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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09-08-21 조회수 : 2,912
제 목 : 강가에 앉아서 8

강가에 앉아서 8

 

언제부터였던가? 내가 가진 것이라곤 아내와 딸 셋이 전부이니, 난 항상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데리고 다닌다. 그런데 딸 둘이 날아가 버렸다. 큰애와 둘째가 고등학생이 되었고,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 애들을, 난 엄혹한 현실에 속에 내던지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려면 고등학교 3년의 중요성은 애써 강조하지 않아도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안다. 한창 성장해야할 고등학교 3년간이 인생을 결정하는 기간이라니, 이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 현실인가? 그런 세상의 구성원으로서 무책임하게 내 딸들을 내던진 채 남은 딸 하나와 아내를 데리고, 난 또다시 못 잊어 달려간 곳이, 이제는 보고자 달려와도 볼 수 없는 내 유년의 고향이다.

 

항상 그렇지만 난 이곳에 오면 길을 잃고 만다. 그런 내가 이곳저곳을 시선을 두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다가, 헤매어 머문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수십 길이 깊은 물을 향해 난, 숲으로 몸을 숨긴 고갯길이었다. 한참을 서성이고, 애써 기억을 더듬어 그곳에 고갯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고갯길이 무엇이던가? 비탈길을 넘어 어디론가 난 길이어서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를 들고 넘었을 고갯길이다. 내 알기로 한바위 고개 너머 저편에는 “병영”이라는 동네가 있다. 그곳엔 사람들이 사뭇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이어서 제법 크게 상업이 번성한 곳이었다. 그런 병영으로 가는 한바위 고개는 “오동안”사람들이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 역할을 했던 관문이었다. 그런 탓이었을까? 내 어린 시절에도 두어 집이 한바위 고개로 가는 계곡 초입에 터잡아 살고 있었다. 옛날에는 제법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모양인데 내 초등학교 시절, 언제쯤에 마지막 남은 한집마저 오복마을로 이사 오고, 한바위 계곡 앞마을은 사라져,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옛날, 그러니까 60년 전 일까 아니면 70년 전 일까? 제법 그럴듯한 마을을 이루고 살았을 적에는 장국 재를 넘어 얼마쯤 가면 한바위 마을에 이르기 전, 주막이 하나가 있었단다. 그곳에 주막의 아낙과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을 난 숱하게 들었다. 그 주막의 늙은 아낙은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 걸까? 지금 생각해도 야릇하다. 내 삶이 힘겨우면 찾아가 막걸리 한 사발 시켜 놓고, 그 늙은 주막 아낙의 이 빠진 쉰 목소리로 부르는 진도아리랑 한소절로 안주삼아 들이키련만 본 적도 없는 아스라이 주막과 아낙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아직, 때 이른 봄이라 숲은 헐벗고 메말라 허허롭건만 내 아내, 쑥 캐러 이곳저곳 기웃거리기에 뒤 따라 찾아간 곳이 내접 산이었다. 정상으로 향하던 내 발길이 닿은 곳은 그저 퍼래서 두려움만 가득한 발길 닿지 않는 장흥댐 물이었다. 대리2구 마을 쪽으로 거의 한 바퀴 다 돌아 내가 자랐던 옻밭골을 향해, 무작정 엄청난 아사리판 숲을 헤치고 간 그곳에는, 묻혀 옴짝 달싹할 수 없을 만큼 자란 잡초들뿐이다. 보려고 아우성치건만 내가 본 것은 전망 좋은 고향 마을이 아니라 그저 두렵도록 퍼런 물뿐이었다. 그렇게 헤매어 걷던 나에게 보여준 것은 옛 길이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어서 상상의 나래 속을 헤맨 끝에 겨우 찾을 수 있는 고갯길이었다. 장국 재는 그렇듯 내가 고향에 살던 때나 지금이나 낯선 길이다. 길이 잘 다듬어진 대리마을과 오복마을 앞으로 난 길 놓아두고 산길 헤치고 거친 그 고갯길 넘어 다닐 사람이 없어진 탓에 그 길은 애지녁에 망각된 길이었다. 