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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22-05-26 조회수 : 1,864
제 목 : 반지성주의

송두율 칼럼

반지성주의

입력 : 2022.05.25 03:00 수정 : 2022.05.25 13:25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송두율 칼럼] 반지성주의

대통령 취임사에 난데없이 등장한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둘러싸고 설왕설래하는 분위기가 있다. 민주주의 위기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은 이 단어는 도널드 트럼프의 극적인 등장과 퇴장으로 인해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철학이나 사회과학에서 그렇게 자주 논의되는 주제에는 속하지 않았다. 학술강연에서나 들을 수 있는 단어가 취임사에 등장한 것을 두고 비꼬는 소리도 들리고, 이것이 과연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를 두고 해석 또한 분분하다.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사실 전후의 문맥을 보면 반지성주의라는 단어가 꼭 등장할 필요도 없고, 만약 필요했다면 비타협적인 독선주의나 이와 비슷한 의미를 전달하는 다른 단어를 사용해, 이것이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트린다고 했으면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왕에 반지성주의라는 화두가 등장했기에 이의 내용이 과연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매우 복합적이며 다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는 당연히 그의 반대말인 지성주의의 이해를 전제한다. 라틴어 ‘인텔렉투스’에서 유래하는 지성, 즉 이성에 기초한 인간 능력에 대한 확신을 따르는 지성주의의 의미는 다양하다. 또 항상 긍정적인 의미만을 전달하지도 않는다.

지성주의를 동양문화권에서는 종종 주지주의(主知主義)로도 이해하는데 이는 지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정서, 윤리 또는 의지와 같은, 인간의 또 다른 중요한 본성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점을 비판하는 뉘앙스도 담고 있다. 단순한 지식이나 인식 능력이 아니라, 존재와 실천의 원리 전체를 뜻하는 양지(良知)와 이에 따른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한 양명학(陽明學)에서 그러한 이해가 특별히 드러난다. 쉽게 표현해서 재주는 있지만 덕이 없는(才勝薄德) 사람이 되지 말라는 뜻이다.

이렇게 사변(思辨)에만 경도된 지식에 대한 비판적인 흐름은 유럽 사상사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에 하나의 큰 획을 남긴 철학자는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그는 <우상의 황혼>에서 ‘이론적인 인간’의 화신인 소크라테스가 설파한, 이성이 곧 덕이며 행복이라는 낙관주의야말로 인간의 삶을 비극으로 내몰았다고까지 비판한다. 인간의 본능을 거슬러 피도 통하지 않는 메마른 지성이 만든 결과물이 바로 ‘데카당스’라고도 지적했다. 지성적인 것으로부터 진실은 물론, 도덕과 아름다움도 모두 함께 얻을 수 있다는 이 믿음,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이성과 진보에 대한 맹목적 확신이 바로 비극의 탄생이라고 보았다.

니체 왈 “어떻게 쇠망치로 철학…”

이번 취임사에 등장한 과학과 진실,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라는 단어를 만약 니체가 들었다면 위에 언급된 그의 저서의 부제(‘어떻게 쇠망치로 철학하는가’)처럼 이 단어들을 모두 부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왔던 이런 단어가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너는 진짜냐, 아니면 배우냐, 아니면 배우를 흉내 내는 또 다른 배우냐’라는 질문을 던진 니체였기 때문이다.

취임사에서 강조된,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 맹동주의나 포퓰리즘과의 연관 속에서 항상 제기되는 문제다.

자주 언급되는 사례로는 러시아혁명 이후 부침했던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비판과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있다. 러시아혁명 후에 일부 급진적인 볼셰비키가 부르주아 출신의 전문가들이 혁명 후에도 국가와 기간산업 요직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데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지식분자는 항상 철권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레닌조차도 9차 당대회(1920년)에서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주관적인 의지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구체제의 지식인을 새 체제 안에 흡수하는 정책을 폈다.

이를 두고 폴란드 출신의 무정부주의자 마하이스키(1866~1926)는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분자들이 혁명 후에도 노동계급을 지배한다고까지 신랄하게 비판했다. 1930년대 중반에 다시 이 문제에 부딪힌 스탈린은 사회주의에서 지식계층을 적대시하는 마하이스키의 추종세력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도 특히 지식분자에 대한 박해는 극심했다. 당시 수많은 지식인은 농촌 강제노역에 동원되었고, 심지어는 부르주아 예술인이라는 이유로 홍위병이 피아노 연주자의 손가락을 꺾는 일도 있었다. 이를 두고 피아노 연주자의 손가락을 훼손하려면 무엇을 위해 예술대학은 세웠느냐는 북한의 비판과 함께 사회주의 노선을 둘러싸고 중국과 북한 사이에도 심각한 이념적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주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특히 트럼프의 대선 승리는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둘러싼 많은 논의를 촉발시켰다. 1960년대 초반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을 필두로 미국의 종교, 경제, 사회, 교육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드러난 지식인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와 이의 내적인 작동 방식을 분석했다.

정신적 삶과 이를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의심과 경멸, 나아가 증오까지 담은 미국의 반지성주의에는 전통적으로 기독교 근본주의 또는 복음주의가 큰 자리를 잡고 있다. 성서를 진리의 모든 것으로 믿고 진화론을 교과서에서 축출하고 코로나 팬데믹도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한다. 이 같은 분위기를 두고 미국의 과학 공상소설작가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는 ‘나의 무식도 너의 지식만큼이나 훌륭하다’고 여기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잘못된 생각이 반지성주의의 핵심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묻자, 누굴 위한 진단과 처방인가

그러면 반지성주의의 한국적 모습은 과연 어떤가. 한국적 반지성주의도 최근 논의되는, 비합리적인 판단이나 행동, 전체 사회를 위한 장기적인 안목보다 개인의 이익 추구, 전문가를 포함한 엘리트 집단에 강한 불신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남북 분단으로 말미암은 첨예한 이념적 갈등과 압축성장이 가져온 급격한 사회 변동에서 온 충격 등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반지성주의의 내용은 상당히 거칠고 복잡해졌다. 복음주의, 반공주의, 능력주의, 학벌주의, 소비지상주의, 지역주의 등이 복합적으로 엉킨 속에서 전 사회가 마치 ‘오징어 게임’을 하는 것 같다.

비록 내용은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했더라도 이런 문제를 한마디로 반지성주의로 진단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를 위한 진단이며 처방인가 하는 물음이다.

반지성주의 문제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개인이나 집단만을 겨냥하고 내놓았다면 이는 애초부터 잘못되었다. 과학과 진실, 그리고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는 우리 편에, 반대편은 이를 부정한다는 편가르기 식의 진단에서 반지성주의가 제기됐다면 이는 이미 잘못된 처방이다. ‘K트럼프’ ‘내로남불’, 반지성주의는 정작 자기들의 문제가 아닌지 되묻는 소리가 벌써 나온다.

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는 학력의 높음과 낮음, 진보와 보수, 좌나 우, 친정부와 반정부에 따라 갈라 볼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다. 우리는 누구나 많은 양의 정보에 빨리 접근할 수 있으며, 특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과 관련해서 편가르기를 쉽게 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만나 몰려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디지털 홍위병’에 의해 정치적 공론의 장이 점거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까지 이르는 데는 두 요소가 특별히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하나는 정치적 공론장의 중심인 의회가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다른 하나는 주류 언론이 특정한 집단의 이해만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다양한 요구가 협치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정치개혁, 그러한 요구를 공론장에 정직하게 전달할 수 있게끔 하는 언론개혁이 그래서 반지성주의에 대한 시급한 처방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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