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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08-09 조회수 : 3,808
제 목 : [장하준 칼럼]금융시장의 격랑, 예견된 것이었다 장하준

[장하준 칼럼]금융시장의 격랑, 예견된 것이었다

 

장하준 |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2008년 금융위기가 시작된 지 3년이 되어간다. 급전직하하던 경기가 2010년 상반기부터 회복의 기미를 보이면서 주요 선진국 주식시장들은 2010년 말에 2008년 금융위기 직전의 주가지수를 회복하고, 특히 미국과 영국의 경우는 위기 이전보다도 주가가 더 오르는 ‘호황’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호황’은 주가가 올라가면 즐거운 금융시장 투자자, 그리고 경기침체 과정에서 엄청난 감원을 통해 이윤을 늘려 놓은 기업 등 일부에만 국한된 ‘그들만의 호황’이었다. 독일, 네덜란드 등과 같이 정부의 고용장려책과 기업과 노동자들의 협력 속에서 실업률이 거의 늘지 않거나 도리어 줄어든 나라들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업과 실질임금 삭감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고통 받는 사람들은 세계 언론과 정책결정에 영향력이 별로 없고, 호황을 누리는 큰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영향력이 크니, ‘상황 끝’을 외치는 목소리가 훨씬 크게 들렸다.

그러나 ‘이제 위기는 끝났다’는 환상은 지난 2주일 동안 무참히 깨졌다. 다시 한번 2008년과 같은 금융경색 현상이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가 감돌기 시작할 정도로 말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가을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지난 100여년 동안 필요할 때마다 의회가 거의 자동으로 갱신해줬던 국채 한도를 갑자기 못 올려주겠다고 버티고 나오면서, 불안감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미국 연방정부의 부도라는 전례 없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오바마 대통령은 증세 없이 정부지출 삭감만을 통해서 재정적자를 대폭 줄여야 한다는 공화당의 억지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7월 말에 힘겹게 타협을 했다. 일부에서는 이 타협이 하락 중인 주식시장을 살려낼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 효과는 몇 시간 가지도 못했고, 세계 주식시장의 하락은 도리어 가속되었다.

재정지출 삭감의 큰 원칙은 타협이 되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아직도 협상할 것이 많은데, 이번 미국 정치인들이 보여준 모습에 비추어 보면 앞으로 갈 길이 험하다는 관측이 득세했고, 무엇보다도, 지난 6개월 사이 미국 경제의 회복세가 완연히 둔화되면서, 소위 ‘더블딥’의 가능성이 다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그리스에 대한 2차 구제금융으로 일단 봉합되는가 했던 유로 통화권의 재정적자 위기가 다시 터졌다.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 세 나라로 그치는가 했던 재정위기가 스페인에 이어 이탈리아에까지 퍼진 것이다. 국제 국채시장에서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채 금리가 6% 이상으로 급등하여, 더 이상 금리가 오르면 구제금융을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유로 통화권이 지금까지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 세 나라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것 가지고도 합의가 안 되어 쩔쩔맸는데, 경제규모가 이 세 나라를 합한 것의 2배 가까이 되는 스페인(2008년 기준으로 1조4560억달러 대 8610억달러), 그리고 앞의 네 나라를 모두 합친 것만한 이탈리아(4개국 국민소득의 합은 2조3170억달러, 이탈리아의 국민소득은 2조1090억달러)가 위기에 빠지면, 유로화의 존재 자체가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금융시장이 요동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주말에는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 중 하나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tandard & Poors·S&P)가 역사상 최초로 미국 정부 채권의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한 단계 강등하였다. 3개 기관 중 한 곳에서만 강등을 했고, 한 단계 내려간다고 해도 이자율 상승요인은 크지 않으니, 이 강등이 당장 미국 정부의 재정 곤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기적으로 금융시장에 끼치는 심리적 충격은 상당할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안전 자산’을 대표하던 미국 국채가 그 지위를 잃으면서 국제 금융의 흐름 자체가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회복하는 듯하던 세계경제가 왜 다시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 우선, 재정적자 문제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에 대한 대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지금 주류적인 견해는 재정적자가 민간수요를 억누르기 때문에 경기 회복을 위해서는 재정적자를 줄이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계경제의 문제는 과다한 부채 때문에 민간부문이 소비지출, 그리고 특히 투자지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지출을 줄이면 경기가 회복되기는커녕 후퇴하게 된다.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이 초인적으로 재정지출을 삭감해도 경기 회복이 안되는 것이 그 한 예이고, 또 작년 5월 집권한 영국의 보수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가 대규모 정부지출 삭감 계획을 발표, 시행하면서부터 지난 1년 동안 영국 경제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 또 다른 좋은 예이다. 미국 경제의 회복세가 급격히 둔화되고 있는 것도, 금융위기 초기에 미국 정부가 실행한 경기부양책이 끝난 것에 기인한 점이 크다.

