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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05-26 조회수 : 4,448
제 목 : 호남/잘 보존된 읍성으로 이름높은 고창/선운사

 

호남/잘 보존된 읍성으로 이름높은 고창/선운사

 

선운사

이번 답사의 핵심은 미륵사터와 선운사라고 할만큼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선운산(일명 도솔산)에 자리 잡은 선운사(仙雲寺)는 백제 위덕왕(6세기 후반)때 검단선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검단선사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신라의 의운국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도 한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죽포도(竹浦島)에 돌배가 떠와서 사람들이 끌어 올리려 했으나 자꾸 바다쪽으로 떠나갔다고 한다. 소문을 들은 검단선사가 바닷가로 나가니 돌배가 저절로 선사 앞으로 닦아왔다.

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상, 옥돌부처와 금옷 입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모시면 길이 중생을 제도하리라.” 고 씌어 있는 글이 나왔다.

검단선사는 본래 연못이던 이곳을 메워서 지금의 절을 세웠고, 이 때 진흥왕은 재물을 내리는 한편, 장정 100여명을 보내어 공사를 돕고 뒷산의 소나무를 베어 숯을 구워서 경비에 충당케 했다고 한다.

절을 세울 당시 선운산 계곡에는 도적들이 들끓었는데 검단선사는 이들을 교화하고 바닷가로 옮겨 살게 하면서 소금 굽는 방법을 가르쳐서 생계를 꾸리게 했다.

그들이 살던 마을을 검단선사의 이름을 따서 ‘검단리’ 라고 하며, 해마다 봄, 가을이면 보은염(報恩鹽)이라는 이름으로 선운사에 소금을 보냈다는데 그 풍습은 오래도록 전해져서 해방 전까지만 해도 그 일대 염전 사람들은 선운사에 소금을 보냈다고 한다.

고려,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여러 번 폐찰과 중창을 거듭했고, 지금 있는 건축물들은 모두 조선중기 이후의 것이어서 손꼽히는 대가람 치고는 보물 몇 점을 지니고 있을 뿐, 국보급 문화재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한창 번창하던 시절에는 8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3000여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선운사, 지금은 도솔암, 창담암, 석상암, 동운암 등 4개암자와 석탑, 그리고 본 절 경내에 대웅전, 만새루, 관음전 등 10여 동의 건물을 지니고있으며, 모든 건물이 하나 같이 모두 맞배지붕의 동일한 형식으로 지어진 것이 특색이기도 하여 정연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암자 중에는 천인암 절벽이 건너다 보이는 위치에 자리한 도솔암이 절경이고, 그 뒤로 올라가서 칠송대라고 불리는 암반 절벽 한 면에 높이 17m에 달하는 거대한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동불암 마애불이라는 이 석불에는 후세에 이르러 희한한 전설 하나가 생겨났다. “선운사 석불 배꼽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하는데 비결과 함께 벼락살도 들어 있어서 거기에 손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 는 것이었다.

1820년 전라감사로 있던 척재 이서구(척齋 李書九)가 마애불의 배꼽에서 서기가 뻗치는 것을 보고 뚜껑을 열어보니 책이 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벼락이 치는 바람에 “이서구가 열어 본다.”라는 대목만 언뜻 보고 도로 넣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 졌다.

갑오동학란이 일어나기 일년 전인 1892년 어느날 전봉준, 김개남과 더불어 동학란을 주도했던 손화중(孫和仲)의 집에서는 그 비결을 꺼내보자는 말이 나왔다.
모두들 벼락살을 걱정했지만 오하영이라는 도인이 말하기를 “이서구가 열었을 때 이미 벼락을 쳤으므로 벼락살은 없어졌다” 고 했다.

동학도들은 석불의 배꼽을 깨고 비결을 꺼냈고, 이 일로 각지의 동학도 수백 명이 잡혀 들어가 문초를 받았고 결국 주모자 세 명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로, 당시 미륵비결을 꺼낸 현장에 있었던 동학도 오지영이 쓴 ‘동학사’ 에 자세히 기록하여 전한다.

마애불 배꼽에서 무엇이 나왔는지 모르지만 이 사건은 썩어빠진 세상이 빨리 망하고 새 세상이 오기를 열망했던 당시 민중들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리라.

그 일이 있은 후 몇 달 사이에 손화중의 포(包)에는 수만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었고, 그로 하여 그가 후일 동학군의 장령이 되었다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운주사의 와불설화와 함께 음미해볼 일이다.

그 외에도 선운사에는 몇 가지 인상 깊이 남는 것이 있으니 첫째는 입구에서부터 들어갈수록 짙어지는 울창한 단풍나무숲과 절 주위를 둘러 싼 동백나무 군락이고, 다음은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선사(白坡禪師)의 부도비문과 이 고장출신 서정주(徐廷柱)시인의 ‘선운사동구시비’ 이다.

가을단풍, 봄동백을 보았어야 하는데 그도 저도 아닌 여름에 왔으니 참 경치를 보지는 못했지만 하늘을 가린 길고 완만한 숲길을 걷는 것이 좋았고, 부도밭 속의 백파선사 비문은 추사선생이 직접 글도 짖고 글씨도 쓴(撰幷書) 좀처럼 보기 어려운 금석문이었다.

선생은 장문의 백파선사 비문의 말미에 과로기부(果老記付: 과로는 과천 사는 노인이라는 또 하나의 호임) 라 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추가했다.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자리도 없으나 貧無卓錐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 하도다. 氣壓須彌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事親如事佛
그 가풍은 참으로 진실하도다. 家風最眞實
속세의 이름은 긍선이나 厥名兮亘璇
그 너머지야 말해 무엇하리오. 不可說轉轉

올라갈 제 미처 못보고 지나쳤던 서정주시인의 시비에는 선생의 육필원고를 그대로 확대하여 비스듬히 기운 글줄 그대로 새겨놓은 것도 재미 있었지만 그 시의 내용이 더욱 웃음을 자아낸다.

선운사 골자기로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 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우리 같은 문외한이 어찌 명시의 멋을 바로 감상할 수 있으랴. 그저 ‘작년 것만 목이 쉬어 남았다’ 는 대목만 몇 번이고 되 뇌이면서 선운사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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