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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0-04-13 조회수 : 9,225
제 목 : 장미의 이름

장미의 이름 - 상 / 움베르토 에코
서문
1968년 8월 16일. 나는 발레 라는 수도원장이 펴낸 한 권의 책을 손에 넣었다. 1842년 빠리의 라 수르스 수도원 출판부가 펴낸, [마비용 수도사의 편집본을 바탕으로 불역한 멜크 수도원 출신의 베네딕트 회 수도사 아드송의 수기]였다. 이 책에는, 책이 편찬된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았으나, 베네딕트 수도회의 역사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알려진 18세기의 석학 마비용이, 멜크 수도원에서 발견한 14세기의 수기를 충실하게 복원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 대단한 학문적 발견(연대순으로 따지자면 세번째의 학문적 발견에 해당하는)은, 친구를 기다리며 불행한 도시에 머물고 있던 나는 몹시 들뜨게 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불과 엿새 뒤에 소련군이 이 프라하를 침공해 왔다. 나는 신고 만난 끝에 오스트리아 쪽 국경선을 넘어 린츠로 갔고, 거기에서 다시 빈으로 올라가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 친구를 만난 다음, 함께 다뉴브 강을 오르는 배를 탔다.
일종의 지적인 흥분 상태에서,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의 이 엄청난 이야기를 독파한 나는 실로 '단숨에', 조셉 지베르 문방구의 대학 노트 몇 귄에다 이 책을 번역해 버렸다. 나에게, 펜 끝이 매끄러운 대학 노트에다 문자를 수놓아 가던 일은 참으로 즐겁고도 신명나는 경험이었다. 내가 이 책을 번역하고 있을 동안 배는 멜크에 이르렀다. 수세기에 걸쳐 몇 차례의 보수와 복원을 거듭한 아름다운 멜크 수도원은 구불구불한 강을 내려다 보면서 의연하게 서 있었다. 눈치 빠른 독자는 벌써 알아차렸을 테지만 나는 멜크 수도원의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드소의 수기와 관련된 자료는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잘츠부르크에 이르기 전, 우리는 몬트제 호반에 있는 조그만 호텔에서 일박했는데, 이 하룻밤이 나에게는 비극적인 밤이었다. 나와 동행하던 친구가 발레 수도사의 책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가 발레 수도사의 책을 가지고 가 버린 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계가 끝남에 따라 경황이 없는 참에 그 책이 그만 그의 짐에 휩쓸려 들어갔을 터이다. 말하자면 그는 내 가슴에 휑하니 뚫린 구멍 하나와 한 뭉치의 번역원고를 남긴 채 책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빠리에서, 나는 그 책의 족보를 샅샅이 캐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나에게는 앞서 불어판에서 메모해 놓은 약간의 자료가 있었다. 자료 중에는 다음과 같은 참고 도서 목록도 있었다.
[고문집성], 별칭 [고문서 전집] 및 짧은 저작, 시작, 서한, 문서, 비문 모음. [게르만 여행기]가 부록으로 딸려 있음. 설명과 주석은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자이자 생 마우로 출신 신부 장 미비용에 의함(신판). [마비용 전] 및 몇 권의 소책자, 즉 위대한 추기경 보나에게 현정한 [유교 성체와 무교 성체에 관한 논의]가 추가된다. 같은 주제에 대한, 히스파니아의 주교 엘데폰수수의 소론과 갈리아의 테오필로스 앞으로 쓴 에우세비우스의 서한 [무명의 성인 공경론], 빠리, 생 미셸 교 부근에 있는 르베끄 출판사에서 1721년에 발행됨. 부록 있음(왕실의 허가를 필한 것임).

나는 생뜨 주느비에브 도서관에서 [고문 집성]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찾아낸 판본은 발레 수도사의 참고 도서 목록과 두 가지 점에서 달랐다.
첫째는 이 책의 발행인이 아우구스티누스 회 수도회(생 미셸 교 부근)의 몽딸랑이라는 점에서 발행인이 달랐고, 2년이나 늦다는 점에서 출판 연도가 달랐다.
뿐만 아니었다.
내가 찾아낸 판본에는 멜크의 아드소, 혹은 아드송의 원고에 대한 언급이 없는 대신 발레 수도사가 필사한 이야기가 중간 분량의 텍스트로 실려 있었다.
나는 나와 절친한 사이였고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에띠엔느 질송 같은, 유명한 중세학자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내가 생뜨 주느비에브에서 본 [고문집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 빠시 근교에 있는 라 수르스 수도원으로 달려가 친구인 아르네 라네슈테트 수도사에게 물어 보았다.
그는, 발레 수도사라는 사람이 라 수르스 수도원 출판부에서 책을 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의 수도원에서 출판부라는 것조차 없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프랑스 학자들은 믿을 만한 서지학적 지식의 제공에는 별 관심이 없기로 악평이 나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때부터 내가 읽었던 그 책이 어쩌면 위조된, 유령도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발레 수도사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그 책을 돌려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더구나, 그 책을 가져 간 사람에게, 돌려 달라고 할 수는 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내 손에 남은 것은 노트와 번역 원고 뿐이었지만 내게는 그것조차 미심쩍어 보이기 시작했다.
상당한 정신 것 피로와, 견디기 어려운 운동 신경의 흥분 뒤에는, 옛날 이야기에서 그러하듯이 허깨비 같은 게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순간이 있는 모양이다(상세한 기억을 더듬어 나가는 데도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잘 안되는 때가 있다).
책의 내용을 훑어보면서부터는 정말 내가 그 책을 번역했던 것인지, 아니면 꿈을 꾸었던 것인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후일 뷔꾸아 수도원의 원장이 쓴 책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씌어진 적이 없는 책에 대한 환상도 존재한다.
만일에 새로운 전기가 될 만한 그 희한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 이야기의 출처를 찾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희한한 일이란, 바로 197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그 유명한 파티오 델 탕고 거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코리엔테스 거리의 소서점 서가를 뒤지다가 우연히 밀로 테메스바르라는 사람이 쓴 카스틸리아 어판 소책자 [장기 놀이에서의 거울 이용법]을 찾아내게 된 일을 말한다.
이 저자를, 나는 [묵시록의 판매인]이라는 최근작을 졸저 [묵시파와 통합파] 가운데서 서평했을 때(다른 책에 인용된 것을 다시) 인용한 적이 있다.

원서는 1934년 그루지야의 뜨빌리시에서 발행된 것이어서 손에 넣을 수 없었다.
내가 찾아낸 것은 그러니까 이탈리아 어판이었다.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책에 아드소의 수기로부터 인용된 대목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용문의 출처가 발레도 마비용도 아닌,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신부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인용문의 출전은 미상). 후일 어느 학자(이름은 여기에서 밝히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신부의 저작 목록을 줄줄 외면서, 이 위대한 예수회 신부가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의 이름을 입에 올릴 리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테메스바르의 책은 분명히 내 앞에 있었고, 그가 인용한 일화는 발레 수도사가 불역한 수기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미궁 같은 장서관의 묘사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중에 벤야미노 플라치도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지만, 수도원장 발레는 어디까지나 실존 인물이며, 마찬가지로 멜크의 아드소도 틀리없이 실재한 인물인 것이다.
나는 아드소의 회고담을 읽으면서, 아드소 자신이 그 사건을 체험한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특히, 저자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도입부를 비롯, 수도원의 위치에 대해서는 끝내 함구하는 대목, 그리고 저자가 밝힐 수 없는, 베일에 가려진 수많은 사건에 관한 묘사에 이르면서 나의 확신은 더욱 굳어져 갔다. 짐작컨대 문제의 수도원 위치는 피에몬테 지방과 리구리아 지방, 그리고 프랑스 접경에 있는 아페니노 산맥 중앙부 기슭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폼포사와 꽁끄 사이가 아닌가 싶다. 이 사건이 있었던 시기는 1327년 11월 말이다. 그러나 저자가 밝히고 있는 시기는 불분명하다. 1327년에 자신이 수련사였다는 것. 그리고 기억에 의지해서 이 글을 쓸 때가 죽음에 임박해서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역산하면 이 원고가 만들어진 시기는 1390년대, 혹은 1380년대로 짚어 볼 수 있다.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14세기 말 프랑스 수도사가 라틴어로 쓴 17세기 라틴 어판의 신 고딕 불어 번역판을 다시 이탈리아 어판으로 출판하려는 이유로 내세울 만한 건 별로 없다.
이것을 출판하려고 하고 보니 먼저 문체부터가 걱정거리였다. 당대의 이탈리아 문체를 따르고 싶다는 유혹은, 부당하다는 이유에서 억눌러야 했다. 아드소가 라틴 어로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서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교양(혹은 그에세 영향을 미쳤음직한 수도원의 교양 수준)이 그 이전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교양 수준으로 말하자면, 중세 말의 라틴적 전통와 무관하지 않은, 수세기에 걸친 학문과 문체상의 일대 궤변론적 총화이다. 아드소는 그 시대 속어의 혁명적인 풍조나 사고에 물들지 않은 채, 자신이 언급하고 있는 도서관 장서의 수준에 밀착하고 있으며, 자신을 신학과 스콜라 철학 교본에 길든 수도사로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쓰고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복잡한 기억에 의지해서 논리적으로 풀어 나가는 이 사건이, 14세기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구사하는 언어나 무불통지한 인용문까지 싸잡아 본다면 12세기나 13세기에 씌어졌다고 하더라도 토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드소의 라틴 어를 자기 모국어인 신 고딕 불어로 번역하면서 발레 수도사는 몇 가지 자유를 누리고 있는 듯하다. 문체상의 자유뿐만이 아니다. 가령 작중 인물은 종종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아류의 비전을 분명하게 언급하면서 갖가지 약초 이름을 들먹거린다. 이 비전은 수세기에 걸쳐 갖가지 판본으로 중간된 책이다. 결론적으로 아드소는 이런 책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인용하는 구절이 파라켈수스식의 처방이나 튜더 왕조 시대의 판본임에 분명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저서의 증보판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뒷날, 발레 수도사가 아드소의 필사본 수기를 베껴 쓸(?) 당시 빠리에는 구제불능인 상태에 이를 정도로 엉터리인 18세기 판 [그랑 알베르], [쁘티 알베르]가 나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바 있다. 물론 이런 판본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어쨌든 아드소나 아드소가 묘사하고 있는 수도사들의 회화에, 후대의 해설이나 난외 주석의 부록이 될 만한, 말하자면 금후의 학문을 살찌웠음직한 요소가 들어 있지 않았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으랴?
발레 수도사가 아드소 시대의 분위기를 보존하고 싶었던 나머지 번역을 기피했던 구절은 라틴어인 채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번역해야 할 것인가도 문제였다. 꼭 그렇게 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원전에 대한 내 양심의 가책, 어쩌면 터무니없는 것일지도 모르는 양심의 가책은 되도록 피라고 싶어서 나도 그대로 두기로 했다. 과장은 되도록이면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발레 수도사의 번역상의 해석은 여기에 그대로 살려 놓고자 했다. 다만 두려운 것은, 프랑스 인 등장 인물을 소개할 때마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여자는 참 어쩔 수 없는 동물이야' 따위의 대사를 맡기는 삼류 소설가 흉내를 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요컨대 나의 가슴속에는 온갖 의혹이 다 소용돌이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다 내어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의 필사본 수기를, 그것도 역사적 전거가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이렇게 재현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굳이 말하자면 애정 때문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나 자신을 괴롭히는 갖가지 끈질긴 망상에서 놓여나기 위한 방편으로 이 책을 낸다고 이해해도 좋겠다.
나는 이 원고를 만들면서 적시성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내가 발레 수도사의 불역판을 읽은 1968년 당시에는, 작가가 이 세계를 바꿀 목적으로 글을 쓴다면 모름지기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만 매달려, 현재에 대한 복무로서만 글을 써야 한다는 확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식자들(식자들 고유의 권리를 되찾은)은 쓴다는 작업에 대한 순수한 애정만으로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편안한 마음과 화자가 누리는 기쁨을 고스란히 누리면서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이 이야기가 우리 시대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고, 우리 시대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우리의 희망과 우리의 확신과는 시간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바로 이 깨달음이 내 꿈속에 나타나던 허깨비를 몰아내어 주었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되어 주었다.
누항의 일상 잡사가 아닌, 책에 얽힌 이야기여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저 모방의 도사 아켐피스의 다음과 같은 명언이 한숨에 섞여 나올지도 모르겠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1980년 1월 5일
노트
아드소의 우너고는 모두 7일 동안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고, 하루하루는 전례 시간과 일치하는 시간대로 나누어져 있다. 3인칭으로 되어 있는 부제는 발레 수도사가 붙인 것인 듯하다.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터이나 독자들에게 혹 지침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또 이러한 형식이 당시의 문학에서는 별로 자주 씌어지지 않던 것이라는 점에서 그대로 두기로 했다.
성무 공과의 기도 시간에 대한 아드소의 묘사가 필자를 당황하게 했다. 지역이나 계절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모르기는 하지만 성 베네딕트가 회칙으로 내린 규정이 14세기에는 정확하게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편의상 이 시간대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좋을 성싶다. 다음의 공과 시간은, 이 책의 묘사와, 원래의 회칙과, 에두아르 슈네데르의 저서 [베네딕트 수도회의 성무 공과 시간](빠리, 그라세, 1925)을 서로 견주어 가면서 산출해 낸 것이다.
조과: 성무 일과의 시작. 새벽 2시 30분부터 3시(아드소는 고풍스러운 표현으로 경야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찬과: 오전 5시부터 6시. 날이 새기 전에 끝난다.(옛날에는 <새벽기도>, 혹은 조과로 불리기도 했다).
1시과: 7시 30분(해뜨기 직전).
3시과: 9시 전후.
6시과: 정오(수도사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는 시각. 겨울철에는 수도원의 점심 시간).
9시과: 오후 2시부터 3시.
만과: 해질녘인 오후 4시 30분(회칙은, 해지기 전에 저녁 식사를 마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종과: 오후 6시 전후(수도사들은 7시 전에 잠자리에 든다).
이 계산은, 북부 이탈리아의 경우 11월에는 오전 7시 30분 전후에 해가 뜨고 오후 4시 40분 전후에 해가 지는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프롤로그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이로써 하느님이 비롯되시고, 신심 깊은 수도자의 본분이 비롯되니, 수도자는 날이면 날마다 영원 불멸의 진리로 화신하는 저 불멸의 성사를 겸허하게 찬미한다. 그러나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해서 진리는 우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허물을 통해 그 진리를 편편이 볼 수 있을 뿐이다(아, 이 또한 알아보기가 얼마나 어렵더냐?). 우리는 사악한 의지에 물들어 가려 보기가 쉽지 않더라도 이제는 이 진리의 표적을 가려 볼 수 있어야 한다.
가련한 죄인의 삶이 이윽고 막바지에 이르고 보니 이제 내 머리는 백발... 바야흐로 바닥 모를 침묵의 심연과 신성이 떠난 암흑에서 미아가 될 날을 기다리는 한편 천사의 은혜인 지성의 광명에 의지하고 세상과 더불어 나이를 먹는다. 늙고 병든 육신을 여기 안온한 멜크 수도원의 독방에 가둔 나는 지금 소시적에 우연히 체험하게 된 저 놀랍고도 엄청난 사건의 기록을 이 양피지에다 남겨 놓을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나는 보고 들은 바를 한순간 한순간,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옮기되 굳이 어떤 구상의 형식을 세우지 않으려 한다. 뒤에 오는 이들(가짜 그리스도가 먼저 오지 않는다면)에게 표적을 표적으로만 남기는 뜻은 글을 아는 교우로 하여금 이를 음미하게 하기 위함이다.
원컨대 주님께서, 이름이야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는 편이 온당하고 크신 뜻에 합당할 터인 저 대수도원 일을 투명하게 그려 낼 권능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때는 주후 1327년 말, 루드비히 황제가 전능하신 분의 뜻에 따라, 아비뇽에 진치고 앉아 사악한 왕위 찬탈과 성직 매매를 일삼으려 사도를 욕되게 한 저 사교의 우두머리를 척결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로 온 해이다(죄 askg은 사교의 우두머리가 누구던가? 믿음이 없는 자들이 교황 요한 22세 라고 부른 까오르의 자끄 바로 그 사람이다).
나도 경험했던 그 일의 전모를 소상하게 밝히려면 당시에 내가 이해하고 있던 것들, 후일에야 내가 깨닫게 된 것들, 그리고 뒤에 내가 들은 이야기들(아직 내 기억력이 그 복잡 다단했던 사건의 맥락을 제대로 잇댈 수 있을 경우에 한할 터이지만)을 여기에 고스란히 되살려 내야 한다.
세기 초에 교황 클레멘스 5세가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자, 로마는 그 지역 군주들의 야심의 표적이 되었다. 이로써 끝없이 거룩하던 이 기독교의 성도는 그 지역 수장들이 벌이는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혹은 곡마단으로, 혹은 창가로 변모해 갔다. 이름이 좋아 공화제였을 뿐, 정치 체제가 사실은 공화제와 거리가 멀었던 이 성도는 시도 때도 없이 폭력과 약탈을 일삼는 무장 폭도들의 과녁이 되기에 이르렀다. 어디 무장 폭도들뿐이던가? 속권으로부터의 다스림데서 면제된 교역자들까지도 교구 관할권을 벗어나 악당의 무리를 규합, 지휘하여 노략을 일삼는가 하면 파계와 사악한 무리 짓기까지 서슴지 아니했다. 이러했으니 이 <세계의 수도>가 어떻게 세계의 머리가 될 수 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이 왕홀을 주어 일찍이 카이사르의 것이던 세속의 지배권을 되찾으려는 만인의 소원을 성취시킬 수 있었을 것인가?
1314년, 이 와중에서 프랑크푸르트의 다섯 독일 제후들은 바이에른의 루드비히를 제국의 최고 통치자로 선출했다. 그러나 이를 어쩔꼬? 마인 강 저쪽에서는 라인의 영주과 쾰른의 대주교가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를 동시에 최고 통치자로 선출했으니... 바야흐로 한 보좌에 두 황제, 두 제국에 한 분의 교황이 앉게 되었다. 자연히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 아닌가.
2년 뒤, 아비뇽에서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까오르의 자끄라고 하는, 일흔두 살의 노옹이 교황으로 뽑혀 요한 22세를 참칭하니, 하늘이 보우하사 이 뒤로는, 의로운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거역스러울 터인 이 이르을 다시 쓰는 교황이 없게 되었다. 프랑스 왕(이 타락한 땅에 사는 사람들은 늘 제 나라 백성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웠지 전 세계를 영혼의 고향으로 볼 줄을 모른다)을 섬기는 이 프랑스 인 교황은 일찍이 공정왕 필립을 도와 성당 기사단을 박해한 바 있으니, 공정왕(내가 보기에는 별로 공정하지 못한)은 일찍이 성당 기사단을 파렴치한 범죄 조직으로 매도하고 타락한 성직자들과 손을 잡아 그들의 재물을 가로챌 수 있었다.
1322년 바이에른 루드비히 황제는 정적이었던 프리드리히를 거세했다. 황제가 둘일 때부다는 하나 있을 때를 더욱 두려워 한 교왕 요한은 승리자인 루드비히 황제를 파문했고, 우리 황제는 자신을 파문한 교황을 배교자로 비방했다. 바로 이 해에 프란체스코 참사회가 페루지아에서 소집되었고 총회장이었던 체체나의 미켈레는 엄격주의파의 절충안을 받아들이고, 신앙과 교리에 관련된 문제로서의 그리스도의 가난에 대해, 그리스도가 사도들과 더불러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사용권, 이용권>에 의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회칙의 미덕과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이 귀중한 헌장은, 교황의 비위를 몹시 상하게 했다. 이는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주교를 임명하는 황제의 권리는 부인하고, 교황이 황제에게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했던 교황 자신의 주장에 위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요한 22세는 1323년 회칙 <쿰 인테르논눌로스>를 통하여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선얼을 묵살해 버렸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루드비히가 교황의 적이 되어 버린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잠정적인 자기의 동맹으로 보기 비롯한 것은 이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난을 긍정하면서 신학자들, 이를테면 파도바의 마르실리오, 장뎅의장 같은 사람들의 학설을 강화해 나가고 있었다. 결국,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사건이 나기 몇 달 전 루드비히는 거세당한 프리드리히와 제휴하고 이탈리아로 내려와 밀라노에서 대관했다.
멜크 수도원의 젊은 베네딕크 회 수련사였던 내가, 루드비히 황제의 적신이었던 선친의 손에 이끌려 수도원의 평화로운 독방에서 나올 때의 사정은 대강 이러했다. 선친께서는 이탈리아도 두루 견문케 하고 황제 대관식도 직접 보게 할 요량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신 것 같다. 그러나 피사가 포위되자 선친께서는 전투에만 몰두하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로써 선친의 손에서 풀려난 나는 반은 좀 한유하고 싶어서, 반은 마땅한 스승 밑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욕심으로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를 방랑했다. 그러나 선친께서는 이 방만한 자유가, 사색의 삶에 평생을 던져 넣은, 한창 나이의 젊은 나에게는 마땅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셨던 모양이다. 선친께서는 전부터 나를 눈여겨보시던 마르실리오와 이 문제를 상의, 결국은 나를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박식한 수도사인, 바스커빌 사람 윌리엄의 수하에 넣기로 작심하시게 된다. 당시 윌리엄 수도사께서는 모종의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큰 도시 및 큰 수도원을 차례로 순방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윌리엄 수도사의 필사 서기 겸 시자로 시봉하게 되었으니, 그 뒤로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분과 더불어 나는, 지금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후세 사람들에게는 좋은 마음의 양식이 될 터인 저 놀라운 사건을 목도할 수 있게 된다.
당시 나는 윌리엄 수도사다 무엇을 구하러 다니는지 알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지금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께서도 몰랐는지도 모른다. 내 보기에 그분은, 진리에의 갈증 때문에 진리라고 하는 것은 주어진 어떤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에 쫓기면서 유럽을 주유하는 것 같았다(나느 그분이, 미심쩍은 일에 유달리 집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성직자의 의무 때문에, 천성적으로 좋아하던 공부에 굶주려 있던 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함께 다니면서도 윌리엄 수도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다니는지 알지 못했다. 윌리엄 수도사 자신이,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가 무엇인지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머무는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윌리엄 수도사가 나누는 대화를 귀동냥하고, 그것으로써 윌리엄 수도사가 맡은 임무의 성격을 어림하여 헤아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테지만, 문제의 수도원에 이르기까지는 그 귀동냥조차 시원하지 못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북쪽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곧장 북쪽으로 가지 않고 객승으로 유숙하면서 별의별 수도원을 다 순유했다.
문제의 수도원은, 피사에서 산티아고에 이르는 옛 순례자들의 여로인 산길을 따라, 목적지를 동쪽으로 두고 서쪽으로 구부러져 한동안 들어가야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는 여기에서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 땅의 영주들은 모두 제국 황제의 총신들이었고 우리 교단의 수도원장들은 모두 저 이단적이고 부패한 교황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던 곳이라는 것만 밝힌다. 우리의 여행은 파란 곡절 속에서 약 두 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동안 새로 모시게 된 사부님의 면면을 접하고 내 나름으로 그분의 위인됨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글을 쓰되 개인에 관한 묘사(얼굴의 표정이나 몸짓이 침묵의 웅변일 경우에는 제외하고)는 되도록 피하고자 한다. 이는, 들판에 가을이 오면 꽃이 시들어 꽃대에서 사라져 버리듯이, 인간 또한 그렇게 사라져 버릴 터인즉, 인간의 외양만큼이나 덧없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는 보에티우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고말로. 수도원장이나 그 측근은 이미 썩어 흙이 디었고 육신은 한줌의 잿빛 바람이 되어 부는데 그 양반들의 눈길이 어떠했느니, 창백하던 뺨이 어떠했느니 낱낱니 묘사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하느님 은혜로 그들의 영혼만은 영원히 스러지지 않는 빛으로 빛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의 풍모만은, 그 비범한 모습이 크게 내 마음을 흔들었기로 여기에다 자세하게 그려 남기고 싶다. 젊은이들이란 노인과 현자의 언변이나 명민한 정신에는 물론이고 아버지의 모습 같은, 그들의 예사롭지 않게 자애로워 보이는 외양에도 반하게 되는 법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육체적 사랑의 형식에(어쩌면 이것만이 순수한지도 모른다) 한 점 의혹도 품지 말고 그 몸짓을 고구하고 그들의 찡그린 표정과 미소뒤에 숨은 의미를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사내들이 외모도 준수하고 크기 또한 엄장했다. 요새 사내들은 능히 아이나 난쟁이에 견주어질 만한 정도로 그러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세상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타내는 숨낳은 재해의 징조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젊은이들은 더 이상 공부하려 하지 않아 배움은 사양길에 들었다. 뿐인가? 세상이 거꾸로 걷는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여 시궁창에다 처넣고, 새들은 날지도 못하는 주제에 둥지를 떠나며, 나귀는 풍악을 잡고 황소는 어깨춤을 춘다. 이제 마리아는 더 이상 명상의 생활을 사랑하지 않고, 마르타는 더 이상 시중드는 일에 골몰하지 않으며, 레아는 불임이고 라헬은 색욕의 눈길을 번뜩인다. 뿐인가? 카토는 창가로 라고 루크레티우스는 여자 노릇을 한다. 만상이 엇길로 들어서 있던 이런 시절에 나는 하느님 은혜로 윌리엄 수도사 같은 분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배움에의 욕구를 채우고 사물을 바로 보는 감각을 익혔으니, 내가 험로를 헤맬 때도 스승의 교훈이 나를 인도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윌리엄 수도사의 외모는 남의 외모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의 시선도 능히 끌 만큼 준수했다. 키는 여느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그러나 몸매가 호리호리한 탓에, 그 큰 키는 실제보다도 더 커 보였다. 그의 눈은 매섭고 형형했으며, 가늘고 매부리처럼 살짝 아래로 기울어진 코 때문에 그의 얼굴은 파수 보는 사람처럼 늘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표정 때문에 그분 앞에서 말을 머뭇거릴 수 없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히베르니아 사람들이나 노덤브리아 사람들의 얼굴이 대개 그렇듯이 주름살로 뒤덮인 그의 긴 얼굴도 주저와 당혹을 숨기기에는 그리 능숙하지 못했다. 이따금씩 그의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나는 배짱이 별로 두둑하지 못한 분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호기심이 발동할 때마다 그런 얼굴을 하고는 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표정이 지니는 매력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내가 그 호기심이라고 하는 것을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격정으로 받아들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응 이성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마땅히 그런 격정을 경계하고, 진리에만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마음이 어리던 나는, 그의 귓속에서 비죽이 비어져 나온 노란 털 무더기와 짙은 금빛 눈썹을 볼 때마다 안쓰럽ㄷ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는 꽃 피는 봄을 쉰 번이나 본 분이어서 당시 이미 노경이었다. 그러나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항상 민첩하게 움직이는 그의 몸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격정의 충동을 받으면 그의 정력은 고갈될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뒤로 물러앉아 가만히 정관만 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 그의 정신은, 가재가 되어 살금살금 뒷걸음질이라도 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런 상태에 들 때마다 그의 눈에는 공허하고 정신이 아가 버린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식물인간이 된 상태에서 환상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환상을 즐기는 그런 분은 아니었다. 나날의 삶에서 보여 주는 그의 절제하는 모습은, 환상을 즐길지도 모른다는 나의 생각을 도무지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 그는 여행 중에 이따금씩 풀밭 가에서나 숲 어귀에서 발길을 멈추고 풀잎(늘 같은 종류의 풀이었던 것 같다) 같은 것을 뜯어 가만히 씹으면서 그 맛을 음미하고는 했다. 때로는 그 풀잎을 뜯어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절박한 사태를 맞아 긴장할 때 그것을 씹고는 했다(우리가 문제의 수도원에 있을 동안에는 풀잎을 씹는 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 그게 도대체 무슨 풀이냐고 물은 것이 있었다. 그때 사부님은 웃으면서, 참 기독교인이라면 상대가 이교도들이라고 하더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맛보게 해 달라고 조르는 나에게 사부님은, 늙은 프란체스코 수도사에게 이로운 풀이라고 해서 베네딕트 수련사에게 반드시 이로운 리는 없다고 대답했다.
사부님을 모시고 있을 동안, 우리에게는 반드시 규칙적인 생활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남의 수도원에서 객승으로 머물 동안, 사부님과 나는 밤늦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을 때도 있었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침상에 누워 있을 때도 있었다. 정례적인 성무 일과에 참석하지 않을 때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여행 중에는 그런 게으름을 누릴 수 없었다. 사부님이 종과 시간을 넘길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을 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습관은 그만큼 실질적이었다. 남의 수도원에서 객승으로 머물 때면 그는 하루 종일 채마밭을 거닐면서 거기에서 자라는 채소를 녹옥수나 에메랄드 보듯이 자세히 관찰하고는 했다. 그러나 막상 수도원 지하보고에 있는 녹옥수나 에메랄드로 가득 찬 성보상자를 들여다볼 때는 그저 덩굴장미를 바라보듯이 심드렁하게 바라보고는 했다. 그런가 하면, 수도원 장서관에 붙박혀, 꼭 뭔가를 찾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심심파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하루종일 필사본 원고를 뒤적거릴 때도 있었다(수도원에서, 참혹하게 살해되는 수도사들의 시체가 늘어 갈 때도 그는 그렇게 한가하게 우너고만 뒤적거리고는 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하느님 앞에서 아무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듯이 글자 그대로 무심하게 화단을 걸을 때도 있었다. 우리 베네딕트 교단에서는 수도사들이 그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사부님은, 우주라고 하는 것이 아름다운 까닭은, 다양한 가운데에도 통일된 하나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통일된 가운데에서도 다양하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당시 나는 그의 대답을, 영국인들의 뻔한 상식 정도로만 이해했다. 사부님을 비롯해 사부님의 동향인들은, 이성적으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관념까지도 신통하게 정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었다.
그 수도원에 함께 있을 동안 그의 손에는 늘 책 먼지, 새금박 필사본에서 떨어져 나온 금박 가루가 묻어 있고는 했다. 어쩌다 진료소에서 나올 때는 노란 시약 가루가 묻어 있을 때도 있었다. 그는 잠시도 손을 놀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손길이 거칠게 부지런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손은 기계보다 정교했다. 부서지기 쉬운 것들, 가령 갓 금박을 입힌 성서 사본, 혹은 오래되어 무교병 껍질처럼 날강날강해진 책장을 만질 때도 그의 손길은 더없이 섬세했다. 기계를 다룰 때도 마친가지였다. 이제 여기에서 이 수수께끼 같은 분이 늘 가방에 넣고 가지고 다니던 기계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그 기계를 놓고 사부님은 <놀라운 기계>라고 불렀다. 그는, 기술의 소산인 기계는 자연을 모방한 것이지만, 이 모방은 형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그 기능에까지 미친다고 말하면서 시계, 천체 관측의, 그리고 자석의 신비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물건은 못된 마술에나 쓰이는 연장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그런 기계가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말짱한 어느 날 밤 사부님은 손에 이상한 삼각형 기구를 들고 별들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본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 같아 일부러 자는 척 한 적도 있다. 내가 이탈리아나 내 조국에서 만난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들은 대개가 단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박학 다식에 대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자기가 태어난 섬나라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은 좀 다르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사부님으로 시봉하던 로저 베이컨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언젠가는 기계 과학을 성취시키실 터이므로 기계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고 건강한 마술이라고 가르치신다. 언젠가는 자연을 본뜬 기계가 만들어질 터인데, 이렇게 만들어진 기계를 쓰면 배는 <오로지 인간의 지배력>만으로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달리는 배는 돛이나 노를 쓰는 배보다 훨씬 빠를 게다. 뿐이냐? 스스로 달리는 수레, 사람이 앉아서 장치만 조작하면 인공 날개를 펄럭이면서 <새처럼 날개짓하는> 날틀도 만들어질 것이야. 이렇게 되면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릴 수 있는 조그만 장치도 만들어질 게고, 바다 밑을 달리는 탈것도 만들어질 테지.'
내가, 그런 기계가 어디 있겠느냐면서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이자 사부님은, 이미 옛날에 만들어진 것도 있고 우리시대에 만들어진 것도 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날틀을 아직 아무도 만들지 못한 모양이야. 나도 본 적이 없고, 보았다는 사람을 만나 본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걸 생각해 낸 사람을 알아. 그리고 기계가 발달하면, 기둥이나 버팀대를 세우지 않고도 강과 강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가 있다.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기계를 만드는 것도 물론 가능하지. 지금 이런 게 없다고 과히 상심 말 일이다. 지금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없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너에게 말해 두고 싶은 것은, 하느님께서도 이런 기계가 만들어지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 의중에 벌써 옛날부터 이런 기계에 대한 생각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내 친구인 오캄사람 윌리엄은, 하느님 의중에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라는 내 말을 들으면 펄쩍 뛸 것이기는 하지만.
내가 이러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뜻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어디어디까지가 하느님 뜻이라고 우리가 울타리를 쳐서는 안되기 때문이야.'
내가 그에게서 들은 말 가운데 허무 맹랑하게 들리던 것은 이것 때문이 아니다. 내 나이 이제 지긋해지고, 그래서 그때보다는 머리가 훨씬 잘 여물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그가 어떻게 해서 오캄 사람 윌리엄이라는 친구분의 생각을 그렇게 잘 알 수 있는지,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로저 베이컨을 어떻게 해서 그토록 열렬하게 신봉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암흑 시대에, 현자라고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네 무리들과 서로 모순되는 신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온당하다.
처음부터 파악하기가 쉽지 않던 그분의 인상(당시에는 사실이 그러했다)을 정돈해 본답시고 윌리엄 수도사에 대해 무분별한 발을 지나치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독자여, 그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했는지는, 그가 수도원에서 앞으로 하게 되는 일, 보이게 되는 행동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독자들에게 세련된 구성을 약속하지는 않겠다. 단지 저 놀랍고도 무서운 사건(그렇다)을 여기에 기술할 뿐이다.
아무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하루가 다르게 사부님의 참 모습을 깨쳐 나갔다. 대목대목 그런 모습을 소개하게 될 테지만, 좌우지간 우리는 긴 이야기를 나누며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여행한 끝에 이윽고 그 문제의 수도원이 터잡고 서 있는 산기슭에 이르렀다. 우리가 당시 그 산기슭에서 수도원으로 다가가고 있었듯이 이제 내 이야기도 본론으로 접어든다. 바라건대 이 이야기를 준비하는 나의 손끝이 끝내 침착해 주기를...
제1일
1시과
11월 말의 청명한 새벽이었다. 밤사이에 눈이 내렸지만 양이 대단한 것은 아니어서 대지는 손가락 세 마디 높이의 서늘한 융단에 덮여 있을 뿐이었다. 찬과를 조금 지난 터라 우리는 어둠 속에서 계곡에 있는 마을의 미사 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해가 뜨자마자 산을 바라보고 출발했다.
산허리로 감겨드는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나는 수도원을 보았다. 그리고는 놀라고 말았다. 기독교 세계에서 흔히 보아 왔던, 수도원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벽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 벽 안에 자리잡고 있는 엄청나게 큰 건물에 놀란 것이었다. 뒤에 알았지만 그 건물은 바로 수도원의 본관이었다. 이 본관은 8각 기둥 건물이었지만, 멀리서는 4각 기중 건물(성도의 위엄과 금성철벽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보였다. 남쪽은 수도원이 앉은 고원과 닿아 있었고, 북쪽은 산이 갑자기 가파른 사면에서 솟은 듯이 불거져 있었다. 아래쪽에서 본 광경도 소개해야겠다. 색깔이나 재질이 한결같은 이 석벽의 정점은 그대로 탑과 관망대(하늘과 따들 두루 아는 대가의 작품임에 분명한)였다. 세 줄로 나 있는 창문은 건물 전면의 삼위 일체의 조화를 표상하고 있어서, 땅에서는 물리적인 정방형 형태가 하늘에서는 정신적인 삼각형 형태로 변전된 형국이었다.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우리는 그 사각 형태 안의 모서리마다 7각 기둥 탑이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탑의 다섯 면은 밖에서도 보였다. 즉 네 개의 작은 7각 기둥을 사방으로 거느린 큰 8각 기둥의 여덟 모서리 중 네 개가 밖에서는 5각의 건조물로 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장관은, 각각 정신적 의미를 드러내는 신성한 숫자의 놀라운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 8은 4각형이 완성된 숫자이고, 4는 복음서의 수를 나타내는 숫자, 5는 이 세계를 나눈 지대의 수, 7은 성령이 내린 은혜의 수가 아니던가? 크기나 형태로 보아 본관은 뒷날 내가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서 보았던 카스텔 우르시노, 카스텔 델 몬테와 흡사했다. 그러나 그 범접하기 어렵게 하는 위용이나, 거기 다가가는 행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위구심으로 말하면, 후일에 내가 보게 되는 어떤 수도원이나 성채도 이와는 같지 못했다. 때가 활짝 갠 겨울 아침이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그 본관 건물을 처음 보았더라면 내 기가 크게 꺾였을 것임이 분명했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건물이 내게 유쾌해 보였다고는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 건물에서 느꼈던 것은 두려움과 거북살스러움이었다. 덜 여문 내 정신의 허깨비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은 하느님은 아실 것이다. 나는 거장들이 역사를 시작한 날, 그리고 망상에 사로잡힌 수도사들이 뜻을 모아 그 건물을 감히 하느님 말씀을 지키는 성채의 표징으로 성별하기 전에 이미 그 돌에 새겨진 불길한 사건의 전조를 제대로 읽어 내었던 것이다.
사부님과 나를 태운 두 마리 노새가 산 위로 올라가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 모퉁이에서 길은 세 갈래로 갈라졌는데, 그중 둘은 곁가지 오솔길이었다. 사부님은 이따금씩 노새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했다. 길 옆, 그리고 길 위로 늘 푸른 소나무가 흰 눈을 뒤집어쓴 채 천연의 차양처럼 길을 덮고 있었다.
'기름진 수도원이로구나. 그런데 원장이 공공연히 대중의 기를 죽이고 있으니 안될 일이지...'
사부님 말씀이었다.
워낙 깜짝 놀랄 만한 말씀을 자주 하시는 분의 말씀이라, 나는 그렇거니 여겼을 뿐 따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아니, 질문할 여유도 없었다. 노새가 두어 걸음 더 떼어놓았을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길모퉁이에서 잔뜩 흥분한 수도사와 수도원의 불목하니 떼거리가 나타났다. 우리를 발견하자 수도사 가운데 하나가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오신다는 기별을 앞질러 접한 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도원의 식료와 요사를 담당하는 식료계 수도사, 바라지네 사람 레미지오라고 합니다. 원장님께서 말씀하시던 바스커빌 윌리엄 수도사이실 테지요?'
수도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무리에게 명했다.
'먼저 올라가서, 손님께서 곧 수도원으로 드신다고 이르게!'
수도사의 말이 끝나자 윌리엄 수도사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고맙소, 식료계 수도사. 친절하게 맞아 주시니 고맙기 한량없소. 더구나 급하게 무얼 찾아다니시는 모양인데 그 일까지 이렇게 작파하고 말이오. 허나 걱정은 마시오. 말은 이 길로 와서 오른쪽 오솔길로 접어들었소. 모르기는 하지만 그리 멀리는 못 갔을 것이오. 거름더미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기가 쉬울 겝니다. 그놈 역시 머리가 있으니까 저 가파른 비탈길로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오.'
'언제 그 말을 보셨습니까?'
식료계 수도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짓궂은 표정을 하고 나를 돌아다보면서,
'본 것은 아니오, 그렇지 아드소?'
이렇게 묻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형제들이 찾는 말이 <브루넬로>가 분명하다면 이 놈은 내가 방금 말한 곳에 있을 것이오.'
식료계 수도사 레미지오는 머뭇거리다가 윌리엄 수도사를 일별한 뒤 오른편 길 쪽으로 시선을 잠깐 던지고는 물었다.
'<브루넬로>라고 하셨는데... 말 이름이 <브루넬로>라고 라는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윌리엄 수도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허허, 이것 보세요. 형제들은 분명히 원장이 가장 아끼는 말 <브루넬로>를 찾고 있을 게요. 키는 열 다섯 장, 털은 검은색, 꼬리는 탐스럽고 발목은 잘쏙할 것이오. 수도원 외양간에 있는 말 중에서 걸음이 가장 빠른 말일 것이오. 머리는 작고 귀는 뾰족하고 눈은 클 테지요.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그놈은 오른쪽 길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조금 서둘러야 할 게요.'
식료계 수도사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서 있다가 함께 온 수도사들, 불목하니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고는 오른족 오솔길로 내달았다. 우리가 탄 노새도 산 위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호기심을 억누르고 있을 수 없어서 질문을 던지려고 하자 윌리엄 수도사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오른편 길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잠시 후, 환호성과 함께 수도사와 불목하니들이 재갈 물린 말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그들은, 참 신통한 사람 다 본다는 듯한 눈길로 사부님을 한차례 훑어보고는 앞질러 수도원으로 올라갔다. 내가 보기에, 윌리엄 수도사는 일부러 시간을 끌어 수도사 패거리를 먼저 수도원으로 올려 보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수도사 일행으로 하여금 수도원장에게, 자기가 드러내 보인 통찰의 기적을 소상하게 보고할 시간 여유를 주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부님같이 귀한 덕성을 고루 갖춘 분도, 자기의 명민한 통찰력을 과시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더러 허영심의 유혹에도 기꺼이 굴복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지닌 천성적인 외교관으로서의 재능을 능히 알고 있는 터라서, 우리가 수도원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이 참으로 박학 다식하고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더라는 평판이 미리 퍼져 있기를 바라는 그의 태도를 이해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호기심을 억누르고 있을 수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저에게도 좀 들려주십시오.'
사부님은 소리없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것 보아라, 아드소. 내 너에게 뭐라고 하더냐? 우리 같은 운수 행각승은, 세상이 위대한 책을 통해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사물의 정황을 유심히 관찰하는 법이라고 하지 않더냐? 일찍이 알라누스 데 인술리스는 이렇게 노래하셨느니라.
<이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거니>
그 분은 하느님께서 피조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끝없는 영생의 상징 속을 거니셨느니라. 허나 우주는 알라누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수다스럽다. 우주는 궁극적인 것(그것은 언제나 희미하게만 나타나는데)뿐만 아니라 비근한 것까지 드러내되 그 드러냄이 참으로 분명하다. 궁극적인 것은 어려울 뿐 비근한 것과 다르지 않은 법이다. 네가 홀로 깨쳐야 할 것을 이렇게 일러주어야 하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구나. 저기 갈림길, 쌓인 눈 위에 말발굽이 찍혀 있지 않더냐? 말은 우리 앞의 왼쪽 길로 갔더구나. 발자국의 간격이 아주 일정치 않더냐? 이 말발굽의 자국을 보면, 발굽이 작고 둥글며, 보조가 규칙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말의 성격을 알아낸 것이다. 말하자면 미친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날뛰는 말의 보조는 이럴 수가 없는 것이야. 소나무 가지가 지붕처럼 길 위쪽으로 비죽이 튀어나와 있는 걸 자세히 보았더니 약 열 다석 장쯤 되는 높이에서 가지가 군데군데 부러져 있더구나. 이놈이 꼬리를 치면서 오른쪽으로 꺾어 든 지점의 검은 딸기나무 덩굴에는 검은 털오라기가 걸려 있었다. 자, 그 길이 거름더미 쪽으로 나 있는 길이라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느냐고는 묻지 않을 테지? 저 아래 길모퉁이를 돌면서 보니까 동쪽 탑 아래 있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쓰레기 버린 자국이 눈을 아주 지저분하게 녹여 놓았더구나. 우리가 지나 온 갈림길 위치로 보면 오솔길이 그 벼랑 끝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어디로 이어지겠느냐?'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머리가 작고, 귀끝이 뾰족하고, 눈이 크다고 하신 말씀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난들 알겠느냐만 수도사들 표정을 보니까 내 말을 수긍하는 것 같더구나. 세빌리아 사람 이시도루스에 따르면 명마의 정의는 이렇게 되더구나. 즉 작은 머리, <뼈에 달라붙어 있되 건조한 가죽>, 뾰족한 귀끝, 큰 눈, 푸짐하게 벌어진 콧구멍, 꼿꼿한 목, 무성한 갈기와 꼬리털, 둥글고 단단한 발굽... 여부가 있겠느냐? 그런데 아까 내가 말하던 그 말이 수도원 외양간에서 제일 잘난 놈이 아니었다면 마부가 나오지 수도원의 중책을 맡고 있는 식료계 수도사가 몸소 찾으러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 아니냐? 너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도 모르느냐? 제 말의 생김새가 어떻게 생겨 먹었건 수도원의 말 주인은 마사의 권위자들이 훌륭한 말의 조건으로 내세운 조항을 모두 자기 말에서 보는 법이다. 더구나...'
윌리엄 수도사는 베네딕트 회 수도회 수련사인 나를 보고 짓궂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 서술자가 유식한 베네딕트 회 수도사인데 여부가 있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러나 어째서 그 말의 이름이 <브루넬로>라고 단언하셨습니까?'
'떽, 성령을 받고도 머리가 그렇게 아둔할 수가 있더냐? 다른 이름을 붙였을 리가 있겠느냐? 목하 빠리 대학 총장이 되어 세도로 말하자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뷔리당이 논증의 실례로 말을 인용할 때마다 그 말을 <브루넬로>라고 부르는 데 여부가 있겠느냐?'
사부님은 만사가 이런 식이었다. 그는, 자연이라는 위대한 책을 읽어 내는 방법에 정통했다. 뿐만 아니라 수도사들이 성서를 읽는 태도, 그리고 성서와 성서를 통해 갖게 되는 수도사들의 사고 방식에도 정통했다. 독자들도 곧 아시게 되겠지만 그의 이러한 재능은 오래지 않아 찬연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는 설명하기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설명 또한 명료해서 알아듣기가 쉬웠다. 따라서 내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지 못해도 크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호기심이 생기더라도 조금만 참고 있으면 그분이 찾아서 설명하시기 때문에, 소갈머리 없이 질문부터 했다가 코를 떼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이런 것을 알아차린 나 자신이 여간 대견스럽지 않았다. 진리의 힘도 이와 같은 것일까? 진리도, 스스로를 전파하고 설명하는 힘이 있다는 뜻에서 사부님의 설명과 같은지도 모른다. 나에게 이 놀라운 이치를 드러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할진저.
이야기가 곁가지로 흘렀다. 나잇살이나 훔친 이 늙은이가 사설만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었으니 실로 한심한 일이다. 각설하고, 이윽고 우리는 수도원 정문에 이르렀다. 수도원 원장은 황금 세숫대야를 든 두 명의 수도사를 거느리고 정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나귀에서 내리자 원장은 윌리엄 수도사의 손을 씻긴 뒤 덥석 껴안고는 입을 맞추고 원로의 안부를 물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원장의 환영 인사에 답하여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원장님. 덕이 높으신 원장님의 수도원에 발을 들여놓은 저는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 수도원의 이름은 산 너머 물 건너 사는 사람들까지도 두루 알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주님 이름을 빌린 순례자로서 이곳에 왔을 뿐인데도 원장께서는 순례자에게는 과분한 대접을 해주시는군요. 그러나 이제 내가 드리는 서한으로 아실 테지만, 이 땅의 통치자 또한 당신의 이름으로 저를 보내었습니다. 그 이름으로도 원장의 환대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원장은 황실 인장이 찍힌 공한을 받아 들고, 윌리엄 수도사의 방문은, 자기 형제들로부터 온 편지로 진작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고는(이 대목에서 나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누가 우리 베네딕트 회 수도원장을 기습할 수 있을까 보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베네딕트 회 수련사인 내 자신의 자존심을 가누었다) 식료계 수도사에게 우리의 숙사를 가르쳐 주라고 일렀다. 마부들이 달려와 우리 노새를 끌고 돌아가자 원장은, 노독이 풀리는 대로 우리를 만나겠노라고 말했다. 사부님과 나는 수도원 마당으로 들어섰다. 바로 그 마당에서 수도원 건물은 부드러운 쟁반(혹은 목장) 같은 산꼭대기의 평원 위에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다.
틈나는 김에 수도원 건물의 배치 상태를 소상하게 소개해 두는 편이 좋을 성싶다. 정문(외벽에 딸린 유일한 출입구) 뒤, 양 옆으로 나무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 길은 원내 성당으로 통한다. 이 길 왼쪽에는 두 채의 건물, 즉 욕장과 시약소, 식물 표본실 건물이 있다. 이 식물 표본실은, 채마밭과 식물원에 둘러싸여 있다. 이 두 건물 뒤, 그러니까 성당 왼쪽으로는 수도원 본관이 우뚝 서 있고, 교회와 본관 사이에는 묘지가 있는 것이다. 교회의 북쪽 문은 본관의 남쪽 탑과 마주보고 있어서 정문을 들어서는 방문객에게는 서쪽 탑이 먼저 보인다. 그리고 왼쪽으로 건물은 벽에 붙어있어 탑으로부터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 같으며 그 위로 북쪽 탑은 비스듬히 튀어나와 있다. 교회 오른쪽에 회랑을 중심으로 서 있는 건물은 숙사, 수도원장 공관, 그리고 객승들의 요사이다. 우리가 가는 곳도 바로 그 요사였다. 우리는 아름다운 화원을 지나 그 요사에 이르렀다. 오른쪽으로 부드러운 잔디밭 건너, 남쪽 벽에서 성당 동쪽에 이르는 곳에는 불목하니들의 거처, 외양간, 방앗간, 착유소, 곡물 창고, 식료 창고, 그리고 수도사들의 거처인 듯한 건물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약간 경사져 있기는 했지만 지형 덕분에 이 수도원을 건설한 고대의 건축가들은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토두니엔시스 혹은 기욤 되랑이 요구한 이상으로 수도우너 정위에 성공하고 있는 셈이었다. 해가 뜬 직후인 그 시각에 나는 서쪽으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동쪽을 향하고 있는 성가대석과 제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떠오르는 태양은 숙사의 수도사들과 외양간의 가축을 깨울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나는 그전에도 그 뒤에도 많은 수도원을 구경했지만 이 수도원만큼 아름답고 정위가 잘 된 수도원은 본 적이 없다. 장크트 갈렌 수도원, 끌뤼니 수도원, 퐁뜨네이 수도원도 크기에서는 앞섰지만 건물의 배치나 공간 배분은 이 수도원만 같지 못했다. 다른 수도원들과는 달리 이 수도원의 본관은 주변 건물에 견주어 엄청나게 컸다. 본관을 축조한 거장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지만 나는 곧 이 건물이 주변 건물보다 훨씬 오래 전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원래 이 본관 건물은 다른 용도로 축조되었는데 수도원이 들어서면서 이 건물을 본관으로 삼고 주변 건물은 배치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되, 이 거대한 건축물과 교회의 상호 정위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니 어려운 일이 아닌가. 모든 예술 가운데서 우주 질서(고대인들의 이른바 코스모스)를 체현하는 데 가장 큰 힘을 기울여야 하는 예술이 바로 건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장식 행위의 산물인 건축물은, 자기가 속한 종의 완성미와 균형미를 대표하는 한 마라의 동물과 같다. 수와 무게와 치수를 주관하시는 우리 창조주를 찬영할진저.
3시과
식료계 수도사는 땅딸막한 사람으로 생김새가 험상궂어 보였으나 뜻밖에 싹싹했고, 머리카락은 백발이되 아직 근력이 좋아 보였으며, 몸집은 작되 거동이 민첩했다. 그는 우리를 순례자 숙사로 안내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를 사부님께서 거처하실 방으로 안내하고, 나에게는 다음날 방 하나를 비우고 치워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나는 수련사여서 품계로 따져 독방 차지를 할 처지가 못 되었지만 그 수도원의 손님인지라 기거에 불편함이 없도록 각별히 배려해 주는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수도사 독방의 길고 널찍한 벽감 위, 식료계 수도사가 사람을 시켜 깔아 놓게 한 향긋한 마른 짚 위에서 잘 수 있었다.
이어 수도사들이 우리에게 포도주, 건락, 감람, 질이 좋은 건포도를 가져다 주고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기고는 물러갔다. 우리는 맛있게 먹었다. 사부님은, 엄격한 베네딕트 회 규율에 묶이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묵언계에 구애됨이 없이 식사 때마다 늘 옳고 바른 말을 들려주어서 흡사 옆에서 한 수도사가 성자의 성행록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도 나는 식사 중에 아침에 보았던 예의 그 말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사부님께 여쭈었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부님께서는 눈 위의 발자국과 가지에 남은 흔적을 읽으실 때는 그 말이 브루넬로라는 것은 모르셨습니다. 그 발자국은 <말>이라고 불리는 모든 종류의 발자국, 혹은 특정 종류애 속하는 말의 발자국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이라는 책이 반드시 사물의 본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고는 볼 수 없지 않겠습니까? 선학들께서는 그렇게 가르치신 것으로 압니다.'
사부님이 대답했다.
'에끼, 선학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하는 말이다만, 그 발자국이, 그 발자국 임자가 <정신의 언어>로서의 <말>이라는 것만 가르쳐 주고 있다는 네 말은 맞다. 뿐만 아니라 그 발자국은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발자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시각, 그 장소에 난 발자국을 보고 나는 그곳을 지나간 모든 말 중에서도 적어도 어떤 특정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말>이라고 하는 말의 개념에 관한 지각과 개별적인 말에 대한 내 지식 사이를 오가면서 이것저것 추론하게 된다. 그런데 발자국을 보니까 내가 아는 모든 종류의 말 중에서 한가지 말이 떠오르더구나. 당시 나는 나의 무지와 발자국의 특이성 사이에서 망설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무지는 아주 투명한 보편 관념의 형태를 전제한 것이었다. 어떤 사물을 먼 거리에서 볼 경우,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에는 그게 어떤 공간을 점유하는 물체로 정의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야. 조금 더 가까이 가면, 글쎄, 그게 말인지 당나귀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물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게 될 테지. 자, 조금 더 다가가면 어떻게 될까? 조금 더 다가가면 그게 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겠지? 하지만 그 말이 브루넬로인지 니게르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어. 자, 여기에서 또 조금 더 다가간다. 그러면 비로소 그게 브루넬로인지 니게르인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말의 고유 명사인 이름까지 알게 되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게 된 셈이 아니냐. 만일에 그 말의 이름이 정말 브루넬로라면 말이다.
한 시간 전만 해도 나는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끌로 올지 몹시 궁금했다. 무슨 까닭이겠느냐? 말에 대한 내 지식의 방대함때문이 아니라 추리가 빈약했기 때문이다. 나의 지적 갈증은, 수도사들이 재갈을 물려 끌고 오는 말을 보는 순간에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때야 비로서 내 추리가 사실에 가깝게 접근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야.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말을 상상하면서 이용한 것이 바로 순수 기호라는 것이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과 남은 흔적은 <말>이라고 하는 동물을 나타내는 기호였다는 말이다. 기호, 그리고 기호의 기호는 우리가 사물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만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이분이, 보편적인 관념에 대해서는 몹시 회의적인 견해를, 개별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대단한 존중을 피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사부님의 이런 경향은 이분이 브리튼 사람인 데다 프란체스코 수도사인 데서 유래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이분에게는 이야기를 신학적인 논쟁으로 비화시킬 힘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 몫으로 허락된 벽감으로 들어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누가 들어오면서 내 누운 꼴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으로 알기보다는 그냥 짐 보따리쯤으로 알았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3시과쯤에 윌리엄 수도사를 예방한 수도원장도 나를 그렇게 보았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수도원장 모르게 두분의 첫 번째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각설하고... 수도원장이 들어왔다. 그는 먼저 사부님의 휴식을 방해하게 된 것을 정중하게 사과하고, 아침에 했던 환영 인사를 되풀이한 뒤, 극히 중요한 일로 윌리엄 수도사와 은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원장은 말머리에, 도망친 말은 붙잡는 과정에서 사부님이 보여준 놀라운 통찰력을 치하한 다음, 어떻게 해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짐승을 그렇듯이 정확하게 뚫어 볼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사부님이, 길에서 본 흔적과 발자국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자 원장은, 믿어지지 않는 혜안이라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이어서 원장은, 지혜로우신 분이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라고 누누이 치하한 다음, 파르파의 수도원장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를 통해 사부님이 황제로부터 밀명을 받고 왔다는 사실뿐만 아니라(이 문제에 대해서는 차후에 논의하기로 하자) 영국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종교 재판에 조사관으로 참여할 때 보인 겸양의 미덕과 놀라운 통찰력으로 칭성이 자자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원장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많은 사건을 심리하시면서 수도사께서는 기소된 자의 무죄를 증명하셨다는 소문이 참으로 듣기에 좋았습니다. 저는 인간이 하는 일에는 늘 악마가 끼여든다고 믿는 사람입니다만 이 믿음이 요즈음의 슬픈 날들 만큼 절실한 적도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수도원장은 누가 그 방으로 숨어들어 엿듣기라도 하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 뿐만 아니라, 악마는 제2의 원인을 통해서도 역사합니다. 제가 알기로, 악마는 희생자를 하나 골라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자기 일을 대행케 하고 그 허물을 그 희생자에게 씌웁니다. 그리고는 의로운 희생자가 악마의 제자를 대신해서 화형을 당할 때 희희낙락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조사관은, 속죄양을 찾아내는 일을 재판을 마무리 짓는 일로 그릇 알고 갖가지 수단을 두루 동원하여 기소된 자로부터 자백을 얻어내고 자기 믿음을 과시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조사관 역시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윌리엄 수도사의 말이었다. 수도원장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응수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전능하신 분의 뜻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까요. 허나 조사관 같이 귀한 분에게 의혹의 눈길을 던진다는 것은 저같이 하찮은 위인이 감히 할 짓이 못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어른의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수도원에서 무슨 변고가 있었습니다만 어른같이 명민하시고 사려 깊으신 분의 혜안과 분별이 도우셔야 능히 이 일을 풀어 낼 수 있습니다. 드러내는 데 명민하시되(필요하다면) 덮어두는 데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한 목자에게 허물이 있으면 다른 목자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터이니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양떼가 목자를 불신하기 시작했다면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러 번 보아서, 이분이 즉석에서 정중하게 자기 의사를 나타내면, 속에다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반대 의견이나 의혹을 담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장이 말을 이었다.
'이런 까닭에서... 저는, 목자의 허물이 관련된 이 사건은 어르신 같은 분께 부탁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선악은 물론이고 드러내어서 좋을 것과 드러내지 않아야 좋을 것을 능히 분별하실 테니까요. 듣건대 어르신께서 유죄를 선고하시는 것은...'
'기소된 자의 범죄 행위가 독살 행위, 미성년자 오손 행위 및 감히 인구에 회자될 수 없는 그 밖의 파렴치 행위에 이를 때...'
수도원장이 윌리엄 수도사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어르신께서는... 어느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악마의 소행임에 분명하여, 훈방하면 범죄 사실 이상의 물의를 빚을 것이 분명할 때만 형을 선고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렇습니다... 속권에 넘겨도 내 양심 어느 한 구석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중죄를 지은 사람에게만 죄값을 물립니다.'
수도원장은 잠시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가 물었다.
'아니 어째서 어르신께서는, 범죄 행위 자체가 안고 있는 악마적인 동기를 차치하시는지요? 악마의 역사가 없는 범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야 인과를 논증하기가 지난한 노릇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나는 하느님 한 분만이 이 이치를 따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새카맣게 탄 나무라고 하는 <과>와 거기에 불을 붙인 번갯불이라고 하는 <인>의 관계를 인증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인과의 끝없는 고리를 더듬어 낸다는 일이 나에게는 하늘에 이르는 탑을 쌓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자, 어떤 사람이 독살을 당했다고 치지요. 이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표적이 있다면, 독살한 사람은 물론 제2의 인물일 테지요. 이 정도는 나도 논리적으로 증명해 낼 수 있습니다. 인과의 고리가 이 정도로 간단할 경우에는 내 머리도 어느 정도 확실하게 작용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범행이 저질러진 배후에 인간의 힘이 아닌, 악마의 힘이 개재했다고 상상하고서야 어떻게 인과의 고리를 더듬어 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원장의 말 브루넬로처럼 악마 역시 제가 간 길에다 분명한 표적을 남겨 놓을테니까요.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증거에 혈안이 되어야 합니까? 범인이 저 사람이라는 걸 알고 그를 속권에다 넘겨주면 내 임무는 끝나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 사람은 사형을 당할 테고 하느님께서는 그자의 죄를 용서하실 테지요.'
'하지만 제가 듣기로는, 3년 전 킬케니에서 열린 종교 재판에서 몇 사람이 파렴치범으로 기소되어 왔을 때 어르신께서는 악마적인 권능의 개입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전에 확인된 바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만...'
'그렇습니다만, 나는 그걸 공개적으로 장황하게 확언하지도 않았다는 데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문득, 해명의 필요를 느꼈던지 다소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떻게 악마의 소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사관들, 주교, 시 행정관들, 방청객, 심지어는 기소된 당사자까지도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하는 판국인데 내가 어떻게 악마의 소행을 빌미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르기는 하지만 악마가 존재한다는 유일하고 확실한 증거는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악마의 소행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그 믿음 때문에 오히려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수도원장이 딱하다는 듯이 물었다.
'하면... 재판에서 악마는 혐의자들뿐만 아니라 재판관들에게도 그 권능을 행사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글쎄요. 내가 어떻게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습니까...'
윌리엄 수도사는 잠시 후퇴하는 눈치였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수도원장이 머쓱해지는 것 같았다. 윌리엄 수도사는, 수도원장이 궁한 입장에 몰린 틈을 타서 화제 바꾸기를 시도했다.
'... 그렇거니 다 옛날 이야깁니다. 나는 이미 그 직분을 떠났습니다. 떠났으니,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이었을 테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수도원장이 까닭 모를 한숨을 쉬었다.
'지금 나는 아주 미묘한 문제에다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틈이 없기는 합니다만 원장께서 자초지종을 들려주시기만 한다면, 지금 원장님의 심기를 사납게 하는 문제에도 한번 눈을 대어 보기로 하지요.'
수도원장은, 윌리엄 수도사의 관심이 밑도 끝도 없는 관념 논쟁에서 자기 문제 쪽으로 돌아온 것을 몹시 다행스러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원장은, 조심스럽게 낱말을 골라가면서, 며칠 전에 일어나 수도사들의 공부를 크게 방해하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장은 윌리엄 수도사가 인간의 정신과 악마의 간계를 능히 꿰뚫어 볼 수 있는 현자이니까 숨김없이 털어놓겠다고 말하고는, 모쪼록 수도사께서 귀한 시간을 나누어 이 고통스러운 수수께끼를 푸는데 할애해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원장이 말한 사건의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장서관 원고를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미던, 젊지만 유능한 채식장인 수도사인 오트란토 사람 아델모가 어느 날 본관 옆 벼랑 아래에서 염소치기에 의해 시체로 발견되었다. 종과 기도 시간에는 성가대석에서 그를 본 수도사가 있었으나 이튿날 조과 기도 시간에는 본 사람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한밤중에 벼랑에 떨여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원장은 덧붙였다. 사건 당일 밤은, 우박을 방불케 하는 칼날 같은 눈보라가 남풍과 함께 몰아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시체는, 표면만 녹아 가볍게 언 눈에 묻힌 채 가파른 벼랑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떨어지면서 바위에 부딪혔는지, 갈가리 찢겨 있었다고 했다. 연약하고 가엾은 목숨... 떨어지면서 얼마나 바위에 부딪혔던지 부딪힌 곳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원장은, 벼랑에 면한 탑의 세 면 중 어느 한 면의, 3층 어디쯤에 있는 창문에서 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윌리엄 수도사가 물었다.
'그 불쌍한 수도사의 시신은 어디에다 묻으셨습니까?'
'당연히 묘지이지요. 수도원으로 들어오시면서 보셨을 겁니다. 묘지는 성당 북쪽과 본관, 채마밭 사이에 있습니다.'
원장의 말에 윌리엄 수도사가 다짐하듯이 천천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원장께서 처한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이 불쌍한 젊은이가... 하느님 이 젊은이를 용서하소서... 자살이라도 했다면, 다음날 창문 중 어느 창문인가가 열려 있었을 터인데... 창문이라는 창문은 모조리 제대로 닫혀 있었고, 창틀에 물 묻은 자국도 없었던 것이겠지요.'
이 수도원장은, 고급 외교관이 그렇듯이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않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놀랐던 모양인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바람에, 아리스토텔레스같이 진중하고 도량이 넓은 사람으로 보이던 원장 특유의 풍채가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원장이 휘둥그래진 눈을 하고 물었다.
'누가 그러던가요?'
'누가 그러기는요... 원장께서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만일에 창문이 하나라도 열려 있었다면 원장께서는 그 수도사가 바로 거기에서 투신한 것으로 단정했을 테지요. 밖에서 언뜻 보았더니, 불투명한 유리가 박힌 큼직한 창이더군요. 이런 종류의 창이 사람의 키 높이에 나 있는 경우는 드물지요. 특히 이 정도 규모의 건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설사 창문이 열려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가련한 친구가 거기 올라가 제 몸을 아래로 던졌을 수는 없는 거지요. 그렇다면 자살로는 설명이 되지를 않습니다. 게다가 자살한 시체를, 성별된 묘지에다 매장했을 턱도 없고요. 그러나 원장께서 이 수도사를,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 주신 걸 보면, 창문은 열려 있지 않았을 수밖에요? 만일에 문이 닫혀 있었다면(나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악마의 소행 아닌 바에야 죽은 자가 하느님의 힘이든 악마의 힘이든 빌려 벼랑을 기어올라가 자기 비행의 증거를 인멸할 수는 없을 테지요) 이 시체는 분명히 사람의 손이나 악마의 권능에 의해 떠밀린 것입니다. 누가 그런 짓을 했겠느냐고 하시겠습니다만, 나 역시 누가 그를 벼랑으로 밀었다는 말은 않겠습니다. 하지만 누가 창틀에다 세우기는 했겠지요. 지금 원장께서 고민하시는 것은,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간에 악마의 권능이, 이 수도원 안에서 역사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만...'
수도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 수도사의 말을 긍정한다는 것인지, 윌리엄 수도사가 그처럼 명석하게, 이로정연하게 전개한 논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인지 내게는 분명하지 않았다. 수도원장이 말을 이었다.
'... 창 틀에 물 묻은 흔적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동쪽에 면해 있는 창으로는 비가 들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모자랍니다. 명불허전은커녕, 전하는 자들도 어르신의 높으신 재능을 다 헤아리지 못했군요. 말씀하신 그대롭니다. 창틀에 물 묻은 흔적이 없었습니다. 저도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네... 말씀하신 그대롭니다. 이제 어르신께서는 제 걱정을 이해하셨겠지요. 저희 수도원 수도사가 자진의 죄악으로 제 영혼을 더럽혔다고 한다손 치더라도 이것만으로도 문제는 적잖게 심각합니다. 그러나 저에겐 수도사 가운데 또 하나가 이미 같은 정도로 사악한 죄악으로 저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고 있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뿐이라면...'
'먼저 여쭙고 싶군요. 왜 수도사 가운데 또 하나라고 하십니까? 수도원에는, 다른 사람들, 예컨대 마무도 있고 염소치기도 있고 불목하니도 있을 텐데요?'
수도원장은 죄라도 자백하고 있는 사람처럼 머리를 조아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씀 드려서, 이 수도원은 규모에 견주어 재물이 많습니다. 수도사 60명에 불목하니가 150명이나 되니까요. 그러나 모든 것은 이 수도원 본관에서 일어났습니다. 아시리라고 믿습니다만 본관 1층은 주방과 식당으로 쓰고 있으나, 2, 3층은 문서 사자실과 장서관으로 쓰고 있습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는 본관 문이 잠기는데, 규칙이 엄격해서 이 시간 이후로는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됩니다...'
수도원장은, 윌리엄 수도사의 다음 질문을 지레 짐작하고 재빨리, 그러나 거북살스러운 듯한 표정을 하고 덧붙였다.
'...물론 수도사들에게도 제한됩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불목하니가 야간에 거기에 침입할 가능성은 절대로(아시겠지만 글자 그대로 절대로)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의 눈꼬리에 방약무인한 웃음시가 자리잡았다가는 사라졌다. 섬광이 번쩍이는, 혹은 유성이 떨어지는 시간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그런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원장이 덧붙였다.
'무서워서 못 들어간다고 해도 좋습니다. 규칙도 규칙이지만 사고 방식이 단순한 머슴들에게는 규칙 위반자에 대한 위협도 효과가 있고, 규칙 위반자들이 초자연적인 변고를 당한다는 소문도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사는...'
'알겠습니다.'
'수도사가 이 금단의 구역을 범하려 한다면 다른 이유에서일 테지요. 이유가 없지는 않습니다... 규칙은 이를 금하고 있지만...'
윌리엄 수도사는 원장이 거북살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화제를 돌릴 요량으로 다른 질문을 던졌으나 이 질문이 원장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 같았다.
'타살의 가능성을 말씀하시면서, <그리고 그것뿐이라고> 하셨는데 대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요?'
'제가 그랬습니까? 그렇지요. 아무리 사악한 자라도 동기 없이는 살인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도반 수도사를 살해할 만한 그 동기의 사악함에 치를 떠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그것 밖에는 없습니까?'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니까, 원장께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은 다 하셨다는 뜻이겠군요?'
'바라건대 윌리엄 형제, 윌리엄 형제여!'
수도원장은 <형제>라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윌리엄 수도사는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대는 영원한 사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수도원장이 속삭였다.
바로 이 순간에 두 선학께서 무심결에 내보인 그 거동의 경솔함이라니! 한 분은 근심과 걱정 때문에, 또 한 분은 호기심 때문에 후학에게 차마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하느님의 신성한 사제의 비의에 다가서는 수련사로서의 경륜은 비록 일천하나, 나는 두 선학의 언중에서 내비치는 언외언을 읽을 수 있었다. 수도원장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으나 고해 성사에서 알아낸 것이어서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원장은 아델모 수도사의 비극적인 최후와 관련된 이야기를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었음이 분명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윌리엄 수도사에게, 고해자를 보호하는 지엄한 계율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 비밀을 밝혀 달라고 애걸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사부님이 그 뛰어난 지력으로 사건의 전모를 꿰뚫어 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두 분 사이를 흐르는 침묵을 깨뜨렸다.
'좋습니다., 수도사들에게 질문은 해도 좋습니까?'
'좋습니다.'
'수도원 안을 자유로이 나다녀도 좋습니까?'
'권한을 드리지요.'
'<수도사의 면전에서> 나에게 이 일을 맡기시겠습니까?'
'바로 오늘 저녁부터.'
'그러나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수도사들이, 내가 이 조사를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수도원의 장서관을 구경하고 싶던 참입니다... 여기에 온 까닭도 이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뭇 기독교국의 수도원이 선망하는 장서관이니까요.'
사부님의 이 말 한마디에 수도원장은 발길에 엉덩이를 차인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을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수도원 안에서는 어디든 나다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관 맨 위층, 그러니까 장서관은 안됩니다.'
'왜 안됩니까?'
'미리 설명해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알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장서관은 여느 수도원의 장서관과 같지 않습니다.'
'어떤 기독교국 수도원의 장서관보다 장서가 많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 장서관과 비교할 때 보비오나 폼포사, 혹은 끌뤼니나 플뢰리의 장서관은 더하기 빼기를 갓 시작한 아이의 공부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도한 내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백 수십 년 전부터 노발레사의 자랑거리였던 6천 책의 필사본 고전도 귀 장서관에 견주면 하찮은 장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그 필사본 고전의 상당수가 여기에도 고스란히 소장되어 있다는 것도 압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귀 수도원 장서관은, 바그다드에 있는 서른여섯 개의 장서관, 비지르 이븐 알 알카미의 1만 권의 책 필사본에 대항하는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빛이라는 사실도 알고, 귀 장서관의 성서 필사본의 수가 카이로의 자랑이 2천 4백 권 책에 이른다는 코란의 수에 필적한다는 것도 나는 압니다. 연전에, 이교도들은 트리폴리 장서관이, 장서가 6백만 책이고 주석학자가 8만 명, 서기가 2백 명이라고, 거짓말의 고수들답게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나는 귀 장서관이야말로 이러한 이교도들의 자신에 찬 선언에 대항할 수 있는 명백한 실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하느님을 찬미할 일입니다.'
'나는, 이 수도원의 수도사 대부분이 세계 전역의 수도원으로부터 유학 와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중에는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이곳밖에는 없는 고본의 필사본을 만들어 돌아가는 수도사도 있겠지요. 이곳에 없는 사본을 가져 와 이 장서관의 장서를 늘려 줄 생각은 않고 말이지요. 개중에 죽을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공부하는 수도사도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장서만이 그들이 필생의 사업으로 작정한 연구에 도움을 끼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게르만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키아 사람, 스페인 사람, 프랑스 사람, 그리스 사람도 있을 겁니다. 나는, 예전에 페데리코 황제께서 이 장서관으로부터 멀린의 예언서를 빌러 아랍 어로 번역, 이집트의 술탄에게 보낼 선물로 삼았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매우 슬픈 시대에는 무르바흐 수도원 같은 은혜로운 수도원에도 서기가 하나 없고, 장크트 갈렌 수도원에도 필사에 능한 수도사 하나 없으며, 각지의 도시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조합이나 만들고 길드나 조직하는 이런 시대에 오직 귀 수도원만은 나날이 새로워지면서 귀 교단의 영광을 날로 드러내고 있으니 이 아니 고마운 말입니까?'
윌리엄 수도사의 말에 수도원장이 나직한 어조로 응수했다.
'<책이 없는 수도원은... 재산이 없는 도시, 군대 없는 성채, 그릇 없는 부엌, 먹을 것 없는 밥상, 풀 없는 뜰, 꽃 없는 목장, 잎 없는 나무 같은 것이지요.> 그러니 수도사께서도 익히 아시겠지요? 공부와 기도라는 두 가지 소명 아래 날로 그 모습을 달리하던 우리 종단은 지금까지 알려진 세계의 빛, 지혜의 보고, 화재와 약탈과 지진의 위협을 받는 고대 학문의 구원이었으며 새로운 저술과 고대 필사본 증보의 용광로였습니다. 익히 아시는 대로 지금 우리는 암흑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씀드리기가 부끄럽습니다만 몇 년 전에 비엔느 총회는, 모든 수도사들에게 평의회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의무 규정을 재천명해야 했습니다. 2백 년 전만 하다라도 위엄과 은혜로 영광을 누리던 수도원 중 지금 나태한 자들의 소굴이 되어 있는 수도원이 얼마나 많습니까? 평의회의 명령은 여전히 지엄합니다만 도시의 좀이 우리의 성역에 슬고 있고 하느님 백성은 장사와 전쟁에 침을 흘리고 있습니다. 저 아래, 신성이 머리 둘 곳 없는 속세 사람들은 상스러운 말을 입에 올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글로 이를 기록하기까지 아니 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성직자들도 예외가 아니라니 대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필경은 이교도들을 선동할 터인 이러한 서물은 한 책도 우리 수도원으로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값으로 세계는 지옥의 심연 언저리에서 기우뚱거리니 머지않아 이 심연이 인간의 무리 안에 자리할 것입니다. 호노리우스가 일찍이 내다보았지만 지금의 우리가 고대의 인류보다 체구가 작듯이 미래의 인류는 지금의 우리보다 체구가 작을 것입니다. <세계는 늙어간다>라는 말로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소임을 맡겨 주셨다면 그것은 우리 교부들이 물려준 지혜의 보고를 관리하고, 거듭해서 고구하고, 이를 지킴으로써 심연으로 향하는 인류의 앞을 막고 나서는 일일 것입니다. 태초에 동방에 있던 사해 동포 정보가 그 뜻이 이루어질 날이 가까워짐에 따라 서진하는 것은 하느님 뜻입니다. 이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하느님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작금의 사태로 미루어 이미 세계는 종말의 문턱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지복 천년이 올 때까지, 가짜 그리스도가 한순가 덧없는 승리를 거둘 때까지 하느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이르셨고, 교부들이 한 자 한 획도 틀림이 없이 이를 기록했고, 비록 어제 오늘의 학계가 뱀굴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옛 학자들이 주석을 놓아 왔던 하느님의 말씀과 기독교 세계의 보물을 지키는 사명은 우리 머리 위에 머뭅니다. 날이 저물고 있기는 하나 우리는 아직 지평선에 남은 횃불이며 등잔입니다. 이 수도원 장서관의 벽이 성한 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수호자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그것은 그렇고, 이것과 장서관 출입 통제와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모르시겠습니까, 윌리엄 수도사님? 이 엄장한 건물을 살찌우는 막중하고도 거룩한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이 대목에서 수도원장은 수도사 독방 창에서 내다보이는, 교회 위로 불쑥 솟은 본관 건물을 일별하고는 말을 이었다.
'... 수세기 동안이나 신심있는 분들이 엄한 규칙을 고루 지키며 애써 왔습니다. 장서관은 수세기 동안 외부로는 드러나지 않은 계획 아래 운영되어 왔습니다. 수도사들은 알 도리가 없지요. 오로지 사서계 수도사만이 전임 수도사로부터 전수 받습니다. 사서계는 살아 있을 동안에 보조사서에게 이 비밀을 전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서계가 세상을 떠나도 장서관 운영의 비밀은 고스란히 다음 대로 전해 집니다. 이 수도사들은 비밀을 누설할 수 없습니다. 서책의 내용을 알고, 서책의 미로 사이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 어느 서책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돌아온 서책을 어디에 꽂을지 아는 사람, 이 엄청난 장서를 안전하게 보관할 책임을 가진 사람은 오직 이 사서계 수도사뿐입니다. 다른 수도사들은 문서 사자실에서 공부하는데 이들이 혹 장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도서의 목록을 아는 수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목록만 보고는 내용을 알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서계 수도사만이 보관되어 있는 책의 위치로, 그 접근의 난이도를 통하여 그 책이 안고 있는 비밀이나 내용의 진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대출을 요구하는 수도사에게 그 서책을 내어 줄 것인지, 말하자면 대출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다 사서계의 소관입니다. 혹간 저에게 물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라고 해서 모든 것에 다 유익한 것은 아니고, 허위라고 해서 모든 눈에 다 거슬리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사란 사자실에서 무엇을 쓰고 무엇을 읽든 하나도 틀림이 없이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자면 꼭 필요한 서책을 읽게 해 주어야 합니다. 지적인 약점이나 자만심이나 악마의 꾐에 의한 바람직하지 못한 호기심에서 지켜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서관에는 허위를 기록한 위서도 있다는 것입니까?'
'악마는 신성한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에 존재하며 그 같은 악마의 추악한 모습 속에서도 창조주의 힘이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마법사가 쓴 책, 유태의 신비주의, 이교도 시인의 우화, 불신자들의 허언 역시 하느님 뜻으로 존재하는 것 입니다. 수도원을 세우고 수세기 동안 수도원 살림을 꾸려 온 분들은, 아무리 거짓을 기록한 서책이라도 현자의 눈으로 보면 거기에서 하느님의 지혜가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실답게 믿었습니다. 확고하고도 신성한 신념이었던 것이지요. 장서관이란 거짓을 기록한 서책까지 고루 실은 방주인 셈입니다.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장서관을 아무나 드나들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수도원장은, 자기의 마지막 주장이 억지에 가깝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태도는, 그래서 그런지 기가 죽어 보였다.
'... 서책이란 참으로 튼튼하지 못한 물건입니다. 세월이 가도 삭아 버리고 좀이 슬면 해어지고 서툰 손에 걸리면 부서집니다. 수 백 년 동안, 누구든지 마음대로 들어가 우리의 귀중한 필사본을 만졌다고 한다면 지금은 상당수가 이 장서관에 남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장서관 사서계 수도사는 인간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서책을 지켜야 합니다. 그는 진리의 원수인 건망과의 전쟁에 삶을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본관의 맨 위층에는 올라갈 수 없는 것이군요?'
수도원장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무도 들어가서는 안되고, 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장서관은, 그 안에 소장되어 있는 진리 그 자체처럼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그 안에 소장되어 있는 허위처럼 교묘하게 스스로를 지켜 냅니다. 장서관은 정신의 미궁이며 지상의 미궁인 것입니다. 혹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오는 것은 뜻 같지 않습니다. 어르신께서도 이 수도원의 이 같은 규칙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원장께서는 아델모가 장서관의 창 가운데 하나에서 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아델로 이야기가 시작된 곳일지도 모르는 장서관을 보지 않고 어떻게 이 사건의 가닥을 풀어 나간다는 것입니까?'
수도원장은 애원이라도 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윌리엄 수도사님, 보시지 않고도 저의 말 브루넬로의 모습을 그려 내시고, 아무 이야기도 들으신 바 없이 아델모 사건의 정황을 상상할 수 있는 분이라면, 들어가 보지 않으셔도 그곳을 손바닥 보듯 하시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윌리엄 수도가사 머리를 조아렸다.
'원장께서는 현명하시면서도 엄격하십니다. 바라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제가 현명하다면 그것은 엄격할 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우베르티노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있습니다. 아마 어르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성당에 가시면 만나 뵈실 수 있습니다.'
'언제가 좋을까요?'
'언제든지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셔야 합니다. 박식한 분이시기는 하지만 그분 역시 장서관에 대해서는 아시지 못합니다. 장서관을 속세의 유혹이라고 생각하시지요... 그래서 대개의 경우는 교회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소일하십니다.'
'근력은 좋습니까?'
'좋지 않습니다. 세상사에는 오불관언입니다. 올해 예순 여덟이시지요. 그러나 정신만은 소시적 그대로 카랑카랑할 것입니다.'
'지금 찾아가 봐야겠군요. 고맙습니다, 원장님.'
수도원장은, 가더라도 점심이나 하고 6시과 이후에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으나 윌리엄 수도사는 점심 생각이 없다면서 바로 우베르티노를 만나겠다고 대답했다. 수도원장은 자리를 뜨기 위해 돌아섰다.
수도원장이 막 방문을 나서는데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이 들려 왔다. 치명상을 입었음직한 사람이 지를 법한 비명이었다. 비명은 몇 차례 계속되었다.
'무엇이지요?'
윌리엄 수도사가 당황해서 물었다.
원장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돼지를 잡지요. 돼지치기들이 나선 모양이군요. 피는 피이되 어르신께서 관심두실 피는 아닙니다.'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는 똑똑한 사람이라는 평판에 어울리지 않는, 경솔한 말을 한 셈이었다. 이유인즉 다음날... 아니다, 나까지 경솔하게 주책을 부릴 일이 아니다. 다음날의 이야기를 잇기에는 먼저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6시과
교회는 뒷날 내가 슈트라스부르크, 샤르뜨르, 밤베르크, 그리고 빠리에서 보았던 다른 교회만큼은 웅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탈리아에서 그전에 구경한 적이 있는 교회와 흡사했다. 이를테면 하늘을 향해 아찔할 만큼 솟아 있다기 보다는 대지를 그러안고 있는 듯한 양식으로, 높이보다는 너비를 중시하는 경향이 엿보였다. 그러나 이 건물 1층은 사뭇 달랐다. 정방형 흉벽이 연이어 있어서 요새를 방불케 하는 것이 다른 접이었다. 흉벽 위에는 또 하나의 구조물이 있었는데 견고하기로 말하자면 첨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제2의 교회였다. 이 교회 지붕에는 역청칠이 되어 있었고 사방으로는 창이 인색하게 뚫려 있었다. 선조들이 프로방스와 랑그독에다 세운 것 같은 튼튼한 수도원 교회는 현대적인 건축 양식을 특징짓는 호방하고 화려한 장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대 양식은 최근 들어 훨씬 화려해졌는데, 내 보기엔 성가대석 위로 천장을 향해 불쑥 치솟은 첨탑이 그 일례일 것 같다.
열려 있는 정문 양쪽에는 곧고 밋밋한 두 개의 기둥이 솟아 있었는데 첫눈에는 거대한 하나의 아치 같았다. 그러나 이 기둥에는 각각 두 개의 나팔꽃 모양의 구멍이 나 있었다. 여러 개의 아치에 둘러싸여 있어서 별나게 시선을 끄는 이 구멍은 거대한 박공의 삼각면에 덮여 있는 문, 즉 바닥 없는 심연의 중심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박공의 삼각면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두 개의 홍예 받침대였는데, 이 받침대와 받침대 사이에는 무의가 양각된 또 하나의 기둥이 있었다. 이 기둥 양쪽으로 금속 보강제를 쓴 참나무 문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시각이 시각이어서, 기가 한풀 꺾인 햇빛은 거의 수직으로 지붕을 쬐면서 박공의 삼각면은 건드리지도 않고 비스듬히 정면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두 개의 기둥을 지나고 보니 어느 틈에 흉벽을 떠받치고 있는, 작은 주열 위로 불쑥 솟은 무수한 아치 밑에 와 있었다. 눈이 그늘에 익자 다듬어진 석재가 내는 침묵의 소리라 들리는 것 같았다. 우선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바라보면서 상상하는 수밖에 없었다(상상이라고 하는 것은 문외한들의 문헌이 아니던가). 순간 나는 두 눈이 휘둥그래진 채, 이날 이때까지도 제대로 묘사하기 어려운 기묘한 환상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하늘에서 만들어진 옥좌와 거기 앉으신 분을 보았다. 앉으신 이의 얼굴은 엄격하면서도 침착했다. 그는 두눈을 화등잔같이 뜨고, 그 꼭대기까지 올라온 지상의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얼굴 주위와 가슴 위로, 사이 좋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 강물처럼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머리에 쓴 관은 법랑과 보석을 넉넉히 들여 치장한 것이었고, 보라색 용포는 금은사로 자수한 것으로 무릎 위에서 넓은 단으로 접혀 있었다. 그분이 무릎에다 놓고 있는 왼손에는 봉인이 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분의 오른손은 축복을 내리려고 그러는지 징벌의 불길을 내리치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높이 들려 있었다. 얼굴은 십자가와 꽃이 어른거리는 아름다운 광륜의 빛을 받고 있었다. 옥좌 주위, 그리고 앉으신 이의 얼굴 위로, 나는 반짝이는 에메랄드 빛 무지개를 보았다. 옥좌 앞, 그러니까 앉으신 이의 발 밑으로는 수정 바다나 넘실거렸고 앉으신 이의 주변, 말하자면 옥좌 옆과 위에서는 네 가지 무서운 형체를 보았다. 보고 있자니 몹시 겁이 났다. 앉으신 이에게는 더없이 유순하고 사랑스러운 추종자들일 터인 이들은 쉼 없이 앉으신 이를 찬양했다.
아니다. 모두 다 무서워 보였다고는 할 수 없겠다. 나의 왼쪽(그러니까 앉으신 이의 오른쪽)에 있던 이는 책을 한 권 내밀고 있었는데 내 보기에는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성미가 온화할 듯했다. 그러나 반대쪽에는 놀랍게도 독수리가 있어서 등골이 오싹했다. 딱 벌린 부리, 흉갑 같은 깃, 무시무시한 발톱...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있었다. 앉으신 이의 발치, 즉 앞의 두 형상 아래에는 황소와 사자가 발로 책 한 권씩 그러쥐고, 옥좌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옥좌를 향하고 있었으며 어깨와 꼬리는 강렬한 충동 때문에 뒤틀린 것 같았고 옆구리는 긴장해 있었으며, 사자는 죽어 가는 동물의 다리 같았다. 입은 벌리고 있었다. 뱀 같은 꼬리는 꼬이고 뒤엉킨 채 불꽃의 혓바닥 속에 감겨 있었다. 두 짐승 모두 날개가 있었고 뒤에는 후광이 있었다. 꼴이 험상궂은 것과는 달리 이 네 형체는 지옥의 사자가 아닌 천국의 사자였다. 그들이 무서워 보이는 것은,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이를 증거하느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옥좌 주위, 정확하게 말하면 네 형상의 옆, 앉으신 발치에는 마치 수정 바다의 투명한 물을 통과해 보이듯, 전 시야를 꽉 채우는 듯한, 3각면의 3각형 틀에 의해 장치된 기층부가 있었다. 처음에는 7더하기 7미터 길이의 기층부에서 3 더하기 3, 급기야는 2 더하기 2미터 폭으로 솟아오른 기층부가 있었다. 박공의 삼각면 공간을 환상으로 가득 채우듯이 거대한 옥좌 양편에는 24개의 작은 옥좌가 더 있었는데 여기에는 흰 옷 차림에 금관을 쓴 스물네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몇몇 노인들은 류트를 들고 있었고, 한 명은 향수병을 들고 있었으며, 단 한 명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무아의 경지에 들어간 듯한 얼굴을 앉으신 이 쪽으로 돌리고, 앉으신 이를 찬양하고 있었다. 이들의 사지는 모두 앞의 네 형상처럼 뒤틀려 있었다. 앉으신 이의 모습은, 사방 어느 쪽에서도 보일 수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법열의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 같았다(다윗이 성약의 궤 앞에서 춤을 출 때도 그렇게 추었으리라). 이들의 모습은 인간의 육신이라는 상식적인 구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건 시선은 항상 찬연히 빛나는 중앙의 옥좌를 향하고 있었다. 아, 기적적으로 육신의 무게에서 풀려나 새로운 질료와 양감으로 자유로워진 신비스러운 사지의 언어 안에서 자포자기와 충동과 일그러져 있으면서도 은혜로운 자세가 빚어 낸 오묘한 조화여! 이 신성한 악단은 흡사 일진 광풍, 생명의 숨결, 환희에의 열광, 소리에서 형상으로 변용된 찬송의 기쁨에 들려 있는 것 같았다.
마디마디 성령이 깃들어 있고 구석구석 계시의 세례를 받은 몸, 경이로움에 길든 싱싱한 얼굴, 열의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 사랑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뺨, 환희에 젖은 동공... 환희로운 경이감에 사로잡힌 이가 있는가 하면, 경이로운 환희에 젖어 있는 이도 있었고, 기적에 의해 모습이 바뀐 이가 있는가 하면 천복의 은혜로 회춘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옷자락을 펄럭 거리면서, 사지를 흔들면서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은혜에 감사하여 미소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만은 똑같았다. 이 노인들 발치 아래, 그들의 머리 위, 옥좌 위, 그리고 4복음서 저자들의 형상 위에는 또 한 무리의 악단이 있었다. 장인은 이들의 형상을 빚되 상호 균형에 어찌나 충실했던지, 분명히 서로 달라 보이는데도 다른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요컨대, 형상의 다양성을 하나로 통일시키되 통일된 분위기 속에서 다양성을 부여하고 각양이 각색이되 전체적으로 보아 하나의 질서 안에 특이한 형태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인데, 갖가지 부드러운 색채로 표현된 부분을 조화시키고 서로가 내는 갖가지 다른 소리를 협화시키는 솜씨는 가히 신묘에 가까웠다. 한 무리의 치타 현처럼 가지런히 늘어선 악단, 예사롭지 않은 저력으로 다의적인 악곡을 하나의 음조로 표출해 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독려하는 듯한, 화기 애애하면서도 서로 공모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 다양성을 단순화시키고 단순성을 다양화시킨 대상물의 장식과 구성, 천상과 지상의 법칙(평화, 사랑, 미덕, 정치, 권력, 질서, 근본, 삶, 빛, 영광, 종류, 형태의 안정된 유대)이 망라된 다정스러운 기법, 물질을 다루되 형태를 고루 빛냄으로써 거기에다 부연한 보편적 대등성, 여기에는 모든 종류의 꽃과 잎과 덩굴과 덤불이 두루 엉켜 있고, 천상과 지상의 동산을 꾸미는 온갖 본초, 이를테면 오랑캐꽃, 백리향, 백합, 쥐똥나무, 수선화, 토란, 나도엉거시, 아욱, 몰약수, 그리고 메카 발삼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내 영혼은 능히 천상적이라고 이를 만큼 아름다운 악단의 음악과 초자연적인 장엄한 표적에 길을 잃고 환희의 송가에 묻혀 방황하고 있었으나 내 눈은 노인들의 발치에 피어난 창가의 장미꽃 리듬에 따라 박공의 삼각면을 떠받치고 있는 중앙 기둥에 인각된 무늬에서 떠나지 못했다.
무엇이었을까?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듯,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세 싸으이 사자가 전하려는 상징적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들 사자는 뒷발을 대지에 박고 앞발로는 동료의 곱슬곱슬한 갈기를 그러쥔 채 포효하는 형태로 기둥의 몸체에 붙어있었다.
이들 사자의 인각은, 악마적인 사자의 본성을 순치하여 보다 나은 존재로 변용시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한 내 정신을 달래 주려는 듯, 기둥 옆에는 두 사람의 형상이 서 있었다. 기둥 높이와 비슷할 정도로 키가 큰 두 사람의 형상말고도 두 개의 참나무 문 곁기둥인 홍예 받침대 양쪽에는 두 형상이 더 있었다. 이 네 형상은 모두 노인들이었다. 몸에 지닌 장신구로 미루어 나는 이 네 노인을 베드로와 바울로, 그리고 예레미야와 이사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춤이라도 추듯이 몸을 비틀며, 그들은 손가락을 날개처럼 활짝 벌린 채 길고 앙상한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날개 같기는, 예언의 바람에 흩날리는 그들의 수염과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긴 다리 때문에 발치까지 치렁거리는 그들의 옷자락은 생명을 얻어 출렁거리는 것 같았고 방향은 사자와 반대쪽을 향하고 있되 그 기세는 사자를 방불케 했다. 이윽고 이 성별된 사지와 몸서리치는 근골의 불가사의한 다성곡에 넋을 잃고 얼굴을 돌린 내 눈앞에서 감피 여기에다 형용할 수 없는 환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문 옆, 그리고 아치 밑, 때로는 흉벽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사이사이에, 그리고 기둥머리의 무늬에, 각 기둥에서 가지쳐 임립한 곡부에 갖가지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이런 형상이 그런 곳에 새겨진 연유를 이 형상이 지닌 비유적, 우화적 설득력, 혹은 도덕적인 교훈의 의미로 풀이해 보았다.
내가 본 것은, 발가벗기운 음녀였다. 살점하나 없는 이 음녀는 두꺼비에게 빨리고 뱀에게 물리고 있는가 하면 빳빳한 털로 뒤덮인 장구배 사튀로스와 뒤엉켜 있었다 사튀로스는 음녀와뒤엉켜 있으면서도 추악한 목소리로 음녀를 저주하고 있었다. 네 기둥을 호화롭게 꾸민 침대 위에 뻣뻣하게 죽어 있는 구두쇠도 보였다. 이 구두쇠는 악마 군단의 공격 앞에 무너지고 있었는에 그중의 악마 하나는 사자의 입에서 아이 모양의 영혼을 찢어 내고 있었다(다시 영생으로 태어날 수 없었다). 나는 악마의 공격을 받고 있는 자만심이 강한 사내도 보았다. 악마는 그의 어깨에 매달려 손톱으로 사내의 눈을 후벼 눈알을 파내고 있었다. 두 아귀가 일 대 일로 드잡이 하면서 서로를 찢어먹는 광경, 화염 지옥에 빠진, 염소 머리에 사자 털, 표범 턱을 한 짐승 무리도 보았다. 화염의 숲에서 모든 수형자의 그을린 숨을 거의 느낄 수 있었다. 그들 주위, 머리 위, 발치 아래엔 수많은 얼굴과 사지가 보였다. 서로 머리채를 잡고 있는 남녀, 희생자의 눈알을 뽑아 먹고 있는 두 마리의 이집트 코브라, 손가락을 갈퀴처럼 만들어 휘드라의 강장을 가르며 웃고 있는 사내, 한 자리에 모여 왕관을 지키다 이윽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악마, 우화집에 나오는 갖가지 동물들도 보였다. 파운 무리, 양성 동물들, 손가락이 여섯인 축생들, 세이레네스 무리, 켄타우로스 무리, 고르곤 세 자매, 하르퓌아이, 인쿠부스, 용어무리, 미노타우로스, 시라소니, 표범, 키마이라, 콧구멍으로 불을 뿜는 카이노팔레스, 악어, 꼬리가 여럿이고 몸에 털이 난 도마뱀 무리, 도롱뇽, 뿔 달린 살모사, 거북이, 구렁이, 등에 이빨이 나 있는 양두수, 하이에나, 수달, 까마귀, 톱니 뿔이 달린 물 파리, 개구리, 그뤼핀, 원숭이, 루크로타, 만티코라, 독수리, 파란드로스, 족제비, 용, 후투티, 올빼미, 바실리스크, 최면충, 긴귀곰, 지네, 전갈, 도마뱀, 고래, 두더지, 올빼미도마뱀, 쌍동 오징어, 디프사스, 녹색 도마뱀, 방어, 문어, 곰치, 바다거북. 이 모든 동물의 무리가 한 동아리가 되어 득실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오시어 산 자와 죽은 자를 나누실 때를 기다리며 박송의 삼각면에 앉으신 이 앞에서 우글거리는 이 지옥의 동물들, 하르마게돈의 패배자들은 모두가 절망의 황무지에 떨어질 영혼을 처단하기 위해 그렇게 우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친숙하게 버릇 들여진 곳이라고 생각했는지, 최후의 심판이 벌어질 저 무서운 계곡에 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광경에 정신을 거의 잃은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젊은 수련사로 공부하면서부터, 아니 성서를 처음 읽는 순간부터, 그리고 멜크 수도원에서 묵상과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익히 버릇들인 무서운 환상을 본 것 같았고 무슨 소리인가를 들은 것 같았다(아니면 실제로 들었던 것일까). 오감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절망 상태에서 나는 나팔소리만큼이나 우렁찬 소리를 들었다. 내용인즉, <지금 본 것을 기록하여라>라는 것이었다(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어서 나는 일곱 개의 황금 촛대와 그 촛대 사이에 자리하신, 사람의 아들과 비슷한 분을 보았다. 그의 가슴에는 황금 띠가 둘러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양털처럼 순백색이었으며, 눈은 불꽃과 같았고 발은 불타는 가마 속에서 하얗게 달아오른 놋쇠 같았으며 목소리는 어우러지는 물소리 같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일곱 개의 별을 잡고 있었는데 입안에서는 양날이 선 칼이 널름거리고 있었다. 나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앉으신 이의 모습은 내눈에 벽옥이나 마노로 보였다. 옥좌 뒤로는 무지개가 널려 있었고 천둥과 번개가 거기에서 새어나왔다. 앉으신 이께서 낫 한 자루를 잡고 이르셨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추수할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낫을 들어 추수하십시오.>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휘두르니 땅이 버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본 환상은 바로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수도원장의 과묵한 입을 통해 들었던 일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이켜보건대, 그날부터 내 이 교회 문간으로 달려와 내 체험이 이 문간의 예언과 그대로 일치한다고 무릎을 친 것이 무릇 몇 번이던가! 그때마다 나는 우리가 저 측량할 길 없는 천상적 학살을 목격하기 위해 그 수도원으로 올라왔음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한겨울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사람처럼 부르르 떨었다. 그때 내 귀에는 다른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내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목소리의 임자도 뜻밖이었다. 환상에서 들려 오는 소리가 아니라 땅 위에서 나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 소리가 내 환상을 깨뜨렸다. 그때까지 명상에 잠겨 있던 윌리엄 수도사(나는 그제서야 그분의 존재를 다시 의식했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도 뒤를 돌아다보았다.
우리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수도승은 분명하나 해진 범의 와 꾀죄죄한 행색으로 보아 아무래도 걸승 같았다. 게다가 그의 얼굴은 기둥머리의 인각에서 보았던 수도사들과 어딘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도반들과는 달리, 나에게는 악마를 대면한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혹 모월 모일에 악마가 내게 나타난다면, 나타나되 하느님 뜻에 따라 본디 모습을 숨기고 인간의 모습을 취한다면 이 순간 우리의 명상을 깨뜨린 틈입자와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머리에는 털 오라기 하나 없었다. 그러나 참회하느라고 삭발해서 그런 게 아니고 과거에 못된 병을 앓았기 때문인 듯했다. 눈썹은 어찌나 검고 숱이 많은지 머리털이 있었더라면 맞붙어 버렸을 터였다. 눈은 둥글고 눈동자는 작았지만 그 시선이 순진해 보이는지 심술궂어 보이는지는 얼른 가늠할 길 없었다. 모르기는 하지만 나는, 순진해 보이면서도 심술궂어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글세, 그런 것도 코라고 할 수 있을지... 코라고 생긴 것은 눈 사이에서 뼈가 잠깐 솟았다가는 금방 다시 가라앉으면서 구멍만 두 개 남겨 놓은 게 고작이었다. 꼴에, 휑하니 뚫린 콧구멍 안에는 코털이 더부룩했다. 코와 흉터 하나를 이웃해 있는 입술은 길쭉하고 흉했다.
왼쪽으로 조금 더 길게 찢어진, 있으나마나 한 윗입술과 두툼한 아랫입술 사이엔 개 이빨같이 날카롭고 시커먼 이빨이 들쭉날쭉하게 솟아나와 있었다.
그 수도사는 싱긋 웃으며(적어도 나는 그가 웃었다고 믿는다) 설교라도 한 자루 하려는 듯 손가락을 하나 세우고 말했다.
'회개하라! 그대의 영혼을 쏠기 위해 공룡이 이 땅에 내릴 터인즉 회개하라! 죽음은 우리 위에 있으니 어이할꼬. 오시어서 우리를 악으로부터 그리고 죄로부터 구하시도록 거룩한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하, 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신술을 좋아하는구나. 그러니까 기쁨도 고통이고 쾌락도 고통이지.
악마를 조심할 일이다! 악마는 숨어서 기다리다가 뒤꿈치를 무는 법이다! 살바토레는 미치광이가 아니다. 좋은 수도원이며 여기는 식당이니 우리 주님께 기도할 일이다. 그 밖의 일은, 말라빠진 무화과만도 못하니. 아멘, 내 말이 틀렸는가?'
이야기를 들어 보았으니까 아셨겠지만, 이 괴상한 사람의 면면과 말투에 대해서는 뒤에 소상하게 소개하게 된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쓰려 해도 쓸 수가 없었다. 그가 쓴 말은 당시 수도원의 식자들이 흔히 쓰던 라틴 어도 아니었고 라틴 어권의 사투리도 아니었다. 요컨대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저 괴상한 말의 족보를 제대로 알 수 없었으니 여기에다 들은 그대로 옮겨 놓을 수밖에 없다. 뒷날, 그의 파란 만장한 생애와 어느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산 여러 나라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살바토레가 모든 나라 말을 하는데도 그 말은 어느 나라의 말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그는 나름대로 말을 하나 만들어 자기 표현의 뼈대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거야말로 창세 적부터 바벨 탑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두루 쓴 아담 시대의 언어, 혹은 언어의 사분오열 뒤에 생긴 방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응징이 떨어진 바로 그날의 바벨 언어, 즉 혼란이 시작된 날의 언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살바토레의 수작을 언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언어에는 규칙이 있으며 모든 용어는 합의된 불변하는 법칙에 따라 사물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약속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한때 개라고 부르던 놈을 고양이 라고 부르는 일은 없고, 사람들이 더불어 그 뜻을 정의하지 않은 불분명한 소리를 내는 일도 없다. 그렇기는 하나 나는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 살바토레가 한 말을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랬던 것으로 안다. 그는 한 가지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면서도 여기에서 한 단어, 저기에서 한 문장씩 취하는, 이를테면 만국어를 하는 셈이었다. 뒤에 나는 그가 처음에는 라틴 어로, 뒷부분은 프로방스 어로 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자기 자신의 문장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다른 문장의 흩뿌려진 파편을 이용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현재 상태와 자신이 말하고 싶은 내용에 따라 언제 어디에서 들었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곤 했다. 예컨대 음식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함께 그 음식을 먹으면서 사람들이 하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자기도 몹시 흥겨웠다고 생각되던 자리에서 사람들이 떠들어대던 문장을 인용함으로써 자기 흥겨움을 나타내는 식이었다. 그의 말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에서 한부분씩 떼어다 맞춘 것 같다는 의미에서 그의 얼굴과 흡사했다. 어떻게 보면 다른 성물함에서 가져 온 보석으로 채워진 성보 상자 같기도 했다(위대한 것을 비속한 것에다 견주는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다면, 천상적인 것을 악마적인 것에 견주는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처음 만난 순간의 살바토레는, 외모로 보나 말하는 투로 보나 교회 정문의 인각에서 보았던 잡종적인 괴물 무리와 다르지 않았다. 훗날 나는 그 역시 착하고 다소 익살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까지는... 아니다, 이야기를 너무 앞질러 하지 말아야겠다.