한바위 마을 주막 늙은 아낙을 기억하던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장국 재를 넘으면 내가 알고 기억하는 이름으로는 “뒷보”라 했던 보가 있다. 농사짓기 위해 탐진강 물길을 막아 대리 마을 앞, 논으로 물길을 내기 위해 만든 보가 뒷보다. 뒷보란 이름이 정확한지 나이 50이 된 지금도 맞는지 틀린지 잘 모르겠다. 당보(제언)를 지나 내접산에 부딪혀 방향을 돌린 강물이 바닥을 깊게 파서 제법 깊은 소를 만들고 있는데다가 조금 아래 뒷보(제언)가 있어서 소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평소 사람이 전혀 왕래가 없는 장국 재와 깊은 뒷보(제언)의 소는 높은 수인산의 그림자로 일찍 어두워지는 곳이다. 장국 재 주변에는 인적이 전혀 없는 곳이기에 저녁이 되면 불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달이 뜨건 뜨지 않건 그곳은 항상 컴컴해서 형체를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왠지 음침한 것이 영 내키지 않는 곳이었다. 조무래기 어린 시절엔 웬만해서는 그곳으로 놀러 가는 일도 없거니와 특별히 가야할 일도 없었다. 한바위 마을 초엽에 주막이 있었던 그 무렵에는 늦은 밤에도 사람들은 장국 재를 넘어 뒷보(제언)의 그 무시무시해 보이는 소를 스치고 지나갔던 모양인데, 내 어릴 적엔 어둑어둑 해질녘에 사람 지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아예 장국 재를 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옳다. 마을 앞으로 지나면 될 것을 굳지 그 험한 길로 가겠다고 고집해야 할 일도 없거니와 한바위로 아침이나 낮에 일하러 가는 사람 외에는 늦은 시간에 한바위로 갈 이유도 전혀 없었다. 저쪽 앞실보를 지나면 신월이나 월암으로 가는 길로 이용될 수도 있지만 그곳 사람들이 그다지 지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분들은 그들 나름의 세상 통하는 길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길도 변변치 않은 장국 재를 넘어 뒷보(제언) 소를 지나는 사람이란, 아마도 그때 그리도 무서운 사람인 간첩이 아니고서는 없었을 것이다. 산업시설도 없고 군부대도 없는 그곳에 간첩이 올 리도 만무하니 해질녘 뒷보는 그야말로 적막과 두려움이 서린 곳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조무래기들이 그곳을 귀신 나오는 곳으로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런 뒷보(제언)에 비가 많이 와 홍수가 나서 강물이 무섭게 흘러가더니, 날이 새고, 강물이 빠지고 흙탕물이 맑아지던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논에 나갔던 부지런한 어느 농군의 눈에, 홍수로 쓸려가지나 않았을까 조바심에 논둑보고 오던 차에 뒷보(제언) 둑에 걸린 시체가 발견되었다. 사람의 머리가 보(제언) 물막이로 쓰이던 큰 바위에 걸려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마을로 뛰어와서는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마을 이장이 달래어 듣고 달려가서 보니 열대여섯으로 보이는 소녀가 죽어 있더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아저씨 말에 의하면, 앞실들 산기슭에 홀로 홀아버지와 딸이 사는 한가구가 살았는데, 홀아버지가 일보러 나갔다가 홍수로 돌아오지 못해 혼자 있던 십대 후반의 딸이 무슨 일인지 물에 떠내려 왔다는 것이다. 다 알다시피 탐진강은 그다지 물이 많지 않아 몇 군데 소를 빼 놓고는 초등학생 허리춤밖에 안 되는 강이랄 것도 없는 개울이다. 하지만 홍수가 날나 치면 사뭇 무섭게 흐른다. 옛적에야 그 홍수 속에 얼마나 죽어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기억하건데 탐진강 상류라 할 수 있는 뒷보(제언)에 죽은 시체가 떠오르기란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개울인 보(제언)에 걸린 소녀의 시체는 조막만한 마을 몇 개가 모여 사는 오동안 사람들에게 갖가지 소문에 소문을 만들어 냈다. 어른들 속에서야 무슨 소문과 말들이 어찌 오갔는지 내 아는 바 없지만 우리 조무래기들 사이에서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그야 말로 공포의 이야기로 변질되어 전해져 회자되고 있었다. 어린 소녀는 왜 그 밤 아배 없는 집을 나와 강물에 빠져 죽은 걸까? 장가도 못가고 죽은 총각귀신에 홀려서 물에 빠졌다는 소문을 듣고는 밤에 집나가는 것은 애지녁에 포기하고 요강 없으면 그냥 이불에 오줌을 누어야 했다.

