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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09-06-24 조회수 : 4,847
제 목 : 상식 밖의 세계사 지은이: 안효상 지음

 상식 밖의 세계사 지은이: 안효상 지음
 
  책머리에
  약간은 자극적인 제목이 붙은 이 책은 독자들에게 역사의 재미와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되는 독자들은
이미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세계사`나  `문화사`라는 이름의 과목이나 여러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이
갖는 한계 때문에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질문을 받고 자신있게 자신의 논
리를 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역사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역사란 왜
지 딱딱하고 연대기나  딸딸 외우는 것이며 어렵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역
사에 대한 올바른 지식, 나아가 나름의 역사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 관념이다. 그래서  섣불리 역사 공부를 시작해 보기도 하고  곧잘 포기하기
도 한다.
  글쓴이는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도전해 보았다. 중요하다고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나 잘
못 알려진 것들을  드러내 주거나, 또 중요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교과서나 역
사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 책의 방향을  잡았다. 그런
다음 독자들이 접근하기 쉽게 그것을 개개의 장면으로 나누고 사실의 전후 맥락
과 의의를 정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므로 목차를 보고 흥미를  느끼는 부분
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사실들을 추려 내는 것도 추려
낸 사실에  의의와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도 글쓴이의 능력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역사의 색다른 면을 밝히기 위해 얄궂게도 기존의 많은 책들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활자화된 책을  통한 도움 이외에도 글쓴이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자료를 주거나 내용을 정리해 준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역사에  대한 재미를 느끼고, 또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면이 숨어 있음을  안다면 글쓴이의 첫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더 나아가 이  책에 담긴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책을 더 읽어 나가면서
나름의 역사관을  만들어 나가기 바란다.  그래서 이런 독자들을  위해 글쓴이가
참고했거나 독자들이 더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말미에 정리해 놓았다.
  1993년 9월
  안 효 상

  1. 바벨탑의 수수께끼를 푼다

  현재 지구상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은 100개가  넘는다. 그리고 그 말이 민족
을 구별하는 주요  지표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사람들이 나라
와 민족에 따라 제각기 다른  말을 쓰게 된 것은 하늘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벌을 내린 결과라고 한다.
  성경 창세기 제 11장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동쪽으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는 의논했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
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야훼께서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
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
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  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 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후일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말을 쓰는 이유가 바벨탑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탑에 대해서만은 끊임없이 관심을  가졌다. 바벨탑은 실재했던 것일
까? 실재했다면 그 위치는 어디일까? 사람들은 이 바벨탑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
이 의문을  던졌다. 특히 이것은  기독교도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수수께끼의
하나였다.
  바벨이라는 것은 원래 `신의 문`이라는  뜻이며 후에 그리스인들은 바빌론이라
고 불렀다. 7세기  이후 이 지역 사람들은 이슬람 교도가  되었지만 바벨탑의 신
비를 쫓는  서유럽 기독교인의 방문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벨탑의 흔적을
발굴한 것은  금세기 초 독일 조사단이었다.  이들은 18년 동안이나 땅을  파 옛
바빌론의 모습을  발굴했으며 바빌론에서 가장 신성한  에사기라(성역)내에서 그
옛날의 7층탑(지구라트)의  흔적을 찾아냈다. 흔적밖에  없었지만 면밀한 조사를
통해 탑의 첫번째 층은 각변이 91미터, 일곱번째  층은 24미터이며 높이는 약 90
미터라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1차대전 이후 영국·미국  합동 조사대가 이라크 남부의 고대 유적을 10
년에 걸쳐 발굴했다. 그  결과 그곳이 기원전 2000년 전의 수메르  인의 도시 국
가 우르의 흔적임을 알 수 있었고 이 유적 가운데 탑도 있었다.
  어쨌든 오늘날 메소포타미아에는 계단  모양의 신전이 40개 이상 발견되어 있
다. 이것을 지구라트라고 부른다. 이 지구라트가 아마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벨탑
일 것이다. 하지만 40개가 넘는 탑 중에서  어느 것이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인
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왜 이런  탑이 필요했을까? 문명 발생지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지역에
수메르 인들이 자리  잡은 것은 기원전 4000년경이었다. 이들은 작은  도시 국가
들을 세웠고 도시의  중심에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웠던 것이다.  동부 산악지대
출신인 이들은 처음에는  신을 평지보다 한 단 높은 곳에  모셨지만, 메소포타미
아 지방이 두  강(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으로 인해 홍수 피해가  심한 곳이었기
때문에 단을 높이 쌓아 그 위에 신전을 모셨던 것이다.

  2. 태양신이 하사한 함무라비 법전

  자신이 당한 대로  상대방에게 해주는 것을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 성경의  히브리 사람들의 율법에도 나온다.
이러한 보복의 사상이  최초로 표현된 것은 함무라비 왕(Hammurabi, B.C.  1728
∼1686)의 법전에서이다.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개방된 평원지대였기 때문에 수
많은 민족의 이주와 정복,  이에 따른 지배자의 교체가 잇따랐다. 기원전 2350년
경에 셈 족인 아카드 인(Akkadians)이 처음으로 통일  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오
래 가지 못하고  같은 셈 족인 아무르  인(Amurites)이 바빌로니아 왕국을 세워
다시 이 지역을  통일했다. 이 왕국은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왕  시대에 전성기
를 맞이했다. 함무라비 왕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정비하고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
었다.
  우리가 이 함무라비 법전을 알게  된 것은 법조문이 새겨진 비문이 발견된 덕
분이다. 1901년 프랑스의 드 모르간(De Morgan)이  지휘하는 페르시아 탐험대가
수사(Susa:페르시아 만  북방에 있는 고대  도시의 유적)에서 큰 돌기둥  하나를
발굴했다. 세 토막으로 끊어져  있었지만 이어 보니 완전한 모습이었다. 이 돌기
둥은 높이 2.5미터, 둘레가  1.8미터였다. 그리고 돌기둥의 상부에는 함무라비 왕
이 태양신으로부터 법전을  받는 광경이 조각되어 있다. 즉 함무라비  왕이 지상
의 백성을 통치하는 권한을 신으로부터 위임받는다는 뜻이다.
  이 돌기둥에는 이란의 고대 문자인 설형 문자가  촘촘히 새겨져 있다. 이 문자
를 해독한  결과 그것이 법률 조문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함무라비 법전은
282조로 되어 있는데 토지 제도, 재산, 결혼, 상속, 범죄에 대한 형벌 등 여러 규
정을 담고 있다.
  이 법전에서 견지하고  있는 원칙은 중형주의와 보복주의이다.  중형주의의 예
로는 절도의 경우  10배, 20배, 30배를 물거나 사형, 술을  마신 성직자는 화형을
집행한 것 등이다.
  `만약 누군가(귀족)가 다른  사람(귀족)의 눈을 상하게 하면 그의 눈도  상하게
한다. 만약 그가 타인(귀족)의 뼈를 부러뜨렸을 때는 은 1마나를  지불한다`는 조
문은 보복주의의 예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딸을 때려서 유산하게  하면 자기의
딸이 사형당하며, 목수가  집을 짓다가 무너져서 주인의 딸이 죽으면  목수의 딸
이 죽어야 한다는 것도 보복주의 원칙이 나타나 있는 예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이 법의  적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앞에 든
예문처럼 동등한 보복은 귀족들 사이의 사건에  한정되었다. 그리고 평민의 범죄
는 귀족의 범죄보다 더 중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함무라비 법전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가장 완전한 첫 성문 법전으로
당시의 사회를 비교적  소상히 전해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함무라비  법전이 새
겨져 있는 이 돌기둥은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3. 이집트의 미라도 자격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미라이다.  물론 미라는 이
집트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는 미라  보존에 적
합해 현재까지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이 미라에는 고대 이집트 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고
대 이집트 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사람의 몸을 떠나지만 후일 영혼이
다시 시체로 돌아와서  죽은 후에도 삶이 지속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고 방식
은 `오시리스 신화`에도 남아 있다.  그 신화에 따르면 지상의 모든 인류를 훌륭
하게 다스리는 자비로운 왕 오시리스가 있었는데 이를 질시한 동생이 그를 죽여
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떠내려 보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이시스가  고생 끝에
남편의 유해를 찾아 관에 정성스럽게 모셨다. 하지만  그의 동생이 다시 관을 찾
아내어 오시리스의 유해를  조각조각내어 이집트 전역에 뿌렸다.  그러나 이시스
는 다시 남편의  유해를 미라로 만들었다. 이후 소생한 오시리스는  죽은 사람들
의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새로운 왕이  되었다. 이 신
화는 왕이 사후에 부활해 신이  다스리는 세계의 왕이 되어 영원한 삶을 보낸다
는 고대 이집트  인의 내세관을 보여준다. 이러한 믿음에 바탕해서  만들어진 것
이 영혼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한 미라이다.
  그런데 아무나 영혼이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아무나 미라가 되지
는 못했다. 고대 이집트 초기에 미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파라오(pharaoh: 이집
트의 왕)뿐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신의 후손이자 신과 같은 존재여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국가였으며 국토 전체는  형식상 파라
오의 소유였고 상업,  농업 등 모든 경제  활동이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렇듯
전제 국가였던 고대 이집트에서 최고 지배자인 파라오만이 미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중왕국 시대에 이르러  귀족들도 영혼이 다시 돌아온다고 믿게 되었
다. 그뿐만 아니라 신의 의지에 따라 종교적  계율을 열심히 지키다가 일생을 마
친 일반 사람들 역시 내세에 부활하여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드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그리스 역사가 헤
로도투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미라 만드는 전문 직인도 있었다고 한다.
  미라 만드는 방법은 우선  사체에서 뇌를, 다음으로 내장을 끄집어낸다. 그 다
음 소금, 향료, 수지의 혼합물을 이용하여  사체에 방부 처리를 하고 건조시킨다.
이후 미라의 속을 채우고 끝으로 아마포로 몇 겹씩 감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라는  유가족에게 돌아와서 상징적인 의미의 `입을  벌리는
의식`을 받는다. 이것은 죽은 자로 하여금  다시 먹고 마시고 말할 수 있게 한다
는 뜻에서 치러진 의식이다. 이로써 미라는 무덤  속으로 들어갈 모든 채비를 갖
추게 된다.
  하지만 일반 사람도 미라가 될 수 있게  된 다음에도 차별은 존재했다. 그것은
재력에 따른 것이었는데 미라 만드는 사람에게 대금을 지불하는 정도에 따라 세
등급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훌륭한 미라가 되는 것은 부자들뿐이었을 것이다.

  4. 알파벳이 생겨난 경위

  오늘날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자는 크게 1)알파벳 체계, 2)한자 체계, 3)기
타로 분류될 수 있다. 이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알파벳 체계이다.
  보통 알파벳이라고 하면 라틴 문자 체계를 떠올리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
이 영어 26자이다. 하지만  이외에도 그리스 문자 체계, 셈 문자 체계, 인도.남아
시아 문자 체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셈 문자 체계에  속하는 페니키아 문자가
알파벳 문자 체계 전체의 모태가 되었다.
  기원전 10세기경  셈 어족의 한 파인  페니키아 인(Phoenican)이 레바논  산맥
서쪽에 정착하여  지중해 연안에 티루스(Tyrus),  시돈(Sidon), 비블로스(Byblos)
등의 도시를  건설했다. 이들은 지중해를  무대로 교역과 식민  활동에 힘썼는데
나중에 로마와 대결하게 되는 카르타고도 페니키아가 기원전 9세기에 세운 식민
지이다. 페니키아 인은 지중해 일대의 산물, 즉 레바논의 목재, 키프로스의 주석,
이베리아 반도의 납 그리고 양모, 포도주, 곡물 등을 매매하여 번영했다.
  당시 사용되던 문자는 이집트의 상형 문자,  메소포타미아의 설형 문자 등이었
는데 복잡하기 짝이 없어 배우기가 쉽지 않았고 상업 활동의 실용성면에서도 매
우 불편했다. 따라서  페니키아 인들은 상업 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쓰기
에 편리한 표음 문자인 알파벳을 고안했다.
  최초의 페니키아 문자는 이집트의  상형 문자의 영향을 받아 기원전 17∼16세
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22개의 자음만을 표기하는  문자 체
계였는데 22개라 누구나 쉽게 깨우칠  수 있어서 페니키아 인에 의해 지중해 주
변 지역으로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비블로스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 일대에는
다수의 페니키아 어 각문이 남아 있으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923년 비
블로스에서 발견된 아히람 왕(기원전 11세경으로  추측)의 석관에 새겨진 각문이
있다.
  그리스 인이  이 문자 체계를 들여온  것은 기원전 9세기였다.  그리스 인들은
이것을 그리스 어의  성질에 맞게 변화시켰다. 즉 페니키아 문자는  자음밖에 표
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모음을 더해 오늘날 알파벳의  원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 계통에서 쓰이는 슬라브 문자 체계는 그리스 문
자를 모태로 하여 만들어졌다.
  그리스 인이 페니키아 문자를 받아들인 얼마 후 중부 이탈리아의 고대 민족인
에트루리아 인들도 당시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그리스 식민지와의 접촉을 통해
이를 받아들여 에트루리아 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했다.  그 후 이는 로마 인에게
채택되어 라틴 알파벳(로마자)이 만들어졌고 로마 제국 전역에 보급되었다. 로마
시대의 라틴 문자는  23자였으나 중세에 이르러 I에서 J가 불리되고  Y에서 U와
W가 분리되어 현재의  26자가 되었다. 알파벳의 대명사인 이 라틴  문자는 현재
알파벳을 직접 쓰지 않는 곳에서도 기호 등의 보조 문자로서 광범위하게 사용되
고 있다.

  5. 신의 계시를 받은 살라미스 해전

  마라톤 경기가 페르시아와 아테네 사이에 벌어졌던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
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아테네는 민
주 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동방의 페르시아라는 강
국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서쪽으로의 진출을 꾀했고  먼저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들을  굴복시켰다. 페
르시아의 다음 목표는 그리스 본토였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25마일 떨어진 곳인 마라톤
(Marathon)에 상륙했다.  애국심에 불타는 아테네의  중무장 보병들은  자기들의
두 배가 넘는  페르시아 군대를 이곳에서 격파했다.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병사가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는 “기뻐하라, 우리의 승리를”이라
는 한 마디를 외친  후 곧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마라톤 전투에서의 승리는
중무장하고 전투에 나선 아테네 시민의 승리였으며 민주정치의 승리라 할 수 있
다. 이것이 마라톤 경기의 기원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페르시아의  위협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480년 다리
우스를 계승한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침략하기 위해 몸소 대군을
진두 지휘했다.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여 아테네는  델포이에 있는 태양의 신 아폴론의 신전에
사람을 보내  신의 계시를 받아 오게  했다. 이것은 당시 정치의  신정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의 계시는 절망적이었다. 다시 한번 계시를
간청하자 약간은 희망적인 내용이었다. 나무로 만든 벽 뒤에 숨으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나무로 만든 벽`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의견이 분분
했다. 이 때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사람이 `나무로 만든 벽`이란 배를 뜻한다고 주
장했다. 그는  원래 해군의 증강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으로 이미  2년 전에
그가 제안했던 배 200척이 건조되어  있었다. 아테네의 민회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아테네  시민은 모든 부녀자와 노인을  사라미스 섬으로 피신시키고
싸울 수 있는 남자는 200척의  배에 올라 페르시아 군과 싸울 준비를 한다는 결
정을 내렸다.
  당시 아테네가 가지고  있던 200척의 배는 3단  노선이었으며 길이는 약 40미
터, 폭은 6미터였다.  그리고 노를 젓는 데는 100명 이상의  사람이 필요했다. 뱃
머리에는 충각이라고 하는 뾰족한 것이 달려 있었는데 이것은 나무 뿌리를 날카
롭게 깎아  청동을 입힌 것이었다.  전속력으로 적함에 다가가  이것으로 적함의
옆구리를 찔러 침몰시키는  것이 당시 사용된 전술이었다. 따라서 노를  젓는 사
람의 기술과 일치된 단결심이 승리의 열쇠였다.
  결전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상에서  벌어졌다. 아테네를 버리고 해상에서
페르시아 군에 맞서  싸운다는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다. 400척이  넘는 페르시아
배의 절반 이상이 침몰했고 크세르크세스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테네는
승리했고 민주 정치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 살라미스의 승리는 아테네 민주주의에 변화를  가져왔다. 10년 전 마라톤에
서의 승리는 중무장한 보병의 승리였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창과 방패 등 무기
는 시민이 자비로  구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시민만이
보병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무장을 할 수 없었던 가난한  시민은 전투에 참가
할 수 없었고  정치적 발언권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는 가난한 시민들이 노 젓는 사람으로  활약했다. 아테네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 낸  이들은 이제 정치 무대에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힘있게 펼  수 있었다.
이전의 민주 정치가 중무장한  시민들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면 이제는 가난한 시
민을 포함하는 새로운 민주 정치로 변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6. 아테네 민주주의의 명암

  민주주의를 가리키는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말이 그리스 어인 데모크라
티아(인민의 지배)에서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가  가장
먼저 성립하고 발전한 것도 그리스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정착한 것
은 아니어서  기원전 8세기 도시 국가인  폴리스(polis)가 성립했을 때는  귀족이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기원전  5세기까지 폴리스의 역사는 귀족에 맞
서 평민이 정치적 권한을 증대시키려고 노력한  역사였다. 그리하여 페르시아 전
쟁(기원전 5세기 후반)  직전에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 제도가 마련되고  전쟁 이
후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지도자의  이름을  따  페리클레스   시대(기원전
457-459)라고 한다.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실현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명문귀족 출
신의 펠리클레스를 지도자로  내세워 보수파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먼저 주목
되는 것은 민회의 권한이 대폭 강화된 것이다.  시민권을 가진 성년 남자 전원이
참석하여 발언할 수 있는 민회는 행정, 입법의 최고 기관이 되었다. 그리고 재판
권도 추첨에 의해 재판관을 선출하는 시민 법정이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적 번영과  동맹시로부터의 공납금으로 공직자들에게 보수를 지급
할 수 있었는데, 이런 수당제의 실시는 가난한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가
능하게 했다. 이전에 수당이 지급되지 않을 때는  직접 일하지 않고도 생활이 가
능한 부유한 시민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민주 정치의 기본  원리는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의 차이를 없
애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테네에서는 관리의 임기를 1년으로 정하고  중임을 금
지했으며 관리의 선출 방식도 추점제였다. 당시  아테네 인들은 추점제가 선거보
다 공평하고 민주적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그리스  인들이 제비 뽑기를 좋아했다
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예외도 있었다. 국방의 책임을 지는  장군들은 추첨에 의해서가 아니
라 경험과 능력에 의해 10명이 뽑혔으며 또한  중임도 인정했다. 그런데 점차 이
들의 권한이 확대되어 모든 내외 정책이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페리클레스가 30
년 가까이 아테네를 지도할 수 있었던 것도 장군으로 매년 민회에서 재선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한다는 이상을 실현한 것 같은 페리클레
스 시대의 민주주의도  기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즉 정치에  참여하는 시
민에는 성년 남자만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여자나 재류 외국인, 노예는 포함되지
않았다. 특히 페리클레스는 시민권을 얻는 자격을  엄격히 규정하여 부모 모두가
아테네 인인 경우로 제한했다. 기원전 5세기 중반 아테네의 시민수는 약 3만 명,
그리고 여기에 가족수를 합하면 약 12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 시민권이 없
는 외국인이 약  1만 명, 노예는 시기에  따라 4만 명에서 10만 명  이상일 때도
있었다. 이렇게  아테네 전 인구 중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수가  적었다는 것이
아테네 직접 민주주의의 한계였지만  또한 이 한계가 직접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 원천이기도 했다.
  그리고 민주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능력
이 필요했다. 일단 생산적인 일에서 벗어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
했다. 또한 단순히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법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민
회에서 훌륭한 연설을 하여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운영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
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달려나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시민은 이러한  능력을 키우기 위해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다. 이러한
여유는 노예의 존재에서 나왔다. 당시 아테네 시민은  한 사람당 평균 두세 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노동은 노예에게  맡기고 시민은 정치, 학문, 체육
에 전념했다. 이것이 시민의  이상이었다. 경우에 따라 노예와 함께 일하기도 했
지만 육체적인 노동은  항상 노예의 몫이었다. 시민은 이렇게 여유  있는 신분으
로서 민주주의를 향유했던 것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문자 그대로 민주주의(데모크라티아, 즉 인민의 지배)를 달성
하려 했고 어느 정도  그것을 향유했다. 하지만 그들이 향유한 민주주의는 여성,
외국인 특히 노예를  배제한 제한된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민주주의에서 배제한 노예의 노동에 의해 민주  정치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이기는 했지만  여타 신분을 배제한
시민만의 민주주의였다. 진정으로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이상은 평등
을 이념으로 한 시민 혁명 이후에나 본질적으로 제기될 문제였다.

  7.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은 알렉산더

  굉장히 어려운  문제나 일을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라고 한다. 이  말의 기원은
알렉산더 대왕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알렉산더는  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폴리스(도시 국가)들이 쇠퇴하고  그 대신 그리스 북쪽
의  마케도니아가 흥기했다.  기원전 359년에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오른  필립
(Philip)은 정치, 군사적 개혁을 통해  강력한 통일 왕국을 만들고 막강한 상비군
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개별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그리스를 통합하여 페
르시아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맞서 아테네는  테베와 연합하여 대항했지만 기원전 338년에 케로네아에
서 크게 패했다. 승리한 필립은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규합하여 페르시아 원정길
에 오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암살되고(기원전336)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동방 원정길에
올랐다. 그는 먼저 소아시아를 정복했다. 여기서 페르시아 군을 몰아낸 알렉산더
는 소아시아의 중앙에 있는 고르디우스에 들어섰다.
  이 도시에는 제우스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의  기둥에 한 대의 짐수레가 단단
히 묶여 있었는데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를 지배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매듭은 너무 절묘하게 묶여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풀지 못하
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알렉산더는 신전으로 가서,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들고 단칼
에 그 매듭을 베어 버렸다. 이제 그는  아시아의 지배자로서 지위를 약속받게 되
었다. 하지만 그것은 매듭을 푼 것은 아니라 난폭하게 잘라 버린 것이었다. 고르
디우스의 매듭을 풀지 않고 잘라  버린 것은 알렉산더와 그의 제국의 미래를 보
여 주는 것이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는 알렉산더는 먼저 후방을 평정하기 위해 이집트를 정복하
고 나일 강 하구에 알렉산드리아라는 그리스식 도시를 건설했다(기원전 331). 이
도시는 이후 300년 동안 세계 최대의 도시로 번성했다.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평정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와 마지막 결전을 치르기 위
해 또다시 동방으로  향했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는 티그리스  동쪽의 가우가
멜라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페르시아의  국왕 다리우스 3세는 중앙아시
아로 도망쳤다가 거기에서 살해되었다. 페르시아는 멸망한 것이다.
  이제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 그리스 세계의 대표자뿐만  아니라 페르시
아 제국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도 차지하게 되었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는 인도로 향했다. 당시  그리스 인들은 인더스 강 너머
에 동쪽 세계의 끝이  있고 그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고 생각했다. 세
계의 끝에 도달하여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 알렉산더의 꿈이었
다.
  그러나 그 꿈은 실현될 수 없었다. 인더스  강을 넘어서도 아시아 대륙은 끝없
이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알렉산더의 군대가 처음 경험하는 인도의  자연 환경
은 너무나 지독했다. 무더위와 장마가 그들을 괴롭혔고  식량 부족도 한 몫 거들
었다. 거기에다 주민들의 저항마저 만만치 않았다.
  지친 군대는 알렉산더에게  원정의 중지를 요구했다. 이틀이나  고민하던 알렉
산더는 마침내  철수 명령을 내렸다.  고생고생하여 그들이 옛  페르시아의 도시
수사로 돌아온 것은  기원전 324년이었다. 마케도니아를 출발한 지  10년이 지난
뒤였다.
  다음해 바빌론에서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알렉산더는 예기치 않게 말라리
아에 걸려 32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세계를  정복한 그도 자연의 질병에는 맞
설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후 알렉산더의 대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제국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후계자들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던 것이다. 권력  다툼 끝에 세 왕실이 유
력한 존재로 남게 되었다. 오리엔트와 소아시아의  일부를 지배하는 시리아의 셀
레쿠스(Selecus)왕실, 이집트의 프톨레미(Ptolemy)왕실,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누스
(Antigonus)왕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개의 나라도 끊임없이 대립했다.
  10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지중해와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기에 알
렉산더는 대왕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정복자였다. 하지만  그의 정복은 말 그대
로 군사적  정복을 넘어서지 못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랐기  때문에 그는
아시아의 정복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잘라 버린 매듭처럼 그의 제국도
그가 죽은 후 조각조각 잘려 나갔던 것이다.

  8. 중국인들은 왜 가을을 싫어하나?

  우리는 중국의  역사를 지나치게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중화사상과 주로 중국측 기록에 의존한
우리의 역사 지식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병자호란 때 우리가  겪었던 삼전
도의 치욕이나 일제 36년의 식민지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국인은 수
많은 치욕과 수모를 겪어 왔다.
  기원 전후경 중국은 빈번히 흉노라고 불리는 북방 기마민족의 침입을 받아 그
방비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흉노는 몽고계 또는 투르크 계로  불리는데 활솜
씨와 승마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 언제나 바람처럼 기습하여 활세례를 퍼붓고 물
건을 약탈한 후 바람처럼 사라지곤 했다.
  평상시 그들은 중국 북부에 흩어져  살면서 말을 타고 유목과 수렵 생활을 하
고 있었다. 초원에서는 봄에서 여름에 걸쳐 배부르게  풀을 먹은 말이 가을이 되
면 통통하게 살이 오르지만 어느새 풀은 시들고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면 대지는
꽁꽁 얼어붙게 된다.
  겨울이 오기 전에 흉노는 살찐  말에 올라타고 겨울 식량을 구하기 위해 따뜻
한 남쪽 중국 본토로 밀려온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은 가을이 되면 흉노의 습
격을 두려워했다.  <한서>는 `흉노는 가을에 온다.  살찐 말과 강한  활과 함께`
라고 중국인들의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약 350년간은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와
남방의 농경민족인  한이 전쟁과 화친을  되풀이한 남북 대립의  시대였다. 당시
양측의 관계는 힘으로서는 굴욕적이다  싶을 정도로 흉노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
서 유지되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선우(흉노의 최고 지도자)에  오른 묵특이 만리장성  이북의
초원지대를 통일한 때는  마침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멸하고 한을  세운 때였다.
이 두 거대 세력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기원전 201년 유방의  심복이었던 장군 한신이 흉노군에 포위당하자  투항, 흉
노 편에 가담한  사건이 발생했다. 진노한 유방은 직접 대군을  지휘하여 흉노를
공격하다가 평성이라는 곳에서  묵특의 군사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죽음의 위
기에 빠진 그는  묵특의 부인에게 뇌물을 주고 구명을 호소했다.  그녀는 묵특을
“두 군주께서는 서로  다투지 마십시오.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초
원에서 말 달리신 선우께서는 끝내 그곳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라며 설득했다.
  묵특은 이에 유방의  목숨을 건져 주고 화친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형제맹약의 체결, 한의 공주가 선우에게 시집갈  것, 흉노에게 매년 솜, 비단, 술,
곡식 등  물자를 공급할 것  등이었다. 한으로서는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고
이런 형태의 조약은  이후의 역사에서 송, 명과 북방의 거란,  여진, 몽고족 사이
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흉노가 한을 얼마나 조롱했던가를 좀더 살펴보자.
  한고조 유방이 죽은  후 선우는 유방의 미망인에게 편지를 띄운다.  “나 의로
운 군주는  소와 말이 가득한 들판  가운데서 항상 죽국에 가  노닐고 싶었노라.
이제 그대도 홀로 되었고 독수공방 외로우니 우리 두 사람 모두 즐겁지 않을 것
같소. 우리 서로 갖고 있는 것과 갖지 않은 것을 바꿔 봄이 어떻소.” 이런 모욕
적인 추파에 유방의 미망인은 “선우께서  저희 나라를 잊지 않고 글을 내려 주
시니 우리는 그저 두렵기만 할 뿐입니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는 연로
하고 기력이 쇠하여  보행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선우께서는 과히  허물치 마시
고 제게 그같이  힘든 일을 요구하지 말아  주십시오. 대신 수레 두 대와  말 두
짝을 보내 드리옵니다” 라는 답장을 했다. 이는  한-흉노 관계가 거의 일방적이
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화친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흉노는 2,3년을 주기로  주로 가을에 중국을 침략했
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조약을 체결, 물자를 약탈해 갔다.
  이런 관계가 한의 우위로 뒤바뀐 것은 월남과 조선을 정벌하여 무위를 떨쳤던
한무제 때에 이르러서였다.

  9. 한나라 농민은 모두 귀족이었다

  흔히 백작, 남작,  후작이라고 하면 군주에게 작위를  수여받은 귀족을 말한다.
그러나 중국 진나라와 한나라의 무지렁이 농민들이 모두 (물론  미성년자와 여자
는 제외) 황제에게 작위를 수여받았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는 물론 역사적 사
실이고 여기에는 엄청난 역사적 비밀이 숨어 있다.
  우리는 보통 중국 역사에서  하은주 시대부터 신해 혁명까지 중국을 지배했던
전제군주의 성격이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진한 시대를 획으로  큰 변화
가 있었다.
  사실상 진한제국 이전의  농민들은 왕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들에게는 씨족
집단의 장이 곧 왕이요, 황제였다.
  물론 은나라, 주나라의  왕들은 그 시대의 최고 지배자였지만 그  권력에는 심
각한 제약이 있었다.  이 시대 사회구조의 기본 단위는 씨족  집단이었기 때문에
왕의 지배력은 씨족 우두머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정도였고 씨족 내부에는 미치
지 못했다. 따라서 은,주  시대의 농민들은 왕을 의식하지도 못했고 의식할 필요
도 없었다. 오로지  씨족장만이 그들의 지배자였다. 게다가 씨족장일지라도 씨족
원들의 동조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은,주의 왕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왕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은,주가 무너지고  춘추전국의 혼란기를  거쳐 등장한 진시황제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과 같은 왕권이 성립한다.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지식인들
을 파묻거나  책을 불살라 버리고  지방까지 자신의 전용도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모든 백성들에게 똑같은 화폐와 길이, 무게, 부피 단위를 쓰도록 강
요했고 전국의  인민을 동원, 아방궁과 만리장성을  짓도록 했다. 그리고 씨족을
해체하고 군과 현을  전국에 설치, 씨족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인민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이 이전의 왕들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황
제`라고 칭했다. 황제는 원래 중국  고대의 신을 지칭하는 말로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호칭이었다. 후일 역사가들은 이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하여 그를
시황제라고 불렀다.
  이는 은주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권력이었고 이러한 황제 중심의 새
체제는 한대에 들어와 완전히 자리를  굳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중국 황제의
개념이 성립한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들은 어떻게 자신들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던 일반  백성에게 `하
늘이 보내신 황제`라는 관념을 주입시킬 수 있었을까? 그 미끼가 바로 작위이다.
여기서 잠시 당시 촌락 상황을 들여다보자.
  씨족 집단이 유지되고 있을  때 사람들은 씨족장을 중심으로 같은 조상신에게
제사 지내고 자연스레  형성된 서열에 따라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춘추 말
전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씨족  질서가 해체되자 사람들은 질서감을 잃고 동요했
다.
  이 때 이들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자 했던  황제는 자신의 즉위나 황후, 황태
자를 세울 때  등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전 백성에게 황제의 이름으로 작위를
하사했다. 작위의 수여 횟수를  보면 진시황제 때 1회, 전한 때  53회, 왕망 시대
에 1회, 후한 때 36회가  실시되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여러 개의 작
위를 받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전한 무제 때의 예를 보자.
  한무제는 즉위할 때  인민(성인 남자)들에게 작1급씩을 수여하고  리마다 쇠고
기와 술 열 섬을 하사해 5일 동안의 연회를 허락했다고 한다 (당시는  허가 없이
연회를 여는 것을 법률로 금했고  3명 이상 이유 없이 모여 술을 마시면 벌금 4
냥을 내야 했다). 이 때 마을사람들은 모두 모여 조상신 또는 마을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이런 은혜를 베풀어 준 황제라는 존재에게  감사하게 된다. 이 때 제사
현장에서 앉게 되는 자리  순서는 곧바로 마을사람들간의 서열이 되는데 황제가
내린 작위를 많이 가진 사람이 상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황제는 작위를 가진 만
큼 형벌을 감해 주었고 사냥  노획물의 분배에서도 작위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
별이 가해졌다.  이렇게 되자 작위의  위력이 분명해졌고 이를  하사하는 황제의
존재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강력한 권위로 낙인 찍히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황제는 만인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10. 3년이나 지속된 스파르타쿠스의 봉기

  기원전 73년 봄 70여 명의 사내들이 베수비오 산을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들은 카푸아에 있는 검투사 양성소에서 탈출한 노예들이었다. 그 지도
자의 이름을  따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라고 부르는  이 노예들의 투쟁은 3년이나
지속되면서 로마 사회를 뒤흔들게 된다.
  로마 사회는  노예제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였다.  이들 노예들은 농업과 목축,
광산 등  주요 생산 부문에  종사했다. 특히 라티판디움이라고  하는 대농장에서
포도, 올리브, 곡물  생산을 위해 매우 많은 노예가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
한 노예들의 처지는  문자 그대로 비참한 것이었다. 빈틈없는 감시의  눈길 아래
쉴 새  없이 고된 일을 해야  했으며, 도망치지 못하도록 쇠사슬에  묶여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노예들을  `말하는 도구`라고 했는데 이만큼 적절한 표현
도 없을 것이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고 부서지면  갈아치울 수 있는 물건에 불과
했던 것이다.
  생산 활동에 쓰이는  노예 이외에도 로마 시민의 오락을 위한  노예도 있었다.
이들이 바로 검투사 노예였다. 노예끼리 칼을 들고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검투사 경기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로마 시민들이  가장 즐기는 오락의 하나였
다.
  그런데 이러한  노예들의 주요  공급원은 전쟁이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이탈리아에만 약  150만 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로마
의 대외 전쟁에서 잡혀 온 전쟁 포로들이었다.  그리고 로마가 침략 전쟁을 거듭
하고 정복지를 넓힐 때마다 노예들의 수도 늘어갔다.
  하지만 노예들의 수가  늘어갈수록 노예들의 반란도 많아졌다.  로마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말하는 도구`라고 했지만 그들의 몸  속에도 자유를 갈구하는 인
간의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스파르타쿠스의 봉기가 일어나
기 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노예 반란이 일어났고 그 때마다 잔혹하게 진압되었
다.
  스파르타쿠스도 어느 노예와 마찬가지로 전쟁 포로였다. 그는 트라키아(지금의
불가리아) 사람이었는데 포로로 끌려 와 처음에는 광산에서 일하다  카푸아에 있
는 검투사 양성소로  팔려 왔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동료를 죽이고  살아 남
거나 아니면 동료의 손에 죽어야만 하는 검투사 노예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
지 않았다. 그와 그의 동료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은 기원전 73년 활화산처럼 타
올랐다.
  도망한 노예들은 베수비오 산을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탈
리아 남부의 농장이나 목장에서도 노예들이 탈주해  와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하
여 7만이 넘는 대군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겨울을 보내면서 다음의 행동 방향에  대해 숙고했다. 처음에는 로마와
직접 대적하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알프스
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쿠스도 그러했지만  도망친 대부
분의 노예들은 트라키아나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출신이었다. 그들에게 고향으
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자유를 의미했다.
  기원전 72년 봄 노예 군대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알프스를 향했다. 이들은 알
프스로 향하는 중에 여러 차례 로마 군을  물리쳤다. 이들은 이미 도망친 노예가
아니라 한겨울 내내  어려운 훈련을 받고 엄격하게  규율이 잡힌 노예 군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알프스의  추운 눈보라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6개월
의 긴 행군을 했기 때문에  알프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
다. 여기서 봄이 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고 게다가 식량도 떨어져 갔다. 그들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오랜 행군으로  인해 노예군은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게다가  내부 불
화마저 생겼다.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노예들은 이탈리아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로마의 시민권을  얻고자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노예군을  이루고 있
던 노예와 농민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시간이  감에 따라 로
마 군은 전열을 정비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최후의 격전장은 이탈리아  남부의 아폴리아였다. 로마 군대를  지휘한 사람은
이 해에 새로  집정관이 된 대부호 크리수스였다. 그는 도망하는  병사는 사형에
처한다고 다그쳐 스파르타쿠스의  군대와 마주했다. 기원전 71년  초가을 대전투
가 벌어졌다.  노예 군대는 죽기로 싸웠으니  6만 명이나 적의  손에 희생당했고
스파르타쿠스와 나머지 노예들도  포위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창에 찔린  채 숨
을 거둘 때까지 방패를 휘두르며 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이후 살아 남은 노예 군대는 산에 숨어 게릴라 활동을 통해 잠시 명맥을 유지
했으나 기원전  70년 폼페이우스의 군대에게 패했다.  이 때 사로잡힌 6,000명의
노예들은 카푸아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에  줄지어 십자가에 매달렸
다.
  결국 노예들의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로마의 지배자들에게 자
유와 해방을 갈구한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는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고, 이에 대한
충격은 로마 사회의 또 다른 계급 모순인 대지주를 중심으로 한 부자와 빈민 사
이의 갈등과 결합되면서 공화정의  얼굴을 한 로마 사회를 제정으로 변화시키게
되었다.

