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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1-06-20 조회수 : 4,222
제 목 :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 ④ 트위터 [2011.05.09 제859호]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 ④ 트위터 [2011.05.09 제859호]
 
세상을 흔들며 복제되는 문화 유전자 vs 어느 과학자의 좌충우돌 트위터 실험기
 
 
 
 
 
 
 
 
 
 
»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화
 
 
 

세상을 흔들며 복제되는 문화 유전자

친교와 여론 형성이란 이중성 가진 트위터, 파워 트워터러 중심으로 소통되며 공적 성격 강한 SNS로 진화해

 

진중권 문화평론가

 

‘파워 트위터러’라 불리는 시사주간지 <시사IN>의 고재열 기자가 한때 트위터에 관한 논쟁에 휘말린 적이 있다.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는 표현에 누군가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반론의 요지는 “트위터는 그저 소통의 채널에 불과할 뿐 그것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표어는 트위터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수사적 표현에 지나지 않고 ‘세상을 바꾼다’는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명확히 규정된 것도 아니기에, 어떻게 보면 거기에 시비를 거는 일 자체가 쓸데없는 짓일 수도 있다.



인간의 삶을 재조직한 SNS 혁명

 

그래도 거기서 논점을 취하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관해 두 가지 입장이 가능하다. 하나는 “미디어란 그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를 미디어를 보는 ‘도구주의적 관점’이라 부른다. 여기에 대립하는 입장은 “미디어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through) 전달되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것 안에(in) 구현된 메시지”라고 말한다. 마셜 매클루언은 이를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간략한 명제로 요약한다. 한마디로 대중이 SNS를 한다는 것이, ‘그것으로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느냐’보다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논쟁이 있은 지 얼마 뒤, 공교롭게도 튀니지·이집트·리비아에서 차례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촉매가 된 것은 트위터·페이스북 같은 SNS였다. 물론 SNS가 혁명을 일으켰다고 할 수는 없을 게다. 무엇보다 이 나라들에는 장기 집권을 해온 독재정권이 있었고, 그 정권 아래 피폐해진 국민의 삶이 있었고, 좌절한 국민의 입을 막는 검열과 탄압의 장치가 있었다. 혁명은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SNS가 없었다면 그 혁명이 촉발되거나 확산될 수 없었으리라는 가정도 충분히 가능하다.

‘도구’란 그저 도구가 아니다. 어떤 도구든지, 사회 속에 들어오면 인간의 삶 자체를 재조직하게 된다. 가령 스마트폰을 사용한다는 것은, 손안에 신통한 물건 하나를 그러잡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들이 짜내는 망 속에 입장해 그 세계에 사로잡히는 것을 뜻한다. 아랍의 독재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SNS가 알게 모르게 국민이 사는 방식을 재조직해 더 이상 기존 통치가 유지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자국에 SNS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페이스북의 창세기’라 할 수 있는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보면, 애초에 페이스북은 미국 하버드대학 성원들 사이의 (다소 배타적인) 친교 수단으로 출발했다. 그래서인지 지인이나 친우들 사이에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확장하는 데 아직도 페이스북이 적격이다. 물론 페이스북으로도 전혀 모르던 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그 경우에도 페이스북은 여전히 ‘사적’ 공간으로 남는다. ‘파워 블로거’나 ‘파워 트위터러’라는 말은 있어도, ‘파워 페이스부커’라는 말을 듣기 힘든 것은 그 때문일 게다.

 

팔로는 ‘구독’ 관계 맺기?

 

내 경험에 따르면, 트위터는 페이스북보다 공적 성격이 훨씬 더 강하다. 청소노동자의 파업을 지원하고, 호텔의 드레스코드를 비판하고,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등 공적 의제를 설정하는 것은 어느새 트위터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공적 사안에 관해 유명인들이 트위터에 남긴 멘트는 곧바로 신문 지면으로 옮겨진다. 이는 트위터를 통한 소통이 생각보다 수평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언젠가 본 연구에 따르면, 트위터를 통한 소통의 상당 부분이 파워 트위터러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 경우 누군가를 ‘팔로’(Follow)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친교’ 관계를 맺는다기보다는 그 사람의 매체를 ‘구독’하는 것에 가까워진다. 여기서 종종 개념의 혼동이 일어난다. 트위터가 ‘사적 친교 관계를 맺는 매체’이자 동시에 ‘공적 여론을 형성하는 매체’라는 이중성을 갖다 보니, 전자의 규범을 그대로 후자에 옮겨놓는 범주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팔로를 했으니 당신도 나를 팔로해야 한다.’ 가끔 이 주장은 이론적 논증을 동반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평등성이라는 트위터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트위터를 한다는 것은 여러 사람의 두뇌 망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집합적 두뇌에 접속함을 뜻한다. 물론 140자의 한계 내에서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단상, 촌평, 혹은 간단한 문답뿐이기에 트위터로 호흡이 긴 사유를 주고받기란 힘들다.

