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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21-05-07 조회수 : 3,019
제 목 : 쩔쩔매는 젊은이를 과학이 구원해줄 수 있을까?

쩔쩔매는 젊은이를 과학이 구원해줄 수 있을까?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이성 친구의 마음에 들기 위한 작업
손짓·몸짓·말…관찰 데이터 수집
나름 ‘과학적 모델’을 만들어낸다

상대방의 반응을 보는 검증 단계
확실한 신호가 오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할지, 과학자도 일반인도
쩔쩔매는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과학자들이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과학자들만 아는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기 전에 우리 주변 일상 속에서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시장에서 잘 팔릴 상품이나 서비스를 알고 싶어 하고, 좋은 학교로 진학하려는 학생이라면 입학 시험에 나올 문제를 알고 싶어 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비록 욕망은 다르지만, 그 욕망들을 실현시키는 방법은 공통점을 갖고 있을 것이다. 즉 사업가는 시장조사를 통해 최근 소비 패턴을 관찰한 뒤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지 예측해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것이며, 학생은 과거의 시험 출제 경향을 검토한 뒤 앞으로 나올 시험 문제들을 예상하고 시험에 임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시장과 시험장에서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에 따라 그들의 예측력이 좋았는지 좋지 않았는지 판단하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의 연구 방법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과학자들도 연구하고 싶은 대상을 정한 다음 관찰을 통해 데이터를 모은 뒤 그를 기반으로 그 대상의 미래 상태나 움직임 등을 예측하고 실제치와 비교하여 연구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판단하게 된다. 그러므로 과학이 특별한 점은 기본적인 철학이나 미래 예측 과정이 아주 달라서라기보다는 미래 예측 과정의 각 단계에서 일상인과는 다른 정밀함을 추구한다는 점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살펴볼 것은 이 가운데서도 특히 과학적 모델(model)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학적 모델이란 무엇일까를 이해하기 위하여, ‘사람’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한번 생각해보자. ‘사람을 연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도 사람이니까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보면, 우리가 사람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하는 객체는 사실 아주 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복합계(complex system)이다. 겉으로 보이는 신체 부위만 따져보아도 머리 정수리부터 발가락 끝 사이에 눈, 코, 입 등 다양한 기관이 존재하고, 몸 안으로 들어가면 심장, 허파, 간, 그리고 총길이 12만㎞에 달하는 수많은 핏줄이 있으며 숨쉬기, 말하기, 보기, 듣기, 움직이기 등 다양한 활동과 움직임을 할 수 있다. 게다가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10조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진 세포들, 그리고 어떻게 보거나 측정해야 하는지도 확실치 않은 ‘생각’ ‘느낌’ 같은 것도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과학자 하나가 이 모든 것을 평생을 가도 다 연구할 수는 없을 노릇이므로 공통적으로 ‘사람을 연구한다’고 하는 과학자들이라 하더라도 서로의 연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이렇게 과학자들이 사람과 같은 대상을 연구한다고 말할 때 실상은 그 대상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요소나 측면들의 극히 일부만을 연구하고 있다. 즉 그 일부만을 제외한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날려버리는’ 것인데, 이렇게 진정한 대상의 일부의 특성만을 갖고 있는 단순화된 대상을 ‘과학적 모델’이라고 하며, 과학적 모델을 만드는 과정을 ‘추상화(abstraction)’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제 사물과 유사한 모습이나 분위기만 어렴풋이 가진 채 구체적인 정체성은 잃어버린 그림을 뜻하는 ‘추상화(abstract painting)’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추상화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날려버리면 실제 대상과 과도하게 달라짐으로써 유의미한 배움을 얻기 어려워지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극단에서 모든 것을 담아내겠다고 한다면 분석과 풀이가 아예 불가능한 ‘추적의 한계(intractability)’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므로 좋은 모델이란, 정말 필요한 것만 남기고 불필요한 것을 날림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답을 얻게 해주거나 대상의 상태와 행동에 대한 준수한 예측력을 갖게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하는 과도한 단순함과 도무지 손을 댈 수 없는 과도한 복잡함 사이에서 좋은 균형을 찾아내야 하는 것인데, 과학의 역사는 바로 이전 세대의 과학적 모델에 조금씩 살을 붙여 개선하거나 또 어떨 때는 모든 걸 뒤엎고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긴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적 모델이라고 하면 다음의 세 가지가 특정되어야 한다. 첫째는 모델의 대상, 둘째는 추상화를 통해 가져오거나 날려버린 대상의 특성, 셋째는 모델의 용도나 잠재적 효용이다. 수업 중 학생들에게 제일 처음으로 떠오르는 모델이 무엇인지 물을 때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자동차 축소 모델’이다. 이것은 실제 자동차 크기와의 비율을 표시하여 ‘24분의 1 모형’ 이렇게 부르는 자동차 모형을 말한다. 이 자동차 모형은 세 가지 과학적 모델의 특성을 다 지니고 있다.

