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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2-01-26 조회수 : 4,183
제 목 : 경주를 가다

경주를 가다

 

-. 왜 경주

우리나라 사람치고 경주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흔히들 천년 고도라고도 말하며 천년의 역사 속에 담긴 숨결을 말한다.

불국사가 있고, 석굴암이 있고, 첨성대가 있고, 대능원이 있어 간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경주를 대충 둘러보아도 일주일은 족히 걸린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 볼거리가 많아 또한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 진가를 알아보기도 어렵다고들 말하기도 하는 것을 나는 많이도 들었다.

신라의 역사가 BC 59년에 시작하여 AD 935년에 멸망했으니 천년의 역사는 거짓되고 부풀려진 이야기가 아니다.

로마 역사가 천년이나 지속되었다고는 하지만 신라의 천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5세기 게르만의 대이동으로 사실상 로마는 멸망했으며 동로마의 역사는 로마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것은 억지처럼 보이기 때문에 진정하게 천년역사의 의미는 신라가 단연 돋보이는 것이다.

성덕대왕 신종이며, 각종 불상이며, 불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석굴암의 예술성이 가히 세계적이라는 찬사를 난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남들 다 가보았다는 경주를 내 나이 50이 넘도록 한 번도 간적이 없다.

부산 갈 일이 있으면 고속버스를 이용하게 되는데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경주라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아마도 그때 경주를 스쳐 지나갔다는 사실이 전부다.

경주 땅을 한 번도 내 발로 밟은 적이 없었다.

불행하다라고는 할 수 없어도 행운일 수는 없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나는 남들 다가는 학창시절 수학여행 갈 기회를 잡지 못했다.

성장하여 일부러 시간 내어 찾아보았을 만도 하지만 딸들은 수학여행으로 다녀 온 터여서 도무지 가려고 하지 않아 딱히 갈 기회도 없었다.

내 아내도 경주를 딱 한번 가보았다는데 그도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라고 한다.

아마도 경주 방문한 사람들 대부분은 학창시절 수학여행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술사가나 사학자 등 전문가들은 신라에 대한 예찬을 끈임 없이 늘어놓지만 내 주변에 경주 다녀온 사람들은 다시 가려들지 않는다.

이는 내 딸들도 마찬가지여서 경주가자는 내 간청을 거절한다.

왜 일까?

그리도 깊은 역사와 예술, 문화, 종교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는 경주를 그다지 가려고 하지 않는 걸까?

난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리도 훌륭하다는 문화재를 감상해 보리라하는 기대를 은근히 가슴에 담아두고 살아왔다.

그 기회를 아이들 떼어 내고 아내와 단 둘이서 만끽해 볼 요량으로 길을 나섰다.

 

-. 가는 길

경주를 방문하는 길은 아마도 봄이 좋을 것이다.

아니면 가을이던가?

봄에는 벚나무가 많아 볼만할 것이고, 여름이면 연꽃이 피어 있을 것이며, 가을에는 단풍이 어우러진 고풍스런 옛 도시를 더욱 아름답게 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경주의 모습은 그런 치장한 도시가 아닐 터, 헐벗은 그대로의 모습이 진정한 고도 경주의 모습은 아닐까하는 기대감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것도 내가 출발하며 느낀 감정이었다.

한산한 새벽 고속도로를 달려 경주에 이르니 오전 11시가 되기 전이다.

한 겨울 산하는 벗은 나목의 앙상한 모습만 내내 내게 보여주더니, 경주에 거의 다다라서야 소나무 숲이 길게길게 이어져 있었다.

경주를 다녀온 지금도 그 소나무들이 가슴에 남아 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

 

-. 불국사

그리 많은 글과 이야기들이 책 속에 담겨져 있고 그래서 수도 없이 불국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었다.

찬사와 찬사에 일색인 그런 불국사에 막 발을 들여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국사의 첫인상은 참으로 낯설었다.

사찰이 있는 곳은 거의 가 비슷하다.

사찰이 있는 곳을 가만히 둘러보면 뒷산이 둥그렇게 감싸는 듯 한 곳에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내가 산만 보아도 이곳에 절이 있었겠구나 하면 어김없이 실제 절이 있거나 빈 절터가 있곤 했다.