대신 모바일이라는 트위터의 사용 환경은 그것을 ‘실시간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감각기관으로 만들어준다. 가령 ‘독설닷컴’에서 버스나 전철에 물건을 놓고 내렸다는 팔로워(Follower)의 멘션을 리트윗(RT·Retweet)해주면, 수만 동료 팔로워들의 눈과 귀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주인에게 돌려주곤 한다.

집합적 두뇌는 ‘타임라인’ 형태로 존재한다. 타임라인에는 내가 팔로하는 여러 사람들의 단상이 뒤섞여 흘러간다. 팔로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타임라인은 더욱더 정신이 없어진다. 이 혼란에 대처하는 데 크게 세 가지 방식이 사용된다. 타임라인의 미적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은 ‘폭트’(폭풍트윗)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언팔’(Unfollow·트위터 구독을 취소하는 것)해 타임라인에 시각적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반면에 타임라인의 정보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은 ‘리스트’를 활용해 타임라인에 흐르는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가장 급진적인 것은 아마 세 번째 방식일 것이다. 언젠가 수백, 수천 명을 팔로하는 이들에게 ‘도대체 타임라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고 물었다. 올라온 대답은 ‘무위자연’, 즉 “굳이 관리하지 않고 수많은 멘트들이 타임라인 위로 그냥 자유로이 흘러가게 내버려둔다”는 것이었다. 이는 백남준이 참여했던 예술운동(‘플럭서스’) 같기도 하고, 초현실주의자들이 좋아하던 기법(‘의식의 흐름’) 같기도 하다. 타임라인을 읽는 방식도 ‘다다’(Dada)스럽다. 계정을 열었을 때 우연히 가장 위에 올라온 것들만 읽는단다.

 

RT로 힘을 얻는 복제·확산의 멘트들

 

미디어 시대에 권력은 복제된다. 복제가 거듭될수록 그것의 힘은 더욱더 커진다. 일반 트위터러가 날리는 멘트의 힘은 결국 RT 횟수가 결정하게 된다. RT가 많이 되는 멘트들은 대개 그럴 만한 이유를 가졌다. 정확한 통찰, 적절한 수사, 충격적 효과, 반전의 미학 등. 물론 RT가 많이 된다고 항상 질적으로 뛰어난 것은 아니다. 논문의 중요성은 종종 인용 횟수로 평가되나, 인용 횟수가 논문의 우수함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비판당하려고 자주 인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되도록 자신을 많이 복제해 널리 확산시키고 싶어하는 게 유전자의 본능이다. 문화에도 유전자(gene)처럼 복제 기능을 가진 ‘밈’(Meme)이라는 유전자가 있다는 이론(이라기보다는 은유)이 있다. 트위터의 멘트는 이 밈을 닮았다. 하지만 본능이 항상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SNS에도 당연히 이성 없이 복제의 본능만 가진 멘트가 난무한다. 클릭 횟수로 광고를 파는 인터넷 신문들이 종종 복제 본능만 가진 기사를 싣는 것처럼, SNS에도 복제 본능만 가진 글이 있다. 그런 글들이 너무나 자주 RT를 통해 제 목적을 이룬다.

전형적 방식은 사적인 일을 공적인 일로 바꿔놓는 것, 가령 가수와 배우의 이혼에 대해 사석에서나 할 수 있을 멘트를 슬쩍 공적 관심사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이때 확산 범위가 사석으로 제한돼 있던 유전자는 졸지에 복제 범위가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여기에는 어떤 생물학적 책략이 있다.

 

 


 

어느 과학자의 좌충우돌 트위터 실험기

기존 SNS가 간과한 욕망을 채워주는 공간, 대중의 날생각을 담은 ‘집단 대뇌’는 현실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하루 만에 트위터 팔로어를 100명 늘리는 방법은 뭘까요?”

