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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20-01-27 조회수 : 936
제 목 : 대만기행

대만기행

대만여행은 어떤 계기가 있어서도 아니고,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어서 너무 갑작스러운 여행이었다.

그러한 탓에 미리 준비한 것이 없었다. 대만에 관한 도로 및 여행을 위한 자료나 박물관에 관한 자료를 전혀 접하지 못하였다.
단지 대만에 고궁박물관이 세계적인 박물관이고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이전 시에 주요 유물을 모두 가지고 왔고, 그것을 전시하는 곳이 고궁박물관이라는 뜬소문과 같은 지식이 전부였다.
평소 중국 역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나로서는 국립 고궁박물원에 꼭 가고 싶었다.
가족들에게 입버릇처럼 잘 준비하여 약 1년여에 걸쳐 중국 역사기행을 할 것이라고 누누이 말하여 왔다.
중국 역사기행을 위한 준비로 먼저 대만 고궁박물원을 찾아야지 했었다.
그런 대만여행을 그 어떤 준비도 없이 무작정 가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를 마치는 막내딸과 아내와 더불어 아무런 계획도 준비도 없이 원했던 대만 고궁박물원을 찾을 요량으로 시작했다.

사람들은 대만을 좋은 여행지라고 한다. 온천이 있고, 우리나라와 달리 춥지 않고, 치안이 안정적이고, 볼거리가 많다는 이유를 든다.
난 그런 것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지 곳곳을 사전에 정보를 취합하여 그 일정에 따라 여행을 즐기는 듯하다.
주변 분들로부터 갖가지 추천을 받았지만 추천받은 곳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고, 타이베이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느낌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찾아보려는 요량과 벼루던 고궁박물관에 관한 막연한 기대를 안고, 준비 없이 출발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공항이란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현재까지 터 잡아 살아가는 내 나라를 떠나는 곳이다.
이른 새벽잠을 떨치고 서둘러 집에서 출발해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아침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비행기 여행이 시간을 많이 단축해 준다고 하지만 출국 절차는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여행의 출발이다.
익숙한 내 나라를 떠나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인천공항, 그러나 그곳은 무지막지하게 크고 또 어찌나 어지러운지!
평일임에도 왜 이리 사람들이 많은지!
외국인이 많아 그러려니 하고 찬찬히 살려보니 대부분이 우리나라 여행객이다.
공항은 나로부터 즉, 일로부터의 해방일 터이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의 문이다. 우리나라에 있기는 해도 어찌 보면 가장 우리나라 같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가끔은 공항을 가볼 일이다. 나 자신이 복잡하고 덧없으면 말이다.
공항에서 출국 절차와 집에서 출발하여 공항 가는 시간, 공항에서의 대기 시간을 모두 합하면 비행시간보다 길다.
2시간이면 충분하리라 하고 생각했고, 또 좀 나아졌으려니 혹은 좀 간편해졌으려니 생각했던 한가한 내 생각은 지금 생각하니 참혹한 것이었다.
늦었는지 어째는 지도 모른 체 비행기에 올라 출발은 했다.
항공사의 배려가 아니었으면 탈 수나 있었을까?
때는 평일, 가장 한가할 것 같은 화요일인데 그 넓은 공항에 사람들이란?
요즘 경기가 나쁘다 어쨌다 하는 언론의 아우성을 지나친 호들갑이라고 평하는 것은 현실을 착각한 너무나 한가한 비판이라고 하는데 인천공항에서 보면 호들갑이 확실하다.
땀 흘려 일하고 있어야 할 날임에도 이리도 많은 사람이 일하러 가는 차림이 아닌 모습으로 공항으로 나온 사람들, 그곳이 산업에 역군이나 들락거리던 7080의 국제공항은 분명 아니다.
이제 공항은 변해서 여유로운 여행객의 공항으로 변화된 공항이 되었다.

