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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08-17 조회수 : 4,236
제 목 : 2011년 여름 휴가 (제주여행 4일째)

2011년 여름휴가 제주여행기

4. 넷째 날

일에 지치고 일에 매달려 살아온 내가 갑자기 한없는 한가한 휴가를 보내고 있자하니 이도 부자연스럽다.
여름휴가도 4일째 접어드니 주어진 한가한 시간이 부담스러워진다.
여름휴가를 제주에서 보내기로 결정하고 나서 일정을 세세히 계획했어야 맞지만 휴가지가 부모님 댁이고 보면 변수가 많아 별다른 정함이 없이 무계획적으로 지내보는 것도 좋을 듯하여, 생각 없이 왔는데 4일째가 되고 보니 막상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해 진다.
아이들과 아내는 오늘은 어디로 갈지 기대한 모양이지만 딱히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제주 첫날 한라산 산행이 인상 깊었던 것도 있고 예전에 한라산 영실코스로 올라가면 얼마 오르지 않아 영실 괴암기석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거리도 짧고 하니 그리로 가기로 하였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 한라산을 횡단하는 도로를 또 하나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도로를 뚫었다하여 작은 제주 바닥이 술렁이던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해발 1,100고지까지 올라간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자동차로 달리다보면 경사가 심하여 조심하지 않으면 지나기가 여간 까다로운 길이 아니다.
제주를 방문하여 부모 댁에 갈 적마다 집에 가까운 눈 쌓인 한라산을 찾을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1,100도로를 따라 올라 오리목 산장을 자주 찾곤 했었다.

오늘 느즈막에 출발하여 1,100도로를 따라 1,100고지 휴게소에 이르니 더위는 형언하기 어려운 기세다.
날씨와 여행의 피곤 탓인지 가족 모두가 기대가 섞인 모습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슬렁거리며 휴게소 맞은편 습지로 향했다.
사람들이 통행하기 쉽도록 나무널판으로 길을 만들어 놓아 그 길을 따라 걸어가노라니 이 고지에 습지라니 신기하기도 하다.
아마도 이 도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습지 주변으로 얼씬거리는 사람들은 없었을 테고 단지 갈증을 해소하러 오는 동물들의 안식처 역할을 하였을 곳이다.
수생식물과 올챙이 만 보이기에 혹시 물고기가 있을까 찾아보니 보이지 않는다.
이런 습지가 있으니 사람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여보, 만일 이곳에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이라면 나와 단 둘이서 살면 안 될까요?”하고 물어보려다 꾹 참았다.
혹시 “아니요!”하고 대답하면 얼마나 무참해질까 하고, 지레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뭐랄까? 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내에게 빚지고 사는 듯한 느낌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나를 만나 지지리 고생만 시키고, 맘 편하게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꾸역꾸역 밀려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과 다르게 특별히 맘 아프게 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지레짐작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소심남이 아닐까 하는…….

예전에 내가 이곳에 올 때는 차량이 없어 1,100도로에서 내려 영실 안내소까지 한참을 걸어 와서는 입장료를 내고 또 2.4㎞를 또다시 걸어 올라가면 영실 휴게소가 나오는데 너무나 먼 거리였다.
지금은 영실 휴게소까지 자동차로 올라오니 편리하기도 하지만 그리 경사진 등산로도 아닌데 걸어 올라와도 좋겠다 싶기도 하다.
그래도 내가 가족을 데리고 이곳에 온 까닭은 자동차로 영실 휴게소 까지 갈 수 있어서 이니, 생각과 행동이 영 딴판이라는 생각의 간사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짧은 거리이고 경치는 그만이니 이만한데도 없다 싶고, 아이들에게 한라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있어, 자동차로 휑하니 올라오니 편하고 간편해서 좋다.
영실 휴게소에 도착하여 좋은 자리에 주차를 하고는 가야할 길을 쳐다보니 영실의 괴암괴석이 눈에 들어온다.

영실기암에 애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하여 이곳에 적어 둔다.
한 어머니가 오백 아들을 낳고 살았는데, 흉년이 든 어느 해에 아들들에게 양식을 구해오라고 하고서는 아들들을 위해 죽을 쑤고 있었다 한다.
그러다 잘못하여 그만 죽 솥에 어머니가 빠져 죽고 말았는데, 어머니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는 아들들은 돌아와 맛있게 죽을 먹었다고 한다.
맨 마지막에 돌아온 막내아들은 죽을 뜨려고 솥을 젓다가 이상한 뼈다귀를 발견했는데 바로 어머니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막내아들은 통곡하며 그 길로 제주 서쪽 끝의 고산리 앞바다로 가 바위가 되었고, 나머지 형들도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슬퍼하며 울다가 바위로 굳어져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바람이 부는 날이면 이곳 나무와 바위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마치 그들의 넋 인 양 처절한 울음소리로 들린다고들 한다는데 해서, "신령스러운 골짜기" 라 불렀다 한다.
이후 사람들은 신령스러운 힘으로 제주도를 지켜 준다고 생각했었으며, 이곳의 기이한 바위는 오랑캐를 물리쳐 주는 장군의 형상이라 여겨 오백장군이라 부르기도 한다는데 더 이상은 아는 바가 없다.

