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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01-14 조회수 : 3,405
제 목 : 강가에 앉아서 41

 

강가에 앉아서 41
 
한 해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지인들에게 “새해는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새해가 되면 나누는 이 인사는 그저 인사정도가 아니라 특별히 무언가를 기원하는 말을 실어 오가는 인사다.
“복 많이 받으세요!” 혹은 “건강하세요!”, 등등.
보통은 힘들여 이루려고 해도 자신에 의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기원한다.
시간을 들여 노력해 이룰 수 있는 일을 기원하지 않는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평상시에도 벌 수 있는 “올해도 1000만원 수입을 올리세요!”라고 기원하면 어떻겠는가!
노력하면 가능한 것을 기원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원한다 함은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니, 절대자에게 이룰 수 있게 해달고 빌어주겠다는 행위이다.
그런데 요 근래에 새해 인사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인사에도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라 함은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이다.
다시 말해 남보다 더 노력하고, 더 시간을 투자해서 남보다 덜 소비해 모으면 부자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부자는 누구나에게 가능한 일이다.
단지 그 가능성을 이용해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자 되세요!”라고 기원하며 인사한다.
왜 일까? 아마도 우리 사회가 부자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불공평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다행히도 요 근래에는 들어서는 그런 기원실린 인사를 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갑자기 기회가 균등한 공정한 사회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인사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또 다른 사회적 사건들 때문에 기원할 일 많아서 인 것 같아 찹찹해진다.
자고로 많은 사람들이 기원할 일이 많아진다면, 그것은 좋은 사회라 말할 수는 없을 게다.
사람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곤궁한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절대적인 힘을 기대여 보려고 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지만 지금처럼 풍요로운 세상에 살아가면서 자기 힘이 아닌 절대자에 힘을 빌려고 하는 것은 그 처지가 상대와 비교하여 열악하다고 하는 상대적 빈곤이라 할 수 있다.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사회에서 절대자에 대한 태도와 상대적 빈곤이라는 사회에서 하는 절대자에 대한 태도는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절대적 힘에 기대여 해결하려는 시도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도 절절한 어려움에 처한 이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예나 지금이나 기원하고 기도한다는 사람들의 행태는 변함이 없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성황당이니 혹은 굿이니 하여, 집안에 우환을 없애고 복을 비는 행위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10살적의 일이었을까?
확실치는 않지만 어름어름한 기억 속에 우리 동네에도, 그게 무속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옆집 아주머니는 뒷산 바위 난간에 조그만 항아리를 올려놓곤 했다.
동네 끝자락에 5가구만 모여 살았던 마을이어서 같은 나이에 친구가 나 말고 여자애 1명에 남자애 2명이 더 있었다.
겨울철이면 변변한 겉옷도 없는 터여서 멀리 본 동네로 놀러간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터라 허구한 날, 넷이 모여 놀았다.
“코피”를 잘 흘린다하여 별명이 “코피”라 했으며, 잘 토라진다하여 “삐지”, 날 두고 아이들을 잘 괴롭힌다하여 “쐐기”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다.
긴긴 겨울철 집 밖에 나가 논다는 것이 여의치 않은 것이어서 이집 저집 돌아가며 놀았다는데, 집안에서 논다는 것이 다양할 수 없어 무얼 어떻게 놀아야 할지 여간 고민이 아니다.
