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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02-18 조회수 : 4,151
제 목 : 勞之坊 2 가야산 산행일기

勞之坊 2

-- 가야산 산행을 생각하며 --

여기 이전에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다.
여기, 그것도 안양 한구석 한적한 산중에 자리한, 50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 살기가 썩 마음 내키지 않는, 한산해서 첩첩 산중이었을 곳, 어느 버스 차고지가 생기고 몇몇 집들이 들어서더니 이내 한적한 마을이 새워져, 생명부지 사람들이 제법 모여들어 사는 곳이  창박골 이다.
우리는 어찌어찌해서 한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이유와 연유가 어떤 것인지 난 모른다.
어째 건 우리는 이곳에서 일하고 또 일한다.
일하는데, “일하고 일하는 곳”이라 내, 이리 이야기하는 건 관리소 일이란 것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어서 관리사무소에 모여들어든 사람들이 맘 붙이기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느 관리소를 가 보아도 그리 오래 근무하는 이가 드물고, 서로 위하는 맘이 그다지 탐탁스런 곳이 아니다.
온갖 잡스런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하기란 웬만한 머슴이 아니고는 받아 넘기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일면식도 없는 우리는 긴 시간 언쟁 한번 없이 묵묵히 제 할일이라 여기고 일한다. 적어도 우리끼리는 서로 웃으며 일한다.
서로 다독이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위로하고, 서로 있는 것 없는 것 나누며, 우리는 어느 관리소 보다 재미있게 일한다.
이런 사무실을 벗어나 산에 오는 일은 일터를 보람되게 한다.

난 산에 오르는 걸 무척 좋아해, 아내와 함께 이산 저산 찾아다니며 산에 오르곤 한다.
전국을 망라해 산에 오르며, 산에 오를 기회가 없어 힘들어 할 우리 직원이라면 이 산이 “딱”이다 싶은 산을 찾곤 하는데 가야산만큼 적당한 산도 없겠다 싶어, 평소에 자주 이야기 해왔는데 우린 그 산행 기회를 봄으로 잡고 기다려왔다.
웬걸, 말이 2월이지 우리가 기대한 봄이 아니라 한겨울도 이런 겨울이 없다 싶을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이번 주 내내 계속되고 있어서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다.
2개월에 한번 정도는 산에 가지고 약속해 오던 차여서 미루기도 좀 그런 상황이다.
각자 쉬는 날이면 일정이 짜여 있을 터이니, 이사람 저사람 일정 맞추기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 더더욱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다. 
평상시 산에 가는 일이 아주 드문 김 주임님이 매서운 날 산행이 어떨지 걱정이 앞서는 걸, 참아 넘기며, 왁자지껄 혹한의 날씨에도 우리는 산으로 향했다.
이른 근무시간부터 몇몇 입주민의 민원과 항의성 질책을 뒤로하고 서둘러 출발한, 서산에 위치한 가야산행은 이렇게 거추장스런 일을 뒤로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안양에서 10시에 출발했으니 산행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서둘러 서둘러 출발한 차량은 토요일임에도 시원스레 서해대교를 건너 가야산으로 향했다.
한 사무실에서 답답한 일상을 뒤로하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서산에 거의 다다르니 멀리서 가야산이 보였다.
가며 나누는 이야기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2시간의 차량이동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라, 서산 진출입로 인근에서 “우리는 저산에 올라 갈 겁니다.”라고 설명할 기회도 잡지 못했다.
우리는 매사 사무실을 떠나 함께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렇듯 이야기한다.
가야산에 대하여 준비 했다가 그때는 못했던 이야기를 이제는 해야 할 것 같다.

