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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09-05-13 조회수 : 2,976
제 목 : 강가에 앉아서 4 -- 옻밭골에서 걸어가며 --

강가에 앉아서 4

-- 옻밭골에서 걸어가며 --

내게는 40이 넘어 낳은 딸애가 하나 있다. 이제 우리 나이로 6살인데 이 녀석을 데리고 거리를 걷노라면 횡단보도가 아닌데 건너는 거야고 아빠를 야단치곤 한다. 주택가 이면도로인 까닭에 누구나 보행신호도 무시하고 또 횡단보도가 아닌데도 건너곤 하는것이 내가 사는 동네의 평상시 모습이다.
그런데 내 딸의 눈에는 유치원에서 가르쳐 준대로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는 아빠가 이상한 모양이다. 어른인 나에게 본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아차 싶을 때가 있다.

말이 늦게 터진 탓에 내 아내를 애태우더니 이제는 여느 6살 난 여자아이처럼 말썽도 피고, 어린양도 피며 자란다. 내 아내는 말이 늦어 맘고생 한 탓인지 요즘 무슨 학습지인지, 무엇인지를 시키느라 아이와 씨름을 하곤 한다.
이 녀석도 도시에서 낳고 자란 탓에 수난 아닌 수난을 겪고 있는 셈이다. 요즘 6살 난 아이들이 글도 읽고 또 웬만한 산수 문제도 다 푼다하니 우리 어릴 적 6살 때와 비교하면 천재나 다름없어 보인다.


내가 내 딸애의 나이 또래 일 때 나는 이사를 했다. 큰댁에서 옻밭골로 두 번의 이사 끝에 자리 잡은 삶터이었다. 내 기억으로 6살 때 언제쯤이라고 생각되지만 이사하던 기억은 거의 없다. 단지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런 기억을 되살려 볼 뿐이다.
유년을 이곳에서 보낸 나로서는 옻밭골에서 겪었던 추억이 내 삶을 형성하고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드리워진 영향은 심대한 것이었다.
비록 내가 살아온 삶에 비추어 볼 때 6년이라는 세월은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말이다.
유년의 기억이 무슨 대수냐고 혹자는 이야기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 유년의 추억으로 해서 온 삶의 기저(基底)가 되어 짙게 영향을 주며,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항상 체득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지금 그런 내 유년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호랑이 모습의 뒷산 배 부분에 자리한 마을이라 해서 범 호(虎)자에 배 복(腹)자를 써서 호복동(虎腹洞)이라 부르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부르기 좋게 오복이라고 했다고 한다.

오복은 본 마을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서쪽에는 옻밭골이 있고 동쪽으로 사미동이 자리 잡고 있다. 대리와 오복을 통틀어 오동안이 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오동안의 기원은 사미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것은 나도 잘 모른다.


이곳은 옻밭골인데 다 없어지고 몇가구만 남았다. 2003년 12월

오복에서 옻밭골이 시작되는 곳은 한골양반이라는 택호를 쓰시는 손삼식씨 댁에서 부터이다. 손삼식씨가 이사 가고 이 사람 저 사람이 그 집에서 전전하더니 결국 폐가가 되어 수몰되기 훨씬 전에 없어지고 말았다. 오복과 같은 동성 마을에 손씨가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 마을에 김씨가 두 집이고, 이씨가 아예 없는 마을이라고 말하면 손씨 한 집이 얼마나 신기해할까 싶다. 어찌 어찌하여 옻밭골에 손삼식씨가 살게 되었는지 아는 게 없지만 대리에서 시집 온 손삼식씨 부인 탓에 한골양반이라는 택호가 붙게 되었다.

대리와 오복은 예로부터 한 마을로 인식되어 온 탓에 한마을에서 결혼한 것이라 하여 한골양반이라는 택호가 붙은 것이리라. 이분에게는 홀어머니와 가슴을 멍들게 했던 동생이 한분이 있었는데, 내게는 기억만 애잔할 뿐 말로 무어라 하기에는….

사람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손삼식씨는 지금 경기도 광명시 어디쯤 사신다고 들었다.


손삼식씨 집 앞에서 두 갈래로 길이 나는데 뒷길과 앞길로 나뉜다. 뒷길로 가면 문재숙씨 집이 있고, 앞길로 가면 본격적으로 옻밭골 마을이 시작된다.

그 옻밭골 두 번째 집이 문현보씨 집이다. 문현보씨 아버님은 내게 중백부(伯父)되시는 문문열이신데 이분에 대해서는 오복에서 몇 해 살아본 사람이라면 노래 잘하고 성미 급하시다는 것쯤은 다 안다. 내게는 사촌 형님이신 문현보씨가 사시던 그 집은 마을회관으로 자리 옮겨 사실 때만 하더라도 잘 보전되어 있더니 그 집 버리고 사미동으로 이사 간 이후 금세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현보 형님은 광주에 사시고, 규수형님은 경기도 일산에 터 잡아 잘 살고 있다.


