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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12-12 조회수 : 4,296
제 목 :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 (18) 육식 [2011.11.28 제887호]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 (18) 육식 [2011.11.28 제887호]
 
끊을 수 없는 남의 살에 대한 욕망 VS 육식 도시인의 비애
 
 
 
 
 
 
끊을 수 없는 남의 살에 대한 욕망

영양 과잉의 시대, 노동계급의 식단이 된 육식… 인류의 역사와 진화를 통해서 본 고기를 먹는다는 것의 사회학과 생물학

 

어느 채식주의자의 강연을 듣고 한동안 고기를 안 먹고 살았다. 그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기를 포기하면 식당에서 딱히 시킬 게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굳이 고기를 구워먹지 않아도 고기는 가령 뼛국물이나 만두소의 형태로 거의 모든 음식에 이미 들어가 있다. 완벽한 채식을 체험하려고 서울 인사동의 사찰음식 전문점을 찾아가봤다. 값은 엄청나게 비싼데, 먹고 나니 뭔가 허전한 느낌. 역시 고기의 빈자리를 푸성귀로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시 고기는 맛있다.

 

고기의 추억

흔히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우리의 식단도 ‘서구식’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변화의 핵심은 물론 육류 소비의 증가일 것이다. 지금이야 고기가 흔해졌지만, 어린 시절만 해도 식탁에 고기가 오르는 일은 드물었다. 어쩌다 한 번 고기가 올라오면, 식탁 위에서는 식구들 사이에 고기를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내가 우리 집안의 독자이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돼야 비로소 고기를 먹으면서도 가족애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시절 그나마 단백질을 보충해주었던 것이 닭고기. 지금이야 온갖 브랜드의 튀김닭이 난무하지만, 당시에는 ‘전기구이 통닭’이 그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였다. 그때 먹었던 전기구이 통닭이야말로 온갖 종류의 치킨에 길들여진 지금까지도 내 생애 최고의 통닭으로 남아 있다. 당시에는 닭조차 사먹을 형편이 안 되어, 주로 손님이 선물로 들고 왔을 때나 맛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긴 그 시절 우리 어머니 소원이 계란을 잔뜩 사서 원없이 삶아 먹이는 것이었다고 하니까.



군대생활을 할 때 우리는 쇠고깃국을 ‘황소도강탕’이라 부르곤 했다. 황소가 건너간 강물을 떠다가 끓인 국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휘저어도 숟가락 끝에 고기는 걸리지 않으나, 국물을 떠 마시면 살짝 혀끝에 걸리는 아련한 황소의 자취. 군대에서 쇠고기는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데리다의 ‘디페랑스’다. 돼지고기는 그보다는 조금 나았다. 하지만 군대생활 하며 내가 발견한 것은, 군대 밖에서 통용되는 생물학적 상식과 달리, 돼지라는 동물은 100% 비계로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과거에 고기는 부자들만 먹는 것이었으나, 오늘날 고기를 먹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었다. 거리로 나가보라. 도처에 널린 것이 고깃집이다. 노동계급 중에서 하층에 속하는 이들도 고된 일을 마치고 근처의 고깃집에서 불판 갈아가며 삼겹살 구워 소주 한잔 걸칠 정도의 여유는 갖고 있다. 물가가 뛴다 하나, 한국의 중산층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가족과 함께 외식을 나가 꽤 비싼 쇠고기를 1인당 2~3인분씩 시켜 먹곤 할 것이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육식은 보편화됐다고 할 수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서구에서도 산업화와 더불어 육류 소비가 급증했단다. 소득이 늘자 노동계급까지도 대거 고기 소비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쯤 상류층은 고기의 폭식에서 벗어나 열량이 적은 가벼운 식단으로 바꾸기 시작한다. 물론 이는 양 적고 질 좋은 음식을 통해 자신들을 하류계층과 차별화하려는 일종의 기호학적 행위다. 고기가 사회적 기호의 기능을 상실하자, 외려 채식이 고급스러운 식문화로 부각되고, 육식은 노동계급적인 식단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하긴 정신노동에는 많은 신체적 열량이 필요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화이트칼라마저도 여전히 노동계급적 식단을 좋아하는 것 같다. 왜들 그렇게 고기를 좋아할까? 못 먹던 시절의 기억이 아직 남아서? 하지만 이것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상류층은 담백한 낮은 열량의 식단으로 옮아갔고, 머잖아 중산층들도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 그들이 모두 채식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기를 먹어도 그들은 양보다는 질, 고급스러운 부위를 섬세하게 조리해 먹는 쪽을 택할 것이다.

