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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2-10-30 조회수 : 4,813
제 목 : 또 오른 가야산

또 오른 가야산

- 들어가면서

남명 조식은 지리산을 한 평생 동안 10번이나 올랐다 한다.한 평생 살아가며 한번 오르기도 쉽지 않았을 조선시대에 그것도 기마타고 10번을 올랐다니 놀랐지 않은가?숱한 벼슬자리를 물리치고 지리산 자락에서 평생을 보낸 그에게 지리산은 매양 보라보던 산이었다.고매한 사대부 유림이라 해도 일없이 산에 오르는 일은 정상적인 행위로 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기란 가마를 지고 가는 종도 타고 가는 남명 조식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식이 지리산에 올랐던 까닭은 지리산 사랑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남명 조식만큼이나 나도 서산에 가야산을 좋아한다.
그래서 가야산을 같을 길로 무려 5번을 올랐다.
그러나 나는 가야산을 잘 모르겠다.
가야산에 대한 내력을 딱히 이야기해 줄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좋아한다’는 표현이 어울릴법하여 그리 표현한 것이다.
단지 느낌만 있을 뿐 구체적인 것이 내겐 없어서 내가 가야산에 또 간 이유를 절절이 설명할 길도 없다. 

예전에 관리소 직원들과 겨울철에 눈 밟으며 가야산 산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석문봉 정상에서 바라본 예산과 서산에 펼쳐진 허허로운 내포평야를 바라보며 감동스러워하던 김명옥 소장이 그 일을 잊지 못하고, 가을철 벼 익은 황금 들녘을 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데 이게 그만 강요처럼 들려왔다.
숙명처럼 가을철에 가야산에 가야지 하고 내심을 벼루고 있던 것이 벌써 2년이 다되어 드디어 가야산 산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 동기라면 동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산행이 있기까지는 여러 곡절 끝에 간신히 이루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수리산 현대 홈타운 관리소 직원들만 모여 산행을 하려고 했었다.
이런저런 일로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고, 그 수가 많지 않아 한 두 사람 빠지는 날이면 일이 성사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내 평소 함께 하고픈 소중한 사람에게 같이 할 것을 요청해 이루어진 분들이 오늘 함께한 면면이다.
참으로 기묘하고 다양한 인연과 면면(面面)의 구성이다.
굳이 공통점을 찾는다면 나와 인연이 있고 공동주택 종사자란 특성 정도 일 것이다.
그런 애매한 인적 구성에 날짜도 추석 연휴 기간이다.
추석 뒤끝이라 그 부산함 끝에 오는 피곤을 떨쳐내려고 집에 쉬고 싶었을 텐데 산에 가지하니 좀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날에 모여 산행을 하였으니 나로서는 무난히 이루질 수 있을까 하고 의문에 쌓여 있었다.
남명 조식과 같이 심오한 철학 속에서 산에 오르는 고매함이 깃든 산행도 아니고 약초 찾으러 혹은 내다 팔 버섯 따러 산에 가는 것도 아닌, 일 없이 산에 가는 사람이 부지기수(不知其數)이고 또 그런 사람이 부러운 세상이 되었다.
어떤 이는 건강을 위해서 가고 어떤 이는 스트레스 해소하려고 산에 간다.
그럼 우리는?

- 출 발
하늘이 열린 날이라 하여 개천절이라 했던가!
단군 할아버지, 우리 같은 그저 그런 사람들 불쌍히 여겨 하늘을 열고 세상에 내려온 그날인 것이다.
우매한 백성은 그런 거룩한 의미를 잘 모른다.
그저 하루 쉬라고 하니 좋을 뿐이다.
왜 쉬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도 모른 체, 하늘이 열리니 태극기 달아 뜻을 기리기는커녕 아침 밥 서둘러 먹고 여명이 시작하기도 전에 자동차를 몰아 사무실에 도착하니 벌써 송은기 과장과 임만규 주임이 도착해 있었다.