그런데 죽은 소녀의 등에 진 보퉁이에 산나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대체 소녀는 왜 산나물을 보퉁이 싸가지고 홍수로 불어난 강물로 뛰어들었을까? 정말 총각귀신의 원혼 때문일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또 산나물은 왜 가득 싸매고 있었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체가 그렇게 떠오는 것이다. 스스로 아니면 누구에게 떠밀려서…….

그 산나물은 누굴 주려고 보퉁이에 가득 담고 있었을까?

 

십대 소녀가 죽었다는 건 쉽사리 이해되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과 맞닥뜨리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상상을 자아내게 한다.

그 옛날 “가야국”의 왕 순장 묘에 17세 정도로 추산되는 소녀가 함께 묻혀있었다. 학자들은 이 무덤을 두고 순장 묘라 했다. 순장이란 죽은 사람을 위해 산사람을 같이 묻는 장례 풍습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뼈에 상처 흔적이 전혀 없는 소녀의 시신이 함께 묻혔는데 소녀의 시신의 머리 곁에 금 귀걸이가 발견되었다. 분석결과 그 금 귀걸이는 장례용으로 만들어진 장식용이 아니라 평상시에 착용하던 것이라 했다. 우리는 흔히 함께 순장된 사람들은 순장자가 부리던 노비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었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순장하는 장례 풍습이 횡행했던 고대 중국에서는 순장 인원이 최고 수백 명에 이르는 경우도 발견되는데 순장된 사람의 모습은 처참했다. 무릎이 끓린 체 목이 없는 시신에서부터 뼈가 심하게 손상된 시신들 이었다.

결국 지금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순장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순장을 원하지 않았고 강제로 죽임을 당해 매장되었다는 것이다.

오죽 거부했으면 묶인 체 목이 없이 순장되었을까? 순장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로 이루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가야의 그 순장 소녀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무릎 뼈의 성장 판이 닫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녀는 분명 소녀일 것이고 뼈의 손상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강제로 순장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노비였다면 성장상태는 몹시 안 좋아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장소녀는 육식 단백질 섭취가 많은 성장상태가 양호해 보인다고 과학자들은 분석 끝에 말한다. 이 가야의 순장소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금 귀걸이를 하고 나이든 노부부의 무덤에 반항 흔적 없이 죽었더란 말인가? 아침 식사를 하고 그리고 뒤뜰 산책을 하고 숙명처럼 무덤으로 들어가 다소곳이 숨져간 소녀…….

 

가야의 소녀도 그렇지만 언젠가, 나는 영국 대영박물관 사진 속에 소녀 미이라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소녀의 죽음은 더더욱 신비롭게 했다. 그 소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어느 여왕의 무덤에 순장된 소녀로 밝혀졌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소녀 또한 반항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동지역이라 워낙 건조한 탓에 시신은 부패되지 않고, 입은 옷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 소녀는 평소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은 체 아마포에 쌓여 순장되었는데 소녀의 호주머니에서 머리핀이 발견되었다.