대만의 시작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아마도 잘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아도 근방 답이 나온다.
내가 타이베이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절차를 밟는 데서부터 이국의 낯섦의 시작이었다.
평소 영어를 잘 못하기도 하지만 그 못하는 영어라지만 그래도 어려움에 부닥치면 몇 마디 할 수 있으련만, 처음 시작은 영어가 한마디도 입 밖을 나오지 않았다.
그곳 입국장의 직원들도 영어에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은 듯해서, 어찌어찌하여 입국 절차를 마치고 대만 땅에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나름 영문으로 된 서적을 늘 참고하여 일하고 있는 처지여서, 여행 시에 도움이 되려니 했는데 현실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하는 경험이었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의 문제는 아닌지 하고 생각하게 한다. 그냥 무작정 해보고 보는 건데 하고….
그 자리에서는 전혀 생각나지 않던 것이 지나고 나면 “이렇게 해야 했는데”라는 새가슴의 잔상만 어른거린다.

인천공항과는 달리 그 느낌이 왠지 조용하고 한산한 느낌의 타이베이 타오위안 국제공항에서 타이베이역까지는 열차와 버스를 주로 이용한다고 한다.
우리는 큰딸의 권유에 따라 버스를 이용하여 타이베이역으로 향하였다.

첫 만남

대만의 첫인상은 우리나라와 달리 건물 외벽을 타일로 마감 처리한 건물이 대부분이었고, 건물 옥상에는 반드시 크지 않은 물탱크가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상수원의 수압으로 웬만한 건물 높이는 별다른 설비가 없더라도 물 공급이 가능하고, 고층인 경우는 옥상 수조방식보다는 부스터 펌프 방식으로 공급되는 탓에 옥상에 별도의 물탱크를 두지 않는다.
이런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도시화가 우리나라보다 먼저 시작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1990년 이후 급격하게 도시건물이 많이 건축되었고, 그 이전 타일이나 옥상 수조방식보다는 콘크리트 외벽에 페인팅하고, 물 공급은 부스터 펌프 방식이 도입된 이후여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되었지만 다소 생소했다.

우리 내 겨울은 모든 식물이 동면기에 든 까닭에 일부 상록 수림을 제외하고 나무와 풀이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지 않지만, 남국인 대만은 겨울 없는 국가답게 녹색의 푸르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추운 나라 한국 겨울의 느낌이 금세 사라져, 지금이 겨울을 이라는 사실을 잊게 했다.
환경의 낯섦이 다소 누그러질 때쯤, 버스에서 내리니 이제는 날씨가 나를 다시금 외국에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대만 사람들과 외국 사람이 뒤섞인 타이베이역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무척이나 다양했다.
옷맵시나 독특한 옷차림 때문이 아니었다. 반소매 차림을 하고 있는가 하면 두꺼운 오리털 파카 차림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기온은 28도를 가리키고 있어서 무척이나 더웠다.
영하의 기온인 우리나라에서 두꺼운 점퍼 차림이었던 것을 인천공항에서 점퍼를 가방에 넣고 가볍게 입었다고는 하지만 더위가 나를 힘들게 했다.
유난히 멀미가 심한 막내딸 때문에 인근 중정기념당 공원으로 걸어서 가기로 했는데, 더위로 어지간히 고생했다.


남국의 가로다, 우리 환경에서 이런 나무는 본 적이 없다.
 

걷는 길가에 심어진 가로수가 유난히 많았고,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상록수 나무를 이야기하며 아내와 딸과 함께 걸었다.
평소에 딸과 나는 그리 많이 걷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도 더운 길을 약 3㎞나 걸어 중정 기념당에 이르니, 딸과 아내는 더는 못 걷겠단다.

중정기념당은 중국 내전에서 패한 장개석을 기리기 위한 공원이다.
쑨원을 기념하는 국부기념당과 더불어 대표적인 정치적 건축물이다.
통한의 한을 품고, 모택동에 쫓겨, 이곳 타이완에서 재기를 꿈꾸었던 장개석이다.
대륙을 되찾기 위해 와신상담했을 장개석이 별 볼 일 없던 이곳 타이완을 세계적으로 굴지의 나라로 만들어 놓았다.

