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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10-31 조회수 : 4,278
제 목 :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 (16) 아랍의 봄 [2011.10.31 제883호]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 (16) 아랍의 봄 [2011.10.31 제883호]
 
그래도 봄은 온다 VS 혁명을 이끈 스마트 시대의 대자보
 
 
 
 
     
 
 
그래도 봄은 온다

경제 위기를 계기로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SNS로 저항을 조직·확산했던 21세기적 혁명의 가혹한 후폭풍은 언제쯤 가실까

 

 

이 글을 쓰는데 마침 ‘카다피’가 검색어 1위로 떠오른다. 기사를 열어보니 그가 땅굴에 숨어 있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 시민군에 체포됐단다. 잠시 뒤 그가 부상으로 사망했다는 뉴스가 올라온다. 이로써 리비아 내전도 대단원의 막을 내릴 모양이다. “쏘지 마시오.” 체포되기 직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한때는 성공적인 근대화 정책으로 오늘의 리비아를 만들고, 과감히 미국에 맞서 아랍 세계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인물인데, 생의 마지막을 장렬히 장식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민족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아랍 혁명’이라고 하면, 1970년대 이란에서 일어났던 호메이니 혁명이 떠오른다. 시민봉기로 미국의 지지를 받는 부패한 왕정을 전복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해 서구와 구별되는 아랍 민족 고유의 전통과 가치를 실현해나가는 그런 혁명. 하지만 2011년 1월 튀니지의 한 청년의 분신에서 시작된 아랍 혁명은 그와는 성격이 사뭇 달랐다. 시민들은 미국이 아니라 자신의 정권에 반대했다. 리비아 사태에서 보듯이 시민들은 외려 미국과 서구로부터 정치적·외교적·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이른바 ‘아랍 국가’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에, 뭉뚱그려 ‘아랍’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 위험을 무릅쓰고 상황을 단순화하면, 적어도 아랍 민중의 멘탈리티 속에서 주요한 이념적 전선은 ‘서구와 아랍’ 사이에 존재했다. 그것은 아랍 민중이 서구로부터 당한 뼈아픈 역사적 체험의 산물일 것이다. 아랍의 반미 정권들은 대립적 민족주의를 이용해 아랍 민중을 쉽게 통치할 수 있었다. 민족주의만큼 원초적 감정을 자극하는 이념은 없잖은가.

이는 친미적 정권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민중이 미국에 대한 자국 정부의 태도를 비난하는 사이에 정말 중요한 내부 문제, 가령 빈부 격차 같은 경제적 문제나 군사독재 같은 정치적 문제는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랍 세계가 오랫동안 민주주의라는 면에서 세계의 보편적 흐름과 동떨어져 있던 것은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0년의 아랍 혁명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아랍 민중이 처음으로 민족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민중은 정권의 타도를 원한다.”(Ash-sha’b yurid isqat an-nizam.) 아랍 민중은 왜 갑자기 이렇게 외치게 됐을까? 물러난 독재자들의 통치 기간을 보면 그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가령 튀니지의 벤 알리 대통령 24년(1987∼2011), 이집트의 무하마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 30년(1981∼2011), 예멘의 압둘라 살레 33년(1978∼2011),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42년(1969∼2011). 철옹성 같은 박정희 독재도 채 18년을 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들 정권이 이제까지 무너지지 않고 버텨왔다는 게 이상할 정도다.

 

경제 위기를 기저로 SNS로 폭발

하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경제에서 찾아야 한다. 독재정권도 경제가 돌아가는 한 웬만큼 버티기 마련이다. 물론 나라마다 경제 사정이 달라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아랍 혁명의 바탕에 경제 상황에 대한 민중의 깊은 절망이 깔려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가령 튀니지에서 일어났던 노점상의 분신자살은 결국 고학력 청년실업에서 비롯됐다. 리비아의 경우 세계적 신자유주의 물결에 편승해 그동안의 사회주의 정책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경제위기에 빠져들었다는 분석이 있다.

