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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12-06 조회수 : 3,973
제 목 : [장하준 칼럼] 유럽 경제 위기의 교훈

[장하준칼럼]유럽 경제 위기의 교훈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경제학

 

 
 

유럽이 들끓고 있다. 2008년 이후, ‘독성’ 금융자산 때문에 금융기관이 부실화되고 부동산 거품이 터지면서 경기가 급격히 냉각되고, 그 결과 세수가 급감하여 재정적자가 급증하였다. 부실 금융기관에 대규모의 공적자금이 투입되면서 적자는 더 늘었다. 그 결과 독일, 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나라들은 대규모 재정적자를 떠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신용등급이 좋지 않아 국채에 많은 이자를 물어야 하고, 또 유로화에 가입한 탓으로 통화 평가절하를 통한 구조조정도 할 수 없는 유로화권 ‘주변부’의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특히 문제를 겪게 되었다.
 
 
 
 
아일랜드의 경우는 대규모의 금융 허브 전략을 추진하다가 엄청난 금융부실을 경험하여, 지난 3년간 국민 소득이 20%가량 줄어들었다. 재정지출을 크게 삭감하였음에도 금융기관에 워낙 공적자금을 많이 투입하여 재정적자가 국민소득의 33%에 달한다. 금융위기 전 30여년 가까이 유럽에서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았고 금융위기 전 10여년 동안은 거의 매년 재정 흑자를 거두었던 나라였던 것을 감안하면 ‘나라가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1932년 창당 이후 79년 중 61년 동안을 집권당으로 지내온 피아나 페일(Fianna Fail)이 2011년 2월 총선에서 득표율이 42%에서 17%로 떨어지면서 참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 2년여 동안 유로화권 위기의 진원지였던 그리스에서는 계속되는 과격한 긴축정책으로 사회가 붕괴 직전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11월 중순에 그리스 정치 ‘왕조’인 파판드레우(Papandreou)가의 3대째 총리인 조지 파판드레우(George Papandreou) 총리가 사임을 하고, 전 그리스 중앙은행 총재였고 유럽 중앙은행 부총재를 역임한 루카스 파파데모스(Lucas Papademos)가 선거를 거치지 않고 전격적으로 총리로 추대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스페인의 경우도 금융위기 전에는 경제성장도 빠르고 국민소득 2%에 해당하는 재정흑자를 내는 경제 모범생으로 여겨지다가, 부동산 거품이 터지면서 재정적자가 국민소득 대비 11%선으로 치솟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긴축을 하다보니 실업률은 20%가 넘고 사회적 불만이 팽배하여, 소위 ‘분노하는 자들’(indignados)이라는 사회 운동이 일어날 정도이다. 지난 11월20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집권 사회민주당이 참패하고 우파 민중당이 집권한 것은 예견된 결과였다.
 


위에서 언급한 주변부 국가들처럼 재정적자 문제가 심각하지는 않지만, 유로화 가입으로 정책 범위에 제한을 받으면서 최근에 와서 금융시장의 ‘의심’의 주요 초점이 되고 있는 이탈리아에서도 그리스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 1994년부터 세번 총리를 역임하면서 말도 많고 일도 많았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총리가 11월 중순 사임을 하고, 유명한 경제학자요 유럽연합의 위원이었던 마리오 몬티(Mario Monti) 교수가 뒤늦게 상원의원으로 추대된 후에 내각을 구성하고 총리 겸 재경부 장관에 취임한 것이다.

영국의 경우는 유로화에 가입하지 않아서 위기에 대처하기가 조금 수월했지만, 금융의존도가 워낙 높다보니 금융위기 이후 세수가 급감하고 공적자금 투입이 많아 재정적자가 국민소득 대비 12~13% 수준으로 올라갔다.

