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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08-17 조회수 : 5,021
제 목 : 2011년 여름 휴가 (제주여행 1일째)

2011년 여름휴가 (제주여행 첫째날)

1. 첫째 날

새벽에 일어나 준비 끝에 서둘러 출발하니 나 말고도 8월의 더위를 피해 강으로 바다로 산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이를 두고 여름휴가라고들 하는데 사실 올해 더위는 별것이 아니었다.
2011년 6월 중순에서 시작된 비가 7월말이 다 되도록 계속되어 힘든 더위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은 3일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정해진 일정에 따라 모두 피서 떠나는 사람들로 고속도로는 만원이라고 한다.
그들의 한 축에 우리가족도 끼어 떠나니 휴가라 하여 가족 전부가 떠난 여행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종종 가족 전부가 하루 일정으로 여행을 하기는 했어도 긴 기간 동안 가족 전부가 함께 여행하는 것이 쉽지 않아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 끝에 서둘러 출발하려니 지고 떠날 짐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7시에 출발하려니 미처 먹지 못한 아침도 준비하여야 하고 점심거리도 준비하여 떠나려니 준비할 것이 사뭇 많은 것이다.
아내가 새벽에 일어나 준비해 놓으니 자동차 짐칸에 가득이다.
 
밀릴 거라 지레 짐작하여 출발한 길이어서 인지 아니면 평일이어서 인지 고속도로는 한산하여 별 어려움이 없었다.
8월 2일에 출발하여 완도 항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여객선으로 제주로 이동하여 제주에서 3일간을 보내고 다시 여객선으로 나와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5일간의 휴가여행의 시작이다.
 
-. 완도 항
여객선 출발 시간을 착각하여 2시간이나 빨리 완도 항에 도착하느라 휴게소에서 쉬지도 못하고 줄곧 달려 완도 항에 도착하니 출발시간 40분 정도 남았다.
서둘러 선착장에 도착하니 출발시간이 1시 반이 아니라 3시 30분에 출발한단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무리한 속력으로 달려오는데도 꾹꾹 참아오던 아내는 아애 어의가 없는 모양이다.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아서 인지 차라리 언급도 하지 않는다.
완도 항으로 오던 길 주변에 대흥사가 자리한 두륜산 괴암괴석의 수려한 경관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마구 달려 왔으니 내가 생각해 보아도 한심하다.
여객선 안에서 마실 맥주며 주전부리를 미리 준비 해두었지만 그래도 맥주에는 치킨이라며 튀긴 통닭을 사자며 조르는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시내로 나가 사들고 여객선을 향하는데 완도 항 맞은편에 무인도 하나가 보인다.



                                                                           완도항 무인도인 주도

넓이가 17,355㎡로 작은 섬이지만 숲이 울창하여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듯 했다.
천연기념물 28호인 ‘주도’라고 한다.
하늘에서 보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인데 바로 여의주에 해당하는 부분이 ‘주도’라고 한다.
급하게 지날 적에는 못 보았는데 시간이 여유로우니 아름다운 무인도 특유의 자태가 참으로 아름답다.
부모님이 제주로 주거지를 옮긴지 벌써 40년이어서 제주도 방문길에 항상 보아왔던 무인도이건만 볼 때마다 신기하고 아름답다.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 저토록 아름다움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싶으니 다행스럽고 한편으로 답답하다.
저편 섬으로 난 다리가 생기고 번듯한 길이 나니 이용하는 사람들이야 좋을지 몰라도 경관은 흉측하기가 그지없다.
간혹 지나는 나그네로서 이리 말하면 터 잡아 사는 분께 죄송한 일지만 완도 항을 찾을 때마다 달라지는 모습이 여간 안타까운 것이 아니다.
개발에 붐이 이곳에도 일어 차량이 다니는 도로를 만든다하여 지금도 마구 파헤치고 있어서 예전에 보던 시골 풍경은 사라져 없어지고 있다.
수도권에서나 보던 도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어서 마음 둘 곳이 하나 둘 없어진다 생각하니 서글퍼진다.