그런데 불국사는 그런 둥글게 감싸 안는 듯한 느낌이 없는 그런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점이 참으로 특이하구나 하고 경내로 접어드니 석조물을 쌓아 만든 불국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개는 터를 깎아 내어 평평하게 닦은 다음 절을 짓지만 불국사는 터를 그대로 두고 돌들을 쌓아 평평하게 만든 특이한 구조로 된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사찰이었다.

그러니 특이하게 보일만도 하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느낌이 들게 하는 건물인 것이다.

그래서 유럽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석조 건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건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운교 백운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다지 큰 감동을 주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옆으로 돌아가며 바라본 축대는 무지막지한 건물이구나 하는 생각을 더더욱 굳어지게 한다.

그런 축대를 돌아 경내로 들어서니 석가탑과 다보탑이 보였다.

난 어려서부터 사진으로 이 두 탑을 수도 없이 보았는데 그런 중에 항상 마음속에는 다보탑이 더 좋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어려서 보았던 보림사의 3층 석탑이 석가탑과 비슷하여 생경스러운 다보탑이 더 좋다고 막연하게 여기곤 했기 때문이다.

막상 직접 바라본 두 석탑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예찬에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다보탑의 둔탁함보다 날렵한 석가탑의 모습은 자꾸만 눈을 끌고 간다.

 

-. 백제의 것과 신라의 것

예전에 부여에 정림사 오층탑을 훔쳐보듯 담 넘어 바라본 적이 있다.

고향에 자리한 보림사 3층탑만을 보아온 나로서는 정림사 오층탑은 충격이었다.

그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무언가 알 수는 없지만 가슴을 잡아당기는 강렬한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비오는 날의 그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정림사의 오층탑은 전체적인 느낌이 부드럽다는 느낌이었다.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인 보림사 3층탑은 왠지 각이 지고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그렇거니와 그다지 와 닿는 것이 없었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석가탑은 모습이 비슷한 보림사 3층탑의 아쉬움을 단숨에 날려 보내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겐 정림사 오층탑에서 느낀 그런 강렬한 무엇은 없고, 훌륭하기는 한데 왠지 정이 없어 보인다고나 할까 아무튼 정림사 탑의 안옥한 그런 느낌이 없다.

그래도 깔끔하고 잘 다듬어진 완벽함의 느낌이 서린 두 탑을 지나 경내를 둘러보니 무지막지한 느낌은 갈수록 더해간다.

평지 절도 아니오, 부드럽게 터를 일구어 만든 절도 아닌 무언가 우격다짐으로 만든 절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절의 대부분은 소박하고 잘 다듬지 않아 투박하기조차 하지만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요즘 들어 중창 이내, 확장 이내 하여 우악스럽게 크게 지어대는 통에 자연과 어우러지는 멋이 사라지고 현대식의 삭막함만 더해가는 것이 왠지 서글프게 한다는 생각을 평소 갖고 있는 터여서 그런 것은 아닐까?

암튼 난 경내를 샅샅이 훑어보며 지나가다가 다람쥐와 마주했는데 이 다람쥐라는 놈이 그리도 사람들이 오가는데도 개의치 않고 먹이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려서 무엇보다도 더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 무지무지한 절 불국사

완벽하고 무엇보다 아름답고 잘 다듬어지고 훌륭한 절이라는 찬사만을 들어온 나로서는 들어왔던 그런 느낌과 환희가 일지 않는다.

그래도 이만한 절을 만든 우리네 조상의 얼에 감사한 느낌으로 돌아서 내려오는데 가슴 한구석엔 왠지 무너져 비어가는 아쉬움이 뒷덜미에 내려 안는다.

그리도 자랑해 맞지 않는 절인데 신라 천년이 빛은 사찰인데 하는 숱한 이야기 속에 텅 빈 가슴을 안고 내려와 빈속이나 채울 요량으로 식당을 찾았다.

관광지 주변의 식당이 다 그렇듯 맛없고 값만 비싼 점심을 대충 먹어치우고 토함산 기슭을 지나가며 생각했다.

불국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당연히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훌륭한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왜 이리 허전한 것일까?

내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정교하고 세련되어 보이며 또한 그 크기도 대단한 것이지 않던가?

그런데 왜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를 올라갔다.

무언가 있는데 보이지 않는 찜찜한 무엇, 바로 그 무엇이 있을 텐데 도무지 모르겠다.

마치 빚지고 떠나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는다.