각설하고, 살바토레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 조금 있다가 사부님께서 궁금했던지 이렇게 물었다.
'어째서 회개하라는 말을 '페니텐치아지테'라고 하시는고?'
살바토레가 머리를 가볍게 조아리며 대답했다.
'주님을 섬기는 위대하신 수도사 어른, 예수께서 곧 오실 터인데, 사람은 회개해야 마땅하지요. 아닙니까?'
윌리엄 수도사가 험악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면서 물었다.
'소형제 수도회에서 온 게로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성 프란체스토 수도회에 있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를 자칭하는 무리도 알고 있으렷다!'
살바토레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아니, 시커멓게 그을린 험악한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고 해야 옳겠다.
그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린 다음,
'물러갑니다.'
하고 중얼거리고는 성호를 긋고 달아났다. 그는 달아나면서도 힐끔힐끔 뒤를 돌아다보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사부님께 여쭈웠다.
잠시 미간을 만지고 있던 사부님이 대답했다.
'별 것 아니다, 내 나중에 일러줄 테니까 안으로 들어가자. 우베르티노를 만나고 싶구나.'
제6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창백한 햇빛이 서쪽에서 교회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단도, 손바닥만한 넓이로나마 햇살을 받고 있었다. 제단의 앞부분이 금빛으로 타고 있는 것 같았다. 회중석은 그늘에 잠겨 있었다.
제단 앞, 회중석 오른편에는 돌기둥이 있었는데 여기엔 성모가 양각되어 있었다. 현대식 기법으로 표현된 성모는 조그만 보디스가 달린 깨끗한 옷차림으로 아기를 안은 채 그윽하게 웃고 있었다. 성모의 발치에는 누군가가 부복한 자세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복색으로 보다 끌뤼니 교단 출신인 것 같았다.
우리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부복하고 있던 사람은 발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들었다. 대머리 노인이었다. 터럭 한 올 보이지 않는 반질반질한 얼굴, 크고 시원한 눈, 얇고 붉은 입술, 흰 살결... 살갗에 싸여 있는 그의 앙상한 머리통은 흡사 우유에 담갔다 꺼내 놓은 미라 같았다. 그의 손은 창백했고 손가락은 길었다. 가까이서 보니, 요절하여 말라 비틀어진 처녀 같았다. 처음에 그는 법열 삼매를 방해받아 짜증스러워하는 듯한 얼굴로 우리를 보았다. 그러나 그 얼굴은 곧 밝아졌다.
'오, 윌리엄! 사랑하는 나의 형제!'
그는 이렇게 외치면서 힘겹게 일어나 우리 앞으로 걸어와 사부님을 얼싸안고는 입을 맞추었다. '윌리엄'을 외치는 그의 두 눈은 눈물로 반짝거렸다.
'...윌리엄,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그래도 내 그대를 알아 볼 수는 있지. 흐른 세월이 짧지 않으니, 그간 있었던 일 또한 적지 않을 것이네. 그러나 모두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
그는 울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한참 뒤에야 그의 포옹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우리는 카잘레 사람 우베르티노 수도사 앞에 선 것이었다.
나는 카잘레 사람 우베르티노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은 바 있었다. 심지어는 이탈리아로 오기 전에도 들은 적이 있고, 황실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과 교우하면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혹자는, 근자에 세상을 떠난 이 시대 최고의 시인인 피렌체의 단테 알리 기에리가 수많은 시편을 남겼지만(토스카나 속어로 씌어진 것이어서 나는 읽을 수 없었다), 그 중의 상당 부분은 우베르티노가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 나무]에 쓴 시구에다 주석을 놓은 데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걸물을 소개하기에 이 정도 일화는 넉넉하지 못하다. 이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전후 사정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중부 이탈리아에 잠시 머물 동안 직접 이야기로 들었고, 함께 여행하면서 윌리엄 수도사가 수도원장이나 다른 수도사와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우베르티노 수도사의 위인됨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으나 그간 내가 듣고 알아낸 바를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다. 멜크에서 내가 섬기던 스승들은 종종 북 유럽 사람에게, 이탈리아 인들의 종교적, 정치적 부침을 명확하게 묘사하기가 몹시 어렵다고 말하고는 했다.
성직자의 귄력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드세던 곳, 또 그 행사가 두드러지던 곳이던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지난 2세기 동안 가난한 자들의 삶에 주의를 기울이는 운동이 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운동은 부패한 성직자들에게 성사 맡기는 것도 마다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독립된 지역 사회를 만들었으니 봉건 군주, 제국의 황제, 그리고 도시의 행정 장관들이 이들을 곱게 볼 리 만무했다.
이윽고 성 프란체스코가 나타나 교회의 계율과 모순되지 않는, 청빈에 대한 사랑을 가르쳤다. 그분의 이러한 노력이 있은 다음 교회는 부패한 성직자들을 질책하는 그분의 설교를 용인하고, 오손된 성직자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던 분열의 징후를 일소했다. 당연히 온순함과 신성한의 시대가 뒤따라야 했다. 그러나 교세를 넓히고 눈밝은 회중의 주의를 끌어감에 따라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그 세력을 지나칠 정도로 확대시켰고 그만큼 세속적인 일에 묶이게 되자, 많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교인들은 종풍을 초장기의 그 순수하던 상태로 되돌리고 싶어했다. 내가 수도원에 있을 당시 전세계에 산재하는 수도회 수도자 수가 3만을 넘을 정도로 웃자라 있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였으니 이것은 이미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이 그랬고,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많은 수도사들은 수도회가 만든 회칙에 반대하는 한편, 세상을 개혁하러 이 땅에 태동한 교회 제도를 대표하는 것은 오직 수도회 자체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것은 성 프란체스코 생전에 이미 기정 사실이 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의 언행과 구도적인 겨냥은 오래 전에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많은 수도사들은 주후 12세기 초, 시토 수도회의 수도사 요아킴이 쓴 책을 재발견하게 된다. 요아킴은 선지자로 칭송받던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는, 거짓 선지자 때문에 오랜 영락의 길을 걷던 그리스도의 정신이 새 세대에는 다시금 이땅의 빛으로 찬연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누가 읽어 봐도 그 뜻이 자명한 한 미래 종파의 출현을 예고했는데, 그라 말하고 있던 종파가 바로 프란체스코 수도회였다. 당시, 세기 중엽에 소르본느 학자들이 요아킴의 가르침을 비난하고 나서던 참이어서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들은 이 예언을 크게, 혹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반겼다. 소르본느 학자들이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비난하고 나선 까닭은 이 수도회(그리고 도미니크 수도회)가 빠리 대학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지나치게 컸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소르본느 학자들은 프란체스코 수도회(그리고 도니미쿠스 수도회) 학자들을 이단으로 몰고 싶어했다. 그러나, 교회 쪽으로 보아서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이 계획은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이 일에 이어 교회는, 누가 보나 이단이 아님에 분명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바뇨레지오의 보나벤투라의 저서를 배포하게 했다. 이즈음 빠리에서도 종교적 이념 논쟁의 혼란이 야기되고 있었다. 누군가가 생각이 있어서 이런 혼란을 야기시켰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종교 이념 논쟁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네 이념을 지키는 종교재판의 조사관이 되라고 부추김으로써 기독교인을 괴롭힌 이단자들이 있었다면 바로 이들이 그런, 악마에 견주어질 만한 자들이었다. 당시 나는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망하며, 종교재판의 조사관들이 이단자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이 문제는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조사관들은, 있지도 않은 이단자를 상상할 뿐만 아니라 이단 쪽으로 약간 기운 자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함으로써 실제로 저쪽으로 돌아서게(이단 심판관에 대한 증오 때문에)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거야말로 악마가 고안한 악순환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아킴 일파의 이단(실제로 그랬다면) 이야기가 옆길로 나가고 말았다. 각설하고, 토스카나의 보그로 산 도니노에는 제라르도라고 하는 한 프란체스코 수도사가 있었는데 이 제라르도는 요아킴의 예언을 상기시킴으로써 소형제 수도회 수도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이 수도사들 가운데서 옛 회칙을 지지하는 무리가 나타났다. 보나벤투라가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재조직하고 수도회 우두머리가 된 데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러다 12세기 말, 그러니까 1170년대부터 리용 회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불법을 주장하는 자들로부터 수도회를 지키고, 사용 중인 모든 재산의 소유권을 인정했다(당시 이것은 이미 기정 사실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르케의 몇몇 수도사들은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는 사유든 수도원 소유든 교단 소유든 일체의 재산 소유가 금지되어 있다는 이유를 들어 회칙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반기를 들었던 수도사들은 종신형을 받고 투옥당했다. 그들이 교리에 어긋나게 설교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속적인 재산 소유가 문제로 제기될 경우 인간이 여기에 줄거리를 타기는 참으로 어려운 법이다. 뒷날 듣기로는, 교단의 새 지도자 라이몬도 가우프레디가 앙코나 감옥에 수감된 이들을 발견하고 모두 방면하면서, '하느님께서 보신다면, 그런 죄악이 묻어 있지 않은 인간이나 교단은 없다'고 했다 한다. 이단자의 말을 변호하지 않으면서도 미덕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 그 때까지만 해도 교회 안에 있었다는 증거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방면된 수도사 중에 안젤로 클라레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프로방스에서 온 수도사 페이르 올리외와 만났고, 올리외 수도사는 요아킴의 예언을 전파하는 가운데 카잘레 사람 우베르티노와 만났다. 엄격주의파 운동은 이렇게 해서 태동한다. 이즈음 참으로 고굘한 은자인 모로네 사람 피에트로가 대관하는데 이분이 곧 켈레스티누스 5세이다. 엄격주의파에서는 이분의 등장을 크게 환영했다. 그들은 이르기를, '성자가 나타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천사의 길을 가실 것인즉, 두고 보자, 썩은 목자들아!'라고 했다.
천사의 길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었는지, 주위의 성직자들이 너무 썩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교황 켈레스티누스는 황제와 유럽의 제왕이 반목하면서 생겨난 그 엄청난 긴장을 견뎌내지 못했다. 교황 켈레스티누스는 관을 벗고 다시 은자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년이 채 못된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엄격주의파의 희망은 성취된 셈이었다. 그들은 켈레스티누스를 찾아갔고, 켈레스티누스는 이들과 더불어 [은수사 켈레스티누스의 가난한 형제들] 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한편 교황은 로마의 막강한 추기경들의 중재자 노릇을 맡고 있었는데 이 추기경들 가운데엔 콜로나 추기경, 오르시니 추기경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은밀하게 이 무소유 탁발 운동을 지원했다. 부와 사치를 두루 누릴 수 있는 실력자들로서는 미묘한 선책을 한 셈이었다. 이들이 단순히 정치적 목적 때문에 엄격주의파를 지원했는지, 아니면 엄격주의파를 지원함으로써 자기네들의 세속적인 영달을 함리화하려고 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일로 짐작컨대, 두 가지 견해가 다 합당할 듯하다. 추기경이 엄격주의파를 비호한 예를 한 가지 들자면, 우베르티노와 오르시니 추기경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르시니 추기경은 우베르티노가 엄격주의파 안에서 최강자로 나서자 그를 정식 대표자로 치인했다. 우베르티노는 뒷날 이단자로 몰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전도에 힘을 쏟았고, 막상 이단자로 몰렸을 때는 추기경이 몸소 나서서 아비뇽에서 그를 변호했다.
당연히 안젤로와 우베르티노는 교리에 따라 전도를 계속 했고, 엄청난 수에 이르는 평민들은 이들의 선교를 받아들이는 한편, 갖가지 제재와 박해가 있었는데로 불구하고 이 교리를 확장시켜 갔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는 소형제 수도회의 탁발승 천지가 되었지만, 이들을 위험한 수도승 무리로 본 사람들 또한 적지 않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교단 당국이 인가한 엄격주의파 사제들과, 무소유로 탁발을 일삼으로 교회의 행정 체계와는 무관하게 사는 일반 교인을 구별할 길이 없었다. 이런 일반 교인이 바로 <프라타첼리>, 즉 소형제 수도회 탁발승들인데, 삐에르 올리외의 영향을 받고 생겨난 프랑스의 <베가르>, 즉 반승 반속 수도사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켈레스티누스 5세에 이어 교황에 오른 분은 보니파티우스 8세인데, 이분은 즉위하자마자 엄격주의파 수도사들과 소형제 수도회 탁발승 무리를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12세기가 저물어 갈 즈음, 그는 교황 회칙 <피르마 카우텔라>를 발표, 일거에 반승 반속의 탁발승, 프란체스코 교단 말단에서 얼쩡거리는 떠돌이들, 그리고 교단 생활을 떠나 은자로 돌아간 엄격주의파 수도사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보니파티우스 8세 사후, 엄격주의파는 누차 복권을 시도했다. 그러나 번번히 좌절되다가 클레멘스 5세에 이르면서 이 교파를 방관하라는 회칙이 내려지는 것과 때를 같이 해서 이 교파의 복권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만일 요한 22세가 출현하지 않았더라면 이 교파는 크게 빛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한 33세의 출현은, 적어도 이들에게는 희망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전기였다. 1316년 교황으로 선임된 요한 22세는, 시칠리아 왕에게 서한을 보내어, 그곳에 몸붙이고 있던 수도사들을 깡그리 몰아낼 것을 요청했다. 그는, 여기에서 철퇴를 거두지 않고 안젤로 클라레노와 프로방스의 엄격주의파 수도사들을 감옥으로 옭아 넣기까지 했다.
만사가 누구에겐들 여의할까? 각 지역에서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 속출했다. 그 결과 우베르티노와 클라레노는 교단 이탈 허가를 얻고, 전자는 베네딕트 수도회고, 후자는 켈레스티누스 은자들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뜻을 어기고 자유로운 삶을 고집하는 자달에게는 가차가 없었으니, 조사든으로 하여금 이들을 박해하게 하는 한편 상당수를 화형주에 매달기까지 했다.
그러나 요한은, 교회의 귄위를 바닥째 위협하는 이 탁발승 무리의 뿌리를 자르려면 이러한 믿음이 뿌리를 대고 있는 이론적인 바탕을 허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론가들은, 그리스도나 사도들에게는 개인적으로든 공동으로든 소유한 재산이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교황은 이런 믿음 자체를 이단으로 몰았다. 그리스도가 가난했다는 믿음 자체는 이단으로 몰고 싶어도 몰 근거가 희박했으나 교황으로서는 입장이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보다 1년전, 페루지아에서 나온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헌장이 이러한 믿음을 지지하고 나선 터여서 교황으로서는 입장이 더욱 궁색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헌장은, 황제와 싸우고 있는 교황 자신의 입장을 크게 남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때문에 교황은, 황제가 무엇인지 페루지아 헌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탁발승들을 무수히 태워 죽였다.
이상이, 우베르티노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앞에 두고 내가 떠올린 생각이고 그에 관한 내력이다. 사부님이 나를 소개하지 이 노인은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정도가 아니가 타는 듯이 뜨거운 손이었다. 그의 손을 촉감하는 순간, 나는 그때까지 들어 왔던 그의 행적,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 나무]에서 읽었던 내용을 온전하게 납득했다. 나는, 빠리에서 공부했지만 신학적인 사색을 그만두고, 갱생한 막달레나로 거듭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을 정도로 그의 젊음을 불태웠던 신비의 불꽃을 이해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신비주의적 삶과 십자가에 대한 사랑으로 그를 이끈 폴리뇨의 성녀 안젤라와 그와의 질긴 관계, 그리고 설교하는 열도에 놀란 교단이 피신시킬 겸 그를 라 베르나 수도원으로 보낸 까닭고 이해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 모습은, 그와 형제가 되어 심오한 심령의 사상을 주고받은 성녀의 얼굴처럼 다정스러워 보였다. 1311년 비엔느 총회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고위 성직자들을 사주하여 엄격주의파를 박해하는 한편, 온건책으로 자유롭게 살게 하되, 회칙에서는 벗어나지 말기를 간청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극단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투사 우베르티노는 약삭빠른 절충안을 거부하고 극도로 엄격한 교리를 바탕으로 한 별개의 교파를 고집하면서 그들과 싸웠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과연 투사라는 별명이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니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위대한 투사도 싸움에서는 패배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삐에르 올리외의 추종자들(우베르티노도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에 대한 반격 세력을 옹호하는 한편, 나르본느와 베지에의 수도사들을 매도했다. 그러나 우베르티노는 교황에 대항하여 친구의 추억을 지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서슬에 기가 죽은 요한 22세는 다른 사람들을 매도하는 데는 망설이지 않으면서도 우베르티노의 이름만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다. 뿐인가. 교황은 그에게 자구책을 세워 주는 뜻에서 처음에는 좋은 말로 달래어 보다가 급기야는 끌뤼니 수도원으로 들어갈 것을 명했다. 우베르티노는 기진해 있었다. 그는 투사는 투사이되 강골 투사는 못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교황청에서 보호자나 협력자를 찾아내는 재주는 있었던 모양이다. 우베르티노는 협력자들을 통한 절충을 거쳐 플랑드르의 젬블르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간 곳은 젬블르 수도원이 아니었다. 그는 오르시니 추기경의 비호를 받으며 아비뇽에 남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래 아비뇽에 머물 수 없었다. 교황청에서 빛나던 그의 성호 성좌의 빛이 날로 바래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교황이 방랑자처럼 세상을 떠도는 이 백절불굴의 사나이를 이단자로 규정, 그 뒤를 쫓는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소문의 근거를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교황이 손을 쓰려고 했을 때 우베르티노는 이미 아비뇽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러던 우베르티노를 나는 그 수도원에서 만난 것이었다. 그러니까 전설적인 사나이 우베르티노는 바로 그 수도원에 몸붙여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내 앞에 선 그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사부님 앞에서 울먹였다.
'윌리엄, 그자들이 나를 찾아 죽이려고 했네, 그래서 밤을 도와 도망쳤던 것이네.'
사부님은 그의 손을 잠은 채 반쯤은 다정하게, 반쯤은 힐난하는 어조로 물었다.
'누가 죽이려고 했나요? 요한인가요?'
'아니... 나를 좋아한 적은 없어도 요한은 나를 경원했네. 미우나 고우나, 10년 전에 날 베네딕트 수도원에다 처넣어 내 정적들의 입을 막고, 불리한 재판을 면하게 해 준 사람도 바로 요한이네. 내 정적들은 저희들끼리 쑥덕공론을 하는데, 가만히 들어, 보니, 나같이 가난한 투사는 재산 많은 수도원으로 보내거나 오르시니 추기경의 관사에서 살게 해야 한다나. 윌리엄,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본래 세간사라면 아무 욕심이 없는 사람이네만, 아비뇽에 남아 내 형제들을 지키려니 다른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교황은 오르시니 추기경을 두려워하니까 거기에 몸붙이면 아무도 내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못할 것이거든. 그런데 3년 전에 오르시니 추기경은 아라곤 왕에게 보내는 사신으로 나를 보냈네.'
'대체 해치려고 하던 자들이 누굽니까?'
'모두 다. 특히 교황청 무리들이 그랬고. 암살 기도가 두 번이나 있었다네. 내 입을 막고 싶었던 게지. 5년 전 일을 그대도 알고 있을 것이네. 나르본느의 탁발승 무리는 그보다 2년 전에 이미 도마 위에 올랐고, 베렝가리오 탈로니는 재판관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도 교황에게 탄원했던 것이네. 아주 어려웠던 시절이었네. 요한은 이미 엄격주의파를 때려잡을 회칙을 둘씩이나 준비하고 있는 중이고, 체제나의 미켈레는 손을 들었고. 그렇거니 미켈레는 언제 오는가?'
'한 이틀 있으면 올 겁니다.'
'미켈레... 이 사람과 나와는 오래 격조했네. 이제 정신이 들었을 테니 우리가 바라던 게 뭔지, 페루시아 헌장이 왜 우리를 복권시켰는지도 알고 있겠지. 그러나 1318년에 이 친구는 교황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교황에게 저항하는 프로방스의 엄격주의파 수도사를 다섯이나 교황 손에 넘겼다네. 윌리엄... 모두 화형을 당했네. 목불인견... 끔찍한 일 아니던가...'
노인은 두 손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탈로니가 탄원한 뒤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한은 공청회를 다시 열어야 하게 되었네. 열지 않을 수가 없었네. 교황청 안이라고... 의심 많은 자가 없으라는 법이 없으니. 프란체스코 수도원데 속해도 교황청에 있는 자들은 성직록을 먹기 위해서는 저 자신까지 팔아먹을 바리사이 인이며 화칠한 무덤 이라네. 그러니 의심 많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요한이 나에게 빈자 구휼 청원서의 재고를 종용한 것도 이즈음이었네. 명문이었는데.. 내 부러진 자존심이여, 하느님 용서하소서.'
'읽어 봤어요. 미켈레가 보여 줍디다.'
'우리 쪽에도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었네. 가령 아끼뗀느의 대주교, 산 비탈레의 추기경 카파의 주교 같은 사람들이...'
'카파 주교? 그 멍청이가 말안가요?'
'명복이나 비세. 2년 전에 하느님께서 수습해 가셨다네.'
'하느님이시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다 자비를 베푸시는 게 아닙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넘어온 보고서는 가짜였어요. 그자는 아직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곧 사절단의 일원이 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요. 우리 팔자가 어째 이 모양입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페루지아 헌장에 동의한다는데...'
'암요, 적군의 투사가 되기를 놓아하는 족속에 속하니까요.'
'사실 말이지만, 그때도 그 사람이 우리 거사에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네. 결국 무산되고 말기는 했지만 그 이념 자체가 이단으로 판정되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중요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일세. 그래서 더 더욱 사람들은 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네. 그자들은 나를 해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황제가 요한을 이단으로 몰 당시에는 내가 작센하우젠에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더군. 그러나 내가 그 해 7월에 오르시니 추기경에게 몸붙인 채 아비뇽에 남아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네. 그자들은 황제의 포고문에 반영된 내 생각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지. 이게 다 무슨 미친 수작들인지...'
'다 미쳤던 것은 아니지요. 내가 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줬던 겁니다. 당신의 아비뇽 선언문과 올리외의 저서 몇 군데에서 뽑아 내어 보여 줬던 겁니다.'
'그대가 말인가?'
우베르티노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그대는 나와 뜻이 같지 않았던가?'
윌리엄 수도사는 약간 당혹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정면에서 살짝 비켜서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시로 봐서는 황제 쪽으로 유리한 사정이었으니까요.'
'그대가 그들을 믿은 것은 아닐 텐데?'
'그건 그렇고... 그래, 무슨 수로 그 주구들 손에서 목숩을 부지할 수 있었지요?'
'암, 그대 말이 옳으이, 주구들이었고말고. 주구라도 여느 주구들이 아니었네. 그대들 혹 아시는가? 좌충우돌하다가 보나그라치아와도 얼굴을 붉혔다는 걸?'
'보나그라치아는 우리 편이 아니던가요?'
'지금은 그렇지. 내 설교 들은 뒤로. 당시에는 대가리가 헛 여물어 가지고, 회칙의 창시자에게를 상대로 핏대까지 올렸다네. 교황은 이 친구를 감옥에 처넣어 일년은 좋이 썩혔고.'
'들리기로는, 지금 교황청에 있는 내 친구 오캄 사람 윌리엄과 아주 가깝게 지낸다고 합니다.'
'오캄의 윌리엄이라는 사람, 나는 조금밖에 몰라.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 뜨거운 데가 없어. 가슴은 없고 대가리만 있는 위인, 바로 그런 위인이 아닌가 하네.'
'하지만 그 대가리라고 하는 게 아주 쓸 만합니다.'
'암, 그것 때문에 지옥에 갈 거고.'
'지옥에 내려가면 만나겠군요. 만나면 한번 따져 보지요. 그것 때문에 지옥으로 내려운 게 사실이냐고...'
'윌리엄 이 사람! 그대는 우리들 주위의 철학자들보다 나아. 그대에게 그럴 생각이 있기만 하다면 말이지만...'
'무슨 말입니까?'
'움브리아에서 우리 처음 만나던 당시의 일이 생각나는가? 나는 당시... 그 누구야, 그 놀라운 여자의 대원으로 미양을 치료하고 있었지. 누구였더라... 그래, 몬테팔코의 키아라였네. 키아라. 마라라고 하는 여자의 속성도 성성으로 정화되기만 하면 능히 은혜를 나르는 수레 노릇을 할 수 있는 법일세. 윌리엄, 순수 무구한 동정이 내 삶을 얼마나 빛나게 했는지 그대 아는가? 어디 대답을 한번 해 보게. 암, 나는 알지. 내 육신의 동계를 잠재우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사랑 앞아서 자신을 비우려던 내 고행이 얼마나 뜨거운 용맹 정진이었던지, 그래 용맹 정진이라는 말 제대로 찾았네. 그대는 알아. 그러나 어쩔꼬. 살아오면서 내가 만난 세 여자는 하늘에서 온 심부름꾼이었네. 폴리뇨 사람 안젤라, 치타 디 카스텔로 사람 마르게리타(이 사람은 내가 겨우 3분의 1을 썼을 때 이미 내 책의 결론을 알았네), 그리고 몬테팔코의 키아라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심부름꾼들이었네. 키아라의 기적을 조사하고 성모님 교회 앞의 대중 앞에서 그 성성을 밝히는 내 소임은 하늘에서 받은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던가? 윌리엄, 그대도 거기에 있었지 아마? 그대가 내 성사를 도울 수도 있었네만...'
'그렇지만 당신이 도와 달라던 그 성사라는 게 벤티방가, 야코모,, 지오반누치오를 화형주에 매다는 일이 아니었던가요? 세상에, 도울 일이 따로 있지...'
'이자들이 키아라의 추억에다 때를 묻히지 않았던가? 그대는 이런 자를 늘히 화형주에 매달 수 있는 종교 재판의 조사관이었고...'
'마침 내가 그 자리에 신물이 나서 의원 해직을 요구하고 있을 때가 아니던가요? 그래요, 마음에 안 듭디다. 솔직하게 말해서, 당신이 벤티벵가를 꼬드겨 잘못을 자백하게 하는 그런 방법도 싫었고. 그걸 교단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을 합류하고 싶어하는 척하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비밀을 캐내어 가지고는 그자를 고발했던 거 아닙니까? 세상에...'
'그리스도의 원수를 잡아내는 데 다른 방법이 또 있던가? 그자들은 이단자들이었네. 가짜 사도들이었네. 돌치노 수도사의 유황 냄새를 피우지 않았던가?'
'그래도 키아라의 친구들이었어요.'
'큰일날 소리! 윌리엄, 결단코 키아라의 추억에 한 점 의혹의 그림자를 던져서는 아니 되네.'
'어쨌든 그들과 키아라의 사이가 좋았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아요?'
'그자들은 자칭 소형제 수도회에 속하는 엄격주의파 수도사들이었지만 사실은 세간의 수도자들이었네. 종교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던가? 구비오의 벤티벵가는 스스로 사도를 참칭했고 지오반누치오와 공모하여 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있지도 않고, 육욕이 반드시 하느님을 진노케 하는 것은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주여, 용서하소서)은 한 남자와 수녀의 동침으로도 받을 수 있고, 주님 보시기에 막달레나는 처녀 아그네스보다 나았으며, 악마는 지식이고 신 역시 정의하건대 지식이니, 사람들이 악마로 부르는 것이 신 자체라는, 당치 않는 망발로 수녀를 유혹하지 않았던가? 하느님께서 환상을 보이시어, 이자들이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의 사악한 추종자들임을 일러주셨으니, 이 영광을 입은 이가 바로 이 당치 않은 말을 들었던 우리 축북받은 키아라가 아니었던가?'
'소형제 수도회 수도사들의 마음 역시 키아라가 본 환상과 같은 열기로 타오르고 있었지요. 법열의 환상과 사악한 광란은 서로 그리 멀리 EJfdjwu 있지 않아요.'
우베르티노는 다시 윌리엄 수도사의 손을 잡았다. 그의 두 눈은 다시 눈물로 흐려지고 있었다.
'그런 말 마시게, 윌리엄 형제. 어째서 그대는 뇌수를 향과 함께 태우는 저 법열의 순간과 유황 냄새가 나는 오감의 광란 상태를 구별하지 못하는가? 벤티벵가는 사람을 꼬드겨 제 사지의 맨살을 만지게 했네. 이자는 이것을 오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다네. 벗은 사내가 벗은 여자 옆에 누워...'
'허나 나눌 것은 아누지 않고 ... 그러나 이와는 관련이 없어요.'
'망발일세! 그자들은 쾌락을 찾아 다녔고, 마침내 그걸 찾았네. 육체적인 충동이 느껴지더라도,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눕고, 하나가 다른 하나의 육신을 구석구석 만지고 입맞추고 이윽고 벗은 배와 벗은 배가 서로 맞기만 한다면 그것을 죄악으로 생각지 않았네!'
솔직하게 말해서, 우베르티노가 다른 이들의 악덕을 비난하는 것은 나의 도덕적 사고에 영감을 주지 않았다.
사부님은 내가 흥분하고 있는 걸 눈치챈 듯이 서둘러 노인의 말허리를 잘랐다.
'우베르티노, 당신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할 때도 뜨겁더니 죄악을 증오할 때도 그에 못지 않게 뜨겁군요. 내 말은, 양자가 공히 의지의 극단적인 발화 상태에서 유래하는 것이라서, 세라핌에 대한 사랑이나 루치페르에 대한 사랑이나 그게 그러라는 겁니다.'
'이 사람아, 차이가 있네. 나는 알아. 그대는, 의지 작용의 방향을 문제삼아 선에의 갈망과 악으로의 치우침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모양인데, 이건 옳아. 그러나 대상은 달라. 대상은 누가 보아도 다르네. 하느님은 이쪽, 악마는 저쪽일세.'
'우베르티노, 어떻게 구별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네요. 어느 날 이녁의 영혼이 어디론가 둥둥 떠가길래 정신을 차려 보았더니 그리스도의 무덤 안에 있더라고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 말하는 폴리뇨의 안젤라 아니었나요? 안젤라가 당신에게 뭐랍디까? 처음에 가슴에다 입맞추고 보았더니 예수님은 눈을 감고 계셨고, 입술에다 입맞추었더니 입술에서 향기가 났고, 조금 있다가 예수님 뺨에다 제 뺨을 갖다 대었더니 예수님은 제 뺨을 지그시 당겼고... 그래서 참 좋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과 오감의 충동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안젤라의 경우는 신비 체험이었네. 그 몸은 바로 우리 주님 몸이었고.'
'내가 옥스퍼드 물을 너무 먹은 건가? 옥스퍼드 사람들은 신비 체험 역시 일종의...'
'역시 대가리뿐이로군.'
우베르티노는 짓궂게 웃었다.
'눈은? 하느님은 빛으로도 나타나시지요. 햇빛으로, 거울에 나타난 형상으로, 가지런히 늘어선 질료 위에서 일어나는 색깔의 확산 현상으로, 젖은 잎새 위에 비친 대낮의 형상으로... 이 사랑이야말로 꽃, 풀, 물, 공기 같은 피조물로 하느님을 찬양한 프란체스코의 사랑에 가깝지 않습니까?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랑이 올가미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의시스럽기는, 전능하신 분과의 대화가 된다는 그 사랑 쪽이랍니다.'
'이런 독신자 같으니! 이 사람아, 그건 달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법열과 몬테팔코의 가짜 사도들이 체험하는, 썩어빠진 무아지경 사이에는 심연이 하나 가로놓여 있네.'
'그 사람들이, 어째서 가짜 사도들이오? 자유 정신을 소유한 형제들이라고 당신 입으로 누누이 말하지 않았소?'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대는 그 재판 과정을 샅샅이 들은 바 없고, 나는 키아라가 그곳에 채워 놓았던 신성한 분위기에 한순간이라도 악마의 그림자가 지나갈까 봐 그자들의 자백을 기록해 놓을 수가 없었는데. 윌리엄, 그러나 나는 알았네. 분명히 알았네. 그자들은 밤이면 지하실에 모여 갓난아이 하나를 공중으로 던지고 받고 했다네. 아이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리하였다네... 이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산 아이를 마지막으로 받은 자, 아이가 죽는 순간에 받은 자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네. 그자들은 아이의 시체를 찢어 밀가루에 버무렸네. 그걸로 독신군을 만든답시고 산 아이를 그렇게 했다고 하네.
'우베르티노!'
우베르티노의 이름을 부르는 윌리엄 수도사의 음성에는 노기가 차 있었다.
'이건 수세기 전부터 아르메니아 주교들이 파울리치아 교파를 경계하면서 써먹은 이야기가 아니던가요? 그리고 보고밀 파에 대해서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악마의 고집이 어디 여간 세던가? 악마에게는, 유혹할 때나 올무에다 걸 때나 단골로 쓰는 수작이 있다네. 천년 세월이 흘러도 악마의 의식은 변하지 않아. 우리가 악마를 쉬 알아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네. 내 서원을 세우고 하는 말이네. 놈들은 부활절 밤에 촛불을 밝히고 처녀들을 잡아다 지하실로 끌고 들어가네. 그리고는 촛불을 끄고, 무슨 질긴 인연의 줄에라도 묶인 듯이 처녀에게 달려드네... 그러다 처녀에게서 아기라도 태어나려면 지옥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모두 포도주 통 가에 둘러앉아 취하도록 마시고는 아기를 벤다네. 피는 술잔에 쏟고, 아기의 육신은 산 채 불길 속으로 던지는데... 놈들은 아기의 피와 재를 섞어... 둘러 마신다네.'
'미켈리 프셀로가 3백 년 전에, 악마의 축제를 소상하게 소개하느라고 써먹은 이야기가 아닌가요? 대체 그런 이야기는 어디에서 들었어요?'
'놈들이 그러더군. 벤티벵카 일파가... 고문에 못 이겼는지...'
'동물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기쁨보다 유효한 게 딱 하나 더 있지요. 바로 고통이랍니다. 고문을 당하면 몽환 약초를 먹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고문을 당하면, 어디서 들었던 것, 어디에서 읽었던 게 고스란히 머리에 떠오르지요. 흡사 천당이 아닌 지옥으로 실려 가고 있는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고문을 당하면, 조사관이 알고 싶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사관을 기쁘게 할 만한 것까지 모조리 말하게 됩니다. 고문당하는 자와 고문하는 자 사이에 어떤 유대(이거야말로 악마적인 유대가 아니겠어요)가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우베르티노, 나는 알아요. 하얗게 단 쇠붙이로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편에 서 본 적이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알아 둬야 합니다. 자백을 강요하는 그 쇠붙이는 바로 강요하는 자들의 불길에서 달구어졌다는 것을... 고문을 당하면서 벤티벵가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는지도 몰라요. 왜냐? 말하고 있는 것은 벤티벵가가 아니라 벤티벵가의 열망, 즉 벤티벵가의 영혼 안에 자리잡은 악마였을 테니까요.'
'열망이라?'
'그래요, 사랑에의 열망, 겸손이라는 미덕에의 열망이 있듯이 고통을 향한 열망도 있는 법입니다. 반골에게는, 허영과 저항을 향한 신앙과 겸손의 미덕도 있는 법이지요. 이것을 도외시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이제야 아셨겠지요? 조사관 시절에 나를 괴롭혀 온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어요. 그래서 조사관 노릇을 그만두고 만 것이랍니다. 내게는 사악한 자들의 약점을 조사해 낼 용기가 없었던 거예요. 알고 보니 사악한 자들의 약점은 도덕 높은 분들의 약점과 같더란 말입니다.'
우베르티노는 기가 막혀서 그랬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이 잘 안 가서 그랬는지 가만히 윌리엄 수도사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그러나 노인의 표정에 연민과 애정이 어리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윌리엄 수도사가 책잡힐 궤변을 농하고 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하고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표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우베르티노는 격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네. 그대 느낌이 그랬다면, 아니 그랬기 때문에 이야기는 이쯤 해두는 게 좋을 성싶네. 유혹이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지 분석의 대상은 아니라네. 그대는 나를 도와주지 않았네만 우리는 그 반골의 뿌리를 뽑을 수 있었네. 내가 이단의 의심을 받은 것은 그대도 알잖는가? 그들을 사려 깊게 대한 것이 오히려 나의 허물이 되지 않았던가? 윌리엄, 그대 역시 악마와 싸우기에 넉넉할 만큼 튼튼하지는 못하네. 그래, 나는 악마라고 했네. 악마에 대한 단죄, 이 오욕의 수렁, 이 음영이 뿌리째 일소되지 않는 한, 우리는 신성한 원천에 이르지 못할 걸세...'
우베르티노는 누가 엿들을 게 두려운 듯이 사부님 앞으로 바싹 다가와 말을 이었다.
'...여기에도... 기도자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성별하신 이곳에도 악마는 있을 것이네.'
'알고 있어요. 원장이 한 말이 있으니까. 원장은 나더러 그걸 그늘에서 날빛으로 좀 끌어내라고 합디다.'
'그럼 관찰하고 조사하게. 살쾡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게. 욕망과 허영으로 가득 찬 언필칭 이 은혜로운 수도원을...'
'욕망이라니요?'
'암, 욕망이지. 죽은 젊은이에게는 뭐라고 할까... 여성적인... 그래서 악마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네. 그 친구의 눈은 인쿠부스를 기다리는 처녀의 눈 같았다네. 지적 허영. 이 수도원 안에서는, 지혜의 환상을 겨냥한 언어에 대한 허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아는 게 있으면 좀 도와주시지요.'
'아무것도 몰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허나 내 가슴은 무엇인가를 감지하지. 가슴으로 말하고 얼굴에 묻되, 남의 혀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게... 아니, 왜 우리가 이런 우중충한 이야기로 그대가 데리고 온 이 젊은 친구를 겁주고 있는게지?'
그는 파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그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물러서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썩 잘한 일 같았다. 그의 의도는 순수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사부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그대 이야기나 좀 들려주게. 그동안 뭘 했는가? 가만 있자... 얼마나 되었다라?'
'18년이나 되었군요. 고국으로 돌아가 옥스퍼드에서 공부를 좀 했지요. 자연 공부를요.'
'좋지. 자연도 하느님의 딸이 아니던가.'
'하느님은 역시 참 좋으신 분이지요, 자연을 낳으셨으니...'
사부님은 이녁 농담에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공부하면서 눈밝은 사람들을 좀 만났지요. 마르실리오라는 사람도 사귀었는데, 제국과 신민, 그리고 이 땅 왕국의 새 헌법에 대한 그 사람 생각이 퍽 마음에 듭디다. 어쨌든 공부를 마치고 나서 황제를 자문하는 무리에 끼게 되었지요. 편지를 쓴 적이 있으니까 이건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보비오에서,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반갑더군요, 영 종적을 감춘 줄 알고 있던 참이어서 더욱 그렇습디다. 이제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날 좀 도와주세요. 미켈레도 미구에 올 겁니다. 베렝가리오 탈로니와의 싸움은 심상치 않을 조짐이 보여요. 아마 재미있을 겁니다.'
우베르티노는 장난기 있는 얼굴로 사부님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어느 세월이 되어야 영국인들이 말을 좀 진중하게 할꼬. 이 사람아, 문제가 이 지경인데 재미있을 사이가 어디 있는가? 교단의 운명이 화형주에 걸려 있지. 그대들 교단 아닌가? 내 그대에게 말하네만 이건 내 교단이기도 하고 그대 교단이기도 하네. 하지만 나는 미켈레를, 아비뇽으로는 못 가게 할 요량이네. 요한은 미켈레를 부리고 싶어 줄창 졸라대는 판국이네. 하지만 저 프랑스 늙은이를 믿으면 못써요. 아이고, 주님, 주님 교회는 대체 어느 놈의 손바닥 안에서 노는 것입니까?'
그는 제단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 사치와 허영에 골병이 들어 사창가로 변해 버린 이놈의 교회는 불맞은 배암처럼 자반뒤지기를 하고 있나이다. 십자가가 그랬듯이 나무로 된 베들레헴의 순수 무구한 구유는 주신제의 금준 옥반이 다 되고 말았습니다. 윌리엄, 그대 교회로 들어오다가 보았지? 형상의 허영에 빠지면 약도 없네. 가짜 그리스도의 날이 목전에 왔는데, 나는 그게 두렵네.'
그는 가짜 그리스도가 들어와 자기를 노려보고 있기나 한 것처럼 휘둥그래진 눈으로 회중석을 둘러보면서 하던 말을 계속했다.
'... 가짜 그리스도의 사자는 이미 여기에 와 있네. 그리스도가 세상으로 사도를 보냈듯이 가짜 그리스도의 사자도 그렇게 온 것일세. 이 사자들은 사기와 위선과 폭력으로 꼬드기며 하느님 도시를 짓밟고 있네. 하느님께서도 엘리야와 에녹을 보내셔야 할 것이네. 하느님께서는 가짜 그리스도와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이 종들을 이 땅의 낙원에다 두시지 않았던가? 하느님 종들은 통자루 옷을 입고 예언하러 올 것이네, 말씀과 본보기로 회개를 외칠 것이네.'
'우베르티노, 벌써 여기에 와 있지 않아요?'
윌리엄 수도사는 자신의 프란체스코 수도복을 가리키며 응수했다.
'허나, 하느님 종들이 아직 승리한 것은 아니야. 머잖아, 가짜 그리스도는 분기 탱천, 에녹과 엘리야를 죽이고, 그 목을 효수할 것이야. 선지자의 말로를 대중에게 보일 것이라는 말일세. 놈들이 나를 해치듯이 가짜 그리스도 역시 선지자들을 죽일 것이라는 말일세.'
무서웠다. 우베르티노가 법열에 들어 예언을 부르짖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까닭을 물어 볼 수 없었다. 그로부터 세월은 한참이나 흘렀지만 내 두려움은 여전하다. 우베르티노는 그로부터 2년 뒤 게르만의 어느 도시에서 정체 불명의 괴한 손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결국 우베르티노는 그날 밤 자기 장래를 예언하고 있었던 셈이다.
'요아킴의 말이 옳았다. 인류의 역사가 제6기에 접어 들었으니 바야흐로 두 가짜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이다. 하나는 수상한 가짜 그리스도, 또 하나는 명실상부한 가짜 그리스도가 바로 이 시대에, 바로 이 역사의 제6기에, 프란체스코 성인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다섯 상흔을 이녁의 육신으로 받은 이 시대에, 가짜 그리스도는 이미 와 있는 것이다. 보니파티우스는 수상한 가짜 그리스도였으니 켈레스티누스의 양위는 만시지탄이 아니던가? 보니파티우스에 따르면,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한 마리 거대한 괴물이 있는데, 이 괴물의 일곱 머리는 일곱 대죄를 나타내고, 열 개의 다리는 십계명의 모독을 나타낸다네. 이 괴물을 둘러써고 있는 새우 떼는 추기경들이요, 이 괴물의 몸이야말로 아폴리욘이다. 괴물의 숫자, 그리스 어로 이름을 읽으면 베네딕티...'
알아듣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나를 노려보던 그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 베네딕쿠스 11세는 명실공히 가짜 그리스도이며 이 땅에서 솟은 괴물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후임자를 드러내시려고 이 괴물의 악덕을 방관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수도사 어르신 ... 후임자는 요한입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죽을 각오를 하고 그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갔다.
우베르티노는, 악몽이라도 쫓는 듯이 손을 미간에다 대고 지그시 눌렀다. 호흡도 거칠었다. 지친 모양이었다.
'암, 계산이 빗나갔던 게야. 우리는 아직도 참 교황을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그동안 프란체스코 성인과 도미니크 성인이 나셨다.'
그는 교회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기도하듯이 읊조렸다(자기 저서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 나무]를 인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첫번째로 오는 자는 치품 천사의 이글거리는 숯불에 정화되니, 하늘의 불길이 옮겨 붙어 온 세상을 태울 듯하다. 두 번째로 오는 자는 예언의 말씀으로 충만하니, 어듬의 세상을 밝게 비추는도다>... 암, 이것은 약속이야. 참 교황은 반드시 내리시네.'
윌리엄 수도사가, 우베르티노가 지어낸 분위기를 깨뜨렸다.
'우베르티노,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어요? 그러나 나는 땅의 황제를 지키려고 여기에 와 있어요. 돌치노 수도사도 당신처럼 예의 그 참 교황이 내릴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 배암의 이름은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마시게!'
우베르티노가 소리쳤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슬픔이 분노로 변하는 걸 보았다.
'... 그자는 칼라브리아 요아킴의 말씀을 더럽히고, 이 말씀을 죽음과 타락의 그릇이게 했네. 가짝 그리스도의 전령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자일 것이야. 한데, 윌리엄, 그대 말투가 왜 그 모양인가? 그대는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을 믿지 않는 모양인가? 옥스퍼드의 훈장들은, 심정의 예언 능력을 고갈시켜 가면서까지 이성을 우상화하라고 가르치던가?'
'잘못 짚었어요. 당신은 아시잖습니까? 저 로저 베이컨을...'
'<날틀> 어쩌고 했다는 양반 말인가?'
'하나만 아시는군, 로저 베이컨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가짜 그리스도를 입에 올리시고, 부패의 만연과 배움의 사양을 걱정하시는 분이오. 그분은 또 가짜 그리스도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셨어요. 자연의 비밀을 배우고, 지식으로 인류를 깨우쳐 나가는 것이오. 그분은, 약효가 있는 초목과 돌의 성질을 연구하고, 당신은 웃겠지만, 이런 날틀을 연구해야 가짜 그리스도와 싸울 수 있다고 했어요.'
'그대 베이컨의 가짜 그리스도는, 지적 허영을 채우자는 구실인 모양이군.'
'거룩한 구실이지요.'
'이 사람아, 거룩하다는 말을 어디에다 붙이나? 윌리엄, 알지? 내가 그대를 좋아한다는 걸? 나는 그대를 믿고 있네. 지적 허영을 잠재우고 주님께서 입으신 상처를 보고 우는 법을 배우게. 책에다 불을 TK지르라는 말이네.'
'어디 그렇게 해 볼까요?'
윌리엄 수도사는 웃었다.
우베르티노는 따라 웃다가 윌리엄 수도사가 웃는 의미를 깨달았는지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아둔한 영구치같으니. 동도의 도반을 비웃지 말게! 사랑할 줄 모르면 두려워할 줄이나 알아야지. 그리고 이 수도원에 있을 동안은 조심하게. 이놈의 수도원,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그것을 더 잘 알고 싶습니다. 가자, 아드소.'
윌리엄 수도사는 발길을 돌리려 했다.
우베르티노는 윌리엄 수도사의 손을 잡으면서 코웃음쳤다.
'좋지 않다고 했더니, 뭐? 더 잘 알고 싶다고?'
윌리엄 수도사는 회중석 사이로 나오다 말고 뒤를 돌아다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말이오, 바벨 말을 하는 저 짐승같이 생긴 친구는 누군가요?'
어느새 무릎을 꿇고 있던 우베르티노가 뒤를 돌아다보면서 대답했다.
'살바토레 말인가? 이 수도원에서 마음에 드는 놈은 그놈과 식료계 수도사뿐이네.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복을 벗어 던지고 나는 카잘레에 있는 우리 수도원으로 돌아갔는데, 가서 봤더니 수도사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더군. 그 지역 주민이 그 수도사를 우리 엄격주의파 소속인 줄 알고는 집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네.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그자들의 프란체스코 수도복을 벗겨 버렸지... 그런데 지난 해 여기 와서 보니, 살바토레와 레미지오가 와 있더군. 살바토레... 아닌게 아니라 짐승 같기는 하지. 하지만 쓸 만한 친구라네.'
윌리엄 수도사는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물었다.
'페니텐치아지테(회개하라), 어쩌고 하던데요?'
우베르티노는, 귀찮은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손을 내젓다가 내뱉듯이 말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워낙 위인이 촌놈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떠돌이 수도사로 설교를 기웃거리다 귀동냥하고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지껄이는 것일 테지. 내 살바토레 이 녀석을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구나. 아주 욕심이 많은 놈이기는 하지만 그것뿐, 정도를 모르는 놈은 아닐세. 다시 말하네만 이 수도원, 구역질깨나 나는 곳이네. 아는 놈을 잡고 물어 봐야지 모르는 놈 잡고 물어 봐야 헛수고일 뿐이야. 남의 말 한마디 믿고 만리장성 쌓지는 말게나.'
'그럴 리가 있겠어요? 남의 말만 들으면서 사는 게 싫어서 조사관 노릇을 작파한 나 아니오. 하지만 들을 말은 들어야겠지요. 들어보고 생각해 봐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할 게 아니겠어요?'
'윌리엄, 이 사람아, 그대는 잡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네...'
우베르티노는 말을 잠시 끊고,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젊은 친구, 은사의 본을 보는 것이 좋지만 너무 많이는 보지 않도록. 한 가지 더 유념하게. 무엇이야... 나도 이제 깨쳤는데, 그것은 죽음이라는 것이야. <죽음은 나그네의 휴식... 모든 수고의 끝>... 잘 다녀오게, 나는 기도나 해야겠네.'
9시과까지
우리는 회중석 중앙을 지나, 들어갔던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우베르티노의 말은 밖으로 나와서까지 내 귀에서 윙윙거렸다.
'좀 괴짜이신 것 같습니다만...'
나는 용기를 내어 이렇게 여쭈어 보았다.
'여러 모로 보나 대단한 분이시다. 지금 대단한 분이 아니시라면 전에 대단한 분이셨거나... 이런 이유에서라며 ,<괴짜>라는 네 말은 합당하다고 할 수 있지. 반반하고 동그란 위인들은 대개 소인배들인 경우가 많다. 우베르티노는, 자기 손으로 화형대로 보낸 이단자들과 똑같은 자가 될 수도 있었고, 신성 로마 교회의 추기경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다. 이단자의 악덕과 추기경의 악덕 또한 고루 갖춘 사람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나는 우베르티노와 노닥거리면서 지옥이 다른 각도에서 본 천국이라는 인상을 받았구나.'
나는 사부님의 말뜻을 헤아릴 수 없어서 설명을 구했다.
'어떤 각도에서 말씀이신지요?'
'물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 말이 모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설명해 보자. 사물의 여러 측면이 있는지, 아니면 전체만 있는지를 아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내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그리고 교회 문간 구경도 너무 하면 해로울 것이야.'
윌리엄 수도사는, 교회로 들어가면서 ??을 놓고 보던 조상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는 내 목덜미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 ...저것들이 오늘 너에게 겁을 준 모양인데, 그만 보아라, 그것으로 족하다.'
출구 쪽으로 돌아서다가 나는 내 앞에 선 수도사를 발견했다. 사부님 연배였다. 그는 웃으면서 공손하기 인사를 차리고는, 욕장과 시약소와 채마밭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는 본초학자, 장크트 벤델 사람 세베리노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그는 또, 수도원 경내를 돌아보는 사부님을 안내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부님은 고맙다고 말하고 나서, 들어오면서 잘 가꾸어진 채마밭을 보았는데, 눈에 덮여 있어서 잘 알 수 없기는 하나 채소뿐만 아니라 약초도 있는 것 같더라고 했다.
본초학자 세베리노가 약산 신이 난 듯한 어조로 말대답을 했다.
'가지 수야 많습니다만 봄이나 여름이면 채마밭 하나 가득 꽃으로 치장하는데, 창조주를 찬미하는 노래로 말하자면 꽃의 찬양도 우리 찬양에 못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초학자의 눈은 겨울의 마른 가지에서도 봄이면 다시 피어날 잎을 봅니다. 시생은, 이 채마밭이 어느 수도원의 채전보다 더 기름지고 다채로우며, 어떤 필사본의 채식보다 더 아름답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뿐입니까? 좋은 약초는 겨울에도 자랍니다. 이런 약초는 미리 분에다 거두어 제 실험실로 옮겨 놓았답니다. 그래서 저는 괭이밥 뿌리로는 유행 감기를 치료하고 무궁화 뿌리를 달여 만든 고약으로는 피부병을 고칩니다. 피부 습진에는 규석이 좋고, 쥐방울풀 뿌리를 짓이겨 뽑아낸 즙은 설사와 부인병에 효험이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고추는 특효 소화제요, 머위는 기침을 가라앉힙니다. 여기에는 또 소화제로 좋은 용담도 있고, 감초도 있는가 하면, 즙을 짜 낼 수 있는 노간주나무도 있습니다. 달여 먹으면 간에 좋은 잎딱총나무 껍질, 찬물에 우려 놓았다 물을 마시면 감기에 좋은 비누풀, 말씀 안 드려도 익히 아실 쥐오줌풀도 있습니다.'
'정말 약초가 다양하군요. 자라는 기후대 역시 다양할 터인데 대체 이걸 어떻게 관리하시지요?'
'첫째로는, 우리 주님의 은혜를 입었음입니다. 주님께서 저희 수도원을, 남쪽으로는 바다를 면하기 하시어 따뜻한 바람을 받게 하시고 북쪽으로는 놓은 산을 지게 하시어 삼림의 향기를 듬뿍 쏘이게 하셨지요. 둘째로는 저의 기술입니다. 별것은 아닙니다만 은사로부터 대를 물려받은 것입니다. 종류에 따라 다르기는 합니다만, 나무란 대체로 주위 환경과 영양과 재배에 주의를 기울여 주면 기후 조건이 달라도 곧잘 자라는 법입니다.'
'수도사님, 식용 식물도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내가 물어 보았다.
'아, 이 젊은 행자께서는 배로도 곯으셨는가? 적당히만 먹는다면, 먹어도 좋은 식물에 약 아니 되는 식물이 없다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같지 못하니,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일세. 호박을 좀 보실까? 호박이란 본시 냉하고 습한 것이네만, 썩은 놈을 먹으면 설사가 나기 때문에 소금물과 겨자로 내장을 보해 주어야 해. 양파? 온하고 건한 식품으로 소량을 먹으면 방사의 질을 높여 주나(물론 세간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일세만) 과복하면 머리가 무거워져. 이때엔 우유와 식초를 복용하면 다시 개운해지지...'
그는 이 대목에서 목소리를 뚝 떨어뜨리고는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젊은 수도사들이 양파 같은 신채를 삼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네. 대신 마늘을 먹게. 온하고 건해서 해독에 그만이야. 허나 이것도 과하면 못써. 체액이 너무 빠져나가 머리가 휑하니 비어 버리거든. 콩은 반대로 배뇨를 촉진하고 몸을 기름지게 하니까 좋다고 할 수 있으나 너무 먹으면 꿈자리가 나빠. 하지만 다른 약초에 견주면 별 것은 아니라네. 약초 중에는 실제로 몽환에 빠져 들게 하는 것도 있으니까.'
'어떤 약초가 그렇습니까?'
내친 김에 던져 본 질문이었다.
'아하, 우리 젊은 행자께서는 아시고 싶으신 것이 너무 많아. 이건 본초학자 이외의 사람들은 함부로 알 게 못 돼. 멋보르는 사람이 과용했다가는 큰일이거든. 중독의 위험이 있어요.'
윌리엄 수도사가 그 말을 받았다.
'그럴 땐 쐐기풀이 좋지요. 로이브라 혹은 올리에리부스 역시 효험이 있고, 이런 약초도 여기에 있겠지요?'
세베리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본초학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아주 조금...'
윌리엄 수도사가 겸손하게 말을 이었다.
'...우연히 발다흐 사람 우붑하심이 쓴 [건강론]을 접한 정도이지요.'
'이불 아산 알 묵타르 이븐 보틀란의 책도 읽으셨습니까?'
'저자를 그렇게 부르는 것보다는 <엘루카심 엘리미타르> 라고 하는 편이 낫겠지요. 혹 이 수도원에 그 양반 책의 필사본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주 예쁜 놈으로 있습니다. 삽화가 많습지요.'
'아이고 고마우셔라. 플라테아리우스의 [약초의 효능에 대하여]는요?'
'그것도 있습니다. 사레셸 사람 알프레도가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식물에 대하여]도 있습니다.'
'그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집필한 책이 아니라는 설이 있습니다. 밝혀진 대로, 그 양반이 [원인에 대하여]의 저자가 아니었듯이 말입니다.'
'어쨌든 대단한 책이지요.'
세베리노의 말에 사부님은 어느 책을 말하는지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두 책 중 어느 것도 읽은 바 없지만 오가는 이야기로 대단하기는 대단한 책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어르신과 약초 이야기를 좀더 했으면 그런 다행이 없겠습니다만...'
세베리노의 말이었다.
'나도 그러고 싶소만, 이 수도원이 속한 교단의 묵언계를 벙하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스럽군요.'
사부님 말씀에 세베리노가 설명했다.
'우리 교단의 회칙은, 각기 서로 다른 종중 단체의 요구에 따라 수세기에 걸쳐 변모해 왔습니다. 회칙은 끊임없이 <성서 봉독>에 매진할 것을 규정하고 있으나 공부하는 방법까지 간섭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 교단이 하느님의 문제와 인간의 문제에 깊이 파고들고 있다는 것은 어르신도 잘 아시겠지요. 아울러 회칙은 수도사들의 공동 생활을 규정하고 있되, 수도사들이 밤이면 자기 독방에서 혼자 묵상하는 것도 묵인합니다. 회칙이 묵언계를 엄격하게 지키기를 요구하고 있기는 합니다. 잡역에 종사하는 수도사는 물론, 읽고 쓰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수도사도 옆에 있는 수도사와 이야기를 나누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수도원은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자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수도사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어 제 학문의 보고에 보물을 늘려 나가는 것이 오히려 본분에 어울리는 것이 아닐는지요. 식당에서나, 성사 시간 중이 아니면, 공부에 필요한 대화는 큰 허물로 치지 않는 것이지요.'
'오트란토 사람 아델모와도 자주 이야기를 나누셨던가요?'
세베리노는, 이 질문에 별로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원장께서 이미 어르신께 말씀 올리셨군요. 아닙니다.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습니다. 그 친구는 자고 새면 사본의 채식만 하고 있었으니까. 살베메크 사람 베난티오, 부르고스 사람 호르헤 같은 수도사들과 자기가 맡은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더러 본 적이 있습니다. 더구나 저는 문서 사자실에는 잘 가지 않고 대개의 시간을 이 시약소에 머뭅니다.'
그는 이 말 끝에 턱으로 시약소 건물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델모에게 환상 체험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잘 모르시겠군요.'
사부님은 유도 신문을 시작하고 있는 것같았다.
'환상 체험이라고 하시면...'
'예컨대, 약초를 먹으면 헛것이 보이는 것 같은, 그런 환상 말이지요.'
세베리노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위험한 약초 간수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세베리노가 보이는 뜻밖의 반응에 약간 당혹해 하면서 재빨리 대답했다.
'내 말은 그게 아닙니다. 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환상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세베리노는 좀처럼 윌리엄 수도사의 덫에 걸려들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수도원장의 허가를 얻었다고 하더라고 수도사가 밤에 본관 주의를 배회하면 괴이한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러니까 늦은 시각에 본관으로 들어가면 말입니다... 그래서 끔찍한 환상에 쫓기다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본 것이지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서책이 필요할 경우가 아니면 문서 사자실에는 가지 않습니다. 서책이 필요한 겨우도 흔치 않습니다. 식물 표본이 제 시약소에 있으니까요. 조금 전에 드린 말씀입니다만, 아델모는 호르헤, 베난티오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베렝게리오와는 물론이고요.'
세베리노의 목소리에 묻은, 다소 대답을 망설이는 듯한 낌새는 나도 눈치챌 수 있었다. 사부님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베렝가리오와는... <물론>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왜 그렇습니까?'
'아룬델 사람 베렝가리오는 보조 사서이니까요. 아델모와는 동년배인 데다 수련사 시절을 같은 문중에서 보냈으니까 배짱이 잘 맞는 게 당연하지요. 이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아, 그랬군요.'
사부님이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놀랍게도 그는 이야기를 더 이상 몰고 나가지 않았다. 뜻밖에도 그는 말머리까지 돌렸다.
'아, 본관에 가 보아야할 것 같군요. 안내 좀 부탁 드릴까요?'
'기꺼이 그러지요.'
세베리노가 대답했다. 궁지를 벗어난 사람 특유의 한숨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는 채마밭을 지나 본관 정문 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가 설명했다.
'채마밭에 면한 문이 바로 주방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그러나 주방으로 쓰는 쪽은 1층의 서쪽 반뿐이고 나머지는 식당입니다. 교회 성가대석 뒤쪽으로 통하는 남쪽 입구에는 문이 둘 있는데 하나는 주방, 하나는 식당으로 통합니다. 하지만 이 문으로 들어가시지요. 주방을 통해 식당으로 나가는 수도 있으니까요.'
엄청나게 넓은 주방으로 들어선 우리 눈앞으로는 분관의 8각형 안마당이 보였다. 뒤에 알았지만 출입이 금지된 마당이었다. 각 층에는 이 마당 쪽으로 창이 나 있었다. 주방은 본관 1층의 초입에 자리잡고 있었다. 수많은 수도원의 불목하니들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마아마하게 큰 탁자에서 두 요리사는 보리, 오트, 호밀에다 순무, 샐러드용 개구리 다리, 무, 당근을 갈아 넣어 파이를 만들고 있었다. 가까운 탁자 앞에서는 다른 요리사 하나가 생선 위에다 포도주와 물을 뿌리고 샐비어, 파슬리, 백리향, 마늘, 고추, 그리고 소금을 버무려 만든 양념을 끼얹고 있었다.
주방 서쪽에서 큼지막한 가마가 빵을 굽고 있었다. 가마 안에서 불꽃이 혀를 날름거렸다. 남쪽으로는 큰 화덕이 있었는데, 요리사들이 이 화덕 앞에서 꼬챙이에 꿴 고깃덩어리를 돌리고 있었다.
교회 뒤 창고 쪽으로 열린 물을 통해 돼지치기들이 그날 잡은 돼지고기를 안으로 날라 왔다. 우리는 바로 그 문으로 나갔다. 뜰이었다. 공터의 서쪽 끝에는 여러 채의 건물이 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세베리노는 첫 번째가 창고, 이어서 차례로 말 외양간, 소 외양간, 계사, 그리고 양 우리라고 설명했다. 돼지우리 밖에서는 돼지치기들이 커다란 항아리에다 부어 놓은 돼지 피를 젓고 있었다. 그냥 두면 굳어지기 때문에 그런다고 세베리노가 설명해 주었다. 제대로 저어 주기만 하면 날씨 덕분에 며칠을 굳지 않고 그대로 있어서 피떡 만들 때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본관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가면서 식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식당은 본관을 끼고 서 있는 두 개의 탑 사이에 있었는데, 북쪽 탑 밑에는 난로, 남쪽 탑 밑에는 둥근 계단이 있었다. 위층 문서 사자실로 통하는 계단이었다. 수도사들은 이계단 끝에 있는 문을 통해 문서 사자실로 올라간다고 했다. 이 밖에도 나선형 계단이 두 개 더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주일인데 문서 사자실에서 공부하는 수도사가 있을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세베리노는, 공부가 곧 베네딕트 회 수도사들의 직분 아니겠느냐고 대답하면서 주일 성사는 여느 때보다 좀 길지만 책과 씨름해야 하는 수도사들은 그 시각에도 문서 사자실에서 성서를 읽거나, 토론하거나, 명상한다고 설명했다.
9시과 이후
문서 사자실로 오르며 윌리엄 수도사는, 계단으로 빛줄기를 들여보내고 있는 창을 올려다보았다. 창문의 위치로 보아 사람이 올라가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윌리엄 수도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식당의 유리창도 사람의 손에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벼랑에 면한 유리창은 1층의 유리창뿐이었다). 더구나 유리창 아래에는, 놓인 가구가 없었다.
계단을 다 오른 우리는 동쪽 탑루를 지나 문서 사자실로 들어갔다. 나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층은 1층처럼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우선 그 넓이가 엄청났다. 그리 높지 않은 천장(교회 천장만큼은 높지 않았지만 내가 본 어떤 방의 천장보다는 높은)은 굵은 기둥이 떠받치고 있었다. 엄청나게 넓은 공간인데도 내부는 눈부실 정도로 밝았다. 각 탑루에 면한 5면벽에 난 작은 창을 통해 8각형의 중앙 공터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창이 그렇게 많았으니 한겨울 오후에도 빛이 고루 들어오는 것은 당연했다. 창유리는, 교회의 경우와는 달리 채색 유리가 아닌, 납틀에 박힌 정방형 유리였다. 그래서 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인공으로 변조된 빛이 아닌, 순수한 자연광 그대로였다. 따라서 자연광이 수도원 학승들의 독서와 필사를 밝혀 주고 있는 셈이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구경한 문서 사자실은 적지 않으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방을 밝히는 자연광이 그처럼 현란한 문서 사자실은 본 적이 없다. 빛이 연출하는 영적인 원리의 광휘와 아름다움과 학문의 본디 모습은 그 방이 체현하는 조화로운 분위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방에서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세 가지 현상이 돋보이고 있었다. 첫째는 불완전한 것을 추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완전성 혹은 무류성, 두 번째는 고유의 조화 혹은 일치, 마지막으로는 특정 색깔을 아름답다고 여기게 하는 청징스러움과 빛 자체의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운 것에는 평화가 깃들어 있는 법... 그리고 우리의 욕심은, 평화로운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 앞에서 차분히 가라앉는 법... 그래서 나는 그 분위기 앞에서 위안을 느끼는 동시에 그런 곳에서 공부하던 사람들이 참으로 부러워 보였던 기억이 새롭다. 내 눈이 그 방의 밝기에 익어 감에 따라 오후의 햇살에 화사해진 그 방은 더할 나위 없는 학문의 전당으로 보였던 것이다. 후일 장크트 갈렌 수도원에서, 장서관과는 분리되어 있는, 비슷한 크기의 문서 사자실을 본 적이 있으나 꾸며진 상태와 간추려진 상태로 보아 그 수도원 문서 사자실과 같지 못했다(장크트 갈렌 수도원의 경우 수도사들이 장서가 있는 곳에서 공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달랐다). 고문헌 연구가, 사서, 주서사들은 모두 각자의 서안 앞에 앉아 있었는데, 이 서안은 하나씩의 유리창 앞에 면벽하고 있었다. 유리창이 40여개여서(4주덕에 10계명을 곱한 듯, 4의 10배수로부터 나온 완벽한 숫자) 40명의 수도사가 동시에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내가 보았을 당시에는 30여 개의 서안 앞에만 수도사들이 앉아 있었다. 세베리노는, 문서 사자실에서 공부하는 수도사들은 3시과, 6시과, 9시과의 성무를 면제받고 있어서 낮에는 그곳을 떠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수도사들의 공부가 끝나는 시각은 만과가 시작되는 일몰 즈음이 되는 셈이었다.
가장 밝은 곳은 고문서 연구가, 채식 전문가, 주서사, 필사사의 자리로 되어 있었다. 각 서안에는 채식과 필사에 필요한 도구가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뿔로 만든 잉크병, 수도사들이 예리한 칼날로 끊임없이 다듬어다준 우필, 양피지를 펴는 데 필요한 부석, 줄을 긋는 데 필요한 자에 이르기까지, 준비에 빈틈이 없어 보였다. 각 필사사들 옆, 경사진 서안 위에는 독경대도 있었다. 필사사들은 필사할 고문서를 이 독경대에다 올려 놓은 다음, 적당한 크기로 잘라 낸 유리를 그 위에다 대고 한면씩 필사해 나갔다. 수도사들 중에는, 문서를 읽으면서 미리 준비한 공책이나 평판에 주석을 놓아 가는 수도사도 있었다.
마침 사서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어서 더 이상 접근하여 이들의 작업 광경을 볼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 사서가 힐데스하임 사람 말라키아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사서는, 표정을 부드럽게 하여 우리를 환영하는 척했지만 그의 독특한 모습에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지 못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베네딕트 교단의 법의를 펄럭거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그는 키가 몹시 큰 데다 깡말라서 사지가 그렇게 길어 보일 수 없었다. 분위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사람의 기를 죽이는 구석이 있었다. 밖에서 들어온 참이라 그는 두건을 그대로 쓰고 있었는데 그 두건이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그의 얼굴에 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큰 눈에서는 고통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물론 만만하지 않은 관상이었다. 표정으로 보아 그는 의지로써 격정을 잡도리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표정이 일어붙은 듯힌 것으로 보아 별로 성공을 거두고 있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얼굴 윤곽에는 수도 생활의 비애와 혹독한 수도의 흔적이 묻어 있었고, 눈빛은 형형하기 그지없어 일별에 상대하는 사람의 마음과 의중을 읽어 두 번 다시 바주 쳐다 볼 마음이 내키지 않게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사서 말리키아는, 문서 사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수도사들을 일일이 우리에게 소개했다. 아울러, 그들이 하고 있는 공부의 내용도 소상하게 일러주었다. 나는 지식의 보고와 하느님의 말씀을 고구하는 그들의 면려와 정진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리스 어와 아랍 어를 번역하는 살베메크의 베난티오를 알게 되었는데, 베난티오는 인류 가운데에서는 가장 미더운 현자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심취해 있었다. 나는 이로써, 수사학을 공부하는 스칸디나비아의 젊은 수도사인 웁살라 사람 베노, 장서관에서 몇 개월 장기 대출한 고문서를 베끼고 있는 알레산드리아 사람 아이마로를 비롯, 가령 끌롱마끄누아 사람 파트리치오, 톨레도 사람 라바노, 이오나 사람 마르누스, 히어포스 사람 월도 같은, 세계 각처에서 몰려든 채식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섬기자면 얼마든지 더 있다. 이름을 헤아리면서 그 모습을 그려 보는 것보다 더 은혜로운 일이 있을까만, 중요한 것은 이야기이니까 우리가 거기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내가 들었던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수도사들 사이의 거북살스러운 분위기, 표면으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의 대화를 짓누르고 있던 몇 가지 관심사가 이로써 드러날 터이기 때문이다.
사부님은 우선 말라키아와 담소하면서 문서 사자실의 아름다움과 면려 정진하는 분위기를 상찬하고, 곳곳에서 이 장서관의 이름을 익히 들었는 바, 장서를 한번 열람하고 싶다면서 어떻게 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말라키아는, 수도원장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즉, 수도사가 사서에게, 보고 싶은 책의 이름을 적어 제출할 경우, 그 요구가 정당하고 수도사 본분에서 넘어서지 않으면 사서가 위층 장서관으로 들어가 책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었다. 사부님은 이어서, 위층에 있는 책의 제목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고, 말라키아는 자기 서안에 금사슬로 묶여 있는, 두꺼운 서명 색인부를 보여 주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법의 안으로 손을 넣어 조그만 주머니를 꺼냈다. 그는 이 주머니를 열고, 여행 중에 내가 여러 차례 본 적이 있는, 그래서 낯익은 물건을 꺼냈다. 그 물건은, 다리가 두 개 달려 있어서, 기수가 말잔들에 올라타듯이, 새가 홰에 앉듯이 그렇게 사람의 코 위에 올라앉을 수 있게 만들어진 물건이었다(사람의 코라고 하지만, 사부님의 뾰족한 코야말로 이 물건이 올라앉기에는 더없이 적당했다). 두 갈래로 나뉜 다리가 만나는 곳, 그러니까 눈과 맞닿는 곳에는 둥근 쇠테가 있고, 쇠테 안에는 술잔 바닥 두께의 편도꼴 유리가 박혀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글을 읽을 때마다 이 물건을 눈앞에다 대기를 좋아했는데, 까닭인즉, 햇빛이 기가 꺾일 때는 이 물건을 이용해야 자연이 그 연세에 허락한 것 이상으로 밝게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물건은, 먼 곳을 보는 데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윌리엄 수도사는 먼 곳을 볼 때에는 별 장애를 받지 않았다. 따라서 가까운 것을 선명하게 보는 데엔 대단히 요긴한 물건인 셈이었다. 이것을 코 위에 올려 놓은 윌리엄 수도사는, 나도 알아보기 어려운, 희미한 글씨까지도 읽어 내곤 했다. 그는 나에게, 중년을 넘기면 시력이 좋던 사람도 눈이 어두워지고 동공이 굳어진다고 말했다. 그래서 50을 넘기면, 아무리 유식한 사람도 쓰고 읽는 일에 관한 한 명이 다한 거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지식의 산물을 죽을 때까지 펴고 닦지 못한다는 것은 식자에게는 예사 불행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할지라, 누군가가 이런 물건을 고안하고 만들었으니... 윌리엄 수도사는, 배움의 목적은 또한 인간의 삶을 연장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한 로저 베이컨의 뜻이 이 물건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다른 수도사들은 침을 삼키며 윌리엄 수도사와 이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감히 이 물건에 대해 질문하는 수도사는 없었다. 나는, 그 많은 수도사들이 읽고 쓰는 일에 세월은 보내는 수도원 문서 사자실에도 아직 그 물건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지혜로 말하자면 세계를 찜 쪄 먹을 만한, 내로라 하는 사람들조차 감히 질문할 엄두도 내지 못할, 그런 어마어마한 물건을 가진 분 옆에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윌리엄 수도사는 그 물건을 눈에다 대고 목록 색인부에 씌어진 서명을 읽어 내려갔다.
나도 그 색인부를 훑어보았다. 유명한 서책도 있었고, 금시 초문인 서책도 있었다.
사부님은 서명을 읽어 내려갔다.
'히어포드 사람 루제로가 쓴 [솔로몬의 오릉보에 대하여, [히브리 어의 웅변술과 이해술], [금속에 관하여], 알 쿠와리즈미가 쓰고 로베르투스 앙글리쿠스가 라틴 어로 번역한 [대수학], 실리오 이탈리코가 쓴 [포에니 전쟁], 라바노 마우로가 쓴 [프랑크 족의 사적], [거룩한 십자가 찬미론],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요르다누스에 의한 A부터 Z까지 알파벳 순서로 배열한, 세계와 인간의 연령에 관하여]... 대단한 명저들이고말고. 그런데 이런 서책의 목록은 무엇을 근거로 짜여진 것이지요?'
사부님은 여기에서, 어떤 책에 나오는 듯한 한 대목을 외는 것 같았다.
'<사서는 마땅히 주제별, 저자별로 분류된 도서 목록을 비치하되, 그 많은 서가에다 두려면 숫자적인 지침이 있어야 하는 법...>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래, 수도사들이 대출을 원할 경우 그 서책은 무슨 원칙을 근거로 찾아냅니까?'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사서 말라키아 수도사는 그 말을 알고 있는 듯했다. 말라키아는 각 서명 옆에 붙어 있는 글귀를 가리켰다. 나는 그 주석을 읽어 보았다.
'<그리스 인 1류 저자의 저서가 있는 다섯 번째 방, 네 번째 서가의 세 번째 칸에 있는 책... 영국인 3류 저자의 저서가 있는 일곱 번째 방, 다섯 번째 서가의 두 번째 칸에 있는 책...>'
이런 식이었다. 나는 첫번째 숫자는 서가, 혹은 서가의 특정 층에 있는 서책의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숫자는 차례, 세 번째 숫자는 그 서책이 든 궤짝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나머지 글귀는 장서관의 방이나 복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용기를 내어, 서책을 찾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단서가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다. 말라키아 수도사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오로지 사서 수도사만이 장서관을 출입할 수 있다는 걸 잊으신 모양이네. 이 글 뜻은 사서나 제대로 알면 그만인 것이네.'
그러나 사부님의 다음과 같은 말이 내게는 족히 무안풀이가 되어 주었다.
'그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 서명 목록이 무엇을 근거로 작성되었는지 궁금하군... 주제별은 아닌 것 같고.'
그러나 사부님은 이어지는 서명을 훑어보았을 뿐, 저자명에 따른 분류법에 관해서는 아는 체하지 않았다. 저자명에 따른 분류법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에는 이를 채택하는 장서관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말라키아 수도사가 대답했다.
'본 장서관의 역사는 아주 깁니다. 따라서 서책은 모두 장서관이 이를 구득한 순서로 서명 목록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장서관에 들어온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찾기가 몹시 까다롭겠군요?'
윌리엄 수도사가 말라키아를 유도 신문하고 있었다.
'장서관 사서 수도사는, 서명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서책이 언제 이 장서관으로 들어왔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수도사들은 사서의 기억력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가 듣고 있는 수도사들에게, <너희들도 나의 기억력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짐이라도 주듯이 말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난 많은 선배 사서들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아서 처리하고 있는 자기의 업무에 대해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윌리엄 수도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령 내가, 책 이름을 정확하게 모르지만 솔로몬 왕의 오릉보에 관한 걸 좀 찾아보겠다고 한다 칩시다. 그러면 당신이, 조금 전에 읽은 서명을 알아내어 위층에서 가지고 온다는 것이군요.'
'수도사께서 꼭 솔로몬의 오릉보에 대한 것을 아시고 싶어할 경우, 저는 그 서책을 가져오기 전에 먼저 수도원장의 의향을 여쭈워야 합니다.'
말라키아가 대답했다.
'내 듣기로는,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채식사가 세상을 하직했다는데요? 원장께서는 누누이, 그 형제의 재주가 아깝다는 말씀을 하십디다. 혹 그 형제가 생전에 채식하고 있던 사본을 볼 수 있겠는지요?'
말라키아는 수상쩍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윌리엄 수도사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오트란토 사람 아델모는 아직 나이가 차지 않아 난외 채식만을 맡아 했습니다. 그 친구는, 상상력이 풍부해서, 해 놓은 일을 보고야 알았습니다만, 전혀 엉뚱한 그림을 자주 그려 내고는 했습니다. 가령 인두마를 그리거나 마두인을 그리는 식이지요. 그 사람이 채식하던 서책은 저기에 있습니다. 아직 그 사람 서안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있지요.'
우리는 생전에 아델모가 일했다는 서안 앞으로 다가섰다. 거기에는 다체롭게 채식한 성서의 [시편]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표지는 양피지 중에서도 질이 좋기로 유명한 송아지 피지로 되어 있었다. 뒤표지는 아직 서안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부석으로 문지르고 백악을 칠하여 부드럽게 한 다음 대패로 마름질한 이 피지가, 날카로운 송곳에 의해 양면에 구멍까지 뚫린 것으로 보아 이 재주꾼의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을 것 같았다. 시편의 전반부는 이미 글씨로 채워져 있었다. 이 채식 수도사는 난외에다 채식화의 초벌 그림을 시작한 참이었다. 그러나 앞 부분은 이미 채식이 끝나 있었다. 나는 사부님 옆에서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나도 사부님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시편]의 난외에는 우리의 오감에 버릇 들여진 것과는 정반대인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진짜 이야기와 가짜 이야기의 경계선에 와 있는 듯, 정체 불명의 놀라운 풍자를 통해, 진짜 이야기의 세계와 우주가, 거꾸로 뒤집어진 터무니없는 세계와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이 거꾸로 뒤집어진 세계란, 가령 사냥개가 메토끼에게 쫓기고, 사자가 사슴의 먹이가 되는 세계였다. 발 모양의 머리를 가지 조그만 새, 등에 인간의 손이 달려 있고 털북숭이 정수리에서 발이 비어져 나와 있는 동물, 얼룩말 무늬가 있는 용, 수없이 매듭지고 꼬인 뱀 모가지의 네 발 짐승, 사슴 뿔이 달린 원숭이, 피막 날개를 가진 수탉 모양의 세이렌, 곱사등에서 또 한 인간의 육신이 솟아오르고 있는 사지가 없는 인간, 배에 이빨이 총총히 난, 입이 무수히 많은 동물, 마 대가리 인간, 인간의 다리를 가진 말, 새 날개를 가진 물고기, 물고기 지느러미를 가진 새,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인 괴물, 혹은 목 하나에 몸이 둘인 괴물, 수탉 꼬리에 나비 날개를 가진 암소, 머리에 물고기 비늘이 돋아난 여자, 도마뱀 주둥이의 잠자리 떼와 뒤엉켜 있는 키마이라,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켄타우로스, 용, 코끼리, 만티코라, 꼬리가 전궁으로 변해 있는 그뤼폰, 목이 끝없이 ?? 악마적인 괴물들, 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흡사 살아 있는 것처럼 전원의 풍경 속을 뛰노는 신인동형 동물과 난쟁이 수형신들, 이들과 함께 그려져 있는, 밭 가는 사내, 과일 거두는 사내, 추수하는 사람, 실 뽑는 여자, 여우 옆에서 씨 뿌리는 자, 원숭이 무리가 지키는 성벽을 활로 무장하고 기어오르는 담비 떼... 아랫부분이 용 모양으로 그려진 두문자 L,나무 모양으로 그려진 V... 이 나무에서는 수천 겹으로 똬리 튼 뱀이 나오고 있는가 하면, 잎이나 열매도 모두 뱀으로 그려져 있었다.
[시편] 옆에는, 죽기 전에 완성한 것인 듯한 성무 일과서가 한 권 놓여 있었다. 어찌나 작은지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갈 것 같은 책이었다. 글씨는 깨알처럼 작았고, 테두리 그림은, 눈을 갖다 대어야 알아볼 수 있으리 만치 미세했다. 나로서는, 무슨 연장을 쓰면 그런 세필화를 그릴 수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책 가장자리에는, 공들여 쓴 본문 글자에서 번식해 나오기라도 한 듯한 수많은 소문자가 그려져 있었다. 바다의 세이렌, 하늘을 나는 수사슴, 키마이라, 그리고 사지가 없는 인간의 토르소 모양을 한 이 미세한 소문자들은 흡사 본문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 같았다. 한 곳에서 세 행에 걸쳐, 삼성창 비슷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자세히 보았더니 글씨에는 인간의 머리를 가진 세 마리의 우스꽝스러운 동물이 그려져 있었다. 머리 두 개중,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향하고 있어서 흡사 입을 맞추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하지는 않을지라도, 심오한 정선적 의미가 반드시 그 자리의 그림을 정당화하였으리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면 음란하다는 느낌을 금치 못하게 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몇 쪽을 훑어보면서 나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라 표정 간수하기가 어려웠다. 성스러운 성무 일과서에 그려진 그림이기는 하나,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그 그림을 보다 말고 웃으면서 한마디했다.
'베이브윈이군요. 우리 영국에서는 이걸 <베이브윈>이라고 한답니다.'
사부님의 말에 말라키아가 응수했다.
'바부앵이지요. 갈리아 사람들은 <바부앵>이라고 한답니다. 아델모는 프랑스에서도 공부했지만, 그림은 귀국에서 배웠습니다. 아프리카의 원숭이, 즉 <바분>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집이 뾰족탑 위에서 서고, 땅이 하늘 위에 있는 거꾸로 된 세계에서 온 동물입니다.'
문득 내 고국 말로 된 시 한수가 생각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가 내 입에서 흘러 나왔다.
기적에 대해서 말하려고 말아라.
땅이 천상에 올랐으니
이보다 더한 기적이 있을 것인가
그러자 말라키아가 같은 시집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읊었다.
땅은 위에, 하늘은 아래에,
이보다 더한 기적이 있을 것인가,
기적 중의 기적이로다.
말라키아가 나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반갑소, 아드소. 아닌게아니라 여기 있는 그림은, 파란 거위를 타고 가야 닿을 수 있는 나라의 풍물을 그리고 있는 게 사실이네. 매가 물가에서 고기를 잡고, 곰이 하늘에서 솔개를 쫓고, 가재가 비둘기와 함께 하늘을 날고, 세 거인이 덫에 걸려 수탉에게 쪼이는 나라 말일세.'
그의 입가로 창백한 미소가 번졌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도사들은 그가 웃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얼굴을 펴고 활짝 웃었다. 사서 말라키아는 남들이 웃고 있을 동안 눈살을 찌푸리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는, 아델모가 얼마나 재주 있는 채식사였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채식본을 든 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등위에서, 점잖으면서도 준엄한 호통이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공허한 말, 웃음을 유발하는 언사를 입에 올리지 말지어다.'
우리는 일제히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통을 친 사람은, 세월의 무게에 찌들려 피부뿐만 아니라 동공까지도 눈처럼 하얗게 바랜 노인이었다. 첫눈에 나는 그가 장님이라는 걸 알았다. 몸은 세월의 풍상에 찌들려 무수히 무너진 모습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사지는 튼튼해 보였고, 음성의 위엄도 추상같았다. 그는 눈이 온전한 사람처럼 우리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장님인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움직였다. 음성에는 권리와 위엄이 묻어 있어서 그의 말이 선지자의 예언처럼 들리게 했다.
말라키아는 노인을 가리키며 윌리엄 수도사에게 소개했다.
'지금 앞에 계신, 연세로 보나 지혜로 보나 대덕으로 일컬어 마땅하신 분은 부르고스 어른 호르헤 수도사님이십니다. 고해 성사로 죄짐을 덜어 주는 그로타페라타 사람 알리나르도를 제외하고는 이 수도원에 계신 분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십니다...'
말라키아는 이어서 노인 쪽으로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
'... 앞에 계시는 분은 저희 산문의 손님이신 바스커빌의 윌리엄 수도사이십니다.'
호르헤 노인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인사에 응했다.
'시생의 아래위 모르는 일갈이 손님의 심사에 폐가 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대중이 우스운 것을 웃는 소리가 들리길래 잠깐 우리 교단의 계율울 깨우쳐 주고 잠시 율기하느라고 그랬습니다. [시편]의 기자가 썼듯이, 수도자는 침묵의 서원을 했으면 마땅히 쓸 말도 자제해야 하는 법인데, 몹쓸 말이야 여부가 있습니까? 몹쓸 말이 있는 바에는 몹씁 형상도 있는 법입니다. 항간에는 하느님 피조물의 형상을 거짓되이 일컫는 자, 마땅히 있어야 하는 세계와는 반대되는 세계를 외람되이 그리는 자가 있어 왔고, 앞으로도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그런 자들은 다함 없이 나타날 것입니다. 허나 손님께서는 다른 교단에서 오시었습니다. 내 듣기에 그곳에서는 때가 때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 유쾌한 웃음은 허물이 아니 된다고 하더군요.'
그는 아시지의 성인 프란체스코의 기행, 프란체스코회의 곁가지라고 할 수 있는 탁발승 및 엄격주의파 수도사들의 상궤를 벗어난 행위에 대한 베네딕트 회 측의 견해를 나름대로 피력했다. 말이 견해의 피력이지 사실은 비아냥거림을 알아들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는 나름의 포석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난외의 채식한 형상 중에 마땅치 못한 구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 읽는 자, 보는 자를 계도하기 위해서 그리하는 것이겠지요. 강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심 있는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이따금씩 우스꽝스러운 예화가 등장하는 것도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지요. 따라서 채식이 시도하고 있는, 형상을 통한 이야기 또한 용납되어야 마땅하니 않을는지요. 우화집에는, 미덕도 사례로 다루지만 죄악 또한 사례로 다룰 수 있습니다. 까닭인즉, 집승이 인간 세계의 본을 보일 수 있음입니다.'
호르헤 노인의 표정이 짓궂어졌다. 그러나 웃지는 않았다.
'아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피조물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교만한 머리를 숙이게 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필경은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웃음거리로 전락시키고 말아요. 이래서 하느님 말씀이 거문고 뜯는 나귀, 방패로 밭을 가는 올빼미, 스스로 멍에를 쓰고 일하는 황소, 거꾸로 흐르는 강, 불붙는 바다, 은자로 변신하는 늑대 따위로 그려지는 불상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황소를 데리고 토끼 사냥을 나가고, 올빼미가 문법을 가르치고, 개가 벼룩을 파먹고, 애꾸가 벙어리를 지키고, 벙어리가 떡을 달라고 하고, 개미가 송아지를 낳고, 구워 놓은 닭이 날고, 지붕 위에서 과자가 익고, 앵무새가 수사학을 가르치고, 암탉이 수탉에게 종란을 낳게 하고, 수레가 소를 끌로, 개가 침상에서 자고, 사람이 대가리를 땅에 댄 채로 걷고... 도대체 이런 장난을 왜 합니까? 하느님의 뜻을 가르친다는 핑계 아래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과 거꾸로 된 놈의 세상이 있어도 좋다는 것입니까?'
호르헤의 말에 윌리엄 수도사가 겸손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아레오파고의 재판관이 가르치고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가장 왜곡된 것을 통해서도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뿐만 아니라 생빅또르의 후고가 일렀듯이, 유사한 것일수록 사실은 상이한 것이고, 진리가 끔찍하고 상식을 벗어난 모습으로 드러날수록 인간의 상상력은 세속적인 재미를 누리지 못합니다. 따라서 기괴한 형상에 깃든 비밀은 체득이 빠른 법입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라는 것은 이 늙은이도 압니다. 고백하기 부끄럽습니다만, 끌뤼니 수도원 원장들이 시토 수도회 원장들과 싸울 때 우리 교단이 옥신각신했던 게 바로 이 문제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르나르 성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성인께서는, 하느님을 드러낸답시고 형상으로든, 수수께끼로든 괴물과 기물을 그리는 사람은 곧 자기가 그런 기괴한 것들을 즐기게 되고 급기야는 오직 이러한 것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게 된다고 하셨지요. 아직 시력이 좋으시니까, 우리 수도원 회랑 문설주에 양각된 것 좀 보시지요...'
그는 손가락으로 청문 너머 교회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사색하고 명상해야 마땅한 수도사들 눈에 무엇이 보이고 있습니까? 저 우스꽝스러운 기물, 기이한 형상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저 탐욕스러운 잔나비를 도대체 어쩌자는 것입니까? 저 사자, 저 켄타로우스, 배에 입이 달리고, 외발에 귀는 꼭 돛 같은 반인수는요? 점박이 호랑이, 맞붙어 싸우는 전사들, 뿔피리 부는 사냥꾼, 머리 하나에 몸이 여럿인 괴물, 몸 하나에 머리 여럿인 괴물은요? 뱀 꼬리를 단 네 발 동물, 몸은 물고기이되 머리는 네 발 동물의 머리인 괴물, 앞은 말이요, 뒤는 영양인 동물, 뿔달린 말을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지요? 오호라, 공부한다는 수도사들이 책보다는 대리석 부조를 더욱 탐하고, 하느님 율법보다는 사람이 한 일을 더욱 상찬하니, 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요, 이 허울만 좋은 교언영색을 도대체 어쩌지요?'
노인은 숨이 가빴던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놀라운 기억력(장님 특유의)에 탄복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는, 스스로 사악하다고 통탄하면서도 그 형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형상을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한때는 그 자신도 거기에 들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궁금했다. 그러나 죄악에 대한 매력적인 묘사가 이러한 행위와 그 파급 효과를 단죄하는 점잖은 사람들의 책에도 실려 있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았다. 이것은, 필자가 진리의 증언에 열중한 나머지, 유혹의 탈을 빌어 쓴 죄악의 도움을 비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증좌였다. 작가는 이로써 사람들에게 악마가 어떻게 인간에 접근하는 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호르헤의 말을 듣고 나니 문득,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회랑의 호랑이와 원숭이의 부조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호르헤는 내 생각의 허리를 자르고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어리석은 것들의 힘을 빌지 않고도 우리에게 곧고 좁은 길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우화는 우스운 것도 아니고 무서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델모는(그 죽음을 우리 모두 애도하고 있습니다만), 자기가 그린 괴물을 즐기던 나머지, 마땅히 그려야 할 궁극적인 형상에 대한 눈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예사롭지 않은 길을 따라가고야 말았습니다...'
호르헤는, 목소리를 뚝 떨어뜨리고는 덧붙였다.
'... 하느님께서는, 여기에 합당한 벌을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 살베메크 사람 베난티오가 그 침묵을 깨뜨렸다.
'호르헤 수도사님께 감히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감히 여쭙거니와, 덕이 과하셔서 그러한 지 수도사님의 말씀은 조리에 닿지 않습니다. 아델모가 죽기 이틀 전에 수도사님께서는 바로 이 문서 사자실에서 있었던 토론회에 자리를 함께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델모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형상에 몰두하는 자기 예술을 변호하여, 형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즉, 자기 예술로써 천상적인 것들을 드러내 보인다고 했던 것입니다. 윌리엄 수도사께서는 방금 아레오파고 재판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만, 이 재판관 역시 왜곡된 것으로 바른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날 아델모 역시 아퀴노의 석학을 인용했습니다. 신성한 것은 귀한 몸보다 천한 몸을 그 형상으로 취한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인간의 영혼은 실수의 용납에 인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한 육신으로 그려지면 그 속성은 신성한 것에 닿지 못하고 그 뜻이 흐려지고 맙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이 겸허한 표현이야말로 이 땅의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가진 지식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을 통하여 당신을 더 많이 드러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먼 이 형상은 가장 정확한 개념으로서의 하느님에 접근시킵니다. 이유인즉, 하느님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이상의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까닭은, 이렇게 해야 하느님에 속한 사상이, 긴히 알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눈에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그날 우리는 진리가, 짓궂은 형상과 수수께끼 같은 형상이라는 이 놀라운 표현법으로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느냐는 문제를 토론했습니다. 저는 그날 아델모에게, 저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는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보이더라고 말했습니다. 즉...'
호르헤가, 베난티오의 말허리를 잘랐다.
'기억이 안 나네. 너무 늙었나 보아. 전혀 기억에 없으니까. 어쩌면 내가 그날 과하게 사나웠는지도 모르겠네. 늦었군... 가야겠어.'
그러나 베난티오는 호르헤 노인을 물고 늘어졌다.
'기억이 안 나신다니 이상합니다. 참으로 요긴한 토론이 아니었습니까? 베노와 베렝가리오도 동석했습니다. 문제는 시인이 장난삼아 만들어 낸 은유와 말장난과 수수께끼가 사물에 대한 참신하고 기발한 명상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저는 현자라면 마땅히 그런 것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말라키아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수도사 하나가 말을 거들었다.
'호르헤 수도사께서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이는 마땅히 연세로 인하여 근력이 떨어진 탓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기억 못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상당히 흥분한 듯한 어조였다. 그러나 막상 말을 시작하고 보니 호르헤의 방패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가 두려웠던 모양인지 어물쩍 말꼬리를 흐렸다. 말한 사람은 사서 조수인 아룬델 사람 베렝가리오였다. 베렝가리오는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우베르티노가 하던, 아델모에 대한 말을 떠올렸다. 베렝가리오의 눈은 음녀의 눈 같았다. 중인환시가 부담스러웠던지 베렝가리오는 하릴없이 자기 손가락만 비틀었다.
베난티오는, 쏘는 듯한 눈으로 베렝가리오를 노려보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암상스러운 사내 베렝가리오는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었던지 자기 눈길을 떨어뜨렸다. 베난티오가 소리쳤다.
'좋네, 베렝가리오 형제. 만일에 기억력이, 하느님께서 내리신 선물이라면, 건망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일 터인데 어찌 경솔하게 우리가 일컬을 수 있겠는가. 내 조금 전에 한 말을 접고, 노 수도사님께 사죄드리겠네. 허나 그대에게는 아주 정확한 기억을 요구하는 바이네. 우리가 그대의 그 사랑하는 형제와 여기에서 함께했을 때의 기억 말일세...'
베난티오가 왜 <사랑하는>이라는 말을 썼는지 그 당시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당시 나는 그 분위기에서 이상한 낌새를 읽어 내고는 당황하고 있던 참이었다. 문서 사자실에 모인 수도사들 모두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베렝가리오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베렝가리오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말라키아가 심상찮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역전시키려고 그랬는지 윌리엄 수도사에게 말을 붙였다.
'가시지요, 윌리엄 수도사님. 재미있는 책을 좀 보여 드리겠습니다.'
모두가 뿔뿔히 흩어졌다. 나는, 베렝가리오가 베난티오에게 적의에 찬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베렝가리오의 그런 눈길을, 베난티오가 조용하면서도 상당히 전투적인 눈길로 맞는 것도 나느 보았다. 호르헤 노인도 자리를 뜨려고 했다. 나는 호르헤 노인에게 다가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그의 손등에다 입을 맞추었다. 노인은, 경의를 표하는 내가 기특했던지 내 머리에 손을 얹고는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대자 그는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름이 아주 대단히 듣기 좋구나. 혹시 몽띠에르 앙 데르 사람 아드소를 아느냐?'
내가 모른다고 하자 호르헤 노인은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가짜 그리스도에 대하여]라는 아주 무시무시하면서도 대단히 재미있는 책을 쓴 사람이다. 이 책에서 그는 앞으로 있을 일을 예언했다. 하지만 어디 사람들이 들은 척이라도 하더냐.'
윌리엄 수도사가 대신 응수했다.
'10세기 이전에 씌어진 책이 아닙니까?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요.'
'보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이겠지요. 하지만 가짜 그리스도는 천천히 옵니다. 천천히 오되 그가 미치는 효과는 대단히 무섭습니다. 그는, 우리의 뜻 밖에서 오지요. 오지 않았다고요?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요? 그렇지만 옵니다. 사도들의 계산이 빗나갔기 때문이 아니고, 사도의 계산법을 제대로 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그는 문서 사자실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천장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오고 맙니다. 꼬리가 뒤틀린 요상한 점박이 괴물이나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그러다 최후의 날을 맞지 않도록 하세요. 마지막 이레를 빈둥거리지 마시라는 뜻이외다!'
만과
만과를 알리는 종소리에 수도사들은 서안에서 일어날 준비를 서둘렀다. 말라키아는, 사부님과 나 역시 문서 사자실을 나가야 한다는 눈치를 보였다. 그는, 보조 사서인 베렝가리오와 둘이 남아서 서책을 읽던 자리에 정리하고, 장서관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윌리엄 수도사는, 손수 문을 잠그느냐고 물었다. 말라키아가 대답했다.
'주방이나 식당에서 문서 사자실로 들어오는 걸 막는 문은 없습니다. 문서 사자실에서 장서관으로 들어가는 걸 막는 문도 없습니다. 원장님의 금지령보다 훨씬 튼튼한 문은 없는 것이지요. 게다가 수도사들은 종과 때까지 주방과 식당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때부터 외부인이나 짐승이 꼭 본관으로 들어오겠다면 별수가 없습니다. 외부인이나 짐승에게야 금지 시킨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방과 식당으로 통하는 문은 제 손으로 잠급니다. 이 시각부터 본관에서는 인적이 끊기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수도사들은 교회의 성가대석 쪽으로 걸어갔고, 사부님은, 우리가 성무에 참례하지 않더라도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것으로 믿었는지(이날부터 하느님은 우리를 여러 차례 용서해 주셔야 했다) 나에게 함께 좀 걷자고 했다. 사부님 말씀으로는 그래야 수도원 경내에 익숙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날씨가 갑자기 나빠지고 있었다. 찬바람이 잠시 기승을 부리는가 싶더니 하늘에는 구름이 덮이고 있었다. 그래도 채마밭 위로 지고 있는 태양을 가릴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교회의 성가대석을 옆으로 끼고 돌아 뜰 뒤쪽으로 갈 즈음 동쪽에서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수도원 외벽에 면해 있는 건물, 즉 본관의 동쪽 탑루와 만나는 건물은 외양간이었다. 돼지 사육사들은 돼지 피가 든 항아리를 덮고 있었다. 외양간 뒤로는 외벽이 낮아 밖을 굽어다 볼 수 있었다. 벽 너머로는 급경사를 이루는 사면이 있었는데, 눈도 그 사면만은 덮지 못했던지 지저분한 흙이 드러나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흙이 아니라 썩은 짚더미였다. 낮은 외벽 너머로 집어 던져진 짚으로 이루어진 짚더미는, 브루넬로가 도망쳤던 길 모퉁이까지 이어져 있었다.
가까운 외양간에서 사육사들은 가축을 구유 쪽으로 몰고 있었다. 우리는, 외벽 쪽으로, 갖가지 가축 우리를 따라 걸어 보았다. 오른쪽, 그러니까 교회 성가대석 반대쪽에는 수도사들의 숙사와 뒷간이 있었다. 여기에서 동쪽 담이 북쪽으로 꺾이고 있었는데, 이 모퉁이에는 대장간이 있었다. 성무 일과에 참례하러 가려고 그러는지, 대장간의 대장장이는 연장을 챙긴 다음 불을 끄고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던지, 다른 작업장과는 좀 떨어진 외딴 작업장 쪽으로 다가갔다.
수도사 하나가 연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갖가지 색깔의 유리 조각 견본이 있었고, 벽 앞으로는 꽤 넓은 판유리가 놓여 있었다. 수도사 앞에는 미완성 성보 상자가 은제 뼈대 모양으로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수도사는 그 위에다 유리와 광물은 맞추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연장이 닿으면 그 미완성 상자는 성보 상자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은 수도원의 유리 세공사인 모리몬도 사람 니콜라였다. 그는 우리에게, 자기가 노 뒤쪽에서 유리를 불면, 대장장이가 유리를 납틀에 끼워 유리창을 만든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는, 자기네들이 유리창을 만들기는 해도 교회와 본관의 장식 유리는 자기네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그만치 2세기 전에 만들어진 명품이라고 말해주었다. 니콜라 자신과 거기에 있는 대장장이들은, 유리에 관한 한 허드렛일을 하거나 오래 되어 손상된 부분을 고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겨우 고치는 정도인데도 굉장히 어렵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옛날의 그 색깔을 낼 수 없거든요. 성가대석 위에 있는 파란 유리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유리는 어찌나 맑은 지 해가 중천으로 솟으면 천국의 빛줄기가 회중석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답니다. 회중석 서쪽에 있는 유리는 얼마전에 바꾸어 끼웠습니다. 그래서 질적으로는 원래 있던 것만 같지 못합니다. 여름에 보시면 금방 알 수 있지요. 맥이 빠집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옛날 사람들 같은 재주가 없는 모양입니다. 거인의 시대는 가 버린 것이지요.'
윌리엄 수도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응수했다.
'그래요, 우리는 난쟁이들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세요. 우리는 난쟁이는 난쟁이이되, 거인의 무등을 탄 난쟁이랍니다. 우리는 작지만, 그래도 때로는 거인들보다 더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답니다.'
윌리엄 수도사의 말에 니콜라가 자신 있게 대들었다.
'아니, 우리가 그분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수도원의 보물이 보관된 교회 지하실로 내려가 보시면, 아주 굉장한 성보 상자를 구경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보 상자를 한 번이라도 보시면... 저 같은 유리장이가 꼼지락거리며 주무르고 있는 이것은... 호작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아실 것입니다.'
