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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09-06-09 조회수 : 2,865
제 목 : 수인산에 오르며....

수인산에 오르며....

▒▒ 문시형 ▒▒

모두에게 고향을 찾는 일이 나처럼 설레는 가슴이 되는 걸까?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는 것 같다.

손수 운전하여 찾는 것 보다는 버스를 전세 내어 함께 가는 것이 비용으로 보나 그 느낌으로 보나 좋아 보이는 것 같았다.

이런 내 생각은 참으로 소박한 착각이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노라면 그 좁은 버스공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에서 우리 놀이 문화에 대해 묘한 이질감을 느끼곤 했는데, 오늘 함께 한 버스 속에서의 동창들의 놀이는 무어라 할까…….

어째든 나는 내 승용차를 버리고 버스에 올라 맨 뒤 자석에 앉아서 노래하고 날뛰며 춤추는 친구들을 긴긴 시간동안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친구들의 놀이문화가 그다지 탓할 일이 못 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바 있다.

우리 생활 속에서 논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뇌리에 떠오는 것은 좁은 유흥업소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며 노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이 있었던가?

사정이 이러하건 데 뜻 맞는 사람과 허물없이 날뛰며 노는 것을 뉘라서 탓할까?

단지 내가 그런 놀이 문화에 젖어들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인 것이다.

소설가 이병주는 소설 “알렉산드리아”에서 감옥 안에 있는 자신이 사면의 벽으로 갇혀 부자유스러워진 것이 아니라 세상이 사면의 벽에 갇힌 것으로 생각하여 스스로를 자유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버스 뒤 칸에 앉아 그런 놀이 문화에 끼지 못하는 나를 두고, 내가 그들로부터 격리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면의 벽으로 가둔 체 부자유스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보아야만 했다.


김판동 선생님 그리고 정홍률선생님, 우리 동창회하면서 찍은 것이다. 그 정정하시던 은사님께서 병환 중이시라니...


그렇다 하더라도 차에서 내려 유치휴양림에서의 밤 전체를 그렇게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나에게는 감내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내가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을 뚫고 수인산으로 향해야 했는지는 꼭 내 탓만은 아닐 듯싶다.

도시의 앙상한 건물 속에 틀어박혀 살아가는 나로서는 새벽 수인산 산행은 항상 가슴에 담아 두었던 소망이었건만 오늘 나는 이렇게 떠밀리듯 오른다고 생각하니 좀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내가 수인산 산행을 항시 생각하며 가슴에 담아둔 것은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수인산에 대한 자료를 찾아, 하나하나 확인해가며 보고 느끼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그랬다.

“아는 것만큼 볼 수 있고, 볼 수 있는 만큼 느낀다”고. 오늘 수인산 산행은 아는 것이 없으니 보이는 것이 그만큼 작을 것이고 느낌 또한 볼품없을 것이다.

나에 이런 생각은 이 새벽, 거치른 산길을 보다 더 힘들고 답답하게 만들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수인산 산행을 그저 생각만 해왔지, 자료 찾기를 시도 해본 적이 내게는 없다.

그런 내가 이런 생각에 젖는 것 자체가 구차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그러나 비록 답답하고 무거운 발걸음이라 할지라도 수인산 산행을 시작하고서 얼마 가지 않아 까맣게 지워져 갔다.

아는 게 없으니 볼 수 없고, 볼 수 없으니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는 추호도 어긋남이 없다할지라도 나는 내 나름의 느낌 속에 슬프기도 하고, 감격스러운 산행이었기에 오늘 글로 옮겨 보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봄 소품이네, 가을 소풍이네 하여 여러 차례 수인산을 찾았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수인산에 오른 적도 없을뿐더러 성문(城門)에 조차 다다라 본적이 없었다.

어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힘들게 왔지만 수인산은 항상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수인산은 기억 저편의 희미한 먼먼 고향 산천의 하나였던 것을, 내 여동생 명순이가 중학교 다니던 어느 날 수인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 속에서 하나의 환상으로 다가왔다.

수인산 정상이라 했는데 그곳에 갈대숲인지 억새풀 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넓게 펼쳐진 숲을 달려가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가세(家世)가 기울어 부모님을 따라 멀리 제주로 이사 온 나로서는 그 사진으로 인해 더욱더 고쳐지지 않는 병적 환상으로 고착되어 갔다.

실제로 수인산 정상에 오른 것은 그리고도 10년도 더 지나서 이었다.