 

김대성의 기괴한 설화가 스며있으며,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새기며 이름도 야릇한 토함산을 이러 저리 휘청거리며 가로질러 자동차를 달리니 가슴만 답답해져 온다.

 

 

-. ! 석굴암

그렇게 무거운 가슴을 안고 토함산에 오르다보니 어느 순간 시야가 확 트인 산등성이를 따라 오르는 길이 나온다.

같은 토함산이라 하지만 불국사가 있는 곳과 정반대 방향에 자리한 곳이 석굴암이다.

석굴암이 저리도 산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도 생경스럽다.

서양 수도원이 암벽의 산 위에 종종 있는 것은 보았어도 우리나라 절은 아무리 올라가도 산 중턱을 넘지 않는 법인데 거의 정상 가까운 곳에 있어 무언가 달라 보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내세울만한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거나 답하는 것이 석굴암이라 하지 않던가!

그런 석굴암을 찾아 토함산 어디쯤에 자동차를 새워두고 나는 아내와 함께 손을 잡고 석굴암으로 향했다.

 

매표소 앞에 이르니 거대한 종각이 있어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고 타종을 하곤 했다.

2012년에 기원할 것이 있으면 1,000원 이상을 지불하고 타종할 수 있다는 표지판이 있어 사람들은 돈 상자에 돈을 넣고 종을 치기 위해 종각으로 올라 타종을 하곤 했다.

돈을 넣고 돈을 벌게 해달고 비는 것은 아닌지 왠지 불안해진다.

야박한 상흔이 이곳에도 존재한다 싶어 언짢았다.

이 문화재를 위해 우리나라 정부는 돈을 쏟아 부었을 것이다.

그 돈은 물론 우리 국민들이 낸 세금이다.

그래서 요즈음 정부에서 운영과 관리를 담당하는 곳은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그럼 지금 불국사나 석굴암은 정부에 돈을 들여 복원하지 않았던가 하는 의아심이 일어난다.

분명 세금으로 복원작업을 했을 테니 지금 내가 내고 있는 문화재 관람료는 정부가 받아야 할 텐데 그렇지는 않는 모양이다.

내가 보이기에 특정 종교인들이 관람료를 받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알고 싶지 않거니와 내용도 잘 모르니 신경을 쓰려고 하지 않다가도 돈 한 푼 내지 않은 단체들이 돈을 받아 챙기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니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석굴암으로 들어가는 관람료가 제법 비싼데 그 문화재가 지금 관리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도 아닌 다음에야 받아 챙길 이유가 없어 보인다.

관리책임이 있는 관계당국에서 관리 목적상 관람료를 챙기는 것은 누가 머랄 것 없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영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

단지 내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적지 않은 관람료를 지불하고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넓은 길을 따라 걸어가며 아내가 수학여행 때 석굴암에 왔던 이야기를 들었다.

이른 새벽에 토함산을 올라 왔드랬는데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한다.

사람들 많기로야 지금이나 그때나 다르지 않다며 옛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아내는 새벽녘에 이곳 석굴암으로 올라와 동해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는데 그게 그리도 좋았다 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석굴암 가는 길은 새벽 해 뜨는 시각이 아니라 오후 시간인지라 석굴암이 왜 동쪽을 향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없지만 멀리 동쪽 바다가 보이는 시원한 눈 맛을 맘껏 느끼며 걸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어 석굴암에 다다르니 여느 사찰과 다르지 않게 둥글게 감싸 안는 듯한 곳에 자리한 석굴암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느 사찰과는 달리 산등성이 어디쯤, 햇볕 잘 들 것 같은 높다란 곳에 위치할 것이라 상상했는데, 평범한 사찰이 있을 만 곳에 자리하고 있어 예상을 빗나가고 있었다.

움푹하게 패인 골자기에 자리하고 있어, 아늑하고 아담하다는 느낌이 다가서고 있지만 내가 마음속으로 막연히 간직하고 있었던 석굴암은 웅장하고 정교한 것이었다.

 

계단을 오르며 침을 삼키고 심지어 긴장까지 하며 서서히 다가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석굴로 들어갔다가는 나오는데 그 시간이 참으로 짧았다.

우리나라에서 사람 손으로 만든 것 중에 누구나 서슴지 않고 첫 번째로 꼽는 문화재인데 사람들은 근방 나오는 것이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세계에서 손꼽는 문화적 예술품을 눈앞에 두고서 저리도 지나치듯 나오는 걸까?