그 다음 집이 해양양반 집이다. 그 작은 집에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씨가 살고 있었다. 해양댁의 그 억척스런 삶을 생각하면 나는 고개를 절로 떨구게 된다. 오복에 유일하게 잡화점포가 있던 곳도 이곳이다.

이런 저런 일로 신비스럽기까지 했던 해양댁은 해양양반 보다 오히려 더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사생활이니 쉬이 말할 수 없어 조심스럽다. 그런 해양양반을 모시고 그런 억척이 아니면 어찌 그 어렵던 생활을 살았을꼬?….

해양 댁에게 진섭이라는 들리지 않는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었는데, 그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고 쓰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부터 35년도 더 이전에 장애아 교육을 시켰던 그 분의 억척을 나는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인간의 숭고함마저 느끼게 된다.
논과 밭이 한 뼘도 없는 살림으로 그 시골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경이롭기조차 하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진섭씨는 우리들에게 그의 의사표현을 글로 대신하곤 하였는데 그 당시로는 신기로운 일이었다.

김진섭씨 2칸의 그 작은 초가집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생성되었던 것은 아마도 그곳이 저녁이면 찾아가는 술이며 주전부리를 판매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리라. 언젠가 잡초 무성한 흉가로 남아 있는 것을 본적이 있었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물어져 없어지고 지금은 모두 타지(他地)로 떠나 진섭씨가 서울 대림동 어디서 일한다고 들은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전부이다.


손삼식씨 집 앞 길은 산 밑인 탓에 비만 오면 무지하게 질퍽거린다. 고무신 신고 지나가기에는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김진섭씨 집과 박씨 제각으로 쓰던 집 사이에는 비가 올 때면 흐르는 조그만 개울이 있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그 개울을 가로 난 옻밭골 길에는 작은 다리 아닌 다리가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오복 앞길에 다리가 없어 비오면 바짓가랑이 걷어 올려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신기하기도 하다. 아마도 제각을 지을 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 동네 실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다리 운운하니까, 머~ 그럴싸한 돌다리쯤으로 상상하겠지만 오복 출신이라면 전혀 그런 다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다리라고는 하지만 적당히 땅을 파서 적당한 돌 올려놓고 흙으로 다진 정도이니 이 글을 읽는 고향 사람이라 해도 기억치못할지도 모르를 일이다.

흔하디 흔한 성씨인 박씨들이지만 대리에는 거의 사는 분이 없고 몇몇 가족만 오복과 사미동에 살고 있었는데, 이 분들이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알고 있지만, 그 집이 정확히 제각인지 아니면 개인 집인지 나는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박씨 제각 집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나는 출입구 부근에 감나무가 생각나는데 그 감나무는 감이 잘 열리지 않는다. 설사 열렸다 하더라도 익기도 전에 다 떨어져 버리는지라 쓸모 있는 감나무는 아니지만 나에게 한없는 부러움으로 바라보던 그런 감나무이다.


그 집은 처음에는 박홍근씨 가족이 사시더니, 오복 다리께로 이사 가고 박봉표씨 가족이 옮겨와 살았다. 박홍근씨 모친 되시는 유동댁은 참으로 말씀하시기를 재미있게 하시던 분이었다. 입담 좋던 유동댁이 손자(孫子)를 업고 한가로이 거니시던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마지막 본 모습이었는데 지금 이 세상 분이 아니시다.
박홍근씨는 일찍이 고향을 등지고 객지로 떠났는데, 내 친구 문향식(행식)이 큰누님과 결혼하여 서울 대림동 어딘가에서 사신다고 들었다. 그런 박홍근씨는 언제가 부인께서 병중이라 하시더니 상처(喪妻)하시고 혼자 되셨다 들었다.
박홍근 동생 박형만씨와 박형동씨가 있는데 박형만씨는 광주에 살고 있고, 박형동은 어디 사는지 나는 잘 모른다. 박형동은 내 어려 같이 어울려 놀기도 해서 지금 어디 사는지 궁금하기도 한데, 내 아직 처지가 척박한지라 찾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여유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동네에는 그 시절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그 시절에 못된 풍습이 하나가 있었다. 그만 그만한 조무래기들이 함께 모여 소먹이와 소꼴을 베러 다니곤 했는데 조금 나이 많은 아이들이 어린 동생들에게 담배피우는 것을 가르치고 또 누가 더 잘 피우는지 시합을 시키곤 했다.
그런 무리 중에 하나인 나도 아버님께서 외출 때 피우려고 양복 안 호주머니에 감추어둔 고급 담배를 몰래 빼 피우거나 선배들에게 갖다 주곤 했다. 지금에 와서 그런 못된 추억이 무어라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최근 언젠가 모임에서 박형동을 보았는데 그 때 배운 담배를 여태껏 피우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오복 출신들 중에 초등학교 때 배운 담배를 여태껏 피우는 경우를 여럿 보았다. “형동아! 여태껏 담배 피우는 것은 아니겠지? 만일 피운다면 이제 그만 피우는 것이….”