송과장 이 친구, 어쩌다 나를 만나 이 새벽에 서둘러 사무실로 왔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에겐 더없는 보물이다.
항상 부지런하여, 출근 시간에 앞서 출근하는 소장 보다 먼저 매양 도착하려니 무척이나 힘들 텐데 아직 한 번도 이른 출근시간을 어겨본 적이 없다니 요즘 젊은이가 아닌가 보다 하고 고마워하며 지냈었다.
오늘 아침은 출근하는 날도 아닌데 나보다 먼저 나와 준비하고 있으니 이런 사람을 직원으로 모시고 있으니 나는 분명 복이 많은 사람 일게다.
총각에다가 젊고 건장한 남자가 남보다 일찍 나와 과일 씻고 오이 씻는 모습을 보노라면 안쓰럽고 고맙고 미안타.
과일을 씻고 있는 뒤 모습을 물끄러미 보노라니 청승스럽게 보이는 것이 아직 상투를 틀지 못한 그에 개인사가 안쓰러운 까닭만은 아닐 것이다.
그에 소중한 개인사이니 내 여기서 꾹꾹 참아 삼키지만 그래도 빨리 장가는 갔으면 하는 간절함이 꾸역꾸역 밀려온다.
어쩌다 나와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는지는 순전히 우연이겠으나 성격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나를 만나, 일 많고 탈 많은 만사를 말없이 척척 해낸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까탈스런 소장도 소장이려니와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직원들 뜻 맞추고 다독이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사람 많은 곳이니 바람 잘날 없어 무척이나 힘들 것이다.
그런 사무실에 우스갯소리로 분위기 만들고 힘찬 목소리로 응대하는 모습 또한 고맙거니와 세대 수가 많아 서무(庶務) 일까지 도맡아 하니, 업무 또한 너무 많아 일에 묻혀 산다.
그런 그지만 아직 일 많다, 힘들다 불평하는 걸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언제까지 고약한 소장 밑에서 일해 줄지는 모르지만, 턱까지 찬 내 욕심일지라도 ‘관리과장’할 거면 나와 계속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조금 있어 이혜란 주임이 나와 출발준비에 참여하여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려니 이숙자 소장과 박용성 사장이 도착하였다.
처음 약속한 두 사람이 빠져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각자 중요한 사연이 있다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처음 이 계획을 세우고 인적 구성을 어찌해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하던 중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함께 산행을 같이 하노라하던 김성미 소장이 언뜻 생각나 여쭈어 보았더니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카툭으로 함께 하노라고 문자가 왔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대면(對面)하는 분이다.
산행에 참여하겠노라 하지만 이를 주관하는 김명옥 소장이나 나도 일면식도 없었다.
성품은 어떤 분인지 성향은 어떤지 도무지 궁금증만 있었지 전혀 모르는 분이라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얼마 전부터 김성환 과장을 통하여 전화 통화는 몇 번 있었기에 그 분의 느낌이 워낙 쾌활하고 싹싹하구나 하고 기분 좋은 느낌만 간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동주택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직업이 관리소장이다.
공동주택에는 숱한 사람들이 산다.
이런 저런 숱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에 나에게 좋은 사람도 있고 간혹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 사납고 음험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어지간한 성격 가지고는 감내하기가 쉽지가 않다.
근래에 암으로 세상을 등지는 여 소장님들을 생각해 볼 때, 이곳 공동주택에 소장이라는 직업은 남자도 그렇거니와 여자 분들이 더더욱 감내하기가 쉽지 않은 직업이다.
그저 참기만 하면 되는 감정노동자와 달리 꾹꾹 참는다고 다 해결되는 직업도 아니다.
어떤 때는 강하게 어떤 때는 부드럽게 또 어떤 때는 무정하게 처신하여야 하는 것이 이 직업 아니던가?
현장에 일어나는 일들이 그저 그렇게 일상적으로 진행되다가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 일도 있어, 한 시(時)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 숱한 만사(萬事)를 다 알 수 없으니 경험 많은 누군가에게 애절하게 묻기도 하고, 간절히 매달려 보고 싶을 때가 간혹 있게 된다.
김성미 소장 또한 다르지 않아 경험이 많아서 이것저것 물어볼만한 사람 찾다가 내게 전화를 걸어오면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내 가진 것이 초라해 그다지 도움이 되어 주지는 못하지만 동료로서 그 무게를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하는 그런 소장님이시다.
군포역 부근에서 처음 대면한 김성미 소장은 “참 미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생각보다 젊어, 어찌 그 험한 공동주택의 소장 일을 해낼까 하는 의구심은 들었는데 그 생각은 곧 사그라졌다.
처음 대하는 사람과 곧잘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고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 범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산행하는 내내 처음 대하는 사람들이건만 개의치 않고 어울려 즐거워하니 역시 나는 인복(人福)을 타고 났나보다 했다.
맛있는 많은 음식을 배낭에 지고 정상에 올랐으니 힘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여간 미안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함께 한 여성 일원 중에서는 가장 잘 걷는 것 같아 다행스러워 그 미안한 맘에 가벼움이 일지만 말이다.
그분이 가지고 온 고들빼기나물은 요리하기 쉽지 않은 음식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어찌하면 너무 써서 먹기가 고약하고 쓴맛 따 빼버리면 맛이 덜하다는 것을 내 아내가 그 음식 만들 때 마다 고민하던 것을 익히 보아왔던 기억이 있어서다.
그분이 가지고 온 그런 고들빼기나물을 맛있게 먹었다.
또 산행할 때마다 맛깔스런 음식을 계속해서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나마 안면 있는 김성환 과장이 함께 하지 않아서 미안 맘에 산행하는 내내 일부러 말을 주고받느라 주저리주저리 내뱉은 말이 오히려 맘 상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산행을 마치고 난 이후부터 내내 걱정이 된다.