무얼 해보아도 재미없는 아이들에게 “삐지”네 어머니가 정성스레 목욕하고는 머리까지 곱게 단장하고, 게다가 깨끗한 하얀 무명옷으로 갈아입고서 반들반들 잘 닦은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산으로 가는 모습이란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그처럼 잘 차려입고 어디를 가는 곳은 읍내이여야 하는데, 읍내가 아니라 뒷산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넷이 슬금슬금 뒤따르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 “삐지”네 어머니를 뒤따라 산으로 갔다. 그다지 크지 않은 뒷산 바위 난간에 항아리를 어렵게 올려놓은 다음, 아주머니는 바위 아래로 내려와 항아리를 향해 서서 ‘무어라 무어라’ 중얼거리시더니 연신 고개 숙여 절을 했다.
그것도 모자라 큰절 세 번을 하고는 내려가셨다.
그 후 우리 넷은 그 항아리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삐지” 엄마뿐만 아니라 “인례”네 할머니도, 우리 엄마도, “코피”네 엄마도 그 항아리 밑에서 절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우리 조무래기들에게 그 항아리는 신비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항아리에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마다 그 앞에서 기도를 하고, 절을 하는 걸까?
허나 어른들은 항아리를 열어보거나 훼손하면 큰 화(禍)를 당하게 된다고 아이들에게 윽박지르곤 했다.
가까이 가지도 말 것이며, 그 쪽에서는 아예 놀지도 말라고 단단히 이르곤 해서 그 궁금증을 더 말해 머 할까!
그렇게 얼마쯤 흘렀을까?
급기야 우리 넷 조무래기들의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어느 봄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나머지 셋 아이들을 설득하고 협박하고 그리고도 내가 모든 책임을 다진다는 언약과 우리 동네에서는 가장 유식하고 똑똑한 분으로서 유학자이신 할아버지가 그러더라하는 말까지 만들어 들려준 이후에 그 항아리를 열어보기로 작정했다.
그 날은 함박눈이 가늘게 날리던 날, 동네 어른들이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기도를 올리고, 세 번에 절을 마치고, 다 내려간 이후 서서히 어둠이 내리는 그런 오후에, 난 아이들 셋을 데리고 산에 올라 조심스럽게 바위 난간에 서서 항아리를 열었다.
뚜껑이 열리자, 항아리 입구를 고운 창호지로 덥고 동여매어져 있었다.
호기심은 여기서 멈추어야 하는데 난 그렇지가 않았다.
옆에 있던 아이들이 이제 그만 가지고 졸라대는데, 난 기어이 창호지를 뜯어보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창호지를 걷어내려다 그만 뚜껑을 놓치고 말았다.
깨진 항아리 뚜껑과 창호지를 걷어낸 순간, 속에든 볍씨와 내 가슴은 허망함과 두려움이 삽시간에 몰려오는 것이 마치 큰 파도가 덮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떻게 산을 내려왔는지 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음날 인례가 자기 할머니한테 물었는데 그 항아리를 열어보면 며칠 있으면 서서히 눈이 멀어진다고 하더란다.
“눈알이 하얗게 변해서 보이지 않는 장님이 된단다.”라는 상상만 해도 이 겁나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모여 울었고, 또 울었다.
난 지금에 와 말하지만, 그 이후 며칠을 감기로 앓아 누어야 했다.
어머니는 그게 감기라 했지만 난 눈이 멀어져가는 과정이라 여기고 상심한 나머지 앓게 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심한 열로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경험을 해야 했으니, 그 고민과 두려움을 말해 무어할까.
그 때 그 두려움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가끔 사회생활 끝에 난 그 두려움이 가슴을 헤집고 들어 올 때가 있는가 하면 악몽에 시달릴 때면 그때 그 두려움을 기억하게 된다.
그 항아리가 언제 어떻게 없어 졌는지 그리고 그 깨진 항아리 뚜껑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에 담아둔 것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금단에 뚜껑을 열어보았던 그 기억은 네 사람만의 기억에 남아 있을 뿐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추억이다.
얼마 전, 이야기 끝에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더니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신다.
코피에게 물었더니 간신히 기억해 낼 만큼 희미하단다.
하지만 내겐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지금도 추억과 두려움에 강도가 여전할 만큼 생생하다.
 
또 2011년 새해가 되었다. 사람들은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기원한다.
혹은 “건강하세요!”라고 기원한다.
그럴 때면 난 그 기억으로 몸서리치며 괴로워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2011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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