'유리 세공사가 줄곧 유리창만 만들라는 법은 없어요. 대장장이라고 해서 줄곧 성보 상자만 만들라는 법도 없고요. 옛날의 거장들이 다행히도 몇 세기를 너끈하게 견딜 만한, 아주 튼튼하고 예쁜 놈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온통 성보 상자로 가득 차 버리게요? 그때쯤이면 성보 상자를 아무리 뒤져 봐야 유물이 될 만한 성자의 유골은 아주 드물어질 테지요. 그렇다고 해서 평생 깨어진 유리창만 땜질하고 있을 수도 없지요. 여러 나라에서 나는 유리 제품을 많이 보았는데, 그걸 보니까 장차 세상에서는 유리가 신성한 사업에 쓰여지는 것은 물론 인간의 약점을 보완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 같습디다. 우리 시대에 만들어 진 거라도 하나 보여 드리고 싶군요. 나는 복이 많아 이 요긴한 견본을 하나 가질 수 있었답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말 끝에, 법의 안으로 손을 넣었다가는 예의 그 렌즈 콩처럼 생긴 유리알 한 쌍을 꺼냈다. 우리의 말상대가 되고 있던 양반의 안색이 달라졌다.
니콜라는, 몹시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으로 윌리엄 수도사가 내민, 유리알이 두 군데 박힌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테 안에 든 유리 눈이로군요! 그것 참 대단한 물건입니다! 피사에서 조르다노 형제를 만났을 때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발명된 지가 20년이 넘었다더군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눈 것도 자그만치 20년 전의 일입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발명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만들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유리 세공의 도사 중에서도 도사라야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시간도 엄청나게 들고 공도 엄청나게 듭니다. 10년 전, 눈에다 대는 이 유리알 한 쌍이 거금 6볼로냐 크라운에 팔렸답니다. 나는 위대한 장인, 아르마티 사람 살비노로부터 이걸 얻었지요. 10년도 넘은 일입니다만 나는 이렇게 애지중지하면서 품고 다닌답니다. 내 몸의 일부나 다름이 없었지요. 하니, 지금은 아주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답니다.'
'언제, 좀 자세히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이런 거 하나 만들 수 있다면 좀 좋겠습니까?'
'물론 입니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유리의 두께는 쓰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유리알 여러 개를 시험해 보아야 한답니다. 특정인에게 적당한 두께가 찾아질 때까지 말이지요.'
'기적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혹자는 마법이니, 악마의 연장이니 할 터이니...'
윌리엄 수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물건을 두고, 마법 어쩌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허나 마법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마의 마법인데, 이 마법은 말로 나타내기 어려우리만치 아주 교묘하게 인간의 타락을 획책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마법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식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러한 마법은 자연을 변형시키는 일을 하는데 그 목적 중의 하나는 인간의 생명 자체를 연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성한 마법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은가요. 따라서 배운 사람들은 이 마법을 고구하되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데 그치지 말고, 하느님께서, 히브리 인, 그리스 인, 고대인, 심지어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허락하셨던 자연의 비밀을 찾아내어야 합니다.(이교도들의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눈과 시력의 과학은 얼마나 방대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기독교도의 지식은 불신자나 이교도들 손을 떠나 다시 우리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면, 이런 것과 관련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어째서 이를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지식으로 널리 펴지 않는답니까?'
'하느님 백성이라고 해서 모두 이 어마어마한 비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데다, 이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악마와 결탁한 요술쟁이로 오해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지식을 남과 더불어 나누겠다고 한 이유로 목숨을 잃은 적도 있기 때문이랍니다. 나부터도, 저 종교 재판과 이단 심판 시절에 악마와 거래한다는 의심을 받았던 나머지 이 렌즈를 감히 코에다 걸지 못했던 때가 있답니다. 이 때문에 꼭 읽어야 할 문건도 직접은 읽지 못하고 공연히 서기들로 하여금 대독하게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단 심판관 시절이라면, 악마가 지천으로 널려 있던 시절, 누구나 코로 유황 연기 냄새를 맡을 수 있건 시절이랍니다. 한번 걸리면 악마와 손을 잡은 혐의로 기소되기가 십상이었지요. 위대한 로저 베이컨께서 경고하셨듯이, 과학의 비밀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미덕이 되는 것은 아니랍니다. 고약한 일에 쓰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식자는, 마법과는 관련이 없는, 지극히 범용한 과학 문건을 일부러 마법과 관련된 문건으로 보이게 합니다. 무슨 까닭인가요? 그래야 불순한 사람들이 이를 넘보지 못할 게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어른께서는, 범용한 사람들이 이 비밀을 그릇된 목적에 쓸까 봐 두려워하시는 것입니까?'
'범용한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을 내가 두려워하는 바는, 그들은 이런 비밀을 무서워하는 나머지, 목자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악마의 소행으로 혼동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유연히 약 만드는 데 대단히 재주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양반은 단기간에 질병을 조복시킬 만한 단방 영약을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이 양반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이렇게 만든 약을 범용한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그들은 약을 쓰면서 주문 비슷한 기도문을 읊조리더랍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이들은 단방 약이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문 비슷한 기도문이 병을 낫운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범용한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은, 이 약이 지닌 효능에 대해서는 들은 척도 않고, 주문을 통한 치유의 기적에만 의지하고는 바르거나 복용하더랍니다. 하기야, 경건한 믿음으로 무장되었다고 하는 상태 자체가 이미 병 나을 준비가 된 상태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배움이라는 것은 이렇게 범용하고 단순한 사람으로부터도 지켜져야 하지만 식자들의 편견으로부터도 지켜져야 합니다. 내 언제 다시 말씀 드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만, 영약은 자연의 법칙을 미리 앞질러 아는 이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이, 자신의 지상적 권력을 키워 나가려 하거나, 소유를 늘이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 손으로 들어가면 큰일입니다. 내 일찍이 카타이에서 한 현자가 무슨 약을 만들었는데, 이 약은 불과 접촉하면 엄청난 폭음과 불꽃을 일으키면서 사방 수십자 이내에 있는 것은 모조리 부수어 버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참 놀라운 발명품입니다만... 그렇지요, 강의 흐름을 바꾸거나, 경작할 땅에 박힌 바위를 부수는 데 쓰여지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만, 자기 적을 궤멸시키는 일에 능히 이 약을 쓸 만한 자의 손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만 같지 못하지요.'
'그 적이라는 자들이 하느님 백성의 원수라면 이 아니 좋겠습니까?'
'좋다마다요. 하지만 오늘날 하느님 백성의 원수는 누군가요? 황제 루드비히인가요? 교황 요한인가요?'
윌리엄 수도사의 질문에 니콜라가 목을 움츠리면서 대답했다.
'하느님 맙소사... 이런 난문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실 테지요. 비밀 중에는 모호한 말의 뚜껑을 덮어 둘 필요가 있는 법. 자연의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양피지나 염소피지에 씌어서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밀의 서에서, 자연이나 예술의 비밀을 너무 밝히 드러내는 것은 천상의 봉인을 뜯는 짓이며, 따라서 악마에게 끼여들 기회를 주는 짓이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곡해하면 안됩니다. 그분은,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드러내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고, 그 드러내는 시기와 방법을 식자가 온당하게 가려야 한다는 뜻이랍니다.'
'그러하시면 서책이 읽는 자들의 손 밖에 있는, 이 같은 곳을 두둔하시는 것입니까?'
니콜라가 물었다. 니콜라가 드디어 사부님의 미끼를 문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문제지요. 과언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만, 과언 또한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못합니다. 나는, 지식의 보고하고 하는 것은 반드시 감추어질 필요가 있다, 이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따라서 내게는 이곳의 풍습이 죄악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내 말은, 선도 될 수 있고 악고 될 수 있는 비밀이 이곳에 있기 때문에 식자들이 동류끼리만 통하는 말로 이를 지키고 막는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식자들이 이를 지키고 막는 것을 보면 여기에 무엇인가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배움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만 선악을 구분하는 일 또한 어렵습니다. 게다가 우리 시대의 식자들은, 대개 난쟁이의 무등을 탄 또 하나의 난쟁이일 경우가 많습니다.'
사부님의 대담 무쌍한 말투가 니콜라의 마음을 아주 편하게 만들어 놓았던 모양이었다. 니콜라는 윌리엄 수도사에게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은근하게 수작을 걸었다. '어르신과 나는, 같은 종류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를 넉넉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턱으로 본관을 가리키면서 속삭였다.
'저기 말씀인데요... 저기에서는... 학문의 비밀이 마법의 보호를 받고 있답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짐짓 무관심한 척하면서 물었다.
'호, 그래요? 어떤 마법이 학문의 비밀을 보호하나요? 철장, 금제, 뭐 이런 것이겠지요.'
'천만에요. 그 이상이랍니다.'
'가령?'
'저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제 관심의 과녁은 유리이지 서책은 아니니까요. 허나 수도원에는 소문이 돕니다... 아주 괴이한 소문이 돌고 있답니다.'
'궁금하군요, 어떤 소문이지요?'
'참으로 괴이합니다. 소문에 따르면, 어떤 수도사가 말라키아에게 서책을 부탁했다가 그만 거절당했답니다. 이 수도사는 그 서책을 훔쳐보기로 말라키아 몰래 야밤에 장서관으로 숨어 들어갔다가 뱀, 머리 없는 사람, 머리가 둘인 사람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수도사가 어찌어찌 해서 그 미궁을 헤어 나왔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더라지요, 아마?'
'하면, 악마나 허깨비의 소행이라고 해야 할 일이지 어째서 마법 운운하게 된 것이지요?'
'제 비록 미천한 유리 세공사에 지나지 않으나, 본시부터 바탕이 미욱한 것은 아닙니다. 악마는(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수도사를 시험하되, 뱀이나 머리 둘 달린 인간의 모습으로 수도사를 시험하지는 않습니다. 광야에서 일찍이 교부들이 당했듯이 악마는 음란한 환상을 통해 시험하기를 즐깁니다. 더구나 모모한 서책을 보는 것이 죄악이라면, 어찌해서 악마가 나서서 그런 죄악에 빠지는 수도사를 혼낸답니까. 악마라면 그런 죄악을 조장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거 훌륭한 추리 같소.'
'시약소 창문을 고치면서 저는 세베리노의 서책 몇 장을 떠들쳐 본 적이 있습니다. 재미있더군요. 잘 모르기는 합니다만 금서로 꼽히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책이 아니었던 가 싶습니다. 특히 저의 눈길을 끈 것은,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진 쪽인데, 그것은 심지를 다듬는 법, 환상을 유발시키는 향수 제조법...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관 2층의 조명은 보셨을 겁니다만 한밤중에는 못 보셨을 겁니다. 이 수도원에서 밤을 지내보시지 못하셨을 테니까요. 많은 수도사들은 그 불빛을 놓고 자주 수군거립니다. 도깨비 불이라는 수도사도 있고, 제 바닥을 찾아온, 죽은 사서의 영혼이라고 하는 수도사도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수도사의 영혼이라니, 그게 무슨 당치 않은 소리냐고 하시겠지만, 여기 있는 수도사들은 대개 이런 것을 믿습니다. 저는, 환상을 지어내는 마법의 등잔 불빛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곧잘 하고는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개의 귀에서 뽑은 기름을 등잔에 부어 놓으면 그 등잔 연기를 쏘이는 사람은 지기 머리를 개 대가리로 믿는다지 않습니까? 누구와 함께 있을 경우에는 서로 상대의 머리를 개 대가리로 여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고약 중에는 별별 고약이 다 있는데 개중에는 바르고 등잔 옆에 서면 자신을 코끼리 같이 거대한 짐승으로 느끼게 되는 고약도 있다고 합니다. 뿐입니까? 박쥐 눈,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무슨 물고기, 그리고 늑대의 독물로 심지를 만들어 등잔에다 꽂아 놓으면 그 심지가 타는 동안에는 바로 눈앞에 그런 동물이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도마뱀 꼬리로 심지를 만들어 태우면 주위의 모든 사물이 은으로 보이고, 검은 배암의 기름이나 수의로 심지를 만들어 태우면 방안에 뱀이 가득 찬 것으로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본 적은 없습니다만 저는 압니다... 장서관에서 누군가가 아주 꾀를 써 가면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은 수도사의 영혼이 장서관으로 들어와서 그런 마술을 부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니콜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만... 하느님께서 저희를 지켜 주시겠지요. 늦었습니다. 벌써 만과가 시작되었을 테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니콜라는 이 말을 남기고는 교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남쪽 벽을 따라 걸었다. 오른쪽으로는 순례자 숙사와 회의장이 있었고, 왼쪽으로는 올리브 압착실, 연자 방앗간, 곡물 창고, 식품 창고, 수련사 숙사가 있었다. 수도사들은 모두 잰 걸음으로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사부님께 물어 보았다.
'니콜라 수도사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모르겠다. 장서관에 무엇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만, 글쎄다, 죽은 사서의 영혼 어쩌고 하는 것은 빈말일 듯하구나.'
'빈말이라고 하시면...?'
'죽은 사선 수도사들 말이다만... 맡은 의무에 충실한 학승들 이었으니 만치 지금쯤 하느님 나라에 머물면서 하느님 뜻을 묵상하고 있어야 이야기가 되지 않겠느냐? 대답이 되었느냐? 등잔 말인데, 장서관에 등잔 같은 게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해 봐야 할 일이다. 유리 세공사가 귀띔하던 고약 말인데... 침입자 앞에 허깨비를 어른거리게 하는 방법 중에는 고약을 쓰는 것보다 훨씬 쉬운 방법이 있다. 너도 오늘 들었으니 알 것이다만, 세베리노 같으면 잘 알고 있을 게다. 그러나 아직 속단하기는 시기상조.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수도원은 야간의 장서관 출입을 바라지 않는 반면에 수도사들은 끊임없이 침입을 시도해 왔고 지금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맡아 하시는 일과 이 일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어떤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델모는 자진했기가 쉽겠구나.'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오늘 아침에 나는 짚더미를 유심히 보았다. 동쪽 탑루 아래에서 모퉁이를 따라 올라오면서 산사태 자국을 보았느니라. 산사태가 아니라면, 탑 아래의 담장이 무너져 내린 것이거나 쓰레기가 흘러내린 것일 테지. 그래서 나는 오늘저녁 위에서 이 지점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짚더미 위에는 덮인 눈이 별로 없었다. 무슨 말이냐? 그 눈은 최근에 내린 눈, 다시 말해서 어제 내린 눈이지 그전에 내린 눈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델모의 시신에 대해, 수도원장은 바위에 갈가리 찢겨 동쪽 탑루 아래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지 않더냐? 동쪽 탑루 아래라면 절벽과 건물이 만나는 지점이다. 아래엔 소나무가 자라 있고... 그러나 바위는 벽이 끝나는 지점 바로 아래에서 계단을 이루고 있다. 결국 짚더미는 계단이 끝나는 데서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뭐라고 할까... 이유는 아직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아델모가 벽의 난간에서 스스로 몸을 던지고, 이어 바위에 부딪히면서, 죽었든 부상했든 간에 짚더미 위로 떨어졌다... 이렇게 말해 버리면 머리가 덜 아플 테지. 그렇다면 그날 밤 폭풍으로 인한 산사태는 짚더미와 담벽 일부와 이 젊은이의 시체를 동쪽 탑루 아래로 밀고 내려갔을 것이야.'
'어째서 사부님께서는, 조금 전에 하신 추리를, 머리가 덜 아플터인 추리라고 하시는지요?'
'이것 보아라,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한번 추론한 원인이나 진상은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닌 법이다. 만일에 아델모가 동쪽 탑루에서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아델모의 몸은 장서관으로 들어갔을 것이 아니냐? 장서관으로 들어갔다면 누군가가 아델모를 침입자로 오인했을 테지? 따라서 아델모는 누군가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지. 장서관에 있던 자는 변변히 저항도 못하는 아델모를 죽이고는 시신을 짊어지고 유리창 있는 곳까지 올라간 뒤, 유리창을 열고 이 가엾은 친구를 아래로 던졌을 것 아니겠느냐? 하지만 내 추리에서 모자라는 것은 아델모, 아델모의 결심, 그리고 작은 산사태...를 한 줄로 잇는 동기다. 원인, 다시 말해서 동기만 있으면 모든 게 설명이 가능할 터인데.'
'아델모 수도사는 왜 자진하려고 했을까요?'
'누가, 왜, 아델모를 죽이려고 했을까? 어떤 질문을 제기하든 먼저 동기를 찾아내어야 한다. 내 보기에는 여기에 반드시 이유, 혹은 동기가 있었을 것 같구나. 본관에는, 말을 조심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더구나. 모두가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에게도, 별 것은 아니다만, 소득이 있기는 있었다. 아델모와 베렝가리오의 이상한 관계를 알아낸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따라서 당분간 이들에게 눈을 대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야.'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동안 만과가 끝났다. 일꾼들은 저녁을 먹기 전에 제각기 맡은 일이 기다리는 일터로 돌아갔고 수도사들은 식당으로 향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눈발이 날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천지가 하얀 융단에 덮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눈은 밤새 내렸던 듯하다.
몹시 시장하던 참이어서 식탁 앞에 앉는다는 게 그렇게 은혜로울 수가 없었다.
종과
식당에는 커다란 횃불 몇 개가 밝혀져 있었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장석을 좌우로 각각 한 줄씩 앉아 있었다. 원장의 자리는 수도사들의 자기와는 직각을 이루는 넓은 단 위에 마련되어 있었다. 반대편에는 강단이 있었는데, 식사 중에 성서를 봉독할 수도사가 이미 거기에 자리잡고 서 있었다. 원장은 성 파코미우스의 권고에 의한 오랜 관례에 따라 세수식을 끝낸 우리들의 손을 닦아주려고 흰 수건을 든 채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수식과 손의 물기를 닦는 순서가 끝나자 원장은 윌리엄 수도사를 옆 자리로 모시면서 나에게는, 역시 손님 중 한 사람이니만치 베네딕트 회의 품계를 무시해서 나의 위계가 수련사임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수도사에 준하는 특권을 허락한다고 말했다. 원장은 친절하게도, 다음날부터는 수도사들과 같은 자리에 앉되, 혹 사부님을 시봉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 식사 전후에 주방을 들르면 요리사들이 편의를 보아 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수도사들은, 두건을 얼굴 위로 드리우고, 두 손을 겉옷 안에 넣은 채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수도원장이 자기 식탁 앞으로 다가가 축복의 기도를 올렸다. 강단에서는 선창자가 <가난한 사람 배불리 먹로>를 선창했다. 원장이 축복을 내리자 수도사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다.
우리 교단의 회칙은, 수도사의 식사는 검약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수도사들에게 필요한 음식의 양을 원장이 정하는 것도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수도원의 경우 수도사들은 식탁의 즐거움을, 탐닉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잖이 누리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습이 무슨 식도락의 잔치로 변형되어 버렸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수도사들의 본분인, 참회와 덕행의 모범을 좇는 수도사들은,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실질적인 영양을 섭취하면서 지적인 노동의 값을 삼는다. 그러나 수도원장의 식탁은 늘 기름지다. 귀한 손님이 거기에 앉기 때문인데, 원장은 이로써 수도원 땅의 소출과 요리사의 솜씨를 과시하는 것이다.
수도사들의 식사는 관례상 침묵 속에서 진행된다. 꼭 할 이야기가 있으면 손가락 신호로 알파벳을 그려서 전한다. 수련사의 젊은 수도사들은 원장 다음으로 배식을 받는다. 이들의 자리가 바로 원장의 옆 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 원장의 식탁에 앉은 수도사는, 말라키아, 식료계 수도사, 그리고 두 분 노수도사, 즉 우리가 문서 사자실에서 만났던 호르헤 노인과 그로타페라타 사람 알리나르도였다. 최연장자인 알리나르도는 거의 백살이 다 된 노인으로, 몸이 가냘픈 데다 다리까지 절어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면 흡사 송장 같은 느낌을 주고는 했다. 수도원장의 말에 따르면 알리나르도 수도사는, 수련사 시절에 그 수도원으로 들어와 자그마치 80년 동안이나 그곳에 붙박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소상하게 기억하는 노인이다. 원장은, 처음에는 이런 이야기를 조용조용하게 했다. 우리 교단의 회칙이 그렇게 되어 있는 데다가 강단쪽에서 조용하게 성서를 봉독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장의 식탁에서는 약간의 융통성이 있었다. 원장이 자기네 수도원에서 만든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자랑할 때마다 합석한 손님들이 장단을 맞추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포도주를 부어 주면서, 포도주와 관련된 회칙의 조항을 인용했다. 즉, 수도사에게 포도주가 꼭 합당한 음식은 아니나, 우리 시대 수도사들에게 이를 금지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니, [전도서]에서 일렀듯이 술은 현자를 배교자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니 마시되 양은 채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네딕트는 지금의 우리 시대와는 거리가 먼 그 자신의 시대를 <우리 시대>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는 어떤가?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우리 시대의 멜크 수도원 수도사들 중에는 맥주 맛을 즐기는 수도사들도 있다는 말로 <우리 시대> 이야기를 대신하기로 하자. 요컨대 우리는 과하지는 않았지만, 맛을 즐기는 데는 과히 인색하지 않게 마셨다.
우리는 꼬챙이에 꿰어 구운 갓 잡은 돼지고기를 먹었는데, 나는 그들이 요리하는 데 쓴 기름은 동물의 지방이나, 포도 찌꺼기 기름이 아니라, 수도원이 바다를 면한 산기슭 올리브 밭에서 거둔 싱싱한 올리브에서 짠 기름임을 알았다. 원장은 우리가 주방에서 요리 과정을 지켜보았던 닭 요리를 권했다. 원장 식탁의 삼지창은 금속제였다. 당시로는 희귀한 물건이라서 나는 그 물건을 보면서, 두 갈래로 나뉘어 있는 사부님의 안경 다리를 생각했다. 귀족 출신인 원장은, 음식에다 손을 대지 않고 그 삼지창을 써서 큰 접시에서 우리 접시로 음식을 덜어 주었다. 나는 황송스러웠던 나머지 원장의 친절을 사양했다. 그러나 일리엄 수도사는 그 음식을 받아 대단히 귀족스러워 보아는 연장인 삼지창으로 능숙하게 음식을 다루었다. 사부님은 원장에게, <보시라,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라고 해서 모두 무식쟁이에 천민 태생인 것은 아니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산해진미 앞에 앉았는데도(여행 중에는 얻어 걸리는 대로, 닥치는 대로 먹어 왔던 우리가 아니던가) 나는 강단에서 들리는, 성서를 봉독하는 소리 때문에 음식에 정신을 쏟을 수 없었다. 나는 헷갈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호르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까지 쳤다. 나는 한 동안 듣고서야, 강단에서 봉독하고 있는 것은 성서가 아니라 우리 베네딕트 회의 회칙이라는 걸 알았다. 오후에 호르헤 노인이 말끝마다 토를 달고 나서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강단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선지자의 본을 따르게 하소서. 선지자들은, <나는 마음을 정했고, 재 길을 지켜 혀끝으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할 것이며, 입에는 재갈을 물리었고, 자신을 낮추어 벙어리가 되었으며 쓸 말까지도 자제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고 하였나니, 이 구절에서 선지자가 우리에게 침묵에의 사랑은 정당한 말까지도 자제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이 죄에 대한 응징을 피하는 덴 대체 정당한 말을 얼마나 자제해야 하겠느뇨? 어디서건 욕설이나 실없는 말이나 농담을 영원히 물리치되, 후학으로 하여금 이런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
호르헤가 표정을 활짝 밝히며 나지막하게, 그러나 자신 있게 말했다.
'이거야말로 낮에 우리가 했던 토론의 주석이 되겠구료.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웃지 않으셨답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그 말을 받았다.
'그분의 인성이 이를 금하신 적도 없지요. 신학자들이 이르듯이, 웃음이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의 아들은 웃을 수도 있었소만, 그분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호르헤는, 피에트로 칸토레의 말을 인용하고 있었다.
'드시지요, 이는 잘 익었음입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윌리엄 수도사가 앞으로 갓날라져 온 음식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있다가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하다 싶었던지 호르헤가 물었다.
'암브로지오에 따르면 이것은 로렌초 성인이 화형대 위에서 형리들에게 하신 말씀이랍니다. 프루덴티우스도 [순교가]에서 쓰고 있지요...'
울리엄 수도사는, 성자의 말투를 흉내내며 말을 이었다.
'... 따라서 로렌초 성인은, 비록 원수를 능멸하기 위함이었어도 웃을 줄을 아셨고, 우스개 소리를 하실 줄 아셨음이라.'
'거 보세요,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 육체의 파멸에 아주 가깝게 있는 것이 아닌가요?'
호르헤가 코웃음을 치며 응수했다. 아닌게아니라 터무니 없는 말은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원장은 점잖은 몸짓으로, 더 이상 진행시키지 말자는 눈치를 보였다. 식사는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에 모인 수도사들에게 윌리엄 수도사를 소개했다. 그는, 사부님의 지혜로운 통찰력을 칭송하고 사부님의 명성을 다소 과장되게 전한 다음, 원장 자신이 아델모의 죽음에 관련된 조사를 부탁한 것인 만큼 수도사들은 마땅히 그의 질문에 응답하되 동석하지 못한 수도사들에게 널리 알려 행여 손님 대접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지시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수도사들은 종과 성무를 앞두고 교회로 갈 준비를 서둘렀다. 그들은, 다시 두건을 내리고 문 앞에 한 줄로 섰다. 이윽고 정렬을 끝낸 수도사들은 묘지를 지나 북문을 통해 교회로 들어갔다.
우리는 원장과 함께 식당을 나왔다. 윌리엄 수도사가 물었다.
'본관 문을 잠그는 시각이 지금쯤입니까?'
'일꾼들이 식당과 주방을 청소하면 사서가 문을 모두 닫고 안으로 잠근답니다.'
'안에서 잠그다니요? 그러면 잠근 사서는 어느 문으로 나옵니까?'
수도원장은 잠시 윌리엄 수도사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주방에서 자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말을 마친 원장은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떴다. 윌리엄 수도사가 나에게 속삭였다.
'그럴 테지. 나오는 문이 있기는 있지만 나는 알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렸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말았다. 사부님의, 예의 그 명민한 추리력이 발동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부님의 질책이 떨어졌다.
'웃음이 그렇게 헤퍼서 쓰겠느냐? 보고 듣지 않았느냐? 이 수도원 울안에서 헤프게 웃다가 어디 제대로 대접을 받겠더냐?'
우리는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키 높이의 갑절쯤 되는 청동 삼각대개 등잔을 하나 달고 교회 안을 밝히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원장이 고개를 끄덕이지 선창자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주여, 저희를 긍휼히 여기소서...'
원장이 여기에 화답했다.
'저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니.'
모두가 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이라.'
이어서 찬송가 <정의의 하느님, 찾을 때 화답하소서>, <온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나이다>, <주여 축복하소서, 주의 종들을 축복하소서>가 이어졌다.
우리는 회중석에 앉지 않고 중앙의 통로 뒤편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때 우리 눈에, 교회 옆 부속실의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말라키아가 보였다, 사부님이 나에게 속삭였다.
'잘 보아 두어라. 어쩌면 본관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을지도 모른다.'
'묘지 밑으로 말씀입니까?'
'있으면 안 되느냐? 내 방금 그 생각을 했다. 어딘가에 공동이 있을 게야. 수세기 동안 이곳에서 죽어 나간 수도사들을 모두 마당 묘지에 묻었을 리는 없지 않겠느냐?'
'정말 밤에 장서관으로 들어가실 의향이십니까?'
'수도사의 시신과 뱀과 신비스러운 빛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 아드소... 아서라, 말아라. 내 오늘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만, 호기심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고, 아델모가 죽은 경위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너에게 일렀듯이, 우선은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어야겠으나 이곳의 관례도 깔끔하게 지켜 줄 생각이다.'
'이곳의 관례를 지켜 주신다면... 알려고 하시지 말아야 할 일이 아닌지요?'
'진정한 앎이란, 알아야 하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 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부님은 이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무시었다.
제2일
조과
때로는 악마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이 되기도 하는 수탉은 동물 중에서도 가장 미덥지 못한 동물이다. 우리 교단에서는 날 새는데도 울지 않는 게으른 수탉을 믿지 않는다. 각설하고, 특히 겨울철에 해당하는 이야긴데, 조과 성무는 사방이 아직 칠흙 어둠이고 만물이 잠들어 있을 시각에 시작된다. 수도사라면 마땅히 어두울 때 일어나 어둠 속을 믿음으로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례상 수도원에는 찰중 수도사가 있기 마련이다. 대중이 잠자리에 들어도 이 찰중 수도사만은 잠들지 않은 채 밤을 밝히며 운율에 맞추어 [시편]을 낭송함으로써 시간을 재고, 수면 시간이 그만하면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면 신호로 대중을 기침시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그날 새벽에 요사와 순례자 숙사 사이로 종을 울리고 다니는 수도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한 수도사가 독실 사이를 다니며 <주님을 찬양할지라>를 외치고 다니면 그 소리를 들은 수도사들이 일제히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화답하면서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윌리엄 수도사와 나는 베네딕트 회 관례를 따랐다. 우리는 찰중 수도사가 순을 돈 지 약 반 시간 만에 새날 맞을 차비를 하고는 교회로 내려갔다. 수도사들은 교회 바닥에 부복한 채 [시편]을 음송하면서, 스승을 필두로 수련사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모두가 자리에 앉자 찬송가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가 시작되었다. 찬송 소리가 궁륭형 교회 천장으로 오르는데 듣기에 흡사 어린아이들의 옹알이 소리 같았다. 두 수도사가 강단으로 올라가 [시편] <오라, 우리가 야훼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를 낭송하자 대중이 대구로 화답했다. 나는 새로 솟아오르는 믿음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수도사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벽 위로는 예순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법의의 두건 때문에 그 그림자의 임자를 알아보기는 불가능했다. 삼각대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등잔 불빛도 두건 쓴 얼굴을 알아볼 수 있기에는 넉넉하지 못했다. 예순 가닥의 목소리는 제각기 전능하신 분을 찬양했다. 이 감동적인 화음, 천상적 기쁨의 문전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는 그 수도원이 수수께끼와 그 수수께끼를 풀겠다는 은밀한 기도와 음산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곳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과연 이 수도원이 그런 수도원이란 말인가... 이렇게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그 까닭은, 그 시각의 수도원은 바로 성인들의 처소, 미덕의 보금자리, 학문의 그릇, 분별의 방주, 지혜의 탑, 자비의 원류, 힘의 요새, 성성의 향로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여섯 장의 [시편]에 이어 성서의 봉독이 시작되었다. 몇몇 수도사들은 끄덕그덕 졸고 있었다. 입승 하나가 조그만 등잔을 들고 회중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졸고 있는 수도사들을 깨웠다. 만일 한번 깨워 놓은 수도사가 다시 수마에 굴복하고 말면, 그는 그 벌로 번을 돌아야 했다. 또 다시 6편의 시편이 계속해서 봉독되었다. 이윽고 수도원장이 축복을 내리자 주번이 기도를 인도했다. 기도 순서가 되자 모두가 명상에 잠긴 채로 제단 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는데 이 신비로운 정열과 강렬한 내적 평화의 순간은,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에 견주어질 만한 것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마침내 수도사들은, 일제히 두건을 내리쓰고 자리에 앉아 엄숙하게 <주여, 찬미하나이다>을 불렀다. 나 역시, 첫날 수도원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 마음에서 일단 의혹을 말끔히 걷어 주시고 거북한 생각에서 풀려 나게 해 주신 주님을 찬미했다.
... 우리 모두, 불면 날고 쥐면 꺼질 연약한 존재... 이 신심 깊고 학식 있는 수도사들 중에도 악마가 있어서 미움을 퍼뜨리고 적의를 도발하는구나. 허나 이들 모두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는 순간 믿음의 강풍에 흩날리는 연기 같은 존재... 이윽고 그리스도께서 내리셔서 그들 사이에 임재하시리... 나는 기도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날이 새지 않았더라도 조과가 끝나고 찬과가 시작되기까지 수도사들은 독방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수련사들은 그 스승을 따라 강론실로 [시편]을 공부하러 들어갔다. 몇몇 수도사들은 교회에 남아 교회 안의 치장을 손질했으나 대부분은 회랑으로 나와 묵상에 들었다. 윌리엄 수도사도 나도 명상에 잠겼다. 불목하니들은 자고 있었고, 여전히 하늘은 어두었으며, 우리가 찬과 성무에 참례하러 돌아올 때까지도 계속 자고 있었다.
[시편]의 낭송, 특히 월요일에 낭송될 부분인 한 구절이 다시 나를 전날의 공포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 같았다. <내 마음 속의 사악한 죄악이 나에게 이르기를, 제 눈앞에는 하느님이 두렵지 않다고 하나, 그 입이 하는 말이 공정하지 못하더라>는 구절이었다. 이 구절은, 나에게 교단의 회칙이 바로 그날 있을 사건의 불길한 징조로 들렸다. 찬미가 끝나고 [요한의 묵시록]의 봉독이 시작되었지만 내 마음은 개운하지 못했다. 문 위에 있던 양각의 부조, 전날 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리던 그 심란한 환상이 다시 내 머리에 떠올랐다. 응답 성가와 찬양과 창화가 끝나고 복음 찬미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눈을 들어 제단을 보았다. 성가대석 너머로, 그때까지 어둠에 잠겨 있던 채색 유리가 창백한 새벽 빛에 빛나기 시작하고 있엇다. 해가 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는 1시과 성부에서 <성인들의 놀라운 빛이신 하느님>과 <이윽고 빛나는 별은 떠오르고>를 부를 때쯤 뜨게 될 터였다. 미명은, 겨울 새벽빛의 희미한 전령사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것으로 넉넉했다. 미명이 회중석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을 편케 하기는 족했다.
우리는 거룩한 책에 기록된 말씀을 노래했다. 만민을 깨우치기 위해 내리신 말씀을 증언하고 있었을 때는, 샛별이 그 광휘를 거느리고 교회로 쳐들어오는 것 같았다. 여전히 밝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시시각각으로 밝아오는 빛은, [아가]의 말씀과, 신비와, 천장에 활짝 피어 있는 향기로운 백합을 비추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오, 주님, 이 견줄 데 없는 기쁨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나 자신을 타일렀다.
'바보같으니,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그때였다. 북쪽 문밖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불목하니들이 어째서 저희 일이나 하지 않고 이 거룩한 명상을 훼방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들은 수도원장에게 다가가 무어라고 속삭였다. 원장은, 처음에는 성무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듯 조용히 손짓으로 그들을 물리치려 했다. 그러나 다른 불목하니들도 교회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밖에서는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죽었다! 죽었다! 수도사님이었어. 신발 봤지?'
기도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수도원장은 식료계 수도사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고는 먼저 뛰어나갔다. 윌리엄 수도사도 그들을 따라 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수도사 전부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늘이 훤했다. 땅 위에 눈이 쌓여 있어서 경내가 더욱 밝아 보였다. 교회 뒤 담벽 앞에는 전날부터, 돼지 피를 채운 커다란 항아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 항아리 위로 이상한 물체가 불쑥 솟아 있었다. 흡사 재를 쫓으려고, 넝마를 주렁주렁 단 막대기를 두 개 세워 놓은 것 같았다.
막대기가 아닌, 사람의 다리, 머리를 항아리의 돼지 피에다 박고 거꾸로 선 사람의 다리였다.
수도원장은, 얼른 그 몸서리치는 항아리 안에서 시체(산 사람이 그런 자세로 배길 수 있었을 리 없었으니)를 끌어내라고 명했다. 돼지치기 몇 명이 머뭇거리다 항아리로 접근하여, 온몸에다 피를 묻히며 시체를 끌어냈다. 설명에 따르면, 돼지 피는, 뽑아 낸 즉시 잘 저은 다음 기온이 찬 데 내어놓으면 엉기지 않는다고 했으나 시체를 적시고 있는 피는 이미 엉기고 있었다. 피는 법의뿐만 아니라 얼굴에까지 엉겨 있어서 수도사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불목하니 하나가 물 한 양동이를 길어와 시체의 얼굴에다 끼얹었다. 다른 불목하니 하나는 걸레를 가져다 시체의 얼굴을 닦았다. 이윽고 우리 눈 앞에, 전날 오후 아델모의 서안 옆에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리스 학자, 살베메크 사람 베난티오의 얼굴이 드러났다.
수도원장이 윌리엄 수도사 옆으로 다가왔다.
'윌리엄 수도사님, 보시다시피, 이 수도원에는 뭔가가 있습니다. 어른의 지혜가 몹시 필요한 상태입니다. 원컨대 한시 바삐 손을 써 주십시오.'
'이 수도사는, 성무에 참례했습니까?'
윌리엄 수도사가 시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아닙니다. 자리가 비어 있더군요.'
수도원장이 대답했다.
'성무에 빠진 수도사는 이 사람뿐입니까?'
'성무에 빠진 수도사가 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질문을 망설이다가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베렝가리오는 제자리에 있었습니까?'
수도원장은 놀란 얼굴로 사부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몇 가지 이유에서 베렝가리오를 의심했는데, 사부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놀란 듯한 눈치였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리에 있었습니다. 맨 앞 열, 내 오른손이 닿을 만한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까요.'
'당연하겠지요. 그저 여쭈워 본 것뿐입니다. 교회 후진을 지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체는 적어도 모두가 잠든 시각부터 몇 시간 이렇게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불목하니들은 동틀녘에야 일어납니다. 시체가 이제야 발견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시체 다루는 데 이골이 난 사람처럼 그 앞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양동이 속의 걸레를 꺼내어 베난티오의 얼굴을 차근차근 닦아 내었다. 그동안 수도사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는, 시체를 둘러싼 채 수군거리다 수도원장으로부터 주의를 들었다. 잠시 후 수도원 내 수도사들의 위생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세베리노가 들어왔다. 세베리노 역시 사부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두 분의 대화 내용이 궁금했는 데다, 사부님에게 다른 물걸레를 건네주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두려움과 구역질을 참고 두 분 옆으로 다가섰다.
'익사자를 보신 적 있소?'
사부님이 세베리노에게 물었다.
'많이 보았습니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익사자의 얼굴은 이렇지 않습니다. 이 얼굴은 부어 있지를 않습니까?'
세베리노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 항아리에다 처박았을 때, 이 가엾은 수도사는 이미 죽어 있었다는 말이겠군요?'
'누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우리는 시방, 마음이 어딘가 몹시 뒤틀려 있는 자의 소행을 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 이 시신의 어디에 상처나 멍이 있는지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욕장으로 옮겨 옷을 벗기고 씻긴 다음에 조사해 보았으면 좋겠군요. 내 곧 그리로 가겠습니다.'
세베리노가,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아 돼지치기들에게 시신을 옮기게 할 동안 사부님은 수도사와 불목하니들에게, 경내를 새 발자국으로 어지럽게 하면 안될 터이니 돌아갈 때는 반드시 오던 길을 이용하라고 일렀다. 사부님과 나는 이렇게 해서, 시신을 꺼내느라고 온통 핏자국으로 얼룩진 항아리 옆에 둘만 남을 수 있었다. 항아리 주위의 눈은 피로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물이 엎질러진 곳곳에는 눈이 녹아 있었다. 잠시 시신을 눕혔던 곳에도 사람의 몸 형상으로 눈이 녹아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수도사들과 불목하니들이 남긴 어지러운 발자국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뒤죽박죽이로구나. 보아라, 아드소. 눈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믿을 만한 양피지이니라. 사람들은 제 몸으로 저 눈 위에다 글씨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양피지에는, 썼다가는 지우고 썼다가는 지우고 하는 바람에 뒤죽박죽이 되었구나. 그래서 내 눈으로도 이 재미난 글씨를 읽을 수 없을 것 같구나. 이곳과 교회 사이엔 수도사들의 발자국이 무수히 남아 있다. 이곳과 창고, 그리고 외양간 사이로는 불목하니들이 무수히 오갔다. 따라서 온전한 곳은 창고와 본관 사이뿐이다. 어디 가서 살펴보자꾸나. 쓸 만한 게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
'무엇을 찾으시려는 것입니까?'
'희생자가 스스로 항아리에다 머리를 처박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이미 죽은 시체를 끌어다 여기에 처박았을 터... 다른 사람의 시체를 운반하는 사람은 눈에다 발자국을 남기는 법이되 남보다 더 깊고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는 법이다. 찾아보아라. 우리 양피지를 뒤죽박죽으로 만든 오합지중 수도사들 것과 어딘가 좀 다른 발자국이 혹 있는지...'
우리는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아 다녔다. 나는, 하느님 은덕으로, 항아리와 본관 사이에서 조금 이상하게 보이는 발자국을 찾는 데 성공했다. 발자국은, 다른 사람이 오가지 않은 듯한 곳에 찍혀 있었다. 사부님은, 그 발자국이 수도사나 불목하니들의 발자국보다 희미한 것은, 이 발자국이 찍힌 다음에 눈이 더 내린 증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은,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에, 발자국 임자가 무엇인가를 끌로 갈 때 생긴 것인 듯한 흔적이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발자국은 항아리에서 동쪽 탑루와 남쪽 탑루 사이에 있는, 본관의 식당까지 이어져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식당, 문서 사자실, 장서관... 장서관이 또한 번 문제가 되는구나. 베난티오는 본관에서 죽었다. 본관 중에서도 장서관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어째서 장서관이라고 잘라 말씀하시는지요?'
'나는, 살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있다. 만일 베난티오가 식당이나 주방이나 문서 사자실에서 죽거나 살해당했다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어야 해. 무슨 까닭이냐? 그냥 두어도 오늘 아침에는 저절로 발견될 것이 아니냐. 그러나 장서관에서 죽었다면, 어딘가로 옮겨 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장서관에 그대로 두면 시신이 남의 눈에 뜨일 일이 없지. 모르기는 하지만 살해자는 이 시신이 남들의 눈에 띄기를 바랐던 모양이구나. 어쩌면 살해자는 장서관에 중인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면, 살해자는 왜 이 시신에 중인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바랐겠습니까?'
'모르기는 하지만 몇 가지로 가정해 볼 수 있기는 하다. 범인은 베난티오를 죽였지만 반드시 베난티오가 미워서 죽였다고는 볼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아닌 베난티오라는 특정인을 죽였다는 것은, 이로써 어떤 표적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부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글이나 문자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면 그 표적은 대체 무엇을 위한 표적이겠습니까?'
'글세, 아직은 그걸 모르겠다. 허나, 아무 의미 없는 말에도 이로써 드러나는 의미 밖의 의미가 있다는 건 잊어서는 안 된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표적으로 삼으려고 수도자를 죽이다니, 어지간히 극악하질 않습니까?'
'암, <우리는 한 분뿐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라는 주장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수도 있으니 그렇다고 봐야지.'
사부님이 이 말 끝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세베리노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시신을 씻고, 주의 깊게 시신을 관찰하고 온 그는, 시신에 상처나 멍든 곳은 없더라고 말했다.
시약소 쪽으로 걸으면서 윌리엄 수도사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혹, 시약소 실험실에 독약이 있던가요?'
'없는 것이 없는 것이니 독약인들 왜 없겠습니까만, 제 대답은 독약이라는 말씀의 의미에 따라 달라집니다. 소량일 때는 보약일 수 있으나 과복할 경우에는 치명적인 것도 있기는 합니다. 본초 제약사들이 그렇듯이 저 역시 그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처방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합니다. 가령 제 시약소 뜰에서는 쥐오줌풀도 자랍니다. 심장의 박동이 고르지 못한 사람에게, 다른 약초와 함께 달여 먹이면 효험이 있습니다.'
'시신에, 특정 독물은 음용한 흔적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만 대부분의 독극물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는 시약소에 이르렀다. 욕장에서 말끔하게 씻긴 베난티오의 시신은 그곳으로 운반되어, 세베리노의 실험실에 있는 널찍한 탁자위에 안치되어 있었다. 세베리노의 실험실은, 증류기, 유리나 토기류로 만든 도구들이 잔뜩 들어 있어서, 내 보기에는(실제로 본 적은 없고, 따라서 그러려니 하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지만) 흡사 연금술사의 방 같았다. 문 옆 벽에 걸린 긴 시렁에는 색깔이 가지각색인 물건이 담긴 병, 단지, 항아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약재 수집이 대단합니다. 모두 뜰에서 재배한 약초에서 추출한 것들인가요?'
사부님이 물었다.
'그렇질 않습니다. 여기에 있는 것들은 희귀한 약재나, 이 기후대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한 게 대부분입니다. 오래 전부터 세계 각처의 수도사들이 가져다 준 것이지요. 보기 드문 희귀 약재도 있고, 이곳에는 분포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아갈링고 가루는 멀리 카나이에서 온 것입니다. 어느 아랍 인 학자로부터 입수한 것이지요. 인도산 침향도 있습니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덴 선수지요. 살아있는 아리엔트는 기사 회생의 영약, 감각이 마비된 사람을 깨우는 묘약이고, 비소는 마시면 큰일나는 극약입니다. 유리지치는 폐를 다스리는 본초입니다. 곽향초석잠은 두골의 열상을 치료하는 데 쓰이고 유향수지는 폐 질환과 돌림 감기를 다스리며 몰약은...'
'동받박사의 예물 말씀이신지요?'
내가 물었다.
'그렇다네. 허나 지금은 감람과 발삼나무에서 채취하는 이 몰약은 유산 방지에 특효가 있다네. 이 목내이 방부제로 말할 것 같으며, 미라를 해체한 데서 나온 것으로, 영약을 제조하는 데 쓰이고 만달라화는 수면제로 쓰이며...'
'육욕을 일으키게 하는 최음제로 쓰이기도 하지요...'
사부님 말슴에 세베리노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렇게들 말씀하십니다만, 공부 닦는 수도자들 사이에서야 그렇게 쓰일 까닭이 있겠습니까? 이걸 좀 보십시오...'
세베리노는, 단지를 하나 내리면서 말을 이었다.
'...용광로 연도에서 얻은 산화 아연인데, 안질에 특효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요?'
사부님이, 선반에 놓은 돌에 손을 대면서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 말씀이십니까? 몇 년 전에 구한 것으로 무슨 치료 효과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지만 저는 아직 그걸 알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윌리엄 수도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다마다요. 하지만 약은 아닙니다. 보시지요.'
윌리엄 수도사는 법의 안 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어 그 돌 앞으로 가져갔다.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자 주머니칼은 그의 손을 떠나 돌 앞으로 다가갔다. 윌리엄 수도사가 손을 움직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칼날은 내 눈앞에서 분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떨리는 것도 잠깐, 칼날은 희미한 금송성을 내면서 그 돌에 달라붙었다.
'보았지? 이 돌에는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다.'
윌리엄 수도사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어디에다 쓰는 것입니까?'
'쓰이는 데가 많지. 내 다음에 소상하게 일러주마. 세베리노 수도사, 여기에 사람을 죽일 만한 게 있는지 그게 궁금하군요?'
세베리노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 것 같았다. 아니, 잠시가 아니라 내 보기에는 지나치게 오래 뜸을 들이는 것 같았다.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많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독과 약은 종이 한 장 차입니다. 그리스 어로 <파르마콘>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일컫는 말이지요.'
'최근 들어, 없어진 약은 없습니까?'
'... 최근에는, 없습니다.'
'하면, 과거에는?'
'글쎄올습니다. 기억이 안 납니다. 저는 이 수도원에 30년 있었는데, 그중 이 시약소에서 일한 것만도 25년이나 되니까요.'
'사람의 기억이 두루 미치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군요...'
윌리엄 수도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하다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 어제 우리는, 환상을 유발하는 본초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게 대체 어떤 겁니까?'
몸짓이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으로 보아 세베리노는 되도록 빨리 이 화제에서 비켜 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좀 생각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여기에는 별 희한한 물건이 다 있으니까요. 그보다 베난티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좋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도 좀 생각을 해보아야겠소.'
사부님의 응수였다.
1시과
이 끔직한 사건은 수도원 경내의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시체 발견으로 야기된 혼란이 성무 일과까지 뒤흔들어 놓고 만 것이었다. 수도원은 서둘러 수도사들을 교회 안으로 들여보내면서 형제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라고 일렀다.
수도사들의 목소리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주름들이 잡혀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와 나는, 성무 일과 중에는 두건을 내리지 않는 것을 감안하여 그들의 표정을 관찰할 만한 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우리 눈에 베렝가리오의 얼굴이 들어왔다. 창백하고 일그러진 데다 땀으로 번쩍거리는 얼굴이었다.
그 옆에는 말라키아가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으나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양 그지없이 침착해 보였다. 말라키아의 얼굴 옆으로는 역시 침착해 보이는 장님 수도사 호르헤의 얼굴이 있었다. 몹시 짜증스러워하고 있는 듯한 웁살라 사람 베노의 얼굴도 보였다. 전날 우리가 문서 사자실에서 만났던 바로 그 수사학도였다. 우리는 말라키아를 힐끔거리는 그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윌리엄 수도사가 수도사들의 표정을 일별하고 나서 속삭였다.
'베노는 짜증이 잔뜩 나 있고 베렝가리오는 겁을 먹고 있다. 곧 불러서 까닭을 물어 보아야겠구나.'
'지금 그러실 필요가 있을는지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조사관의 일이라고 하는 게 원래가 지난한 일인 게야. 가장 허약한 이를 찌르되, 가장 허약한 순간에 찔러야 한다.'
성무가 끝난 직후, 우리는 교회를 나와 장서관 쪽으로 가는 베노를 따라잡았다. 이 젊은 수도사는, 윌리엄 수도사가 불러 세우자 찔리는 데가 있었던지 긴히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어물쩍 자리를 피하려 했다. 문서 사자실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는, 자신이 수도원장을 대신해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된 것을 상기시키고는 베노를 회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우리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안벽 앞에 앉았다. 이따금씩 본관으로 시선을 던지고는 하면서 베노는 윌리엄 수도사의 질문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얼마간 뜸을 들이면서 베노의 분위기를 관찰하고 있던 윌리엄 수도사가 말문을 열었다.
'대답해 주게. 베렝가리오, 베난티오, 말라키아, 그리고 노수도사 호르헤 노인과 더불어 아델모의 채식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을 때 어떤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어제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호르헤 노수도사께서는, 진리가 담긴 서책을 채식하는 데 요상한 형상을 쓰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난티오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진리를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재담이나 말장난도 그리 큰 허물이 되지 않으며, 재담이나 말장난이 진리를 나르는 수레일 수 있다면 웃음 역시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고 했습니다. 호르헤 노수도사는, 자기가 기억하는 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은유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비슷한 주장을 한 적이 있기는 하나 이 서책이 그 때문에 큰 곤욕을 치렀다고 말했습니다. 즉, 이 [시학]은, 하느님의 뜻이 그래서 그랬을 테지만, 오랫동안 기독교 세계에는 소개되지 못하다가 이교도인 무어 인들의 손을 통해서야 겨우 기독교 세계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퀴나스의 친구분에 의해 라틴 어로 번역되지 않았던가?'
윌리엄 수도사의 말에 베노가 경계를 누그러뜨리고 말을 계속했다.
'제가 바로 그 점을 지적했습니다. 저는 그리스 어가 서툴러 모르베카 사람 기욤의 역몬을 통해서야 겨우 이 서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대로 바로 이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호르헤 노수도사는 이 서책의 의도를 비방하면서, 스타게이로스 사람이 비록 이 서책에서 시를 말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쓸모 없는 가르침>이어서 허구의 세계에나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난티오가, 성서의 [시편] 역시 시인의 작품이 아니냐, 여기에도 비유가 사용되고 있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호르헤 노수도사는 화를 내시더군요. 호르헤 노수도사의 말씀에 따르면, [시편]은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작품이기 때문에 오로지 진리를 전하는 데 필요한 비유법만 쓰여지지만, 이교도 시인들은 거짓을 전하거나 쾌락을 좇기 위해 비유법을 쓴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나니 몹시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화를 내었습니다.'
'화가 난 까닭, 화를 낸 까닭은?'
'화를 낸 것은 제가 바로 수사학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사학도 이기 때문에 이교도 시인들의 작품을 많이 읽습니다. 저는 이교도의 작품이라 해도 기독교의 진지를 보여주고 있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믿습니다. 아무튼,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베난티오는 다른 서책 몇 권의 이름을 들먹거렸고, 호르헤 노수도사는 베난티오의 말에 몹시 화를 내었습니다.'
'어떤 서책의 이름이 등장하던가?'
베노가 머뭇거렸다.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만, 이 일과 그 서책의 제목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있어도 적지 않게 있지. 우리는 지금 서책 사이에서, 서책과 함께, 서책으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납득하려고 이러고 있네. 이런데도 서책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베노는 처음으로 웃었다. 처음과는 달리 표정도 밝아졌다.
'하긴 그렇기도 합니다. 저희들은 서책을 위해서 삽니다. 무질서와 부패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딴에는 가장 귀한 책무를 수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르신께서도 전후 사정을 대략 헤아리실 테지요. 그리스 어에 능통한 베난티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제2부에서 웃음의 문제를 특히 마음을 다하여 다루었다면서, 그렇게 위대한 철인이 서책 한 권을 웃음에 바쳤다면 필시 웃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만치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호르헤 노수도사는, 많은 교부들이 죄악 이야기만으로 책을 썼는데, 이거야말로 죄악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면서도 사악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응수했습니다. 그러자 베난티오는, 자기가 아는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 삶에 바람직한 것일 수 있으며 진리의 도구일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했습니다. 호르헤는 한심하다는 어조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문제의 책을 읽어 보았느냐고 물었고, 베난티오는, 자신이 읽어 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 지도 모르는 책이기 때문에 읽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모르베카 사람 기욤의 수중에도 이 책만은 없었습니다. 호르헤 노수도사는, 그것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는 그것이 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요, 신의 섭리가 헛된 것을 영광되게 함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두 분의 의론을 진정시키고 싶었습니다. 호르헤 노수도사는 불같이 화가 나 있었고, 베난티오는 묘하게 호르헤 노수도사의 성미를 긁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가 아는 [시학]과 [수사학]의 한 부분을 예로 들면서, 여기에 아주 기발한 수수께끼에 관한 대단한 통찰이 엿보인다고 넌지시 말했더니 베난티오가 제 말에 찬성하고 나서더군요. 그 자리에는 이교도의 시를 많이 아는 티볼리 사람 파치피코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런 기발한 수수께끼에 관한 한 아프리카의 시인들을 당해 낼 장사는 없다고 하더군요. 그는 실제로 물고기에 관한, 심포시우스의 시를 인용해 보였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상에는, 맑은 소리를 내는 집이 있다.
그 집 자체는 소리를 내지만,
손님은 침묵하여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집도 손님도 함께 흐른다.>
바로 이 대목에서 호르헤 노수도사는, 이야기를 길게 해보았자 어차피 악마의 이야기일 테니까 예수님께서 가부를 가리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고기를 언급하려면 거짓된 소리 밑에 개념을 숨기지 말고 <물고기>라고 말하면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프리카 인 운운하는 것 부터가 현명하지 못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런데 이때 저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렝가리오가 웃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호르헤가 꾸짖자 베렝가리오는 웃음을 터뜨린 까닭을 설명했습니다. 베렝가리오의 말에 따르면, 아프리카 인의 수수께끼를 듣고 보니, 물고기 이야기만치 쉽지는 않지만 역시 그만큼 재미있는 다른 수수께끼가 하나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베렝가리오의 석명을 듣고 있던 말라키아가 화를 버럭 내면서 베렝가리오의 덜미를 잡아 떠밀어 버리면서 헛 짓 말고 시키는 일이나 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아시겠지만 베렝가리오는 말라키아 사서 수도사의 조수입니다.'
'그 다음에는?'
'호르헤 수도사가 자리를 떠 버리는 바람에 입씨름은 그것으로 끝나고 모두 제 할 일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베난티오와 아델모를 눈여겨보았는데, 두 사람은 베렝가리오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것 같았습니다. 베렝가리오는, 두 사람의 부탁이 들어주기 힘든 것인 양 자꾸만 꽁무니를 빼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두 사람은 그런 베렝가리오를 물고 늘어진다는 인상을 받게 했고요. 그날 밤 저는 베렝가리오와 아델모가 식당으로 들어가기 직전 회랑에서 정답게 무슨 이야긴가를 나누는 걸 보았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이게 전붑니다.'
'자네의 말을 요약하면, 최근에 기묘한 상황에서 묵숨을 잃은 두 수도사가 베렝가리오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는군.'
베노는 기분이 상한 듯한 얼굴을 하고 윌리언 수도사의 말에 응수했다.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자꾸만 캐어 물으시길래 그날 있었던 일, 그날 제가 받은 인상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굳이 제 의견을 듣고 싶어하신다면 말씀드리지요. 베렝가리오는 두 사람에게 장서관에 있는 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르신께서 꼭 조사해 보아야 할 곳이 있다면 그건 장서관입니다.'
'왜 장서관이라고 생각했는가? 베렝가리오는 왜 아프리카 시인 이야기를 하였던가? 아프리카 시인의 시가 더 널리 읽힌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을까?'
'그렇 것입니다. 아니, 그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말라키아 수도사는 왜 화를 냈을까요? 결국, 장서관으로부터 아프리카 시집을 내어 줄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말라키아입니다. 말라키아가 장서관의 사서이니까요. 저도 한 가지는 압니다. 장서 목록을 뒤적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서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문 가운데서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발견할 것입니다. 언젠가 저는 거기에서 <아프리카의 끝>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저에게는, 이 장서 목록에 속하는 서책의 대출을 요구한 적도 있습니다. 제목이 몹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뿐,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라키아는 목록에 그런 표시가 되어 있는 서책은 분실된 것이어서 장서관에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서 올리는 말씀입니다만, 베렝가리오에게 물어 보시되 베렝가리오가 장서관으로 올라갈 때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안 들으신 것으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안 들은 걸로 하지.'
윌리엄 수도사는 베노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던지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베노를 돌려 세운 뒤 나와 함께 회랑을 걸으면서 윌리엄 수도사가 말했다.
'베렝가리오는 이미 도반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베노는, 우리의 주의가 장서관으로 쏠릴 것을 바라고 있는 눈치가 아니더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사부님의 주의가 장서관으로 쏠리기를 바라는 것은 사부님을 통하여 자기가 알고 싶어하는 바를 대신 알아내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일리가 있기는 하다만 그 반대의 가능성도 있지 않겠느냐? 가령 우리의 관심을 장서관으로 돌리게 함으로써 자기가 관심하는 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하는지도 모르지 않겠는냐?'
'그럼 베노 수도사는 어떤 일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까?'
'모르지. 문서 사자실인지, 주방인지, 교회인지, 숙사인지, 시약소인지...'
'사부님께서는 장서관에 관심을 가지신 것으로 압니다.'
'그것은 내가 찾아서 가지는 관심이지 남의 제보를 받았거나 충고를 받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쨌든 장서관을 계속해서 주목해 본 필요가 있다.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 한번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야.'
사부님 말씀은, 사정이 급변한 덕분에 명분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장서관 침임은 물론 위법일 것이지만, 사정이 사정이니만치 베네딕트 교단과 수도원의 규칙에 대해 변명할 여지, 최악의 경우에는 억지를 써 볼 언덕이 생겼다고 판단한 셈이었다.
우리는 회랑을 벗어났다. 미사가 끝났는지 불목하니들과 수련사들이 교회에서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교회 서쪽 벽을 따라 걷다가 베렝가리오를 발견했다. 베렝가리오는 교회 수랑문을 나와, 본관 쪽으로 가려는지 묘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베렝가리오의 매무새는, 교회 안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흐트러져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베노의 경우에 그랬듯이 베렝가리오도 정신 상태가 흐트러져 있을 때를 노려 한번 심문해 보기로, 말하자면 허를 찔러 보기로 작심했던 모양이었다.
'생건의 아델모를 마지막으로 본 게 자네였던 것 같은데?'
베렝가리오를 불러 세운 윌리엄 수도사는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베렝가리오는 이 질문에,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 쓰러질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제가...요?'
베렝가리오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어떤 확신을 가지고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 같지는 않다. 베노로부터 베렝가리오와 아델모가 회랑에서 정담을 나누는 걸 봤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어서 에멜무지로 던져 보았던 질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질문이 정곡을 찔렀던 모양이었다. 베렝가리오의 음성이 몹시 떨렸던 것으로 보아, 그에게는 자기만 아는 아델모와의 마지막 만남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신지요? 저 역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델모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델모를 만난 것은 저뿐만이 아닙니다.'
순간 윌리엄 수도사는 베렝가리오를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말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만에, 자네는 그 친구를 다시 만났어.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자네는 뭔가를 알고 있어. 이곳에서 수도사가 둘이나 죽었다는 걸 자네도 알 테지. 따라서 자네도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어.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말을 시키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 바보가 아닌 자네가 모를 리 없겠지.'
윌리엄 수도사는 틈날 때마다, 비록 자기가 종교 재판과 이단 심판의 조사관으로 있었지만 고문만은 되도록 피하는 주의였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그러나 베렝가리오가 윌리엄 수도사가 그런 분이었다는 걸 알 리 없었다. 말하자면 베렝가리오는 윌리엄 수도사를 오해한 것이었다. 아니, 윌리엄 수도사가 자신이 베렝가리오로 하여금 자신을 오해하게 만든 셈이었다. 어쨌든 윌리엄 수도사의 으름장은 즉석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윌리엄 수도사의 장난기 어린 협박에 베렝가리오가 금방 눈물을 줄줄 흘린 것이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밤에 아델모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죽어 있던가? 벼랑 아래로 떨어져 있던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여기 이 묘지에서 아델모를 만났습니다. 제가 만났을 당시의 아델모는 사람 꼴이 아니었습니다. 유령처럼 이 묘지를 방황하고 있는 아델모는 도무지 산 사람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의 얼굴은 송장의 얼굴과 다를 바 없었고, 눈은 이미 받아야 할 천벌은 다 받은 듯했습니다. 제가 그 다음 날 그의 죽음을 부고 받고, 전날 밤 이 묘지에서 제가 본 것은 아델모가 아니라 아델모의 유령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하고 있을 당시에도, 저주받은 영혼, 혹은 유령의 환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맙소사,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흉측했던지 제 입으로는 차마 그려 낼 수 없습니다.'
'자네에게 뭐라고 하던가?'
'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저주를 받았다. 이렇게 보고 있듯이, 그대 앞에 선 나는 지옥에서 온 자이다, 나는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야 한다!>
... 그래서 제가 소리쳤습니다.
<아델모, 정말 지옥에서 왔더냐? 지옥의 고통이 어떠하더냐?>
... 두려움을 이길 수 없어서 온몸이 마구 떨렸습니다. 종과 성무를 마치고 나온 참인데, 그때 봉독한 성서 구절이 바로 주님의 분노를 그린 구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델모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지옥의 고통을 어찌 필설로 그려 낼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까지 내가 걸치고 있던 궤변의 너울에 마침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이 궤변의 너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 아니면 이 땅의 산 한 덩어리를 짊어진 듯한 무게로 나를 내리누른다. 허나 나는 이 짐을 내려놓을 수 없다. 이 고통은 하느님이 내리신 벌인데 내 죄목인즉 내 허영심, 내 육체를 쾌락의 거처로 믿은 허물, 남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 죄, 내 상상 속에 둥지를 틀고 있던 괴이한 형상을 즐겼다는 것이다. 어이하랴, 이제 이 괴이한 형상은 내 영혼 안에도 전보다 더 괴이한 형상을 슬었으니... 이제 나는 영원히 이들과 살아야 한다. 그대 눈에도 이 법의가 보일테지. 이 법의가 벌겋게 단 숯 덩어리나 불길이 되어 내 몸을 태우고 있다. 이 징벌은, 알면서도 저지른 육신의 정결하지 못한 죄악에서 비롯되어 이제는 불길로 쉴 새 없이 나를 태우는구나. 손을 주게, 내 아름다운 스승이여. 그대와의 만남은 참으로 유익하였으니, 그대와의 만남은 그대가 내게 베푼 여러 유익함 가운데 하나였다. 손을 주게. 내 아름다운 스승이여.>
아델모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자기 입으로 불타고 있다고 하던 바로 그 손입니다. 그때 제 손 위로 그의 땀이 한 방울 떨여졌는데, 어찌나 뜨거운지 그 땀방울이 제 손을 꿰뚫는 것 같았습니다. 이 징표를 며칠간이나 제 손에 남아 있었습니다만, 저는 사람들로부터 이를 숨겨 왔습니다. 아델모는 이 말을 남기고 무덤 사이로 사라졌는데, 놀랍게도 저는 그 다음날, 그의 시신이 벼랑 아래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던 것입니다.'
베렝가리오가 시종 울먹이면서 말을 끝내자 윌리엄 수도사가 물었다.
'왜 아델모는 자네를 <아름다운 스승>이라고 불렀을까? 자네와는 동년배가 아니었는가? 혹 자네가 그 친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 것이 아닌가?'
베렝가리오는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덮고는 털썩 주저앉아 윌리엄 수도사의 다리를 껴안았다. 그의 흐느낌은 통곡으로 변해 있었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두렵습니다. 수도사님, 수도사님께 고백하고 싶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악마가 제 오장육부를 파먹고 있습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베렝가리오를 떠밀었다가 다시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안 된다. 베렝가리오. 나에게 고해를 청하지 말라. 네 입을 여는 것으로 내 입을 봉하려 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어떤 방법을 쓰든 네 입을 열게 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네가 기어이 입을 열지 않으면 내 스스로 그 방법을 강구하고 말겠다. 네가 원한다면 내 자비를 구하는 것은 허락하겠다만 침묵은 구하지 말아라. 이 수도원 안에는 그렇지 않아도 침묵이 너무 흔하다. 그러니 먼저 내 말에 대답하여라. 칠흑 어둠이었다면서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으며 눈과 진눈깨비와 비가 몹시 내리는 밤이었는데 어떻게 그자의 땀방울이 네 손을 태울 수 있었느냐? 그리고 그 밤에 너는 묘지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느냐...'
윌리엄 수도사는 그의 어깨를 잡아 사정없이 흔들었다.
'...어서 말하여라, 이것만은 말하여야 한다.'
베렝가리오는 부들부들 떨면서 대답했다.
'묘지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그의 얼굴을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횃불이... 아니, 아델모에게 횃불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든 횃불의 불빛으로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와 눈이 몹시 내렸을 텐데 그 친구는 어떻게 횃불을 들고 있을 수 있었더냐?'
'종과 성무 직후였기 때문에, 그때엔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눈은 그 뒤에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제가 요사로 가면서 첫 눈발을 보았던 듯합니다. 저는... 숙사로 도망쳤고, 망령 같은 아델모는 반대편으로 갔습니다... 그 위로는 모르겠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더 이상은 묻지 말아 주십시오. 저에게 고해를 허락하지 않으시려면, 더 이상은 묻지 말아 주십시오.'
'오냐, 그럼 가거라. 교회로 가서 주님께 말씀드려라. 너는 사람을 상대로 말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아니면, 야밤에 은밀히 성소에 접근하는 죄를 짓고도 아직 고해하지 않은 모양이니, 입이 무거운 수도사를 한 분 찾아 죄를 고백하도록 하여라. 나중에 내 다시 너를 만나리라.'
베렝가리오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윌리엄 수도사는 두 손을 마주 비비고 있었다. 만족스러워 할 때마다 나오던 그의 버릇이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오냐, 이제야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사부님, 보이기 시작한다고 하셨습니까? 아델모의 망령이 하나 더 나타난 것 같은데요?'
'잘 들어라, 아드소. 내 보기에는 그 망령이라는 게 그리 무서운 망령 같지는 않구나. 더구나 베렝가리오는, 설교자들의 필독서를 읽고 거기에서 몇 구절을 외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 수도사들은 독서량이 지나쳐, 흥분하면 읽은 것을 줄줄 읊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델모가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베렝가리오가 저에게 필요한 말이니까 아델모에게서 들었다고 하는지, 지금으로서는 나도 잘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내가 세운 가정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아델모가 자살했다고 가정해 보자. 베렝가리오는, 아델모가 죽기 전에 몹시 흥분해 있었고, 자기가 저지른 일을 뼈아프게 통한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아델모는, 누군가가 겁을 주었기 때문에 흥분해 있었고 그래서 제 지은 죄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누군가가 아델모에게 지옥의 허깨비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 모른다. 이 지옥의 허깨비 이야기는 바로 아델모 자신이 베렝가리오에게, 완전한 광란 상태에서 해 준 것이지. 아델모는, 교회를 나와 묘지로 향했을 텐데, 교회에서는 무엇을 했을까? 누군가에게 제 의중을 털어놓았거나 고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흥분과 통한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야. 베렝가리오 말에 따르면 아델모는 요사와는 반대쪽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본관 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관일 수도 있고 외양간 뒤의 수도원 외벽일 가능성도 있다. 내 이미 아델모가 투신 자살했다면 투신한 곳은 그곳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 않더냐? 결국 아델모는 폭설이 내리기 전에 그곳에서 투신하고 외벽 밑에서 죽었는데 뒤에 산사태로 이 시체는 북쪽 탑루와 동쪽 탑루 사이로 밀려 내려갔던 것이야.'
'뜨거운 땀방울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인지요?'
'이것은 베렝가리오가 어디에서 듣고 그대로 주워섬겼거나, 흥분 상태에서 상상해 낸 것일 게다. 왜 그러냐 하면, 너도 들었을 테지만 아델모의 회한과 베렝가리오의 회한은 역반복 관계에 있다. 만일에 아델모가 교회에서 나왔다면 분명히 양초를 들고 있었을 것이야. 그렇다면 베렝가리오의 손등에 떨어진 것은 눈물이 아니라 촛농일 수 있다. 그러나 베렝가리오는, 아델모가 자기를 스승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촛농을 훨씬 뜨겁게, 살갗을 태울 만큼 뜨겁게 느꼈던 게야.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아델모가 베렝가리오에게 뭘 잘못 배워 그 때문에 절망과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다고 베렝가리오를 질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베렝가리오 역시 이것을 알고, 아델모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게 했기 때문에, 그래서 아델모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들어 보아라, 아드소, 우리가 저 사서 조수로부터 들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잡아내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사부님의 짐작을 헤아려 보았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저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부님, 수도자는 모두 하느님 자비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사부님께서는, 아델모가 교회에서 고해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왜 아델모는 죄악을 저지르고, 이 죄악보다 더한 죄악으로 자신을 다스렸는지 도무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아델모에게 아주 절망적인 말을 했을 테지. 조금 전에 일렀듯이, 요즘 나도는 설교집을 보면, 아델모 같은 사람을 겁주기에 충분한 구절이 나온다. 아델모는 같은 방법으로 베렝가리오를 위협했을 것이다. 전에는 없던 일이었는데 근자에 들어 설교자는, 대중의 공포를 유발시키고 이로써 신앙심과 믿음에의 열의를 부추기고, 인간의 법과 하느님의 법을 공히 준봉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답시고 공공연히 극언은 물론 끔찍한 위협까지도 망설이지 않고 있다. 우리 시절에는, 그리스도의 성모님의 슬픔을 묵상해야 마땅한 성무 시간에 채찍으로 제 몸을 치면서 고행하는 이른바 편타 고행자의 무리가 횡행하지는 않았고, 오늘날처럼 평신도의 신앙을 연단한답시고 지옥의 불길로 을러메는 일도 없었다.'
'참회하게 하려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아드소, 오늘날만큼이나 참회라는 말이 난무하던 시대도 나는 알지 못한다. 옛날에는, 설교자는 물론, 주교도, 엄격주의파 수도사들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회는 그런 것으로는 유도해 낼 수 없는 것이라고들 믿었다.'
'그렇다면 제3의 시대, 천사 같은 교황이 주재했다는, 페루지아 회의 때는 어떠했습니까?'
'공연한 향수지. 위대한 참회의 시대는 갔다. 그래서 회칙 대헌장이 참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야. 백 년, 이백 년 전에는 엄청난 개혁의 회오리 바람이 불었다. 성자들, 이교도든, 참회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만 해도 화형을 당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합 대중이 저마다 참회를 입에 올리고 있으니 민망하구나. 교황까지도 이 말을 입에 담지 않더냐? 교황청이 말하는 인간의 거듭나기란 믿을 바가 못되는 게다.'
'그렇지만 돌치노 수도사는...'
나는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는 이 이름에 대한 사부님의 의견이 궁금하던 참이어서 감히 여쭈었다.
'돌치노 수도사는 사는 것도 끔찍하게 살았고 죽을 때도 끔찍하게 죽었다. 너무 늦게 왔던 탓이다. 그것은 그렇고...너는 돌치노 수도사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느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쭈운 것입니다.'
'그 사람 이야기는 네게 않는 게 좋겠다. 대신 자칭 <사도회> 혹은 <사도파>이야기나 할 거나? 내, 가까이서 보아서 잘 알지. 슬픈 이야기다. 들으면 네 기분 역시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너는 내가 판단하지 못하니 더욱 유쾌하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사도파 이야기는, 많은 성인들이 가르친 바를 체현한답시고 미친 짓거리를 일삼던 사람들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나 역시 그게 어느 쪽 잘못인지 모르겠다. 나는, 흡사 참회를 가르치는 성자와, 대개는 이 성자들의 수고를 빌어 참회를 실천하는 죄인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두 진영 사이에 놓인 것 같다 싶을 때가 이따금씩 있다. 아니다, 내가 말하려던 것은 이것이 아니야... 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지... 참회의 시대는 갔으니, 참회의 시대에는, 참회자에게 참회의 욕구는 곧 죽음에의 욕구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회해야 마땅할 자들이, 광적이 참회자들을 죽였다. 무슨 말이냐? 죽음을 부르는 진정한 참회를 중지시키기 위해 죽음의 짐을 지운 자들, 다시 말해서 광적인 참회자들을 죽인 자들은, 영혼의 참회를 상상의 참회로 대치시켰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고통과 피를 진정한 참회?l 거울이라고 부르면서, 고통과 유혈이 낭자한 초자연적인 환상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범용한 평신도들의 상상력 안에서는 물론, 때로는 식자들의 상상력 안에서도 이 참회의 거울은 지옥의 고문을 일깨운다. 지옥이 이러이러하니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기는, 공포를 상기시킴으로써 영혼을 죄악으로부터 떼어놓자는 것이다. 그들은 반항의 자리에 공포를 들어앉힐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이제 죄를 짓지 않겠군요?'
'아드소, 네가 무엇을 죄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만 내 대답은 네 대답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수년 동안 몸붙여 산 이 나라 사람들을 헐뜯고 싶은 것은 아니다만, 우상에 능히 성자의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면서도 우상에의 공포가 죄악을 경계하리라고 믿는 게 서푼어치도 안 되는 이탈리아 인의, 서푼어치도 안 되는 미덕의 표본이 아닐까 싶구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리스도보다 성 세바스티아노와 성 안토니오를 더 두려워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개가 그러듯 아무 데나 오줌을 잘 누는데, 네가 만일 한 자리를 정하게 지키고 싶으면 나무 작대기로 그 자리 위에다 성 안토니오의 형상을 그려 놓아 보아라. 그러면 아무도 거기에 오줌을 누지 않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냐? 이탈리아 사람들은 어설픈 목회자들 덕분에 고대의 미신으로 뒷걸음치는 것도 마다히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육의 부활은 믿지 않고 육신의 상해와 불행만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그리스도보다는 성 안토니오가 더 두렵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베렝가리오 수도사는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를 게 없다. 자는 지금 이 반도를 풍미하고 있는 교회와 설교의 분위기를 이르고 있음이야. 이러한 분위기가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다. 신심과 학식 있는 수도사들이 많은 이 수도원까지 퍼져 오지 않았느냐?'
'하지만 죄를 짓지 않으면요?'
나는 사부님에게 매달리고 싶었던 나머지 억지를 부렸다.
'수도원이 세상의 거울 이라면 해답은 자명해졌을 테지.'
'사실이 그렇습니까?'
'세상에 거울이 있으려면 먼저 세상이 모습을 얻어야 할 것이다.'
어린 나에게는 너무나 철학적인 윌리엄 수도사의 결론이었다.
3시과
문서 사자실로 올라가기 전에 우리는 잠시 주방에 들러 목이라도 축이기로 했다. 해 뜬 이후로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셨다. 곧 몸이 풀렸다. 남쪽 화덕은 대장간 용광로처럼 달아 있었고, 가마 안에서는 점심거리 빵이 익고 있었다. 양치기 둘은 갓잡은 양을 굴리며 살을 발라 내고 있었다. 나는, 요리사들 사이에서 살바토레를 발견했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는 예의 그 늑대 입으로 푸짐하게 웃었다. 나는 그가, 전날 밤부터 식탁 위에 남아 있던 닭 요리 부스러기를 그러모아 은밀히 양치기들에게 건네주는 걸 보았다. 양치기들은 엉큼하게 웃으면서 그 닭고기 요리를 양피 저고리 안으로 감추었다. 그러나 요리장 수도사가 그 광경을 보고는 살바토레를 나무랐다.
'이것 보아, 식료계 수도사를 자칭하시면서 수도원 음식을 잘 건사해야지 턱없이 낭비해서 쓰나?'
살바토레가 그 말을 받아 이렇게 응수했다.
'이들은 하느님의 자식이 아닌가 뭐? 예수님께서는, 이 어려운 사람 대하기를 당신 대하듯 하라고 하셨다.'
요리장 수도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더러운 프라티첼로 소형제회, 소형제의 똥 같으니라고! 시방 네가 있는 곳은 이제 거러지 걸승 패거리의 천막이 아니야. 하느님의 어린 양을 고루 먹이려고 노심초사하시는 수도원장이 기어이 자네 죄를 물을 것이야!'
살바토레가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면서 고함을 질렀다.
'나는 소형제의 걸승 패거리가 아니라 <성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사다! 이 더러운 놈, 보고밀 파의 똥 덩어리 같은 작자야!'
'뭐라고, 이런 돼지 같은 자여? 누구를 보고밀이라고 부르느냐? 야밤에 네놈이 희롱하는 갈보나 보고밀이라고 부를 일이지 누구 보고 보고밀이라고 하느냐?'
살바토레는 양치기들을 문 밖으로 내쫓고 나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윌리엄 수도사를 보자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어르신, 제가 속한 교단은 아닙니다만, 어르신께서 나서시어서 저를 좀 변호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발 <프란체스코 회는 이단이 아니다>라고 좀 해주시면 저자에게 큰 교훈이 될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내 귀에다 입술을 댈 듯이 하고 <저 거짓말쟁이, 퉤!>하고 속삭이고는 침을 탁 뱉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요리장 수도사가 급히 달려 나와 살바토레를 문 밖으로 떠밀어 낸 뒤 문을 닫으면서 윌리엄 수도사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수도사님, 저는 귀 교단이나, 귀 교단에 속하시는 신성한 분들을 욕되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걸승 패거리와 가짜 베네딕트 회 수도자들을 욕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금 전 그 사람이 속하던 문중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나, 이제는 자네와 같은 사제 신분이니 마땅히 법도에 따라 예우 해야 할 것이네.'
'하지만 어르신, 저자는 식료계 수도사의 비호를 받는 것을 기화로 이제는 아예 내놓고 식료계 행세를 하면서 제 일 남의 일 가리지 않고 광대뼈를 내밀고 다닙니다. 요컨대 이 수도원이 제 것인 양 설치는 것입니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요.'
'밤에는 어떻게 설치는가?'
윌리엄 수도사가 물었다. 요리사의 표정은, <향기로운 이야기가 못 되어서 구태여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윌리엄 수도사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마시던 우유잔을 비웠다.
나는 호기심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우베르티노와의 만남, 살바토레 및 식료계 수도사의 과거에 관한 소문, 당시에 사람들 입에 유난히 자주 오르내리던 탁발승 무리 및 이단적인 소형제 수도사들, 돌치노 수도사에 대한 사부님의 기이한 침묵... 일련의 영상들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 수도원으로 오는 도중 우리는 두어 차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편타 고행자 수도사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사람들 중에는 이들 대하기를 성자 대하듯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시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편타 고행자 무리는 두엇씩 짝지어, 사타구니만 가린 채 도시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사람들은, 이들이 그런 차림으로 다닐 수 있는 것은 일찍이 수치심이라고 하는 것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모두 가죽 채찍을 하나씩 가지고 다니면서 피가 나도록 이녁의 어깨를 쳤다. 그들은 또 구세주의 고난을 친견이라도 한 양, 그 고난의 순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가 하면, 주님의 자비와 성모의 대도를 눈물로 노래하기도 했다. 대낮에는 물론, 한겨울 한밤중에도 그들은 촛불을 들고 떼거리로 몰려 이 교회 저 교회로 들어가, 양초와 깃발 든 사제를 필두로 제단 앞에 부복하고는 했는데, 이 무리에는 평신도 남녀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귀부인이나 부호들도 있었다. 이럴 때면 종종 참회의 대제전이 연출되고는 했는데, 이 집회가 절정에 이르면 물건을 훔친 자는 그 훔친 물건을 되돌려 주고, 죄지은 자는 그 죄를 고해하는 등의, 반드시 그르다고는 할 수 없는 일도 더러 생겨나고는 했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는 이러한 의식을 좋은 눈으로 보지 않았다. 언젠가는 나에게, 그런 참회, 그런 고해는 진정한 참회나 고해가 아니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날 아침 교회에서 참회의 정화 의식이 끝났을 때 윌리엄 수도사는 나에게, <이거야말로 그리스도라는 정점을 중심으로 설교자가 대중의 신앙을 결집시키는 의식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설교자는, 대중에게 이단적인 참회의 욕구에 굴복하지 않게 한다. 말하자면 그런 참회 의식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참회와 이단적 참회 의식에 차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그 차이를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러이러한 행위에 차이가 있어 보이는 것은, 행위 자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이러한 행위를 판단하는 교회의 자세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베르티노와 사부님 사이에 있었던 입씨름을 되씹어 보았다. 사부님은 분명히, 우베르티노의 신비주의적(그리고 정통파적) 신앙과 이단자들의 왜곡된 신앙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믿는 것 같았다. 사부님은 이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우베르티노를 설득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분명히 다르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베르티노는 사부님을 공격했다. 두 분의 입씨름을 가까이서 보고 내가 느낀 것은, 다르다고 보는 우베르티노에게는 분명히 다른 것이고, 같다고 보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 차이를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사부님은 이단 심판의 조사관 노릇을 그만두었던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부님은 나에게 저 수수께끼의 인물 돌치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문득 내게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사부님은 주님의 도우심을 입지 못했기 때문에 그게 자꾸만 다르게 느껴진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 양자를 다른 것으로 보고 한 입장에서 다른 입장을 단죄하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베르티노와 몬테팔코의 성녀 키아라(죄인에 둘러싸여 있었던)는 분별하는 법을 알았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 양자가 같은 것임을 납득했기 때문에 오히려 성자 성녀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이것, 오직 이것만이 성성이 아닐지... 그렇다면, 견줄데 없이 명민하여 사물의 본질에 관한 한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사물과 사물의 미세한 어긋남이나 미세한 관련성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윌리엄 수도사에게는 왜 이런 능력이 없었던 것일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눈을 들어 보니, 사부님은 여전히 우유잔을 비우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사부님에게 인사를 건네는 소리가 들렸다. 전날 문서 사자실에서 만났던 알레산드리아 사람 아이마로였다. 나에게, 그의 인상은 충격적이었다. 웃는 모습을 바로보고 있노라면, 아이마로라는 사람은 안간의 어리석음과는 죽어도 화해하지 못할 것은 물론이고, 인간도 어리석을 수 있다고 하는 우주적인 비극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윌리엄 수도사에게, 예의 그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윌리엄 수도사님, 벌써 이 광인들의 소굴에 익숙해지신 모양이군요?'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시는가? 나는 이 지극히 점잖고 학식 있는 분들이 모이신 곳을 광인의 소굴이라고 한 적 없네.'
윌리엄 수도사가 점잖게 응수했다.
'옛날에는 그랬습지요. 수도원장이 수도원장 같고, 사서가 사서같이 굴었들 때엔 그랬습지요. 이 윗동네를 보셨겠지요...'
그는 턱으로 본관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 윗동네에 관심하셨으면 보셨겠지요? 장님 눈깔을 한 빈사 직전의 게르만 인 말입니다. 이자는 시체의 눈을 한 스페인 장님의 헛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니 참으로 딱한 노릇입니다. 꼴이 이 모양이니 가짜 그리스도가 아침마다 나타날 수밖에요? 장서관 관리를 제대로 해내기나 합니까? 이들은 죽자고 낡은 양피지만 긁어대었지 새 서책이라고는 제대로 들여놓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위에서 이러고 있을 동안에, 저 아래 도시에서 그들은 행동합니다. 한때 우리 수도원은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되어 가는 꼴을 좀 보십시오. 황제는 우리를 이용하되, 여기에다 자기 친구를 보내어 원수를 맞게 합니다. 저는 수도사님께서 맡으신 임무를 어림으로 헤아립니다. 다른 수도사들이야 입방아에만 부지런할 뿐 그런 걸 보아 낼 눈이 있을 리 없습지요. 각설하고... 그러나 황제의 친구분이 만일에 이 나라의 문제를 제대로 수습할 양이면 이리로 올 것이 아니라 마땅히 도시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곡식을 거두고, 잡아먹을 가축을 기르는데 코를 박고 있지만 저 아래 세간 사람들은 한 필 비단을 한 치 린네르로 바꾸고, 한 치 린네르를 한 자루 양념과 바꾸는 등 부산하게 교역하여 떼돈을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겨우 우리 재산을 지키는 데만 골몰하나 세간의 사람들은 나날이 재산을 불립니다. 서책인들 다를까요? 서책의 문화를 교역의 문화에 견준다면 세간 사람들에게 귀한 책이 많다는 것이야 따로 말씀드릴 필요도 없을 테지요?'
'암, 세간에 새로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는 건 사실이네만, 어째서 이 때문에 수도원장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그야 장서관을 외국인에게 맡기고, 수도원을 온통 장서관 지키는 성채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지요. 이탈리아 땅에 있는 베네딕트 회 수도원은 마땅히 이탈리아 인이 이탈리아 문제를 결정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황 한 위 내어 보지 못한 주제에 대체 이탈리아 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거래를 일로 삼고, 공산품을 넉넉하게 지어 내다 보니 지금은 프랑스 왕보다 더욱 배가 불러 있지를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수도자들도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좋은 책을 만들 줄 압니다. 그러니 마땅히 좋은 책을 만들어 대학에 배포하고, 세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귀를 기울여 수도원의 문화를 살찌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윌리엄 수도사님, 수도사님의 귀한 임무를 빗대어 황제를 비아냥거리자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볼로냐나 피렌체 사람들만큼은 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탈리아와 프로방스를 오가는 순례자 및 상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장서관을 이런 사람들에게 개방하여, 반드시 라틴 어를 아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올라와서 자유로이 이용하게 했어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자기가 무슨 끌뤼니 수도원의 오딜로네 원장이라고, 우리 원장은 죽자고 이 장서관을 틀어쥐고 있고, 덕분에 우리는 저 외국인 무리에게 당하고 있으니 이 아니 한심한 일입니까?'
'하지만 수도원장은 이탈리아 인이지 않은가?'
사부님의 질문에 아이마로는 냉소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곳 수도원장의 안중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머리 속에는 서책 상자만 가득 들어앉아 있지요. 케케묵었다는 것입니다. 대체 원장이 무슨 일은 어떻게 하는지 아시기나 하십니까? 원장은, 교황의 부아를 돋운답시고 이 수도원을 탁발승 패거리(수도사님, 저는 귀 교단의 신성한 회칙을 피폐케한 이단자 무리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의 소굴로 만드는 가 하면,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북방 사람들이면 마구잡이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뭐 필사사도 없고, 그리스어나 아랍 어를 하는 사람도 없답니까? 돈 많고 점잖은 부호의 아들이 피사나 피렌체에는 없답니까? 이들을 교단으로 맞아들여 그 배경의 권력과 금력을 쓰면 안 된답니까? 그러나 한심하게도 게르만 인이 아니면 안 된답니다. 이곳에서는 게르만 인의 인정을 받아야 세간 소식을 귀동냥이라도 할 수 있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수도사님... 아이고, 이놈의 혀, 온당하지도 못한 소식을, 어쩌자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지...'
'수도원 안에 온당하지 못한 일이 있다는 말씀이신가?'
윌리엄 수도사가 우유를 조금 더 다르며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수도사도 사람입니다... 허나 이곳에는 사람 축에 들지 못하는 사람 또한 어떤 곳보다 많습니다. 제가 드린 말씀은 잊지 마셔야 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지금 곧 잊으셔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없는 것입니다.'
'재미있군. 그래 이건 자네 개인의 의견인가, 아니면 자네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수도자들을 대표하는 의견인가?'
'저와 의견이 비슷한 수도자... 많고 많습니다. 가엾은 아델모를 잃고 상심하는 수도자가 많습니다. 허나 심연으로 떨어진 게 아른 사람이었다면, 아델모 이상으로 장서관 주위를 서성거리는 사람들에 대한 저자들의 기분도 별로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망언이 지나쳤습니다만, 진작 아셨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말들이 좀 많습니다. 이제 이곳에, 침묵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다른 데서는 침묵을 귀하게 여기는 게 지나치기는 하지만요. 이곳에 머무는 우리는, 수다를 떨어서도 침묵해서도 안됩니다. 오로지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교단의 황금기에는, 수도원장이 수도원장답지 못할 경우, 독을 탄 포도주 한 잔으로 후계의 자격 여부를 물었답니다. 윌리엄 수도사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수도원장이나 다른 수도사 형제들의 흉을 더 이상 잡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은덕으로, 저는 아직 남을 펌하하는 버릇은 익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도원장이 수도사님께, 저 아이마로, 티볼리 사람 파치피코, 혹은 산탈바노 사람 피에트로의 조사를 의뢰했다면 기분이 덜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장서관 문제를 더불어 논해 본 적이 없습니다. 허나 조금 논하고 싶은 생각이 저에게는 없지 않습니다. 자, 원컨대 이 뱀굴을 백일하에 밝히 벗기십시오. 수많은 이단자들을 화형대로 보내신 분이시니 능히 해 내실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아, 사람을 화형대로 보낸 적이 없네.'
윌리엄 수도사가 발끈하면서 그의 말꼬리를 낚아챘다. 아이마로는, 아이마로답지 않게 사람 좋게 웃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잘해 보십시오, 윌리엄 수도사님. 하지만 밤에는 조심하십시오.'
'낮에는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이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육신은, 낮에는 좋은 약초에 길이 들어 있고, 밤에는 정신을 사악하게 하는 약초에 길이 들어 잇기 때문입니다. 행여 누군가가 아델모를 심연으로 밀어 넣었고, 베난티오를 되지 피 항아리에 처넣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곳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서책을 읽어야 할지, 수도사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옥의 귄세, 혹은 지옥의 사촌인 요술사의 권능이 수도사들의 죄 없는 호기심을 누르는 데 동원되기도 합니다.'
'자네 본초학자 수도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장크트 벤델 사람 세베리노는 좋은 사람입니다. 말라키아가 게르만 인이듯이 그 역시 게르만 인이기는 합니다만...'
아이마로는 이렇게 말하다가 다시 한번, 자기는 남의 허물에 관심이 적은 사람이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그곳을 떠났다.
내가 사부님께 물었다.
'아이마로 수도사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했던 것입니까?'
'모든 것을 말하려 하는데도 언외로는 한마디도 넘쳐 나지를 않는구나. 수도원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어떤 수도원을 막론하고, 수도사들이 주도권은 놓고 추잡한 드잡이 벌이는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너의 친정인 멜크 수도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야. 다만 수련사인 네 눈에 보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너희 나라에서는, 수도원의 주도권은 곧 황제와 언로를 트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황제가 로마까지 내려온다고 해도 거리가 너무나 멀다. 그래... 로마라고 해도 이제 그 도시에는 교황청도 황실도 없다. 보았겠지만, 도시만 있을 뿐이다.'
'저에게도 로마라는 도시는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도시는 제 나라 도시와는 어딘가 다른 도시 같아 보였습니다. 살기 위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결정하기 위한 장소 같다는 인상, 광장에 모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황제나 교황보다는 시장을 휠씬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 눈에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는 수많은 왕국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왕국의 왕은 모두 상인이다. 따라서 돈이 무기 노릇을 한다. 이탈리아에서 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나라나 너희 나라에서와는 전혀 다른 노릇을 한다. 다른 나라에는 돈이라는 것이 있어도 어디까지나 거래를 돕는 역할만 할 뿐 닭, 밀, 낫, 마차 따위의 거래는 거의 물물 거래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어디에 가나 돈이 거래의 수단이 된다. 너도 보았듯이 다른 나라에서는 돈이 물건을 섬기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물건이 돈을 섬긴다. 따라서 사제이든 종단이든 돈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권력에 저항할 때 가난에 호소하여 무리를 규합하는 것은 당연지사. 권력에 저항하는 자들은 대개 돈과 인연이 별로 없는 법이다. 따라서 가난한 자에 대한 선동이 상당한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 또한 당연지시다. 그래서 모든 도시에서 주교나 시장 같은 권력자들은, 가난에 대해 너무 깊은 문제를 건드리며 설교하는 사제를 자기 적으로 보는 법이다. 종교 재판이나 이단 심판의 조사관들은 누군가가 악마의 똥 구린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에서 악마의 냄새를 맡아 내는 것이다. 이제 아이마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겠느냐? 베네딕트 수도회가 황금 시대를 구가할 때, 베네딕트 수도원이라면 의당 목자가 성도의 무리를 제대로 간수하는 곳으로 통했다. 아이마로는 이 전통을 되찾고 싶은 것이야.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바뀌었으니, 수도원이 옛날의 전통을 되찾는 길은(즉 그때의 영광, 그때의 권세를 다시 누리는 길은) 수도원이 성도의 이 새로운 삶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함께 변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이곳의 성도들을 지배하는 것은 무서운 무기도 장엄한 의식도 아닌, 바로 돈의 힘이기 때문에 아이마로는 수도원 건물 전부와 장서관까지 공장, 즉 돈을 버는 공장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것이다.'
'이것과, 수도원에서 있었던 범죄 사건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나도 아직은 모르겠다. 허나 지금은 위층으로 올라가 때이다. 그러니 따라 오너라.'
수도사들이 공부를 시작했을 시각이었다. 문서 사자실에는 침묵이 감돌고 있었으나, 모두가 공부나 일에 열중하는 데서 오는 침묵은 아니었다. 우리보다 조금 먼저 문서 사자실로 올라갔던 베렝가리오는 거북살스러운 얼굴을 하고 우리를 맞았다. 다른 수도사들은 각자 자기 서안 앞에 앉은 체 우리를 돌아다보았다. 모두, 베난티오 사건의 납득에 필요한 실마리 때문에 문서 사자실로 올라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우리의 주의를 끌어 간 곳은, 8각형의 안뜰로 열린 창 아래쪽의 빈 서안이었다.
꽤 추운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문서 사지실의 온도는, 따뜻하다고 해도 좋으리만치 높았다. 문서 사자실이 주방 위에 있어서 주방의 열기를 덤으로 누리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교묘하게도, 주방의 두 빵 가마 굴뚝이, 서쪽 및 남쪽 탑루를 오르는 두 개의 계단층 기둥을 통하게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서 사지실 반대쪽, 그러니까 북쪽 탑루로 오르는 곳에는 계단이 없는 대신 벽난로가 있어서 주위를 쾌적한 온도로 덥혀 주었다. 쾌적한 것은 온도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는 짚까지 깔려 있어서 우리가 걷는데도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따라서 문서 사자실은 밝고 따뜻하고 조용한 곳인 셈이었다.
문서 사자실 중에서 난방이 가장 허술한 곳은 동쪽 탑루 부근이었다. 사실상, 일하고 있는 수도사들의 숫자를 보면 빈자리가 거의 없었는데도, 모든 수도사들이 그 자리에 있던 서안을 기피하려 했음을 알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로 이 자리, 즉 동쪽 탑루로 통하는 계단과 가장 가까운 이 자리만이 아래로는 식당, 위로는 장서관으로 통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그 자리의 난방이 가장 허술한 까닭을 납득했다. 즉, 가장 중요한 통로 근방의 난방을 허술하게 함으로써 거기에 앉는 수도사들의 기를 꺾어, 장서관 접근을 저지하자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었다.
베난티오의 서안은, 커다란 벽난로를 등지고 있었다. 따라서 문서 사자실 안에서는 상석인 셈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문서 사자실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후일 문서 사자실을 자주 출입하면서, 혹은 문서 사자실에서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학승, 필사사, 주서사들에게 추위는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추우면 우필을 쥔 손가락이 마비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평상 기온 아래서라도 6시간 정도 계속해서 쓰고 있으면 손가락에 경련이 이는데, 특히 엄지손가락은 누구의 발에 밟히기라도 한 것처럼 얼얼해지는 법이다. 옛 필사본의 여백에서 볼 수 있는, <하느님, 어둠이 빨리 내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 질 좋은 포도주 한잔이여>, <날씨는 춥고, 방안은 침침하다, 오늘따라 양피지에는 잔털이 왜 이리도 많은가> 따위의 낙서는 다 문서 필사사들의 이러한 고통의 호소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옛말에도 있듯이, 우필 잡는 것은 손가락 세 개라도 일을 하는 것은 온몹이다. 그래서 온몸이 쑤시고 뒤틀리는 것이다.
각설하고, 베난티오의 서안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8각형 뜰을 내려다보며 동그랗게 배치된 다른 서안과 마찬가지로 베난티오의 서안도 비교적 좁았다. 학승용 서안이기 때문이었다. 외벽을 면한 창가의 큼직큼직한 서안들은 대개 채식사나 필사사 전용이었다. 베난티오 역시 독경대를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수도원 장서관에서 원서를 빌어 번역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안 아래엔 나지막한 선반이 있었는데, 칸막이 안에는 양피지 묶음이 있었다. 라틴 어가 씌어진 양피지를 보면서, 나는 베난티오가 최근 들어 번역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번역이 끝난 양피지는, 필사사와 채식사의 손으로 넘어가서 작업이 끝나야 서책 꼴이 되는 법이다. 필사사의 손을 거치지 않은 그의 원고는 읽기가 어려웠다. 그리스 어로 된 책도 몇 권 있었다. 독경대 위에도 그리스 책이 있었다. 베난티오가 번역가로서의 재능을 한껏 펼쳐 보이게 한 원서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리스 어를 몰라 장님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사부님은 제목만 읽고도 루키아노스라는 사람이 쓴, 사람이 당나귀로 둔갑하는 이야기일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아풀레이우스의 비슷한 우화를 떠올렸다. 그러나 아풀레아우스의 책은, 수련사들에게는 접근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금서였다.
우리 곁으로 베렝가리오가 다가왔다. 윌리엄 수도사는 베렝가리오에게 물었다.
'베난티오는 왜 이 책을 번역하고 있었을까?'
'밀라노의 영주가 우리 수도원에 번역을 의뢰했습니다. 반대 급부로 수도원은 여기서 동쪽에 있는 몇몇 농장에서 생산되는 포도주 반입의 우선권을 갖게 됩니다.'
베렝가리오는 멀리 밀라노 방향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고는 바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다고 수도원이 그런 타산적인 반대 급부 때문에 이 일을 맡은 것만은 아닙니다. 밀라노의 영주는, 비잔티움 황제로부터 이 책을 빈 베네치아 총독의 호의에 힘입어 이 책을 접했지만, 워낙 귀한 물건이라 다루기가 몹시 어려웠던 참에 우리 수도원에 번역을 의뢰했던 것입니다. 베난티오가 번역을 끝내면 우리는 두 권의 필사본을 만들어 한 권은 밀라노 영주에게 주고 한 권은 우리 장서관에 비치하게 됩니다.'
'이 요상한 이교도의 우화집을 갖다 놓아도 이 장서관 장서에는 흠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렸다?'
윌리엄 수도사가 짓궂게 물었다.
'장서관은, 진리도 증거하고 허위도 증거하는 곳이오.'
우리 뒤에서 엉뚱한 목소리가 응수했다. 호르헤 노수도사의 목소리였다. 나는 두 번째로, 호르헤 노인이 뜻밖의 순간에, 뜻밖의 장소에서 불쑥 나타나는 데 놀랐다(우리는 뒤로도 종종 이런 식으로 놀라게 된다). 호르헤 노인은, 우리의 눈 밖에서 우리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뜻밖에 호르헤 노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장님이 문서 사자실에 무슨 볼일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도원 경내에 관한 한 호르헤 노인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있을 수 없었다. 요컨대 수도원 경네에서는, 호르헤 노인은 무소 부재하는 셈이었다.
호르헤 노인의 자리는 벽난로 옆에 놓인 의자였다. 그는 그 의자에 앉아, 문서 사자실에서 나는 소리라는 소리는 하나도 빠짐없이 듣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벽난로 옆 의자에 앉은 채, 문서 사자실 바닥의 짚을 소리나지 않게 밟으며 장서관으로 올라가는 말라키아를 향해, <누가 이층으로 가고 있느냐?>고 물은 적도 있다고 한다. 수도사들은 그의 학식을 높이 평가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만나면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단어도 묻고, 성자의 이름이나 동물의 이름 읽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질문을 받으면 그는, 있지도 않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면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느 책 어느 쪽을 읽고 있는 것처럼, 가짜 선지자는 차림새로 말하면 주교와 흡사하나 자세히 보면 입에서 예언 대신 개구리가 나온다거니, 신성한 예루살렘 성벽은 돌로 되어 있다느니, 아리마스포이가 사는 산을 찾으려면 사제왕 요하네스가 통치하던 땅 근방의 지도를 보아야 한다느니, 괴물을 그릴 대는 상징적으로 알아볼 만하게 그리면 그만이지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웃게 만들면 안될 것이라는 등의 조언을 들려주고는 했다.
언젠가는 고전 주해자에게, 번역에 관한 조언을 들려주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때 호르헤 노인은 튀코니우스의 원전은 성 아우구르티누스의 사상을 좇아 해석해야 도나투스 파의 이단에 논파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언젠가는 주석을 놓는 수도사에게, 이단과 교회 분리주의를 구별하는 법을 이로 정연하게 가르치는 걸 본 적도 있다. 뿐만 아니었다. 목록 색인의 무슨 책은 장서관 어디에 있고, 어떤 주장을 논증하려면 어느 어느 쪽을 보아야 하는데, 그 서책은 하느님 뜻에 따라 씌어진 것이니까 사서 수도사가 틀림없이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묻는 수도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도 있다. 그는, 특정 서책의 이름을 들을 경우, 그 책이 서명 목록에 들어 있기는 해도 반세기 전에 생쥐가 쏠아 버리는 바람에 지금쯤은 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솔솔 부스러져 내릴 것이라는 식으로 대답하기도 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장서관의 기억이었고 문서 사자실은 영혼이었다. 수도사들이 문서 사자실에서 잡담이라도 하고 있을라치면 난데없이 그가 나타나, <서둘러, 이 사람들아, 진리를 증언하되, 때가 가까워졌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는 가짜 그리스도의 임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호르헤의 일갈이 날아든 것이었다.
'장서관은 진리도 증거하고 허위도 증거하는 곳이오!'
윌리엄 수도사가 아랫배에다 힘을 넣으면서 응수했다.
'아풀레이우스와 루키아노스를 마법사라고 하는 데엔 토를 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허구라는 너울을 썼을 뿐, 그들의 우화가 우리 인류에게 마땅히 좇아야 할 도덕률을 제시했다는 것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의 우화는, 인간이 자기 허물의 값을 어떻게 치르는가를 가르칩니다. 나는, 나귀로 변한 인간 이야기는 죄악에 빠지는 영혼을 은유하는 이야기라고 믿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호르헤가 뜻밖에도 시답잖게 대꾸했다.
'어제 모두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만, 나는 이제야 베난티오 형제가 왜 희극이라는 문제에 흥미를 느꼈던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아풀레이우스와 루키아노스의 우화는, 고대 희극의 사촌쯤 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테지요. 비극과는 달라서 우화와 희극은, 실존했던 사람의 이야기만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이시도루스가 <시인은, '말하는 것' 자체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이것을 '이야기'라고 명명했다. 다시 말해서 그냥 '생긴 것'이 아니고 '말에서 솟아난 것'이라는 뜻이다.>라고 했듯이, 우화나 희극은 모두 그렇게 솟아나는 것입니다.'