  11. 거세된 사마천이 눈물로 쓴 <사기>

  사마천이 <사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28,9세경이고 50세가 다  되어 죽을 때
까지 수정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약 20년의 작업 기간을 거친 셈이다. 그 전에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각종  서적을 섭렵하고 중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미담은 사마씨의  집안이 상고 이래로  사관의 직을
세습해 왔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아들에게 들려 주곤  했다. 그 자신이 한나라 조
정의 태사령 (문서의 수집과  관리를 믿는 직책)이었던 사마담은, 그러나 자신이
훌륭한 사서를 짓지 못한 것을 통분하여 임종 직전 아들에게 유언했다.
  “우리의 선조는 주나라의  태사였다. 이제 내 대에  와서 끊어지려는가!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  선조의 가업을 이어라. 이제 한나라가 일어나고  천하가 통
일되었는데 나는 태사가  되고서도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아아, 두렵도다. 너
는 명심하여라!”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듣고 있던 천은  “소자 불민하오니, 선인들의 문헌들을
빠짐없이 정리해 쓰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이 같은 상황이 젊은 사마천을 사기 집필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37세(기원전 99)때 그를  덮친 `이릉의 화`는 그를 죽음의 벼랑으로 몰
고 갔다.
  사마천이 천거한 장군 이릉이  흉노와의 전투에서 분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항
복하여 포로가 되자  한무제를 비롯하여 조정의 모든 신하는 그를  규탄했다. 이
때 사마천만은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진노를 사 궁형(죄인의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에 처해지게 되었다. 공자는 위나라  영공이 환관과 같은 수레에 탔다는 이
유만으로 다른 나라로 떠났을 정도로 당시 지식인들은 궁형을 혐오했다.
  사대부로서 가장 큰 치욕을  당한 사마천은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이나  뒤
틀렸으며, 집에 있으면  마치 무언가를 잃은 것처럼 불안하고 나가면  어디를 가
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우왕자왕`  극도의 수치감에 시달렸다. 사마천은 사대부
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부끄러움을 씻어야 할 처지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마천은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 “그 옛날 주문왕도 유리에서 구금된  적이 있
고 이사는 승상이었으나  다섯 가지 형벌을 모두  받았으며 한신 장군도 차꼬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 모두 지위는  왕후장상에 이르렀고 명성은  이웃 나라에
알려졌지만 그 곤욕을 당해서도 자결할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습니다”라고 유명
인들의 행적을 들추기도 하고 “제가 불행하여 양친을 일찍 여의고 형제 친척이
없는 홀몸이니 제 처지는 어찌되겠습니까”라며 동정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자살을 마다한  진짜 이유는 이미 초고가 완성된 <사기>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노비라도 능히 자결할  상황이로되 내가 그것을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은연자중하며 구차히 살려고 분토 중에 떨어지는 것도 불사한
것은 마음속에 미진한 바가 있어  한으로 여겼고 죽은 후 문채가 후세에 드러나
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라며 사마천은 밀려오는 좌절감과 싸
웠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사기>는 본기 12권, 세가 30권,  표 10권, 서 8권, 열전
70권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 각 항목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
타사공왈`이 삽입되어 있고 말미에는 이 책의 서문인 `태사공자서`가 있다.
  이 책은 중국 상고의 황제 시대부터 사마천 당시의 한무제 때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전국책, 춘추, 좌전, 국어, 세본 등 당시까지 중국 문명이 낳은 거의
모든 기록을 참고로 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까지  중국 문명의 총결산이라 할 만
하다.
  또 본기(황제에 대한 기록)와 열전(유명한 인물에 대한 기록)을 기둥으로 하고
세가(제후에 대한 기록),  표(연표), 서(문물 제도에 대한 기록)로  구성되는 기전
체는 사마천이 처음  시도한 기념비적인 역사 서술  방법으로 그후 역사 서술의
본보기가 되었다. 19세기 말의 청나라 역사책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편찬하는 정
사는 모두 이 기전체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춘추전국 시대는 이전의 신화적인  세계관에서 인간 자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가는 철학적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철학적 유산을 이어받은 <사기>는 신
들의 역사를 인간의  역사로 대체한 것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그가  당시의 사서
로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열전을 설정해서  역사 속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은 그 단적인 증거이다.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눈은 매우 날카로워 많은 후세 학자들의 경탄을 자아내
곤 했다. 어떤 학자는 현대 역사학자들이 저술한  중국 고대사와 관련된 노저 중
에서 <사기>에 제시된 이해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에 대
해 의문을 표시하고 있을 정도이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전국을 통일할 때 사람들은 위나라가 신릉군을
기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전국  말기의 사
회 상황이 이미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릉군을 기용
했더라도 위나라의 멸망은 피할 수 없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잇다. 즉 `하늘의 의
지` 앞에서는 어떠한 현군명신이 있더라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인물 평가에서
도 시세를 예민하게 읽고 정확히 대응한 사람들이 역사상에 족적을 남기고 있다
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즉 역사는 백아숙제 같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아니라 한초의 공신인 소하나 조참 같은 시세를 탈 줄 아는 사람들이 이끌어 간
다는 것이다.
  본기를 중심으로 한 체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마천의 기본적인 역사관은 황
제를 정점으로 한 제국 질서가 그 바탕이었다.  당시 창성하고 있던 한제국의 위
세와 기본적으로 유교적 지식인이었던 그의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관점이었다.
  그러나 <사기> 곳곳에는 당시  무제의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배어 있
다. 예컨대 8서 중의 하나인 평준서는 주로 무제 시대의 소금, 철 전매정책을 중
심으로 한 각종 경제정책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표적은 당시 실력자이며
경제정책의 주역이던 어사대부  상홍양이었다. 무제는 상과 작위를  내릴 정도로
그를 총애했는데 사마천은 평준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싣고 있다.
  “어느 해 가뭄이 들어  점술가에게 자문을 구하니 말하길 `황제는 마땅히  조
세만으로 경비를 충당해야 하는데 지금 상홍양은 관리를 시장에 앉혀 물건을 판
매시켜 이를 구하고 있으니 상홍양을  삶아 죽이면 하늘이 곧 비를 내릴 것입니
다.”
  열전의 마지막 편인  화식열전에서도 비판은 이어진다. 화식열전은  전국의 간
략한 경제지와 춘추시대 이후 대상인들의 활약을 소개한 것이다. 여기서, 사마천
은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경제 생활과 그 자체의 원리로 움직이는 경제 원리를
논하고 경제 불간섭주의의  장점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무제와 그
의 관료들이 추진하던 획일적인 통일 경제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12. 로마 황제가 한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기원후 1세기경 동서양에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발달한 제국이 동
시에 융성하고 있었다. 한나라와 로마가 그들이다.
  비록 수만 리나 떨어져  있었지만 이들 사이에 과연 접촉은 없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교역품의 왕래도 있었고
사람의 왕래도 있었다.
  중국의 서쪽은  파미르 고원을 비롯해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그 너머  서쪽으로 가기를 꺼려했다. 산맥을 넘을 때  생기는 산악병
을 서행을 막으려는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래도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던 한 중국인이 있었다.  바로 감영이
다. 후한 화제 때(서기 97) 대진(당시 중국인들이  로마를 지칭한 이름)에 사신으
로 파견된  감영은 바빌로니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  대진에 가려고
하는데 중앙아시아의 제국인 파르티아의  뱃사공들이 말렸다. “바다는 광대합니
다. 순풍을 만나지  못하면 2년이나 걸립니다. 더구나  이 바다는 인간을 망향의
병에 걸리게 하여  벌써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여기서  감영은 로마
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파르티아의  속임수였다. 당시 파르티아는 한나라와  로마 사이
에서 물품을 중개하면서 폭리를 취하고 있었는데 만일 감영의 로마행으로 두 나
라간의 직접  교역이 트이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파르티아 인들은  로마로 가는
가장 짧은 거리인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육로를 숨기고 일부러 페르시아만을 남
하, 아라비안 반도를  우회하여 홍해로 향하는 해상로만을 알려 주며  겁을 주었
던 것이다.
  중국인들도 나중에는 이를  알아차렸다. 이런 기록이 있다. `대진은 키가  크며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상행위는 공정했으나 그 의복은  중국의 것과 달랐다. 그들
은 중국에 사절  파견을 항상 원했으나 안식국(파르티아) 사람들은  우리와의 교
역에서 이득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대진 사람들이 안식국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
하지 않았다.`
  그러나 166년 마치내 로마의 명군으로 이름 높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파
견한 사신은 안남(지금의 베트남)에 와서 상아, 물소  뿔, 거북이 등을 중국 황제
에게 보냈다. 때마침  파르티아가 쇠약해지고 있어서 이후로  대진국과의 교류가
본격화되었다. 알렉산드리아를 출발, 해상로를 이용해 동남아시아까지 온 로마의
상인들은 동남아시아의 토산품을 중국에 보냈다. 또  직접 중국의 해안에까지 가
기도 했다.
  이 상인 가운데 중국인들이 진륜이라고 부른 로마 사람은 직접 중국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226년 그는 베트남을  거쳐 당시 위,촉,오 삼국이 정
립하고 있던 중국으로  들어왔다. 오의 왕 손권은 그에게 로마의  국토와 민족에
대해 상세히 물어  보았고 진륜은 문서를 작성하여 보고했다. 손권은  그에게 남
녀노비 각 10명을 주어 로마로 돌려보냈다.
  지금부터 1700여 년 전 중국 땅에 로마 인이 체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13.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의 국교가 되었나?

  미치광이 황제로 유명한 네로가 권자에 앉아 있던 서기 64년 로마의 중심가에
서 원일 모를 대형  화제가 발생했다. 때마침 교외 별장에 있던  황제 네로는 급
히 로마로 돌아와 사태를  수습했으나 시민들 사이에서는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이에 네로는  시민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방화
범으로 몰아 투기장 등에서 무참하게 학살했다.
  이를 피해 로마를 탈출하던 베드로는 도중에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는 그리스
도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물었다. 그리스도가 “로마에 가서 십
자가에 못 박히련다”라고 말하자  그는 자신의 비겁함을 참회하고 로마로 돌아
와 십자가에서 순교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이 영화로 더욱
유명한 소설 <퀴 바디스(Quo Vadis)>이다.
  그런데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는 네로 시대에 그치지 않았다. 교세가  크게 확
장되어 가던 2세기 이후 박해는 점점  심해졌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최대의 박해가  있었는데, 칙령을 발하여(303)  교인의 집회를  금지하고, 교회를
부수고 성경을 불태울 것을  명했으며 신자로부터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자유민
의 경우 법의 보호마저 박탈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쇠퇴하기는커녕  뿌려지는 순교자의 피가 많아지면 많아질수
록 더욱 교세가  확장되어 갔고 마침내 국교까지 되었다. 탄압받던  기독교가 어
떻게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될 수 있었나?
  이스라엘의 민족 종교인 유태교를  모태로 하여 나온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계기로 사랑과 전 인류의 구원을 지향하는 보편적인 종교로 발전하게 되
었다. 로마의 속주였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외국의  지배에 시달려 온 유태인
들이 자기  민족을 구원해 줄 존재인  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 때
나타난 것이 예수였다. 하지만 그는 유태교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형식화된 율
법 사상을 배격하고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구제하는  신에 대해 설파하고 다녔
다. 소박한 생활 태도와 결합된 그의 사상은  점차 하층민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
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그를 구세주라고 불렀다. 예수의 영향력  확대에 위협
을 느낀 기존 유태교 사제들은 그를 로마에 대한 반역자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
혀 죽게 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결합되어 기독교를 발전시키는 계기
가 되었을 따름이다.  예수의 사후 사도 바울과 베드로 등의  노력으로 로마내에
의 포교의 발판을  갖춘 기독교는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갔다.  초기에 빈민들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로마 제국이  쇠퇴해 감에 따라 중산층 나아가 부자들에게까
지 퍼져 나갔다. 제국  말기가 되면서 정치, 사회가 혼란해지자 사람들 사이에서
는 정신적인 공허감과 현실 도피적인 사고 방식들이 퍼져 나갔는데 이러한 상태
가 기독교가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교세가 미약했던 초기에 로마  제국은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으
나 교인들이 황제에 대한 예배를 거부하고 병역을 거부함에 따라 기독교를 불온
한 사상을 전파하는 종교로 규정하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
도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재정을 보충하려는 의도도  작용했다. 이런 대박해가 행
해진 것이 3세기 중엽 데키우스  황제(Decius, 249-51) 때와 앞서 말한 디오클레
티아누스 때였다.
  하지만 가장  박해가 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가 박해의  마지막이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할 수밖에 없었다(밀라노 칙령). 이렇
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떠한 박해도  기독교를 종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해가 가해져도  기독교도는 계속 늘어갔고  심지어 군인이나 고위  관리, 황실
인사 중에서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기독교의 성격 변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발생
할 당시 기독교는 압박받는 자의 운동 형태를  띠고 있었다. 현실의 비참함을 메
시아의 도래로 보상받고자 하는  민중의 심정이 종교적으로 표현된 것이 기독교
였고 따라서 예수가  죽은 후의 초기 교회는  빈민들의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2세기 말, 3세기에  이르러 중산층, 나아가 부자들도 현실의
정신적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자 교회의 성격은 어느덧 보
수적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공인될 무렵에  교회는 억압하는 자에 대
한 저항이 아니라  신에 대한 순종만을 설교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기
독교를 승인하여 그것을 다른  저항 운동에 대립시키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
던 것이다.
  처절한  순교를 통해  공인된 기독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Theodosius,  재위
379-95) 때가 되면 아예 국교로까지 승격되었고(392)  로마 제국보다 더 오랜 생
명을 가지게 되었다.

  14. 당고조, 당태종은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중국의 역사는 한족과 이민족이 반반씩 이뤄 놓은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
지 않다. 이민족에게 수백 년간 정권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역사상 유명한 인물
중에도 한족이 아닌 사람들이 숱하다.
  그 예를 하나 보자.
  5,6세기 중국은 선비, 흉노, 저, 갈, 강족  등 5개의 이민족의 16개의 나라를 세
우며 명멸해 간 이른바 5호 16국의 혼란기였다.  오랜 기간 섞여 살게 되자 이민
족과 한족은 문화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호한 체제`라는 독특한 정치,
문화 양식을 발전시켜  갔다. 게다가 통혼이 성행함에 따라 광범한  혼혈이 이루
어져 한족인지 이민족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족의  동진 정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영향
력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화북을 통일한 선비족의 북위 정권이 지나치
게 한화정책을 추진하자 북방 요새인 6진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뒷날 수
당 통일제국을 형성하는 중추  집단인 이들은 애초에 한화정책을 반대하고 선비
족의 고유성을 지킬 것을 목적으로 거병했다. 이  때부터 중국은 다시 수당 통일
제국을 향한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다.
  6진 가운데 하나인  무천진의 군벌 세력들은 북위를 멸망시키고  서위, 북주의
정권을 독점하면서 배타적인 기득권 세력을 형성했다.  이 군벌 집단은 선비족인
북위 정권이 지나치게 한화정책을 취하는 데 반발해서 난을 일으킨 만큼 중국식
으로 바뀌었던 성을 다시 선비족  원래의 성으로 되돌리는 등 강한 호족 성향을
띠었다. 이 무천진 군벌에  속하는 인물들이 바로 수나라를 일으킨 양견(수문제)
와 당나라를 세운 이연(당고조)의 할아버지 이호 등이었다.
  이씨 집안은 원래 대야씨라는 성을 가진  호족 집안이었다고 한다. 한화정책을
강하게 추진하던 북위 효문제 때 이씨로 성을 고쳤다가 무천진 군벌의 우두머리
인 우문태로부터 대야씨를 하사받았다.  중국인이 자랑하는 수당제국의 황제들이
`오랑캐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수,당나라는 호족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이들이 고구려를
온 힘을 쏟아 침략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때마다 수양제, 당태종(이세
민), 당고종은 수도에 남아  있지 않고 직접 전장에 나와 전투를  지휘했다. 황제
가 친히 전투를 지휘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중국의 관념에서 볼 때 대단히 드문
일로 유목민들인 호족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당태종은 중국식 군주 칭호인  천자라고만 불리는 것보다 유목민의 군대를 가
리키는 칸을 덧붙인 천가한이라고 불리길 좋아했다.  당고종이 자기 아버지인 당
태종의 후궁이었던 무조(측천무후)를 자신의 황후로  삼은 것이라든지 현종이 자
기 아들의 비였던 양옥환(양귀비)를 귀비로 맞은 것  등은 중국적인 관습이 지배
하는 사회였다면 있을  수 없는 불륜이었다. 그러나 이는 북방  유목민들 사이에
서는 극히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관습이었다. 또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
인 측천무후가 당나라 때에 나왔다는 것도 여권을 종중하는 유목민의 전통이 당
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당이라는 제국의  국제성이야말로 가장 비중국적인 것이다.  이는 유목
민의 개방성에 연유한  것이다. 당의 수도 장안은 서역과 동아시아  각국에서 모
여든 사람들이 각기 제 나라의 풍속과 습관을 지닌 채 살고 있어서 마치 세계의
인종 전시장 같았다. 신라의  최치원도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종교도 페르시
아의 마니 교, 유럽의 데스토리우스 교 등이 아무런 규제 없이 수입되었다. 이도
유목민의 뿌리 깊은 종교적 개방성에서 비롯된 문화 현상이었다.

  15.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중국사상 단  한 사람의 여황제인  측천무후는 원래 관리의  딸이었다. 미모가
뛰어났던 그녀는 14세에 당나라 제 2대 황제 태종의 비가 되었지만 태종이 죽자
관습에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
  그런데 태종의 뒤를 이은 아들 고종은 황태자 시절부터 아버지의 후궁인 그녀
를 좋아했다. 당시 후궁에서는 정비인 왕황후와  소숙비 사이에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고종의 마음이 소숙비에게로  기우는 것을 질투한 왕황후는 절에 있는
무조(측천무후의 본명)를 궁궐로 불러들여 소숙비를 견제했다.
  그러나 총명한  그녀는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황후와 소숙비를 쫓아내고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곧 이어 병약한 고종을 대신, 정무를 보기에 이
르렀으며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신의  아들인 중종과 예종 두 사람을 재위에 않
혔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마음에 안 차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주라고 했
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에 등극한 그녀는  왕황후, 소숙비와 자신의 황
후 책봉을 반대했던  조정대신들을 죽였다. 또 자기가 죽인 후궁의  30세가 넘은
두 딸을  출가시키자고 했다는 이유로  장남 이홍을 죽였고,  학자로서도 이름이
높았던 차남 이현에게는 모반의 혐의를 씌워 자결을 명령했다.
  정통성이 취약한 무후는 추사원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스파이 정치를 자행했
다. 주로 반대 세력의 관리들이 희생물이었는데  추사원의 정문인 여사문은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는 자가 드물어 이곳의 부름을 받은 관리들은 아예 가족들에
게 하직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미 환갑을 넘긴 측천무후는 미소년인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가까이하고 남
첩제도를 만들었다. 이의 부당함을  진언한 태자의 장남, 즉 자신의 맏손주도 역
시 살해되고 말았다. 그녀는 또 당의 법률에서  금지하고 있는 미신적인 종교 생
활에 평생을 의지하기도 했다. 정신 이상의 광기마저 엿보이던 무후는 705년, 83
세로 숨을 거뒀다.
  잔학무도했던 사생활과는  달리 무후 시대의  정치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까지 폐쇄적인 기득권층을 형성하며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했던 개국공신 집
단을 제거하기 위해 무후는 유명무실하던 과거제를  공정하게 실시, 실력있는 신
인들을 대거 발탁했다.  이들에게만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장안
성 북문의 출입을 허용하여, 이들은 `북문지사`라고  불리게 된다. 이 북문지사에
서 배출된 인재들은 곧 이어지는 현종의 황금기인  `개원의 치`에서 당문화의 절
정을 꽃피우게 된다. 후세 사가들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에서만은 무후를 `일급의
감식가`로 평가하고 있다.
  무후가 무참한 칼날을 휘둘렀던 대상도 그녀로 인해 좌천된 사람들과 황족 세
력에 한정되어 있었다.  무후는 역대 어느 황제보다도 민중 생활의  안정에 신경
을 썼고 이에 따라 그녀의  치세 50년간에는 그 흔하던 농민 봉기가 단 한 차례
도 발생하지 않는 진기록이 세워지게 된다.

  16. 며느리 양귀비에게 반한 당현종

  측천무후가 죽자  이번에는 중종의 황후인  위씨 일족이 권세를  휘둘렀다. 당
황실의 운명은 다시 위태로워졌다. 중종의 손자였던  23세의 이융기는 이를 보고
만 있을 수가 없었다. 중종이  죽은 지 18일 만에 이융기는 젊은 관리들을 동원,
쿠테타를 일으키고 위씨 일족을 주살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예종으로 옹
립하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었다. 이가 바로 현종이다.
  당 황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등장한 현종의 치세는 중국 4000년 역사상 다
시없는 전성기여서 그의 연호를 딴 `개원의 치`는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쓰일 정
도였다. 인구는 날로 늘어  양귀비가 등장하기 직전의 한 통계에 따르면 4,890만
9,800명을 헤아렸다.
  현종은 웅대한 지략가이기도 했지만  음악에 관한 한 당대 최고의 풍류객이기
도 했다. 737년 황후였던 무혜비가 돌연  사망하자 그는 수천의 후궁도 돌아보지
않고 상심했다. 눈치  빠른 환관 고력사는 재색으로 소문이 파다했던  한 여인을
천거했다.
  청화궁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현종은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즉석에서 음률에 맞춰 선녀처럼 춤을  추었다. 현종은 그 여인에게 그
만 한눈에 반하게 되었다. 이 여인이 양귀비이고  당시 황태자의 비 가운데 하나
였다. 현종의 며느리인 셈이다.
  양귀비는 피부가 하얗고  풍만한 여인이었다. 본명은 옥환이라고 했다. 사천성
관리의 딸로 태어나 17세 때 황태자인 수왕의 비가 되었다.
  현종은 그녀를 여자 도사로 만든  후 곧 후궁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비로 삼았
다. 이 때  양귀비의 나이 22세, 현종은 57세였다. 그녀는  얼굴만 아름다웠던 것
이 아니라 노래와 춤도 뛰어났고 특히 비파의  명수였다. 게다가 머리 회전이 빨
라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현종은 양귀비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황제의 유흥비를 조달하던 그녀의 친척
양국충을 중용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일개 무뢰배에 불과했던 양국충은 권력
을 전횡하며 양귀비의 양자이자  변방 3개 지역을 관할하던 절도사 안록산과 앙
숙지간이 되었다.
  안록산은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돌궐계 또는 이란 계로 추정되고 있다.
궁궐에 들어올 때면 항상 양모 양귀비를 먼저 배알해 현종이 그 이유를 묻자 “
호인(오랑캐)은 어머니를  앞세웁니다”라고 대답할 정도로 자신에  찬 인물이었
다.
  양국충이 이미 죽은 재상  이임보를 돌궐과 내통했다고 모함하여 그의 일족을
주살하자 안록산은 `황제 옆의  간신을 제거한다`며 거병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
로 조정은 장안에  있던 안록산의 아들을 죽였다. 이에 격노한  안록산은 낙양을
짓밟고 국호를 대연이라  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당은 고구려  출신의 고선
지에게 방어를 맡기나 고선지는 환관의 모함에 걸려 싸워 보지도 못하고 병사들
앞에서 철수를 당하고 말았다. 수도 장안이  위태해지자 현종은 사천성 방면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배고픔과 피로에 지친  병사들은 양국충을 살해하고 현
종의 막사를 포위, 양귀비의 처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하
고 17년  동안 애지중지했던 양귀비를 현종은  차마 내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천거했던 환관 고력사는 현종을 설득해서 양귀비를 근처 절로 데리고 갔
다. 양귀비는 그곳  배나무에서 목을 매달았다. 그 때 그녀의  나이 38세였다. 현
종은 고력사로 하여금 그녀의 시체를 수습해 오게 해서 비단옷을 입히고 가슴에
는 향수 주머니를 단 후 조그마한 산에서 장사 지냈다.
  안록산의 난으로 번성하던  당은 치명상을 입었다. 통치의 근간이었던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 등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따라서 중앙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안록
산의 난을 진압한 것도 당 조정의 군대가 아니라 위구르라는 유목민족의 군대였
기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대당제국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지방에서는 그 동안
규제받았던 호족들의  대토지 소유와 토지 매매가  성행하고 군벌들도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중의 하나가 당을 멸망시킨 주전충이었다.

  17. 바이킹은 정말 해적이었나?

  `바이킹=해적`이라는 등식은 그들이  타고 다녔던 배 그리고 전설처럼  내려오
는 그들의 용맹성과 함
께 이미 굳어진 신화인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방이킹의 한 측면에 불
과할 뿐이다.
  9-11세기에 걸쳐 유럽은 제2차 민족 이동이라 불리는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시
달렸다. 이  때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넓은 지역을 휩쓸고  다닌 이민족이
북방의 바이킹(또는 노르만 족)이다.  이들의 침입으로 많은 수도원과 도읍이 약
탈당했고 인명 피해도 많았으며 경작지는 방치되어  황무지로 변하기도 했다. 이
런 바이킹의 활동 결과 유럽 인들은 바이킹을 주로 해적으로 묘사했다.
  `바이킹`이라는 말은 노르웨이나 아이슬란드의 문헌에서 나타난 `비킹`에서 유
래했는데 그 어원은 강의 후미를 가리키는 vik라고 한다.
  이 바이킹의 고향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이다. 이곳은  자연 환경이 험하기는 했
지만 목축, 농경, 어로와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북유럽은 전체적으로 보리,
오트밀, 소맥 등의 곡물이 재배되었으며 양, 소, 밀, 돼지 등의 가축 사육도 이루
어졌다. 교역 물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피였다.
  이렇게 북유럽 사람들은 바이킹  활동 이전에는 목축을 중심으로 한 농경민이
태반이었다. 그들은  자유인으로서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꾸려 나갔으며  약간의
노예를 가진 독립적인 농민이었다. 그리고 바이킹  활동이 시작된 이후에도 일정
기간 약탈을 자행한 후에는  고향으로 되돌아오거나 정복한 땅에 정착하여 농민
생활을 계속했다.
  9-11세기에 걸친 바이킹 활동의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는 것은
없다. 가장  그럴 듯한 이유로는 자원이  매우 한정된 이 지역에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것을 들 수  있다. 정착할 토지가 없는 농민과 지배할  영지가 없는 귀족
들은 모험과 생계를  위해 바다로 나가려 했다. 또한 이  시대는 스칸디나비아에
서 정부라 할 만한 것이 자리잡아 가던  때였다.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던 수많은
소부족들이 9세기 들어서 서서히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 밑으로 통합되
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왕의 통치를 견디지 못한 부족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
했다는 설도 유력한 것 중의 하나이다.
  바이킹의 약탈 행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영국  동쪽에 있는 란디스판 섬의
수도원에 남아 있는데  그 때가 793년이었다. 그들은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바이
킹이었다. 스웨덴의 바이킹은 동쪽의 슬라브 족의  땅으로 진출했는데 이들은 10
세기 말 키에프를 중심으로 슬라브 인을  지배하고 키에프공국을 세웠다. 이것이
최초의 러시아 국가였다.
  북해와 대서양에서는  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 바이킹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들은 수시로 영국과 프랑스의  해안지대와 강 하구에 출현하여 약탈을 일삼았
으며 11세기에는 지중해의  시칠리아를 정복하기도 했다. 그들의  침략에 시달린
서프랑크 왕은 911년 그들에게 세느 강 하구 일대를 나누어 주고 그들을 봉신으
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이후 노르만디 공국이 되는데  노르만디라는 지
방은 노르만 족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들은 또한 영국을 정복하여  노르만 왕조
(1066)를 세우기도 했다.
  이후 노르만  족은 멀리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까지  진출했고 일부는 거기서
북미 대륙으로 건너갔다는 설도 있다.
  이렇듯 당시  바이킹의 활동은 분명  해적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정복 왕조를
세운다든지 일정 지역에 정착하여 산 것 등을 보면 해적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
다. 어쨌든 9-11세기  바이킹을 비롯한 이민족의 유럽 침입은 이전  세기에 서서
히 발전해 오던 유럽 문명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유럽의 중세 후기는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18. 십자군 전쟁은 진짜 성전이었나?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많은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말처럼
전쟁은 유일하게 합법하된  살인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은  여러 수
단이 동원되어 정당화되고  또 미화되기까지 한다. 성전이란 말이 그것에  꼭 맞
는 표현일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자행되는 전쟁이 거룩할  수도 있다니
말이다. 역사에서 대표적인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군 전쟁도  사실 그러한
전쟁이다.
  기독교 세계인 서유럽이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하여 이슬람  세계를 공격한
십자군 전쟁은 약 200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당시 서유럽 세계는 예루살렘 성지
를 순례하는  기독교인들을 이슬람 인들이 박해했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물론 전혀 박해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 이
야기는 비잔틴의 황제가 꾸면 낸 것이었다.
  11세기 중엽  비잔틴 제국은 이미  국력이 쇠한 상태였다.  여기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주크 투르크 족(Seljik urks)이 급속히 세력을  팽창하여 11세기에는 바
그다드를 점령하고 이슬람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이러한 셀주크 투
르크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은 먼저 그들을 공격했으나 도리어 패했을 뿐
만 아니라 투르크  족이 소아시아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알렉시우스 1세 (Alexius 1,  1081-1118)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지원을 요
청했다. 이 때 지어 낸 말이 성지에서 박해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기독교도로서의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술적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교황은 이 기회에 성지를 탈환하고 비잔틴 교회를 로마 교회에 통합시켜
기독교 세계를 부흥시키려고 했다. 그리하여 1095년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 공
의회에서 우르반 2세는  십자군을 제창했다. 그는 신념에 찬  목소리로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이며  유럽의 귀족들은 힘을 합쳐 이슬람을 물리치
고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한 순례자들에 대한  박해를 실감
나게 강조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전쟁은 성전이며 이 전쟁에서 전사하는 자는 모
두 천국에서 그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고무된  참석자들은 “하느
님이 이를 원하신다”라고 호응했다고 한다. 이후  서유럽의 넘치는 활력과 강렬
한 신앙심이 결합되어 전 유럽이 십자군으로 궐기했다.
  이렇게 십자군 전쟁은 성전으로  규정되었고 따라서 야만적인 종족인 적에 대
한 어떠한 행위도 허용되는  것으로 믿어졌다. 그리고 실제로 약탈과 만행, 적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1096년 가을 1차로 구성된  십자군을 필두로 하여 약 200년간 8차례나 십자군
원정이 감행되었다. 하지만 1차에서만 성지  탈환이라는 명목상의 목적이 달성되
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에루살렘에 입성한 1차  십자군의 경우 6주간이나 계속된
전투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행했다. 십자군들은  적의 병사뿐만 아니라 주민
들까지 가리지 않고 죽였다. 십자군에 참가했던 어떤 프랑스 성직자는 `예루살렘
의 큰 거리나  광장에는 사람의 머리와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
군 병사나 기사들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신전이나 벽은  물론 기
사의 말고삐까지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오랫동안 성지 순례를 방해했
던 사람들로 더럽혀졌던 이곳이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
한 것일 뿐 아니라 찬양할 만한 것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십자군의 잔혹한 학살
을 잘 묘사하면서도 이 전쟁을  악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규정하면서 학살을 정
당화하고 있다.
  1차 십자군의 공격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비롯해  영토를 빼앗긴 이슬람 측은
전열을 정비하고 십자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리하여 1187년에는 다시 예루
살렘을 되찾게 된다.  서유럽은 여러 차례에 걸쳐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지만 소
기의 목적은커녕 이동하는 지역에  대한 약탈과 어처구니없는 탈선 행위로 일관
했다.
  그 중 4차 십자군은 가장 추악한 경우였다.  교황 이노센트 3세의 주도하에 집
결한 4차 십자군은 원래  이집트를 공격해서 그곳의 이슬람 세력을 축출할 요량
으로 기사 4,500명, 말 4,500마리, 보병 2만 명, 식량 9개월 치를 베네치아에서 수
송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모인 병력은  반도 안 되었고 더구나 수송
을 담당해 주기로  한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줄 비용마저 조달되지  않았다. 베네
치아 상인들에 대한 계약 위반과 빚으로 궁지에 몰린 십자군에게 베네치아 상인
들이 기발한  제안을 해 왔다. 그것은  얼마 전에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에 의해
점령된 자라 시를 십자군이 다시 찾아 주면 계약 위반과 빚에 대해 따지지 않겠
다는 것이었다. 성지  탈환을 위해 일어선 십자군에게 기독교인이 사는  자라 시
를 공격해 달라는  엉뚱한 제안이었지만 궁지에 몰려  있던 십자군들은 선뜻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십자군들은 성지로 가기에  앞서 자라 시를 점령했
을 뿐만 아니라  약탈까지 감행했다. 이에 분노한 당시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십
자군들을 파문했다고 한다.
  또한 1212년에 조직된  소년 십자군의 경우는 더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소년
십자군은 성지 탈환에 대한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프랑스의 양치기 소년에서 비
롯되었다. 그  소년이 그가 받은 신의  계시를 널리 알리자 수천  명의 소년들이
이를 따르게 되었고 처음에는  반대하던 부모, 성직자, 국왕도 소년들의 굳은 결
심을 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소년이 중심이 된 이  기이한 십자군이
출발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유에서 7척의 배를 타고 출발
했다. 그런데  그들을 수송한 선주는 베네치아  상인보다 더 비열했다. 폭풍으로
난파된 2척 이외에 5척에  타고 있던 소년들을 모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노예로 팔았던 것이다.
  이렇듯 추악한 일면을 가진  십자군 전쟁이 오랫동안 서유럽 인들에게 성전으
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200년이란 오랜 기간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유럽  인들의 신앙심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대한
경비와 인력이 드는 전쟁이  그렇게 오랜 기간 수행되었다는 것을 신앙심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도리어 중세 전반기에 급속도로 팽창하던  이슬람 세
력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유럽이 10세기 이후 안정과 번영을 거치면서 11세
기가 되면 어느 정도 힘에서 균형을 찾아 나가고 있었고 이러한 힘의 균형이 십
자군이라는 무력 충돌로 표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 토너먼트라는 말의 숨은 이야기

  운동 경기의 방법으로  참가자(또는 팀) 전원이 돌아가면서 경기를  갖는 제도
인 `리그(league)`와 달리 일  대 일로 겨루면서 진 상대를 탈락시키는  제도를 `
토너먼트(tournament)`라고 한다. 이 토너먼트는  원래 중세 유럽의 기사들의 마
상 시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세 봉건  사회는 피라미드형 계층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봉건  사회의 인적
구성을 비유적으로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
는데 각각 성직자,  기사, 농노를 가리킨다. 여기서 싸우는 사람인  기사는 맨 말
단인 평기사뿐만 아니라 말을 탄 전사라는 의미에서 봉건적 지배계급 전체를 가
리키는 말이다. 이 기사는 중세의 정치 군사적  지배자일 뿐만 아니라 토지 보유
자로서 경제 지배자이기도 했다.
  이 기사들의 주된 임무는 당연하게도 전쟁이었다.  유력한 제후들은 영토를 차
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평기사는 주군에 대한 봉건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또 전리품 배분을  노리고 전쟁에 참가했다. 따라서 기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
목은 용맹과 충성심이었다.
  그런데 11세기 이후 사회가  안정되고 상업이 부활하면서 기사들의 생활도 변
했다. 전반적으로 생활이 풍요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거친 전투 기질이 완화되면
서 생활  방식이 세련되어 갔다.  여기에는 전쟁과 전투를  줄이거나 완화하려는
교회의 노력도 한몫 거들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한  것이 토너먼트 즉 마상 시합이었다. 이것은  대략 11세기
경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이후 봉건  기사들의 가장 큰 행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
다.
  처음에는 실전과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는데  두 기사 집단이 단체로 싸워 상대
편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말에서 떨어뜨리는 쪽이 승리하는  시합이었다. 이긴
쪽은 진 쪽으로부터 무기나 갑옷, 말 등을  빼앗거나 포로로 잡고 나중에 몸값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마상  시합만 전전하면서 돈을 버는 기사도 나타났다.  동시에 평
화시에 무예를 연마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이를 장려하는 국왕도 나타났
다. 그러나 위험한  경기였기 때문에 부상을 입거나 죽는 기사도  많아서 왕자의
시합 참가는 금지되기도 했다.
  이후 이 난폭한 경기는 점차 일 대 일 시합으로 바뀌었으며 무기도 인체에 손
상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변했다. 그리하여 15세기  이후가 되면 국왕이나 세도 있
는 귀부인 앞에서 화려한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의 경기가 되었고 시합에서 우
승하는 것이 기사  최대의 명예로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프랑스의  국왕 앙리
2세는 마상 시합 중 상대방의 창에 눈이 찔려 급사하기도 했다.