박홍근씨 가족이 언제 이사를 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사를 가고 오복 본 마을에 살던 박봉표씨 가족이 박씨 제각 집으로 이사를 왔다. 박봉표씨 아버지 군산 양반의 근면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 가족에게는 아들이 많아 다복한 집안인데 박봉표씨의 술 마신 후의 기행들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입방아에 오르곤 한다.
표자 돌림으로 승표, 삼표, 영표 등 이 집 아들은 모두 수도권에서 산다고 들어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어디 사는지 잘 모른다.
그리고 딸 하나가 있는데 아마 종숙(?)씨라 했는데 초등학교 다닐 적 말고는 아는게 없다.


나는 감나무만 보면 설음이 밀려온다. 유난히 감나무에 대한 추억이 많은 까닭이다.

그 다음 집은 문재구씨 집이 맞대어 있다. 문재구씨 아버님은 나에게 7촌 당숙 되시는 분으로 안촌양반이라는 택호를 쓰셨다. 7촌이라 하니 엄청나게 멀어 보이는 촌수로 보이지만 그 시절 동성(同姓)촌인 우리네 마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8촌 관계이지만 일가(一家)라 하여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었다.

안촌댁은 일찍이 저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그분의 진도 아리랑은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한 가락이다. 끝도 없이, 한 없이 이어지는 그분의 진도아리랑은 아마도 오복에서 삶을 보낸 어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일 것이다.

그리도 흥겹고 정겨운 진도아리랑의 가락과 목소리와는 달리 이분들에게는 뇌성마비로 몸을 쓰지 못하는 딸이 하나 있었다. 나보다는 한 살 위인 집안 누나인 셈이다. 내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집 앞을 지나칠 때면 계순이 누나는 큰 눈과 정겨운 목소리로 나를 부르곤 했다.
어른들이 들에 일하러 가면 혼자 집에 있어야 하는 누나는 얼마나 심심했을까? 그러나 인내심과 배려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인 나는 그곳에 결코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렇듯 지금도 모습은 다 지워져서 알 수 없지만 심심해 부르던 “시형아! 이리와 놀고 가.” 말만은 그래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된다.

집안 형님 되시는 재구형님 집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어릴 적 발갛게 익은 감의 유혹으로 저녁이면 혹은 지켜보는 눈이 없으면 탐내어, 훔치다 들켜 혼나던 기억이 많았다.

수몰되기 직전까지 그 집을 지키시던 안촌양반은 장남인 재구형님댁으로 가셨다고 들었다. 재구형님은 장흥읍내 어딘가에 터 잡아 살며, 경찰에 몸담고 계신다. 이집의 막내는 광주 어딘가에 산다고 들었는데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다.


문재구씨 집을 지나면 맞대어 고길옥씨 가족이 사는 집이다. 나로서는 본관이 어딘지 알지 못하는 고씨 집안이다. 이 집은 워낙 일찍 모두가 고향을 떠나는 바람에 내게는 아는 게 별로 없다.
고길옥씨라 하지만 나에게는 1년 선배요, 경기도 어디쯤 산다는 소리만 건너 건너서 들었기에 이름만 안다고 할밖에 없다. 나보다는 상당히 나이차이가 많은 장남이 있었고, 2살인가 3살인가 터울로 남동생이 있고, 그 아래가 길례라든가 하는 딸과 그 아래 딸인 길남 그 다음 딸인 길옥이 있었다.
참으로 한심한 건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라는 것이다. 단 한집 밖에 없는 고씨인데도 택호는 무어라 불렀는지, 언제 어떤 연유로 이 마을로 들어와 살았는지 나로서는 전혀 아는바가 없다.
언제 한번 길옥씨 만나면 물어 보아야겠다. 그 집에는 고염(먹감)나무가 있었는데 수몰되기 한참 전에 없어지고 집터만 그곳에 자리하고 있더니, 이제는 그 가족처럼 흔적조차 알아 볼 수 없다.


그 다음집이 문재팔씨 집이다. 재팔씨의 부모님은 수원양반이라는 택호를 쓰셨고 아시는 분들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분 성품은 한 성격하시던 분이시다. 사람 좋고 입담 좋은 수원댁은 자식이 많아 4남2여를 두었는데 워낙 일찍 장남이 객지로 떠난 탓에 나는 그 분 이름도 잘 모를뿐더러 집안 형님이시니 그 형수님 또한 알만한데도 아직도 그 형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서울 도봉구 어디 쯤 사신다고 들었는데 그 이상은 알지 못한다.