처음에 나는, 왜 사부님이, 이러한 내용의 이야기를, 그것도 학식을 겨루는 듯한 논쟁을 자청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호르헤 노수도사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사부님이 펼치는 일종의 유도 신문이 얼마나 절묘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어제 우리가 토론한 것은 희극의 문제가 아니었지요. 웃음이 과연 온당한 것이냐, 아니면 온당하지 못한 것이냐, 이 문제가 아니었나요?'
호르헤의 반응은 더 이상 시답잖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전날 베난티오가 그 토론을 상기시키자 호르헤 노수도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하던 일을 떠올렸다.
윌리엄 수도사의 기억력이 나만 못할 까닭이 없었다. 그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아, 그랬군요. 나는, 시인의 거짓말과 교활한 수수께끼 이야기를 하신 줄만 알았군요.'
윌리엄 수도사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반응에 호르헤 노수도사가 목청을 높였다.
'암요, 우리는 웃음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요. 희극이라고 하는 이교도들의 행동은 온당한 행동이 못 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희극이나 우화를 입에 담으시는 대신, 천국에 이르는 길을 바로 빗댄 명쾌한 비유법을 쓰셨을 뿐입니다.'
'글쎄요, 내게는 이해가 안 가는군요. 예수님이 웃으셨는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만 나오면 왜 그렇게 쌍수를 들고 논파하려고 하시는지, 나는 이해가 안 갑니다. 나는 웃음이라는 것은 좋은 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웃음은 목욕과 같은 것이지요. 웃음은 사람의 기분을 바꾸어 주고, 육체에 낀 안개를 걷어 줍니다. 우울증의 특효약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목욕이라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아퀴나스 성인 토마스께서도, 비탄을 가시게 하는 한 대증 방편으로 목욕을 권했지요. 과감하게 떨쳐 버릴 수 있다는 걸 보이지 않으면 비탄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악마에게 이용당할 수 있으니까요. 목욕은 흐트러진 기분을 올곧게 세워줍니다. 다만 웃음이란 육체를 뒤흔들고 얼굴의 형상을 일그러뜨리게 함으로써 인간을 잔나비로 격하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잔나비는 웃지 않습니다. 웃음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그것은 그의 이성성의 기호입니다.'
윌리엄 수도사의 응수에 흐르헤 노인의 음성이 높아져 갔다.
'말은 인간이 지닌 이성의 표징일 수 있으나, 안간은 말로써 하느님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있습니다. 인간에개 고유한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 온당한 것이라는 법도 없지요. 웃는 자는, 자기가 웃는 대상을 믿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악한 것을 보고 웃는다는 것은, 악한 것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요, 선한 것을 보고 웃는 다는 것은, 선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드러내는 선의 권능을 부인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회칙에, <어리석은 자는 웃음 속에서 제 목청을 높인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입니다.인간이 지닌 열 번째 미덕은, 웃음이 헤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부님은, 호르헤의 이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퀸틸리아누스는, 웃음이란 위엄을 차리고 칭찬해야 할 자리에서는 삼가되, 그 밖의 경우에는 장려해서 마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 플리니우스는, <인간이기에 나는 때로 웃고 때로 익살을 부리고 논다>고 썼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이교도들이 아닌가요? 우리 회칙은 경거와 망동을 다음과 같은 엄한 계율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내가 읊어 볼까요? <거룩한 곳을 소란케 하는 희롱과 잡담과 웃음은 어느 곳에서든 금하며 이러한 언사에 제자들이 입을 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허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 땅에 넘치자 퀴레네의 쉬네시우스는, 신성이란 능히 희극과 비극을 두루 조화롭게 꿸 수 있는 것이라 했고, 아엘리우스 스파르티아누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일러, 엄격한 제왕이 행신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즐거울 때와 엄숙할 때를 가림에 모자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뿐입니까? 아우소니우스는, 진지한 태도와 익살스러운 여유를 고루 가질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래도 놀라 사람 파울리누스와 알렉산드리아 사람 클레멘스는, 웃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고 했고,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는, 성 마르티누스를 보았으되, 그분이 화를 내고 있거나 웃고 있는 것은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 역시 성인이 기뻐하시더라고 술회한 적은 있습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지혜로워 보이는 모습이지 결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기뻐하신 것은 아닙니다. 성 에프라임은 수도사의 웃음을 엄중하게 경고했는데 그분이 쓰신 [수도사의 행실과 대화에 관하여]에는, 음담과 우스갯소리를 코브라의 독으로 알고 피하라는 구절이 있다는 건 모르셨던가요?'
'허나 힐데베르투스는, <특정의 품격을 지닌 경우에는 농담이 가하나, 이 역시 그 품격에 어울려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또 조금 전에 어른께서 회칙 이야기를 할 때 인용한 [전도서]에는, 웃음이란 바보들의 전유물이기는 하나 조용한 웃음이면 온전한 사람이 웃어도 좋다고 한 구절이 있습니다.'
'정신이란, 진리를 묵상할 때, 선행을 기뻐할 때만 온전한 법입니다. 그리고 진리와 선행은 웃음의 대상이 될 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웃지 않으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웃음은 의혹을 일으킬 뿐입니다.'
'허나 때로는 의혹도 약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아요. 의혹이 일면 사람은 권위자를 찾거나, 아버지에게 묻거나, 박학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면 의혹은 사라집니다. 내 보기에 당신을 빠리의 논리학자들처럼 퍽이나 교리 토론을 좋아하시는 모양이오만, 성 베르나르는 고자가 된 아벨라르를 다룰 줄 아셨습니다. 아벨라르는 아시다시피 성서에 근거하지 않는, 차갑고 생명이 없는 이성의 검증에다 모든 문제를 끌어다 붙이고, 제멋대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이렇지 않다는 식으로 칼질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위험한 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과, 만고의 명언이 된 도리를 비웃는 사람의 웃음을 가려 들을 줄 압니다. 바보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법입니다.'
'호르헤 어른, 아벨라르를 고자라고 하시는 것은 마땅한 말씀이 아닌 것 같군요. 아시다시피 그분은 사악한 자들의 손에 그 지경이 되지 않았던가요?'
'자업자득이지요. 인간의 이성뿐인 제 신앙의 자만 때문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범인은 조롱감이 되었고, 하느님의 신비는 외람되이 드러나고 말았으며(어쩌면 바보들이 드러내려고 한 데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만) 사소한 일에 관한 질문에는 이치에 닿지도 않는 해답이 속출하였으며, 성직자들은 그러한 질문은 드러나기보다는 감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죄로 놀림감이 되었던 것입니다.'
'호르헤 수도사, 내가 그런 말씀에 찬성할 줄 알았던가요? 하느님께서는, 성서가 우리에게 <스스로 결정하라>고 여지를 남겨 둔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의 이성을 발동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혹자가 당신에게 어떤 명제를 믿으라고 할 때 당신은 먼저 그 명제가 과연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의 여부를 가늠합니다. 우리의 이성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을 만족시킨다고 해서 하느님의 이성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혹도 해보고 때로는 부정도 해보면서 유추와 부정에 의한 우리 자신의 이성의 과정으로부터 추론한 것만을 알 뿐입니다. 아시겠지만, 이성에 반하는 불합리한 명제의 권위를 무화시키는 데 웃음을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웃음이란 사악한 것의 기를 꺾고 그 허위의 가면을 벗기는 데 요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 마우루수 이야기를 아시겠지요. 이교도들이 이 성인을 끓는 물에다 넣었을 때 이분은 목욕물이 어째서 이렇게 차냐고 불평했습니다. 이교도 형리는 그 말을 믿고 거기에다 손을 넣었다가 그만 병신이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적들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버리신 순교 성인의 쾌거라고 아니할 수 없지 않습니까?'
'성인의 행적에도, 안방 마님의 입맛이나 어울릴 만한 일화는 얼마든지 있어요. 끓는 물에 들어간 성인이라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입을 삼갔어야 할 것을. 어쩌자고 이교도들을 상대로 치기만만한 장난질을 했을꼬.'
그 말의 꼬리를 잡고 윌리엄 수도사는 호르헤 수도사를 막바지로 몰아갔다.
'바로 그것 아닙니까? 이 이야기가 당신에게는, 이성으로 헤아릴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일 테고, 그래서 당신은 이 이야기를 치기만만한 것이라고 몰아붙입니다. 비록 이성으로 입을 자제하고 있기는 하나 당신은 교묘하게, 나까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엇인가를 비웃고 있어요. 당신은 웃음을 비웃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웃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요?'
호르헤는 몰리면서 짜증스럽다는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
'웃음을 비웃어요? 당신은 시방 나를 한가한 말놀이 마당으로 끌어내고 싶은 모양이나, 그리스도가 웃지 않았다는 것 모르지 않겠지요?'
'글쎄요. 나는 그렇게 안 봅니다. 바리사이 인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을 때, 화폐는 거기에 새겨진 형상의 임자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을 때, 재담하시면서, <너는 반석이다>라고 하셨을 때, 내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당황케 하고 제자들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시려고 우스갯소리를 하신 것 같습니다. 가야파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하셨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재담을 하신 것이지요. 끌뤼니 수도회와 시토 수도호의 대립이 첨예하던 때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끌뤼니 수도회에서는, 시토 수도회를 능멸한답시고, 바지를 입지 않는다고 공격한 것을 아시지요. 우스개가 아니던가요? [바보들의 거울]에서 보면, 당나귀 브루넬로가, 한밤중에 부는 바람이 수도사들이 덮고 자던 담요를 홀랑 걷어 버리면 수도사들은 저마다 사타구니를 내려다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할까, 하고 궁금해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주위에 있던 수도사들이 와락 웃음을 터뜨렸다. 호르헤는 서슬이 시퍼렇게 호령했다.
'당신은 지금 내 수도원 대중들을 얼간이의 축제로 인도하고 있구려! 내 일찍부터, 프란체스코 수도회에는 이따위 얼빠진 객담으로 대중의 환심을 사는 못된 풍조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남의 수도원에서 이렇게 방자할 수는 없소. 이런 속임수에 대해, 내 당신에 수도회 목회자로부터 들었던 말 한마디를 들려드리리다. <그때 사타구니에서 무시무시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호르헤의 호통은 누구의 눈에도 지나친 것으로 보였다. 윌리엄 수도사가 약간 무례했던 것은 사실이나 호르헤는 다른 곳도 아닌 문서 사자실에서 대갈 호령을 한 것이다. 이상한 것은 노수도사가 그런 반응을 보이면서도 우리에게, 문서 사자실에서 나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선배 수도사를 준열하게 나무라던 윌리엄 수도사가 갑자기 태도를 누그러뜨리는 데 다시 한번 놀랐다.
윌리엄 수도사는 호르헤 노수도사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실언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내 입이 그만 내 생각을 배반하고 말앗습니다. 이러한 무례가 내 본의 아니었던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의 이 병통이 한심스럽습니다''
호르헤는 순식간에 달라진 윌리엄 수도사의 말에 <끙>하고 신음을 토했을 뿐 더 이상은 쓰다 달다 하지 않았다. 그의 신음 한 마디는, 사과가 만족스럽다, 허물을 용서한다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입씨름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수도사들도 각기 자기네 서안으로 돌아갔다. 윌리엄 수도사는 다시 베난티오의 서안 앞에 앉아 양피지를 뒤적거리면서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호르헤에게 사과하고 나서 겨우 몇 초를 거기에 앉아 있었을까?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는 그냥 거기에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불과 몇 초... 윌리엄 수도사와 호르헤의 입씨름을 가까이서 듣고 있던 베노가, 필기 도구를 찾으러 온 양 윌리엄 수도사에게로 다가섰다. 베노는 윌리엄 수도사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 욕장 뒤에서 좀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윌리엄 수도사가 먼저 나가면 곧 따라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잠시 망설이고 있다가 곧 말라키아를 불렀다. 장서 목록 상자 옆의 사서 서안 앞에 앉아 있던 말라키아도 윌리엄 수도사가 앉은 쪽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수도원장의 각별한 조사 의뢰가 있었으니만치(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그 특권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누군가를 데려다가 베난티오의 서안을 지키게 하여 그 현장을 보존하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사건 조사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생각에서, 돌아올 때까지 어떤 수도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말을 일부러 아주 큰 소리로 했다는 점이다. 윌리엄 수도사의 목소리가 어떻게나 컸던지 말라키아는 흠칫 놀라 다른 수도사들을 둘러보았고, 수도사들도 일제히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정도였다. 말라키아는, 많은 수도사들 면전에서 그러마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님과 나는 밖으로 나왔다. 뜰을 지나 시약소 건물 앞으로 다가가면서 사부님이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내가 베난티오의 서안 위나 아래에서 뭘 찾아낼까 봐 전전긍긍하는 눈치가 아니더냐?'
'... '
'겁들을 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면 베노 수도사는, 사부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가 아니고, 단지 사부님을 문서 사자실에서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곧 알게 될 테지.'
그 직후에 우리는 베노를 만났다.
6시과
베노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는 듣기 어려운 참으로 민망한 사연이었다. 아닌게아니라 베노는 문서 사지실로부터 사부님을 유인해 내기 위해 할 이야기가 있으니 욕장 뒤에서 만나자고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냥 빈 입으로 돌아서기가 어려워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그는 우리에게 그가 아는 것보다 넓은 차원의 진리의 조각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오전에는 윌리엄 수도사의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하지 못한 것을 시인하고, 기억나는 대로 일러 진실을 알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웃음에 관한 저 논쟁에서 베렝가리오는 <피리느 아프리카에>이야기를 했는데, 이 <피니스 아프리카에>, 즉 <아프리카의 끝>은 장서관 비서의 보고, 특히 수도사들에게는 금서로 되어 있는 서책의 보고였다. 베노는, 명제의 이성적인 명확성에 관한 윌리엄 수도사의 말에 큰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학문에 전념하는 수도사라면 장서관에 소장된 자료를 모두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벨라르를 단죄한 수아송 회의를 비난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학문의 자유에 목말라 있는 한 젊은 수사학도가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가로막는 수도원 규율 앞에서 경험하는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알기로 그러한 호기심은 수도자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것, 따라서 타기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의 태도는 달랐다. 사부님은 베노의 입장을 동정하고 그를 위로해 주었다. 베노는, 자신은 아델모, 베난티오, 베렝가리오 이 세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거기에 어떤 은밀한 사연이 있음을 공개하는 일이 장서관의 앞날에 보탬이 된다면 자기는 떳떳하게 밝힐 수 있다고 말했다. 베노는 또, 필경은 수도원의 수수께끼를 풀어 낼 사부님이, 수도원장을 타일러 지적인 호기심에 목말라 있는 수도사를 탄압하는 폭력을 포기하게 하기 바란다면서,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수도사들은, 그 수도원 장서관이라고 하는 거대한 모태 안에 들어 있는 지식으로 영혼을 살찌울 목적으로 참으로 먼 곳에서 온 사람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자리에서 했던 말로 미루어 베노는 사부님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부님은. 우리가 베난티오의 서안에 손을 댈까 두려웠던 나머지 우리의 주의를 그곳에서 돌릴 목적으로 불러내어 정보를 주고 있다는 것을 모를 분이 아니었다. 베노가 우리에게 준 정보는 대략 다음과 같다.
베노는, 수도원의 많은 수도사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베렝가리오는 아델모에 대해 참으로 입에 담기 민망한 정욕을 품고 있었다고 말했다. 베렝가리오가 아델모에게 품었던 정욕은 어떤 정욕이던가?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이 만판으로 놀아나다가 하느님을 진노케 하여 결국은 불바다 속에서 절멸한 것은 바로 이 정욕 때문이 아니던가? 베노는, 내 나이가 어리다는 것도 잊었는지 자기에게도 그런 정욕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사춘기 시절을 수도원에서 보내는 수련사들이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지키고, 이런 종류의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하여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녁의 뜻과는 달리 이러한 정욕에 얽힌 이야기가 풍편으로 들리는 것이야 어쩌랴. 나 역시 멜크 수도원에 수련사로 입문하고 오래지 않아 어느 나이 든 수도사로부터, 속인이 여성에게 보내는 듯한 이상한 사연이 든 두루마리를 받은 바 있다. 수도사로 서원을 세운 사람이, 여체라고 하는 악덕의 덩어리를 경계하게 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수도사라고 하는 직분은, 바로 이러한 계율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이따금씩 엉뚱한 죄악에 물들고는 한다. 벌건 대낮에, 성가대석에 앉아 있던, 살결 희기가 처녀 같고 얼굴에 수염 한 올 나있지 않은 앳된 수련사를 보면서 가슴을 두근거리던 일을, 내 이 나이가 되었으니 감출 것이 무엇이겠는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수도사의 삶에 평생을 바치게 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때로는 이 거룩한 사명을 너무 무거운 짐으로 생각한 나머지 죄악인 줄 알면서 저지를 수도 있는 허약하고 인간적인 수도사들을 변호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베노의 말에 따르면, 이 베렝가리오라는 수도사는 이 악덕을 좇되 그 방법이 사악하고 치사하기가 그지없다. 베노는 베렝가리오가, 미덕과 품위를 두루 갖춘 자라면 마땅히 타기할 만한 것을 얻기 위해 부당한 수단을 그 무기로 썼다고 말했다.
베노의 말에 따르면, 많은 수도사들은, 베렝가리오가, 미모 수려한 아델모에게 수상한 시선을 던지는 것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던 아델모는 베렝가리오의 그런 칙칙한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부 쌓느 데만 기쁨을 누리며 정진한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참으로 기묘한 것이니, 누가 알았으랴, 아델모는 공부에 전념하고 있는데 아델모의 영혼은 은밀히 이 사악한 유혹에 이끌리고 있었음을...
아델모가 이러한 지경에 이를 즈음 베노는 아델모와 베렝가리오의 대화를 엿듣는다. 아델모가 베렝가리오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자 베렝가리오는,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자기 요구도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베렝가리오가 장서관의 사서 조수였으니, 아델모가 베렝가리오에게 무엇을 부탁했는지는 자명해진다. 아델모는 베렝가리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외견상으로 아델모는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대단히 위험한 모험에 뛰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베노의 생각은 달랐다. 베노는, 오히려 아델모가 덫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아델모는 베렝가리오가 어떤 반대 급부를 요구할 것인가를 알고 장서관과 관련이 있는 청을 넣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아델모는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육욕에 대한 나름의 핑계를 마련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베노는 웃으면서 자기에게는, 마음에도 없는데도 남의 육체적 욕망을 받아들일 만큼 강렬한 지적 욕구가 없는 것이 한심해 보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베노가 윌리엄 수도사에게 물었다.
'물론 몇 년 동안 읽어 보고 싶어했던 서책이 바로 장서관에 있었으니 오죽이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부끄러운 짓을 해도 좋은 것인지요?'
'몇 세기 전, 현명하고 점잖기로 호가 난 실베스테르 2세는, 귀중한 천구의를, 스타티우스나 루카누스의 원고와 바꾸었다네...'
윌리엄 수도사는 이어서 정색을 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 허나 그것은 천구의였지 체면은 아니었네.'
베노는, 이야기에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잠시 자기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을 사죄하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베노의 이야기는 이렇다.
아델모가 죽기 전날 밤, 베노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아델모와 베렝가리오를 미행한다. 종과 성무가 끝난 다음 두 사람은 요사쪽으로 간다. 베노는 그들의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고리를 잡고 한동안 기다린다. 수도사들이 모두 잠들어 요사는 적막한데, 아델모와 베렝가리오는 베렝가리오의 방에 든다. 베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둘의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시킨다. 그런데 돌연 베렝가리오의 방문이 열리면서 아델모가 도망쳐 나온다. 베렝가리오가 그 뒤를 쫓는다. 베노는 방에서 나와 다시 두 사람을 미행한다. 그러나 베노는 두 사람을 놓치고 만다. 한참 뒤에야 베노는, 베렝가리오가 요사 모퉁이에 몸을 감추고 한 수도사의 방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베렝가리오가 바라보고 있는 방은 호르헤 노수도사의 방이다. 그래서 베노는 이렇게 추리한다. 아델모는 자기 죄악을 고해하기 위해 원로 수도사 호르헤의 방으로 들어갔다. 베렝가리오는, 고해라는 것이 누설될 리 없는 성사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혹 자기 비밀이 드러날까 전전긍긍 떨면서 호르헤 수도사의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아델모가 파리한 얼굴로 호르헤 수도사의 방을 나와 교회 쪽으로 간다. 아델모는, 베렝가리오가 따라가면서 말을 거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밤에도 늘 열려 있는 북문을 통하여 교회로 들어간다. 아델모는 기도하기 위해 교회로 들어갔을 거라고 베노는 생각한다. 베렝가리오는 아델모의 뒤를 쫓았으면서도 교회 안으로는 따라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손을 비비면서 묘지를 서성거린다.
이때 베노는, 주위에 제4의 인물이 있는 것을 알고는 몹시 당황한다. 이 제4의 인물 역시 아델모와 베렝가리오의 뒤를 따라 묘지 근방까지 와 있다. 그러나 이 인물은, 묘지 한 쪽의 늙은 참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있는 베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이 제4의 인물은 바로 베난티오이다. 베렝가리오는 베난티오를 보자 묘지의 묘석 사이로 숨는다. 베난티오는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베노는, 이 대목에서 들키면 입장이 난처해진다고 판단하고 요사고 돌아온다. 그런데 아델모는 다음날 벼랑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베노는 이야기 끝에, 자기는 맹세코 거기까지밖에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부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베노는 우리를 떠났다. 사부님은 한동안 욕장 뒤에서 서성거리다가 뜰로 나섰다. 생각에 잠긴 채로 뜰을 산보하던 사부님이 앙상한 관목 위로 허리를 구부리면서 중얼거렸다.
'협죽도로구나. 줄기를 달이면 치질에 특효하다. 저기 있는 것은 아르크티움 라파인데, 뿌리를 삶아 그 물을 습포에 적셔 찜질하면 습진에 탁효가 있지.'
'사부님께서는, 본초학자 세베리노 수도사보다 본초에 더 박학하신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들으신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사부님의 말머리를 돌려 보려고 했다.
'아드소, 네 머리로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허나 네가 물었으니까 내 생각을 말해 주마. 베노가 한 말은 사실인 듯하다. 베렝가리오가 환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만 빼면 베노의 말은 대강 베렝가리오의 말과도 일치하고 있다. 베렝가리오와 아델모는, 우리가 진작부터 미루어 헤아리고 있었듯이 아주 못된 짓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직은 모르고 있다만 베렝가리오는, 무엇인가를, 다시 말해서 아주 은밀한 것을 아델모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아델모는 베렝가리오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그것 때문에 베렝가리오의 요구에 따라 제 순결의 서원과 자연의 순리에 어긋난 짓을 저지르고는 오로지 자기를 사면해 줄 만한 사제에게 이를 고백하히하고 벼르다가 결국 호르헤에게 달려간다. 우리가 겪어 봐서 알았다시피 호르헤는 교리에 여간 엄격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호르헤는 분명히 아델모를 몹시 나무랐을 것이다. 호르헤는 어쩌면, 사면을 거부했거나, 참회로는 닦을 수 없는 죄악아리고 아델모를 몰아세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것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고, 금후로도 호르헤가 우리에게 이야기해 줄 것 가지도 않다. 확실한 것은 아델모가 교회로 들어가 제단 앞에 오체 투지하고 참회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델모는 이러써는 양심의 짐이 덜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때 베난티오가 아델모에게 다가간다. 이들이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도 우리로서는 알 길 없다. 아델모는 베렝가리오로부터 선물로 받은, 혹은 반대 급부로 얻은, 지금으로서는 정체가 불명한 비밀을 베난티오에게 들려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도 알다시피, 아델모는 사제로서는 저질러서는 안될 죄를 지었다. 아델모에게 죄를 지었다는 사실보다 더 큰 비밀이 어디 있었겠느냐? 그러므로 아델모에게, 베렝가리오로부터 얻은 비밀은 더 이상 의미 있는 것이 못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역시 모르는 일이기는 하다만, 베난티오는 베노처럼 강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던 나머지 비밀을 알게 된 것에 만족하고 아델모를 교회에 둔 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홀로 교회에 남은 아델모는 세상으로부터, 모든 사제들로부터,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가갛고는 자살을 결심, 절망에 사로잡힌 채 묘지로 나왔는지도 모른다. 만일에, 묘지에서 아델모를 만났다는 베렝가리오의 말이 사실이라면 베렝가리오는 바로 이런 상태에 빠진 아델모를 만났을 것이다. 아델모는 베렝가리오를 욕하고, 자기가 그렇게 된 책임을 베렝가리오에게 돌리는 한편, 반어법으로 그를 스승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베렝가리오의 이야기는, 환상 어쩌고 하는 부분만 빼면 대체로 정확한 것 같다. 아델모는, 호르헤로부터 들었던 절망적인 이야기를 거기에서 되풀이한다. 여기에서 베렝가리오는 겁을 먹은 나머지 묘지를 떠나고 아델모는 자살을 결행하기 위해 반대쪽으로 간다. 이어서 우리가 알게 된 사건이 발생한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아델모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한다. 베난디오는, 장서관의 비밀이 자기가 믿어 오던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고는 혼자서 이 비밀을 캐어 내고자 한다. 베난티오의 이러한 행위는 누군가의 손에 저지당할 때까지 계속된다. 다시 말해서 이 누군가에 해당하는 자는, 베난티오가 무엇인가를 손에 넣은 뒤에 저지했을 수도 있고, 그 전에 저지했을 수도 있다. 저지... 이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누가 베난티오를 죽였습니까? 베렝가리오입니까?'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말라키아의 짓인지도 모르겠고... 본관을 지켜야 했던 말라키아가 아니면 제3의 인물일 수도 있다. 내가 베렝가리오에게 혐의를 두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베렝가리오는, 자기가 관련되어 있는 비밀이 드러날까봐 몹시 겁을 먹고 있었는데다, 그 비밀이 이미 베난티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라키아아게도 혐의가 있다. 장서관 신성 불가침의 파수꾼인 말라키아는, 누군가가 이 원칙을 범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경우 죽임을 통하여 비밀을 지키는 것도 불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르헤는, 우리의 추리에 등장하는 모든 수도사들의 비밀을 두루 알고 있다. 아델모의 비밀가지 알고 있는 호르헤는, 베난티오가 입수하게 된 비밀이 내 귀에 들어오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호르헤를 가리키고 있다. 장님인 그가 어떻게 사람을, 그것도 장골인 젊은이를 죽일 수 있겠느냐? 죽였다 치더라도 무릎이 귀를 넘는 노인이 어떻게 이 시체를 메고 가서 항하리에 처박을 수 있겠느냐? 글쎄다. 마지막으로, 베노에게는 혐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무슨 까닭일까? 베노는 고백할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내 머리를 맴도는 의문이 하나 있다. 왜 우리는 웃음에 대한 논쟁과 관련된 사람에게만 혐의를 두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범죄의 동기는 어쩌면 장서관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전혀 엉뚱한 데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다. 무엇이냐? 우리는 야밤에 장서관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자면 등잔이 필요하다. 등잔은 네가 구하거라. 저녁 때 주방에 들어가거든 벽에 걸린 놈으로 하나 챙겨 법의 속에 숨겨 두어라.
'훔치라는 말씀이신지요?'
'주님의 영광에 의지해서 잠시 빌어 놓으라는 것이다.'
'그러겠습니다.'
'문서 사자실로 들어가는 게 우선 문제다. 어젯밤 말라키아가 나오는 걸 눈여겨보았느냐? 내 오늘 교회로 들어가 보겠다. 한 시간 뒤면 저녁 식사 시간이다. 식사가 끝나면 원장을 만난다. 너도 나를 따라가게 될 게다. 내 진작, 나와 원장이 이야기를 나눌 경우에는 받아 적을 서기가 하나 있어야겠다고 해두었으니까.'
이 말끝에 사부님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9시과
우리는 교회 제단 앞에 있는 수도원장을 발견했다. 그는 은밀한 곳에서 내어온 제기, 성배, 접시, 성체 안치기, 그리고 십자가 같은 보물을 점검하고 있었다. 거의가 수련사들의 공예품으로 상당히 값진 것으로 보였다. 오전 성무에는 나온 적이 없던 듯한 성물들이었다.
나는 이들 성물을 보는 순간 어찌나 아름답던지 한숨을 숨길 수 없엇다. 정오여서 빛줄기는 교회 창을 통해 푸짐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창뿐만 아니라 교회 정면에서도 빛이 쏟아져 들어와, 하느님을 상징하는, 신비스러운 물결 같은 하얀 빛의 분류를 이루어 제단을 적시고는 교회 안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병과 접시... 이 모든 성물의 재료는 모두 귀물이었다. 황금의 노란 색깔, 상아의 흰 빛깔, 수정의 투명한 형체 속에서 나는 갖가지 색깔... 나는 갖가지 크기의 보석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풍신자석, 자수정,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귀감람석, 줄마노, 홍옥, 벽옥, 그리고 마노 정도는 내 눈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 성물이 오전에도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전에는 기도에 정신을 쏟고 있었는 데다 다른 일을 생각하느라고 거기에 있는데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오전 성무 때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은 성물뿐만이 아니었다. 제단의 전면과, 제단의 세 측면은 완전히 금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제단 전체가, 어느 방향에서 보건 모두 금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혀를 내두르면서 한숨을 거푸 쉬자 수도원장은 미소를 지으며 나와 사부님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 보고 계신 성물과 앞으로 보시게 될 성보는 수 세기 동안의 신앙과 헌신을 증언하는 귀한 유산이며 본 수도원이 떨치는 권능과 성성의 생생한 증거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의 왕후 장상들, 세계의 주교와 대주교들이 이 제단과, 그들의 서임을 증거할 성물을 기중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네들 귄위의 징표인 황금과 귀물을 녹여, 보다 크신 하느님 영광과 하느님 처소인 이 성전에다 바친 것입니다. 비록 오늘 본 수도원은 유감 천만인 이러저러한 사건으로 어려움을 맞고 있기는 하나, 우리는 잠시도 우리 인간의 허약함과 전지 전능하신 분의 힘과 능력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그리스도께서 강탄하신 날이 옵니다. 하여, 우리는 지금 이 성기와 성물을 닦고 있습니다. 그래야 구세주의 강탄이 화려한 집기와 장엄한 예식으로 빛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화려한 집기와 장어한 예식은 이 강탄일에 합당한 것이고, 또 이 강탄일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성물은 성장한 모습으로 강탄일을 맞아야 합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며...'
수도원장은 윌리엄 수도사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는데, 나는 뒷날에 가서야 왜 그가 자기 행동을 그렇게 장황하고 화려하게 변명했는지를 이해했다.
'... 우리는 이 강탄의 예식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 따라서 감출 것이 아니라 드러내어 하느님의 영광과 자비를 널리 보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정중하게 응수했다.
'과연 그렇습니다. 원장 어른께서 주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귀 수도원은 최고의 칭송에 값하는 큰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선지자들의 명에 따라 믿음이 독실한 사람들이 솔로몬 성전의 양이나 송아지나 어린 암소의 피를 받을 황금 항아리와 황금 병과 황금 절구를 바친 관례를 아시겠지요. 따라서 황금 병이나 보석이 창조된 데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귀물은, 그리스도의 피를 받는 데 쓰이는 등, 귀한 일에만 쓰여야 할 것입니다. 거듭 창조될 때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성전의 거룹이나 스랍이 될 것이라면, 그런 귀한 제물을 드리는 제사 또한 더없이 귀중할 것입니다.'
'아멘.'
'많은 사람들은 언필칭, 믿음이 돈독한 마음, 청결한 신앙, 믿음으로 인도받는다는 의지만 있으면 성무는 그것으로 넉넉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합니다. 암,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먼저, 성부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외쳐야 할 터입니다. 허나 나는 하느님을 경외하되, 성물을 통한 외적인 모양새를 통해서도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통하여 구세주를 예배하는 것이 본직적으로 옳고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구세주께서는 무엇 하나 유예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베푸시되, 아낌없이 베푸시기도 마다하시지 않았습니다.'
'귀 문중에서 나오신, 뛰어나신 분들의 의견일 터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 위대한 수도원장 쉬제가 교회 장식에다 쓴 아름다운 글씨가 생각나는군요.'
'지당하신 말씀. 이 십자가를 보시지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만...'
수도원장은 십자가를 하나 집어, 더없이 밝은 얼굴, 지극한 사람이 담긴 눈으로 어루만지면서 말을 이엇다.
'... 여기에는 아직, 제대로 박혀야 할 진주가 빠져 있습니다. 크기가 적당한 진주를 아직 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 안드레아스가 골고다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그 십자가를 장식한 것은 진주와 그리스도의 사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저 위대한 기적의 <시물라크룸>에는 의단 진주가 박혀야지요. 그러나 여기 구세주의 머리 부분에 얹을 금강석은 구해 두었습니다. 아마 이렇게 아름다운 금강석은 구경하시기 어려울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이 신성한 생명 나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의 재질인 신성한 상아의 귀한 부분을 어루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 이 하느님 처소의 아름다음을 두루 누리고 보니, 다채로운 보석의 마력이 나를 외부의 관심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가치있는 명상이, 물질적인 것에서 신성한 미덕의 다양함 위에 있는 비물질적인 것으로, 나를 반성으로 이끕니다. 이제는 더 이상 대지의 진창에만 감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천상적인 순수에서 완전히 놓여나지도 않은, 말하자면 참으로 신묘한 우주의 한 영역을 발견했다고나 할까요? 하느님 은덕으로, 나 자신이 신비스러운 체험을 통하여 이 하계에서 천계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이올시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회중석으로 얼굴을 돌렸다. 천장에서 쏟아져 내린 빛줄기가 그를 비추었다. 그의 모습은 낮별인 태양의 자비 앞에 완연하게 드러났다. 그는 다시 열정을 느꼈던지, 십자가 모양으로 어긋나게 놓아두고 있던 두 손을 거두어 잡았다.
'보이는 것이든 아니 보이는 것이든, 모든 피조물은 빛이 아버지에 의해 존재로 형상화한 빛입니다. 이 상아, 이 마노 뿐만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돌은 빛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은 모두 그들 자신의 비례 규칙에 따라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다른 종과 속과는 그 종과 속이 다르다, 그것들은 자신의 수에 의해 정의된다, 이것은 그 질서 안에서 참되다, 이것은 그 무게에 따라 스스로의 위치를 찾아낸다... 이렇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밀이 내 앞에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나는 이 귀한 물건의 속성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내가 결과의 장대함을 통해서 그 충만함에서 접근할 수 없는 사태의 장대함을 파악해야 한다면, 그리고 분변과 버러지가 그것을 내게 일러줄 수 있다면 황금이나 금강석 같은 귀한 결과로 하느님의 우연은 얼마나 쉽게 이 도리를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이러한 돌을 초월적인 존재로 생각하노라면 내 영혼은 기쁨을 이기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고는 합니다. 지상의 허무 혹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통해서가 아니고 귀한 것에 대한 순수한 사랑, 신이 불러일으킨 것을 통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이야말로 신학에서도 가장 감미로운 부분이 아닐는지요?'
윌리엄 수도사가 더할 나위없이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그가 수사법에서 <아이러니>라고 부르는, 음흉한 어법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수법을 쓸 때는 어법을 예감하게 하고, 논리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윌리엄 수도사는 결코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기의 연설에 취한 수도원장은 윌리엄 수도사의 의도를 뚫어 읽지 못하고 여전히 수도원 재물에 대한 법열에 들뜬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 신학이야말로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하게 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자 하느님께서 현현하시는 자리이기도 하지요.'
'에...헴.'
윌리엄 수도사는 점잖게 마른기침을 했다.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싶어 할 때마다 나오는 사부님의 버릇이었다. 사부님은 화제를 돌리되, 대화의 상대가 이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데 능했다. 즉, 화제를 돌리고 싶을 때마다,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기가 몹시 힘들다는 듯이 마른기침을 연거푸 해대면서 서론을 길게 늘여 진행 중인 대화의 김을 빼버리고는 했다. 내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사부님의 마른기침이 잦으면 잦을수록 본론에 대한 그의 확신은 그만큼 큰 것이 보통이었다.
'에...헴, 그러니까... 이번에 있을 회담과 청빈 논쟁에 대해서도 오늘 이렇게 뵌 김에 짚고 넘어갔으면 합니다만...'
'청빈이라...'
수도원장은 여전히 자기 생각에 취한 채 중얼거렸다. 눈앞의 귀한 보석이 데려다 준 저 아름다운 우주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기가 몹시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덧붙였다.
'...아, 네, 해야지요.'
이로써 두 분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논재으이 내용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게 태반이었다. 나는 두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의미를 꿰어서 헤아리려고 애썼다.
이 책 머리에서 쓴 바 있지만, 두 분의 논쟁이란 이중의 반목, 즉 황제 대 교황, 교황 대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이의 분쟁에 관한 것이다. 황제와 교황이 대립하게 된 내력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고, 교황과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반목하게 된 까닭은, 프란체스코 회가 페루지아 총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청빈에 관한 프란체스코 회 엄격주의파의 주장(교황권을 깡그리 부정하는)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프란체스코 회가 황제 편에 가담하면서 한층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복잡한 이 3파전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장들이 가세하면서 4파전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자체가 엄격주의파와의 의견 일치를 보이기 전부터 베네딕트 회 수도원장들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엄격주의자들을 비호하거나 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이유를, 나로서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엄격주의파는 이 세상의 재물은 일체 부정하는데 견주어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원장들은, 덕성에서 반드시 뒤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재물에 관해서는 엄격주의파와 정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네딕트 회 수도원장들이 재물에 뜻을 두거나 교황의 편에 서는 까닭은, 어쩌면 교황권이 강대해지면 도시나 수도원도 함께 강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 베네딕트 수도회는, 천상과 지상의 직접적인 매개자, 군주에 대한 조언자를 자임하고 속세의 성직자들과 도시 상인들과의 투쟁의 와중에서 몇 세기에 걸쳐 그 권위를 고스란히 지켜 온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여러 차례 걸쳐 들은 바에 따르면 하느님의 백성은 양치기(즉 성직자)와 수양견(즉 군대)과 양(즉 대중)으로 나뉜다. 나는 이런 견해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리 표현될 수 있다는 것도 배워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베네딕트 수도회에서는 이 하느님의 백성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지 않고 두 가지 부류로 나눈다. 즉, 하느님의 백성을, 지상의 일을 관장하는 부류와 천상의 일을 관장하는 부류로 나누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상의 일에 관한 한 성직자와 세속 군주와 민중이라는 3분법이 유효하게 된다. 하면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무엇인가? 수도사는 하느님의 백성과 천상의 일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수도사는 재속하는 성직자들과 달라지게 된다. 말하자면 수도사들은 재소의 양치기(성직자)들과 같지 않게 된다. 베네딕트 회의 견해에 따르면 속세의 양치기들은, 도시의 이해 문제에 끼여들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어리석고 부패한 무리에 속한다. 더구나 도시에 사는 양들은 선량하고 충직한 농민이 아니라 약삭빠르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 상인 아니면 장인들이다. 베네딕트 회의 경우, 평신도에 대한 관리는 재속 성직자들에게 맡겨 버리고, 천상적인 권력의 원천인 하느님과 지상적인 권력의 원천인 황제와 직접 접촉하고 이 관계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한을 수도회에 맞길 수만 있다면 문제는 없어진다. 이렇게 하자면 베네딕트 회 수도원은, 천상적인 권력을 지닌 교황권과 지상적인 권력을 지닌 황제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 때문에 베네딕트 회 수도원장들의 대부분이 도시 정권(재속 성직자와 상인이 결탁한)에 대항하여 황제의 권위를 옹호하는 데 동의하는 한편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염격주의파 수도사들까지 보호해 온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엄격주의파가, 막강한 세력으로 자라나는 교황권에 대항하여 황제권에다 훌륭한 공격의 구실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베네딕트 수도회에서는 그들의 교리 자체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대단히 쓸모 있는 존재로 보고 그들의 피난처 노릇을 해온 것 같다는 것이다.
나의 추론에 따르면, 베네딕트 회 수도원장이, 황제가 파견한 윌리엄 수도사와 손을 잡고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교황청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려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이즈음, 교회의 통일을 위협하는 분쟁의 와중에서, 교황 요한으로부터 누차 아비뇽으로 소환 명령을 받은 바 있는 체제나의 미켈레도 결국은 그 소환에 응하여 출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기가 총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프란체스코 교단과 교황청과의 결정적인 충돌은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체제나의 미켈레에게는, 한 수도회의 최고위직에 남아 있으려면 밉건 곱건 교황의합의를 얻어 내지 않으면 안되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단 프랑스로 불러들인 뒤에 붙잡아 이단으로 몬 다음 이단 심판에 회부하기 위해 교황 요한이 자꾸만 프랑스에서 미켈레를 부른다고 우려했다. 이렇게 우려하는 사람들은, 미켈레가 아비뇽으로 가기는 가되, 그 시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충분한 협상이 있은 뒤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즈음 마르실리오가 한 가지 복안을 마련했다. 마르실리오의 복안에 따르면 미켈레를 교황에게 보내기는 보내되 황제 지지자들의 견해를 전하는 황권의 특사를 뽑아 미켈레에게 딸려 보내자는 복안이었다. 이 복안은, 이렇게 될 경우 미켈레의 신변을 교황 요한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켈레의 입장을 강화시켜 줄 것이라는 의미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서 실현될 수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렇게 속이 보이는 복안을 교황청에서 받아들일 리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때부터 검토된 것이 교황측 사절과 황제의 사절이 한 곳에 모여 사전에 협상하는 자리를 갖자는 복안이었다. 즉, 협상을 통하여 양자의 실세를 서로 인정하고, 차후의 협상을 통해 이탈리아 인이 프랑스로 들어갈 경우에는 교황측으로부터 신변 안전의 보장을 받아내자는 것이었다. 이 첫 모임을 주선하기 위해 선발된 분이 바로 바스커빌의 윌리엄 수도사였다. 윌리엄 수도사는, 아무 일 없이 여행을 끝낼 경우 아비뇽의 교황 앞에서 황제측 신학자의 대표로서 자기 견해를 밝히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여간 위험한 임무가 아니었다. 그 까닭은 오직 미켈레 한 사람만 붙잡아 족칠 마음을 먹고 있는 교황 요한이 황제측 신학자들의 이런 생각을 사전에 알아낸다면 은밀히 이탈리아로 사람을 보내어 윌리엄 수도사의 여행을 방해함으로써 윌리엄 수도사의 아비뇽 방문을 봉쇄해 버릴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수많은 베네딕트 회 수도원을 순유하면서(우리가 수많은 수도원을 돌아보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수도원의 협상 회의장 가능성을 타진한 끝에, 내가 말하고 있는 바로 이 수도원에 이른 것이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이 수도원을 협상 회의장으로 고른 것은 수도원장이 한편으로는 황제에게 충성하면서도 양다리 외교 수완이 대단해서 교황청으로부터도 별로 미움을 받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수도원은 위치상으로도 황제측 신학자들과 교황측 신학자들이 만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형편이, 겉으로 보면 황제측 신학자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교황측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교황측에서는 교황청 사절이 일단 수도원 경내로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그 수도원장의 사법권 아래로 들어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교황측 사절단 중에는 주로 수도사들로 구성될 터이지만 개중에는 재속 성직자도 있을 수 있었다 아무리 교황의 사절이라고 하더라도 재속 성직자들은 수도원장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교황측 사절이 협상 회의장으로 쓰는 수도원 원장의 사법권에 영향을 받는다면 회담은 공정하게 진행되기 어렵다는 것이 교황측의 견해였다. 일리가 있는 견해였다. 만일에 협상의 무대가 되는 수도원의 원장이 황제측을 옹호하고 나서는 경우 교황측 사절들은 설 자리를 잃는 셈이었다. 그래서 교황측은 수도원장의 관할권, 즉 사법권을 용인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수도원장의 사법권을 용인하지 않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즉, 사절의 신변 경호는, 교황이 임명하는 지휘자 휘하의 프랑스 왕실 궁병대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나는 윌리엄 수도사가 보비오에서 교황측 특사와 이 문제를 상의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때의 의제는, 이 궁병대 임무를 어떤 범위로 한정시키는가, 즉 교황측 사절의 경호 임무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을 지니는가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었다. 이때 윌리엄 수도사는 아비뇽의 교황청이 제안한 조건이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고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즉, 무장 궁병대와 그 지휘관은, <어떤 형태가 되었든, 교황청 사절단 전원의 생명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자에 대하여, 폭력 행위를 통하여 사절단의 행동이나 의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자에 대하여> 사법권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러한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당시 내 눈에는 이 합의 자체가, 체면을 지키기 위한 대단히 형식적인 요식 행위로 보였다. 그러나 수도원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터진 시점에서는 문제가 달랐다. 수도원장이 초조해진 나머지 윌리엄 수도사의 옷깃을 잡고 늘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만일 이 두 범죄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절단이 수도원에 도착하게 될 경우 수도원장은 자기네 수도원에, 교황측 사절단의 의견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만한 자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터였으니 수도원장으로서는 속이 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러나 그 전날 수도원자의 속이 타는 정도는 그 다음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바로 그 다음날 수도사의 주검이 둘에서 셋으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기왕에 터진 사건을 미봉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사건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다음 사건이 터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고, 다음 사건이 터질 경우 교황측 사절은 사건 차제를 황제측의 음모로 단정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해결 방안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즉, 교황측 사절단이 산문에 들어오기 전에 읠리엄 수도사가 범인을 찾아내는 방법(수도원장은 사부님에게 사건의 수사를 재촉하는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과 수도원장이 사절단에게 솔직하게 그런 사건이 있었음을 고백하고 협상 기간 동안 수도원 경내의 감시를 철저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두 번째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위험 부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는 하지만 결국, 교황측 사절의 신변에 아무 위협도 없는 상황에서 지레 자기 수도원의 사법권을 프랑스 궁병대에 넘기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수도사와 수도원장은 사태의 추이에 몹시 초조해 하고 있었으나 사건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에는 두 번째 방법을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절단의 도착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만큼 이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수도원장으로서는, 사절단이 도착할 때까지 하느님의 자비를 빌거나 윌리엄 수도사의 두뇌를 믿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 어른, 가능한 방법을 다 써 보기는 하겠습니다. 이 사건이 이번 회담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황청 사절로 뽑힌 분들이라면, 미친 자의 소행, 혹은 폭도의 소행, 혹은 마음의 길을 잃은 자의 소행과, 정신이 말짱한 신학자들이 마주 앉아 의논하는 대사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쯤은 헤아릴 테지요?'
수도원장이 윌리엄 수도사를 바라보면서 반문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이것만은 잊으시면 안됩니다. 아비뇽에서는 틀림없이 소형제파 수도사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분별없는 자들, 범죄로 손을 더럽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단자와 관계가 있는 자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목소리를 떨어뜨릴고 이렇게 덧붙였다.
'...교황측 사절들이 생각하는 소형제파 수도사에 견주면, 여기에서 이런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자들은 벌건 대낮의 안개만큼이나 시시한 존재들일 테지요.'
윌리엄 수도사가 정색을 하고 항변했다.
'당치 않은 말씀, 소형제파 수도사들은, 범죄로 손을 더럽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단자로 보시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페루지아 총회가 정의하는 소형제파 수도사와, 복음서의 뜻을 곡해하여 부를 적대한 나머지 청빈을 일련의 개인적인 보복과 유혈의 광기로 변질시킨 저 이단자들을 동일시하셔서는 안됩니다.'
'윌리엄 형제께서 말씀하시는 그 무리가 베르첼리 주교관과 노바라 지방 산간을 불바다로 만든 것은 오래된 일도 아니고, 그런 피해를 입은 곳이 여기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닙니다.'
'돌치노 수도사와 <사도회> 이야기를 하시는 모양인데요...'
'<사도회>가 아니라 <가짜 사도파>라고 하셔야지요.'
수도원장의 응수가 의외로 만만치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돌치노 수도사와 <가짜 사도파>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셈이었다. 돌치노의 이름이 나오고부터 두 분의 이야기 분위기는 무거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가짜 사도파>라고 하지요. 그러나 소형제파 수도사들은 이들과 무관합니다.'
'그러나 칼리브리아의 요아킴을 섬겼다는 뜻에서는 같습니다. 내 말이 옳게 들리지 않으시다면 우베르티노 형제에게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원장어른,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베르티노가 이제 귀 교단, 귀 문중에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빙그레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우베르티노 같이 대단한 인사가 베네딕트 수도회 문중에 들었으니 마땅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냐, 우베르티노를 비방하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가 아니냐... 이런 의미가 숨어 있었다.
수도원장도 웃었다.
'압니다, 알고말고요, 윌리엄 형제에게도 분명히 말씀드릴것이 있습니다. 교황의 눈 밖에 난 엄격주의파 형제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교단이 워낙 관대하고 오지랖이 넓기 때문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지금 우베르티노 한 사람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격주의파 문중에서 우리 교단으로 들어온 형제들 중에는 그간의 행적이 분명치 못한 형제들, 우리가 앞으로 반드시 그 뒤를 한번 알아보아야 할 형제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소형제파 수도회 법의를 입은 도피자들이라면 형제로 대접하여 모두 받아들였습니다만 뒤에 알고보니 곡절이야 있었겠지만 한동안 돌치노 패거리에 몸담았던 형제들 또한 없지 않더이다.'
'하면 여기에도 있다는 것입니까?'
'여기에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나는 지금 나 자신도 잘 모르고 있는 대단히 위험한 이야기를 입에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에게는 특정한 형제를 비난할 자료가 없습니다. 그러나 윌리엄 형제께서는 지금 이 수도원에서 벌어진 일을 조사하고 있으니만치 이런 것도 알아 두실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 내가 들은 바, 내가 유추한 바에 따르면 식료계 수돗의 분명치 못한 행적에도 미심쩍은 데가 많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단지 미심쩍다는 정돕니다만, 이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바로 소형제 수도사들이 지하로 잠적할 당시 우리 수도원에 몸붙였습니다.'
'식료계 수도사라고 하시면 바라지네 사람 레미지오 말씀인가요? 레미지오가 돌치노 패거리였다는 말씀인가요? 내가 본 보로는 온건한 사람, 청빈과는 거리가 먼 사람 같던데요? 청빈과는 거리가 먼 사람 같아서 귀 수도원의 살림을 맡긴 게 아니던가요?'
'나는 이 사람을 험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도 이 사람 덕을 많이 보고 있고 수도원 전체가 이 사람의 수고를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내 말을 길잡이로 삼으시면 우리 교단 수도사들이, 탁발 수도사들 및 소형제파 수도사들과 어떻게 다른지, 소형제파 수도사들이 어떻게 탁발 수도사들이 되어 갔는지를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될 터이기 때문입니다.'
'어른, 지나친 말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원장 말씀은 정확하지가 못합니다. 우리는 지금 돌치노 무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 소형제파 수도사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형제 수도회가 워낙 종류가 다양한 형제들의 집단이니까 다소 조잡하게라도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소형제파 수도사들을 폭도라고 부르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소형제 수도회의 엄격주의파 무리에게, 하느님의 참 사랑에 감복한 나머지 그것을 경솔하게 실천하려고 한 허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미묘한 점에서 오해받을 소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돌치노 무리에 견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의 항변에 대한 원장의 반응이 의외로 완강했다.
'아니지요. 소형제파는 이단이지요. 소형제파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청빈을 실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회에다 이것을 강요하지 않았던가요? 물론 내가 그들의 이론 자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비뇽 교황청의 오만에 맞섰다는 것만은 나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소형제파 수도사들은 바로 이 이론에서 실천적인 삼단 논법을 끌어내고는 폭동과 약탈과 풍기 문란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았던가요?'
'아니, 대체 어느 소형제 수도회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소형제 수도회 분파는 대개 오십보 백보 아니던가요?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죄악에 물들어 있는가 하면, 혼인을 인정하고, 지옥을 부정하고, 남색을 자행하고, 불가리아 교단이나 드라고 비차 교단의 보고밀 파 이단들 신봉하고...'
'바라건대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듣자니 원장께서는 소형제 수도회, 파타리니 파, 발두스 파, 카타리 파, 불가리아의 보고밀 파, 드라고비차의 아딘자들을 모두 한통속으로 알고 있던 모양입니다그려.'
'한통속이 아니던가요? 모두 이단이라는 뜻에서 한통속이고, 윌리엄 수도사가 이렇듯이 애써 지키고자 하는 제국의 질서, 문명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게 했다는 뜻에서도 한통속이지요. 백년도 더 된 일입니다만, 브레시아 사람 아리날도의 추종자들이 귀족과 추기경들의 집에다 불을 질렀던 것을 기억하시겠지요. 그자들이 누구던가요? 파타리니 파에 속하는 롬바르디아 떨거지들이 아니던가요?'
윌리엄 수도사가, 잠시 생각과 목청을 가다듬고는 대답했다.
'원장, 원장께서는 세상의 사악한 풍물에서 멀리 떨어진, 이 엄장하고도 신성한 수도원에 기거하십니다. 도시의 삶은 원장께서 미루어 헤아리시는 것 이상으로 복잡합니다. 허물과 죄악에도 등급이 있다는 것도 잘 아시겠지요. 나쁜 생각, 가령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에 대해 나쁜 생각을 품는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지요. 이런 사람을 죄인이라고 해도 좋은 것입니까? 베드로의 배반을 유다의 배반에 비겨서는 아니 되지요. 베드로는 용서를 받았지만 유다는 용서를 못 받지 않았던가요? 원장, 파타리니 파와 카타리 파를 같다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배반과 유다의 배반을 같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파타리니 파는 교회의 율법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손된 성직자들의 행동을 개혁하려고 한 이들이 어떻게 이단일 수 있습니까?'
'하면 성사가 부정한 성직자들 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까?'
'파타리니 파에 허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교리의 해석에 잘못이 있었을 뿐, 결코 하느님의 율법을 바꾸려 한 적은 없다는 뜻입니다.'
'로마에서 브레시아 사람 아르날도의 교리를 전파하던 파타리니 파가 폭도들을 교사하여 귀족과 추기경들의 집에 불을 지른 것은, 그러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아르날도는, 로마의 관료들을 이 개혁 운동에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르날도의 제안을 거부했지요. 우리는 그 폭력 사태의 책임이 아르날도에게 있다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만, 사실은 아르날도가 가난한 자, 버려진 자들의 지지를 얻은 것뿐, 사태의 책임 자체가 아르날도에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부패한 도시의 개혁을 부르짖는 아르날도의 호소에 폭력과 분노로 응답했을 뿐입니다.'
'도시라고 하는 것이 원래가 그 모양인 게지요.'
'도시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하느님의 백성이 사는 곳입니다. 원장이나 나는 바로 이러한 백성들을 이끌어야 하는 목자가 아닙니까? 그렇기는 합니다. 도시라고 하는 곳은, 돈 많은 성직자들이 가난한 자, 배고픈 자들에게 미덕을 가르쳐야 하는 참으로 말 많은 곳입니다. 파타리니 파 사건은 이런 상황의 산물입니다. 그런 동아리가 생겨났다는 것은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일일지언정 지탄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카타리 파는 다릅니다. 카타리 파는 교회의 교리밖에 있는 동방의 이단입니다. 그들이 죄악을 저지르는지, 혹은 저질렀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순교를 부정하고 지옥을 부인한다는 것은 나도 잘 압니다. 글쎄요, 그들의 종교적 신념이 그래서, 어쩌면 저지르지도 않는 수많은 죄악을 저지른 것인양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이나 아닐는지요.'
'어이가 없군요. 윌리엄 형제 같은 분이, 파타리니 파와 가타리 파가 한통속이 아니라고 하시다니... 똑같은 악마적 현상의 두 가지, 아니,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얼굴 중의 두 얼굴이 아니라고 하시다니...'
'내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나는 지금 교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는, 이러한 이단적인 교파들이 무식한 민중의 계층에서, 우리는 우려합니다만,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째서 그러한 성공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들이 무식한 사람들에게, 기왕에 살아온 것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무식한 사람들 중에는 교리를 아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내 말은 무식한 사람들일수록 파타리니 파, 카타리 파, 엄격주의파를 혼동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원장, 무식한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들의 분별력이나 학식을 그리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질병과 가난, 그리고 무지로 인한 눌언과 더불어 삽니다. 그래서 그들 중 상당수에게는, 이단자들의 동아리에 끼는 것이, 그들의 절망을 외치는 하나의 수단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직자에게 완벽한 삶을 요구하기 때문에 추기경의 사저에다 불을 지를 수도 있는 겁니다. 물론 성직자가 가르치는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불을 지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읽어 내야 하는 것은, 이 땅에 이미 지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저질러진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목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불가리아 교회와 리프란도 사제의 추종자를 구분하지 못하듯이 제국의 성직자들과 이들의 추종자들 역시 엄격주의파와 이단을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국이, 그 반목하는 세력과 싸우기 위해 대중이 지니고 있는 카타리적 성향을 자극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이더이까? 내 f말은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기로 더욱 위험한 것은, 이 세력이 위험하고 불안하고 무식하다고 해서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대에 세우는 일입니다. 원장,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맹세코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착한 삶의 길을 걷는 사람들, 청빈과 정결의 교리를 따르던 사람들이 단지 주교의 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속권에 넘겨지는 것을 무수히 본 사람입니다. 제국의 안위를 위한답시고 자유로운 도시를 위한답시고 무고한 이들에게 혼음과 수간과 파렴치한 죄악의 허물을 들씌웁니다. 내가 알리고 이러한 죄값의 임자는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무식한 사람들은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와 같습니다. 적대 세력과의 분쟁을 야기시킬 때 이용되고는, 이용이 끝나면 희생된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원장의 눈가로 심술궂은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 하면, 돌치노 수도사와 그의 미친 조개들, 게라르도 세가렐리와 피에 굶주린 무리들은 사악한 카타리 파라는 것입니까, 고결한 소형제파라는 것입니까, 수간을 일삼는 보고밀 파라는 것입니까? 윌리엄 형제, 이단에 너무 박식해서 그런지 내 눈에는 이단자로 보아는 윌리엄 형제께서 좀 가르쳐 주시지요. 진리는 어디에 있답니까?'
'진리는, 때로 없을 수도 있습니다.'
'설마 윌리엄 형제께서 이단과 참 교파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나에게는 적어도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 하느님 백성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이단입니다. 내가 황제에게 믿음을 두는 것은 제국이 이 질서를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황을 곱지 않게 보는 것은, 교황이 상인과 결탁한 도시의 주교들 위에 군림할 줄만 알았지, 더 이상 질서를 지켜 줄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세기 동안 이 질서를 지켜 왔습니다. 이단에 관해, 나에게 원칙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단 혐의를 받고 있는 베지에 시민들을 놓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속권의 질문에 시토 회의 수도원장 아르노 아말리끄가 했던 대답이 그것입니다. 즉, <죽여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알아보신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눈길을 떨어뜨리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스스로 그 침묵을 깨뜨렸다.
'베지에 시를 함락시킬 당시 우리 군대는 귀천도, 남녀도, 나이도 가리지 않고 2만 명을 베어 죽였지요. 학살을 끝내고 도시를 유린하고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다시 거기에 불을 질렀지요.'
'성전은 결코 전쟁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성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체 내가 여기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지금 이탈리아를 그렇게 불바다로 만들고 싶어하는 루드비히 황제의 권리를 지키려고 여기에 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이상한 동맹군의 동아리가 된 셈이군요. 엄격주의파 제국의 이상한 동맹, 제국과 제 백성의 주권을 찾아 주려는 마르실리오와의 이상한 동맹... 그리고 이상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원장과 나와의 이상한 동맹... 허나 우리는 두 가지 임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회담을 성공시키고 살인범을 뒤져 내는 것이 그것입니다. 평화롭게 나아갑시다.'
수도원장도 손을 내밀었다.
'윌리엄 형제, 나에게 평화의 입맞춤을, 윌리엄 형제같이 학식 있는 분과 함께하면 끝없이 신학과 도덕을 의논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빠리의 학자들처럼 남을 비방하는 것을 재미로 삼는 짓은 절대로 맙시다. 윌리엄 형제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앞에는 대사가 기다리는 만큼 마땅히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여기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문맥에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일어난 사건과, 조금 전에 내가 언급한 여러 교단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교단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우리가 아비뇽 측의 의혹을 일소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장께서, 나의 조사에 도움을 주신 것으로 이해해도 좋은 것이군요? 저간의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라면 수도사들의 이단 이력을 들추는 일도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할 거라는 말씀이겠군요?'
수도원장은 말없이 윌리엄 수도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텅 빈 표정이었다.
'이 슬픈 사건의 조사관은 바로 윌리엄 형제입니다. 터무니없는 의심을 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의심하는 것은 윌리엄 형제의 권리입니다. 여기에 있는 나는 일개 사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 문중의 어떤 수도사에게 혐의가 갈 수 있다면 이 건강하지 못한 나무는 자르시되 뿌리까지 잘라 주시기를 바립니다. 내가 아는 것은 형제도 아십니다. 바라건대 내가 모르는 것은 형제께서 지혜로 밝히 보여 주십시오.'
그는 이 말 끝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교회를 떠났다.
윌리엄 수도사가 눈살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어렵게 꼬이는구나. 우리는 원고를 쫓았다. 호기심이 지나친 수도사에게 관심이 가더니, 그 다음에는 욕심이 지나친 수도사에게 관심이 가고... 이제 별별 이야기라 다 나오니 갈수록 태산 아니냐? 뿐이냐? 식료계 수도사도 등장하고... 저 괴물 단지 같은 살바토레는, 식료계 수도사와 함께 이 산으로 올라왔다지? 아니다, 아니다, 우선을 좀 쉬도록 하자. 밤에는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까.'
'사부님, 아직도 장서관에 들어가시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첫번째 단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포기라니, 당치 않는 말이다. 단서에 첫번째, 두 번째가 있을 수 있느냐, 원장이 식료계 수도사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잠시 헷갈렸던 것뿐이다.'
그는 순례자 요사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조금 전에 한 말을 계속하듯이 중얼거렸다.
'정리해 볼거나? 수도원장은, 젊은 수도사들 사이에서 건강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고 나에게 아델모의 죽음에 관한 진상 조사를 의뢰했다... 헌데, 베난티오의 죽음이 또 하나의 문제를 던진다. 수도원장은, 이 사건 해결의 열쇠가 장서관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한사코 장서관만은 조사의 대상으로 삼지 말았으면 한다. 그래서 원장은 내 관심을 본관 장서관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식료계 수도사 레미지오 이야기를 한 것일 게다.'
'하지만 원장님께는 장서관 조사를 바라시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듣고도 모르느냐? 처음부터 원장은 장서관을 신성 불가침이라고 하지 않더냐? 이유가 있을 테지. 아델모의 죽음은 모르겠다만 적어도 베난티오의 죽음에는 원장 자신이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이야기가 확대되면 자기가 다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라. 원장은 진실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일까... 적어도 내 손에 의해 밝혀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 것일까...'
'그러면 장서관이, 하느님께서 버리신 곳, 하느님게서도 편하시지 못할 곳이라는 말씀이신지요?'
맥이 빠지는 기분에서 내가 여쭈었다.
'하느님 거하시기에 편할 곳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느냐.'
윌리엄 수도사가 그 큰 키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반문했다.
사부님이 숙사로 드신 뒤 나도 자리에 누웠지만 마음이 무거워 견딜 수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세계로 내보내신 선친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배우기에 벅찬 것들이 너무 많은 세계가 싫었다.
<가련한 이 몸을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잠들기 직전에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만과 이후
나는 저녁 식사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개운치 않았던 것으로 보아 비몽사몽간을 헤맸던 모양이었다. 옳거니... 자면 잘수록 더 자고 싶을 터이니... 그래서 낮잠을 육욕의 죄악이라고 하였겠거니.
사부님은 방에 계시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일어나셨던 모양이었다. 잠깐 찾은 뒤, 본관에서 나오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사부님은, 문서 사자실에서 장서 목록을 열람하고, 수도사들이 공부하는 양을 지켜보면서 베난티오의 서안에 대한 접근을 시도해 보았으나 수도사들이 갖가지 구실을 달고 다가와 성가시게 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부님 말씀에 따르면, 처음에는 말라키아가 와서 귀중한 채식 견본을 보여 주겠노라고 했고, 다음에는 베노가 와서 갖가지 구실을 달아 사부님의 주의를 흐트렸으며, 겨우 자리를 조사를 시작할 무렵에는 베렝가리오가 다가와 일을 돕겠다면서 앞을 알랑거렸다는 것이었다.
사부님이 수도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베난티오의 자료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려 하자 이번에는 말라키아가 다시 다가와서는 노골적으로, 죽은 수도사의 유품을 조사하려면 수도원장의 인가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서관 사서인 자신도, 사자에 대한 예의와 수도원의 규칙 때문에 유품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노라면서, 사부님이 원한다면, 수도원장의 인가가 있기까지는 어떤 수도사의 접근도 막겠노라고 호언했다. 사부님 같은 분이 말라키아와 같은 조무래기와 옥신각신하면서 시간을 낭비했을 리 없다. 그러나 사부님에게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장서관과 관련된 수도사들이 그런 태도를 보였다는 것 자체가 사부님에게는 소득이었다. 결국 수도사들은 그런 태도를 보임으로써 사부님에게, 베난티오의 죽음이 장서관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 셈이었다. 사부님은 이런 말로, 장서관 이야기를 끝마쳤다.
'글세, 방법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만 녀석들이 괘씸해서라도 오늘밤에는 기필코 거기에 들어가 보아야겠다고 작심했다. 녀석들의 태도에서 구린내가 났어. 진리 어쩌고 하지만 이건 진리와는 상관없다는 냄새를 맡았다. 녀석들에 대한 나의 앙갚음이 가볍지만은 않을 것이다.'
식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찬 공기로 머리를 맑게 할 겸 회랑 안을 좀 걸었다. 몇몇 수도사들은 그때까지도 명상에 잠긴 채 회랑 안을 걷고 있었다. 회랑으로 열린 뜰에서 우리는 그로타페라타 사람 알리나르도를 발견했다. 연로해서 근력이 많이 떨어진 그는 교회에서 기도하지 않을 때면 늘 나무 사이를 거닐다가 뜰에서 묵상하고는 했다. 그 날씨에 바깥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연로해도 별로 추위는 타지 않는 모양이었다.
'참 평화로운 날입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인사를 건네자 노인은 시간을 함께 보내줄 사람을 만난 것을 몹시 반가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다 하느님 은혜를 입었음이지요.'
노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늘이야 하느님 은혜로 평화로운 터입니다만 사람의 일은 그렇지 못하니 답답합니다. 혹시 베난티오를 가까이 아셨습니까?'
'베난티오가 누구더라...'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제서야 생각난 듯이 말을 이었다.
'...오라, 죽은 친구 말씀이시군. 이 수도원 안을 나다닐 때는 조심할 일이오. 별별 괴물이 다 발치에 거치적거리니까.'
'무슨 괴물 말씀이신지요?'
'바다에서 나온 괴물이지 뭐... 대가리가 일곱 개, 뿔이 열 개, 그리고 뿔 위에는 열 개의 볏이 있고, 머리에는 세 개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닮기는 표범을 닮았고, 발은 곰 발이요, 입은 사자 입이랍니다. 나도 본 적이 있어.'
'어디에서 보셨습니까? 장서관에서 보셨습니까?'
'장서관이라니! 왜 거기에서 봅니까? 문서 사자실에 들어가 본 지가 몇 년은 좋이 되었어. 장서관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고... 장서관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요. 내가 장서관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알고 있어.'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말라키아 아니면 베렝가리오겠지요.'
노인은 어린아이같이 웃으면서 응수했다.
'아니오. 말라키아가 여기 오기 전에 있었던 사서를 말하는 거요.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지.'
'그때의 사서는 누구였는데요?'
'기억이 나지를 않아요. 말라키아가 아주 젊던 시절에 죽었거든... 나는 말라키아의 은사의 은사 사서도 알아요. 나도 소시적에는 사서 조수였답니다. 하지만... 나는 장서관에는 발을 안 들여놓았어요. 그 미궁에 들어갔다가 어쩌게?'
'장서관이 미궁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이 미궁은 이 세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들어가는 자에게는 넓지만 나오려는 자에게는 한없이 좁답니다...> 장서관은 거대한 미궁이며, 세계라고 하는 미궁의 기호지.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오는 건 장담 못해요.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범하는 것이 아닌 법.'
'그렇다면, 본관 문이 잠기면 장서관으로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는 말씀이시군요.'
'암... 하지만, 납골당을 통해서 들어가는 수가 있기는 있어요. 아는 사람이 많을 걸. 그러나 납골당은 지나고 싶지 않을 걸. 죽은 수도사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죽은 수도사들이 지키다니요? 밤에 등잔을 들고 장서관을 서성거린다는 분들이 바로 세상을 떠난 수도사들입니까?'
노인은 약간 놀라는 눈치를 보였다.
'등잔을 들어?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인 걸. 죽은 수도사들은 장서관에 있는 게 아니라 납골당에 있어요. 묘지에 뼈만 수습해서 거기에다 모셔 놓은 거지. 이 뼈가 길을 지켜요. 교회 부속실에서 납골당으로 통하는 문, 못 보셨구나.'
'수랑을 지나 왼쪽으로 세 번째 문 말씀이신가요?'
'세 번째? 그럴 게요. 그 부속실 계단은 수천 개의 뼈로 만들어진 거요. 오른쪽 네 번째 해골... 그 해골의 눈을 누르면 납골당으로 들어가게 되지. 하지만 가지 마오. 나도 가보지 않았어. 원장이 안 좋아하거든.'
'괴물은요? 어디에서 괴물을 보셨습니까?'
'괴물? 아, 가짜 그리스도 말이군... 앞으로 올 테지. 천년이 지났으니까. 우리 모두 가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지.'
'그렇지만 그 천 년은 벌써 3백 년 전에 지나갔어요. 그래도 안 왔잖습니까?'
'가짜 그리스도는 딱 천 년만에 오는 게 아니에요. 천 년이 지났다면 다음 천년기가 시작될 테지요. 가짜 그리스도는 그때 와요. 의인을 핍박하러 오지요. 마지막 싸움이 있을 겁니다.'
'그래도 의인이 천 년을 다스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첫 번째 천년기가 끝나기까지 다스린다든가. 가짜 그리스도는 그때 오는 것으로 아는데요? 아직 의인이 다스린 적이 없으니 가짜 그리스도가 올 때도 아직은 요원한 것이지요.'
'천년기는 그리스도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계산하는 게 아니에요. 그로부터 3세기 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 눈을 떴을 때부터 계산하는 거지. 그러니까 지금이 바로 천 년이 된 때야.'
'그럼 의인의 통치가 끝난 것입니까?'
'나는 몰라... 더 이상은 피곤해서 말 못하겠어. 계산하자면 힘이 들어요. 리에바나 사람 베아토가 계산을 해냈지. 호르헤에게 물어봐요. 호르헤는 아직 젊으니까 기억력이 좋을 게야... 하지만 때가 익었어. 당신 귀에는 일곱 개의 나팔 울리는 소리라 안 들렸어?'
'왜 하필이면 일곱 개립니까?'
'또 한 녀석... 채식하던 녀석이 죽었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지? 첫 천사가 나팔을 불었어. 우박과 불덩어리가 떨어져 피와 범벅이 되었지. 두 번째 천사가 두 번째 나팔을 부니까, 바다의 3분의 1이 피로 변했어. 두 번째 시체는 피 속에 처박혀 있었다면서? 세 번째 나팔소리가 또 들릴 게야. 그러면 바다에 사는 것은 3분의 1이 죽겠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게야. 수도원 땅은 이단자들 손으로 들어갈 게고. 듣자 하니 로마에 사술을 부리는 고약한 교황이 있어서 이단자를 잡아 제 애완용 곰치에게 먹인다며? 이 동네에서는 누군가가 금기를 어기고 미궁의 봉인을 떼었어.'
'어디에서 들으셨습니까?'
'다 들었지. 수도원에 악마가 들었다고 다들 수군거리고 있어. 자네, 젊은이, 병아리콩 가진 거 있어?'
나에게 한 질문이었다. 나는 무슨 소린지 모르고 있다가 얼떨결에, <병아리콩은 하나도 없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다음에 올 때 좀 가져다 줘. 입에다 넣고 우물거리게. 내 이빨 봐. 하나도 없지. 입에 놓고 오래 있으면 병아리콩이 부드러워지면서 침이 생기지. 침은 생명의 원천이 되는 물이야. 내일 좀 가져다 주겠니?'
'네, 내일 병아리콩을 좀 가져 오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고 보니 노인은 벌써 졸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떠나 식당 쪽으로 걸었다.
종과
저녁 식사는 무미 건조하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베난티오의 식사가 발견되고 나서 열두 시간만에 있었던 식사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수도사들은, 비어 있는 베난티오의 자리에 흘끔흘끔 시선을 던지고는 했다. 종과 시간이 되어 교회로 들어가는 수도사들의 행렬은 흡사 장례 행렬 같았다. 우리는 회중석에 서서 성무 시간 내내 제3부속실 쪽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교회 안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래서, 말라키아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자기 자리로 왔는데도 정확하게 어디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슬금슬금 그림자 속으로 자리를 옮겨 회중석을 벗어났다. 성무가 끝났을 때, 우리가 회중석을 벗어나 있는 것은 본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내 법의 자락 안에는 저녁 식사 시간에 주방에서 잠시 빌어 놓은 등잔이 들어 있었다. 성무가 끝나면, 밤새 불이 켜져 있을 터인 삼각대 위의 청동 등잔에서 불을 옮겨 붙일 참이었다. 심지도 새것으로 갈고 기름도 듬뿍 채워 놓은 터였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불을 밝히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미리 해둔 준비였다.
나는 장차 경험할 모험에 긴장하고 있었던 터여서 성무 자체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무는 얼떨결에 끝나 주어서 좋았다. 성무가 끝나자 수도사들은 얼굴 위로 두건을 내려쓰고는 교회에서 나가 각자의 독방으로 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삼각대 위의 등잔만이 홀로 교회 안의 적막을 비추었다.
'시작하자꾸나.'
윌리엄 수도사가 속삭였다.
우리는 제3부속실로 들어갔다. 제단의 바닥은, 아닌게아니라, 그대로가 온통 하나의 납골당이었다. 제단 자체가, 동공이 움푹움푹 패인 수많은 해골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씩 떼어놓고 보았다면 섬뜩했을 터였지만 그렇게 쌓여 있고 보니 오히려 이상하게 미더워 보이기도 했다. 윌리엄 수도사는, <알리나르도 노인은, 오른쪽에서 네 번째 해골의 눈을 누르라고 했지...>하고 중얼거렸다. 그가, 말끔하게 육탈된 해골의 눈에다 손가락을 넣고 누르자 귀에 거슬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이상한 소리와 함께 제단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축을 중심으로 빙그르르 돌자 눈앞에 시커먼 공동이 나타났다. 등잔을 내밀자 축축한 계단이 보였다. 윌리엄 수도사는, 은밀한 장치를 통해서 열린 문을 닫아야 할지, 열어 두어야 할지 몰라 잠깐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그대로 열어 두기로 마음을 정하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 닫아 버리면, 우리로서는 여는 방법을 모르니까 안에서는 열 수 없지 않느냐... 어차피 누가 들어온다고 해도 여닫는 방법을 아는 자일 터이니, 우리가 열어 놓든 닫아 놓든 그자에게는 아무 장애 거리가 될 수 없지 않겠느냐... 윌리엄 수도사의 표정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남은 단이 좋이 되는 계단을 따라 내렸다. 곧 복도가 나왔다. 복도 옆으로는 벽감이 총총 뚫려 있었다. 훗날 내가 보았던 전형적인 지하 납골당의 모양 그대로였다. 그러나 당시의 납골당은, 나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어서 몹시 무서웠다. 거기에 수습되어 있는, 수세기에 걸쳐 육탈이 끝난 수도사들의 유골은 각기 원래 모양대로 재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수북수북이 쌓여 있었다. 벽감 중에는 안에 가느다란 사지 뼈만 들어 있는 곳도 있었고, 두골만 쌓여 있는 곳도 있었다. 두골은, 피라미드 꼴로 쌓여 있어서 웬만한 외부의 충격에는 흘러내릴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쌓여 있는 유골을, 등잔 불빛, 그것도 우리가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끊임없이 일렁거리는 등잔 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참으로 끔찍했다. 두골이 쌓인 벽감을 차례로 지나자, 손뼈, 손가락뼈만 쌓인 벽감이 나타났다. 등잔 불빛에 드러난, 이 사자들의 납골당에서, 머리 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듯한 발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새앙쥐일 것이야.'
윌리엄 수도사가 지긋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면서, 위로라도 하듯이 속삭였다.
'여기에 쥐가 있을 턱이 있습니까?'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처럼 이렇게 지나가는 과객일 테지. 납골당은 본관으로 통하는데, 이 지하 통로의 끝이 곧 주방일 것이다. 장서관의 서책도 생쥐에게는 좋은 심심풀이가 될 수 있을 게다. 말라키아가 왜 항상 돌 씹은 얼굴을 하고 교회에 나타나는지 알겠느냐? 하루에 두 차례씩 이 통로를 지날 테니 무리도 아닐 것이다. 웃음이 나올 턱이 없지.'
'그런데 사부님, 어째서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께서 웃으셨다는 대목이 나오지 않습니까? 결국 호르헤 노수도사님의 말씀이 옳은 것인지요?'
나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엉뚱하 질문을 했던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웃으셨다거니, 안 웃으셨다거니, 수맣은 학자들이 찧고 까불어 댄다만, 백가쟁명일 것이야. 내게는 관심이 없어,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으니까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느라고 아마 안 웃으셨을 게야. 하지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우리 있는 곳 일이나 생각하도록 하자꾸나.'
다행히도 복도가 끝나고 또 하나의 계단이 시작되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쇠 손잡이가 달린 문이 하나 나타났다. 위치를 곰곰이 따져 보니, 문서 사자실로 오르는 나선형 계단 바로 아래, 그러니까 주방의 화덕 바로 뒤였다.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또 들려 왔다.
사부님과 나는 숨을 죽이고, 비슷한 소리가 다시 들려 오기를 기다렸다.
'다른 사람이 앞질러 이곳에 왔을 수도 있습니까?'
'본관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이것뿐인 줄 알고 있구나.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몇 세기 전에는, 이 건물이 요새로 쓰였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모르는 비밀 통로는 또 있을 것이야. 천천히 오르자.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진퇴유곡 아니냐? 등불을 꺼버리면 우리가 앞을 못 볼 테고, 그대로 켜두자니, 먼저 오신, 머리 위의 손님의 표적이 될 것이고... 우리 머리 위에 정말 누가 있기는 있되, 우리를 보고 겁을 먹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우리는 남쪽 탑루를 통해 문서 사자실로 들어갔다. 베난티오의 서안은 방 저쪽에 있었다. 방이 워낙 넓어 등잔 불빛은 방의 일부분밖에는 비추어 내지 못했다. 우리는 수도원 경내를 어슬렁거릴 터인 사람들이, 창에 비치는 우리 등잔의 불빛을 보지 못하기를 바랐다. 서안은 언뜻 보기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는 서안 밑을 들여다보다가는 혀를 찼다.
'무엇이 없어졌습니까?'
'오늘 나는 여기에 서책이 두 권 있는 것을 보았다. 그중 한 권은 그리스 어로 씌어져 있더라. 그런데 한 권이 없어졌어. 누군가가 이걸 가져간 게야. 그것도 허겁지겁... 보아라, 서책의 한 쪽이 여기 바닥에 이렇게 떨어져 있지 않으냐?'
'하지만, 수도사님들이 이 서안을 지키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를 말이냐? 하지만 누군가가 가져 갔으되, 조금 전에 가져 갔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것을 가져 간 자는 아직 이 본관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부님은 돌아서서 어둠을 노려보면서 꾸짖었다. 그의 목소리가 기둥 사이로 메아리쳤다.
'네 이놈! 여기 있거든 몸조심하여야 할 게다!'
사부님 생각이 옳았다. 사부님께서 언제 이르신 적 있듯이 우리에게 겁을 주는 자가 있다면 우리 역시 그에게 겁을 줄 필요가 있는 일이었다.
사부님은 조금 전에 서안 아래서 주운 쪽지를 들고 앉아 얼굴을 갖다 대면서 등잔을 좀더 가까이 들이대라고 말했다. 나는 등잔을 갖다 대면서 그 쪽지를 보았다. 윗부분 반은 공백이었고 아랫부분 반에는, 나로서는 읽어 내기 어려운, 잔 글씨가 빼곡이 씌어져 있었다.
'그리스 어입니까?'
'그렇다면 판독이 쉽지 않겠구나.'
사부님은 법의 자락을 열고 예의 그 안경을 꺼내어 코에다 걸고 다시 쪽지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그리스 어로구나. 필체가 좋기는 한데 급했는지 너무 날려 썼어. 그래서 안경을 써도 읽을 수가 없구나. 어두워서 그런가... 등잔, 등잔을 더 가까이 대어 보아라.'
그는 양피 쪽지에 얼굴을 들이대다시피 했다. 나는 그의 뒤에서 불을 비추어야 할 터인데도 등잔을 그의 머리 위로 치켜들고 그의 앞에 선 꼴이 되고 말았다. 사부님은 나에게, 비켜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비켜서면서 그만 등잔의 불꽃으로 양피지 뒷면을 스치게 한 꼴이 되고 말았다.
'태워 먹고 싶으냐?'
사부님이 나를 밀어내면서 꾸짖었다. 그러나 꾸짖는 것도 잠깐, 사부님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내 눈에도, 아무 것도 없던 쪽지의 윗부분에, 희미한 황갈색 부호가 나타나는 게 보였다. 사부님은 내 손에서 등잔을 빼앗아 들고는 양피지 뒤를 쬐기 시작했다. 불꽃이 양피지 뒷면에 다가갔지만, 양피지를 태울 정도로 가까이 가게 한 것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씌어진, <므네 므네 드켈 브라신>이 벽 위에 나타났던 것처럼, 양피지 위에서도 이상한 부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사부님이 등잔을 갖다 댐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나타나는 부호를 바라보았다. 보호는 부적 같았을 뿐, 어디로 보나 알파벳 같지는 않았다.
'놀랍구나 놀라워, 점입가경이로구나...'
사부님은 어둠에 싸인 사방을 한차례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 어느 녀석이 이 방에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그자에게 보여서는 안되겠다...'
사부님은 말 끝에 안경을 벗어 서안에도 놓고는, 조심스럽게 그 양피지를 접어 법의 안에 숨겼다. 사부님은 예사로 생각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눈앞에서 일어난 기적을 본 느낌이었다. 나는 사부님에게 설명을 여쭐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이상한 소리가 다시 들렸다. 장서관으로 통하는, 동쪽 탑루의 계단 아래에서 난 소리 같았다.
'그자가 저기 있다. 따라잡아!'
사부님이 소리쳤다. 우리는 그쪽으로 내달았다. 사부님은, 등잔을 든 나보다 달리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나는 누군가가 비틀거리다 바닥으로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힘을 다해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소리가 들렸던 곳에 사부님이 서 있었다. 그는 계단 아래서, 금속테로 장정한 묵직한 책 한 권을 펼쳐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귀에 누군가가 무너지는 소리로 들렸던 소리가 사실은, 그 서책을 떨어뜨리는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바로 그 때, 우리가 있었던 곳, 그러니까 베난티오의 서안 쪽에서 또 인기척이 들렸다. 윌리엄 수도사가 혀를 찼다.
'아뿔싸, 내가 헛짓을 했구나! 서둘러라! 베난티오의 서안이 있던 곳으로 어서 가자!'
나는 그제서야 사부님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누군가가 우리를 따돌리기 위해 일부러 그 책을 떨어뜨렸던 것이다.
윌리엄 수도사는 이번에도 나보다 빠른 속도로 베난티오의 서안 쪽으로 달렸다.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기둥 사이로 빠져 서쪽 탑루 계단으로 내려가는 그림자 하나를 보았다.
나는 그 순간 투사라도 된 양, 윌리엄 수도사의 손으로 등잔을 건네 주고는 괴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던 계단 쪽으로 내달았다.
지옥의 군단과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병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 괴한을 붙잡아 사부님에게 넘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욕망이 지나쳤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내 법의 자락에 걸려 그대로 계단 위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맹세코 말하거니와, 내 평생 수도자의 사문에 든 것을 그때만큼 후회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내 앞에서 달아나던 자 역시 나와 같은 차림이었을 터... 게다가 그가 만일, 베난티오의 서안에서 훔친 책을 들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면 입장은 나보다 불리했을 터였다.
빵 가마 뒤에서 나는 주방 쪽으로 돌진했다. 주방의 입구를 밝히는 희미한 등 불빛으로, 나는 괴한이 식당으로 들어간 다음 뒤로 문을 닫는 걸 보았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가 온몸 무게를 실어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바깥문은 닫혀 있었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둠과 적막뿐이었다. 그때 주방 쪽에서 불빛 하나가 다가왔다. 나는 벽에다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주방과 식당 사이의 통로에 나타난, 등잔 든 사람은 바로 사부님이었다.
'아무도 없지? 내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아는 문으로는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납골당으로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쪽으로 나갔습니다만, 어디를 통해서 나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길래 내 뭐라고 하더냐? 다른 통로가 있을 거라고 하지 않더냐? 여기에서 두리번거려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쫓던 괴한은, 우리가 모르는 문을 통하여 진작 나갔을 게다. 내 안경을 훔쳐 가지고 말이다.'
'안경이라니요?'
'암, 괴한은 양피지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바꾸어 먹고 내 안경을 가지고 가버렸구나.'
'왜 안경을 가지고 갔겠습니까?'
'이자는 바보가 아니야. 아니, 바보이기는커녕 우리가 예상하던 것 이상으로 똑똑하다. 이자는, 내가 너에게 양피지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는 양피지를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양피지는 기왕 손에 넣을 수 없게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내 안경을 가져가 버린 게다. 안경이 없으면 내가 무슨 수로 이 양피지를 해독하겠느냐? 이자는 어쩌면, 내가 이 양피지 해독을 남에게 의뢰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게다. 내 비록 양피 쪽지를 가지고 있으나 안경이 없으니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나저나 이를 어쩌면 좋으냐...'
'사부님께 안경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런 아둔패기. 어제 유리 세공사와 안경 이야기를 한 데다, 문서 사자실에서 베난티오의 유품을 뒤적거릴 때도 그 안경을 꺼내 쓰지 않았더냐? 그랬으니, 그 물건이 내게 얼마나 요긴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안경 없이도 여느 서책은 읽을 수 있다만 아무래도 이건 어려울 것 같구나...'
사부님은 법의 속의 양피 쪽지를 가리키다가 법의 자락을 열고 그 양피지를 꺼냈다.
'... 그리스 어로 씌어진 부분은 선명해서 알아먹기가 쉬우나 윗부분의 부호는 너무 흐려서 도무지 판독할 수가 없구나...'
그는 나에게, 등잔불의 열기를 받고는 흡사 기적처럼 나타난 수수께끼의 부호를 보여 주었다.
'베난티오는, 중요한 비밀을 감추고 싶었던 나머지 묘한 잉크를 사용했던 것이다. 여느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불에다 쬘 경우에만 글씨가 나타나게 하는 그런 잉크가 있다. 어쩌면 구연즙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글쎄다, 베난티오가 무슨 잉크로 썼는지도 모르겠고, 여기에 나타나 있는 부호가 언제 사라져 버릴지, 그것도 모르겠구나. 너는 눈이 밝으니까, 이걸 깨끗이, 큼직큼직하게 베껴 다오.''
나는 무슨 부호인지도 모르고 사부님 시키는 대로 베껴 드렸다. 너댓줄에 이르는, 부적 같은 이상한 부호였다. 독자에게, 내가 당시에 얼마나 당혹하고 있었던지는, 다음의 첫 줄의 부호를 소개하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내가 베낀 것을 내밀자 사부님은 눈을 멀찍이 뗀 채 그걸 들여다보았다.
'무슨 암호 같은데... 어떻게든 해독해 보아야겠구나. 쓴 솜씨가 시원찮았는지, 네가 베낀 솜씨가 단정치 못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게 무엇이냐... 12궁도에 쓰이는 부호인 것만은 틀림없을 듯하다. 보이지 이 첫 줄?'
그는 눈의 초점을 모으느라고 연신 눈살을 찌푸리고는 덧붙였다.
'사기타리우스(반수인좌, 즉 토성)... 태양... 메르쿠리우스(수성)... 스코르피오(전갈 좌)...'
'무슨 뜻이지요?'
'베난티오가, 약간 머리가 돌아가는 자였다면, 틀림없이 12궁도의 부호를 썼을 것이다. 는 태양, 는 목성... 그렇다면 첫줄은 이렇게 된다... RAIQASVL... 의미가 없겠어. 무의미한 글자의 나열에 지나지 않아. 따라서 베난티오는, 이 방법으로 부호를 만들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부호를 다른 방법으로 배열했을 텐데... 어디 좀 생각해 보기로 하자.'
'푸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암, 아랍 어를 조금만 알면... 암호 조립과 해독에 능한 사람들은 대개가 이교도 학자들이다. 나도 옥스퍼드에서 암호 공부를 좀 했지, 지식의 정복은 언어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야 가능하다는 베이컨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나는구나. 아부 바크르 아마드 벤 알리 벤 아시야 안 나바티는 몇 세기 전에 [고대 문자의 해독에 발심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쓴 일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군대와 군대, 왕과 그 사절간에만 통하는 밀서의 조립 및 해독에 필요한 갖가지 암호문의 실례를 소개하고 있다. 이런 암호는 나도 아랍 어 서책에서 본 적이 있다. 암호문 쓰는 방법에는, 문자를 일정한 법칙에 따라 바꾸어 쓰는 방법, 한 자씩 빼어 먹고 쓰는 방법, 낱말을 거꾸로 쓰는 방법, 글월을 거꾸로 쓰는 방법이 있다. 각설하고... 이 암호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이것을 글자 대신 12궁도의 부호로 쓴 것이기는 한데... 아무래도 부호가 지니는 숫자적인 의미에다 눈을 대어 보아야 할 모양이구나...우선 숫자로 보자...'
'과연 베난티오 수도사가 그런 방법으로 암호를 조립할 줄 알았을는지요?'
'그러니 이 방법 저 방법을 두루 고려해 보아야지. 허나 해독의 첫걸음은 역시 의미를 가정해 보는 것이야.'
'의미를 가정할 수 있으면 해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되잖게 사부님 앞에서 웃고 말았다.
'그렇지 않다. 첫 낱말의 해석에 따라서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이 가설이 나머지 낱말에도 유효한 것인지 검증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보기에, 베난티오는 이 암호문에다 <피니스 아프리카에>라는 말을 감추어 놓고 있는 것 같다. 이 세 낱말을 읽어 보되, 암호 자체는 보지 말고 암포의 숫자만 세어 보아라... IIIIIIIIIIIII. 첫 낱말은 모르겠고, 다음과 그 다음 낱말을 소리 내어 한번 읽어 보면 따... 따따따따, 따따따따따따따... 짚히는 게 없느냐?'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럴 테지. 내게는 생각이 났다. <세크레툼 히니스 아프리카에>...이렇게 된다. 그러나 이게 맞다면 마지막 낱말의 첫 자와 여섯 번째 글자는 같아야 한다. 마지막 낱말 를 보아라. 첫 자인
와 여섯 번 째 글자인 가 같지 않느냐? 즉, 이 낱말에는 지구를 상징하는 글자 가 두 자나 들어가 있다. 그리고 첫 번째 낱말의 첫 글자 는 두 번째 낱말의 마지막 글자와 같아야 한다. 보아라, 같지? 그리고 이 두 번째 낱말에는 처녀좌를 상징하는 글자가 두 번 들어가 있다. 아무래도 제대로 짚은 것 같구나. 그러나 이것 또한 단지 정합성의 연속일 수 있다. 대응법칙이 발견되어야 해.'
'어디에서 발견합니까?'
'머리로 해야지. 머리로 하되 이걸 검증해 내어야 한다. 허나, 찾아내고 검증하자면... 이걸로도 하루가 좋이 걸릴 것 같구나. 명심하여라. 끈기 있게 달라붙을 경우, 해독되지 않는 암호는 세상에 없는 법이다. 그러나 어쩌랴, 지금은 시간이 없구나. 우선은 장서관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게는 안경이 없고, 네 눈으로는 이게 해독될 것 같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저는 그리스 어를 몰라서... 장님 단청 구결하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 베이컨 사부님 말씀이 옳지. 공부할 일이다! 허나 의기 소침해 할 것은 없다. 우선 이 양피지와 네 필사지를 집어 넣고 장서관으로 올라가 보자. 오늘 밤에는, 지옥의 군단 열 개가 앞을 막고 나선데도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야.'
'조금 전의 그 괴한은 누구였을 것 같습니까? 베노 수도사 였을 것 같습니까?'
'베노는, 베난티오의 유품이 보고 싶어서 눈에서 손이 하나 튀어나올 지경일 게다. 그러나 이자에게, 야밤에 본관에 숨어 들 용기까지는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럼 베렝가리오 수도사, 아니면 혹 말라키아 수도사는 아닐는지요?'
'베렝가리오라면 그럴 만한 용기는 있을 테지. 게다가 베렝가리오는 장서관의 비밀을 지킬 책임을 나누어 지고 있는 참이어서 지금쯤, 그 비밀의 일부가 누설된 걸 알면 땅을 칠 터이기도 하고... 베렝가리오는, 베난티오가 그 서책을 가져 갔다고 생각하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장서관 업무를 보고 있기는 하나 사서 조수 신분이어서 위층으로 올라갈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 책을 어디에 감추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동기라면, 말라키아 수도사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고 달리 보아. 말라키아는, 베난티오의 서안을 뒤지고 싶다는 생각만 있으면 언제든지 뒤질 수 있다. 말라키아는, 본관 문을 잠근 뒤에도 얼마든지 문서 사자실에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 나는 진작부터 이걸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말라키아의 짓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잘 생각해 보아라. 베난티오가 장서관으로 숨어 들어가 뭔가를 훔쳐내었을 것이라는 가정, 말라키아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성립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베렝가리오와 베노도 알고 있고, 너와 나도 알고 있다. 아델모의 고백을 듣고 호르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허나, 호르헤는 계단을 뛰어서 오르내릴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지 않느냐?'
'그렇다면 베렝가리오 수도사나 베노 수도사라는 것입니까?'
'너는 어째서 티볼리 사람 파치피코나,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보았던 수도사들 중 하나라는 생각은 못 하느냐? 유리 세공사 니콜라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내 안경이 어떤 물건인지 아는 자 역시 니콜라 뿐일 터이다. 밤이면 혼자서 여기저기 어슬렁거린다는 저 괴승 살바토레는 어떠냐? 베노의 고백이 우리에게 어떤 단서를 제공한다고 해서 우리 혐의가 어느 한 곳으로 치우쳐 가서도 아니 될 것이다. 베노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베노 수도사는 사부님께 진실을 말씀드린 것 같았습니다.'
'그랬을 테지. 하지만 유능한 조사관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에게도,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에서 혐의를 두는 법이다. 너도 명시하도록 하여라.'
'조사관들께서 하는 일... 사부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옳으시다면, 정말 할 게 못 되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집어치운 것 아니냐? 어쩌다 이렇게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만... 자, 어서 장서관으로 올라가보자.'
한밤중
우리는 다시 문서 사자실로 올라갔다. 역시 금단의 방으로 이어지는 동쪽 계단을 통해서였다. 이 미궁 같은 장서관에 대해서는 노수도사 알리나르도로부터 들은 말이 있는 참이어서 나는 무서운 일을 당할 것을 각오했다.
금단의 방으로 첫발을 들여놓고 보니 놀랍게도 창이 하나도 없는, 그리 크지 않은 7면벽실이었다. 방에서 곰팡이 냄새 같은, 쾨쾨한 냄새가 났다. 당할 것으로 각오하고 있었던,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방을 이루고 있는 7면벽 중 네 벽에는 문이 있었다. 문 양 옆에는 조그만 기둥이 하나씩 서 있었다. 문은 꽤 넓었고, 기둥 위의 꾸밈새는 아치 모양이었다. 문이 없는 벽 앞에는, 서책을 가지런히 채운 커다란 궤짝이 놓여 있었다. 각 궤짝과 서가에는, 번호가 매겨진 두루마리가 각각 하나씩 들어 있었다. 서명 목록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숫자인 모양이었다. 방 한가운데에 있는 탁자에도 서책이 쌓여 있었다. 서책 위에는 먼지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자주 청소하는 모양이었다. 바닥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아치 모양으로 꾸며진 상인방 위에는 커다란 두루마리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글씨는 고체였으나 두루마리 그림 자체는 오래된 것이 아닌 듯했다. 뒤에 다른 방에서도 이런 두루마리 그림을 보고 안 것이지만, 그림은 돌에다 꽤 깊이 새긴 것으로, 벽화를 그릴 때 화가들이 자주 쓰는 기법이 그렇듯이, 일단 음각하고 나서 그 홈에다 물감을 채운 것이었다.
문 하나를 지나자 또 하나의 방이었다. 이 방에는 창이 하나 있었는데, 창에는 유리가 있을 자리에 설화 설고 석판이 끼워져 있었다. 방의 나머지 두 면은 그저 밋밋한 벽이었고, 또 하나의 벽에는 문이 있었는데 이 문은 우리가 조금 전에 지나 온 것과 똑같은 통로로 통했다. 물론 통로는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통로를 지나 우리가 이른 방 역시 밋밋한 벽 두 장, 창이 있는 벽 한 장, 그리고 문이 있는 벽 한 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문 역시 정면 통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두 방문의 상인방에도 처음 우리가 보았던 것과 똑같은 두루마리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두루마리 그림은 같지만 거기에 새겨진 글귀는 달라서 첫 번째 방의 출입구 상인방의 글귀는 <높은 좌석 스물네 개>, 두 번째 방의 출입구 상인방 글귀는 <그의 이름은 죽음>이었다. 이 두 방은, 맨 처음 장서관으로 들어오면서 본 방보다 작았지만 내부의 모양은 똑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맨 처음 장서관으로 들어오면서 본 방이 7면벽실인 데 비해 4면벽실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세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에는 서책도 없고 두루마리 그림도 없었다. 창 밑에는 조그만 석조 계단이 있었다. 문은 모두 세 개였다. 세 문 중 하나는 조금 전에 우리가 들어왔던 문, 또 하나는 우리가 지나 왔던 7면벽실로 통하는 문, 나머지 하나는 새로운 방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이 방 역시 우리가 지나 온 방과 다를 바 없었으나 두루마리에 새겨진 글귀가 달랐다. 이 방 두루마리의 글귀는, <햇빛과 대기가 어두워지다>였다. 이 방 역시 또 다른 방으로 통했는데, 또 하나의 방 상인방 두루마리에 새겨진 글귀는, 대혼란과 화재를 경고하는, <우박과 불덩어리가 떨어지다>였다. 이 방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어서 일단 들어갔다가는, 들어간 문을 통하여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중었거렸다.
'어디보자. 창이 각각 하나씩 달려 있고, 벽이 4면, 혹은 부등 4변형으로 되어 있는 방이 다섯 개 있었는데, 이 다섯 개의 방 한가운데에, 계단과 이어지되 창문이 하나도 없는 7면벽실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렇다. 우리는 시방 동쪽 탑루에 와 있다. 밖에서 보면 각각의 탑은 5면형이고 각 면에 창이 하나씩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방은, 동향이기가 쉽다. 그렇다면 교회의 성가대석과 같은 방향이 아니겠느냐? 교회 제단은, 이른 아침의 햇빛이 비치게끔 정위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설화 석고석을 박은 창을 생각해 보아라. 이것은 머리가 여간 좋은 사람의 고안이 아니다. 설화 석고석이라고 하는 것은 낮 동안 햇빛을 통과시키기는 하지만 밤의 달빛은 한 줄기도 들여 보내지 않는다. 말하자면 설화 석고석 창은 낮에는 창 구실을 하지만 밤이면 무용지물이 되는 게다. 자, 7면벽실의 나머지 문 두 개가 어디로 통하는지 한번 조사해 보자.'
그러나 사부님 말씀은 옳지 않았다. 장서관 설계자는 사부님이 생각했덕 것 이상으로 교활했다. 그때의 정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일단 그 탑루에서 나온 뒤에 보니 방의 순서가 어떻게 되었는지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방 중에는 문이 두 개인 방도 있었고 세 개인 방도 있었다. 창은 모두 하나였다. 본관으로 들어간다고 들어갔을 때도 본관은 나오지 않고 창이 하나뿐인 작은 방이 나왔다. 방에 놓인 궤짝과 탁자도 모두 같은 것이었는 데다 그 위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책도 모두 똑같아 보였다. 따라서 궤짝이나 탁자나 책으로 이방 저방을 구분해 낼 수는 없었다. 우리는 두루마리의 글귀를 방향잡이로 삼아 각 방이 면한 방향을 알아내려고 해 보았다. 우리는 두루마리의 글귀가 <그 즈음>인 방을 지나 한동안 방황하다가 다른 방을 찾아 들어갔는데, 우리가 기억하기로는 두루마리 글귀가 <죽은 자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난 자>가 분명할 터인데도 들어가 보니 뜻밖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였다. 게다가 두루마리의 글귀만 같았을 뿐, 우리가 맨 처음에 지난 7면벽실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제서야 두루마리의 글귀가 다른 방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본 것만 해도, 두루마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글귀가 새겨진 방은 두 개였다. 그러나 그중 한 방의 옆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지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방이었다.
두루마리의 글귀가 암시하는 의미도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요한의 묵시록]에 나오는 글귀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런 글귀를 상인방에다 새긴 까닭, 그 글귀가 의미하는 바는, 논리적으로 줄거리가 잡힐 만한 것이 아니었다. 또 하나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힌 것은, 많지는 않았지만, 그중 몇 개의 두루마리는 검은색이 아닌, 붉은색으로 채색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처음의 그 7면벽실에 당도해 있는 것이었다(이 방에만은 계단이 있어서 알아보기가 쉬웠다). 우리는 이 방의 오른쪽 문을 통해 일단 밖으로 나가 각 방을 다시 뒤져보기로 했다. 우리가 방 세 개를 지나고 보니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다른 입구를 찾아내어 그 방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통로로 빠져 네 개의 방을 지나니 다시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는 이미 지났던 방으로 되돌아와 두 개의 출입구 중, 한번도 지난 적이 없는 출입구를 통해 새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고 보니 뜻밖에도 처음에 우리가 만났던 7면벽실이었다.
'우리가 되짚어 나온 마지막 방 두루마리에는 뭐라고 씌어져 있더냐?'
윌리엄 수도사가 물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흰 말 한 마리가 내 기억에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흰 말>라고 대답했다.
'좋다. 그 방을 다시 한번 찾아보자.'