  20. 마스터피스(걸작품)의 어원

  걸작품 또는 명작을  영어로 마스터피스(masterpiece)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마
스터피스의 유래는 중세 길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길드의 존재가 처음으로 부각된  것은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11세기와 12세
기로, 또한 이 때는 중세 도시가  성립하던 시기였다. 근거리 교역이나, 요즘식으
로 말하면 국제 무역이라고 할  수 있는 원격지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은 봉건
영주가 거주하는 성  주변이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정착했다. 또  상인들은 자
신의 거주지를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기 위해 무장도  하고 성벽도 쌓기 시작했
다.
  이후 점차  활동의 규모가 커지자  상인들은 길드라는 조합을  만들었다. 이는
공동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조직이었는데 자연 재해나 해적으로 인한
상업상의 손실을 보상해 주고 조합원이 죽었을 때는 그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기
도 했다. 현대와는 다르게 치안 상태가 불투명했던  당시에 서로 돕기 위한 길드
야말로 상인들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상인 조합은 중세 도시의 자유와 자치권 획득에도 앞장 섰다.
  상인과 더불어 중세 도시 주민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수공업자였다.
수공업자 조합은  상인 조합보다 늦게 만들어졌는데  동일 업종마다 조직되었기
때문에 동업 조합이라고도  한다. 이 동업 조합의 목적은 동업자간의  경쟁을 배
제하고 또 다른 도시의  동일 업종 수공업자와의 경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
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동업 조합은 생산에 대한 독점권은 물론  생산과 판매도
엄격하게 통제했다. 이러한 수공업자 조합의 성격은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 경쟁
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었는데 당시와 같이 공업 생산력이 미약한 단계에서는 불
가피한 일이었다.
  수공업자 조합에는 독립된  작업장과 가게를 가진 장인(master)이 가입했는데,
그는 한두 명의 직인(journeyman)과 또 같은 수의 도제(apprentice)를 두었다.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수련공격인 도제가 되어 장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일을 배운다.  도제는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장인의 피보호자였기
때문에 보수는 고사하고  장인의 집안 일까지 도맡아 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빨리 기술을 배워 직인이 되고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독립적인 장인이 되는 것
이었다. 평균 7년 정도 장인 밑에서 수업을  마치면 직인이 되는데 이 때부터 장
인으로부터 급료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기술 연마를 하게 된다. 또한  직종에 따
라 견문을 넓히기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는 관행도 생겼다.
  직인 생활을 마치고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술을 증명할 작품을 조합
에 제출하여 인정을 받아야 했다. 바로 이 작품을 마스터피스라고 한다. 즉 장인
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이후 걸작  또는 명작이라는 뜻으로 변형되어 쓰
이게 된 것이다.
  14세기까지는 5,6년 정도의 직인  생활을 거치면 장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15,6세기가 되면  상황이 달라지는데 동업자의  수가 늘어나면  경쟁이 치열해질
것을 우려한 장인들이  동업 조합원의 정원을 제한한 것이다. 이로써  장인이 되
는 길은 매우  어려워졌고 직인들의 불만은 높아 갔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직인들은 따로 직인 조합을  결성했고 16세기 말이 되면 오늘날의 노동 조
합의 파업과 유사한  분규가 적지 않게 발생했다. 여기에다가 엄청난  부를 축적
한 대상인들이 도시의 지배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장인들의 불만도 높
아졌다.
  이렇게 동업 조합의 정식  회원인 장인의 작품을 가리키던 마스터피스라는 말
은 근대 사회로  넘어가면서 길드의 폐지와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공장제 대량
생산의 대두로 그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걸작품을 뜻하는 한정된 의미로 사용되
게 되었다.

  21. 대학의 뿌리는 길드였다

  나라마다 대학 제도의  뿌리가 되는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와 같은
모습의 대학은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이 대학은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 학
생 조합(길드) 또는 교사 조합에서 시작되었다. 대학을 영어로 university라고 하
는데 이는 라틴  어 universitas에서 온 말로 `전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어
떤 공통된 목적을  가진 집단에 적용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수공업자  조합의 회
원들에게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대학은 기본적으로 교육을 위한 길드였다. 당시
학생들은 교사들의 명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어서 아는 이도 없는 경
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생활의 안전과 서로 돕기 위해 조합을 만들었던 것이
다.
  이런 대학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이다. 이 대학은 로
마 법과 교회법 등 법학  강의로 유명하여 12세기 말에는 전 유럽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이 학생들은  안전과 서로 돕기 위해 이탈리아 학생과  이탈리아 외부
의 학생으로  조직된 2개의 길드를 결성했다.  파리 대학은 노트르담  성당 부속
학교의 명성에 끌려 모인  교사들이 12세기 말 길드를 결성함으로써 설립되었으
며 1200년 필립  2세로부터 특허장을 획득했다. 이 파리 대학은  신학 연구의 본
산이 되었다. 옥스포드 대학은 12세기 전반기에 생겼는데,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
화된 1167년 헨리 2세가  파리에 있던 영국 학자들에게 귀국 명령을 내림으로써
그 기틀이 잡혔다.  이후 13세기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14세기에는 독일에도
대학이 생겨났다. 이렇게 출현한 대학들은 처음에는  정해진 학교 건물이 없어서
강의실은 교사의 집이나 교회 등을 빌려서 사용했다.
  또한 모든 대학은 군주나 도시 행정당국 또는 교회의 지배나 통제에서 독립하
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투쟁했다. 이런 투쟁의 결과 `대학의 자치권`을 얻었
는데 여기에는 대학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법권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었
으며 대학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길드에 대한  감독권 등도 대학이 가지게
되었다.
  당시 대학에서 가르치던 것들은 문법, 수사,  논리의 3교과와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의 4교과였다. 3교과를  수료하면 문학사(bachelor of arts) 학위를  받았으며
그  후 5,6년간의  수업을 더  거치면  비로소 독립된  교사  자격인 문학  석사
(master of arts)가 될  수 있었다.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에는  앞에서 말한 7교
과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든지 아니면 전문학부인 법률, 의학, 신학등을 공부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  과정을 수료하면 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당시에는 신학
이 가장 이수하기 어려운 학문으로 꼽혔다.
  그런데 오늘날 단과  대학을 가리키는 칼리지(college)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이는 외부 인사가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를 설립해 준  것에서 기원한다.
이런 기숙사에서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무료로 또는 아주 값싸게 숙식을 제공했
으며 교사가 함께 지내면서 학습을 도와 주기도  했다. 칼리지 중에 유명한 것은
1258년 파리의 부유한 상인 로베르 드 소르봉(Robert de Sorbon)이 설립한 소르
본 대학, 영국  로체스터의 주교 머튼의 월터(Walter of  Merton)가 세운 옥스포
드의 머튼 칼리지, 영국의 대제후인  존 벨리올(John Baliol)이 세운 벨리올 칼리
지 등이 있다.
  학문의 중심지로서 교회를 제치고  부상한 대학은 중세 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대부분의 저명한 학자들은 대학에 속해  있었고 각 학부는 그 분야
의 최고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문학 석사는   교사나 행정가로, 법학 박사는
법률가나 관리로, 신학 박사는 신학 교수나 고위 성직자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주장되는  `대학의 자치`와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이 중세
대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때의 자치나  학문과 사상의 자
유는 근대적인 의미의 보편적인 것은 아니고 자치 도시, 수공업자 조합, 상인 조
합 등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특권 안에서의 자치와 자유였다.

  22. 천하 무적 칭키즈칸 군대의 숨은 비결

  불과 8만의 군대로 세계를 정복한 칭키즈칸의  괴력. 그 엄청난 파괴력의 비밀
은 어디에 있을까?
  전통적으로 몽고 수령들이 모두 귀족층에서 세습적으로 자리를 차지했던데 비
해 칭키즈칸은  집안도 몰락한 상황에서  맨주먹 하나로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칭키즈칸의 집안도  원래 귀족이었다. 그러나 그가  9세 되던 해  아버지가 경쟁
부족에게 독살되었고, 가족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테
무친(칭기즈칸)은 귀족들에게  고통당하는 몽고의 하층민과 약소  부락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이  때의 경험은 후에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오랜 포로 생활에서
탈출한 테무친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쓰러진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출세
하고 싶었다. 그러나 초원에서는 기득권층인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권력 기반이 전무했던 그는  장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 기득권층에 맞서기위해
부족에서 이탈한 노비, 대장장이  등 초원의 민중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당
시에는 다른 부족 사람들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초원의 기존 질서에 대한 중대
한 위협이었다. 부족과 씨족의 장인 귀족들은  즉각 연합군을 조직하여 테무친을
공격했다. 그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은 얄궂게도 그와 어린 시절  의형제를 맺었
던 자무카였다.  그러나 테무친의 평민  군대는 자무카의 귀족  군대를 격파했을
뿐 아니라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족 등을 깨고 몽고  평원을 통일했다. 1206
년 그는 마침내 쿠릴타이(몽고족의 의사결정  회의체)에서 칭키즈칸의 칭호를 받
고 초원의 패자가 된다.
  이후 칭키즈칸의 여진족의 금, 거란족의 요, 한족의 남송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서방 원정에서는 동유럽까지 진출했다. 로마 교황청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도 계
획되었으나 칭키즈칸의  돌연한 죽음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 때  로마 원정이
예정대로 행해졌다면 세계사는 아마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칭키즈칸 군대의 가공할 만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첫째, 이 군대는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게다가 이전의 군대 조직과는 전혀 다
른 조직 원리를 갖고 있었다. 병사들은 부족을 단위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칸(유
목민의 군주 칭호)의 명령에 따라 만  호, 천 호, 백 호로 편제되었다. 이에 따라
각 부족장들의 권한은  약화되고 칸으로의 중앙집권이 이뤄졌다.  지휘관은 철저
히 능력 위주로 선발했고 무능하면 그 자리는  즉시 부하에게 넘겨졌다. 실제 유
명한 장군  중에는 목수, 양치기, 대장장이,  노비가 많았고 이들은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쟁터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둘째, 칭키즈칸은 적 내부의  반목을 이용하는 데 뛰어났다. 특히 개방적인 종
교정책을 취함으로써 각 종교가 엉켜  있는 중앙아시아에서 큰 이득을 볼 수 있
었다. 예를  들어 지배층이 불교도인 퀴췰릭을  정벌할 때였다. 그는 지배층과는
달리 민중들은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점을 이용해  이슬람 옹호를 선전했다. 민
중들은 몽고군을 해방군으로 여길 정도였다.
  셋째, 칭키즈칸은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초원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국제상인들의 활동을 장려하고 안전을  약속함으로써 이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
공했다. 몽고군의 승리만이  상업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각
민족의 국내  정세에 관련된 정보를  칭키즈칸에게 넘겨 주었다.  칭키즈칸은 또
이들의 입을 통해 몽고군에  대한 과장된 소문을 유포시킴으로써 싸우기도 전에
적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결국 몽고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평민 군대의  탄생이 테무친을 몽고 초원의
패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칭키즈칸의  개인적인 능력과 당시  국제 상인
조직의 뒷받침이 결합되어 전무후무한 정복 드라마가 펼쳐질 수 있었다. 
  칭키즈칸은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행동은 매우 신중해서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는 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개를 무서워하는  나약한 면도 있었고 큰 싸
움을 앞에 두고는 산 위에  올라가 적의 잘못을 늘어놓으며 하늘의 도움을 호소
하기도 했다.  칭키즈칸은 생애 마지막 원정이  된 탕구트 정복을 끝낸  후 숨을
거두었다. 1227년 8월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사냥  도중 말에서 떨어져 입은 상
처 때문이었다. 전투중 무릎에 맞은 화살 때문이라는 등 설이 분분하다. 이 밖에
도 벼락을 맞아  죽었다. 탕구트 국왕의 아름다운 부인 퀴르벨진이  그와 동침할
때 국부에 상처를 입혀 그 때문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가 죽자 몽고군  기도부는 남은 원정 계획을  취소하고 즉각 귀국을 결정했
다. 죽음을 비밀로 하라는 그의 유언 때문에  몽고로 돌아가는 길에 장례 행렬을
목격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23. 14세기 중세를 뒤흔든 흑사병

  현대에도 에이즈라는 죽음의 병이  있지만 그것은 세계를 뒤바꿀 만큼 무시무
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근대 이전  사회에서 커다란
전염병의 발생은 사회 경제적 변화뿐 아니라 사람의 심성까지 바꾸는 엄청난 충
격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4세기에 유럽에서 유행한 흑사병(Black Death)
이다.
  페스트의 일종인 흑사병은 아시아  지역에서 발원하여 1346년 봄 이탈리아 상
선대에 의해 흑해  연안에 도달했다. 이후 크림 반도 남단에  상륙하여 무역로를
따라 이탈리아 반도에 이르러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등의 북부 도시까
지 강타했다. 같은  해 말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에 퍼졌고  다음해에는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1349년이  되면 흑사병은 영국 전역까지  만연했고 1350년에는
북유럽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당시의 의학으로는 이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피해는 엄청
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시의 인구는 엄청나게  줄었으며 농촌 마을도 사람들이
죽거나 병마를 피해 마을을 버린 까닭에 폐촌이  된 곳도 적지 않았다. 흑사병으
로 인한 희생자수는  확실치 않다. 대략 당시 유럽 인구의  1/3~1/4인 약 3,000만
명이 쓰러졌다고 한다.  또 당시 교황청은 사망자수를  4,283만 4,486명으로 추산
했다.
  엄청난 인구 감소를 가져온  흑사병은 사회 전체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
다. 죽음의 공포가 사회를 휘감았으며 살아 나기  위한 투쟁은 기존의 가족 관계
나 인간 관계를 철저히 파괴시켰다.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환자를 간호한다
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시체는 매장되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굴렀
다.
  죽음의 대한 공포는 흑사병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더욱 가중되었
다. 흑사병의 원인에 대한  설이 난무했지만 모두 허황된 것들이었다. 누군가 물
에 독을 탔다는  것이 그럴듯하게 퍼질 정도였다. 그리하여 평소  증오의 대상이
된 사람이나 집단이 공격을 받았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
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속죄를 부르짖는  신비주의적 색채를 띤  종교 집단도
발생했다.
  그럼 이 엄청난 사태를 겪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마
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을까?
  흑사병의 피해가 컸던 곳은 무엇보다도 인구가  밀집했던 도시 지역이었다. 요
행히 살아 남은 사람들은 죽은 귀족이나 대상인들의 재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
수했다. 그리고 새로운 많은  사람들이 텅 빈 도시로 유입되었다. 따라서 도시의
운영권도 이 과정을  통해 재산을 획득한 신참자들에게 돌아갔다. 한  마디로 도
시는 기존의 권위와 질서가 완전히 흔들릴 정도로 바뀌었다.
  농촌의 경우는  사망률은 낮았지만 인구비가 높았기  때문에 실제 사망자수는
더욱 많았다. 그 결과는 엄청난 노동력의 부족과  방치된 많은 토지 그리고 노동
자의 임금 인상  요구였다. 살아 남은 영주들은 어떻게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
해 혈안이 되었으며  따라서 임금은 계속 상승했다. 반면 임금  인상이라는 방법
과는 정반대로  이전부터 지속되었던 농노 해방을  중지하고 부역을 강화하려는
영주들도 나타났으며 정부에서는 임금을 묶어 두려는  억압책을 쓰기도 했다. 하
지만 이러한 반동적인 시도는 강화된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위와 같은 사회 경제적 변화 이외에도 흑사병의 유행이 사람들의 심성에 끼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짧은  기간에 일어난 대량의 죽음, 그것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은 사람들에게  늘 삶과 함께 하는  동반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
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다양한 미신적 종파를 발생시켰다. 죽음을 가져
오는 병을 신의 분노로 보고 몸 안의 악을 내쫓기 위해 신자들이 서로 채찍질을
하면서 행진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신과의 영적인 합일에 의해 구
원을 얻어야 한다는 신비주의가 유행했다. 흑사병  이후 그림에는 최후의 심판과
지옥이 소재로 많이 채택되었으며 조각을 통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숭배도 나타
났다.
  의학적 무지에 의해 흑사병의 피해가 더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흑
사병은 상업의 발달로 인한 물자 교류의 확대에  의해 급속히 퍼졌다. 이것이 당
시 농업 생산력의  정체로 나타난 봉건 경제의  전반적인 위축과 맞물려 커다란
희생을 초래했다.  따라서 어찌 보면  흑사병은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길목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24. 르네상스는 중세 문화의 결실기였다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에서 문학과  미술을 중심으로 하여
문화의 뚜렷한  발전이 나타난다. 새로운  문화의 발전은 고전  문화의 부흥으로
나타났는데,  이에   앞장  선   사람들을  인문주의자라고   한다.  후마니타스
(Humanitas)라는 말에서 유래한 인문주의라는  말은 원래 인간성을 도야하고 세
련되게 해주는 글과 예술의 힘을  뜻했으며 시, 수사학, 역사 등 인문 교양 과목
이 그러한 힘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여기서 바탕이 되는 것은 그리스
와 로마의 고전들이었다. 중세에도 고전들이 교양의  기초가 되기는 했지만 기독
교의 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였는데 이것이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종교
적 속박을 벗고 새로운 인생관을 펼칠 수 있는 것으로 환영 받았던 것이다.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페트라르카(Petrarca,  1304~74)는 이탈리아
말로 서정시를 썼으며,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Boccaccio, 1313~75)는 세속
적인 생활을 자유롭게 묘사했다. 또한 이들은  라틴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거나
그리스 어를 공부하여 고전 문화를 자신들의 작품 활동의 기초로 삼았다.
  또한 이탈리아의  미술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분야로서 찬란하게  꽃피웠다.
보티첼리(Botticelli, 1444~1510),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등으로  대표되는 천재 예술가들은 고전  미술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자연과 인체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새로운 미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당시 사람들은  찬란했던 고대 문화가  멸망한 뒤 암흑의  중세가 이어졌으며,
이제 자신들에 의해 멸망했던 문화가 부흥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명
확하게 표현한 것이 16세기 중엽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전기를 썼던 바사리
(Vasari,  1511~47)였다.  그는  치마부에(Cimabue,   1240~1320),  지오토(Giotto,
1266~1337)에서 시작하여 미켈란젤로에 이르러 완성된 고전 미술의  부활을 리나
시타(rinascita  :  재생)라고  불렀고  이  말은  이후  프랑스  어인   르네상스
(renaissance)라고 말로 널리 퍼졌던 것이다.
  그런데 르네상스를 단지 미술  분야만이 아니라 문화의 전 영역으로 확대하여
근대 문화의 출발점으로 보는  관점을 확립한 사람은 19세기의 문화사가 부르크
하르트(Burckhart)였다. 그는  르네상스를 `세계와  인간의 발견`을 기초로  하여
인간을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함과 동시에 개인의 가치와 능력을 최대한 발
휘시키려는 경향으로 파악했으며,  합리적인 사고 방식과 생활  태도를 중요시했
다는 점에서 근대  문화의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르네상스를
시대적으로 중세와는 단절되고 고대와 직결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부르크하르트의 이러한 해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배경을 볼 때 매우 타당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르네상스의 배경은 넓은  의미에서 중세 사회의 붕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 이전에 이미 봉건 제도가 쇠퇴했다. 지
중해 무역을 기반으로 하여 도시가 급속하게 발전했고 이 속에서 상인층이 새로
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했다. 이렇게 원격지 무역과  모직물 공업, 금융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상인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민 사회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사회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의  해석에 반기를  드는 견해도  많이 제출되었다.  먼저
12~13세기 유럽의 정신적  각성에서 르네상스의 원류를 찾는 주장이  나왔다. 중
세의 연애시나  성자 프란체스코의 자연에  대한 천진난만한 태도,  당시의 종교
운동을 지탱시킨 인간의 신앙적 갱생 등이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고전 문화의  부흥을 르네상스의 기본적인 계기로 볼 수 없으
며, 기독교와 게르만 민족 정신의 융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12세기 프
랑스의 라틴어 고전이나 자연학의 부흥과 그에 수반된 새로운 생활 태도에 주목
하여 `12세기 르네상스`를  제시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그 지류에  지나지 않
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호이징아는  <중세의 가을>이라는 저서에서 르네
상스는 근대의 시작이  아니라 중세의 가을, 즉 중세 문화의  결실기라고 주장하
기도 했다.
  이러한 반론들을  통해 부르크하르트가 근대적인 것으로  보았던 많은 것들이
중세의 산물이며, 르네상스 시대에도 여전히 중세적인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었
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제 르네상스를 단순히 근대의 시작으로는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중
세를 암흑의 시대로 보는 관점은 사실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하나의 신화일
뿐이다.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에는  실제로 중세적인 요소와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르네상스는 신구 문화가 교차하여 혼재했던   하나의 과
도기로 볼 수 있다.

  25. 다 빈치가 한밤중에 공동묘지에 간 이유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예의  부활로 알려진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중세에서 근
대 사회로 넘어가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일어난 운동이었다. 이는 중세의
종교(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고전  문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근대적 문화를 창조하려는 문화 운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운동의 구호는 `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인물은 <모나리자>의 작가로 유명한 레오나르
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이다.  1452년 피렌체에서 멀지  않은
빈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다  빈치는 집에서 법률 공부를 강요했으나 자신에게
는 화가로서의 재능이 더 있다고 생각하고 그림 공부를 고집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모나리자>를 그린 훌륭한 화가만은  아니었다. 다 빈치는
14세 때 조각가로 유명한 화공인 베로키오 밑으로 들어가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
다. 그런데 당시 화공  길드는 기술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맡았다. 토목, 건축,
회화 등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
역시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배웠다.  또한 당시는 무엇이
든지 잘하는 `만능의 천재`가 동경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었다.
  젊은 날을 베로키오  밑에서 보낸 다 빈치는 1482년 밀라노로  갔다. 20년간의
밀라노 시대에  그는 군사 기술자로서 종군,  측량과 지도 제작,  기중기의 고안,
운하 건설, 궁정 오락 연출 등 실로 광범위한 활동을 했다. 이 시기에 완성된 그
림이 <최후의  만찬>이다. 또한 압연기 등  새로운 공작 기계를  발명했고 새의
날개와 공기의 운동을 연구하여  인력을 동력으로 하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설
계도도 남겼다. 물론  이러한 기발한 발상들은 실제로 거의 실현되지  못하고 그
의 노트에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는 인체 해부도도 남겼는데 이는  매우 정확할 뿐만 아니라 인체에 대한 그
의 철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인체를 해
부하는 것은 엄청난  죄악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인체의  여러 부위
의 구조와 비례를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 교회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직
접 해부해 보았다. 그는 약 30구의 시체를  해부했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한밤중에 묘지에서 시체를 파 내어 촛불로 비추어 가면서 해부했다
고 한다.
  이렇게 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을 새롭게  발견하고, 세계에 중심에
놓으려는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집념은 다 빈치의 시체 해부와 인체 해부도에
깃들어 있다.

  26. <동방 견문록>을 기록한 사람은 따로 있다

  15~16세기의  지리상의 발견을  촉발한 것  중의  하나가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 견문록>이다. 이 책에 서술되어 있는 동방, 특히 지팡
구(일본을 가리킴)라는 황금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 유럽  사람들의 호기
심과 모험심을 자극했다. 그런데 이 <동방  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감옥에 있
을 때 만들어지게 된다.
  1271년 17세의 마르코 폴로는  고향 베네치아를 떠나 동방으로 여행길에 올랐
다. 그의  아버지와 숙부는 동방과 교역하고  있던 상인이었는데 그들은  5년 전
몽고의 쿠빌라이 칸(1215~94)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부탁받았다. 즉 로마 교황
에게 말하여 기독교의 교의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살마 100명과 예루살렘의 그리
스도 무덤에 켜  있는 램프의 기름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르코의
아버지와 숙부는 기름은 가지고 갔지만 기독교의 교의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이 때 쿠빌라이 칸의  눈에 띈 것이 마르코 폴로였다. 그는  긴 여행으로 벌써
20세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칸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마르코 폴로는  이후 장장
17년 동안 궁정에서 일하면서 귀중한 체험을 얻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매우 유능했기  때문에 쿠빌라이 칸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기회가 왔다. 원나라 왕조의 왕녀 코카친
이 17세가 되던 해 일  한국의 아르군 칸에게 시집 가는 것이 결정되었고 이 여
행에 마르코  폴로 일행이 동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을 마치고  나서 고향
베네치아에 잠시 들렀다  오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1290년 말  마침내 마르
코 폴로 일행은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다. 그런데 고향에  도착하고 보니
쿠빌라이 칸이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어 굳이  원나라로 돌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동방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
를 해주었지만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도리어 그는 허풍쟁이로 몰리곤 했다.
그러던 중 베네치아와  이웃 도시인 제네바가 전쟁에  돌입했는데 이 때 참가한
마르코 폴로는 포로가 되었다.
  어둡고 습기찬 감옥 생활의 유일한 낙은  서로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마르코 폴로의 동방  체험은 그를 감옥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
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다행히도 당시  감옥에는 루스티케로라
는 작가가  갇혀 있었다. 그리하여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루스티케로의 손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동방 견문록>에서 마르코  폴로는 허풍쟁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무수한 이야
기를 늘어놓고 있다. 그는 우선 수도 칸발리크(지금의 북경)의 도시 계획에 놀랐
던 것 같다. 시가지가 바둑판 모양으로 잘  정비되어 있고 도로도 상당히 넓었다
고 한다. 또한  수도와 지방을 잇는 교통망의  발달도 그를 놀라게 했다. 거기에
지폐(당시 유럽에서는 아직 지폐가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의 유통, 연료로 석탄
을 사용하는 것 등에서 중국  여성의 예의바름까지 그가 중국에 대해 말하고 있
는 것은 다종다양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외국인이라면  당연히 흥미를 가질 만한 일이  <동방 견문
록>에 언급되어 있지 않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만리장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
도 없다. 그 외에  여성의 전족의 관습, 중국의 연중 행사, 한자의  구조 등에 관
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호기심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그도 역시 외국인이었다.
특히 그는 중국어와 한문을 알지 못했다 (그는 몽고 어와 페르시아 어에는  능통
했는데 당시 원제국 안에서 이 두 언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여행에는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중국 고유의  풍습, 문물을 깊게 이
해하는 데는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재미있는 이야기 이상으로 받
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세계 밖에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위대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의 이
야기가 유럽  인들에게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
다.

  27.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대륙 찾기 경쟁

  남미에서 브라질만이 유일하게 포르투갈 어를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나라들은
전부 스페인 어를 쓴다. 이것은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나머지가 스페
인의 식민지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남미  대륙의 이러한 분할은  지리상 발견의
시대에 두 나라의 경쟁과 타협의 결과였다.
  14세기경부터 중세  봉건 사회는 무너지고  있었다. 봉건 사회의  붕괴와 중세
문화의 황혼 속에서 새로운 근대 사회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으며 이것은 르네상
스, 종교 개혁, 지리상의  발견으로 표현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아프리카를  회항하는 인도 항해, 1519년  마젤란의
세계 일주로 상징되는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  경제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유럽 인들이 새로 발견한  지역은 그들의 약탈로 인해 기존의 문명이 파괴
되고 혹심한 약탈과 살상이 자행되었다.
  이런 지리상의 발견의  주동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새로운  인도 항로
의 발견자인 바스코 다  가마의 말처럼 지리상의 발견의 동기는 `기독교인과  향
료`였다. 후추를 비롯한 향료는 지중해를  통한 동방 무역의 주요 상품이었고 당
시 이것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따라서 동방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아랍 상인이나 이탈리아 상인을 거치지 않고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있
다면 엄청난 이익을 볼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지리상의 발견의 동기가 되는 것은 두 나라의 역사에서 유
추할 수 있다. 끊임없이 이슬람의 침입에 시달린  두 나라는 이슬람에 대한 적개
심과 기독교  전파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레스터  존
(Preste John)이라는 사람이 다스리는 국가가  아시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
은 그들의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만약 이  국가를 발견하고 동맹을 맺는다면 이
슬람 세력을 협공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스페인, 포르투갈 두 나라는 경쟁적으로  새로운 땅의 발견에 나서게
된다. 그  중에서도 앞선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15세기 초반부터 엔리케 왕자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탐험했지만 적도 근방까지만
탐험하고 중단되었다. 이후  1480년대에 국왕 조안 2세의 후원으로  탐험이 재개
되었고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1487년에 드디어 `희망봉`에 도달했다.
  한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했고 따라서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인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콜럼버스는 자신의 계획이 실현되도록 도와 줄
후원자를 찾고 있었다. 1484년 포르투갈의 국왕  조안 2세를 만난 콜럼버스는 자
신의 인도 탐험  계획을 열심히 후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국왕은  측근들의 의견
을 토대로 하여  그를 허풍쟁이 공상가로 단정하여 상대해 주질  않았다. 게다가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회항하는 항로 발견에 열심이었다.
  그리고 희망봉의 발견 이후  포르투갈은 내정의 불안으로 인해 당분간 새로운
항로 개척에 힘을  쏟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포르투갈 국왕에  실망한 콜럼버스
는 스페인으로 가  자신의 계획을 후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1492년  스페인의 이
사벨라 여왕의 마음이 움직였고 같은  해 8월 3일 새벽 산타마리아 호를 비롯한
세 척의 배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항했다. 이  선단은 출발한 지 한 달 가까이
되어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했고 거기서 서쪽으로 기수를 돌려 41일 만에 지금의
바하마 제도 중의 한 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가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의 어
느 곳이라 믿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493년 3월 15일  콜럼버스 일행은 자신들이 출발했던 스페인의 팔로스항으로
귀환했다. 떠날 때는  90여 명이었던 일행이 약 40명으로 줄었고  그들이 가져온
것도 향료와  금이 아니라 약간의 노예와  금속 제품, 거기에 앵무새와  담배 등
신기한 물건이었지만 각지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에 경쟁  국가인 포르투갈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한편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귀국한 즉시 로마 교황에게 새로 발견한 지역이 모두 스페인의 영토임을 인정받
고자 했다. 교황은  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약 600여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서 남북으로 선을  그어 그 서쪽의 발견지는 스페인이, 동쪽의  발견지는 포르투
갈이 차지한다고 선언했다(493). 포르투갈 왕은 이에 즉시 항의했고 양국은 약 1
년쯤 협의한 후  경계선을 좀더 서쪽인 서경46도 37분으로 옮겼다.  이것이 토르
데실라스(Tordesillas) 조약이다.
  오늘날 보면 어처구니없는  결정이 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성립했지만 당시로서
는 교황의 권한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유럽 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
여졌다. 이  조약으로 인해 포르투갈이  브라질로부터 대서양, 아프리카, 인도양,
인도네시아를, 스페인이 아메리카, 태평양, 필리핀을  자기네 영토로 설정하게 되
었다. 물론 종교 개혁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이 이 조약을
무시하고 영토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28. 독일 농민을 배신한 루터의 종교 개혁

