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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06-20 조회수 : 3,969
제 목 :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 ⑦ 학교짱 [2011.06.20 제865호]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 ⑦ 학교짱 [2011.06.20 제865호]
 
일그러진 영웅들의 힘자랑(진중권) vs 불안과 열패가 불러온 야만과 폭력(정재승)
 
 
 
 
 
 
 
 
 
»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화
 
 
 

일그러진 영웅들의 힘자랑

동물의 습속과 닮은 ‘짱’이라는 이름… 학교에서 현재의 권력을 약속하는 힘, 덜 자란 어른들이 만들어낼 폭력의 맹아

 

진중권 문화평론가

 

일본 규슈에서 오키나와로 길게 이어지는 열도 중에 ‘야쿠시마’라는 섬이 있다. 이 섬에는 ‘야쿠자루’라 불리는 덩치가 작은 토종 원숭이가 서식하고 있어, 자동차로 산길을 달리다 보면 도처에서 이 조그만 원숭이 무리를 만나게 된다. 한번은 잠시 차를 멈추고 내려 조심스레 한 무리의 야쿠자루에게 다가갔다. 다른 놈들은 슬슬 피하는 눈치였지만, 한 놈이 당당하게 내 앞길을 가로막고 나선다. 그놈이 이른바 무리의 ‘짱’인 모양이다. 조그만 녀석이 그 주제에 무리를 보호하겠다고 나서는 데 어떤 감동이 존재했다.



동물에서 인간으로

 

무리 속 개체들이 서로 힘자랑하는 것은 동물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발정기 때 대부분의 수컷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힘을 겨룬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직 한 놈이 무리의 모든 암컷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이는 흔히 우월한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 무리의 생존에 유리하다는 ‘섭리’로 설명되곤 한다. 굳이 생식의 필요가 아니더라도, 많은 종류의 동물이 무리의 ‘짱’을 선출하기 위해 서로 힘을 겨룬다. 아무래도 우월한 놈이 리더가 되는 것이 종족의 생존 가능성을 좀더 높일 것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러시아 비행청소년들의 행태를 동물행동학 관점에서 조명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폭력으로 타인을 제압하는 이들의 독특한 제스처가 동물원의 원숭이 무리 사이에서도 관찰된다는 내용이다. 거만한 자세로 어깨를 으쓱이며 걷는 것이라든지, 상대에게 눈을 아래로 깔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든지, 맘에 안 들면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 등은 원숭이 무리의 ‘짱’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비행청소년과 두목 원숭이 사이에 차이랄 게 있다면, 한 놈의 피부에는 털이 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인간이 동물 세계에서 벗어난 뒤에도 이 습속은 여전히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예를 들어 J. G.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는 ‘왕의 살해’라는 원시적 관습이 기록돼 있다. 원시인에게 왕은 자연의 생장력을 상징했다. 자연이 풍성하려면 왕이 젊고 건강해야 한다. 자신의 건재를 증명하기 위해 왕은 늘 다른 사람의 도전을 물리쳐야 한다. 한동안 그는 왕좌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젊음과 건강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일. 언젠가 그는 더 젊고 건강한 자에게 살해당할 수밖에 없다. ‘짱’은 이렇게 늘 위협을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학교라는 정글

 

학교는 또 다른 세계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이 부모에게조차 차마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은, 학교라는 곳이 현실 사회의 논리가 미치지 않는 또 하나의 독립국가임을 보여준다. 그 세계의 시간대는 사회계약 이전의 시대, 말하자면 힘이 곧 정의였던 청동기의 영웅시대에 가까울 것이다. 아이들은 두 세계에 속한다. 성인의 세계 속에서 아이들은 보호의 ‘대상’이나, 학교라는 세계 속에서 아이들은 행위의 ‘주체’다. 아이들에게 더 실재적인 것은 후자다. 그들이 ‘주체’가 되어 행동하는 세계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이기 때문이다.

