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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09-05-13 조회수 : 3,496
제 목 : [박동천의 집중탐구] 연재를 시작하며

연재를 시작하며

노무현의 집권기 5년은 높은 기대가 실망으로 곤두박질친 시기였다. 노무현과 386을 "무능한 아마추어"나 "친북좌파" 따위로 비난하고 넘어가기는 쉽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정치체제와 질서, 어떤 부류의 정치인과 정파가 한국 사회에 필요한지를 분별하기는 어렵다.

당장 노무현에 대한 실망을 기화로 집권한 이명박은 '노무현 뒤집기'를 첫 번째 목표로 삼고 있지만, 지지율의 추세는 노무현의 경우를 답습하고 있다. "독단", "독선", "이념 지향", "소통 부재", "코드 인사", 등등, 노무현에 대해서 빗발쳤던 비난들이 그대로 이명박에게 들이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노무현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던 반면에 이명박에 대한 비판은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에 대한 지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에 대한 실망이 정치적 부동층의 증가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상당수의 유권자 맘속에 현재 야당들이 대안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

박근혜처럼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 없어서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세균이나 추미애는 인지도가 박근혜에게 뒤진다고 할 수 있지만, 민주당의 정동영, 손학규, 김근태, 그리고 사회주의 쪽의 노회찬, 심상정, 권영길 등이 단순한 인지도라는 점에서 박근혜에게 밀린다고는 보기 어렵다. 차이는 인지도가 아니라 결국 정책이다.

보수와 진보가 다 같이 이미지만 가지고 경쟁한다면 진보는 필패할 수밖에 없다. 보수는 현재보다 망치지만 않으면 기득권층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지만, 진보는 현재보다 낫다는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지지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대체로 권력을 비판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망했을 때 지지 대상을 바꿀 확률도 높다. 반면에 맹목적 충성심의 정도는 진보 지지층보다 보수 지지층에서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 진영일수록 매력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

그러나 어떤 현안에 관해 대립되는 정책들의 장단점을 분별해서 더 나은 정책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느냐는 이념적 차이가 항상 개재하고, 미래에 대한 예측을 포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이란 특정 집단의 이익과 일반적 이익, 단기적 이익과 장기적 이익, 물질적 이익과 도덕적 이익 등을 어느 순간에 뭉뚱그려 패키지로 묶어내는 과정이다. 실제 정책을 결정하는 입장에 있든, 단순히 선거 때 표를 행사할 뿐인 처지에 있든 정치적 의사의 형성에는 합리적 계산보다 의지적 선택이 작용하는 순간이 있다.

부동층이 의지적 선택을 내리는 데에는 담론 투쟁의 향배가 큰 영향을 미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담론 투쟁이란 김대중·노무현의 대북 협상 정책을 "퍼주기"로 볼 것인지 아니면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로 볼 것인지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이다. 노무현이 표방했던 "지역 균형 발전"이나 이명박이 내걸었던 "747"이나 "비핵개방3000"도 선거 국면에서는 구체적인 정책이라는 의미보다는 이미지에 호소하면서 분위기를 잡아가는 수사와 구호의 의미를 더 많이 가진다. 물론 진보·개혁 세력 전체를 "빨갱이"로 매도한다든지, 이명박을 "토건 마인드"로 폄하하는 낙인찍기 역시 전형적인 담론 정치에 속한다.

담론의 차원에서 진보 진영이 선거 정치에서 동맹을 유지하고 표를 모을 수 있도록 기여한 주요 무기는 "민주화", "민주주의", "평화적 정권 교체" 등이었다. 하지만 이 구호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대안이었다기보다는 군사정권의 독재에 반대한다는 소극적 부정적인 의미에 그쳤기 때문에, 1987년의 개헌 그리고 그 후 김대중·노무현이 집권함으로써 효력이 마감되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이명박의 강권과 전횡 때문에 다시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동맹이 형성되는 조짐을 보이지만, 여전히 공통의 적이 있다는 사실의 의존해서 형성되는 저항적 연대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화 이후 과거의 친독재 세력은 조·중·동을 중심으로 표현의 자유를 한껏 누리면서 오히려 결속력과 전술적 세련도를 강화했지만, 과거의 민주화 세력은 "진정한 진보"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중구난방 다투는 사이에 87년 체제마저 위협받는 아이러니를 낳은 것이다.

진보 진영이 새롭고 적실성 있는 아젠다를 생성해야 할 필요는 광범위하게 인식되고 있다. 혹자는 "민주화" 대신 "신자유주의 반대"나 "올바른 정당제도"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구호를 다른 구호로 대체하는 식으로는 언제나 "경제 살리기" 한 방에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면한 과제의 초점은 "민생", "상생의 정치", "경제 살리기" 따위 모호하기 짝이 없는 구호가 마냥 통하는 풍토를 바꾸는 데에 맞춰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진보를 자임하는 사람일수록 정치의식의 기본 프레임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의 정치의식이 공유하는 네 개의 프레임을 찾아내 비판하고자 한다. 이 프레임들은 내가 보기에 본질적으로 보수 정치의식에 유리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런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한, "진보"란 단지 특정 부류의 직업정치인들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명칭에 불과하게 될 위험이 높다.

첫째는 마녀 사냥 프레임으로 가짜 문제를 하나 찾아내서 순전히 언어적인 분풀이를 영속시키는 경향을 말한다.

둘째는 권력 숭배 프레임으로서 과도한 합리성에 대한 기대가 사실은 권력에 의지하고자 하는 나약한 심성의 발로임을 고발한다.

셋째는 선견지명 프레임으로서, 숱한 이익집단들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양보를 모르고 결사적으로 달려드는 경향을 비판한다.

넷째는 집단 생존 프레임으로서 우리 사회에 팽배한 집단주의와 그에 따르는 억압이 과도한 민족주의에 뿌리를 둔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내용들을 제2부에서 제5까지 논의한 다음, 이들 낡은 프레임에서 벗어난 새로운 방식의 사고를 내 나름대로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내가 다루며 비판하는 주제들은 공공담론의 차원에 국한되기 때문에, 사적 공간에서 각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추구할지에 관해 간섭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사적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생각들이 개명된 방식으로, 즉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경쟁하거나 협동할 수 있으려면 사회체제가 어떤 식으로 짜여야 할 것인지가 내 관심이다.

내가 말하려는 내용들 각각은 별로 새로운 것이 없다. 대부분 이미 공론장에서 자주 거론되어 상식에 가까운 것들이다. 그만큼 이 글에서는 내가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은 경우이거나, 또는 추가적인 확인이나 논의를 위해 독자들에게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아니면 인용이나 전거를 달지 않을 것이다. 불필요한 가지들을 줄이고 논의의 초점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들을 서로 연결하는 방식은 아마도 많은 독자들에게 상당히 생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생소한 길을 가기 전에 약간의 사전준비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제1부는 그러한 예비 작업에 할애할 수밖에 없다.

/박동천 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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