순간적으로 순장 소녀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이미 순장 소녀로 운명 지어진 것이기에 순순히 순장에 이르는 과정에 동의했고 그러기에 시신의 손상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헌데 그녀의 호주머니에는 머리핀이 발견된 것이다. 왜 일까? 그녀는 머리에 핀을 꽂고 죽은 것이 아니라 호주머니에 넣은 체 죽었다. 마치 내일 아침에 일어나 머리에 꽂을 양으로 말이다.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집을 나설 때 머리핀을 호주머니에 넣고 출발했을까, 그리고 순순히 무덤으로 들어갔을까”

 

뒷보(제언)에 죽어 떠오른 그 소녀도 과연 스스로 물로 뛰어 들었을까? 마치 그럴 운명으로 타고나 숙명처럼 순순히 앞실들 앞, 한바위 보(제언) 그 퍼런 물속으로 총각귀신 원혼 달래려고 산나물 간직한 채 풍덩 뛰어든 것일까?

알 수 없는 것은 소녀가 자의(自意)로 뛰어든 것인지 아니면 아배 찾으러 그 산나물 가득 지고 강을 건너려다 변을 당한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단지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순장 소녀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산나물을 보퉁이에 쌓매고 그 깊은 밤, 물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소녀가 뒷보(제언)에서 떠오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번엔 장년을 지나 이제 늙으막에 접어든 여인이 한 많은 세상을 뒤로 한 체 뒷보(제언)의 그 퍼런 소 위로 떠올라 뒷보(제언)에 걸렸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들로 나가던 농부에게 발견되었는데 하얀 모시 죽음 옷을 곱게 차려입은 상태였다고 한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하얀 고무신 바위에 나란히 벗어놓고 죽을 때 입으려고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던 모시 치마 저고리를 꺼내 입고 저 퍼런 물속으로 이끌렸을까?

 

꼬장꼬장한 남편에게 의도하지 않게 시집와서 그 많은 세월, 뜻 맞히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삶이련만, 왜 아무도 없는 뒷보(제언)로 몰래 갔더란 말이던가?

똑똑해서 일까? 그렇지 않아서 일까? 매사 남편이란 작자는 동성촌 동네에서 분쟁을 일으켜 데는 통에 집안 아제요, 오빠요, 조카요, 아줌씨인 일가촌의 원성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했던 한 많은 세월의 삶으로 이끌렸다. 자식 많아 바람 잘날 없다고 했던가, 아무튼 자식들 많아, 다 성장한 아들들이 이런 저런 일로 다투는 일도 많고 내외하는 일도 많았다. 수더분하고 말이 없고, 그저 착하기만 한 이 여인이 물로 뛰어들어야 했던 이유야 본인이 아니니 알 수 없으나 우리네 여인들이 살아가는 삶을 보건데, 안쓰럽기 그지없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듯싶다. 세상살이 어찌되었던 저 세상에서는 제대로 살고픈 맘에 죽음 옷 곱게 입고 물로 뛰어 들었으려니 생각하니 가슴이 멍멍해 온다.

남정네야 저 잘난 맛에 산다지만 그런 남정네만 바라보고 사는 아낙이야 어쩌란 말인가? 남정네 잘못 만나 처참하게 생을 살다간 여인들이 어찌 이여인 뿐이랴!

 

조선 시대에는 당대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나간 먼 과거가 아닌 당대 일, 특히 왕가에 일을 잘못 서술했다가는 3족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중국에서 조선 왕가를 서술한 역사서가 있었는데 그게 조선왕가의 뜻과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선 왕가에서는 금서(禁書)로 정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 소유하는 것을 역모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조선 영조 때 이희천이라는 사람이 그런 금서를 소유하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잡혀가서는 한강변에서 참수(斬首)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학을 소중히 하고 목숨처럼 주자학을 존중했던 선비인지라 책을 소유하는 것은 당대에는 선비의 참다운 모습이었다. 이유야 어찌됐던 그가 선비로서 살다가 죽든, 억울하게 죽든 그 스스로 택한 것이니 불쌍타할 수 있을지언정 선택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려니 하지만 그 가족, 남편 잃고, 아버지 잃고, 자식 잃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아내와 자식들은 머나먼 흑산도까지 노비로 전락한 신분이 되어 귀양을 가야했다. 남편의 행위로 참담한 노비 생활을 했던 이희천의 부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하고 생각하니 우리나라에서 살아왔던 아낙의 운명이란 스스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덧대어진 곁다리 삶이었다.

