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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06-02 조회수 : 4,215
제 목 : 변산반도 행락일기

변산반도 행락일기

 

한 직장에 모여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하기에는 그 구성원의 면면이 이리도 다양할까 싶은 곳이 내가 일하는 곳이다.

어떤 분은 이일 저일 다해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분은 곱고 귀하게 살아온 분도 있을 것이며, 힘들게 힘들게 가까스로 살아온 분들도 있을 터이다.

나이도 다양하여 70이 넘은 노년에서 이제 30을 살아가는 젊은이까지 분포되어 있지만 직장일의 특성상 나이든 분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이 우리 관리사무소의 모습이다.

이런 분들을 모시고 떠나려니 준비하는 것도 쉽지가 않아 새벽부터 나와 대충 일을 처리하고 부산을 떨어 출발하니 벌써 9시가 넘었다.

남들처럼 곱게 치장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성능 좋은 관광버스에 오르면 될 일을 새벽부터 출근하여, 해야 할 일 다 처리하고 떠나야 하는 처지이니 그저 기쁘기만 한 행락이 아니다.

평상시에 하는 노동도 모자라 새벽에 나와 할일 다하고 성능 좋은 버스도 아닌 12인승 소형 승합차를 타고 출발하니, 이 또한 행락을 가는 게 아니라 마치 70년대 고향 가는 사람들 같아 출발부터가 가슴이 아파온다.

평소 한 직장의 책임자로서 일하는 사람 하나하나를 어찌 할 수는 없다 손치더라도 명색 행락이니, 번듯한 버스라도 한 대 전세 내어 출발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처지가 궁한지라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다.

어째 거나 주섬주섬 싣고 덜덜거리는 차량을 출발하여 변산으로 향했지만 토요일 오전이니 조금은 도로 사정이 좋을 거라 예상했건만 그게 아니다.

한 곳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집주변에 나와 있는 분들을 하나하나 태우느라 지체되고, 또 차 밀려 지체되니, 이 또한 번거롭게 한다.

안양 시내를 지나쳐왔건만 밀리는 고속도로를 피해 들어선 39번 국도도 어지간히 이어진 차량으로 끝이 없다.

평소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별로 밀지지 않던 39번국도 인데도 오늘은 왜 이리 밀리는지.

거의 인내의 한계에 다다를 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슬슬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39번 국도를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접어드니 서해안 고속도로다.

변산반도로 같이 떠난 직원들

 

얼마가지 않아 서해대교의 위용이 차량들 사이를 뚫고 가는 우리들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다리라 하여 언론도 언론이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구경거리로 여기고, 지방 저 멀리서 관광단을 꾸릴 만큼 대단한 위치를 점할 만큼 명성이 있던 다리다.

하지만 지금 광안대교니 인천대교다 하여 서해대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규모의 다리가 생겨서, 이 다리 건너다 말고 중간에 자동차 세워놓고 사진 찍던 그 많던 관광객은 이젠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항상 그렇듯 좋은 시절은 있는 법이다.

지금 내가 싣고 가는 우리 직원들 또한 한 번쯤은 그러했을 것이다.

비록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늘그막에 시간이나 축내자고 그 힘든 일을 하는 것이리라고 내 짐작하고 있지만 오늘날 서해대교가 겪고 있는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노라니 짠한 맘이 한층 아파온다.

서해대교를 거의 지나칠 쯤에 이르면 행담도가 있다.

이 행담도는 모르기는 해도 서해안 고속도로가 없었다면 사람 하나 없는 무인도 이었을 곳이다.

혼자 외로이 있어야 할 행담도가 고속도로 휴게소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제법 크고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나이든 분들 모시고 다니면 자주 가는 곳이 있으니 휴게소 찾는 주된 이유다.

주차장에 자동차 세워두고 기다리자니, 저만치 건물 앞에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온다.

노래하는 사람의 모습이 우리와는 다른 외국인인데 노래하는 실력과 생소한 악기 연주 실력은 제법이다.

아마도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미국사람 아닐까 추측된다.

말은 자선(慈善)을 위한 연주회라 하지만 그 앞에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인디안 전통악기를 펼쳐놓고 판매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먹고 살기위해 노래하고 연주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잠시 그들의 음악연주에 정신을 팔고 있노라니 경리담당 여직원이 출발하잔다.