김성미 소장, 김명옥 소장, 나정수 과장이 마저 군포역 주변에서 작은 봉고 차량에 올라타고 고속도로를 내달리니 예상과 달리 교통 지체도 없이 서산시 운산면에 이를 수 있었다.
내가 이 세상 사람이 되어 서산에 운산을 어찌 찾을 일이 있겠는가?
그곳에 개심사가 있고 서산 마애삼존불이 있고 보원사지가 있어 운산에 왔을 뿐이다.
예전에 개심사 가려면 지나가야 하는 곳이 이곳 운산이기에 찾아왔지만 이 마을에 대한 느낌이 별로 없었다.
언젠가 아내와 함께 개심사를 찾았다가 이곳으로 내려와 점심식사를 하게 되어 이곳 마을을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운산에 의미는 이곳 행정구역상의 이름이 운천면이었다가 부산면이 되었다 하는 등 일정하지 않다가 운천면과 부산면의 일부를 떼어내어 하나의 면(面)이 되었는데 그때 운천면의 “운”자와 부산면의 “산”자를 합성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구름‘운(雲)’자에 뫼‘산’(山)을 썼으니 가야산과 좀 연관이 있어 보여 꽤나 운치가 있고 내력이 깊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는데 떼어 붙여 만든 지명이라니 허망한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게다.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벚나무가 많아 봄이 되면 꽤나 벚꽃이 만발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 많이 찾아 드는 번잡한 봄에 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운산리’에서 조금 들어가면 머리칼을 밀어 버린 것처럼 말끔한 민둥산이 한없이 펼쳐진다.
그 유명한 ‘삼화목장’이다.
‘삼화목장’이라는 이름 보다 ‘김종필 목장’으로 더 알려진 목장이다.
지금은 축협 중앙회 소유라고 하는데 개심사 갈 적마다 눈 쌓이는 날 이곳에 와서 비료포대 깔고 앉아 눈썰매 타면 재미있겠다 싶은 생각을 늘상 했었다.
함께한 일행 중에 이숙자 소장님이 이런 비슷한 곳에서 눈썰매를 탔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눈썰매 타러 왔으면 하는 간절함을 말한다.  
비료 포대 같은 비닐포대에 푹신한 옷 집어 놓고 타면 그만이란다.
나도 눈 오는 날, 마이산 갔다가 그 앞 있는 저수지 둑에서 비닐포대에 볏짚 넣고 썰매를 탔는데 딸아이들 손이 퉁퉁 붓도록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저 삼화 목장 민둥산에서 눈썰매 타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고 바라보지만 민간인이 출입하는 것을 금(禁)하고 있다 한다.
식당 주인에게 물어보니 이곳 아이들이 겨울철이면 개구멍으로 들어가 실재로 눈썰매를 타곤 한단다.
그런 민둥산에 목초지 재배하느라 잡목은 말끔히 제거했는데도 가끔 소나무 몇 구루가 덤성덤성 자라고 있어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연신 탄성을 지르던 김명옥 소장에게 관악산에서 파다가 심어 준다던 그 소나무 대신 저 소나무가 어떠냐고 했더니 송은기 과장을 불러 그 소나무 말고 저 소나무 파다주면 안되느냐고 너스레를 떤다.
그래저래 웃으며 개심사 아래 신창제라는 저수지 인근에 이르니 초가을인데도 억새풀이 흐드러지게 자라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갈대라 하고 한편에서는 억새라며 연신 맞는다고 우스꽝스럽게 우겨대는 통에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대치상태는 조금 있어 개심사 옆으로 흐르는 계곡에 자라는 갈대를 확인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이래 웃고 저래 웃으며 개심사 주차장에 이르니 밤나무에 알밤이 철을 만나 한창이었다.
자동차에서 내려 알밤을 주어온 박용성 사장과 나정수 과장이 임만규 주임께 산에 올라 밤이나 가득 주어오자며 알밤을 건넨다.
이 세분은 한 직장에서 일 년여 교차하며 같이 지내서 그런지 많은 나이 차이 임에도 어우러져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상당기간 떨어져 있었던 세월을 느낄 수 없게 한다.
예전과 다르지 않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훔쳐보듯 지켜보았는데 또다시 내 인복(人福)을 확인하게 된다.