그 방을 다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그 방에서는, 조금 전처럼 되짚어 나오는 대신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라는 글귀가 새겨진 방을 지났다. 그런데, 분명히 새로운 통로로 나왔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그 즈음>과 <죽은 자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난 자>라는 글귀가 새겨진 방 앞에 와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보기에 이 두 방은 우리가 지나왔던 방 같았다. 우리는 이 방에서 다시 처음 보는 방, <땅의 삼분의 일이 타다>에 이르렀다. 땅의 삼분의 일이 탔다는 걸 알았을 때조차 동쪽 탑루 속에서의 우리 위치는 종내 짐작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등잔을 높이 쳐들고 다음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문턱에 발을 대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거대한 물체가 흡사 유령처럼 일렁거리면서 내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귀신이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섰다. 윌리엄 수도사가 뒤에서 나를 껴안지 않았더라면 등잔을 떨어뜨리고 말았을 것이다. 윌리엄 수도사는 나를 뒤로 밀친 다음 등잔을 빼앗아 들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분 역시 주춤,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보아 그 무서운 형상에 잠시나마 놀랐던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구부리고 등잔을 앞으로 내밀어 형상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절묘하구나, 거울이다!'
'거울이라뇨?'
'그래, 거울이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거라, 이놈아! 조금 전 문서 사자실에서는 금방이라도 원수의 덜미를 잡아 무릎을 꿇릴 기세이더니, 여기에서는 제 모습에 기겁을 하고 혼비백산을 해? 거울이 네 모습을 확대시키고, 찌그러뜨려 되 쏜 것이다. 보아라.'
사부님은 내 손을 끌어 방 입구에 서 있는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나는 등잔을 높이 치켜들고, 주름이 잔뜩 잡혀 있는 유리를 비추어 보았다. 기괴하게 찌그러진 두 개의 형상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일그러진 이 기괴한 형상은, 우리가 다가서고 물러서는 데 따라 커지거나 작아지고는 했다.
윌리엄 수도사가 짓궂은 어조로 나를 힐난했다.
'광학 논문 줄이라도 읽어 보아야겠구나. 아무래도 너는 광학이라는 것에 도통 무지한 것 같다. 그런데 광학에 관한 논문 중의 백미를 역시 아랍 인들이 쓴 것이다. 알 하젠의 [시각론]이 그 중의 하나인데, 알 하젠은 이 논문에서 정확한 기하학적 실례까지 들어 가면서 거울의 쓰임새를 소개하고 있다. 이 양반의 주장에 따르면, 거울이라는 것은 표면을 깎는 데 따라 작은 것을 크게 보이게 할 수도 있고(내 안경을 보았으니 너도 잘 알 것이다). 형상이 거꾸로 보이게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흐리게 보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뿐이냐? 두 개의 형상을 한 곳에 모을 수도 있고, 두 곳에다 네 개의 형상을 모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거울을 이용해서 우리가 조금 전에 보았듯이, 난쟁이를 거인으로, 거인을 난쟁이로 보이게 하는 것쯤이야 실로 여반장일 터이다.'
'아이고, 우리 주님 마시옵소서. 그렇다면 사부님, 이곳 사람들이 장서관에서 보았다는 허깨비가 바로 이것입니까?'
'그럴 테지. 아주 영리한 자들의 짓이다...'
그는 거울에 비친, 두루마리의 글귀를 읽고는 말을 이었다.
'... <수페르 트로노스 비긴티 쿠아투오르>, 즉 <높은 좌석에 앉은 스물네 원로>라는 뜻이다. 이런 글귀라면 아까 어느 방에서도 보았다. 그러나 그 방에는 거울이 없지 않더냐? 이 방에는 거울은 있지만 창이 하나도 없는 데다가 방 자체도 7벽면실이 아니구나. 도대체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냐? 아드소, 안경이 없어서 서책의 제목을 읽을 수가 없다. 어디, 내 눈이 되어 제목이나 읽어다오.'
사부님이 궤짝 앞으로 다가가면서 하신 말씀이었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서책을 한 권 뽑았다.
'사부님, 씌어졌다기보다는..''
'무슨 소리냐? 글씨가 보이는데도 그러는구나. 뭐라고 씌어져 있느냐?'
'씌어졌다기보다는 그려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읽을 수가 없습니다. 라틴 어 알파벳도 아니고, 그리스 어 알파벳도 아닙니다. 조금 더 보아야 알겠지만, 꼭 벌레, 배암, 아니, 파리가 기어간 것 같습니다.'
'아랍 어다. 다른 서책도 모두 그 모양이냐?'
'네, 몇 권은요. 라틴 어로 된 것도 있기는 합니다.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알... 알 쿠와리즈미의 [성좌표]라는 책입니다.'
'오냐, 알 쿠와리즈미의 천문 도판이구나. 바드 사람 아델라드가 번역한 것일 게다. 희본이다. 계속 읽어 보아라.'
'이사 이븐 알리의 [안구에 대하여], 그리고 알 킨디의 [별빛에 대하여]...'
'이번에는 서안 위를 좀 보거라.'
나는 서안 위에 있는 엄청나게 큰 책, [괴물 도감]을 펼쳤다. 마침 펼쳐진 쪽에는 정교한 일각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걸작이로구나. 글씨는 씌어져 있지 않느냐?'
안경 없이는 그림밖에 볼 수 없었던지 사부님이 물었다.
'<여러 가지 괴물에 관한 책>입니다. 역시 그림이 아름답습니다만, 앞의 서책들보다는 시대가 앞선 듯합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그 책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약 5세기 전, 히베르니아(아일랜드의 옛 이름)수도사가 채식한 것이구나. 일각수는 최근에 그려진 것이고... 제책한 솜씨를 보니 프랑스 식이로구나.'
나는 사부님의 박학에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우리는 다음 방을 지나 방 네 개를 두루 거쳤다. 방방에는 모두 창이 있었고 서안이나 궤짝에는, 초자연 과학 서적과 정체 불명의 문자로 기록된 서책이 산적해 있었다. 이윽고 문과 통로가 다하면서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다섯 개의 방은 서로 통해 있었지만 마지막 방에는 출구가 없었다. 우리는 문과 통로를 되짚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벽의 각도로 미루어 봐서 우리는 다른 탑루의 5면벽실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가운데에 마땅히 있어야 할 7면벽실이 없으니, 우리가 잘못 짚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창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떻게 창이 이렇게 많을 수가 있습니까? 모든 방이 밖을 조망하게 되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너는 가운데 있는 계단 통로를 잊어버리고 있구나. 우리가 본 대부분의 창은 8면벽의 계단 통로에 면해 있을 것이야. 지금이 낮이면 빛줄기로 미루어 밖에 면한 창인지 내부에 면한 창인지를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태양의 위치로 미루어 방의 위치도 어림하여 헤아릴 수 있을 게다. 그러나 밤이라서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구나. 되돌아가자꾸나.'
우리는 거울이 있던 방으로 돌아와 세 번째 문의 문턱을 넘었다. 이 방은 우리가 가 본 적이 없던 방인 듯했다. 우리 앞으로 서너 개의 방이 더 보였다. 마지막 방에서는 불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앗! 저기에 누가 있습니다.!'
내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주름이 잡히는 바람에 내 목소리는 다행히도 고함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소리를 죽일 것 없다. 누가 거기에 있었다면 우리 등잔 불빛을 진작부터 보고 있었을 게다.'
윌리엄 수도사가 등잔을 손으로 가리면서 속삭였다. 우리는 잠시 움직임을 읽고 망설였다. 불빛은 가볍게 일렁거릴 뿐,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다.
'그냥 거기에 놓인 등잔일지도 모르겠다. 수도사들에게, 사자의 영혼이 이 장서관을 지키고 있다는 것 시위할 요량으로 말이다. 하지만 확인해 볼 일이다. 내 조심해서 다가가 볼 터이니 너는 여기에서 등잔을 잘 가리고 기다리거라.'
거울 앞에서 혼비백산하는 꼴을 보였던 게 내심 몹시 부끄러웠던 나는, 사부님 앞에서 구겨져 버린 내 명예를 되찾고 싶었다.
'아닙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제가 조심해서 가볼 터이니 사부님께서 여기에 계십시오. 저는 사부님보다 몸집도 작고 눈도 밝습니다. 별 위험이 없는 것이 확인되면 사부님을 불러 뫼시겠습니다.'
사부님은 그러라고 했다. 나는 벽에 바싹 붙은 채로, 고양이처럼 날랜 걸음으로 세 개의 방을 가로질렀다(식품 저장실의 건락을 꺼내 먹으려고 살금살금 주방으로 숨어드는 장난꾸러기 수련사의 발걸음이 꼭 그랬다. 멜크 수도원에서 나도 하던 짓이었다). 나는 불빛이 일렁거리는 방문턱까지 다가갔다. 왠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나는 그 방의 오른쪽 문설주인 기둥까지 접근하여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등잔 하나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을 뿐이었다. 등잔 안에서는 무엇인가가 연기를 내며 빛나고 있었다. 우리가 들고 들어갔던 등잔과는 달리 갓이 없어서 향로 비슷해 보였다. 불꽃도 없었다. 하얀 재가 옆으로 소복하게 쌓인 것으로 보아 무엇인가가 그 안에서 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방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 향로 옆에는 밝게 원색 그림이 그려진 서책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한 면에 각각 다른 색깔로 그려진 네 개의 줄을 보았다. 노랑, 주홍, 청록, 적갈색 줄이었다. 그 옆에는 보기에는 끔찍한 괴수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머리가 열 개인 거대한 용이었다. 용의 뒤로는 하늘의 별들이 따르고 있었다. 용은 꼬리를 땅에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는 용의 수효가 무수하게 불어나는 걸 보았다. 용의 가죽은 반짝거리는 사금파리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그 사금파리가 서책에서 나와 내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나는 물러서면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이 휘어지면서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내 귀에 수천 마리의 뱀이 쉭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나를 위협하기보다는 유혹하는 쪽에 가까웠다. 이어서 한 여자가 찬란한 빛줄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나타나 내 얼굴에 제 얼굴을 갖다 대고는 숨결을 내뿜었다. 나는 여자를 밀쳤다. 그러나 손은 이상하게도 방 건너편에 있는 궤짝에 가 닿았다. 나는 내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어디가 땅인지 어디가 하늘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 눈에, 방 한가운데 선 베렝가리오가 보였다. 베렝가리오는, 증오와 정욕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느새 내 손은 두꺼비 발처럼 끈적끈적해진 데다 손가락 사이에는 물갈퀴까지 나 있었다. 이때 비명을 질렀던 것 같다. 입 안에 신 침이 돌았다. 그래도 영원히 어둠 속으로 꺼져 가는 것 같았다. 어둠이 내 발치에서 시시각각으로 깊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이상은 모르겠다.
나는, 몇 세기가 좋이 됨직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머리를 때리는 소리와 충격에 정신을 차렸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내 뺨을 몇 대 갈기고 있었다. 향로가 있던 방이 아니었다. 내 눈에, <수고를 그치고 쉬리로다>라는 글귀가 든 두루마리가 보였다.
'정신 차려라, 이놈! 아무것도 없으니까.'
윌리엄 수도사가 내 귀에다 입술을 댈 듯이 하고 꾸짖었다.
'있습니다... 저기에... 괴물이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혼수 상태를 헤매면서 중얼거렸다.
'이놈아, 괴물이 어디에 있느냐? 너는 탁자 위에 놓인, 아름다운 [모자라브의 묵시록] 밑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느니라. 마침 용과 맞서는 <태양을 입을 여자>가 그려진 데가 펼쳐져 있더구나. 허나 냄새로 보건대 너는 위험한 물질의 연기를 맡은 것이 분명해서 내 너를 이리로 옮겨 왔다. 독한 것이었구나. 내 머리까지 다 지끈거리는 것으로 보아...'
'그러면 제가 본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아마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이 거기에서 타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냄새를 안다. 아랍 것인데, 산노인이 자객을 떠나 보내기 전에 맡게 했던 것이 바로 이 냄새였을 것이다. 환상의 수수께끼를 우리는 이것으로 설명한 바도 있다. 누군가가 밤에 여기에다 약초를 얹었을 게야. 침입자에게, 초자연적인 존재가 장서관을 지킨다는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 꾸민 수작이기가 쉽다. 그것은 그렇고, 너는 여기에서 대체 무엇을 보았다는 것이냐?'
나는 어질어질한 정신을 애써 가누고 내가 본 것을 되는 대로 설명했다. 그러자 윌리엄 수도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허깨비의 절반은 네가 서책을 통해 본 것을 네 나름대로 튀기로 불리고 해서 만들어 낸 것이고, 절반은 네 욕망과 공포가 만들어 낸 것이다. 너를 그렇게 만든 것은 필시 마약초의 장난일 것이야. 날이 밝으면 세베리노와 의논해 보아야겠구나. 세베리노라면 속시원하리만치 자세하게 일러 줄 게다. 그래,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이것은 마약초의 장난임에 분명하다. 왜, 유리 세공사가 말하지 않더냐? 장서관 안에서 누군가가 무슨 장난을 치고 있다고... 약초, 거울... 금단의 지식이 소장된 것이 이런 얄팍한 속임수로 지켜지고 있다니 한심한 일이구나. 지식이 우둔한 자를 밝히는 데 쓰이지를 않고 다른 지식을 은폐하는 데 쓰이고 있으니 이 아니 한심한 일이냐? 마음에 들지가 않아... 장서관 지키는 신성할 일을 사악한 자들의 머리에 맡겨 두다니. 어쨌든 끔찍한 밤이다. 지금으로서는 이곳을 떠날 수 밖에 없다. 너는 몸도 마음도 다 말짱하지가 못해. 시원한 물도 좀 마시고, 맑은 공기도 좀 쐬어야 한다. 창을 열려고 애써 봐야 헛일이기가 쉽다. 너무 높은 데 달려 있는 데다가, 어차피 수십 년 동안 열려 본 적이 없을 테니까, 이런데 아델모가 어떻게 저 높은 것까지 올라가 아래로 몸을 던졌겠느냐?'
윌리엄 수도사는 장서관을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우리는 장서관에 이르는 길은 하나, 즉 동쪽 탑루를 통하는 길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바로 이렇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었다. 우리는, 어쩌면 거기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날을 밝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피를 말려 가면서 방방을 방황했다. 게다가 나는 토기까지 억누르느라고 애를 써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판단 착오에 혀를 차던 윌리엄 수도사는 내 걱정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더더욱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고진감래... 이 방황은 우리에게, 아니면 적어도 그에게 다음날에 필요한 대단히 요긴한 정보를 제공한 셈이었다. 우리는, 일단 거기에서 나가는 데 성공하면 다음에는 관솔숯이나, 벽에다 표를 할 만한 것을 구해 가지고 장서관으로 잠입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 미궁을 빠져 나가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처음 보는 문마다, 우리가 지난 곳마다 세 개의 기호로 나누어 표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 놓으면 한 번 지나간 곳은 쉬 알아볼 수 있어서 두 번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게다. 어떻게 표를 하는가 하면... 한 번도 지난 적이 없는 분기점을 만날 때마다 들어가는 통로에다 기호를 그린다. 만일에 그 분기점의 출입구 어느 한 쪽에, 이미 기호가 그려져 있으면, 한 번 와 본 분기점이기 때문에 입구가 되는 통로에 기호를 하나 더 그린다. 만약에 모든 분기점의 출구에 기호가 다 그려지게 되면 완전히 되돌아서서 기호가 그려진 통로만을 되짚어 가야 한다. 그러나, 출구에 하나 내지는 두 개의 통로에 기호가 이미 그려진 분기점을 만나면 어느 출구로 나와야 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때 우리가 선택한 출구에는 두 개의 기호를 그린다. 우리는 되도록이면 기호가 하나뿐인 통로만 택해야 한다. 만일에 어쩔 수 없이 기호가 두 개 그려진 통로를 지나야 할 경우에는 이 통로에 기호를 세 개 그려야 한다. 이렇게 해나가면 이 미궁의 분기점에는 기호가 없는 출입구가 하나도 없게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기호 없는 출입구가 하나도 없게 될 경우 세 개의 기호가 그려진 출입구를 통하면 장서관의 미궁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그런 것을 생각해 내셨습니까? 사부님께서 미로에까지 달통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달통이라고 할 것은 없다.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고본의 몇 구절을 왼 것뿐이다.'
'그렇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만하지는 않다. 밑져야 본전이니 해보는 수밖에. 그리고 며칠 뒤에, 안경이 마련되는 대로 서책을 좀 조사해 볼 생각이다. 두루마리 그림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성서 구절, 혹은 서책의 분류법이 어떤 실마리가 되어 줄 것 같다.'
'안경이 마련되다니요? 어떻게 되찾으실 생각이신지요?'
'마련하겠다고 했지, 되찾는다고 했느냐? 새것을 만들게 할 생각이야. 우리 세공사에게 새것을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면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할 참이다. 불감청이되 고소원이라고 할 게다. 유리를 갈아 내는 연모만 있으면 가능하다. 유리라면 그 사람 일터에 얼마든지 있으니까.'
출구를 찾으려고 방방을 헤매고 다니는데 어느 방 한가운데서 문득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뺨을 더듬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질겁하고 말았다. 흡사 유령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저 방에서 이 방으로 옮겨 다니는 듯, 인간의 소리도 짐승의 소리도 아닌 괴성이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장소가 장서관이니만치 웬만한 것은 각오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만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사부님도 같은 일을 당하신 듯, 뺨을 문지르면서 등잔으로 사방을 비춰 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사부님이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사부님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맞은편 벽, 사람의 키 높이쯤이었다. 거기에 두 개의 좁은 틈새가 있었다. 손을 거기에 갖다 대자 밖에서 불어 온 것인 듯한 찬바람의 냉기가 느껴졌다. 귀를 갖다 대어 보았다. 그제서야 밖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 소리임에 분명한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것이 장서관의 환기 시설 노릇을 하는 것이다. 당연하지. 여름에는 공기가 쉬 혼탁해질 터이니... 습기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 양피지가 마르지 않는다. 허나 이 건물을 설계한 자는 환기와 보습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구나. 보아라, 환기구를 교묘한 각도로 배치해 놓으면, 한쪽 구멍으로 들어온 바람이 방을 돌고 나가면서 조금 전에 우리가 들은 요상한 소리를 내게 되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 장서관에 침입한 자는, 거울에 당하고, 약초 연기가 불러일으키는 환상에 당하고, 이 소리에 정신이 혼비백산을 하고 말 게다. 우리만 해도 조금 전에는 귀신이 우리 얼굴에다 숨결을 내뿜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바깥 바람이 세어, 바깥 바람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니 망정이지... 이제 이 수수께끼도 풀린 게야. 그러나 이런 수수께끼만 풀면 뭣 하나? 나가는 길을 못 찾고 있는데...'
사부님은 이런 말을 하면서 미궁 안의 방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두루마리의 글귀는 비슷비슷해서 읽어 봐야 별로 길잡이가 되지 못했다. 우리는 새로운 7면벽실에 이르러 옆방을 지났지만 거기에도 출구는 없었다. 우리는 들어간 길을 되짚어 근 반시간을 헤맸지만 여전히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했다. 어떤 점에서 사부님은 우리가 실패했다고 결론지었다. 사부님까지 실패를 스스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아침에 말라키아가 우리를 발견하기까지 거기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모험의 종말은 비할 바 없이 비참해지는 셈이었다. 천우신조, 내려가는 계단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우리 모험의 비참한 종말을 예견할 즈음이었다. 우리는 하늘에 감사하면서 의기 양양 그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주방으로 내려온 우리는 벽난로를 통해 납골당 복도로 들어갔다. 맹세코 하는 말이지만, 육탈이 된 해골의 표정이 그날따라 그렇게 다정한 친구의 미소 같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교회를 지나고 교회 북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다음 묘석에 앉아 숨을 돌렸다. 시원한 밤 공기는 그것만으로도 하늘이 베푼 방향이었다. 별빛이, 장서관에서 보았던 환상의 공포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장서관은 어떻게 그렇듯이 추악할 수 있습니까?'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사부님이 대답했다.
'장서관을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으면 세상은 더 아름답게 보일 게다.'
우리는 교회를 왼쪽으로 돌아 정문 앞을 지났다. 나는 교회 정문에 양각된, [묵시록]의 <높은 좌석 스물네 개>를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회랑을 지나자 순례자 요사는 지척이었다.
요사 입구에는 뜻밖에도 수도원장이 서 있었다. 원장은 캄캄한 얼굴을 한 채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밤새 찾았습니다. 대체 어디에 계셨는지요? 방에도 안 계시고 교회에도 안 계시더군요.'
원장의 어조는 기분 나쁠 정도로 낮았다.
'이것저것 좀 뒤적거리고 다녔지요.'
말투는 여상스러웠어도 사부님의 표정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원장은 한동안 사부님의 표정을 읽고 있다가 천천히, 그러나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과 성무 직후부터 찾아 다녔습니다. 베렝가리오가 제자리에 없습니다.'
'제자리에 없다니, 대체 무슨 뜻인지요?'
사부님 음성에 생기가 돌았다. 이로써 문서 사자실에서 우리가 만났던 괴한의 정체는 분명해진 셈이었다.
'베렝가리오는 종과 성무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성무 시간에 나타나지 않을 경우 있어야 할 곳에도 없었고요. 제 방으로도 돌아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조금 있으면 조과 성무가 시작되니까 두고 봐야지요만, 조과 성무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인가가 또 터진 것입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과연 베렝가리오는 조과 성무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제3일
찬과에서 1시과까지
이 대목을 쓰려고 하니 문득, 그날 밤, 아니 그날 아침에 내가 느꼈던 피로와 현기증이 되살아 나는 느낌이 든다. 무슨 말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조과 성무가 파한 뒤 원장은 수도사들을 보내어 경내를 뒤지게 하는 통에 수도원은 또 한차례 발칵 뒤집힌 형국이었다. 그러나 베렝가리오의 행방은 잡히지 않았다.
찬과 직전, 베렝가리오의 방을 뒤지전 한 수도사가 침대 밑에서 피 묻은 흰 천 조각 하나를 찾아내었다. 수도사는 나는 듯이 달려가 원장에게 이를 보고하고 천 조각을 보여 주었다. 원장은 그 천 조각에서, 최악의 사태에 대한 최악의 징조를 읽었음은 불문가지다. 마침 그 자리에는 노수도사 호르헤도 있었다. 그는 사태의 전모를 보고 받고는, 말 같지 않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듯이, <피라니?>하고 반문했다. 수도사들의 입을 통해 이 소식은 알리나르도 노인의 귀로도 들어갔다. 알리나르도 노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닌데, 아니야... 세 번째 나팔이 울리면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데...'
윌리엄 수도사는 그 천 조각을 찬찬히 들여다보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뭔가 좀 잡히는 것 같구나.'
그러자 수도사들이 일제히 윌리엄 수도사에게 물었다.
'베렝가리오는 어디에 있습니까? 베렝가리오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잡으신 것입니까?'
'모르겠소.'
사부님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아이마로는, 한 차례 앙천하고 나서 산탈바노 사람 피에트로에게 속삭였다.
'영국 치들은 할 수 없다니까.'
1시과 성무 직전, 그러니까 해뜨기 직전에 수도원장은 불목하니들을 벼랑과 성벽 아래로 보내어 샅샅이 수색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3시과 성무 직전에 빈손만 쥐고 돌아왔다.
윌리엄 수도사는 당분간 사태를 관망하는 것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는 기다리는 것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윌리엄 수도사는 유리 세공실로 니콜라를 찾아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교회 중문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밤새 잠을 설친 탓에 나는 거기에 앉은 채로 몇 차례 선잠을 들었다. 젊은 수련사였던 내가 노인들보다 잠이 많았던 것도 무리는 아닐 게다. 노인이란 이미 잘 만큼 잔 데다 또 한차례의 영원한 잠을 준비해야 할 분들이니까.
3시과
나는, 몇 차례 선잠에 든 덕분에 가뿐한 몸으로 교회를 나올 수 있었으나 사실 머리 속은 교회로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어지러웠다. 인간의 육체가 밤 시간이 아니면 평화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다를 바 없나 보다. 나는 문서 사자실로 올라가 말라키아 수도사의 허락을 얻어 장서 목록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장서 목록을 건성으로 넘기고 있었을 뿐, 내 관심은 거기에 않아 있는 수도사들에게 쏠리고 있었다.
그들의 침착, 그들의 냉정이 내 눈에는 그렇게 좋아 보일 수 없었다. 그들은 일에 몰두한 나머지 두 형제가 참혹하게 목숨을 잃고 한 형제가 행방 불명이 되어 수도원 경내가 벌집을 쑤신 듯하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 이러니 우리 베네딕트 교단의 위명이 허명이 아닐 수밖에... 수세기 동안 우리 교단의 수도사들은, 야만족의 무리가 몰려와 수도원을 노략질하고 왕국에다 불지르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여전히 양피지와 잉크 단지를 놓지 않고, 읽고 쓰기를 게을리 하는 법 없이 하느님 말씀을 다음 세대로 물렸는데 앞으론들 그러하지 않겠는가. 지복 천년이 오고 가는 데도 일고 쓰기를 계속했는데 누가 이들을 말릴 수 있으랴...
나는 문서 사자실 수도사들을 바라보면서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
그 전날 나는 베노로부터, 회서에 접근할 수 있다면 자기는 죄 짓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것짓말을 하고 있는 것도, 농담을 하고 있는 것 도 아니었다. 수도사라면 서책을 탐하는 것은 마땅한 노릇. 더구나 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도원의 법을 지키기 위함인 바에야. 속인이 성희에 유혹을 느끼고 재속 사제가 부자 되는 꿈을 꾸는 세상에 수도사가 지적인 서책에 유혹을 느낀다고 해서 어찌 탓할 수 있을 것인가.
장서 목록을 한 장씩 넘기자 일련의 기묘한 서명이 춤이라도 추듯이 장서 목록에서 내 눈앞으로 뛰어드는 것 같았다.
퀸투스 세레누스의 [의약에 관하여], 아르토스의 [현상], 아이소포스의 [동물의 성질에 관하여], 아에티쿠스 페로니무스의 [우주 형상지], 아르쿨푸스 주교가 기획하고 아담나노가 받아쓴 [해외의 성지에 관하여], 퀸투스 율리우스 힐라리오의 [세계의 기원에 관하여], 박식사 솔리누스의 [세계의 지리와 기적에 관하여],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쓴 [천문학 대전]...
나에게는 그런 괴이한 사건이 수도원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까닭인즉, 수도사들이라는 사람들은 바로 학문에 몸을 바친 사람들이고, 수도원 장서관이란 곧 천상의 예루살렘이자, <미지의 세계>와 하데스의 변경에 가로놓인 지하 세계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모두 장서관에, 장서관의 규칙과 금기에 완전히 매료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장서관과 더불어, 장서관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때가 이르기만 하면 장서관의 철통같은 방어막에 반기를 들 음흉한 꿈을 품은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어째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려고 해서는 안되며, 이런 사람들이 어째서 자기네 장서관 비밀에 접근하는 자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그들에게는 지적인 해갈에의 유혹이 있었고, 지적인 긍지가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교단을 세운 분들이 상상했던 필사사 수도사들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필사사 수도사들은 하느님의 뜻에 갇혀 의미도 모르는 채 그저 베끼고, 기도하듯이 쓰고, 쓰는 듯이 기도했을 뿐이다. 이 수도사들이 왜 필사사의 본분을 벗어났던가? 이것이 어찌 우리 베네딕트 교단만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까 보냐.
우리 교단은 지나치게 비대해 왔으니, 수도원장은 언감생심 군주와 세력을 겨루지 않았던가. 그런데 내가 어떻게, 우리가 머물던 수도원의 원장에게서, 두 적대하는 군주를 화해시키면서 또 하나의 군주 노릇을 겨냥하는 원장에게서 이런 수도원장의 전형을 보지 않을 수 있으랴. 수도원이 축적한 지식의 부는, 상품의 교환 수단, 자만을 위한 사치품, 허장성세의 빌미로 이용된 지 오래지 않던가. 기사가 갑옷과 기치를 자랑하듯이 우리 교단의 수도원장들은 채식한 필사본을 자랑하지 않았던가. 작금에 와서 이러한 작태는 나날이 우심해 가니 이것이 대체 무슨 미친 수작인가. 이제 우리 교단의 수도원은 학문을 주도하던 초장의 그 기세를 잃고 말았다. 교구의 부속 학교, 도시의 조합, 각지의 대학이 앞을 다투어 서책의 필사본을 만들기에 이르러 이미 솜씨로 보나 양으로 보나 수도원을 앞지르는가 하며 심지어는 새 서책을 발간하기까지 하니, 그 수도원의 불상사가 어쩌면 이런 어제오늘의 사태에 그 까닭이 있는지도 모르는 일...
사부님과 내가 머물고 있던 그 수도원 원장은 어쩌면, 학문의 그릇인 서책을 발간하고, 필사하는 기능의 빼어남을 자랑하는 마지막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수도사들은 필사라고 하는 그 신성한 작업에 만족할 수 없었기가 쉽다. 그 수도원 수도사들은, 지식에 대한 신선한 충동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연에 대하여 느끼는 생소한 경이를 서책으로 엮어 내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당시에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나이도 먹고 경험도 할 만큼 한 지금에 와서는 명약관화하다), 수도원 장서관을 철통같이 싸고도는 그 수도원의 그러한 태도는 수도원의 우위를 스스로 허물어뜨리자는 태도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그들이 장서관을 싸고돈 까닭을 이해한다. 만일에 수도원만이 소장하고 있는 새로운 학문이 수도원 밖에서 자유로이 나돈다면 신성한 수도원은 교구의 부속 학교나 도시의 대학과 다를 바가 없어지고 이러써 수도원의 신성은 허물어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속세와 담을 쌓은 채로 그 권위와 권력을 고집만 하고 있어서 될 일이던가? 그러면 언제까지나 그 신비스러움과 위대함이 이를 검증하고자 <옳음과 그름>을 따지는 논란에 무너지지 않는다던가?
... 그래, 이 수도원 장서관을 둘러싸고 있는 침묵과 어둠에는 나름의 까닭이 있을 것이다. 장서관은, 수도삳르의 접근을 저지함으로써만 그 지식을 보존할 수 있다. 학문은 재물이 아니다. 재물은 아무리 사악한 손길을 거쳐가도 물리적으로 손상되지 않는다. 아니, 학문이란 값비싼 옷과 같은 것이어서 자주 입고 장식을 달아 나가면 필경은 낡고 만다. 서책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만지는 손이 여럿이면 책장은 너덜거리게 되고, 잉크는 바래고 황금빛 채식은 떨어져 나가고 만다...
나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
내 눈에 티볼리 사람 파치피코가 보였다. 그는 습기 때문에 서로 달라붙은 책장을 넘기고 있었는데, 책장 넘기기가 힘들어서 그랬겠지만 자꾸만 엄지와 검지에 침을 묻혀 가지고 넘기는 바람에 책장에 침 자국이 묻어 났다. 책장을 넘긴다는 것은 앞으로 접어 나간다는 뜻이다. 그러자면 서책의 한쪽 한쪽이 먼지 자옥한 공기에 노출된다. 이래서 양피지의 섬세한 주름이 펴져 버리고, 침이 묻은 부분에 곰팡이가 스는가 하면 서책의 솔기가 닳아져 나간다. 정이 과하면 무사는 한미와 유약에 빠지는 법. 마찬가지로 과도한 사랑은 서책을 병들게 하고 마침내 그 병으로 명을 다하게 하는 것...
그러면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서책을 독서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보존의 대상으로만 삼아야 마땅한가? 서책을 사랑하는 나의 우려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사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나는 가까이에 있던 주서사인 이오나 사람 마그누스를 보았다. 그는 부석으로 양피지 문지르는 작업을 마치고 활석으로 이를 부드럽게 마름질한 다음 자로 면을 고르고 있었다. 그 옆의 톨레도 사람 라바노는 서안 위에 양피지를 펴놓고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은 다음 금속자를 대어 가로선을 긋고 있었다. 곧 이 선과 선 사이에 색색의 글씨와 그림이 그려지면, 학문이라는 보석이 반짝이는 또 하나의 성보 상자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두 형제는 지상의 낙원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오로지 세월만이 사멸시킬 수 있는, 새 서책을 만들고 있었다. 세월만이 사면시킬 수 있는, 따라서 이 땅의 지상적인 세력이나 존재가 서책이나 장서관을 범하기는 언감생심이었다. 서책과 장서관은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하면, 어째서 문을 열고, 살아 있는 지식이 살아서 나가게 할 수 없는 것일까? 베노가, 베난티오가 노리던 것은 바로 지식으로 하여금 살아서 나가게 하는 것이었을까?
뭐가 뭔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생각하기가 두려웠다. 어쩌면 베노나 베난티오는, 수도사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 회칙이나 달달 외고 오는 세월이나 맞고 보내면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뒤로 내가 산 삶이 바로 회칙이나 달달 외면서 오는 세월이나 맞고 보내는 삶이었다. 나는, 세계가 피와 광기의 폭풍 속으로 깊이깊이 가라앉는데도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나는 주방으로 내려갔다. 요리사 중에 얼굴이 익은 사람이 있어서 배식을 받고 보니 진수 성찬이었다.
6시과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식탁 구석에 앉아 있는 살바토레를 보았다. 그 역시 요리사의 호의를 입었음인지 양고기 파이 접시가 보기 좋게 수북했다. 그는 음식을 처음 먹오 보는 사람인 양 부스러기 하나 떨어뜨리지 않고 아주 열심히 먹고 있었다. 보고 있으려니 살바토레는 식사라고 하는 이 희한한 행사를 허락하신 하느님께 크게 감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향하여 한 쪽 눈을 징끗해 보이고는. 예의 그 뜻을 종잡기 어려운 말로, 하도 굶은 세월이 길어서 그 세월을 먹어 버리듯이 음식을 먹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는 시골에서 보낸 고통스럽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풀어 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고향은 공기고 더럽고 별나게 비가 잦은 곳이었다. 논밭은 비만 오면 썩어 갔고 마을에는 시도 때도 없이 역질이 창궐했다. 철마다 홍수가 나는 바람에 논밭의 이랑이라는 이랑은 그때마다 허물어져 씨앗 한 말을 뿌리면 두 되 가웃을 거두었고 두 되 가웃을 뿌리면 빈손 털기가 일쑤였다. 지주나 소작인이나 얼굴이 희기는 마친가지였으나 굶어 죽는 수는 소작인이 많았던 것은 소작인의 수가 지주의 수보다 많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면서 그는 웃었다. 씨 보리 두 되 가웃의 값은 15솔도, 한 말 값은 60솔도... 그래서 재속 성직자들은 맨날 말세가 왔다고 주장했으나 살바토레의 부모와 조부모는 과거에도 그런 시절이 연속이었던 것을 보면 세상은 맨날 말세인 모양이라고 웃었다. 떨어진 새도 주워 먹고, 오다가다 만나는, 굶어 죽은 짐승까지 뜯어먹었지만 그것으로 배가 찰 리가 없었던 마을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가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살바토레는 배우라도 된 양 과장된 몸짓을 동원하여 이른바 <갈 데까지 간 인간 악종>, 바로 전날 매장된 무덤에 손을 넣은 인간 말종 이야기를 했다. 살바토레를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줄곧 <얌냠> 소리까지 내면서 양고기 파이를 베어먹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면서도, 시체를 파먹는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험악해지는 그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살바토레는 이 이야기에 이어, 무덤을 파는 게 성에 차지 않았는지 숲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행인을 칼로 찌르고는 그 고기를 먹는 인간 말종 이야기도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살바토레의 얼굴이 꼭 그런 자의 얼굴 같았다.
'푸욱!'
살바토레는, 인간 말종이 행인을 찌르는 대목에서 제 목에 칼을 들이대고, 소리까지 내면서 찌르는 시늉을 하다가는 다시 입맛을 다셨다. 갈 데까지 간 악종들은 사과나 계란으로 아이를 꾀어 잡아먹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살바토레는 엄숙하게, 그래도 그들은 요리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헐값에 삶은 고기를 팔고 다니던 사람 이야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싼값으로 고기를 사 먹으면서 하늘에 감사했으나 성직자는 그 고기가 사실은 인육이라는 것을 온 마을에 폭로했고 노한 마을 사람들은 이 고기 장수를 찢어 죽였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기 장수가 찢겨 죽어 무덤에 묻힌 그날 밤에 그 마을 사람 하나가 이 사내의 무덤을 파서 그 살점을 먹다가 발각되어 역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살바토레는, 내가 프로방스 사투리나 이탈리아 반도 각지의 사투리를 기억나는 대로 떠올려야 겨우 알아먹을 수 있는 잡탕말로, 고향을 떠나 세상을 주유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에는 내가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도 여럿 등장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뒤에 만났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어떻게 보면 나는 살바토레 같은 사람 덕분에 위험한 모험과 이보다 더 위험한 범죄 행위를 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는 늙은 당나귀가 되어 있는 지금의 피폐해진 기억력 속에 하나의 형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황금의 기억과 산의 기억이 하나가 되면 황금 산이 되어 버리는 것... 이것이 상상력이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행 중에 사부님은 대중과 배우지 못한 사람을 지칭하는 뜻으로 <범부>, 혹은 <평신도>라는 말을 자주 썼다. 이 명칭으로 사부님과 동문 수도사들은 단순한 민중, 혹은 무학자들을 규정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말은 단순한 사람, 혹은 평시도를 규정하는 데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까닭은 이탈리아 반도 각지의 도시에서 나는 성직자가 아니면서도 무식하지도 않은 상인이나 장인들을 무수히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제 지방의 속어로 말할 뿐, 언어로 사람 사는 이치를 드러내는 데는 모자람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각지에 할거하고 있는 전제 군주들 중에는 신학이나 의학이나 논리학이나 라틴어에는 무지했지만 평신도라고 할 수도 없고 교양이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사부님도 <범부>, 혹은 <평신도>라는 말에 관한 한 낱말의 선택이 상당히 범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살바토레는 범부, 혹은 평신도라는 표현에 걸맞는 사람이엇다. 살바토레는, 여러 세기 동안 기근과 봉건 제후의 수탈에 시달인 농민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살바토레는 범부였을지언정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가 살아온 것과는 다른 별종의 세상을 꿈꾸었다고 말했다. 그가 꿈꾼 별종의 세상이, 꿀이 흐르고 맛있는 건락 덩어리와 향기로운 순대가 열리는, 그런 나무가 자라는 세상이었으니 이 얼마나 단순한 인간인가.
이 세상을 부정하면서, 불의가 신의 섭리라는 이름으로 백일하에 자행되는 세상, 하느님의 의도가 종종 우리를 버리는 이 눈물의 골짜기 같은 세상을 부정하면서 살바토레는 단순한 희망에 사로잡힌 채 여러 나라 여러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는 고향 몽페라트에서 리구리아로, 리구리아에서 북부 프로방스로, 또 여기에서 프랑스 왕의 여러 속지를 두루 돌아다녔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시 유럽 전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부랑자 패거리와 그런 패거리의 일원이 되어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부랑자 무리는 그 구성원들이 복잡하기가 그지없었다. 가짜 수도사, 야바위꾼, 협잡꾼, 사기꾼, 무전 여행자, 남루 걸객, 문둥이나 절름발이, 혹세무민을 일삼는 기술사, 행려병자, 이교의 나라에서 상처만 안고 도망쳐 나온 떠돌이 유태인, 정신 이상자, 박해에 쫓기는 망명자, 한 쪽 귀를 잘린 전과자, 남색꾼...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에 행상 장인, 직공, 땜장이, 의자 수리공, 칼갈이, 바구니 장수, 석공, 태형 맞고 나온 각설이, 쇠 벼리는 사람, 불한당, 상습 도박꾼, 극렬 분자, 뚜쟁이, 주정뱅이 변절자, 장물아비, 치기배, 성직 매매자, 허술한 사람을 등쳐먹고 사는 파렴치한, 가짜 술장수, 교황청 봉인 위조범, 교회 문전에서 구걸하는 가짜 사지마비 환자, 수도원에서 도망 나온 땡중, 방랑 시인, 면죄부 장수, 가짜 선지자, 점쟁이, 요술사, 무당, 가짜 탁발승, 각양각색의 우상 숭배자, 사기와 폭력으로 처녀만 전문으로 욕보이는 치한, 수종, 간진, 치질, 통풍, 열창, 게다가 광적인 조울증까지 고친다고 풍을 치는 약장수까지... 없는 게 없었다. 악성 궤양 환자인 척하느라고 온몸에다 회를 칠한 자, 구제 불능의 폐병 환자 행세를 하느라고 입에다 핏빛 물감을 찍어 바르고 다니는 자, 사지가 멀쩡하면서도 목발을 짚고 휘청거리며, 다리가 부어서 가래톳이라고 서고 상처에 딱지가 앉은 양 노란 물감을 칠한 채 칼로 제 대가리에 상처를 낸 다음 교회로 들어가는 자도 있었다. 이런 자가 쓰러지듯이 교회 마당으로 들어가 게거품을 뿜고 눈을 까뒤집거나 코에 미리 넣어 둔 딸기즙이나 붉은 물감을 질질 쏟으면서 자반뒤집기를 해댈 양이면, 적선을 권면하던 신부의 설교를 기억하는 신도들은 앞을 다투어 돈이나 먹을 것을 내어 오고는 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집 없는 자를 그대들 거처에 재우는 일이 바로 그리스도를 찾고 그리스도께 잠자리를 보아 드리는 일이며, 그리스도께 옷을 드리는 일인데, 이는 물이 불을 끄듯이 선행이 우리 죄악을 씻음임이라...'
부랑자들은 신부의 이러한 설교에 마땅히 감읍해야 할 일이었다.
사부님과 헤어지고 나서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도 나는 다뉴브 강변에서 악마들처럼 무리를 짓고 무리의 이름까지 태연히 내건 이런 부랑자를 수없이 보아 왔다. 이런 자들은 지금도 더러 눈에 띈다.
평범한 대중들 사이에 끼어 있는 이런 무리는 흡사 길 위로 진창이 흘러내려온 형국이었다. 이런 부랑자의 무리에는 설상가상으로 믿음이 단단한 사제, 새로운 희생자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이교도, 선동의 전문가들이 가세하는 법이다. 교황 요한이 수도사들 중에서도 탁발하는 수도삳르을 가장 통렬하게 비난하고 나선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교황은 청빈을 설교하는 수도사들과, 그 청빈을 실천하는 평신도들이 이루는 큰 줄기의 운동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교황은, 물감으로 그린 깃발을 흔들고, 청빈을 설교하고, 돈을 우려내면서 호기심이 강한 평신도들을 자극한다고 그들을 매도했다. 성직 매매을 일삼는 부패한 교황이 청빈을 설교하는 탁발 수도사 무리를 버림받은 자들의 무리, 날강도의 무리라고 매도하는 것은 될 말이 아니지만 실제로 그러했던 것을 어쩌랴.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 반도 여행 경험이 있다고는 하나 일천하기 짝이 없었던 나에게 청빈을 설교하는 진짜 탁발승 무리와, 청빈을 핑계로 기존의 교회 제도에 반기를 드는 버림받은 자들의 무리를 구별할 눈이 없었다. 당시에 나는 토스카나 지방의 알토파시오 수도사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설교를 통하여, 신도들에게 파문의 위협을 가하되 구속을 약속하고, 재물을 바치기만 하면 강도 살인죄, 형제 살인죄, 심지어는 위증의 죄까지도 사면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햇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네들이 세운 빈민 구휼원에서는 하루에도 백여 차례씩 미사를 집전하고 헌금을 받는데, 이 헌금으로 2백 명의 가난한 처녀들에게 결혼 지참금을 마련해 주었노라고 선전하고는 했다.
파올로 조포 수도사의 이야기도 들은 바 있다. 라치오 지방의 리에티 숲에 은거하던 은수사였던 파올로 조포 수도사는 성령을 통하여 직접 계시를 받았는데 이 계시에 따르면 육욕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기 교하에 입문하는 여신도들을 자매라고 부르면서, 옷을 벗겨 다섯 명씩 땅에다 무릎을 꿇려 십자가 꼴을 만들게 한 뒤, 하느님께 바쳐지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의식이랍시고 평화의 입맞춤이라는 것을 강요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사실이었을까? 스스로 성령의 계시를 받고 대각을 이루었다는 은수사들과, 참회의 기치를 들고 이탈리아 반도를 누비면서 재속 성직자와 주교의 비리와 악덕을 고발한 죄로 박해받고 있던 청빈한 수도사 무리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살바토레의 이야기와 나 자신의 경험을 두루 미루어 살펴도 나에게는 이 두 무리를 구분하는 경계선 같은 것은 선명해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같은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다른 것 같았던 것이 당시의 사정이다. 살바토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살바토레야말로 뚜렌느의 절름발이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전설에 따르면 뚜렌느의 절름발이들은 마르티누스 성인의 시신을 몹시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그 까닭은 마르티누스 성인의 은총이 이들 절름발이에 미치면서 절던 다리가 온전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면 절름발이들은 절던 다리가 온전해지는데 왜 마르티누스 성인의 은총을 두려워했을까? 이유인즉, 저는 다리가 수입원인데 다리가 온전해지면 그만 수입원이 온데간데없어지기 때문이란다. 절름발이들은 성인의 은총을 피하여 국경으로 도망쳤고, 성인의 은총은 이들을 쫓아 무자비하게(?) 성치 못한 다리를 낫게 해줌으로써 이들의 사악한 행위를 벌했다는 전설이다. 몰골이 흉측한 살바토레도, 이런 무리들과 기거하면서 역시 박해받던 수도사인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의 말씀을 듣던 시절을 술회할 때는 그렇게 밝아 보일 수 없었다. 살바토레는 이 설교를 듣고, 청빈한 떠돌이 삶은 필요에 따라 좆아야 할 삶의 양식이 아니라 헌신과 희생의 행위로 마땅히 감수해야 할 삶의 양식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즉시 대중에게 참회를 외치는 탁발 수도사 무리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살바토레는 대중에게 참회의 삶을 요구하는 종문이나 종파의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고 그 교리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추측컨대 살바토레는 파타리니 파와 발도 파, 아니면 카타리 파와 아르날도 파 및 겸손을 삶의 으뜸가는 가치로 삼던 우밀리아티 파를 전전하면서 그 유랑의 삶 자체를 종교적 사명으로, 주린 배를 채우는 일을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으로 그릇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살바토레는 대체 언제까지 이런 상태에 있었을까? 내가 알기로, 그는 약 30년 전쯤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 교리를 익힌 것 같다. 그가 어설프게 쓰는 라틴 어는 거기에서 배웠기가 쉽다. 살바토레는 이렇게 배운 엉터리 라틴 어를, 가난한 운수행각 시절에 떠돌아다니면서 주워들은 지방 사투리, 우리 게르만의 용병에서부터 달마티아의 보고밀 교단 수도자에 이르기까지, 그가 만난 온갖 종류의 떠돌이들에게서 배운 잡탕 언어와 섞어서 썼다. 그는, 그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속하는 소형제파 수도원에서 참회의 삶에 정진했으나 함께 머물던 도반 수도사들의 신앙이나 종교적 신념은 차마 눈뜨고 볼 것이 아니었다고 술회했다(이상한 발음으로 <페니텐치아치테>, 즉, <참회하라>는 말을 할 때마다 살바토레의 두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윌리엄 수도사의 호기심을 자극하던 바로 그 발음이었다. 뒤에 설명하게 되겠지만 이 발음에 살바토레의 종교적 편력이 요약되어 있다). 살바토레의 설명에 따르면 소형제회의 도반 수도사들은, 가까운 교회의 참사회원이 공금 횡령과 성직 모독의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 교회를 습격, 당사자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인 다음 그 집을 노략질한다. 이 일 때문에 주교가 무장한 경호병 부대를 파견하자 살바토레는 탁발승 패거리와 소형제회 행각승 무리에 들어 이탈리아를 방랑하게 된다. 당시 이들에게는 규범도 계율도 없었다.
살바토레는 이탈리아 북부에세 뚤루즈로 옮겨 간 뒤에 기이한 일을 겪게 된다. 십자군 대원정 이야기에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하게 된 일이 그것이다. 이 희한한 십자군 이야기의 발단은 이러하다. 그 즈음 목동들과 천민 무리가 모여 바다를 건너가 믿음의 운수를 쳐부수기로 결의하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일러 <빠스뚜로>라고 했다. 이들의 명분은 이교도들과의 전쟁을 통하여 기독교의 명예를 되찾는다는 것이었으나 실은 자기네들의 비참한 팔자를 면하고자 궐기한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 무리에서, 머리에 온갖 잡탕 사상이 가득 가득 든 두 지도자가 나왔으니 그중 하나는 못된 짓을 저질러 교회에서 파문당한 사제, 또 하나는 성 베네딕트 수도회를 탈퇴한 수도사였다. 무지한 대중은 이들의 선전에 이성을 잃고 무리를 지어 휘하로 모여들었다. 이들의 무리 중에는 심지어는 열예닐곱 살바기 소년들도 있었다. 이런 애송이까지 부모의 말을 들은 적도 없고 빈손에 배낭 하나 꿰어 차고와 지팡이 하나 들고 논밭을 떠나 이들을 따르니 그 수는 삽시간에 엄청난 숫자로 불어났다. 이 무리에게는 이성도 정의도 없었으니, 오직 무리의 흥분을 빌어 무리의 폭력을 행사하고 무리의 염치를 빌어 마음내키는 대로 노략질 한 것도 당연했다. 한 동아리로 모이면서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약속의 땅에 대한 동경이 이들의 광기에 불을 지르니 이들은 흡사 미치광이의 무리 같았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 폭풍처럼 경향을 누비면서 닥치는 대로 빼앗고 부수고 하다가 혹 무리 중 하나가 붙잡히면 우르르 몰려가 파옥하고 동아리를 구하고는 했다.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유태인은 보는 족족 죽이고 그 재산을 강탈한다는 것이었다.
'왜 유태인을 죽인 겁니까?'
내가 살바토레엑 물었다.
'왜 안된다는 것인가?'
살바토레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살바토레의 말에 따르면, 유태인들은 기독교인의 숙적이고, 그들의 재물은 가난한 기독교인들로부터 긁어 들인 것이었다. 나는 살바토레에게, 영주와 주교들 역시 세수와 십일조로 재산을 늘이는데 재산을 늘인다고 해서 유독 유태인만 공격하는 것은 적을 제대로 짚어 내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내 말에 살바토레는, 마땅히 쳐부숴야 할 적은 영주와 주교일 것이나 그 적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좀 약한 적은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옳거니, 평신도가, 부정적인 의미로 <평신도>라고 불리는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평신도들에게는 이성이 없어서 진짜 적이 누구인지 몰랐던 것인데, 이를 안 지방의 토호나 영주들을 이 빠스뚜로로부터 제 재산이 유린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나머지 슬며시 이 무리의 지도자들에게, 공격하여야 마땅한 부자는 오직 유태인 부자뿐이라는 생각을 주입했던 것이었다.
나는 살바토레에게, 대중에게 유태인을 공격하자는 생각을 주입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살바토레는 내가 요구하는 정답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나는, 다수의 대중이 모이고 어떤 요구와 약속으로 들떠 버리면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무리는 그 말의 책임을 따지지 못하게 된다고 믿는다. 내가 알기로 비록 무리가 오합지중이었다고는 하나 그 지도자는 수도원이나 교구 부속 학교에서 공부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천한 농민이나 목동들이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번역해서 했다고 하더라도 그 언어 자체는 토호나 영주의 언어와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무리의 지도자와 토호 및 영주는 한통속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리에게 유태인이 손쉬운 상대였던 것은, 교황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유태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빠스뚜로는, 프랑스 국왕의 영토에 속하는 성채에 무리 지어 피신해 있는 유태인들을 공격했다. 유태인들이 성채 아래로 바위나 나무토막 같은 것을 굴리며 소극적으로 저항하자 빠스뚜로는 성채 문에다 불을 지르고 저항하는 유태인들에게 화염 공격을 계속했다. 빠스뚜로를 격퇴하기에는 자기네들의 힘이 미약하다는 것을 깨달은 유태인들은, 할례받지 않은 자들 손에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현명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무리 중에서 가장 용기있는 자를 하나 뽑아 무리를 상대로 칼질해 줄 것을 부탁하고 나섰다. 부탁을 받은 유태인을 이에 흔연히 도의, 자그마치 5백 명의 동족을 죽이고는 유태인 아이들만 데리고 성채를 나와, 아이들을 기독교의 손에 붙이니 기독교도로 세례를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한다. 빠스뚜로 무리는, 제 백성을 그렇게 쳐죽이고 어떻게 살기를 바라느냐고 이 유태인을 꾸짖은 뒤 찢어 죽이고는 아이들은 살려 기독교로의 개종을 허가했다. 빠스뚜로는 유태인에 대한 공격을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급기야는 까르까손느로 진격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살인과 노략질로 가는 길을 폐허로 만들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나서야 프랑스 국왕은 이들에게 살인과 노략질을 중지하도록 엄중하게 경고하고, 이들이 경유할 도시의 영주들에게 저항할 것을 명했다. 프랑스 국왕이, 유태인 역시 제국의 신민이니만치 그 목숨을 지켜 주어야 마땅하다는 공식 견해를 밝힌 것은 이 즈음의 일이었다.
국왕이 이 대목에 이르러서야 유태인들을 비호하고 나선 까닭은 무었이었을까? 국왕은 빠스뚜로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는 사태가 걱정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당시 무역에 큰 몫을 하고 있었던 유태인들의 원망받이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국왕으로서는 기독교도들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빠스뚜로를 진압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도를 동원하는데 유태인 보호라는 명분은 실패작이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숙적인 유태인 비호는 당치않은 일이라면서 국왕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기독교인들고, 우태인들의 고리채를 쓰고 있던 많은 도시 빈민들은, 빠스뚜로가 유태인을 죽이고 그 재산을 몰수하는 데 내심 쾌재까지 부르고 있었던 판국이었으니 당연했다. 형편이 이렇게 되자 국왕은, 빠스뚜로에 대하여 재정적인 원조를 하는 자에게는 사형으로 그 죄값을 물린다고 포로하고는 대규모의 용병을 모병하여 이 빠스뚜로를 공격했다. 많은 빠스뚜로 무리는 국왕이 파견한 군대에 목숨을 잃었고, 목숨을 부지한 자들은 숲으로 도망쳤으나 오래지 않아 이들 역시 국왕이 보낸 용병들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국왕의 군대는 바로 이 숲에서 잡아 온 잔당을 한꺼번에 2, 30명 씩 교수대에 매다니, 이들의 처참한 최후는 그 시대의 평화를 해치려는 자들을 경계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살바토레가 이 무리의 난동을 무슨 대단한 업적이나 되는 양 묘사했다는 점이다. 아닌게아니라 살바토레는, 이른바 <빠스뚜로> 무리의 목표가 이교도들로부터 그리스도의 성료를 되찾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성묘를 찾는 원정은 은수사 페트루스, 성 베르나르의 시대에, 프랑스의 루이 왕 치세에 이루어졌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그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살바토레는 프랑스 국왕의 용병대에 쫓겨 황급히 프랑스 땅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이교도의 땅으로 그리스도의 성묘를 찾으러 갈 수는 없었다. 살바토레는, 자기는 당시 노바라로 갔기 때문에 전후 사정에는 어둡다고 말했다. 그는 노바라에서 카잘레로 가서 소형제회 수도원에 몸을 붙였다(그가 레미지오를 만난 것은 바로 카잘레의 소형제회 수도원에서 였던 것 같다). 그 즈음은 많은 수도삳르이 교황의 박해를 피해 교적을 바꾸어 다른 교단 수도원에 몸을 붙임으로써 이단 심판을 면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당시의 사정을 카잘레 출신의 거물 우베르티노 수도사로부터도 들은 적이 있었다. 살바토레는, 만고 풍상을 겪은 뒤에도, 갖가지 잔재주를 몸에 익히고 있었던 덕분에(그는 떠돌이 생활을 할 동안 이 잔재주를 나쁜 일에 쓴 적도 있었으나 더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쓴 적도 있다고 말했다), 당시 사부님과 내가 머물던 수도원 식료계의 조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살바토레는 베네딕트 수도회 교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면서도 식료계 수도사 레미지오의 조수가 된 덕분에 식료 행정에 참여하면서 훔치지 않고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이단 심팜관들의 눈을 피하여 주님의 은혜를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살바토레를 관심 있게 보았던 것은, 그의 특이한 외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주위에서 있었던 일이 당시 이탈리아를 술렁거리게 했던 수많은 사건과 운동의 빛나는 축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의 이야기에서 떠오른 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하느님의 율법을 거역하는 자를 좋게 보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살바토레의 모습을 읽는 순간부터 우리가 속해 있는 모듬살이의 현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아지경의 환상에 쫓기고 악마의 율법과 하느님의 율법을 혼동하여 학살을 자행하는 폭도와, 치밀한 계산 아래, 조용히, 그리고 냉정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바토레는 비록 폭도의 무리에 속해 있었다고는 하나 치밀한 계산 아래 조용히, 그리고 냉정하게 도반을 죽임으로써 제 영혼을 어럽힐 그런 위인 같지는 않았다.
나는 수도원장의 완곡한 어법 뒤로 묻어 났던 돌치노 수도사 이야기를 살바토레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 어쩌면 당시에는 돌치노에 대한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도 그의 망령은 며칠 동안이나 내가 듣는 대화를 넘나들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나가는 말로 살바토레에게 물어보았다.
'혹 세상을 주유하시면서 돌치노 수도사를 만나신 적은 없습니까?'
그의 반응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그는 두 눈을 화등잔같이 뜨고 거듭거듭 가습에 성호를 긋고는 횡설수설, 나로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어대었다. 요컨대 그는 내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했던 듯하다. 내 질문이 나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를 믿고 나에게 우정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던 살바토레는 질문이 던져진 순간부터 나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우물쭈물 핑계를 대고는 자리를 떠버렸다.
그를 붙잡고 늘어즐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이름만으로도 능히 수도사들에게 전율과 공포를 안기는 돌치노 수도사는 대체 누굴까? 그러나 나는 내 궁금증을 더 이상 참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을 그렇게 정하고 나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우베르티노 수도사!
처음 만났을 때 우베르티노 수도사는 돌치노라는 이름을 들먹거린 적이 있었다. 우베르티노 수도사라면, 수도원 수도사와 탁발 수도사, 그리고 이 구별이 흐려지는 바람에 많은 기독교도들에게 파란 곡절을 안긴 역사의 비밀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디에서 우베르티노 수도사를 만난다...! 문득 교회에서 기도하는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한동안 노닥거린 다음이어서 머리가 무겁지 않았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교회에 갔다.
그러나 우베르티노 수도사는 교회에 없었다. 저녁 때까지 찾았으나 하릴없었다. 다른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이 궁금증을 한동안 더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이 일 이야기부터 하기로 해야겠다.
9시과
나는 유리 세공소에서 윌리엄 사부님을 만났다. 사부님은 니콜라 수도사와 함께 열심히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었다. 세공소 탁자 위에는 조그만 유리가 여러 장 놓여 있었다. 유리를 틀에다 박으려고 연모로 자르고 적당한 두께로 갈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부님은 이런 유리 몇 개를 집어 자주 눈에 대어 보고는 했다. 니콜라는 대장장이에게, 우리를 끼울 틀의 크기와 모양을 설명했다.
사부님은 유리 세공소에 있는 유리는 모두 연초록 유리뿐이라면서 안경을 만들어도 양피지가 초원으로 보이겠다고 웃으면서 불평했다. 니콜라는 대장장이를 감독하러 대장간으로 갔다. 사부님이 유리 시험을 끝낼 때를 기다려 내가 살바토레 이야기를 꺼냈다.
사부님이, 유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만고 풍상을 다 겪은 사람인데... 어쩌면 돌치노 파의 밥술을 얻어먹었을지도 모른다. 이 수도원은 아닌게아니라 기독교 세계의 소우주로구나. 교황 요한의 사절단과 미켈레 형제만 오면 없는 것이 없을 터이니까.'
'사부님, 저는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녀석아, 뭘 모르겠다는 게냐?'
'첫째는 이단 교파의 차이점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뒤에 여쭙겠습니다. 지금 저는 다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베르티노 어르신과 말씀 나누실 때에는, 성자든 이단자든 필경은 모두 똑같다고 주장하신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원장과 말씀 나누실 때 사부님께서는 이 이단과 저 이단, 그리고 이단과 정통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걸 설명하려고 애쓰시는 것 같았습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사부님께서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을 다른 것이라고 우기시는 우베르티노 어르신을 나무라시면서, 기본적으로 다른 것을 같다고 우기시는 원장님을 질책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부님은 만지작거리던 유리를 탁자 위에 놓고 말믄을 열었다.
'어디 한번 구분해 보도록 하자. 구분하려면 빠리 학파의 용어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 빠리 학파에서는, 만인은 동일한 실체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맞느냐?'
빠리 학파의 주장이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동물은 동물이되 이성적인 동물이요, 인간의 특성은 웃을 줄 아는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장하다. 그러나 토마스는 보나벤투라와는 다르다. 토마스는 뚱뚱한데 보나벤투라는 깡마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구치오네는 나쁘고 프란체스코는 좋다, 혹은 알데마로는 둔하고 아질룰포는 예민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내 말에 모순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형상은 같으면서도 사람에게는 그 고유성이 있다. 따라서 표면상으로 사름을 규정하는 대는 우유성, 즉 다양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하냐?'
'역시 그러하겠습니다.'
'내가 우베르티노에게, 사람이 각기 다른 행동을 해도 인성 자체는 복잡한 작용을 통하여 선에 대한 사랑과 악에 대한 사랑에 공히 지배된다고 했을 때, 나는 그에게 인간의 고유성을 납득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수도원장에게 카타리 파와 발도 혹은 발두스 파가 다르다고 했을 때, 나는 그에게 양자의 우유적 속성이 다양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카타리 파와 연죄한 적이 있는 평신도에게는 카타리 파의 우유성이 있고 발도 파와 연좌한 적이 있는 평신도에게는 발도 파의 우유성이 있어서 화형을 당한 일이 비일비재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을 화형에 처함은 개별적 실체를 태우고 존재의 구체적 행위였던 순수 무구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를 존재하게 한 행위자, 다시 말해서 그를 존재하게 한 분이신 하느님 눈에 좋게 보였던 행위까지 송두리째 화형에 처하는 셈이다. 어떠냐? 이것이면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설명한 것 같으냐?'
'사부님, 저는 발도 파, 카타리 파, 리용의 빈자파, 겸손을 으뜸가는 덕목으로 친다는 우밀리아티 파, 베기니 파, 요아킴 주의자들, 파타리니 파, 가난한 롬바르디아 인들, 아르날도 파, 굴리엘모 파, 루치페리니가 어떻게 서로 다른 지 알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부님은 다정스럽게 내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
'가엾은 우리 아드소, 허나 분간할 수 없는 것이 어찌 너뿐이랴? 지난 두 세기 동안,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우리 세계는 협량과 희망과 절망의 폭풍에 난타당해 왔다... 아니다, 적절한 비유가 못 될 것 같구나. 자, 강을 생각해 보아라. 단단한 땅, 튼튼한 제방 사이를 오래오래 흘러가는 강을... 어느 시점에 이르면 흘러가는 강은 기진한다. 너무 오랜 시간 너무 넓은 공간을 흘렀기 때문이요,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로써 강은 죽음을 맞는다. 죽음을 맞기 때문에 강은 더 이상 제 준재를 느끼지 못한다. 즉, 강의 고유성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강은 강 자체의 삼각주가 된다. 주류는 남을지 모르나 지류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혹 어떤 흐름은 흐르기를 계속하고, 혹 어떤 흐름은 다른 흐름에 휩쓸리나 어느 흐름이 어느 흐름을 낳고 어느 흐름에 휩쓸리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것이 여전히 강이고 어느 것이 이미 바다가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제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를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강은 하느님의 도성이거나 의의 왕국입니다. 이 강은 지복 천년의 땅으로 흐르나 불확실한 세상을 흐르기 때문에 온전하게는 흐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강은 가짜 선지자와 진짜 선지자를 낳으면서 아마겟돈의 전쟁이 벌어질 대평원으로 흘러갑니다.'
'거기까지는 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수세기 동안 우리 모듬살이의 몸이기도 했던 교회의 몸 죽 하느님의 백성이 너무 비대하고, 그 관심의 영역이 넓어져, 지나온 길에 모든 나라의 찌꺼기를 운반하느라고 그 순수성을 상실했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다. 삼각주의 지류는, 되도록 빠른 시간에 바다에 다다르는 순간, 즉 정화의 순간에 이르려는 강의 기도를 반영한다. 나는 비유를 통하여 너에게, 강이 그렇지 않아도 온전하지 못한 판에 여기에 이단의 교파와 개혁의 운동이 가세하면서 아주 난마가 되고 말았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다. 내 하잘것없는 비유에, 힘으로 강둑을 쌓으려 하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는 한 인간의 모습을 덧붙여도 좋겠다. 삼각주의 지류 중에는 중간에서 막혀 버리는 것도 있고 인공의 운하를 통하여 다시 강에 이르는 것도 있고, 처음 그대로 흐르는 것도 있다. 무슨 까닭이거냐? 모든 것을 구속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흐르는 것이다. 제 흐를 길을 제대로 알 수 만 있다면, 이로써 제대로 흐를 수만 있다면 물의 일부를 잃은들 어떠랴.'
'점점 더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겠다. 내게는 비유로 말하는 재주가 없는 모양이구나. 그러니까 이 강 이야기는 잊어버리거라. 대신, 네가 말한 그 많은 개혁 운동 세력은 5백 년 전에 태동하였다가 소멸되어 버리더니 근자에 들어 새로 대두되고 있다는 것만 명심하여라.'
'그러나 이단의 문제가 논의될 때마다 이러한 개혁 운동 세력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사실이다. 이단이라는 것은 그렇게 발흥하고 그렇게 소멸하는 것이다.'
'역시 모르겠습니다.'
'어려우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네 나이에는 모르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내 쉽게 설명해 보마. 자, 네가 도덕의 개혁자가 되어 사람들을 산정에다 모으고 청빈한 삶을 실천한다고 가정하자.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많은 사람들이... 아주 먼 곳에서까지 찾아와서 너를 선지자, 혹은 새로운 사도로 떠받들고 너를 추종할 것이다. 이때 이 사람들이 너를 위해서 왔겠느냐, 아니면 다른 무엇을 위해서 왔겠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저를 위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만... 어째서 다른 것을 위해서 올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선조들로부터 다른 개혁자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선조들로부터 완전한 사회에 관한 전설을 들었기 때문에 네가 세우려는 사회를 그런 사회로 믿고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개혁 운동은 다른 개혁 운동을 계승한 것이라는 뜻입니까?'
'그렇다. 개혁자를 따르는 무리의 대부분은 범용한 평신도들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교리를 구분할 안목이 없다. 그리고 도덕의 개혁 운동이라는 것은 늘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서로 다른 교리 아래서 시작된다. 가령 카타리 파와 발도 파는 종종 뒤섞이기는 하지만 이 양자에는 큰 차이가 있다. 발도 파는 교회와 함께하는 도덕 개혁을 설교하지만 카타리 파는 교회가 달라질 것을 촉구하고 하느님과 도덕을 새로운 눈으로 볼 것을 주장한다. 카타리 파는, 세상이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이라는 두 적대 세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완전한 자와 단순한 평신도를 구별하는 교회를 세운다. 그들에게는 나름의 성사와 의식이 있다. 그들은 우리 성모님 같은 천군을 두되, 한 순간도 권력의 형태를 파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도 계급, 지주, 봉건 영주들이 이 카타리 파에 가담한 이유는 이것으로 설명이 되지 않겠느냐. 그들은 또, 선과 악이라는 적대 세력이 안간에 의해서는 만들어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세상을 개혁할 생각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발도 파, 아르날도 파, 그리고 가난한 롬바르디아 인들은 청빈이라고 하는 이상 위에 전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들이 버림받은 자들을 받아들이고, 노동을 실천하며, 인간의 모듬살이에 묻어 산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악마적인 이단자들로 단죄당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 진작 이르지 않더냐? 그들을 살린 것이 필경은 그들을 죽이는 법이다. 이 세력은, 다른 세력의 선전에 일어선 단순한 평신도들, 만인에게는 똑같은 반역의 충동과 희망이 있다고 믿는 자들을 모으면서 교세를 펼쳐 나가다가 이단 심판의 조사관들 손에 박멸을 당하고 말았다. 이단 심판의 조사관 혹은 이단 심판관들이 다른 교세의 실책을 이들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만일에 어느 한 운동 세력의 종도가 범죄를 저지르면, 이단 심판관들은 이 죄값을 그 운동 세력의 종고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씌우는 게야. 엄밀하게 따져 말하면, 이단 심판관들은 서로 모순되는 각 이단 종파의 겨리를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 한 이단 종파에 덮어씌우는 실수를 곧잘 하는 게다. 그러나 이단 심팜관들의 이 같은 실수는 어쩌면 실수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무슨 까닭이냐? 가령 어느 도시에서 아르날도 파가 세력을 떨칠 경우, 이 세력에는 한때 카타리 파 혹은 발도 파에 속했거나 속하려던 신도들이 가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세한다면 어려 이단 종파의 교리가 두루뭉수리하게 적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돌치노 파의 이른바 사도들은 재속 성직자와 영주들에 대해 물리적인 힘을 행사할 것을 주장한 바 있고 실제로 폭력을 쓰기도 했지만, 발도 파는 여기에 반대했고, 소형제파 역시 반대 의견에 뜻을 같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돌치노 파가 득세했을 당시, 여기애 소형제파와 발도 파의 가르침을 따르던 무리가 섞여 있었던 것으로 확신한다. 단순한 평신도들은 개인적으로 이단을 선택하지 못하는 법이다. 잘 들어 두어라. 단순한 평신도들이란, 제가 사는 지방에서 설교하고, 제 마을을 지나고, 제 마을 광장에 서는 자를 따르는 법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적이 미끼로 삼는 것... 설교의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자라면 이 미련한 군중 앞에서 단 하나의 이단적인 행위만을 제시할 것이다. 성적인 쾌락의 체현과 육체의 친교를 동시에 제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 이러한 설교가 광장에 모인 무리에게는 상식에 반하는 악마적인 모순의 덩어리로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단 각파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요아킴주의자 혹은 엄격주의자가 되고 싶어하던 평신도가 카타리 파의 수중에 떨어지거나, 반대로 카타리 파를 따르고 싶어하던 평신도가 요아킴주의자 혹은 엄격주의자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악마의 장난이다, 이런 뜻입니까?'
'아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그러나 내 미리 너에게 일러둘 것이 있다. 그것은, 지금 나 스스로도 완전하게 납득하지 못한 것을 너에게 설명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인데 문제는, 이단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단순한 평신도들이 여기에 가세한다고(그리고는 파멸한다고) 믿은 데 있을 듯하다. 사실은 단순한 평신도라는 조건이 선행하고 이 조건에서 이단이 생기는 것인데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말의 개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양 떼(여기에는 좋은 양도 있고 나쁜 양도 있다)는 사나운 번견(군대, 혹은 세속적인 권세)이 지켜 주고, 황제나 군주는 목자나 재속 성직자, 다시 말해서 하느님 말씀을 해석자들이 지켜 주고 있다. 이제 내 말뜻을 알겠느냐?'
'알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을 듯합니다. 목동과 수양견은 서로 싸웁니다, 서로가 서로의 몫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 양 떼의 속성을 예견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서로 헐뜯고 싸우는 데만 관심할 뿐, 수양견과 목동은 양 떼를 돌보지 않는다. 그래서 양 떼의 일부는 밖으로 버려진다.'
'밖이라니 어떤 밖이지요?'
'변두리에 처한다는 것이다. 농민이 이런 양 떼에 속한다. 아니, 땅도 없고, 있다고 해봐야 그 땅이 먹여 살리지 못하니까 농민이라고 할 것도 없다. 또 시민들이 있다. 그러나, 조합이나 단체에 속하지 못하는 허약한 무리, 도시 세도가들의 노략질받이가 될 뿐이니 역시 시민이라고 할 것도 없다. 시골에 무리 짓고 있는 문둥이들을 본 적이 있느냐?'
'네, 백여 명이 모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일그러진 얼굴, 썩어 가는 육신, 허옇게 바래어 가는 몸을 목발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눈두덩은 부어 올라 있고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더이다. 말하거나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생쥐처럼 오구구 모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은 외변으로 밀려난 남들이다. 양 떼는 그들을 미워하고 그들은 양 떼를 증오한다. 양 떼는, 그 같은 무리는 이 땅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네, 마르크 왕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왕은 아름다운 이솔다의 죄를 물어 화형대에 매달고자 하는데 문둥이들이 왕에게 주청하기를, 화형주 형벌은 너무 가벼운즉 그보다 무거운 형벌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솔다를 저희에게 넘겨주십시오. 어쩌면 이솔다는 저희 무리에 속하는 인간인지도 모릅니다. 저희 아픔이 저희 욕망을 태우노니, 그 여자를 저희 문둥이들에게 넘겨주십시오. 문드러진 상처에 달라붙은 저희의 남루를 보십시오. 그 여자는 다람쥐 가죽에다 보석이 박힌 옷을 입고 폐하의 궁전에서 호사를 누리다 이제 폐하의 법정에서 문둥이를 구경하고 있으니, 저희 무리로 들어와 함께 기거하게 하시면 지은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깨닫고 오히려 화형주 밑의 화목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이놈, 성 베네딕트 수도회 수련사가 못된 잡서를 뒤적거렸구나!'
사부님의 일갈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젊은 수련사에게 소설은 금서였다. 그런데도 우리 멜크 수도원의 젊은 수련사들 사이로는 그 책이 은밀하게 나돌았기 때문에 나도 어느 날 밤 촛불 아래서 독파했던 것이었다. 사부님은 무안해 하는 내가 불쌍했던지 웃으면서 말을 이엇다.
'... 네가 내 말귀를 알아먹었으니, 네 허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버림받은 문둥이는 모든 것을 저희들의 폐허로 끌어들이고 싶어한다. 그들은 버림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사악해진다. 사람들이 그들을 일러, 인간의 파멸을 바라는 유령의 무리라고 하면 할수록 그들은 점점 더 인간의 모듬살이로부터 소외된다. 그래서 성 프란체스코께서는 일찍이 이것을 아시고 먼저 그들에게로 가시어 그들과 더불어 살기로 하신 것이다. 버림받은 자가 그 육신을 온전하게 회복하여야 하느님의 백성이 변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버림받은 자를 말씀하시지만 제가 듣기에는 두 가지의 버림받은 자들이 같아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단적인 개혁 운동가들은 문둥이 무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무리라고 하는 것은, 일련의 동심원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무리가 가장 조밀하게 분포하는 곳이 있고, 이에 연접하는 외변이 있는 것이다. 문둥이는 소외의 상징과 같은 것...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이 점을 미리 아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문둥이를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도와주는 데 그쳤다면 그것이야 여느 박애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분은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셨다. 성인께서 새들에게 설교하셨다는 이야기, 혹 들은 적이 있느냐?'
'네, 참으로 아름다운 그 이야기는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가녀린 피조물과 함께하신 성인을 받들어 섬기고 있습니다.'
'허나 네가 들은 이야기를 잘못 전해진 것이야.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니라면 근자에 들어 교단이 윤색해서 퍼뜨린 것이거나...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도시의 시민들과 행정관들을 상대로 설교를 하시다가 그들이 알아먹지 못하는 걸 아시고는 묘지로 가시어 시체를 쪼아먹는 까마귀, 까치, 매 같은 육식조를 상대로 설교를 시작하시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런 새들은 선한 새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암, 문둥이가 버림받았듯이 그렇게 버림받은 새들이다.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요한의 묵시록]의 이런 구절을 생각하고 계셨음이야. <... 나는 또 태양 안에 한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늘 높이 날고 있는 모든 새에게 큰 소리로, '다같이 하느님의 잔치에 오너라. 왕들과 장성들과 장사들과 말들과 그 위에 탄 사람들과 모든 자유인과 노예와 낮은 자와 높은 자의 살코기를 먹어라' 하고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의 저항을 바라셨던 것입니까?'
'아니다. 혹 그런 것을 바란 일파가 있다면 그것은 돌치노 수도사와 그 추종 세력일 것이다.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무리 지어 반역하려는 버림받은 자들을 모두 불러 하느님 백성으로 만들려 하셨다. 양 떼의 무리가 모두 모여야 한다면 먼저 버림받은 자가 누구인지, 이들부터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허나 프란체스코 성인도 이것만은 능히 이루지 못하셨으니 이 아니 원통한 일이냐. 교회 안에서 함께 살, 버림받은 자들을 모으기 위해서, 모아서 함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인께서도 먼저 당신이 속하신 교단 회칙에 따라 인준을 얻으셔야 했다. 인준을 얻으면 또 하나의 교파가 생길 터이고, 이렇게 해서 생긴 교파는 버림받은 자들을 외변에서 안으로 모아들일 테지. 이제 소형제파와 요아킴주의자들이 버림받은 자들을 규합하려던 까닭을 알겠느냐?'
'그러나, 사부님, 지금은 프란체스코 성인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단순한 평신도와 버림받은 자가 이단으로 몰리는 과정을 말씀하시는 중이 아닙니까?'
'오냐. 우리는 지금 양 떼에서 소외된 자들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황과 황제가 권력을 두고 드잡이를 해 온 수세기 동안 소외된 자들은 문둥이 무리처럼 집단의 변두리에서 고단하게 그 삶을 이어왔다. 그 중에서도 진짜 문둥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경계로 삼는 징표 노릇을 해왔느니라. 따라서 성서의 <문둥이>라는 표현은 마땅히 <버림받은 자, 가난한 자, 범용하고 단순한 자, 소외된 자, 농촌에서 쫓겨난 자, 도시에서 능욕당한 자>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야.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더냐? 우리가 이 표징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무리에서 소외당하였어도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수양견과 목자의 행위를 규탄하고, 먼 미래에 이들에 대한 단죄의 약속이 담긴 설교를 들을 준비, 이런 설교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도 이를 의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버림받은 자들은 자기를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권력자들에게 권력의 배분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소외를 의식하는 소외된 자들은, 교리에 상관없이 이단자로 낙인찍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소외를 의식하지 못하는 부류는 교리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법인데 이것이 바로 이단이라는 미망인 것이야. 세상에 이단 아닌 것 없고 정통 아닌 것 없다. 어느 한 세력이 주장하는 신앙을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그 세력이 약속하는 희망인 것이야. 모든 이단을 현실, 즉 소외의 기치와 같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이단자들을 긁어 보면 바닥에 있는 문둥병 자국이 보일 것이다. 대 이단 전쟁은 오로지, 문둥이는 문둥이로 소외시킬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문둥이에게야 요구할 게 무엇 있겠느냐? 그들이 속로회의 교리와 성찬의 정의를 구별할 줄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 잘 듣거라. 이런 것을 구별하는 놀음은 우리 같은 식자들의 전유물인 게다. 단순한 평신도들에게는 나름의 문제가 있다. 문제는 이 해석의 방법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그들이 이단의 벙거지를 쓰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들을 지원하는 자들이 생기는 것입니까?'
'신앙은 상관없다. 목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쥔다는 목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가 반대파를 이단으로 모는 것도 이 때문입니까?'
'그렇다. 자기 휘하로 들어오는 이단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까닭, 이단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화될 때 정통으로 받아 주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무슨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에 따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세속의 영주들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때로 지방 장관이 이단 세력을 부추켜 복음서를 방어로 번역하는 일도 있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특정 도시 국가의 언어는 방어로 되어 있고, 로마와 수도원의 통용어는 라틴 어가 아니냐. 때로 지방 장관들이 발도 파를 지원하는 일도 있다. 무슨 까닭에서이겠느냐? 발도 파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물론 근본의 귀천을 막론하고 남을 가르칠 수도 있고 설교단에 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열흘만 스승을 사숙한 사람이면 비록 그 신분이 막일꾼이라고 해도 설교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성 불가침인 성직자의 요건이 뒤죽박죽이 된 것이군요. 하지만 그렇다면 외 같은 도시의 장관 중에 어떤 장관은 이단을 화형주에 매달고, 어떤 장관은 이단을 화형주로 보낸 자들 손에 교회를 맡기는 일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까?'
'까닭인즉, 이단의 발호가 방어 쓰는 속인들의 특권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197년의 라테란 공의회에서(너도 알겠지만 이 문제는 자그마치 150년은 거슬러 올라간다) 월터매프는, 교회의 제단이 어리석고 무식한 대중인 발도 파가 이단으로 넘어가는 것을 강력하게 경고한 바 있다. 그는, 발도 파 신도는 일정한 주거도 없고, 맨발로 다니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되 모든 재산을 공유하고 벗은 채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한 적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발도 파는 버림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세력을 키워 가는데, 만일에 이 세력이 일정한 수준까지 강화되면 자기네들은 교단에서 쫓겨나고 말게 된다. 이때부터 도시 사람들은 탁발 수도회, 특히 우리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는 참회와 도시 생활, 교회와 돈벌이에 관심을 가진 공민의 균형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돈벌이에 대한 관심이 조화롭게 되었습니까?'
'아니다. 심령의 갱생 운동은 난관에 봉착했다. 교황이 인가한 교단이 이를 봉쇄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교황이 인가한 교단이라고 해도 우리 저류에 흐르는 사상만은 봉쇄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 프란체스코 회의 운동은 고행 운동으로 비화했다. 고행자는 남을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고, 돌치노 파 같은 무장 폭도의 무리에도 가담하지 않고, 우베르티노가 말하던 저 몬테팔코 수도승들의 요상한 제식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누가 옳았고 누가 글렀던 것입니까?'
'가는 길은 모두 옳았으나 모두가 잘못 가고 있었다.'
'그럼 사부님께서는, 왜 사부님의 견해를 밝히시지 않습니까? 왜 진실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는 흥분했던 나머지 나도 모르게 사부님에게 대든 꼴이 되고 말았다.
사부님은, 시험삼아 눈에 대어 보던 유리를 쥔 채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윽고 그 유리를 탁자 위의 못에 가까이 대면서 물었다,
'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못이 확대되어 크게 보입니다.'
'그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까이서 이렇게 크게 보는 일이다.'
'그러나 못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하냐? 그렇다면 이 유리 덕분에 읽을 수 있었던 베난티오의 원고 역시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을 게다. 허나 원고를 읽으면 뭔가가 드러날 테지. 그러면 이곳 수도원 생활의 면모도 지금 이상으로 생생하게 알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문제가 다 풀리겠는지요?'
'아드소, 나는 표면적인 것만을 너에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로저 베이컨 이야기 듣는 게 너에게 이번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그분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현명한 분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나, 나는 학문에 대한 사랑을 독려하는 그분의 낙관적인 태도, 학문이 우리에게 줄 수 있다는 희망의 약속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 베이컨 사부님께서는 힘을 믿으셨고, 궁핍한 자들을 믿으셨고, 단순한 자들의 영적, 창조적 능력을 믿으셨다. 그분이 만일에,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 바보와 무식꾼도 종종 우리 주님의 입을 빌어 말을 한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훌륭한 우리 프란체스코 문중 어른이라고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한 사람은, 자기의 연구 업적이나 보편적인 법칙 속에서 종종 길을 잃어버리고는 하는 박식한 사람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할 때가 있는 법이다. 평신도들에겐 개별적인 것에 대한 분별이 있다. 그러나 이 인식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아. 단순한 자들은, 교회의 신학자들보다 훨씬 진실할 수 있는 자기네 나름의 진실을 파악하고는 있으나, 경솔한 행위로 이 진실을 부숴 버리고는 한다. 그들이 어떻게 해야 마땅할까? 이 가난한 자, 단순한 자들을 가르쳐야 할까? 이것은 너무 쉬우면서 너무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란체스코 교단의 팍자들은 이 문제를 심사 고구했는데, 위대한 보나벤투라는, 현능한 수도자는 반드시 평신도의 행위에 내재된 진리로써 진리의 뚜렷함을 확장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페루지아 헌장이나, 우베르티노 수도사님의 박식한 논문이, 청빈을 요구하는 단순한 평신도들의 소리를, 신학상의 결정으로 드러나게 한 것도 그런 예에 속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만, 너도 보았듯이 늘 만시지탄이다. 그래서 이를 정의해 놓고 보면 단순한 평신도의 진리는 늘 강자의 진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청빈한 탁발 수도사에게보다는 루드비히 황제에게 더 유용한 진리가 되어 버린다는 말이다. 어떻게 해야 단순한 평신도의 경험에 다가앉을 수 있겠느냐? 다시 말해서 그들의 역동적인 미덕,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역량을 어떻게 해야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겠느냐? 베이컨 사부님이 안고 계시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늘, <무지에서 생겨 나는 것은 우연한 작용 이외의 어떤 작용도 하지 못한다.>라고 하셨다. 그분께서는 또, 단순한 평신도의 경험은 야만스럽고 통제하기 어려운 결과를 부르는 법이다. <그러나 지혜가 한 일은 법다워서 필경은 그 효과를 거두게 하는 법>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이는 실제적인 일, 즉 농업이 되었든 상업이 되었든, 행정이 되었든, 이러한 일에는 반드시 일종의 신학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새로운 자연 과학에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자연의 변화에 대한 각별한 지식을 통해, 무직서한 것 같아도 나름대로 절실하고 온당한, 단순한 평신도들의 필요를 수렴하자는 것 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과학이며 학문의 새로운 마법인데, 사부님께서는 교회가 이런 작업의 선봉에 서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사부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까닭을, 식자의 사회는 성직자 사회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래, 당시에는 식자의 사회가 곧 성직자 사회였지만 오늘날에는 통하지 않아. 식자들은 수도원과 성당은 물론이고, 대학, 심지어는 대학 바깥에서도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의 나나 나의 동류들은 이러한 작업의 주도를 교회에 맡길 것이 아니라 세인의 집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미래에는 식자의 사회가 곧 자연 철학이자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마술인 이 새로운 인간의 신학을 제창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겠습니다만, 그런 일이 가능할는지요?'
'내 사부님 베이컨께서는 그렇게 믿으셨다.'
'사부님께서는요?'
'나 역시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이것을 믿기 위해서는 먼저 유일선인 개인의 인식은 단순한 자들에게서 나온 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인식이 유일선이라면, 과학은 어떻게 해야 우주 법칙을 재조명하고, 이를 해석함으로써 이 불가사의한 학문에다 기능을 부여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도 그 이상은 알지 못한다. 내 옥스퍼드에 있을 때, 지금은 아비뇽에 있다만 당시에는 함께 있던 오캄 사람 윌리엄과 이 문제를 자주 토론했다. 그양반은 자주 내 가슴에 의혹의 재를 뿌리고는 했다. 개인의 직관이나 인식이 유일선이라면 동일한 원인은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는 전제는 증명이 곤란한 명제가 되어 버린다. 한 개체는 차가울 수도 있고 뜨거울 수도 있는가 하면, 달 수도 있고 쓸 수도 있으며, 습할 수도 있고 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새로운 실재의 궁극을 몰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내가 항차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보편적인 사슬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느냐? 이 보편적 사슬의 작용에 따라 내 손가락과 다른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는 변하는 것이다. 관계란, 내 마음이 실재와 실재 사이의 관련성을 감지하는 방편인데, 여기에 보편성과 양속성이 있다는 것을 누가 보증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유리의 두께에 따라 상이 달라진다는 걸 알고 계십니다. 사부님께서는 이것을 아시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과 똑같은 유리알을 만들게 하실 수 있습니다.'
'현답이다. 실제로 나는, 같은 유리로 보면 사물이 같은 크기로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가정한 것은 늘 혼자서 이 생각을 해 보았기 때문이다. 약초로 사람의 병을 낫우어 본 사람은, 같은 종의 약초는 환자에게 같은 정도의 치료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조사자는 특정 약초가 특정 병을 낫우는 데 도움을 준다는 가정을 공식화한다. 어떤 두께의 유리는 같은 정도로 시력을 도와준다는 가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베이컨 사부님의 과학이라는 것도 이러한 가정에서 시작된다. 아드소, 너도 알겠지만 나는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에 이 가정이 두루 통할 수 있는지 논리적으로 검증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를 검증하고 여기에 믿음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우선 보편적이 법칙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부터 확인해야 한다. 그러자 지금 단계에서는 말할 수 없다. 보편적인 법칙과 기정 질서라고 하는 개념의 존재는 하느님의 이런 개념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절대 자유로운 분이시고, 원하셨다면 일거에 세상을 바꿀 수 있으셨던 분이 아니냐? 보편적인 법칙과 지정 질서라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따라서 우리 교리와 모순되는 것이다.'
'제가 바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행동도 하시고, 행동하시는 이유는 아십니다만, 아시는 이유는 아직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사부님은 내 말을 듣고는 놀란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우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럴 것 같구나. 좌우지간 이것이 내 불안을 설명할 수 있기는 하다. 나는 믿으면서도 내 진실을 확신하지 못하는 불안을 안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우베르티노 어르신보다 더 불가사의하십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허나 네가 알다시피 나는 자연을 공부하는 사람이다. 지금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도 나는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는 알고 싶지 않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오로지, 어젯밤 문서 사자실에 있었던 게 누구인지, 내 안경을 가져 간 자가 누구인지, 눈에다 자국을 남기면서 수도사의 시체를 끈 자가 누구인지, 베렝가리오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실제로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었던 일의 전말인, 이런 것뿐이다. 가능하다면 이러한 일들을 한 꾸러미로 엮어 보편적인 줄거리를 세워 보고 싶구나. 그러나 이 인과 관계를 엮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천사가 개입하면 만사는 일장 춘몽. 따라서 인과가 엮이지 않더라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다만 해볼 뿐이다.'
'사부님께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맡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브루넬로를 찾지 않더냐?'
사부님은 이틀 전 수도원장의 말 <브루넬로>를 찾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이 세상은 하나의 질서에 꿰어져 있는 것입니까?'
'암, 그 질서를 찾아내는 지혜가 이 노마의 머리에도 조금은 있을 것이고...'
이때 니콜라가, 거의 완성된 안경테를 자랑스럽게 흔들면서 나타났다. 사부님은 그 안경테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저놈을 코에 걸면, 노마의 머리가 조금 낫게 돌아갈 게다.'
수련사 하나가 나타나 수도원장이 사부님을 만나고 싶어하는데, 시방 뜰에서 기다린다고 전갈했다. 뜰 쪽으로 가면서 사부님은 양손바닥으로 당신의 이마를 소리나게 갈겼다. 뭔가를 깜빡 잊고 있다가 다시 생각해 내었을 때마다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참, 베난티오의 요상한 기호, 내가 해독했다. 그 말 하지 않았지?'
'모두 해독하셨습니까?. 언제 하셨습니까?'
'네가 잘 동안에 했다. <모두>라는 말은 하기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겠구나. 양피지가 불길에 닿자 나타난 기호를 네가 베껴 주지 않았느냐? 네가 베껴 준 것은 모두 해독했다. 그리스 문자 해독은 아무래도 새 안경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야겠구나.'
'사부님께서는, <아프리카의 끝의 비밀>일 거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랬습니까?'
'그래.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베난티오의 유품을 보니까 12개의 12궁도 기호와 8개의 다른 기호가 있더구나. 8개 중 5개는 행성을 나타내는 기호, 2개는 해와 달을 나타내는 기호, 나머지 하나는 지구를 나타내는 기호였다. 모두 해서 기호는 스무 개가 아니냐. 이 스무 개의 기로를 라틴 어 알파벳에 대응시켜 보았다. <우눔과 벨루트>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자. 즉, 어떤 단어의 두문자는 다른 단어의 두문자와 하나일수도 있고, 동일한 것일 수도 있다.말이 다를 뿐 의미는 같다는 말이다. 알파벳의 순서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기호의 순서는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겠느냐? 나는 12궁도 사분원에 놓는 천체의 순서를 한번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지구, 달, 수성, 금성, 태양 순인데, 바로 이때부터 12궁도 기호는 전통적인 순서 그대로 나오더구나. 세빌리아 사람 이시도루스가 분류했듯이, 춘분점인 백양궁에서 시작, 쌍어궁에서 끝나는 것 말이다. 이걸 이용하면 베난티오의 암호는 뚫린다.'
사부님은 나에게 양피지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라틴 어 해제가 이미 그의 필체로 씌어 있었다.
'세크레툼 피니스 아프리카에 마누스 수프라 이돌룸 아게프리뭄 에트 셉티뭄 데 쿠아투오르'
'이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곧이곧대로 해석해 보아라.'
'<우상 위의 손길이 넷의 첫 번째와 일곱 번째에 작용한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먼저 베난티오는 무슨 생각에서 <이돌룸>, 즉 <우상>이라는 말을 썼는지 알아야 한다. 상? 유령? 아니면 형상? 그 다음, <넷의 첫 번째와 일곱 번째>는 무슨 뜻일까? 말하자면 <일곱 번째와 첫 번째가 있는 넷>은 무슨 뜻일까? 이것을 어떻게 한다는 뜻일까? 우상의 손길이 이것을 당긴다는 뜻일까? 민다는 뜻일까?'
'그걸 모르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이 가벼웠던 게 불찰이었다. 사부님은 걸음을 멈추더니 험상궂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 보면서 대갈 일성 꾸짖었다.
'네 이놈!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더냐? 주님의 권능에 힘입어 학식과 기예를 고루 갖춘 내가 아니더냐? 저 혼자만 알겠다고 만들어 놓은 다른 사람의 암호를 그것도 단 몇 시간에 해독한 늙은 프란체스코 수도자에게, 너같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감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고 재잘거릴 수 있다더냐!'
나는 황급히 사죄했다. 무의식중에 사부님의 빳빳한 자존심을 건드려 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분이 자기의 추리의 속도와 그 정확성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부님의 암호 해독 능력은 그만한 자존심에 걸맞는 것이었고, 약아빠진 베난티오가 자기 비밀을 해독하기 어려운 함정을 만들어 놓았던들 그게 어찌 사부님이 비난받아야 할 대목이었겠는가?
'사죄할 것까지는 없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기는 하다. 해독은 했으나 알아낸 것은 업지 않느냐? 어서 가기나 하자.'
사부님 말씀이었다.
만과
원장은 잔뜩 삼엄한 표정을 하고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편지를 보여 주면서 사부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금 전 꽁끄 수도원의 원장으로부터 받은 편지입니다. 수도원장은, 교황으로부터 프랑스 궁병대 지휘관과 사절단 경호를 위임받은 사람이 누군지 이 편지에다 밝히고 있습니다. 이 궁병대 지휘관은 군인도 아니고 교황청 사람도 아닙니다. 이런 대권과 사절단 일원의 임무를 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묘한 사람들이 한 판에 어울리는군요. 대체 누굽니까?'
사부님이 거북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
'베르나르 기, 혹은 베르나르도 귀도니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사부님은 시선을 먼 곳으로 던지면서 욕지거리를 했다. 그러나 사부님의 고향말인 영어여서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원장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알아듣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사부님의 욕지거리는 상당히 외설스러운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부님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이거 마음에 안 드는에요? 베르나르는 다년간 뚤루즈 지역에서 이단 혐의를 받는 자들의 씨를 말린 위인입니다. 발도 파, 베기니 파, 소형제파, 돌치노 파를 박해하고 박멸한 사람들의 교과서 노릇을 한 [이단 심문의 직무에 대한 편람]이라는 저서까지 낸 일이 있는 사람이지요.'
'압니다. 나도 읽어 보았는데, 저자가 대단히 박식합디다.'
'대단히 박식하지요. 하지만 이자는 요한의 오른손입니다. 최근에 요한은 이자에게 플라드르와 이곳 북 이탈리아의 요직이라는 요직은 모두 돌려 가면서 맡겼습니다. 갈리시아의 주교에 임명된 적도 있습니다만 교구에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고 이단 심문에만 신바람을 내더군요. 근자에 로데브 주교직에서 은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한을 어느새 이자를 북 이탈리아로 파견한 모양이군요. 문제는 하고많은 사람 가운데 왜 하필이면 베르나르 같은 자에게, 그것도 병력의 통수권을 쥐어 주었느냐 하는 겁니다.'
수도원장이 미간에 손가락을 대고 있다가 대답했다.
'설명이 가능합니다.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내 오금이 저려 온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형제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인정은 하고 싶지 않을 겝니다. 무성한 신학적 논쟁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기는 하나 그리스도의 청빈 문제와 페루지아 총회가 인정한 교회의 청빈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이고, 많은 이단의 온상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이단의 길로 들어섰을 때의 문제입니다만 이 청빈 운동은 어쩐지 분별이 모자라고 정통의 길에서 자꾸만 벗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황제께서 지지하시는 체제나 사람 미켈레의 위치가, 우베르티노나 안젤로 클라레노 꼴이 되었다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지요. 이 시점에서 양쪽 사절단이 대좌합니다. 따라서 베르나르는 볼 만하게 설쳐댈 것이고, 실제로 설치는 재주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페루지아 쪽 논제를 소형제파나 가짜 사도파의 논제쯤에 견주어 뭉개어 버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거야 예견했던 일이지요. 내 말은, 베르나르가 아니었더라도 이번에 거론될 문제라는 겁니다. 어쨌든 베르나르는 교황청의 모사답게 효과적으로 이쪽을 공격하고 나설 것입니다. 요컨대 이자와의 논쟁이 대단히 껄끄러워질 조짐이 보이는 겁니다.'
수도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만, 문제는, 어제 우리가 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일 내일까지 우리가 두 수도사(어쩌면 셋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나로서는 이 수도원에서 그런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이 미결인 채 남아 있다는 걸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상대가 베르나르 기 같은 실력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여기에 동의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물론 이런 일이야 없어야겠지요만, 만일에 우리가 이를 숨기다가 베르나르 기에게 발각될 경우, 우리는 그에게 우리를 배신자로 몰 명분을 주는 셈입니다.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속수무책입니다. 방법은 하나뿐... 이 수도원에 살인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걸 베르나르 기에게 귀띔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베르나르 기도 살인범을 찾는 일에 뛰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수사도 해야 하는 데다가 살인범에 의한 저격의 위험도 느낄 것이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는 시간이나 횟수도 줄겠지요.'
'살인 사건의 진상 조사를 맡긴다는 것은 베르나르 기라는 가시를 삼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는 걸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사상 처음으로 이 수도원에 대한 지휘권을 교황의 사절에게 양도하는 수모를 당하는 꼴이 됩니다. 이것은 이 수도원만이 아니라 우리 끌뤼니 교단 자체의 역사에서도 새로운 전환점입니다. 이를 면하기 위해서라면 나에게 못할 짓이 없습니다. 베렝가리오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자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윌리엄 형제께서는 대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나는 옛날 옛적에 이단 조사관을 지낸 한 늙은 수도사에 지나지 못합니다. 앞으로 이틀 안에 진상이 밝혀지리라고는 원장께서도 믿지 않으시겠지요. 그것은 그렇고, 대체 나에게 무엇을 베푸셨습니까? 장서관엘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수도사들에게 질문을 마음대로 할 수가 있습니까? 나는 원장의 지원을 도무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 사건과 장서관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럴까요? 아델모는 채식사, 베난티오는 번역사, 베렝가리오는 보조 사서인데도 장서관과 관련이 없다고 하시겠습니까?'
윌리엄 수도사가 차분하게 응수했다.
'이 수도원의 수도사 60명은 모두 교화와도 관련이 있고 장서관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장서관 핑계만 대고 교회를 조사하겠다고는 않습니까? 윌리엄 형제, 형제는 나를 대신해서, 내가 그어 놓은 선 안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하느님 은혜로 이 수도원에서 나는 하느님 다음가는 존재입니다. 사건이 풀리지 않으면 나는 이 자리를 베르나르 기에게 양도해야 합니다...'
원장은 이 대목에서 음성을 누그러뜨리고는 말을 이었다.
'... 어쩌면 베르나르 기가 이곳에 오는 것은 회의 때문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꽁끄 수도원장의 편지에 따르면, 교황이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 추기경을 볼로냐에서 불러 올려 교황측 사절단장을 맡겼다고 합니다. 베르나르는 어쩌면 추기경을 만나러 이곳으로 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그 경우가 훨씬 심각하지요. 베르트란도 추기경은 중부 이탈리아에서 이단 혐의를 받는 사람들의 호랑이로 군림하던 사람입니다. 대 이단 전쟁의 두 선수가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이곳에서 대공세의 돌풍을 일으키겠다는 암묵적인 몸짓인지도 모릅니다. 결국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운동도 물고 늘어지기 쉽겠지요.'
'이건 바로 황제 폐하께 기별해야 할 일입니다. 허나 아직 발들에 불이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정신을 차릴 일이기는 하지만... 그럼, 먼저 실례합니다.'
원장은 이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윌리엄 수도사는 원장이 간 다음에도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나에게 말했다.
'아드소, 먼저 말이다, 조급하게 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소한 우리의 경험까지도 요긴하게 쓰일 모양인, 쉽사리 해결이 날 성싶지도 않다. 읽을 수 없으니 원고를 내 방으로 가져 갈 수도 없고, 안경이 없으니 오늘 밤 장서관에 들어가 볼 수도 없구나.'
사부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리몬도 사람 니콜라가 달려왔다. 그는, 유리알 중에서고 가장 그럴듯한 놈, 바로 사부님이 희망을 걸고 있던 바로 그 유리알이, 테에다 끼우려는 순간에 그만 부서지고 말았다고 말했다. 사부님으로서는 맥 풀리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니콜라는 반쯤 정신나간 듯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는 하늘을 가리켰다. 이미 만과가 지난 시각이어서 하늘에서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요컨대, 니콜라로서는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부님은, 풀이 죽을 대로 죽어 있는 니콜라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실제로 그는 뒷날 니콜라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사부님에게 남은 것은 허무한 밤뿐일 터였다.
우리는 몸둘 바를 모르는 니콜라를 그곳에 남겨 두고 베렝가리오의 행방부터 조사해 보기로 했다. 보았다는 사람은 물론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느낌이었다. 사부님은,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랬겠지만, 멍한 얼굴로 자주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이따금씩 법의 안으로 선을 넣어, 몇 주일 전에 따서 넣어 둔 이상한 풀잎을 꺼내어 씹고는 했다. 사부님은 그 풀잎이 정신 작용을 자극해 주는 것으로 믿는 모양이었다. 맑은 정신이 나가 버린 사람처럼 그렇게 서 있는데도 이따금 두 눈에서는 불길이 일고는 했다. 그의 텅 빈 마음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그렇게 번쩍거리고 있는 듯했다. 미동도 않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사부님이 문득 이런 말을 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무슨 생각이 나셨습니까?'
'장서관의 미궁안으로 뭘 좀 가지고 들어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간단한 물건은 아니나 요긴하게 쓰이기는 할 게야. 그래... 출입구는 동쪽 탑루에 있다. 이건 우리도 알지. 그런데도 들어가기만 하면 방향을 모르게 되고 말지? 만일에 우리에게 북쪽을 가르쳐 주는 도구가 있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북쪽만 알면, 오른쪽으로 돌면 동쪽이 될 터이고, 반대쪽으로 가면 남쪽이 될 테지요. 그런 도구가 어디네 있겠습니까만 있다손 치더라도 미궁은 여전히 미궁입니다. 동쪽으로 가더라도 다시 벽이 가로막을 테고... 길을 잃기는 마찬가지가 아닐는지요?'
'그럴 테지.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이 도구는, 어떤 위치에서건 어떤 지점에서건 항상 북쪽을 가리킨다. 우리가 방향을 바꾸어도 늘 북쪽이 어느 쪽인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게 있다면 대단하겠습니다. 그런 도구가 있기만 하면 밤에도, 실내에서도... 태양이나 별이 없을 때도 북쪽을 알 수 있을 게 아닙니까? 하지만 사부님의 은사이신 베이컨 님이신들 어찌 이런 도구를 가지셨겠습니까?'
나는 기가 막혀서 웃고 말았다.