일요일 나른한 오전, 트위터에 올린 이 한마디에 수십 개 멘션이 날아왔다. 하나같이 ‘맞팔 잘 해주는 사람 100명을 팔로우하면 단번에 해결된다’는 식이었다.

 

하루 만에 팔로어 100명을 늘리는 방법은?

 

다른 방법은 뭐 없을까? 가설을 하나 세워보기로 마음먹었다. ‘팔로어’(Follower)가 무지 많은 이른바 ‘허브’(Hub)에게 유익한 정보를 보내면, 그는 자신의 팔로어들에게도 유익하다고 판단되면 리트윗(Retweet)을 하리라. 그러면 그들 중 내 트윗을 읽고 ‘이 사람의 정보를 직접 받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기리라. 10만 명 이상의 팔로어를 가진 사람에게 보내면 그들 중 0.1%만이라도 나를 팔로잉(Following)해주면, 단번에 100명이 늘어날 것이다.

일요일 나른한 오후, 이 가설을 곧바로 테스트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팔로어 수가 당시 350만 명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트윗(Tweet)을 날렸다. “버락, 대한민국 서울의 홍대 입구에는 라비린토스라는 곱창집이 있는데, 그곳에선 ‘팔로어 수×10원’어치 할인을 해줘요. 당신은 팔로어 수가 350만 명이니, 그곳에서 3500만원어치 공짜로 곱창을 먹을 수 있어요. 다음에 한국에 방문하면 라비린토스를 꼭 방문하세요.” 물론 영어로!

그리고 곧바로 이외수 선생(당시 팔로어 수 10만 명!)에게도 트윗을 보냈다. “이외수 선생님, 덕분에 항상 BBQ 치킨 맛있게 먹고 있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BBQ 치킨은 서초동에 있는 교대점이 제일 맛있다는 거:-)” 당시 BBQ 치킨 홍보를 열심히 하시던 그의 말초신경을 BBQ로 자극하고 싶었다. 이 모든 상황은 당시 내 팔로어들에게 생중계됐고, 그들은 모두 내 트위터 실험을 유쾌하게 엿볼 수 있었다.

 

 
 
 
» 크로스 2의 필자 진중권 문화평론가(위)와 정재승 교수는 트위터로 활발히 대중과 소통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버락 오바마와 이외수 선생은 내 글을 리트윗하지 않았고, 나른한 일요일에 100명의 팔로어가 늘어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 광경을 신기해하던 사람 20~30명만 나를 측은하게 여겨 ‘동정 팔로잉’해주었을 뿐. (물론 이런 실험을 하면 “왜 팔로어 수에 그렇게 집착하세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라고 멘션을 주시는 분들이 꼭 있다. 어휴!)

이 실험으로 우리가 얻은 교훈은 팔로어가 많은 허브를 공략한 것이 패착이었으며, 오히려 남의 글을 잘 리트윗해주는 이른바 ‘커넥터’(Connector)를 공략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쁜 여성들만 팔로하고 리트윗하시는 이외수 선생이나 자기 할 말만 하는 버락 대신, <시사IN>의 고재열 기자에게 트윗을 날렸어야 했다는 얘기다.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차미영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트위터 공간에서의 영향력은 팔로어 수만으론 부족하며, 그가 평소 받는 멘션 수, 그의 글이 리트윗되는 수까지 고려해야 한다.)

실패로 끝난 줄로만 알았던 이 실험은 어느새 내 팔로어를 일주일 만에 800명이나 늘려놓았다. 버락과 이외수 선생은 내 트윗에 응답하지 않았지만, 나와 그들을 모두 팔로잉하는 트위터 사용자들이 내 트윗글을 보고 리트윗해줘, 이 글이 트위터 사용자들 사이에 회자돼 내 팔로어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다시 얻은 교훈. 앞의 가설에서 나와 팔로어가 많이 겹치는 커넥터에게 트윗글을 날리면 커넥터가 리트윗을 안 해주더라도 공통의 팔로어들에 의해 리트윗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보의 영향력 좌우하는 ‘친밀함’

 