홍수전의 야릇하고 이상적인 태평천국의 난이 수습되고,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일어선 신해혁명을 통해 쑨원의 중화민국 정부가 난징에 들어섰다.
이도 잠시 일본에 의한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있지 않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중국 본토를 지배하는 시대가 되더니, 3년간의 내전 끝에 장개석은 중국 중앙은행의 어마어마한 황금을 들고 대만으로 쫓겨왔다.
풍운의 도시 난징을 벗어나던 장개석이 절치부심하여 본토를 수복하려 했겠지만 지금 중국은 자본주의적 사회주의 국가로서 미국을 맞상대하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장개석의 국민당은 대만에서조차 정권에서 밀려나 야당이 되어, 그 자취가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런 장개석이 안간힘을 쏟았던 대만에서 그의 자취를 기려 건설된 중정기념당, 무지막지하게 넓고, 큰 공원을 조성하고 건물을 지어 놓았다. 대륙의 기상을 살리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장개석 기념관 건물


중정기념관 음악당 건물
 

나는 이 거대한 건축물에 기죽지 않으려는 감에 따라 중국 전통 건물의 정문 입구로 들어갈 요량으로 그 건물 쪽으로 애써 걸어갔다, 그러나 그곳은 정문이 아니었다.
정작 내가 처음 마주한 아치형 출입문이 정문임을 중정기념당 안으로 들어가서야 알았다.
거대한 중국 전통건축물은 똑같은 모양으로 두 개를 마주 보게 건축하여 공연장으로 쓰고 있는 건물이었다.
자금성과 같이 목재로 건축된 건물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손쉽게 건축된 것이어서 다소 실망스러웠다.
모양은 전통건축물을 현대 건축기법으로 지은 것이어서 근방 흥미를 잃게 했다.
타이베이역에서부터 차멀미로 고생하는 막내 딸내미 때문에 걸어서 이곳까지 온 탓도 있겠지만 역사적 맥락이나 장개석의 한스러운 사연도 모르고, 청나라 말기와 현대 중화민국의 초기의 흥미로운 역사를 알 길 없는 사람들이야 중정기념당이 무슨 볼거리가 되겠는가?
나 혼자서 휘적휘적 걸어 장개석 동상이 있는 중정기념당에 오르니, 현지 사람들은 제법 엄숙한 모습으로 묵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왁자지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떠들며 둘러보는, 아마도 중국 본토 사람들과 괜히 힘들여 왔구나 하고 후회하는 네이버 관광객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중국여행을 한다면 맨 먼저 가야 할 곳으로 중경인 난징을 염두에 두어왔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오나라 손권이 춘추(春秋)시대 오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동오(東吳)라고 칭하는 오(吳)나라를 건국하고, 난징을 처음으로 도읍으로 삼은 이후 동진, 송, 양, 진, 명나라 초기, 쑨원의 신해혁명 후 도읍으로서 장개석과 밀접한 인연이 있는 난징은 나에게 매력적인 도시다.
중국문화의 그림(고개지)과 글씨(왕희지) 예술이 처음 시작된 도시, 난징을 가기 위해서는 그 종말인 타이베이의 장개석으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특히 중국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만든 유물의 보고(寶庫)인 대만 국립 고궁박물원은 꼭 방문하여야만 했다.

그런 출발로서 중정기념당은 나에게 의미가 적지 않은 그런 곳이었다.
나라 잃고 머나먼 바다 건너로 쫓겨와 간신히 연명하다간 풍운아 장개석은 뒤 허물을 거대하게 남겨두고, 지금은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매만 관공서 거리


대만 관공서(건물 이름을 모르겠다)


대만 총통부 건물(식민지배 시에 일본이 짓은 건물)

중정기념당을 뒤로하고 타이베이역 앞 가까운 곳인 숙소로 가기 위해 구글 지도의 도움을 받아 걷고 걸었다.
가면서는 보고도 몰랐던 총통부 건물을 다시금 쳐다보면서 말이다.
대만 총통부 건물은 제국이고자 몸부림치던 일본이 전쟁 중에 심혈을 기울여 지은 건물이다.
그들의 제국주의 산물인 건물하면 아마도 우리나라 중앙청 건물로 쓰던 총독부 건물이 아닐까 싶다.
현재 남아 있는 대만 총통부 건물을 보면서 총독부 건물이 생각나는 건, 건물의 모습과 의미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5배의 돈과 인력을 들여 지은 건물인 총독부 건물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대만의 총통부 건물 정도라면 몰라도 예술성이나 규모가 남다른 옛 총독부 건물은 남겨두기에는 우리 내 아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좋지 않은 행위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내에서조차 일제 강점기를 근대화라 떠드는 상황에서 그 건물을 남겨두기가 쉽지는 않았을 일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지금은 없다)