청년시절 겨울 수인산 산행을 한 적이 있었데, 그때 보았던 내가 유년을 보냈던 오복과 대리의 저녁 무렵의 전경은 지울 수없는 흑백사진으로 내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기억이야 어찌돼건 물에 잠긴 고향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나는 그렇게 수덕이가 있던 시멘트 포장을 따라 걸어갔다.

내 친구 문태훈이는 아직도 어두운 산길을 가겠다고 우기는 내가 은근히 걱정되는지, 계속해서 위험하니 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렇게 태훈이 충고를 뒤로하고 터덜터덜 수인산 성문을 향해 걷는 길가에 수덕이는 참으로 스산한 모습이다.

댐 보상 문제로 몇 푼 더 받아 볼까하고, 목적 없이 만들어 놓은 축사는 이제 그 목적이 다한 것일까 아니면 애초 그랬던 것처럼 목적이 없어 그런 걸까?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참으로 처량하게만 보인다.

그게 그 옆 잘 지어진 별장 같은 건물과 어찌나 대비되는지…….

새벽의 공기가 한층 서늘해지는 것은 그 건물들의 모습에서 진물처럼 우러나오는 내 삶과 내 고향의 추억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여간 등골이 시려지는 것이 아니다.


댐건설로 인한 수물지 보상문제로 마구 지어축사인데, 저 축사 지어서 얼마나 받는지? 뒤 모습만 처량하다.

그런 폐가를 지나면 넓은 주차장과 안내판이 나온다.


이곳도 산과 옛 산성이 있다하니 찾는 이가 있을 법하고, 그들을 위해 친절히 주차장을 만들기는 했는데 주차장이란 것이 포장되어 있지도 않고, 안내판은 무엇을 안내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특히나 이곳에 묵어갈 곳이 마땅치 않으니 나중에 또 찾아야지 하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을 성 싶다.

주차장에서 성문을 향해 가면 큰 사방(砂防) 사업이나 하려는 것처럼 무참하게 파헤쳐지고 있는데, 아마도 규칙 없이 흐르는 물길을 잡아보려는 공사를 하고 있는 듯싶었다.

적어도 공사현장으로 보건데 현대인의 볼썽사나운 자연 파괴 현상을 이곳에서도 여지없이 보여주는 것 같았다.

비오는 날이면 많은 물이 흐를 것이고, 그렇다면 무너지고 쓸려가련만 그것을 두고 보지 못하는 현대인의 기호 탓에 파헤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 아래 피해 줄 민가(民家)가 변변히 있는 것도 아닐진대 왜 이리 못살게 하는지 모르겠다.

시멘트로 뒤번벅이 된 길을 지나 끊긴 산길을 따라 얼마가지 않으면 성문이 나온다.


성문의 모습이나 구조를 살펴보기 전에 나는 막 동 트는 새벽의 여명 속에 나비의 군무(群舞)에 넋을 잃고 바라보아야 했다.

내 삶이 적지 않게 사십을 넘게 살아오면서 이 많은 흰나비 떼는 처음 대하는 것이었다.

장관이다 못해 이런 광경도 있을까 하고 그렇게 한참, 나비떼를 바라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디카로 찰영하였는데 아쉽게도 어둡고, 너무 멀리서 찍은 것인지라 그 많던 나비가 보이지 않아 못내 아쉬움만 남아있다.

수인산성의 첫 관문이었던 남문은 잘 다듬어 쌓은 성돌을 볼 수 있지만 많이 알려진 산성(山城)의 출입문에 비교하면 볼만한 것은 아니다.

흔히 성문이라면 큰 목조건물을 연상할 수 있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런 목조건문을 세웠을만한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자료를 찾아보았더라면 이곳에 번듯한 목조성문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으련만 지금 내 수중엔 흔적을 통해 추측해 볼 수밖에 없는 허접한 혜안만이 있을 뿐이다.



수인산성은 숲에 가려서 전체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그나마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그나마 계절이 신록의 계절인지라 언젠가 겨울에 보았던 복잡하게 널어 서 있던 성들은 숲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산행에서 수인산성의 본 모습을 확인하려는 의도는 접어야 할 듯하다.

그리고 얼마를 지나다 보면 또 다른 성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는데, 출입을 가능하게 만든 성문 흔적을 세 번 거쳐야 비로소 성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수인산 정상이 561m라고 하니, 오르는 길이 가파를 것 같지만 그다지 가파른 길은 없어 산행의 수고로움은 별로 없다.

그 많다던 동백도 성문을 한참 지났건만 보이지 않고,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찔레꽃만 향기를 내뿜어대며, 나의 향수(鄕愁)를 짙게 흔들어놓고 있다. 또 꽃은 얼마나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던지?