둘째 아드님은 하도 어려서 본 기억이 전부지만 영리하여 공부 잘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한밤에 사라진 이후 경찰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러던 어느 때 쯤 인가 예쁜 따님이 할머니 품에서 자라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 딸은 참으로 예쁘고 이름 또한 예뻤는데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 형님은 경기도 어느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셋째 재천이 형님, 그 다음이 나와 추억이 잔잔한 재팔 형님이다. 그 아래 복 많을 것 같은 두 딸 영옥씨와 영남씨는 경기도에서 각각 잘살고 있다고 들었다.
문제는 넷째 아들 재팔씨 이다. 나이 들어 장가들었다더니 요즘 수원에서 좋다던 술 줄이고 자식 낳고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고향에 묻혀 산 탓에 대도시에 잘 적응할까 싶었는데 최근 몇 번 만나보니 잘 적응하여 삶을 영위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언제 다시 만나면 술 한잔하자 해야겠다.

재팔씨 가족이 사미동으로 옮겨가고, 광주에 살다 이사 온 박씨 집안사람이 살았는데 내 개인적으로는 사돈되는 관계이지만 아는 게 없다. 그래도 이 집은 수몰되지 전까지 그 자리를 지키다 사라진 집이다.


재팔씨 집을 끝으로 옻밭골 마을은 200m의 사이를 두고 있었다. 재팔씨 집 출입구를 지나자마자 위쪽 논에서 흐르는 물이 옻밭골 길을 가로지르는데 이게 항상 문제였다.

어른들에게는 하등에 문제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어린 나에게는 건너기가 만만치 않았던 탓이다. 저 만치 도움닫기를 하여 펄쩍 뛰어야 간신히 넘어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운 나쁘면 그만 물에 빠져야 지날 수 있었다.
그게 여름이면 몰라도 가을에는 여간 싫은 일이 아니었다.

추운 겨울날 얼음이 녹거나 비오는 날이면 이 길은 걷는다는 것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위아래 논이 있어서 항상 젖어 있는 탓인데 그래서 지나는 사람들은 그런 날이면 옻밭골 뒷길을 이용하곤 했다.
지대가 높은 뒷길은 손삼식씨 집을 기점으로 갈라져서 문재숙씨 집으로 가는 길을 따라 나 있었다.


문재숙씨 부모님은 봉골 양반이라는 택호를 쓰셨는데 이 집은 종갓집으로 식구가 많았다. 하얀 수염이 길게 늘어뜨리고 다니시는 할아버지 한분이 계셨는데 장난기가 많은 분이셨다.
이 분이 지나다가 어린 사내아이를 볼라치면 눈을 부라리며 갑자기 “이놈! 봉알까분다!”하곤 했는데, 우리 조무래기들은 그만 자지러지며 도망쳤었다.
이 분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어지간히 뒤 ?아 오곤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 때만큼 무서워했던 기억이 없다. 정말이지 무섭고 무서웠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 할아버지가 가물가물 보일만치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는데도, 마치 독수리가 하늘에서 빙빙 돌때면 병아리 숨듯 우리는 모두는 집으로 숨어들었다.
하얀 옷, 그리고 하얀 긴 수염과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그 분을 떠올리면 지금도 서늘해진다. 돌아가신 선조모(先祖母)님께서 들려주신 바에 의하면 우리네 부모님들도 또한 어릴 적에 무서워했단다 하신다.
그리도 무서웠던 그 어르신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저 세상분이 되고, 그 진한 기억만 아로새겨 놓았다.

그 할아버지의 아들인, 집안에 아저씨뻘 되시는 봉골양반께서는 아들 둘에 딸 넷을 두셨는데 큰 아들은 마지막까지 고향을 지키셨다. 종교에 심취하여 사시곤 했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터 잡아 사시는지 잘 모른다.
옛날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 이야기하시기를 좋아 하셨는데 지금 어찌 사시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재숙씨는 나와는 나이 차이 많이나는 집안 형님이어서 인지, 내 아는 바가 없다. 어디 사는지도 잘 모를뿐더러 어릴 적 이후 소식도 들은 바가 없다.

그리고 그 아래 넷 딸이 있는데 큰딸이 길님씨, 덕님씨, 그 다음이 미숙씨이다. 막내인 경미씨는 언젠가 몇 번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집 뒷산 아래, 언덕 위에는 무덤이 여럿 있어서 의시시 할뿐 아니라 마을과 떨어져, 떨렁 집 한가구만 있어서 왠지 낯설어 보인 집이기도 했다. 집 둘레에 탱자나무로 둘러쳐져 있는 것도 그렇고 그 집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다는 점 또한 나를 그런 느낌으로 이끈다.
작약 꽃이 피어있고 감나무 많은 집이었다는 사실만이 그저 아련할 뿐이다.