지난해 1월18일, 처음 트위터 계정을 열었다. <한겨레21> 연재물인 ‘크로스’가 책으로 출간되자, 출판사가 진중권 선생과 나를 초대해 ‘트위터 생중계: 저자와의 만남’을 세계 최초로 시도한 것이다. 크로스 덕분에 나는 트위터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날 우리는 ‘크로스2’에 담겨야 할 우리 시대의 키워드로 ‘트위터’를 선정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때만 해도 트위터를 그저 경이롭다고 생각했을 뿐 잘 몰랐다. 2006년 샌프란시스코의 벤처기업 오브비어스(Obvious)의 야심찬 젊은이들이었던 에번 윌리엄스, 잭 도시, 비즈 스톤 등이 공동으로 개발한 트위터는 과학자들에게 ‘놀라운 혁신’이었다. 블로그·카페·페이스북·싸이월드 등 다양한 인터넷 서비스가 존재했지만, 상대방이 허락하지 않아도 일방적으로 ‘구독’(혹은 등록·Follow)할 수 있고 140자 이내의 짧은 단문으로 지저귀는(Twitter) 공간인 트위터는 기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간과한 욕망을 채워주는 공간이었다. 트위터는 소셜 네트워크를 넘어, 느슨하게 연결된 팔로어들과 ‘사변적 대화’ 대신 유익한 정보를 주고받는 정보 미디어(Information Media)가 되었다.

‘잘난 척’이 유익한 정보로 인정받고, ‘사치스러운 소비와 경험을 자랑하는 왕재수’를 ‘반드시 팔로잉해야 할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트위터 공간은 사생활이 노출될 위험에도 사용자의 뇌 속 기억을 통째로 쏟아놓도록 독려한다. 카이스트 전산과 문수복 교수 연구팀이 지난해 4200만 트위터 사용자가 주고받은 1억 개 트윗글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뉴스의 85%가 트위터의 주요 이슈로 다루어진다. 트위터는 최근 이슈에 대한 대중의 ‘날생각’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집단 지성과 집단 감성을 모두 담은 ‘집단 대뇌’인 셈이다.

우리가 트위터 시대에 주목해야 할 것은 ‘가치 있는 정보’ 형태가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가치 있는 정보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있는 지식처럼 권위자가 정돈해서 만든 것이었다. 웹2.0 시대를 거치면서, 가치 있는 정보는 권위 있는 정보에서 다수의 집단 지성으로 만들어진 정보로 바뀌었다. 이젠 위키피디아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트위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가치 있는 정보란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주는 정보’다. 취향과 가치관을 공유한 사람들(Similar Others)이 제공하는 정보에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를 입증하는 심리학 논문은 수십 편에 이른다.

예를 들어 자동차 구매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 “지난 3년간 스웨덴 자동차 ‘볼보’는 교통사고시 사망자가 연평균 0.9명으로, 채 1명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를 일러주며 볼보 구입을 권한다. 때마침 옆에 있던 친구가 “어, 우리 아버지 친구분이 지난해 볼보를 타다가 돌아가셨는데!” 하면, 자동차 구매 예정자는 절대 볼보를 사지 않는다. 수년간의 통계치보다 친구의 말 한마디에 훨씬 더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부산에 출장이라도 갈라치면, 예전처럼 네이버에 ‘부산 맛집’을 키워드로 쳐서 ‘지식IN’의 수많은 ‘초등학생’들에게 맛집 정보를 얻지 않는다. “부산에 출장 갑니다. 맛집 추천해주세요”라고 트위터에 글을 남기고, 가는 동안 받게 되는 멘션들 중에서 ‘부산 맛집’을 고른다. 팔로어가 추천해주는 맛집,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주는 정보에 우리는 훨씬 더 주목한다(이것이 조만간 ‘프렌드십 마케팅’(Friendship Marketing)으로 발전할 전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SNS를 넘어 ‘검색의 절대 강자’ 구글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이다.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트위터를 사용한 지 1년6개월. 팔로어가 3만5천 명이나 되었지만, 나의 트위터 실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과연 트위터가 개인 미디어(Personal Media)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기 위해, 요즘 사회적 발언은 대중매체가 아닌 트위터로만 하고 있다. 트위터가 정보 미디어를 넘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스토리 미디어’가 될 수 있는지 실험하려고, ‘영어 실수담’을 공유했다가 수많은 팔로어가 배꼽을 잡은 사건도 저질렀다. 트위터가 과연 현실 세계에 유익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실험하기 위해 ‘10월의 하늘’이라는 작은 도시 도서관에서 과학 강연을 기부하는 과학자 활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트위터가 뭔지 잘 모르겠다. 이 해괴한 물체를 현미경 위에 올려놓고 핀셋으로 헤집는 마음으로, 오늘도 나는 트위터에 글을 남긴다. 내년 대통령 선거 때 트위터가 대한민국을 한 발 더 앞으로 진보할 수 있게 이끌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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