그 까닭은 석굴암으로 들어가 보면 근방 알 수 있다.

유리창 너머로 느낌 없이 앉아있는 불상과 알아 볼 수 없는 조각품들로 이루어진 석굴암은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은 앞에 감시하듯 앉아 있는 안내원과 투명한 유리뿐이다.

그래도 국립박물관에서 본 반가사유상처럼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머금은 불상이 중앙에 앉아 있는 석굴암을 나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열심히 들어 알고 있는 배치와 예술성, 정교한 배치 등은 솔직히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본존불의 모습은 박물관에서 본 반가사유상과 묘한 일치와 이질적인 느낌을 함께하고 있었다.

도톰하게 살이 진 본존불은 깡마른 박물관 반가사유상과 분명 차이가 나 보이기는 한데 유리창에 갇힌 내 눈으로는 분간할 수가 없다.

볼 것 없다는 듯 밖으로 나간 아내에게 미안한 맘이 들 때까지 한참을 들여 다 보았다.

 

-. 초라한 석굴암

외국 사람이건 우리나라 사람이건 석굴암에 대한 칭송은 강요받듯 들어왔다.

아마도 외국인들이 묻지 않아도 우리나라를 소개할 때나 설령 물어올라치면 분명 거의 반 강제적으로 불국사와 석굴암에 대해서 설명했을 것이다.

내가 석굴암으로 오는 동안 곧잘 외국인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이 보고 간 것은 거짓말 같은 석굴암이다.

실컷 설명해 놓고는 보여주지도 않는다.

이건 강도나 다름없는 행위다.

저리도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과학적이고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종교적 속내가 저 유리벽 안에 있으려니 하고 내려오니 허망함이 밀려온다.

이게 어디 나 만에 심사일까 싶다.

 

-. 토함산 산행

쾡한 맘을 달래려는 심사로 토함산 정상으로 산행을 시작하였다.

가파르지 않는 잘 닦인 산길을 따라 오르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미술사학자가 아니다.

더더군다나 사학을 전공한 전문가도 아니요, 특별한 심미안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남달리 고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아, 많다할 수는 없어도 제법 책도 읽었으며 예술품에 대한 감각을 기르기 위해 스스로에게 많을 질문을 함으로써 얻어내기 위해 무척 애를 쓴 탓에 그 묘미는 아니더라도 오랜 시간을 그곳에 머물며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어느 학자는 책에서 그랬다.

아는 만큼 보게 되고, 보는 만큼 느끼며, 느낀 만큼 감동을 받는다고 하지 않던가!

오늘 난,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또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느껴지지 않는 감동을 애써 찾으려는 억지는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산행 내내 질겅질겅 씹으며 걸었다.

첫 번의 답사로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쌓아온 것을 다 이루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도 곰곰이 곱씹었다.

볼 것 많아 일주일은 걸려야 그나마 대충 볼 수 있다는 경주를 2일간 시간 내어 찾은 길인데 산행이나 하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워지기도 하지만 한 숨 쉬어가는 가는 것도 다음 길에 좋을 듯싶어 산 정상을 재촉하여 올랐다.

 

 

-. 경주박물관

산정상이야 어디든 좋지 않은 곳이 있으랴! 토함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는 정경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맘을 편케 한다.

저 멀리 푸른 동해바다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화물선 하나가 지나고 있었다.

산 정상에 오른 기념으로 사진 몇 장 찍고 내려오려는데, 볼 것 많다는 경주인데도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지는 것이다.

아내와 가볍게 아무것도 든 것 없이 몸만 달랑 경주에 왔다.

애써 무얼 보아야지 하고 염두에 둔 것도 없고 특별히 오늘 여행을 위해 계획을 세워보지도 않았고 그에 따른 정보를 찾는 노고를 한 적도 없다.

그런데 내 삶에 50년을 넘기고도 찾지 못했던 경주 아니던가?

생각이 깊어질수록 무거워지는 가슴을 달래야 했다.

그렇담 경주를 가장 다양하게 알 수 있는 곳이 어디던가? 그런 곳이라면 박물관이 가장 나을 성 싶어 경주박물관을 찾아 다시 경주시내로 들어왔다.