아랍 혁명에 경제적 배경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세계 자본주의 위기와 연관돼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약한 고리’에서 터져나왔다고 할까? 위기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신자유주의?),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 체제는 삐걱거리고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에서도 청년들의 반란이 일어나더니, 최근에는 미국에서마저 금융자본주의의 상징인 월가를 점령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주변국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심지어 이스라엘에서도 고물가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저항이 있었다.

한마디로 아랍 혁명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위기로 고통받는 민중이 그 좌절과 분노를 구체적인 타깃, 즉 장기 집권해온 독재정권을 향해 분출한 사건이었다. 경제위기로 인한 고통이야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선진국에 비해 아랍에는 절대적 빈곤층도 많고 통치 역시 비할 수 없이 가혹했기에 그 저항이 혁명으로 터져나온 것이다. 아무튼 이 혁명을 통해 아랍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세계의 보편적 추세에 합류했고, 그것을 보며 나머지 세계는 그동안 아랍에 대해 가졌던 ‘이질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번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였다. 아직도 지구상의 몇몇 국가는 인터넷마저 검열하려 하나, 인터넷을 받아들인 이상 아무리 폐쇄적 정권이라 하더라도 그 나라 국민이 세계의 다른 부분과 연결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자신할 수는 없지만,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제공되는 SNS는 그동안 아랍과 다른 세계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오해와 편견과 고립의 장벽을 정신적으로 해체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SNS는 아랍 국가들 내에서 저항의 대의를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검열과 통제는 ‘수직적’이나, 인터넷과 SNS의 소통은 ‘수평적’이다. 이 방식의 차이로 인해 신문과 방송을 통제하던 전통적 검열도 새로운 소통 앞에서는 힘을 잃게 된다. 사회학자 마셜 매클루언의 말대로 “미디어는 그 자체가 메시지”다. 즉, 미디어를 ‘통해’(through) 전달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미디어 자체 ‘속에’(in) 들어 있는 그것이다. 아랍의 독재자들이 미처 몰랐던 것은 휴대전화 ‘속에’ 내재된 이 폭발적 잠재력이다.

SNS는 저항을 물리적으로 조직하는 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레닌은 당 기관지 <이스크라>를 배포하는 라인을 그대로 당의 조직으로 구축했다. 아랍 혁명에서 SNS는 러시아 혁명에서 <이스크라>가 했던 것과 똑같은 역할을 했다. 차이가 있다면, <이스크라>를 따라 구축된 것이 ‘조직’(Organization)이었다면, SNS를 통해 출현한 것은 리좀 같은 ‘네트워크’(Network)였다. 네트워크를 통한 자발적 동원 방식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이미 촛불집회를 통해 경험했다.

 

피흘리는 민중에게 연대를

리비아의 내전은 끝났지만, 혁명은 계속되고 있다. TV를 트니, 영국 뉴스가 시리아에서 벌어지는 정부군과 시위대의 유혈 충돌 장면을 비춘다. 보도에 따르면, 정부에서 보낸 보안군이 시위에 가담한 마을을 봉쇄한 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가담자를 색출하고 있단다. 리비아와 달리 시리아의 운명은 가혹할 모양이다. 유혈 진압을 중단시키려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이 부결됐고, 시리아의 회원 자격을 박탈하려는 아랍연맹의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희생자 수는 3천 명을 넘었다. 얼마나 더 죽어야 할까?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 직후에 쓴 자신의 저서 <양키들아, 들어라>에서 쿠바 혁명에 영감을 준 원천으로 한국의 4·19 혁명을 들었다. 영광스러운 일이나, 우리에게도 혁명은 쉽지 않았다. 그 혁명 이후에도 민주주의가 올 때까지 27년을 더 싸워야 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봄은 온다. 아랍에도 온다. 아직도 거리에서 피 흘리는 시리아 민중에게 동지의 연대를.

진중권 문화평론가

 

 


혁명을 이끈 스마트 시대의 대자보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어떻게 재스민 혁명을 촉진했을까… 강력한 지역문화 기반의 아프리카 대륙에 불어온 SNS 바람

 

2009년 9월9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의 한 인터넷 회사는 흥미로운 시합에 참여하게 된다. 영화 한 편 크기(4GB)의 데이터를 80km 떨어진 곳에 누가 더 빨리 전하는지 경기를 치르게 된 것이다. 누구와 했느냐 하면, 바로 비둘기와.