'되지도 않는 말을 해 놓고는 웃는 녀석이라니... 이런 도구는 이미 진작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는 알아. 항해에 이용된 적도 있다더라. 너, 세베리노의 시약소에서 본 이상한 돌 기억나느냐?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돌 말이다. 이 돌을 이용하면, 태양이나 별이 없을 때도 북쪽을 알 수 있다. 베이컨 사부님께서도 이를 연구하신 일이 있고, 삐까르디의 요술쟁이라는 마리꾸르 사람 삐에르도 이 도구에 관한 글을 남긴 일이 있다.'
'사부님께서도 만드실 수 있습니까?'
'도구 자체는 만들기 어렵지 않다. 세베리노의 시약소에서 본 돌은 기적도 능히 일으키나. 이것을 이용하면 외부의 힘 없이도 영원히 움직이는 도구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니까. 허나 가장 간단하게 이용하는 방법은 아랍 사람 바일레크 알카바야키가 고안한 일이 있다. 이 방법에 따르면, 먼저 용기에다 물을 붓고, 바늘을 꿴 얇은 전피를 띄운다. 그 다음에 이 물 위로 자석, 즉 저 불가사의한 돌을 몇 차례 왕복하게 하면 바늘도 이 자석과 비슷한 성질을 띠게 된다. 물론 자석 자체가 중심 축 위에서 움직이기만 한다면 자석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만, 바늘이 더욱 정밀하게 돌면서 북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물이 든 용기를 움직여도 바늘 끝은 항상 북쪽을 가리킨다. 자, 이게 가능해진다면 용기의 북쪽에 해당하는 가장자리에 표를 해두고 동, 남, 서를 정해 놓고... 어떠냐? 이렇게 하면 장서관 안에서도 방향을 알 수 있을 게 아니냐?'
'정말 놀랍습니다. 하지만 바늘은 왜 북쪽을 가리킵니까? 그 신비로운 돌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것은 저도 보아서 압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돌의 성질을 띤 바늘이 북쪽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혹시 엄청난 양의 쇠붙이가 이 신비스러운 돌에 작용하는 것입니까? 혹시 북극성 쪽, 그러니까 이세상의 북쪽 끝에 엄청나게 큰 철광석 광산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설명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나 바늘이 정확하게 금성 쪽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천체 자오선의 교차점으로 살짝 기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돌은 그 자체에 하늘의 모습을 담고 있다>라는 옛말이 그르지 않지. 그러나 이 돌은 사실, 북쪽 땅의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북쪽 하늘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리적인 인과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리와 상관없이 작용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게다. 내 친구 장 뎅 사람 장이 이걸 연구하고 있다. 황제로부터, 교황청이 있는 아비뇽을 접시에 빠뜨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부님, 그럼 가시지요. 세베리노에게는 그 기적의 돌이 있습니다. 이제 물과 물그릇과 전피만 있으면 됩니다.'
나는 흥분해서 떠들었다. 사부님은 내 어깨를 낚아챘다.
'가만... 까닭을 모르겠다만, 나는 이 도구를 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랍 광물학자의 지시대로 만들기만 하면 제대로 말을 들을 것 같은 기분이구나. 철학자가 가르치지 않아도 농부가 쓰는 낫을 그대로 본떠 만들면 제 몫을 하지 않더냐? 걱정스러운 것은 그 미궁 안으로 어떻게 등잔과, 물그릇을 들고 다닐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가만 있자... 좋은 생각이 하나 있기는 하다. 우리가 미궁 밖에 있더라도 이 도구는 북쪽을 가르쳐 줄 테지?'
'그렇습니다만, 태양 아니면 별이 있으니까 밖에서는 필요가 없습니다.'
'안다, 나도 안다. 허나 이 도구가 미궁의 안팎에서 기능할 수 있는 바에 우리 머리는 왜 아니되겠느냐?'
'머리라고 하셨습니까? 물론 머리라면 안에서도 돌아가고 밖에서도 돌아가기는 합니다. 사실, 밖에서라면 본관 장서관의 서실 배치도는 그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안에섭니다.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통 방향을 알 수 없다는 게 바로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하는 소리다. 어쨌든, 내게 생각이 있으니까 그 도구 이야기는 더 이상 말자. 그걸 생각했더니, 자연의 법칙, 우리 사유의 법칙에도 생각이 미치는구나... 그래! 바로 이것이야! 밖에서 장서관 서실의 배치도를 그려 보는 것이다. 이렇게 그린 것으로 내부를 헤아려 보자는 것이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수학이라는 걸 한번 이용해 보자. 아베로에스가 말했듯이 수학에서만 사물들이 절대적으로 알려진 것과 동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사부님께서도 보편적인 지식이라는 걸 처음으로 용인하시는 것이군요?'
'수학상의 지식은 기왕에 이미 진리의 하나로 그 몫을 해온, 지성이 구축한 명제다. 진리의 하나로 몫을 해왔다... 무슨 까닭이냐? 수학적 개념은 고유한 것이며, 수학은 다른 학문을 앞질러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서관은 내가 보기에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에 의해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무슨 까닭이냐? 수학 없이는 미로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학적 명제를 설계자의 명제와 비교해 보면 여기에서 과학적 명제를 도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또 무슨 까닭이냐? 수학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의 과학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아니다... 지금은 형이상학적인 말놀이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늘은 악마가 들어 유리알을 깨면서 우리 일을 훼방하는구나. 너는 눈이 좋으니까 양피지 글씨를 읽을 수 있지? 석판도 있고. 석판에 뭘 그릴 수도 있고. 필기구도 있고. 좋다, 가지고 있지? 가자, 아드소. 본관을 한 바퀴 돌아 보자. 그러면 뭔가 우리 머리를 치는 게 있을 게다.'
우리는 본관을 한바퀴 돌았다. 그러나 말이 한바퀴지 사실은 멀찍이서 동쪽, 남쪽 ,서쪽 탑루와 이를 잇는 벽을 조사해 보았을 뿐이었다. 나머지 북쪽 벽은 낭떠러지에 면해 있어서 가까이서 볼 수 없었다. 우리는 대칭의 추론을 통하여 일단 북쪽 탑루가 다른 탑루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부님의 지시에 따라 내가 석판에다 그리고 쓴 바에 따르면, 각 벽에는 창이 두 개씩 있었고, 각 탑구에는 모두 다섯 개씩의 창이 있었다.
'자, 생각해 보아라. 우리가 본 방에는 창이 하나씩 있었다.'
'7면벽실만 제외하고 그랬습니다.'
'그건 각 탑루 중앙의 방이 아니겠느냐?'
'7면벽실이 아닌데도 창이 없는 방이 있었습니다.'
'그건 잠시 접어 두고, 먼저 규칙을 찾고, 그러고 나서 예외적인 것을 설명해 보자. 이렇게 된다... 밖에서 보면 각 탑루에 방이 다섯 개씩 있고, 벽에 면한 방이 두 개씩 있다. 각 방에는 창이 하나씩 있다. 그러나 창이 하나인 방에서 장서관 서실로 들어가면 창이 하나인 다른 방이 나오게 되어 있다. 즉, 안으로 난 창이 있다는 증거다. 자, 주방에서, 그리고 문서 사자실에서 본 계단실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더냐?'
'8각형이었습니다.'
'잘 보았다. 여덟 개의 벽면에는 각각 두 개씩의 창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여덟 개의 벽면 안쪽으로는 두 개씩의 방이 있다. 내 말이 맞느냐?'
'맞습니다만, 창이 없는 방은 어떻게 합니까?'
'그런 방은 모두 여덟 개다. 실제로 각 탑루의 안방은 벽면이 7면으로 되어 있고, 이 가운데 5면의 벽에 난 창이 탑루 속의 방 다섯 개와 통하고 있다. 창이 없는 벽 두 개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것은 외벽과 닿아 있는 벽이 아니다. 닿아 있다면 창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덟 개의 계단실에 면해 있지도 않다. 만일에 계단실에 면해 있다면 방이 장방형일 것이다. 자, 그려 보아라. 장서관을 위에서 보면 어떤 꼴로 보일지... 자, 각 탑루에는 7면벽실과, 창 없이 연접하는 두 개의 방, 8각형 계단실과 창 없이 연접하는 방이 두 개씩 있다. 이 두 개씩의 방은 서로 통하고 있다.'
나는 사부님 말씀대로 그려 보고는 그만 탄복하고 말았다.
'알았습니다! 어디 세어 보겠습니다. 장서관 안에는 방이 모두 쉰여섯 개가 있습니다. 그중 네 개는 7면벽실, 쉰두 개는 4면벽실입니다. 창이 없는 방은 여덟 개... 쉰두 개의 방 가운데 스물여덟 개는 외벽에 면해 있고 열여섯 개는 내벽에 면해 있습니다.'
'네 개의 탑루에는 각각 4면벽실이 다섯 개씩, 7면벽실이 하나씩 있다... 장서관은 천상의 조화, 말하자면 갖가지 오묘한 의미와 상통하는 천상의 조화에 따라 설계된 것이로구나.'
'정말 놀라운 통찰이십니다. 그런데 이게 왜 그렇게 어려웠습니까?'
'수학적 법칙과 일치하지 않는게 있어서 그랬다. 문이 이 법칙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야. 여러 개의 방으로 통하는 방도 있고 하나의 문으로만 통하는 방도 있다. 게다가 어디로도 통하지 않고 막혀 버린 방도 있지 않더냐? 게다가 안은 어둡고, 태양으로 방향을 알아낼 단서도 없고, 환상이 나타나고 거울이 겁을 주어 혼을 빼놓는가 하면 들어간 사람은 죄의식이라는 짐까지 덤으로 지고 있어야 하는 판국이니 이 미궁 헤어 나오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느냐? 우리만 해도 어젯밤에는 출구를 찾지 못해서 얼마나 애를 먹었느냐? 배열의 극치가 연출하는 혼란의 극치... 정말 놀라운 계산이다. 장서관의 설계자는 정말 놀라운 사람이구나!'
'앞으로는 방향을 어떻게 짐작하시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별로 어렵지 않다. 네가 그린 도면은 대충 장서관 설계도면과 일치할 것인즉, 일단 첫 번째 7면벽실에 이르면 바로 창이 없는 방을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만 돌아 두세 개의 방을 지나면 북쪽 탑루에 이르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다시 창이 없는 방을 찾아 이 방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야 한다. 이 방은 7면벽실과 창 없이 연접해 있는 방인데,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 전에 말한 대로 두세 개의 방을 지나면 서쪽 탑루가 나올 것이다.'
'방이, 다른 방과 서로 통하기만 하면 가능하겠습니다.'
'오냐. 그래서 네가 그린 약도면이 필요한 거다. 창이 없는 방을 점겸해야 나오는 갈을 알 수 있을 것이야, 허나 이것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게다.'
'될까요, 사부님?'
나는 너무 간단해 보여서 오히려 믿어지지가 않았다.
'될 게다만 불행하게도 아직 모든 것을 두루 알게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길만은 잃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지금부터 우리가 알아내어야 하는 것은, 각 서실에다 서책을 배치하는 데 어떤 법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요한의 묵시록]에 나오는 구절로는 알 도리가 없다. 더구나 같은 구절이 다른 방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으니...'
'[요한의 묵시록]에서 인용할 수 있는 구절은 56구절이 넘을 텐데 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일까요?'
'이를 말이냐. 그러나 구절 수는 문제삼지 말자.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하구나... 50구절보다 적다면... 그래서 30구절이나 20구절이라면... 내가 멀린이 아닌 것이 한스럽구나.'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알 일이 아니다. 우리 나라 책에 나오는 마법사 이름이니까. 그래, 그래, 그렇다! 구절을 뽑되 알파벳 수만큼 뽑은 것이야! 바로 이거다! 중요한 것은 구절 자체가 아니라 그 구절의 두문자다! 각 방은 알파벳으로 표시된 것이고... 이것으로 무슨 표적을 삼은 모양인데, 무슨 표적인지를 모르겠구나.'
'십자가나 물고기 모양을 그리는 도해시처럼 말씀이십니까?'
'오냐, 장서관이 축조될 당시에는 그런 시가 유행했을 테니까.'
'첫번째 구절은 어느 것입니까?'
'우리가 처음 들어가서 본 7면벽실... 다른 방의 것보다는 좀 큰 두루마리... 그런데 왜 그 구절은 붉은색으로 썼을까?'
'붉은색은 또 있었지 않습니까?'
'구절도 그러니까 여러 가지였지. 우선 네가 그린 약도면을 조금 더 크게, 선명하게 다시 그리거라. 일단 장서관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지나는 방, 문과 벽의 위치, 창의 위치, 각 두루마리에 씌어져 있는 구절의 두문자를 거기에다 써 보아라. 훌륭한 채식가들이 그러듯이 너도 붉은 글씨로 큼직큼직하게 쓰도록 하여라.'
'사부님,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밖에서 장서관을 보시고 이렇듯이 수수께끼를 풀어 내시는 사부님께서 안에서는 풀어 내시지 못했으니까요.'
'하느님께서 세상을 아시는 것도 이와 같을 게야. 만드시기 전에 그분 뜻으로 이러저리 재셨을 터이니... 그러나 우리는 이 안에 살기 때문에, 만들어지고 나서 보았기 때문에 그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일 게다.'
'밖에서 보아야 사물을 꿰뚫어 보기에 용이하다는 말씀이신지요?'
'예술이 창조한 것은 그렇다. 우리의 마음으로 그 일을 이룬 장인의 마음을 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의 피조물은 안 된다. 그것은 우리 마음과 비슷한 장인의 마음이 빚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장서관은 장인의 작품이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나 장서관만 그럴 뿐이다. 들어가서 좀 쉬어 두자. 내일 아침까지는 아무 짓도 못할 것 같구나. 그때까지라도 내 안경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만...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생각할 것도 좀 있다.'
'저녁 식사를 하셔야지 않습니까?'
'암, 먹어야지. 하지만 벌써 때를 놓쳤다. 수도사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종과 성무에 들었으니까. 주방은 아직 열려 있을 게다. 가서 뭘 좀 거두어 오너라.'
'훔쳐 오라는 말씀이신지요?'
'구하라. 살바토레에게서 구하라. 살바토레와는 꽤 가까워진 사이가 아니더냐?'
'살바토레라면 훔칠 것입니다.'
'네가 네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냐?'
사부님은 카인의 말투를 흉내내고는 웃었다. 사부님은, 하느님은 크시고도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이렇게 농담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살바토레를 찾으러 나섰다. 그는 마구간 옆에 있었다.
나는 대화의 빌미를 잡을 요량으로 수도원장의 말 브루넬로를 턱으로 가리키면서 수작을 걸었다.
'정말 쓸 만한 놈입니다. 한번 타 보고 싶군요.'
'그건 안돼. 원장님의 말이니까... 솜씨 없는 사람이 명마를 탐내어서 어쩌려고...'
살바토레는 턱끝으로, 튼튼하게 생기기는 했어도 손질이 제대로 안 되어 있는 말을 가리키면서 덧붙였다.
'... 저거면 어떨꼬. 저걸 좀 봐, 저기, 말의 세 번째를...'
그는 세 번째 말을 가리켰다. 나는 그가 쓰는 엉터리 라틴 어가 우스워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 저런 놈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는 나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의 말이 따르면, 아무리 늙고 병든 말이라도 방법만 제대로 알면 브루넬로 같은 명마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먹이에다 사타리온 이라는 풀을 잘게 썰어 넣어 먹이고, 숫사슴 기름으로 다리를 문질러 준 다음 말 잔등에 올라 박차를 가하기 전에 말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고는 귀에다 대고 <니칸데르, 멜키오르, 메르키자르드>라는 주문을 세 번 외면 말은 질풍같이 내닫는데, 그 빠르기로 말하면 같은 시간에 브루넬로가 달린 거리의 여덟 배는 능히 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말의 목에다, 바로 그 말이 밟아 죽인 이리 이빨 목걸이를 걸어 주면, 아무리 달려도 지칠 줄을 모른다는 말도 했다.
내가, 실제로 해보았느냐고 문자 그는, 한차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그 냄새가 복잡한 숨결이 닿을 정도로 내 귀에다 입술을 대고는, 사타리온이라는 약초는 주교나 영주들만 재배하는 것이어서 자기는 구하기가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사부님께서 긴히 읽을 책이 있어서 방에 계시고 저녁은 방에서 들고 싶어하는데 무슨 수가 없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해보지. 건락 떡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어떻게 만드는데요?'
'간단하지. 너무 오래된 것이라서 너무 짠 것이 아닌 건락을 구해 가지고 네모로 자르든 다른 모양으로 자르든 좋을 대로 자른다. 다음에는 밀가루에다 버터나 돼지 기름을 발라 불에 얹는다. 건락이 눅진눅진할 때쯤 해서 사탕이나 계피 같은 것으로 온갖 양념을 한다. 다 되면 바로 먹어야 한다. 따끈따끈 할 때 먹어야 하니까.'
'아하, 그런 게 있었군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주방 쪽으로 뛰어갔다. 약 반시간 뒤에 그가 천을 덮은 접시를 들고 돌아왔다. 냄새가 썩 좋았다.
'여기 있네.'
그는 접시뿐 아니라 기름을 듬뿍 채운 등잔도 하나 건네주었다.
'아니, 등잔은 왜 줍니까?'
그러자 그가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아? 모르기를 하지만 자네 사부님은 이 밤중에 어두운 데 가시는 모양인데?'
살바토레는 뜻밖에도 우리 일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까닭을 묻지 않고 사부님 방으로 음식을 가져갔다. 식사 후 내 방으로 돌아왔으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우베르티노 수도사를 만나고 싶었다. 나는 살그머니 방을 빠져 나와 교회로 갔다.
종과 이후
우베르티노 수도사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교회의 성모상 앞에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쪽으로 다가가 한동안 함께 기도하는 척했다(교백하거니와, 기도하는 척했다). 그러다가 틈을 보아 대담하게 그의 기도를 깨뜨렸다.
'높은신 어르신, 한 말씀 여쭈워도 되겠습니까? 가르침을 받잡고 싶습니다.'
우베르티노는 나를 바라보다가 내 손을 잡고 일어서서 의자 쪽으로 나를 끌었다. 우리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가볍게 나를 포옹했다. 숨결이 얼굴로 느껴져 왔다.
'무슨 일이냐? 이 죄인이 네 영혼이 베풀 것이 있다면 내 기꺼이 나누어 줄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그리움이냐? 육욕에 대한 그리움이더냐?'
우베르티노의 말투야말로 그리움에 사무친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리움이 있다면, 그것은 많을 것을 아시는 미지의 큰 어르신에 대한 그리움일 것입니다.'
'그것은 낭패다. 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앎을 사모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을 구별할 줄은 알아야겠습니다. 인간의 열정도 이해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저는, 지금은 비록 수련사에 지나지 못하나 언젠가는 수도사나 신부가 될 것입니다. 저는 악마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악마를 알아보고, 대중에게 그것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선재로다. 그래 무엇이 그리도 알고 싶으냐?'
'어르신, 이단이라고 하는 독초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말했다. 따라서 다음 말을 잇느라고 망설일 수 없었다.
'저는 대중을 그릇되게 인도한 사악한 돌치노 수도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베르티노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윌리엄 형제와 내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알테지. 허나 참으로 구역질이 나는 이야기가 아니냐? 하려니 가슴이 답답하다만, 네가 듣기를 소원하니 하기는 해야지. 참회에의 애착과 세상을 정화하겠다는 욕심이 지나쳐 피와 살육이 난무한 내력이 디겠다만, 너 역시 이를 알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터이니 하기는 해야겠구나.'
그는 의자를 고쳐 앉았다. 내 어깨 위로 올라온 그의 손은 힘이 조금 풀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내 목에 닿아 있었다. 그는 나에게 지식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열기를 전하려는 사람 같았다.
'시작하려면 이야기를 돌치노 이전으로 되돌려야 한다. 내 어린 시절이었으니 지금과는 자그마치 60년 세월이 상거해 있다. 그래, 파르마에서부터 시작하자. 60년 전 파르마 땅에 게라르도 세가렐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온몸으로 회개하며, 거리마다 <페니텐치아지테>를 외치고 다녔다. <페니텐치아지테>라는 말은 무식한 사람들이 발음을 잘못해서 그 모양이 된 것이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 라는 복음서 말씀에서 앞의 두 낱말 <페니텐티암 아기테>를 붙여서 <페니텐치아지테>라고 한 것이야. 게라르도 세가렐리는 사도들의 흉내내기를 좋아해서 자기네 교파를 <사도회>라고 자칭했다. 그 추종자들은 오로지 보시에 의지해서 육신의 살림을 꾸리면서 거지처럼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느니라.'
'소형제 수도회의 행각승들처럼 말씀이십니까? 이거야말로 우리 주님과, 어르신네의 교단을 세우신 프란체스코 성인께서 바라시던 것이 아닙니까?'
우베르티노는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게라르도 세가렐리는 도를 넘어선 것이다. 게라르도와 그 추종자들은 사제직의 권위와, 미사 및 고해 성사 의식을 부인했다. 그래서 나태한 떠돌이 걸승 패거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렇다면, 프란체스코 회의 엄격주의파 역시 같은 비난을 받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프란체스코 회에 속하는 소형제파는 교황의 권위는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나 사제직의 권위는 건드리지 않았다. 우리 소형제회 수도사들이 곧 사제들 아니더냐? 잘 들어 두거라. 각 교파의 주장을 듣고, 어느 것은 검고 어느 것은 희다고 하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선악을 구별하기도 필경은 이렇게 어렵다는 게다. 그러나 게라르도는 정도를 벗어나는 바람에 이단으로 몰리고 말았다. 게라르도 세가렐리는 무리를 거느리고 우리 소형제회 교단에 들기를 바랐지만 우리 형제들은 그 무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우리 형제들 교회에 잠시 몸붙여 살았는데, 이렇게 살면서,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어깨에는 소매 없는 겉옷을 걸친 사도들의 영정을 보고는 그게 그렇게 좋아 보였던지 저 역시 머리키락과 수염을 기르고 발에는 가죽신을, 어깨에는 우리 소형제회의 법복을 걸쳤다. 당시 대중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던 우리 프란체스코 문중의 차림을 따를 필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어딘가에서 잘못되었다. 당시 흰옷 위에다 흰 겉옷을 걸치고,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다니던 게라르도는 단순한 평신도들로부터 성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자 그만 머리가 돌아 버렸던 모양이다. 그는 자기가 살던 집을 팔아 돈을 장만해 가지고는, 옛부터 지방 장관들의 연단으로 쓰이던 석단 위로 올라가 돈을 한줌씩 꺼내어 설교를 듣는 불한당들에게 던졌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도 좋을까 말까 한 게 돈인데 그게 어디 불한당들에게 뿌릴 것이더냐? 게라르도가 <마음대로 가지시오> 하면서 돈을 뿌리자 불한당들은 이 돈을 주어 그날로 노름에다 탕진하니, 독신이라도 이런 독신이 어디 있겠느냐만, 돈을 부려 설교를 들어준 대가로 삼은 당사자는 낯빛 한번 붉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도 몸에 재물을 지니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저희 사부님 말씀을 듣고 알았습니다만,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문둥이, 버림받은 자들은 물론, 까마귀나 매같이 시체를 파먹는 육식조들을 상대로 설교하셨습니다.'
'그래. 그렇지만 게라르도는 엇길로 들어섰다.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성스러운 교회와 알력하신 적이 없다. 복음서는, 재물을 나누어 주되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지 불한당들에게 던지라고는 하지 않았다. 게라르도는 불한당들에게 던졌기 때문에, 시작이 나빴기 때문에, 과정이 나빴기 때문에, 끝이 나빴기 때문에 주고도 받지 못했다. 아니, 아무 것도 받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의 눈총을 받기는 했으니...'
'그렇다면 그레고리우스 10세는, 프란체스코 교단을 인가한 교황만큼 마음이 넓지 못했던 것이군요?'
'그래. 그러나 게라르도는 정도를 벗어나도 지나치게 벗어났다. 게라르도를 프란체스코 성인께 견주지 말거라. 프란체스코 성인께는, 스스로 하시는 일에 한 점 의혹이 없었다. 잘 들어라. 게라르도의 소매 아래로 모여 하루아침에 가짜 사도들이 된 돼지치기, 소몰이들은, 소형제회 수도사들이 청빈의 본보기를 보이면서 그토록 애써 가르쳤던 보시와 고행에 의지해서 피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지복 한가운데서 살고 싶어했다. 그러나 문제는 게라르도 세가렐리가 자꾸만 정고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게라르도 세가렐리는 사도들과 닮으려면 철저하게 닮아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도들은 유태인들이 아니냐? 그래서 게라르도는 할례까지 받게 된다. 이것은 바울로가 갈라디아 인들에게 한 말에 위배되는 행위가 아니냐? 너도 알겠지만, 많은 성인들께서는, 미래의 가짜 그리스도는 할례한 족속 가운데에서 나온다고 하셨다. 게라르도 세가렐리가 왜 이것을 몰랐을까만 그는 여기에서 한술 더 떠서 단순한 평신도들에게, <나와 더불어 내 포도원으로 가자>고 외쳤으니, 대중은 포도원이라는 포도원은 모두 게라르도의 포도원인 줄 알고 남의 집 포도원을 짓밟고 포도를 축내었다.'
'소형제회에서도 남의 사유 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내 말에 우베르티노는 험악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소형제회는 스스로 청빈하기를 고집했지 남들에게까지 청빈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다. 선한 기독교인의 재산을 무단히 유린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다더녀?' 그러면 도둑놈 소리 듣는 것을 면치 못한다. 게라르도가 바로 도둑놈 소리 듣는 것을 면치 못했다. 들리는 바로(나는 소문의 진위까지는 알지 못하나 그자들과 직접 연통이 있던 수도사로부터 들었거니와), 게라르도는 자기 의지력과 정신력을 시험한답시고 여자와 동침했으나 육욕을 느끼지 않고 무사히 밤을 넘겼더란다. 허나 문제는 그 졸개들이 이 흉내를 낸 데 있다. 천박한 졸개들이 이런 흉내를 내었으니 그 결과가 어찌 되었겠느냐? 너 같은 입문 수도자에게 어찌 이런 이야기가 당하겠느냐만 여자란 악마의 그릇인즉 유념할 일이다. 게라르도는 <회개하라>를 외쳤지만 제자 중 하나가 무리의 지휘권을 장악하고는 기마대를 거느리지를 않나, 막대한 돈을 들여 잔치를 베풀지 않나, 하여간 로마 교회 추기경의 수염을 뽑을 만큼 거들먹거리다가 급기야는 종파의 주도권을 노리고 한바탕 내분까지 일으키니 이 아니 부끄러운 일인가. 그렇다고는 하나 게라르도의 주위에는 나날이 많은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무식한 농투성이뿐이었으나 날이 감에 따라 도시의 직능 조합에 가입하고 있던 자들도 모여들었다. 게라르도는, 벗어야 벗은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면서 이들의 껍질을 홀랑 벗긴 뒤에 세상을 구하랍시고 거리고 내몰았다. 그러면서도 저는 유난히 튼튼한 천으로 소매 없는 허연 법의를 지어 입었는데, 그런 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은 종교 지도자라기보다는 광대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게라르도의 무리는 벌판에 기거하다가 틈이 엿보이면 교회로 쳐들어가 성직자를 몰아내고는 저희가 강단에 서기도 했다. 한때의 일이기는 하지만 라벤나의 성 오르소 성당에서는 주교좌에 어린아리를 앉힌 일도 있다더라.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요아킴의 교리를 계승한 교파라고 선전했다니 기가 막히지 않느냐.'
'하지만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는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보르고 산 도니노 사람 게라르도도 그렇게 주장했고 어르신께서도 그렇게 주장하시지 않았습니까?'
'닥쳐라! 요아킴은 위대한 선지자이시다. 프란체스코 성인께서 교회를 개혁하시리라는 것을 맨 처음 알아보신 분도 바로 이 요아킴 어른이시다. 그런데도 가짜 사도들은 저희들의 흰수작을 정당화하느라고 그의 교의를 이용한 것이다. 게라르도 세가렐리는 이름이 트리피아라던가 리피아라던가 하는 여사도를 하나 데리고 다니면서 선지자라고 선전했다. 알겠느냐? 여자를 말이다.'
'하지만 어르신, 전날 어르신께서는 몬테팔코의 키아라와 폴리뇨의 안젤라를 성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분들은 성녀야! 그분들은 교회의 힘을 인정했고 겸양으로 살았어. 선지지를 참칭한 적은 물론 없고... 그러나 가짜 사도들은, 다른 이단자들이 그랬듯이, 여자들도 도시를 순회하면서 설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뿐이냐? 결혼한 자와 독신으로 사는 자의 차이를 용납하지 않았고, 서원을 완전한 것으로 믿지 않았다. 이게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여서, 혹 너의 정진을 꺾는 이야기가 될지 몰라서 하지 않으려고 했다만 들어 보아라. 결국 파르마의 오비초 주교는 게라르도 세가렐레에게 철퇴를 가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해외한 일이 벌어진다. 인간이라는 게 얼마나 미약한 존재이며 이단자들이라는 게 얼마나 사악한 것들인지... 주교는 게라르도를 감옥에 옭아 넣기는 했지만 얼마 뒤에는 다시 풀어 밥상을 함께하는가 하면, 게라르도의 재담에 낄낄거리다가 결국은 자기의 전속 광대로 만들었다더라.'
'어떤 이유에섭니까?'
'모르겠다. 아니, 모르는 게 약일지도 모른다. 주교라고 하는 사람들은 원래 고상한 처세와 허장성세를 좋아한다. 이런 사람들은 도시의 상인이나 직인을 좋아하지 않아. 어쩌면 주교는, 게라르도가 청빈을 설교하면서 도시의 상인 및 직인들과 맞섰던 것이 좋아서 그랬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게라르도가 이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되 강도질하듯 하는 것도 눈감아 주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마침내 교황이 이 문제에 개입하고 나니 주교는 안면을 깔아 붙이고 게라르도를 다시 잡아들였다. 결국 게라르도는 구제 불능의 이단자로 낙인찍혀 화형주의 연기로 한 많은 삶을 마감해야 했다. 금세기 초에 있었던 일이다.'
'이런 일들이 돌치노 수도사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있다. 이단자가 참형을 당하여도 다른 이단이 뒤를 이으니, 어찌 앞일과 뒷일이 무관하다고 할 수 있으랴. 이 돌치노라는 위인은 본시, 여기에서 북쪽으로 좀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 북부 노바라 교구 성직자의 사생아였다. 돌치노 일찍부터 영특한 데가 있어서 읽고 쓰는 것을 익혔으나, 장성하자 배운 값을 하느라고 저를 길러 준 사제의 집을 털어 가지고는 북쪽으로, 그러니까 트렌토로 도망쳤다. 바로 여기에서 돌치노는 게라르도 세가렐레의 설교를 듣고 나서 이단자의 피를 끓이고는, 자신은 하느님의 유일한 사도이며 모든 것은 사랑 안에서 평등하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뿐이냐? 남자는 많은 여자와 혼교해도 반드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며, 타인의 아내와 딸을 더불어 통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어미와 딸을 구별해 가면서 지탄할 것은 아니라는 주장까지 하게 된다.'
'정말 이런 설교를 한 것입니까, 아니면 이런 혐의로 기소되었던 것입니까? 제가 듣기로 몬테팔코의 수도사들이나 엄격주의파 수도사들도 같은 혐의를 받았다고 합니다만...'
'그만 해두어라. 그자들을 수도사라고 부르는 것이 벌써 온당하지 못하다. 수도사라니! 이단자들이야! 돌치노가 푼 이단의 독을 마신 자들이라는 말이다. 내 말을 듣기나 하여라. 돌치노가 무슨 짓을 했길래 독사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는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돌치노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가짜 사도파의 가르침에 가까워졌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 젊은 시절 파르마에서 게라르도의 설교를 직접 듣지 않았나 싶다. 알려진 바로는, 게라르도 세가렐리의 사후에, 돌치노는 볼로냐 지역에서 이 이단자들과 접폭한 것으로 되어 있다. 돌치노가 설교를 시작한 곳은 트렌토이다. 돌치노는 여기에서 아름다운 명문의 규수 마르게리타를 유혹한다. 어쩌면 엘로이즈가 아벨라르를 유혹했듯이 마르게리타가 돌치노를 유혹했는지도 모르겠다. 명심하여라, 여자라고 하는 것은 사내의 가슴을 찌르는 악마의 독화살이다. 이즈음 트렌토 주교는 돌치노를 자기 교구에서 쫓아내게 된다. 그러나 돌치노에게는 이미 수천 명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그는 이 무리를 거느리고 먼길을 되짚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물론 도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돌치노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수하로 들어온다. 돌치노는, 지나던 길가의 산악에 은거하던 발도 파 이단자들도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돌치노가 이탈리아 북부의 발도 파와 합류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보인 몸짓이었던 것 같다. 당시 노바라에서 베르첼리 주교의 이름으로 가티나라 성읍을 다스리던 봉신들이 대중의 손에 쫓겨나고 없었던 데다가 대중이 돌치노의 무법자 패거리를 귀한 친구로 여겼으니, 노바라 지역에 당대한 돌치노에게야 상황이 얼마나 유리했겠느냐?'
'주교의 봉신들이 거기에서 무슨 짓을 했길래 쫓겨났습니까?'
'나도 모른다. 알 바도 아니고... 허나 너도 알겠지만 많은 경우 이단자들은 봉건 영주에게 먼저 반역하는 게 반역의 순서이다. 그러니까 이단자들은 신도들에게 한편으로는 성모의 청빈을 설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과 폭력을 도발하는 무리로 기른다. 당시 베르첼리에서는 몇 개 문벌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가짜 사도파는 이를 이용하여 도시를 교한했고 이들 문벌은 가짜 사도파가 야기시킨 혼란을 이용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봉건 영주들은 불한당들을 고용, 서민을 노략질했고, 서민은 노바라의 주교에게 보호를 요청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복잡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돌치노는 그러면 어느 편이었습니까?'
'그것은 나도 모르겠다만 돌치노는 이 혼란의 와중에 뛰어들어 제 몫의 지분을 챙기지 않았나 싶다. 말하자면 이 혼란의 소용돌이로 뛰어들어 청빈을 명분으로 사유 재산 버릴 것을 설교하는 기회를 붙잡았을 것이다. 이때 이미 3천 명 규모로 늘어난 돌치노 무리는 노바라 근처의 <대머리 산>에 진치고 살 집과 진지를 만든다. 돌치노는, 말하려니 얼굴이 뜨겁다만, 남녀가 어울려 혼음을 일삼는 이 무리 위에 군림하고 이 무리를 다스린다. 바로 이 대머리 산에서 돌치노는 일찍이 자기네 이단적인 교리를 퍼뜨려 놓은 지역의 추종자들에게 서한을 보낸다. 말하자면 자기네 교파의 이상은 청빈이고, 신자는 형식적인 복종의 서약에 구애되지 않으며, 자신은 하느님이 직접, 예언의 봉인을 헐고 신, 구약 성서를 가르치라고 보낸 사람이라는 주장을 편 것이다. 그는, 설교자와 소형제회 사제 같은 재속 성직자를 악마의 사제라고 부르는 한편 신도들로부터는, 이러한 재속 성직자에게 복종할 의무를 해제하기도 한다. 돌치노는 하느님 백성의 삶을 네 시대로 나눈다. 들어 보겠느냐? 제 1기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인, 교부와 선지자의 구약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번성해야 했기 때문에 혼인은 하느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었다. 제2기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이다. 그러니 바로 성성과 성결의 시대였다. 이어서 제3기가 온다. 교황이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 우선 지상의 부를 독점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백성은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들을 돌리고 방황을 계속하자 성 베네딕트가 와서 재물의 화를 설교한다. 그러나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들 역시 재물에 혈안이 되자 이번에는 성 프란테스코와 성 도미니크가 온다. 이들은 베네딕트보다 훨씬 강경하게 지상의 권력과 부를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고위 성직자들은 여전히 선한 대중을 배반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제3기는 종말을 맞는다. 종말을 맞게 되니 선한 사도들이 나타나 백성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돌치노가 주장하는 제4기이다.'
'그렇다면 돌치노가 가르친 것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그 중에서도 어르신께서 속하신 엄격주의파에서 가르친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돌치노는 이러한 도식에서 아주 해괴한 결론을 추론해 낸다. 즉, 부정과 부패가 난무하는 제3기를 하루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재속 성직자와 수도사와 탁발승들을 모두 쓸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냐? 교회의 고위 성직자, 사제, 수녀, 남녀 신도, 설교자, 수도사는 물론 소형제회, 은수사회에 속하는 수도사들, 심지어는 교황 보니파티우스까지 황제의 손에 넘겨 죽여야 한다고 했다. 당시의 황제라면 시칠리아 왕 페데리코 아니었더냐.'
'그러나 이 페데리코 황제는, 시칠리아에서 움브리아로 추방되어 온 엄격주의파 수도사들을 열렬하게 환영한 분이 아닙니까? 지금은 루드비히 황제로 바뀌었습니다만 바로 이 루드비히 황제에게, 교황과 추기경이 지니고 있는 속권의 박탈을 요구한 게 바로 소형제회 아닙니까?'
'이단자와 미친놈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하나 있다. 멀쩡한 사상과 꿈을, 하느님과 인간의 율법에 대한 배신자의 사상과 꿈으로 변용시킨다는 점이다. 소형제회는 황제에게 다른 사제들을 죽이라고 한 적이 없다.'
내가 알기로 당시 우베르티노는 실언을 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바이에른 인들이 로마에다 자기네 교단을 세웠을 때, 마르실리오와 다른 소형제회 수도사들은 교황을 떠받드는 성직자들에 대해, 돌치노가 요구한 것과 똑같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내가 돌치노의 편을 들고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마르실리오의 실책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즈음 나에게는 몇 가지 의문이 있었다. 특히 윌리엄 수도사와 대화를 나눈 다음이어서 더욱 그랬다. 나의 머릿속을 맴돌던 것은, 돌치노를 따르던 단순한 평신도들이, 엄격주의파의 약속과 그들에 대한 돌치노의 교리를 구별할 수 있었을까, 정통파 성직자들이 가르치던 의식에 신비주의 색채를 더했다는 것만으로 단죄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거룩함이란, 선지자가 약속한 바로 세속적인 수단으로 쟁취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실 때를 기다리는 데서 말미암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것이 옳은 길이고 돌치노의 길이 정도를 벗어난 길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변하기를 바랄지언정 사상의 질서를 변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자꾸만 서로 모순되는 것 같기 때문에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없어 애를 먹었다.
우베르티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단자는, 자존심 때문에 그 이단의 정체를 드러내는 법이다. 1303년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돌치노는 스스로를 사도회 최고 지도자로 참칭하고 저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르게리타(여자 말이다), 베르가모 사람 론지노, 노바라 사람 페데리코, 알베르토 카렌티노 그리고 브레시아 사람 발데리코를 대리자로 삼는다고 밝혔다. 이어서 미래의 교황들에 대해 미치광이처럼 예언하기 시작했으니, 이자의 말에 따르면 두 교황, 즉 첫 교황과 마지막 교황은 선할 것이고 두 교황, 즉 둘째 교황과 셋째 교황은 사악할 것이라고 했다. 첫 교황은 켈레스티누스, 두 번재 교황은 보니파티우스 8세인데, 바로 이 보니파티우스에 대해 자칭 예언자들은 <백척간두에 선 네가, 네 오만으로 이름을 모욕되게 하는구나> 하고 일갈한다. 세 번째 교황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만 모르기는하지만 예레미야 같으면 <사자 같은 자>라고 했음직한 교황인 듯하다. 돌치노는 시칠리아의 페데리코를 사자로 보았던 게야. 돌치노는 네 번재 교황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는 밝히고 있지 않은데, 내가 보기에는 요아킴이 말하던 거룩한 교황, 혹은 천사 같은 교황이 아닐까 싶다. 이 교황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교황의 성위에 오르는데, 돌치노와 그 추종자들은(그 즈음에는 이미 무리가 4천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 교황과 더불어 성령의 은총을 받아 세계가 끝날 때까지 교회를 개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허나 이분이 오시기까지, 즉 3년 동안 이 지상에 악마라는 악마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야 했다. 알겠느냐, 악마가 제 동아리인 돌치노를 얼마나 농락했는가를? 다섯 번째 교황이 누구더냐? 바로 돌치노 토벌을 선언한 클레멘스 5세이다. 이즈음 돌치노는 추종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정통파와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이론을 전개했다. 이자는, 로마 교회는 갈보집이라고 했고, 복종은 사제의 의무가 아니라고 했다. 뿐이냐? 모든 영적인 권능은 사도회로 넘어갔으니, 오로지 사도회만이 교회를 대표할 수 있고, 오로지 사도회의 사도만이 혼례를 주관할 수 있다고 했다. 입에 담기도 거역스럽다만 이자들은 사도회에 속하지 않는 자가 구원받은 일은 있을 수 없다, 교황은 죄를 사면할 수 없다, 십일조를 내지 말아야 한다, 성별된 교회는 마구간과 다름이 없으니 여기에서는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예배하기만 하면 교회든 숲속이든 마친가지다... 이랬으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느냐.'
'정말 그런 소리를 했습니까?'
'이를 말이냐? 말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문서로 작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자들의 행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으니, 선한 기독교인들에게 이게 행인지 불행인지... 이자들은 <대머리 산>에 정착하면서부터 계곡 마을을 약탈하고는 마을 사람들은 자기네 물자나 조달하는 노예로 부리니, 이게 무엇이냐, 무고한 백성을 상대로 성전을 성포한 꼴이 아니냐?'
'모두가 돌치노를 적대했습니까?'
'모르겠다. 몇몇 부락에서는 지원하기도 했을 게다. 조금 전에 내가 말하지 않더냐? 돌치노는 지방의 분규를 교묘하게 이용한 기회주의자였다고... 어쨌든 그러던 차에 겨울이 왔다. 1305년의 겨울에는 수십 년래의 한파가 닥쳤다. 인근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수밖에. 돌치노는 추종자들에게 세 번째 공한을 통한 격문을 보냈고, 그 결과 더 많은 무리가 돌치노에게로 몰려와 몸을 붙였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산 위에서 겨울을 날 수 있었겠느냐? 허기를 채우느라고 말을 잡아먹고, 초근 목피를 고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상당수가 여기에서 굶어 죽었지.'
'당시 이 무리를 가장 적대한 이들이 누구누구인지요?'
'베르첼리의 주교가 클레멘스 5세에게 주청했고 이 주청에 따라 곧 이단자 토벌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여기에 가세하는 사람들은 기왕에 지은 죄를 먼죄받는 특권을 누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랬겠지만 사보이아의 루도비코, 롬바르디아의 이단 심판관들, 밀라노의 대주교 등이 가세했다. 여기에다 베르첼리와 노바라 사람들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사보이아, 프로방스는 물론 심지어는 프랑스에서도 십자군이 왔다. 총사령관은 베르첼리의 주교가 맡았다. 양군은 <대머리 산>에서 접전을 더러 했던 모양이나 돌치노의 요새는 난공불락이었는 데다 지원하는 이단자들이 많아서 십자군으로서는 앞이 안 보였었다니, 아마.'
'누가 대체 돌치노 일파를 지원했습니까?'
'난들 어떻게 소상하게 알까만, 세상이 혼란해지면 혼란해질수록 득을 보는 자도 있는 법이다. 그런 자들이 돌치노를 지원함으로써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기를 바랐을 테지. 그러나 그런 자들의 보람이 뒤쪽으로 나서 1305년 말, 이단자들은 <대머리 산>에다 부상자와 병자를 남겨두고는 트리베로 지역의 주벨로 산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 주벨로 산은, 당시에 반역자들의 진지 노릇을 했다고 해서 뒤에 <반역자의 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즈음의 상황을 너에게 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아쉽구나. 어찌하였든 피아의 참극이 되풀이되다가 결국 반도들이 항복하면서 돌치노 일파는 화형주의 연기로 사라지게 되었다.'
'아름다운 마르게리타도 화형을 당했습니까?'
'이런 젊은 녀석 좀 보게? 아름다운 마르게리타? 암, 말이야 맞지. 아름다웠고 말고. 수많은 지방 영주들이 이 여자를 화형대에서 끌러내려 제 계집 삼고 싶어했으니까. 하지만 어디 말을 들어먹게 생겼데? 이 고집 센 계집은 결국 고집 센 사내 돌치노를 따라 죽음을 택했다. 너도 교훈삼도록 하여라. 아무리 아름다운 용모로 단장하고 있더라도 계집은 필경은 바빌론의 창부... 조심하여야 할 일이다.'
'하지만 어르신, 저에게 한 가지만 더 일러주십시오. 이 수도원의 식료계 수도사... 그리고 살바토레 수도사 역시 한때나마 돌치노와 우여곡절을 같이한 것 같은데요?'
'말을 삼가라! 분별없이 함부로 지껄이다니! 내가 식료계 레미지오를 처음 만난 것은 소형제 수도원에서였다. 레미지오가 그전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내가 알기로 레미지오는 착한 수도사이다. 정통파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오, 마음이 원이로되 육신이 허약하도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신지요?'
'너 알 바 아니다...'
우베르티노 수도사는 다시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성모상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 너도 순결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겠구나. 저기 승화한 여성의 실체가 있다. 아름답다는 말은 저분을 일컬을 때나 써야 한다. 노래 중의 노래 [아가]에 나오는 사랑스러운 이처럼 아름다운 분이 아니냐.'
그의 얼굴이 그렇게 밝아 보일 수가 없었다. 전날 성보 상자의 은금 보화를 자랑할 때의 수도원장의 얼굴과 비슷했다.
'저분 안에서는 육체의 아름다움도 천상적인 아름다움의 표징이 되느니라. 조각가가 저분을 여느 여성처럼 구색을 있는 대로 갖추어 드러낸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느냐?'
우베르티노 수도사는 이러면서, 바싹 조여진 보디스 위로 실팍하게 부풀어오른 성모의 가슴을 가리켰다. 아기 예수의 손이 그 위에 머물고 있었다.
'보이느냐? 일찍이 선인들이 일렀다. <아름다워라, 젖가슴이여, 부풀어올랐으되 지나치지 아니하고 자제하였으되 위축되지 않았도다...> 어떠냐? 저 감미로운 모습을 올려다보니?'
나는, 내 가슴에서 일렁거리는 정체 모를 불길에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우베르티노는 내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았던지 이렇게 덧붙였다.
'초자연적인 사랑의 불길과, 네 오감의 욕심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성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만.'
'성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항차 저 같은 것에게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사랑이 무엇이냐? 이 세상 만물 중에, 사랑만큼 영혼을 흔드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에게도 그러하고, 악마에게도 그러하니 만상에 두루 그러할 것이다. 사랑처럼 가슴을 뜨거운 것으로 가득 차게 하고, 사랑만큼 가슴과 가슴을 하나로 열게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사랑을 이길 무기가 없는 자는, 영혼의 사랑을 통하여 바닥 없는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나는, 마르게리타의 유혹이 없었더라면 돌치노도 저렇듯이 저주받을 인간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대머리 산>이 그토록 농탕하고 어지러운 혼교의 무대가 되자 않았던들 돌치노의 반역에 동조하는 무리가 그렇듯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곡해하지 말아라. 수도자가 타기하여 마땅한 악마의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 인간과 그 이웃간의 사랑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진실로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함께 살기를 바라고, 이쪽이 부르면 저쪽이 대답할 것 같은 남녀 사이에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내 너에게 고백하거니와, 안젤라와 키아라 같은, 참으로 정결한 여성에 대하여서도 나는 벌받아 마땅한 마음을 품은 적이 있느니라... 하느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고 영교하는 사이였는데 그러하였다는 말이다... 영혼이 느낀 사랑, 생각으로 준비한 사랑이 아니고 그냥 뜨겁게 느껴진 사랑도 종국에는 어지러워질 수 있는 것이다. 오, 사랑의 속성이여... 처음에는 우리 영혼을 위로하던 사랑이... 때로는 괴로움을 안기고... 이윽고 하느님 사랑의 뜨거움에 닿으면 우리를 절규하게 하고 신음하게 하고... 급기야는 용광로에 던져진 돌처럼 우리를 녹이고 마는 것...'
'그것이 참사랑 아니겠습니까?'
우베르티노 어른은 내 어깨에 올렸던 손길을 거두면서 대답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 그것이 참사라, 선한 사랑이다. 하지만 난지난사라, 이것과 저것이 다름을 알기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면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 안느냐? 두 손을 뒤로 묶이고 눈에는 눈가리개를 당한 채로 교수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과 같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죽여 주는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허공 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과 같으니라...'
그의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그게 부끄러웠던지 곧 얼굴을 훔치고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 이제 가거라. 네가 묻는 것에는 다 대답해 주었다. 여기에는 천사들의 찬양대가 있고 저기에는 지옥의 아가리가 있다. 가되 주님을 온당하게 찬미할 일이다.'
그리고는 다시 성모상 앞에 엎드렸다. 부드럽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다시 기도를 시작한 것이다.
나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우베르티노 수도사와의 대화는 내 정신과 오장 육부에 기이한 근질거림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광기의 불길을 일으켜 놓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지만, 나는 혼자서 장서관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사부님 모르게, 미궁으로 들어가 방향을 헤아려 보자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돌치노가 <루벨로 산>으로 올랐듯이 혼자서 장서관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내게는 등잔이 있었다(왜 교회로 들어올 때 등잔을 가지고 있었던가? 나는 진작부터 혼자 은밀하게 장서관으로 올라가 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눈을 감고 납골당을 지났다. 문서 사자실까지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참으로 기이한 우연의 일치였다. 문서 사자실의 한 필사 서안에서, 수도사가 베끼다 놓아둔 원고 한 편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른 원고가 아닌, 하필이면 [디안자의 우두머리 돌치노 수도사의 내력]이었다. 그 원고가 놓여 있던 서안은 산탈바노 사람 피에트로의 서안이었던것 같다. 그가 이단자와 관련된 원고를 필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살인 사건 때문에 중단되고 있었던 터였다. 따라서 그 원고가 파타리니 파 수도사 및 편타 고행파 수도사에 관한 보고서와 함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은혜인지 악마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그 상황을 초자연적인 우연의 일치로 보고 그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별로 긴 것은 아니었으나 내용 중에는 우베르티노가 말하지 않았던 것도 들어 있었다. 모르기는 하나 그 사건을 가까이서 목격하고, 따라서 기억의 불길을 꺼뜨리지 않은 사람이 쓴 원고 같았다.
원고에 따르면 돌치노, 마르게리타, 론지노가 붙잡힌 것은 1307년 3월의 성 토요일이었다. 그들은 비엘라로 끌려가, 거기에서 교황의 하회를 기다리고 있던 주교의 손으로 넘어갔다. 돌치노 일당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교황은 프랑스의 필립 앙에게 공한으로 이 소식을 전했다. 그 공한의 내용은 이러하다.
<우리는, 간난 신고와 오랜 노력과 여러 차례의 접전 끝에 드디어 우리 주님께서 거룩한 만찬을 드신 이날에, 우리의 존경하는 베르첼리의 라니에로 주교의 수고에 힘입어, 저 극악무도한 이단자인 벨리알의 아들 돌치노를 붙잡았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니 기쁘고 혼연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단자와 행동을 함께하던, 악마에 물든 무리의 대다수는 현장에서 도륙당한 것으로 보고 받았습니다.>
교황은 포로를 준엄하게 심문하되 구체적으로 이단에 가담한 것으로 확인된 자는 화형에 처하게 했다. 같은 해 7월 초하루 이단자들은 속권으로 넘겨졌다. 도시의 종이라는 종은 모두 울리는 가운데, 이단자들은 형리와 군대에 둘러싸인 채 도시로 들어왔다. 수레가 거리를 지날 동안 형리들은 빨갛게 달군 집게로 이단자들의 살점을 뜯어 내엇다. 마르게리타는 돌치노의 눈앞에서 화형을 당했다. 돌치노는, 불에 단 집게가 사지로 파고들 때도 신은 한마디 내뱉지 않았듯, 마르게리타가 화형을 당할 때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마차는 계속해서 도시 거리를 누볐고 형리들은 계속해서 집게를 달구었다. 돌치노는 무수한 고문을 침묵으로 이겨내었다. 돌치노는, 형리들이 코를 떼어 낼 때는 어깨를 한 번 실룩거렸고 남근을 자를 때는 한 숨을 한 번 쉬었을 뿐이었다. 제3일에 다시 오겠다는 돌치노의 경고는 보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화형을 당했고 그 재는 이단을 경계하는 본보기로 공중에 뿌려졌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원고를 덮었다. 화형주에게 돌치노는 어떻게 죽어 갔던가? 순교자처럼 의연하게 죽어 갔던가, 아니면 저주받은 자로서 비참하게 죽어 갔던가? 장서관 계단을 오르는데 자꾸만 발이 헛군데에 가닿았다. 나는 계단을 오르면서 비틀거렸던 까닭을 안다. 문득 토스카나에 당도한 직후, 그러니까 그 시점으로부터 몇 달 전에 보았던 화형 현장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돌연, 그때까지 그 화형 현장에서 보았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내 영혼의 요구에 따라, 악몽이 되어 내 가위를 누르고는 하던 그 일을 의도적으로 깡그리 내 뇌리에서 몰아내고 있었는지도 모르다. 아니다. 소형제회의 행각승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 광경이 선명하게 떠오르고는 했던 것을 보면 잊어버렸던 게 아니라 보았다는 것 자체를 오욕으로 치부하고 내 기억의 바닥으로 자꾸만 쟁여 넣고 있었다는 것이 옳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소형제회 행각승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되는 것과 소형제회 행각승이 화형을 당하는 것을 본 것은 같은 즈음이다. 피사에서 사부님을 만나기 직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사부님의 도착이 지연되자 선친께서는 익히 소문으로 듣던 교회 구령이나 하라고 나를 피렌체로 보내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이탈리아 어를 익히느라고 토스카나를 전전하다 한 주일 남짓 피렌체에 묵게 되었다. 피렌체에 관해서는 하도 들은 이야기가 많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피렌체에 이른 직후에 나는 머지않아 이단 심판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도시 전체가 바로 이 소문으로 술렁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종단을 더럼히고, 주교와 재속 성직자들을 욕보인 소형제회의 이단자 하나가 종교 재판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소식을 옮겨 준 사람에게 물어 종교 재판이 열린다는 곳으로 가보았다.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이, 이단 혐의를 받고 있는 미켈레라는 소형제회 행각승은 참회와 청빈을 설교하고 성 프란체스코의 말씀을 전하는 참으로 믿음이 깊은 수도사라고 했기 때문에 문득 구미가 당겼던 탓이었다. 내 지인의 말에 따르면, 미켈레 수도사는 고해성사를 베푼답시고 여자에게 접근하여 이단적인 교리를 편 혐의로, 바로 그 여자의 집에서 붙잡힌 것으로 되어 잇다. 원래 성직자는 그런 곳에서 사사로이 성사를 집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소형제회 행각승들의 믿음이나 처신하는 바에 따르면 이것은 큰 허물이 되지 못했다. 내 지인은, 바로 이 때문에 대중은, 혹은 이단 심판관들은 이 수도사를 이단시하고 다른 행각승들이 해온 못된 짓까지 옴싸잡아 들씌웠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믿는 모양이었다(그렇지 않아도 카타리 파 행각승들이 도둑질과 남색질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돌던 즈음이었다).
나는 이단 심판이 열리고 있다는 산 살바토레 교회로 갔지만 바깥에 군중이 많아서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극성스러운 시민 하나가 창문틀에 매달려, 안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우리에게 소상하게 알려 주는 바람에 다행히도 대강의 분위기는 헤아릴 만했다. 이 극성스러운 시민이 전해준 바에 따르면 이단 심판 조사관이 미켈레에게, 전날 미켈레 자신이 한 말, 즉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개인적으로 소유한 것도 없었고 공동의 재산으로도 가진 것이 없었다>고 한 증언내용을 읽어 주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사실이냐고 물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시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증서기가, 하지도 않은 말을 덧붙인 것이오!>라는 소리가 밖에 까지 들렸다. 미켈레 수도사의 음성이었다.
'공증 서기는 최후의 심판날 이것을 설명해야 할 것이오!'
미켈레 수도사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었다.
이단 심판관들은, 공증 서기가 미리 작성한 자백서를 낭독하자 미켈레 수도사에게, 향후로는 교회와 시민의 뜻을 좇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미켈레 수도사는 밖에까지 들릴 만큼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은 오로지 소신대로만 행동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나는 청빈하시었던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르겠소. 이것을 아니라고 하니 교황 요한 22세야말로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오?'
이어서 신학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대개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속하는 이단 심판관들은 성서에서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미켈레 수도사를 회유하려고 했지만 미켈레 수도사는, 어째서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속하면서도 교단의 회칙을 부정하느냐고 오히려 심판관들을 꾸짖었다. 심판관들은, 교단의 전문 신학자들인 자기네들 앞에서 성서를 가르치려 한다고 미켈레 수도사를 꾸짖고 어찌되었든 그리스도에게는 재산이 있었고, 교황 요한 22세는 그리스도 교회를 대표하는 거룩한 사람이라고 못박았다.
'아니오, 교황 요한은 이단자요!'
미켈레 수도사가 외쳤다. 심판관들은, 미켈레 수도사처럼 사악한 논리로 철저하게 무장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면서 혀를 내둘렀다지만 교회밖에 서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미켈레 수도사를, 바리사이 파 신학자들 앞에 선 그리스도에 견주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제서야 많은 사람들이 미켈레 수도사의 믿음을 거룩한 것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윽고 주교의 친위대가 미켈레 수도사를 다시 감옥으로 데려갔다. 그날 밤 나는, 많은 주교 측근의 신학자와 수도사들이 그에게 달려가 더러는 꾸짖기도 하고 더러는 달래기도 했지만 미켈레 수도사는 자기 믿음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켈레 수도사는 주교 측근의 수도사들에게 일일이, 그리스도는 청빈했고, 성 프란체스코와 성 도미니크도 일찍이 그렇게 믿었던 바, 그런 믿음을 고집한다고 화형주에 매달겠다면 곧 성서에 기록된 바도 확인할 수 있고, [요한의 묵시록]의 스물네 원로와 그리스도와 성 프란체스코와 여러 순교잗르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인즉, 기꺼이 불에 타죽겠노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런 신심으로 성인의 교의를 읽어 낸다면, 그들과 함께하는 우리의 신심와 기쁨은 또 얼마나 크겠는가?'
미켈레 수도사의 이런 말에 주교의 측근들은, <저놈 속에는 악마가 들어앉았다>는 말을 남기고 감옥을 떠났다는 것이다. 다음날 그에 대한 판결문이 포고로 내걸렸다. 나는 양피지를 가지고 주교관으로 달려가 그 판결문 일부를 베껴 둔 바 있다. 판결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주님의 이름으로, 아멘. 이는 실로 육신에 대한 탄핵, 육신 탄핵을 소상하게 포고하는 포고문이거니와, 본 규정에 따라 간결하게 공시라는 바이다...'
이 포고문은 이어서 미켈레 수도사의 죄상을 나욜하고 있었는데, 미켈레 수도사가 실제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가장 결정적인 지상은, 소형제회 수도사들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인이 아닌즉 구원을 받기는커녕 저주를 받아 지옥의 나락에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대목이었다. 판결문은 피고가 기소 사실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서 미켈레 수도사라고 하는 요한을 관례대로 끌어내고 불고, 점화된 불꽃으로 태우되 이자가 완전히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 영혼이 육체에서 완전히 분리될 때까지 태울 것이다.>
포고문이 내걸리자 많은 성직자들은 감옥으로 달려가 미켈레 수도사에게 경고했는데 그중 한 수도사는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미켈레 형제, 이미 형장이 차려지고 주교석이 만들어졌으며, 화형대 위에는 악마와 동행하는 소형제회 행각승의 이름이 씌어 있네.'
이 수도사는 미켈레 수도사에게 겁을 주어 신념을 꺾게 하고 목숨을 부지하게 하고자 했으나 당사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화형주 옆으로 우리 프란체스코 성인이 오실 것으로 믿네. 예수님, 사도님들, 바톨로메오와 안토니오 같은 순교자들도 오실 것으로 믿네.'
이로써 미켈레 수도사는 이단 심판관들, 주교의 측근들, 동도의 도반 수도사들이 내미는 화해의 손길을 거부한 것이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 주교관 앞, 이단 심판관들이 모여 있던 다리 위로 갔다. 미켈레 수도사는 사슬에 묶인 채 그곳으로 끌려 나와 있었다. 미켈레 수도사의 추종자 하나가 강복을 받으려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가 무장 경비병 손에 끌려나가 즉석에서 투옥되기도 했다. 이어서 심판관들은 피고 앞에서 판결문을 읽은 다음 참회하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판결문이 이단자라고 지칭할 때마다 미켈레 수도사는, <내가 왜 이단자인가? 나는 죄인이나, 가톨리임에 분명하고 이단자가 아니다> 하고 소리쳤고, 판결문이 교황을 거룩한 교황 요한 22세라고 지칭할 때는, <아니야, 그게 바로 이단자여>하고 외쳤다.
이윽고 주교가 미켈레 수도사 앞으로 와서, 자기 앞이니 무릎을 꿇으라고 말하자 미켈레 수도사는 이단자 앞에서는 무릎을 꿇지 않는 법이라고 대들었다. 측근의 경비병이 우격다짐으로 무릎을 꿇리자 미켈레 수도사는, <하느님께서도 이런 내 허물을 용서하시리라>라고 중얼거렸다. 법의가 한 장 씩 벗겨지면서 의식이 시작되었다. 그의 몸에는 피렌체 사람들이 <치오파>라고 부르는 내의 한 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사제의 성복을 벗길 때에는, 벌겋게 단 쇠붙이로 손가락의 육질부를 그을리고 머리카락을 밀어 버리는 것을 보면 그런 관계가 진작부터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어서 죄인이 속권을 대리하는 경비대장과 그 부하들에게 넘겨졌다. 그들은 미켈레 수도사를 쇠사슬로 묶어 다시 감옥으로 끌고 갔다. 끌려가면서도 미켈레 수도사는 군중들에게 외쳤다.
'우리 주님을 위해 죽는다!'
미켈레 수도사는 그 다음날 화형을 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화형을 당하기 전날 심판관들은 미켈레에게, 죄를 자복하고 성체를 배령하겠느냐고 물었지만 미켈레 수도사는 죄 있는 자로부터 성사를 받는 것 역시 죄악이라면서 거절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켈레 수도사는 어쩌면 파타리니 파의 이단적인 교리에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침내 집행일이 왔다. 당일이 되자 지방 장관이 나와 그에게 물었다.
'너는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냐? 무슨 배짱으로, 온 시민이 다 받아들이는 성모님 교회의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냐?'
'나는 가난하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을 뿐이오.'
미켈레 수도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어 경비대장이 부하들을 데리고 나와 미켈레 수도사를 끌어내었고 주교를 대리하는 사제가 자백서와 포고문을 다시 한번 읽었다. 미켈레 수도사는 여기에서도, 공증 서기가 위증을 했다는 말로 자백서 낭독을 방해했다. 위증했다는 대목은 상당히 미묘한 문제를 다룬 것이라서 현장에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지금 내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미켈레 수도사를 화형에 처함으로써 소형제회 박해를 정당화시키는 것과 결정적인 관련을 맺는 것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성직자들인 심판관들과 속권인 형리들이, 청빈 속에서 살며 그리스도에게 세속적 재산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을 왜 그렇게 모질게 다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죄를 주어 화형대에 매달아야 할 사람은 호의호식을 탐하고, 남의 재물을 탐하여 죄악과 성직 매매로 교회를 더럽히는 자들이 아니겠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 나는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옆에 있는 수도사에게 물어보았다. 그 수도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청빈을 좋아하는 수도사들은 동아리를 지어 교파를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대중에게 좋지 못한 본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대중이 청빈하지 않은 수도사는 성직자로 치지 않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대중에게 청빈을 가르치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요. 대중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그만큼 가난한 자기 삶을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여기게 되지요. 그런데 삼단 논법의 가닥이 어디로 어떻게 풀려서 그렇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소만, 대중이 청빈을 사랑하게 되면 교황 설자리가 없어진대요. 대중이 황제 편으로 붙을 터인데 교황이 이것을 좋아할 리 없지요.'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러나 미켈레 수도사가 무슨 까닭에서, 죽음으로써 황제를 기쁘게 하고, 교단에 논쟁의 씨를 뿌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질문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 성인이 아니에요. 피렌체 시민을 교란시키기 위해 루드비히 황제가 보낸 사람일 게요. 소형제회 행각승은 대개 토스카나 사람인데, 그 배후에는 루드비히 황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미친놈입니다. 과대 망상증에 걸린 데다 악마까지 붙어 덧들린 것이지요. 보세요, 과대 망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순교자 놀이를 즐기고 있는게 아니고 뭡니까? 심판관들은 저 땡중의 순교자 놀이 상대가 되어 주고 있는데, 저 땡중의 입장에서 보면 마누라 붙여 주는 것보다 재미가 낫겠어요.'
'무슨 소리야?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자기 믿음을 저런 식으로 주장할 수 있어야지. 옛날 옛적 이교 시대의 순교자들처럼...'
멍한 상태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서 나는, 이따금씩 군중의 머리에 가렸다가는 나타나고 나타났다가는 다시 가려 버리고는 하는 미켈레 수도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 내가 본 얼굴은 지상적인 것을 바라보는 얼굴이 아닌, 천상적인 것을 바라보는 얼굴이었다. 나는 법열의 순간순간에 더러 그런 성인의 얼굴을 친견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미친 사람인지, 아니면 순교자인지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나는 한가지는 이해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어떤 적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임에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까지도 그의 태연 자약한 태도를 기억하고 문득문득 놀라면서 생각해 보는 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 진리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죽음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두려워하면서도 그 사형수에게 탄복하고 있었다.
각설하고, 형장으로 돌아가자, 군중들은 미켈레 수도사가 화형을 당할 형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경비대장과 경비병들은, 단추가 벗겨진 헐렁한 속옷 차림인 그를 끌고 갔다. 그는 성큼성큼 걸으면서도 이따금씩은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문을 음송했다. 언필칭 순교자의 위용이었다. 군중의 수는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누군가가 외쳤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이다!'
미켈레 수도사가 대답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게 아니야!'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면 진리를 위해서 죽는다고 하자.'
미켈레 수도사가 응수했다.
대열이 <총독의 거리>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무리 중 누군가가 미켈레 수도사에게, 대중을 위해서 기도를 드려 달라고 했다. 미켈레 수도사는 묵묵히 무리를 축복했다. <침례 교회>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가 외쳤다.
'목숨을 도모하시오!'
그러자 미켈레 수도사가 응수했다.
'죄악으로부터 그대 목숨이나 도모하게.'
옛 시장터에서 또 누군가가 외쳤다.
'살아야 합니다, 살아야 해요!'
'자네나 지옥을 경계하고 살아!'
미켈레 수도사도 소리를 다투어 외쳤다.
새 시장터에서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회개하라! 참회하라!'
'네놈들이나 돈놀이를 회개하고 참회하여라.'
미켈레 수도사도 맞고함을 질렀다.
<성 십자가 거리>의 계단 위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들이 서 있었다. 미켈레 수도사는 그들을 보고, 어찌하여 성 프란체스코의 회칙을 따르지 않느냐고 꾸짖었다. 그들 중에는 어깨만 으쓱해 보이는 수도사도 있었고, 부끄러움을 느꼈던지 두건을 내려쓰는 수도사들도 있었다.
<정의의 문> 앞에 서 있던 군중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철회하시오, 취소하시오. 왜 돌아가시려고 하십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다오.'
미켈레 수도사가 대답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라면 죽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지.'
미켈레 수도사가 태연하게 응수했다.
<정의의 마당>에서는 무리 중 하나가, 어째서 앞서 가신 프란체스코 성인처럼 모든 것을 보리지 못하느냐고 하자, 미켈레 수도사는, <나는 성인이 못 되어서 그럴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환호하면서 힘을 내라고 격려하는데 가만히 보니 바로 미켈레 수도사의 추종자들이었다. 나는 황급히 그곳에서 벗어났다.
이윽고 시가지를 벗어나자 화형주와 <오두막>이 보였다. 화형주 밑에다 장작을 오두막 모양으로 쌓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오두막 주위에는 기병대가 둥그렇게 둘러서서 접근하는 군중을 막고 있었다. 형리들이 미켈레 수도사를 화형주에 묶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무엇 때문에 죽겠다는 것입니까?'
'내 속에 있는 진실, 죽음으로밖에는 펼 수가 없다네.'
그의 어조는 담담했다.
형리들이 오두막에 불을 질렀다. 미켈레 수도사는 <사도신경>을 음송하고 찬미가를 불렀다. 여덟 소절쯤 불렀을까? 조는 듯이 그의 머리가 꺾이면서 몸이 화형주에서 떨어졌다. 그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이 타 버린 것이었다. 절명한 뒤였다. 몸이 타기 전에 먼저 고열에 숨이 끊어지고 가슴에 가득 찬 열기로 심장이 터져 버리는 게 순서였다.
오두막이 횃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꽃 위로 언뜻언뜻 보이던, 새카맣게 그을린 미켈레 수도사의 몸뚱어리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저 불붙는 떨기나무 앞에 선 기분이었으리라. 당시 내 입에서는 어느새 환희의 송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 힐데가르트의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 송가였다.
'고귀한 청정, 예사롭지 않은 기운, 화성의 열정인 불꽃이여, 비추는 것을 청정하게 하고, 태우는 것을 열정이게 하는 불꽃이여!'
장서관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우베르티노 수도사로부터 들은 사랑과 관련된 말들을 생각했다. 화형대의 미켈레 수도사와 화형주의 돌치노, 그리고 돌치노의 아름다운 마르게리타가 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갑자기 몸이 무너질 듯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곧장 장서관의 미궁 쪽으로 걸었다.
혼자 장서관의 미궁으로 들어가기는 물론 처음이었다. 등잔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바닥에 끌리는 나 자신의 긴 그림자는, 흡사 전날 밤에 본 환상 같아서, 내 그림자가 거기에 끌리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문득문득 숨이 막히고는 했다. 게다가 거울이 나타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거울의 조화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그게 거울인 줄을 아는데도 막상 대하면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법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이상한 것은 그렇게 겁을 먹고도 방향을 가늠하면서 저 기이한 냄새가 환상을 불러일으키던 방을 피하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딱히 어느 방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무엇에 들린 사람처럼 무작정 걸었다. 그러나 장서관 입구에서 그리 먼 방까지도 이동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걸은 것 같아 정신을 수습하고 자세히 보니, 조금 전에 지났던 그 7면벽실이었다.
서안 위에는, 전날 못 보던 서책이 몇 권 놓여 있었다. 말라키아가 문서 사자실에서 가져다 놓기는 했지만 짬을 못내어 정리하지 못한 서책인 것 같았다. 기이한 약초가 타는 방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머리가 어질어질해 왔다. 문제의 방에서 냄새가 새어 나왔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냄새일 수도 있었다. 나는 채식이 화려한 서책 한 권을 펼쳤다. 채식의 기법으로 보아 <세계의 끝>의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사도 마르코의 복음서가 시작되는 면에는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사자의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하고 말았다. 사자의 실물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게 사자인지 아닌지 모르는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채식사가, 괴수의 땅 히베르니아(아일랜드의 옛 이름)에 산다는 사자의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으로 믿는다. 나는 [박물지]에서 읽은 바가 있어서 사자가 지상의 동물 중에서는 가장 무서우면서도 제왕의 특징을 두루 갖춘 짐승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는 사자라는 짐승이 상징하는 바에 대해서는 읽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형상만으로 나는 복음의 원수를 상상하는 동시에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상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서웠는 데다 벽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한기 때문에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 왔다.
내가 채식 그림에서 본 사자는 이빨이 날카롭고, 머리는 뱀 대가리처럼 선이 미끈해 보이는데도 더할 나위 없이 강인해 보였다. 그 큰 몸을 버티는 기둥같이 굵고 튼튼한 다리 아래의, 방석같이 넓은 발끝에는 날카롭고도 무시무시한 발톱이 달려 있었다. 털은, 나도 구경한 적이 있는, 붉은색과 에메랄드 색 너울로 수놓은 동양의 융단 같았다. 사자의 뼈대는 무서우리만치 튼튼했다. 엉덩이에서 머리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똬리로 꼬인 굵은 꼬리 끝은 검은 색실과 흰 색실로 꼬아 놓은 두루마리 술 같았다.
사자의 위용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겠지만 다른 면을 보려고 하는데도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혹 그렇게 무서운 짐승이 옆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몇 차례 주위를 둘러보기까지 한 것으로 기억되는 걸 보면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마태오의 복음서]를 펼치자 사람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 사람의 형상이 사자의 형상보다 더 무서웠다. 얼굴은 분명히 사람의 얼굴인데도 이 사람은 발치에 이르기까지 뻣뻣한 제복 같은 것을 두르고 있어서 예사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제복 같기도 하고, 갑옷 같기도 한 옷에는 빨갛고 노란 준보석이 박혀 있었다. 루비와 자수정으로 이루어진 성채 위로 불쑥 솟아오른 머리통은 사부님이 추적하고 있는 흉악한 살인범 같아 보여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 동물과 사람을 미궁과 관련시켜 생각한 이유를 깨달았다. 장서관의 미궁에서 불쑥 나타난 서책의 삽화, 줄마노와 에메랄드 선, 녹옥수 실, 옥주석 띠는, 내가 있던 방과 복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듯했다. 번들번들한 서책의 면면에서 내 눈이 초점을 잃어버림에 따라 나는 장서관 미궁에서 길을 잃고 방방을 헤매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문득 내 눈앞에, 양피지 위에 그려진, 길 읽은 내 모습이 보였다. 그 그림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해져 와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혼미해지는 정신으로, 이러한 서책의 채식이 기괴한 웃음을 흘리면서 내가 처한 입장을 그대로 일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이것은 바로 네 이야기인 것이다>, 이렇게 중얼거림으로써 정신을 가누려고 했다.
다른 서책을 펼쳤다. 히스파니아에서 만들어진 서책인 것 같았다. 색채가 몹시 상렬해서 붉은 색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피가 흐르고 불길이 일럴거리는 것 같앗다. [요한의 묵시록]이었다. 펴고 보니 전날 밤에 본 것과 똑같은 물리에르아믹타 솔레, 즉 태양을 입을 여자 그림이 보였다. 그러나 전날 밤에 본 것과 똑같은 책은 아니었다. 우선 채식부터가 달랐다. 채식에는 여성의 형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거기에 그려진 여자의 얼굴과 가슴과 허벅지를, 우베르티노 수도사와 함께 보았던 성모상에 견주어 보았다. 선은 달랐지만 아름다워 보인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나는 형상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몇 쪽을 더 넘겨 보았다. 다른 여자, 바빌론의 창부가 나왔다. 나는, 앞의 여자는 미덕의 용기, 뒤의 여자는 악덕의 그릇... 이런 생각을 하다말고는 화들짝 놀랐다. 내 내부가 근질거리면서 흥분이 내 몸을 스멀거리게 하는 것 같았다. 교회에서 보았던 성모상이 아름다운 마르게리타의 모습과 겹쳐지기 시작했다.
'아뿔싸, 내가 저주를 받았구나... 내가 미치고 말았구나...'
나는 황급히 장서관을 나오려 했다.
다행히도 내가 있던 곳은 계단과 멀지 않았다. 나는, 나동그라지면 등잔불이 꺼질 염려를 하면서도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문서 사자실이었다. 나는 거기에도 머물지 않고 후다닥 식당으로 통하는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한참을 그렇게 허둥댄 끝에야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창으로 밝은 달빛이 흘러 들어와 등잔을 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장서관 안에서나 필요한 물건을 그때까지 켜 들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거로나마 위안거리로 삼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아서 나는 물이라도 마셔 흥분과 긴장을 가라앉히기로 마음먹었다. 주방이 가까이 있었던 터에 나는 식당을 가로질러 본관 1층으로 통하는 문을 살며시 밀었다.
흥분과 긴장이 가라앉기는커녕 가슴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빵 가마 옆에서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등잔불을 껐다. 빵 가마 옆에 있던 괴한 역시 놀랐던지 바로 등잔불을 불어 껐다. 그러나 서로 하릴없는 짓이었다. 창으로 들어온 달빛이 주방 안을 좋이 비추고 있었다. 내 눈에, 당황한 나머지 몸둘 곳을 모르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움직이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토막토막 끊기는 말소리, 부드러운 음성이 들린 것 같았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 찰나 빵 가마 뒤의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한 후다닥, 열려 있던 문을 통해 튀어 나갔다. 문이 그림자 뒤로 닫혔다.
나는 주방과 식당 사이, 그러니까 빵 가마 곁의 문지방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환청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여자의 흐느낌이 분명하게 들려 왔다.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상대 역시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낌새만큼 큰 위안이 되는 것은 없는 법. 그러나 내가 소리나는 곳으로 다가간 것이 이로써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다. 환상을 경험할 때와 같은, 무엇에 들려 버린 상태에서 다가갔다고 해도 좋다. 주방에는, 내가 전날 장서관에서 맡은 것과 비슷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똑같은 것은 아니었으나 지나치게 흥분한 나에게는 똑같은 효과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모르기는 하지만 요리사들이 포도주의 향을 낼 때 쓰는 트라간트, 명반, 그리고 주석 냄새 같았다. 뒤에 알았지만 맥주 냄새였다.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는 당시 맥주 빚는 일이 드물이 않았다. 맥주를 빚을 때면 내 고향에서는 히드, 도금양, 야생 로즈마린 같은 것을 향료로 쓰고는 했는데 어쨌든 그 냄새는 내 후각과 정신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나의 합리적 본능은 나에게 물러서라 하고 속삭였다. 내 이성은 나에게, 흐느끼고 있는 것은 여자일 터이고, 여자는 필경 악마가 보내는 수쿠부스이니, 그로부터 물러서라고 했을 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의 생래의 욕구는, 앞으로 나아가 정체를 밝혀 볼 것을 요구했다.
바라건대 하느님과 성모님과 낙원의 성자님들이 나에게 힘을 주시어 그때의 일을 여기에 소상하게 적게 해 주시기를... 나는 시방 평화와 명상의 안식처, 이 은혜로운 멜크 수도원에 기거하는 늙은 수도사. 이 신분에 어울리게 근행하여야 하는 내게 어찌 거기에 어울리는 조심성이 없을까 보냐? 그저 거기에서, 젊은 수련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 있었다는 말로 사실의 소상한 기술을 피한다면 내 독자나 나 자신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아도 좋을 터임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허나 나는, 아득한 옛날에 있었던 그 일을, 진실 그대로 여기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진실은 정제할 수 없는 법이니, 진실이란 스스로 명징하여 우리의 흥미나 부끄러움을 빌미로 이를 훼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한다. 문제는 쓰되, 지금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가 아니고 그때 생각하고 느꼈던 대로 써야 한다는 점이다(내가 그때 일을 무정하리만치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이후의 참회가 적실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적실한 참회를 통해서 마음의 문을 꼭꼭 닫아 두었는데도 그 경험이 워낙 절실해서 지금도 가닥가닥의 부끄러움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하여튼 나는 연대기를 쓰는 기분으로 자세하게 적을 수 있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내가 그때 한 짓, 내가 그때 한 생각을 양피지 문서를 필사하듯이 그대로 재현시킬 수 있다. 대천사 미카엘이시여, 저를 보호해 주소서, 이제 그 일을 이렇게 적겠나이다. 미래의 독자들을 가르치고, 제게 지은 죄값을 부끄러움으로 다시 받기 위해서라도 한 젊은 수련사가 악마의 꾐에 빠졌던 그때 이야기를 여기 적겠나이다. 이를 백일하게 다시 드러내는 것은 후학이 혹 이런 악마를 만날 때를 준비해서 그 꾐을 이기는 지침을 주고자 함이니... 살피소서.
여자였다. 아니, 소녀였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그때까지는(하느님께서 보우하사 맹세코 그때까지는) 여자를 가까이 한 일이 없었던 나는 소녀의 나이를 어림으로도 헤아릴 수 없었다. 사춘기 전후... 젊었다는 것은 안다. 열여섯을 넘겼거나, 열여덟, 아니면 스물 가까이 되었을까?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여자가 풍기는 지극히 지상적인 인상에 압도되고 말았다. 환상이 아니었다. 어느 모로 보나 보기에 참 좋았다 라는 말이 어울렸다. 내가 무서워서 그랬는지, 우느라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겨울새처럼 떨고 있었다. 선한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는 천천히 여자에게 다가가면서 또박또박 라틴 어로, 나는 친구이니까, 적은 아니니까, 적어도 사람을 해칠 만한 적은 아니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내 태도가 다정스러워 보였던 모양인지 여자는 경계를 풀고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여자가 내 라틴 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서 우리 게르만 말로 해 보았다. 그러나 이 게르만 말이 여자를 약간 망설이게 하는 것 같았다. 당시 그 지역 사람들 귀에는 버릇 들지 못한, 다소 발음이 거친 인상을 주는 말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 게르만 말이 품행이 반드시 방정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게르만 용병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말보다는 표정이 나을 것 같아고 판단하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자는 마음을 아주 놓았던지 마주 웃으면서 몇 마디 속삭이기까지 했다.
이탈리아 말이라면 나도 조금 알기는 했지만 여자의 말은 내가 피사에서 배운 것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어조를 통하여 여자가 나를 칭송하고 있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젊고, 미남이시군요,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수도원에서 살아 온 수련사에게 자기 외모에 대한 칭찬을 듣는 경험을 희귀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는, 외모의 아름다움이란 무상한 것인즉, 외모에 대한 평론은 귀에 담을 것이 못된다고 배운다. 그러나 악마의 꾐은 한이 없는 법... 고백하거니와, 들을 것이 봇 된다고 배워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은 내 귀에 뿌듯하게 들리면서 가슴에서 이상한 온기가 꿈틀거렸다. 더구나 여자가 그런 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수염 한 올 없는 내 뺨에 손가락까지 대었음에랴! 어지러웠다. 어찌된 일인지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우리를 쓰러뜨리고 우리 영혼으로부터 하느님 성총의 표적을 거두어 가는 악마는 늘 이런 식으로 마술을 부리는 법이니, 후학은 다투어 경계할진저.
내 느낌이 어떠했던가? 내가 무엇을 보고 있었던가? 기억컨대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었다. 내 혀와 마음은 그런 종류의 감정적 격랑을 이름하는 데 도무지 버릇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제정신이 나면서, 경우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은밀한 말들이 더러 생각났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어렵사리 기억해내어 더듬더듬 써 보니 놀랍게도 내 마음의 상태를 적절하게 나타내는 말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흡사 내 마음의 그런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말들 같았다. 내 기억의 동혈에 갇혀 살던 말들이 내 입술로 올라왔다. 나는 그러한 말들이, 성서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데 쓰였고, 성자의 말씀을 통하여, 저 눈부신 실재를 나타내는 데만 쓰였다는 것을 잊고 말았다. 하지만 성자가 그려내는 환희의 순간과 당시의 달아오른 내 영혼이 맛보던 환희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나는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차이를 인식하는 마음 자체가 내 내부에서 차례로 감금당하고 있었다는 편이 옳겠다. 가치가 혼란에 빠진, 저 지옥의 나락에서 느끼는 광희의 본보기가 그럴 터이다.
여자는 [아가]에 나오는, 피부 빛이 검으나 아름다운 처녀같아 보였다. 여자는 가슴이 깊이 패인 헌 옷 차림에 목에는 흔한 돌을 알락달락하게 꿴 목걸이를 두르고 있었다. 헌 옷과 수더분한 목걸이에 어울리지 않게, 상아같이 흰 목 위로 솟은 얼굴의 표정은 당당했고, 눈은 헤스본의 연못같이 파랬으며, 코는 레바논의 탑처럼 오똑했다. 머리카락은 보라색에 가까웠다. 그렇다. 여자의 머릿단은 흑염소 떼 같았고, 이빨을 갓 목욕하고 가지런히 무리 지어 올아오는 양 떼 같았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아름다워라 그대 나의 고운 짝이여, 그대 눈동자 비둘기처럼 아른거리고, 머리채는 길르앗 비탈을 내리닫는 염소 떼, 이는 털을 깎으려고 목욕시킨 양 떼 같아라. 입술은 새빨간 실오리, 볼은 석류 같으며 목은 다윗의 망대 같아 용사들의 방패 천 개나 걸어 놓은 것 같구나...'
나는 놀라움과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아름답기가 달 같고, 빛나기가 태양 같으며, 위용이 당당하기가 기치 창검을 번쩍이는 군대 같은 모습으로 새벽처럼 내 앞에 선 여자가 누구이겠느냐고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여자는 내게로 다가서면서 그때까지 가슴에 안고 있던 까만 보퉁이를 구석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조금 전에 하던 말을 되풀이했다. 도망쳐야 할지, 가까이 다가서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내 귀에 예리고 성벽을 허물어뜨리는 여호수아의 나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자는, 마음은 원이로되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는 나에게 미소를 뿌리고는, 암염소 같이 주름잡힌 소리를 내면서 가슴 위에 둘러져 있던 치마끈을 풀었다. 치마가 휘장처럼 걷히면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 앞에 선 하와 같은 모습으로 여자가 내 앞에 우뚝 섰다.
'아름다워라, 젖가슴이여. 부풀어올랐으되 지나치지 아니하고, 자제하였으되 위축되지 않았도다.'
나는 우베르티노에게서 들었던 말을 라틴 어 원문으로 읊었다. 여자의 가슴이 흡사 백합 꽃밭에서 뛰는 두 마리 새끼 사슴 같았기 때문이었다. 배꼽은 영원히 비지 않을 술잔, 배는 백합꽃밭에 놓인 밀가루 자루 같았다.
'오, 처녀들의 청정한 별이여, 오, 닫힌 문이여, 뜰의 샘이여, 향기로운 연골로 봉인된 샘이여, 향긋한 골방이여!'
나는 이렇게 속삭이고 말았다.
나는 어느 틈에 여자와 살을 맞대고 있었다. 처음 맡는 냄새가 진동했다. 격정의 순간이 오면 남자는 힘을 잃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나는 그제서야, 악마의 올가미 때문인지 하늘의 은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움직이는 격정과 대항할 힘이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아, 숨이 막히는구나. 숨이 막히는 까닭을 알아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구나!'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여자의 입술에서 묻어 나오는 냄새는 그렇게 향기로울 수 없는 장미꽃 냄새였고 곧게 뻗은 다리와 가죽 신 속에 들어 있던 발은 그렇게 튼튼하고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처녀의 몸은 더할 나위 없이 음흉한 장인이 다듬어 낸 보석을 감추고 있었다.
'오, 사랑이여, 쾌락의 딸이여, 왕이 그대 머릿단 속에서 포로가 되었구나...'
나는 여자의 품안에 있었다. 우리는 어느새 한 덩어리가 되어 주방의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내 몸에는 수련사의 법의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의 몸은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좋아서, 여기에 쓰기 부끄러워도 이 역시 좋았다.
여자의 입술이 다가왔다. 그녀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았고, 점액질 타액은 향기로웠다. 목은 진주처럼 맑았고 뺨은 귀고리 아래로 붉었다. 나는 정신없이 지껄였다.
... 사랑이여,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그대의 눈은 비둘기 눈 같구나. 모습을 보여 다오, 목소리를 들려 다오, 그대의 목소리는 가락이 아름답고 그대 모습은 내 넋을 빼앗을 것이므로. 오, 내 누이여, 그대는 내 영혼을 겁간하였다. 그대의 눈으로, 그대 목걸이의 사슬 하나로 내 영혼을 겁간하였다. 그대 입술은 벌집으로 떨어지니 그대 혀 밑에서 꿀과 젖이 고이는구나. 그대 숨결은 능금 향기, 그대 가슴은 포도송이, 그대 입천장에서는 독한 포도주가 흘러 내 사랑을 취하게 하고 내 입술을 흐르는구나... 감송향과 사프란, 창포와 육계와 베누스 신목과 침향 향기가 고루 흐르는 새암이여, 나는 내 꿀로 벌집을 먹었고 내 젖으로 포도주를 마셨구나! 대체 그대는 누구던가? 새벽처럼 일어났으되 달처럼 아름다운가 하면 태양처럼 명징하고도 기치 창검을 시위하는 군대처럼 위풍당당한 그대는 대체 누구던가?
영혼이 길을 잃으면, 보이는 것을 사랑하는 일만을 미덕으로 삼고, 보이는 것을 소유하는 일만을 지복으로 치는 법이던가, 지복의 삶이 그 근본에 취하게 되면 보이는 것이 모두 영원한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누리는 천국의 삶 같은 법... 여자가 더할 나위 없이 감미로운 사랑을 풀어 감에 따라 나는 마침내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이상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내 몸은, 앞뒤가 두루 보이는 기이한 눈이 된 것 같았다. 문득, 몸을 돌리지 않고도 사방을 고루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문득, 이런 데서 합일과 감미로움과 선과 입맞춤과 포옹이 생겨나는 것이고, 이것을 모두 합하여 사랑이라고 이르는 것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의 정점에서는 백주에 악마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영혼을 꾀고 육체를 유린하는 악마에게, 나는, 너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악마는 그제서야 제 본 모습을 드러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 자체가 악마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함께 했다. 순간순간 감미로움이 더해 가는 그 쾌락, 내가 경험하고 있던 그 쾌락 이상으로 정당하고 선하고 거룩한 것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포도주 통에다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그 물방울이 곧 포도주에 스며들어 포도주 빛깔이 되고 포도주 맛이 되듯이, 쇠붙이를 센 불길에다 던져 넣고 오래 달구고 녹이면 마침내 그 본래의 형태를 잃어 버리고 불길이 되고 말 듯이, 햇빛을 받는 밝고 투명한 대기가 빛을 받는다기보다는 빛 자체가 되어 버리듯이 나 역시 쾌감 안에서 쾌감으로 용해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내게는, <보라, 내 가슴은 새 잔을 채울 새 포도주 통 같다>는 시구를 흥얼거릴 힘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 그 때였다. 찬연한 빛줄기가 내 눈에 보였다. 그 빛줄기 안에는, 감미롭고도 찬란한 불길로 타오르는 노란 형체가 하나 있었다. 빛줄기는 찬란한 불길 속으로 번져 갔고 이 불길은 너란 형체 속으러 스며들다가 이윽고 빛줄기와 불길은 하나로 어우러졌다.
기진한 채로, 내가 우연히 만난 여자의 육체 위에 쓰러진 채, 나는 그 불길이 바로 고귀한 청정과 예사롭지 않은 기운과 불 같은 열정으로 이루어졌으되, 청정은 곧 기운을 밝히고 열정은 이를 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제서야 나는 이러한 사실이 내 발 밑에다 깊고 깊은 심연을 마련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돌이켜보게 되는 죄악에 대한 두려움과 되새겨 보게 되는 저 사건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내 손은 지금 떨리고 있다. 그 떨리는 손으로 그때 일을 기록하면서 또 한번 문득 깨닫는 것은, 내가 저 사악한 황홀의 경험을 여기 기록하되, 얼마 전 순교자 미켈레 수도사의 육신을 태우는 불길을 묘사할 때와 똑같은 어구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영혼의 하찮은 심부름꾼인 내 손이 동떨어진 두 가지 경험을 같은 언어로 기술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내가 두 사건을 하나로 경험했기 때문에 여기 양피지에 옮기면서 같은 표현을 통하여 그때의 느낌을 되살려 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천상의 사상도 지상적 언어로 지칭할 수 있듯이 서로 구별되는 현상을 유사한 이름으로 부르는 신비한 지혜가 있다. 이 지혜로운 표현법에 따르면 다의적인 하느님은 사자 혹은 표범으로 상징될 수 있고, 죽음은 칼, 쾌락은 불길, 불길은 죽음, 죽음은 심연, 심연은 파멸 파멸은 광란, 광란은 곧 정열의 상징일 수도 있는 것이다.
대가리의 피도 채 말리지 못한 내가 어째서 성인들이 천상적인 삶의 황홀을 표현할 때 쓰던 말을, 아무리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미켈레 수도사의 죽음의 황홀을 표현하는 데 썼던 것일까? 그런데도 나는 어째서, 필경은 돌아서면 죽음과 파멸의 한 상징으로 나를 괴롭힐 저 죄 많고 무상한 지상적 쾌락의 황홀을 그리는 데 같은 언어를 동원하고 말았던가? 이제 나는, 몇 달을 상거해 있던 사건이지만, 내 정신을 드높였는지는 모르나 당시에는 몹시 고통스럽던 두 가지 경험에 대한 내 느낌을 차근차근 반추해 보기로 한다. 그날 밤 수도원에서 겨우 몇 시간 사이에, 한번은 의식적으로 생각해 내었던 것, 한번은 문득 느끼게 된 것도 여기에 밝혀 두어야겠다. 뿐만 아니다. 여기 이 양피지 위에다 그 일을 소상하게 쓰는 경위, 그리고 이 세 예화에다, 천상에 대한 환상 속에서 죽음에 직면한 한 성인의 영혼이 경험했던 언어를 굳이 동원하게 된 경위도 밝혀야겠다.
내가 하느님을 모독했던 것일까? 했다면 그때였을까? 지금일까? 죽음에 대한 미켈레 수도사의 열망, 그를 태우는 불길을 보고 내가 느꼈던 정체 모를 황홀, 여자와 함께하면서 내가 경험했던 육체적인 결합에의 욕망, 약간 비유적으로 표현했던 저 더할 나위 없는 부끄러움, 그리고 영원의 삶이라는 명분 아래 성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갔던 저 파멸에의 욕망 사이에 닮은 데가 없는 것일까? 이렇게 의미가 무궁한 사상을 단순하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일까? 학자중의 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사는, 소박한 웅변의 형태가 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언어를 떠난 다양한 차이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은유는 그 참뜻을 그만큼 쉽게 드러낸다>고 했다. 그렇다면, 불꽃에의 사랑과 심연에의 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은유일 수 있다면 이러한 사랑이 죽음에의 사랑, 죄악에의 사랑을 운유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렇다. 사자와 뱀이, 동시에 그리스도의 은유가 될 수도 있고 악마의 은유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교부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는 이러한 상징과 은유를 해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나를 괴롭힌 것은, 내 영혼이 순종과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권위가 내게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의심의 불길이 나를 태우고 있었던 것은, 불길이 영원한 진리의 상징으로 보이기도 하고 나를 파멸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의 상징으로 보였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 내 마음의 혼돈이여, 나는 스스로 일월성신의 질서와 그 천상적 운행의 도리를 한 두름에 꿰고, 내 추억의 소용돌이에 몸을 맡긴 채로 때와 장소가 다른 두 사건을 하나로 파악하려 했으니... 나는 필시, 지성의 경계를 드나듦에 경솔했던 게 분명하니 이 얼마나 경망스럽고 죄 많은 일이었겠는가.
각설하고, 이야기를 원 줄거리로 되돌려야겠다.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느낀 내가 죄의식을 견딜 수 없어하던 순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때 내 뇌리에 떠오르던 갖가지 상념을 반추하다가 그만 이 연대기 기자의 초라한 붓끝이 길을 잃었구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나와 여자는 나란히 누워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내 몸을 쓰다듬는 여자의 손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내 가슴 속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러나 평화롭지는 못했다. 환희는, 그랬다, 불길은 이미 사르러져 버리고 시간이 흐르면 여신 아래에서 죽어 갈 불꽃의 마지막 일렁거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잠결에, 이승에서 단 한 번, 짧은 순간이나마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자가 있다면,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겠다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나도 한 번밖에는 경험하지 못했다). 존재하기를 끝낸 사람처럼, 이미 심연에 가라앉았거나 파멸해 버린 사람처럼 자신의 존재나 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단 한 번, 아주 짧은 순간에라도 나와 유사한 기쁨을 누려 보지 못한 인간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얼마나 심술궂은 눈으로 보고, 삶의 재미없음에 얼마나 절망했을 것이며, 육체의 죽음을 얼마나 무거운 무게로 느낄 것이냐고... 내가 배워 왔던 것이 바로 그러한 기쁨을 경험하는 법이 아니던가? 이 다시없을 즐거운 추억에서 내 영혼을 건져 올린 것은 영원한 태양빛이었다(이제 와서야 나는 그것을 깨닫는다). 태양빛이 주는 기쁨은 인간을 열고 인간을 넓힌다. 태양빛이 있으면 인간은 제 내부의 균열을 더 이상 감추어 내지 못한다. 이 상흔의 균열은 사랑의 칼날에 베인 흔적이므로, 이보다 감미롭고 이보다 참혹한 것은 다시없다. 그러나 태양에게는 이 상흔을 낫우는 권능도 있다. 태양은 그 빛살로 상처받은 사람을 골라내고 기왕의 상처를 헤집어 놓는다. 상처받은 사람이 불려 나와 사지를 묶이고 혈관을 절개 당하면 명령을 거역할 힘을 잃고 오로지 욕망에 따라서만 움직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불에 탄 영혼으로 육화한 심연에 빠져 들면서 이제 자기가 살아온 현실, 사는 현실에 발가벗기운 자기 욕망과 욕망의 진실을 구경할 수 있을 뿐이다. 바야흐로 저 자신의 광란을 제 눈으로 멀거니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심의 환희에 젖은 채 나는 잠이 들었다.
눈을 떴다. 구름 때문이었겠지만 달빛이 흐려져 있었다. 옆을 더듬었으나 여자의 몸은 잡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보았다. 없었다.
내 욕망의 끈을 풀게 하고, 내 갈증을 적셔 준 당사자의 부재는, 돌연 그 욕망의 허망함과 갈증의 사악함에 눈을 뜨게 했다. <짐승이란 무릇, 교미를 끝내면 쓸쓸해지는 법>이라던가...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르고 있었던가를 깨달았다. 적지 않게 세월이 흘렀어도 내가 그때 지은 허물에 가슴을 치는 것은 변함이 없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그날 밤에 내가 어떻게 해서 그런 기쁨을 느꼈던 것인지, 어쩌다 내가 만물을 선하고 아름답게 지으신 하느님께 못할 짓을 할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이다. 두 죄인의 안에서 발로한 감정이 두루 선하고 아름답다고 믿지 않고서야 내가 어찌 그런 죄를 지을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죄악을 저지르기는 하였어도 내 청춘은 참 아름답고 선했었다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제, 내 앞에 임박한 죽음에도 내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되었다. 그러나 그 젊던 시절에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저지른 죄악을 심히 울었다.
나는 떨면서 일어섰다. 양심의 가책도 가책이려니와 주방의 차가운 바닥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던 참이라 몸이 못쓰게 굳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었다. 입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여자가 도망치면서 놓고 간 듯한 보퉁이가 구석에 있었다. 나는 그 보퉁이를 집어 들었다. 주방에서 쓰는 것인 듯한 천이었다. 보퉁이를 풀어 보았다. 처음에는 사위가 어둑어둑한 데다 내용물의 형상이 일그러져 있어서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알아보지 못한 것도 잠시... 엉겨붙은 핏덩어리, 흐느적거리는 살점, 섬뜩하게 튼튼한 힘줄... 죽어 있으면서도 죽은 오장 육부의 아교질 생명으로 푸들푸들 움직이는 듯한 물건... 엄청나게 큰... 염통이었다.
내 눈앞으로 어둠이 내리면서 입 안에 시큼한 침이 가득 고였다. 나는 비명 한마디 크게 지르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한밤중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가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였다. 사부님은 등잔을 든 채 내 머리 밑에다 무엇인가를 집어 넣는 참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아드소. 부엌에서 칼밤이라도 훔치려던 게냐? 한밤중에 부엌을 기웃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부님 말씀에 따르면, 사부님은 잠을 깨어 무슨 이유에선가 나를 찾아다니다가, 내가 보이지 않자, 내가 혼자 장서관으로 숨어 들어갔거니 여겼다. 그래서 주방 쪽에서 본관으로 들어오다가, 채마밭 쪽 문으로 그림자 하나가 급히 빠져나가는 걸 보았다(인기척에 놀라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간 여자의 그림자였던 모양이었다). 사부님은 몹시 궁금했던 나머지(사부님에게는 여전히 정체 불명의 그림자였다) 그림자를 뒤쫓았으나 그림자는 능숙하게 담 밖으로 나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사부님은 한동안 사위를 살피다가 주방으로 들어서면서 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염통이 든 보퉁이를 사부님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또 사건이 터진 모양이라고 하자 사부님은 웃으면서 나를 나무랐다.
'정신을 차리거라. 염통이 그렇게 큰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그것은 암소 염통 아니면 황소 염통이다. 내 어제 어미 소 한 마리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도 있다. 그래, 말해 보아라. 어떻게 해서 이것이 네 수중에 있느냐?'
회한에 몸이 오그라들고 공포에 몸이 떨렸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해 성사를 맡아 줄 것을 간청했다. 사부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낱낱이 고해했다.
사부님은 굳어진 얼굴로 내 고백을 경청하고는 부드럽게 꾸짖었다.
'분명한 것은, 너는 사통을 경계하는 계율을 범하고, 수련사인 네 본문을 저버리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 같은 상황에 놓였더라면, 황야에서 공부를 쌓던 예언자도 십 년 공부를 허물어뜨렸을 것인즉, 이 말이 너에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성서가 누누이 일렀거니와 여자란 마물이다. [전도서]는 여자의 말을 일러서 활활 타는 불이라고 했고, [잠언]은, 여자는 남자의 영혼을 유린하는 데 능하니 아무리 강한 자라도 여기에서는 폐허가 된다고 했다. [전도서]는, <나는 또 여자란 죽음보다도 신물나는 것임을 알았다. 여자는 새 잡는 그물이다, 그 다음은 올가미요, 그 팔은 사슬이다>라고 하지 않더냐? 잘 들어 두어라. 혹자는 여자를 일러 악마의 그릇이라고도 했다. 나를 보아라, 아드소. 이렇게 말하는 나도 사실은 자신할 수 없구나. 허나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거니, 하느님께서 이 못난 것들을 그냥이야 창조하셨겠느냐? 무엇이든, 쓸 만한 걸 존 넣어 두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나름의 갖가지 특권과, 광영 입을 그릇을 주셨을 거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내 말은, 특권과 광영의 그릇 중에 적어도 세 가지는 참으로 위대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 하느님께서는 이 궁창에다 흙으로 사람을 빚어 놓으셨다. 그런데 뒤에 하느님께서는 낙원에서 여자를 빚으시되 귀한 인간으로 만드셨다. 아담의 발아니 오장육부는 취하지 않으시고 갈비뼈를 취하시지 않았더냐? 또 한 가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 주님을 이 땅에 내리시게도 하시되, 우리 주님을 여자의 자궁 속에서 때를 기다리게 하셨다. 이러할진대 어떻게 자궁이라고 하는 것을 천한 것의 상징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부활 때도 주님께서는 여자 앞에 나타나셨다. 뿐이냐? 천계의 은총이 누리에 내릴 때 왕이 되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죄지은 적이 없는 여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도 하와와 그 딸들을 이렇듯 총애하시는데, 우리가 여자의 미덕과 기품에 발이 걸려 넘어졌대서 여자 자체를 몹쓸 것으로 여김은 부당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이런 일이 되풀이되어도 좋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단지 유혹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는 그렇게 많이는 흉하지 않다는 뜻을 뿐이다... 수도자도 일생에 한번쯤은 육체적인 격정의 순간을 경험해야... 고해하는 속인의 심정을 헤아려 그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면 너무 인심 좋아 보이기는 할 것이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이 생겨서 좋다는 뜻은 아니고... 생겼다고 해서 너무 자신을 책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자, 하느님의 뜻을 따를 일이니,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도록 하자. 가능하면, 다른 일을 생각하여, 왕사를 잊도록 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야...'
