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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07-12 조회수 : 4,469
제 목 :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 ⑧ 뽀로로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 ⑧ 뽀로로 [2011.07.04 제867호]
 
어른들은 모르는 멋진 세계(진중권) vs 뽀롱뽀롱 눈으로 먹는 사탕(정재승)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은 연임에 성공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일 것이나, 어린이 세계에도 유엔이 있다면 전세계의 유아들은 역시 만장일치로 ‘뽀로로’를 사무총장으로 뽑을 것이다. 유튜브에 들어가면 전세계의 유아들이 TV 앞에서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이하 <뽀로로>)에 몰입한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뽀로로>를 시청하는 아이들의 태도는 거의 종교적 경건함에 가깝다. <뽀로로>는 국적이나 인종의 차이를 넘어 범지구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듣자 하니 이미 전세계 80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유아들이 <뽀로로>를 시청한단다.

 

다른 종과 대화하는 초자연적 현장


<뽀로로>의 권능을 증거하는 전설적 이야기. 서너 살 먹은 아이가 장난을 치다가 주전자에 빠져 몸이 끼어버렸다. 결국 119 구급대가 출동해 주전자에 낀 아이의 몸을 빼내어야 했는데, 구조 작업이 벌어지는 내내 아이는 전혀 그 나이답지 않게 울거나 떼쓰지 않고 어른 뺨칠 정도로 놀라운 평정심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뽀로로>를 시청하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인터넷에는 아이들을 휘어잡는 <뽀로로>의 위대한 권능을 증거하는 부모들의 세속적 간증이 차고 넘친다. “우리 아이의 절반은 <뽀로로>가 키워줬어요.”

<뽀로로>를 찬양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노선이 있다. 하나는 세속적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노선이다. 세속적 노선을 따르는 이들은 뽀로로를 ‘뽀통령’이라 부른다. 그들에게 뽀로로는 정치적 군장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 노선이다. 이 노선을 견지하는 부모들은 뽀로로를 ‘뽀느님’이라 부른다. 울고 불며 떼쓰는 아이를 달래는 일, 괴성을 지르며 사방천지 뛰어다니는 아이를 말리는 일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런 아이들을 일거에 진정시키는 것은 ‘인간’ 부모의 눈에 초자연적 이적으로 보일 수밖에.

두 노선이 서로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뽀통령을 모시는 이들이라고 그분을 뽀느님으로 섬기기를 꺼리지 않고, 뽀느님을 섬기는 이들이라고 그분을 뽀통령으로 모시는 데 이견을 달지는 않을 것이다. 천년왕국이 도래하면 어차피 하느님이 세속의 군주들을 제치고 직접 이 땅을 통치하신다지 않는가. 한마디로 뽀로로는 제정일치의 수장, 단군왕검 이후 최초로 한반도에 다시 정치적 군장과 종교적 수장을 겸하신 분이다. 이러다가 민족의 토템이 곰에서 펭귄으로 바뀌는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겠다.

펭귄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은 과거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핑구>를 생각해보라. <핑구>도 당시에 제법 인기를 끌었지만, 몰입도에서는 <뽀로로>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아마도 감정이입에 한계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핑구>도 의인화된 형상이나 외관이 인간보다는 외려 펭귄에 가깝고, 행동은 아이보다는 어른에 가깝기 때문이다. <핑구>에서는, 가령 유리 노르스테인의 <안개 속의 고슴도치>에 등장하는 곰과 돼지처럼 친구 사이의 따뜻한 우정 같은 것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유난히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것은 유년기의 ‘애니미즘’과 관련 있을 게다. 영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은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한다. 이는 모든 사물에 생명이 있다고 느끼는 애니미즘의 감정과 통하는 데가 있다. 일찍이 예이젠시테인은 월트 디즈니를 부러워했다. 자기와 달리 디즈니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에이젠시테인의 열광에는 아마 아주 오래전 인류가 아직 유년기에 갖고 있던, 그러나 진화 과정에서 버려야 했던 애니미즘 감정이 깔려 있을 것이다.