앞줄 왼쪽 부터 나정수 과장, 송은기 과장, 박용성 사장,
뒤줄 외쪽부터 김성미 소장, 김명옥 소장, 임만규 주임, 이숙자 소장, 이혜란 주임 

- 산 행

시작 운동도 하고 시진도 찍고 화장실도 다녀 온 후 개심사의 억지스런 일주문을 지나 송림이 우거진 절 길을 걸어가니 예전에 가던 길이 막히고 새로운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 멋스런 길을 단장하는 모양이다.
예전 그 길로도 멋있고 고즈넉했는데 무슨 작정으로 길 막고 공사를 벌이고 있는지 그 좋던 길은 망가뜨리고 계단을 잔뜩 만들어 놓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아니나 다를까?
개심사 앞에 이르러 어떻게 공사를 벌이고 있는지 내려다보니 돌계단으로 말끔히 단장하고 있었다.
“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세심동(洗心洞)’이라고 그저 그런 큰 돌에 새겨놓은 다듬지 않은 길을 따라 송림 길을 오르는 맛이 너무나 좋았는데 그런 맛을 이제 다시는 느껴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런 실망스런 가슴을 추스르려고 눈을 돌려 개심사를 보니 예전에 볼 수 없던 건물이 들어서 있고 여기저기 터를 닦고 아스콘 포장을 만들어 놓아, 자동차도 올라와 있었다.
또 다시 이곳에 올 일이 없어질까 두려워 진다.

무던한 성격의 소유자인 나정수 과장은 언제 무슨 일이건 마다하지 않고 척척해내는 사람이다.
어쩌다 이 험한 공동주택관리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 그 심사야 내 알 수 없으니 머랄 수 없지만 이 사람만큼 공동주택관리직에 딱 맞는 사람도 없지 않을까 싶다.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관리소장의 소임은 맡지 못하고 있으나 곧 그 기회가 올 테고 그때가 오면 누구보다 잘 해낼 사람이다.
전기 과장으로 나간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감내하기 어려운 수난이 있어 맘고생 심했을 텐데, 어찌 해결했는지 궁금하지만 묻자니 내 맘 또한 아파 와서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있다.
더 이상 나빠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속마음만 달래고 있다.
지난번 가야산 산행기에서 나정수 과장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니 이만 줄이려 한다.

그런 나정수 과장이 앞장서 시작된 산행은 송림 숲으로 이어져 있지만 출발은 다소 가파른 길로부터 시작된다.
많은 산을 올라 보았지만 이처럼 길게 이어지는 가야산 송림 길은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이탈이아 작곡가 ‘레스피기’가 작곡했다는 ‘로마의 소나무’가 여기만큼 잘 어울릴만한 곳도 없을 것이다.
‘로마의 소나무’을 듣고 있노라면 곧 있으면 잠이 들만큼 잔잔해서 높낮이가 별로 없는 음률이 끝없이 이어진다.
웬만한 애호가 아니고서는 끝까지 듣기가 쉽지 않다.
가야산 송림능선은 ‘레스피기’ 음악만큼이나 잔잔하게 계속해서 이어지는 능선 길이어서 바위가 없어 완만하고 밋밋한 능선의 부드러움을 원 없이 느낄 수 있게 한다. 
혹자에게는 심심하고 밋밋한 산행길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소나무로만 이어지는 길을 걷노라면 만사가 평온해진다.
비록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하는 산행인지라 왁자지껄 떠들며 대충 바라보며 지나쳤지만 언제 어느 때 누구와 걸어도 맘 편해지는 길이다.
그런 송림능선을 열심히 떠들며 걷노라니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헐떡이며 걷다 보니 줄기가 손가락 감싸는 듯이 보이는 반원 모양인 멋스런 소나무 앞에 서서 사진을 찍으며 수려한 산에 경치를 보라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일락사와 일락저수지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산행 때도 저 소나무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으며 이야기 나눌 적에 임만규 주임을 떠 올리며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다음에는 꼭 같이 오자고 했었는데 드디어 오늘 함께 가야산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일행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환갑을 넘은 나이이니 적지 않은 나이이다.
그럼에도 우리 함께 산행을 마다하지 않고 흔쾌히 나오셔서 거리낌 없이 어울리신다.
이 정도 나이 차이면 오랜 세월 함께 하지 않고는 왠지 어색해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가 함께 한 것이 길게 잡아야 2년 남짓이다.
각자 뜻하는 바 있어 제 갈 길로 흐트러져 지낸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가까운 친척도 떨어져 있으면 남이 된다고 하는데 친척도 아닌 남남이 모여 일하다 떨어진지 1년이 넘었으면 인연이 다한 것처럼 소식이 없이 지내는 것이 요즘 사람 사는 모습이다.
마치 매일 같이 일하는 사람처럼 산행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나이도 적지 않게 차이가 남에도 이리도 잘 어울리는 것은 그 성품들이 남다른 여유와 너그러움 때문이리라 짐작만 갈 뿐이다.
모가 나지 않고 배려심 많은 성품 탓에 그 험한 직장에서 별 탓 없이 잘 버티고 있지만 요즈음 들어 이런 저런 일로 맘에 내키지 않는 일이 자주 생겨서, 나와 그곳에서 함께 일하던 때가 자꾸 그립다 말씀하신다.
원래 몸 아끼지 않고 일 찾아 하는 분이셔서 나무랄 데 없는 분이신데 맘 불편한 일없이 앞으로도 잘 지내셨으면 좋으련만 요즈음 불편한 일이 생겨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영 편치 않다.
그런 속내이시만 아무 일 없는 듯 어울려 산행은 계속되었다.