옻밭골 앞길과 뒷길이 만나 하나가 되어 이어지다가 비오면 흐르는 개울을 지나면 3칸의 작은 집 한 체가 있다. 여기서부터 4가구의 집들이 이어지다가 조금 지나서 문씨 제각으로 옻밭골은 끝이 난다.
나란히 4가구의 집들이 내 유년의 시작이자 끝이고 나로 하여금 이글을 쓰게 만든 동인(動因)인 것이다. 수몰되기 직전에 고향을 찾았을 때 4가구 중에 오르지 한가구만이 최후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때는 4가구 조무래기들이 모이면 제법 많아서 많은 기억을 만들 수 있었다. 4가구 중에 첫 번째 집은 처음에 문말열씨로서 진산양반이라는 택호를 쓰시는 예바르고 똑똑하신 분이 자리 잡은 집이다.
이 분은 옻밭골 우물인 샘을 파고서는 얼마 되지 않아 월암리로 떠나시는 바람에 기억나는 것이 없다. 단지 성남에 사셨는데 지금은 이 세상 분이 아니시란다.


그리고 용산댁이라는 택호를 쓰시는 머리칼이 일찍 희고, 곱게 머리 빗어 올려 머리에 비녀를 꽂은 단정해 보이던, 혼자된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 분에겐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첫째 딸은 일찍 고향을 떠나 살았던 까닭에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둘째 딸 문자님씨인데 나와는 한 살 위의 선배였고 같은 문가(文家)인 탓에 한 집안인 셈이다. 그리고 막내아들 창영씨가 있는데, 얼마 전 서울 상가(喪家)집에서 만났는데 인쇄회사 중역이 되어 있었다.

한 많은 용산댁 집은 지나던 동네 사람들이 자주 들리는 명소이기도 했다. 아마도 사람 좋은 탓이리라. 큰 딸네 집으로 옮겨 살다가 둘째 딸집에서 사신다 들었는데 돌아가셨다고 하신다.
기회 되면 꼭 한번 찾아뵙고자 했는데 결국 어릴 적에 본 것이 전부가 되고 말았다.

이 집은 언제 어떻게 없어져 버렸는지 나는 모른다. 언젠가 잠시 고향에 들렸는데 어릴 적에 보던 그 집 모습만 떠오를 뿐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용산댁 집 다음에는 조그만 텃밭이 있고, 그 다음이 작골양반이라는 택호를 쓰시는 박씨 집안사람이 사는 집이 있었다.
얼마나 어릴 적 기억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집 짓던 기억은 흐트러져 다시는 맞출 수 없는 퍼즐처럼 헝클진 기억 속에 편린(片鱗)으로 남아 아른 거리곤 한다.
분명하게 기억되는 건, 오복의 다른 집과는 달리 이 집은 돌을 쌓아 만든 집이 아니라 흙벽돌로 쌓아 지은 집이었다는 기억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확한지는 그 집이 없어 확인 할 길이 없다.
초가집이라 하지만 제법 큰 집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 또한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작골양반의 함자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의 장남인 박인례씨 아버지는 항상 집에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번은 박인례씨 새 어머니가 애 낳고 잠시 살다가 떠난 기억은 있지만 인례 아버지는 모습마저도 전혀 기억에 없다.

병치레 심했던 인례씨 언니 되는 인숙씨는 그 시절이지만 팔뚝만한 주사를 꽂고 있던 모습이 기억나는 것으로 보아 큰 병을 앓았던 것 같다.

작골댁은 작은 아들이 잠시 집에 살기는 했지만 금세 어디론가 사라지고 손자들과 농사 지며 살았다. 작골댁 부부와 몇 살인지 나로서는 기억할 수 없는 인숙씨와 인례씨 그리고 그 아래 동생 형대씨가 평상시 이 집 식구의 전부였다.

작골댁은 약손이라 하여 소문이 자자했다. 배 아픈 사람은 이 분이 배를 쓰다듬어 주시면 금방 나곤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내 옆집 문동진씨가 배가 아파서 작골댁을 찾았는데 동진씨 배를 쓰다듬다가 채한 것 같으니 토해야 할 것 같다며 중얼거리시더니 진짜로 동진씨를 쓰다듬어서 토하게 만드는 것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어린 내 눈에 그런 손은 마법의 손이나 다름없었다.

인례씨는 나와는 동갑이고 학교를 5년간이 같이 다니던 친했다면 가장 친했을 또래였다. 거칠고 부잡했던 어릴 적 나는 무척이나 인례씨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는데 그래도 내가 가장 많이 어울린 유년의 친구였다.
내가 내 딸들에게 어릴 적 이야기를 해 줄때면 으레 인례씨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곤 한다. 지금도 내게는 유년을 생각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인례씨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말에 전학을 가고 난 이후 한 번도 인례씨를 본적이 없다.
지금은 어엿이 자라 어른이 되어, 아들딸을 낳았어도 이제 대학생은 되었을 나이일 텐데, 지금이라도 한번 볼 수 없을 거나?