간단한 절차를 거쳐 박물관에 이르니 제법 사람들이 많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서울 국립박물관과 달리 경주 국립박물관을 전시된 유물이 그리 다양한 것은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이 경주지역에서 발굴된 출토품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양성은 다소 떨어져도 전시된 유물은 참으로 많았다.

금은 세공품이 눈을 현란하게 하는데 익히 들었던 누금세공기법, 양각기법, 상감기법 등으로 세공된 귀걸이며, 목거리, 혁대 등이 전시되어 있어 한참을 눈요기하였다.

그 외, 남방 문물과 교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게 하는 토우들이나 유리구슬 하나하나를 다 보고 나니 날이 저물어 간다.

 

-. 에밀레종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신라천년의 불후의 명작이라고 극찬에 마지않는 성덕대왕 신종을 보았다.

실제로 타종하는 에밀레종의 음향을 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언론을 통하여 적지 않게 들었던 것이 에밀레종 소리다.

너울너울 거리는 듯한 공명소리는 내게 진한 여운과 감동으로 남아있다.

비록 실제 들었던 음향은 아니지만 말이다.

오늘 나는 직접 그 종을 눈앞에 두고, 눈으로 매만지고 있다.

옆에서는 비록 실제 종소리는 아니지만 녹음하여 들려주는 종소리가 일정한 시간간격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병들어 이제는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없을 거라는 우려가 있어, 나무로 괴어 올려진 종은 지금도 거대한 모습으로 숱한 풍파 헤치고 저기 있는 것이다.

여기 경주에 오면 천년이란 세월이 그리 길어 보이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은 에밀레종을 보고서였다.

 

-. 달빛어린 감은사

박물관에서 나머지 유물은 스치듯 훑어보고 서둘러 동해안으로 접어드니 감포로 향하는 산길이 나온다.

가야 길은 바쁜데 길은 험해 자꾸만 지체하니 아무래도 해지기 전에 감은사에 닿기는 틀리듯 싶다.

어찌어찌하여 겨우 감은사 주차장에 이르니 벌써 해는 서산을 넘어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어슴푸레하여 인적이 없을까 했는데 그래도 몇몇 사람이 어둠을 등에 지고 감은사탑을 둘러보고 있었다.

문화유적 답사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행위처럼 보이지만 어둠에 갇힌 세월에 세월이 언 져진 탑은 어찌나 아름답고 고즈넉한지, 아마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던 그때 그 사람들만이 알 것이다.

달빛이 처연히 내리는 겨울 밤, 달빛이 감싸 안은 깨진 탑의 아름다움은 나를 자꾸만 붙들었다.

내려오다가는 뒤돌아보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달을 보다가는 또 탑을 보고, 탑을 비켜 떠 있는 달을 보다가는 저만치에서 보고 또 보았다.

그렇게 쌍 탑에 깃들어 있었을 사연과 연륜은 또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고 생각해 보았다.

역시 그것이 무엇이든 분위기와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1500년 전 달이 휘황창 떠오른 언제쯤 모닥불 피워놓고 탑을 돌며 미래를 기원하는 청춘 남녀를 생각하며 아내와 나는 몇 바퀴 돌고서 내려왔다.

 

-. 감은사와 불국사

감은사은 감은사라 하지 않고 감은사지라 한다.

다시 말해 절은 간데없고 절터만 남았기 때문이다.

무너지고 깨진 탑만 남아 있다가 그나마 찾는 이를 위해 단장해 놓아 지금에 이른 것이다.

감은사지 탑은 그 규모가 모전탑이 아닌 석탑으로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클 것이다.

크기가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그 솜씨는 정교하다.

맞는 말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조각품은 커질수록 서툴러진다고들 말한다.

실제로 그렇다하더라도 감은사지 탑은 그에 포함되지 않는듯하다.

말로만 듣던 감은사는 예사롭지 않았다.

그와 달리 불국사는 옛 모습과 얼마나 비슷하거나 닮았는지 몰라도 말끔히 복원을 해 놓았다.

둘 다 꼭 같이 도시와 멀리 떨어진 곳에 지어진 불사이지만 그 규모에 있어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감은사지의 탑은 불국사의 그 규모를 비견할 수 있으리만치 크고, 석가탑과 다보탑과 비교가 될 만큼 정교하고 세밀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탑 하나로 불국사에 모든 것을 받아내는 구나 싶었다.