제주에 계신 부모님의 “이제 출발하였느냐”, “배는 탔느냐”며 잦은 전화 통화는 모처럼 찾는 아들 식구의 방문이 기다려지는 눈치시다.
멀거니와 비용도 만만치 않아 1년에 한 번도 제대로 찾아보지 못하는 아들인지라, 이번 방문이 무척 반가우신 모양이다.
둘째 아들로 태어나 자식노릇이라도 제대로 하는 건지 전화올 적마다 미안함이 저려온다.
여객선 터미널에서 준비해간 점심을 대충 마치고 승선을 하니 날은 맑아 햇볕으로 견디기 힘들게 한다.
일찍 도착한 탓에 일찍 승선할 수 있어 전망 좋은 창 쪽으로 자리하고 앉아 망망대해로 출발하니 덥던 날씨도 더운지 어쩐지 느낌도 없이 시원하기만 하다.

-. 배 안에서
오른 쪽에는 보길도, 왼쪽에는 청산도가 있어도 여객선을 타고 한참을 바다로 나와 바라보니 그저 그런 섬일 뿐이다.
영화 서편제 촬영지로 알려진 이후 청산도엔 여행객이 모여든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영화 서편제에 나오는 돌로 쌓아 만든 돌담길을 따라 난, 유채꽃 흐드러지게 핀 그 길이 저기 저 청산도에 있다 하니 서편제를 본 사람이라면 가보고 싶기도 하겠다 싶다.
오른쪽 보길도는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이라고 알려진 고산 윤선도가 기거했다는 섬인데 그 오랜 이야기들이 서린 곳이라지만 멀리서 보는 탓에 별다른 느낌도 아름다움도 없다.
고산 윤선도는 저기 보이는 보길도 부용동 정자에 앉아,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이 바다 어디쯤에 있었을 고기잡이배를 바라보며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읊조렸을 것이다.

 동풍이 건듯부니 물결이 곱게닌다
 돛달아라 돛달아라
 동호를 돌아보며 서호로 가자구나
 찌그렁 찌그덩 어사와
 앞산이 지나가고 뒤산이 나아온다.

 우는 것이 뻐꾹이인가 푸른 것이 버들숲인가
 배저어라 배저어라
 어촌 두어집이 안개속에 들락날락
 찌그렁 찌그덩 어사와
 마알간 깊으늪에 온갖고기 뛰노나다.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중에


                                                                                                   멀리보이는 보길도

저쪽에 보길도와 청산도가 있거니 하고 지나쳐 점점 바다로 접어드니 이젠 멀리에 띄엄띄엄 섬만 간혹 보일뿐 그저 바다에 바다만 보인다.

사가지고 간 맥주 꺼내고 통닭 꺼내, 딸과 마시는 맥주는 얼마나 맛있던지.
“못 먹는 술이면서도 술 마시며 맛없다 하신 적이 없네요!”라는 이야기는 아내에게서 매양 듣는 말이지만 어쨌거나 오늘은 그 맛이 다르다.
옆 사람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며 맥주 한 캔에 거나해져 딸들을 데리고 갑판으로 나오니 기분이 그만이다.
여객선은 제법 커서 6,300톤 넘는 엄청나게 큰 배다.
예전 내가 제주에 드나들 때에는 ‘안성호’와 ‘가야호’가 목포와 제주을 왕복하고 있었다.
400톤, 600톤 남짓 되는 작은 배여서, 지금 보이는 저 너울 정도만 칠라치면 너무 흔들려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지금 생각하면 그런 시대도 있었나 싶지만 아련한 추억 속에 그 배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사람도 사람이려니와 배도 그 수명이 다하면 사라져 간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그 작은 배들은 추억으로 남아 그 많던 이야기를 기억 저편에 남겨두고 있다.
좁은 여객선 속에서 8시간을 같이 지내다 보면 아무나 친구가 되는가 하면 친한 사람처럼 옆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시끄럽고 쾌쾌하고 고약한 냄새 속에 견디기가 쉽지 않기에 그렇다.
지금은 여객선도 크고, 시설도 좋아 깨끗하고, 시원한 에어컨이 있어 쾌적하니 예스러운 작은 배의 추억을 잊게 하지만 내겐 그래도 그 힘들던 옛 추억이 아련하다.
 