어느 7월 칠석날 인례집 마당에 멍석 깔아놓고 뉘어 솥뚜껑 뒤집어 구어 낸 지짐이를 먹으며 보았던 그 하늘에 은하수가 지금도 한없이 보고만 싶다.


그때 보았던 그 호박꽃, 나팔꽃은 아니지만 나팔꽃, 호박꽃만 보면 그때 그 호박꽃, 나팔꽃이 생각....

일부러 심은 것인지 아니면 절로 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작골댁 텃밭 울타리에 나팔꽃, 호박꽃들이 여름이면 항상 만발하였는데, 지금이라도 찾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작골댁 집 앞에는 어느 해인지 알 수는 없지만 땅벌이 제법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부잡한 옻밭골 악동이었던 나는 누군가가 땅벌을 피해 살금살금 지날 때면 땅벌 집을 살짝 건드리고 쏜살같이 달아나곤 했는데 그럴때면 엉뚱하게도 땅벌들이 지나던 사람들에게 몰려가 쏘아대곤 했다. 물론 지나던 어른들에게 그 댓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지만 말이다.
아마 이때 인례는 셀 수 없이 벌 세례를 받곤 했을 것이다.

이 집에 겨울쯤이면 머리칼을 길게 땋다 내린 소년이 찾아오곤 했다. 조선시대에나 있을 법한 차림으로 찾아오는 소년이 작골댁 식구와 무슨 관계인지 알지 못하지만 참으로 야릇했다.
내가 초등하교 시절이니 그는 아마도 청소년 쯤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한번 찾아오면,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는지 누군가 데리려오면 안가겠다고 떼쓰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지금 소년이 누구이며, 왜 그런 차림을 하고 살았는지 알고 싶어진다.
또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살고 있는지도 무척이나 궁금하다.

작골댁 식구들은 오복 떠난 이후 한 번도 그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고, 그 이후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다시 찾았을 때는 작골댁 식구들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장흥에서 새로 이사 온 안씨 성(姓)을 가진 가족이 살고 있었다.
안씨 집안 또한 얼마 살지 않고 떠나 빈 집으로 있다가 허물어져 버렸다.


그 다음 집이 가는 잔가지로 만든 울타리로 맞대어진 집이 우리 집이다. 옻밭골 우리 집은 어디선가 헌집 나무 자재를 가져와 내 외할아버지께서 지은 3칸짜리 초가집이었다.
내 어머니는 오막살이나 다름없는 그 집이 그래도 내 집 이어서 한없이 좋았다 한다. 그 집이 언제 없어졌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10년도 넘기지 못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내 어머니의 희망이자 꿈이었던 그 집이 내게는 지금 눈에 그려지는 지워지지 않는 빛바랜 사진일지언정 생생히 남아있다.

장마철 계속해서 비가 올라치면 부엌 아궁이에 물이 차올라 아궁이 바닥에 큰 돌을 집어넣고 밥을 지어야 하고, 울타리 하나 변변치 않아 삶캥이 닭장 서리로 가슴앓이를 해야 했던 그런 초라한 집이었다.

내 어머니는 지금도 그렇지만 화단에 국화와 키다리꽃 가득 심어 활짝 핀 꽃을 보며 허기를 잊곤 했던 그런 집인 것이다. 내 어머니의 그런 고상한 취미는 이웃들의 눈에는 한심해 보이는 헛배 부른 행위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끼니를 때우는 것조차 힘겨운 살림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런 고상한 취미가 어떻게 보였을까를 넉넉히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기에 그렇다. 그런 우리 집이지만 10년도 되지 않아 없어져 버리고, 작골댁 집과 우리집 자리는 대나무 밭이되어 있었다.

솔직히 내 집 이야기를 내손으로 쓴다는 사실이 좀 멋쩍은 일이고 보니, 가능하다면 다음에 기회가 있어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집 앞에는 4가구 사람들이 힘을 모아 판 우물이 하나 있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썩 좋은 우물은 아니었다고들 한다. 이 우물에 형대씨가 빠져 큰일 날 뻔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등골 오싹하다.

우리 집과 조그만 텃밭이 있고, 그 옆에 제법 큰 4칸짜리 집이 문동훈씨 집이다. 문동훈씨 아버님 되시는 분은 일찍이 저 세상으로 가신 오동양반이라는 택호를 쓰시는 분이시다.
이분에 대해서는 단지 돌아가시어 장사 지내던 기억과 논농사로 발가락 사이에 습진이 생겨서 마루에 앉아 있으실 때는 담배가루를 발가락 사이에 넣고 계시는 모습이 전부다.

