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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09-05-13 조회수 : 3,212
제 목 : 소치마을 후기....

수산모와 함께한 일들…….
 

 간혹 이러 저리한 주민들이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몰아붙이는 일이 있을 때면
분명 심하게 야단을 맞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야단맞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을 때가 있다.
 분명 무어라했으면 하등의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이유에 걸맞게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건만
 일방적으로 수세적인 위치가 되어 이유 없는 샌드백이 되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비단 이런 일들이 나만의 일일까?
 모르긴 해도 다른 관리사무소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관리소장이란 직책이 흔히들 전문사무직이라고 분류하는 이도 있다.
 물론 맞는 분류이다.
 그럼에도 전문직이 아니라 잡다한 사무에다
 일부 입주민의 분풀이 대상이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과연 그럴까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리치이고 저리치이고
 이게 관리소장이란 직업이라면 보람과 자아실현이라는 인간으로서
 지극히 바람직한 직업상에 끼워 맞추기란 억지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관리소장은 전문직 종사자란 사명의식을 가지려면 어떨까?
 이점에 대해 각자 생각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고 태도도 각각 다를 것이기에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그 자체 스트레스다.


 

 그런 점에서 수산모와 같은 여가생활은 그런 직업인으로서 탈출구라면
 누가 머랄 수 없는 현상이다.
 어느 관리소장님 치고, 과거 쓴맛 단맛 안 본, 그런 소장님은 거의 없다.
 적어도 내가 볼 때 대부분 그렇다.
 하여 사람들은 소장님치고 안 똑똑한 사람 없고,
 소장님을 상대로 한 그 어떤 논쟁도 만만치 않으며,
 또 뒷말이 많지만 그 뒤말 또한 옳지 않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문제는 그런 잘못된 문제들을 나서서 해결하려고 선뜻 나서는 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실패한 사람에게 또 다른 실패는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참혹한 것이어서
 다시 경험한다는 것은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나서서 실패할지도 모를 일을 총대매고 참여할 소장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잘못된 것 같으니 말은 하지만
 그것을 해결할만한 용기까지는 없는 것이 과거 경험으로 얻은 자기보전 법칙이라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사회가 요즘 들어 두 편으로 나누어 대립만 했지,
 서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상대편이 주장하면
 다른 편은 옳은 것이든 틀린 것이든 가리지 않고 무조건 반대한다고들 한다.
 점점 골이 깊어지는 갈등만 고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것 또한 다르지 않다.
 우리네 관리소장 사회에서도 그런 점이 발견되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이런 복잡한 일들 다 버리고 떠나는 것 중에 여행만한 것이 또 있을까?
이번 수산모 가족 패키지여행은 그런 점에서 나에게 있어서 거절하기에는 간절한 유혹이었다.
우리 협회 안에 많은 친목 동우회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접하여 참여하기에는 용기와 희생이 필요하다.
내 개인적으로는 도회와 연관되어 접해야 하는 일이 종종 있어서 정대장님과 교류하여야 할 일이 있는데,
“정자홍국장님”, 그때마다 수산모 산행에 동행하자고 제안해오곤 했지만,
매월 첫째 주, 토요일은 행사가 있어 참석할 수 없는 피치 못할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탓도 있어서
응하지 못해 오던 차였다.
강홍구 소장님의 권유도 있고 정대장님의 유혹도 있고 해서 선뜻 나서기는 했는데,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여행 중에는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일정을 가만히 살펴보니 아마도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듯하여
별 갈등 없이 따라 나서기는 했는데
그런 나에 소박한 생각은 신앙인으로서 죄인이 되고 말았다.
단지 신앙인으로서 신앙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내 감정에 충실할 것인지
갈등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내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잘 알고 있으니 하고….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고등학생만큼 할 일 많을까!
아마도 모두가 그리 느낄 것이다.
나에겐 딸이 셋인데 그 중에 둘이 고등학생이다.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함수이니 당연히 한 가족 모두가 함께하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나 혼자가기는 좀 머하고,
막내 데리고 여행이랄 만한 기억도 없는 터에 잘됐다 싶어,
막내만 달랑 데리고 떠난 여행이 바로 수산모 가족 패키지여행이었다.
근데 새벽이나 다름없는 출발 시간부터가 나에게 만만치 않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 잠 많은 나는 새벽부터 부산떨며 일어나,
막내딸 억지로 깨우고,
겨우 도착하여 간신히 차에 오르니,
이건 여행이 아니라 꼭 ?기는 피난살이 떠나는 행렬 같아 보였다.