보아도보아도 물뿐인 물길을 얼마나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도시의 건물 숲에 사는 사람의 눈에 망망대해의 바다는 속마저 시원하게 한다.
그래도 물뿐인 바다를 오랜 시간 쳐다보기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여~어~가 태평양이라고 생각도 해보고 지도를 꺼내 손가락 짚어보지만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다.
그저 심심한 잔물결만 무한정 출렁일 뿐이다.


                                                                            끝없이 펄쳐진 바다

여객선 중앙 홀 대형 모니터에 현재 여객선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항로를 표시해주는 GPS에 연결된 지도가 있다.
지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지금 보이는 저 섬이 무슨 섬인지 지도에 표시되어 있으니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그러던 차에 여객선 조타실을 공개한다는 방송이 있어 딸내미들과 조타실을 찾았는데 예전 내가 조선소에 일할 적에 보았던 그런 조타실이 아니다.
영화에서나 보았던 조타실은 손잡이가 많이 달린 운전대를 있는 힘 다해 신나게 돌리던 것이 조타실에 대한 지식의 전부였다.
조선소에서 근무할 적에 대형 선박에 올라 보았던 운전대(조타)는 손바닥만 한 둥근 운전대에 조그만 손잡이 4개가 전부였다.
그런데 오늘 본 여객선 조타실에 운전대는 마치 오락실 자동차 게임기 운전대 같이 생겼는데 그도 항해사가 전혀 조정하고 있지 않았다.
우주선처럼 미리 입력된 좌표에 따라 자동으로 항해하고 있다.
조타실에 항해사는 별다르게 하는 일이 없었다.
창가에 올려 진 많은 화분에 물이나 주는 것이 일과란다.
“이거야 원!”
세상 좋다지만 이 큰 배가 지 알아서 간다니 신기하다.

항해사라는 분이 조정은 하지 않고 구경 온 손님에게 설명해 주느라 분주한데 마침 옆에 지나쳐 가는 홀로 있는 섬이 무슨 섬이냐 내 딸내미가 물으니 사수도란다.
사수도는 전라남도 완도군과 제주도 북제주군이 서로 자기네가 관할하는 섬이라 주장하여 분쟁이 일어난 무인도이다.
완도 사람들은 장수도라 하고, 북제주 사람들은 사수도라 한다.
분쟁 끝에 결국 헌법재판소에 그 결정을 요구했는데 헌법재판소에서는 북제주군에 속한다고 결정하여 지금은 북제주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한다.
누구 하나 처다 보지 않던 무인도를 서로 자기 땅이라고 우겨서, 서로 의좋게 해결하지 못해 제삼자의 손을 빌어 해결했다니 독도 일이 생각난다.
가끔 해녀들이 물질을 위해 찾는 곳이라는데 저 사수도에서 하루 밤만 지내보았으면 좋겠다.

사수도를 지나니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잔물결만 출렁이는 바다만 보이니 왠지 두려움마저 밀려온다.
그저 파란 바닷물의 세상이다.