사감이 끼여들고 있었던지, 사부님의 말투가 이날따라 몹시 어눌했다.
'... 그러니 어젯밤에 있었던 일의 배후나 더듬어 보자. 문제는 이 여자가 누구이며, 여기에서 여자가 만나고 있던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함께 있는 자를 알아보지 못하겠더이다.'
'그럴 테지. 허나 우리는 여러 가지 확실한 단서를 통해서 그게 누구인지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사내는 늙고 추할 터이겠다. 네 말마따나 아름다운 여자였다면 이런 자에게 몸 맡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게다. 너 같은 풋내기가 그런 여자를 만난 것은 이리 새끼가 고깃덩어리를 문 격이다만.'
'어째서 늙고 추할 것이라고 하시는지요?'
'여자는 사내가 좋아서 온 것이 아니고 고깃덩어리가 탐나서 왔을 것이다. 여자는 인근 마을에서 왔기가 쉽다. 갈증을 견디지 못하는 죄 많은 수도사를 사랑해 주고 그 값으로 제 식구 먹일 양식을 얻어 갔을 터이니... 아마 처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매음이 아닙니까?'
내 몸이 다시 떨려 오기 시작했다.
'가난한 촌색시라고 부르거나. 어쩌면 제 손으로 부양해야 할 어린 동생들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촌색시에게 힘이 있었다면 노동 품을 팔지 무엇하러 사랑 품을 팔았겠느냐? 어젯밤에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뿐이냐, 너더러 젊은 미남자라고 했다면서? 여자는 진심으로 그랬을 것이다. 정체 불명의 사내에게라면 황소의 염통에다 간을 덤으로 받아도 그런 찬사는 보내지 않았기가 쉽다. 여자는 저 자신을 무상으로 공여하면서도 기쁨을 누렸길래 대가를 챙기지도 않고 자리를 뜰 수 있었을 것이 아니겠느냐? 상황이 이러하니 여자의 눈으로 본 사내는, 너보다 젊지도 잘나지도 못한 사내일 수밖에?'
고백하거니와, 죄를 뉘우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고 사부님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다.
'이 늙고 추한 사내는 아마 마을로 내려가서 농민들을 상대로 이러저러한 거래를 더러 한 듯하다. 그러자면 이 수도원에서의 지위가 상당할 터. 게다가 이자는 마을 사람들을 수도원 안으로 불러들이는 통로도 알고 주방에 허드렛고기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어쩌면 마을에다, 수도원에는 개구멍이 있어서 개구멍받이들이 주방의 칼밥 고기를 얻어 먹는다는 소문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이런 짓을 하다가 급기야는 제 경제를 도모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물론 주방에는 먹을 만한 음식이 늘 남아돈다는 것도 알겠지. 남는 음식으로 마을 사람을 꾄 것이 아니고 정육으로 꾀었을 지도 모르는 일. 자, 이 사내가 누군지 대강 알 것 같지 않느냐? 누구겠느냐? 정황으로 미루어 식료계 수도사인 바라지네 사람 레미지오라고 해도 크게 죄 될 것 같지 않구나. 레미지오가 아니라면 저 정체 불명의 괴승 살바토레는 어떠냐? 살바토레는 원내 이땅 사람이니까 말이 통하고, 따라서 여자를 꼬여 오기도 쉽지 않았겠느냐?'
'지금 이것을 알아낸들...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없거나 아주 많거나, 둥 중 하나다. 이게 우리가 관심하고 있는 사건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서 하는 말이다. 만일에 이 식료계가 과서 돌치노 파 밥술을 얻어먹은 것으로 확인된다면 이득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대단해지는 것이야. 이제 우리도, 이 수도원에서는 밤마다 요상한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면, 문제의 사내가 이 수도원 어둠을 이리도 쉬 누비고 다니는데, 이자들이 사건의 실마리를 붙잡고 있지 않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느냐?'
'알고 있을들 말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지. 이자들의 허물을 눈감아 주고, 연민을 나누는 척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일단 실마리만 잡히면 말을 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바꾸어 말해서 레미지오나 살바토레를 우리가 먼저 우리 수중으로 넣어 버리는 방법도 잇다. 하느님께서는 대죄도 형편에 따라서는 용서하시니까 우리의 이러한 교지도 용서하실 것이다.'
사부님답지 않게 삿된 표현 방법이었다. 나는 말대꾸할 용기를 잃고 말았다.
'... 이제 가서 잠자리에 들도록 하자. 한 시간만 있으면 조과가 시작된다. 아드소, 지은 죄 때문에 네 마음자리가 마땅치 않을 것 같구나. 영혼을 가라앉히기에 교회만한 곳을 없다. 내가 네 죄를 사면했으니, 이제 네 일을 알 인간은 없다. 가서 주님의 확약을 받도록 하여라.'
사부님은 이 말고 함께 내 머리를 몇 차례 쓰다듬었다. 내 어지러워진 심성을 부정으로 다독거리고, 고백한 죄의 사면을 확인하려고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그 역시 새로운 생명 체험에 목말라 있었으니, 내가 부러워서 그랬는지도 모르는 일이다(죄 많은 말이지만,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을 어쩌랴?).
우리는 전날 지났던 지하 납골당을 통해 교회 쪽으로 갔다. 나는 납골당의 해골 앞에서 그만 눈을 가리고 말았다. 납골당 해골을 견주어 보면서, 내가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가,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인가 싶어서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교회 통로에 이르렀을 때, 제단 윙 웅크리고 앉은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우베르티노 수도사이거니 했는데 뜻밖에도 알리나르도 노수도사였다. 노수도사는 처음에 우리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사라진 젊은 수도사를 위해 기도나 해 주고 싶어서 나왔다고 했다. 노인은 베렝가리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노인은 베렝가리오 수도사가 죽었을 경우에 맞추어서는 그 영혼을 위해 기도했고, 앓아 누웠거나 방황하고 있을 경우에 맞추어서는 그 육신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를 마친 그가 중얼거렸다.
'너무 죽어. 너무 많이 죽어 가고 있어... 헌들... 어째... 사도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첫 나팔 소리가 울리면 우박... 두 번째 나팔 소리가 들리면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로 끓는다. 그것 보아. 시신 하나는 폭설이 내린 다음날 눈에 띄었고, 또 하나는 피 항아리 속에 있었다지... 세 번째 나팔 소리는, 불타는 별이 강과 샘에 떨어진다고 경고하는 게요. 거봐, 세 번째 형제가 사라졌지... 네 번째가 나타날까 봐 겁이 나는구먼. 태양의 삼분의 일이 일그러지고 달과 별이 얼굴을 가려 세상은 암흑 천지가 될 게야.'
수랑을 나오면서 사부님은, 노인의 말에 일리가 있을지도 a로라,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요한의 묵시록]을 인용하면서 노인은 세 수도사의 죽음 및 실종을 단일한 악마적 의지의 소행으로 설명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악마적 의지의 소행이 아닌 것이, 아델모 수도사는 제 의지로 죽지 않았습니까?'
'그렇기는 하다만, 사악한 자가 아델모의 죽음에서 암시를 얻어 나머지 둘도 묵시록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으로 살해했을 가능성은 어쩌겠느냐? 그렇다면 베렝가리오의 시체는 강이나 우물에서 발견되어야 마땅하다, 어디 보자, 수도원에는 강이나 우물이 없다. 적어도 누구를 빠뜨려 죽일 수 있는 것은...'
'욕장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무심코 한 발이었다.
'뭐라고? 그래, 욕장이다!'
'하지만 수도사들이 오늘 욕장도 뒤져 보았을 것이 아닙니까?'
'오늘 아침에 불목하니들이 수색이랍시고 하는 걸 보았다. 문만 열고 쓱 들여다보고는 말더구나. 꽁꽁 숨겨 놓은 걸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이런 생각에서 잔뜩 볼이 부어 가지고 말이다. 베난티오처럼 항아리에 처박혀 있는 꼴이나 상상했을 터이니 무리도 아니지. 가서 뒤져 보자. 아직은 어둡다만, 우리 등잔이 한동안을 더 버티어줄 것 같으니 들고 앞장서거라.'
우리는 시약소 바로 옆에 있는 욕장으로 가서 어렵지 않게 문을 땄다.
숫자는 잊었지만, 두꺼운 휘장과 휘장 사이에는 여러 개의 욕조가 있었다. 수도사들은 회칙이 제정된 기념일마다 거기에서 세정했고 세베리노는 환자를 치료할 때마다 그 욕장을 이용했다. 말하자면 육체와 정신의 기력을 되찾아주는 데 목욕만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수도사들 사이에서 자주 이용되는 욕장이었다. 구석의 큰 화덕은 물을 데울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화덕에는 재가 가득했고, 앞에는 커다란 가마가 뒤집힌 채 놓여 있었다. 또 한구석에는 하수구가 있었다.
첫 욕조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두꺼운 휘장에 가려진 마지막 욕조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고 옆에는 옷가지가 떨어져 있었다. 등잔불에 얼핏 보기에는 욕조의 수면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등잔불이 바닥을 비추었을 때는 벌거벗은 시체 그림자가 하나 일렁거렸다. 우리는 시체를 끌어올렸다. 베렝가리오였다. 사부님은, <익사자의 얼굴이란 이런 것이야>하고 중얼거렸다. 시체는 형편없이 불어 있었다. 사타구니 돌기만 없었다면 영락없는 여자의 몸이었다. 털 오라기 하나 없는 몸은 그만큼 희고 연해 보였다. 몸이 떨려 왔다. 사부님이 시신을 축복할 동안 나는 성호를 그렸다.

 

 

 

 


장미의 이름 - 하 / 움베르토 에코
제4일
찬과
우리가 수도원장에게 베렝가리오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보고한 이야기, 성무 공과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이 이야기가 퍼져 수도원 전체가 벌집 쑤신 듯했다는 이야기, 수도사들의 면면에서는 공포와 슬픔과 당혹의 그림자가 엿보였고, 불목하니들은 성호를 그으면서 축귀하느라고 주문을 외고 다니더라는 이야기까지 조목조목 하지는 않겠다. 나는 그날의 조과 성무가 정례에 따라 제대로 진행되었는지 어쨌는지, 또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누구누구가 거기에 참석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윌리엄 수도사와 세베리노의 뒤만 따라다녔다. 세베리노는 베렝가리오의 시신을 수습하여 시약소 탁자에다 눕혀 둔 참이었다.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의 문상이 끝나면서 시약소가 조용해지자 본초학자 세베리노와 사부님은 그 방면의 전문가들답게 시신을 꼼꼼하게 살폈다.
세베리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익삽니다.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부어오른 얼굴, 빵빵한 배를 보십시오.'
그러나 사부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타의에 의한 익사 같지는 않소그려. 타의에 의해 물 속으로 이끌려 들어갔거나, 밀려 들어갔다면 저항한 흔적이 있을 터인데, 그렇게 보기에는 시신이 너무 깔끔하거든. 베렝가리오가 제 손으로 물을 데워 욕조에다 채우고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 같다는 말이오?'
'저에게 짚이는 게 하나 있기는 합니다. 베렝가리오에게는 발작적으로 경련하는 증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 온수 목욕은 육체와 정신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된다면서 권한 적이 있습니다. 몇 번 저에게 물을 데우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습니다. 어젯밤에도 그렇게 물을 데워 욕조에 채우고는 온수욕을 한 것 같습니다만...'
'어젯밤이 아니오, 그전이지... 잘 봐요. 시신은 적어도 하루 이상 물 속에 있었어요.'
사부님은 세베리노에게,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대충 이야기했다. 물론 우리가 문서 사자실로 숨어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부님은, 자세한 것은 생략하고, 하여튼 누군가가 우리 뒤를 밟아 서책을 한 권 가져갔다는 이야기만 한 것이었다. 세베리노도, 사부님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낌새는 눈치채는 듯했지만 사부님을 두렵게 여기는 터여서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세베리노는, 우리 뒤를 밟아 서책을 가지고 간 사람이 만약에 베렝가리오라면 그 흥분과 긴장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욕장을 찾았을 거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베렝가리오는 몹시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라서 짜증스러운 일을 당하거나 감정이 격앙되면 곧잘 경련을 일으킨다는 말을 덧붙였다. 말하자면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로 바닥에 쓰러져, 허연 거품을 뿜으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린다는 것이었다.
세베리노의 이야기가 끝나자 사부님이 중얼거렸다.
'어쨌든, 서책 훔쳐 간 자가 베렝가리오라면, 베렝가리오는 이 욕장으로 오기 전에 어딘가를 들르기는 들렀을 것이오. 욕장에, 베렝가리오가 훔쳐 간 서책이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오. 하기는 그래요. 어딘가를 들른 뒤에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혹은 우리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욕장으로 숨어들어 물에다 몸을 담갔을 것이오. 세베리노, 어떻소? 이 사람의 증세가, 의식을 잃고 물에 빠져 죽을 만큼 중증이던가요?'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합니다만.'
세베리노는 별 자신이 없는 듯한 어조로 대답하고는, 한동안 시신을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좀 묘한 데가 있습니다만...'
'무엇이 묘하요?'
'그저께 베난티오의 시신을 눈여겨보았습니다. 물론 돼지피를 씻어 낸 다음이었지요. 대수롭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상하게도 베난티오의 오른쪽 손가락 두 개의 ?P이 까맣더군요. 무슨 물감을 만진 것 같았습니다. 베렝가리오의 손가락을 좀 보십시오.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그런 흔적이 있지 않습니까? 베난티오의 손가락을 볼 때는, 혹시 문서 사자실에게 잉크를 만진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만...'
베렝가리오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사부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새고 있었지만 실내는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안경을 잃어버린 사부님에게 그 이상의 자세한 관찰은 무리였다.
'아닌게아니라 그렇군... 그런데, 왼손에도 희미한 물감자국이 있군 그래. 왼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봐요.'
'검은 자국이 오른손에만 있다면, 작은 물건이거나, 길고 가느다란 물건을 잡았던 흔적일 수 있을 텐데요.'
'우필같은 것 말이오? 아니면 무슨 음식이나 벌레? 아니면 성체 안치기? 지팡이? 예를 다 들자면 한이 없겠군. 허나 흔적이 양손 손가락에 다 있는 것으로 보아 술잔일 수도 있겠군요. 오른손을 잡고 왼손으로 밑을 받쳤다면 말이오.'
세베리노는 자기 손가락으로 시신의 손가락 끝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렝가리오의 손가락 끝에 난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세베리노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독극물을 다룰 때 끼는 장갑인 모양이었다. 세베리노는 시신의 손가락 끝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면서 무슨 냄새를 맡는 것 같았지만 코에 익은 냄새를 맡아 낸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우리를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이런 흔적을 남기는 약초, 혹은 광물의 이름을 늘어놓자면 끝이 없겠습니다. 이런 흔적을 남기는 게 반드시 독극물인 것만은 아닙니다. 채식사들은 종종 손가락 끝에 채식에 쓰이는 금분을 묻히고 다니는 수도 왕왕 있습니다.'
'아델모는 채식사였고. 그 시신의 몰골이 워낙 흉측해서 그랬을 테지만 그 손가락을 눈여겨볼 생각은 못해 보았지요? 하지만 나머지 희생자들 역시 아델모가 만지던 것에 손을 대었을 가능성이 있소.'
'아델모의 경우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머지 두 희생자의 손가락 끝이 모두 까맣게 변색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연역하시는지요?'
'글세, 아직은 잘 모르겠소. <두 가지 사례에서는 어떤 규칙도 이끌어낼 수 없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나, 이 두 가지 사례에서 우리는 하나의 규칙을 도출해야 할 형편이오.'
내가 끼여들어 사부님의 삼단 논법을 거들었다.
'...베난티오 수도사님과 베렝가리오 수도사님의 손가락 끝에는, 까맣게 물들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두 분은 같은 물질에 손을 댄 것이 아닐는지요?'
사부님이 나를 나무랐다.
'녀석! 네 삼단 논법은 타당하지가 못해. <매개념도 한두 번쯤은 보편 타당할 수 있는 법>이라는 말도 못들어 보았느냐? 이 삼단 논법에서는 매개념이 보편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단 말이다. 따라서 너의 삼단 논법에는 일반성이 없어. 네가 대전제를 제대로 짚어 내지 못했다는 증거 아니겠느냐? 나는, 특정 물질을 만지면 모두 손가락 끝이 검어진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 물질을 만지지 않았는데도 손가락 끝이 검어진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야. 내 말은, 손가락이 검어진 사람은 모두, 그리고 검어진 사람만이 특정 물질에 손가락을 댔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하자면 베난티오와 베렝가리오 등등이 이런 범주에 드는 것이지. 이게 바로 제1격에 의한 제3번 삼단 논법, 즉 Darii의 예이다.'
'그렇다면 답은 이미 나온 것이 아닙니까?'
'어허, 너는 삼단 논법이라는 걸 너무 믿는구나. 내 다시 너에게 이른다만, 우리가 얻은 것은 문제이지, 답이 아니야. 무슨 문제냐? 우리는, 베난티오와 베렝가리오가 같은 물질을 만졌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것이 합리적인 가설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죽은 자의 손가락 끝에 이런 흔적을 남게 할 만한 여러 물질 중에 특정 물질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죽은자들이 왜 여기에 손을 대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뿐이냐, 우리는 그들이 만진 물질과 그들의 죽음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 여부도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대전제를 오해하면 얼마나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지 아느냐? 금분에 손을 대게 함으로써 손을 댄 사람을 모두 죽이려는 미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너는 죽은 사람 중에 손가락 끝에 금분이 묻은 사람이 있으면 금분 때문에 죽었다고 하겠구나. 그래, 사람을 죽이는 금분도 있다더냐?'
나는 기가 죽고 말았다. 그대까지만 해도 논리야말로 만능의 무기라고 믿던 나는 그제서야, 그 적용의 근거가 확실할 때만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뿐만 아니었다. 나는 사부님을 시봉하면서, 논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적용되어야 할 사상 안에 있을 때보다는 거기에서 떠나 왔을 때 더욱 유용한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어 준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이러한 깨달음은 사부님과 함께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욱 확실하게 내 것이 되어 갔다.
논리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세베리노는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동안 자기 경험을 토대로 헤아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베리노는, 우리가 이미 일별한 바 있는, 수많은 서책과 함께 선반에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단지와 항아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독극물의 세계란, 자연의 신비가 그렇듯이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전날 말습드렸다시피,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독초는, 찧어서 적당량을 복용케 하면 이독치독의 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게 환약이나 고약으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기 저 독말풀이나 벨라도나나 독미나리는 수면제 효과를 내기도 하고, 사람의 신경을 자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량이면 특효약이 될 수 있으나 과하면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약초를 만졌다고 해서 손가락 끝이 검게 되는 것은 아닐 텐데요?'
'제가 아는 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복용하면 안 되는 약초가 있는가 하면, 피부에 닿게 해도 안 되는 독초도 있습니다. 가령 헬레보레는, 뽑으려고 대궁이를 잡기만 해도 구토를 일으킵니다. 박하와 백선은 개화기에 특히 위험합니다. 만지기만 해도, 만진 사람의 얼굴은 술취한 사람의 얼굴처럼 벌겋게 달아오르니까요. 검은 헬레보레는, 만지기만 해도 설사를 일으킵니다. 이 밖에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약초, 두통을 일으키는 약초, 목을 쉬게 하는 약초 등, 참으로 다양하기 그지없는 것이 약초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뱀의 독은, 피부에 묻으면 조금 가렵기는 하지만, 혈관으로 스며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언제 누군가가 이 뱀 독에다 다른 약제를 섞어 개의 허벅지 안쪽, 그러니까 생식기에다 주입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이 부분이 엄청나게 부어오르고 사지가 뻣뻣해지면서 개는 곧 죽고 말더군요.'
'독극물에 참으로 박식한 분이시오.'
사부님은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한 것 같았다. 세베리노는 그 말을 진심에서 하는 것인지, 아니면 떠보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잠깐 사부님의 안색을 살피고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대수롭지 않습니다. 의사, 본초학자, 인체 과학도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머리에 담고 있는 데 지나지 못합니다.'
사부님은 한동안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세베리노에게, 시신의 입을 열고 혀를 들여다보라고 말했다. 세베리노는 호기심이 동한 듯한 표정을 하고는, 압설자로 시신의 혀를 누르고는 안을 들여다보다가는 흠칫했다.
'과연... 혀도 검습니다.'
'하면... 이 사람은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다 넣었어요... 당신이 조금 전에 말한, 피부를 투과하는 독극물에 가까워지는 군요. 하지만 아직은 어설프게 결론을 내릴 단계는 아니에요. 왜냐... 베난티오와 베렝가리오는, 자진해서 이런 짓을 했을 것이므로... 자진해서 집어서 삼켰다는 것은, 그게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일 거요.'
'먹는 것이었을까요, 마시는 것이었을까요?'
'글세, 잘은 모르겠지만, 악기... 피리 같은 것을 분 것은 아닐까?'
'당치않습니다.'
세베리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치않을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우리는 당치않아 보이는 가정이라도 해보아야 하오. 만일에 당신만큼 약초에 박식한 자가 이곳으로 숨어들어 여기에 있는 당신의 약초를 훔쳤다면... 손가락과 혀에 검은 자국을 남기는 독극물을 조제하기는 여반장일 것 아니오? 그걸 먹을 것이나 마실 것에다 넣고, 숟가락이나, 혹은 그 밖의 연장으로 고루 섞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악기 같은 것에다 발라 놓았을 수도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 그 말이오.'
'그럴 수도 있기는 하겠습니다. 하지만 누가요?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가정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누가 감히 이 가련한 두 형제를 독살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나 역시 베난티오나 베렝가리오가 수수께끼의 독극물을 조제한 사람에게 접근하고, 그 사람은 이 두 수도사를 독살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부님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서 물러설 분이 아닌 것 같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합시다. 지금 내 마음에 짚이는 게 있으니까. 당신은 펄쩍 뛸지도 모르겠소만, 혹시 당신에게 약초에 관해 이것저것 시시콜콜하게 묻는 사람은 없었소? 당신 말고 이 시약소에 쉽게 드나들 수 있었던 사람은? 내 말뜻을 아시겠소?'
세베리노는 미간에 손가락을 대고 기억을 더듬다가 대답했다.
'잠깐, 잠깐... 아주 오래 전에 있었습니다... 몇 년 족히 된 일입니다. 저는 저 선반에다. 이곳에서 먼 곳으로 떠난 수도사가 저에게 준 극약 단지를 얹어 둔 적이 있습니다. 그 수도사는 그 극약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는 저에게 일러주지 않았습니다. 약초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수도사에게는 이름이 생소해서 기억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하여튼 제가 뚜겅을 열고 보았더니 색깔이 노르스름하더군요. 그 수도사는 저에게,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혀 끝에 닿기만 해도 즉사한다고요. 그 수도사 말에 따르면 극소량이라도 혀 끝에 묻을 경우, 그 사람은 반시간 안에 인사불성이 되는 동시에 사지가 마비되면서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수도사는 워낙 먼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갈 수 없어서 저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때가 오면 한번 연구해 봐야지... 하면서 선반에 얹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시약소로 폭풍이 밀어닥친 적이 있습니다. 제 조수 노릇하던 수련사 녀석이 시약소 문 잠그는 걸 잊는 바람에 태풍이 이 안으로 몰아쳐 이 방을 아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제가 들어와서 보았더니 병이라는 병, 항아리라는 항아리는 모조리 깨져 있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약물은 삼지 사방으로 흩어져 있더군요. 저는 그날 하루 종일 이 시약소를 치웠습니다만, 겨우 깨어진 유리 조각이나 항아리 조각을 쓸어 내었을 뿐 그 안에 들어 있던 약물은 어떻게 끌어 담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나서야 저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 극약 단지가 없어졌다는 걸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몹시 걱정이 되더군요. 하지만 그 수련사 녀석이 나쁜 마음을 먹었을 턱이 없으니, 그 단지 역시 떨어져 깨어진 채 있다가 제가 치운 유리 조각과 항아리 조각에 쓸려 나갔을 것이거니 여겼습니다. 그 날 저는 시약소 마룻바닥과 선반을 깨끗이 닦아 냈습니다.'
'폭풍이 밀어닥치기 직전에 그 단지를 보았나요?'
'어디 좀... 이제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저는 그 단지를 다른 항아리 뒤에다 숨겨 놓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날마다 그 단지가 제대로 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폭풍 직전에 그 단지가 도난당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군요?'
'글세올습니다... 그렇습니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입니다.'
'하면, 당신의 조수 노릇하던 그 수련사가 단지를 훔치고 나서 일부러 문을 열러 두었을 수도 있겠군요. 폭풍이 밀어 닥칠 것임을 미리 알고, 그 단지를 훔친 뒤에 시약소 문을 열어 둠으로써 이 시약소 안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시약소가 엉망이 되어야 당신이 단지 없어진 데 신경을 쓰지 못할 것 아니겠어요?'
'바로... 그겁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군요. 당시 저는, 폭풍이 사나웠다고는 하나 시약소를 이 지경으로 만들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르신 말씀이 옳습니다. 누군가가 폭풍을 이용해서, 제 시약소에서 극약 단지를 훔치고, 폭풍을 빌미삼아 제 시약소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 가능성이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 수련사가 대체 누구였나요?'
'아우구스티노라는 녀석이었는데, 작년에 수도사들, 불목하니들과 어울려 교회 앞의 조상을 청소하다 발판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녀석이, 폭풍이 들이닥치기 전에 문을 잘 잠갔다고 극구 변명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몹시 화를 내면서 시약소가 그 지경이 된 책임을 그 수련사에게 물었지요. 하지만... 그 녀석의 말이 옳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녀석은 아무 죄도 없이 욕만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조사 대상에 제3의 인물이 등장한 셈이군요. 어쩌면, 당신이 가지고 있던 그 희귀한 극약의 정체를 그 수련사보다 더 잘 아는, 전문적인 용의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요.'
'저로서는 더 이상은 짚이는 게 없습니다. 원장이야 물론 그 극약에 대해서 알고 계시겠지요. 극약을 이 시약소에다 보관하자면 원장의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요. 당시의 장서관사서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혹 극약의 성분을 아는데 필요한 자료가 없을까 해서 장서관 당무자의 협력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시약 업무에 필요한 서책은 모두 이 시약소에 있다고 하지 않았소?'
'있습니다. 많이 있습니다...'
세베리노는 서책이 꽂힌 서가와 서책이 쌓여 있는 선반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당시 저는, 여기에 보관할 수 없는 서책, 말하자면 다소 희귀한 자료를 보고 싶어서 말라키아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사서 말라키아는 대출을 꺼리더군요...'
세베리노는 이 대목에서 목소리를 뚝 떨어뜨렸다. 어린 수련사인 내 앞에서 하기에는 수도사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잘 아시겠지만 장서관 비밀 서고에는 요술, 마술에 관련된 서책은 물론, 심지어는 음약의 처방에 관한 서책도 있습니다. 웬만한 서책이면, 필요의 경중에 따라 저에게도 뒤져 볼 권한이 있었습니다. 제가 바란 것은 그 극약의 성분과 용처를 알자는 것이었는데, 말라키아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 빈손 쥐고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말라키아에게도 그 극약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거로군요?'
'물론입니다. 말라키아에게는 물론이고, 조수 노릇하던 베렝가리오에게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시지는 말아주십시오. 정확하게는 기억 나지 않습니다만, 다른 수도사들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지만, 문서사자실에 수도사들이 좀 많습니까?'
'나는 누구를 의심하자고 이러는 게 아니오. 오직 극약과 관련해서 빚어질 수 있는 사태의 성격을 이해하자는 것뿐이요, 당신은 몇 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했소.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 극약을 보관하고 있다가 최근에 와서 일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상하지 않소? 그렇다면 문제의 인물은 오랫동안 살인 계획을 세워가면서 때를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세베리노는 잔득 겁을 먹은 얼굴을 하고는 가슴에 성호를 그으면서 중얼거렸다.
'오, 하느님. 용서하셔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더 오고 간 말은 없었다. 우리는, 영결식이 있기까지 시약소가 안치하고 있어야 하는 베렝가리오의 시신을 다시 덮고 일어났다.
1시과
사부님과 나는 세베리노의 시약소를 나서다 반대 방향에서 시약소로 들어서는 말라키아를 만났다. 말라키아는 그런 곳에서 사부님을 만나게 된 게 당혹스러웠던지 오던 길을 되짚어 나가려고 했다. 안에서 세베리노가 보고 있다가 말라키아에게 툭 던지듯이 말했다.
'날 찾으시오? 그러니까 그 일 때문에?'
세베리노는 사부님과 나를 의식했던지 던지다 말고 말허리를 잘랐다. 말라키아는 은밀하게 세베리노에게 눈짓으로,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이렇게 말한 것 같았다. 들어오던 말라키아와 나가던 우리가 문턱에서 마주섰다. 말하자면 세 사람이 문턱에 오구구 모인 셈이었다.
'본초학자 세베리노 형제를 찾아온 참입니다... 두통이 성가셔서요.'
말라키아는 사부님에게, 시키지도 않는 말을 했다. 사부님은 호기심을 누르고 혀를 찼다.
'답답한 장서관에 너무 오래 계셨던 게로군... 뭘 좀 드시고 힘을 차리셔야지.'
말라키아의 입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싶어하는 것처럼 달싹거렸다. 그러나 굳이 할 필요가 없겠다고 판단했는지, 말라키아는 사부님에게 목례를 보내고는, 밖으로 나서는 우리 앞을 지나 시약소 안으로 들어갔다.
'세베리노 수도사님은 왜 찾아온 것일까요?'
말라키아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만한 거리로 멀어졌을 때 내가 사부님에게 여쭈웠다.
'아드소, 이제 너도 네 머리를 좀 써서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
사부님 말슴에는 짜증기가 묻어 있었다. 사부님은 곧, 발밑을 내려다보면서 말머리를 바꾸었다.
'사람들을 불러 말 좀 물어야겠다... 그나저나... 물어도 살아 있을 동안에 몰어야지... 픽픽 쓰러져들 나가니... 이제부터는 먹고 마시는 데도 신경을 좀 써야겠다. 먹을 것은 꼭 남들이 쓰는 접시에다 덜어 먹도록 하고, 마실 것도 남들이 따르는 주전자에서 따라 마시도록 하자꾸나. 베렝가리오의 시신이 발견되고 보니,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물론 이 사건의 범인만큼이야 알겠느냐만...'
'이제부터는 누구를 심문하실 의향이신지요?'
'너도보아서 알 터이다만, 여기에서는 일이 터지되 꼭 밤에만 터지는구나. 밤에 수도사들이 죽어 나오고, 밤에 누군가가 문서 사자실을 배회하고, 밤에 여자가 수도원 경내로 들어온다... 여기에는 밤의 수도원, 낮의 수도원이 따로 있는 것인가? 그런데 어쩔꼬, 밤의 수도원은 요사스럽기가 짝이 없구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들, 따라서 내가 불러 세우고 말을 묻고 싶은 상대는 야밤에 수도원 경내를 돌아다니는 자들이다. 가령 우리가 보았던, 그 여자와 함게 있던 괴한이 그러하다. 여자와 그 괴한의 관계와, 독살일 가능성이 큰 살인 사건 사이에는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내가 괴한이라고 지칭하는 자는, 이 신성한 수도원 경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 이상으로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할 터, 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기 한녀석이 오는구나.'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수도사는 살바토레였다. 살바토레도 오다가 사부님을 보았던 모양인지 오다 말고 우물쭈물 걸음을 멈추고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던 살바토레는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다가.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던지 미적미적 사부님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그 푸짐한 미소와 끈적끈적한 축복을 인사로 삼았다. 사부님은 그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짜고짜 이렇게 다그쳐 물었다.
'너, 내일 이단 심판의 조사관들이 이리로 온다는 걸 알고 있겠지?'
살바토레는 흠칫하다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반문했다.
'그것이 저와 무슨...?'
'너, 나에게 말하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네 동아리들과 소형제파 수도사들 이야기 말이다. 어쩌겠느냐? 이단 심판관들에게 말하겠느냐? 이단 심판관들이 어떠하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을 테지?'
기습 공격이 급소를 쳤던 모양이었다. 살바토레는 저항을 포기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아는 대로 대답하겠다는 듯이 힘없이 웃으면서 사부님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주방에 여자가 와 있었다. 그 여자와 함께 있던 자가 대체 누구냐?'
'(장사치)처럼 제 몸을 파는 것이니 (요조숙녀)라고도 할 수 없고 (인심 좋은 처녀)라고도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요.'
'나는 그 여자가 요조숙녀인지 아닌지를 묻고 있는 게 아니다. 그 여자와 함게 있었던 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젠장), 여자가 예사 요물입니까? (밤낮) 사내 꼬드기는 연구만 하는 게 여자인데요?'
사부님은 살바토레 앞으로 다가서면서 멱살을 틀어쥐고는 다그쳤다.
'그 여자와 함께 있었던 게 누구냐? 너냐? 아니면 식료계 레미지오냐?'
살바토레는 사부님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얼렁뚱땅 얼버무릴 계제도 아니고 임기웅변으로 모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는걸 개달은 모양이었다. 살바토레는 듣기 민망한, 참으로 괴이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살바토레는 식료계 레미지오를 기쁘게 하기 위해 밤이면 마을에서 여자를 꾀어 자기만 아는 통로를 통해 수도원 경내로 들어온다고 고백했다. 그것뿐이었다. 그 통로에 대해서는 한사코 입을 다물었다. 살바토레의 말에 따르면, 맹세코 자기는 좋아서 그런짓을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식료계 레미지오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 짓은 해왔다. 레미지오를 만족시킨 여자가 자기에게도 무엇인가를 베풀고자 했지만 한번도 그 혜택을 달갑게 누린 바 없다고 했다. 살바토레는 시종 칙칙한 미소와 눈짓을 곁들여 가면서 이런 구역질나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사부님과 나 역시, 그렇게 살덩어리만으로 이루어진 인간, 그런 파계 행각의 고백 앞에서도 별로 놀라지 않을 인간으로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그는 나에게로도 시선을 던지곤 했으나 나는 그 시선을 맞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같은 비밀, 같은 죄악에 물든 공범자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살바토레가 중언부언하자 사부님은 결정타를 날렸다. 그를 협박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언제 레미지오를 만났느냐? 돌치노와 함께 있을 때 만났느냐? 아니면 그 뒤에 만났느냐?'
살바토레는 <돌치노>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단 심판관들로부터 목숨만은 구해 달라고 애원했다. 사부님은, 진실만 이야기하면 이단 심판관들로부터 지켜 주고, 들은 이야기도 혼자만 알고 있겠노라고 약속했다.
이 약속이 미더웠던지 살바토레는 레미지오를 사부님 손에 붙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살바토레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이 서로 만난 곳은 <대 머리산>이었다. 말하자면 돌치노의 무리 안에서 만난 것이었다. 살바토레와 레미지오는 함께 이 폭도의 무리에 속해 있다가 무리를 이탈, 카잘레 수도원으로 들어가 있다가 나중에 끌뤼니 수도원, 즉 베네딕트회 수도원으로 합류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고백한 살바토레는 용서를 구하면서 사부님의 손을 잡고 울먹였다. 그에게서 더 알아낼 것이 없다고 판단했던지, 아니면 레미지오를 공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지 사부님은 살바토레를 놓아주었다. 살바토레는 도망치듯이 사부님 옆을 떠나 교회 안으로 사라졌다.
식료계 수도사 레미지오는 곡물 창고 앞에서 사하촌 농부들을 상대로 곡물을 흥정하고 있었다. 곁눈질로 사부님을 알아보고도 레미지오는 아는 체하는 대신 농부들을 잡고 너스레 떨기를 계속하자 사부님이 그를 한쪽으로 불러 쥐어박듯이 물었다.
'자네! 자네는 직책과 관련된 업무 때문에 밤에도 수도원 경내를 돌아다녀야 하는 것으로 아는데...?'
'경우에 따라서 다릅니다. 농민들과 농산물을 흥정할 일이 있으면 시생은 몇 시간의 잠을 희생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를 말이겠는가만, 자네의 관할 구역인 주방과, 장서관 사이에 누군가가 한밤중에 배회한다면, 그걸 자네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자를 보았다면 원장께 보고드렸을 것입니다.'
'그럴 테지...'
사부님은 레미지오의 눙치는 수작이 예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말머리를 돌렸다.
'...그것은 그러하다고 치고...저 계곡에 있는 사하촌이 부촌은 아닐 것이네만, 어떤가?'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하촌에는 수도원의 성당 참사회원이라서 성직록을 받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수도원과 이런 분들은 재산을 공동 소유하고 있는 셈이지요. 가령 금년의 성 요한 절의 경우 이 참사회원들은 우리 수도원으로부터 엿기름 열두 말, 말 한 마리, 암소 일곱 마리에 황소 한 마리, 암송아지 네 마리, 수송아지 다섯 마리, 양 스무 마리, 돼지 열다섯 마리, 닭 쉰 마리, 벌 열일곱 통을 받았습니다. 훈제 돼지 스무 마리, 굳기름 스물일곱 통, 꿀 반 말, 비누 서 말에다 고기잡이 그물도 마을로 내려가지요...'
사부님은 밑도 끝도 없이 계속될 듯하던 그의 말 자락을 낚아챘다.
'알았네, 잘 알았네. 하지만 그걸로는 마을의 경제를 훤히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은 자네도 인정할 걸세.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마을에는 성직록 먹는 사람이 몇이고 성직록을 아니 먹는 사람이 몇인데, 후자가 소유하고 있는 농토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일세.'
'그거라면 말씀드립지요,. 보통 가구당 50타볼라 정도의 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한 타볼라는 얼마나 되는가?'
'4평방 트라부코가 한 타볼라입니다.'
'평방 트라부코라...그건 또 얼마나 되는고?'
'한 트라부코는 36평방 피에데입니다. 길이로 셈하자면 8백 트라부코가 1피에몬테 마일입니다. 이 정도 농토를 가진 가구의 수확량을 말씀드리면, 수도원 북사면일 경우 반 부대 정도의 기름을 짤만한 올리브 나무를 가진 셈이지요.'
'반 부대라면?'
'네, 한 부대는 5에미나, 한 에미나는 8잔에 해당합니다.'
대화가 이 지경에 이르자 사부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겠네. 지방마다 도량형이 달라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군. 그래, 여기에서는 포도주를 큰잔으로 되는가?'
'잔으로 되기도 하고 루비오 단위로 되기도 합니다. 6루비오는 한 브렌타, 8브렌타는 한 통입니다. 한 루비오는 6파인트, 즉 2보칼레에 해당한다고 아시면 됩니다.'
'이제 뭔가 감이 좀 잡히는 것 같군.'
'더 아시고 싶은 게 있습니까?'
레미지오가 의기 양양, 방자하게 물었다.
'암, 있고말고... 나는 자네에게, 저 아랫마을 사람들 사는 형편을 물었네. 내 마침 문서 사자실에서 로망스 사람 움베르토가 여자를 상대로 펴낸 설교집을 읽고 온 참이네. 이 설교집에 나오는 <가난한 촌부들을 위하여>라는 설교를 자네도 알고 있을 것이야. 이 설교에서 움베르토는, 촌부들이 가난 때문에 사악한 육욕의 죄를 범하는 것을 엄하게 경고하고 있는데... 이 사통의 죄악 중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신자를 타락시키는 것이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성직자를 타락시키는 것이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세상을 등진 수도사를 타락시키는 것이라네. 수도원같이 성스러운 곳에도, 벌건 대낮에 사람을 유혹하는 악마가 없지 않음은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 것이네. 나는 혹 자네가 마을 사람들을 접촉하면서, 어떤 수도사가 여자를 경내로 끌어들인다는 해괴한 소문 같은 거라도 들은 적이 없는지 알고 싶어서 이렇게 자네를 찾아왔네.'
물론 사부님은 지나가는 말처럼 묻고 있었다. 그러나 저 가련한 레미지오의 귀에 사부님의 이런 질문이 어떻게 들렸을지는 독자들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땅히 그래야 할 터인데도 레미지오는 얼굴을 붉혔던 것 같지 않다. 어쩌면 붉어지기에는 너무나 느물느물한 얼굴이러서 낯빛을 잃고 있었다는 편이 옳겠다.
레미지오는 낯빛이 바래져 가는 얼굴을 하고는 딴에는 침착하게 응수했다.
'수도사님께서는, 시생이 알았다면 마땅히 원장님께 보고드렸을 법할 것만 묻고 계십니다. 하여튼 이런 종류의정보가 수도사님의 조사에 도움이 된다면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아는 것이 있을 때 한합니다만... 첫 번째 질문을 받잡고 보니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 저 가엾은 아델모 형제가 죽은 날 밤, 시생은 수도원 경내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닭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경내 대장간의 대장장이들이 밤이면 닭장에서 닭서리를 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그날 밤 시생은 우연히... 먼발치에서... 곡 베렝가리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베렝가리오가 아닐 리가 없습니다. 어쨌든 한 수도사가 제 숙사로 돌아가려고 그러는지 교회 앞을 지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관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만 저는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베렝가리오에 대해, 수도사들 간에 나도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수도사님께서도 그 소문을...'
'못 들었으니, 말하게.'
'글쎄요, 뭐라고 말씀 드려야 좋을지... 베렝가리오가... 정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수도사 신분에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네는, 베렝가리오가 마을의 여자와 연을 맺고 있었다, 이런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 물은 게 바로 이것이었네만...'
레미지오는 몹시 당황했던지 연거푸 마른기침을 했다. 교활하게 웃기 시작하면서 그제서야 레미지오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닙니다. 그보다 망측한 정념입니다.'
'하면, 수도사가 마을의 여자와 육욕의 정을 나누는 것은 망측하지 않다, 그 말인가?'
'그렇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천사에는 미덕의 천사가 있고 타락의 천사도 있는 법입니다... 육욕도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육욕이 있고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는 육욕도...'
'그렇다면 베렝가리오가 동성과의 육욕에 쫓기고 있었다는 말이렷다?'
'어찌 큰 소리로 말씀 올릴 수 있으리까. 저는 다만 저의 진실과 선의를 증명하고자 이런 해괴한 말씀을 올리는 것뿐입니다.'
'고맙네. 동성에의 육욕에 쫓기는 것이 순리적인 육욕에 쫓기는 것보다 더 낯 뜨거운 것이라는 자네 말에는 일단 동의하네만... 솔직하게 말해서 나에게는 이것을 조사할 의향이 없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아니 기가 막히게 사악한 변고이겠습니까?'
'알겠네, 레미지오. 우리 인간은 모두 그렇게 기가 믹히게 사악한 죄인들일세. 허나, 내 눈에 들보가 박혀 있는 것을 모르고 형제의 눈에 든 티를 찾으려 하여서도 안 되는 일... 장차 자네가 나더러, 눈에 들보가 들었다고 한다면 내 고맙게 여기기는 할 걸세. 그러니 우리 나남 없이 눈에 든 들보는 서로가 일러주어서 바람에 날아가 버리게 할 일이네. 그건 그렇고... 자네, 1평방 트라부코가 얼마나 된다고 했더라?'
'36평방 피에데입니다. 하지만 수도사님, 이런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실 때가 아닙니다. 무슨 낌새를 잡으시면 제게 오십시오. 저라면 수도사님께 드릴 정보가 좀 있습니다.'
'나도 자네를 그렇게 보네. 그런데 우베르티노 형제의 말에 따르면 자네는 한때 우리 문중에도 몸 붙인 적이 있더군. 내 어찌 우리 문중의 도반을 배신하겠는가? 다른 때도 아니고, 저 돌치노 파의 무리들을 수없이 화형대로 보낸 이단심판 조사관들을 필두로 교황의 심복들이 줄줄이 들이닥치는 판국인데... 그래, 1평방 트라부코가 36평방 피에데라고 했던가?'
레미지오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윌리엄 수도사를 상대로 고양이와 쥐놀이를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님을 깨달았던 모양이었다. 더구나 자신이 쥐 노릇을 하고 있는 터임에랴... 그의 기세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윌리엄 수도사님, 과연 수도사님께서는 시생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살려주십시오. 저도 수도사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입니다. 저는 육욕에서 헤어나지 못한 가련한 자, 정욕의 불꽃으로 육신을 사르고 있는 불쌍한 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살바토레가 저에게, 수도사님이나 수도사님의 시자가 지난 밤 주방에서 무슨 낌새를 잡았을 것이라고 한 마당에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윌리엄 수도사님, 수도사님께서는 넓은 세상을 두루 다니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 넓으신 견문으로 말하자면 저희 필부에 견줄 바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수도사님께서 저를 이렇게 심문하시는 것이 저 사악한 육욕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저는 수도사님께서 저희 과거지사를 조사하셨다는 것도 압니다. 저희 소형제파 무리들이 다 그렇듯이, 저역시 참 기구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래 전에 저는 청빈의 이상에 깊이 감동한 바 있어 속세를 떠나 비승 비속의 걸승으로 살아왔습니다. 저같은 것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저도 돌치노의 설교를 믿었습니다. 수도사님, 저는 배우지 못한 놈입니다. 그래서 비록 서품은 받았을망정 성사 집전할 줄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신학에 대해서야 무엇을 알겠습니까. 저는 제 이상을 겨냥할 줄만 알았지 거기에 맞추어서는 살지 못한 놈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한때 권력에 반역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듯이 권력을 시봉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군주를 위해, 저같이 못되어 먹은 것들에게 명령도 내립니다. 반역 아니면 충성... 저 같은 범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 때로 오지랖 간수는 범부가 식자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도, 그때 제가 왜 그랬는지 알지 못합니다. 살바토레의 경우는 이해가 갑니다. 살바토레의 부모는 농노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가난과 역경 속에서 보냈습니다. 수도사님게서 너무나 잘 아시다시피 돌치노는 지주들을 파멸시키자고 일어선 반역자들의 우두머리가 아니었습니까? 살바토레 같은 범부가 이런 무리에 가담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저는 도시 공민의 아들입니다. 저는 가난에 시달려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의 일은 바보들의 축제, 얼간이들을 위한 훌륭한 사육제 같은 것이었습니다. 수도사님께서는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돌치노와 함께 <반역의 산>에 군거할 때 저희들은 차마 어쩔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금수에게 던져주던 전우의 시신을 , 나중에는 저희들끼리 포식하고는 했습니다. 물론 수많은 무리가 굶기를 밥 먹듯 할 때의 일입니다. 기이한 분위기... 그것을 자유라고 해도 되는 것입니까? 저는 그때까지 자유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설교자들은, 진리가 저희들을 자유롭게 할 것(요한의 복음서 8:22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이라고 했습니다. 저희들은 그때 저희들의 느낌을 바로 자유의 느낌이라고 믿었습니다. 저희들은, 저희들이 하는 행동이야말로 정당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들과도 자유롭게 접촉했겠군요?'
내가 물었다. 그렇게 물었던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전날 우베르티노로부터 들은 말, 문서 사자실에서 읽은 글, 그리고 내가 지은 대죄를 번갈아 생각하는 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온 질문이었던 것 같다. 사부님이, <어렵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부님에게는 그처럼 당돌한 나의 질문이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레미지오는 잠깐 나에게 험상궂은 눈길을 던지고는 말을 이었다.
'<반역의 산>에 군거하던 무리 중 상당수의 여자들은 아이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손바닥만한 방에 아이, 어른, 모자, 부녀 가릴 것 없이 송곳 꽂을 틈도 없이 몸을 붙이고 살았습니다. 이러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밤이면, 십자군의 공격이 이젤까, 저젤까, 가슴 조이면서도 우리는 옆에 있는 이성의 몸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단적인 짓거리라고들 했지요. 이른바 십자군에 묻어 <반역의 산>을 공격해 왔던 수도사들은 그걸 악마의 꾐에 넘어간 루벨로 산 반역자들의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모르는 소리니다, 신앙이 아니라 삶의 한 수단이었습니다... 네, 그런 희한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희들은 하느님이 저희 편에 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도사님,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어쨌든 그렇게 한 철을 살다가 저는 그곳을 떠나 이리로 왔고, 그래서 이렇게 수도사님을 뵙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리스도의 청빈이 무엇인지, 소유가 무엇인지, 권리가 무엇인지 몰랐고 지금도 모릅니다. 저는 유식한 입씨름과는 아무 인연도 없는 자입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그걸 사육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사육제가 벌어질 동안 저희는 거꾸로 살았습니다. 이만큼 살았으면 마음이 정해질 때도 되었건만, 수도사님,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워지는 것입니까? 여기에 서 있는 저는 꿀돼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단자를 화형대로 보내시는 수도사님, 꿀돼지도 화형대로 보내시겠습니까?'
'그만해 두게, 레미지오. 나는 그때의 일을 묻는 것이 아니고 최근에 있었던 일을 묻는 게다. 솔직히 말하라. 그러면 내 너를 화형주로 보내지 않겠다. 아니, 나는 이제 너를 심판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허나 이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 네가 아는 일은 숨김없이 고해야 한다. 너는 밤에 수도원 안을 자주 돌아다녔으니 만치 아는 것이 많을 게다. 그러니 말하여라. 누가 베난티오를 죽였느냐?'
'맹세코, 그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는 압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아는 것을 말해 보아라.'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날 종과 성무 끝나고 나서 한 시간쯤 되었을 때입니다. 저는 그 시각에 주방으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무엇 때문에 그 시각에 주방에 들어갔더냐?'
'채마밭 쪽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저에게는, 오래 전에 대장장이에게 청을 넣어 만들게 한 열쇠가 있었습니다. 주방문은, 안으로 잠그지 않는 유일한 문입니다. 들어간 이유는, 수도사님 말씀에 따르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수도사님께서는, 육욕 가지고는 저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시도 때도 없이 사통을 일삼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날 밤에 제가 주방으로 들어갔던 것은... 살바토레가 데려온 여자에게... 줄 만한 게 없을까 하고... 먹을 것을 좀 찾으러 들어갔습니다.'
'여자를 데리고 들어갔겠다? 살바토레는 여자를 어디로 데리고 들어왔느냐?'
'정문 옆 성벽에는 출입구가 하나 있습니다. 원장님께서도 아십니다. 저는 물론 알고요... 하지만 그날 밤에는, 주방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여자를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주방에서 있엇던 일...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젯밤에 수도사님께서 주방으로 들어오신 것으로 압니다만...'
살바토레는 전날 밤 주방으로 들어간 사람을 사부님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레미지오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조금만 늦게 들어오셨다면 거기 있었던 것은 제가 아니고 살바토레였을 것입니다. 살바토레는, 본관에 누군가가 잠입했다고 저에게 가르쳐 주더군요. 그래서 저는 제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젯밤 일이 아니다. 주일 밤과 월요일 새벽에 있었던 일을 묻고 있지 않느냐?'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방으로 들어간 저는, 바닥에 쓰러진 베난티오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볼 당시에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주방 바닥에?'
'그렇습니다. 설거지대 바로 옆이었습니다. 문서 사자실에서 내려온 것 같았습니다.'
'저항한 흔적은 없었느냐?'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체 옆에는 깨어진 유리잔이 있었고, 물이 엎질러진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물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느냐?'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물이라고 생각했던 것뿐입니다. 다른 것이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뒤에 사부님이 지적하신 대로 이 깨어진 유리잔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베난티오는 누군가의 계략에 걸려 바로 그 주방에서 유리잔에 든 독을 마셨을 수도 있고, 언제, 어디에서 마셨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다른 데서 독약을 마시고 위장이나 혀를 태우는 듯한 고통을 달래려고 주방으로 달려와 그 유리잔으로 물을 마셨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베렝가리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베난티오의 손가락에도 검은 얼룩이 있었다.)
사부님도 레미지오로부터는 더 알아낼 것이 없었다. 레미지오의 말에 따르면, 시체를 보고 워낙 기겁을 한 터라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이윽고 제정신을 수습한 그는, 어떻게든 손을 쓰려다가 아무 짓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손을 쓰자면,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 터인데, 그렇게 하면 한밤중에 본관에 침입한 사실이 들통날 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시신을 그대로 두고 아침에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게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는 살바토레에게 달려간다. 살바토레는 이미 경내로 여자를 데리고 온 뒤이다. 레미지오와 살바토레는 서둘러 여자를 내보내고는 잠자리에 들어, 찰중 수도사가 조과 성무 시간을 알릴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데 조과 성무 시간이 되고 시체가 발견되는 것은 좋은데, 레미지오는 시체가 주방에서 발견되지 않고 돼지 피 항아리에서 발견된 데 몹시 놀라게 된다. 누가 시신을 주방에서 끌어내어 돼지 피 항아리에 쳐넣었다는 것일까? 레미지오도 이것만은 설명하지 못했다.
'밤중에 본관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는 말라키아 뿐일 테지?'
사부님의 질문에 레미지오가 뛸 듯이 놀라면서 항변했다.
'아닙니다. 말라키아가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말라키아가 그런 짓을 한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저는 말라키아에게 불리한 증언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말라키아에게 무슨 빚을 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말라키아도 너의 과거를 알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말라키아의 처신은 신중했습니다. 제가 수도사님 입장이라면 베노에게 눈을 대어 보겠습니다. 베노는, 베렝가리오와 베난티오의 기묘한 관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맹세코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 이상으로 제가 아는 것은 없습니다. 알게 되면 꼭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것으로 족하다. 필요하면 또 부르기로 하겠다.'
사부님이 시선을 거두자 레미지오는 적이 마음을 놓은 양 농부들에게로 돌아가 하던 흥정을 계속했다. 곡식 자루를 옮기는 농부들에게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 보아 딴에는 몹시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세비리노가 달려왔다. 그는 이틀 전에 도난당한 사부님의 안경을 들고 있었다.
'베렝가리오의 법의 속에 있었습니다. 수도사님의 것일 테지요. 전날 문서 사자실에서 수도사님께서 이걸 눈에 대고 계시는 걸 보았습니다. 맞지요?'
사부님이 몹시 반가워하면서 그 안경을 받아 들었다.
'이러니 역시 우리 하느님이시지! 이로써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첫째는 안경을 찾았고, 둘째는, 전날 문서 사자실에서 내 안경을 훔쳐 간 장본인이 베렝가리오라는 걸 확인한 셈이 아니냐.'
그런데 사부님의 말이 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모리몬도 사람 니콜라가, 사부님보다 더 밝은 얼굴을 하고 달려왔다. 그 역시 손에 안경 하나를 들고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님! 드디어 제 손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완성입니다. 아마 제대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소리치다가, 이미 사부님 코 위에 자리를 잘 잡고 앉아 있는 안경을 보고는 당혹해 하는 것 같았다. 사부님은, 그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기 싫었던지, 끼고 있던 안경을 벗고는 새 안경을 받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게 훨씬 잘 보이는군 그래. 걱정 마시오. 낡은 놈은 여벌로 갖고 다니되 내 당신이 만들어 준 놈만 쓰기로 하지...'
그리고는 나를 돌아다보면서 덧붙였다.
'...아드소, 내 방으로 가서 그걸 좀 읽어 보아야겠구나. 드디어 내 눈으로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아니 다행한 일이냐? 나중에 너를 부를 터이니 하회를 기다리거라. 세베리노 형제, 니콜라 형제, 두분 다 고맙소이다.'
종소리가 제3과 성무 시각을 알려 왔다. 나는 교회로 들어가 남들처럼 찬미가를 부르고 (시편)과 성구를 봉독하고 연도를 좇았다. 성무에 참례한 수도사들은 모두 죽은 베렝가리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나는 사부님에게 안경이 한 벌도 아니고 두 벌이나 생기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보고 들은 온갖 추한 것들을 생각의 뒤켠으로 밀어내고 느긋하게 성무 공과 시간의 평화를 즐기던 나는 깜빡 졸다가 성무가 끝날 즈음에 끼어났다. 나는 그제서야 밤잠 설쳤던 것을 생각해 내었다. 성무 공과 시간에 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밖으로 나와 맑은 공기를 쐬고 나니 여자 생각이 다시 내 머리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몸과 마음을 가누면서 나는 잰 걸음으로 묘지 옆을 걸었다. 잠이 왔다. 나는 잠을 쫓으려고 귀도 잡아당겨 보고 발로 땅바닥을 구르기도 했다. 졸음이 왔지만 생명은 뿌듯한 상태로 깨어 있는 듯하던 참으로 기묘한 순간순간이었다. 나는 내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잇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3시과
솔직하게 말해서, 여자와의 죄 많은 만남은, 그 뒤에 있었던 끔찍한 사건 때문에 한동안은 거의 잊고 있었던 셈이 된다. 게다가 사부님 앞에서 내가 지은 죄를 고해한 다음이라서 내 영혼은 타락의 희오와 불면의 피곤에서 거의 놓여 난 기분이었다. 말하자면 고해함으로써, 내 가슴을 맴돌던 수많은 말마디와, 그 말에 묻어 있던 느낌의 앙금을 깡그리 벗어버린 듯했다는 것이다. 하기야 죄짐과 그 죄짐으로 인한 회오를 우리 주님 품안에다 내려놓으면 죄악을 후회하던 육신과 영혼이 가벼워지지 않는다면 어찌 고해의 성사를 통하여 정죄함을 입는다고 할것인가?
그러나 어쩌랴. 그렇다고해서 내가 모든 일로부터 온전하게 놓여난 것은 아니었다. 인간과 금수의 탐욕이 소음을 지어내는 그 날의 싸늘하고도 창백한 겨울 아침을 걸으면서 나는 어느새 내 경험을 여러 각도에서 반추하고 있었다. 죄를 짓고 고해의 성사를 통하여 정죄함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고해의 말과 정죄의 은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육체의 환상과 인간의 사지만 나에게 붙어 다니는 것 같았다. 열병에 들뜬 듯한 내 마음속으로 문득문득 물에 퉁퉁 불은 베렝가리오의 귀신이 나타나곤 했다. 기이하게도 나는 견디기 어려운 욕지기와 자기 연민을 느끼고는 몸둘 바를 몰랐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런 악령을 몰아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내 마음이 추억이라는 신선한 그릇에 든 저 여자의 형상을 좇았다는 점이다. 나는 내 눈에 보일 듯이 어른거리는 그 여자의 형상, 엄위하기가 기치를 드높인 군대 같은, 그 당당하던 여자의 모습에서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나는 앞에서, 수십 년 동안을 내 마음속에서 맴돌던 그 사건의 충실한 연대기 기자 노릇을 하기로 서약한 바 있다 내가 그렇게 서약한 까닭은 장차 올 독자들을 가르치겠다는 진실에의 사랑과 욕망 때문이기도 하고, 평생을 내 기억에 묻어 고형체로 남는 저 환상과 추억으로부터 나 자신을 해방시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한다. 따라서 나는 모든 이야기를 진솔하게 하되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제 나는 그 겨울날 아침 수도원 안을 걸으면서 내가 했던 생각, 정말 감추고 싶었지만 내가 독자에게 세운 서약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당시의 내 심경을 고백하겠다. 나는 때 아니게 쿵쾅거리는 내 심장의 고동에 내 육신의 율동을 맞추느라고 느닷없이 달음박질을 하기도 했고, 문득 걸음을 멈추고 농노들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들을 선망한 것에 놀라 몸둘 바 모르게 당혹하기도 했으며, 속인들이 공포와 슬픔을 잊으려고 술을 마시듯이 그렇게 정신없이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슴 안으로 빨아들이기도 했다.
하릴없는 일이었다. 그래, 나는 그 여자를 생각했다. 내 육신은 다행스럽게도, 여자와의 만남이 나에게 안겨 주던 그 죄 많고 덧없는 쾌락을 잊은 다음이었다. 그러나 내 영혼은 그 여자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아, 내 영혼은 그 추억을 더러운 것으로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더러운 것으로 승인하기는커녕 내 가슴은 창조의 광영을 입은 지복의 얼굴 앞에서 그렇듯이 쿵쾅거리기까지 했으니 이를 어쩔꼬.
이럴 수가 있는가! 저 자신의 육신을 죄인들에게 판, 저 가련하기도 하고 더럽기도 하고, 음탕하기도 한 여자, 제 육신을 내어 놓고 값을 쳐 받은, 제 자매들처럼 나약한 저 하와의 딸이 저주스러웠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아니었다. 자꾸만 기이하고도 눈부신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물론 내 지성은, 그 여자가 죄악의 그릇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내 육신이 그 여자를 영광스러운 것의 그릇으로 느끼는 것을 어쩌랴! 그대의 내 느낌을 여기에 고스란히 전하기는 쉽지 않다. 여전히 죄악의 올가미에 걸린 채 문득 그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나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쓸 수밖에는 없다. 내 지성은 아니라고 하는데도 내 가슴은 그 여자가, 나를 유혹하던 그 형상이 불쑥 나타나 주기를 애타게 바라면서 눈을 부려 일하는 농노들 무리 사이, 오두막 모퉁이와 창고 그늘을 살피게 한 것을 어쩌랴! 아, 나는 왜 여기에다 진실을 쓰려하지 않는가? 나는 왜 내 진실에다 너울을 씌우려 하는가! 나는 그 여자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니고 보았다. 이것이 진실이다. 그렇다. 나는, 추위에 몸이 곱아진 참새가 피난처를 찾아 자리를 뜨는 바람에 가엾게 떨리는 마른 가지에서도 그 여자를 보았고, 방황하는 내 앞을 지나면서 우는 어린 양의 울음소리에서도 그 여자의 음성을 들었다. 만물이 내 귀에다 대고 그 여자 이야기를 하는 것같았다.
그렇다. 나는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어했다. 동시에 나는 다시 그 여자를 볼 수 없다는 것, 다시 그 여자 옆에 누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런데도 나느 그날 아침, 내 가슴을 채우던 그 환희의 순간을 마음으로 누리고, 비록 영원히 나와는 아득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 여자를 내 마음으로 느끼리라고 마음먹었다.
이제 알 것도 같다. 우주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이 손가락으로 쓰신 서책과 같은 것이다. 이 서책에서는 만물이 우리에게 창조자의 크신 은혜를 전한다. 바로 이 서책에서 만물은 삶과 죽음의 다른 얼굴이자 거울이 되며, 바로 이 서책에서 한 송이 초라한 장미는 온갖 지상적 순행의 표징이 된다. 그 서책에서 그렇듯이 그날 아침 내가 만난 만물은 나에게, 그날 주방의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그 여자의 모습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환상이 싫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비록 하찮은 존재이기는 하나, 세상을 향하여 창조주의 권능과 자비와 지혜를 증거하게 마련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날 아침 만물은 나에게 그 여자의 모습을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비록 죄인이기는 하나 그 여자 역시 위대한 창조의 이야기가 실린 서책의 한 장이요, 우주가 음송하는 위대한 시편의 한 구절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여자 역시 한 자루 피리처럼 우주를 조화와 화음으로 채우는 하느님 뜻의 한 자락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걸으면서, 내 눈앞에 보이는 만물의 형상을 즐거움으로 누리면서 원근의 풍경에서 그 여자의 모습을 보고 탐닉했다.
그런데 서글펐다. 수많은 사물을 통하여 보고 누렸다고는 하나 허상일 뿐, 역시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 모순을 풀어서 설명할 수 없었다. 인간의 정신이란 참으로 나약한 것이다. 세상은, 완벽한 삼단 논법의 세계를 세운 신성한 이성의 도정이지만 인간의 정신에는 그 삼단 논법을 따르는 대신 그 논법에서 이탈하여 저에게 유리한 명제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악마의 농간에 넘어가는 것일 터이다.
하면, 그날 아침 그토록 내 마음을 흔들어 놓던 그 여자에 대한 상념 역시 악마의 농간이었더라는 말인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신분이 수련사였다는 데 있다. 내가 수련사만 아니었다면, 인간의 마음에서 인 그런 격정 자체는 크게 허물될 바 아닐 것이다. 남자의 마음에 여자에 대한 그러한 격정이 있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그래야 이방의 사도들이 바라듯이 육과 육이 만나 새로운 인간이 지어지면서 선거하는 세대가 있고 후래하는 세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방의 사도들이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보아 준 것은 우리 같이, 동정 지키기를 서원한 사람이 아닌 속인들에게 한하기는 한다.
나는 누구인가? 동정을 지키기로 서원한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날 아침의 격정이 나에게는 사악한 것이나 속인들에게는 아름다운 것이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내가 느낀 갈등은 그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서원을 세운 사람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나는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한편으로는 사악한 것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러면 나의 허물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여는 인간에게는 당연한 정욕이라고 해서 내 영혼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 그것이 나의 허물이었다. 이제 나는, 의지의 작용이 끼여든 엄연한 지적 갈등과, 인간적인 정열에 종속되어 있는 감성적 갈망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일찍이 아퀴나스가 갈파했듯이, 감성적인 욕망으로 인한 행위가 정념이라는 부정적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육체적인 변화를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천사적인 박학 아퀴나스에 따르면, 정념 자체는 사악한 것이 아니나, 마땅히 이성이 주도하는 의지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
그날 아침의 내 이성은 어떠했던가? 내 이성은 전날 밤의 불면과, 본질적인 선악의 갈등으로 인한 피로로부터 깨어 있지 못했다. 당시 내가 사로잡혀 있던 저항하기 어려운 갈등 상태를 제대로 설명하자면, 내가 사랑에 들려 있었다고 하는 수 밖에 없겠다. 이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갈등의 정체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사랑은 우주적인 법칙이다. 무슨 까닭인가? 육체의 무게를 서로 느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랑에 들려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나의 신분에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을까? 나에게는 유혹이었는데, 내 허물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한 데 있었다. 이제야 나는 저 천사적인 박학 아퀴나스의, <사랑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며 사물을 꿰뚫어 아는 데는 지식이 사랑만 같지 못하다고 했던 이유를 이해한다. 그 까닭은, 느낌만인데도 전날 밤보다 그 여자를 훨씬 분명하게 볼 수 있었고 훨씬 선명하게 그 여자의 안팎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그 여자 안의 나 자신과 내 안의 그 여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이켜보아도, 그때 내가 지니고 있던 그 감정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상대의 미덕을 제 것으로 취하고자 하는 우정에서 기인한 사랑의 감정이었는지, 아니면 제 미덕은 따로 두고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에서 기인한 사랑의 감정이었는지 분명하게는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 여자로부터, 내가 갖지 못했던 것을 바랐던 것으로 보아 탐욕에서 기인한 정욕적인 사랑의 감정이었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는, 나는 그 여자로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니, 바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여자의 미덕을 내 것으로 취하기를 바랐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나는 그 여자가 얼마 안 되는 식량 때문에 몸을 팔아야 할 정도의 비참한 가난에서 구제되기를 바랐다. 나는 그 여자가 행복하게 되기를 바랏다. 나는 그 여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로지 양 떼 속에서, 소 떼 속에서, 나무 속에서, 수도원 경내를 말끔히 씻는 차분한 빛 줄기 안에서 그 여자를 생각하고 보았을 뿐이었다.
이제 나는, 선이야말로, 미덕이야말로 사랑의 씨앗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미덕은 지성을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덕을, 선을 발견한 연후에야 비로소 참사랑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허나 어쩌랴. 당시에는 그 여자를 사악한 의지의 화신이 아닌, 덧없는 갈망의 아름다운 화신으로 알았던 것을...
내 감정은 더할 나위 없이 착잡했다. 당연했다. 그 여자와의 덧없는 사랑을, 박학한 신학자들의 이른바 더없이 거룩한 사랑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감정의 오류에 휩쓸리자 내 안에서 사랑하는 자나 사랑받는 자가 같은 것을 바라는 것과 그 상태가 비슷한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요컨대 나는 그 여자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질투는 바울로가 <고린토 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단죄한 질투가 아니라 아레이오파기테스 디오뉘시오스가 <신명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그런 질투였다. 말하자면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이 하시는 것과 비슷한, <사랑하는 것에 참가하는>그런 질투였다. 나는 그 여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여자를 사랑했다(나는 그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행복으로 여겼을망정 그 존재 자체를 질투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여자에 대한 나의 질투는 천사적인 박학 아퀴나스의 이른바 <사랑의 씨앗인 질투>, 사랑하는 자의 위험을 막고 나서는 우애의 질투였던 것이었다.(당시 나는, 그 여자의 육체를 삼으로써 제 사악한 정념을 또 한번 더럽히는 자의 손아귀로부터 그 여자를 구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야 나도, 사랑이 지나치면 사랑하는 자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저 박학한 아퀴나스의 말귀를 알게 되었다. 내 사랑은 바로 그런 지나친 사랑이었다. 말이 길어졌지만 나는 당시의 내 느낌을 되도록 정확하게 설명하고자 한 것이지 그때의 내 느낌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청춘의 그 죄 많던 열정의 정체를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그 열정은 사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실은 나에게, 그때의 내 느낌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고백할 것을 요구한다. 이 진실이, 나처럼 유혹의 덫에 걸릴지도 모르는 후학에게 가르침이 될 수 있다면 그런 다행이 없을 터이다. 이제 늙은이가 다 된 나는, 그러한 유혹을 피하는 방법을 두루 안다. 이제는 낮도깨비의 유혹에서 놓여 났으니 내가 좀 자랑스럽게 여겨도 될 때가 되었다 싶다가도 문득문득 아직은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지 않아서 곤혹을 느끼고는 한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게, 이것이 무엇인가,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은 지상적 정열에 굴복하는 것인가, 아니면 시간의 흐름과 죽음에 저항해 보려고 이러는 것인가, 하고 물어 보고는 한다.
어쨌든 당시에 나를 구한 것은 기적적인 본능이었다. 여자는 돌연 여자 자체로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자연과 인공의 사상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내 영혼의 직관이 지니는 힘을 빌려 이 모든 사상을 정관함으로써 여자로 인한 긴장과 갈등에서 놓여 나려 했다. 나는 외양간에서 소 떼를 끌고 나오는 목동들, 돼지에게 먹이를 주는 돼지치기들, 양 떼를 모으라고 번견에게 고함을 지르는 양치기, 자루를 메고 방앗간에서 나오는 농부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자연 현상에 관한 명상 안에다 나 자신을 풀어 놓음으로써, 내 생각을 지우고, 있는 그대로 자연의 형상을 바라보고, 그 형상에 의지해서 나 자신을 잊으려 했다.
아름다워라! 사악한 인간의 지혜에 물들지 않은 자연의 모습이여.
나는 어린양들을 바라보았다. 어린양들은, 그 순수하고 착한 성품을 인정받아 <어린양>이라는 이름을 상으로 받으면서부터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일까? 실제로 어린양을 지칭하는 <아그누스>라는 명사는 어린양이 <아그노스치트>(안다, 인정한다), 즉 무리속에 있는 제 어미를 알아보고, 그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어미 역시, 수많은 어린양 무리에 섞여 있어도 제 새끼의 울음소리를 알아듣고 제 새끼만 가려내어 젖을 먹인다. 나는 양을 바라보았다. 양은 <아브 오블라티오네>(제물)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해서 <오비스>, 즉 양이라고 불린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짐승이 제물로 쓰였기 때문에 <아브 오블라티오네>라는 말이 <양>으로 꼴바꿈을 한 것이다. 양에게는, 겨울이 다가올 때면 목초가 서리에 시들기 전에 탐욕스럽게 먹어 두는 버릇이 있다. 양 떼 사이에는 개가 있었다. 라틴 어로 양 떼를 지키는 개는 <카네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짖는다>는 뜻을 지닌 동사<카노르>가 변한 말이다. 짐승 중에서는 가장 완벽한 짐승, 완벽의 극치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짐승인 개는 주인을 알아볼 뿐만 아니라, 숲에서 야생 동물을 사냥하기도 하고 훈련을 받으면 이리 떼로부터 양 떼를 지키기도 한다. 개가 주인의 집이나 주인의 아들을 지킨 이야기, 목숨을 걸고 제 임무를 수행하다가 결국은 목숨을 버리는 이야기는 허다하다. 적의 무리에 포로로 잡혀가던 가라칸테스 왕이, 2백 마리의 사냥개들이 적진을 뚫어주는 데 힘입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뿐이던가? 뤼키우스의 이아손이 기르던 개는 주인이 세상을 떠나자 식음을 전폐함으로써 결국 자진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뤼시마케 왕의 개는 왕이 승하하자 주인의 관에 뛰어들어 주인과 운명을 같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개에게는, 상처를 핥아서 치료하는 능력도 있다. 강아지의 혀는 위장병에 특효약이라던가? 개에게는, 토한 것을 다시 먹는 버릇이 있다 개의 이러한 절제 행위는 정신의 완전성을 상징한다. 개의 혀가 지니는 이러한 기적적인 능력은, 고해와 참회를 통한 죄악의 정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다는 것은, 고해한 뒤에도 다시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암시는, 자연의 경이를 바라보고 있던 그날 아침의 내 마음을 위로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나의 발걸음은 우사 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침 소 떼가 목동에 쫓겨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우정과 미덕의 상징을 보았다. 소가 우정과 미덕의 상징이라는 사실은,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더라도 쟁기 끄는 동아리 소를 잊지 않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소는 쟁기 끌던 동아리가 보이지 않으면 다정한 울음으로 불러보기도 한다. 소는, 혹 비라도 내릴 양이면 스스로 알아서 우사로 돌아온다. 비를 피하면서도 늘 바깥을 바라보는 것은 밭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비가 그치면 다시 일을 계속하기 위해 밭일을 유념하고 있는 것이다. 우사에서는 송아지도 나왔다. <비틀리>라는 말은 <비리디타스>(앳된), 혹은<비르고>(처녀)에서 유래한다. 송아지야말로 앳되고 순결한 짐승이기 때문이다. 송아지를 바라보면서, 송아지의 우아한 모습에서 기껏, 순결하지도 못한 여자를 생각한 나야말로 얼마나 한심한 인간이었던가? 나는 겨울 아침의 기분 좋은 소요를 보고 들으면서 세상과 나 자신을 화해시킨 위대한 평화를 생각했다. 여자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여자에게 품었던 불 같은 사랑을, 내 안의 고즈넉한 평화와 행복으로 변용시키고 말았다는 편이 옳겠다.
세상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기특한 것인가... 이런 생각도 했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토두니엔시스의 말마따나 하느님의 선하심은 금찍한 괴수를 통해서도 드러나니 세상은 얼마나 오묘한 것인가. 괴수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뱀 중에는, 수사슴을 단숨에 삼키고, 넓디넓은 바다를 헤엄쳐 건널 만큼 큰 뱀도 있다. 나귀의 몸, 야생 염소의 뿔, 사자의 갈기와 가슴, 인간의 목소리, 소 발굽처럼 가운데가 갈라진 발굽, 귀까지 쭈욱 찢어진 악어의 입... 이런 것을 고루 갖춘 <식인 괴수>도 있다. 이 괴수의 뼈는 통뼈로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얼굴, 세 줄로 난 이빨, 사자의 몸, 전갈의 꼬리, 핏빛 눈...을 하고는 뱀처럼 쉭쉭거리며 인육을 찾아 해매는 괴수도 있다. 여덟 개의 발가락, 이리 주둥이, 구부러진 발가락, 양의 털, 개의 등... 늙으면 털이 세기는커녕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까맣게 짙어져 가는, 그래서 인간보다 수명이 더 긴 괴수도 있다. 어찌 그뿐이더냐. 머리가 없기 때문에 양 어깨에 눈이 하나씩, 가슴에 콧구멍이 한 쌍 뚫린 괴물이 있는가 하면, 갠지스 강에서 사과 냄새만 맡고 사는 괴물로, 그 강을 떠나기만 하면 죽어 버린다는 것도 있다. 그러나 개가 그러하고, 소, 양, 살쾡이가 그러하듯이, 이렇게 생긴 괴수들도 나름의 목소리로 다 창조주와 그이의 지혜를 찬미한다. 뱅상 드 보배(이탈리아 어 이름은 빈첸초 벨로바첸제, 라틴 어 이름은 빈첸티우스 벨로바첸시스. 프랑스의 도미니크 회 수도사, 중세의 백과 사전 편찬자. <큰 거울>이라는 이름의 전 80권으로 된 방대한 백과 사전을 편찬한 바 있다. 이 백과 사전이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반영한다는 뜻에서 제목을 <큰 거울>이라고 한 듯하다. 이 책에는 민간의 미신이나 근거 없는 속설도 많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의 말마따나 이 세상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사실은 얼마나 고귀한 것이며, 우주에 어울리게 갖추어진 온갖 사물의 꼴과 수와 냄새, 태어난 것의 죽음으로 확인되는, 생성과 소멸을 통한 시간의 주기에 대한 통찰이 이성의 눈에 얼마나 아름답게 비치었던가. 내 비록 한때는 영혼을 육신의 노예로 전락시킨 죄인이었다. 그러나 고백컨대 나는 곧 그 죄를 참회하고 내 영혼으로 하여금 창조주와 이 세상의 이치를 따르는 정신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하고, 기꺼이 창조의 크심과 그 견인불발에 고개를 숙이게 하였다.
그렇게 느긋하게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참인데 사부님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느 발길 닿는 대로, 전혀 의식도 하지 못한 채로 수도원 경내를 거의 한 바퀴 돌고 있었던 모양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느 어느새, 두 시간 전에 사부님과 헤어졌던 바로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사부님은, 생각의 미로를 해매던 나를 깨워 수도원이라는 현실로 되돌아오게 한 셈이었다.
사부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예의 그 베난티오의 양피지를 들고 있었다. 기어이 그 양피지의 암호문을 해독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사부님은 혹 우리 주위에 경솔한 귀가 있을까 염려스러웠던지 나를 당신의 독거로 데리고 가서는 당신 손으로 해독한 암호문을 번역해 주었다. 12궁도의 기호로 짜여진, <세크레툼 피니스 아프리카에 마누스 수프라이돌룸 프리뭄 에트 셉티뭄 데 쿠아투오르>, 즉 <아프리카의 ?P의 비밀은 우상 위의 손길을 통해 넷의 첫째와 일곱 번째에 작용한다>로 시작되는 암호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무서운 독이기는 하나 이 독에는 정화 작용의 효능이 있다...
원수를 궤멸시키는 데는 최상의 무기...
비천하고 가난한 천민을 쓰되 이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남을 즐겁게 한다... 약점을 이용하되 죽게해서는 안 된다... 귀족이나 권력자의 저택이 아닌, 농민들이 사는 마을에서... 주지 육림이 파한 자리에서... 땅딸막한 광대, 일그러진 얼굴.
처녀를 능욕하고 창부와 잠자리에 들지만 악의가 없고 두려워할 줄도 모른다.
다른 진리, 혹은 진리의 다른 모습...
점잖은 무화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돌이 광야를 구른다... 눈앞에서.
사기란 필요한 것이다. 짐짓 사람을 놀라게 하거나, 일반의 믿음과 정반대 되는 말을 하거나, 저 뜻으로 이 말을 하는 것은.
거기에서는 매미도 땅 밑에서 울 수 있다.
이것이 전문이었다. 그러나 전문이나마나 내가 보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미친 사람의 헛소리에 다를 바 없었다. 사부님에게도 내 느낌을 고백했다. 사부님도 내 말을 그르다고 하지 않았다.
'딴은 그렇기도 하다. 번역해 놓고 보니 더하구나. 내 그리스어 실력이 그렇게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면 마음이 좀 놓이겠느냐? 허나 베난티오나 그 서책의 저자가 미친 사람이었다고 해도, 그 서책을 숨겼다가 다시 찾느라고 온갖 고생을 다 한 사람들 모두가 미쳤다고 할 수는 없다.'
'여기에 씌어진 글귀가, 그 수수께끼의 서책에서 나온 것은 분명한지요?'
'베난티오가 베껴 쓴 것임에 분명하다. 너도 보면 알 것이다. 이것은 옛날의 양피지가 아니라 요즘에 만들어진 양피지이다. 따라서 베난티오가 그 서책을 읽으면서 요약해 둔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베난티오가 그리스 어로 섰을 리가 없다. 틀림없이 <피니스 아프리카에>, 즉 <아프리카의 끝>이라는 이름의 서실에서 훔친 서책의 문장을 때로는 압축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그대로 옮겨 적은 것임에 분명해. 베난티오는 이 서책을 문서 사자실로 가지고 가 필요한 걸 요약하면서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서... 말하자면 골치가 아파졌다거나,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거나 해서... 다음날 아침에 다시 읽어 볼 요량으로 서책과 양피지를 서안 밑에다 넣었을 것이다. 하여튼 문제의 서책이 지니는 성격을 재구성할 단서는 이 양피지의 암호문뿐이다. 어떤 물건을 손에 넣을 목적으로 저지른 범죄 사건의 경우, 그 물건의 성격이 범행의 성격, 범인의 성격을 알아내는 단서가 될 수 있는 법이다. 한 덩어리의 황금 때문에 저질러진 살인 사건이 있다면 그 범인은 탐욕스러운 자일 가능성이 크지 않겠느냐. 마찬가지로, 서책으로 인해 살인 사건이 생긴다면, 범인은 그 서책의 비밀을 몹시 궁금해 하는 자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선 우리 손에 없는 그 서책의 내용을 추정하는 것이야.'
'여기에 있는 몇 줄로 어떻게 그 서책의 내용을 추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드소, 잘 보아라. 무슨 경전의 글귀 같지 않으냐? 경전의 글귀는 자구밖에 있는 법이어서 하는 소리야. 레미지오와 헤어진 다음 나는 이 글을 읽다 말고 크게 놀랐구나. 여기에도 천민, 즉 범인과 농부에 관한 언급이 있지 않으냐? 범인과 농부도, 현자의 진리와는 다른 진리를 알고 있는 범인과 농부... 레미지오는 말라키아와 자기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듯이 말하더구나. 말라키아가, 레미지오의 손에서 넘어온 이단적인 불온 문서를 숨겼을까? 그렇다면 베난티오가 이것을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어서 읽어 보고, 세상 만사와 세상 사람들의 진리와는 상관없는, 천민사회의 진리에 관한 내용을 옮겨 적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저에게는 여전히 어렵습니다만...'
'...그렇지만 내 가설에는 두 가지 약점이 있다. 말하자면 두 가지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베난티오는 그런 문제에 별로 관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베난티오는 그리스 어 문서 번역자이지 이단적인 목회와는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의 가설로는 글귀에 <무화과>, <돌>, <매미> 같은 낱말이 들어 있는 까닭을 설명해 낼 수 없다.'
'혹 다른 뜻이 있는 수수께끼가 아닐가 합니다만, 사부님께서는 다른 가설도 세우셨을 것이 아닙니까?'
'세우기는 했다만 그게 아직 선명하지가 못하다. 이 양피지를 읽고 보니, 이와 비슷한 글귀, 아니면 바로 이 글귀를 언제 어디에선가 읽은 것 같기도 하더라. 어쩐지 이 글귀가, 지난날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다른 서책을 읽든지 하면서...'
'다른 서책을 읽으시다니요? 다른 서책이 사부님께 도움을 드릴 수가 있습니까?'
'그래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책들은 종종 다른 책들에 대해 말하지. 간혹 무해한 책은 위험한 책에서 꽃을 피우는 씨앗과 같거나 그 반대라고. 독초 대궁이에 단 열매가 열리는 격이라고나 할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책을 읽어도 토마스 아퀴나스가 뭐라고 했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 토마스 아퀴나스를 읽으면 아베로에서가 뭐라고 했는지도 알 수 있고...'
'과연 그러하겠습니다.'
나는 속으로는 적지 않게 놀랐다. 그때까지 내각 안 바로,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든 하느님이든, 책 바깥에 놓여 있는 것들만 다루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사부님 말씀에 따르면, 서책이라는 것은 서책 자체의 내용도 다루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서책끼리 대화를 주고 받는다는 것을 나는 사부님 말씀을 듣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문득 장서관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면 장서관이란, 수세기에 걸쳐 서책끼리의 음울한 속삭임이 계속되는 곳,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는 정복되지 않는, 살아 있는 막강한 권력자, 만든 자, 옮겨 쓴 자가 죽어도 고스란히 살아 남을 무한한 비밀의 보고인 셈이었다.
'사부님, 드러나 있는 서책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서책에 이를 수 있을 바에, 어째서 굳이 그 드러나지 않은 서책을 찾으려 하시는지요?'
'몇 세기가 지나면 아무 소용도 없게 되는 게 서책이다. 어느 해, 어느 날에 있어야 요긴하게 쓰인다는 게야. 그래, 이렇게 말하지만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장서관이라고 하는 게, 진실을 교란시키지 못하도록, 다른 진실을 가두어 놓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까?'
'꼭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렇다고 밖에는 할 수 없구나...'
사부님은 이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무셨다.
6시과
베난티오의 양피지 암호를 해독한 이후로 사부님은 활동을 중단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앞에서 이미, 사부님에게 이따금식 완전한 무위에 빠질 때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사부님이 이렇게 무위에 빠질 때면 별들도 그 운행을 멈추는 것 같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부님이 별들과 함게하고 별들이 사부님과 함게하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날 아침의 사부님이 그러했다. 사부님은 짚자리 위에 반듯이 누운 채 가슴에다 두 손을 포개고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씩 입술을 움직이기는 했다. 기도문이라도 음송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기도문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마음 내키는 대로 종착없이 시작했다가는 마음 내키는 대로 끝내 버리는 것으로 보아 설사 기도문을 음송했더라도 도무지 신심이라고는 깃들어 있지 않은 기도문 음송이었을 터였다.
나는 일단 사부님이 명상에 잠긴 것으로 보고 그 명상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뜰로 나왔다. 어쩐지 햇빛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맑고 밝던 아침이, 하루의 반을 채 넘기지 못하고 그만 풀이 푹 죽어 버린 형국이었다. 짙은 구름이 북쪽에서 산꼭대기로 쳐들어와 정상을 가볍게 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산기슭에서는 안개가 오르고 있었는데, 발 밑에서 안개가 솟아오르는 광경은 산문경험이 적은 나에게는 생소해 보였다. 수도원이 위치한 지대의 고도가 높아서 그렇겠지만 나에게는, 위에서 내리는 구름과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안개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먼 곳의 집들은 그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세베리노가 부산하게 돼지치기들을 지휘하면서 돼지 모으는 게 보였다. 세베리노는 신바람이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돼지 모으는 까닭을 묻는 나에게, 기슭의 골짜기로 내려가 송로버섯을 캘 작정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세베리노는 송로버섯이 이탈리아 반도에서만 나는 귀물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송로버섯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고위 수도자들이 특히 즐기는 고급 식품으로 노르치아 지방에서는 검은 송로버섯, 그리고 우리가 몸붙이고 있던 그 수도원 인근 지역에서는 검은 것보다 더 향기로운 흰 송로버섯이 난다. 세베리노는 이어서, 송로버섯이 무엇인지, 어떻게 조리해야 귀한 요리가 되는지도 설명해 주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송로버섯은 여느 버섯과는 달리 땅속에서 자라기 때문에 찾아내기가 몹시 어렵다. 재미있는 것은, 송로버섯의 냄새를 맡고, 흙을 파고 버섯을 캐닐 수 있는 동물은 돼지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돼지는 송로버섯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캐내는 즉시 그 자리에서 먹어 버리기 때문에, 돼지를 따라가다가 송로버섯 냄새를 맡은 기미가 있으면 서둘러 돼지를 쫓아 버리고 손수 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후일에 나는 많은 귀족들이 족보 있는 사냥개 대신 돼지를 앞세운 채 괭이 든 하인을 거느리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때 세베리노로부터 송로버섯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심히 괴이하게 생각했을 터이다. 한번은, 내가 이탈리아 반도를 여행하고 온 것을 안 조국의 어떤 귀족이, 이탈리아에서는 귀족들이 손수 돼지몰이를 한다는데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아하, 송로버섯 캐러 다니는걸 본 적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웃은 적도 있다. 나는 그 귀족들이 땅속에 있는 <타르투포>(송로버섯)를 캐 먹으러 다닌다고 설명하려다가 우리 게르만 어로 <데어 토이펠>(악마)을 캐 먹으러 다닌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귀족은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얼굴을 하고는 성호를 그었다. 그의 표정은 <맙소사, 악마를 캐 먹으러 다니다니...>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 <송로버섯>과 <악마>사이의 오해를 풀고 박장 대소하기는 했지만 말이라고 하는 것은 참 묘한 것이다. 듣기에 띠라 이 말이 저 말 되고 저 말이 이 말 될 수 있는 것이니까...
세베리노의 설명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는 그를 따라 송로버섯을 캐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따라 나서기로 작정한 데엔 까닭이 있다. 물론 송로버섯이라는 것을 한번 구경하고 싶다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실은 세베리노가 버섯 캐기 놀음으로 수도원 전체의 분위기를 일전시키려고 그러는 것 같아서, 말하자면 세베리노를 도와 그의 마음의 짐도 덜어 주고 수도원 전체의 분위기도 좀 바꾸는 데 일조를 하고자 그를 따라나섰던 것이었다. 나는 세베리노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내 기분만은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다,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항상 그리고 오로지 진실만을 쓰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고백하거니와 내가 세베리노를 따라 나서기로 작정한 가닭은 다른 데 있다. 골짜기로 내려가면 혹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희망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 독자들에게 떳떳이 밝히고 싶은 것도 있다. 그날은 마침 황제측 사절과 교황측 사절이 수도원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날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내가 골짜기로 내려가려 했던 복잡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일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산의 사면을 내려감에 따라 시계가 넓어져 갔다. 하늘에 구름이 덮여 있었지만 해를 완전히 가린 것은 아니었다. 우리 머리 위로는 안개가 끼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물은 산 위에서보다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수도원에서 한동안 내려갔을 때 나는 눈을 들어 수도원 쪽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여야 할 산꼭대기와 수도원과 고원 언저리는 안개일 수도 있고 구름일 수도 있는 것에 가려 시계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수도원으로 올라오던 날에는 산을 꽤 올라왔는데도 십여 마일이나 떨어진 바다까지 보였다. 한동안 산을 오르다 보면 아름다운 만으로 내리깎인 까마득한 노대 위로 올라서게 되는가 하면, 얼마 뒤에는 먼 해변으로 펼쳐지면서 높이를 다투어 자랑하던 산들을 가리면서 산협이 문득 앞을 가로막기도 했다. 따라서 그날의 짧은 여행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산협은 어찌나 험하고 가파른지 햇빛도 그 사이로는 비집고 들어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뒤로도 이탈리아 북부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그렇게 비좁은 산협, 그렇게 갑작스럽게 상봉하는 바다와 산, 그렇게 고산 풍광의 꼬리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해변은 본 적이 없다. 협곡 사이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불어오는 바람을 맞노라면, 바다 냄새와, 산봉우리를 휘돌아 내려온 돌풍의 냉기를 동시에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버섯 캐러 간 날은 주위가 온통 잿빛, 아니 우윳빛이어서 산협이 해변으로 활짝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수평선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독자들이여, 내 마음을 조급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어서 버섯 이야기는 내 기억에나 묻어두기로 하겠다. 따라서 <악마>를 찾아 산을 오르내리던 이야기 대신 프란체스코 회 사절단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나는 프란체스코 회, 혹은 소형제회 사절단이 올라오는 걸 보고는 바로 수도원으로 되짚어 올라가 사부님에게 보고했다.
사부님은, 사절단에 속하는 수도사들이 수도원 경내로 들어와 의전 절차에 따라 수도원장의 영접을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 영접 행사가 끝나자 사부님은 사절단원들에게 가까이 갔다. 인사와 포옹이 어지럽게 오갔다.
식사 시간은 지난 지 오래였으나 식당에는 빈객을 위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때아닌 식사를 금하는 우리 베네딕트회 회칙 때문에 혹 빈객들이 무안해 할까봐 그랬는지 원장은 식당 주위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사절단 수도사들은 윌리엄 수도사를 둘러싸고 자유롭게 먹고 마시면서 그간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런 말이 어찌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만, 내가 보기에는 정담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교황측 사절단의 도착을 앞두고 장군들이 대책을 의논하는 무슨 작전 회의 분위기였다.
곧 우베르티노가 빈객들과 합류했다. 우베르티노에게 각별하게 안부를 묻는 빈객들은 하나같이 우베르티노를 존경했고 그래서 그와의 재회를 몹시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우베르티노가 오랫동안 종적을 감추고 있었고, 그의 잠적을 둘러싸고 소문이 무성했으니, 수십 년 간이나 용감 무쌍하게 싸워 왔을 터인 전우들로서는 무리도 아니었다.
사절단 구성원들의 면면은, 정식 회의가 열릴 때 자세하게 소개하기로 하고, 우선 그날 오후에 전격적으로 열린 사부님, 우베르티노, 그리고 사절단장이라고 할 수 있는 체제나 사람 미켈레의 3자 회담(실제로는 3자 회담이 아니었지만, 다른 사절단원들은 거의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이야기부터 하고자 한다.
체제나 사람 미켈레는 참으로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열렬한 프란체스코 성인의 추종자인가 하면(우베르티노만 그런 줄알았는데 그의 말투나 태도에서도 일종의 신비스러운 격정 같은 것이 묻어났다.). 극히 인간적인 로마냐 사람답게 호쾌한 데도 있었다. 말하자면, 열광적인 프란체스코주의자인 반면에 잘 차려진 식탁을 즐길 줄도 알고, 친구들과 행복을 나눌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단 권력 구조 내부의 인간 관계에서는 치밀하고 교활해서 가히 영리하기가 여우 같고 음흉하기가 두더지 같다고 할 만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내가 본 그는 호탕하게 웃을 줄도 알았고, 팽팽한 긴장도 여상스럽게 견딜 줄도 알았으며, 침묵으로써 웅변 못지않게 사람을 설득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상대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시선을 돌려버림으로써 그 질문 자체를 무시하면서도 질문자를 무안하지 않게 하는 재주도 있었다.
앞에서도 체제나의 미켈레 이야기를 조금 한 바 있다. 물론 남들에게서 전설처럼 들었던 이야기들이다. 나에게 미켈레 이야기를 한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는 미켈레를 한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도 역시 들은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 준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미켈레 수도사를 목전에서 친견하면서 수많은 동도의 도반들과 추종자들을 당혹케 했던, 그의 모순된 태도와 정략적인 변신의 과정과 까닭을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곧 소형제 수도회의 총회장인 그는 원칙적으로는 성 프란체스코의 적법한 후계자인 동시에 실제로 으뜸가는 성프란체스코 해석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는 바뇨레지오 사람 보나벤투라 같은 전임자와도 성성과 지혜를 겨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안으로는 회칙을 확립해야 했고, 밖으로는 교단의 재정을 반석 위에 올려 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귀족들과 행정관들을 상대로 정치적 협상을 벌임으로써 교단이 찬밥 신세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기 때문에, 비록 헌금이라는 명목이 붙기는 했어도 그들로부터 교단 발전의 재원이 될 회사금과 유산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소형제 수도회의 한 종파인, 열렬하고 따라서 과격한 엄격주의파 수도사들도 그 자신이 다독거려야 했다. 당시의 엄격주의파 수도사들은 약간은 이단의 소지가 있는 소형제파의 참회 강요에 못 이겨, 미켈레가 총회장으로 있는 정통파 교단을 떠나 이단자 무리에 가담하는 일 또한 비일비재했으니 총회장으로서는 검은 머리가 모시 바구니 될 지경이었을 터였다. 그는 또 황제의 미움을 살 처지도 아니었고, 교황의 심사를 건드릴 형편도 아니었으며, 날로 과격해지는 소형제파와 엄격주의파를 나몰라라 할 계제도 아닌 판에 성 프란체스코까지 기쁘게 해야 했다. 성프란체스코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프란체스코 회 신도들이 땅에서 올려다보았을 터이니 그의 자리가 몹시 고단한 자리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렇게 어려운 자리에서 모나지 않게 처신해야 했던 미켈레는 교황 요한이 프란체스코 회의 엄격주의파를 이단으로 몰았을 때, 회칙에 묶이지 않으려고 날뛰는 프로방스의 수도사 다섯을 교황의 손에 붙이는 것도 마다할 수 없었다. 교황은 이 다섯 수도사들을 화형주에 매달았다. 그러나 교단의 많은 성직자들이, 복음주의적 청빈 사상에 경도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이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우베르티노였다) 미켈레는 4년 뒤에 페루지아에서 열린 총회에서는 화형을 당한 다섯 수도사를 복권시키는 한편, 이단으로 흐를 수 있는 교단의 내적 요구와 교단 자체의 회칙 및 원칙을 화해하게 하고 교단의 요구와 교황의 요구와도 조화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재가가 없는 경우 미켈레는 교단의 살림을 꾸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바로 이 대문에 미켈레는 교황의 미움을 살 수도 없는 형편이었고, 교황을 용인하지 않으려고 날뛰는 교단 내의 분위기 때문에 황제 및 황실 신학자의 미움을 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우리와 그 수도원에서 만나기 2년 전만 하더라도 리용의 프란체스코 회 총회장 자리에 앉아 교황만이 온당하다고 가르치던 그가 아니던가? 그것도 교황이 프란체스코 회를 두고 <우는 소리와 실책과 독신만 아는 무리>라고 하고 나서 겨우 몇 달 뒤의 일이 아니던가? 그러던 그가 불과 2년 뒤에는 교황을 전혀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 말하자면 우베르티노 같은 투사, 사부님 같은 황제측 총신과 정답게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
교황 요한 22세가 미켈레를 아비뇽으로 부르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는 앞에서도 한 바 있다. 미켈레 자신은 회담의 참석을 바랐던 것도, 바라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 다음날에 열릴 회담의 목적은, 그러니까 미켈레가 아비뇽으로 가되 여행의 안전을 공식적으로 보장할 것과, 미켈레에 대한 교황의 복종 강요 및 반역의 문죄와 관련된 문제를 타협하는 데 있다. 내가 알기로 미켈레는 요한을, 적어도 교황으로서의 요한을 친견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수도회 내에서는 교황과 타협할 여지가 가장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미켈레와 동석한 옛 전우들은 미켈레 앞에서 성직 매매자로서의 교황의 초상에 먹칠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윌리엄 수도사가 먼저 미켈레에게 못을 박았다.
'총회장인 당신이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교황의 서원은 절대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오. 왜냐? 앞장서서 신성을 모독하고 있는 자의 서원이기 때문이오.'
우베르티노도 거들었다.
'그자가 교황 자리에 오를 때 일은 천하가 다 알지.'
'그게 어디 선거랍디까? 협잡이지...'
식탁에 동석하고 있던 한 노수도사가 고함을 질렀다. 나중에 알았지만 고함을 지른 장본인은 뉴캐슬 사람 휴 수도사였다. 고향이 비슷해서 그랬는지 억양이 사부님 억양과 비슷했다. 그가 음식을 삼키고 나서 말을 이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클레멘스 5세의 죽음과 관련된 문제가 투명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투명하지 못한 것이 어찌 이뿐입니가? 클레멘스 5세가 전임 교황인 보니파티우스 8세의 사적을 탄핵하겠다고 공언했다는데, 이게 확인된 겁니까? 여러분은 클레멘스 5세가 전임 교황을 부정하지 않으려고 애쓴 것을 알지 않습니까? 국왕이 사면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클레멘스 5세는 전임 교황을 매도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신 분입니다. 이분이 카르판트라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는 분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사실로 분명해지는 것은 교황을 선출하고자 추기경들이 카르판트라에 모였다는 것뿐입니다. 교황은 선출되지도 않았지요. 추기경들이 무엇을 했답니까? 교황청이 로마에 있어야 하느냐, 아비뇽으로 가야 하느냐, 이걸 놓고 갑론을박한 것이 고작 아닙니까? 저는 당시에 있었던 일을 잘 모릅니다만 귓구멍으로 듣기로는 대학살이 있었다더군요. 승하한 교황의 조카가 추기경들을 위협하고 추기경들이 데리고 온 종자를 죽이고 이들의 숙소에 불을 놓았더랍니다. 추기경들이 프랑스 왕에게 이를 탄원하자, 왕은 교황이 로마를 버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서 추기경들의 인내와 현명한 선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지요... 이어서 공정왕 필립이 승하하셨지요. 그의 사인 역시 하느님이나 아십니다.'
'어쩌면 악마가 알지도 모르지.'
우베르티노가 성호를 그으며 중얼거리자 모두가 함께 성호를 그었다.
뉴캐슬 사람 휴 수도사가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악마라면 알겠군요... 아무튼 다음 국왕이 대를 이으나 이 양반 역시 재임 열여덟 달만에 또 세상을 뜹니다. 그 다음 후계자가 등극하나 또 며칠만에 덜컥... 급기야는 섭정하던 왕제가 왕위를 찬탈, 대통을 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미켈레가 덧붙여 설명했다.
'그 양반이 바로 필립 5세 아닙니까? 뿌와띠에 백작 시절에 카르판트라에서 허겁지겁 도망치던 추기경들의 앞을 막고 선 장본인이지요.'
뉴캐슬 사람이 미켈레의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이 양반은 추기경들을 다시 리용에 있던 도미티크 회 수도원에다 몰아넣고 교황을 선출하라고 윽박지르되, 외부를 향해서는 자기는 추기경들을 보호하자는 것이지 볼모로 잡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어디 그랬던 가요? 추기경들이 손아귀 안으로 들어오자 이 양반은, 나중에는 관례가 됩니다만, 추기경들을 <감금>하고 교황이 선출되기까지 매일 음식의 양을 줄입니다. 추기경들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지요. 백작은 추기경들을 한 사람씩 불러 자기가 왕위에 오를 때는 응분의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실제로 백작은 왕위에 오르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한 두어 해 동안 그곳에서 먹을 것 제대로 못 얻어먹으며 살아야 할까봐 잔뜩 겁을 집어먹은 추기경들은 거기에서 필립 왕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말하자면 칠십 객인 땅 귀신을 베드로의 자리에다 앉힌 겁니다.'
'땅 귀신이라는 말 잘 하셨군. 꼴은 폐병 환자 같지만 힘쓰기 피쓰기는 상상을 앞지른대요.'
우베르티노가 웃으면서 응수했다.
'신기료 장수 아들이었다면서요?'
좌중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자 우베르티노가 그를 나무랐다.
'에끼, 그런 말 마오. 그리스도는 목수 아들이었고. 허나 신기료 장수 아들이었다는 건 사실이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나 공부는 많이 한 사람이랍니다. 몽펠리에에서는 법률을 공부했고 빠리에서는 의학을 공부했다니까... 이렇게 공부하다가 기회는 오는 듯 싶자 주교 자리, 추기경 모자를 하루라도 먼저 얻으려고 사람도 골라서 사귀게 됩니다. 나폴리에서 현명왕을 자문할 때에는 그 특유의 혜안으로 사람들을 적잖게 놀라게 하기도 했던 모양이에요. 아비뇽 주교 시절에는 공정왕 필립을 적절하게 자문하여 성당 기사단을 해산하게 하기도 합니다. 내가 굳이 <적절하게> 자문했다고 하는 것은, 당시 성당 기사단의 작폐가 적지 않았기에 하는 소리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양반은 교황에 선임된 직후에,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추기경단의 음모를 분쇄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내가 정말 하려는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랍니다. 나는 이 양반에게만 있는 독특한 능력을 하나 소개하려는 참이에요. 이 양반에게는, 맹세를 깨뜨리고도 남들의 비난을 피하는 묘한 능력이 있어요. 교황에 피선되기 직전에 이 양반은 오르시니 추기경에게 교황청을 로마로 옮겨 가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피선된 뒤에는, 교황이라는 성별된 자리를 두고 맹세하거니와, 자기가 만일에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평생 말이나 노새는 타지 않겠다고 또 한번 맹세합니다. 이 여우 같은 자가 그 뒤로 어떻게 했는지 아시오? 이자는 리용에서 대관함으로써, 아비뇽에서 대관하기를 바라던 왕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만, 이리용에서 아비뇽까지 어떻게 갔는지 아시오? 배를 타고 갔답니다.'
