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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5-01-27 조회수 : 4,612
제 목 : [장하준 칼럼] 거꾸로 가는 파생상품 규제와 세계경제의 앞날

[장하준 칼럼] 거꾸로 가는 파생상품 규제와 세계경제의 앞날

[중앙일보] 입력 2014.12.18 00:03 / 수정 2014.12.18 00:17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지난주에 미국 의회가 논란 끝에 새해 예산안을 통과시켰고 유가는 상징적인 60달러 선 밑으로 내려갔다(서부텍사스유 기준).

 두 가지 모두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일단 크게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두 사건은 세계경제의 앞날이 얼마나 걱정스러운가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우선 유가 문제를 살펴보자. 지난 15년 동안 유가는 널뛰기를 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직전 유가는 한때 배럴당 140달러를 넘었다. 1990년대 말 11달러까지 내려갔던 것이 12배 이상 뛰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금융위기가 나자 배럴당 40달러 이하, 즉 3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 실물경제가 조금 회복되자 유가는 다시 두세 배 뛰어 2010년 말부터 2014년 여름까지는 80달러에서 120달러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60달러 이하로 내려온 것이다.

 수요·공급의 법칙으로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금융위기 직전까지 유가가 급등할 때 많은 사람이 그것을 중국의 고도성장 때문이라고 했지만 2000년대에 걸쳐 중국의 석유 소비는 1일당 500만 배럴에서 800만 배럴로 늘었을 뿐 세계 유가를 10배 이상 올릴 정도는 아니었다. 지난 6개월 사이에는 세계 경기가 곤두박질 친 것도 아닌데 유가는 반 토막이 났다.
 

 실수요의 변화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유가가 요동을 치는 이유는 석유에 대한 투기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특히 선물·옵션 등 파생상품 시장이 발전하면서 석유는 공장이나 가정 같은 실수요자뿐 아니라 금융투자자들이 사고파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석유뿐이 아니다. 2008년에는 투기적 수요 때문에 곡물가격이 급등해 수많은 가난한 나라에서 식량폭동이 일어난 적도 있다.

 이렇게 파생상품 시장의 발달로 인해 실물경제와는 관계없이 석유·식량 등 기본적 상품들의 가격이 요동을 치게 되면 세계경제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

 우선 석유나 곡물 등 1차산품의 가격이 요동을 치면 이런 상품들을 수출하는 나라들은 소득이 요동을 치니 경제를 안정되게 운영하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상품들의 가격이 급등하면 2008년 식량폭동에서 볼 수 있듯이 가난한 나라들은 경제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고, 부자 나라들도 인플레 압력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이런 상품들의 가격이 급락하면 러시아·베네수엘라같이 형편 안 좋은 산유국들은 금융위기를 겪을 수 있고 중동 국가 같은 형편이 좋은 산유국들은 해외 투자를 줄이게 되니 세계경제가 불안해진다.

 그러면 미국의 예산안 통과와 금융투기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이번 예산안은 백악관과 공화당 수뇌부가 합의를 해 내놓은 것이기에 많은 사람이 순조로운 통과를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통과 과정에 진통이 많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산안에 끼워져 있던 금융규제 완화 안에 민주당의 일부 의원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정부는 소위 프랭크-도드 법안을 도입해 금융규제를 강화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조항 중 하나가 상업 은행들이 자기 자금을 가지고 파생상품을 거래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상업은행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예금보험의 혜택을 받고 있으니, 위험성이 높은 파생상품의 거래를 하다 일이 잘못되면 구제금융을 받게 되고, 그 부담은 바로 납세자로 넘어가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금융위기 직후 숨을 죽이고 있던 월가는 상황이 좀 잠잠해지자 열심히 로비를 해서 도드-프랭크 법에 지속적으로 ‘물타기’를 해왔는데, 이번에 특히 중요한 규제인 파생상품 거래에 관한 규제를 철폐하는 법안을 예산안에 포함시키는 ‘쾌거’를 거둔 것이다. 일부 민주당의 진보파 의원들은 이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그렇게 하다가 정부가 폐쇄되면 자기들이 책임을 뒤집어 쓸 것이므로 울며 겨자 먹기로 이 법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금융투자가 워런 버핏은 파생상품을 ‘금융 대량살상 무기’라고 불렀다. 주택담보 대출 관련 파생상품들이 2008년 금융위기에서 큰 역할을 한 점, 석유가격 널뛰기나 식량폭동 등에서 1차산품 관련 파생상품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것 등을 고려하면 정말 정확한 이야기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영국 등 많은 주요 국가가 실물경제보다는 자산시장 부양에 기반해 경기를 되살렸기에 지금 세계경제에는 안 그래도 자산 거품이 엄청나게 끼어 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세계 금융규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미국 정부가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투기를 장려하다니, 세계경제의 앞날을 위해 정말 걱정되는 일이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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