일본의 흔적으로나 국민당 정부의 흔적으로나 찹찹한 마음이 드는 건물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가니 전쟁박물관 건물 주변으로 많은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어깨에 띠를 두른 모습이나 두른 띠에 새긴 글자는 아마도 보수단체의 집회로 보였다.
언론 기자들의 성의 없는 모습이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분들의 행동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었다.
정치적 식견의 차이에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하는 그런 행위는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있나 보다 하고 지나쳐 걸었다.
어찌 보면 미래에 관한 생각에 차이일 뿐이다.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해주지도 않을뿐더러 그리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모든 것을 걸어 투쟁한다.
그곳이나 우리나 그렇다.
정부 거리는 그렇듯 알 수 없는 사람들과 그런 일들로 답답하고 무거운 거리다.
날이 어두워져 가면 사람들은 줄어들 것이고, 밤이 되면 걷는 사람들 없는 거리가 될 것이다.
그게 관공서 거리다.

대만 고궁박물원

우리 내 역사를 말할 때 반만년인 5천 년 역사라 한다.
문화적 특성은 자연 친화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소박하고 부드러우며 추상적이고 세련되었다고 한다.
우리 역사가 5천 년이라는 말은 초등학교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
5천 년 전부터 한반도에도 사람들이 살았을 터이니 그 말은 맞을 것이다.
그 역사 시작은 고조선이라고 말한다. 누가 썼는지 알 수도 없고, 유물로 증명되지 않는 것 말고, 선뜻 수긍이 가는 고조선 유물이 있기는 하는 걸까?
솔직히 말해서 고조선 것이라고 확인된 직접적인 유물은 아직까지 있다고 듣지 못했다.
고조선이 없어지고, 천년도 더 지난 역사책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몇 줄 나오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더 든다면 중국 역사서에 몇 줄이 고작이다.
그러니 기원전 고조선 역사가 훌륭하다 둥 하는 것은 난센스다.


          대만 국립 고궁박물원 전경

대만의 고궁박물원은 나에게 있어서 중국문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관한 확인 작업이었다.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를 따라 걷고픈 내 욕망을 위한 첫걸음이 대만 고궁박물원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몇 번 읽었던가?
또 몇 명의 번역본을 섭렵했던가?
사마천의 사기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현장에서 은퇴하면 1년간 꼭 사마천의 사기(史記) 현장을 돌아보리라 하고 말이다.
그런 꿈 같은 욕망을 다소나마 채우기 위해 오늘 대만 고궁박물관을 찾았다.
여기에 오기 전에 찾아본 정보는 국민당 정부가 본토에서 철수할 때 주요 보물은 모두가 가지고 이곳 고궁박물원으로 옮겼다는 사실과 그 유물이 너무 많아 일정한 시기를 두고 차례차례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는 청나라 강희제, 웅정제, 건륭제 연간 황궁 유물과 명나라 영락제, 선덕제 등 연간의 황궁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는 정도였다.