게다가 <뽀로로>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인간은 성장 과정에서 자신을 동물과 구별함으로써 정체성을 형성하지만, 유아들은 동물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른들은 동물을 3인칭으로 간주하나, 아이들은 동물과 1인칭·2인칭의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사실 자신과 종(種)이 다른 존재와 대화가 가능하다면, 그처럼 매력적인 세계도 없을 것이다. 유아들은 그렇게 멋진 세계에 산다.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에 유아들이 매혹당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5분 갈등’, 서사의 전략

 

하지만 <뽀로로>가 누리는 특별한 인기를 동물 애니메이션 일반의 특성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흔히 그 인기 비결로 지적되는 것이 캐릭터의 매력이다. 제작진은 “아이들과 똑같은 체형인 3등신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듯한 느낌이 들게 한 점이 적중한 것 같다”고 말한다. 아직 보행이 자유롭지 못해 뒤뚱뒤뚱 걷는 것도 4~5살 유아의 특성과 일치한다. 게다가 <뽀로로>는 자주 정면을 응시하며 TV를 보는 아이들과 눈을 맞춘다. 아무래도 이것이 ‘감정이입’을 더 쉽게 해줄 것이다.

아이들은 왜 자신들을 이 고글을 쓴 펭귄과 쉽게 동일시하는 걸까? 뽀로로는 전혀 모범적이거나 이상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뽀로로는 크롱에게 짓궂은 장난을 하기도 하고, 에디의 장난감 비행기를 망가뜨리기도 하고, 루비가 구워놓은 맛있는 쿠키를 몰래 훔쳐먹기도 한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에 겁먹은 친구들을 놀려주기 위해 밤에 변장을 하고 친구들을 찾아가 겁주기도 한다. 때로 ‘못된’ 짓을 한다는 점에서 뽀로로는 평범한 유아의 모습 그대로다. 이것이 유아들에게 쉽게 감정이입되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뽀로로>에는 펭귄 뽀로로 외에도 크롱(공룡), 에디(여우), 루피(비버), 포비(백곰), 패티(펭귄) 등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해리(새)와 뿌꼬(고래)도 있다. 각각의 캐릭터는 글자 그대로 저만의 ‘캐릭터’를 대표한다. 여우 에디는 발상이 뛰어난 발명왕, 비버 루피는 얼굴에 이미 수줍음이 묻어나며, 백곰 포비는 덩치만큼 육중한 신중함으로 아이들의 맏형 노릇을 한다. ‘크롱, 크롱’ 외에는 몇 마디 말을 못하는 공룡 크롱은 아이들에게 아직 말을 못하는 아기 동생을 연상시키지 않을까?

뽀로로 마을은 어른이 없는 꾸러기 세상이다. 거기에는 공부를 하라고 다그치는 사람도 없고, 말 안 듣고 소리 지른다고 혼내는 사람도 없다. 로켓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다 떨어져도 다치지 않고, 썰매를 타고 달리다가 엎어져도 아파하지 않는다. 바람이 곧 현실이 되는 유아들의 이상 세계 속에서 각자 성격이 다른 여러 캐릭터들이 부대끼며 제법 갈등을 일으키고, 그 갈등을 어른의 도움 없이 자기들끼리 해결해낸다. 뽀로로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여섯 살 아이들이 실제로 일상에서 겪을 법한 이야기다.

뽀로로 마을로 날아간 아이들은 거기서 어른의 도움을 받지 않는 유사-주체가 된다. 수용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까지 유아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에는 이렇다 할 갈등 구조가 없었다. 갈등 구조가 있는 애니메이션은 유아에게는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웠다. 이 경우 유아들은 형이나 언니가 보는 애니메이션을 따라 보는 수준에 머문다. 하지만 <뽀로로>는 유아들도 이해할 수 있는 갈등 구조를, 유아들이 집중할 수 있는 최대 한도인 5분 남짓한 시간 안에 해결해준다. 이로써 유아들은 수용의 주체가 된다.

 

동심이 없다면 공감도 없다

 

하지만 이 모두는 어차피 어른들의 추측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물을 수도 없는 일. ‘왜 재미있냐?’고 물어봐야, 고작 “재밌으니까”라는 대답을 들을 테니까. 바나나가 맛이 있는 데도 이유가 있단 말인가? 너희에게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 마음이 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결코 뽀로로 마을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래도 한 가지 이 나이 되도록 <뽀로로>에 진정으로 공감 가는 요소가 있긴 하다. “노는 게 제일 좋아 뽀롱뽀롱.”