 

더 이상 필연적 이유가 없는 육식

영양 결핍의 시대에 고기는 영양의 대명사였으나, 오늘날처럼 영양 과잉의 시대에 육식은 외려 건강에 해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의사들은 환자에게 콜레스테롤 얘기를 하며 고기 섭취를 줄이라고 권한다. 육식이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는 인식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가령 철학자 칸트는 고기를 먹을 때 육즙만 빨아먹고, 고기 자체는 식탁에 뱉어냈다고 한다. 그와 더불어 사유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와 더불어 식사를 하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이빨의 모양으로 판단하건대 인간은 원래 잡식동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간은 육식을 통해 뇌를 발달시킴으로써 원숭이의 상태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인간이 될 수 있었다는 가설도 있다. 하지만 스님이나 채식주의자들이 일절 육식을 하지 않고도 뇌기능에 전혀 지장이 없는 것을 보면, 인류 전체가 장기간에 걸쳐 채식을 한다고 해서 진화를 거슬러 다시 원숭이로 퇴화할 것 같지는 않다. 뇌의 크기가 지능을 결정한다면, 지구는 오래 전에 흰긴수염고래에게 장악됐을 것이다.

흔히 단백질은 고기를 통해 섭취해야 한다고 하나, 단백질은 채식을 통해서도 섭취할 수 있다. 칼슘을 섭취하려면 우유를 마셔야 한다고 하나, 정작 골다공증 환자가 많은 곳은 우유 소비가 왕성한 서구라는 얘기도 있다. 건강과 영양에 관한 얘기는 워낙 논란이 분분해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인간이 굳이 육식을 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육식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가 크다면, 한 번쯤 육식 없는 식문화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문제에 사회적 관심을 모으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 미국의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의 저서 <육식의 종말>(1994)일 것이다. 방대한 자료를 동원한 이 저서에서 리프킨은- 특히 미국 사회에서- 육식이 초래하는 문제들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당장 완전한 채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당장의 목표는 미국에서 육류 소비를 50%가량 줄이는 데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고 그는 지금도 다양한 사회적 실천을 하고 있다.

인류가 채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크게 네 가지 근거가 있다. 인간의 건강, 동물의 권리, 식량의 배분, 생태의 보존이 그것이다. 채식을 할 경우, 일단 먹는 이의 건강에도 좋고, 불필요하게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되며, 가축을 기르는 공간에 농사를 지어 기아를 해결할 수 있고, 가축 분뇨로 인한 수질오염 및 CO₂의 방출로 인한 온실효과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식의 포기로 이렇게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당장 채식으로 전환하는 게 합리적일 게다.

 

고기 굽게 하는 글쓰기의 고통

문제는 그 실천이 쉽지 않다는 것. 개인적으로는 낮은 수준에서 이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개고기는 일절 먹지 않고, 면이나 국의 육수로 나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쇠고기·닭고기·돼지고기는 삼가고, 남의 살에 대한 욕망은 되도록 생선으로 채우자.’ 물론 이마저 쉽지 않아 가끔은 원칙을 어긴다. 하지만 어디 고기를 일절 먹지 않는 것만 실천이겠는가? 되도록 적게 먹는 것도 위에서 나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신체에 원기가 떨어졌을 때는 고기로 보충할 수는 있다. 가령 어제 같은 경우가 그랬다. 마감 전에 원고를 써 보내야 하는 글쟁이들의 정신적 고통을 아는가? ‘육식’이라는 주제로 무슨 글을 쓰냐고 서로 걱정하며, 대전의 한 식당에서 정재승 선생과 고기를 구워먹었다.