내가 고궁박물원에서 본 유물은 옥에 관련된 유물(6천 년간), 청동기(5천 년간), 도자기(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글씨와 그림이었다.
이들 중에서도 고대 청동기와 옥은 나를 충격이 아니라 경악케 했다.
지금도 가슴이 떨리고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중앙 박물관의 청동기가 있다.
그 청동기 유물과 중국의 고대 청동기 유물은 나를 힘들게 하는 비교가 되었다.
내 나라 사람으로서 어찌 우리 것과 외국의 문물을 비교하지 않겠는가?
그때 느끼는 충격! 일단 비교가 되지 않는 크기와 예술적 정교함 말이다.
유물 앞에 설명된 제작연도를 보면 거짓말 같은 시기이다.
기원전 20세기는 기본이다. 심지어 3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차라리 눈이 감긴다.
현대 공장에서 생산한다 해도 쉽지 않아 보이는 청동기 유물이 즐비하다.
하(夏), 상(商) 나라(혹은 은(殷)나라)의 청동기 유물은 크기부터 기를 꺾어버린다.
그럼에도 어쩌면 저리도 정교할까? 진흙이나 돌을 깎아 만든 거푸집으로 만들었다고는 상상하기 힘든 크기와 구조는 이제까지 보아온 청동기에 대한 식견을 깡그리 무너뜨렸다.
글로 표현된 우리 유물이라고는 기원후 5세기나 6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볼 수 있을뿐더러 그마저 몇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10개를 갓 넘는 만큼 극히 드물다.
그런데도 기원전 10세기를 훨씬 넘는 청동기 유물에 글이 새겨진 것을 보노라니 부럽기도 하고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니 놀랍다. 주(周)나라 청동기에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청동기가 흔했다. 청동기 솥에 새겨진 고대 문자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옥으로 만든 유물로 자리를 옮겼다.

 
상나라 청동기 솥인 후모무정(3500년이나 된 것임)               글자를 세겨 넣은 주나라 청동기(기원전 8세기)

5천 년 전 옥을 마치 떡 주무르듯 갈고 새긴 유물이 전시되고 있었다. 옥은 무른 암석이 아니다.
그도 진흙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진흙으로 빚은 듯 옥을 다루고 있다.
단단한 강철이 있었던 시기가 아닌 것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면 상상을 초월한 솜씨이다. 언젠가 용산 중앙국립박물관에서 본, 고분에서 나온 옥 유물을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그 눈으로 고궁박물관의 옥을 보면 그 솜씨와 예술성에 놀라게 된다. 아니 절망감마저 든다.
중국인의 옥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다 들었다.
옥으로 만든 유물은 청나라 시대 유물이 많았는데 중국인의 옥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청나라 때에 배추와 귀뚜라미를 새긴 옥부터 서태후의 옥으로 만든 병풍까지 놀랍기도 하고, 어쩌면 저리도 사치스러울까 생각되기도 했다.
사람이 많으니 인간의 솜씨라 할 수 없는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구나 싶다.
옆에서 선 딸내미가 그런다. 저거는 아름다운 예술품이 아니라 저걸 만든 장인의 고통이 더 느껴진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5천 년 전의 옥부터 17, 18세기까지의 옥 유물이 전시된 전시장에서 자꾸만 고대 옥 유물이 나를 힘들게 했다.
물론 17, 18세기 옥 유물이 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옥 예술이 극에 달한 청나라 유물들이었지만 고대 옥 유물에서 나는 발을 돌릴 수가 없었다.

 
옥을 깍아 만든 공예품 (명청시대)                                                 옥 공예품(명청시대)

송나라 회화와 서화들을 둘러보며 역사 천년 넘는 유물이 어쩌면 저리 멀쩡하게 보존되고, 또 저리도 많을까 싶다.
우리나라 그림 중에 동굴 벽화를 제외하면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조선 초를 넘지 못한다.
중국의 송(宋)나라는 우리의 고려 초에서 고려 중기에 해당하는 연대가 된다. 옥이나 청동기와 달리 보관이 쉽지 않은 회화나 서화는 500년을 넘는 유물이 극히 드물다.
그런데도 이곳 고궁박물원에서는 흔하다.
커질수록 서툴러지는 우리와 달리 그 크기에서부터 압도된다.
채색이나 보관상태, 완성도 등에서 보는 이에 감동을 더한다.
특히나 서화(書?)의 정밀함이 돋보여서 부럽기도 했다.