학교는 자연과 사회의 중간에 존재한다. 학교란 그 정의상 아직 사회화가 덜 된 인간을 사회화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 질서가 수립되는 방식은 대단히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른들은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서열을 매기려 하나, 정작 아이들 사이에서 서열은 ‘싸움’을 잘하는 것으로 매겨진다. 공부는 미래 권력을 약속할지 모르나, 그것이 현재에 권력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현재의 권력을 보장하는 것은 역시 싸움이다. 공부는 미래에 속하나, 싸움은 현재에 속한다. 현재는 언제나 미래보다 생생할 수밖에 없다.

자장면을 시켰더니 마침 배달 온 사람이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학교짱이더라는 얘기.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이건 실화라기보다 꾸며낸 얘기로 보인다. 부당한 일을 당한 이는 어떤 식으로든 그 부당함을 보상받기 원한다. 나를 괴롭힌 자가 아무 처벌을 받지 않고 멀쩡히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분통 터지는 일도 없을 게다. 정의는 회복돼야 한다는 소박한 바람이 이런 종류의 통쾌한(?) 복수담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는 나쁜 짓 한 자는 죽어서 지옥 간다는 비굴한(?) 믿음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 '덜 자란 어른'은 사회에서도 여전히 '학교짱' 행세를 하려 든다. 노동자를 야구방망이와 주먹으로 때리고 '맷값'이라며 2천만원을 건넨 최철원 전 M&M 대표가 조사를 받으려고 지난해 12월2일 서울지방경찰청에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사회라고 학교와 크게 다르겠는가? 솔직히 ‘싸움’ 대신에 ‘학력’ ‘재산’ ‘출신’이 사용될 뿐, 더럽고 치사하기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성인의 사회에서 완력을 쓰는 자들은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난다. 사회의 중심에 들어가려면 ‘완력’보다는 머리를 써야 한다. ‘권력’이란 물리적 완력이 아니라 합법적 수단으로 타인을 움직이는 물질적 ‘능력’을 말한다. 그 능력을 흔히 ‘정치’라 부른다. 물론 학교에도 정치라 할 만한 게 있다. 가령 특정한 아이를 ‘왕따’시키는 것은 직접 완력을 가하는 것보다는 꽤 진화한 형태의 폭력이다.

학교 안에는 나중에 사회에서 발현될 모든 폭력과 권력의 맹아가 존재한다. 우리 문단에는 이문열이라는 이름의 탁월한 ‘17세기 작가’가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 정신성의 현대적 수준에 도달한 몇 안 되는 예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적어도 이 작품이 한국 문학이 낳은 최고 걸작 중 하나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소설 속의 엄석대는 그저 완력만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아이들을 자신의 권력 아래 잡아놓는다. 교실에서 그가 행사하는 것은 미셸 푸코가 말한 ‘미시권력’이다.

엄석대는 아이라기보다 성인에 가깝다. 그의 폭력은 소박하기보다 성숙하다. 그는 교실에서 성인이 사회에서 행사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권력을 휘두른다. 엄석대라는 아이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학교짱’ 중에서 가장 진화한 종족에 속할 것이다. 일반적인 학교짱이 단순무식한 청동기의 다혈질적 영웅이라면, 엄석대는 냉정한 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근대적 유형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학교짱’은 학교 밖에서는 더 이상 짱이 될 수 없다. 학교 밖에서 짱을 먹는 것은 외려 엄석대 같은 냉정한 유형의 인간들이다.

 

사회에서도 짱 행세하는 어른들

 

학교를 졸업했다고 다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다 커서도 학교짱 수준의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이 있다. 최태원 SK회장의 사촌동생인 최철원 M&M 전 대표는 한 대에 100만원씩 쳐주겠다며 야구 배트로 노동자를 구타했다. 고교 시절 학교짱 모시고 껄렁하게 놀던 아이들은 이런 걸 전문 용어로 ‘깽값 문다’고 표현했다. 유성기업이라는 곳에서는 파업에서 복귀하는 노동자에게 “나는 개다”라고 복창하게 했다고 한다. 발레오전장시스템스코리아라는 회사에서는 50대 노동자들을 세워놓고 ‘오리걸음’ ‘한강철교’ 등의 얼차려를 준다고 한다.