  역사상의 급격한 변화는 대개 실제  상태와 있어야 할 상태 사이의 간격이 매
우 넓을 때 나타나며,  이러한 모순을 종결 짓는 움직임에 불을  붙이는 것이 바
로 그 변화의 지도자이다. 중세의 기독교 세계를  분열시키고 근대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만든 종교 개혁도 마찬가지였다.
  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된 루터는 처음에는 교황청에 직접적으로 대립하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지만 사태의 전개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종교
개혁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종교  개혁의 와중에서 일어난 반봉건적 농
민 전쟁에 대한 루터의 태도는 종교 개혁의 방향을 결정 짓는 역할을 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된 뿌리는  중세 말 유럽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와 맞물
려 있다. 봉건제 사회였던 중세는 강력한 중앙 권력이 없이 지방의 유력자(즉 봉
건 영주)가 자기 영토에서  입법, 사법, 행정 등 모든 권한을  행사하던 지방분권
체제였다. 이렇게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던 유럽을 하나로 묶는 힘은  바로 카톨
릭 교회였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카톨릭 교회는 세속 권력이  분산되어 있는
상황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보편적인  교리를 무기로 전체 유럽을 정신적으로 정
치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림 : 종교 개혁의 불을 지핀 마르틴  루터, 하지만 농민 전쟁에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여 종교 개혁을 지배계급에 의존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왕권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집권 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하자 보편적인
기독교 정신을 내세우던  교회는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강력한  국가를 건
설하려는 왕은 자기 영토 안에서 교황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교회에 도전하
게 되었고 이에 교황권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카톨릭 교회  자체의 부패도 한몫 했다. 성적자의 타락은  누구의 눈에
도 명백한 것이었다. 성직자가  공공연히 매매되기도 했다. 또한 재물에 눈이 멀
어 교회 근처에 술집 등 유흥업소를 운영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 종교 개혁은 독일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독일
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종교 세력이 매우 강한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
에 독일은 교황청의 좋은 착취 대상이었고  교황청의 젓소라고까지 불렀다. 이러
한 상황은 친교황적인  독일 황제 칼 5세(Karl 5, 1519~56)  때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전 유럽을 기독교 왕국으로 통일하겠다는 시대착오적 꿈을 꾸고 있던 인물
이었고 따라서 로마의 교황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의  영방 군주들은 자신들의 독립성이  침해될까 두려워 칼 5세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거기에 교황청으로 흘러들어 가는  돈에 커다란 불만을 가지
고 있었으며 엄청난 교회  재산을 호시탐탐 노리던 군주들이라 황제의 친교황정
책에 반항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후진 지역이었던 독일의 상인
과 제조업자들도  교황청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독일  경제를 지배하던
것은 남부 독일의  광산주이자 대금융업자였던 푸거(Fugger)가문이었는데 이 가
문은 칼 5세를 후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금융 대부를 통해 교황청과
도 밀착하고 있었다. 이런  푸거 가문에 대한 상인, 제조업자들의 반감은 곧바로
교황청에 대한 불만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농민들도  교회의 착
취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교황, 황제, 대금융업자에 맞서는 제후, 도시상인과 제조업자, 농민이
라는 광범위한 세력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 불을  붙인 것이 루터였다. 작센 지방에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하
던 루터는 21세에 갑자기 법률 공부를 그만두고  수도사가 되었다. 그 이유는 죽
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도사가 된 루터에게 가장  중대한 문제는
구원에 관한 문제였다. 고민 끝에 루터는 해답을  얻었는데 그것은 신에 대한 신
앙과 신의 자비로운 은총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제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가 되어 자신의 새로운 신학을 전개시키고
있던 루터에게 닥친  중대한 문제가 면죄부 판매 문제였다. 이  면죄부는 이전부
터 있었던 것이지만 중세 말  이후 남용되기 시작하여 교회의 재정적 필요를 충
당하는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에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했다. 처음에 교회는
이를 중요시하지 않았으나, 그 반박문이 독일어로 번역되고 (원문은 라틴 어) 인
쇄술 덕분에  독일 전역에 보급되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자  사태는 달라졌다.
그리하여 1519년 루터는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학 교수 에크(Johann Eck)와
라이프치히에서 공개 토론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  루터는 자신의 견해가 카톨
릭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유능한 신학 교수 에크의 추궁을 받
자 정통 교리로써는 자신의 입장을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 : 봉기한 농민군들. 이들은 봉건제의 폐지  및 교회의 수탈에 맞서 싸웠
다.>
  그는 결국 결단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신념을 버릴 것인가, 교회
를 떠나 이단의 낙인을 받을 것인가? 기로에 선 루터는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
다. 그는 다시 한번 `참된  신앙이란 오직 성경에 의거한 믿음`이란 자신의 신념
을 재확인하면서 이러한 신앙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는 제후들의 도움이 필요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루터는 1520년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 귀족에게 고함>
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독일 귀족들에게 독일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할 것을 권고했다.
  1521년 루터는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그리고 황제  칼 5세도 그를 법의 보호
밖에 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루터는 연방  군주들의 도움으로 은신하면서 라틴
어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신앙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은 그로서는
모든 이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었다.
  이 무렵에 이르러 루터의 종교 개혁은  전국적인 사회 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교회의 압박과 제후의 압제에  고통받고 있던 농민들은 루터의 `신 앞에서의  평
등`에 자극되어 대규모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  농민들은 종교 개혁이라는
갑작스런 사태에서 비롯된 지배자들의  분열과 체제의 혼란을 틈타 자신들의 권
리를 자각하고 요구했던 것이다. 1524년  6월 슈바르츠발트 지방의 슈튤링엔에서
발생한 농민 봉기는 순식간에 라인란트트, 슈바벤,  프랑켄, 튀빙엔 등의 남부 독
일 일대로  확산되어 갔다. 이 농민들의  봉기는 규모가 매우 컸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폭동의  수준을 넘어서  조직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독일 농민 전쟁
(1524~25)이라고 한다. 농민들이  내건 요구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대표적
인 것이 슈바벤의  농민들이 내건 `12개조`였으며 그것의 핵심적인  내용은 농노
제의 폐지와 10분의 1세 등 교회 수탈을 없애는 것이었다.
  농민군 지도자 가운데는 루터의 영향을 받은 젊은 성직자들이 많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토마스 뮌저(Thomas Munzer)였다. 그는 루터의 주장을 종교적
인 면에 한정하지 않고 정치,사회적으로 확대시켜  강력한 반봉건 투쟁의 목표를
내걸었으며 일종의 평등한 공산사회 건설을 주장했다.
  처음에 루터는 농민들의 무력을 사용한 반란에는 반대하면서도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동정을 보였다. 그러나 곧 앞서 말한  뮌저와 같은 이들의 지도하에 빈
농이 반란의 중심이 되어 기존 질서의 파괴(농노제의  폐지)와 재산의 공유 등을
요구하면서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는  등 폭력적인 투쟁을 벌이자 루터는 농민
들을 비난하고  제후들에게 미친 개를  잡듯이 때려 잡으라고  권고했다. 농민의
아들임을 자랑하던 루터는 농민  전쟁에 대해 냉소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
이었다. 루터에게 뮌저와  같은 인물과 폭력적인 반란은 그의 종교  개혁을 파멸
시키려는 악마의 소행으로 보였으며  기존 권위와 권력에 대한 복종이 기독교인
의 의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각지의 제후들은 이러한 루터의  주장에 힘입어 농민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
다. 이런 루터의  주장과 태도를 보면 그는 영주, 제후,  기사등 지배계급과 한편
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들의 힘을  빌려 자신의 종교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루터에 대한 농민의 기대는 무너졌고 영방  군주들의 반격으로
농민군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루터의 이러한 태도는  매우 중요한 결과를 가져와
종교 개혁을 기존의 정치 세력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농민 전쟁 이후  루터의 종교 개혁은 제후들의  지원하에 계속되었고 그 대립
양상은 루터 파의 제후 대  교황과 황제의 싸움으로 나타났고 이후 신구 제후간
의 투쟁인 슈말칼덴 전쟁(1546~47)을 겪게 된다. 이 투쟁은 1555년 아우구스부르
크 종교 화의로 일단락되는데, 거기서  천명된 원칙은 `영역을 지배하는 자가 종
교를 지배한다`라는 것이었다.  즉 제후는 자신의 영내의  신앙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카톨릭과  루터 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를 얻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앙과 개인적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다.

  29. 희망봉의 원래 이름은 `푹풍의 곶`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유럽 인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
들은 실제 새로운 바다, 새로운 섬, 새로운 땅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이 시대를 `
지리상의 발견` 또는 대항해 시대라 한다.
  이 시대에 발견된 땅에는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거나 발견자가 명명한 이름을
붙였고 그 지명들은 아직도 쓰이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
봉`이다.  희망봉을   발견한  것은   푸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뮤  다아스
(Bartholomeu Dias, 1450~1500)인데 이 때가 1487년이었다.
  포르투갈이 가장 의욕적으로  새로운 땅, 새로운 항로를 찾아 나선  데는 그만
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후추를 비롯한 각종  향료는 지중해를 통한 동방 무역의
주요 상품이었는데 이것은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이
무역을 독점적으로 장악함으로써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볼 것이
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영국이나 프랑스도  이 지중해
무역이나 북해 무역을 통해 어느 정도의 이익을 보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항로를
찾아 나설 절박한 이유는 없었다. 지중해 무역에서 소외되어 있던 포르투갈(그리
고 이와 경쟁 입장에 있는 스페인)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얻게 될 경제
적 이득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국가들은 지리적으로 대
서양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르톨로뮤 디아스에  앞서 대항해  시대의 막을 연  것은 포르투갈의 엔리케
(Henrique,1394~1460)왕자였다. 그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하여  인도에 이르는
새로운 항로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인도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었고 그가 죽은 후 탐험대는 적도를 넘어서 나아갔지만 거기서 탐험은
중단되었다.
  1480년 국왕 조안 2세의 후원으로 탐험이 재개되었고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인
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 나섰다. 그의 선단은 아프리카의 남서부  앞바다에서 심
한 폭풍에 휩쓸려 남쪽으로 한참 흘러 내려가  약 2주간 육지를 보지 못했다. 폭
풍이 가랑 앉은  후에 동쪽으로 항해했지만 육지가  보이지 않아 다시 북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드디어 그는  곶을 발견했다. 이 앞바다에서 푹풍우를 만났기 때
문에 그는 이곳을 `폭풍의 곶`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이 보고를 받은 조안
2세는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할 것을 기약하며  이름을 `좋은 희망의 곶(즉 희
망봉)` 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하지만 희망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희망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
(Vasco da  Gama, 1469~1524)가 희망봉을  우회하여 인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30.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영국에 패한 까닭

  우리는 운동 경기 등에서 너무  강력해서 맞수가 없을 정도의 팀을 흔히 무적
함대(Invincible Armada)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정복할 수 없는 함대라는 뜻이
다. 어떤 나라의  왕이나 지도자든지 자기 함대를 그렇게 부르고  싶었겠지만 우
리가 무적 함대라  하면 보통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만든  함대를 가리킨다. 그
런데 이  무적 함대도 영원한 것은  아니어서 영국에 패하고 말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중세 말 이후 지방분권적인 봉건 체제가 무너지고 왕권을 중심으로 통일이 이
루어지면서 16세기경에  행정, 사법, 군사면에서  중앙집권적인 절대주의 국가가
성립했다. 그리고 최초로 이러한 절대주의 국가가 형성된 곳이 스페인이었다.
  15세기 후반 통일 왕국을 형성한 스페인은 지리상의 발견 이후 광대한 식민지
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곳으로보터  유입되는 막대한 양의 귀금속으로 인해 번영
하고 있었다. 특히 펠리페 2세(재위 1556~98) 때 스페인은 레반토 해정에서 투르
크를 격파하여(1571)  지중해의 패권을 잡았으며  이후 포르투갈을 합병하여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세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당시 결혼하지 않고 있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에게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여기
에다 엘리자베스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 정책은 펠리페 2세의  심기를 건드렸다.
특히 스페인과의 경쟁속에서 진행된  해외 진출 과정에서 엘리자베스는 해적 드
레이크(Francis Drake)로  하여금 스페인 상선대를 습격하도록  했다. 자기 나라
상선대가 큰 피해를 입자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드레이크의 처형을
요구했으나 여왕은 이 요구를  무시하고 도리어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
했다. 펠리페 2세에게 이것은 구혼 실패와  함께 엄청난 모욕이었고 양국 사이에
는 전운이 감돌았다. 드디어 1588년 5월 무적 함대는 영국으로 향했다.
  당시 이 무적 함대는  약 130척의 배와, 2,500문의 대포를 가지고 당당한 위용
을 자랑하던 함대였다.  이에 맞서 영국은 모두 합쳐 190척의  배를 모았지만 절
반 정도는 소형배여서 실제 전투에서 얼마나 소용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영국
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듯이 보였다.
  태풍을 만나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겨우 7월  29일 영국 해협에 그 모습을
들어낸 무적 함대는 영국 함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프랑스의 찰레 항구로 도망
쳤다. 거기서 한숨  돌리려고 했지만 다시 야간 공격을 받고  이리저리 쫓기다가
폭풍우까지 만나 피해는  더욱 커졌다. 9월에 겨우 살아남은  병력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그 동안 63척의 배와 익사, 전사 등으로 약 1,800명을 잃었다. 한편 영
국측의 손실은 배 한 척, 전사자 약 100명이었다.
  그러면 이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숙련된 선원을 가지고 있었던  점이다. 여기에 작지만 기동성이 있었던 배, 그리
고 소구경이었지만 사정 거리가  긴 포를 가지고 있던 것 등이  그 이유이다. 영
국 함대는 위세만을 믿고 덤벼든  무적 함대에 먼 거리에서 포를 쏘았으며 이에
놀라 후퇴하는 적을 쫓아 야간 공격을 감행할 정도로 기동성과 선원들의 기술이
뛰어났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패한 스페인은 이후 해상에서의 패권도 상실하게 되어 쇠퇴의 길
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그 자리를 네덜란드와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31. 명나라 말기에 발생한 노동자 파업

  일반적으로 중국은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점에서는 대단히 뒤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명나라 말기에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공업이 성장해 있었고 이에
따라 노동자 파업, 인력 시장의 형성 등의  현상도 나타나고 있었다. 16,7세기 특
히 명말청초  중국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산업  발전이 꽤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양자강 하류 지역에는 직물 수공업이 성행해서 소주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주
위에 무수한 중소도시들이 연계돼 있어 직물타운을  이루었다. 여기서는 면화 재
배, 씨빼기, 방적,  방직 등의 공정이 분화되어 있었고 상인  자본이 전체 과정을
통괄했다.
  소주의 경우 직기를 수대에서  수십 대까지 가진 직물업소가 1만여 곳이나 되
었고 이들은 직공, 무늬공, 염색공 등  분야별로 노동자를 고용했다. 이렇게 고정
된 일터를 마련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매일 새벽에 수십 명씩 모여 각 기능별로
정해진 다리 밑에서 직물업자가 불러 주기를  기다렸다. 일종의 일용노동 시장인
셈이다. 이 때문에 세계  학계에서는 이를 `자유로운 노동시장의 성립`,`자본주의
의 맹아`로 보는 설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당시 중국의 정세는 명재상 장거정이 죽은 뒤 환관들이 득세하여 횡포를 일삼
았다. 이들은 전국의 요로마다 징세관을 파견하여  오가는 상인들에게 상세를 강
제로 징수했고 도시의 직물업자에게도 직기의 수에 따라 과중한 세를 물게 하여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1601년 마침내 환관의 횡포에  저항하는 직물 노동자들의 파업과 폭동이 발생
했다.
  환관이 파견한 징세관 손융은  소주의 6개 성문에 각각 세관을 설치하고 기타
교통의 요충지에서도 상세를 강제 징수했다. 이  때문에 미곡상등 상인들은 소주
에 발을 끊었고  모든 물가는 폭등했다. 소주 시내 상업은  마비되고 직물업소의
폐업은 속출하고 직물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6월 6일 마침내 소주 시내의  직물 노동자들은 직장을 빠져 나와 거리 시위를
벌이다 손융 일파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손융과 결탁해 사리를 꾀한 그 지역 거
부인 정원복의 집을 불태웠다. 이에 놀란 정부는  상세의 폐해를 시정할 것을 약
속해 폭동은 가라앉게  된다. 사건 수습과정에서 직공으로  자처하는 갈성이라는
사람이 군중 속에서  나와 스스로 사태의 주모자로 자처하며 중형을  청했다. 이
에 책임 추궁은 그 정도에서  그쳤으며 그의 의리에 감동한 소주 시민들은 그를
갈장군이라고 칭송했다.
  정치 투쟁의 양상을 띤 이  중국 최초의 노동자 파업과 시위에서 직물 노동자
들은 시종 정연한 규율과 조직적인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들의 투쟁은 당시 소
주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지역 관리와 지식인들의 지
원도 직,간접으로 받았다.
  그러나 강남  지역(양자강 하류)을 중심으로  싹을 키우던 자본주의적인  경제
활동은 1644년 이민족인  청의 북경 점령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청은  막강한 경
제력을 보유하고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 지역을 불온시하고 대대
적인 탄압을 가했다. 특히 이 지역의 경제권을  쥐고 있던 가문이 주된 표적이었
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만약 청의 침입이 없었다면 17세기 이후 중국의 자본주
의 발전은 상당히 진전되었으리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32. 유토피아의 원래 뜻

  오늘날 이상향을 지칭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16세기 영국의 인문주의
자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만들어 낸 신조어이다.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속되어 오던 것인데 그 동기는
실제 현실에 대한  불만과 비판의 우회적인 표출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토마스
모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어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1516년에 쓴 책에서 표현했
는데 이 책의 제목이 바로 <유토피아(Utopia)>이다. 그런데 이 유토피아라는  말
은 그리스 어 ou(없다)+topos(곳)+ia(명사어미)에서 나온 말이다. 문자 그대로 하
면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다.
  <유토피아>는 영국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제1부와 이상국 유토
피아의 지리, 정치, 종교, 가족제도, 풍속 등을 다룬 제 2부로 나뉘어져있다.이 책
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신대륙  탐험에 따라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표류하다
유토피아 섬에 도착한 선원이 그곳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저자에게 들려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의 제2부에서 표류했던 선원이 들려 주는 이상 사회의 유토피아는 재산공유
제의 사회였다. 즉 착취  없는 생산과 분배, 쾌적한 노동, 교육의 남녀평등, 행복
한 가정 생활, 평화주의, 종교적 관용 등.  모어가 이렇게 재산 공유제 사회를 이
상 사회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를 근대  공산주의의 선구자로 간주하기도 한
다. 하지만 그의 재산 공유론은 인간의 악에  대한 도덕적 비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그가 본 현실은  어떠한가? 모어가 살고 있던 영국의 현실은 유토피아와
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영국은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해외 식
민지 무역이 발전했고 상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발전한 것이 모직물
공업이었다. 이전까지는 양모를  수입해 쓰던 모직물 공업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원료인 양모가 부족해지자 토지  소유자들은 좀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자 농경지
를 목장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이른바 인클로저 운동이다.
  그런데 이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농민들은 하루 아침에 대대로 살던 토지에
서 쫓겨나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라고까지 말했다.
  모어는 또 프랑스 국왕과 대신들을 예로 들어 정치에서의 책략과 야망을 폭로
하고, 나아가 정치와  사회의 근본적인 결함의 원인을 사유 재산  제도에서 찾았
다. 즉 돈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는 곳에서  국가의 올바른 번영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여러 국가의 사악함의 원인을 파헤치고 당시의
영국인들, 넓게는  유럽 인들에게 도덕적 반성을  촉구한 저서라 할 것이다.물론
거기에는 이성적인 교화로 인간을 개조하여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고 본 인문주의자의 이상이 깃들어 있다.

  33. 수염에 세금을 매긴 황제

  러시아에 절대주의를 확립하여 러시아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던 이가 17세기
의 표트르대제이다.
  15세기 말 이반 3세 때  러시아는 몽고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이후 이반 4세에
이르러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의 기본 골격을  갖추었다. 그런데 그것은 농노제를
바탕으로 하는 황제(챠르)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 국가였다. 이반 4세는
비밀 경찰을 만들고 황제에 반항하는 귀족들을  억압하는 한편, 자신에게 충실한
신흥 귀족층을 키우는  방식으로 황제권을 강화해 갔다. 또한 농민의  이동의 자
유를 박탈하고 농노제를 강화했다.
  이반 4세  이후에는 황제권 계승의  혼란에다 귀족들간의  갈등, 스테카라진의
반란 등 농민들의  반항으로 국가가 한때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가  1613년 로마
노프 왕조가 들어섬으로써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되어 러시아는 안정적인 발전
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  세기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러시아는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이고 아시아적 성격이  강한 후진 국가였다. 또한 유럽 세계와도  별로 접촉
이 없어서 유럽과 직접 거래하는 곳은 백해의 아르한겔리스크뿐이었다.
  이 때 황제에  오른 사람이 표트르 대제이다(1682).  표트르의 전 황제 표드르
(Fedor)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전 황제 알렉세이(Alexei)의 두번째 왕비의 소
생인 열 살의  표트르가 황제로 옹립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이복 누이인 소피아가 친위대의 도움으로 섭정을  폈다. 그러다가 1689년 표트르
는 소피아를 수녀원에 가두고 실권을 장악했다.
  키가 크고 총명했으며 호기심이  강한 청년이었던 표트르는 전쟁 놀이를 즐겼
고 형식적인 것을 싫어해서 궁정이나 교회의 의식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
았다. 또 손재주도  뛰어나서 자신의 의자나 식기를 손수 만들었고  외과와 치과
의 진료 기술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측근들은 그가 수술 도구를 가지고 나타나는 일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표트르는 뒤떨어진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의 기술을 도입하고자 대규
모 사절단을 파견했고 자신도  하사관으로 신분을 감추고 사절단의 일원으로 유
럽 여행을 떠났다.  유럽 여행 도중 그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조선소에서 직공으
로 일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표트르는  서구화를 통한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했다. 우선
그는 생활과 풍습을  서구화했다. 신하들은 몰론 자신의 긴 수염도  깍고 동양식
의 거추장스러운 옷을 서구식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런 조치를 강제로 시행해
수염을 자르지 않는 자에게는 `수염세`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귀족 부인들은 가
슴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다.  또한 그는 젊은이
들을 유럽으로 유학 보내고 유럽인을 초빙하여 유럽의 문화와 시술의 도입에 힘
썼다.
  표트르는 러시아의 근대화와 더불어 `서방으로의  창구`를 확보하기 위해 발트
해로의 진출을 꾀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발트 해를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
을 꺽어야만했다. 표트르는 덴마크,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과 전쟁을 시작
했다. 이른바 `북방전쟁`(1700~21)이 시작된 것이다. 1700년 11월 나바르 강 전투
에서 패하는 등  초기의 전세는 불리 했지만  후퇴해서 군비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한 러시아는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세를 뒤집
었다. 이 북방 전쟁의 승리를 통해 러시아는 에스토니아 등 `서방으로의 창구`를
얻었다.
  표트르는 북방 전쟁중에  중앙과 지방의 행정, 관료기구도  재편하여 원로원을
창설하고 지방에는 지사를 파견했다. 또한 징병  제도를 마련하고 각군 사관학교
도 세웠다.
  그렇지만 지속되는 전쟁과 개혁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표트르는 모든 것
에 세금을 부과했고 새로운 세원  마련을 위해 종래의 호구세 대신 인두세를 신
설했다. 그는 또한 중상주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하여 보호
관세로 수입을 억제하고 면세 등 각종 특권을 제조업자에게 부여했다.
  이러한 표트르의 서구화, 근대화 정책과 팽창  정책으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후
진성을 벗어나 비로소  유럽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제(the
Great)'라고 불리게 된  표트르 1세는 북방 전쟁중 새로 건설해  수도로 삼은 페
테르스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34. 수평파의 요구는 무엇이었는가?

  런던 근교에 퍼트니(Putney)라는 곳이 있다.  템즈 강을 가로지르는 그곳의 퍼
트니 다리 옆에 있는 교회에서 1647년 10~11월에 청교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주
역인   의회군의  평의회가   열렸다.  여기에서의   의회군의  지도자   크롬웰
(Cromwell,1599~1658)과 그의 사위  헨리 아이어튼(Henry Ireton)은 사병 대표들
과 격론을  벌였다. 이 사병 대표들은  정치적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하여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를 주장했다. 이들이 바로 `수평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크롬웰은 그들의 주장을 거부했다. 그에게  정치란 지주나 상인처럼 일
정한 재산을 가진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농민이나 직인처럼 재산도 없
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
  혁명의 승리를 향해 왕당군에 맞서 함께 싸운 의회파 안에서의 이러한 대립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 의회의  하원에서  다수를  차지한  것은 젠트리
(Gentry)라고 불리는  지주층이었다. 이들은 이전 세기에  모직물 공업의 발달에
따라 양목을 위한 인클로저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로서 이제는 유력한 사회층
으로 성장해 있었다.  또한 도시에서도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에 따라  시민 계급
이 성장했다. 그런데 이들 시민층과 앞서 말한 젠트리 중에는 청교도가 많았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와 그의 뒤를 이른 찰스 1
세는 왕권 신수설의 신봉자로서 전제 정치를 실시했고 이에 방해가 되는 의회의
권한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또한 찰스 1세는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종교면에서도 국교회를  강화하고 청교도를 박해했다. 따라서 의회와 국
왕의 관계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1628년 대외 전쟁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의회를 소집한 찰
스 앞에 의회가 내놓은 것은 과세의  승인이 아니라 <권리청원>이었다. 영국 헌
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이 된 이 권리청원에는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 개인 집에  병사를 숙박시킬 수 없다.  평화시에는 계엄령을 선포할 수 없
다. 자의적인  구속이나 투옥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찰스는  의회의
요구를 부득이 승인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의회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
닫고 다음해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하지만 1639년 스코틀랜드의 장로파가 국교회를 강요하는 데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다음해인 1640년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런데  11년 만에 소집된 의회는 왕의 과세  승인을 거부하고 오
히려 왕의  실정을 실랄하게 비판했다.  국왕과 의회의 대립은  해소되지 못하고
결국 내란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이  내란은 1645년 네이즈비  전투를 정점으로
하여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의회군은 승리 이후 평화와  질서 회복이라는 과제를 놓고 그 동안 잠
재되어 있던 내부  분열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의회파 내부의  대립은 크게
장로파와 독립파로 나타났다. 장로파는  장로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려는 사람들
로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독립파는  의회군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었
고 각 교파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수평파가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의회파내의
대립 속에서였다. 장로파는 의회군을 해산하는 조치를  통해 자파의 기반을 강화
하려고 했는데 이에 맞서 의회군은 장교와 사병의 대표로 구성된 군평의회를 만
들고 자신들의  불만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의회군은 밀린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제대  후에도 마땅한 대책이 없던  차에 해산당하게 되자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군의 요구를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장교와 사병 사이의 의견차
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군의  불만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자신들이 피흘려
승리로 이끈 혁명의 대의와 새로운 입헌 질서라는 문제로 사태가 발전하자 차이
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가 퍼트니에서 벌어진 크롬웰과 사병  대표 사
이의 격론의 내용이다.
  완전한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는 수평파의 요구는 당시 그들이  작성한 <인민
협정>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21세 이상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권을 비롯
하여 신앙과 종교의 자유, 법의 의한 재판,  채무로 인한 인신 구속 반대, 공무원
선거제, 징병 권한의 의회 귀속등의 주장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평파의 요구는 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에 의해 거부당했고
이후 아일랜드 원정을  거부하는 사병들의 집회는 폭력적으로  해산당했다. 수평
파는 패배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한 정치적 평등과  권력 남용에 대한 견제 사
상은 수평파를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35. 미국인들은 홍차를 마시지 않는다.

  미국 사람들은  홍차를 마시지 않고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미국의 상점에서
홍차를 주문하면 의아한  눈길로 쳐다본다. 반대로 영국인은 하루 평균  여섯 잔
의 홍차를  마신다고 한다. 주로  영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인  미국인들의 관습이
이토록 다른 것은 왜일까?
  이것은 미국의 독립 혁명의 와중에서 생긴 관습이다.
  17세기 이래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원하는  청교도와 사업으로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영국에서 북아메리카의 동부  해안으로 이주했다. 이리하여 18세기에는
13개 지역에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영국은 식민지마다 총독을  임명했으나 실제
로 간섭하는 일은 없었다.  식민지는 각기 의회를 가지고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중엽 이후 영국의 정책이 바뀌었다.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식민지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등 중상주의 정책을
강화했던 것이다. 이에 식민지인의  불만은 점차 높아져 갔다. 모든 문서에 인지
를 붙이도록 한 인지법(1765)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버지니아 의회가 인지
법 반대  결의안을 가결했다. 대표가  참가하지 않은 영국  의회로부터의 과세는
부당하며 식민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단정한  이 결의안은 식민지를
가로질러 모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 이것이 반
대 운동의 표어로 자리 잡았다.
  영국 의회는 다음해 인지법을  폐지했지만 본국이 식민지에 과세할 권한이 없
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해에 각종 수입품에 세금을  부과했지만 불
매 운동이 일어나 1770년 이것마저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차에 대한
세금은 남겨 두었는데 이것은 본국의 과세권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반대로 식민
지의 입장에서 보면 차에 대한 세금은 억압의 상징이었다.
  게다가 1773년 영국  정부는 차의 판매 독점권을 동인도 회사에  넘겨 주었다.
식민지인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1773년 12월 16일 밤  보스톤 항에
정박한 세 척의 동인도 회사  배에 인디언으로 가장한 50명의 사람들이 몰래 올
라갔다. 이들은 차가 든  300개 이상의 상자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이것이 이른
바 보스톤 차  사건이다. 본국에 대한 분노가  차에 대한 분노로 폭발한 것이다.
이 사건이 미국인들이 차를 마시지  않고 대신 커피를 즐기게 된 역사적 뿌리이
다.
  이후 본국과 식민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식민지 대표들은  1774년 9
월 대륙 회의를  필라델피아에서 열었다. 식민지인의 자치와  권리를 지키겠다는
점에서 56명의 대표들의 생각은 일치했다. 만약  본국 정부의 정책이 완화되었다
면 전쟁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국의  입장은 강경했
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최초의 무력 충돌은 이듬해 4월에 발생했다. 독립 전
쟁이 시작된 것이다.  보스톤 서쪽 콩코드에 있는 무기고를 파괴하기  위해 출동
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일전을 벌였다.
  6월 제2회 대륙  회의는 워싱톤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듬해인  1776년 7월
4일  대륙 회의는  <독립  선언서>를  공포했다. 주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기초한 독립  선언은 그 앞 부분에서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하는 천부의 권리를 가지며, 정부는 피치자의  동의에 의
하여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수립된 것이고, 따라서 정부가  그러한 목적
을 파괴하는 경우 이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권리가 있다고 했다. 민주
주의의 기본적인 원칙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이 문서는 이후 프랑스 혁명
의 <인권 선언>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인들은 독립을 원하는 애국파와 영국을 지지하는
충성파로 갈라졌다. 하지만  식민지인의 다수는 애국파를 지지했다. 초기에 불리
했던 식민지군은 1777년 사리토가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를 계기로 국제
정세도 식민지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프랑스가 식민지편에 가담했고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무장  중립을 선언했다. 고립된  영국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1783년 파리 조약으로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이로써 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신생  미합중국이 탄생했
으며 <독립 선언서>를 공포한 7월 4일은 독립 기념일이 되었다.
  미국 독립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보스톤 차 사건은 커피를 마시는 미국인
의 일상 생활에 깊게 새겨져 있다. 오늘날  보스톤 항구에는 당시의 배를 재현한
배가 정박해 있으며 관광객은 돈을 내고 차  상자를 바다에 던지기도 한다. 차이
가 있다면 차 상자 안이 비어 있으며 나중에 그물로 건져 올린다는 점이다.

  36. 좌파, 우파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현대 정치에서 `좌파`라는 말은 급진파 또는 진보파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
으며 `우파`라는 말은  보수파 등과 마찬가지로 통용되고 있다. 이  좌파, 우파라
는 말이 이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였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도화선으로 프랑스 혁명은 불붙기 시
작했다. 이 사건이 있기 2개월 전쯤에  소집된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는 스스로를
제헌 의회로 선언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8월 26일 <인간
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여 민주주의를  근본으로 삼는 국가 건설의 토대
를 마련했다.
  하지만 국왕을 폐위시키지는 않았으며 1791년 제정된 헌법에서도 국왕의 지위
는 인정되었다. 만약  루이 16세가 이 헌법하에서의 입헌 군주라는  지위에 만족
했다면 프랑스 혁명의 진로는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절대 군주의 지위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루이 16세에게 입헌군주
란 참을 수 없는 허수아비와 같은 자리였다.  그리하여 그는 외국의 도움을 받으
려 했으며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황실은 그러한 루이의 요
청에 응하려 했다. 루이  16세는 몰래 파리를 탈출하여 오스트리아로 가려 했다.
그러나 1792년 변장을 한 채 가족을 파리를 빠져 나간 루이 16세는 도중에 어느
마을 사람들에게 들켜 파리로 되돌아오고 만다 (바렌느 Varennes 사건).
  국왕의 배신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국왕이 문제
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간섭 전쟁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닥쳤다. 전쟁
이 시작되자 준비가 거의 없었던  프랑스 군대는 잇달아 패배했다. 그러나 `조국
이 위기에 처했다`는 입법  의회의 선언에 호응하여 전국에서 의용군이 속속  파
리로 몰려들었다.
  민중들은 반혁명군의 계속되는 승리  뒤에는 내부의 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국
왕을 체포하려고 마음 먹었다. 1792년 8월  10일 파리의 혁명적 군중과 의용군들
은 왕궁으로 쳐들어가  루이 16세와 왕비를 붙잡았고, 의회는 왕권의  정지를 선
언했다.
  이 사이에 프로이센 군대는  국경을 넘었고 9월 파리에서 200킬로미터 떨어진
발미까지 육박했다. 조국을  지키려는 의용군들은 이 발미 전투(9.  20)에서 죽기
를 각오하고 싸웠고 승리했다.  그리고 바로 이 날 입법 의회  대신 국민 공회가
소집되었다. 이 국민 공회는 왕권의 폐지를 선언하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당시 국민 공회는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지롱드 파와  쟈코뱅 파가 그
것이며 거기에 더해  중간에 유동적인 중도파들이 있었다. 그런데 국민  공회 회
의에서 지롱드 파는  오른쪽에 있는 좌석에 앉았고 쟈코뱅 파는  왼쪽에 앉았다.
따라서 그들을 각각 우파, 좌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둘 다 공화주의자들이었으나 지롱드 파는 부유한 부르주아지를 대변했고 지방
분권과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했다. 한편 쟈코뱅  파는 부르주아 출신이기는 했
지만 소시민층과 민중을  지지 기반으로 삼았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을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복지와 혁명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통제경제도 불사해야 한다는
철저한 민주주의자들이었다.
  이렇게 정치적 목표를 달리 하는  두 정파는 국왕 처리 문제로 대결로 치달았
다. 이 문제에 관해 지롱드 파는 가능하면  국왕을 재판에 회부하지 않으려고 했
으며 최소한 사형은 면하게 하려고 했다.
  국민 공회는 1792년  12월 11일 국왕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모든 의원들이
국왕이 유죄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사형에 처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
원들은 적지 않았다.  물론 로베스피에르를 필두로 하는 쟈코뱅 파는  혁명의 안
전을 위해 조국과  국민을 배반한 국왕을 처형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1793
년 1월 16일 사형이 결정되었다. 표결 결과는 사형 찬성 387표, 반대 334표였다.
  1월 21일 루이 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
비도 같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그만 섬에 도착하여 타고 온 배를 불
지른` 격이었다.