가야산 송림능선은 바위로 된 산이 아니라서 흙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검은 흙길을 따라 걸어 얼마만큼 올라가니 일락봉 정상이다.
아마도 이곳에서 보면 서쪽 바다로 해가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일 것이다.
그래서 해가 지는 일락봉(日落峰)이라 명명 했으리라 쉬이 짐작이 간다.
그러나 해질녘에 일락봉 정상에서 그 장엄했을 해지는 노을을 본 적은 없다.
그 시간대에 외지(外地)인이 이곳에 있기가 사실상 가능해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언제 꼭 이 일락봉(日落峰)에서 해지는 모습을 보리라 다짐은 해보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요원(遙遠)하다.
그 소망만은 가슴에 담아 꼭 간직해 두련다.

일락봉 정상에 정자가 있어 피곤한 다리도 쉬어 갈 겸 배낭을 내려넣고 서산 쪽 내포평야의 황금들녘을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이분 저분이 내 놓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눈을 돌려 반대편을 보라보니 용현계곡 넘어 완만한 곡선의 옥양봉 눈에 들어온다.
저 아래 용현계곡은 꽤 알려진 계곡이라서 여름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휴양지이지만 아직 그곳까지 내려가 본 적이 없어 실재로 어떤지 모른다.
단지 물 맑고, 시원하고, 커다란 나무들이 그늘 막을 드리우고 있어 아름답고 빼어난 계곡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용현계곡을 지나 꽤나 가파르게 치솟아 오른 621m의 옥양봉과 마주하게 되든데 산 능선의 부드러움으로 눈 맛을 선선하게 한다.
왜 옥양봉이라 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능선의 곡선은 참으로 아름답다.
옥양봉 정상에 이르면 예산 쪽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들었는데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내가 가야산을 5번째 올랐었다고 하지만 매양 개심사 쪽 길로만 올랐었다.
언젠가는 꼭 보원사지 쪽에서 옥양봉을 거처 가야봉에 올라 남연군묘가 있는 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가야산을 타보리라 맘먹은 지가 몇 년이 되었는데 그 뜻을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길도 멀거니와 교통편이 쉽지 않아서 실행하기가 까다로운 탓이다.
그 등산로를 타보아야 가야산에 갔었다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번죽만 울리고 있을 뿐 가야산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내가 가야산에 가지고 있는 설익은 연가(戀歌)이다.

출발 때부터 박용성 사장이 다른 일행들이 배낭을 무겁게 지고 가는 모습이 미안한 지 앞서지도 뒤서지도 못하고 어색해 한다.
박용성사장이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관리사무소에 근무하지 않는 분이다.
나와 수리산 현대 홈타운에서 같이 근무하던 인연이 있어 오늘 함께하게 되었는데 관리사무소에는 근무하지 않지만 공동주택과 관련하여 유지보수업을 영위(營爲)하는 분이라 우리와 다를 바는 없는 분이다.
요즈음 부인의 병환과 비록 가볍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성치 못한 몸으로 그 험한 세상 다 지고 가느라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어린 남매를 보살피는 일에서 병환 중인 부인 그리고 늙으신 어머님, 무엇 하나 만만해보이지 않는 일을 등에 지고 어렵다는 영세 자영업을 몸 하나로 버티고 있다.
안정적이지 못한 수입도 그러려니와 경기가 자꾸만 나빠진다고 하니 앞으로의 걱정 또한 그의 앞날에 짐이 될 법하다.
그런 모든 것 다 지고 사는 것이 비단 박용성 사장뿐이겠는가만은 일거리가 있을 때 마다 불러 일을 맡길 적에 먼발치서 바라보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 좋은 기술과 심성이었으면 벌써 성공하여 넉넉한 삶을 누리고도 남았을 텐데 우리네 세상은 그런 심성으로는 살아내기가 쉽지 않다.
괜히 이럴 때면 세상이 원망스러워지고 심란해 진다.
맘 착하고 열심히 일하고 좋은 기술 가졌으면 그만큼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니 원망만 깊어지는 것이다.
함께 산행할 때 무어 도와줄 것이 없나하고 찾으며 지었던 미안스런 표정이 지금도 선하다.