 

그래도 이희천의 처자는 나중에 면천(免賤)되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의 처자는 더더욱 처참했다. 성삼문은 역사에 남는 충신이요, 지조 있는 선비로서 현재까지도 추앙되는 사람이지만 그에 선택하나로 노비로 전락하여 어찌되었는지 조차 알려지지 않는 처자는 어쩌란 말인가? 그들이 역적의 굴레로부터 벗어난 것은 성삼문이 죽은 지 100년이나 지난 일이니 성삼문의 처와 딸은 노비로 살다가 한 많은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남편이 거리에서 사지가 찢어지고 논공행상으로 공신들의 요구에 따라 그 가족을 노비로 나누어 가졌다. 전(傳)하는 말에 의하면 능욕당하며 노예로 살았다고 하는데, 그것도 한때는 같은 사대부로 사이좋게 지내던 사이였던 공신들의 노비로 전락하여 노리개 감으로 한 많은 삶을 살았다 한다.

 

이렇듯 성삼문의 처이든 이희천의 처이든 시골의 평범했을 아낙으로 한 많은 삶을 모시베옷 입고 푸른 강물에 몸을 던진 아낙이든 무어 다를까?

등골 휘도록 하는 노동도 주정뱅이 남편의 손찌검도 어찌어찌 산다하지만 자식들마저도 다를 바 없다면 무엇으로 살라 하겠는가?

한바위 마을 앞 주막 아낙이 그래도 속 썩이는 그런 남정네라도 있었으면 하고 중얼거릴지 몰라도 가슴에 못만 박던 남편이야 그렇다지만 자식에게서도 희망을 잃은 아낙이 무슨 힘으로 살아 갈 수 있으리오.

 

저 쪽에서 막내딸과 무어라 속삭이면서 나물 캐고 있는 아내가 있다. 나와의 삶 속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저 좋을 것도 없는 평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아내지만 내가 힘들어할 때 만나서, 진실과 거짓을 뒤섞은 갖은 구애 끝에 분에 넘치게도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난 아내에게 “상처는 주지 말자, 그리고 갖은 것은 궁핍하여도 재미있게는 살자”는 다짐 속에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어 하게 만든다. 누군들 이 세상 살아가면서 하고픈 것, 다 하고 살까마는 난 그래도 하고 싶어 하는 것 몇 가지는 하고 산다. 하고 싶어 하는 공부도 하고, 읽고 싶은 책도 읽고, 하지만 항상 잡다한 집안에 매달려 있는 아내는 과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하고 생각해 보면 나는 고개가 절로 흔들린다.

 

장국 재 넘어 뒷보(제언) 소에서는 그렇듯 한 많은 소녀와 아낙의 한이 서린 체 물 속 깊은 곳으로 침잠해 버렸다.

무서우리만치 푸른 저 물 속을 들여다보며 앉아 바라보던 장국 재는 지금은 고개가 아니다. 고개란 넘나드는 사람이 있어야 고개일 수 있는 것이다. 헌데 이젠 저 댐, 한가운데를 바라보는 시선을 가리는 아무것도 아닌 잡풀 우거진 언덕 일 뿐이다.

한바위 앞 주막자리는 어디쯤인지 알 수도 없고 전설처럼 나의 뇌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주막의 늙은 아낙은 전설 같은 이야기만 흐릿한 기억 속에 남겨둔 체 무덤하나 남기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며 싸우며 살던 오동안 사람들도 이젠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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