·모델의 대상: 실제 자동차

·가져온 특성: 자동차의 모양, 더 정확히는 자동차의 부위별 거리의 상대적 관계. 날려버린 특성은 사실 엄청나게 많다. 모형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실제 크기, 엔진, 기어, 유리, 조명 등이 있고, 사람이 탈 수도 없다.

·모델의 효용: 실물을 만드는 것보다 적은 자원을 들여 자동차 모양에 따른 공기 저항을 알기 위한 풍동(wind tunnel) 실험에 사용하거나(실용성), 장식품으로 사용하여 마음에 드는 실내환경을 연출할 수 있다(심미성).

또 한 가지 예로는 대한민국 지도가 있다. 모델의 대상은 한반도, 가져온 특성은 지점 사이 거리의 비율이며 모델의 효용은 길찾기·이동거리 예측하기임을 생각해보면 지도도 모델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따져 모든 물체를 동그란 공으로 생각하는 고전 뉴턴 역학도 과학적 모델이고, 사람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점과 연결선으로 표시하는 사회연결망(social networks)도 과학적 모델인데, 대상에 대한 극도의 단순화(모든 물체 → 공, 모든 사람 → 점)에도 불구하고 세계와 사회에 대한 많은 과학적 이해를 하게 해준 이 예들을 보면 모델의 우수성은 그 복잡성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예측력에 있고, 그것을 평가하는 단계를 검증(validation)이라고 한다. 당연하게도 이 검증 단계에서 살아남은 모델은 앞으로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지고, 실패를 거듭한 모델은 폐기되어야 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재미로 한 젊은이가 사람에 대한 간단한(그러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과학적 모델을 만드는 과정을 한번 경험해보자.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아무나가 아니라 친구 소개로 만난 젊은 이성이다. 상대방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어 더 잘 알고 싶은 욕망이 생긴 젊은이가 할 일은 그 사람의 손짓, 몸짓, 말을 관찰하며 머릿속에 담아두는 것이다. 이렇게 데이터를 열심히 수집한 첫 만남 이후 다행히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두번째 만남에서도 크게 욕심을 내기보단 다시 한번 행동을 관찰하며 데이터를 수집했는데, 상대방도 젊은이에게 관심이 없진 않은지 한번 더 만나는 데 동의한다. 이제 이 젊은이는 단순한 관찰을 넘어 그 이성의 마음에 들 행동을 적극적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여러 가능성 가운데에서도 상대방이 좋아할 디저트를 자기가 골라보겠다고 한다. 이를 위해 젊은이는 관찰 데이터를 떠올리는데, 이상기후로 기온이 30도까지 치솟은 2021년 4월의 한낮에 있었던 첫 만남에서 상대방이 얼음이 잔뜩 들어간 아이스라테를 시켰던 것, 그리고 기온이 다시 10도로 뚝 떨어진 저녁에 있었던 두번째 만남에서는 80도의 따뜻한 핫초코를 시켰던 것이 기억난다.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⑬우주선을 쏘고, 백신도 만들어내는 과학이 ‘멘붕’에 빠질 때