학교짱이야 학창 시절에 잠깐 철이 없어 하는 짓이라 치자. 성인이 되어서 이런 동네 양아치 수준의 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개체발생적으로는 발달장애일 것이고, 계통발생적으로는 진화의 순서를 거스르는 종(種)의 퇴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 회사를 각하께서는 노사상생의 모범으로 칭찬했다고 한다. 각하의 장점이 이른바 ‘현장 정치’가 아닌가. 산업현장의 실태를 직접 파악한다는 차원에서 잠깐 이 회사에 입사해 오리걸음과 한강철교를 하시면서 본인이 극찬한 그 흐뭇한 노사상생의 분위기를 직접 체험해보시는 건 어떨까?

 

 


 

불안과 열패가 불러온 야만과 폭력

짧은 순간의 우월감 느끼려고 교실에서 주먹을 겨루는 아이들… 굴종의 다른 이름이 된 의리, 얄팍해진 우정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2개 리그’에 출전해야 한다. 서로 성적을 경쟁해야 하는 ‘공부 리그’와 누구 주먹이 더 센지를 가르는 ‘싸움 리그’. 학생들은 날마다 두 리그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리그 안에서 더 높은 숫자를 가진 학생들은 학교 생활이 좀더 편하다.

 

친구 안에 형성된 권력구조

 

공적 영역에서 수행되는 공부 리그의 경쟁은 온 나라의 관심거리이기도 하다. 내가 우리 학교에서 어느 정도 순위에 있는지는 내신으로 가르고, 다른 학교 학생들과의 비교는 수능을 통해 이뤄진다. 초등학교부터 12년간 공부 리그에서 뛴 결과는 고등학교 3학년 12월 대학입시를 통해 최종 성적표를 얻는다. 대한민국 학생은 ‘이 살벌한 공부 리그에서 이기는 자만이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절체절명의 명제를 끊임없이 학습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성적이 나쁘면 행복할 수 없다.

학생들 사이에서 은밀히 수행되는 싸움 리그는 온 학생들의 관심거리다. 서로의 순위를 위해 모든 학생이 매번 싸울 필요는 없다. 싸우지 않아도 판가름이 나는 경우가 태반이다. 대충 내 순위는 친구들이 알아서 정해주며, 더 높은 순위에 오르려면 ‘도전’해야 한다. 이 리그에는 사교육도 없다. (억울하면 합기도나 격투기를 배우면 된다. 나도 그래서 태권도를 배웠다.)

대한민국 학생들은 이 살벌한 싸움 리그에서 ‘제 순위에 맞게’ 같은 반 친구를 대하고 선후배를 대하는 법을 배운다. 복종하는 법, 불의에 눈감는 법, 더 맞지 않으려고 주머닛돈을 내주고 답안지를 보여주는 법을 배운다. 싸움 잘하는 녀석들과 웃으며 친해지는 법을 배운다. 이 리그에서 낙오되면 남은 학교 생활이 평탄하지 않은 ‘왕따’로 낙인찍힌다. 행복이 싸움순은 아니지만, 주먹이 약하면 학교 생활이 비참할 수밖에 없다.

 

 
 
 
»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한 교실에서 청춘들은 싸움으로 교실 권력에 순위를 매기며 폭력의 리그를 형성한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싸움 리그는 아주 원시적인 ‘짐승들의 세계’다. 고등학교를 미처 졸업하지 않은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무리는 그야말로 ‘짐승들의 세상’이다. 힘이 강한 자가 윽박지르고 싸움을 잘하는 자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는다. 때론 선생님 이상의 권력을 가진다. 싸움 리그의 순위에 따라 모든 학생의 친구관계가 형성되고 권력구조가 만들어진다. 그 권력구조의 정점에 있는 싸움 1등을 우리는 ‘짱’이라고 부른다.

나는 중학교 때 날마다 살벌한 싸움 리그를 치르며 학교를 다녔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 시간이 되면, 책상과 걸상을 모두 교실 가장자리로 옮겨 링을 만들고 몇몇 아이가 망을 보는 사이에 학생들 간의 경기가 치러진다. 대진표는 그날 아침에 나온다. 경기를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다. 피가 터지고 살이 찢겨져나가는 짐승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고 손에서 땀이 흐르는 시간을 통해 점점 ‘굴종의 자세’를 학습한다. 대한민국 청소년은 ‘주먹의 힘’을 교실에서 배운다.