영국은 그리스 등 주변부 국가들에 비해서는 국가 신용등급이 높아서 그들만큼 급격히 재정긴축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2010년 5월에 집권한 보수당-자유민주당 연합정부는 ‘건전 재정’을 내세우며 복지지출의 급격한 삭감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지부진한 금융개혁에 분노한 젊은이들이 10월 중순에 런던 증권시장을 점령하여 두 달 가까이 농성 중이고, 11월30일에는 공무원들이 연금 삭감과 정년 연장에 반대하면서 수십년래 최대 규모의 파업을 감행하는 등 정세가 불안하다.

현재 유럽의 상황은 ‘먼 나라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경제의 문제에도 여러 가지 시사점들이 있다. 우선 우리나라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번 위기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유럽 일부국가들이 추구해 온,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정부가 열망하는 금융과 부동산 중심의 경제 모델이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일랜드는 1980년대 초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다국적 기업의 적극적 유치와 선별적 산업정책을 통해 제조업 중심으로 고도성장을 이루어 유럽의 ‘동아시아형 경제기적’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허황된 금융 허브 전략을 추구하다가 경제가 거덜났다. 그리스나 스페인의 경우는 유로화 출범 이후 금리가 내려가면서 시작된 부동산 거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그것이 터지면서 경제가 좌초되었다.

금융주도 경제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경우는 금융부문이 가라앉자 경제가 동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2008년 이후 파운드화가 30%가량 평가절하되었음에도 제조업 수출이 지지부진할 정도로 제조업이 허약해져 있다. 상당히 낙관적인 가정에 기초한 영국 현 정부의 발표에 의해도, 영국의 중간치(median) 가계소득은 잘해야 2015년에나 2002년의 수준을 회복할 것이라고 한다.

금융-부동산 중심의 경제들이 몰락한 데 비해 독일, 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 제조업 중심 국가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 성장도 빨리 회복되고 실업률이 도리어 줄어든 경우도 있으며 재정적자도 심각하지 않다.

이러한 유럽의 금융중심 경제들과 제조업 중심 경제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하여 이명박 정부에서 강화된 제조업 경시 풍조, 허황된 금융 허브론 등의 문제점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져야 한다.

제조업의 중요성에 더해 현재 유럽의 위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또 한 가지는 대규모 경제의 구조조정에 있어 국민적 합의 도출과 갈등 해소 기제를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현재 대규모 재정 삭감을 하고 있는 유럽 나라들에서는 실업, 복지 지출 삭감, 실질임금 하락 등으로 국민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 선거만 있었다 하면 좌파, 우파를 가리지 않고 집권당이 실권하고 파업, 시위, 점거농성 등이 줄을 잇는다.

가장 큰 문제는 지금 유럽 일부 국가들에서 진행되고 있는 복지국가의 급격한 축소는 2차 대전 후 유럽을 지탱해 온 ‘사회 계약’을 다시 쓰는, 엄청난 정치적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단순히 재정적자 감축이라는 기술적인 문제로 포장되어 정치적 토론과 합의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나 이탈리아가 그 극단적인 예들이다. 많은 그리스 사람들은 의원내각제 나라에서 국회의원도 아닌 파파데모스가 외압을 등에 업고 총리로 취임한 데 대해서 유럽연합의 ‘식민 지배’라며 분노하고 있다. 이탈리아 몬티 총리의 경우는 금권 행사와 스캔들로 점철된 베를루스코니의 ‘저질’ 정치에 질린 많은 국민들이 환영하고는 있지만, 그도 선거로 선출된 정치인이 아니고(총리 취임 며칠 전에 임명직 상원의원이 되었다) 내각을 완전히 기술관료로만 채웠다는 점에서 민주적 정당성에 취약함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정당성이 약한 개혁은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런 예들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유럽연합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들을 맺는 과정에서 겪어 온 갈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수결’이라는 것이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는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내세워 제대로 된 정치적 합의도 도출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틀을 완전히 다시 짜는 협정들을 협상하고 비준하였다.

이미 많은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갔지만, 지금이라도 복지제도를 강화하여 자유무역협정들에 따른 구조조정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하고 재기의 기회를 주어 사회적 갈등이라도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유럽 일부국가들처럼 계속된 갈등과 침체를 겪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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