송림능선을 따라 어찌 걸었는지 어디 만큼 왔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마냥 떠들며 걷다보니 어느새 석문봉 정상에 이르러 있었다.
석문봉 정상에 이르면 서산 쪽 내포들과 예산 쪽 내포들 그리고 아산, 당진 쪽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면(四面)이 벼 익어 고개 숙인 황금들녘으로 둘러쳐진 산 아래 광경을 보노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조선조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예산, 서산, 당진, 홍성을 합하여 내포라 했다 한다.
주로 삽교천 주변 땅이라고 하지만 저 홍성까지를 내포라 한 것을 보면 강 주변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농사지어 먹던 논들이 이어진 너른 농토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지금 우리가 보라보고 있는 멀리 사면(四面)의 들녘이 바로 그 내포평야이다.
벼 베기가 한창이어서 저 아래 농부들은 탈곡하느라 무척이나 바쁠 터이지만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 눈에는 그저 한가한 들녘의 풍성함만 들어온다.
우리네 농부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안타까울 데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노동의 현장이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농부 아닌 부모에게 태어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거의 대부분은 농사짓는 부모 밑에 자란 탓에 농사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것이다.
농사가 싫다하여 떠나버린 저 들녘엔 지금 노인들만 모여 벼 타작을 하며 끙끙대고 있을 것이지만 지금 우리는 그런 실상은 접어두고 산 정상에 올랐다는 성취감에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정경에 취해 감동스러워 했다.
어찌 그 늙은 농부와 부모님 생각이 간절치 않겠는가마는 지금 그런 눅눅하고 무거운 생각으로 저 아래 정경을 보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고 평화로워 보였다.
이렇게도 들녘이 아름다울 수도 있느냐며 모두가 한마디씩 한다.
같이 온 일행들 대부분이 시골 출신이라 들녘이란 그저 힘든 노동만 있는 그저 그런 지겨운 곳이라고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들녘을 매양 보고 자란 분들이지만 지금 내려다보고 있는 저 들녘은 지금까지 부대끼며 경험했던 그런 곳과 달리 낭만 가득한 멋스런 전경쯤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석문봉 정상 주변에 작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든 돌탑을 둘러보며 그 정성에 탄복을 하며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한담(閑談)을 나누었다.
이쪽을 배경으로 한 장, 저쪽을 배경으로 또 한 장, 사진을 찍고 점심 먹을 자리를 찾으니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등산을 자주하는 나정수과장이 이리저리 한참을 헤매며 찾은 끝에 마땅하다고 정한 장소가 지금 생각하니 어째 좀 그랬다.
점심 다 먹고 내려오며 둘러보니 좋은 자리 다 놓아두고 어찌 그 협소한 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지 한심스럽기조차 하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버너를 꺼내 물을 끓이고 컵라면과 누룽지 등 각자 싸가지고 온 각종 음식들을 나누어 먹으며 지나가는 사람들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떠들며 막걸리를 들이켰다.

요즘 들어 커다란 태풍이 두 번이나 쓸고 간 탓에 채소 값이 엄청 올랐다고 한다.
음식점에 가면 고기값보다 채소 값이 더 비싸다며 고기로 채소를 싸서 먹어야겠다며 호들갑을 떨 만큼 채소 값이 상당한 모양이다.
직접 사보지는 않아서 얼마나 올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숙자 소장님이 금(金)치라며 김치를 꺼내놓는다.
누구하나 김치를 싸가지고 오신 분이 없었으니 라면에 필수라는 김치가 참으로 반가운 것이었다.
그 김치 싸가지고 오르느라 힘도 들었을 텐데 정상에 올라와 슬그머니 내놓으신다.
맛있게 잘 먹었지만 그 맘 씀이 어찌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이숙자 소장님은 김성미 소장님과 더불어 처음 우리 일행과 산행에 동행하신 분이시다.
얼마 전 지인들과 함께 이숙자 소장님과 산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러이러한 분들과 산행을 한다하니 함께 가겠다했었는데 이혜란 주임이 청하여 함께 하게 되었는데 성격 싹싹한 분이시라 있는 듯 없는 듯 잘도 어울리신다.
예전에 산행을 두 번인가 같이 하였는데 직장생활이 쉽지 않는 듯 많은 어려움을 이야기 하셨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지셨다 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그다지 나와 알고 지낸지가 오래되지 않아 무어라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 여기서 줄이지만 계속해서 함께 산행했으면 하는 마음이 깊다.
<사진이 없어 올리지 못해 아쉽다>