버스 안에서의 낯선 얼굴은 또 얼마나 부담스럽던지.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지 않아,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분들의 얼굴만 기억날 뿐 어느 분이 소장님인지,
가족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간다.
이 부분은 진행하시는 분의 불찰은 아닐까???? 
적지 않은 차량의 지루함 속에 겨우 겨우 도착한 소치분교.
누군가가 그랬다. “역시 사진이 더 멋있어”
출발에 앞서 얼마나 많은 기대를 했는지를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성 싶다.
상상과는 약간 다를 수 있을지 몰라도 오지에 오지인 소치분교는 참으로 편안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비는 왔다 말았다했건만 부산하게 움직여 만든 닭백숙, 어쩌면 그렇게 맛있을까?
특히 이 여행을 위해 애쓴 최재남 소장님 부부의 노고로
우리는 맛있고 편안한 점심과 저녁을 먹을 수 있어,
이 부부의 노고에 새삼 감사를 드린다.
이제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노는 것이다.
각자 입맛 데로 노는 것인데,
기대에 부풀어 송이버섯 따러 가려는 사람,
산삼 찾으려가겠다며 객기에 가까운 의기를 부리는 사람,
개천에 있는 물고기, 다 잡을 요량으로 준비로 부산한 사람.
하지만 정작 우리에겐 물고기를 잡을 어떤 연장도 없고,
송이버섯에 대한 사전 지식도,
산삼이 어떤 것이고 어떤 곳에 잘 자생하는지 하는 사전 지식도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남이 보관하던 투망을 허락 없이 꺼내들고 물고기 잡는다던
투기어린 행위도 결국엔 야단맞는 것으로 끝을 맺고,
우리는 대책 없이 일부는 산으로 올라가고,
일부는 이제야 투망 구한다하여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가고,
단지 아이들만 신이나 강을 독차지하고 물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산행도, 물고기 잡이도 관심 없는 것처럼 어슬렁이던 점잖은 사장님 혹은 협회 전임 고위간부님들,
그도 잠시 체면이고 머고 없이 물장난에 빠져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가지 않았다.
모모 부인께서는 이 상황에 가만히 있을 리 없고,
물통가지고 체면치레하는 사람들에게 사정없이 뿌려대는 통에 너나할 것 없이 물에 뛰어들어 천하 없이 
모두가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송이버섯 따러 혹은 산삼 찾으러간 분들 소득이란 게,
 의기와 상관없이 고작 더덕 몇 뿌리,
 산도라지 몇 뿌리가 전부였다.
 산삼 캐고 송이버섯 따겠다던 그 의기 어디 갔느냐고 누구 한사람 나무랄 것도 같은데,
 그런 사람 하나 없이, 산행하던 사람,
 물놀이 하던 사람 할 것 없이 뒤엉켜 물놀이 뿐이다.
 물놀이야 얼마나 재미있는 일일까?
 하지만 그 이어서 오는 샤워하는 일 또 빨래하는 일까지 재미있을 리 없는 일,
 그도 집 떠나서 빨래니 씻는 일이 어디 만만한 일이던가.
 그래도 소치분교라는 옛 초등학교 건물을 개조해 만든 건물치고는 꽤나 시설이 좋은 편이어서
 별 불편 없이 모두가 무난히 끝낸 것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밤새 내린 비와 돌풍 덕에 아침에
 그 빨래 다시 해야 했던 것을 기억하니 아내 없이 혼자인 나로서는 도와주는 이 없어 힘들었다.
 밤새 억수로 내리는 비와 코골이에 잠자는 일이 힘들고 힘들어
 거의 뜬 눈으로 지새다 싶을 정도로 긴긴 밤이 지나고
 아침 무렵에 잠든 나를 짓궂게 깨우는 이가 있으니,
 항상 부지런한 정대장님이시다.
 얼마나 밉던지! 밤 지새고 새벽녘에 잠든 이들만 그 고통 안다.
 어째 거나 힘들게 일어난 아침은 참으로 찬란한 아침이었다.
 낮은 안개가 산을 타고 넘는 모습이 마치 내가 신선이 사는 동네에 와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로 얼마나 신비해 보이던지!
 강홍구소장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며,
 동네 한 바퀴 산책하며 바라본 오지마을 소치,
 가난에 물들어 살아야 했을 소치마을의 아늑함은 박종대 사장님이 준비한 순두부만큼이나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소치마을이 고향이라 시던 박 사장님, 언짢은 일도 있었으련만 흔쾌히 사준 순두부도 정말 구수하고 맛있었다.
 “강원도 인제군 ??? 소치마을”
얼레!
이게 내가 아는 소치마을의 사전 지식의 전부다.
 내가 소치마을에 대해,
 역사는 어떻고 먼 옛날에는 무슨 일 있었는지 알면 좋겠지만
 모른다하여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미안하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아는 게 없다. 
 그러니 다녀온 지금도 “강원도 인제군 ??? 소치마을” 외에 더 아는 게 없다.
 그렇지만 사람 좋고 인심 후해 보이는 이장님과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한없이 많은 신선한 공기,
 몇 걸음 하지 않아도 맑은 시냇물이 펼쳐진 곳이다.
“아내 그리고 딸내미 데리고 다시 와야겠다. “
옥수수와 감자를 맛있게 먹기는 했는데
이걸 얼마 주고 샀는지 그냥 얻은 건지 아니면 누가 그냥 인심 쓴 건지 나는 모른다.
거저 간 나로서는 별 신경 쓸 필요도 없이 그냥 먹고 놀기만 하면 되는 여행이어서 좋았지만
이걸 준비하고 뒤치다꺼리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정말 미안타.
저녁 준비며, 고기 굽는다하여 온갖 그릇이며, 집기 다 꺼내 사용하였으니,
저걸 어떻게 치울까 내심 걱정이었는데,
여소장님들 그리고 함께 하신 여자분들 다 팔 걷어붙이고 설거지하는 하는 모습이
마치 성인(聖人)들 같아 보였다.
소장이라는 직업이 어디 만만한 직업이던가?
온갖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파트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안하무인격인 사람, 깡패, 몰상식한 사람,
물론 우리 일을 격려하고 도와주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 모두들을 거뜬히 받아 넘기는 사람이 소장 아니던가. 지금 설거지하고 있지만
관리사무소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사는 사람, 다시 말해 전문직업인이다.
그런 소장님들이 마다하지 않고, 나서서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하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하지 않아도 되는 굳은 일들을 나서서 희생으로 몸소 실천하고 계신 것이다.


