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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3-12-04 조회수 : 4,740
제 목 : 모든 종교 행위는 정치적이다

모든 종교 행위는 정치적이다

[박동천 칼럼] 종교인의 정치개입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기사입력 2013-12-02 오전 10:26:20

     

 
한국 사회에서는 매사를 영토구분으로 이해하는 풍조가 있다. "삼권분립"이라는 말을 어려서부터 접한 결과, 국회와 행정부와 사법부가 각자 영토를 차지하고 앉아서 서로 모르는 척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더욱 한심한 것은 행정부를 그냥 정부인 것처럼 여기는 자세가 왕조시대 또는 전체주의의 사촌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넘어간다). 국회와 행정부와 사법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바깥에서 영향을 미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영토 분리는 한 마디로 언어도단이다. 민주사회에서는 국회나 행정부나 사법부나 모두 인민주권의 위임을 받아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들이다. 따라서 한 기관 안에서 주권의 명령을 위반하는 일이 저질러진다면 다른 기관에서 마땅히 개입해서 조사하고, 잘못 된 일을 올바르게 고쳐놔야 할 의무가 있다. 다만, 사법부는 본령 상 누군가 소송을 제기한 다음에만 움직이게 되어 있다고 한다면, 행정부와 입법부는 일단 문제의 소지가 인지되면 적극적으로 진상을 밝히고 잘잘못을 가려내야만 한다.

특히 국회는 주권자를 대변하는 최고의 의결기관으로서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문제일수록 철저한 진상조사를 수행할 의무와 권한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수사 중인 사안", "진행 중인 재판에 영향을 줄 우려", "국가 안보상 비밀", "대통령 또는 행정부의 고유 권한" 따위 구실로 국회의 조사권을 제한하는 사악한 말버릇이 횡행한다. 그리고 "삼권분립"의 의미를 오해하도록 잘못된 시민교육을 받은 보통 시민들이 그따위 말버릇을 (그것이 얼마나 사악한지 깨닫지 못한 채) 당연시하고 묵종한다. 바로 이 틈바구니야말로 "국가", "공익", "공공질서", "안보", 따위 구호를 간판으로 내걸고 뒷전에서 국가와 공익과 공공질서와 안보를 해치면서 온갖 도둑질을 해먹을 수 있는 공간이 넓게 마련된다.

정교분리, 즉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는 원칙 역시 한국 사회에서는 흔히 영토 분리인 것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종교집단이라는 간판만 내걸면 그 안에서 무슨 짓을 벌이든지 공권력이 침투할 수 없다면 말이 되겠는가? 성추행범, 조직폭력배, 가장 악질적인 사기꾼들이 관공서에 "성직자"라든지 "종교단체"랍시고 등록만 해두면, 그 안에서 살인, 강간, 강도, 사기 등등,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려도 되는 사태가 말이 되는가? 그런 일들이 허용된다면, 영성을 추구하고 수양을 위해 정진하는 진짜 신앙인들의 모임은 종교단체 중에서도 뒷전으로 밀려나고, 헌금을 경영 수단으로 삼고 신도를 착취 대상으로 삼는 인종들이 "종교"의 이름을 달고 온갖 악행을 맘껏 저지르게 될 것이다. 그레샴의 법칙이 딱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종교인들이 정치에 관해 발언하지도 행동하지도 못하는 사태란 어떤 상태일까? 정치권력이 공동체의 평화와 이익을 도모하기는 고사하고 사회를 내란으로 몰아넣으면서 그 틈에 자기네 잇속을 챙길 때,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초연해야 할까? 깡패와 도적떼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초연한 것이 아니라 깡패와 도적떼의 범행을 방조하는 셈이 된다. 종교인의 모든 행위는 (사실은 모든 시민의 모든 행위는) 곧 정치적 행위일 수밖에 없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운명이라면, 시대의 불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불의로 말미암아 공동체가 입게 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이 곧 영성이고 구원이다.

신앙인이라면 무력은 물론이고 사나운 말도 최대한 아껴야 한다. 그러나 살인자가 연약한 어린이를 막 죽이려는 장면에 처했을 때, 또는 불법적인 침략을 받아 공동체가 위난을 당할 때처럼, 범죄자의 무력으로부터 무고한 영혼을 다급하게 구출할 길이 무력밖에 없다면, 신앙인이라도 무력을 행사하는 것이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물며, 이와 같은 목불인견의 참상이 눈앞에 벌어질 때, 범죄자를 말로 꾸짖는다든지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행위는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다.

한국의 종교조직 가운데는 이런 의무를 게을리 한 사례가 아주 많다. 일제 시대와 독재 시대로 이어진 오랜 기간 동안 정치판이 곧 깡패판으로 점철되는 데도 "정교분리"라는 미명만을 내걸고 침묵을 지킨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정치적 중립이 아니라 깡패들의 불법적 권력행사를 방조 내지 묵인한 것이다. 개중에는 깡패들에게 빌붙어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거기서 나오는 떡고물을 챙긴 불행한 영혼들도 적지 않다.

과거의 암흑 같던 시대에 그나마 천주교에 정의구현사제단, 개신교에 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조계종에 실천불교승가회 등이 있어서, 권력의 초법, 탈법, 불법 행위를 지적하고 비판하고 세상에 널리 알렸다. 1987년 이후 이들이 정치판에 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할 일이 줄었는데, 이명박의 무도한 작태에 이어 이제 "촛불을 앞에 둔 무녀"처럼 광기에 휩싸인 박근혜가 한국인이 피를 흘려가면서 겨우 기틀을 마련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뿌리째 뒤엎으려 하자, 종교인들의 시국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자면 제 가슴을 찢으며 통탄할 만한 일이다.

박창신 신부의 발언에 대한 종북몰이가 얼마나 어리석고도 악랄한지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도 주류 언론의 영향 아래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정교분리"를 텃밭나누기로 생각하면서 "종교인의 정치개입은 자제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가 각기 텃밭을 나눠 가지고, 서로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상태는 종교에서도 정치에서도 깡패와 사기꾼의 전횡이 무한정 허용되는 상태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종교판의 깡패들과 정치판의 깡패들이 평신도와 인민을 상대로 착취와 사기와 협박 그리고 때로는 살인까지 저질러도 외부에서 견제하고 비판할 권위가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회개하여 마음을 고쳐먹거나, 아니면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는 한, 현재의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깡패들이 맘 놓고 날뛸 마당이 되어 버렸다. 박근혜가 물러난 다음이라고 해서 지금보다 얼마나 나아질지에 관해서는 전혀 낙관을 할 수 없지만, 어쨌든 현재의 깡패판은 어떻게 해서든지 고치는 것이 선한 길이다. 건강한 정치공동체를 지향하는 올바른 길로 물꼬를 되돌릴 방도가 분명하지 않아서 주저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현 상태가 잘못된 상태라는 발언만은 주저 없이 뱉어내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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