점심을 먹고 저쪽 가야봉 쪽을 둘러보았는데 석문 봉에서 가야봉 쪽은 제법 길이 험하다.
경사가 급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능선 길이라 걷기가 고약하건만 가야봉쪽에서 석문봉으로 넘어오는 등산객이 제법 많았다.
가야산 정상은 석문봉(653m)이 아니라 가야봉(678m)이다.
그 높이야 약 20m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가야산에 올라 정상을 밟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기는 하다.
가야봉 정상엔 레이다 기지와 통신 설비들이 건설되어 있어 정상으로서의 그 호쾌함과 정상을 정복한 통쾌함 같은 것이 없다.
애써 찾은 정상이 그러하다면 거의 정상 높이와 유사한 석문봉이 나을 듯싶은지 사람마다 가야봉보다 석문봉을 더 찾는다고 한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하고 예산과 아산 그리고 당진 쪽 너른 들녘이 못내 아쉬워 보고 또 보고서 뒤돌아 내려오니 오후 3시가 넘었다.
빨리 내려가 태안 만리포 해수욕장으로 나가서 해지는 노을을 지켜보고자 했으나 아무리 서둘러 내려가도 해지는 모습을 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내심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서둘러 내려가 바닷가 가자며 재촉했지만 바닷가를 찾지 못했던 아쉬움이 지금도 간절하다.
 

산행한 후 내려와 노을이 진 바닷가는 상상만 해보아도 감동스럽다.
바닷가에서 노을을 보자고 한 분은 김명옥 소장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가야산 가자는 것도 김명옥 소장님의 의견이었다.
이번 산행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분의 노력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근래에 건강이 좋지 않아 산행이 가능할지 지극히 의심스러운데다 어머님 병환으로 자유스럽지도 또 마음에 무게도 남다를 텐데 시작한 일인지라 남들 피해주지 않게 남몰래 하나하나 준비해 주셨다.
매양 즐거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시던 분이신데 어머님 병환으로 맘고생 또한 이만저만이 아닐진대 그 사정을 다 알지 못하는 우리는 그저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스러워 했을 뿐이다.
여러 좋지 않은 사정에도 불구하고 준비하고 참석해 주신 그분의 마음 씀에 그저 고맙고 미안했다.
꽃을 좋아해 이름도 잘 모르는 처지에 보는 꽃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통에 같이 가는 나는 항상 그 꽃 이름 맞추느라 긴장을 해야 한다.
다행스럽게 눈에 흔히 띄는 꽃만 골라 물어와 답하지만 사실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꽃은 그리 많지 않다.
적당히 물어 오기에 망정이지 보는 꽃보다 물어온다면 아무 대답도 못했을 것이다.
이러 저리 전화해서 오는지 안 오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 바쁜 공동주택을 책임지고 있는 몸으로 쉽지는 않을 것이다.
9월 초부터 시작해서 산행하는 날까지 언제가 적당한지 확인 끝에 ‘못 간다’하고 말 못할 날이 바로 오늘인 10월 3일이라며 정한 것도 그분이시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내일 또 무어라 이야기 나눌 분인지라 여기서 줄이련다.

석문봉에서 출발할 적에는 늦었다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태양은 중천에 있었는데 서둘러 내려왔는데도 중간 쯤 내려오니 어스름해진다.
산행 중에서 갔던 길을 또다시 내려온 것과 계단 많은 길 만큼 힘들 때가 따로 없지만 계단은 없어도 올랐던 같은 길을 다시 내려오려니 그 걸음걸이가 올라갈 때와 달라 보였다.
모두가 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내려와 올라갈 때는 무심히 지나쳤던 조그만 봉우리에 있는 정자로 올라갔다.
이곳이 상왕산이다.
개심사를 상왕산 개심사라 한다.
그 상왕산 정상에 이렇듯 멋스런 정자를 지어 놓았다.
말이 정상이지 사실은 정상에 자리한 것은 개인의 묘(墓)라기에는 다소 커 보이는 묘소(墓所)이다.
예전에 가야산을 찾았을 때는 묘(墓)가 잘 다듬어져 있었는데 추석이 지났는데도 아직 벌초도 하지 않았다.
산 정상에 쓴 묘(墓)이니 나름 명당(明堂)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서산시청에서 이 정자를 지으려고 했을 때는 당연히 정상에 지으려고 했을 것인데 저 묘소의 후손들이 그리 허락해주지 않아 정상을 벗어나 조금 아래 짓게 되었을 텐데 누구하나 돌보지 않는 묘가 되다니 그 속내가 무언인지 참으로 궁금해진다.
지난번 산행 때와 마찬가지로 나정수 과장이 그곳에 올라 누구인지도 모르는 묘소(墓所)에 술을 따르고 내려왔었다.
이미 노을이 서쪽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엄한 하루의 햇살이 여성분의 붉은색 옷과 어우러져 쏟아지고 있었다.
곱다 곱다하고 서쪽 하늘과 여자 분을 번갈아 쳐다보니 훤칠하게 키가 큰 이혜란 주임의 얼굴에 가을 노을빛이 곱게 덥고 있었다.
 

이혜란 주임은 매양 나는 무언가 하고 있는 모습만 보게 된다.