, 낮이 아닌 보름 달빛이 내리는 밤에 본, 감은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 해맞이

동해안 어디쯤 아담하고 깨끗해 보이는 여관을 찾아 나서며 저녁 식사 때울 식당을 눈여겨보았으나 그저 회집만 끝없이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비린 생선과 날 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 습성 때문에 그것들 외에 마땅한 식당을 찾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내륙으로 한참을 들어가 간신히 저녁을 때우고, 바닷가 여관에 묵기 위해 들어서니 초저녁이 지났다.

동해안 그것도 태평양 끝자락에서 이는 파도소리가 생생히 들이는 여관에 들어 세상모르게 잠들었다가 아내가 깨워 일어나니 아침 해가 이제 막 햇무리를 뿜고 있었다.

장엄한 해돋이를 여관 창문열고 맞이한 다음, 서둘러 짐을 꾸려 대왕암으로 갔다.

그 아침인데도 전망 좋은 곳에는 사람들이 나와 주차비를 받고 있었다.

누구하나 구경나온 사람은 없고 내 아내와 나 그리고 3명의 관광객을 제외하면 텅 빈 바닷가인데, 인심 좋게 열어놓았으면 얼마 좋을까 싶었다.

대왕암에 깃든 옛 이야기들과는 사뭇 다르게, 그저 바닷가 조그만 돌 섬 일뿐인 대왕암을 느낌 없이 바라보노라니 갈매기 떼와 철새 떼들이 무리를 지어 이른 아침의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런 아침 하늘을 목 아프게 쳐다보다가 돌아서 다시 경주시내로 향했다.

경주시내에 있는 신라 유물을 보기 위해서 어제 넘었던 산길을 따라 보문단지를 지나 안압지를 향해 달려왔다.

남들 다 찾는다는데, 천 년 전 신라 사람들의 손 떼가 묻었을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현대판 관광단지인 보문관광단지를 미끄러지듯 지나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경주 재래시장으로 갔다.

 

-. 경주 재래시장

그 숱한 볼거리를 뒤에 두고 재래시장은 찾는 건 그곳에 물건이 싸고 경주사람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선 모든 것이 다 있다.

물론 물건도 많지만 사람들도 많다.

또 사람의 모습 또한 제각각이지만 원래 경주에서 터 잡아 살아오던 사람들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재래시장이다.

경상도에 왔는데도 관광지 주변만을 맴돌았던 나로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그다지 들을 수가 없었다.

이곳 경주역 주변 재래시장에 오니 말 그대로 경주사람들의 혼이 묻어나는 말투를 들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맛나는 점심도 맛있게 먹었다.

재래시장에서 이것저것 주전부리도 하고 물건도 사가지고 안압지로 향해 슬금슬금 다가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안압지 주차장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쳐다보니 입장료가 2,000원이란다.

얼마 전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를 토대로 복원작업을 했다고 들었는데, 새로 지은 건물 보자고 입장료 내기가 아까워 자동차만 세워놓고 반월성으로 향했다.

 

-. 대능원, 안압지, 첨성대, 반월성

거대한 토성으로 둘러싸인 반월성으로 들어가니, 예전에는 으리으리하고 찬란했을 신라 왕궁은 간데없고, 남은 것은 빈터와 잘 자란 소나무가 전부다.

연기 그읆으로 집이 상할까봐 숯만을 사용했다던 팔자 좋은 귀족들만 모여 사는 왕경(王京)에 자리 잡은 신라왕궁 반월성, 토성만이 그 화려했던 왕궁이 있었던 자리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예전에는 민가가 있어 왕궁이었는지 모를 만큼 폐허였던 자리에, 그나마 표지판이 있어 우리는 그곳이 왕궁 터인지를 알 수 있다니 무상하기 그지없다.

볼 것 없는 반월성을 반쯤 지나 대능원으로 가는 길이 나있어 나오니, 반월성에 대한 느낌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허망하다.

이름도 멋스런 반달모양이라 해서 반월성이라 했다는데, 그 달빛이 내리는 반월성 안에서는 수많은 은밀한 일이 있었을 것이고, 또 정치적 야망으로 죽어 갔을 것이며, 누구도 모르는 음험한 사랑도 있을 것이다.

지금 보이는 저 아무것도 없는 허허로운 벌판에서, 일어 오르는 안개 같은 상상으로부터 빠져나와 바라보니 대능원이다.

