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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3-08-05 조회수 : 5,204
제 목 : '고구려 타령' 좀 그만! 조선은 충분히 강했다!

'고구려 타령' 좀 그만! 조선은 충분히 강했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⑤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8-02 오후 6:59:15

예전 중·고등학교에는 '시련과 극복'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입에 발린 상투어로 '숱한 외침을 극복하면서 면면이 이어온 민족의 역사'를 운운할 때마다 나는 '시련과 극복' 과목을 떠올린다. 마침 광해군-인조 시대를 다루다보니 또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서, 시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몇 가지 관점을 정리하고 가겠다.

2.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⑤

"박정희 같은 독재자는 아예 처음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을 꺼주는 것이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발전을 위해서 좋은 일이련만, 그는 유달리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전혀 상관없는 역사적 사실을 끌어다가 자신을 정당화하곤 했다. 고려시대 무인정권 이래 군인으로서는 처음 최고 권력을 잡아서인지, 그는 무인정권을 즐겨 찬양했고, 미국과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강화도의 신미양요 유적을 대대적으로 복원하기도 했다. 이 무렵 박정희는 이선근이라는 사학자와 죽이 맞아서 그를 초빙 해다가 국무회의에서 '국난 극복사' 강의를 정기적으로 들었는데, <시련과 극복>도 그 아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홍구, <대한민국사-3>(한겨레출판 펴냄))

 
▲ 1972년에 간행된 '시련과 극복' 교과서 : 정말 나는 '민족의 역사'가 숱한 침략에 시달렸던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극복'은 별로 기억이 남지 않는다. 과목의 소속도 불분명했던 '시련과 극복'이라는 교과서를 배운 소회이다. (네이버 블로그 '한옹가'에서 퍼옴.) ⓒ한옹가
국무회의에서 '국난 극복사' 강의를 들었다는 대목이 인상적인데, 당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의 뇌리에는 '국사'가 '숱한 외침'이라는 한 마디로 정리되는 경향이 있다. 아마 한홍구 교수가 말한 박정희 정권의 성격과 국정교과서 정책의 영향이었던가 보다.

그러나 이런 인상은 두 가지 점에서 재고할 측면이 있다. 첫째, 단군-고구려로 소급되는 이른바 민족사를 당연시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도 '아국(我國)', '동국(東國)' 등의 표현을 써서 '국사(國史)'를 의미하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역사시험은 보았어도 요즘처럼 국사시험은 없었다. 단군-고구려로 연결하려는 긴 역사는 후대,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의 '인식'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국사의 탄생은 근대역사학이 국민국가의 탄생에 기여하면서, 즉 정치-역사학을 자임하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공론이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배웠던 것이다.

'숱한 외침'은 없다

둘째, 대략 한반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역사 일반을 인정하더라도 이 땅에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전쟁, 침략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비장한 얼굴로 어깨에 힘주고 '극복'할 전란은 오히려 적었다.

전쟁사가 히로세 다카시가 그려놓은 전쟁 지도를 보면, 1945년 이래 세계에서 전쟁을 하고 있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히로세의 책은 계발성이 없어서 권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류제승 옮김, 책세상 펴냄)을 보라.) 한반도만 해도 3년간의 길고 치명적인 전쟁을 겪었고, 남한은 베트남전에 개입했다. 혹시 우리가 너무 전쟁이 흔한 시대와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도 전쟁이 흔했다고, '시련과 극복'이라는 교과서를 만들어야 할 만큼 흔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조선시대의 경우, 큰 전쟁 두 차례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과 병자호란(정묘호란). 6진 개척, 대마도정벌, 삼포왜란으로 불리는 국지적 전투를 제외하고 대외 전쟁은 없었다. 혹자는 거꾸로 이렇게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문약(文弱)으로 흘렀다는 진단도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만들어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조작된 약소국 의식

'숱한 외침'을 받았다는 세뇌는 그 정치적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조작된 자기피해의식'이다.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피해의식을 뒷받침하는 편견이면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전제가 또 하나 있다. 조선은 약소국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은 약소국이 아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명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그의 유훈(遺訓)에서 주변에 정복할 수 없는 16국이 있는데, 첫째가 '고려'(조선)이고, 그 다음이 안남(安南, 월남)이라고 하였다. 말은 '정복할 수 없는 나라'이지만, 실은 명을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있어주면 고마운 나라라는 말도 될 것이다. 명의 기초를 닦은 성조(成祖, 영락제)는 이 유훈을 지키지 않고 안남 여창(黎蒼)의 반란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오랫동안 안남을 공격했다가 엄청난 전비만 들이고 실익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조선이 불안하였던지 엄청난 전비만 낭비한 그 전쟁을 놓고 '안남을 평정했다'고 허풍을 떠는 조서를 조선에 보내 미리 조선의 움직임을 단속하였다.(<태종실록> 권13, 7년 5월 1일)