                
  4세기 남북조 혼란기의 중국 북조 시대 청자               12세기 고려 청자

  
명라나 청화 백자                               청나라 강희제 채색도자기                   명나라 도자기

아마도 고궁박물원 방문객들은 주로 옥으로 된 유물과 도자기 유물 앞에 발길을 머무는 경우가 많고, 탄성과 감동도 도자기 유물 앞에서였다. 17세기만 하더라도 세계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하는 나라는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우리나라뿐이었다고 한다.
중국을 제외하고 나면 우리나라 도자기 솜씨는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또한, 고려 중기와 말기에 생산된 고려청자에 대하여 당시 세계에서 으뜸이었다고들 한다.
그런 연유로 국외 유물보다 우리 도자기에 대한 자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내 생각은 고궁박물원 방문 이후에 계속되고 있다고 하기에는 그 충격은 너무 크고 아팠다.
우리 내 것만이 대단한 것으로 여긴 나로서는 당(唐)대 말 도자기와 송(宋)나라 때 도자기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고려청자의 우수성과 예술성에 대한 자부심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도자기의 예술성에 대한 내 생각에 중대한 변화가 밀려왔다.
특히 그 다양성은 참으로 다채로웠다.
우리 내 고려청자의 모양과 문양 등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고려청자는 나름대로 독특한 특징, 색상, 모양에서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明)과 청(淸)나라의 유물과 마주하는 순간, 얼어붙게 된다. 이때쯤 되면 우리 도자기와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화려함과 정교함은 그 끝이 어딘지를 알 수 없게 한다.
소박하고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우리 도자기의 느낌을 말하려다 꾹꾹 참게 되고 도로 삼키게 한다.
대륙의 크기와 대륙의 다양함에 앞에 고개 숙이게 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우리 문화, 매년 찾았던 용산 국립박물관, 내가 배워왔던 문화적 소양이 흔들거렸다.
대만 고궁박물원을 방문하고 돌아 나오면서 생각했다.
저 화려하고 심대한 중국에 문물을 지켜보면서 우리 내 조상들은 어땠을까?
그면서도 우리는 분명 그것에 휘말려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명 저 화려하고, 다양하고, 정밀한 도자기는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들보다 우리가 더 낫다는 애당초 없었던 생각마저도 내 가슴 속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최고를 좋아하지만, 우리가 최고라고 하려는 순간 이상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조선 말 청화백자                                  조선 초 분청사기                               조선 초 분청사기

명·청나라 시기에 이르면 우리나라 조선 시대와 그 시기를 같이한다.
조선은 상인들이 만든 나라인 고려와는 문화와 경제에 있어서 확연히 다르다.
고려 때 청자의 발달은 그 필요에 따라 생산된 결과였으리라.
요구하는 사람은 돈을 더 얹어주더라도 더 좋은 물건을 요구하고, 생산자는 더 잘 만들어서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으니, 도공은 더 빛깔이 좋고 더 균형미 넘치고 더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려고 애썼을 것이다.
이런 환경과 노력이 찬란한 고려청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건국된 조선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첫째는 명나라가 쇄국 정치로 노선을 바꾸더니, 급기야 도자기 수출을 금지하였다.
그러니 이제 중국산 도자기의 가격은 폭등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성리학의 정치 이념에 따라 사치품 거래나 사용을 금기(禁忌)시하게 된 것이다.
급기야는 사치품인 도자기에 대하여 일반들의 사용을 금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도자기 생산은 관(官)이 직접 생산하고 민간은 생산할 수 없게 만들었다.
도공으로서는 잘 만드나 그저 그렇게 만드나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상황에서 무엇 하러 잘 만들려고 애쓰겠는가!
그런 데다가 청나라 시기의 중국 도자기 채색화는 오랑캐 청이 만든 것이니 천박하다 여겼다.
우리 도자기가 왜 질박해지고, 소박해질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만하다.

대만 국립 고궁박물원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무작정 방문한 탓에 어디서부터 관람을 시작하여야 하는지 안내문을 찾아보았지만, 모조리 중국어로 된 것이어서 알 수 없는 나로서는 용산 국립박물관이 그런 것처럼 1층부터 관람을 시작했으나 이곳은 3층부터 시작하여야 그 흐림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관람이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이라도 점심을 거른 체 5시간이 넘도록 관람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리가 따른다.
딸은 벌써 저쪽 의자에 앉아서 꼼짝하지 않고, 아내마저도 힘들어할 때쯤에 스치듯 모든 관람이 끝이 났다.
아내는 열심히 핸드폰으로 사진에 담았고, 나는 그 사진을 보여 달라고 조르고 있다.
누군가 그랬던 것처럼 사진밖에 남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만여행 정보는 네이버의 여행기에서 시작해서 끝이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린(士林) 야시장과 닝샤(?夏) 야시장을 간다.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안양 중앙시장과 같은 시장을 더 좋아한다.
대구에 서문시장과 비슷한 시장이 대만에 있고, 그곳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가는 대만 야시장이다.
여기저기 한국 사람들이 어깨에 스치듯 흔하다.
나도 딸들이 그리고 지인들이 권하는 곳이어서 가기는 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대만 음식은 전통적이라기보다는 서구화된 인상이 든다.
특유의 향신료가 늘 풍기지만 진하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았다.
누가 먹거리를 찾아 대만 간다면 나는 권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지인들은 그 먹거리를 권한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머랄 것은 없지만 외국에서 야시장보다는 대구 서문시장에 갈 일이다.
그리고 안양에 중앙시장을 더 자주 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임가화원 가는 길