서산이라는 곳이 그 지명의 유래도 복잡하거니와 눈여겨 볼만 곳도 많으니 수도권 인근에 이 만한 곳도 드물다.
백제시대에는 「기군」이라 했던 것을 통일신라 경덕왕 14년(755)에는 「부성군」으로 고려 충열왕10년 (1284)에 처음으로 「서산」이라 불려오다가 충열왕 34년(1308)에 「서주목」으로 승격되더니, 다시 충선왕2년(1310)에 「서령부」로 개칭되었다 한다.
그 후로도 이 지역 저 지역으로 나누어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다시 서산이라 칭한 이후로는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다.
이곳에 쓰지 못한 지명의 유래가 한참 더 있으니 복잡한 지명의 유래만큼이나 역사 속에 붙임도 상당했을 것이다. 어째 거나 그런 서산에 으뜸은 단연코 가야산이다.
가야산에는 백제시대 마애석불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국보 제84호 서산마애삼존 불상을 비롯한 보원사지, 개심사, 일락사 등이 가야산 자락의 품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국보1점, 보물6점, 기타문화재 4점 등을 비롯한 각종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내포문화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홍성, 예산, 서산, 당진, 아산의 일부를 접하여 자리한 지역이 예부터 내포지역이라 했다.
그런 너른 내포땅 한자리 차지했음에도 내포땅 전부를 다 안고 있는 것이 또한 가야산이다.
내 여기서 가야산의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할 수 없으니 이만 줄이지만 가야산의 면면은 다양하고 멋스러우니 예부터 절이 많아 백을 넘으면 모두가 망할 것이니 백장사를 지어 이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니 아무리 보아도 경이로운 산이 가야산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마애삼존불에서 시작하여 옥양봉, 석문봉, 일락산을 거쳐 송림능선을 따라 개심사로 내려오는 것이 둘도 없는 산행코스이지만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아무래도 김 주임님의 걸음걸이가 이를 다잡을 것 같지 않다.


이상하리만치(어느 정치 권력자에 의해 무지막지하게 깎아 만든 목장) 나무도 없어 산도 아니고 그렇다고 들도 아닌 목장 길을 구불구불 돌아, 가야산을 찾아 처음 마주한 것이 개심사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10개를 꼽을 때, 반드시 넣는 절이 개심사이다.
현판의 글씨도 유려할뿐더러 건물의 멋스러움은 뉘라서 그냥 아름답다고만 말 할까!
상왕산 산자락과 소나무, 그 무엇 하나 내 눈을 그냥 지나치게 하지 않는 모습을 어찌 말로 다할까!
너무 늦게 도착하여 산행이 늦을까 노심초사한 탓에 말없이 그냥 지나쳤지만 내려 올 적엔 꼭 세심히 살펴야지 하는 마음을 다잡는 건, 진기한 보석을 앞에 두고 지나치는 맘이랄까, 어째든 우리는 스치듯 개심사를 지나 가야산의 첫 자락 상왕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가야산행을 시작하며 기념으로
 


개심사를 뒤로하고 오르는 가야산 산행은 처음부터가 만만치 않다.
초입 가파른 길은 벌써부터 정상이 어디냐고 묻는 이가 있으니 이러고서야 정상에 오를 수 있을지 의심스럽게 만든다.
가파른 길을 얼마가지 않아 눈길이 시작되고 있어서 더더욱 그렇다.
정상은커녕 여기서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비명에 가까운 엄살을 받아 넘기며 재촉을 거듭하니, 감았던 머플러며, 귀마개, 자켓 앞자락 다 헤치고 겨우 겨우 송림능선을 따라 올라 갈 수 있었다.
상왕산 정상의 화려한 정경을 확인도 못하고 일락산을 향해 걸었다.
눈은 점점 많아져, 아이젠으로 발을 동여매니 이제야 미끄럽다고 쩔쩔매던 아우성이 자자든다.