  37. 최초의 흑인 공화국 탄생

  근대 사회에 넘어가는 전환점이었던  프랑스 대혁명은 그 과정의 격렬함과 이
념의 보편성 때문에  다른 시민 혁명들, 예컨대  영국 혁명, 미국 혁명과 비교된
다. 특히 대혁명이 천명한  이념의 하나인 `평등`은 `모든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
제를 폐지한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모든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1794년 2월  4일자 법령
이 나오기 전에 벌써 혁명의 영향은 대서양을  건너갔다. 1791년 8월 22일 밤 멀
리 카리브 해 이이티 섬 북부에서 봉기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이다. 당시 아이티
섬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나누어 식민지로 가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노예제의 사
슬에 신음하던 분노한 흑인 노예들은 프랑스 인 관리와 농장주의 저택으로 쳐들
어갔다. 이  과정에서 봉기의 지도자로  떠오른 사람이 프랑스와  도미니크 투생
(Francois Dominique Toussaint, 1743-1803)이었다.
  투생의 선조는 아프리카에서 프랑스 인에게 잡혀  온 노예였다. 따라서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던 투생은  나중에 주인의 마부로 일했다. 하지만 그가  어느 노예
들과 다른 점은  독학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혁명 서적들을 많이 읽었고  특히 볼테르가 쓴 글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런 점이 그를 봉기의 지도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1793년 투생은 다른 봉기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스
페인 편에 가담했다.  당시 동부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식민지  군대가 자신들
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프랑스 식민지역으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투생은
곧 스페인 군대와 그들의 동맹군인 영국군의 주둔은 노예제의 복구를 가져올 것
임을 깨닫고 다시 프랑스에 합류했다. 그 때 그를 따르는 병사는 4,000명이나 되
었다.
  이렇게 힘을 모은 투생의 군대는 영국군을 섬에서 몰아냈을 뿐 아니라 대부분
의 프랑스  인 관리들도 쫓아냈다. 그리고  1801년 초 그의 군대는  드디어 섬의
동부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 산토 도밍고를 점령했다. 이렇게 하여  오랫동안 노
예 생활을 하던 흑인들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나라
를 건설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해 7월 1일 최초로  흑인들이 스스로 제정
한 헌법이 세상에 나왔다. 아이티의 독립을 정식으로  선포한 이 헌법은 또한 노
예제를 영원히 폐지하며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아이티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황제가 된 나
폴레옹은 프랑스 식민지를 되찾기 위해 샤를 르클레르크(Charle Leclerc)가 지휘
하는 2만 명의  군대를 보냈던 것이다. 투생과 그의 군대는  격렬히 저항했고 프
랑스 군대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정면 공격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
단한 르클레르크는  음모를 쓰기로 작정했다.  1802년 초 그는  투생에게 프랑스
군 진영에서 평화적 담판을 하자고 제안했다. 투생은  프랑스 군이 큰 손실을 입
고 패배했으므로 진심으로 평화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제안을 수락했
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투생이 프랑스 군의 진지로 들어
가자마자 그는 체포되어 프랑스로 압송되었다. 투생은  1803년 4월 분노 속에 옥
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아이티 민중을 격분시켜 프랑스 군에 대한 저항은 거세졌
다. 그  해 10월 프랑스 군이  점령하고 있던 포르토 프랭스를  해방시켰고 11월
29일 `독립 선언`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4년 1월 1일 정식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이렇게 하여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탄생했으며 아이티 민중은 투생을 루베르
튀르(L'ouverture: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라는 뜻)라고  부르며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38. 게릴라의 원조는 스페인

  1804년 5월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프랑스
황제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 유럽을 정치적으로 통일해 지배하는 것을  꿈꾼 그
는 정복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갔고 그 영토에 프랑스 혁명의 이념과 공화국 제
도를 실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나폴레옹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국가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영국
이었다. 하지만 1805년 10월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해군에 크
게 패한 바 있는 나폴레옹은 직접 침공을 피하고 대신 1806년 대륙  봉쇄령(베를
린 칙령)을 내렸다. 이는 유럽 대륙과 영국의 통상을 금지하는 것으로 영국의 경
제에 타격을 줌과 동시에 프랑스의 시장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대륙 봉쇄령은 생각했던 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국의 경제력은
나폴레옹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고 게다가 영국 상품이 대륙으로 밀수입되
었다. 하지만 해군력이 약한 나폴레옹으로서는 바다에서  이 밀수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 밀수 통로는  영국의 동맹국인 포르투갈의 리스본이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점령하려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스페인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1807년 포르투갈 점령 계획을 세우고 스페인에 포르투갈을 분할하자
고 제안했다. 그 결과 포르투갈이 점령되기는  했지만 스페인도 실질적으로 프랑
스의 지배하에 놓인 꼴이 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은 마드리드를  점령했는데 이에 저항하는 마드리드 민중이 5
월 2일 프랑스 군을 공격하여 상당수의 프랑스 군이 살해되자 프랑스 군은 보복
을 감행했다. 무기를 소지한  채 체포된 스페인 인은 군사 재판후 처형되었다. 8
명 이상의 집회는 모두 금지되었다. 프랑스 인이  살해된 경우 그 사건이 발생한
마을은 완전히 불타 버렸다. 5월 3일 마드리드  곳곳에서 많은 스페인 인이 처형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고발과 분노를 화폭에 담은 것이 고야의 <1808년 5월 3
일)이다. 이 사건 직후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을 퇴위시키고 자신의 형을 스페
인 왕에 앉혔다.
  이 사실이 전국에 전해지자 민중 봉기가  확산되었다. 저항이 거세었기 때문에
프랑스 군은 일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해 말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재
차 침입한 나폴레옹은 거의 스페인 전역을 정복했다.
  그러나 이 정복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프랑스 군은 게릴라전  때문에 골
치를 앓았다. 게릴라(guerrilla)라는 말은 소규모 전쟁을  의미하는데 당시 민중의
전투를 표현하기 위해 쓰였다.  프랑스 군은 처음 경험하는 전투에 당황했다. 정
규전과 다르게 언제 어디서 스페인  게릴라 부대가 출몰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
다.
  프랑스 군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스페인 게릴라 부대들은 영국군과 함께 1811
년에서 13년 사이에 프랑스 군을 내몰았다.
  나폴레옹은 이 스페인에서의 전쟁을 두고 “스페인의 궤양이 나를 괴롭힌다”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 말처럼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나폴레옹 몰락의 제1보
였다.

  39. 폴란드 인의 비애가 담긴 쇼팽의 <혁명>

  우리에게도 친숙한 음악가 쇼팽(1810-49)은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유럽 고전 음악의 전통과 폴란드  민족 고유의 색채를 종합한 독자적인 음악 세
계를 구축하고 피아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천재였다.
  그런데 쇼팽이 폴란드 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쇼팽이 살았던 시대에 독립국가
로서의 폴란드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일찍이 폴란드는  동유럽의 대국이
었지만 17세기 이후 점차 쇠락해져 `유럽의 국가`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그리
고 쇠락한 폴란드는 1772-95년 세 차례에 걸친 분할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
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1807년  나폴레옹의 원조로 바르샤바 대공
국이라는 명칭으로 어느 정도 국가의 틀을 갖추었지만 나폴레옹 몰락 이후 다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쇼팽이 태어난 1810년에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바르샤바 대공국이 있었는데
나폴레옹 몰락 후인  1815년의 빈 회의를 통해 폴란드 왕국이  수립되었다. 하지
만 이 왕국은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황제가 국왕으로 있는 러시아 영토
에 불과했다.
  어렸을 때부터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한 쇼팽은 1829년 열아홉의 나이로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하고 도시 빈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이 연주회로 호평을
받은 쇼팽은 음악가로서의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듬해 가을  연주 여행에 앞서  그는 바르샤바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새로운
출발을 앞둔 이 천재는  열정적으로 연주했지만 그에게 그 연주회는 조국에서의
마지막 연주회가 되고 말았다.
  다시 빈으로 연주 여행을 떠난 쇼팽은 빈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르샤
바 봉기 소식을 들었다. 1830년 파리에서 불타오른  혁명은 전 유럽에 영향을 미
쳤고 드디어 11월  폴란드에도 봉기의 기치가 높이 올랐다. 그러나  봉기 세력은
대귀족 중심의 보수파와 중소 지주 중심의 진보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게다가 어
느 쪽도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봉기는  러시아 군대에 의해 1831년 9월 바르샤바 함
락과 함께 진압되었다.
  귀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태의 추이를 보고 있던 쇼팽은 독일의 슈트트가르
트에서 진압  소식을 들었다. 작품 번호  10번 `12개의 연습곡`중의  하나인 <혁
명>은 이 때  작곡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곡에는 `골수까지  폴란드 사람`인 쇼
팽이 자기 민족의 고통에 동참하지 못한 고뇌와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잘 담
겨 있다.
  이후 폴란드 인으로서의 고뇌를 간직한  채 파리로 간 쇼팽은 죽을 때까지 조
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1849년 파리에서  서른아홉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쇼팽의 마음은 항상 조국 폴란드를 향해 있었다.  말년에 건강이 매우 나빠진 와
중에도 그는 런던에서 폴란드 난민을 위한 자선 연주회에 출연할 정도였으며 사
망한 해에 작곡한 두 편의 작품도 모두  마주르카(4분의 3박자의 폴란드 무용곡)
였다.

  40. 영국에도 부정 선거구가 있었다.

  현대 정치의  기본적인 형태인 의회가  가장 먼저 벌달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7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의회는  의회 정치의 본보기라고 할만하
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직후인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영국의 의회 정치는 현재
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관건은  `얼마나 민의를 고루 대변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
이다. 하지만 당시  의회는 영국의 전 지역과  전 계급, 계층을 골고루 대변하고
있지 못했다. 18세기  시작된 산업혁명은 급속한 인구 이동과 사회  구조의 변화
를 가져왔지만 영국 의회는 명예 혁명(1688) 이후  별다른 변화없이 유지되어 왔
다.
  우선 19세기 초  영국 인구의 대다수는 참정권을 가지지 못했다.  일정한 규모
이상의 토지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주었기 때문에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민은 물론 새롭게 대두하고 잇던  중간계급(자본가계급)도 선거권이 없는 경
우가 허다했다. 전국민의 2-3%, 성인 남자만 따져도 10%가 조금  넘는 숫자만이
선거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산업화에 따른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과 그로 인한 도시의 비대화가 진
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선거법은 과거의 인구 기준에 따라 선거구
를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예를 들어  인구 300만이 조금
넘는 남부의 10개 주가 의회에서 236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 400만에 가까운
북구 6개 주에 할당된 의석수는 불과  68개였다. 그리고 멘체스터와 리버풀 같은
신흥 공업도시는 단 한 명의 대표도 선출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른바 불합리한  선거구(rotten boroughs: 부패 선거
구) 문제였다. 이는  산업화에 따른 인구 이동 등의  이유로 유권자가 거의 없는
선거구를 말한다. 이를테면  유권자가 50명 미만인 어떤 선거구는  2명의 의원을
선출했는가 하면,  단윅(Danwick)의 선거구는 그 대부분이  바다에 매몰되어 배
위에서 투표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불합리를 고치려는 움직임은 선거법 개정 운동으로 일찍부터 나타났지만
그것이 강력해진 것은 1820년대였고 드디어 1832년 6월 선거법 개정안이 의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그  주된 내용은 불합리한 선거구를 없애고 이를  인구가 증가
한 신흥 공업 도시에 배정하는  한편 선거인의 재산 요건을 완화하여 토지 소유
이외에 동산 소유도 재산 요건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권자수가 약
50% 정도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거법 개정으로 중간계급의 대다수는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지
만 재산이 거의  없거나 적은 하층민들은 여전히 선거권이 없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1832년 선거법 개정은 의회 개혁의 출발점에 불과했다.
  선거권을 갖지 못하고 정치에서  자신들의 의사를 주장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
은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을 통해  참정권의 획득과 정치 개혁을 요
구했다. 이 정치 운동은 1837년 `런던 노동자 협회` 지도자들이 작성하고 이듬해
8월 버밍엄의 군중 집회에서 채택된 <인민 헌장(People's Charter)>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그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이 <인민  헌장>의 골자는
성년 남자의 보통 선거, 의원의 재산 요건 폐지, 의원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당
시 7년), 인구 비례에 의한 평등한 선거구 설정, 의원에 대한 봉급 지불, 비밀 투
표제 등이었다.
  노동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참가한 이 운동은 1839년, 1842년,
1848년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통하여 6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
은 청원서를 하원에  제출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하원을 지배
하고 있던 귀족과 신흥  자본가계급들로서는 만약 보통 선거권을 부여하면 국민
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계급이 권력을 장악할지도 모른
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인민 헌장>에  담긴 내용은 이후  의회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대부분은 이후 성취되었다.
  <인민 헌장>의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인 보통 선거권은 실현되는 데 가장 오
랜 시일이 걸렸다. 1867년 디즈레일리(Disraeli, 1804-81)가  이끄는 보수당은 제2
차 선거법 개정을 통해  도시의 대부분인 임금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자유당의 글래드스톤(Gladstone, 1809-98)은  1884년과 1885년 선거법 개정을 통
해 농민에게 투표권을  확대했다.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권이 완전히  실현된 것
은 1918년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여성이 선거권을 가지게  된 것
은 1928년이 되어서였다.
  선거구의 평등은 1885년 글래드스톤의  선거법 개정 때 실현되었는데 대략 인
구 5만 명당 의원 한 명의 비율로 되었다. 비밀 투표제는 1872년에 실현되었다.
  이렇게 의회 정치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에서조차 현대와 같은 의회
정치의 골격이  마련되기까지는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소요되었고 차티스트
운동과 같이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요구되었다.

  41. 9표차로 발발한 아편 전쟁

  1840년 3월 19일 영국 하원.
  중국 정부가 아편을 선적한 영국 선박에 식량과 음료제공을 거부한 사태를 두
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즉각 전쟁 개시를  주장하는 쪽과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는 쪽이 맞서 다음달
10일 표결에 들어가기까지 토론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됐다. 자본가 집단의
모임인 인도 중국협회의 강력한 압력을 받은 정부와 상원의 웰링턴 공작등은 파
병동의안을 가결시키기 위해 하원을 집요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이때 당시 30세에 불과한  자유당의 글래드스톤이 연단에 올라 좌중을 쏘아보
며 연설을 시작했다.
  “중국 영토에 체제하고 있으면서 그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 외국인에 대해 중
국이 식량과 음료 공급을 거절한 것이 어째서 중국의 죄가 되는지 본인은 잘 모
르겠습니다. 정부는 이 전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 작전 행동이 어느 정
도까지 확대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즉,  그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나는 이
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광동에 나부끼는 영국기를 볼 때마다  벅찬 감격
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정의의 상징이고 압제에  대한 반항, 공정한 경제 행동을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고귀하신 귀족 파머스턴경(당시  외상, 아편
전쟁의 주동자)의  후원 아래 우리 국기가  부끄러운 밀무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중국 연안에서 나부끼고 있습니다. 위풍당당한 영국국기를  볼 때마다 느꼈던 벅
찬 감동을 앞으로  다시는 느낄수 없게 될  것을 생각하면 전율스러울 따름입니
다.”
  의사당 밖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평화협회 등 여러 시민단
체들이 무력에  의한 해결을 반대했고 맑스도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를 통해
“아편 무역에 비하면  노예 무역은 그래도 인정이  남아 있다”며 영국 정부를
비판했다.
  그러나 외상 파머스턴은 “아편은 술보다 해독이 덜하다”고 강변하면서 “중
국인의 도덕심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라도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 또 워털루 전쟁의 영웅 웰링턴 공작은“50년  공직 생활에서 영국 국기가 광
동에서 당한 것과 같은  모욕을 본 일이 없다”며 중국 응징을  열렬히 지지, 의
회의 여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온 세계의 주시 속에  4월 10일 실시된 표결에서 파병안은 불과 9표차로
통과되었다. 전 동양인의 운명을 뒤바꿔 놓은  아편 전쟁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시작된 것이다.
  영국 정부가 이 같은 강한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명분없는 전쟁을 감행한 이
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바로 당시 중,영간의 무역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 1689년 영국이 중국
차를 처음으로 구입해 간 이후로는 차는 중국의  최대 수출품이 되었다. 당시 영
국에서는 상류 계층뿐 아니라  노동자까지도 차를 즐겨 마시는 풍속이 확산되어
중국에서 수입하는 상품의 90%를 차가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말이 되면
차의 평균 수입량은 영국이 중국에  수출하던 3대 상품(모직물,금속,면화)의 수출
량과 맞먹었다.
  영국 정부는 높은 관세로 차의 수입을 줄이려 했으나 오히려 밀무역만 초래하
여 1784년 경감법을 관세를 대폭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1820년대가
되면 중국 차 총생산량의 70~80%가 영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에 비해 영국이 크게 기대했던 상품인 모직물은 중국 시장을 휘어잡지 못하
고 있었다. 모직물은 중국인에게는 아직 사치품에 속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유한
사람들도 실크와 털옷을  더 선호했다. 더욱이 중국이 외국에 개항하고  있던 광
동은 중국의 남부 지역으로 날씨가 춥지 않았으므로 모직물의 판매는 기대에 미
치지 못했다.
  영국은 인도 면화를 새 상품으로 개발하여  모직물의 부진을 만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도 면화도 1817~19년을 차의 수출액을 휠씬 밑돌았다.
  이처럼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항상 적자를 면치 못했는데 이에 따라 결제
수단이었던 은이 대량으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졌고 영국의 자
본가들은 이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이 인도 면화 대신 새로 개발한 `상품`
이 바로 아편이었던 것이다.
  인도,중국협회를 비롯한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적자를 훌륭해 해소해  주고 있
는 아편이 중국 관리에  의해 소각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리  없었다. 더 나아
가 이들은 이 기회에 아예  중국의 개항장을 북부의 추운 지역으로 확대해 모직
물을 팔아 먹을 속샘도 키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영국 정부는 이에 앞장 섰다.

  42. 대통령제를 채택할 뻔한 태평천국운동

  조선의 동학농민운동, 인도의 세포이 반란과 함께  유럽 자본주의에 대항한 아
시아 농민의 대표적인 투쟁  중의 하나인 태평천국운동은 과거 낙방생 홍수전의
기이한 꿈에서 비롯했다.
  그 꿈은 자신이 승천하여 금빛 수염의 근엄한  노인에게 진도와 검, 권능을 부
여받고 중년 남성의 도움을 받아 천상의 요마를 쫓아내고 세계를 구한다는 내용
이었다. 이전에 광주 거리에서 기독교 안내문을 주워  읽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
는 그는, 꿈속의 노인은  여호와, 중년 남성은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자신은 예수
의 동생이라고 믿고  상제회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청조의 더딘  개방정책에 신
물을 내고 있던  열강들은 한때 태평천국군을 지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기독
교에 대한  상제회의 이단성과 태평천국군의 공산적  혁명성을 간파하고 청조를
무력 지원했다.
  태평천국 지도부는 토지의 균등 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천조전무제도`를 시행
하는 등 농민공산주의적인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부르조아
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이 개혁의 주창자는  천왕 홍수전인 조카 홍인간(1822~64)이었다. 그는 최초의
상제교 개종자로서  과거 시험에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1852년 이후에는
태평군과 합류하지 못하고 홍콩으로 피신하여 개선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으면
서 활동했다. 스웨덴  사람 햄버그와 런던 선교회 회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선
교사 훈련을 받았다.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 홍인간은 자연과학, 정치학, 경제학,
외국정세 등을 광범하게 공부했다. 그는 당시  태평천국뿐 아니라 중국 사회전체
를 통틀어 서구 문물에 대해 가장 체계적인  지식을 갖춘 최초의 선각자였다. 마
침내 그가 광동으로부터 육로를 통해 1859년 태평천국의수도인 남경에 도착하자
홍수전은 그를 최고 행정직위인 군사로 임명했다.  이에 홍인간은 개혁 이론서라
할 <자정신편>을 저술, 본격적인 개혁 작업을 추진했다.
  그의 노선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자본주의적인 개혁 방안이었고 이전의 태평천
국의 평등주의적인 경제 이념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리를 옹호하
여 각 생산 부문의 경쟁적  발전, 노동력의 질적 제고를 촉구했다. 이를 위해 은
행, 우편, 새로운 기계 기술의 발명에  대한 전매특허, 철도, 기선, 도로, 광산, 신
문, 노비폐지, 고용 노동의 도입 등을 제시했다.
  정치 체제에서도 홍인간은 미국식  대통령제 채택을 신중하게 검토했고 그 밑
에 외국 사정에  밝은 사람들이 실무를 맡을 것을 구상했다.  하마터면 장발적이
라 불리던 농민  반란이 아시아 최초의 대통령을 탄생시킬 뻔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평등 외교를 기반으로 한 무역 경쟁을  통해 부국, 강국화가 가능하다고 보
았다.
  이 같은 개혁 구상은 태평천국의 진압 후에 청조에 의해 추진되는 양무운동이
나 같은 시대 일본의 유신세력이 구상했던 근대화 계획과 맞먹을 만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새로운 개혁 노선을 확보한  태평천국은 양자강 하류의 경제 중심지와 서양의
근대적인 기선을 획득하기 위해 상해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태평천국이 그들
의 형제라고 여기고  있던 서구 열강은 태평천국군이  상해로 입성하려 하자 그
동안의 관망 자세를 버리고 상승군이라는 부대를 조직, 무력 개입에 나섰다.
  근대적인 대포 앞에서  태평천국군은 무력했다. 이홍장의 중국군과  영국 장군
고든의 외인부대의 거센반격에  태평천국은 그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천경
(지금의 남경)을 내주고 말았다.

  43. 최초의 박람회였던 1851년 런던 박람회

  1851년 5월1일 대도시  런던은 이른 아침부터 활기에 넘쳤다. 이  날은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박람회인 런던  박람회가 하이드 파크에 마련된 전시장에서 열
리는 날이었다. 온갖  계층의 영국인이 새로운 문명에 대한 호기심과  진보에 대
한 확신을 가슴에 간직한 채 박람회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철제 구조물과 유리로만 만들어져 수정궁이라고 불린 전시장에서 개최된 박람
회는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영국의 탄생을 알리는 요람이었다. `모든  나라의 공
업 제품`을 한 자리에 진열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지만 사실  영국의 공업 제품
을 전시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전시장의  절반이나 차지한 영국 전시
품을 대표했던 것은 각종  원료와 미래를 엿보게 해주었던 각종의 최신기계들이
었다. 특히 기관차,선박용 엔진, 수압식 인쇄기, 동력직기, 공작기계 등은 영국 공
업의 이름을 빛낸  제품들이었다. 박람회의 광경이 이렇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
한 일이었다.  다른 나라들도 산업  혁명을 맞이하고는 있었으나  충분히 진전된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이렇게 영국을 세계 제 1의 공업국으로 올려 놓은 역사적 과정이 18세기 후반
에 시작된 산업혁명이었다.  기계발명과 기술의 혁신으로 전례없는  생산력의 발
전을 가져온 산업혁명은  면직물업에서 시작되었다. 면직물 공업을  구상하는 두
개의 공정인 직포가 서로 개량과 발명을 자극하여 급속히 기계화를 진전시켰다.
  1733년 존 케이가 만든 자동  베틀, 1760년대에 만들어진 다추 방적기(일명 제
니 방적기),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 크롬프턴의  뮬(mule) 방적기(1779), 카트
라이트의 역직기(1784) 등이 당시 발명되거나 개량된 대표적인 기계들이었다. 이
면직물 공업의 기계화는 다른 산업의 기계화를 자극함과 동시에 증기 기관의 개
량에 의한 동력 혁명도 초래했다. 이와  함께 제철업, 석탄기업, 기계공업이 발달
하여 생산 구조도 급속하게 변화했다.
  산업의 발전은 원료의 수입과 제품의 운반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철도가 부설
되고 증기선도  발명되었다. 특히 철도는  낡은 봉건제에서 서로  폐쇄되어 있던
지역 사회를 통합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동맥이 되어 산업 혁명의 발걸음을 한층
빠르게 했다.
  이리하여 영국 각지에 대공장이 모여 도시가 생겨났고 인구도 그에 따라 집중
되었다. 공장은 검은 연기를 끊임없이 내뿜었고  기계가 돌아가는 우렁찬 소리가
도시를 뒤흔들었다. 영국은 철과 석탄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러한 산업혁명을 통한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  즉 철과, 석탄과 증기, 기계
와 엔진, 철도와  기선과 전신선의 시대의 도래는 사람들의 마음에  인간의 무한
한 능력과 진보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런던 박람회의 테마가 `진
보`였던 것은 정확하게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엇다.  일찍이 인간이 주위
세계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이토록 의식한 시대는 없었다.
  하지만 대가 없는 이득은  없다. 산업혁명을 통해 현대 사회를 맞이했지만, 아
니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도 같이 생겨났다. 공장
제도의 발전과  함께 소수의 부르주아지가 사회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성장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로 전락했다.  이윤추구가 초고의
목적으로 설정된 사회의 도래 속에서 노동자들의  생활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낮은 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평균수명도 매우 짧아졌다. 또한 임
금을 낮출 수 있다는 이유로 여성과 아동 들이 공장으로 내몰렸으며 작업환경은
매우 위험했다. 급속하게 팽창한 도시도 새로운 문제의 원천이었다. 도시는 위생
시설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고 주거 환경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후진 지역은 대량 생산에 의한 공업 제품의 침투로 전통적인
산업의 파멸을 맛보았다. 영국제 면직물의 대량  유입으로 인도 면직물업이 몰락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후진 지역은 전통적인 산업의 몰락뿐만  아니라 공업
국의 원료 공급지라는 현대적인  의미의 식민지로 전략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
다.
 한편 당시  `진보`를 의미했던 자연에  대한 지배는 사실상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것이었음을 드러났다. 특히  석탄 (나중에는 석유)이라는 화석 연료의 대
량 사용과 공업  폐기물은 자연 환경을 파괴시킨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
다.
  이렇듯 런던 박람회에서 표명되었던 `진보`는  분명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켰지
만 현대 사회가 있는 문제를  고스란히 배태하기도 했으며 그 진보에 대한 확신
은 1차대전이라는 인류의 파멸적인 경험을 거치면서 도리어 회의의 대상으로 바
뀌었다.

  44. 링컨은 노예제 페지론자였나?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사람은 링컨일
것이다. 켄터키의 가난한  오두막집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신세계  미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인물,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사람, `인민의,  인민을 우한, 인민에 의
한 정부`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천명한 민주주의자.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강렬
하게 남아 있는  그의 이미지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노예제 폐지론자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는 노예를 해방시켰다.
  1848년경 미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
다. 하지만 이러한 영토팽창과 서부 개척에 따라  이전부터 있어 왔던 남부와 북
부의 지역적 차이와 대립이 더 심해져 갔다.  그리고 남북의 대립은 영토의 확대
에 따라 새로운 주가 생길 때 그것이 노예주가 되느냐 자유주가 되느냐 하는 문
제로 격화되었다.
  땅이 넓고 기름진 남부는 식민지 시대부터 대규모 농장이 발달했고 여기에 흑
인 노예가 이용되었다.  남부는 이 대농장에서 면화 등을 재배하여  영국에 수출
하고 생활  필수품을 수입했기 때문에  자유무역을 추구했다. 이에  비해 북부는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하여 공업이 발달했다.  자본주의적 공업의 발달은 자연
히 많은 수의  임금 노동자를 필요로 했으며, 이는 남부의  노예제도와는 대립되
는 것이었다. 그리고  북부의 자본자들은 영국의 값싼 공산품이 들어올  경우 자
신들의 상품의 경쟁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보호 무역을 요구했으며 산업 발
전을 위해 중앙집권적 체제를 주장했다.
  더구나 영국의 면방직 공업의 발전은  미국 남부의 면화를 더 많이 필요로 했
고 이에 따라 남부 농장주들의 노예에 대한  수요도 더욱 늘어갔다. 1850년 노예
수는  남부 인구의 35%에 이르렀다.  하지만 노예제 확대는 당시의 세계사적 추
세에는 역행하는 것이었다.  서인도 제도에서 영국은 1833년에, 프랑스는 1848년
에 노예제를 폐지했다. 또한 당시 출판된  스토우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은 노예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노예의 국외나 북부로의  탈출이 늘어났고
흑인 노예의 해방을 주장하는 백인들도 많아졌다.  미국은 노예제를 중심으로 하
여 서서히 분열되어  갔다. 전쟁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그것을  막을 힘
은 없는 듯이 보였다.
  사태는 1859년 존  브라운(John Brown)의 공격 사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
다. 존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18명의 지지자를 이끌고 연방군의 한  무기고를 습
격하고 흑인들에게 봉기할 것을  호소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사형당했다. 이 사
건을 계기로 감리교를 비롯하여  모든 교파가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정당들과 연
방 의회조차도 노예제 문제를 놓고 분열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위기속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사람이 에이브레햄
링컨이었다. 원래 노예제를 인정하는  켄터키에서 태어난 링컨은 노예제페지론자
는 아니었다. 비록  노예들에 대해 동정적인 태도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의 염
원은 노예제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남과 북이라는  `두 개의 미국
`을 통일하는 문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태의 발전에 따라 노예제 문제
는 전면에 나설 것이었다.
  1860년 11월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링컨의 당선은 남북의 대립
을 더욱 심화시켰다. 남부인들은 링컨을  지지한 표의 99%가 자유주에서 나왔다
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미 남부에서는  링컨이 당선되면 연방을 탈퇴하자
는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사우스케롤라이나를 선두로 하여 7개  주가 연방을
탈퇴하여 1861년2월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링컨이 `나는 남부의 노예제도를 간
섭할 의도는 없다... 합중국 정부는 여러분을 공격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먼저 공
격하지 않는 한  무력 충돌은 있을 수 없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러한 애매한
태도는 벌써 효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결국 1861년 4월 12일 섬터(Sumter) 요새에 대한 남부의 공격으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몇 개 주가 더 가담하여 남부 연합은 11개 주가 되었다. 이 전
쟁은 4년간  계속되었는데 초기에는 남군이  우세했다. 하지만  북부는 경제력과
인구에서 우세했고 노예제 반대라는 명분에서도 유리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어도 노예 문제에  대한 링컨의 태도는 여전히 모호한 것이었
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군들이 점령 지역에서 노예제를 즉각
폐지하자고 건의했을 때에도 그는 반대했다.
  그러다가 1862년 7월이  되어서야 노예 해방령을 선포했다. 그것은  노예제 폐
지라는 명분의  실행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전쟁의  효과적인 수행이라는 측면이
컸다. 즉  남부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뉴올리언즈와 같이
북군이 미리 점령하고 있던 지역의 노예나 남부 경계주의 노예에 대해서는 아무
런 언급이 없었다. 또  반란을 일으킨 주라 할지라도 90일 안에  다시 연방에 돌
아오면 노예제의 존속은 그대로 인정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링컨의 온건
하고 보수적인 태도에 대해 의회의 공화당 급진파와 흑인들은 불만을 가졌다.
  1865년 4월 남부 연합의 수도 리치먼트가 함락됨으로써 4년에 걸친 전쟁은 끝
났다. 승리를 거둔 링컨은  남부를 관대하게 대했다. 그의 목적은 연방의 단결이
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암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은 링컨보다 더 관
대한 정책을 실시했고 따라서  흑인에게 유리한 법률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
했다.
  1863년 1월 1일은  미국의 흑인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날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날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흑인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정치적, 경제적으로
여전히 약자였다.  북부로 이주한 흑인들은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남부에 남은
흑인들은 다시 옛  주인들 밑에서 임금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더구나 공공시설
이용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을  금하는 1875년의 공민권법은 1883년의 대법원 판
결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던 백인들은 KKK단 등
의 테러 조직을 조직하여 흑인들을 박해했다.
  이렇듯 링컨은 개인적으로 비록 노예들의 처지에 대해 동정적이었지만 철저하
게 연방의 존립을 위해 행동했고 이러한 그의 행동은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북부
의 이해 관계를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쨌든  흑인 노예
들은 남북 전쟁을 통해 `해방`되었다. 물론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은 요원한 것이
었고 미국의 흑인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사회문제로 남아있다.

  45. 일본 농민은 존재조차도 몰랐던 천황

  한때는 `살아 있는 신`으로까지 추앙받으며 전 일본인을  그 이름 하나로 전쟁
터로 몰아넣은 일본 천황. 1945년 패전 후  히로히토 천황은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요구대로 그가 신이 아님을 공식 선언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천황은 여
전히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신으로 살아 있다.
  1989년 히로히토가  위독했을 때 일본인들은 1억의  일본 국민 모두가 천황이
나을 때까지  근신하자는 `1억 총자숙`을 실행하고  신문들은 날마다 그의 혈압,
맥박 등을 전하는 고정란을 설치하여 전 세계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아키히토 천황의 황태자가 여성  외교관과 결혼한다는 발표가 나자 일본의 양
심과 진보적 지성을  대표한다는 아사히 신문의 1면 제목은  `황태자 전하, 감축
드리옵니다`였다. 황실 대변인의 발표를  방송하는 역대황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든 일본인들이 감격해 하는 표정이 전 세계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그  어느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만세일체의  천황 혈통`을
자랑하며 천황에 대한 신앙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정치에서 천황의 위력이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 천황은  그 존재
만으로도 일본 국민의 보수적  성향과 배외주의적 기질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
다. 일본 사회가 큰 혼란에 처하게 되거나  19세기 말처럼 외국의 위협이 고조되
는 상황이 오거나 일부 정치 세력이 필요에 의해 이런 상황을 조작해 내는 때가
온다면 천황이 일본 사회의 불평을 잠재우고 통합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등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천황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해서 일본인들에게 절대적인 존재
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일본인들에게는 유감스러운 말이겠지만  불과 150년 전만 해도 그들의 할아버
지와 할머니 들은 천황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천황은 11세기 무사들이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우고 정권을 장악한 이래 한 번
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적이 없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정치적  실권은 고사
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7세기 초 정권을 잡은 뒤로 무사정권이 확고히 안정
되자 천황은 그 존폐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당시 천황가의 연수입은  쌀 3만 석이었다. 당시 도쿠가와가의  장군의 연수입
이 700만 석이었고 10만 석이 넘는 번(막부의  통제를 받던 지방정권)들도 꽤 있
었다. 천황은 일개 번의 수입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재정 규모로 옹색한 나날
을 보내야만 했다. 급기야는 생계를 위해 황가의  보물을 교토의 시장에 내다 파
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시대를 막부는 수수방관했고 행여  왕실이 정
치적인 움직임을 보일  때는 가차없는 보복을 가했다. 일부 무사들  이외에 농민
을 비롯한 일본 민중의 대다수는  이런 천황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고 알 필요
도 없었다. 그들은 영주만 의식하면 되었다.
  이렇던 천황이 민중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1840년 중국의 아편전쟁 소식이
전해지면서였다. 중국이 오랑캐  영국에게 패했다는 청천벽력을 접한  일본의 조
야는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다. 완전히 이질적인 문화의 위험 앞에서  그들은 자
기 고유의 것, 천황을 새삼스레 들춰내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막부  전복을 꾀하던 일부 하층  사무라이들은 거사의 명분을 갖기
위해 천황을 이용했다. 훗날  명치유신의 주역이 되는 이들은 천황을 `다마`라는
암호로 부르며 천황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무도 찾지 않던 교토를 연
일 드나들었다. 이들에게  천황은 신앙의 대상이기보다는 정치적  이용물에 불과
했다. 효명 천황(명치 천황  직전의 천황)이 막부를 무력으로 타도하는데 반대하
자 하층 사무라이들은 명치유신 직전에 그를 독살시켜 버린다.
  이들의 공작에 의해 어느덧  천황은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천황의 이름으
로 명치유신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농민을 비롯한 일반 일본일들에게
천황은 여전히 관심 밖의 존재였다.
  1868년 명치유신을 통해 정권을 막부에게서 탈취한 젊은 사무라이들은 자신들
의 거의 유일한 권력 기반인  천황의 존재와 위엄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이
데올로기 공작을 시작했다.  아직 나이 어린 명치 천황에게 전국  각지를 순행하
게 하고 곳곳에서 천황의 군대 사열식을 거행했다.
  1873년 명치  천황은 한때 무사정권의 본거지였던  가마쿠라의 순행길에 오른
다. 천황은  4월 1일 아침  도쿄 신바시역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가마가와역에서
마차로 갈아타고 오후에  가마쿠라에 도착했다. 여기서 무사들의  무기독점을 폐
지하고 징병제를 새로 구상한 `천황의 육군`의 야영  연습을 참관하고 한 어촌을
방문했다.
  당시 정부가 파견한 밀정은 이  때 백성들이 천황 방문에 대해 “감복해 하기
는커녕 귀찮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천황이 방문한다니까 지방관서에서는 도
로, 교량 보수에 주민들을 동원했고 천황 일행의  음식 등도 주민 부담으로 마련
했다. 안 그래도 생계가 빠듯한데 수백 년  동안 존재조차 모르다가 갑자기 나타
난 천황에 대해  어민들은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길에 난 구덩이를  메우는 일
에 동원된 사람들은 제대로 메우지 않고 짚단으로만  살짝 가리기도 했다. 이 중
한 사람은 “천자님이 오신다고 이전의 길을  고치고 청소했다. 천자님의 행차는
정말이지 귀찮아 죽겠다”고 말했다고 밀정은 보고하고 있다.
  인도에 동원된 사람들의  반응도 냉담했다. 가마쿠라에 도착했을  때 마중나온
사람들의 숫자는 예상보다 훨씬 적었고 몇몇  마을에서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마중 나온 자들도 뻣뻣이 서서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고 예를 갖출 생각을 하
지 않은 자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민중의 반응에 신정부의  실권자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이미  폐지되었던 황실
의 각종 행사를 부활시켜 성대하게 치렀고 전국의 국민학교에 천황의 사진을 배
포, 교실마다 걸어 놓게 했다.
  이어 불교를 탄압하고 신도를 크게 장려하여  천황을 신격화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자생적으로 존재하던 신사를  정리해 국가의 감독하에 두는 국가 신도정
책을 수많은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일본의 첫  의회가 개설되던 1890년에는 마침내  국가적인 천황 이데올로기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잇는 <교육칙어>가 공포되고 전국의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암송하게끔 했다.
  이리하여 20세기 초가 되면 농민의 자식인 젊은 군인들이 대형 중국국기 위에
서 중국에 대한 `대일본제국의 성스러운  전쟁`을 개시할 것을 촉구하면서 `천황
의 이름`으로 하리카리(할복)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도쿠카와 막부 말기 젊은 무사들의 배를 갈랐던  `천황의 이름`이 20세기에 와
서는 농민 아들들의 배를 가르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패전 15년이 지난 1970
년에도 저명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역시 `천황의  이름`으로 일본 정신의 부활
을 외치며 배를 갈라 죽었다. `천황의 이름`은 현대 일본 사회에서도 종이호랑이
는 아니다.