실제로 저 거대한 무덤이의 주인이 누군지는 몇 개를 빼고는 알 수 없다.

대능원으로 가다보면 경주김씨 시조의 난생설화(卵生說話)가 깃든 곳이 있는데 그런 연유에서일까?

이곳이 김 씨들의 근거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라는 박 씨로부터 왕가의 기원이 시작된다.

그러다 석씨가 왕이 되었다가는 다시 박 씨가 왕이 되고 이내 김 씨들의 왕가로 이어져 내려온 왕국이다.

신라 왕족 중에 김 씨를 빼면 고대의 왕치고는 왕이랄 수 없는 왕이었다.

6부족으로 구성된 신라 씨족 사회는 박 씨가 왕이었던 때는 박 씨들의 근거지가 왕궁이었을 터, 석씨라면 또한 석씨 근거지가 왕궁이랄 수 있었을 것이며 지금의 반월성은 김 씨들의 근거지 아니었을까?

한 나라에 왕족이 세 가문으로 이루어진 예가 신라 말고는 없다.

조선의 예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낯설다.

그러나 서양의 예로 보면 이상스러울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동서양의 문화가 넘나들던 유목민의 후손으로 알려진 신라 귀족층이라고 상정해 놓고 보면 그리 이상타 할 수는 없는 것이기도 하다.

거대한 능원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돌아 나오며 생각하니, 누구의 묘인지도 모르는데 크기는 크다는 생각만 든다.

크다는 생각 외는 별다른 느낌이 없는데, 이는 이 묘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의 능이라고 알려진 미추 왕릉이 있어, 그나마 이야기를 제공해주지만 나머지 능은 그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박물관으로 다 옮겨진 상태로 그저 침묵이 있을 뿐이다.

대능원에서 나와 반월성에서부터 멀리 보이던 첨성대로 행했다.

첨성대는 멀리서 보면 공짜, 가까이서 보면 500원을 내야한다.

500원을 내고 들어가서 찬찬히 들여다볼까 아니면 멀리서 그 유려한 첨성대의 곡선을 감상할까를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나와 아내는 멀리서 관망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첨성대가 무어 볼 것이 있던가!

역사가 깊고, 그 쓰임에 대한 상상이 어지럽고, 대를 구성하는 돌들의 의미가 의미심장하여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추정하기를 천체 관측을 위한 누대라는 것인데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 때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외에 첨성대가 무엇이었는지는 순전히 상상에 맡겨진다.

이름으로 보나 그 형태로 보나 천체 관측 시설 이외에 다른 설명이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제사를 위한 시설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누구도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첨성대를 지나 시들어 꽃이 없는 꽃밭을 걸어 나오며 생각해보니 천년 고도(古都) 경주는 대표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

불상과 탑 그리고 능이다.

그 외에는 볼만 것이 있다고 할 수 없어 보인다.

시간을 두고 깊게 들여다보지 않거나 미리 공부하지 않으면 다 그렇고 그렇다.

그래서 난 그런 반복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남산으로 향하기로 했다.

 

경주 시가지를 지나며 경주에는 최 부자가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신라 때에는 왕국 전각과 각종 관청들이 즐비해 있었을 곳에 지금 최 부잣집이 있다.

원래 최 부자 집이 있는 곳은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이 있었던 자리로 알려진 곳으로 신라시대에는 민가가 없었을 곳이다.

아마도 후대 어느 때쯤 최 부자라는 분이 재산을 일구어 그곳이 어딘지 아랑곳하지 않고 일반 민초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지금의 대능원 주변에 집을 지었으리라.

대능원이라 하지만 예전에는 나무가 아무렇게나 자라고 그 주변에 민가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지금은 문화재라 하여 다 이주시키고 빈터로 남아 있지만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그저 그런 촌락이었던 셈이다.

경주 최 부자는 잘려진 대로 그냥 부자로 호의호식하며 살아간 사람들이 아니라고 전()한다.

그런 최 부자의 가훈은 많은 사람들, 특히나 이 시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걸 보면, 요즈음 사람들의 삶이 누구에게나 녹록치 않나 보다.

얼마쯤 자동차를 달리니 포석정을 지나 삼릉공원에 이르렀다.