송림능선의 소나무들 
    송림능선의 무성한 소나무들 (이전에 찍은 사진)         &      곤파스 태풍으로 쓰러진 소나무(자료 수집)

송림능선이 무엇이던가?
소나무 숲이 있는 능선이라 뜻 아니던가?
지난번 “곤파스” 태풍 때 모진 바람 이겨내지 못해 쓰러지고, 자빠지고, 그런 소나무를 안타까이 보노라니 눈에 한스러움이 스친다.
내 삶도 이렇듯 태풍도 태풍이거니와 잔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흐트러 지지 않았던가 하고 스멀스멀 잡생각이 눈앞을 가려온다.
애써 머리를 흔들어 새우고, 소나무 숲길을 아득히 걸으며 솔향기에 취하고,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먼 저편 내포뜰에 탄성을 지르며 얼마를 걸었을까?
비로소 우리는 일락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왼쪽으로는 옥양봉과 석문봉 사이에서 시작된 용현계곡, 오른쪽에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서해바다와 한눈에 들어오는 너른 내포뜰을 만끽하며 눈 길을 조심조심 걸어 일락산에 오르니 이제 그만 가잔다.




일락산 정상에서 왼쪽부터 나정수 반장, 김명옥 경리주임, 김성환 전기과장


해가 즐기는 곳, 다시 말해 해가 거닐다가는 곳이라 해서 이름 붙였을 일락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산사인 일락사며, 저수지며, 소나무로 수놓은 솔밭을 지켜보노라면 신선이 따로 있을까 싶다.
등에 지고 온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며, 김 주임님 우스갯소리에 웃었다.
항상 그렇지만 근무시간에도 우리 사무실에서는 김 주임님으로 인해 웃는 경우가 많다. 적지 않은 나이에 집안이 아니라 낯설고 물설고 인심도 그런, 우악스러운 관리사무소에서 신기하리만치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요즈음 사무실 여자분들 잡스런 일 하려들지 않는다.
커피 한잔 얻어먹으려는 생각은 아예 버려야한다.
꼭 여자 분이 그런 일 맡아해야 할 것이 아니기에 모두가 이해하는 바다.
허나 우리 김 주임님이라고 그런 시대정신을 모르랴.
그런데도 사무실 일에 있어 가리는 법이 없다.
그게 누구에 일이든 궂은일도, 싫고 힘든 일도, 사무실 일이라면 척척 다해치운다.
단 한번 싫은 내색하는 걸, 난 본적이 없다.
입주민들의 과한 행동도 아니 도저히 넘길 수 없는 인간적 한계를 넘는 일도 그냥 웃으며 넘긴다.
그분도 사람인지라 어찌 화가 나고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그런 김 주임님 곁에 두고 일하는 우리는 아마도 행운이 가득한 사람들이 틀림없을 게다.
정돈된 책상이며, 책상을 넘어 사무실 전체가 나름 정돈되어 있는 것은 그건 다 김 주임님의 손길에 의해서다.
출근할 때마다 미화반장님도 그렇거니와 김 주임님의 배려와 손길에 감사해 하며 즐거움 가득 안고 일하며 지낸다.


우리 관리사무소 김명옥 경리주임

그런 김 주임님이 왈, “소장님! 이제 그만 내려가면 안 될까요.”하고 애처로운 말투와 장난스런 표정으로 말한다. 아직 반도 올라오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하마터면 그 꾸득임에 넘어 갈 뻔 한 마음을 되새며 석문봉을 향해 걸었다.
눈앞에 보이는 봉우리마다 저 봉우리가 정상이냐고? 정상은 어디냐고 지나가는 등산객마다 묻는 것으로 보아 힘들기는 힘든가 보다 하며, 약 2㎞를 걸어 3개의 봉우리를 건너 정상으로 향했다.

얼마쯤 갔을까?
가지를 인심 좋게 펼치고 선 소나무가 몇 그루 있는 바위에 오르니 서산 시내와 서산 쪽 내포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쉼 호흡 가다듬고, 저편에 아래 가야산 어디쯤에 펼쳐진 남연군묘 이야기며 그리고 가야산 정상 옆에 자리한 원효봉 이야기로 힘든 길을 달래었다.