서둘러 차량을 출발하니 나이 지극한 남자 경비직원 한분이 이런 기회도 좀처럼 없을뿐더러 나이 많아 다시 올 것 같지 않다며, 새만금 방조제 쪽으로 돌아서 가잔다.

처음 출발할 적에는 출발시간도 있고 하니 변산반도 해변 길을 돌아, 격포항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변산반도 모래사장에서 해변의 바람을 만끽한 후, 선운사를 들려 돌아올 예정이었다.

갑자기 일정을 변경하여 새만금으로 가자니 서두르지 않고는 너무 늦게 도착하지 않을까 조바심 내는 나와는 달리, 우리 일행은 펼쳐진 오월의 신록에 온통 마음이 빼앗긴 듯하다.

연륜으로 보아 한두 번 경험한 5월도 아닐 진데 연신 좋다고 탄성을 지르는 것을 보면 이분들의 삶이 얼마나 메마른 삶인지를 짐작케 한다.

살림이 넉넉지 않아 여유롭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연이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찬찬히 뜯어보지 않고는 그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이란 그저 좋다하는 정도로 느끼는 별다른 것이 아니다.

그 궁박한 처지에 한가로이 자연에 아름다움이나 즐길 처지로 살아온 세대가 아닌 이분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쩌니 저저니 하는 것 자체가 사치로 여겨지던 그런 세대가 바로 함께한 분들이 살아온 삶이다.

요즈음에 와서야 문화유산답사니 하여 여행을 다니는 세태(世態)가 되었다.

그도 여유 있는 젊은이들이나 누리는 곱살스런 취미랄 수 있지,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엄감생심 흉내 내기 쉬지 않은 것이 우리 네 삶이다.

그래도 모두가 오월에 신록이 스치는 산하의 전경에 즐거움이 절로 일어나는 모양이다.

내 아는 고향사람들은 힘든 농사일을 하는 탓 일까.

일할 때 마다 술 힘으로 일한다며, 마셔온 술이 어느덧 중독증세가 생겨 음주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이든 술중독자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관리사무소에서 어르신 중에 술 마시는 분이 적어, 몇 분되지도 않을뿐더러 음주를 하시는 분 중에도 그다지 많이 마시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 모여 나누는 이야기지만 술기운도 없는데도 어찌나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던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분들이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금강을 지나 군산 시내를 가로 질러 새만금 방조제로 들어섰다.

내가 처음부터 새만금을 지나쳐 가려고 했던 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중에, 특히 커다랗게 만든 것 중에는 제대로 된 것이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것 중에는 즐기기 위해 만든 것이 있고,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들이 있다.

즐기거나 숭상하기 위해 만든 것 중에 우리에게 감동 주는 것은 문화유적이 그 대표적인 예술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로 종교예술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에 반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해도 아름다움 것이 많은데, 청자는 그 으뜸이라 할 수 있고, 성곽 등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청자는 장식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들 하는데 사용하려고 만들다 보면 편의성만 따져 만들기 때문에 모양이 없어지고 예술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고려청자의 그 아름다움은 박물관을 찾아보노라면 넋을 잃게 된다.

그것도 옛날사람들의 유품에서 찾을 수 있는 여유이지, 요즘 만들어진 예술품이라 것을 보자면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 중에는 작은 것은 예술적이라고 하기에는 미각이란 곤 찾을 수 없는 사용상의 편의성만 따지는 세상이 되었다.

말은 디자인이다 어쩐다 하지만 그게 감동을 주는 예술은 전혀 아닌 듯하다.

더군다나 큰 것은 흉물이나 다름없다.

새만금을 보면 특히 그렇다.

 

새만금 바다쪽


그 크기야 단군 이래 가장 큰 토목 사업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 사람을 없을 것이다.

내가 애써 피하려고 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거기서 느낄 안타까움 때문이다.

물론 콘크리트로 만든 설치물 치고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경험이 앞서 가보지 않고 아름답지 않다고 단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새만금 방조제도 그러거니와 군산시내도 내겐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벌써 대여섯 번을 족히 가보았는데도 군산은 이상하리만치 느낌이 없다.

예전에 군대생활을 같이하던 선임이 이곳 군산출신이어서 군 생활을 마친 후 군산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도 5일이나 군산에 머물렀지만 그때도 군산에 대한 느낌이 없었다.