 

 


 

 

 
 
 
» 뽀로로는 친구들과 숲속마을에 모여 산다. 왼쪽부터 루피, 포비, 뽀로로, 에디, 패티, 하늘의 새는 해리. EBS 제공
 
 
 

뽀롱뽀롱 눈으로 먹는 사탕

과학자 아빠가 관찰한 ‘뽀로로 앓이’… 화려한 색감, 일상적 친근함, 힘을 뺀 이야기 등 유아들의 욕망을 한 화면에 담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바이오및뇌공학과

 

서너 살밖에 안 된 애들을 데리고 여행을 가려면 반드시 챙겨야 할 필수품이 있다. 바로 <뽀롱뽀롱 뽀로로>(이하 <뽀로로>) DVD. 칭얼거리거나 짜증낼 때 <뽀로로>만한 특효약도 없다. 보여주려고 DVD 플레이어 앞에만 가도, 애들은 TV 앞에 모여앉아 머리를 TV 안으로 박을 태세다. 2시간 집중도 아마 끄떡없을 게다. 다년간의 관찰 결과, <뽀로로>에 대한 아이들의 몰입 시간은 초자연적인 수준이다.

 

뽀로로는 영락없이 우리 애들

 

내게 <뽀로로>란 ‘아이들의 측좌핵(nucleus accumbens·쾌락의 중추)을 활성화하는, 눈으로 먹는 사탕’이다. 주기적으로 보지 않으면 아이들은 화를 내고, 한동안 못 보면 금단증상을 보인다. 길거리에서 뽀로로 캐릭터 사진만 봐도 집에 가서 보겠다고 조르고, 뽀로로 인형만 봐도 사달라고 난리다.

듣자 하니 이젠 전세계 아이들이 비슷한 증세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일본·프랑스·영국 등 전세계 110여 국에 이미 수출했고,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를 활용한 완구·출판·가구·문구 등 캐릭터 매출도 2009년까지 판매 매출 누적액 기준으로 약 83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뽀로로>를 보겠다며 서너 살 애들이 TV 앞을 떠날 줄 모르는 이 비정상적인 사회현상은 이제 유엔이 나서서 풀어야 할 국제적 이슈가 될 전망이다. 도대체 <뽀로로>의 무엇이 우리 아이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과학자로서 <뽀로로>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뽀로로> 시청자’를 옆에서 다년간 관찰한 아빠로서 판단하기에, <뽀로로>의 매력은 ‘애들이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와 덜 교육적인 이야기’에 있지 않나 싶다.

<뽀로로>의 등장인물은 지구 생태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동물들의 조합이다. 남극 펭귄 뽀로로와 북극곰 포비, 북미 산악지대에 어슬렁거릴 법한 여우 에디와 강가의 비버 루피, 그리고 6500만 년 전에 멸종한 공룡 크롱 등 전세계에서 가장 귀엽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동물들을 서식지와 상관없이 한데 모았다. 이처럼 캐릭터를 동물로 한 것은 수출을 대비한 글로벌 전략으로 유효해 보인다(<뽀로로>에 등장하는 모든 책이 영어책인 것을 아는가? 처음부터 글로벌 전략을 염두에 둔 설정일까? 설마!).

서너 살 아이들처럼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크고 팔다리는 짧은 2등신. 크롱처럼 “크롱크롱”이라는 옹알이만 할 줄 아는 녀석부터 펭귄처럼 뒤뚱뒤뚱 걷는 녀석까지 유아들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실제 사람이 아니라서 해외에서도 공감할 수 있게 보편성을 가지면서도 외형이나 행동이 아기들을 쏙 빼닮아 유아들이 열광할 만하다. 아마도 아이들은 자신과 체형이나 걸음걸이가 비슷한 캐릭터를 보며 친구처럼 동료의식을 느꼈을 것이다(그 또래의 아이들은 만화에서 사람 캐릭터보다 동물 캐릭터를 더 친근하게 생각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강렬한 색감과 다채로운 성격을 부여한 것도 캐릭터의 매력을 더하는 데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캐릭터가 산재한 쇼핑몰 매대 위에서도 <뽀로로>의 캐릭터들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우리 애들도 언제 어디서든 뽀로로와 친구들은 가장 먼저 발견한다. 파란색·노란색·분홍색·흰색·초록색 등 화려하면서도 귀여운 색감은 캐릭터가 동물을 넘어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미지의 존재’처럼 느껴지게 만든다(그런 의미에서 강아지나 고양이, 토끼 같은 친근한 동물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하늘을 날고 싶어 매일같이 파일럿 모자와 고글을 쓰고 있는 펭귄 뽀로로는 영락없이 우리 애들이다. 하늘을 날고 싶지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펭귄,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서!”라고 노래하는 뽀로로는 서너 살의 욕망을 그대로 대변한다. 크롱은 뽀로로를 능가하는 장난꾸러기인데, 말은 잘 못하지만 개념 없이 장난이 심한,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동생’을 연상시킨다. 아이들은 크롱의 장난에 종종 당하는 뽀로로를 보며 동정과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뽀로로도 반격을 시도하고 꾀를 내지만, 이내 번번이 당하고 만다).