힘들어 하는 아이들을 이끌고 자릿대 무성한 원시림 속을 따라 얼마쯤 가니 가파른 경사길이 시작된다.
막내딸부터 힘들어 하며 온갖 짜증이다.
겨우 겨우 달래어 간신히 경사 길을 얼마간 오르니 오백나한이라도 하고 병풍바위라고 하는 거대한 바위가 보였다.
그 옆으로 기괴한 영실기암이 펼쳐져 있건만 병풍바위길 중간에 앉은 아이들은 더 이상 올라갈 태세가 아니다.
조그만 더 걸어가면 완만한 등산로가 펼쳐지니 힘내어 가자고 어르고 달래어 보아도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어찌할 수 없을뿐더러 제주에 온 첫날 정상 등산이 무리였던지 아내도 더 이상 못 가겠다는 눈치다.
더 이상 산행을 멈추고 수려한 한라산 자락을 구경하고 있는데 막내딸이 하늘에 무지개가 피었다고 좋아라! 소리친다.
날은 덥고 쾌청한데 무슨 무지개라는 것인지 믿기지 않았는데 성화에 쳐다보니 정말로 무지개가 구름에 어우러져 있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무지개일까 하고 신기해 한창을 쳐다보았다.
신기루처럼 우리 가족 눈에만 보이는가 싶었는데 지나가는 등산객들도 우리와 같이 하늘을 쳐다보며 신기해한다.
맑은 날씨에 무지개라니, 믿기 어려워 사진을 찍어 두었다.
“윗세오름이 저긴데, 윗세오름에 오르면 한라산 정상 남쪽 절벽이 보이는데”하며 아쉬워하며 내려와야 했다.
 
영실 휴게소로 내려오며 딸내미들이 그런다.
“아빠! 그래도 사면이 바다이고, 우리나라에 물이 가장 맑은 곳이 제주인데 딱 한번 물놀이하는 건 후회 할 것 같아요!”하며 바다로 가자며 졸라대기에 서둘러 영실 휴게소에서 나와 다시 금릉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왜 또 금릉해수욕장이냐 아우성이지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하는 큰 여동생과 한 약속 때문에 동생이 사는 곳과 가까운 금릉해수욕장으로 밖에 갈 수가 없었다.
전해들은 아이들도 별 말 없기에 집에 혼자 계신 어머님을 모시고 금릉해수욕장으로 왔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바다로 나가 물놀이로 여념이 없기에 지난번에는 유심히 보지 않았던 금릉 해수욕장 동쪽에 있는 종려나무 숲으로 갔다.
종려나무도 종류가 여러 가지 있는 모양인데 제주도나 남부지방에 심어 놓은 것들은 대부분 일본 규슈지방이 원산지인 ‘왜종려’라고 한다.
제주를 남국의 이국적 느낌을 갖게 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종려나무인데 사진에서 괌이나 뉴질랜드에서 보는 종려나무와는 종류가 다르다고 한다.
아이들이 노는 사이, 한참을 노을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가는 종려나무 숲에서 내가 아무도 모르는 남국의 어느 외국에 있는 듯한 착각에 생각을 맡기고 서성였다.

생각에 팔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성이고 있는데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울리더니 확성기를 통해 해수욕장 물속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오라는 방송을 한다.
지금 태풍 “무이파”로 너울이 일고 있어 위험하니 빨리 나오라지만 물놀이 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따르려 하지 않는다.
태풍이라면 무시무시한 파도가 쳐야 맞지만 아직은 조금 전과 다른 점이 전혀 없으니 좀처럼 따르려 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해수욕장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모터보트를 타고 다니며 물속에서 나오라고 손짓을 하며 소리치니 그때야 비로소 물놀이 하던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온다.
태풍 ‘무이파(MUIFA)’는 마카오에서 제출한 태풍 이름으로 '서양자두꽃'을 의미 한다고 한다.
이름의 어감은 무시무시한데 그 뜻은 평범한 과일 꽃 이름이라니 좀 맥 빠지게 하지만 ‘무이파’는 제주와 전남 지방을 강타하여 천문학적 피해를 준 태풍이다.
내일 토요일이면 제주항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야 하는데 은근히 걱정되어 간다.

해수욕장에서 나와 여동생이 사준 생선회를 맛있게 먹고 나오려니, 회집 이름이 “바다이야기”이란다.
얼마 전에 “바다이야기”라는 인터넷 도박이 사회를 휩쓸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는 강제로 퇴출시킨 서양도박의 이름이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름을 생선회집 이름으로 지어 부르게 되었는지 몰라도 손쉽게 한몫 잡아 보려는 무망한 꿈으로 재산 탕진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걸 생각해보면 이름만으로도 기억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듯싶다.
음식이 좀 특이한 꽁치 김밥이 나왔는데 꽁치를 통제로 구워 밥으로 감싸고 김으로 말아 만든 것인데 처음 보는 음식이고 맛도 야릇하다.
그 외에도 색다른 비빔밥, 제주에서 나오는 온갖 해산물이 모두 나오니 우리가족에겐 분에 넘치는 저녁식사였다.
오늘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한 여동생은 내 바로 밑 동생인데, 말이야 여동생이지만 어릴 적 초등학교 5학년까지가 함께한 것이 전부여서 나에게는 대하기가 좀 어려운 동생이다.
왕래도 별로 없고 멀리 떨어져 살다보니 남매로 우애를 나무며 살지 못해 부모님께도 그렇고 동생에게도 미안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모처럼 제주에 왔다하여 분에 넘치도록 거하게 저녁을 대접해 주니 더더욱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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