오동댁은 대리에서 시집을 와서 인지 그런 택호를 갖게 되었는데 워낙에 말이 없으시고 바느질 잘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동네 행사 때에 바느질은 늘 이 분이 맡아 하시는 모습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이 분들은 아들 넷에 딸이 둘을 두었다. 장남인 동훈씨, 동영(?)씨, 동화씨, 동진씨가 있었다. 첫째인지 둘째 아들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파월 장병이라 하여 집안 큰 걱정거리였던 기억이 난다.
나와 한 살 아래인 동진씨는 항상 같이 지내던 동네 악동들의 일원이었다. 좀 소심한 탓에 나의 부잡하고 거칠른 행동에 항상 저만치 뒤에 서 있곤 했었다.

얼마 전 이 집 장남은 큰 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뜨셨다는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분에 대한 어릴 적에 느낀 기억은 여간 용감한 분이 아니었던 듯하다.
조무래기들의 영웅이었는데 그 유래는 아무래도 이웃 동네 청년들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기행(奇行)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이웃에 사시는 분이어서 기억에 담아둔 게 많지만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누가 될까 두려워 그만 두련다.


작골댁 뛰 뜰에는 감이 열지 않는 감나무가 한 구루가 있었는데 늦봄 감꽃(우리는 감꽃을 감똥이라 했다) 줍는 재미가 쏠쏠한 기억이 난다.
떨어진 감꽃을 주어 낌지에 가지런히 끼어서 목어 걸고 하나씩 따먹는 재미란 그때 아니고서는 다시는 느낄 수 없는 재미다. 언제가 한번 다시 먹어 보았는데 떫고 쓰디쓴 맛이 영 아니다 싶었다.
그보다는 아무래도 동진씨 뒤뜰에 있는 밤나무에 대한 추억이 한층 가슴 속에서 응얼거린다. 동진씨 손위 누이인 기숙씨는 어릴 적 기억이지만 샘이 많았던 듯하다.
어릴 적 내 생각으로는 직접 뒤뜰에 심은 밤나무라 해도 알밤으로 저절로 떨어진 밤은 주워가도 될 성싶은데 자기네 밤나무에서 떨어진 것이니 가져가지 마란다.
몰래 주워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 빼앗아 가곤 했는데, 이런 기억은 하도 어릴 적 기억이라 실제로 그런 기억의 주인공이 기숙씨인지는 정확타 말하기는 어렵다.

추억 많은 이웃집 고모뻘 되는 분이지만 어릴 적에 초등학교 때 말고는 만난 적도 없고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다.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사시는지 궁금도 하다.
이 집에 딸을 둘 두었다, 말했지만 기숙씨 위에 첫째 딸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 어떻게 고향을 떠났는지 그저 백지처럼 텅 비어 있다.
막내 동진씨와 장남 동훈씨 말고는 다른 아들들 또한 통 소식을 접하지 못해서 아는 바가 없다.

동훈씨 집 뒤쪽으로 몇 개 무덤이 있고 그 옆으로 조금 올라가면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낭간 중간쯤에 조그만 항아리가 뚜껑이 덥힌 체 올려 져 있었다.
이를 두고 어른들은 우리 조무래기들에게 그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면 눈이 멀어진다고 겁을 주었다. 그 소리 듣고, 나를 비롯하여 옻밭골 아이들은 그 항아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궁금하기 그지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서워서 감히 열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속에 뱀이 있다거나 귀신을 가두어 두었다거나 혹은 아기 시체를 넣어 두었다는 등 갖가지 추측을 하며 그곳을 지날 때마다 무서워 진저치곤 했다. 사실 지금도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언제 오동댁을 찾아 뵐일 있으면 꼭 여쭈어 보아야겠다. (오동댁은 내게는 할머니뻘 되시는 분이시다)


동훈씨 집을 지나 100여 미터를 당보 쪽으로 가다보면 뒷산 자락에 문씨 제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법 고풍스런 건물로서 오복을 대표하는 건물이었다.
내 알기로는 2백년이 넘는 집으로 내 놓을만한 자랑거리는 되지 못해도, 그래도 이런 건물도 있다며 은근히 꺼내 이야기 해볼 만한 건물이었는데 멀쩡한 건물을 헐어버리고 현대식 건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풍스런 건물도 아닌 이상한 건물로 바뀌어 버렸다.