 

3D로 표현된 배경도 몰입 요소

 

유아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5분 내외, 따라서 유아용 애니메이션은 5분 안에 모든 재미있는 요소를 쏟아부어야 한다. 5분짜리 스토리에 무슨 ‘재미’를 담을 수 있을까 싶지만, 어른인 내가 봐도 <뽀로로>는 재미있다. 짧지만 기승전결의 구조가 잘 담긴 이야기가 우선 흥미롭다. 가끔 감동도 준다. 종종 밋밋하게 끝나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겐 기승전결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섬세한 묘사가 재미를 더해준다. 지구를 구하거나 예쁜 공주로 변하는 식의 영웅모험담이 아니라, 서너 살 아이들이 일상에서 겪는 소소한 경험을 다루다 보니, 애들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느낌을 받으며 공감한다. 우상화보다는 친근감에 무게를 두었다고나 할까? 서로 골탕 먹이고 장난치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우리 애들이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굉장히 섬세하게 우스꽝스럽다. 작은 동작에도 아이들의 웃음이 빵 터질 수 있도록 의외로 소소한 ‘슬랩스틱’이 많다. 슬랩스틱의 숨은 공헌자는 단연 에디와 패티다. 이들이 뽀로로나 루피와 벌이는 슬랩스틱코미디가 5분 동안 아이들을 완전히 몰입하게 만든다. 너무 교육적이려고 노력하지 않고 힘을 뺀 이야기가 오히려 아이들에게 어필했다고나 할까?

많이들 주목하진 않지만 개인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대목은 ‘3D로 표현된 배경’이다. 문화신경과학(Cultural Neuroscience)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 따르면, 만화나 그림책을 볼 때 서양 아이들은 인물에 주목하는 반면에 아시아 아이들은 ‘배경과 함께 선 인물’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서양 아이들은 어떤 상황에든 금세 캐릭터를 인지하지만, 동양 아이들은 배경과 함께 인물을 파악하기 때문에 배경이 바뀌면 캐릭터를 다르게(혹은 낯설게) 인지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아이들은 배경에 민감하다는 얘기다(그래서 서양의 유아용 만화는 오랫동안 배경 묘사가 최소화돼 있다. 요즘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또 다른 펭귄 만화 <핑구>에 비해 <뽀로로>의 탁월한 점 역시 3D로 표현된 배경이다. 침엽수들이 울창하고 눈으로 덮인 숲 묘사가 실감나며, 낚시를 하거나 숲 속 오두막에서 놀 때 묘사된 뒷배경은 아이들이 몰입할 만큼 큰 즐거움을 준다. 침엽수림 속에 있는 펭귄 뽀로로와 패티, 낚시하는 공룡 크롱처럼 ‘공간과 캐릭터의 이질감’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보더라도 오래도록 ‘낯선 광경’으로 신선함을 줄 수 있다.

 

“뽀로로의 엄마·아빠를 찾아주세요”

 

<뽀로로>를 수출역군으로만 여기는 기성세대에게 뽀로로와 루피, 크롱과 에디, 포비는 그저 ‘기특한 녀석들’일 것이다.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려는 ‘시각적 사탕발림’으로 여기는 부모들에게 <뽀로로>는 ‘이걸로 우리말을 좀 배웠으면’ 하는 교육용 교재일 뿐이다.

그러나 <뽀로로>는 ‘서식지에서 벗어난 고아 동물들이 부모의 보살핌 없이 스스로 생활을 꾸려가는 이야기’를 담은 엽기적인 애니메이션이다. 그들은 내일을 걱정하진 않지만, 보살핌을 기대하지도 않는 숲 속에 버려진 고아들이다. 바라건대,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EBS 앞에서 언젠가 “뽀로로와 패티를 남극으로 돌려보내주세요!” “뽀로로와 친구들을 부모의 품으로 돌려보내주세요!”라고 피켓 시위하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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