중국의 입장에서 주변을 빙 둘러보면 사방이 적인 듯한 느낌이 된다. 한 곳이라도 터지면 어느 곳에서 또 사단이 발생할지 모르는 형국이다. 그러므로 사대(事大)라는 외교 정책에 따라 조선과 명이 우호관계를 유지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긴장하는 '멀리 할 수도 가까이할 수도 없는[不可遠, 不可近]' 관계였던 데는 이렇듯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파병은 조선과 명의 관계를 실질과 명분의 측면에서 한 편, 즉 동맹국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측에서 후금과 가까울 수 없었던 데는 이 시기 확인된 명나라와의 관계도 한몫 했다고 생각한다. 미심쩍고 불안했던 관계가 실제로 안정적인 우호관계임이 확인되었는데, 그걸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조선은 주요 상수(常數)이다

병자호란은 후금이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황제로 칭하면서 이를 조선에 강요함으로써 발생한 침략 전쟁이었다. 이 무렵 후금의 요구를 놓고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졌는데, 그중 홍익한(洪翼漢)의 말을 살펴보자.

"오랑캐가 황제라 일컫는 것은, 오랑캐가 스스로 황제라고 일컫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조정에서 황제라 일컫게 해서 오랑캐가 할 수 없이 황제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진실로 천자라 일컫고 대위(大位)에 오르고 싶으면 스스로 제 나라에서 황제가 되고 제 나라에 호령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누가 그것을 금하기에 반드시 우리나라에게 물어본 뒤에 황제의 일을 행하려 한단 말입니까." (<인조실록> 권32, 14년 2월 21일)

후금은 조선이 자국을 황제라고 불렀기 때문에 칭제한다는 명분이 필요했다. 후금은 사신 용골대를 보내 그걸 조선에 요구했는데 조선의 홍문관 관원인 홍익한은 그 의도를 꿰뚫어 보고 위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황제든 청이든 부르고 싶으면 니들끼리 부르면 되지, 왜 조선에 그걸 요구하느냐는 것이었다. 홍문관에서는 "그들이 반드시 우리나라를 이웃 나라로 대우하지 않고 장차 신첩(臣妾)으로 여길 것이며 속국(屬國)으로 여길 것"이라고 경계했다.

결국 요구가 통하지 않자 후금은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했고, 이것이 병자호란이었다. 이 사실에서도 조선이 동아시아, 아니 당시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중국을 제외하고 가장 윗자리에 있는 나라였다. 그 점을 알기 때문에 청나라는 조선을 무력으로라도 굴복시켜 칭제의 명분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거듭, 조선은 당시 아시아 정세의 상수(常數)였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정권(조선으로 치면 왕조)이 바뀌었고, 중국에서도 명과 청의 교체가 일어났다.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종종 주변 4대 강대국(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틈바구니에 끼어 생존을 모색해야하는 나라로 생각한다. 물론 조선과는 다르다. 남한, 북한이 갈려 있는 탓에, 주변국들은 그 점을 악용하여 분할, 지배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은 인구, 경제력, 군사력 수준에서 세계 10위권이다. 도대체 이런 나라가 약소국이면 강대국은 과연 어디란 말인가?(혹 문화 수준이 낮아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제발 주눅 들지 말자. 이제 '시련과 극복' 수준의 멘털리티 좀 벗어나자.

사건의 원인이라는 난제

역사 공부를 할 때 저지르기 쉬운 오류는 대부분 어떤 사건의 원인을 따질 때 일어난다. 이런 사실은 우리를 난처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다름 아닌 원인에 대한 호기심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좀 달랐지만, 서양에서 역사학의 아버지라도 불리는 헤로도토스도 "이 글은 할리카르낫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이다. 그 목적은 인간들의 행적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헬라스인들과 비(非)-헬라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고 쓰지 않았던가. (헤로도토스, <역사>(천병희 옮김, 숲 펴냄))

그러나 그 '원인'이라는 말이 참 오묘하다. 원인이란 말에는 직접적인 이유도 있지만, 명분, 목적, 토대, 조건 등이 포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외로 간단치 않은 셈이다. 그래서 심지어 원인-결과에 대한 탐구, 즉 인과관계란 단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아예 해결 불가능한 문제라고까지 말하는 학자도 있다. 실제로 역사학자들은 원인이란 말 대신 '영향(influences)', '원동력(impulses)', '요소(elements)', '뿌리(roots)', '기초(bases)', '토대(foundation)'와 같은 표현을 썼다.