진중권 문화평론가

 


육식 도시인의 비애

‘잡식 동물’로 진화해 온 인간에게 육식 전폐는 본성을 거스르는 일… 그러나 산업화한 음식사슬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버려야

 

 

영국의 작가 존 버거는 <왜 동물을 보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인간은 동물과 접촉하지 않게 되면서, 특히 눈과 눈을 서로 들여다보지 않게 되면서 동물들과 잔인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어린 시절,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의 눈망울을 본 뒤 한동안 고기를 먹지 못한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존 버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쉽게 수긍이 가리라. 나는 초등학교 시절, TV 다큐멘터리에서 ‘소를 도축장에 끌고 가는 장면’을 보고서 한동안 비슷한 ‘육식 전폐’를 경험한 적이 있다.

 

동물과 시선을 마주해 본 사람이라면

존 버거에 따르면, 우리는 동물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말해 어느 정도 신비롭다고 할 수 있는 ‘시선의 접촉’을 통해) 인간이 동물과 대단히 비슷하면서 동시에 매우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동물의 눈을 바라보며 그들과 공감하고, 그들의 감정을 엿보며, 때론 동일시한다. 최소한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 감정과 고통, 그리고 존엄한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그 순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도시가 발달하고 도축장이 도시인들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시선 접촉을 해본 적이 없는 도시인들은 점점 ‘잔인한 육식동물’로 진화해왔다. 그들에게 고기는 그저 얇게 잘 썰어진, 살코기가 튼실한, 혹은 냉동포장 안에 평화롭게 누워 우리의 식탁 위에서 맛있게 요리되기를 기다리는 식재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가 돼 버렸다. 동물과의 시선 접촉이 사라진 시대에, 사람들은 동물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들을 편하게 잡아먹는 ‘먹이사슬의 관계’로 회복되었다.

동물의 눈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채식주의자가 돼가는 추세이며, 내 주변에서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채식주의자들은 전 지구적으로 매시간 400마리의 송아지가 도축장에서 총에 맞거나 주사를 맞아 죽어간다는 사실을 식탁에 앉을 때마다 인식한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닭과 돼지들이 인간의 식탁에 올라오기 위해 훨씬 더 잔인한 방식으로 죽어간다는 사실 또한 기억하고 있다. ‘산업적 도축 현장’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인식하는 사람들은 채식을 일상화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육식’을 테마로 글을 쓰면서, 미국의 석학 제러미 리프킨처럼 육식에 대한 맹비난과 함께 육식을 하지 말자고, 우리 모두 채식주의자가 되자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난 오늘도 고기를 구워 먹었으니까). 자본주의의 몸뚱이를 가진 사람으로서, 글과 삶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그토록 꽃등심을 즐기고 한 달에 몇 마리의 닭을 먹지 않으면 삶이 유지되지 않는 육식주의자로서, 나도 못하는 ‘육식 끊기’를 권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저 채식주의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앞으로 되도록 육식 소비를 줄입시다!” 정도로만 말할 수밖에 없는 저를 용서하시길.

과학자로서 부끄러운 축산업 공장

동물과의 시선 접촉이 사라진 도시 시공간에서, 동물의 시선을 느끼는 채식주의자는 그 자체로 훌륭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육식이라는 인간 본성을 거슬러가며 생태계 안에서 우리가 동물과 행복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꿈꾼다. 실제로 브리야사바랭의 말처럼 “세상에서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인간의 거대한 식욕 앞에 송두리째 맡겨져 있는 오늘날, 인간의 복잡한 미각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자연 생태계 전체에서 인간은 유일한 미식가”다. 동물과 식물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왕성한 식욕과 잡식 능력은 그 자체로 유일하며 위대하다는 얘기다.