젊은이는 “아하, 그 사람은 더운 날에는 0도의 차가운 디저트를, 싸늘한 날에는 80도의 따뜻한 디저트를 선호하겠구나. 그렇다면 다음에 만날 땐 바깥 온도에 따라 알아서 디저트를 준비하면 놀라면서 나를 더 좋게 봐주겠지?”라면서 다음의 과학적 모델을 고안해낸다. ‘상대방이 좋아할 디저트의 온도 예측 모델: 외부 온도가 10도 이하일 때는 80도 / 외부 온도가 30도 이상일 때는 0도 / 그 사이에서는 -4 곱하기 외부 온도 더하기 120도.’ 이런 것을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함수(response function)라고 부르고, 그래프로 나타내면 제일 직관적이다.

이것이 과학적 모델인 까닭은, 상대방이라는 모델링 대상이 있고, 상대방의 여러 가지 성질 가운데서 ‘좋아하는 디저트 온도’라는 요소만 남기고 다른 것은 날려버리는 추상화 과정을 거쳤으며, 앞으로 그 사람을 오래 만날 수 있게 하는 잠재적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함수 그래프 형태로까지 나타냈다니, 이러한 젊은이는 필자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받을 사람이다.

자 이제 마음과 함수의 준비를 마친 세번째 만남. 그날의 기온이 25도인 것을 보고 나서 자기의 공식에 대입해 20도 정도 되는 디저트를 미리 주문하고 그 사람 앞에 놓아주는 젊은이. 이제 상대방의 반응을 보는 검증 단계가 남았다. 그런데 과학적 모델은 단 한번의 검증으로 ‘진리’로 등극하거나 곧바로 폐기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날의 기온뿐만 아니라 비, 바람 같은 날씨도 디저트 선택의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방이 그 디저트를 마음에 들어 했다면 이 젊은이는 모델을 더 개선해나갈 기회와 자신감을 얻을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면 이 젊은이는 정성을 들였던 이 모델을 완전히 뒤엎어야 하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가지거나 더 잘못되면 아예 다시 시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름답고 그럴싸해 보이는 과학적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욱더 어려울 수 있는 것은 모델의 검증 단계에서 그다지 확실치 않은 신호가 올 때이다. 쉽게 말해 ‘제 마음을 어떻게 아셨어요?’(긍정) 또는 ‘우리는 정말 안 맞나봐요’(부정)라는 말이 나오면 그다음 단계에서 할 일이 비교적 확실하기라도 하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반응이 나온다면 과연 이 모델을 계속 끌고 나가 개선시켜볼 것인가 아니면 버리고 새로 시작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리학적으로 말해 이 젊은이는 이래야 하는지 저래야 하는지 몰라 “쩔쩔매는” 상태(frustration)에 빠져든다고 한다. 불행히도 과학은 이러한 상태를 명쾌히 극복해낼 수 있는 방법론을 주고 있지 못하다. 사람을 우주로 보내고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대항할 백신을 1년 만에 만들어내는 과학도 말이다. ‘금맥이 바로 앞에 있는데 지금 포기하면 안 된다’와 ‘안 될 것에 대한 집착으로 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반되는 고민 속에 사는 것은 과학자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 속시원한 해답이 있는 사람은 필자에게 알려주기 바란다. 필자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라며 머리를 싸매고 있을 그 젊은이를 위해서 말이다(모델 잘 만들었다고 칭찬해놓고 해피엔딩을 주지 못해 미안하긴 하다).

▶박주용 교수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⑬우주선을 쏘고, 백신도 만들어내는 과학이 ‘멘붕’에 빠질 때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네트워크과학·복잡계과학으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데이나-파버 암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시스템스 생물학을 연구하고,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와 예술의 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제주도에 현무암 상징물 ‘팡도라네’를 공동 제작·설치했고, 대전시립미술관의 ‘어떻게 볼 것인가: 프로젝트 X’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창시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남는 시간에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5070600005&code=610100#csidx8a7e20c39c028a9b7363c548a0d99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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