아프리카 대륙의 인터넷 전송 속도가 지나치게 느려 사용자의 불만이 극에 달하자, 한 시민의 제안으로 이 시합이 성사됐다. 과연 승자는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비둘기였다. 평소 우편 배달이 특기였던 이 비둘기는 2시간6분57초 만에 80km나 떨어진 곳에 데이터 파일을 무사히 전달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시간 동안 인터넷을 통해 전송된 데이터는 겨우 4%였다. 비둘기의 완벽한 승리인 셈이다. 이 일화는 2009년까지만 해도 아프리카의 인터넷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해프닝(비둘기를 활용했던 수백 년 전만도 못한!)이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 뿌려진 IT 혁명의 씨앗

2년이 지난 지금, 아프리카의 인터넷 환경은 훨씬 나아졌다. 케냐의 나이로비나 이집트의 카이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같은 도시에선 인터넷 카페를 쉽게 볼 수 있고,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시민들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인터넷 전송 속도도 5배 이상 빨라졌다. 아직은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휴대전화가 여전히 귀한 편이지만, 지난 2년 사이 아프리카의 정보기술(IT) 환경은 놀랍도록 변했다.

IT 과학자들에게 아프리카는 흥미로운 곳이다. 유선 인터넷을 제대로 경험하지 않고 바로 모바일 환경으로 넘어간 첫 대륙이기 때문이다. 어느 대륙보다 지역문화가 발달한 이곳에 ‘스마트 모바일’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제공했을 때, 이들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어떻게 변모할지 과학자들은 주목하고 있다.

한 예로, 케냐 신문은 케냐의 주술사나 무당들이 최근 들어 스마트폰을 모객과 영업에 활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특급 무당들은 VIP 손님을 스마트폰으로 관리한다는 것이다. 주소록에 있는 고객에게 종종 ‘그들의 미래’에 대한 계시를 문자로 보내주고, 전화를 걸어 “얼마 전 당신에 관한 꿈을 꾸었는데,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일이 생길 것 같다. 조만간 한번 찾아오지 않겠나” 같은 영업용 안부 전화로 고객을 꾄다는 것이다. 이 신문 기사에는 스마트폰으로 고객을 관리하는 무당과 그렇지 못한 영세한 무당 사이에 수입 차이가 크다는 내용도 실렸다.

지난해 여름, 네트워크과학을 연구하는 아시아 과학자들이 아프리카 IT 과학자들을 돕는 모임에 참여하게 돼, 아프리카의 르완다와 케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들은 유럽의 지배를 받고 미국에 노예로 팔려간 수백 년의 역사 때문에, 유럽 과학자나 미국 기술자들에게 IT를 배우고 싶지 않아 한다. 그래서 그들이 손 내민 곳이 바로 아시아다. 특히 IT가 발달한 우리나라와 일본 과학자들이 이제 IT를 시작하는 아프리카에서 겪을 수 있는 문제, 이를테면 IP 프로토콜 표준, 개인정보 보안, 인터넷 뱅킹, 사생활 노출, 문화산업과의 연계 등을 조언해주고 있다.

이 연구모임을 주도하는 전길남 카이스트 명예교수는 내게 “어떤 분야에서든, 아프리카 사람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1등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역사의 최전선에 서본 경험’은 그들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 분야가 IT가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IT 혁명을 돕는 아시아 과학자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SNS 타고 조직된 저항의 네트워크

2009년 7월만 해도 케냐·탄자니아·우간다 동아프리카 3개국의 휴대전화 사용률은 각각 41%, 35%, 29%로 35% 내외였다. 세계 최저 사용률이었지만, 지난 2년간 이 수치는 50%를 넘어섰다. 동아프리카 각국의 정부는 2013년까지 휴대전화 사용률을 90% 이상 증가시키기 위해 정부 차원의 투자와 민간 투자 활성화를 준비하고 있다(아프리카에서 휴대전화 가격은 2만4천∼42만원인데, 이는 몇 달치 월급에 해당된다).