 

아침 식사 후,
우리는 물이 불어 래프팅은 포기하여야 한다는 실망스런 소식을 안고
번지점프 장으로 가야했던 버스 속에서의 광경은
벌떡주로 시끌벅적해야 했다.
우스꽝스러운 술잔에 웃고,
벌떡주의 내역에 웃고,
여소장님 농담에 웃으며,
우리는 그렇게 번지점프를 위해 내린천에 다다랐다.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고층아파트 옥상에 잘 올라가지도 못한다.
다리가 풀리고 오금이 저려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절대 올라가지 않는다.
올라갔더라도 금세 내려오고 만다.
그럼에도 그 높은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는 듯 한 표정을 짓는 분들을 보면,
다리가 풀리고 오금이 저려와도 이를 극복하고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높이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인지 궁금해 오던 차였다.
까마득히 보이는 저 높이 번지점프대에 올라 뛰어내리는 저 분들,
그 날처럼 대단해 보일까 싶다.
번지점프대에 올라 아무렇지도 않는 것처럼
맨 먼저 점프를 시도한 정대장님의 담력을 정말 대단한 것이다.
앞서 누눈가 먼저 실행하면 그 다음은 아무래도 안심이 되기 마련이며,
두려움 또한 훨씬 덜하기 마련이다.
맨 처음 실행하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 창조자 모습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항상 앞서 본을 보이는 정대장님의 모습은 존경스럽기 조차 하다.
여러 사람이 번지점프를 했지만
이 영자 소장님에 대해서는 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 높은 번지 점프대에 올라 거리낌 없이 뛰어 내리는 사람은
글쎄, 별 재미가 없다.
그 사람의 내면이야, 내 알 길이 없으니 모르는 일이고,
추측컨대 그는 담력이라기보다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높이에 대해 무딘 천성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몇 번이고 나왔다 들어갔을 반복하다가
결국엔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뛰어내리는 모습이 정말이지
담력다운 담력이다.
카메라 렌즈에 들어오는 이 영자 소장님은 두려움에 떨며,
몇 번의 시도 끝에 뛰어 내리는 모습이
진정한 번지점프인의 모습 같았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그 과정의 위대함 때문에 번지점프를 하나 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 두려움 자체를 짜릿한 쾌감으로 즐기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
꼭 그런 것이라 말하긴 어렵지만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위기에 몰아넣고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라면 부러움을 살만 것이 틀림없다.