-. 멀리 보이는 저 섬 제주
이제 막 여객선 여행의 지루함이 밀려올 쯤에 저 멀리 제주도 땅이 희미하게 그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리 가족은 내가 12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11월에 제주로 이사를 왔다.
난 12살 되기 전까지 고향을 떠나 가본 곳이라곤 강진군 성전면 외갓집이 전부였다.
그것도 고작 2번이다.
수인산으로 둘러 처진 고향 동네 외에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있다면 장흥 읍내가 전부였다. 
장흥 읍내가 아닌 세상은 책으로 보았고 이야기로 들었을 뿐이다.
그런 내가 상상해보지도 못한 제주로 이사를 간 것이다.
바다도 이사 가던 날 처음 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하여 제주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지만 내가 제주에 있었던 기간은 그리 길지는 못했다.
7년이 전부였지만 부모님은 벌써 40년을 넘게 정붙여 살고 계신다.
내가 오늘 제주로 향하는 이유도 부모님이 제주에 계시기 때문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솔직히 내 능력으로 제주도로 휴가가기가 만만치 않다.
내가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도 이곳에서 마쳤으니 나름 추억도 많고 기억해둔 일도 많을 터이지만 실상 나에게 제주의 삶은 언제나 타인이었다.
난 유독 제주에 정붙이지 못하고 고향에 대한 향수로 고통스러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마치 탈출하듯 제주를 떠나 타지에서 생활한지도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이후 제주에 머문 기간이 불과 며칠이 전부다.
제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었건만 이리도 낯선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를 일이다.
선상에서 제주가 보이는 바다에 이르면 설레임이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몰려온다.
내 나이 벌써 50이 넘었는데도 그런 내 감정은 여전히 같은 것이어서 남몰래 감정을 누르고 있어야 했다.

긴 여행 끝에 그것도 바다를 건너 여객선 터미널에 이르면 누군가 기다려 반갑게 맞이해 줄 때 만큼 반가울까!
제주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막내 동생이 기다리고 있다가 여객선에서 내리자마자 “형”하고 부르니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동생이 가지고 온 자동차를 타고 제주시내에 들어서니 한 아름이나 되는 종려나무가 우리를 반긴다.
제주에 오면 내가 다른 세상에 왔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 종려나무가 아닌가 싶다.
탑동 매립지에 자라고 있는 종려나무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어도 우리가 제주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탑동을 지나 신제주로 향하는 공항로에 접어들었는데 도로는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데 신제주 연동은 천지개벽한 것처럼 변해 버렸다.
마치 내가 외국에 온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낯 설은 건, 처음 제주에 올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이방인인가보다.

아버님이 사십이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이곳, 제주로 이주하여 40년을 줄곧 살아오셨다.
고향에서 살기가 그럭저럭하셨다면 어찌 물설고 낯 설은 이곳 타향으로 오셨을까?
호구지책도 되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아 근근이 살아오다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을 때쯤에 도망치듯 이곳으로 오셨으니 70년대 초의 우리나라의 여느 시골마을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다를 바 없이 고향 버리고 타향으로 이주하신 것이다.
이분들은 특이하게도 서울이나 공업도시가 아니라 제주로 향한 까닭은 아마도 아버님의 여린 성품 탓이리라.
그런 부모님 슬하에 자라고 성장한 나로서는 제주로 이주 이후 항상 쪼들리고 넉넉하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그다지 풍파 없이 무난히 내 앞가림할 수 있도록 성장한 것이니 그 공은 부모님의 노고이고 고마움이다.
요즈음 부모님은 연세 탓도 있겠지만 시름시름 앓더니 이제 어머님은 누어 계시는 경우가 많아 가슴 아프게 한다.
평생 그 험한 농사 노동으로 살아오신 분이시니 그 연세 되시도록 몸성히 계시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시다.
여생이라도 고통 없이 맘 편히 사시기를 자식으로서 기원할 뿐, 멀리 사는데다 덜어 드릴 여유도 없으니 자식으로서 죄스럽기 그지없다.

부모님의 건강에 대한 걱정과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는 죄의식으로 제주의 첫날밤이 시작되었지만 형님 내외 그리고 동생 내외와 내 가족 모두 모여 저녁 식사를 하며 나누는 이야기꽃으로 밤이 깊어 갔다.
부모님이 계시는 마을은 내가 청소년기와 청년기 보낸 곳이다.
짧지 않은 기간을 이곳 마을에서 보낸 나로서는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다.

수도권이나 뭍에는 연일 비가 와서 홍수다 산사태다 하여 아우성이라지만 이곳 제주는 연일 무더위로 고생이라는 아버님 이야기를 들으며, 마당에 모여 별이 초롱초롱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니 내가 이제야 정말 제주에 왔나보다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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