내 연륜이 작아 꺼내기 조심스럽지만 나름으로는 이곳저곳 보고 느낀 것이 많다할 것이다.
언젠가 안동과 봉화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과 내 고향을 비교해 보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초래하던지, 나 아닌 누구라도 그리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누구 하나 내 놓을 만한 인물이 있는 것도 아니요, 만들어서 라도 불천위 제사 지낼 조상이 있을 법한데 내 고향 사람, 그런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옛날도 그렇지만 지금도 내세울 만한 인물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터 좋아 출중한 인물 배출할 명당(明堂)도 아니요, 경치 수려해서 타지(他地) 사람 끌어 들릴 만한 곳도 못된다.
내 비록 자랑스럽게 들어 내놓고 이야기는 하지만 자부심을 가질 만한 특별한 무엇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닐성싶다.


그렇듯 보잘 것 없는 마을이어서 내세울 만 특별한 무엇을 찾노라면 부딪치게 되는 것이 자료 수집일 텐데, 나도 고향을 지키고 살아온 터가 아니어서 누구에게 무엇이 있고,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야 할 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 살 수 밖에 없는 처지로 만용(蠻勇)에 가까운 용기 내어 자료를 찾아 나설 요량이 아니라면 그냥 모른 체 돌아설 수밖에…. 연유가 그러한 까닭에 내가 고향 앞에 서면 떠날 줄 모르고 서 있기는 하되 작아지는 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오복의 입향조(入鄕調)는 조선 선조 때 의병활동을 하신 분으로 강성서원에 제향되신 풍암(楓庵) 문위세(文緯世)의 셋째 아들인 형자(字)개자(者)(亨凱)를 쓰시는 분이시다. 내게는 13대조이신데 그 분으로 하여 오동안에는 문씨의 동성(同姓) 촌이나 다름없는 마을이 된 이유가 된다.
이 분 아들들이 대과(大科)에는 이르지는 못했어도 진사시에 이르러, 고을 현감을 지낸 두 분이 있어서 세(勢)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옻밭골 마지막 집인 문씨 제각은 바로 이 분을 제사(祭祀)지내기 위한 곳이다.
제사 말고도 제각(祭閣)은 서당(書堂)으로 쓰기도 하고 문씨들이 회의장으로 쓰기도 하던 곳이다.

이곳만 생각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마루 뒤쪽에 큰 항아리가 있고, 사람들은 마루에 서서 이 항아리에 길게 소변을 보곤 했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을 그래왔는지 그 악취가 대단한 것이었다. 기억할 게 없어 소변 악취일까 싶어 좀 머쓱해지기는 하지만 내 뇌리에 틀어박힌 이 기억은 점점 생생해 질뿐이다.

박기석씨라는 분이 제각을 지키며 살고 있었는데, 이 분 혹시 판소리 명창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술 한잔 거나한 기석씨는 뒤춤에 담뱃대 끼우고서 판소리를 불러대며 옻밭골을 지나 제각(祭閣)으로 돌아가곤 했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판소리 잘하면 명인이라 하여 대접받은 예인(藝人)이지만 그 시절에는 돈벌이 안 되고 천시되는 그런 직업이 아니었던가? 그런 까닭에 이곳 제각까지 흘러 들어온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동네 상여(喪輿) 나가던 날, 만가(輓歌)는 이 분이 도맡아 했는데, 지금도 그 만가(輓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어려 들었던 만가(輓歌)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던 기석씨가 저 세상 사람 되고, 그에 아들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 아들 되시는 분이 만가(輓歌)나 판소리하던 것을 듣지 못했다. 아마도 판소리는 뒤를 이을만한 것이 되지 못할 것으로 판단되어 그만 둔 모양이다.

박기석씨와 그 아들 말고도 제각(祭閣)에 잠시 기거(寄居)하던 사람은 또 있다. 덕수씨가 그 장본인인데, 덕수씨가 제각 지키던 분들과 무슨 관계인지 알지 못하지만 겨울철이면 찾아와서 바람처럼 사라지던 사람이다.
어느 해에는 여자 한사람을 데리고 와서는 빨간 마후라를 그리도 즐겁게 부르며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곤 하더니, 덕수씨 먼저 사라지고 얼마 안 있어, 그 여자마저 사라져 갔다. 약간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들로서 어린 우리에게는 신비로운 사람들이었다. 어린 내 기억 속에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묘하게 잊히지 않는 영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내가 기억하여 간직해 온 유년의 고향을 그림 그리듯 펼쳐 놓았는데 이런 기억들은 내 개인적인 추억이기에 정확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일일이 확인하여 써야 맞을 일이지만 이는 내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분도 있을뿐더러 설사 살아계신다 하더라도 연락이 닿지 않아 물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차피 정확성을 기하여 쓴 기록물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럴 의도로 쓰인 글도 아니다.
단지 없어진 고향에 대한 추억의 단서를 제공하는데 그치고자 한다.

만일 이 글로 해서 의도한 것은 아니나 누(累)가 되었다면 용서를 구하며, 사과(謝過)를 드립니다. 혹시나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서 수정되어야 할 내용이나 추가하여야 할 내용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2006년 12월 25일 성단절 날, 남녁 하늘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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