 

점점 청명하게 변해가는 날씨를 따라가는 주문진행은
왠지 미묘한 전운 같은 긴박감이 흐르는 것 같았다.
무언가 있기는 있는데, 무엇을 빠뜨린 것 같은,
머~ 그런 것 말이다. 
보통이라면, 나이 지긋한 분들이 버스 앞좌석에 자리 잡고앉아 무게 잡고,
젊은이 들이 뒤쪽 좌석에 않아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탄 버스의 좌석배치는 정반대였다.
나이 지긋하고 무게 있어 보이는 전임 간부님께서 뒤 좌석을 틀어잡고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분위기는 무거워 보여 내겐 안심되는 측면도 있지만
왠지 거꾸러 가는 듯 한 불길한 예감 또한 엄존하고 있었다.
이런 내 느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점심을 먹을 때부터 그 수상한 느낌이 현실이 되어 가는 듯했다.
의기투합하여 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나는 술에 대해서 숙맥이나 다름없다.
필요에 의해서라도 술을 배워볼 요량으로 수련 아닌 수련을 해 보았지만
받아주지 않는 몸 때문에 많이 마셔야 소주 한잔이 고작이고,
많이 마시면 두잔,
후유증을 감수하고 자포자기 상태에 마시며 소주 석잔 이다.
물론 맥주는 좀 마시는 편이어서 500CC정도는 마신다.
그런 나였지만 그 날의 내 음주량은 대단한 것이었다.
늦은 점심 식사 때, 김동준 소장님의 적극적인 권유도 있었지만
벌써 2잔이나 마셔버렸다.
그런 나지만 취하지 않아서,
아마 너무 흥에 취하여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어째 건 술이 많이 받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 것이다.
늦은 점심과 거나하게 취기 오른 상태로 버스에 올랐으니
이제 조용히 잠들겠지 하고 잠을 청하려는 순간,
일은 벌어졌다.
갑가지 버스가 터질 같은 고음의 댄스 음악이 폭발하고 한 사람 한 사람 흔들기 시작했다.


 

언젠가 내 아내와 내 딸내미들과 유적답사를 갔을 때의 일이다.
유적지 주차장에 관광버스 세워놓고 미친 듯이 막춤 추는 사람들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분들이 손에 든 유적지 출입표는 뜯지도 않은 채 말이다.
구경은 관심도 없다는 듯 현란한 춤 속에 빠져든 그들은 우리가 답사 다 끝내고
어스름 때 주차장으로 내려올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때가 여름철이었으니 아마도 벼농사도 좀 한가해진 시기라
품돈 모아 관광나선 분들 일 텐데,
관광의 목적은 사라지고 춤추기 위해 나선 사람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때는 이상타며 눈살 찌푸리며 지나쳐 갔었다.
그런데 오늘 버스 안에서 똑 같은 모습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오늘의 나와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제삼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록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어,
같이 참여하지는 못했어도 분명 같은 일원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비로소 왜 그렇게 춤을 추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운행하는 버스 안이어서 좀 위험해 보이기도 한데
신기하리만치 안정된 자세로 흥에 겨워 춤을 추는 것은
인간 본연의 감성일 게다.
자기 감성에 충실하다는 것은
요즘처럼 스트레스와 절제된 삶 속에서 분출구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도시에 한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감성의 분출이 없다면 도시는 미쳐갈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는 합리적 이성의 세기라고 분류하는 것을 나는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21세기는 무엇일까?
20세기 중반에 나타난 전후 사상,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 합리적 사고의 지배로부터 탈출을 모색한 것이어서
마치 부정만을 일삼는 모습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런 생각에 대한 대안일까?
지극히 개인적이고 통합보다는 특성과 개성이 강조되는 세기가 21세기라고 하는 이도 있다.
20세기에는 통합되고 커져야 살 수 있었다면, 21세기에는 남달라야 하고, 독특해야 인정받는다.
그럼 그게 전부일까.
감성은 어떨까?
21세기가 개별적이고 부정해야 살아  남을 수 있는 사회구조로 변해간다면
감성이야 말로 그런 사회를 통합하는 기재로 작용하지 않을까?
이야기가 너무 고루하게 변해버렸다.