요즘 약초라 해서 모두 뽑아갔다는데 이곳에는 지천으로 피어 있다. 수인산의 찔레꽃은 정말 장관이다.

시멘트 포장길을 지나 숲으로 들어온 이후, 한참이나 지났건만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잡목으로 우거진 길은 하늘을 보여주지 않고, 내 눈에 보이는 잡목들의 처절한 생존경쟁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무에게 있어서 햇볕은 생명줄이다. 만일 햇볕에 닫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런 경쟁에서 패배하고서 죽어 나자빠져 썩어가는 나무의 무상함이야…….




하늘이 없는 숲길을 지나노라면 곳곳에 작은 리번을 매달아 놓았는데 그 중에는 어느 어느 산악회 또는 갖가지 광고 등을 매달아 놓아서 인적을 느낄 수 있어, 좋아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 속에 부대기며 살아가는 나로서는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런 리번 속에 산불조심이라고 쓰인 리번도 있는데 그 리번을 단 소방서가 장흥 소방서가 아니라 보성소방서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장흥은 사는 이가 얼마 되지 않아 보성의 소방서를 빌려 쓰고 있나보다 하고, 생각하니 왠지 씁쓸한 기분이다.

내 어릴적 장흥읍내는 별천지로 여길만큼 크고 호화로운 곳이었는데 변변한 소방서 하나 가질 수 없는 작은 규모의 도시라니 참으로 딱한 건, 만들어 간직하여 온 유년의 추억이다.

그렇게 찔레꽃 향연의 길을 지나고 잡목 숲을 지나면 이제 동백나무 숲이 펼쳐진다.

내 아내의 집요한 식물재배 취미는 내 항상 배워야할 집념으로 여기고 있다.

집 여기저기에 핀 꽃들을 볼 때면 내 가슴에도 꽃이 피곤 한다.



그런 내 아내의 화원(花園)에 동백나무가 한 구루가 있었는데 동백나무 잎이 산에서 보았던 동백 잎과 비교할 때 왠지 융기가 없었다.

이런 현상을 내 친구 박일환이는 동백나무는 해안가에 사는 식물이라서 약간의 소금기가 있어야 하는데, 집에서 기르는 동백나무는 소금기가 없어서 그런단다.

그러니 천에 소금을 담아 걸어 두면 잎에서 융기가 날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정말 생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일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그 말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이니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갈 밖에…….

어째 거나 수인산 동백 숲을 걷는 나는, 감동을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내 무슨 시(詩) 쓰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요, 탐탁한 글 쓰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너무 아름답고 좋았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지만 그 융기도는 동백 잎에서는 마치 기름기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내 옷과 발등을 적시는 새벽이슬을 거슬러 올라 동백 숲을 지나면 이내 대나무 숲이 펼쳐진다.



대나무숲. 대나무 숲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대나무숲 길의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
대나무숲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자신 신선쯤으로 착할지도 모른다.

나는 가장 아름다운 숲이 대나무 숲일 것이라고 상상해 왔다.

중국 고서(古書)에 나오는 시(詩)나 산문에 자주 등장하는 대나무 숲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 살던 내가 고향의 모습을 떠올리면, 은은히 떠오르는 고향의 모습은 대나무 숲에 묻혀 있는 마을 모습이었고,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영상으로 남아있기에 그렇다.

산 정상 인근에 이런 대나무 숲이 있다는 사실도 신기로울 뿐더러 그 넓이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한 새벽, 오르지 나 혼자 뿐인 산정(山頂)에서 그것도 대나무 숲을 걷는 나는 분명 하늘 아래 평상인은 아닐 듯싶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대나무 숲을 몇 번이고, 왔다 갔다를 반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지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나고 보니 시멘트 포장길을 지난 이후 볼 수 없었던 숲길의 하늘은 그 대나무 숲에서 트이기 시작했다.

산 정상 구릉지대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계곡에서는 물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아직 노적봉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대나무 숲을 지나고 나서는 쉽사리 그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고, 그만큼 숲은 깊고 길었다.



내 짧은 지식으로는 이곳 수인산성에서는 전쟁다운 전쟁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전쟁이 있을 만한 곳이 못된다.

그저 피난처가 되었으면 되었지 전쟁하기에는 너무나 가파른 산새가 그렇고, 북쪽 국경이 맞닿고 있는 것도 아니니 그렇다.

적들이 쳐들어온다면 왜구들을 말하는 것일 텐데 그들이 이곳 깊은 산속으로 쳐들어오기에는 바다와 접해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동학혁명이라 하지만 동학혁명이 있었던 그 시절에는 동학난(東學亂)이라 했다.