20년이 지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선유도를 가기 위해 군산항을 찾았을 때도 군산 시내를 지나쳐 갔지만, 군산에 대한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런 군산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느낌이 없다.

지리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 여행을 하기에, 빠른 길로만 가게 마련이다.

그러니 더더욱 군산에 대한 특유의 느낌을 갖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수차례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어떤 느낌도 없다는 것은 나로서도 야릇하기 까지 하다.

이곳 군산은 내 알기로 일제강점기에는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수탈하던 대표적인 항구였다고 한다.

그래서 군산에 대한 느낌이 그러려니 생각해오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래서 인 것 같지는 않다.

어차피 군산에 대한 좋다 나쁘다 하는 구체적인 느낌은 내 살아생전에 풀어갈 숙제이겠구나 하고 남겨 둘밖에…….

군산 시내를 통과하여 새만금 방조제의 긴 도로를 느린 속도로 지나갔다.

오른쪽으로 푸른 바다가 한없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내륙 쪽 바다가 있다.

방조제가 가로 막아 그 흐름이 막혀 있다.

왼쪽의 바다를 보면 그 색깔이 왠지 죽어 있다는 것을 한눈에도 느낄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방조제 공사에 반대하여 단식도 하고, 모여 항의도 하고, 삼보일배도 하는 등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법원에서는 많은 세월을 거쳐 이 일이 우리가 만든 원칙에 반하는지를 따져 보았다.

하지만 결국 공사는 이루어져 방조제 안쪽은 죽어가고 있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분명한 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죽어가는 바다를 확인하러온 것이 아니니 여기서 줄이련다.

어째 거나 방조제를 지나가며 보는 한쪽의 죽음과 한쪽의 생기 있는 느낌이란 참으로 말 못할 야릇함이 생겨난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야 어떤 것이건 간에 오른쪽의 푸른 바다에 대한 느낌을 각자가 한마디씩 한다.

삶 그 자체에 지친 분이라도 방조제 안쪽 신음에 대해서는 나와 별다르지 않는지 죽어간다며 안쓰러워한다.

방조제의 쭉 뻗은 길은 그 끝이 아스라이 어른거리도록 길고 장대하다.

인생이 이리 직선으로 쭉 펼쳐진 삶이라면 어떨까?

굴곡진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상상해봄직한 삶일 게다.

우리 직원들이 굴곡진 삶이라 굴곡이 없는 평탄한 삶을 부러워 할 터이지만 나와 같이 모험보다는 모난 일들을 피해가는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굴곡진 삶이 부러울 때 간혹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찌 한인간의 삶이 그저 굴곡 없는 직선으로만 된 삶을 살겠는가!

여기 있는 사람들 또한 굴곡진 삶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한 많은 삶이여서 힘들었을 것일 터.

앞으로 남은 삶이라도 이렇듯 직선으로 굴곡 없는 삶이 계속되길 기원해 본다.

방조제의 3분의 2쯤에 자동차를 주차할 곳이 있어 자동차를 세우고 다 내려놓으니 바다로 나가는 이, 풀밭에 난 쑥나물을 캐는 이, 각자 제 좋아하는 것을 맘껏 펼치니 바다에 정경과 자유로움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가 보다.

30분을 그렇게 지내고 출발하여 노래를 시작하니 각자 어찌 살아왔는지, 노래는 하나같이 잘들 하신다.

차안에서 부르던 목쉬고 숨차하며 부르는 노래는 아마도 살아온 삶이 애잔하고 처연해서 숙연함이 인다.

한분 한분 돌아가며 부르는 노래 속에 그분의 삶이 묻어난다.

! 저 분은 어찌 살아왔을까?

대충 짐작이 가는 노래와 이야기는 차분하고 진지하기 까지 하다.

 

방조제를 지나 변산반도에 이르니 해변길이 우리를 반긴다.

구불구불한 해변 길은 그 아름다움으로 숨 막히게 한다.

변산반도는 해변을 끼고 돌아가는 반도이지만 산이 있어 더욱 어우러지는 곳이 변산반도다.

유독 아름다운 절과 전설과 신화가 깃든 사당이 많은 곳이 이곳 변산이기도 하다.

그런 사당이 많다 함은 그곳이 말 못할 사연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 할대로 하며 사는 요량이라면 사당에 올라 염원에 찬 기도를 드릴 사당을 그리 많이 지었을까?

바닷가란 그렇듯 사연 또한 많은 법이다.