  46. 천황의 품으로 돌아간 일본의 자유 정신

  현재 일본에서 통용되고 있는 만 엔짜리 지폐에는 학자풍의 인물이 그려져 있
다. 이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로 일본의 명문사학 게이오 대학의  전신인 게이
오의숙을 창시한 일본의 대표적인 근대 계몽사상가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 계몽
사상가인가?
  김옥균, 박영효 등  한국의 개혁파들이 그를 스승으로 모실 정도로  당시 입헌
정부를 수립하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동양의 혁명가들에게 그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로 일찍이 미국, 영국 등을 견학한 바가 있는 그
는 서양의 의회제도, 교육, 인권사상 등을  소개하는 데 정열을 불태웠다. 1870년
대에 쓴 <학문을 권함>은  1872년부터 76년까지 낸 17편의 소책자를 묶은 것으
로 진보적인 계몽사상가로서의 후쿠자와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
에 앞서 영국과  미국을 다녀와서 쓴 <서양사정>(1866-69)이 20만  부가 팔려나
간 데 이어 <학문을 권함>도 소책자로 370만부나 팔렸다니 가히 일본 자유주의
사상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학문을 권함>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당연한 관념이  되어 버린 인권 평등, 실
학의 중요성, 국가 독립, 국법의 준수  등을 주장하고 있다. 서양의 계몽사상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논리와 충만한 기백을 담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이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투쟁했던 데 비해  후쿠자와의 유일한 목표는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의
독립을 보전하는 것과 나아가 일본도 열강의 대열에 끼는 데 있었다. `어떻게 해
서라도 국민 일반을 문명 개화의  문에 들여 놓아 이 일본국을 군사적으로 강하
고 상업이 번창한  대국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 나의 가장 큰  소망`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후쿠자와의 계몽적 자유주의는 언제나  일본이라는 국가의 이해에
종속되어 있었다. 여기에  이미 후쿠자와의 자유주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유주의는 어디까지나 애국을 위한  것이었지 애국을 초월하는 상위 개념이 아
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본래의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고 있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명치  정부는 급속히 보수화되어 갔다. 부농, 지식인을
중심으로 조속한  헌법 제정과 의회 설치를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을 무력으로
억누르고 정부내의 자유주의 세력을 축출해, 소수의  실권자를 중심으로 독재 정
부가 성립했다. 경제적으로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이뤄져 대다수 농민의 희생
위에 소수의  정상배들(미츠비시, 미츠이  등)이 급성장했다. 대외적으로는  서양
각국이 제국주의적인 행태를  노골화하면서 대외 위기감이 조장되고 해외침략노
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런 명치정부의 보수화  경향에 발맞춰 후쿠자와 유키치도 <학문을 권함>에
나타난 계몽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고에서 변질되어 갔다.  그는 천황을 문명 개
화의 중심이라고 숭배하는가 하면 지도자가 되어 서양 열강의 침략에 맞서야 한
다는 `아시아맹주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1900년 중국에서  터진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이 서양  열강의 군대와 함께 중국에 파견되자 후쿠자와는
`그 전쟁 보도의 기사를 읽을 적마다 저절로 눈물이 나는 것을 금할 길 없어  다
만 감격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했다.
  <학문을 권함>에서 자신이 주장했던 국가간의 평등은 온데간데없고 제국주의
군대가 되어 중국 땅을 주름  잡는 것에 대한 감격만이 말년의 후쿠자와를 사로
잡고 있었던 것이다.
  1901년 그가 사망했을 때 일본  국회는 이 일개 야인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미 후쿠자와는 자유  일본의 상징이 아니라  중국와 조선
침략을 목말라 하는 일본 지배계급의 정신적 지주였다.
  후쿠자와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일본 지식인들은 자유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
에 이르기까지 마음 깊은 곳에서는  국가와 천황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콤플렉
스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 근현대사를 통해 서양의 여러  사조를 받아들였
던 그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자신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사상으로 쉽게 전향해
버리곤 했다. 1930년대  수많은 일본 공산당원이 불과 다섯 손가락에  꼽을 사람
만을 남겨  놓고 모두 `천황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전향 바람을  일으켰던 것은
그 뚜렷한 예이다. 적어도 그들은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천황의 아들이었고 후
쿠자와 유키치의 후예들이었던 것이다.

  47 수에즈 운하가 영국의 소유가 되었던 속사정

  수에즈 운하는  아프리카 동북부의 아시아 접경  지대에 있으며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의  중요한 통로 구실을 하고 잇다.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함으
로써 거의 전 세계를 연결하고 있는 이 운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른 말이 필
요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수에즈 운하가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과정
은 너무나 간단했다. “삽시다.” 디즈레일리 수상의 이 한마디가 이후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수에즈 운하는 원래 프랑스 사람인 레셉스에  의해 1869년 완공되었다. 완공된
이후에는 프랑스  투자가들과 이집트 왕의  공동 소유가 되었다.  그러자 수에즈
운하 건설에 냉담한  반응을 보냈던 영국은 다급해졌다. 이 운하의  개통으로 인
도로 가는 길이  희망봉을 돌아가는 것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따
라서 이 운하는 `인도에 이르는 생명선`으로서 영국의  상업적 이익에 매우 긴요
한 것이 되었다.  개통 이래 이 운하를 가장 많이  이용한 것도, 이 운하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것도 영국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국은 운하의  주식을 살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회가 왔
다. 이집트의 왕이 자기 지분을 팔려고 내놓았던 것이다.
  파리에서 공부한 적이 있던  당시 이집트 왕 이스마일은 이집트를 개화시키려
고 열심이었다. 그는 행정, 법률 등을 정비하고 철도, 전신, 운하 등의 건설에 열
중했다. 또한 수도 카이로를 비롯한 도시를  서구풍으로 정비했고 군사적 팽창도
꾀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업에는 돈이 많이 필요했고 그것은 주로  유럽의 은행
가로부터의 부채로 충당했다. 부채는 늘어났고 세금을  올려 걷어도 이자 갚기에
도 모자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이스마일은 1875년 수에즈 운하의 자기
소유 주식 17만 6,602주를  시장에 내놓고 프랑스에 매입 의사를 타진했다. 그런
데 당시 프랑스로서도 이 주식을 살 형편이  못 되었다. 1870년 프랑스는 프로이
센과의 전쟁에서 패해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지경에 빠졌고 이러한
사정은 1875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1875년 11월 14일 일요일 저녁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는 유태인 재벌 로스차일
드의 저택에서 집주인인 라이오넬 로스차일드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집사
가 전보를  가져왔다. 이집트 왕이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팔겠다는 내용이었다.
가격은 400만 파운드.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드디어 수상이 로스
차일드에게 말했다. “삽시다.”
  다음날인 월요일 디즈레일리는 각료 회의를 열고  각료 전원의 위임을 받았다.
그런데 의회가 휴회중이었기  때문에 예산을 사용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디즈레일리는 로스차일드에게  돈을 빌리기로  했다. 수상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It  is yours, Madame(여왕 폐하, 그것은 폐하의  것입니
다).“ 이틀 후 이집트 왕 소유의  수에즈 운하 주식이 영국 정부의 소유로 넘어
갔다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이집트의 재정에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곧 이집
트내에서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어 1882년 무력  저항이 발생했다. 영국은 재빨
리 무력을 동원한 `일시적 점령`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 일시적 점령은 장기화되
어 2차대전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수에즈 운하는 1956년  나세르 대통
령의 국유화 조치에 의해 이집트 소유로 돌아오기까지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이다.

  48. 록펠러는 어떻게 돈을 벌었나?

  아마 록펠러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록펠러는  미국이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자 부자 나라로  발돋움하려고 했던 19세기 후반에 산업화를 이
끈 산업의 지도자이자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린  재벌 중의 재벌이며, 그의 후손들
은 여전히 미국 경제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성공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당연하게도 록펠러가 돈을 버는
데는 근면과 사업적 능력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배경
과 그가 구사한 사업 방식을 살펴보면 다른 평가도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남북 전쟁에서  북부의 승리는 미국  자본주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게다가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넓은 영토와 풍부한 천연 자원을 보유한 나라였으며 끊임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의 물결은 산업화에  필요한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여기에 정부의 친기업정책은  산업화의 활력소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급속한 산
업 발전으로 1890년이 되면  공업생산이 농업생산을 넘어서기 시작할 정도가 되
었다.
  이 산업화  시대는 철도 건설로 시작되었고  대륙횡단철도의 완성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그런데 이  철도망의 급속한 팽창은 기업에 대한 정부의  특혜와 부정
부패로 얼룩졌다. 철도  회사들은 정부로부터 막대한 국유지를  철도 부설부지로
받았으며 각종 보조금과  융자금까지 얻어 냈다. 이러한 특혜 제공  배후에는 정
치가와 기업가의 결탁이 있었다. 만연된 부패의  대표적인 예는 크레디트 모릴리
에 사건이었다.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의  중역들이 크레디트 모빌리에라는 회사를 차려놓고
유니언 퍼시픽의 모든 철도공사의 하도급을 독차지하려고 했으며 의회로부터 실
제 공사비보다 더 많은 액수의 금액을 받아  내었다. 그리고 이 거래를 성사시키
기 위해 영향력 있는  정계 인사들에게 이 회사의 주식을 뇌물로  뿌렸다. 이 사
건은 1872년 폭로되었는데 뇌물로 주식을 받은 인사중에는 부통령까지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록펠러가 대기업가로 성장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에서였다.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은  원래 회계원으로  출발했다가 당시  새로운 사업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정유  산업에 손을 댔다. 1859년  펜실베니아의 타이터스빌에서
최초로 유전 개발에 성공했고  거기서 나오는 석유가 산업용으로 다양하게 쓰일
가능성을 보이자 새로운 투자  분야를 찾고 있던 록펠러는 정유산업에 뛰어들기
로 결심했던 것이다. 1862년에 처음으로 정유공장을  사서 사업을 시작했던 록펠
러는 1870년 클리블랜드 스탠더드 오일 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정유사업을
벌였다.
  그는 정유사업의  왕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독점을 적절히  사용했다. 그는
철도로 석유를 독점적으로 운송하는  대신 운임 할인혜택을 줄 것을 철도회사들
에 요구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하던 철도 회사들도 록펠러 회사의  수송 물
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록펠러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정유회사들이 철도 대신 정유수송을 위해 송유관을 부설하려 하자 여러 경
로를 통한 압력으로  이 시도를 좌절시켰다. 여기에 더해 파격적인  가격 인하정
책으로 다른 정유회사들을 몰락시켜 버리고 나중에  그 회사들을 매입했다. 그리
하여 1879년에 그는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설립했는데 이는 개별 기업들의 소유
권은 남겨 두고 그들의 경영권을 하나의 경영진이 장악하는 트러스트(trust)였다.
록펠러의 이 방식은  이 시대의 기업의 독점과 통합의 모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회사는 미국 정유시설 능력의 90% 이상을 장악했다.
  20년 후 스탠더드  석유 회사는 다른 회사들의 주식을  지배하는 `지배회사`로
개편되어 체이스 맨해튼 은행, 선박, 철강, 석탄 등으로 사업범위를 확대했다. 자
본금 1억 1,000만 달러, 연간 이윤 4,500만 달러, 록펠러의 재산은 2억 달러로 추
정되었다. 이후 사업확대에  따라 록팰러의 재산은 20억 달러에 이를  정도가 되
었다.
  이렇게 록팰러는 `금융왕` 모건이나  `강철왕` 카네기와 마찬가지로 뇌물과 매
수, 다른 회사들과의 무자비한 경쟁, 독점 형성에 의한 해당 산업분야의 지배 등
의 방식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급속한 산업화의
와중에서 적자생존 원리에 따른  무한 경쟁에 가장 충실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
의 산업발전의 주역이었다는 또 다른 평가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장을
지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무자비한 기업가`라는  평가와 노동자
에 대한 탄압과 착취, 소비자의 희생을 대가로  재산을 모은 록팰러를 비롯한 대
재벌들을 `강도 귀족들(Robber Barons)`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49. 일본 민간인들의 국제 침략사

  일본이 다시 아시아를 넘보고  있다. 1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기업인,
문화인 심지어는 기자에 이르기까지 민간인들이 그 앞장을 서고 있다.
  1세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일본의 아시아 침략사 특히 조선 침략에서 이른바 낭인이라는 존재는 매우 중
요하다. 우리에게는 1895년 민비시해(을미사변)를 자행한 깡패집단쯤으로 알려진
이 낭인들이야말로 일본 제국주의의  맨 앞에 서서 일본정부와 적극적인 유대를
가지면서 정부의  외교정책과 해외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친  민간인 집단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변호사,  언론인, 종교인 등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서양의 침략에
선교사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낭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낭인들은 명치유신을 일으켰다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사무라이 출신들로 주
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아시아국가들이 서양의 침략과  모욕을 막기 위해 한마
음으로 협력해야  함은 자연의 이치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아시아의 지도자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냉정하게 판단하여 일본 이외에는 지도자가 될  능력을 소
유한 국가가  아시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명감`에  젖어 있었다. 따라서
낭인들은 급진적  보수나 일신의 안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하기
곤란한 일들을 도맡았고 특히 대외침략을 일삼는 군부는 이들과 깊은 관계를 유
지했다.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를 결성하여 조선침략의  `선교사` 노릇을 한 우치다료헤
이의 활동을 중심으로 낭인들의 역사를 살펴보자.
  료헤이는 대외 팽창주의자들의  모임은 현양사에서 활약하던 사무라이 출신의
낭인이다. 현양사는  명치정부의 대외정책이 미온적이라고  비난하면서 러시아와
의 전쟁을 선동, 노일전쟁을  도발시킨 단체이다. 현양사 활동을 통해 그는 일본
이 대외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확보하는  것이 선행조건이라고 판단하고
독자적인 활동에 나섰다. 그 계기는 1894년 조선에서 터진 동학 운동이었다.
  이 때 이미 조선에는 많은 수의 낭인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1892년 부
산에 외교관 출신인 야마자  엔지로를 중심으로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조선의 정
세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동학혁명이 터지자 이들은 그  동안 모아놓은
정보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현양사의 낭인들은 1893년 일본을 지지하던 김옥균이 청나라 땅에서 암살되자
외무대신에게 청나라와의 개전을 요구하며 전쟁 여론을  부추겼다. 이 때 외무대
신은 이 요구를  겉으로는 거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침략주의자인 육군참모총장
가외카미 소로쿠와 이들을  연결시켜 주었다. 민간인과 정부의  교묘한 역할분담
이 행해진 것이다.
  정부와 군부의  내면적인 비호에 고무된 낭인들은  동학혁명을 기회로 행동에
들어갔다. 정부의 개진 결단을 돕기  위해서는 누군가 불을 질러야 한다는 `방화
의 역할`을 하기 위해  천우협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천우협의 격문에서 `시주
음락으로 소일하는 한국정부와 민씨  일족의 압정을 깨뜨려 도탄에 빠진 조선백
성을 구제`하고  `민씨의 악정을 뒤에서  조종하고 지원하는 청국을  한반도에서
쫓아낼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천우협은 1894년  6월 하순 부산에
도착한 후 전국에서 석 달  동안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게릴라 활동과 폭력을
감행했다. 우치다 료헤이는 그 행동대원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의 내정에 큰
소요를 야기했다. 이들은  의도대로 청일전쟁을 점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전쟁중
에는 일본군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첫 해외활동의  대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료헤이는 한국, 중국에  대한 공작을
구상했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 세 나라가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
도의 반환을  협박하는 이른바 삼국간섭이 일어나자  료헤이는 러시아로 눈길을
돌렸다. 온 일본신문들이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선동하고 있을 때  정부 관리
도 군부 인사도 아닌, 일개 민간인에 불과한 료헤이는 `먼저 러시아의 내정을 연
구하여 복수의 길을 얻기 위해` 단독으로 시베리아로 갈 것을 결심했다. 그는 블
라디보스톡에 유도 도장을 열어 거점을 마련했다.  여기에도 역시 대륙 낭인들이
이미 진출해 있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의 시가,  요새, 주요 도로들의 지도를 만
들고 정보 활동을 하는  군첩보원을 지원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을 한국, 중
국,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간도에 보내 일대를 조사하게 했다.
  이어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스부르크에 가서 일본의 해군무관,  외교관 등의
도움을 받아 가며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3년 만에 귀국한 료헤이는 이미 `정
치가 부패하고 인륜이 타락한  러시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동아시아 보전이
라는 국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단호히 러시아를 응징`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전쟁이 일어난다면  `승리의 여신은 일본 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
다.
  귀국한 후 그는 순회강연을 통해 러시아와의 개전 여론을 일으키는 한편 흑룡
회라는 낭인들의 강력한 조직을 결성, 정부나  군부보다 더욱 호전적인 정치운동
을 전개해 나갔다. 이  흑룡회의 구성원에는 사업가, 변호사, 언론인, 군인,  교사,
유도사범, 승려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한국, 중국,
시베리아, 몽고, 동남아시아 등지에  나가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이 조종할 수 있
는 현지의  정치세력을 포섭하는 공작을  벌여 나갔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면
군대의 일원이 되어 통역관 또는 첩보원으로 그들의 `사명`을 수행했다.
  일본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이들 단체의 주장에 반대하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은밀히 이들 단체에 자금을 조달하고 호전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것을 방관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주장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외교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민간인의 은밀한 대외활동, 그리고 이들과 정부와의  교묘한 결합 등 1세기 전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이 애용한  방법은 지금도 한국, 동남아시아, 중국 등지에서
기업인, 언론인, 유학생 등을 통해서 되살아나고 있다.

  50. 여론정치의 천재 강유위의 싱거운 종말

  1897년 10월 20일.
  독일이 산동성의 교주만을 무력 점령하자 중국  조야는 벌컥 뒤집혔다. 열강의
중국 분할이 임박했다는  위기감이 사대부층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이에 12월에
는 러시아 함대가 여순과 대련을 점령했다.
  이에 강유위는 상해에서 북경으로 급히 상경,  위기에 대처할 정부개혁을 촉구
하는 정치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이미 몇 해  전 과거 시험장에서  수험생
700명을 선동해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적이 있는 그의 출현은 북경 정부와 지식
인들 모두에게 주목의 대상이었다.
  당시 궁중은 40년째 서태후  중심의 수구파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황제인
광서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아무런 권력 기반이  없던 강유위는 이 외로운 황제
야말로 자신의 유일한  권력기반이 될 수 있다고 판단, 황제에게  집요하게 접근
해 갔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주로 상소, 신문, 학회, 출판 등  여론을 이용하는 것이었
다. 강유위는 스스로 수차에 걸쳐 제도개혁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을뿐 아니라
정부 안에 친구 언관들을 시켜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정부의 대신들은 그의 상
소가 황제에게 끼칠 영향을 우려하여 황제에게는 몇 달이 지난 후에 전달되도록
하는 등 집요한 방해 공작을 계속했다.
  강유위는 자신의 상서 내용은 즉각  신문을 통해 발표해 이를 본 많은 지식인
뿐 아니라 정부 관리까지도 그의 개혁노선에 끌어들였다.
  또 <일본변정고>, <이대피득변정기> 등의 책을 출판해 일본 명치유신과 러시
아 피터 대제의 개혁 실상을 선전했다.  특히 <일본변정고>는 황제 광서제가 항
상 옆구리에 끼고 다닐 정도로 애독해  후일 광서제 - 강유위 권력 형성의 매개
역할을 했다. 이런 공작을  통해 강유위가 목표로 한 것은 황제와  단독 회담 기
회를 얻어 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여론공작이 특히 사대부를  비롯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먹혀 들고 있음
을 확인한 강유위는  보국회를 만들어 그들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서
양식 의회가 될  것임을 주장했다. 보국회가 열렬한 호응을 받아  전국으로 확산
될 조짐을 보이자 서태후 일파는 이를 해산시켜 버렸다.
  1898년 4월 서태후의 수족으로 실권을 행사하던 공친왕이 죽자 정세는 강유위
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이 틈을  이용하여 서태후로부터 권력  탈취를 노리던
광서제는 파격적으로 강유위를 궁중으로 불러 단독  회담을 했다. 강유위는 오랜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강유위는  이 자리에서 `제도국`을 설치해 개혁을 추진하
되 그  구성은 신분에 얽매이지 말고  개혁파 인사를 등용할 것과  영국, 일본과
연대해 러시아에 맞설 것 등을 주장했다. 광서제에  대한 그의 첫인상은 그가 생
각보다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황제와 강유위는 수구파  관료를 무더기로 경질시키고 개혁을 국시로 공
포하는 등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그러나 개혁의 핵심이라 할  제도국의 창설은
서태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동의를 구하려고 이화원으로  서태후를 찾아
간 광서제는 오히려 패위의 위협을 당했다.
  이에 개혁파는 원새개로 하여금  황제 직속군을 창설하게 하고 서태후를 제거
할 쿠테타를 계획한다.  마침 8월 5일에는 `개명  일본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가
북경을 방문해 황제를 알현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경 정가는 개혁파 쪽으
로 대세가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믿었던 원세개는 거병 계획을 서태후측에  밀고해 버린다. 이에 서태후
파는 8월 4일 황제를 연금시키고 이튿날 이토 히로부미와의 회견도 서태후의 간
섭하에 이뤄졌다. 이토가  돌아가자마자 서태후 일파는 역쿠테타를 감행, 강유위
체포령이 내리고  정부내 강유위에게 동정적이었던 관리들은  파면 또는 처형했
다. 이  와중에서 강유위의 동생  강광인이 처형되고 강유위와  양계초는 북경을
탈출, 일본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받아 강한 중국을 건설하려 했던 강유위는 그 힘의 원천
을 황제에게서 찾았다. 그가 신문을 만들고 사대부  조직을 만든 것도 이것을 권
력의 기반으로 삼으려  한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
다. 그는 새 시대에는 대중조직과 군사력이 힘의 원천이 될 것임을 간과했다. 따
라서 수구파가 광서제와 그를 격리시키고 군사력을 동원하자 강유위의 백일천하
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는 재기하지  못하고 신해혁명 후에도 황제복위
운동을 꾀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하고 만다.

  51. 파나마 운하를 둘러싼 미국의 음모

  1915년 파나마 운하가  정식으로 개통되었다. 1513년 스페인의  탐험가 발보아
가 파나마 지협을 확인하면서부터 간직한 꿈인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시킨다는
생각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파나마 운하의  개통은 사
실 파나마 국민에게는 굴욕적인 역사의 시작이었다.
  양 대양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생기는 전략적,  상업적 이익이 엄청날 것이라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분명했다. 남북 전쟁 후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재임,
1869~77)은 운하의 입지  조건을 살펴 보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적이 있으며,
미국 회사가 지협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런데 먼저 운하 건설에 나선  것은 수에즈 운하 설계를 담당했던 프랑스 사
람 페르디당 레셉스(Ferdinant Lesseps)였다. 그는 당시 콜롬비아 땅이었던 이곳
에 운하를 만들기 위해 1880년 수천 명의 투자자를 모아 회사를 만들고 운하 건
설권을 따냈다. 곧 운하  건설에 착수했지만 이 회사는 경영상의 부패, 설계상의
결함, 풍토병, 가혹한 자연  조건 등으로 인해 어려움에 부딪쳤고 1889년 마침내
공사를 포기했다.
  레셉스의 운하 건설이 좌초하자 미국 정부와 독점 자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일에 뛰어들었다. 1902년 테오도르 루즈벨트 행정부는 운하 건설권을 4,000만 달
러에 사들였고  또 콜롬비아 정부와 운하  사용에 관한 조약을 맺으려  했다. 이
조약의 내용은 1,000만  달러에 매년 25만 달러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파나마 운
하를 99년간 조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콜롬비아 의회는 이 조약  내용이 자국
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비준을 거부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미국은 아니었다. 미국의 정책은  이 지역에서 콜롬비아를 쫓
아 버리고 미국의 말을 잘 들을 나라를  세우는 쪽으로 정해졌다. 다행히도 당시
파나마 지역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열망하고 있었다.  1903년 11월 프랑스 운
하 회사의 이사였던  프랑스 인이 파나마 인들을 데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물론
그 배후에는 미육군의 지원이 있었다. 반란이  일어나자 미국은 전함까지 파견하
여 콜롬비아를 위협하면서 신생 파나마 공화국의 탄생의 산파 노릇을 했다.
  이렇게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하에 파나마는 태어났고  따라서 파나마 운하의
운명도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미국은 앞서 콜롬비아와 맺으려던  조약과 같
은 조건으로 파나마 운하의 사용권을 획득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조차 기간이 99년에서 `영구적`으로 되었고 또 운하와 운하 지대에 대해
파나마가 주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운하와 운하 지대에 대한 주
권이 미국에 있다는 `신화`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1904년 공사에 착수한 미국은  레셉스가 겪었던 어려움에 시달리긴 했지만 결
국 윌슨 대통령  임기중인 1914년 운하를 완성했다. 이 운하의  완성으로 미국은
엄청난 이익을 보게 되었지만 동서로는 짧고 남북으로 긴 파나마 영토는 미국이
지배하는 운하 지대에  의해 양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운하의 안전을 핑계로 한
미국의 끊임없는 간섭에 시달리게 되었다.
  미국의 지배와 간섭이 계속될수록 파나마 국민의 주권 회복 운동도 시간이 갈
수록 열기를 더해 갔고 마침내 1977년 파나마의 민족주의적인 군부 정권은 카터
행정부와 파나마  운하 신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골자는  1999년 12월31일
정오를 기해 운하와 운하 지대에 대해 파나마가 주권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파나마 운하의 운명이 결정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실 미국
은 신조약을 체결하긴 했지만 가능하면 파나마 운하에 대한 지배권을 놓치고 싶
지 않았다. 그래서  1981년 정권을 잡은 노리에가 장군이 반미적인  민족주의 노
선을 표방하자 미국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노리에가를 독재자라
고 비난하면서 파나마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한편 그를  마약 거래 혐의로 미국
법정에 기소했다. 게다가  1989년 5월의 파나마 대통령 선거를  무효라고까지 선
언했다. 이제 남은 것은 미국의 직접 행동이었다.
  1989년 12월  부시 행정부는 파나마를 침공하여  노리에가를 미국으로 잡아갔
다. 명목은 미국 시민의 보호, 파나마의  민주화, 마약 범죄자 노리에가의 체포였
지만 누가 그러한 침략 행위를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1977년 맺은 파나마 운하 신조약이 발효되기까지 6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사실
파나마 운하가 파나마 국민에게 돌아올지는 아직 쉽게 단정할 수 없다.

  52. 알파벳을 문자로 사용하는 베트남
  수천 년에 걸친 중국과의  투쟁, 그리고 프랑스, 미국과의 대결로 독립 자주성
에 관한 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베트남 인들이 자신들의 문자를 갖지
못하고 서양의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다. 현재 베트남에서는 문자
로 `꾸옥 으(국어)`라는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다. 1600년경 프랑스  선교사 로드
가 베트남 말을 로마자화한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한자만이 유일한 표현
수단이었다. 그러다가 8세기경 신라의  이두와 같은 원리로, 베트남 발음을 한자
로 표기하는 자남이라는  문자가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용하기 불편했고
지식인들이 천시하는 바람에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17세기에 로드가 `꾸옥 으`를 만든 후에도 한참  동안 한자의 위세는 수그러들
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말 베트남을 완전히 식민지화한 프랑스는  베트남 지
배의 최대 장애물인  유교 정신을 파괴하기 위해 `꾸옥 으`의  사용을 적극 추진
해 나갔다. 학교를 세우고 `꾸옥 으`로 된 신문을 간행했다.
  그러나 베트남 인들은  `꾸옥 으`를 사용하는 것은 프랑스  식민통치에 조력하
는 행위라 하여  이를 거부했다. 특히 관료, 지식층 등  구지배계급은 한문, 자남
으로 프랑스에 저항하는  논설이나 문학 작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왕조와 유
교 이념의 보위였다.
  그러나 1905년 노일전쟁을 전후해 근대 민족주의자들은 민중의 교육을 위해서
는 쉬운 `꾸옥 으`가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꾸옥 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신식학교를 세우고 근대 교육을 전개해 나갔다.  즉 전통과 프랑스로부터의 해방
을 위해 프랑스 인이 만들어 준 문자를 사용한 것이다.
  이리하여 19세기 말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꾸옥 으`는 20세기에  들어 전국으
로 보급되었고 1930년대에는  지식층에서도 수용하기 시작했다. 한문으로  된 전
통시는 퇴조하고 `꾸옥 으`로 된 에세이, 소설,  신문 기사 등이 성행하기 시작했
다. 그 후  1961년 한 조사에 따르면 `꾸옥  으`의 해독률은 85%에 이를 정도로
베트남에 파고들었다.
  이래서 한때는 한자  문화가 창성하던 베트남은 현재  자기 이름도 한자로 못
쓸 정도로 `꾸옥 으`가 공용 문자로 자리 잡고 있다.

  53. 신해 혁명에서 과장된 손문의 역할

  중국이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1895년,  손문은 중국
혁명파의 첫 봉기인  광주 봉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실패하고 손문은  목에 현상
금을 단 채 미국을 거쳐 영국으로 간다.
  이때 런던주재 청국공사관이 그를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영국 정부가 강
력히 항의함으로써 곧 풀려나지만  이 사건은 중국 국내에 센세이션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개혁파의 기관지라  할 시무보를 비롯, 주요 신문과 잡지 등
이  이를  대서특필했고  손문  자신이 납치  경위를  밝힌  <런던에서의  납치
(Kidnapped in London)>는 런던에서 발간된 그 다음해에 벌써 상해에 유통되고
있을 정도였다.  이 사건으로 일개 봉기주의자요,  망명 정객에 불과했던 손문은
졸지에 전 중국과 온 세계에  반청 활동의 최고 지도자로 잘못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손문의 역할이 과대평가된 만큼 신해 혁명의  의의도 과장되어 왔다. 신해혁명
은 2000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전제 군주제를  타도했다는 점 이외에는 완전히
실패한 혁명이다. 정권은 1년도 안 돼  수구 세력에게 되돌려졌고 원세개의 황제
부활 시도까지  허용하고 말았다. 더구나  이후 새로이 국민당과  공산당에 의한
국민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혁명은 청조보다 더 타락하고 반동적인 군벌들에 의
해 유린되었다.
  그럼에도 손문은 현재 중국 공산당, 국민당을 가릴  것 없이 전 중국인의 추앙
의 대상이다.
  일찍이 1894년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결성, 반청  폭동을 주도하고 신해 혁명을
성공시키고 중국 국민당을  창당하여, 국민 혁명의 불길을 댕긴 그의  화려한 투
쟁 경력을 살펴보면 이는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신해 혁명에서 손문의 역할과 비중은 알려진 것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며 신해 혁명의  주도권은 오히려 다른 세력에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신해
혁명은 청나라의 신임을 받는  장국이었던 원세개에게 정권을 가져다 주었고 결
국 군벌들의 추악한 싸움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신해 혁명을 추진한 주요 정치 세력은 손문이 이끄는 혁명파와
강유위, 양계초 등이 이끄는 향신층(지주, 관리, 지식인)을 주축으로 하는 개혁파
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은 청조에 대항한다는 점에선  같았으나 정
치적 입장의 차이로 연대보다는 대립하는 때가 더 많았다.
  개혁파는 주로 지방지주와 상인, 개명 관료, 광범한 예비 관료(거인, 생원)들의
이익을 대변했고 청조 자체를 타도하는 데는 반대하고 입헌 군주제의 실시를 목
표로 했다. 그들이  활동하던 1890년대 중반으로부터 불과 20년 전  일어났던 일
본의 명치유신은 이들의 모델이었다.
  이들은 당시 서태후의 기세에  허수아비 노릇을 면치 못하던 황제 광서제에게
접근하는 한편 지방의회라 할  수 있는 자의국을 설치, 세력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들의 무기는 출판물 등을  통해 여론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과  학연, 지연 등
으로 얽혀 전국적인  연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  이들과 동문수학했던
친구들이 관직에 널리 포진하고 있었던 것도 활동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개혁파는 1898년 강유위를 중심으로  북경에서 여론 공작을 벌여 서태후를 궁
중에 연금시키고 광서제를  포섭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유명한 무술정변
이다. 당시 북경을 방문한  `개명 일본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당시 근대화를  추
진하던 동양의 혁명가들은 대부분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다)의  존재가 개혁
파의 집권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가  귀국하자마자 서태후는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개혁파 지도자들을 체포,  처형했다. 100일만에 개혁파는
축출되고 강유위, 양계초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한편 손문 등의  혁명파는 입헌군주제를 반대하고 오랑캐(청조는 만주족이  세
운 나라)를 몰아낼 것을 주장하여  한족의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이들은 즉각적
인 무장봉기로 청조를 타도하고 민주공화정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런 노선을 뒷받침할 군사력과 자금력이 없었던 혁명파는 수백 년동안 농촌에 존
재해 온 회당(유랑농민  등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산전 집단)을  선동하여 무모한
봉기를 반복했으나 청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희생만 내고 말았다.
  무장봉기와 무술정변에서  각각 실패한 혁명파와 개혁파  세력은 일본에 모여
치열한 노선싸움을 전개했다.
  혁명파는 도쿄에 있는  중국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했다. 손문의
홍중회, 황홍의  화흥회, 장병린의 광복회 등으로  분열돼 있던 혁명파는 1905년
동맹회를 구성하고 청조의 타도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분열하고 말았다.
  개혁파, 혁명파의 망명객들이  도쿄에서 혁명의 방향을 놓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을 때 전열을 가다듬은 국내 개혁파들은  외국에 뺏긴 이권회수운동, 미국상품
불매운동, 철도국유화 반대운동  등 치열한 대중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지방에서
관할하던 철도를 국유화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 주려는 청조에 대항한 철도국유
화 반대운동은  대규모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마침내  신해 혁명의
기폭제가 된 무창봉기(1911. 10. 10)로 이어졌다.
  손문은 동맹회의 분열로 국내에서 영향력을 상실했고 무창봉기가 발발할 때까
지 주로 구미 지역에서 자금조달이나 외교적  노력에만 관계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창봉기가 났을 때 그가 크게 놀랐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무창봉기 후 개혁파는 혁명군  정부를 수립하고 청조의 장군인 여원홍을 대원
수로 추대,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 때 손문은 미국에  있었다. 혁명 발발 한달 보름 만에야  귀국한 손문은 높
은 지명도 때문에  임시 대총통에 선출되긴 했다. 그러나 공화국의  국기로 그가
주장한 청천백일기 대신 개혁파가  내세운 오색기가 채택될 정도로 신정부의 주
도권은 개혁파의 수중에 있었다.
  손문은 청조 붕괴  후 그 군사력을 거느리고  북경에 응거하고 있던 원세개를
토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본래  원세개와 한뿌리인 개혁파는 협상에 의한 해결을
고집했다.
  마침내 손문은 취임  두 달여 만에 원세개에게  대총통직을 물려 주고 쓸쓸히
상해로 떠나게 되었다.
 