이혜란 주임은 나와는 한 사무실에서 같이 일한다.
1000세대에 이르는 공동주택에 경리 직원 한사람이 숱한 업무를 다 해내려면 무척 힘들 것이다.
힘들다 어렵다 한 번도 말한 적도 투덜댄 적도 없어서 능력 있어 척척 해 내나 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이혜란 주임이라고 어찌 그 많은 일이 힘들지 않겠는가?
공동주택의 특성상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다 모여 산다.
말이야 나쁜 사람이라 하지만 어쩔 땐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모욕감을 주는 경우가 간혹 있어서 응대하는 이혜란 주임 또한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온다.
말이 없고 심성이 착한 탓에 말도 없고 불평도 없이 감내하고 있을 뿐일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마주보는 처지인지라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이 좀 그렇기는 하다.
어째 거나 김명옥 소장님이 갑작스레 어머님 병환으로 참석하기 어려운 처지인진지라 산행 준비물을 이혜란 주임께 요청해서, 미리 시장 보느라 고생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을 뿐 도와주지도 못해 미만한 마음만 가득하다.
항상 말없이 하는 분이시라 이번에도 송과장 도움을 받아 미리 준비해 주어서 아무 불편 없이  다녀올 수 있어 고마울 따름 이다.
그래서 일까 노을이 옆 광으로 깃든 얼굴 모습이 그리도 곱고 예뻤을까!
항상 무언가 일하고 있는 모습만 보아왔는데 지금 등산 스틱 챙기는 모습이 너무 익숙해 좋았다.

대충 막걸리 나누어 마시고 개심사로 내려오니 장엄하던 태양은 간데없고 이젠 어둠이 세상을 덮어가고 있었다.
햇무리가 포근히 감싸고 있는 상왕산 산속에 포근 자리하고 있는 개심사는 찾는 이가 제법 많아졌다.
자연친화적으로 지어진 건물을 두고 찬사를 쏟다내고 있다.
대규모 사찰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름 있는 문화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이유는 아담한 사철 건물의 기둥 때문이다.
언제 보아도 감칠 맛나고 시골티 나는 자연스러움이지만 그렇다고 저속하다거나 번잡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리도 찬사를 쏟고 있는지 모른다.
사찰의 연륜이 제법 된다고 하지만 현재의 건물들 대부분이 조선조 중기의 건축물이다.
세월을 거슬러 백제까지 그 연원을 찾아 올라가지만 조선 중기의 세월도 놀라운 세월이다.
그런 연륜과 여유스러움을 자꾸만 헤치는 일이 잦아들고 있다.
멋스런 건물 보자고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중창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새로운 건물이 여기저기 지어놓았고 또 지을 모양이다.
종교 도량이니 종교인이 모여 필요에 따라 건물 짓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니지만 고즈넉하고 아담하고 소박한 그 멋스런 사찰의 이미지를 다 지우고 있어 안타깝고 미안해진다.
산행 시작 할 때 개심사로 오르던 소나무 길을 비켜 다른 길로 내려오면서 우리는 말장난에 낄낄대며 무어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소리를 개심사 계곡에 가득 채우며 내려왔다.

차에 올라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내려오니 처음 운산에서 개심사 쪽으로 접어들었을 때 보았던 코스모스가 어둠으로 보이지 않았다.
돌아갈 때 차에서 내려 거닐자던 멋스런 코스모스 길이었는데 서두르지 않아 볼 수 없는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추석 뒤끝이라 밀릴 것이라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자동차는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려 군포역 주변에 이르니 김성미 소장님이 먼저 집으로 가야겠단다.
아마도 청소년인 자녀들이 못내 걱정인가보다.
우리는 아쉬움 속에 김성미 소장님을 보내드리고 추어탕 집에 앉아 저녁식사를 하니 시간이 어찌 지나갔는지 벌써 한 밤중이다.
다음 마니산 등산을 약속하고 서둘러 헤어져 돌아가 집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 후기
가야산 산행에 관한 글은 이미 한번 썼다.
또다시 가야산 산행이야기를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막상 글을 쓰려고 생각을 더듬으니 생각은 많은데 어떻게 정리하여야 할까 하고 고심하게 했다.
이 많은 사람을 다 언급하자니 재미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또 개인적인 주관인데다 그분들 모두 한 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 공유하는 것도 없었다.
이분이 이러이러하니 어쩐다하고 말하려 해도 그런 내용은 나만의 기억과 경험일 뿐 다른 분들에겐 공유될 수 없는 것이라 난감한 면이 있었던 것이다.
산행기를 쓰려면 산행 중에 있었던 일들이 내가 행위를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되고 멀리서 바라보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산행하는 내내 나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대었으니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이번 산행이 내겐 특별한 것이었고, 또한 새로 산행을 같이 한 분들이 많아 무리한 부분이 많지만 두서없는 이글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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