흥선군은 천자(天子) 2대가 난다는 명당자리 이야기를 듣고 부친 묘를 이장하리라 맘먹었다 한다.
지방관을 사주하여 스님들은 매질해 내?고 멀쩡한 절을 불태우고 묘를 쓰니, 이게 지금의 남연군묘다.
흔히 우리는 역사책에서 어느 독일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이라 알고 있는 그 묘가 바로 가야산 남연군묘다.
그로 인해 더욱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공연히 천주교인을 잡아 가두고 죽이니, 이게 곧 그 유명한 병인사옥과 같은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이다.
내포땅에 살던 천주교인들이 영문도 모르고 교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저 아래 해미읍성에서 죽어 갔다.
지금은 그런 역사적 사건을 기념해 멀쩡한 사람들이 죽어갔던 그곳에 천주교 성지라 하여 큰 건물 짓고 다듬어 불쌍한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살벌한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공포에 땅이었던 시절이 있던 곳이다.
역사 속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우리는 인심 좋게 생긴 소나무에 기대여 사진을 찍으니 마치 저 아래 세상이 다 우리 것 같았다.


정상에서 찍은 사진(정상에 오르지 우리 뿐이어서 네사람이 함께 할 수 없었다)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니 시야가 확 트인 산줄기가 나타나고 주변에 돌을 쌓아 만든 탑이 있어 운치 있는, 바위로 이루어진 석문봉 정상이 눈에 들어왔다.
소나무 숲으로 부분 가리어진 시야가 확 트이니 서산 쪽 내포 땅이 한눈에 들어오고, 눈을 돌리니 예산 쪽 내포 땅이 한 가슴 가득 들어왔다.
발아래 내포땅이 그리고 옆으로 옥양봉과 가사봉, 멀리 원효봉이 보이니 그 눈 맛이 그만이다.
이쪽으로 보아도 너른 들이요, 저쪽으로 보아도 너른 들이다.
가야산에 3번째 오르지만 언제 보아도 펼쳐진 저 내포 땅은 감동적이고 감격스럽기 까지 하다.
어찌 정상에서 보는 산하가 저러한데 나만 즐겁고 감동스러울까?
늘상 산에 오르기를 즐겨하는 나 반장님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낸다.
그리 많이 산에 올랐으니 이산 저산 꼭대기에 올라 내려다보았을 광경이지만 오늘은 특별한가 보다.
하산길에 땀을 흘리지 않고 올라와 본 산행은 처음이라고 한마디 하던 그이지만 정상에서 본 광경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요 모양 저 모양 폼 잡아 온갖 모양새로 사진 찍고 나서야 비로소 등에 지고 온 음식물을 내려놓고는 까마귀 이리저리 유영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먹는 점심과 막걸리는 땀 흘려 일하고 난 다음에 먹어 본 이 아니고는 그 맛을 모를 것이다.