 

싸움 리그, 자연선택의 각축장

 

진화심리학이 옳다면, 싸움 리그는 약육강식 원리가 지배하는 자연선택의 정글이다. 공부 리그가 ‘내가 얼마나 똑똑한가’를 드러내고, ‘더 나은 대학’이라는 사회적 기표를 얻으려는 경쟁 리그라면, 그래서 결국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더 나은 이성에게 최종 선택을 받기 위해 치러야 할 두뇌 리그라면, 싸움 리그는 그야말로 생존 투쟁이다. 이 투쟁에서 낙오되면 주먹으로 얻어터지고 학교를 더 이상 다니지 못할 수도 있다.

싸움 리그의 승자는 이성 친구들에게 인기를 독차지한다는 점에서 성선택의 예비전일 수도 있겠다. 침팬지 사회의 사회적 서열처럼, 학생들은 싸움 리그라는 ‘자연선택과 성선택의 각축장’에서 더 높은 순위를 얻으려고 노력한다(여학생들의 ‘얼짱 문화’ 역시 성선택의 예비 과정이 아니겠는가?).

무엇이 이 아이들을 악마로 만들었을까? 영국 소설가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1954)에서 보았듯이, 아이들만의 교실은 그 자체로 ‘불안으로 가득 찬 거대한 무인도’다. 학생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강한 자에게 복종하고 약자를 공격하며 ‘폭력에 매혹당한 야만인’처럼 행동한다. 싸움 리그를 지배하는 것은 조폭의 원리다. 주먹이 센 자가 교실을 지배하고 ‘의리’가 그들 사이의 가장 중요한 가치다.

‘결국 내가 이 공부 리그가 끝나고 어떤 대학에 들어가게 될까’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공부 경쟁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감과 공부 리그에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열패감이 그들을 더 야만인으로 만든다. 그래서 싸움짱은 공부짱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이 미친 리그전이 모두 끝나고 나면, 결국 우리가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지 막연하게나마 말이다.

짱의 비극은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그들이 사회에서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왜소하고 병약했던 공부 1등은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명문대생이 되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위에 올라 떵떵거리며 살지만(요즘엔 그것도 보장받진 못하지만), 싸움 1등 짱은 잘 돼야 주먹의 세계에서나 불러주는 ‘사회적 낙오자’가 되기 일쑤다.

싸움 짱을 졸졸 따랐던 친구 녀석들은 졸업과 함께 뿔뿔이 흩어지고 곁에 남는 녀석은 아무도 없다. 왕따에게는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비극이 끝나고 상처가 아무는 시간만이 필요하지만, 짱은 졸업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된다. 싸움 리그나 공부 리그에서 비리비리하던, 그래서 교실에서 존재감이 없던 녀석들이 나중에 큰돈을 벌어 짱과 우등생을 엿먹이며 동창회에서 한턱내는 것으로 이 아이러니는 결말을 맺는다.

세상에 그 많던 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을 따르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 윤성현 감독의 영화 <파수꾼>이 우리에게 물었듯, ‘과연 대한민국 학교에 우정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패거리를 이뤄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때리고 죄책감을 공유했던 일진들, 과연 그들에게 우정과 의리가 존재했을까? 그들의 우정이 굴종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조폭의 의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무기력한 어른이 된 학교짱

 

대한민국 학교는 우리 시대 청소년들에게 ‘말죽거리 잔혹사’를 선사한다. 성적이 나쁘면 사람 취급 안 하는 살벌한 공부 리그에서, 주먹이라도 가진 녀석들은 그것이 알량한 힘이자 권력인 양 학생들을 때리며 불안을 해소한다. 친구들의 따귀를 때리고 돈을 뺏고 모멸감을 주며 잠시나마 우월감을 느끼지만, 그것은 열등감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학교짱도 세상에 나오면 냉엄한 사회의 정글에서 심판을 받는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는 법, 내가 아는 학교짱들은, 지금은 그저 무기력한 사회 일원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옛 기억들을 ‘한때 잘나가던 추억’이라 떠올리며. “대한민국 학교, 좆 까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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