원인과 책임의 혼동

원인을 둘러싼 난제 중 하나로, '원인과 책임의 혼동'이라는 오류가 있다. 지난 호에 "후금의 강성은 조선의 피폐를 배경으로 한다. 그것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겠지만, 유력한 원인이다"라고 썼다. 조선이라는 동아시아 외교사의 유력했던 상수를 하잘것없는 변수로 만들어놓은 시기가 바로 광해군 재위 15년간이었기 때문에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정묘호란, 병자호란은 인조 때 일어났다. 여러 정황을 보면 인조를 비롯한 위정자들이 후금과 전쟁을 피하려고 할 수 있는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의 패배, 특히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굴욕적 패배 때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인민들의 심사가 편치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원인이 무엇이든 위정자는 무한 책임을 진다. 그런 책임을 지라고 정치를 맡긴 것이니까. 그래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파천하자마자 경복궁이 불탔던 것이다. 왜군들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 백성들의 손에 의해서.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당시 살았던 백성들만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연구하고 읽는 학자나 독자들도 묻는다. 감정이 이입될수록 그 책임 추궁은 심해진다. 역사를 탐구할 때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기도 하다.

인조 때 일어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경우도 연구자들 사이에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인조 정권, 반정(反正) 세력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 극단적 해석 중 하나가 명나라에 대한 명분(名分)에 사로잡혀 현실 판단을 그르쳤다는 평가이다. 그런 평가가 사실에 비추어 타당한지는 다음번에 검증할 것이지만, 이런 평가가 바로 '책임을 원인으로 착각하는 오류'이다.

거듭 말하지만, 선조든 인조든 위정자는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정치가이다. 그러나 이들 또는 이들의 정책이 전쟁의 원인은 아니다. 원인은 왜군과 후금(청)의 침략이다. 이런 점을 혼동하면 우리는 원인의 늪에 빠져버린다. 이 오류는 윤리적인 문제를 수행자의 문제와 혼동함으로써, 둘 다에 대한 이해를 그르친다. 원래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는 질문과,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다른 것이다. 이런데 위의 오류는 '왜'라는 질문에 두 가지 질문을 섞고, 대답은 하나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오류를 피하는 방법, 불행하게도 몸도 마음도 조금 떨어져서 보는 것밖에 달리 묘책이 없다.

부국강병의 허상

한 가지만 더하고 마치자. 이상한 약소국 콤플렉스(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는 식민지라는 역사적 경험이 낳은 콤플렉스이다.) 때문에 갖게 된 망상 중의 하나가 거창하게 '웅비사관'이라고도 불리는 '아, 고구려 사관'이다. 그 목표는 곧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슬로건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고려나 조선 문명의 성격은 분명 평화적이다. 흔히 이런 말을 하면, '당하고만 사는 게 무슨 평화주의냐'고 비아냥거리는 분들도 있는데,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성공한 나라, 아직 역사상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가 되어야 '부'와 '강'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어야 만족하는가, 하는 질문과 같다. 과연 누가 알겠는가? '부'와 '강'은 단지 '어떤 바람직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조건, 그것도 '조절되어야 할 조건'의 하나일 뿐이다." (오항녕,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
 
▲ 술 못 마시는 사람은 술로 죽지 않는다. 술 잘 마시는 사람이 술로 죽는다. 군대가 약한 나라는 전쟁으로 망하지 않는다. 군대가 강한 나라가 전쟁 하다가 망한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저만 죽지만, 후자는 저도 죽고 상대도 죽는다.

나는 전형적인 태음인이다. 간대폐소(肝大肺小). 100미터 달리기, 수영 등 숨 차는 운동은 잘 못한다. 대신 술은 잘 마시는 편이다. 알코올 분해 능력이 뛰어나므로. 이런 체질은 해부학적으로도 간이 크단다. 해부해보지 않아서 미처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반면 아내는 술을 못한다. 자, 질문이다. 그러면 누가 술로 인해 죽을병에 걸릴 확률이 높을까?

왜 그토록 숱한 인류의 현자(賢者)들이 부국강병을 패도(覇道), 즉 깡패 논리라고 비판했는지 이쯤 되면 알 수 있다. 부국강병에 앞서 해야 할 일은 어떻게 공존, 공영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일 것이다. 그게 생명에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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