 

-. 경주 남산 소나무 숲

삼릉은 아달라 이사금, 신덕왕, 경명왕능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삼구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전혀 다르게 나오고 있어, 실제로 그분들의 능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달라 이시금은 신덕왕과는 적어도 600년 이상 차이가 나고 있어, 많은 학자들로부터 알려진 이러한 이야기를 부정하게 만들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위 세분의 왕이 모두 박 씨여서 그렇게 알려진 것은 아닌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삼릉에 대한 경위야 어떤 것이든 능 주변의 소나무는 정말이지 아름다고 평온하게 한다.

내가 현실 세계가 아니라 딴 세상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소나무 숲인데 아내는 경주에 그 어떤 유물도 또 그 어떤 경관도 이 소나무 숲만 못하다고 속삭인다.

그런 소나무 숲을 한참을 지나 경주 남산 산행을 시작하였다.

그 많은 신라 유물을 주변에 두고 뜸금 없는 산행이냐고 할지 모른다.

그도 초행길에서 말이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오락방송을 이곳에서 촬영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한다.

내가 산행을 하는 동안 오락방송에서 이곳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경주 남산에는 어림잡아도 국가가 지정한 보물만도 20개가 넘는다.

그 외, 사적까지를 포함하면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경주 남산 그 자체가 문화재로 채워진 느낌이다.

그래서 신라 천년을 보거나 느끼려면 경주 남산에 갈일이다.

그러나 내가 경주 남산을 찾은 이유는 그런 문화재를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남산에 오르며 보았던 조각품들은 별 느낌도 없었고, 볼 만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남산에 오른 그 까닭은 금오봉에 올라 신라를 만들어온 그 근거가 된 전체 윤곽을 느끼려는 것이었다.

소나무 숲길을 계속에서 오르니, 정상에 다 이르도록 소나무 숲길이 계속되고 있었다.

금오봉 정상에 올라 전체 경주 시내를 바라보노라니 제법 너른 농경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원래 이곳에는 토착 원주민들이 소박하게 삶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 마을에 외지 사람들이 바다를 통해 들어왔을 것이다.

흉노왕족 중에 중국 한()나라 노예로 잡혀 와서, ()나라 무제(武帝) 때 반란에 공을 세운 김씨 일족이 무슨 연유인지 이곳으로 이주하여 왔다고 한다.

또 부여계 유목민이 이곳으로 왔다고도 한다.

선진문물을 지닌 이들이 6개 부족으로 나누고 지배를 시작한 것이 신라에 기원이라고 하는데 지금 내가 내려다보는 저 곳이 그런 역사의 현장이다.

저 너른 농토도 사람이 많아지면 먹고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테고, 그러니 이웃 고을에서 빼앗아와야만 했을 것이다.

이웃 고을에서 재물을 빼앗으려면 사람 수도 많아야 하고 이를 뒷받침할 체계가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빼앗고 나면 반드시 반격을 받기 마련이니 그 수성(守成)도 잘 해야 한다.

이것이 그들이 고대 국가로 발전해가는 토대가 되었을 터이다.

전망 좋은 산 정상에서 나는 그 많은 유물 내버려두고 이곳으로 잘 왔구나!” 싶었다.

해가 기울어질 쯤에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향하며 경주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경주에 대해서는 교과서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고, 수많은 서적에서도 그렇듯 찬양일색이다.

불국사와 석굴암 등 경주에 있는 유물에 대해 너무나 과대한 설명을 들어온 것은 아닌지에 대해 곰곰이 곱씹어 보아야 할 일이다.

솔직히 엄청나게 좋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 그런 거 아니네!”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특별한 역사적 지식과 심미안 없는 범인(凡人)인 내게, 경주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기 십상이다.

누구도 경주 다녀와서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혹은 볼 것이 많아 다시 가야겠다고 말하는 이를 내 주변에서 듣지 못했다.

왜냐면 내 주변엔 그저 평범한 사람들만 있기 때문이다.

경주를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거의 대부분이 이런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에게 볼거리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석양이 서쪽에서 시작되어 경주 뜰을 뒤덮고 있는 경주를 뒤에 두고 서둘러 집으로 향해 달려갔다.

내 생애 첫 경주 방문은 이렇게 스치듯 지나갔다.

 

201216일과 72일간 경주를 하고 돌아와 감정에 맡기여 쓴 글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글이니 가볍게 읽고 넘기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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