 

곧장 난 새만금 길은 그저 단순하고 밋밋하다.

새만금을 지나 올 적에는 함께한 일행들도 그 전경에 말을 아끼더니 변산반도의 구불거리는 해변 길에는 사뭇 말들이 많다.

공동주택에 근무 분의 면면을 보면 나이든 경비원, 할머니 아니면 볼 수 없는 미화원과 좀 젊은이 측에 속하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60을 넘거나 거의 임박한 분이 기전실 직원이며 소장이나 과장 또한 젊다고 할 수 없다.

저 해변 길처럼 험난한 삶을 살아온 끝에 이곳으로 온 분이 경비원 미화원 아니던가.

그 고댄 일이 하고 싶어 할까 하고, 생각 들 때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물론 그 중에는 생활이 넉넉한 분도 있어, 시간이나 축내려고 혹은 용돈이나 벌 요량으로 이곳에서 일하는 분이 대부분이리라 짐작된다.

그렇다지만 그 노동이 그리 만만한 일이던가 하고 생각해 볼 적에 꼭 그러리라 생각되지 않는 건, 각자가 말하지 못하는 속내가 별도로 있으리라.

 

채석강

 

우리는 채석강과 적석강이 저긴데 이를 지나쳐, 우리들의 처지에 맞지 않으리 만큼 거나한 점심이 차려지고, 그에 걸맞게 즐거이 먹는 점심은 모두를 즐겁게 했지만 그 준비를 해야 하는 측의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70이 다된 미화반장님의 노고와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우리네 직장에선 젊은이 측에 끼인 탓에 이 모든 준비하느라 고생하였을 경리대리를 생각하니 고맙고 미안타.

점심 맛나게 먹고, 술도 거나하게 마시고, 채석강과 적석강 그리고 변산 해수욕장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갈 요량이었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아 채석강만 대충 쳐다보고 서둘러 출발하니 벌써 오후 4시가 넘었다.

 

이번 기회에 내 개인적으로 꼭 다시 가고픈 선운사에 가야 할 것 같아서였다.

내소산의 그 화려한 산자락과 숱한 사찰을 뒤로하고, 스치듯 지나쳐 곰소 항에 이르러 잠시 쉬어 젓갈을 맛보고, 사려는 사람 젓갈 구입하여 선운사에 이르니 6시가 넘었다.

선운사 가는 길이 잘 닦여 있어서 별 어려움이 없이 산사가 있는 산을 만끽하며 들어오니, 내가 선()을 닦으러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거나한 일행의 이야기소리에 잠시 스쳤다 지나는 환각 같은 것이었다.

어째거나 주차장에 자동차를 새워두고 가려니 이미 오랜 차량 여행에 지친 몇몇 분이 그냥 자동차에 남겠다하여, 그냥 남겨두고 선운사로 향하니 멋들어진 소나무 두 구루가 우리를 반긴다.

 

머리만 남은 소나무


이리 잘나 내고, 저리 잘나낸 나머지 저 머리 꽁지에 달랑 몇 가지만 매달린 소나무는 측은하고 안쓰럽지만 그래도 보기에 참으로 좋았다.

옆쪽 호수는 내려 올 적에 보자며 슬쩍 비켜 선운사 길을 걸어가며 이처럼 아름답게 만들어진 길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길을 걸으니, 사람 손으로 만들 것도 아름답구나 싶다.

길바닥이 흙길이었으면 더 좋겠구나 하는 아쉬움 속에 선운사에 거의 다다르니 곱게 쌓아 올린 돌담길이 비켜선 체 차분하게 늘어서 있다.

황토 흙으로 쌓아 올린 토담만큼 차분하게 하는 것도 없다.

어루만지듯 눈길을 주며 걸어가는 모습이 나 뿐 아니라 일행들도 선방에 수도승처럼 숙연하고 고요하다.

절집이야 여느 사찰을 가보아도 거기서 거기다.

눈이 없는 우리로서는 산속에 묻힌 사찰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으련만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다른 사찰과 달리 맞배지붕이 유독 많이 보이는 것이 특이해 보인다.

사찰 뒤쪽으로 동백 숲이 길게 뻗어있어도 늦은 오후에다 꽃이 진 5월인지라 별다른 감흥이 없다.