내가 가보고픈 시장은 임가화원을 찾을 때, 지나갔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조그만 시장이었다.
집 앞에서 몇 그루 귤나무에서 딴, 귤을 거리에서 내다 팔고 있는 할머니로부터 사서 먹었었다.
세계 어디에도 시골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이 텃밭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내다 파는 그런 시장은 있었다.
그곳에서 난 주전부리를 했다.
언젠가 내가 대만을 또 간다면 타이베이를 나와 시골로 가고 싶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은 임가화원 가는 시장과 야시장에서 느낀 내 속사정이었다.

타이베이 임가화원

 
임가화원 가족들이 거주하는 곳                                        임가화원 내 인공 연못

 
임가화원 내 신선이 머무는 산을 형상화 한 것임                     임기화원 내 정원
 

여행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서둘러 임가화원을 찾았다.
복건성(福建省)에서 살던 임씨들이 이곳 대만으로 이주하여, 대륙의 양주(揚州)나 소주(蘇州)의 중국 전통 개인 정원들처럼 조성하였다고 한다.
첫인상은 재력이 얼마나 많으면 우리나라 왕국 같은 규모로 개인 저택을 조성할 수 있을까 하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했다.
한 번도 중국 전통 정원을 본 적이 없어 임가화원이 중국 전통적 정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유명한 중국 본토의 양주나 소주, 난징의 정원을 본 적이 없고, 단지 사진으로나 동영상으로 본 것이 전부여서 비교하여 진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임가화원 이곳저곳을 한가롭게 걸으면서 신선이 거니는 이상향의 땅을 생각해 보았다.
중국의 도교적 전통사상을 표현한 이상향의 자연을 인공으로 조성된 산과 연못은 볼 만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창덕궁 비원과 담양 소쇄원을 기억에 담고 찾아간 임가화원은 기이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담양 소쇄원

담양 소쇄원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거스르지 않고, 조성된 정원이다.
그래서 조성된 정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자연 그 자체이다.
그런데 임가화원은 자연을 우겨넣은 것이 아니라 상상하고 동경하여 자연을 빚어낸 듯한 모습이었다.
손님을 접대하는 내청각과 같은 건물과 고서(古書)에 나오는 건물을 표현한 정정당 등은 둘러보았다.
우리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인데,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계곡을 그대로 정원으로 삼은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인공으로 조성한 연못은 제법 넓고, 여럿이어서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귀국 시간에 쫓겨 서둘러 둘러보고 나왔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움

대만 타이베이에는 국립역사박물관과 식물원이 있다고 한다.
둘째 날, 국립역사박물관은 시간이 없어 다음으로 미루고, 숙소에서 가까운 식물원으로 갔다.
대만 타이베이 식물원은 2,000여 종의 식물을 조성한 곳이라고 한다.
이미 고궁박물원에서 지칠 대로 지친 딸과 아내는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서 고통을 호소하는 데다 날이 저물어가고 있어서 슬쩍 쳐다보고만 온 셈이 되고 말았다.

새로운 시작

나는 귀국하자마자 용산 국립박물관을 방문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신창이가 된 역사관과 문화적 충격은 무언가 새롭게 재정립하여야 할 것 같아서다.
나는 지금 이제까지
내가 가졌던 소중한 것들을....
이제 새로운 눈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앓이하고 있다.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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