  54. 1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킨 두 암살 사건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보스니아(당시 오스트리아령)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울린 두 발의  총성이 1차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오스
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세르비아의 비밀 결사 소속 한 청년이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권총으로 암살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사라예보 사
건`이다.
  이 사건이  1차대전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기는  하지만 전쟁의 검은 그림자는
이전부터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19세기 말 유럽의 열강들은 독점  자본주의 단
계로 들어서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으며 아프리카, 발칸  반도, 중근동, 동아
시아 등의  지역에서 시장과 식민지  분할을 둘러싸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3국 동맹국과 러시아,  프랑스, 영국의  3국 협상국으로
나뉘어져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대립의 한 초점이었던 발칸 반도는 당시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릴 정도
였다. 15세기 이래  발칸 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7세기가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고 이를 기화로 유럽 열강들은 저마다 발칸 반도에 대한
지배욕을 드러내게 된다.  여기에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도 독립의  의지를 높여
가고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아직 힘이 미약해 이웃의 강대국인 러시아나 오스트
리아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이런 독립 의지의  고양과 열강들의 간섭은 발칸 반
도를 국제적 분쟁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한편 1389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패한 이래 강대국의 지배를 받다가
1878년에야 독립을 쟁취한  세르비아의 국왕과 귀족들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
나를 병합하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가 1908년 이
두 지방을 병합하여 세르비아 인들의 소망을 꺾어 버렸고 세르비아 인의 반오스
트리아 감정은 고양되었다.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18세의 청년은 이런 오스트리
아의 지배를 분쇄하려는 민족주의 비밀 결사의 일원이었다.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했다. 하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은 복잡한 정세는 이 사건이  두 국가 사이의 전쟁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유럽 아니 전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
이에 휘말려 들어갈 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암살 사건이  있다. 그것은
프랑스 사회당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장 조레스의 죽임이다.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해 7월 31일 밤  장 조레스는 파리의 한 카페에서 다른 사회당 간부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도중 총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깨지고 조레스도
쓰러졌다. 주위는 그가 흘린 피로 흥건했다. 의사가 곧 왔지만 머리에 총을 맞은
조레스는 금방 사망하고 말았다. 체포된 범인은  라울 발렝이라는 국가주의에 사
로잡힌 청년이었다. 조레스는 왜 암살당했는가?
  20세기 초 유럽 각국에서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 운동은 이미 주요한 정치 세
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다가오는  전쟁을 각국 자본가들의 이익
을 도모하기 위한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면서 전쟁 반대를 외쳤다.  당시 사
회주의 정당의 국제  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은 이 전쟁에서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국민 대다수는 피를 흘릴 뿐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수
차례 반전을 결의하고 각국 정부에 평화 외교를 요구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공
동 행동을 호소했다.  프랑스 사회당의 장 조레스도 다가오는 전쟁을  막는 반전
평화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던 참이었다. 조레스의 암살
사건은 전쟁 반대를 외치는 사회주의와 평화주의자에 대한 호전적인 국가주의자
의 테러였다.  그리고 조레스를 죽인  총성은 사라예보에서 울릴  총성에 덧붙여
전 유럽이 아니 전 세계가 전쟁으로 돌진하고 있다는 신호탄이었다.
  조레스가 암살당한 다음날 프랑스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전쟁 반대의 목
소리는 조레스의 죽음과 함께 사그라들고 있었다.
  조레스가 암살당하기 며칠 전인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
를 한 상태였다. 러시아를 필두로 유럽 각국이  줄줄이 전쟁의 불길 속으로 뛰어
들 참이었다.  7월30일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다.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리고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바야흐로 이후 4년간이나 계속될 최초의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야 만 것이다.

  55. 배반당한 민족 자결주의

  1919년 3월 1일 경성의 집집마다 이른 아침부터  독립 선언서, 독립 신문 등이
배포되었고 시내 곳곳에는 전단이 뿌려졌다. 오후가  되자 파고다 공원으로 중학
교 이상의  학생들이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시민들도 합세했다.  집회 연단
위로는 꿈에도 그리던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으며 학생 대표가 <독립 선언서>
를 낭독했다. <독립 선언서> 낭동이 끝나는  것을 신호로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이 퍼져 나갔다. 일제의 무단 통치 10년의  쇠사슬을 끊어 내려는 조선 민중
의 염원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삼일운동은 5월 말까지 전국으로 퍼져 나가 천여 회의 시위 행
진에 200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비록 이 운동이 군대와  경찰의 총칼을 동원한
일제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지만 조선  민중이 살아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
기가 되었으며 일제도 이른바 문화 정치라는 좀더 유화적인 통치 방식으로 바꾸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삼일운동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
럼 1918년 1월, 전후 처리의 원칙으로 천명된 윌슨의 `14개조`의 한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민족 자결주의의 실제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이자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 대전이었던 제1
차 세계 대전은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피해 못지않게 국제 질서의 변동을 가져
왔다. 패전국인 독일의 몰락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조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
했으며 대신 그  자리를 미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대전중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탄생한 소련은 기존
의 제국주의 국제 질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혁명과 식민지 민족의 해방을 주장
했다. 이러한 전쟁의 승리와 패배,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국제 질서의 변동은 자
연히 약소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양시켰다.
  이러한 변화의 목전에서 새로운  전후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원칙으로 천명된
것이 윌슨의 `14개조`이다. 이것은 1918년 1월  8일 미국 의회에서 발표되었는데,
`비밀 외교의 폐지`, `공해의 자유`, `민족  자결주의`, `무병합무배상`등의 원칙과
함께 국제 평화를 유지할 기구로 국제 연맹의  결성을 주창하고 있다. 이 14개조
는 전쟁중에 수립된  소련의 평화 공세와 민족  자결 원칙에 대항하고 연합국의
동요와 전쟁에 수립된 소련의 평화 공세와 민족 자결 원칙에 대항하고 연합국의
동요와 전쟁에 대한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급하게 발표된 것이었다.  하지만 전
쟁에 지친 전  세계의 민중과 독립을 염원하는  약소 민족들은 윌슨의 주장에서
평화와 독립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을 보았고  그것을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이
희망은 좌절과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이 `14개조`의 시험대는 파리  강화 회의였다. 독일의 항복(1918. 11)으로 끝난
전쟁의 뒷수습과 평화를 위해  1919년 1월 18일 27개 전승국이라 하더라도 약소
국은 본회의에서 제외되었으며 또 실제로 회의를 주도한 것은 미, 영, 불 3국 대
표인 윌슨,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였다. 이 파리 강화 회의의  주된 의제는 러시
아 혁명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신생 소련을 봉쇄하는 것이었으며 패전국 독일에
전쟁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었다.
  미국이 연합국 승리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과 14개조 발표로 인한 윌
슨의 국제적 인기로 인해 당연하게도 파리 강화 회의를 이끌었던 것은 윌슨이었
다. 하지만 그의 고매한 이상주의적인 원칙은  현실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치
게 되었다. 먼저  비밀 외교의 폐지는 영국을 필두로 하여  프랑스, 이탈리아, 일
본 등 연합국이 대전중에 맺은 영토나 세력 범위 분할에 관한 비밀 조약과는 대
립되는 것이었다.  또 무병합 무배상  원칙도 독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
내고 영토마저 빼앗으려는 영국, 특히 프랑스의  의도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
이었다.
  그리고 전 세계 약소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불러일으켰던 민족 자결주의도
동유럽과 발칸 반도 등  이전에 패전국의 영토였던 곳에서만 적용되었고 그것도
열강의 이해 관계에 따라 왜곡되어 적용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완전
히 해체되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로 나뉘어졌고 연합국에 참가했
던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등을 합병했다. 터키 제국도
붕괴하여 이전의 광대한 영토를 잃어버리고 현재의 모습으로 축소되었다.
  반면 패전국의  해외 식민지는 위임 통치제라는  기만적인 방식으로 처리되었
다. 이 위임 통치제는 명목상으로는 식민지  주민을 교육하여 궁극적으로 민주주
의적인 자치 정부의  수립과 독립을 달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했지만, 실
상은 승전국들이 패전국의  식민지를 나누어 가진 것에 불과했다. 이  방식에 따
라 독일의  동아프리카 식민지는 영국에,  서남아프리카는 남아연방에, 카메룬과
토고란드는 각각 영국과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태평양에 있는  독일 식민지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일본에  맡겨졌으며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
인은 영국에,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더구나 강화 회의 조약에
는 승전국이었던 중국의 경우, 이전에 독일이 강점했던  산동 반도 및 그곳의 철
도, 지하 자원, 해전 전선 등을 일본의  소유로 한다는 결정까지 들어 있었다. 이
것은 중국 민중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으며 민중의 분노는 5,4운동으로
불타올랐다.
  이렇듯 아시아, 아프리카의  피억압 민족들이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걸었던
기대는 완전히 배신당했다. 사실 윌슨의 이상주의적  외교 원칙은 제국주의 국가
들의 이해 관계라는 현실의 벽을 뚫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철저하지 못한 것
이었다. 그리하여  이후 식민지 민중들이  새로운 질서의 국가인  소련으로 눈을
돌린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56. 레닌은 왜 독일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나?

  1차대전은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하지만 엄청난 인적, 물적 피
해를 낳은  이 최초의 세계 대전은  유럽의 동부 전선에서는 이미  끝나 있었다.
1918년 3월 신생 소비에트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강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조약의 내용은 소비에트로서는  매우 가혹하고 굴욕적인 것이
었다. 강화의 조건으로  상당 부분의 영토와 배상금을 독일에 제공해야  했던 것
이다. 소비에트는 왜 이런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가?
  러시아의 2월 혁명(신력으로는 3개 혁명)은  “빵을 달라”라는 요구로 시작되
었다. 1917년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  페트로그라드의 여성들이 “빵을 달라!
”,“우리 아이가  굶주린다!”라고 외치며 거리  행진을 했다. 여기에  공장에서
일손을 놓은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사태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위대
의 주장도 “빵을 달라”에서 “차리즘 타도”, “전쟁 중지”, “평화와 자유”
로 확대되었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 했지만 반대로 사병들은
혁명의 편으로 돌아섰다. 시위가 일어난 지 9일  만에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퇴위
할 수밖에  없었다. 300년이나 이어져 온  로마노프 왕조가 썩은  나무 쓰러지듯
일순간에 넘어져 버린 것이다.
  2월 혁명은 3년이  넘게 진행된 엄청난 희생을  강요받은 국민의 분노가 끝내
폭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것은 전제적인 러시아  사회 자체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었다.
  1861년 알렉산더 2세에 의해 농노 해방이 실시되었지만 철저하지 못한 상태로
끝났고 도리어 정치적인 면에서는 더 후퇴하기까지  했다. 1890년대에 들어 러시
아에서도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지가 대두하고 자유주의가
확산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장  노동자의 증가에 따른 노동 운동의 발전과
혁명적인 사조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차르의 전제  정치에는 변함이
없었고 자유주의와 혁명 운동에 대한 탄압만 점점 심해졌다.
  그리하여 1차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국내에서 고조된 혁명 운동을 잠재우
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러시아는  엄청난 인원을 동원하여 무기도
부족한 상태에서 동부 전선에 대군을 투입했다.  그 때문에 농촌에서는 노동력을
빼앗겨 식량 생산이  반감되었고 식량난이 일반화되었다. 게다가  전쟁은 시작부
터 패배를 거듭했으며  교착된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물적,  인적 자원이
소모되었다. 그리하여 전쟁이  장기화되자 국내의 사회 불안이  급속히 증대되었
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은 급속히 전국으로 파급되어 각 지역에
서 노동자, 병사의  대의 기관인 소비에트가 성립되었고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는 자유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의회 다수파에 의해 임시 정부가  만들어졌다. 그
런데 임시 정부는 평화와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외면하고 질
서의 회복과 전쟁 속행을 당면 임무로 삼았다. 임시 정부는 정치범의 사면,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선언했지만 토지 개혁이나 정치  체제의 변화 등은 일정에
올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불안전한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해 10월 25일 (신력
11월 7일)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당(이후 소련 공산당)은 무장 봉기를 일으켜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 레닌은 2월  혁명이 발발하자
망명지 스위스에서 귀국하여  “전쟁 즉시 중단,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하에 볼셰비키  당을 지도했다. 그는  당시 민중의 여망이  평화에 있다는
것을 간파했고 소비에트라는 민중의 조직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
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수립된 신생 소비에트 국가의 당면 과제는 전쟁의 중단과 평화의 회복
이었다. 평화는 전쟁에  지친 민중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지만 새로  탄생한 사회
주의 국가가 새로운  사회 체제의 기초를 닦는 데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비에트는 레닌이 기초한  `평화에 관한 포고`를 발표하면서 영토  할양과 배상
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즉각 전쟁을 중단하자고 전쟁 당사국에게  제안했다. 그
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대신 소비에트가 계속 전쟁에
참여하기를 주장했다. 그들로서는  동부 전선에서 독일 군대를  견제하는 소비에
트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독일과의 전쟁에서  신생 사회주의
정권이 약화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반대에 부딪친 레닌은  독일과 단독 강화를 맺을 결
심을 했다. 이 강화  회담 제의에 독일이 의외로 동의했다. 독일로서는 소비에트
와 강화함으로써 두 개의 전선에서  벗어나 서부 전선에 전력을 총동원할 수 있
고 소비에트에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이익을 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이다.
  2개월 가량의 회담을 거쳐 독일은 1918년 2월  최후 통첩을 보냈다. 그 내용은
강화의 조건으로 러시아의  영토 15만 평방 킬로의 할양, 30억  루블의 배상금을
제시했다. 이 조약에 서명한다는 것은 정말로 굴욕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레닌은
서명할 것을 주장했다.
  레닌은 러시아가  3년 넘게 전쟁을 수행하면서  경제가 심하게 피폐해졌고 또
지친 민중이 평화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게다가 사실  당시 러시아
군대로서는 더 이상 싸울 형편이 못 되었다. 식량, 장비 등이 형편없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병사들이 지쳐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독일과 전쟁을 계속한다면 그것
은 새로 탄생한 소비에트 정권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었다. 필요한 것은 숨 돌릴
기회였다. 그러므로 적이 아무리 가혹한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강화는 절실히 필
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당 중앙위원들은  레닌의 주장에 반대했고 회담 대표인 트로
츠키는 회담을 거부하고 철수했다. 그리하여 독일 정부는 군사 행동을 재개했다.
독일군은 전면적인 공격으로  소비에트 군대의 방어선을 삽시간에  돌파했다. 독
일군이 진격해 들어와 수도 패트로그라드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이에 레닌
은 <사회주의 조국은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민중의 투쟁을 호
소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군대 이른바 적군이 대오를 갖추고 반격에  나서 수도
가 방위되었다. 그제서야 독일군은 다시 소비에트에 강화를 요구했다.
  여전히 당 내부에서는 강화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
어졌다. 그러나 결국  소비에트의 장래를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조약을 성사시
켜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이 채택되어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기로  했다. 1918년
3월 15일 소비에트 대표 대회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승인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소비에트는 정권을 공고히 하고 국민 경제를 회생시킬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57. 1920년대 중국 여대생들의 브래지어벗기운동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전신인 <청년>지가 창간되면서 늙은 대국  중국에서
는 수천 년 동안 굳어 온 인습에 대한  힘겨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그 도전의 선
봉은 1905년 신식학교제  설립에 따라 형성된 대도시의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의
폭발적인 에너지는 마침내 1919년 5,4운동으로 분출해서  중국 반제 반봉건 역사
에 또렷한 이정표를 남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전국을 분할하여  지배하고 있던 군벌들은 5,4운동의  격량을 비웃기라
도 하듯 여전히  건재했다. 학생들에게 중국의 미래는 암담해  보였다. 5,4운동이
시들고 2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학가는 좌절과 무기력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 학생들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정치  투쟁 대
신 중국을 병들게  하고 있는 반인간적인 전통과 관습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것은 개인의 자유와 인간 해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당시 대학문이  여성에게도 개방되면서 남녀관계라는 새로운  문제가 이 시기
대학생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자극하기도 했다. 한  학생은 수업중 여학생에게 신
경이 쓰여 “한 시간  수업이 마치 자유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저 여
학생은 아무런 교태도 부리지 않는데 왜 이리 신경이 쓰이는 걸까”라며 상사병
을 앓았다.  1년 반 동안에 200여  통의 사랑을 호소하는 편지를  받은 여학생도
있었다.
  학생들은 전통 부정의 일환으로 성욕의 긍정, 자유연애 옹호를 주장했다. 학생
잡지에는 수음,  몽정, 생리  등 성지식을  제공하는 칼럼이  생기고 서점에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연애와 사랑을 찬양하는 소설들이 즐비했다.
  한편 1919년 북경여자고등사범학교는 설립된 이래 여학생의 수가 꾸준히 늘어
1922년에는 665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여학생의 목소리도 커졌다.  이 때 나타난 것이 `방흉운동` 즉 브
래지어벗기운동이다. 물론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브래지어가 아니라  천으로 가
슴을 눌러 묶는 것이었다. 젊은 여인의 발달된  젖가슴을 천으로 묶는 것은 가슴
을 압박하여 폐활량을 감소시키고 기포가 확장할 수 없게 만들어 건강을 헤치고
여성의 활동력을 약화시킨다고 여학생들은 주장했다.
  그들은 자연적으로 솟아오른 젖가슴을 추하게 여겨 억지로 감추도록 강요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이 운동은  젖가슴을 묶
지 않고 입을 수 있는 복장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전족으로부터 여성의 발이 해방된 지는 이미 오래였고 여자만 머리를 길게 늘
어뜨려야 하는 관습에 저항하여 단발을 주장하는  여학생도 나왔다. 1927년 무한
에서는 여성들이 단발하고 옷소매를 짧게 하며 양말을 벗고 다니는 풍조가 유행
했다. 그리고 주위의 눈총을 무릅쓰고 외모상의  혁명을 실현시킨 여성은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유명한 소설가 파금의 소설에는  단발한 여학생 허천여의 심
정이 그려져 있다. “단발을  하기란 쉽지 않아. 오늘 나도 등교길에서 남학생과
건달들로부터 놀림을 받았지. 길  가는 사람들도 모두 나만 쳐다봤어. 하지만 난
두렵지 않았어. 일부러라도 내  용기를 시험하고 싶었지. 내가 왜 남을 두려워해
야 하지? 나도 어엿한 한 사람의 인간이야.”
  여학생들의 방흉, 단발운동은  단순히 외모 변화의 운동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서부터 여성을 옥죄는  지배권력, 관습과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척이나
힘겨운 투쟁이었다. 전통의 보루인 가정과 고향마을에서 이런 여성들은 `요괴`로
배척당했다.
  결국 양측의 대립은 `이초사건`에서 충돌한다.
  북경여자고등사범학교 학생인 이초는  보호자인 양오빠가 결혼을 강요하자 이
를 거절했다.  그러자 양오빠는 경제적인 지원을  끊었다. 그녀는 생활의 곤궁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결핵에 걸려 23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녀의  동료와 지
식인들은 이 죽음에 분노해 `이초여사추도회`를 열며 전통의 포학에 항의했다.
  또 장사지방의 여성  조오정은 부모가 강요한 결혼에 저항, 시집가는  가마 속
에서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1927년 무한에서 벌어진 공산당  숙청 때는
단발한 여학생은 무조건 공산당으로  간주해 살육한 뒤 발가벗겨 길거리에 전시
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상해 대학의 여학생이자 유부녀인 양지화는 뒷날
공산당 지도자가 되는 상해 대학의  젊은 교수 구추백과 결혼을 하면서 전 남편
과의 이혼, 새 남편과의 결혼,  그리고 이 두 남자가 계속 우의를 지켜 나간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알려 전통 관습을 우롱했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전통과 관습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던 학생들 또는 그 압박
에서 갈등하고 불안에 시달리던 젊은이들은 북경 군벌 타도를 목표로 하는 손문
과 장개석의  북벌이 시작되자 고향과  부모를 떠났다. 그들은  국민당에서 또는
공산당에서 봉건세력과 외세를 쓸어 내기 위한 투쟁에 젊은 열정을 불태웠다.

  58.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효과는?

  침략 문명을 상징하는 기계에 반대하여  물레로 실을 잣고 신식 옷 대신 흰색
천을 몸에 두르고  둥근 안경을 쓴 간디의  모습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인도 민중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런 간디의 모습과 함께 다가오는  것은 그가
주장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이다.
  영국 유학을 통해  변호사 자격을 얻고 돌아온 간디(20세)는  봄베이에 변호사
사무실을 냈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남아프리카의 인도인  회사가 고
문 변호사를 구하고 있어 그 일을 맡기 위해 처자식을 인도에 둔 채 남아프리카
로 건너갔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인종차별에  큰 충격
을 받았다. 변호사였던  간디도 인종차별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역마차의 백인
전용 좌석에 앉았다가 끌려 나온 일이나 밤늦은 시간에 백인전용 도로를 걷다가
백인 경찰에게 구타당한 일 등은 간디로 하여금 자신의 반제국주의적 신념을 더
욱 굳게 하는 경험들이었다. 또한 그는 그곳  광산에서 일하고 있는 인도 노동자
들의 무권리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권 획득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도 했다. 이렇게 남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은 간디가  이후 인도에서 본격적인 반영
운동을 벌이는데 굳건간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18세기 중엽부터 본격화된 영국의 인도 지배에 맞선 투쟁이 최초로 폭발한 것
은 1857년 세포이 반란이었으나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영국은 인도 지배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전에는 동인도 회사를 통해  지배하던 것을 1877년 영국 왕
을 황제로 하는 인도제국을 만들어 직접 통치하에 두었고 인도인의 모든 정치활
동에 대한 단속도 강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도 독립을 위한 새로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885년 말 봄베
이에서 최초의 국민회의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국민회의운동은 순조롭게 진행되
지 않았다. 내부가 급진파와  온건파로 갈라졌고, 또 영국의 공작으로 1906년 전
인도 이슬람 연맹이 결성되어 종교의 대립이  나타났다. 독립운동은 침체한 채 1
차대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1차대전으로 독일과  전쟁에 돌입한 영국은 인도의  협력을 얻기 위해 전쟁이
끝나면 자치를 허용할 것을 약속하면서 인도를  회유했다. 국민회의는 이를 따를
태세를 취했으며 당시  남아프리카에 있던 간디도 이에 응했다. 영국에  대한 협
력이 인도의 자치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대는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  대전중 인도는 영국을 위해 150만 명의 병사와 식량,
광석, 고무, 목재 등 총 1억 4,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물자를 부담했다. 이 중 전
사자는 3만 6,000명이 넘었고 부상자는 그 두배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의  희생에 대한 영국의 보상은 롤라트 법이었다.  이 법에
의하면 개인이든 단체든 간에 영국의 시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모두 재판
없이 투옥할 수 있었다.
  전쟁중이던 1915년 병  때문에 귀국하여 조국에 머물고  있던 간디는 즉시 이
법에 대한 저항을 전 인도인에게 호소했다. 이  저항은 전 도시의 파업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모든 시민의 합심에 의해 대도시의 상업이나 교통을 마비시켜 식민
지 당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샤티아그라하`  투쟁이라고 한다. 사티아그라하
란 `진리를 파악한다`라는 뜻이다. 이 진리란 간디에게 사회에서 악한 것을 배제
하는 올바른 힘을  의미했다. 그것은 모든 비폭력 수단을 사용하여  현실 정치에
서 압제자의 마음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당국은  이 비폭력 저항 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간디의 저
항 운동이 시작된 꼭 일  주일 만인 1919년 4월 13일 암리트살에서 열리고 있던
저항 집회를 영국군이 습격했던  것이다. 여기서 379명이 죽고 1,200명이 부상당
했다. 이 사건으로 인도  전역은 들끓었다. 국민회의는 12월 암리트살에 모여 학
살 사건의 책임 규명과 롤라트 법의 철폐 요구를 결의했다.
  이듬해 1920년 간디는 국민 회의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영국에 대한 철저한 불
복종 운동을 추진해 간다. 식민지 당국의 지배하에  있는 입법 기관에 대한 참가
거부,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 당국 관리하에  있는 학교에 가지 않고 인도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가기,  영국인 은행에 예금하지 않기, 관직 사직  등, 동시에 인
도제 면직물의 생산과 소비를 장려하는  스와데시(국산품 장려) 운동이 전개되었
다. 이러한 운동의 전개 속에서 간디의 명망은  높아졌으며 인도 민중은 그를 마
하트마(위대한 혼)라고까지 불렀다.
  하지만 불붙은 대중  운동은 당국의 탄압 속에서  간디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발전했다. 1922년 2월 인도 북부의 촐리촐자 농민들이 경찰서를 습격, 경관 22명
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충격을 받은 간디는 불복종  운동을 중단했고
그도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그 후 1928년까지 투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또한 1930년 시작된  제2차 불복종 운동 때  경찰 무기고 습격이나 시 행정권의
장악이 일부 지역에서 일어났을 때 간디는 단호히 이에 반대했다.
  또한 민족 운동의  발전과 나란히 자본가나 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의 투쟁
도 많이 나타났는데  간디는 이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자본이나 토지  등 기득권
에 대한 침범은 간디에게 일종의 폭력으로 보였던 것이다.
  간디의 독특한 철학에서 나오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실제로 두 번에 걸친 투쟁은 스와라지(독립)를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영화 <간디>에 나오는  불복종 운동 참가자
들의 모습, 즉 경찰봉에 맞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전진하는 모습은 엄청난 반
향을 일으켰고 다음  단계의 투쟁을 위한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실
제 이 투쟁의 최대의  공헌은 국민 회의가 인도 전역에 조직되어  모든 계급, 계
층의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그들의 민족 의식, 정치 의식을 고양시킨 데 있다.

  59. 파시스타가 권력을 잡게 된 배경

  1차대전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는 새로운 세계와 민주주의 발전에 대
한 희망이 가득찼다.  각국에서 선거권을 비롯한 민주주의적  권리가 확대되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중동부 유럽에서도 의회 정치가 수립되기 시
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희망은 10년이 못  가 다분히 소박한 것이었음이 드
러났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파시스트 운동이  대두되고 몇 나라에서는 권력을
장악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런 파시스트 운동의  원초적 형태는 이탈리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1차대전
에 연합군으로 참전한 이탈리아는 승전국이 되긴 했지만 국내외 상황이 그리 순
탄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국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물가가 4배나 뛰어올
랐고 실업자도  증가했으며 농민들의 생활도  궁핍하여 사회 불안이  커져 갔다.
여기에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노동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쳐 전후 2년간 파업
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1920년에 일어난 토리노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는 자본가
들의 단합된 대응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탈리아의 지배계급인 자본가와 지주
들은 이러한 혼란 사태를 해결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연합국에  가담하여 전승국이 되었음에도 약속받은  `미수복 이탈리아`의
영토를 얻지 못하자 국민들 사이에는 과격한  민족주의 감정이 높아갔다. 무능한
정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높아 갔으며 불만의 분출구로 폭력을 용인하는 분위
기까지 나타났다.
  파시시트 운동의  초기 추종자들의 대다수는  1차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었
다. 전쟁 참가를 영웅적인 애국심과 결부시켰던  이들에게 종전은 가치관의 혼돈
으로 다가왔다.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재적응의 문제, 즉 돌아갈 곳이 없다는 상
실감을 야기시켰다.  여기에 더해 이탈리아와  같이 승리하긴 했지만  그 승리를
보상받지 못했다는 감정은 사회적 긴장을 초래했다.
  1919년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의 `전투 파쇼`가  결성된 것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였다.  처음에 그 구성원이 200명에 불과했던  전투 파쇼는
1921년이 되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편의적으로 혼합한  이데올로기(한편으로
는 `미수복 이탈리아`에  대한 민족적 감정을 부추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빈곤
층의 호응을 얻기 위해  대중적 반자본 구호를 선전했다)와 무솔리니 개인의  매
력이 함께 어우러져  20만 정도의 회원을 확보하며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러
나 1921년 선거에서  35석(총 500석)을 차지하는 등 정계 진출은  미미한 상태였
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이 1922년 10월 이른바 `로마  진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
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당시 지배층을  대변하고 있던 자유주의자들의 책임이
있다. 전후의 `혁명적 위기`에 대해 지배층은 불안해 하고 있던 차에 공산주의에
대한 보루이자 사유 재산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파쇼는 커다란 위안이었다.
  이렇게 성장한 파시스트들은  지배층의 후원을 받으며, 생활고  때문에 불만에
찬 중간층, 농민 출신의  귀환병을 지지 세력으로 하면서 사회주의자, 기독교 사
회주의자 등 진보적 인사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으며 노동 조합을 습격하고 파업
을 분쇄하기도 했다. 이러한 폭력 행위는  당연하게도 정부당국에 의해 묵인되었
다.
  여기에 더해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 등 급진파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파시스트들을 선거를 위한 구성에 끌여들었다. 이것은  당시 보수당의 지도자 조
리티의 `파시즘을 가지고 사회주의를 제압한다`는 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당시
지배층에서 파시즘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사회주의였다.
  그렇지만 점증하는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 노동자들도  힘을 결집하기 시작했
다. 1922년 8월 사회주의자들은 정치적 자유를  구하기 위한 최후의 시도로 총파
업을 단행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이를 핑계로 왕국을 구할 것을  선포하고 파
시스트 민병대로 하여금 로마로 진군하게 했다.  1922년 사회당은 3개 파로 분열
되어 있었고 새로 탄생한 공산당도 파시스트의 진출을 막는 공동 행동을 조직하
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월 28일 파시스트들은  로마에 접근하자 파시스트들을 이용하려던 자유주의
자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서둘러 계엄령을 선포하려  했으나 국왕은
이를 거부했다. 국왕은  무솔리니가 왕정의 존속을 인정하자  파시스트들에 대한
진압을 포기하고 도리어 무솔리니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이것으로 전후 4년간의 혼란이 종식되고 `안정`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 안정은
20년이 넘게 지속될  파시스트 독재 체제를 향한 침묵 속의  안정이었다. 파시즘
을 이용하여 기존 질서를  지키려던 자유주의자들의 구상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
간 것이었다. 그들은 일종의 정치적 자살을 감행한 셈이었다.