광케이블 기반 인터넷과 태양열 배터리 장착 휴대전화(아프리카에서만 가능한!)도 출시될 예정인데, 이것 역시 아프리카 IT 네트워크의 기반이 될 전망이다. 2009년 6월, 인도와 케냐의 몸바사 간 해저 광케이블 설비가 완료됨에 따라, 동아프리카 지역에 광케이블 기반 인터넷 사용 환경이 조성됐다. 현지 언론들은 이를 ‘인터넷 혁명’으로 표현한다(아프리카에서 인터넷 사용료는 분당 150~200원, 월사용료는 4만~8만원인데 그들에겐 ‘호사’ 수준. 게다가 요금은 무조건 선불제다). 해저 광케이블 설비에 이은 내륙 지역 광케이블 건설 공사의 조속한 완공이 이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네트워크 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모바일 네트워킹이 아프리카 문화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탐구하는 와중에, 이집트에서 시민정치 혁명이 일어났다. 한 청년단체가 국경일에 집회를 열자고 제안해 9만 명이 페이스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고, 페이스북을 통해 집회 장소가 정해지고 경찰 감시를 피하는 법을 그들끼리 공유하면서, ‘호스니 무라바크 대통령을 몰아내자’는 정치시위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2010년 여름, 경찰의 마약거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고문을 받고 숨진 칼레드 사이드의 소식이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알려지게 되고, ‘우리 모두가 칼레드다’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이 사건은 ‘대통령 축출의 시발점’이 됐다. 구글의 임원 와엘 고님도 인권운동가 폭행치사 사건에 항의하는 페이지를 페이스북에 개설해 시위를 주도하며 이집트 혁명에 기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튀니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봄, 지메일의 로그인 정보를 뒤지는 비밀경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평범한 시민 슬림 아마모우가 폭로하자 경찰은 그를 체포했고,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아마모우의 석방을 촉구했다. 정부의 부당한 검열에 항의하는 집회가 점점 확산되며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이 급물살을 탔다.

때마침 대학을 나오고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 때문에 과일 노점상을 해야 했던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분신자살을 한 사건이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져,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 일가의 불법 재산 축적과 관련해 불만으로 가득 찼던 시민들이 들고 일어서게 됐다. 튀니지 경찰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런 소식 또한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빠르게 퍼졌고, 결국 시위는 정권 퇴진 운동으로 확산됐다(튀니지 국민의 18%가 페이스북 회원이다!).

비로소 ‘재스민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통신과 교통 시스템이 열악한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정보를 확산시키고 공감대를 빠르게 형성하고 현실적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프리카·중동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스민을 시민에 빗댄 ‘민초들의 혁명’이 촉발된 것이다.

 

지금은 투명한 스마트 시대

일반 인터넷 사이트는 정부가 접속을 제한하면 이용이 어렵지만,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본사가 조처를 취하면 다른 주소로도 접속이 가능하다. 그래서 정부 검열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최근 이집트 정부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접속을 막았음에도 이용자 트래픽에 큰 변화가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게다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초보적 수준으로나마 자동번역 기술이 제공돼, 연대에 걸림돌이 되는 언어 장애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덕분에 미국과 유럽 등 서방세계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자체 평가도 있다.

러시아 출신 저널리스트 예프게니 모로조프는 ‘재스민 혁명’을 SNS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다. 시위 참가자 가운데 인터넷이나 SNS를 쓸 줄 모르는 이도 상당수였던 만큼, 인터넷 덕에 시위가 성공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는 주장이다. 게다가 이집트에서 시위 규모가 가장 컸을 때는 역설적이게도 정부가 인터넷을 차단했을 때다. 오히려 중국처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외국 SNS를 차단하고 인터넷을 ‘정권이 시민을 감시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페이스북과 트위터 같은 SNS는 의견을 교환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공감을 나누는 플랫폼이다. 그런 점에서 SNS가 정치에 대한 시민적 자각을 확대하고 현실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은 일리 있는 주장이다. 이미 지난 몇 해 동안 한국에서 벌어진 ‘시민정치’의 기운도 여기에 의존한 바가 크지 않았는가! 바야흐로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어떤 정치적 꼼수도 결국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투명한 스마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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