알다시피 인간의 몸은 고기와 채소를 먹기에 아주 잘 발달해왔다. 인간의 이는 동물의 살을 무자비하게 찢기에 효율적으로 어금니와 앞니가 발달해왔고, 오래도록 식물성 섬유를 찧기에도 적절하게 진화해왔다. 이 두 쌍의 도구를 모두 갖춘 동물은 많지 않다.

인간의 위장과 소장이 가진 능력 또한 각별하다. 인간의 위는 특별히 ‘엘라스틴’이라는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를 생산하는데, 엘라스틴은 고기 말고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인간의 대사는 특정한 화합물들을 필요로 하는데, 비타민C처럼 어떤 화합물은 식물에서만 얻을 수 있고, 비타민B12처럼 어떤 화합물은 동물에서만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지난 3만 년간 느리면서도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인간은 ‘잡식동물의 몸’을 갖게 된 것이다.

게다가 1.4kg의 무거운 두뇌를 갖게 된 인간은 여기에 창의적인 미식 문화까지 갖게 되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한 동물로 변모했다. 돼지와 닭, 소들을 좁은 공간에서 대량으로 키우고, 그들에게 하루 종일 음식을 먹게 만드는 끔찍한 장치를 개발하고, 기름기가 잘 배어 있는 살코기를 만들어내려고 먹여서는 안 될 사료를 대량으로 제공하는 무자비함을 테크놀로지화했다.

불행하게도, 몬샌토 같은 거대기업이 과학기술로 무장해 그 최선봉에 서 있다는 사실을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슈퍼마켓의 풍요로운 음식 풍경을 제공하려고 유전자를 조작한 식물을 대량 재배하고, 부적절한 사료를 대량 생산하고, ‘유기농’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내세워 지금의 산업적인 음식사슬의 모순과 폐해를 더욱 공고히 하는 일을 조직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그들이 만든 살충제는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왜곡하고, 식물을 비정상적으로 성장하게 하며, 육식 세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데 기여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식욕을 통제하는 가치 있는 미덕이 없다면’, 모든 동물 가운데 음식에 관련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불경하고 잔인하며 사악한 동물이다. 제러미 리프킨이 <육식의 종말> 같은 책에서 언급한 수많은 통계가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육식으로 인해 지구와 자연 생태계가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음식사슬이 짧은 식탁을 꿈꾸며

점점 미국인의 몸을 닮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미국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프랑스인의 역설’는 주목할 만하다. 비만이 ‘전 국가적 우환’인 미국 사람들은 프랑스인의 식생활에 관심이 많다(치즈와 함께 와인을 적당히 마시면 심장병과 비만에 걸릴 확률이 낮아진다는 신문 기사를 미국에서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보게 된다!). 그들은 프랑스인들이 몸에 안 좋은 음식을 충분히 즐기면서도 어떻게 심장병·비만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장수를 얻게 됐는지 관심이 많다.

실상 탄수화물과 지방이 많이 든 음식은 맛있지만 ‘독’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어떻게 프랑스인들은 독을 즐기면서도 장수하게 됐을까? 프랑스인들은 어떻게 먹느냐, 그리고 음식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무엇을 먹느냐만큼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프랑스인은 몸에 좋지 않은 각종 음식을 먹는다(푸아그라를 생각해보라!). 하지만 그들은 엄격하고 안정된 일련의 규칙에 따라 음식을 먹는다. 적은 양을 먹고, 식사 외에 간식은 삼가며, 거의 혼자 먹는 법 없이 여럿이 함께 오랫동안 여유로운 식사를 한다. 이거, 우리에게 쉽지 않은가! 우리는 프랑스인들보다 더 훌륭한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의 전통 음식과 식사 문화는 프랑스인들보다 더 건강하다.

도시에 사는 인간은 점점 음식사슬이 긴, 그래서 세상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음식사슬이 짧은 식사 생활을 꿈꿔본다. 내가 재배한 것을 먹고, 직접 사냥한 무언가를 요리하고, 채집해 얻은 것으로 식사를 하는 삶 말이다. ‘자연이라는 풍요로운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서 사는 삶’을 오늘부터 꿈꿔본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바이오및뇌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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