  60. 대공황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929년 10월  24일(목요일) 아침 뉴욕의 월  가에 있는 주식  시장에서 주가가
사상 유례 없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암흑의 목요일`이라고 불리는 이 날  `대공
황`의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그  이전까지 치솟기만 하던 주가가 별안간 폭락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식을 팔려고 주식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이제는 주
식을 살 사람이  없었다. 5일 후인 29일  주가는 다시 폭락했고 몇  시간 사이에
주식 시장에 쏟아져 나온 매물이 무려 1,650만 주나 되었다.
  하지만 주식 폭락이 대공황의 불을 당긴 것은 사실이지만 주가가 떨어진 것이
공황의 원인은 물론 아니다. 대공황의 원인은 이미 `황금의 20년대`에 내재해 있
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미국은 전후에 경제면에서도 세계
제1의 대국이 되었다. 전쟁시 연합국에 빌려  준 돈으로 말미암아 최대의 채권국
이 되었으며 덩달아  뉴욕은 런던을 제치고 국제적인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또
한 전쟁 물자로 공급하면서 발전한 중공업은 전후의 번영을 떠받치는 지주였다.
  20년대의 번영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기술혁신과 산업조직의  변모였다. 1920년
웨스팅 하우스 방송국이 대통령 선거전을 중계함으로써 보급되기 시작한 라디오
는 20년대 후반이 되면 전체 가정의 40%가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기
술혁신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자동차의 대량 보급이다. 1차대전 전만
하더라도 자동차는 상류 계급의 `비싼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을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대전  직전부터 대량 생산모델을 개발하여 전후가 되면  자동차
는 대중 소비품으로서의  위치를 점할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자동차는  연관 효
과가 큰 제조업이므로 강철,  기계, 유리, 고무, 전기, 석유 산업, 건설업 등의  산
업 발전을 선도했다.
  이러한 발전에는 산업조직의  변모가 수반되었다. 포드에 의한  대중적인 자동
차 생산이 대표적인 예이지만, 규격화된 부품사용과  콘베이어 벨트에 의한 대량
생산이라는 새로운  생산방식이 출현했다.  이와 같은 생산방식에는  거대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에 기업의 규모는 점점 커져 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강도 높은
작업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지불하여 구매력을 증대시킴으로써
대량생산에 할당한 대량 소비를 창출하려고 했다.
  이렇듯 20년대의 미국은 미증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어
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잠재적 모순인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었다.
  20년대 중반부터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사이에 실질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
았다. 앞서 말한 포드  자동차 공장의 숙련 노동자의 경우 높은  임금을 받는 편
이었지만 전체 산업에서는 소수였고  그나마 노동 생산성 향상에는 밑도는 것이
었다. 반면 노동 생산성은 20년대에 걸쳐 평균 43%나 높아졌다. 하지만 독점  기
업에 의한 가격통제  때문에 상품 가격은 내리지 않았다. 이러니  소비자의 구매
력은 늘 수 없었다. 황금의 20년대의 수혜자는  확실이 일반 대중이 아니라 기업
가였던 것이다.
  게다가 농민도 이 시기에 과잉 생산 때문에  가격 저하, 부채 증가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러한 형편은 1929년 세계에서 가장 풍요한 이 나라에서 인구의 70%가
당시로서는 최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연간 2,500달러 이하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대중의 소득  증가의 정체는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
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반면 소수 상류계급으로의 부의 집중은 더욱 심화되어 최정상 5%가 소득의 3
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게다가 과세율도  낮았으므로 상류층의 저축은 더욱 늘
어갔다. 그런데 이렇게 쌓인 돈은 생산적인 투자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투
기로 향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증권 시장으로 달려 갔다. 이러한
주식 열풍은 당시의 호경기와 맞물려 주가를 천정부지로 치솟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상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가고 있었다. 승용차  판매 대수는 1927년의 경우 전년의  80%에 불과했고 주택
건설도 1926년 절정에 달한 이후 1929년까지 35%나 감소했다. 특히 1929년 하반
기에 들어서면서 공업 생산,  가격의 하락은 눈에 띄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아직
주가는 계속 올라갔고  9월 19일 그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절정은 곧 낭떠러지
였다.
  수많은 투자가들이 파산했고 은행도  예금 인출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
다. 부도를  낸 기업이 5,000개가 넘었으며  수만 개의 기업이  파산했다. 이러한
공황은 실업으로 나타났다. 심각한 단계에 들어선  1932년 봄 전체 노동력의 3분
의 1이  일자리를 잃었다. 사람들은  굶주렸고 대도시에서는  자선단체의 구호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월 가에서  시작된 공황은 대서양을 건너갔다. 1차대전을  지나면서 유
럽 경제는 미국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고 따라서 미국의 공황은 강 건너 불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부 유럽을  시작으로 영국, 가장 늦게 프랑스까지 공황에 휩
쓸려 들어갔다. 바야흐로 세계 대공황이 발발한 것이다. 약 4년간 지속된 공황으
로 인해 세계적으로 수천만이 넘는 실업자가  생겨났으며 공업생산의 저하, 농산
물 가격의 폭락, 무역 감소, 금본위제의  정지가 초래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공황
을 타개하려는 각국 정부의 노력은 경제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초래하
여 자본주의 경제 자체의 모습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61. 신무기 실험대에 오른 게르니카의 비극

  20세기 미술의 거장  피카소의 그림 가운데 `게르니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
있다. 게르티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1937년 4월
26일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이 마을은 쑥밭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을 향해 사격
연습하듯 기관총 세례와  폭탄을 퍼부었고 여기에는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약 3시간의  폭격으로 1,654명이 죽고  889명이 다쳤다. 피카소의 <케르니카>는
독일군의 폭격에 대한 분노이자 고발이었다.
  1930년대 유럽은  새로운 전쟁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었다. 이탈리아,
독일에서 파시스트가 정권을 잡고 군비 확장에 힘을 쓰면서 호시탐탐 침략의 기
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렇게 점점 커 가는 파시스트 세력과  그것을 저지하려
는 세력의 대립 상황은 스페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주제 국가였던 스페인이 공화제로 바뀐 것은  1931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주
민 세 명  중 한 명이 문맹이고 토지  소유자의 겨우 2%가 경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카톨릭 교회가 넓은 토지를 비롯하여  스페인 국가 재산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
하고 있었는데 이  교회 세력은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다.
  공화당과 사회당의 연립으로 구성된 공화국 정부는 교회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하고 보통선거의 도입,  군대 개혁, 토지 개혁 등을 추진했다.  이에 대해 지
주, 자본가, 성직자,  장교 등 전통적인 지배 계층은 위기감을  느꼈으며 그 결과
독일 나치의 영향을  받은 극우 정당인 팔랑게 당이 결성되었다.  1933년 총선거
에서는 독일에서의 나치의 정권 획득에 고무된 듯 우익의 진출이 두드러졌고 내
각에도 참여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대해  마드리드와 북부 공업지역의 노동자들
은 총파업으로 저항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공화국을 지키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단결의 필
요성을 느끼게 했다.  그리하여 1936년 1월 공화당 좌파,  사회당, 공산당 등으로
인민 전선이 결성되었고 이어 열린 2월의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우파는 이에 반란으로 답했다.  그 해 7월  식민지 모로코에
있던 프랑코 장군 (Francis  Franco, 1892-1975)이 반란의 신호탄을 쏘았고 이에
본국의 반동 세력이  호응했던 것이다. 스페인은 인민 전선에 의한  민주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내전의 초기에는 공화파가 불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형세를 뒤바꾼 것
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군사 개입이었다. 영국은 6만이 넘는 병력과 대량의 무기,
자금을 반란군에게 지원했고 공군과 해군을 동원한 직접 군사 행동도 서슴치 않
았다. 이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은 불간섭 정책으로 파시스트 세력의  도발을 묵
인했고 오직 소련만이  벙력과 무기를 보내 공화국을 지원했다. 하지만  국가 차
원의 지원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전 세계 지식인, 노동자의 참전이었다. 반
파쇼 정열에 불타는 전 세계의 양심적인 사람들이 스페인의 갓 피어난 민주주의
를 지키기 위해 스페인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약 3,4만
이었으며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에  참가했다. 헤
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앙드레 말로의 <희망>, 조지 오웰의 <카
탈로니아 찬가> 등은 이 반파시즘 전쟁에  참가한 체험을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
킨 것들이다.
  게르니카의 비극은 이러한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서 벌어졌다.  바스크는 스페
인에 속하기는 했지만 스페인 사람들과는 언어도  문화도 달랐다. 따라서 그들은
이전부터 스페인에  자치를 요구했다. 1936년  10월 인민 전선  정부는 바스크의
자치를 지지하고 자치  정부를 승인하는 방침을 밝혔다. 그리하여 그  후 바스크
에서는 프랑코의 반란군에 반대하고  인민 전선 정부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강했
다.
  프랑코는 바스크를 공격하여 북부 지방을 먼저  장악하려 했다. 여기에 신무기
를 실험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던 독일 공군 총사령관 괴링(Hermann Goring)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괴링은  히틀러가 프랑코의 반란군은  지원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스페인 내전을  독일 신무기 실험장으로 이용하려고 마음 먹고
있던 차였다. 그리하여  1937년 4월 26일 독일의  최신형 폭격기, 신무기들이 이
고요한 마을을 폭격했는데 여기에는 각종 폭탄, 소이탄, 심지어 어뢰까지 투하되
었다.
  게르니카의 비극이 벌어진 약 2년  후인 1939년 3월 말 끈질기게 버티던 마드
리드가 프랑코 군대에 함락되었다. 마침내 내전이  반란군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
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은 2차대전의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마드리드가 함락
된 해 9월 독일군의  전격적인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는 새로운 전쟁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62. 보살의 출현을 믿은 일본 국군주의의 시조

  1936년 2월 26일 새벽 5시.
  전날에 내린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도쿄시내  곳곳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이로부터 24시간 동안에  일본제국의 내대신, 재무대신, 교육총감 등이 살해되고
수상, 천황의 측근들이  피습되었으며 경시청, 육군성, 참모본부  등이 일단의 청
년 장교들이 이끄는 1,500여 명의 병사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른바 `2.26사건`의 반발이다.
  이 쿠데타는 국가주의 사상과 중국에 대한 무력 진출을 주장하는 육군의 위관
급 장교가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정부가 중국 문제 등에서 미국, 영국 등
서구 열강의 눈치를 보며 무력 진출을 망설이고 있고 농민 경제의 파탄 등에 대
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난하면서 정부각료, 정당, 재벌 등 국내 지배 계층
의 제거와 천황  친정을 거사의 목적으로 삼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명치
유신에 빗대어 `소화유신`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무력에 굴복한 정부와 군 수뇌부는 이들을 사태 수습을 위한 계엄군의
일부로 편성시켜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들이 신앙의 대
상으로까지 숭배하고 있던 천황이 쿠데타군을 용납하지 않았다.
  26일 아침 사건  보고를 받은 천황 히로히토는  “저들이 내 오른팔과도 같은
궁정대신을 죽이고 이제 내 목을 조이려  드는구나”라며 즉각 진압을 명령했다.
일이 틀린  것을 깨달은 청년 장교들은  천황의 명령에 의한  `영예로운` 자결을
호소했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자결하려거든  너희들 맘대로 하라”며 자결명령
칙사파견을 거절했다.
  결국 주모자 17명이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이후 일본은
쿠데타에 동정적이었던 일본 국민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중일 전쟁, 국가총동원
체제, 태평양 전쟁으로 내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사형수들의 명단  중에는 검찰당국이 `수뇌`로 지목한 민간인  한 명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일본 파시즘의 교조`, `순정 파시스트`, `혁명의 실천가` 등으
로 불리며 청년 장교들의 숭배 대상이었던 기타 이키였다. 당시 55세.
  19세 때  오른쪽 눈을  실명한 외눈박이  청년 기타는 1906년  23세의 나이로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를 자비로 출판, 당시 저명한 사회주의자들에게서 `자
본론에 버금가는 저작`, `기성 학자 계급에 대한 정복` 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후
일 세계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은 일본 군국주의 시조치고는 역설적인 데뷔가
아닐 수 없다.
  손문이 만든 중국동맹회의 회원이기도  했던 그는 이어 중국에서 신해 혁명이
터지자 상해로 건너갔다.  거기서 중국 국민당 초대 당수였던 송교인과  깊은 친
교를 맺고 8년 동안 중국 혁명의 성공에 매진했다.
  그는 일본 정부가 손문의 중국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것을 비난했
다. 일본은 영일동맹을  파기하고 영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영국을 동아시아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으로써 영국의 압제에서 벗어난  중국은 소비에
트 러시아와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동양은 서양으로부터 완전
한 해방을 성취할 수 있고 이 과정은 동양의 맹주인 일본의 사상적 지도로 이뤄
져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 같은 생각은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라는 허울 아
래 실제로는 조선에  이어 만주, 중국도 일본이 장악해야 한다는  일본 제국주의
의 침략성을 드러낸 것이다. 기타의 이 주장은  혈기 왕성하고 호전적인 젊은 장
교들을 사로잡았다. 젊은  장교들은 중국에 대한 무력 침략을 지상  과제로 여기
게 되었고 1930년의 만주사변, 1937년의 중일  전쟁으로 몰아가는 원동력이 되었
다.
  기타는 원세개의 집권과 북경 군벌의 발호 등으로 퇴색한 중국 혁명에 실망하
고 1919년 상해의  한 여관에서 그의 혁명사상을 정리한 <국가개조안원리대강>
을 집필했다. 이 책은 곧 이은 그의 귀국과 함께 일본의 우익 인사, 청년 장교들
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아  우익의 바이블로 불리기 시작한다. 2,26당시 지도자였
던 한 장교는 처형되기 전 남긴 옥중수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국가개조
안원리대강>은 한  자 한 획도 수정하지  않고 완전히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대강은 절대진리이다. 그 누구도  이것을 평하고 또는 훼손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된다.”
  그럼, 그 내용은 무엇인가?
  기타는 소화유신을 이룩하기 위해서 당, 재계, 군, 관료의 제거를 주장했다. 그
는 천황을 등에  업고 군사력을 동원해서 3년간 헌법을 정지시키고  귀족원(전후
참의원), 중의원을 해산시켜 버리려고 했다. 또한 25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
거권을 부여하고(당시는 납세액이 10엔을 넘는  남자만이 선거권을 갖고 있었다)
선거에 의해 국가개조의회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개인의 사유 재산과 기업 자본금의 한도를 정해 그것을 초과한 액
수는 국유화하여 국가가  통일적으로 관리하게 했다. 국영기업에  종사하는 노동
자는 경영과 수지결산에  관여할 수는 없으나 그  대신 중의원을 통하여 국가의
모든 생산에 발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대외적으로 기타는 일본을  아시아의 우두머리로 인식했다. 그에게  한국은 언
어와 풍습의 차이만  있을 뿐 나라의 기본인  사상면에서는 일본과 완전히 같아
다른 나라라기보다 훗카이도와 같은 서간도일 뿐이었다.  또 대영토를 이뤄 일본
의 안녕을 위협하고 있는  영국과 러시아의 압박에서 맞서 호주와 극동시베리아
의 점령을 주장했다. 이을 위해 군비의 확장을 주장했다.
  기타의 이론에서는 노동자, 농민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보이지만 이것은 기성
계급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패전  때까지 일본 군국주의는 민중에게
천황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헌신만을 강조하면서 전쟁터로 내몰았을 뿐 어
떠한 민중을 위한 정책도 구상조차 하지 않았다.
  <국가개조안원리대강>을 완성하고 난 후  기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모
두 끝났다고 생각하고  매일 법화경을 암송하면서 소일했다.  신비롭고 카리스마
같은 분위기의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젊은이들에게 법화경에 나오는  `보살의 출현
`이야말로 혁명의 성취를 예언한 것이라며 소화유신의 실행을 선동했다.
  그가 죽고 난  후 그를 죽인 군상층부에  의해 추진된 군국주의화정책은 바로
그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출현한 것은 보살이 아니
라 원자탄이었다.

  63.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

  흔히 장개석과 모택동의 싸움을 2000년 전에 있었던 항우-유방의 싸움과 비교
하곤 한다.
  유방은 일개 농민의 아들로  병사 한 명 창 한 자루도  없는 맨손이었다. 그는
주변의 친구, 동지 들에게는 신의로, 백성에게는 관대함으로 급속히 인심을 얻어
갔다.
  이에 비해 항우는  초나라라고 하는 강대국의 최고 귀족 집안의  자제로, 유방
이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초패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세력을 보유하
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병사를 혹독하게 다루었고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 있었
다. 결국 항우는 유방의 군사가 사면에 불러  대는 초나라 노래를 들으며 회한에
찬 최후를 맞게 된다.
  중국에서 국민 혁명이 시작된 이래 장개석과  모택동, 국민당과 공산당의 세력
은 항우와 유방에 비유될 정도로 차이가 났다.
  장개석은 북벌 전쟁을 통해 군벌을 타도하고 통일 정권을 수립한 국민당의 당
권, 군권  등을 한몸에 장악하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가히 유일한
중국의 지배자였다.
  장개석이 1927년 상해에서 피비린내 나는 공산당 숙청(4.12쿠데타)을 자행했음
에도 그가 곧 이어 국민당  최초의 통일 정권인 남경 정권을 수립했을때 민중의
지지는 열광적이었다. 오랜  통치에 지친 사람들은 국민당의 통일 정권에  큰 기
대를 걸고 있었다.
  사실 장개석이  집권한 1927년부터 일본군이 침입한  1937년까지 남경 정부의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과 그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1928년 최초의
국립은행이 설립되고  이금제(한 지역을 통과할  때마다 부과되는 내지  관세)가
폐지되어 국내 시장의 통일이 진전되었다.
  또 1931년부터 34년까지는 세계  공황의 여파와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시달리
고 있는 농촌을 구제하기 위해 농촌건설을  전개, 공산당의 소비에트에 맞대응했
다. 이를 바탕으로  1930년대 중반에는 전국경제위원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공
업화를 추진했다. 1935년에는 종전의 냥을 원으로  바꾸는 화폐 개혁을 단행하고
아편 전쟁 당시 빼앗겼던  관세 자주권을 열강으로부터 되찾음으로써 중국 민족
의 숙원을 풀었다.
  정치척으로도 잔여 군벌들을  아우르고 공산당을 오지인 연안으로까지 몰아내
는 데 성공했다. 자신감에 찬 장개석 정권은  손문의 국가건설 단계인 군정-훈정
-헌정 중 최종단계인  헌정 실시를 약속하고 1935년 헌법을  기초했다. 사람들은
바야흐로 국민당 정부가 반제반봉건의 노선으로 매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후인 1947년 공산군과 내전을 벌이고 있는 국민당은 이
미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몰라볼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고  내전을 시
작한 지 3년도 안 되어 대륙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우선, 장개석의 독재적  성향이다. 그는 북벌 과정에서  노동자, 농민을 동원하
기 위해 당내 이들을 위한 조직을 설치하고  지원했다. 그러나 북벌이 끝나고 자
신이 통일 정권의 지배자가 되자 이 조직들을 폐지하고 민중운동을 폭력으로 탄
압했다. 학생이나 지식인의  움직임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들이 손문의 유지와
장개석의 약속대로  헌정의 실시, 의회  소집을 요구하자 장개석은  헌법 초안을
만든다는 구실로 시간을 끌었고 점차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당내 좌파가 끊임없이 독재  체제의 완화를 촉구했지만 장개석은 정치란 엘리
트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수의 군부 인사와  당료들의 의견만을 들었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대중의 힘을 동원하는  데 실패하고 그가 버린 대중은 공산당 쪽
으로 향해 갔다.  이 점에서 모택동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초창기의 혁명성과 활력을 잃고 부패하고 노쇠하기 시작 했다.
  둘째, 남경 정부의 도약기에 엄습한 일본의 침략은 치명적이었다. 전쟁의 첫해
에 국부군은 그  때까지 10년 동안 이룩한 인원과 장비의  대부분을 파괴당했다.
그 후로 국부군의 질은 형편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국민당 정권이 피난 간 서부의 오지인 중경은 당시로서는 거의 외국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낯선 곳이었고 낙후한  지역이었다. 서부 중국은 전국 전력의 4%만
을 생산했고 공장수의 6%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거의 농업에 종사했는
데 이들은 낯선  국민당 사람들에게 비협조적이었다. 중경에 있을 때  국민당 정
부의 수입은 63%나 감소했다. 정부의  적자 재정에서 비롯된 인플레는 7개월 동
안 251%나 물가가 오를 정도였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학생과 지식인 들은 장개석에 대해 전민  항전, 즉 노
동자, 농민, 학생 들의 정치 활동을 탄압하지 말고 이들 대중의 에너지를 분출시
키는 것만이 대일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방안으로서
장개석이 약속했으나 실행하지 않고 있던 의회의  개설을 촉구했다. 요컨대 정권
의 민주화만이 전쟁  능력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론의
지지를 받은 이  주장에 대해 장개석은 전쟁은  정부와 군대가 한다며 코웃음을
쳤다. 반면 공산당은 이들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이런 과정을 그치면
서 많은 지식인과  학생, 사회 저명인사들이 국민당의 독선에 염증을  느끼고 공
산당 쪽에 가까워져 갔다. 게다가 장개석은  이들이 빨갱이라며 탄압하여 결과적
으로 공산당을 도와 주었다.
  1945년 소련의 만주  진공도 장개석 패배의 큰 원인이었다. 소련은  국민당 정
부가 만주에서 군사적, 행정적인 힘을 확보하는  것을 저지시키려고 만주의 공업
시설들을 떼어  갔다. 그리고 이곳에 공산군의  근거지를 마련해 주었다. 풍부한
식량과 일본인이 남겨 놓은  공업시설을 갖고 있는 만주를 장개석이 확보했다면
그리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당 약체화의 또 다른 원인은 중앙 정권에 대한 지방 세력의 저항을 들 수
있다. 1940년대 말까지 군벌 세력은 완전히  소탕되지 않았고 중앙정부는 마을단
위까지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
  거듭되는 패전과 살인적인 인플레로  위기에 직면한 장개석 정권은 1948년 통
화 개혁을 단행한다. 장개석의 아들이자 후일  자유중국의 총통이 되는 장경국이
주도한 이 개혁은 법폐라는 옛돈을  금원권이라는 새 돈으로 300만 대 1의 비율
로 바꾸고 동시에 모든 물가와 임금을 동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통화 개혁
은 70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국민당 정부는 붕괴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절망한 장개석은 1948년 1월 이렇게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 중국에서나  외국에서나 오늘날의 국민당처럼 노후하고 퇴폐한
혁명 정당이란 있어 본 일이 없다. 얼이 빠져  있고 기율이 없으며 더 나아가 옳
고 그른 기준도 없다. 이 따위 당은 오래 전에 부서져 쓸어 버려야 했다.”
  그러나 당의 기율을 세우고 옳고 그른 기준을 바로 하라는 수많은 충고자들을
감옥에 처넣은 것은 장개석 자신이었다.

  64.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여긴 베트남 사람들

  1940년 프랑스가 나치에게  함락되자 일본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에
눈독을 들인다. 당시 장개석은 인도차이나와 가까운  중경으로 수도를 옮겨 일본
에 결사 항전하고 있었는데  물자 보급이 주로 인도차이나로부터 이뤄지고 있었
다. 이것은 일본에게 좋은 구실이었다.
  1940년 6월 일본은  프랑스 식민총독을 협박해서 군사 사절단을  파견, 장개석
에 대한 물자 보급로를 끊었다. 이어 9월에는 2만 5,000명의 군대를 진주지켜 프
랑스 식민지당국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80년 동안 절대자로 군림해 오던 프랑스가 같은 동양의 일본에게 쩔쩔매는 것
을 지켜 본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독립의  희망을 일본에게서 찾았다. 사실 그보
다 35년 전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1905년 일본이 러시아를  격파하자 베트남 지식인들은 경악한다.  동양의 소국
일본이 대러시아제국을  격파하다니...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은 즉시  일본을 배우
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각계  각층으로부터 자금을 모아 우수한 젊은이들을 도쿄
에 유학시키는  이른바 동유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 많은 민족주의 망명객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본질을 간과하고 같은 동양국으로서 서
양의 침입에 대항해야 한다는 생각과 과거의 인연을 앞세웠다.
  일본군이 진주한  후 베트남 보국동맹회는  일본군의 무기 지원을  받아 봉기,
프랑스 군을 공격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도 각지에서 무모한 봉기를 계속했다.
까오다이, 호아하오 등  전국적인 종교단체들도 일본을 환영했다. 그들은 일본헌
병대의 도움으로 교단을 재조직하고 일본에 정보를 제공했으며 사이공의 일본군
조선소에 노동력을 공급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젊은 교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
켰다. 훗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는 고딘디엠도 이 때 일본군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독일의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하의 프랑스 식민당국을 인정하면서 간접통치를
하려 했던 일본의 구상은 연합군과 드골이 파리를 탈환하고 미군이 필리핀에 상
륙하자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군이 인도차이나에  상륙할 경우 프랑스 군이
일본에 반기를 들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1945년 3월 9일. 마침내 일본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 군을 무장해제시키
고 총독을  감금시켜 버렸다. 그리고  유명무실하게 황제 자리를  지켜오던 우엔
왕조의 바오다이 황제에게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게 하고 저명한 역사학자 쩐
쫑킴에게 내각 구성을 맡겼다.
  연로한 쩐쫑킴은 우유부단한  인물로 일본이 다루기에는 안성맞춤인 사람이었
다. 그의 내각에는  민족적인 성향의 정치인은 거의 없고 단순한  행정관료가 대
부분이었다. 이것은 베트남 인의 내각이라기보다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행정
기구에 불과했다.  프랑스 총독부의 행정 기구도 그대로 존속되었다.
  일본인의 속마음을  읽지 못한 베트남  인은 환호와 감격의  물결에 휩싸였다.
각지에서 저명인사들이 애국강연회를 열었고  수많은 정치단체들이 생겨났다. 이
들은 일본의  행동을 찬양하고 일본에 접근하여  독립베트남 정권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 일본 지도부는 이미 베트남을 중국, 소련, 영국, 미국과의 전
쟁을 위한 식량 보급기지로 설정해  놓고 베트남의 독립은 먼 훗날의 일로 치부
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국이 일본의 반불 쿠데타에 환호를 보내고 있을 때 인도차이나 공산
당과 베트민(도맹: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많은 베트남인들과 달리 일본이 결코
베트남의 독립을 갖다 주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도처에서 일본군이
연합군에 밀리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연합군에 접근했다. 연합군도  프랑스 식민
당국의 행정체계가 파괴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던 베트
민이 필요했다. 호찌민은 반일노선을 굳히고 중국  운남성 곤명에서 미국의 제14
공군사령관을 만났고 OSS(미국전략첩보대)와 구체적인 작전 계획도 논의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고 이틀 후 소련이 만주에 진입하자 베트
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일본의 항복이 박두했음을 깨닫고 즉각적인 총봉기를
결행했다. 일본을 해방군으로 여겼던 많은 국민들과  정치단체들은 손을 놓고 있
을 수밖에 없었다. 8월 19일 하노이가  베트민 장악하에 들어갔고 공산당의 세력
이 비교적 약했던  사이공까지 8월 25일 베트민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것이 8월
혁명이다.
  8월 30일 바오다이 황제는  권력과 권위의 상징인 황금의 보도를 베트민 대표
에게 넘겨 주고 퇴위했다. 그로부터 3일  후 호찌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
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많은 베트남 인들은 비로소 일본에 대한  환상에서 깨
어났다. 베트남  인들은 호찌민 정부  아래서 자신의 이권을  되찾겠다며 돌아온
프랑스와 그에 뒤이은  미국의 침략과 맞서 처절한 전쟁을 수행했다.  이제 아무
도 환상 따위는 갖지 않았다.

  65.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한 비결

  전투의 성패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중에서  아군과 적군의
준비 정도, 지휘관의 적절한 작전 계획 수립과  그것의 효과적인 실행 등이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주요한 대규모  전투는 서
로가 너무나 잘 알고 그에 따른 적절한 준비를 갖추기 때문에 몇 가지 우연적인
일에 의해 성패가 결정 지어지기도 한다.  2차대전의 노르망디상륙 작전이 그 대
표적인 예이다.
  2차대전 초기 패배를 거듭하던 연합군은 1942년 초여름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
작했다. 태평양 전선에서의  미드웨이 전투(1942 .6), 아프리카전선에서의 롬멜의
전차 부대의 패배에 이어  1943년 2월 동부 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 공격에 나
섰던 30만의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아프리카 전선을  석권한 연합군은
1943년 7월 시칠리아에 상륙했고 이어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했다.
  이렇게 모든 전선에서 유리한 국면에 들어서게 되자 연합군은 유럽 본토에 대
한 상륙 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이 계획이  실현된 것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며
이 전투의  상황은 2차대전의  영웅들이 총출동하는  <가장 긴  날(the Longest
Day)>이라는 영화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아이젠하워를 총사령관으로 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것은 1944년 6월
6일이었다. 영국에  집결했던 연합군은 그  전해부터 상륙작전에  대비한 훈련을
쌓았고 준비도 착착  진행시켜 가고 있었다. 독일측도 이에 대비하여  대서양 연
안의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그런데 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대한 방어에서  독일군은 세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상륙 지점을  노르망디가 아니라 그보다 동쪽인 칼레 방면
이라고 생각하여  그곳에 정예 부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칼레 지역이
영불 해협에서 가장  거리가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이
것이 첫번째 실수였다.  게다가 주력군이 노르망디 방면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을
때는 레지스탕스의 공격으로 이동이 지체되었다.
  독일측의 두번째 실수는 상륙 날짜를 잘못  예상한 것이었다. 연합군이 상륙하
기에 알맞은 때는 해가 늦게 뜨고 새벽에 썰물이  날 때였다. 그 조건에 맞는 것
은 6월 5일에서  7일 사이였다. 그런데 6월이  되고 보니 날씨가 매우 나빠졌다.
잘못하면 작전을 한  달이나 연기해야 할 판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군은 연합군
은 예상을 뒤엎고 6월  6일 아침 함포 사격과 함께 상륙  주정을 발진시켰다. 때
마침 날씨가 약간 좋아졌던 것이다.
  여기서 세번째 실수가  겹쳤다. 독일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속임수
이고 이후 적의 주력 부대가 다른 곳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때문
에 독일군은 연합군을 해안에서 격퇴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린 셈이었다.
  이렇게 교두보를  확보한 연합군은 독일군의 저항을  격파하면서 빠른 속도로
진격했고 8월 말에는  레지스탕스와 시민들의 봉기로 파리가 해방되어 연합군은
유유히 파리에 입성할 수 있었다.

  66. 채플린은 공산주의자였나?

  큰 구두에 중산 모자, 지팡이를 든 콧수염의  신사 찰리 채플린을 모르는 사람
은 없을 것이다. <모던 타임즈>에서 보이는  웃음 속에 비수처럼 감추어진 자본
주의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위대한  독재자>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자유를 향한 절규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191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30년이  넘게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활동하던 채플
린은 1952년 고향인  영국 여행을 떠나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출세시켜 준 미국을  버렸는가? 아니면 미국이 이 천재 예술가를 버렸는
가?
  20년대 `빨갱이  소동(Red Scare)`을 한차례  치른 미국은 2차대전 후  소련과
냉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다시 한번 그러한 소동을 겪게 된다.  이때의 빨갱이
소동을 매카시 선풍이라고 한다. 이는 극단적인  우인 반공주의자인 공화당의 상
원 의원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y, 1909~57)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워싱턴 정가에서 `가장 형편 없는` 상원 의원이란  평판이 자자했던 인물로 1950
년 선거가 다가오자  돌파구를 반공 선전에서 찾았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적 동
기에서 출발한  반공 선동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면서 사회적인
현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1950년 2월  매카시는 미국 국무성 안에  수많은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여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이후 1954년경까지 상원의 위원회를
무대로 하여 진보적인  지식인과 뉴딜 파의 정부 인사들을  차례로 `빨갱이`라고
몰아 그 직위에서 추방했다. 그런데 이러한 매카시  선풍은 사회 각 분야로 퍼져
교육 기관,  노동 조합 나아가 헐리우드까지  확대되었다. 채플린이 미국을 떠난
것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였다.
  사실 채플린이 공산주의 활동가라는 혐의로 감시의 대상이 된 것은 1921년 부
터였다. FBI의 채플린에 관한 파일은  1,900페이지가 넘으며 거기에는 독일의 유
명한 망명 시인  브레히트 등 좌파 인사들과의 친교가 기록되어  있다. 채플린은
어느 정치 조직에도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진보적 운동에 적지 않은 자금을 주었
으며 이따금 정치적인 발언도  했다. 하지만 그가 감시의 대상이 된  가장 큰 이
유는 그의 영화 속에 담겨 있다. `빨갱이`라는 비난은 <모던 타임즈>를 만들 때
쯤부터 일기 시작했다.
  그 후 <위대한 독재자>, <무슈 베르두>  같은 작품과 함께 그의 정치적 발언
에 대해서도 매스컴  특히 우익계 잡지는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그런데 비난의
초점은 주로 사생활에 관한 흥미거리이거나  또는 탈세 혐의 등에 관한 것이 대
부분이었다.
  채플린은 당시  `빨갱이 사냥`의 도구를  활용된 반미행위 조사위원회의  출두
요구를 여러 차례 받지만 모두 거부하고 다음과  같은 회답을 했다. “나는 공산
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어떤 정당이나 정치 단체에 가입한 일도 없다. 나는 여러
분이 알고 있듯이 평화주의자이다.”
  하지만 굳은 신념의 소유자인 채플린도  `빨갱이`라는 사회의 비난을 감내하기
는 어려웠던 것  같다. <라임 라이트>를 촬영할 무렵 그는  막다른 골목으로 쫓
긴 상태였다. 1952년 이 영화를 완성한 후  시사회를 위해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떠날 때 그는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한 듯하다. 아니
나 다를까  미국 법무성은 채플린의  재입국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는 미국에 오래  살기는 했지만 영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이었던 것이
다.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스위스에서 평온하게 살았다.
  하지만 채플린은  1972년 그러니까 그가  죽기 5년 전 `빨갱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72년 4월 2일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아카데미 특별상을 받
았다. 영화 산업을 예술로 바꾸어 놓았다는 찬사와  박수 갈채 속에서 오스카 상
을 받은 채플린은 감격의 인사를 했고 사람들은 <모던 타임즈>마지막에 나오는
`스마일`을 합창했다. 쫓기듯 미국을 떠났던 채플린으로서는 감격에 겨운 순간이
었을 것이다.

  67. 오키나와는 독립 왕국이었다.

  일본은 근대 국가로  변신한 이래 영토 팽창에  대한 욕구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욕구는  지금도 북방 4개 섬으로  러시아와, 독도로 한국과 분쟁을
낳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바탕으로 남한지역을 그들의 옛땅으로  여기는 생각
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이 같은 일본인의 영토 욕심에  최초로 희생된 것은 지금은 누구나 일본의 영
토임을 의심하지 않는  일본 남부 해상의 군도 오키나와이다. 극동  최대의 미공
군기지를 보유하고 있는 오키나와는  사실 불과 100여 년 전인 명치유신 무렵까
지는 류큐라는 독립 왕국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오키나와 지배의 역사는 미국이
군정을 실시했던 기간 27년을 빼고 나면 불과 100년도 채 안 되는 극히 짧은 기
간이다.
  류큐 왕국이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1372년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의 요청에  응해 류큐 왕국이 명나라에 조공했다는 기
록이 그것이다.  류큐 왕국은 3개의  정권으로 분열되어  존재하다가 1429년에는
통일 정권이 수립되고 16세기에는 동지나해 일대에 광범한 무역 영역을 갖는 류
큐 왕국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이 왕국의  주요 무역대상국은 조공  무역을 하는 중국이었다.  명나라에 대한
조공 횟수는  171회를 넘어 2위인 베트남(89회),  10위 조선(30회), 13위  일본(19
회)을 훨씬 웃돌고 있다. 당시  명나라는 중국 상인의 해외진출을 금지했기 때문
에 류큐 상인은  유리한 상황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조선과  일본에까지 진출했다.
우리 나라의 부산은 이들의 중요한 무역대장지였다.
  16세기에 포르투갈 인은 태국에서 동포의 시체를 버리지 않고 소금에 절여 고
국으로 데리고 가려는 류큐  인을 보고 “그들은 정직한 사람들이고 노예매매를
하지 않는다. 전 세계를  다 준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들의 동포를  파는 짓은 하
지 않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번성하던 류큐 왕국은 1609년  일본의 서남단에 위치한 사쓰마번의 침략을 받
는다. 당시 일본의 도쿠카와 막부는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와의 무역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류큐를 중개지로  하여 명과의 무역을 재개하려는 속셈으로 사쓰
마번의 군사 행동을  방관했다. 1615년 사쓰마의 류큐 침략 소식을  들은 명나라
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진족인  후금에 압박당하고 있던 명나라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후 이를 묵인하게 된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가 등장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청나라는  류큐에
표류민의 송환을 명령한다. 이는  `표류민은 반드시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귀국시
킨다`는 막부의 법령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류큐 왕은 청의 명령을 따르
고 “만약 나가사키에 표류민을  보내면 류큐가 일본에 복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나게 된다”며 일본측을 달랬다. 이 같은  이중 조공외교로 류큐는 왕국으로
서의 면모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1872년 일본의 명치 신정부는 류큐 왕국을 일개 번으로 만들어 버렸고
이어 1879년에는 류큐 왕  상소를 강제로 도쿄로 끌어오고 류큐를 오키나와현으
로 만들어 버렸다. 왕국에서  번으로, 이제는 중앙 정부의 지방 행정구역에 불과
한 현으로 전락하여 한때는 동아시아를 주름 잡던 무역왕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
지게 된 것이다.
  일본에 편입된 류큐, 즉  오키나와는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2차대전이 종국으
로 치달을 무렵 미국은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해 오키나와에 상륙을 감행하고 이
과정에서 남녀노소 17만 명의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발생한다. 이어 1945년 4월
부터 니미츠(C.W. Nimitz)포고에  의하여 미군정이 시작되고 거대한 미공군기지
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일본 패망 후 1952년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에서도 오키나와는 계속 미국의 영토로 되어 있어 그 후 미일 양국의 현안 문제
로 존재해 왔다.
  이것이 다시  일본으로 귀속된 것은  1972년 일이다. 당시  닉슨 미국대통령은
미국의 국제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동맹국들의 책임 분담을 요구하는 정책을
폈다. 이에 오키나와 반환  교섭이 급진전됐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과 일부 야
당은 반환과 함께 미군기지 철폐 또는 축소,  특히 핵기지의 완전 철폐를 요구하
여 미국과 일본  양쪽 정부와 충돌했다. 이 때 오키나와내에는  일본과 단절하려
는 오키나와독립론이 일어나 신문에는 `류큐  민족의 독립을 절규한다`는 기사가
살리기도 했고 류큐  독립당이 결성되기도 했다. 일본 자민당과 사토  내각은 이
들의 주장을 묵살한 채  국회에서 비준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고 1972년 5월 비
운의 땅 오키나와는 다시 일본의 영토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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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라쟈노프스키, 니콜라이 V., 김택현 옮김, <러시아의 역사2> (까치)
  19. 호스킹, J., 김영석 옮김, <소련사> (홍성사)
  20. 리히트하임, G., 유재건 옮김, <유럽 현대사> (백산서당)
  21. 이주형 지음, <미국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2. 이병수. 우기동 지음, <철학의 철학적 이해> (돌베개)
  23. 프리샤우어, P., 이윤기 옮김, <세계 성풍속사> 상.하(까치)
  24. 버날, J., 박정호 옮김, <사회 과학의 역사> (한울)
  25. 민두기 엮음, <일본의 역사> (지식산업사)
  26. P. 두스, 김용덕 옮김, <일본근대사> (지식산업사)
  27. 서울대 동양학연구실 엮음, <강좌 중국사> Ⅰ~Ⅶ (지식산업사)
  28. 후외로, 양재혁 옮김, <중국철학사> 상. 중. 하, (일월서각)
  29. 민두기 엮음, <중국현대사의 구조> (청람)
  30. 강동진 지음, <일본근대사>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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