둘째로, 재정적자를 줄이는 것이 경기 회복에 도움이 되는지를 떠나서, 재정적자의 원인에 대한 진단, 그리고 그에 따른 해결책이 잘못되어 있다. 지금 주류적인 견해는 재정적자가 과다한 정부지출 때문이고, 따라서 정부지출, 특히 복지지출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많은 나라에서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은, 금융위기로 민간부문의 경제활동이 급격히 위축되면서 세수가 급감했기 때문이지, 정부지출이 늘어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나라의 정부들이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세금을 올리기보다는 복지비를 비롯한 지출 삭감에 집중하고 있다. 미국 공화당 같은 경우는 세금을 하나도 올려서는 안 된다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재정적자의 주원인이 금융위기로 인한 세수 감소라면, 그 가장 큰 책임은 결국 금융투기에 몰두한 금융기관들에 돌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그 해결책으로 복지비를 대규모 삭감하는 정책을 펴게 되면, 당장은 국민들이 받아들일지 몰라도, 결국은 갈등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는 이미 사회갈등이 심각한 상황에 달했다. 갈등이 심해지면, 더 이상의 지출 삭감이 불가능해지고, 무엇보다도 사회가 불안해져 경제활동이 위축되어 세수가 더 줄어들어 적자를 늘릴 수 있다.

셋째, 장기적으로 더 큰 문제는 지난 3년간 금융규제 개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선, 미국의 프랭크-도드 법안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이루어진 금융규제 개혁도 없다. 그나마 프랭크-도드 법안도 아직 시행령을 마련하는 중이고, 일부에서는 경기 회복을 돕기 위해 그 집행을 늦추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세계경제는 지난 2008년 위기를 창출한 바로 그 금융시스템에 그대로 의존해서 운영되고 있다.

미국 서브프라임 위기 때 얼마나 신용등급을 엉터리로 매겼는가가 드러난 S&P, 무디스, 피치 등 3대 신용기관이 아직도 국가신용등급을 매기면서 세계 각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선물시장 투기에 대한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조금만 세계경제가 불안해지면 원자재가격이 치솟아서 원자재 수입국, 특히 후진국들이 큰 피해를 본다. 금융권에 만연한, 상만 있고 벌은 없는 보상체계에 대해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아, 아직도 금융권에는 남의 돈 가지고 장사하다가 잘 안되면 (미리 약속 받은 고액의 퇴직금을 받고) 물러나면 그만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지금까지도 정부 구제금융을 받아 운영되는 금융기관들마저도, 2008년 한 해만 거르고는, 예전처럼 천문학적인 보너스를 지급하고 있다. 기업에 돈을 빌려주었다가 잘못되면 파산법을 통해 채권자도 손해를 보아야 하는데, 이번 유럽 사태에서 보듯이 정부에 돈을 빌려 주었다가 잘못되면 채권자는 절대 손해를 보지 않고 돈을 빌린 나라 국민들이 고통을 전부 부담하는 관행도 ‘국가파산법’의 도입을 통해 고쳐져야 한다.

현재 경제문제는 ‘재정적자’라는 형태로 표출되고 있지만, 그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결국 잘못된 금융제도의 문제이다. 강력한 금융개혁을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현재 재정위기를 요행히 넘긴다고 해도, 위기 상황이 계속 터질 것이고 세계경제의 앞날은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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