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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09-20 조회수 : 4,061
제 목 : [야! 한국사회] 시대의 표징 / 김규항

 

[야! 한국사회] 시대의 표징 / 김규항
 
 

안철수 현상은 보수가
‘합리적 보수로의
재무장’을 시작했음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이 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진보이거나 적어도 자유주의자이겠지만, 상상력을 발휘해서 보수의 처지에서 세상 돌아가는 걸 살펴보자. 단박에 위기감을 느낄 것이다. 청년 세대와 중간층 시민들은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수구 혹은 꼴통이라는 딱지가 붙은 기존의 보수에 더 이상 현혹되지도 설득되지도 않는다. 물론 여전히 보수 진영엔 수구와 꼴통 딱지에 걸맞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구보수’가 위협하는 건 자유주의자들이 늘 떠들어대듯 우리가 아니라 보수 자체다. 부와 사회적 기득권의 상당 부분을 가졌기에 여전히 위세당당하지만 보수의 성채는 몰락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머리가 돌아가는 보수라면, 이를테면 윤여준 같은 보수의 책략가라면 무엇을 해야 할까? 당연히 청년 세대와 중간층 시민들을 포섭할 수 있는 보수, 이른바 ‘합리적 보수’로의 변신이다. ‘안철수 현상’은 그런 거시적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드러낸다.

사실 안철수라는 인물에 대한 환호엔 거품이 있다. 우선 ‘성공한 시이오(CEO)’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시이오에서 물러날 무렵까지도 안철수연구소의 백신은 유명세는 있으되 전문가들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후 미국 유학과 교수 이력에서도 그다지 특별한 건 없다. 그는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보수도 진보도 아닌 소박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다. 이를테면 그는 “나는 노동자라는 말이 편안하지 않다. (중략) 이 말에서는 상하간의 계층 구분, 분리 의식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성공한 시이오이자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겨도 될 만한 능력과 경륜을 가진 지도자로 여겨진다. 그의 과장되고 미화된 이력들이 기존의 정치에 질릴 대로 질린 대중들의 ‘메시아 대망’과 절묘하게 조응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안철수라는 인물이 어떤가 혹은 안철수가 윤여준과 어떤 관계인가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안철수 현상이 한국 보수가 ‘합리적 보수로 재무장’하기 시작했음을 드러내는 시대의 표징이라는 사실이다. 안철수는 한나라당을 비난했다가 다음날 번복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와 한나라당과의 관계도 중요하지 않다. 보수 재무장의 목적은 한나라당이라는 기존 틀의 존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무장의 목적은 한껏 높아진 시민의식을 포섭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진보적 변화, 즉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착취의 구조 자체가 변화하는 걸 차단하고 지배계급의 이익을 보전하는 지속가능한 보수 정치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부시 정권(미국의 구보수)과 천양지차로 다른 느낌을 주면서 사상 최고의 빈곤율을 기록하며 부자들의 천국을 운영하는 오바마 정권은 그 생생한 모델일 수 있다.

구보수 세력은 결국 도태될 것이고, 구보수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게 유일한 존재 이유인 민주당 등 자유주의 세력은 일시적 혼란에 빠지지만 재무장한 보수와 자신이 결국 다르지 않음을 받아들이며 이합집산하게 될 것이다. 대중 노선을 걷는다며, 이명박 정권을 심판한다며 자유주의 세력에 몸을 섞어버린 일부 진보정치 세력이 소멸하는 건 물론이다. 결국 큰 그림으로 보자면 한국 사회는 거대해진 신보수(재무장한 보수 및 자유주의 세력)와 새로운 진보가 대립하는 구도로 가고 있는 셈이다. 윤여준 같은 사람들이 보수의 재무장을 위해 밑그림을 그리고 실천하듯 진보를 생각하는 진지한 사람들은 새로운 진보의 밑그림을 그리고 실천해야 하는 시점이다. 시대의 표징을 읽지 못하고 수구 꼴통 짓을 반복하는 보수가 보수의 걸림돌이듯, 만날 구보수 욕이나 반복하며 자유주의 세력의 재집권을 진보라 말하는 진보는 진보의 걸림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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