맛있게 먹은 점심이야 더할 나위 없었지만 시간을 보니 오후 4시가 넘었다.
겨울 산이라는 것이 낯의 길이도 그렇거니와 산이란 원래 해가 빨리 넘어가기 마련이다.
살금살금 걷는 걸음걸이와 산행 경험이 미진한 일원들 생각할 때, 다급한 맘이 앞선다.
식사 후 다시 한 번 보려던 산정에서의 정경을 만끽하기도 전에 서둘러 내려가야 했다.
엉금엉금 느린 걸음걸이이던 이들도 밤 산행이 될지 모를 거라는 은근한 협박 아닌 협박에 제법 빠른 하산길을 잡아 나섰다.
오를 때야 정상에 오른다는 나름의 기쁨 맘일지라도 하산길의 봉우리에 봉우리는 지루하고 답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산길 가야산 송림능선 오른 쪽에는 보원사지와 서산 마애삼존불이 있다.
시간 허락한다면 꼭 같이 가보고 싶은 곳이지만 지금 이곳을 갈 시간도 기력도 없었다.
그러나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마애삼존불은 몇 차례 가본 곳임에도 그때마다 받은 감동은 남다른 것이었다.
1500년도 넘게 그곳에 있었지만 마을 몇 사람만 알고 있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산속 깊은 오지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에야 길이 나고 잘 닦여 있어 쉽게 접근이 가능하지만 아마도 그곳에 마애삼존불을 조각하던 그 시절에도 길도 없고 더구나 인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곳에 날마다 남몰래 올라 그저 신앙심 하나만으로 그리도 아름다운 불상을 조각 했을 것이다.
상상을 해보라!
지금처럼 기계로 쉽게 올라 터를 닦고 작업대를 세우고 작업할 수 있는 그런 처지와 장소가 아니다.
오르지 밧줄에 몸을 매달고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지 않는 조각을 해야 한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밀고 다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세한 실수라도 있을라치면 그 조각은 끝이다.
만일 이쪽이 생각대로 안 되었다 생각되면 그건 실패를 의미한다.
딱 한번이라도 말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조각은 완전무결하니 이건 단 한 번에 조각한 예술품이다.
실패해 다시 고치고 다듬고 해서는 조각 할 수 없는 것이 자연석에 하는 조각이다.
예술가들은 돌을 조각내어 마음에 들 때까지 버리고 다른 돌에 다시 깎고 다듬어 조각한다.
그러나 자연석에 매달려 조각한다 함은 그런 시행착오란 있을 수 없다.
생명과 같은 신앙심과 예술혼 그리고 살인적인 끈기와 염원이 한데 어우러져 있지 않으면 단한번의 조각으로 저 아름다운 조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에 올라 미소가 어쩌고저쩌고, 신앙이 다르니 그저 그렇다는 둥 하는 왁자지껄하는 소리를 난 그곳에 오는 이로부터 들어 안다.
예술이 어떻고 하는 것보다 난, 이름 없는 어느 예술가의 숭고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차라리 그 조각을 보기가 겁이 난다.
어떤 일에 그토록 자기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석굴암이 그렇고 연주사 동부도가 그렇고 그 아름다움이야 서산 마애삼존불 못치 않지만 보는 이 없는 산중에 그것도 자연석에 저리도 아름다운 조각을 하는 것은 그 격이 다르다. 


서산 마애삼존불
 

마애삼존불을 보고픈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냥 지나쳐 올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냥 지나쳤던 상왕산 정상(정확히 그곳이 상왕산 정상인지 나도 잘 모른다)에 자리한 전망대에 올라 남은 막걸리를 마저 마시며 서둘러 내려온 탓에 조금 남은 태양의 마지막 향연을 바라 볼 수 있었다.
내포평야 끝단을 서서히 넘어가는 장엄한 태양을 뒤로 하고, 마주앉아 마시는 막걸리 맛이 어떨까하겠지만 이미 지친 우리에겐 그 맛이란 그저 그런 것이었다.
그 보다 어느 정도 술이 거나한 상태다보니 요리 빼고 저리 빼고 한다.
정상이 아니라 하산길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전망대라고는 하지만 산 정상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
얄밉게도 산꼭대기에는 묘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인심 좋은 나반장님이 막걸리 한잔 묘에 나누어 부어주고 내려왔다.

 

그런 나반장님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이력과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 험한 일 다 해낼까?
반신반의하며 채용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그이지만 이일 저일 마다하지 않고 성실히 해내는 걸을 지켜보며, 이곳에 있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훗날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며 차곡차곡 자신을 쌓아가는 모습에 난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내 해주는 것 없이 지켜보아야만 하는 맘은 참으로 미안타.
능력도 있고 성품도 원만하고 너그러우니 경력 쌓이고 준비하는 일 잘되면 제 하고자 하는 일 너끈히 해 낼 것이라 믿는다.