사찰 건물을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심었다고 하는데 그 수령이 제법 깊어 보이고 아침이면 참으로 아름다울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자란 제주에는 동백 숲이 많은데 아침에 해 뜨는 동백 숲의 환상적 아름다움을 익히 잘 알고 있다.

내가 경험한 동백 숲의 아름다움이 그것뿐이어서 일까?

어찌 동백 숲의 아름다움이 그 뿐 일까마는 해 저문 산사에 동백 숲은 그냥 그런 것이었다.

다음에는 이른 아침 꼭 찾아오리라.

그 동백 숲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선운사에 오면 반드시 가야 할 곳이 도솔암과 선운산 산행이지만 우리에겐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러나 선운사 뒷자락에 버티고 선, 선운산의 바위와 그 바위에 새겨둔 도솔암 마애불이다. 조선 말기에 마애불에 비기(秘記)가 있다하여 그 신비스러움이 서린 곳이지만 그보다 선운산의 정상을 꼭 가보고 싶지만 맘만 있을 뿐 가보지는 못했다.

 

앞산 산봉우리 더 찍었으면 좋을텐데


대웅전 앞에서 바라보는 앞산의 능선은 농후한 중년 여인의 앞가슴도 아니요, 젖먹이 둔 모성애 가득한 젊은 여인의 부풀어 오른 앞가슴도 아니다.

그렇다고 지치거나 혹은 만사를 겪어 익은 노년의 노숙하고 잘 가꾼 여인의 앞가슴도 아니다. 아무리 보아도 저 능선의 곡선은 십대 갓 피어난 처녀의 앞가슴이다.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도 않고 싱그럽고 탱탱한 근접할 수도, 범할 수도 없는 신성함이 깃든 산자락이다.

그 처녀 앞가슴 같은 산봉우리를 보기 위해 난 이곳에 온다.

일주문 앞에서 본 산봉우리 다르고 법당 앞에서 본 모습이 다르고 또한 느낌도 다르다.

50이 넘은 나도 그렇고 30대인 전기과장도 그렇고 중년의 경리대리도 그렇고, 무엇보다 70이 된 미화반장님도 그 능선의 모습이 남다른 모양이다.

돌아갈 자동차 안에서 보지 않은 다른 미화원 아주머니들에게 그 감동을 설명하느라 여념 없다.

보지 않은 산자락이 뭐 대수냐는 듯 시큰둥해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젠 욕지거리 섞어가며 설명한다.

산사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하여 지나가는 스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그 나무가 보리수나무란다.

석가모니 부처가 성불한 곳이 바로 보리수나무 아래였다고 하여 우리나라 산사에 종종 볼 수 있는데 예전에 낙산사에서 그 꽃이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꽃도 꽃이려니와 그 향기와 벌들이 얼마나 많던지!

꼭 다시 한 번 보았으면 했는데 꽃피지 않은 보리수나무만을 보았을 뿐이다.

언제 꽃피는지 꼭 알아두었다가 다시 찾으리라.

그럭저럭 선운사 구경을 마치고 가려던 참에 어둠이 서려가는 늦은 오후, 산사에 종소리가 올려 펴지니 서성이던 불자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가 시작된다.

생각해보시라!

희미한 어둠이 내리는 산사를 등지고, 계곡에 물소리에 섞여 은은히 퍼지는 종소리가 선운사 계곡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지는 광경을….

감동에 젖어 내오는 우리 일행들은 저마다 각자 자기 가족 데리고 다시 와야겠다고 한다.

젊은 과장님은 부모님 따라 절에 자주 왔지만 종소리는 처음 들었단다.

아마도 말은 안 해도 일행 모두가 그 종소리 직접 듣는 건 처음일 게다.

계곡물에 비친 나무의 감동스런 모습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내려오니, 선운사 일주문 들어서기 전 호수가 우리를 반긴다.

사람 손으로 만든 구조물이 덮인 호수이지만 붓꽃, 창포 꽃, 자운영 꽃이 만발해 있다.

요리조리 사진을 찍고 차에 오르니 그제야 어찌 돌아가야 할지 막막해진다.

이미 해는 지고 저물어 집으로 출발하여 고속도로에 접어드니 또 미화반장님의 이야기와 노래가 시작된다.

내 비록 여흥을 즐겨하는 성향이 아니라 좋아하지는 않지만 미화반장의 그 한() 서린 노랫가락이 싫지는 않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늦은 저녁식사 까지 해결하고 집에 도착하니 11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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