그리고 그 이후 최근까지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부르던 것을 어느 샌가 동학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내가 여기서 동학혁명을 논하는 것은 동학혁명의 역사성이나 정치적 성격을 규명하려는 틈바구니가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에 그 동학의 마지막 사람들이 죽어간 곳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싸움다운 싸움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 동학하던 사람들의 마지막 사연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면 6.25때 몇몇 잔당이 이곳에 찾아 들어, 굶어 죽어간 사연이 고작이라는 사실로 보건데 역사적 의미는 그다지 찾을 만한 것이 없다.

단지 이곳에 서서 바라보는 경치만이 가히 경이로울 뿐이다.

이 높은 산에 보기도 시원한 넓은 구릉지대가 있고, 여기저기 샘이 있다는 사실이 그렇다.

내 동생 명순이가 찍은 그 풀들은 지금 살펴보니 갈대가 아니라 평지에서는 볼 수 있는 그런 억새풀과는 달라 보이지만 억새풀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억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언하여 말 할 수 없지만 억새와 다른 갈대와 유사한 풀도 찾을 수 있다.

그것도 샘 주변에서 자라는 것이 갈대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구릉지대 중앙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 이정표가 하나 서 있는데,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을 다 가리켜 주고 있지 않으니 실망스러웠다.

분명 우거진 숲에 겨울이 되어, 낙엽이지면 다 보일성싶은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이정표는 이를 가리켜 주지 않는다.

분명 수인사 절터가 있는데, 그곳이 어딘지 가늠할 수가 없다.

짐작되는 곳으로 가고 싶기는 한데 이 새벽, 이슬이 털고 찾기에는 만용과 같은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 포기했다.

여러 곳을 가리키고 있는 이정표(里程標) 앞에서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곰곰이 생각해야 보아야만 했다.

이중에 하나를 택하려면 말이다.

분명 가슴 속에 무엇인가, 가득 담고 오기는 했는데 생각하기에 그다지 달갑지 않은 그 무엇이 있기는 분명 있었다.

나는 이정표 앞에 서서 한참을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내려고 애써야 했다.

자명한 답이지만 말이다. 보고 싶되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무엇 말이다.

그러기에 내가 택할 수밖에 없는 곳, 그렇다.

나는 봉수대로 쓰이던 노적봉으로 가야 한다.

그곳이 수인산의 정상이어서가 아니다.

또 그곳이 경치가 좋고 전망이 수려해서도 아니다.

경치가 수려한 곳이야 이곳 어디를 쳐다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없는 이정표 앞에서 서성이다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노적봉으로 걸어가야 했다.

그곳에 오르면 분명 내 고향 오복이 보일 것이다.

청년 시절 노적봉에 올라 바라보던 내 고향 오복마을 집들의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던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곳, 노적봉에 올라야 한다.

그냥 올라서 보기만 하면 되는데, 왜 나는 그 이정표 앞에서 옛일을 기억해내며 망설여야 하는지…….

예상외로 가파른 노적봉에 오르며 생각했다.

어쩔 것인가!

수인산으로 오르기 전에 내 고향 오복이 훤히 보이는 길을 태훈이와 자동차로 달려왔다.

하지만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척 지나쳐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망설여야 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며 그냥 땅만 보고 가파른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내가 산정(山頂)에 올라 본 것은 분명 방향은 같은 곳이되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25년 전에 보았던 그 집도 없고 연기 피어오르던 그 마을도 없었다.

얼른 핸드폰 꺼내들고 내 친구 태훈이게 노적봉에서 어느 쪽을 보면 옛날 그 마을을 볼 수 있는지 물었다.

이제 막 장엄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는데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태훈이 말에 의하면 태양이 뜨는 쪽으로부터 약 45도 방향을 보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이쪽 산등성이 저쪽 산등성이 다시 노적봉으로…….

내가 노적봉을 3번이나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했을 때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막연하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때 왜 찾을 수 없었는지, 그 느낌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리 정신 차려 쳐다본들 보이지 않는 것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는 나는 모른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래도 다시는 이곳에 못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진 몇 장 찍어 내려왔지만 상실(喪失)의 슬픔만 흐느적거릴 뿐이다.

산속에서 나는 내 아내에게 문자를 날렸다. “여보! 아무것도 없어요, 연기 피어오르던 그곳이 없어요”라고.



이곳이 내고향이 훤히 보이는 노적봉인 수인산 정상이다.

2006년 6월 6일 동창회하는 날 수인산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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