전망대를 내려와 소나무 숲을 걸어오며 누가 꺼내는지 알 수 없지만 이야기는 발전하여 자식애기로 가득해 진다.
내겐 딸이 셋인데 그 딸 자랑으로 팔불출이 되곤 한다.
내 못지않게 딸에 열 올리는 분이 있으니 그분이 김과장님이다.
난 그래도 이제 대학생이 둘이고 막내가 초등학생이니 좀 덜하지만 아직 유치원생으로부터 아래로 둘이 더 있으니 딸만 셋이다.
아직 젖먹이 아기도 있으니 정신없고 부산스러워 딸 자랑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연신 딸 자랑이다.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분명 그건 딸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다.
그래도 우리 사무실에서는 젊은 측에 속하는 나이다.
젊은이로서 혈기도 있고 의욕도 있어, 관리소 일하기가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럼에도 그 혈기 다 죽이고 묵묵히 관리소장 따라, 나이든 기사님 따라 혹은 가르쳐 주고 혹은 배우며 잘도 해낸다.
그런 과장님이 난 고맙고 감사하다.
다른 사무실에 비해 그 처우가 신통치 않음에도 날 믿고 따라주니 고맙기 그지없는 것이다.
나이든 사람들 뜻 맞추느라 힘들었을 과장님의 그 심사에 애틋함을 내 잊지 않고 기억하련다.
 
아름드리 소나무를 안아보고 만져보고 연신 경탄을 금치 못하며, 아픈 다리에 신음까지 내 뱉으며 걷는 하산 길은 늦은 시간이라 하산하는 등산객을 단 한사람도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서두른 까닭에 저물기 전에 내려와 개심사에 다다르니 오늘 참석치 못하고 근무 중인 임 반장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임반장님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나이 들어 우리 사무실에서는 가장 어르신이시다.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항상 보고 배워야 할 분이시지만 어찌 어찌하여 우리 사무실에 와, 나이 어린 소장 밑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그 연유야 개인사(個人史)이니 내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만 어린 소장 보기가 그래서 일까?
내 몸 아껴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면 어디서 쉬려니 하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마다 어디선가 일하고 계신다.
쉬는 모습이라곤 좀처럼 볼 수 없어, 그에 맞는 대우도 해주지 못하는 난, 항상 민망하기 그지없다.
관리소 일이란 것이 그렇듯, 정해진 일보다 그 외에 일이 훨씬 더 많다.
세대 민원이라는 것도 관리소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닐 때가 대부분이지만 임 반장님이 그걸 가리는 걸, 본 적이 없다.
그 민원이 무엇이든 그저 묵묵히 다 해주시고 오신다.
이런 모습 때문일까?
입주민으로부터 주전부리 음식도 곧잘 받아오시는 분도 임 반장님이신 걸 보면, 아마 입주민들께서도 보시기에 이분이 몸 아끼지 않고 도와주는 고마운 분으로 느끼시는 것 같다.
가려 일하는 분에게 그런 고마움의 표시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듯, 이분이라고 어찌 부족한 점, 못마땅한 점이 없을까!
무뚝뚝하고 말이 없고, 남 말하는 것에 재미있게 받아 내는 분이 아니신 까닭에 공연한 오해를 받는가 하면, 잘못하고 부족한 점이 눈에 띨라 치면 입주민들로 부터 혹독한 대가를 치르시곤 한다.
이를 바라보는 사무실 직원들의 가슴은 안타까이 저려온다.


가야산 모습(예전에 찍은 사진)

임반장님에 대한 마음을 털어내듯 우리는 개심사에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특히 돌을 쌓아 만든 창고며, 감나무, 그리고 기기묘묘하게 뒤틀린 나무를 보며 갖가지 상상을 곁들여 말하니 마치 어린애들이 따로 없다.
“마음 열다”라는 의미의 개심사, 그 이름으로도 마음을 편안케 하지만 무엇보다 주변 소나무 경관은 참으로 아름답다.
소나무 숲을 지나 하나하나 듬성듬성 돌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洗心洞이라는 선돌이 있다.
아마도 “마음을 씻고 개심사에 올라 마음 열라”는 것일 게다.
거참!
이럴 때면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
내 마음과 몸 그리고 언행이 어떠했는지를….

2011년 2월 12일 토요일
관리소 직원 김명옥 나정수 김성환과 함께 가야산 산행을 하면서
--문 시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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