 

현대인에게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분야가 개발되고 넓어져가고 있다.
그렇지만 이 고상하고 규제되고 절제된 레크리에이션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감정에 충실하도록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버스 안에서 있었던 춤판은
그 어떤 것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감성에 충실한 모습의 전형이다.
춤판에 끼어들지도 못하는 나는 등지고 앉아,
대관령의 넘어가는 저녁 햇볕으로 옆 광이 드리워진 구름을 쳐다보아야 했다.
이도 어두워지니 내 것이 아니고,
그러니 별 수 없이 반대편 차선으로 지나가는
“BMW 자동차가 3대,  벤츠가 2대, 렉서스 1대, 택시가 6대”를 세어 보는 것을 내 할 일로 삼을 밖에….
나야 경험이 없고,
흥이 덜하여 그런다하지만 내 딸은 나와는 사뭇 다른 모습니다.
언젠가 큰 딸내미가 노래방 가자고 졸라대는 통에 딸들만 보낼 수 없어,
딸 셋 데리고 노래방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저윽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집에는 막내딸이 일어서기도 전, 언제쯤부터 집에서 TV를 없애 버렸다.
하여 대중음악과 댄스에 대해서는 접할 길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헌데 노래방에 보여준 딸들의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내 아내가 노래와 춤에는 도무지 반응도 없을 뿐더러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그러니 내 아이들도 그러려니 했는데,
특히 막내딸의 음악에 대한 반응은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 날 버스 속에서의 내 딸의 반응도 그때와 다르지 않다.
그 아이도 자기 감성대로 반응하는 것을 무어라 할까 마는
옆집 아이가 아닌 다음에야 그 감성을 절제하고 조절하지 못하지는 것에 대한
걱정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음악이 멈추고 모두가 자리로 돌아가고 내 딸마저 잠들었을 때
돌아가는 소주파티는 흥겹게 춤추고 난 이후이니 그 소주 맛 참으로 맛있어 보이기도 했다.
늦은 점심부터 시작된 내 음주는 다하여 자그마치 6잔이나 마셨다.
사양해도 소용없이 권하는 맛에 그만 도를 넘게 마셨는데 그게 그만 탈이 나고 말았다.
그 밤, 집에 도착하여 팔 다리 저리고 아파 얼마나 고생 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음주야 흥을 돋우는데 꼭 필요한 것이니
한 두어 잔 나누어 마시며 시작된 길고도 긴 노래방이
더디 가는 버스만큼 긴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50여명 되는 사람 중에는 노래 못하는 사람 한명 쯤 있을 법도 한데
나 말고는 모두가 수준급이다.
특히 강홍구 소장의 노래는 일품이었다.
가끔 뒤 좌석에 앉은 전임 간부님들께서
노래는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며,
시범을 보이고 들어가면 앞 뒷좌석 궁짝이 잘도 맞아 들어간다.
내 과거 경험으로는 이사람 저사람 억지로 노래시키는 모습을 볼 때가 있지만
이 버스 속에서의 노래방은 그만하라고 아우성을 칠 때까지 끝이 없이 계속되는 것이었다.
 


 

이번 여행은 길지 않은 내 생애에서 있어서 색다른 역사였다.
비록 내 입맛에 딱 맞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내겐 여간 용기내야 선택할 수 있는 여행이다.
춤추는 것도 그렇고 노래하는 것도 그렇고 내 비록 흔쾌히 참여하지 못하였고,
노래나 춤솜씨는 남들에게 피해 줄 만큼 형편없는 것이어서
또 기회가 온다하여도 응하지 못하겠지만
같은 편에 서서,
같은 일원된다는 사실은 즐겁고 행복했다.
시간적으로 언제 그런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기회가 되면 또다시 시도해보게 될 지는 두고 봐야 될 일이다.
흔히 군대갔다온 이에게 물으면 군대란 꼭 한번은 가볼만한 곳이지만
두 번은 절대 안가겠다고들  한다.
 


 

 즐겁고 행복했던 여행에서 돌아와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 또한 제자리로 돌아와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며 생각하고 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애쓴 수산모 관계자 여러분들에 대해서.
 여행을 다녀오면 습관적으로 글을 쓰곤 했는데,
 이 글도 그런 차원에서 쓰여진 글이다.
 나름데로 자재력을 갖고 쓴 글이지만 너무 주관적이고 서투른 글 솜씨여서 부끄럽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내용은 빼고 올리다 보니 문맥이 다소 매끄럽지 못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하길 빈다.
글을 쓰고는 올릴까 말까를 망설이다,
함께 한 사람으로서 함께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라 생각하여 올립니다.
되도록 짧게 하려고 애써 줄인 것이지만 여전히 긴 글이 되어버렸다.
하여 이글 끝까지 읽으려면 아마도 인내심이 필요할 듯 싶다.


2008년 8월 5일 밤.


문시형
 


    소치마을 나와 설악산 한계령을 넘다 말고 쉬어가던 중 모두가 모여서 찰깍...  하지만 관광버스 안에서 남아 있는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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