좌중의 노수도사들이 모두 웃었다. 교황이 비록 위서의 허물을 짓기는 해도 그에게 순진한 구석은 있었던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윌리엄 수도사가 내뱉듯이 말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군. 휴가 그러지 않습디까? 요한은 제 검은 뱃속을 구태여 감출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이라고. 우베르티노, 당신이 한 말이지요? 요한이 아비뇽에 도착한 즉시 오르시니 추기경에게 뭐라고 했다지요?'
'암, 내가 했지.'
우베르티노가 좌중을 일별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때 교황 요한이 한 말이 걸작이야. 프랑스 하늘이 그렇듯 아름다운데 자기가 왜 꼭 프랑스를 떠나야 하느냐, 프랑스에도 로마처럼 유적이 참 많은데 왜 자기가 떠나야 하느냐는 거예요. 베드로에게 그랬듯이,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게는 문제를 결지해지하는 권한이 있는 것 아닙니까? 요한은 이 권한을 한번 써본 거지요. 결국 이 늙은이는 프랑스에 눌러앉기로 하지요.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살기가 편해서 그랬던 거랍니다. 오르시니 추기경이, 교황은 마땅히 바티칸 언덕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고 토를 달고 나서자 교황은 오르시니에게 교황에 대한 추기경의 복종의 의무 운운하면서 입을 막아 버리더랍니다. 그럼 그 늙은이가 했던 맹세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하시겠지요. 아, 교황청을 버티칸으로 옮기지 않고 프랑스에 눌러 살려면 평생 말이나 노새를 안 타면 그만 아니요? 리용에서 배를 타고 아비뇽에 닿을 경우 내려서 교황은 백마를 타고 앞장서고, 추기경들은 흑마를 타고 뒤따르는 게 관례 아닙니까? 하지만, 요한은 맹세를 지킨답시고 주교관까지 걸어갑니다. 애꿎은 추기경들만 발이 부르트게 걸은 것이지요. 그 뒤로도 교황이 말 탔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자, 미켈레, 그대가 상대해야 하는 위인이 바로 이런 위인이니 알아서 할 일이오.'
미켈레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좌중의 관심이 자기에게 쏠려 있는 것을 의식했는지 천천히 대꾸했다.
'나는 교황이 아비뇽에 남아 있으려 하는 걸 이해합니다. 따라서 이것만은 비난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교황도, 예수님도 청빈을 좇았고, 청빈의 본을 보였다는 해석은 비난하지 못할 겁니다.'
가민히 듣고 있던 위리엄 수도사가 일갈했다.
'이켈레, 순진한 소리 맙시다. 당신의 희망, 우리의 희망이 성취될까봐 이자는 죽자고 아비뇽에 죽치고 있겠다는 겁니다. 눈을 크게 뜨세요. 고래로 교황의 위에 오른 사람 중에 이만큼 탐욕스러운 사람은 없었어요. 우리 우베르티노의 입에 걸리면 단칼에 난자당하는 바빌론의 창부들, 단테알리기에리라고 하는 당신 나라 시인의 시에 오르내리는 끝없이 부패한 교황도 이 요한에 견주면 순한 양들입니다. 요한이야말로 도둑까치이자 유태인 고리 대금업자예요. 아비뇽이 피렌체보다는 번성한 도시이니까, 물렁한 사람들 주머니 털기에는 피렌체보다 아비뇽이 나은 겁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자와, 클레멘스 교황의 조카되는 베르뜨랑 드 고뜨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어요. 베르뜨랑 드 고뜨가 누구던가요? 카르판트라 사건의 피의자 아닙니까? 추기경들이 그 사건 임시에 수중의 보석을 몽땅 빼앗긴 일 알고들 있어요? 베르뜨랑 드 고뜨는 제 숙부의 재물에도 손을 대는데 요한은 이걸 수수방관 하더랍니다. 요한은, 클레멘스의 재물이라면 금은전, 금은기, 서책, 융단. 귀금속, 장신구 등 하나도 빼지 않고 목록까지 작성해 둔 참이어서 손금 보듯이 훤히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었으니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을 테지요. 카르판트라 사건 당시 베르뜨랑 드 고뜨는 자그만치 금화 15만 피오리노를 가로채지만 요한은 이것을 모르는 척하고 대신 베르뜨랑이 그 숙부로부터 <성무 자금>, 즉 십자군 자금으로 받은 3만 피오리노만 문제 삼았답니다. 베르뜨랑과 요한 사이에는 일찍부터 십자군 자금을 반반으로 나눈다는 묵계가 있었다던가, 어쨌다던가, 그런데 요한이 그걸 문제삼고 나선 것은, 베르뜨랑은 십자군 원정에 나선 바 없고, 요한은 땡전 한 닢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이랍니다.'
'금전 문제에 칠칠치 못하다는 거 아닙니까?'
미켈레가 돌 씹은 얼굴을 하고 물었다. 미켈레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베르티노가 대답했다.
'돈 문제에 칠칠치 못한 이력이라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지. 여기에 있는 여러 도반들은, 당장 내일부터 우리가 대적하게 될 장사꾼들이 어떤 것들인지 그 속성을 알고라도 있어야 합니다. 베르뜨랑에게 당했다고는 하나 요한은 이재에 도가 튼 사람이에요. 뭐든 이지가 손을 대면 금 덩어리로 변해 아비뇽의 금고로 들어가니 미다스 왕이 따로 없지요. 내 언제 이자의 방에 가보았더니, 아니 글쎄, 고리 대금업자, 환전상이 들락거리고, 책상에는 금전이 수북이 쌓여 있습디다. 서기들은 이 금전을 세어 차곡차곡 쌓고 있었고요... 곧 보게 될 테지만 이자가 지은 궁전은, 비잔티움 황궁이나 타타르의 한궁은 유가 못됩니다. 이자가 청빈의 이상을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도미니크 회를 감싸고도는 까닭을 아시오? 이자가 우리 수도회 수도사들을 모두 몰아내고 그리스도상 만든 걸 아시오? 금빛 용포 차림에 호화로운 발에는 신발을 신고 머리에는 왕관을 쓰신 그리스도상을 말이오. 아비뇽에 가면, 한 손은 십자가에 못박혀 있고, 한 손은 허리에 찬 지갑에 손을 대고 있는 그리스도상을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돈이 좋은 목적에 쓰여져야 하는 걸 상징한다나... 기가 막혀서...'
'그거야말로 독신 아닙니까?'
미켈레가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우베르티노, 그렇다면 결국 그자는 스스로 교황을 3관왕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요?'
윌리엄 수도사의 말에 우베르티노가 대답했다.
'암. 11세기 벽두에 교황 일데브란도가 <하느님의 손이 내리신 천국의 왕관>을 하나 씌우더니, 파렴치한 보니파티우스가 근년에 관을 하나 더 만들고는 그 관을 <베드로의 손에 의한 지배의 왕관>라고 썼네. 그런데 드디어 요한이 나서서, 영적인 권능, 세속적 권능, 그리고 천상적 권능... 이렇게 박자가 척척 맞는 관을 하나 더 만듦으로써 3관왕의 상징을 완성한 것이네. 이교도의 두목의 상징인, 페르샤 왕이나 지닐 법한 부귀 영화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때까지 한마디도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노수도사가 한 분 있었다. 그는 수도원장이 마련해 준 기름진 음식을 우겨 넣느라고 딴 정신이 없어 보였다. 멍한 눈으로, 어지럽게 오가는 가시 돋친 대화를 좇으며 교황에 대한 비난이 쏟아질 때마다 이따금씩 냉소하거나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치근이 시원찮은 입가로 흘러내리는 고깃국물이나 고기 조각을 닦아 내기에 바빴다. 딱 한번 옆자리에 있던 수도사에게 말을 건 적이 있기는 했으나, 그건 음식 이야기였다. 나는 뒷날에 가서야 그 양반이 바로 카파의 주교 제롤라모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틀 전에 우베르티노로부터 그 양반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 두어야겠다. 카파의 제롤라모 주교가 2년 전에 죽었다는 소문은 당시 기독교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 나 역시 그 소문을 들은 바 있고 우베르티노르부터 확인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전에 죽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그 수도원의 모임이 있고 나서 몇 달 뒤에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지금도 그의 사인은 그 다음날의 모임에서의 노여움이었다고 믿는다. 몸이 허약한 데다 성미는 더없이 까다로운 노인이어서, 그 다음날, 쌓이고 쌓였던 분노가 폭발하는 바람에 그런 변을 당하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바로 그 제롤라모 주교가 느닷없이 대화에 끼여들어, 음식을 한입 넣은 채로 목청을 높였다.
'그 망나니가 <정죄를 받기 위한 거륵한 세금>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아시오? 이런 거라도 만들어야 돈을 짜낼 수 있을 것이 아니겠소? 성직자나 수녀가 동성과 육욕의 죄를 범하면... 이런 일이 있으니까 제도가 생긴 거 아니겠소... 면죄세로 금화 67리라와 12솔도를 내면 정죄를 받아요. 성직자가 수간의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금화 2백리라, 허나 상대가 암컷 아닌 경우에는 백 리라로 깎아 준다던가? 수녀가, 수녀원 안에서건 밖에서건, 한번에 하나씩이든 한꺼번에 여럿이든 사내에게 제 몸을 공여하고도 수녀원장이 되고 싶어한다면 금화 131리라 15솔도를 치러야 하고...'
우베르티노가 나무랐다.
'대강해 둬요. 제롤라모 주교! 내가 교황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건 당신도 아실 거외다면, 말이 그렇게 나오면 나 역시 교황을 변호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건 아비뇽에서 떠도는 중상 모략에서 더도 덜도 아니에요. 나는 그런 제도, 들어 본적도 없어요.'
'있다니까요. 나도 본 적은 없지만 있기는 있어요.'
제롤라모 주교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베르티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수도사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모두 제롤라모 주교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다는 눈치를 챌 수 있었다. 후일 사부님은 그를 일러 <멍청한 늙은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사부님이, 제롤라모 주교 때문에 중단된 대화를 잇기 위해 침묵을 깨뜨렸다.
'사실이건 아니건, 이런 소문이 아비뇽 교황청의 도덕적인 분위기를 말해 주고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사실이라면, 혹은 사실에 가깝다면, 빼앗는 자나 빼앗기는 자나, 저희들 있는 곳이 그리스도 대리자가 있는 교황청 옆이 아니라 장돌뱅이들이 들락거리는 시장 바닥인 줄 알 테지요. 요한이 교황의 자리에 올랐을 때 7만 피오리노이던 교황청 재산이 지금은 1천만 피오리노가 넘는다는 소문도 나다니고 있는 판국입니다.'
'그건 사실이네...'
우베르티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대답하고는 느닷없이 미켈레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미켈레, 여보게, 미켈레! 내 눈으로 아비뇽에서 본 이 남부끄러운 일들을 그대는 어쩔 텐가!'
미켈레가 돌 씹은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이것들 보세요. 우리 좀 솔직해지려고 애써 봅시다. 남의 말 할 때가 아닙니다. 다 아시지요? 우리에게도 지나친 데가 있다는 것, 다 아시지요? 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들이 무장하고 도미니크 회 수도원을 습격하여 그곳 수도사들에게 청빈의 교리를 강요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프로방스 사건 때 내가 교황에게 대들지 못한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그 양반과 담판이라도 해야 할 형편이에요. 나는 그 양반의 자존심을 능멸하지 않되, 우리 청빈을 능멸하지 말 것을 요구할 겁니다. 돈 이야기는 않습니다. 오로지 성경의 건강한 해석에 동의할 것만 요구할 겁니다. 내일 교황청 사절단의 대부분은 신학자들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요한처럼 탐욕스러운 자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요. 그들 중 귀밝은 자가 우리의 성경 해석을 지지한다면 교황도 더 이상은...'
미켈레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우베르티노가 대갈일성으로 치고 나왔다.
'교황이 어쩐다고? 이 사람, 교황이 신학에 얼마나 먹통인지 모르시는군. 이자는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모조리 제 손아귀에 넣고 싶어해. 이 땅에서 그자가 하는 짓을 보지 않았는가? 하늘에 관한 한... 하기야 그자가 제 생각을 공개적으로 나타낸 바 없으니 나도 자네에게 할말은 없네만, 주위의 아첨배들 귀를 몹쓸 소리로 꼬드겨 놓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네. 그자가 믿는 교리의 본질 자체를 바꾸어 놓을 만한 방책을 세우지 않으면 그자는 머지 않아 엉뚱한 계획을 세우고 우리의 강론권마저 박탈할 것이야!'
'엉뚱한 계획이라니, 그게 대체 뭡니까?'
좌중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베렝가리오에게 물어 봅시다. 이런 걸 나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 베렝가리오니까 모른다고는 않을 것이오.'
'우베르티노가 베렝가리오 탈로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렝가리오 탈로니는 과거 수년 동안 교황청 안의 가장 강력한 반교황 세력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아비뇽을 떠나 있던 그가 이틀 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다른 수도사들과 합류, 그 수도원으로 왔던 것이었다.베렝가리오 탈로니가 대답했다.
'말이 하도 말 같지 않아서 믿을 사람이 적을 것이오. 교황은 머지 않아, 최후의 심판이 있기까지 지복 직관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새로운 교리를 선포할 듯합니다. 한동안 교황은 <요한의 묵시록> 6장 9절을 고구한 모양인데, 내용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겝니다. 다섯 번째 봉인이 열리고, 제단 아래로 하느님 말씀을 증거하다가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나타나 하느님께, 얼마나 더 기다려야 땅 위에 있는 자들을 심판하고 자기네들이 흘린 피값을 갚아 주시겠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는 흰 두루마기를 한 벌씩 주시면서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교황은 이 구절을 최후의 심판이 있기가지 그들은 하느님을 친견할 수 없다는 대답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누가 교황에게 그런 소리를 했습니까?'
미켈레가 숨이 넘어가는 듯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
'측근들이 했을 테지요만 벌써 말이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오늘 내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몇 년 뒤에는 교황이 이를 공식적으로 선포할 거라고들 수군거립니다. 지금은 신학자들과 이 교리를 다듬고 있을 테지요.'
'어허!'
제롤라모 주교가 음식을 우물거리다 말고 탄식했다.
'뿐만 아닙니다. 교황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날이 오기까지는 지옥문도 열리지 않는다고 선포할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악마도 그때까지는 없는 것이지요.'
제롤라모 주교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음식 그릇을 물렸다.
'아이고 예수님, 저희를 도우소서! 악행을 일삼다가 죽으면 바로 지옥 간다는 위협도 못 하고서야 앞으로 죄인 대중을 무슨 수로 가르칠꼬!'
'이거야말로 미친놈 손에 멱살을 잡힌 형국이 아닌가... 그러나저러나 나는, 이자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우베르티노의 한숨 섞인 말에 제롤라모 주교가 투덜거렸다.
'속죄의 교리는 물거품이 된 겁니다. 이제는 그자 역시 면죄의 교리를 팔아먹을 수 없게 된 겁니다. 면죄의 교리가 물거품이 된 바에, 수간을 범한 성직자가 금화 바치러 올 턱도 없는 일... 벌을 받아도 한참 있다가 받는다지 않습니까?'
'한참 있다가 받는 게 아니오. 때가 익었어요.'
우베르티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롤라모 주교도 맞고함을 질렀다. 이제 음식 맛이 싹 달아났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이것 보세요, 우베르티노 형제. 형제야 아시지만 대중이 그걸 모른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아니오. 이거야말로 악마의 대가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고 뭡니까? 교황청 강사들이 그자의 머리에다 이걸 교리랍시고 집어 넣은 것이 분명한데... 이 일을 어쩔꼬.'
'강사들이 왜 그랬을까요?'
체제나 사람 미켈레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좌중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그의 질문에는 윌리엄 수도사가 대답했다.
'이유가 나변에 있겠어요? 자만심에서 생겨난 일종의 자기 시험의 방편일 테지요. 이자는 하늘과 땅을 두루 좌지우지하고 싶은 겁니다. 나는 그자의 속셈을 알아요. 언젠가는 우리도 교황, 교황청 신학자들 그리고 교황의 소리, 하느님 백성의 소리, 주교단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될 테지요.'
'교리에 관한 한, 교황은 신학자들을 자기 뜻 안으로 굽혀 넣을 수 있습니다.'
미켈라가 침울하게 말했다. 윌리엄 수도사가 말을 이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지금, 신학의 식자들이 겁없이 교황을 이단으로 몰 수 있는 시대에 삽니다. 신학의 식자들이야말로 하느님 백성의 대변자들입니다. 이제는 교황이라도 이들과 맞설 수 없을 겁니다.'
'아니에요. 설상가상이랍니다. 이쪽에서는 교황이, 저쪽에서는 비록 신학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러겠지만 하느님 백성이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 생길 텐데 이게 더 큰일 아닙니까?'
미켈레의 말이었다.
'왜요? 페루지아에서 당신네들은 안 그랬던가요?'
'내가 교황을 만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황이 절충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짓도 못합니다.'
미켈레의 반응은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두고 봅시다. 두고 보아요, 곧 알게 될 테니까.'
윌리엄 수도사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역시 사부님은 선견지명이 있으신 분이었다. 대체 사부님은 어떤 근거에서, 뒷날 미켈레가 황실의 신학자 및 민중의 지지를 업고 교황을 단죄하게 될 것을 예견했던 것일까? 사부님은 대체 어떻게, 4년 뒤에 교황 요한이 얼토당토않은 교리를 선포할 것이라는 사실과 이로 인해 기독교권이 혼란에 빠질 것을 예상했던 것일까? 지복직관이, 최후의 심판 때까지 연기된다면, 죽은 자가 어떻게 산 자를 위해 하느님께 탄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성인을 섬길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기독교권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 해괴한 교리선포 직후 교황 탄핵의 선봉에 선 것은 역시 소형제회 쪽이었고, 그 선봉장은 확고 부동한 이론으로 무장한 소형제회의, 오캄 사람 윌리엄이었다. 이러한 분쟁은, 죽음에 임박한 교황 요한이 교리 해석에 부분적인 수정을 가하기까지 3년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나는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334년 12월, 추기경 회의에 나타난 교황 요한의 모습을 묘사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여든다섯이라는 나이에 걸맞는 호호백발과 창백한 얼굴로 죽음을 기다리던 그는 이 회의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그 기록은 전하고 있다.(역시 그 늙은 여우는 해괴한 말장난으로 자기 서약을 끼뜨리지도, 자기 고집을 꺾지도 않을 만큼 교활했다.)
'나는, 육체를 떠나, 정죄함을 입은 영혼이 천사들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게 천상의 천국에 들어 하느님의 실재를 본다고 믿습니다.'
그리고는, 숨이 가빠서 그랬는지, 이 마지막 구절을 강조하고 싶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잠깐 뜸을 들이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육체를 떠난 영혼의 상태 및 조건이 허락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장의자에 앉은 채 추기경들의 문안 인사를 받고는 세상을 떠났다.
이런 또 이야기가 옆길로 새고 말았구나. 내가 후일담을 이렇게 하는 데에 까닭이 전혀 없지는 않으니, 굳이 말하자면 그날 식탁에서 오간 이야기는 앞에서 소개한 이상으로는 별로 진전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소형제 수도사들은 다음날을 기약하면서, 우선 교황청 사절들의 면면을 한 사람씩 거론, 대책을 숙의했다. 윌리엄 수도사가, 교황청 사절단에 베르나르 기가 들어 있다고 했을 때 좌중이 잠깐 술렁거리는 것 같았다.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 추기경이 아비뇽 교황청 사절단장이라는 윌리엄 수도사의 언명은 좌중에 파문을 일으켰다. 까닭은 분명했다. 베르나르 기와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추기경은 교황청 이단 심판관을 지낸 사람들이엇다. 사절단에 이단 심판관이 둘씩이나 들어 있다는 것은, 아비뇽 교황청이 그 회의를 기화로 소형제회의 이단 여부를 내사하려는 저의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혀를 차면서 말을 꺼냈다.
'이것을 두고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자들이 회의를 빙자하여 우리를 이단으로 몰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아니지요, 아니에요. 우리 쪽에서 그렇게 단정할 것은 없어요. 신중하게, 도달 가능한 합의점을 찾아봅시다.'
체제나 사람 미켈레는 여전히 우유부단해 보였다.
윌리엄 수도사는 미켈레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나도 이 만남의 성격을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았기에 하는 말입니다. 아비뇽의 주구들이 우리와 어떤 합의점에 도달하고자 이곳으로 오는 것 같아 보이지가 않아요. 미켈레, 당신을 아비뇽으로 불러 올리고 싶어하는 교황의 속은 당신도 헤아릴 테지요? 교황은, 당신 한 사람만을 부르고 있어요. 무엇을 어떻게 보장하겠다는 어떤 약속도 없이... 허나 이 모임이 그냥 무익하지는 않을 겁니다. 적어도, 아비뇽의 저의에 대한 당신의 이해가 지금보다는 훨씬 깊어질 테니까 말이지요. 이런 경험을 하기 전에 당신이 아비뇽으로 갔다면 글자 그대로 한 치 앞이 안 보였을 겁니다.'
'아니, 이 만남을 과소 평가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럼 윌리엄 형제 당신은 겨우 이 정도의 모임을 주선하느라고 몇 달 동안이나 이 고생을 한 것입니까?'
이맛살을 찌푸리고 미켈레는 다분히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윌리엄 수도사가 태연하게 응수했다.
'황제 폐하와 당신이 부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우리가 이 만남을 통해서 아비뇽의 주구들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이 만남은 무익한 만남만은 아닐 겝니다.'
윌리엄 수도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비뇽에서 교황청 사절단이 산문에 이르렀다는 전갈이 왔다. 소형제회 수도사들은 교황의 사절단을 맞으러 밖으로 나갔다.
9시과
한동안 서로서로 허교하던 사람들끼리, 혹은 비록 지인은 아니더라도 서로 소문을 통하여 이름을 익히고 있던 사람들이 수도원 안뜰에서, 겉으로는 다정해 보이는 인사를 어지러이 나누었다. 수도원장 옆에서 거들먹거리는 것으로 보아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 추기경은 시건방이 들어도 많이 든 사람처럼 보였다. 거들먹거리는 그의 거동은 영락없는 제2의 교황이었다. 이런 태도는, 소형제회 수도사들 대할 때 특히 역연하게 드러났다. 그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띤 채, 다음날의 회담이 좋은 결론을 얻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교황 요한 22세가 보내는 <평화>와 <선의>를 전한다고 말했다.(성프란체스코를 의식했기 때문인지 소형제회 수도사들에게는 특히 이 <평화>와 <선의>를 강조했다.)
'총명하게 생겼구나.'
사부님이 친절하게도 나를 서기 겸 시자라고 소개하자 추기경이 내게 한 말이었다. 그는 나에게, 볼로냐라는 도시를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안다고 하자, 그 도시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과 특히 그곳에 있는 대학 자랑을 늘어지게 한 다음, 교황의 속이나 썩이는 게르만 인들에게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아예 볼로냐에 눌러앉는 게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말까지 했다. 그러다가는 반지 낀 손을 내 얼굴 앞으로 내밀어 손등에 접구를 허락하고는, 예의 그 미소가 인심 좋은 얼굴을 다른 수도사들에게로 돌렸다.
사실 나의 관심을 끈 사람은, 수다스러운 추기경이 아니라, 당시에 부쩍 자주 인구에 회자되던 베르나르 기... 다른 나라에서는 <베르나르도 귀도니>, 흑은 <베르나르도 귀도>라고 불리던 프랑스 사람이었다.
베르나르 기는, 70대의 도미니크 회 수도사로, 키가 크고 깡말랐으되 허리가 곧은 사람이었다. 나는, 무표정해 보이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버리는 듯한 그의 잿빛 눈동자에 기가 꺾이고 말았다. 이따금씩 기이한 섬광을 내는 눈... 자기의 생각과 격정을 투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려 버리기도 하는 참으로 기이한 눈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서 특정인에게 마음을 열어 보인다거나 다정하게 군다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말하자면 꼭 필요한 만큼의 예의를 갖추되 반드시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오랜 지인 사이인 우베르티노 대하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그는 우베르티노에게 관심이 가지 않는 척하면서도 이따금씩은 보는 내가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눈길을 던지고는 했다. 체제나 사람 미켈레와 인사를 나눌 때는 묘하게 웃기까지 했지만 나는 그때 베르나르 기가 지은 미소를 여기에 묘사할 길이 없다. 인사를 건넨 그는 무덤덤한 말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짧지 않은 세월, 거기에서 기다리셨군요...'
반갑다는 뜻에서 하는 말인지, 비아냥거리는 말인지, 나무라는 말인지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미켈레의 낯빛이 고와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비아냥거림에 가까웠던 것 같았다.
이윽고 윌리엄 사부님과 베르나르 기가 만났다. 사부님을 소개받은 그는, 정중하되 분명히 적의가 실린 시선으로 사부님을 바라보았다. 적의가 실린 시선이라고 해서 베르나르기가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바람에 내심의 적의가 겉으로 드러난 것은 분명 아니었다. 나는 베르나르 기가 사부님에게 고의적으로 자기의 적의를 전하려 한다고 확신했다. 사부님 역시 이와 유사한 적의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말투는 지나치게 겸손했다.
'시생에게는 오랫동안 뵙고 싶었던 분이 한 분 있었소이다. 시생은 늘 그분으로부터 가르침의 음덕을 입고 있었지요. 중대무비한 인생의 갈림길에서도 시생은 그분의 훈도를 받았답니다.'
모르는 사람의 귀에는 찬사, 혹은 아첨으로까지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나르 기는 그 말을 새겨듣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사부님 인생의 중대무비한 갈림길이 무엇이었던가? 바로 이단 심판관 노릇을 계속할 것이냐, 그만둘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사부님은, <너 같은 것과 같은 이단 심판관 노릇은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사직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사부님의 말을 들으면서 끔찍한 광경을 상상했다. 여차해서 사부님이 지하 감옥에라도 들어가게 된다면 베르나르 기가 사부님을 그대로 두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칼자루를 쥔 사람은 사부님이 아니라 바로 베르나르 기였다. 나는 그런 베르나르 기 앞에서 가시 돋친 말을 태연하게 내뱉는 사부님이 염려스러웠다.
베르나르 기는 이미 수도원장으로부터 수도원의 연쇄 살인 사건을 보고 받았던 모양이었다. 베르나르 기는 역시 거물답게 사부님의 가시 돋친 비아냥거림을 귓전으로 흘리고 이렇게 말했다.
'원장의 요청도 있고, 우리를 여기에서 이렇게 만나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맡기신 임무도 있어서 어차피 불가피한 일이니, 나역시, 악마의 소행임에 분명한 이 수도원의 유감스러운 사건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보오. 내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다 지나간 일이기는 하나 당신 역시 내 가까운 곳에 있어 본 적이 있었으니, 선의 권능과 악의 권능이 맞서는 이 황막한 벌판에서 싸워 본적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오.'
'그렇습니다만, 어르신과 시생은 편이 달랐지요.'
윌리엄 수도사가 조용하게 응수했다.
베르나르 기는, 사부님의 주먹 앞으로 나설 정도로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부님의 주먹에서 비켜서면서 이렇게 물었다.
'어떻소? 혹 도움말이 될 만한 거라도 있소? 범죄 사건 해결에 단서가 될 만한 것 말이오.'
'안됐지만, 없습니다. 어르신과는 달리, 시생은 범죄 사건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요.'
사부님이 정중하게 대답하고는 돌아섰다.
이때부터 한동안 나는, 양 진영 사절 단원들의 행동 궤적을 노치고 말았다. 사부님은 미켈레, 우베르티노 등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서 사자실로 갔다. 그는 말라키아에게 무슨 서책의 열람을 부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 책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말라키아는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잠깐 사부님을 바라보았다. 말라키아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었던 모양인지, 그 서책은 장서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난티오의 서안에 있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사부님은 곧 베난티오의 서안 앞에 앉아 위에 있던 서책을 읽었다. 나는 사부님을 방해할 수 없어 곧 문서 사자실을 나왔다.
사절단의 움직임이 궁금했던 나머지 주방으로 내려가 보았다. 과연 베르나르 기는 주방에 있었다. 수도원의 길과 건물을 익히느라고 경내를 두루 다니다가 주방에 이르러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조리사와 불목하니들에게, 웬만큼 통할만한 그 지방 사투리로(북부 이탈리아에서 이단 심판관을 지낸 장본인이었다.) 여러 가지를 묻고 있었다. 수도원의 수확량, 업무 조직 등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묻되, 그저 캐묻는 것이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던지면서 이따금씩 예의 그 의중을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상대를 응시하면서 전혀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순진한 불목하니들은 말을 더듬거리고는 했다. 말하자면 그는, 일단 진실에 접근하기 전에 상대에게 겁부터 주는, 이단 심판관들의 상투 수법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심판관에게 일단 겁을 먹고 주눅이 든 사람은, 자기가 의심받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법인데 그 역시 그 수법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날 오후 내내 수도원 경내를 돌아다니며 교황청 사절단의 동태를 살피고자 했다. 다른 사절과 접촉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베르나르 기를 만나기는 어렵지 않았다. 베르나르 기는 이런 식으로 방앗간이나 교회 회랑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러나 수도사를 붙잡고 묻는 법은 없었다. 그의 심문 대상은 늘 불목하니 아니면 농부들이었다. 사부님의 조사 방법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만과
얼마 뒤 사부님이, 밝은 표정을 하고 문서 사자실에서 내려왔다. 저녁 식사 시간을 기다리면서 회랑을 걷던 우리는 바로 그 회랑에서 알리나르도 노수도사를 만났다. 알리나르도 노수도사를 만나고 보니 문득, 노인의 부탁을 받고 전날 주방에서 집어 주머니에 넣어 둔 한 웅큼의 병아리콩이 생각났다. 나는 그 콩을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몹시 좋아하며, 이빨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입 안에다 콩을 몇 알 넣고 오물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고맙다. 고마워... 그래, 콩은 콩이고... 봤지? 내가 뭐라고 했어? 또 한 구의 시체는 물 속에 있을 거라고 했지?'<요한의 묵시록>에 그렇게 씌어 있는 걸... 오래지 않아 네 번째 나팔소리가 들릴 게야.'
나는 그에게 왜 일련의 범죄 사건을 <요한의 묵시록>과 관련시켜 생각하고 있는지, 사건 해결의 열쇠가 거기에 있는 것 같으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대답했다.
'성 요한의 <묵시록>에 있는 열쇠면 안 열리는 문이 없어. 나는 알아. 그래서 나는 옛날부터 줄곧 그렇게 주장해 왔어... 알아? 나는 예전의 수도원장에게... 입이 닳도록 말했어. <요한의 묵시록>에 관한 주석서라는 주석서는 모조리 모아야 한다고... 장서관 사서 노릇은 내가 했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빼앗겼어. 그 친구가 나를 앞질러 실로스로 가서는 굉장한 필사본을 무더기로 가져왔거든. 그 친구... 똑똑했어. 이교도 말도 곧잘 할 줄 알았고... 그래서 장서고나 사서 자리에는 내 대신 그 친구가 앉게 된 거라고... 헌데 하느님께서 그 친구를 벌하셨어. 때가 이른 것도 아닌데 암흑의 세계로 보내셨거든... 하하...'
노수도사가 천진 난만하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도 노인이던 그가 옛날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그만 나이를 잊고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지금 말슴하시는 그 수도사가 대체 누굽니까?'
사부님이 물었다.
노수도사 알리나르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올려다보면서 대답했다.
'내가 시방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벌주시고, 없애시고, 지우신다오. 기억까지도... 장서고나에서, 제 잘난 맛에 못할 짓 많이들 했어. 특히 외국인들 손으로 넘어간 뒤로 외국인들이 그랬어. 그래서 하느님께서 지금도 벌을 내리시는 게야.'
그리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우리는 알리나르도 노수도사로부터 더 이상은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우리는 그를 회랑에 남겨 둔채 밖으로 나왔다. 사부님은 알리나르도 노수도사와 나눈 몇 마디 대화에서 무슨 낌새를 느꼈던지 이렇게 말했다.
'알리나르도 노인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입을 열때마다 아주 흥미로운 말이 몇 마디씩 흘러 나오지 않더냐?'
'이번에는 어떤 암시를 받으셨습니까?'
'듣거라, 아드소. 수수께끼 풀이는 만물의 근본이 되는 제1원인으로부터 추론해 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특수한 자료를 꾸역꾸역 모아들이고 여기에서 일반 법칙을 도출하면 저절로 풀리는 것도 아니다. 수수께끼를 풀자면, 아무 관련이 없는 듯한 두세 가지의 특정 자료를 서로 견주고, 여기에서 우리가 아직은 알지 못하는 것, 알려진 바가 없는 일반적인 이치가 드러날 수 있는 것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너도 잘 알게다. 어떤 철학자는, 사람과 말과 나귀는 역정을 내지 않으면 오래 산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아, 역정을 내지 않으면 동물은 장수할 수 있는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생각은 틀린 것이다. 사람과 말과 나귀가 장수한다고 했지 동물 모두가 그런 조건 아래에서 장수한다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뿔이 있는 짐승의 예를 들어 보자. 왜 짐승에게 뿔이 있겠느냐? 뿔이 있는 짐승에게는 윗니가 없다. 아직 모르고 있었다면 유념해 두어라. 그런데 윗니도 없고 뿔도 없는 짐승도 있으니 낙타가 바로 이런 짐승이다. 윗니가 없는 짐승에게는 위가 네 개라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너는 이빨이 없어서 제대로 씹을 수 없으니까 이런 짐승에게는 위가 네 개나 있어서 소화를 도모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너도 상상할 수도 있고 추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뿔은 어떨까? 너도 짐승의 머리에 뿔이 자라는 이유, 말하자면 <질료인>을 상상할 수 있을 게다. 머리에 골질 조직을 솟아나게 함으로써, 부족한 이빨의 수를 보충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설명이 못 된다. 낙타에게는 윗니가 없다. 윗니가 없으면 위가 네 개 있고, 뿔이 있어야 마땅한데 위가 네 개인 것은 분명하지만 뿔은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야 한다. 방어 수단이 없는 짐승의 머리에만 몸 속의 골질이 뿔로 자라난다. 그러나 낙타의 가죽은 몹시 두껍다. 따라서 낙타에게는 뿔이라고 하는 방어 수단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면 여기에는 어떤 원칙이 있을 수 있다고 해야겠느냐?'
'짐승의 뿔과 이 문제의 해결책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부님께서 짐승의 뿔 이야기를 하신 까닭이 무엇인지요?'
'그저 해본 것이다. 링컨의 주교가 좇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나도 한번 좇아 본 데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링컨의 주교가 내린 결론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고, 낙타의 입을 벌리고 윗니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본 바도 없을 뿐더러 낙타의 뱃속에 위가 몇 개 들어앉아 있는지 조사해 본 바도 없다. 나는 단지 너에게, 자연 현상에서, 설명이 가능한 하나의 법칙을 추론해 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걸 너에게 가르쳐 주고자 했을 뿐이다. 자연 현상에서 하나의 법칙을 이끌어 내자면 우선 설명되지 않는 현상에 주의하면서,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갖가지 일반적인 법칙을 서로 연계시켜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뜻밖의 결과들이 특수한 상황에서 서로 관련되는 데서, 혹은 여러 법칙을 두루 싸잡는 하나의 실마리가 잡혀 나온다. 이 실마리를, 유사한 경우에 적용시켜 보거나, 다음 발전 단계를 미루어 헤아려 보면, 마침내 자기 직관이 옳은지 그른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실마리가 결론의 유도에 필요한 것인지, 어떤 실마리가 합리적 추론을 방해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섣불리 취하거나 버리는 일은 삼가야 한다. 나도 시방 이 방법을 따르고 있다. 나는 지금 서로 관련이 없을 듯한 여러 가지 요소를 한 곳에 모으고, 이들 다양한 요소를 토대로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보고 있는 중이다. 이 가설 중에는, 너에게 밝히기가 민망할 정도로 터무니없는 것도 있다. 수도원장의 애마 브루넬로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라. 나는 여러 가지 실마리를 내 눈으로 찾아내고, 이 실마리와 실마리를 엮어 몇 가지 서로 모순되는 가설을 세워 보았다. 그러니까 그런 흔적을 남긴 것이 도망친 말일 수도 있고, 원장을 태우고 산기슭으로 내려간 말일 수도 있다. 눈에다 발자국을 남긴 말은, <브루넬로>일수도 있고 <파벨로>일 수도 있다. 뿐이냐? 길 옆 나무의 잔가지를 부러뜨린 것은, 나는 말이라고 추론했지만 사실은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식료계 수도사와 불목하니들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나는 내가 세운 가설 중 어느것이 맞고 어느것이 틀리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수도사들이 브루넬로를 끌고 올라오는 것을 보았을 때야 비로소 브루넬로 쪽 가설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실제로 식료계에게 아주 뽐내면서 말했던 게다. 따라서, 비록 내가 성공을 거두기는 했다만, 실패할 수도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성공했기 때문에 수도사와 불목하니들은 나를 현자 보듯이 우러러보지 않더냐? 그러나 그들은 내가 엉터리 가설을 무수히 세웠다가 그 중에서 하나를 건졌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성공하기 직전까지도 내게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이 수도원 살인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고 있지만, 어느 것이 사실에 가까운 가설이고, 어느 것이 사실에서 먼 가설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사실에 가까운 가설도 있을 것이다만, 가깝다는 증거가 아직 드러나고 있지 않으니까... 분위기가 분위기인 차제에, 이제부터는 똑똑한 척하고 다닐 게 아니라 어수룩하게 굴어야 할까 보다. 당분간, 적어도 내일까지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겠다.'
나는 그제서야 사부님의 암중 모색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이해했다. 그것은 제1원리에 의해 추론하여 그의 오성이 신의 오성의 방식들을 추측하는 철학자의 방법과는 매우 다르게 보였다. 사부님은, 해답이 얼른 자기 앞에 드러나지 않으니까 자기 자신에게 여러 가지 복잡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렴풋이나마 이해는 했는데도 내 머리는 조금도 맑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신지요?'
'적어도 한 가지 결론에는 가까이 갔다. 그러나 그게 무슨 결론인지, 그걸 모르겠구나.'
'여러 가지 문제를 두루 꿰는 해답을 찾으셔야 하는 것입니까?'
'그걸 찾았다면 빠리로 가서 신학을 가르치지 이러고 있겠느냐?'
'빠리의 신학 교수들은 해답을 찾는 데 능하신지요?'
'그렇지는 않다만 오류를 얼버무리지는 않는다.'
'사부님께서도 오류를 범하시는지요?'
'자주 범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범하는 한 가지 오류보다는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오류를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오류로부터 나를 구할 것이다.'
나는, 사부님이 만물과 지성의 다리 노릇을 하는 진리에는 통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오히려 여러 가지 가능성 중 몇 가지가 어떻게 적중할 것이냐는 문제를 두고 은밀하게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고백하거니와 나는 사부님에게 가볍게 실망했던 나머지, 교황청의 이단 심판관들이 수도원에 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던 것 같다. 말하자면 베르나르 기가 진실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마음 또한 나에게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 목요일의 유다보다 더 복잡한 심정으로, 나는 사부님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식당 쪽으로 걸었다.
종과
사절단을 위한 만찬은 초호화판이었다. 만찬의 차림새는, 원장이 얼마나 인간의 약점과 교황청 관행을 두루 꿰고 있는, 천성적인 협상가인가를 알 수 있게 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청빈을 으뜸가는 미덕으로 치는 소형제회 수도사들, 심지어는 소형제회의 우두머리인 체제나의 미켈레 수도사부터도 교황청식의 초호화판 만찬을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요리사는 만찬장에 임석한 사절단원들에게, 원래는 몬테 카시노식 요리법에 따라 갓잡은 돼지 피떡을 만들기로 되어 있었으나, 수도원에 불상사가 생기는 바람에 취소되었다면서 양해를 구했다. 수도원 불상사는 물론 베난티오의 시체가 돼지 피 항아리에서 발견된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수도원 분위기는 요리감을 도살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탁은 엄청나게 풍성했다. 돼지 피떡이 없었다 뿐이지 식탁에는 이탈리아 산 포도주에 담갔다가 꺼내어서 만든 비둘기 스튜, 토끼 구이, 금식일에 먹는 음식인 살가루와 편도로 만든 성 키아라 빵, 유리지치 파이, 절인 감람, 구운 건락, 후추 국물을 곁들인 양고기, 볶은 콩, 푸짐한 고급음료, 성 베르나르도 과자, 성 니콜로 파이, 성 루치아 경단, 포도주... 심지어는 취한 사람을 들뜨게 하는 약술까지 올라왔다. 점잖은 베르나르 기 같은 사람도 약술 앞에서는 말수가 늘었을 정도였다. 레몬 즙, 호도술, 용담술도 있었다. 한모금 마시고 한 입을 먹을 때마다 들리는, 성경을 봉독하는 낭랑한 수도사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식도락가의 주지육림과 다를 바 없었을 터이다.
모두가 거나해진 얼굴로 일어섰다. 개중에는 종과 성무에 참례하지 않으려고 꾀병 부리기를 시작하는 사절도 있었다. 수도원장에게도 그런 수도사를 교회로 불러들이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기야 사절단원 모두에게 우리 베네딕트 교단의 성무에 참례할 특권과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절단이 식당을 떠난 뒤에도 나는 주방 주위를 한동안 배회했다. 호기심 때문이었다. 주방을 치우는 요리사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겨드랑이에 조그만 보따리를 끼고 안뜰 쪽으로 가는 살바토레를 발견했다. 나는 호기심이 아닌 의무감에서 한동안 그를 미행하다가 어느 건물 모퉁이에서 그를 불러세웠다. 나를 피하고 싶어 우물쭈물 몸을 사리는 그에게 나는 보따리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보따리 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실리스크를 보거든 조심해! 뱀들의 왕인데 독이 아주 많은 것은 마구 뿜어 나오지. 말했지, 독이라고. 냄새만 맡아도 죽어... 등에는 얼룩 무늬가 있고 대가리는 꼭수탉 대가리 같은데, 배암처럼 몸의 절반은 땅에 대고, 반은 꼿꼿이 세우고 다닌다고... 벨룰라를 물어 죽일 수도 있다.'
'벨룰라라니요?'
'오끄야. 아주 조그만 것인데 몸 길이는 쥐보다 훨씬 길어. 사향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이 바실리스크움과 벨룰라의 관계는, 뱀과 두꺼비의 관계와 같아. 바실리스키움에게 물릴 경우 벨룰라는 부리나케 대추나무와 엉거시있는 곳으로 달려가 잎을 따서 씹어 해독하고는 다시 싸움터로 돌아온대. 벨룰라가 눈으로 새끼를 낳는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나는, 도마뱀을 어디에 쓰느냐고 물었지만 살바토레는 상관할 일이 아니라면서 그냥 가려고 했다. 나는, 반은 호기심을 누를 수 없어서, 반은 사부님에 대한 내 의무감을 저버릴 수 없어서 살바토레를 위협했다.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자고 새면 죽어 가는 판인데 수련사가 상관할 일, 못 할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면서, 가르쳐 주지 않으면 윌리엄 수도사에게 고변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기겁을 한 살바토레는, 윌리엄 수도사에게 고변하는 것만은 참아 달라면서 보따리를 풀었다. 안에는 도마뱀 대신 까만 고양이가 한 마리 들어 있었다. 살바토레는 내 옆으로 바싹 다가와, 권력이 막강한 식료계 레미지오 수도사나, 젊고 잘생긴 나라면 마을 여자를 사귀는 데 별 어려움이 없겠지만, 주머니에 든 것도 없고 잘생기지도 못한 자기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어떤 여자든 사랑에 빠지게 하는 주술을 알고 있다면서 그것을 귀띔해 주었다.
살바토레가 검은 닭이 낳은 것이라면서 달걀 두 개를 보여 주고 나서 나에게 말한 사랑의 주술은 이렇다. 검은 고양이를 죽이고 그 눈알을 뽑은 다음, 검은 닭이 낳은 계란 두 개에다 그 눈알을 각각 하나씩 넣는다. 다음에는 이 달걀을, 자기가 수도사들의 발걸음이 뜸한 채마밭 한 귀퉁이에 모아 둔 말똥에 묻어서 썩히면 이 달걀에서 꼬마 악마들이 나와 이 주술을 준비한 자의 소원을 이루어 준다. 그러나 이 주술이 완성되려면 살바토레가 짝사랑하는 여자가, 달걀을 묻기 직전에 그 말똥에 침을 뱉어야 한다. 불상한 살바토레! 그러니까 이 주술을 영험하게 하려면 짝사랑하는 여자를 밤중에 채마밭까지 불러와 말똥에 침을 뱉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바로 이 점이 살바토레를 괴롭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더구나 침을 뱉는 상대가 그 주술의 내용이나 의미를 몰라야 마법의 의식이 완성되고 주술이 주효할 터였다.
정체 모를 열기가 내 얼굴, 내 오장 육부, 그리고 온뭄의 살갗 위를 스멀거리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그래서 여자를 수도원 경내로 데리고 들어올 생각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린 게 여자를 너무 밝히네. 마을에는 여자가 얼마든지 있다. 자네가 그리워하는 여자보다 훨씬 예쁜 여자를 데려오랴?'
살바토레는 나를 따돌리려고 짐짓 허튼 수작을 부려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망설였다. 사부님이 긴요한 일을 앞두고 나를 기다리는데, 밤새도록 살바토레를 따라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살바토레가 노리고 있는 여자가 바로 그 여자일까? 그렇다면 따라가서 여자를 한번 만나보면... 내 이성의 무장을 일거에 해제시키고 육욕의 불을 지펴 버린 그 여자, 더 이상은 만날래야 만날 수 없는 그 여자를 만나보면...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살바토레라고 하는 허술한 인간이 지니고 있을 법한 여자에 대한 진실을 경멸함으로써 나 자신을 진정시키려 했다. 살바토레는 거짓말을 하고 잇는 지도 모르고, 이른바 주술이라는 것도, 미신에 사로잡힌 순진한 사내의 환상일 뿐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성을 되찾고 나니 살바토레라는 존재가 싫고 귀찮았다.
'교황청 사절단과 함께 온 궁병대가 경내를 순행하고 다닌다니까 일찍 잠자리에 드시지요.'
나는 아래위 모르는 척 심술을 부렸다.
'수도원 경내의 지리라면 경호대는 내 상대가 안된다. 밤안개가 이렇게 짙은데 뭐... 어쨌든 나는 간다. 밤 안개를 보아라. 나와 자네 여자가 바로 자네 옆에 있어도 자네 눈에는 안 보인다.'
그가 했던, 알아먹기가 간단하지 않았던 말을 해석하면 대충 위와 같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수련사 신분인 내가 그런 야료배와 어울려 득될 것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사부님을 만났다. 우리는 다음 단계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종과 성무 시간에 회중석 뒷자리에 있다가 성무 끝나는 대로 두 번째로(나의 경우는 세 번째로)장서관 미궁을 탐험하기로 한 것이다.
종과 이후
장서관으로 올라가 방방을 두루 다니는 데 우리는 많은 시간을 썼다. 장서관으로 올라가, 우리가 일찍이 세워 두었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고 해버리면 문제가 간단할 터이다. 그러나 등잔을 들고 다니며 각 방의 명을 읽고, 미리 만들어 둔 도면에다 통로와 벽을 그려 넣고, 각 방의 상인방에 새겨진 명의 두문자를 기록하고, 출입구가 복잡한 데다 장애물까지 있는 장서관 미궁을 돌아다니는 일은 길고도 지루한 작업이었다.
날씨가 매우 찼다. 밤이 되면서 바람이 잠잠해진 나머지, 첫날밤에 우리를 놀라게 했던 그 이상한 소리는 들려 오지 않았다. 그러나 벽 틈으로 들어온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우리를 괴롭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책을 만지다가 혹 손가락 끝이 얼까봐 털장갑을 끼고 들어갔지만, 그 장갑은 필사생들의 겨울 작업용 장갑이라서 손가락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따금씩 손을 등불에다 쬐거나, 가슴속으로 집어 넣거나, 수시로 비비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작업은 일관 작업이 될 수가 없었다. 사부님은 이따금씩 걸음을 멈추고는 궤짝의 서책을 꺼내어 읽고는 했다. 사부님의 코 위에는 예의 그 유리알 안경이 맞춤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새로운 서책을 대할 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탄성이 한숨에 묻어 나오고는 했다. 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서책이 되었든, 오래 찾아다니던 서책이 되었든, 듣도 보도 못한 서책이 되었든 그 제목이 안기는 반가움 때문일 터였다. 요컨대 사부님에게는, 그 방의 한책 한책이 이방의 땅에서 만나는 우화적인 동물 노릇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한 서책을 읽으면서도 입으로는 나에게 다른 서책을 찾아보라고 했을 정도로 장서관 미궁의 가멸찬 서책의 보고를 걸터듬었다.
'저 궤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살펴보아라.'
사부님 명에 따라 나는 그 궤짝의 서책을 한책 한책 꺼내면서 표지를 읽었다.
'베다가 쓴 <앙글리아 역사>입니다. 계속해서 베다의 책이 나오는군요, 사부님. <성전 건축에 관하여>, <성궤에 대하여>, <디오뉘시오스의 시대와 계산과 기록과 범위에 대하여>, <정서법>, <운율의 이론에 대하여>, <성 쿠트베르투스의 생애>, <운율학>...'
'그 어른의 전집인 게로구나. 이걸 좀 보아라. <수사학적 동질론>, <수사학적 표현의 분류>...뿐이냐? 여기에는 다른 문법학자들의 책도 있구나. 프리스키아누스, 호노라투스, 도나투스, 막시무스, 빅토리누스, 에우티케스, 포카스, 아스페르...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앙글리아 저자들의 서책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래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아라.'
'<아일랜드의...시편...>이라고 씌어져 있는데 이게 대체 무엇인지요?'
'응, 히베르니아의 시편이니라. 어디 들어보아라.
(바다는 물거품으로 이 세상 바닷가를 둘러싸고 끓어오 르는 파도로 국경을 두드린다.
바다는 수벽으로 강 어귀 바위를 두드리며
무서운 기세로 강바닥을 갈아엎는다.
강물은 돌멩이와 더불어 소용돌이치다가
이따금씩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끓어오른다.)'
나는 무슨 뜻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부님은 단어를 혀끝으로 굴리면서 읽었는데, 그 소리는 흡사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면서 포말을 일으키는 소리 같았다.
'이건 또 무엇입니까? 맘스베리 사람 알드헬름이 쓴 것인데요? 그런데... 제가 한번 읽을 테니까 들어보십시오. <우선 면면한 이 시 전편의, 우리 삶의 찬가와 같은 이 시편을 노래할 일이다. 아버지의 특권을 받은 자는 열심과 경건을 다하여 노래할 일이다. 모든 것은 창궁 아래에서 씌어진 것이고, 이 중에 산문 아닌 것이 없으므로>... 똑같이

로 시작되는 단어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섬나라에는 약간 돌아 버린 사람이 많아. 어디 다른 걸 좀 보아라.'
'베르길리우스인데요?'
'베르길리우스가 여기에서 또 뭘 하고 있지? 어느 베르길리우스냐? <농경시>를 쓴 베르길리우스냐?'
'아닙니다. <적요집>을 쓴 베르길리우스입니다.'
'주후 6세기 적의 수사학자인 뚤루즈 사람 베르길리우스로구나.'
'시, 수사학, 문법, 해학, 논리, 기하... 이 모든 것을 예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지금 어느 나라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까?'
'라틴 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네가 아는 라틴어가 아니고 그 사람이 만들어 낸 신식 라틴 어야. 자기가 만들어 낸 신식 라틴 어가 훨신 아름답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걸 읽어 보아라. 천문학이란, 황도 12궁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주장하면서 황도 12궁을 각각 <몬, 만, 톤테, 피론, 다메트, 페르펠레아, 벨갈릭, 마르갈레트, 루타미론, 타미논, 라팔루트>라고 부르고 있구나.'
'미친 사람이 아닙니까?'
'글쎄다만, 내 고향 영국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이걸 좀 보아라. 불을 나타내는 말에도 열두 가지가 있구나. 그냥 불은 <이그니스>라고 하고, 살아 있는 것을 요리하는 불은 <코퀴하빈>, 열기만을 말할 때는 <아르도>, 열기가 느껴지는 불은 <칼락스>, 탁탁 소리를 내는 불은 <프라곤>, 빨간 불꽃은 <루신>, 연기가 나는 불은 <푸마톤>, 태우는 불은 <우스트락스>, 죽었다가 살아난 불은 <비티우스>, 부싯돌로 켜는 불은 <실룰레우스>, 그리고 아이네이아스를 부활하게 한 불은 그 이름을 따서 <아에네온>... 이런 식이다.'
'이분 말고, 이런 주장을 한 분이 또 있습니까?'
'다행히도 없다. 하지만 이 양반이 이런 주장을 펼 당시는, 문법학자들이 세상 잡사를 잊으려고 공연히 난삽한 문제에 매달리는 걸 재미로 알던 시대다. 언제 나는, 이 시절의 수사학자 가분두스와 테렌티우스가 <나>라는 말의 호격문제로 15일 밤낮을 입씨름하다가 결국은 칼로 서로를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숲속의 원숭이와 뱀이 그려진 그림책을 사부님께 보이면서 여쭈었다.
'철자가 이상한 말이 나오기는 여기도 마찬가집니다. 어디 한번 들어 보십시오. <칸타멘, 콜라멘, 곤젤라면, 스테미아켄, 플라스마멘, 소네루스, 알보레우스, 가우디플루스, 글라우치코무스>...'
사부님은 그리움에 젖은 듯한 눈을 하고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역시 우리 섬나라 이야기로구나. 머나먼 히베르니아 수도사들을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라. 여기에 수도원이 있고, 우리가 신성 로마 제국을 입에 올리는 것도 다 그분들 은덕을 입었음이다. 유럽이 폐허가 되어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들은, <성부와 그 딸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고 해서 갈리아 지방 사제들의 세례는 모두 무효라고 한 적이 있다. 허나 이는 라틴 어에 무식했기 때문이지 새로운 이단의 물이 들어 예수님을 여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살바토레처럼 말씀이시군요.'
'오십보백보다. 옛날 극북 지방의 바이킹 족이 바다와 강을 따라와 로마를 약탈한 적이 있다. 이교 사원은 폐허가 되었지만, 기독교 교회는 세워지기도 전이었으니 부서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지. 그 당시 읽고 쓰고, 성서를 채식할 줄 알던 사람들은 히베르니아에 있던 수도원 수도사들뿐이었다. 이 수도사들은 짐승 가죽으로 만든 배를 타고 너희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 너 보비오에 가본 적 있느냐? 보비오를 건설한 사람이 바로 그 중의 한 분인 콜룸바누스 성인 이시다. 네가 보고 있는 엉터리 라틴 어는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유럽에 고대 라틴 어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그렇게라도 만들었던 것이나 너무 욕할 일이 아니다. 딴에는 모두 나름대로 위대한 분들이다. 성 브렝당 같은 이는 지복의 제도를 지나 지옥의 해단을 따라 항해하다가, 사슬에 엮인 채 바위에 묶여 있는 유다를 보았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쪽배 하나를 상륙시켜 자세히 보게 했더니 사실은 유다가 아니라 괴물이었더란다. 시대가 시대였으니만치 네가 미친 사람들이라고 하는 데도 알 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게 바로 그때 그려졌다는 그림입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다채로울 수가 없습니다.'
'다채롭다니? 색채와는 별 인연이 없는 땅 사람들이었는데 다채롭게 채식했을 까닭이 있느냐... 내가 보기에는 푸르뎅뎅한데 그러는구나. 그것은 그렇고 지금 히베르니아 수도사 이야기나 노닥거릴 때가 아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왜 여기에만 앙글리아 저자 및 다른 나라 저자의 문법책이 모여 있느냐 하는 점이다. 도면을 보아라. 우리가 지금 어디쯤 있느냐?'
'서쪽 탑루에 있는 방입니다. 상인방 두루마리의 글귀도 적어 두었습니다. 창이 없는 방을 나와 7면벽실로 들어가면, 하나밖에 없는 탑루의 방으로 가는 통로가 있습니다. 붉은 글씨인데, 자로 시작되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방입니다. 사부님과 제가 이방 저방을 다니며 탑루 안을 돌다가 막다른 방으로 돌아왔으니까... 맞습니다. 글자를 짜맞추면 <히베르니>가 됩니다!'
'막다른 방에서 나가 7면벽실로 들어가면,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묵시록이라는 뜻을 지닌 아포칼립시스의 두문자 A가 있으니까 히베르니가 아니고 히베르니아가 옳다. 그런데 여기에 세계의 끝 극북지방 사람의 저서와, 문법학자, 수사학자들의 저서가 있다. 왜 그럴까? 장서관 서책을 정리한 사람은, 베르길리우스가 뚤루즈 사람이기는 하나 여기 문법학자니까 그 저서를 히베르니아 문법학자들 저서와 함께 비치한 것일 게야. 이제 뭔가 실마리가 풀리는 것 같구나.'
'하지만 전에 들어갔던 동쪽 탑루의 방문 상인방 글귀의 두문자를 순서대로 쓰면 폰스가 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인지요?'
'도면을 잘 읽어 보아라. 그 다음 방의 기호도... 우리가 드나든 순서대로 읽어 보아라, 무엇이 되느냐?'
'폰스 아다에우... 가 됩니다만...'
'틀렸다. 폰스아다에가 옳을 것이다. 우리가 두 번째로 들어간, 동탑의 창이 없는 방이 바로 U에 해당하는 방 아니었느냐? 따라서 이 U는 이 글귀 배열에도 쓰이고 다른 글귀의 배열에도 쓰일 게야. 그래, 우리가 폰스 아다에를 지나면서 무엇을 보았더냐? 지상의 낙원 아니더냐? 솟는 태양에 면한 제단이 그 방에 있었던 것 같구나.'
'성서와, 성서의 주석서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온통 성서와 관련된 서책밖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상의 낙원과 일치하는 하느님의 말씀 아니겠느냐? 사람들은 지상의 낙원이 동방에 있다고들 말한다. 그 반대쪽에는 무엇이 있겠느냐? 바로 히베르니아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장서관 각실의 배치는 세계 지도 모양을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서책은 서책의 국적, 혹은 저자의 고향, 아니면 출생지였을 법한 지역에 맞추어 비치되어 있을 것이다. 장서관 사서들은 문법학자 베르길리우스가 뚤루즈에서 태어난 것으로 잘못 알았던 게야. 서쪽의 섬나라에서 태어났을 터인데 말이다.'
우리는 조사를 계속하면서 <요한의 묵시록>에 나오는 글귀가 새겨진 방을 무수히 지났다. 그 중의 어느 한 방이, 바로 내가 환상을 보았던 그 문제의 방이었다. 실제로 우리는 먼 발치에서 그 방의 불빛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사부님은 코를 싸쥐고 다가가 침을 뱉어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는 나와 함께 서둘러 그 방을 나왔다. 나는, 그 방에서 <물리에르 아믹타 솔레>, 즉 <태양을 입은 여자>와, 용이 그려진 아름답고 다채로운 <요한의 묵시록>을 보았던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는, 맨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방 상인방 글귀의 두문자, 즉 붉은 글자 를 앞세워 글귀를 만들어 보았다. 역순으로 짠 결과 만들어진 단어는 <이스파니아>였다. 마지막 글자인 A는 <히베르니아>의 마지막 글자 A와 겹쳐지고 있었다.
<이스파니아>에 해당되는 각 방에는 장정이 호화스러운 <요한의 묵시록> 필사본이 많았다. 사부님은 필사본을 살펴보고는 이스파니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수도원 장서관에, 기독교 국가에 현존하는 사도들의 복음서 필사본과, 이 필사본에 대한 방대한 주석서가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상당수의 장서는 리에바나 사람 베아토에 의한 <요한의 묵시록>의 주석서였다. 서책은 대개 대동 소이했으나, 이스파니아에서 만들어진 서책은 화려하고 풍부하고 변화 무쌍한 채식이 돋보여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사부님은 그 서책들이 아스투리아스 땅의 유명한 채식사들인, 마기우스, 파쿤두스 같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좌충우돌 장서관 내부를 조사하다 보니 어느새 남쪽 탑루에 와 있었다. 전날 밤에 와본 곳이었다. <이스파니아>의 에 해당하는 방은, 창문이 없는 방 로 통했다. 우리는 탑루에 있는 다섯 개의 방을 차례로 지나 막 다른 곳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붉은 글자로 된 상인방 글귀의 두문자가 인 방이었다. 우리는 6개의 방에 씌어진 글귀의 두문자를 역순을 짜보았다.
'<사자>가 되는 구나. 남쪽 탑루가 <사자>라... 지도상으로 우리는 지금 아프리카에 와 있다. <여기에 사자가 있다>, 이제 알겠지? 그래서 여기에 이교도 저자들의 서책이 많았던 게다.'
나는 궤짝을 뒤져 보고는 사부님 쪽으로 돌아섰다.
'얼마든지 더 있습니다. 아비체나의 <원리>가 있고... 아름다운 글자로 된 필사본이 있는데, 이게 어느 나라 말인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습니다.'
'<코란>일 게다만 나는 불행히도 아랍어를 모른다.'
'<코란>이라면, 이교도의 경전인 사서가 아닙니까?'
'사서라고 하지 말고, 우리 성서와는 유가 다른 지혜가 담긴 서책이라고 부르거라. 장서관 사서들이 왜 이 서책을, 사자가 있고 괴물이 득실거리는 <피니스 아프리카에>, 즉 <아프리카의 끝>에 두었는지 알겠다. 우리가 괴물 그림이 그려진 서책을 본 곳도 바로 이 방이다. 너는 일각수를 보았지? 그렇다면 <레오네스>에 해당되는 이 방들은, 장서관 설계자가 위서로 여겨지는 서책을 두려고 만든 방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저건 또 무엇이냐?'
'라틴어로 된 서책이지만 저자는 아랍 사람입니다. 아유브 알 루하위의, 개의 공수병에 관한 논문입니다. 귀한 서책인 것 같습니다. 알 하젠의 <시각론>이라는 책입니다.'
'오해 말아라. 괴물과 허위만이 난무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읽고 배워야 할 과학의 논문도 있다. 장서관이 세워질 당시 이미 이교도들은 과학에 눈을 대고 있었다는 증거 아니겠느냐?'
'위서 속에 왜 일각수가 그려진 서책이 들어 있습니까?'
'장서관 설계자 혹은 당시의 사서는, 일각수가 그려진 서책도 위서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방의 환상적인 동물이나 괴수가 그려진 서책은, 무조건 이교도들이나 읽는 불온한 서책의 범주에 넣었을 것이야.'
'그런데 왜 일각수가 그런 괴물의 범주에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동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동물, 고결한 덕목의 상징 같은 동물 아닙니까? 일각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순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듣기로 일각수를 생포하려면 숲속에 처녀를 홀로 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일각수가 처녀의 순결을 냄새로 알고 다가와, 처녀의 무?을 베고 누움으로써 저 자신을 바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말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많은 사람들이 일각수를, 이교도들 우화에나 나오는 동물로 알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부님, 정말 저로서는 맥풀리는 일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숲을 가로질러 가는 일각수를 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일각수가 숲을 가로질러 질풍처럼 내딛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 것입니까?'
'이 동물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동물이라는 주장, 그거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서책에 그려지는 것과는 모습이 좀 다를 지도 모르지만, 베네치아의 어떤 여행자는 지도에 <낙원의 샘>이라고 표시된 아주 먼 나라에까지 여행했는데, 이 여행자는 바로 그 땅에서 일각수를 보았다고 주장한다. 허나 그가 본 일각수는, 성질이 포악하기가 그지 없고, 모습은 몹시 추한 데다 색깔도 검더라는구나. 아마 미간에 뿔이 돋은, 진짜 짐승을 보았던 게지? 어쩌면 이 여행자가 보았다는 짐승은 고대의 전도자들이 실제로 보고 생생하게 그려 내었던 짐승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고대의 전도자들이, 안본 것을 보았다고 할 리 없다. 우리가 못 본 것을 보는 기회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느냐? 이 저자에서 저 저자로 옮겨지면서 이 동물의 묘사에 상상력의 살이 붙어 그만 순백의 아름다운 환상의 동물인 일각수로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따라서 숲에 일각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너는 처녀를 미끼로 쓰지 말아라. 아무래도 이 동물은, 이 서책에 묘사되어 있는 것보다는, 베네치아 나그네의 목격담에 가까울 것 같아서 하는 소리다.'
'고대의 전도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일각수의 참모습을 계시받았던 것입니까?'
'계시라는 말보다는 경험이라는 말이 좋겠다. 설마 그러기야 했겠느냐? 어쩌다 보니 일각수가 사는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일각수가 그때에 맞추어 우리 땅에 살거나 했을 테지.'
'그럼 우리가 어떻게 고대의 지혜를 믿을 수 있습니까? 멋대로 해석된 엉터리 서책을 통해 전수되어 왔을 법한 것을 어떻게 지혜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옳다. 서책을 대할 때는 서책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성서의 주석서 저자들이 늘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서책의 뜻은 우리에게, 일각수는 도덕적 진실, 비유적 진실, 우화적 진실을 나타내고 있음을 가르친다. 그러나 순결이 고결한 미덕이듯이, 이 서책이 드러내는 의미 또한 진실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 가지 진실을 지지하는 언어적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험이 이러한 표현을 부여했는지를 한번 따져 보아야 한다. 아무리 그 뜻이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언어적 관념이라는 것은 반드시 논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법이다. 가령 서책에는, 금강석은 숫양의 피에만 녹는다고 씌어져 있다. 내 사부님이신 로저 베이컨께서는 벌써 이 진술이 틀린 진술이라고 하신 바 있다. 실제로 해보셨더니 안 되더라는 게다. 그러나 금강석과 숫양의 피 사이에 실증적인 의미 이상의 고상한 의미가 존재한다면, 금강석이 반드시 숫양의 피에 녹을 필요는 없다. 따라서 금강석은 숫양의 피에만 녹는다는 진술은 진실이라고 일러도 무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거짓 희롱이 귀한 진실을 나타내는 데 장애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무튼 일각수가 이땅에 존재하지 않고, 존재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하느님 섭리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뜻이라면 일각수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심려 말아라. 일각수는 이 서책에 존재하고 있지 않으냐? 참 실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능한 실재로 존재하니 그것으로 만족하려무나.'
'그렇다면 서책을 읽을 때도 우리는 신학적인 미덕인 믿음을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요?'
'신학적 미덕에는 믿음 말고도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고 또 하나는 가능하다고 믿는 인간에 대한 자비이다.'
'사부님의 지성은 일각수의 존재를 믿지 않으시는데, 도대체 일각수라는 존재가 사부님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베난티오의 시신은 돼지 피 항아리로 끌려 들어갔다. 그때 눈 위에 남았던, 베난티오가 끌려간 흔적이 그러하듯이, 비록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일각수는 나에게 여전히 유용하다. 서책 속의 일각수는 그 흔적과 같다. 흔적이 있으면 흔적을 남긴 존재도 분명히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일각수와 그 흔적은 다른 것일 것 같습니다만.'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남기는 것에 따라 흔적의 모양은 늘 같지 않고, 또 흔적이라는 것이 꼭 찍혀야 생기는 것도 아니다. 때로 인간의 육체가 인간의 마음에다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관념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관념은 만물의 기호요, 형상은 기호의 기호, 관념의 기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육체나 관념이 없어도 이미지로써 이를 재구성한다.'
'그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사부님 보시기에 넉넉한지요?'
'아니다. 기호에 지나지 못하는 관념에 만족해서는 참 배움이 이뤄지지 않는다. 나름의 진실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흔적의 흔적에서, 사슬의 첫 번째 고리인 내 나름의 일각수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이제 베난티오의 살해자가 남긴 모호한 기호, 그러나 많은 것을 말해 주는 흔적에서 살해자의 문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나마 단시간에는, 다른 흔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저도 이제는, 이것으로 저것을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그럴 터이다. 그래서 내가 나름의 일각수 이야기를 한 것이다. 너무 심려 말거라. 비록 추악하고 검은 것일지 모르나, 너도 곧 너의 일각수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일각수, 사자, 아랍 인 저자, 그리고 무어 인... 이곳은 분명히 수도사님들이 입에 올리던 바로 그 <피니스 아프리카에>, 즉 <아프리카의 끝>입니다.'
'그렇다마다. 티볼리 사람 파치피코가 말하던 그 아프리카 시집을 다시 찾아 보아야겠구나.'
사부님과 나는 그 방을 나가 다시 방으로 되돌아갔다. 그 방의 서책 궤짝에는 플로루스, 프론토, 아풀레이우스, 마르티아누스, 카펠라, 그리고 풀겐티우스의 저서가 있었다.
'베렝가리오가 말했다는 바로 그 방일 것입니다. 베렝가리오는, 엄청난 비밀을 밝히는 책이 이곳에 있다고 했다지 않습니까?'
'그럴 게다. 베렝가리오는 <피니스 아프리카에>라는 말을 더러 했고, 말라키아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몹시 화를 내었다지? <피니스 아프리카에>는 마지막 방일 것이야... 그런데...'
사부님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끌롱마끄누아의 일곱 교회! 뭔가 짚히는게 없느냐?'
'무슨 말씀이신지요?'
'되돌아가자. 우리의 출발점이었던 방으로 되돌아가자!'
우리는 출발점이었던, 창이 없는 방으로 되돌아갔다. 이 방의 두루마리 글귀는 <수페르 트로노스 비긴티 쿠아투오르>, 즉 <높은 좌석 스물네 개>였다. 문은 네 개였다. 그 중 하나는 방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이 방의 창 하나는 8각의 안뜰에 면해 있었다. 또 하나의 문은

방으로 통했다.

방은 건물 정면을 따라 <이스파니아>와 연결되고 있었다. 이 방의, 탑루 쪽으로 난 문은, 조금 전에 우리가 지나온 방으로 통했다. 이 방에는 창이 없는 벽이 있었고 방문은 두 번째의 창이 없는 방 로 통했다. 방은, 이상한 거울이 있던 바로 그 방이었다. 다행히도 거울은 내 오른 쪽 벽에 붙어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또 한번 기겁을 하고 말았으리라.
나는 도면을 살펴보고서야 그 방이 여느 방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다른 세 탑루에 있던, 창이 없던 방처럼 그 방 역시 중앙의 7면벽실로 이어져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7면벽실의 입구는, 창이 없는 방 와 이웃하고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8면 안뜰과는 창 하나로 이어지는 방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방과 역시 문 하나로 이어지는 이 방의 세 벽면 앞에는 서책 궤짝이 쌓여 있었다. 우리는 주위를 점검하면서 다시 한번 도면을 살폈다. 건물의 균형으로 보나, 논리적으로 보나 이 탑루에도 7면벽실이 하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게 없었다.
'없습니다, 그런 방은 없습니다.'
'아니야. 없는 것이 아니야. 만일에 7면벽실이 없다면 다른 방이 조금 더 커야 마땅하다. 하지만 방 크기가 다 고만고만하지 않으냐? 따라서 7면벽실은 있다. 어디엔가 있다. 단지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벽으로 가로막혀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럴 게다. <피니스 아프리카에>라고 불리어지던 방,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수도사들이 호기심에 쫓겨 기웃거리던 방, 그 방은 분명히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단지 우리 앞에 벽으로 막혀 있는데 지나지 않을 것이야. 들어가지 못하는 방일까? 그렇지 않아. 들어가는 수가 틀림없??있을 것이야. 베난티오는 그 방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아델모로부터 그 방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아델모는 또 베렝가리오로부터 들었을 것이고, 베난티오가 쓴 암호문 쪽지를 다시 한번 검토해 보자.'
사부님은 법의 속에서 베난티오의 양피지 글귀를 번역한 쪽지를 꺼내어 다시 읽었다.
'<마누스 수프라 이돌룸 아게 프리뭄 에트 셉티뭄 데 쿠아투오르>... <우상 위의 손길이 넷의 첫 번째와 일곱 번째에 작용한다>?... 이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래, 그렇다! <이들룸>, 즉 <우상>은 거울에 비치는 형상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베난티오는 그리스어 식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라틴 어의 <이돌룸>과 같은 뜻을 지닌 그리스 어의 <에이돌론>은 <허상> 혹은 <유령>이라는 뜻이다. 거울은 일그러진 우리 허상을 반사하지 않더냐? 게다가 우리에게는, 그 전날 그 허상을 유령으로 오인한 적도 있다. 하면... <수프라 이돌룸>은 무슨 뜻일가? 거울 표면의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느냐? 거울 앞에, 각도를 바꾸어 가면서 서보자. 베난티오의 기록과 일치하는 무엇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각도를 바꾸어 가며 거울 앞에 서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의 형상 옆으로, 거울은 등불에 비친 스산한 방안 풍경의 윤곽만 반사할 뿐이었다.
'어쩌면 <수프라 이돌룸>이라는 말은 <거울 너머>라는 뜻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거울이 문 노릇을 할지도 모르고... 이문을 통하여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일까?'
여느 사람을 넘는 거울은 참나무 틀에 단단히 고정된 채 벽에 붙어 있었다. 우리는 거울의 아래 위, 양 옆을 손으로 더듬어 보기도 하고, 유리와 틀 사이에다 손톱을 넣어 밀어도 보고 당겨도 보았다. 그러나 거울은 여전히 벽의 일부였다.
'<거울 너머>도 아니구나. 그렇다면 <수프라 이도룸>이 아니고 <수페르 이돌룸>, 즉 <우상 위>라는 뜻일까?'
사부님은 까치발로 선 채 손을 내밀어 거울의 틀 위를 더듬어 보았다. 손에 먼지가 묻었을 뿐 역시 하릴없었다.
'설사 거울 뒤에 방이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찾은 서책이나 다른 수도사들이 찾던 서책이 반드시 그 방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아무도 못 한다. 처음에는 베난티오가, 두 번째로는 베렝가리오가 가져갔을 테니까... 어디로 가져갔는가는 하느님만 아실 테지...'
'베렝가리오 수도사가 여기에 도로 갖다 놓았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장서관으로 들어왔던 날에는 그럴 경황이 없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베렝가리오는 같은 날 밤, 그러니까 서책을 훔치고 나서 오래지 않아 욕장에서 죽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 않았다면 베렝가리오의 시체는 바로 그 다음날 아침 우리 눈에 띄었을 것이야. 아무튼, 지금 이 상태에서도 우리에게는 얻은 것이 없지 않다. <피니스 아프리카에>에 해당하는 방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었고, 장서관 도면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정보는 거의 얻은 셈이니까. 네 생각이 어떤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보기에 장서관 미궁의 수수께끼는 어느 정도 풀렸을 게야.'
우리는 다른 방을 차례로 돌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을 모조리 도면의 해당 위치에다 기록했다. 장서관에는 수학이나 천문학 관련 서책 전용 소장실도 있었고, 아랍 어 이상으로 요령부득인 문자로 기록된 필사본 소장실도 있었다. 사부님은, 아무래도 인도 어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사부님과 나는 서로 맞닿아 있는 일련의 방들인, 유대와 이집트 사이를 여러 차례 오고 갔다. 독자들을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기에서 밝혀 두는 편이 좋을 듯하다. 우리는 약도를 거의 완성하고 나서야 장서관이, 이 세계의 모습에 따라 배치되었음을 확신했다. 말하자면 본관의 북쪽에는 <앙글리아>와 <게르마니>, 서쪽에는 <갈리아>가 있으며 이 <갈리아>의 극서쪽에는 <히베르니아>, 남쪽은 고대 라틴의 낙원인 <로마>와 <이스파니아>로 이어지는 셈이었다. 그리고 본관 남쪽에는 <레오네스>와 <아에깁투스>가 있고 그 동쪽으로는 <유대아>와 <폰스 아다에>, 즉 <아담의 고향>이 있었다. 8각형 안뜰의 북쪽과 동쪽에 걸쳐 배치되어 있는 일련의 방은 <아카이아>였다. 바로 이 <아카이아>를 두고 사부님은, 그리스를 일컫는 제유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이 일련의 방에는 고대 그리스의 이교도 시인 및 철학자들의 저서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각 방을 나타내는 두문자로 낱말을 꾸미는 방법도 일정하지 않았다. 한 방향으로 잇기만 하면 낱말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거꾸로 읽어야 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활꼴로 읽어야 할 경우도 있었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같은 글자가 두 단어에 겹치는 경우도 있었다.(이 경우에는 같은 방에 두 종류의 서책이 든 궤짝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배치의 황금률로 작용할 만한 어떤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배치 상태는, 대출 요구에 따라 서책을 찾아 내는 데 필요한, 장서관 사서의 기억 보조 장치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령 <쿠아르타 아키이아에>는 <아키이아>의 네 번째 방이니까
에서 헤아려서 네 번째 방인 것이다. 그러니까 장서관 사서는 머리 속으로 기억해 둔 통로를 따라 사각형으로 배치된 네 개의 방 중 어느 한 방에서 바로 그 서책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막다른 멱의 비밀도 알아내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가령 동쪽 탑루에서 <아키이아>로 들어왔다고 하자. 그러나 방과 방은 막다른 벽에 면해 있어서 여기에서는 다른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즉 미로는 바로 이 벽에서 끝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북쪽 탑루로 가자면 되돌아서서 나머지 세 개의 탑루를 두루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입구는 <폰스 아다에>쪽에 있으니까 길을 잘 아는 사서는 북쪽 탑루의 <앙글리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에깁투스>와 <이스파니아>와 <갈리아>와 <게르마니>를 차례로 지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장서관 미궁의 조사를 거의 끝내었다. 수확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장서관을 떠날 준비를 했다는 말을 하기에 앞서 독자들에게 고백해 둘 것이 있다. 장서관에 잠입하여 미궁을 조사한 목적은 물론 그 금단의 지역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열쇠를 얻어내는 데 있었다. 그러나 각 방의 배치 상황과 소장 도서를 점검하느라고 방방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미지의 대륙이나 신비의 땅을 탐험하는 기분으로 일삼아 갖가지 종류의 서책을 읽은 꼴이 되고 말았다. 이 두 번째 잠입 조사는 사부님과 동행이었다. 결국 사부님과 나는 같은 서책을 읽은 셈이었다. 나는 흥미로운 서책을 만날 때마다 사부님게 보고하고 사부님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자세히 설명까지 해주시었다.
<레오네스>가 있는 남쪽 탑루의 방들을 조사할 때의 일이다. 사부님은, 내 눈에는 생소한 광학 분야의 그림이 잔뜩 실린 아랍 어 도서 소장실에 한동안 머물렀다. 그날 밤 장서관으로 가지고 들어간 등잔은 두 개였다. 그래서 나는 등잔 하나는 그 방에다 남겨둔 채 나머지 하나를 들고 혼자서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 빼곡이 들어앉은 서책은 주로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병폐를 다룬 이교도 학자들의 저서였다. 따라서 장서관 밖으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서책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책이라도 더 보아 두어야겠다는 욕심에서 살며시 사부님을 떠나 그 방으로 갔던 것이었다.
그 방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행히도 내용과는 동떨어진 그림, 즉 꽃, 포도덩굴, 쌍쌍의 동물, 그리고 약초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는 그리 두껍지 않은 서책 한 권이었다. 볼로냐 사람 마시모가 썼다는 <사랑의 거울>이라는 서책이었다. 이 서책에는, 다른 서책에서 뽑아 실은 인용구가 대단히 많았는데, 내용은 거의가 상사병에 관한 것이었다. 독자들은 이해하실 테지만, 이 서책의 인용구들이, 그날 아침에 겨우 잠재운 내 마음에 다시 불을 지르고, 잊으려고 몸부림치던 그 여자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날 하루 내내 나는 아침에 하던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나는, 그 같은 생각이 온전한 정신으로 용맹 정진해야 하는 수련사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몇 번이고 내 마음으로부터 다짐을 받아 내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날 낮에 있었던 일, 즉 황실 사절단과 교황청 사절단의 만남은 나의 관심을 그쪽으로 쏟게 하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나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필경은 일과성 불장난에 불과할 터인, 그 일로 인한 망상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거울>을 보는 순간 나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책을 보는 순간 나는 나의 상사병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중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뒷날 나는 의학에 관한 책을 읽고, 타인으로부터 특정한 병의 증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듣는 사람 역시 비슷한 증세를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혹 사부님이 들어와, 무슨 서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고 있느냐고 나무랄까봐 건성으로 읽어 내리긴 했지만, 그렇게 읽은 몇 쪽이 나의 내부에 이상한 파문을 일으켜 놓고 말았다. 말하자면 그 서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과 똑같은 증세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서책에는 상사병의 증세가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내용을 읽고 보니, 한편으로는 애가 타는데도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쁘기도 했다. 나 자신이 상사병에 걸려 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은 애가 타는 노릇이었으나 나의 비극이 나만의 비극이 아니라는 것 또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향하여 씌어 있는 듯하던 그 서책의 내용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다.
특히 사랑이라는 병은 괴질이기는 하되 사랑 자체가 곧 치료의 수단이 된다는 이븐 하즘의 정의는 인상적이었다. 이븐 하즘에 따르면, 사랑이 괴질인 까닭은,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통찰인가! 나는 그제서야 그날 아침 내 눈에 보인 것들이 그렇게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던 까닭을 이해했다. 안치라 사람 바실리오에 따르면 사랑은 눈을 통해 우리 몸 속으로 들어오는 병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들뜨거나, 혼자 있거나, 혼자 있고 싶어하거나(그날 아침, 나는 얼마나 혼자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던가) 공연한 심술을 부리거나 바로 이 심술 때문에 말수가 적어지거나 한다.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상을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심한 자기 학대 증세를 보이면서 하루 종일 침상을 떠나지 않는데, 이 상사병 증세가 지나쳐 뇌가 영향을 받게 되면 정신을 잃거나 헛소리를 하게 된다는 대목에서는 겁이 덜컥 났다.(그러나 내 경우는 맑은 정신으로 장서관 미궁을 조사할 정도였으니 그런 중증은 아닐 터였다.) 이병이 악화되면 목숨을 앗을 수도 있다는 대목도 꺼림칙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여자를 생각하다가 육체가 희생되어도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성녀 힐데가르트의 글도 읽었다. 이 성녀의 주장에 따르면, 내가 그날 느꼈던 것과 같은, 여자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느끼게 되는 우울증이야말로 천국에서 경험하는 완벽한 평화의 상태와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중증에 속하는 <암담함과 비참함을 느끼는 우울증>은 뱀의 숨결을 맡거나 악마가 틈입하는 데서 생기는 병이었다. 다른 이교도 학자들의 주장도 이와 비슷했다. 아부 바크르 무하마드 이븐 자카리야 아르 라지는 <의학총서>에서 상사병으로 인한 우울증을 낭광증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상사병에 들려 끝없이 우울증을 느기는 사람은, 하는 짓이 늑대와 비슷하다는, 그의 증세 묘사는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그에 따르면 상사병의 초기 증세로는 우선 외모에 변화가 오고, 이어서 시력이 약해지고, 눈이 들어가며, 여기에서 조금 더 발전하면 눈물이 마르고, 다음에는 혀가 마르면서 혓바닥에 농포가 생기고, 몸이 말라가면서 시도 때도 없이 갈증을 느끼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병자는 대낮에도 침대에 누워 이불로 얼굴을 가리게 되며, 얼굴과 목에 개의 이빨 자국이 나타나다가 결국은 늑대처럼 묘지를 어슬렁거리게 된다.
아비체나의 인용문은 나에게, 나 자신이 까발려진 듯한 느낌을 안겼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상사병은 이성인 상대의 얼굴, 태도, 행동에 대한 연속적인 상상에서 비롯된 편집증적 우울증이다. 아비체나는 흡사 나를 관찰하고 상사병을 그렇게 정의한 것 같았다. 상사병은 처음에는 병이 아니나, 사랑의 갈증이 해소되지 못할 경우에는 강박적인 병으로 이행하여 (나의 갈증은... 하느님 용서하소서... 채워졌는데도 나는 왜 그런 증세를 느꼈던 것일까? 전날 밤의 죄많은 춘사는 그런대로 만족한 상태에서 끝나지 않았던가? 이것이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면 대체 만족스러운 것이란 어떤 것이란 말인가?, 이윽고 눈꺼풀이 떨리고,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까닭없이 울고 웃게 되고, 급기야는 심장의 박동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진다. 실제로 내 맥박도 빨라지고 있었다. 이 글을 읽을 동안 내 호흡은 거의 멎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비체나는 또 갈레노스가 고안한 상사병 환자의 진단 방법을 소개하고 있었다. 즉,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사랑의 대상이 될 만한 이성의 이름을 부르면 특정인의 이름에서 맥박이 빨라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글을 읽다 말고, 사부님이 불쑥 튀어 들어와 내 손목을 잡고 내 맥을 짚을까 봐 더럭 겁이 났다. 참으로 창피한 일이었다. 아비체나는, 상사병의 유일한 치료 수단은 상사병의 대상과의 결합이라고 했다. 아비체나는, 똑똑한 사람이기느 하나 역시 물정 모르는 이교도였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든, 주위의 사려 깊은 주선을 통해서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성별되어 그런 병에는 걸릴 수도 없고 결려서도 안될 뿐만 아니라 설사 걸린다고 해도 대상과의 결합을 통하여 이 병을 치료할 수는 더욱 없는 가련한 베네딕트 회 수련사의 팔자를 전혀 고려에 넣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팔자가 나 같은 사람은 고려에 넣고 있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일 경우에 대한 대비는 있었다. 즉 마지막 대증 요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온탕욕이 그것이었다.
하면... 베렝가리오는 죽은 아델모에 대한 상사병을 치료하러 욕장에 들어갔던 것일까? 인간은 동성에 대해서도 상사병에 걸리는 것일까? 이거야말로 짐승의 음욕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내가 그 여자와 함께 밤을 보냈던 것도 짐승의 음욕에 견주어질 만한 탐욕 때문이었던가? 아니어야 한다... 그렇게 달콤한 사랑이 짐승의 음욕일 리 없다... 아니다, 아드소여, 네가 틀린 것이다. 그날 밤의 춘사는 악마가 보낸 환상이다. 따라서 짐승의 음욕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죄를 짓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죄를 짓고 있는 너 아드소여...
아비체나의 치료법은 계속되고 있었다. 두 번째 방법은, 소시적에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힌 적이 있는, 늙은 여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치료의 한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나에게는 수도원에서 늙은 여자(젊은 여자는 물론이고)를 찾아낼 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수도사를 하나 붙들고 통사정하는 수밖에 없겠지만... 대체 누구에게? 이사라센 인이 권하는 마지막 치료법, 즉 상사병에 걸린 사람에게 계집종 여럿을 붙여 난교하게 한다는 치료법은 나 같은 수도자에게는 천부당만부당했다. 결국 수도자가 상사병에 걸릴 경우에는 마땅한 치료법이 없었다. 나는, 세베리노에게 약초를 부탁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까지 해보았다.
그런데 빌라노바 사람 아르날도의 글에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아르날도라면, 사부님도 극찬하던 분이었다. 아르날도에 따르면, 상사병이란 체액의 분비와 정신의 고양이 지나친 데서 생기는 병이었다. 이로 인해 혈액(생식의 종자를 지어 내는)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종자, 즉 (성욕의 상황)을 조성하고 결합의 욕망을 강화시킴으로써 몸의 각 기관의 습도와 온도를 높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엔체팔루스>, 즉 뇌의 중앙에 있는 공동 뒷부분은, 오감이 받아들인 무분별한 자극을 수용하고 그 자극을 평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래서 오감이 감지한, 대상에 대한 욕망이 지나치게 되는 경우, 이 평가 기준이 위축되면서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의 허상만 밝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슬픈 일이 기쁜 일로 보이게 되는 등의 판단 착오가 생기면서 육체와 정신이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육체와 정신이 불길에 휩싸이게 되는 까닭은, 기쁨을 느끼는 순간 온몸의 열기가 몸의 표면으로 치솟기 때문이다.(절망하는 순간에는 이 열기가 몸 깊숙이 스며들기 때문에 한기를 느낀다) 그러니까 아르날도의 치료법에 따르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확신과 희망의 싹을 잘라 버리면 생각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면 나의 병은 치료된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대상을 다시 만날 가능성이, 혹은 희망이 나에게는 거의, 혹은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만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취할 수 없고, 취한다고 하더라도 수습할 수 없고, 수습한다고 하더라도 내 곁에 둘 수 없었으니, 이는 수도에 전념해야 하는 나의 수련사 처지와, 내 집안이 나에게 지운 의무의 굴레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구원을 받은 것이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서책을 덮었다. 바로 그 순간에 사부님이 그 방으로 들어왔다.
한밤중
식당 쪽으로 내려오던 우리는 바깥에서 들려 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주방 쪽으로는 일렁거리는 횃불도 보였다. 사부님은 재빨리 들고 있던 등잔을 불어 껐다. 우리는 벽에 바싹 달라붙은 채로 걸어내려와 주방으로 통하는 문에 접근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잠시 후, 소리와 불빛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주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럿이 앞뒤 없이 떠들어대는 소리로 보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우리는 재빨리 지하 납골당을 통해 교회로 나왔다. 교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교회 남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을 때 회랑에는 여러 개의 횃불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수도사들 무리에 묻어 그쪽으로 달려갔다. 횃불 아래 드러난 면면으로 보아, 수도사 숙사와 순례자 요사에서 수도사들이 거의 다 나온 것 같았다. 내 눈에, 경호병들에게 붙잡혀 있는 얼굴이, 눈의 흰자만큼이나 하?方?질린 살바토레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내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내 생각 속에서 나를 괴롭히던 바로 그 여자였다. 내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알아본 듯한 그 여자는 필사적인 애원이 묻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달려나가 여자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부님은 내 손목을 비틀어 잡으며 나지막한 소리로 매정하게 꾸짖었다.
'죽고 싶은 게냐?'
사방에서 수도사들과, 그날의 수도원 빈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곧 수도원장과 베르나르 기가 당도했다. 경호대장이 두 사람에게 보고한 사건의 경위는 대강 이러했다.
진상 조사에 눈을 댄 이단 심문관 베르나르 기의 명을 받고 경호병들은 야간에 경내 순찰을 강화했다. 이들은 정문에서 교회에 이르는 길, 뜰, 그리고 본관 앞을 순찰할 때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왜? 나는 그 가닭을 생각해 보았다. 까닭을 납득하기까지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주방과 식당을 쑤시고 다니던 베르나르 기가 불목하니나 요리사들로부터, 정체 불명의 괴한이 야간에 수도원 성벽과 주방 사이를 숨어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수도원 경내 지리라면 손바닥 보듯이 훤하다고 큰소리치던 살바토레는 주방과 곡물 창고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했기가 쉬었다. 그렇다면 그날 오후에 베르나르 기로부터 불시 심문을 받았던 사람들은 겁이 났던 나머지 베르나르 기에게 정문에서 본관에 이르는 길목을 한번 잡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한 것이 분명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어둠과 안개 속을 순찰하던 경호병 순라군들은 이렇게 해서 베르나르 기의 그물에 걸려든 살바토레와 여자를 붙잡았을 터였다.
'이런 성소에 여자라니!'
베르나르 기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나서 수도원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원장 어르신! 단순히 한 수도사의 파계와 파행이 지은 허물에 불과하다면, 이자에 대한 문죄는 원장의 재판권에 맡겨 두어야 옳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허나 이 두 사악한 것들의 밀약이 빈객의 안전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질 때가지는 빈도 등이 우선 이를 따져보는 것이 순서일 줄 압니다. 자, 너희 불한당들을 듣거라!'
베르나르 기는, 살바토레가 한사코 감추려고 하는 보퉁이를 배앗으면서 호령했다.
'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나는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았다. 칼 한 자루, 검은 고양이 한 마리와 달걀 두 개가 들어 있을 터였다. 과연 그랬다. 보자기를 푸는 순간, 고양이는 앙칼지게 가르랑거리며 도망쳐 버렸다. 두 개의 달걀은 보자기 안에서 깨어지고 짓이겨져,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피, 혹은 담즙으로 보일 법했다. 그러니까 살바토레는 주방으로 들어가 고양이를 죽이고 눈알을 뽑아 낼 참이었던 모양이었다. 말똥에 침 뱉을 여자를 꼬여 들이면서 그가 무엇을 사례로 약속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곧 살바토레가 여자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여자의 몸을 뒤지라는 베르나르 기의 명이 떨어지자 경호병들은 입가에 음흉한 웃음을 개어 바르고는 여자의 몸을 뒤졌다. 여자의 품안에서 갓 잡은 수탉 한 마리가 나왔다. 일이 잘못되려니까 그랬겠지만 밤이라서 수탉도 고양이처럼 검은 색으로 보였다. 나는 여자가 받은 수탉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며칠 전날 밤에 황망 중에 그 귀한 황소 염통까지 버리고 달아났던 여자에게 닭 한 마리는 너무 초라한 사례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검은 고양이와 수탉이라... 이런 것으로 부리는 잔재주를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베르나르 기의 시선이 둘러보다가 윌리엄 수도사에게서 멎었다. 그느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윌리엄 형제, 형제도 3년 전에 킬케니에서 이단 심문관을 지냈으니 잘 아실 게요. 여자가, 검은 고양이로 둔갑한 악마와 교접한 사건을 말이외다.'
내 보기에는, 사부님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답을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부님의 소매를 당기며 속삭였다.
'사부님, 말씀하십시오. 여자에게 저 닭은 식구들에게 먹이는...'
그러나 사부님은 조용히 그러나 매정하게 내 손을 뿌리치고는 베르나르 기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결론에 이르시는 데 꼭 빈도의 과거 경험 같은 게 필요한 것은 아닐 겝니다만...'
'그래요? 하기야 너무나 명백한 증거가 있는 터이니 그럴 필요가 없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분의 경험을 들어 보기로 할까요?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문에 관한 글에서 부르봉 사람 스테판느는, 성 도미니크가 팡조에서 이교도들을 상대로 설교를 마친 뒤 여자들에게, 곧 그들이 섬기던 이교신의 정체를 알아볼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난데없이 대중들 속에서 크기가 개만한, 무시무시한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왕방울 같이 큰 눈으로는 불길을 뿜고, 시뻘건 혀는 배꼽까지 늘어져 있는 데다 짤막한 꼬리는 하늘로 치솟아 있더라지요. 꼬리가 치솟아 있었으니 냄새가 고약한 뒤가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이거야말로 성당 기사단 등 사탄의 추종자들이 회합 때 입을 맞춘다는 <항문>인 것입니다. 이 요사스러운 고양이는 여자들 사이를 근 한 시간이나 돌아다니다가 종루의 줄을 타고 올라갔는데 좌중에는 악취가 진동하더랍니다. 알라누스 데 인솔리스의 말에 따르면 고양이는 곧 교활하다는 말에 어울리는 카타리 파 이단자들도 이 고양이라는 짐승만은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사탄의 추종자들이 항문에다 입을 맞추는 것은 이 고양이를 악마의 대왕으로 여기기 때문인데, 카타리 파가 이 짐승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지요. 드 베르뉘 사람 기욤도 저서 <규범에 대하여>에서 이 사탄의 의식을 두고 구역질 나는 의식이라고 한 바 있답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역시 고양이를 악마의 화신이라고 했었지요. 나의 사형 푸르니에는, 까르까손느 사람 고드프루아 조사관을 종신하는 자리에, 악마의 화신인 검은 고양이 두 마리가 나타나 산 사람들에게 겁을 주더라고 회상한 적이 있습니다.'
수도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는 성호를 그었다.
베르나르 기는 위엄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원장 어른, 어른께서는, 죄인들이 익히 이런 소도구로 잔재주를 부린다는 걸 잘 모르실 겝니다. 허나 나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입어 압니다. 나는, 형제들이 잠자리에 든 어두운 밤에 검은 고양이를 이용해서 악마의 잔재주를 피우는 사악한 무리를 무수히 보아왔으니까요. 이들이 고양이로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가? 밤중에 먼 곳까지 달려가, 음탕한 인쿠부스로 둔갑한 음욕의 노예들을 끌어 내는 것입니다. 악마는 그들에게 수탉이나 검은 동물 형상으로 나타나 나란히 눕기도 한답니다. 나란히 누워서 무슨 짓을 하는지는, 바라건대 묻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알기로, 다른 곳도 아닌 성도 아비뇽에서만 해도, 사악한 무리들이 마법으로 음약을 만들어 교황 성하의 수라에 섞은 적이 있습니다. 성하께서 다행히, 형상이 뱀의 혀 같은 보석에 에메랄드와 루비를 박은 귀물을 가지고 계신 덕에 신명을 보전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귀물에게는 독물과 닿으면 변색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프랑스 국왕이 성하께 이런 귀물을 열 개나 진상한 덕분에 성하께서 위난을 면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장 어른께서는 십여 년 전에 체포된 이단자 베르나르 델리시외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자의 거처에서는 흉측한 마법의 서책이 발견되었는데 이 서책에는 사람을 헤치는 독약의 제조법이 소상헤게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그 집에는, 급소에 빨간 원을 그린,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교황 성하의 제웅도 있었습니다. 이 제웅을 줄에 매달아 겨울 앞에 걸어두고 바늘로 급소를 콕콕 찌른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끔찍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성하께서는 그래서 작년에 <거울에 대하여>(1326년 교황 요한 22세가 쓴책, 요한에 따르면 거울이란 하느님이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게 창조한 사람을 의미한다.)를 통하여 이를 단죄하시었습니다. 이곳 장서관에도 그 필사본이 있을 것인즉 원장께서 친히 읽으실 수도 있습니다.'
'있습니다. 있고 말고요.'
원장이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제 내 눈에 이 사건의 진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수도사는 마녀를 꾀어 악마의 의식을 베풀고자 했습니다만 다행히도 우리가 이를 사전에 막을 수 있게 되었으니 다 하느님 은덕일 터입니다. 악마 의식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가요? 이는 차차 밝혀질 것입니다만 이를 밝히는 데 빈도가 어찌 몇 시간 단잠의 희생을 마다하겠습니까? 원장 어른께서는 모쪼록 이것들을 감금할 자리를 마련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장간 지하에는 몇 개의 빈 방이 있습니다. 다행히도 쓰일 데가 없어서 몇 년은 족히 비어 있었습니다.'
원장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다행일 수도 있고 불행일 수도 있지요.'
베르나르 기가 비아냥거렸다.
'그 방을 쓰지 않았으니 수도원 기강이 이 모양이 아니냐...', 베르나르 기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경호병들에게 명령했다.
'이 수도원 수도사의 안내를 받아 이자와 마녀를 독방에다 분리 감극하라. 수도사는 벽의 고리에다 단단히 묶어 두되 심문이 시작되면 언제든 끌어 내어 올 수 있도록 하라. 여자는, 정체가 분명해진 이상 화형대로 보내는 마녀 재판이 따로 열릴 터이다. 따라서 밤중에 끌어 내어 심문할 일은 없을 것이다.'
베르나르 기는 끌려가는 살바토레에게, 진실을 말하고 공범을 대면 죽음을 면하는 길도 있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은 대장간 지하로 끌려갔다. 살바토레는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린 사람처럼 조용히 끌려 나갔고, 여자는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발버둥치며 끌려 나갔다. 그러나 여자가 외마디 소리로 뱉어 내는 사투리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베르나르 기나 경호병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에는 권능을 베푸는 말이 있고, 무리를 비속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말이 있다. 평범한 대중의 속된 언어가 바로 후자의 범주에 속하는데 , 하느님께서는 마땅히 이들에게 지혜의 세계와 권능의 세계에서 두루 통용될 자기 표현의 능력을 선물로 주셔야 했을 터인데 어째서 그 반대로 하셨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여자를 따라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사부님도 그런 낌새를 느꼈던지 내 소매를 잡으면서 조용하게 꾸짖었다.
'잠자코 있거라, 돌대가리 같으니! 잊어버려라! 벌써 화형주의 노린내가 풍겨 나고 있는데도 모르느냐?'
착잡한 심정으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에다 손을 올렸다.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나는 뒤를 돌아다보지 않고도 그 손의 임자가 우베르티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뒤에서 우베르티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지금 저 마녀를 보고 있는 것이지?'
우베르티노가 나와 그 여자의 관계를 알 리 없었다. 따라서 그는 오로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그 무서운 형안으로 나를 뚫어 보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나는, 나를 두고 내가 아니라고 했다.
'아닙니다. 여자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 여자는 마녀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저 여자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 네가 저 여자를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은 저 여자의 아름다움 때문이렸다?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하지? 그러나... 아름다움 때문에 네가 저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면, 네가 저 여자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번민하고 있다면, 네가 저 여자를 보고 욕망을 느긴다면 그것만으로도 저 여자는 마녀의 혐의를 벗지 못한다. 보아라, 너는 번민하고 있지 않느냐. 저 여자에게 걸린 마녀라는 혐의가 여자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지? 그 때문에 너는 번민하고 있는 것이지? 정신을 차리거라. 행자여, 육신의 아름다움은 가죽에서 머무는 법이다. 그 가죽을 뚫어 볼 수 있다면, 여자라는 것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이성으로 인한 번민은 사라진다. 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점액과 피와 체액과 담즙이니라. 저 코, 저 목, 저 배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느냐? 알면 구역질이 날 게다. 손가락으로 똥을 만지기를 싫어하면서 어째서 너는 똥자루는 안고 싶어하느냐?'
나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마침 사부님이 우베르티노의 어깨를 밀어 나를 풀어 주었다. 사부님은 우베르티노에게 핀잔을 주었다.
'우베르티노, 웬만큼 해두지 그래요. 여자는 곧 고문을 당하다가 화형주에 걸릴 겁니다. 그리고는 당신 소원대로 점액과 피와 체액과 담즙으로 돌아갈 테지요. 허나 하느님이 만드시고 꾸미신 가죽을 꿰뚫어 보는 것은 사문살이를 웬만큼 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겁니다. 때가 오면 당신 역시 저 여자와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인즉 그 아이에게 너무 겁을 주지 마시오.'
'나는 죄인이야, 죄인... 그래, 죄인이라고 하는 짓이 늘 이 모양이지...'
우베르티노가 잔뜩 기가 죽어 중얼거렸다.
모두가 제각기 한 마디씩 하면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부님은 미켈레 수도사를 비롯한 소형제회 수도사들과 한동안 그 자리에 더 머물렀다. 그들이 의견을 물어오자 사부님이 대답했다.
'아직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베르나르는 구실을 하나 잡아도 단단히 잡은 겁니다. 이 수도원에는, 아비뇽에서 교황을 해치려고 하던 자의 수법과 똑같이 사악한 자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직은 증거가 없으니, 이 구실이 내일의 모임에 당장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오늘 밤에 베르나르는 저 가엾은 것들로부터 무슨 단서를 얻어내려고 할 테지요. 그러나 이렇게 해서 무엇을 얻어내었다고 해도 당장 내일 모임에서는 이게 무엇인지 공개하지 않을 겁니다. 왜? 베르나르는 능히 이런 걸 뱃속에 넣고 있다가 나중에, 자기네 입장이 불리한 결정적인 순간에 이용할 위인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으로써 능히 회담의 향방을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 위인이라는 것입니다.'
'베르나르는 저 수도사를 윽박질러 우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 만들까요?'
미켈레가 물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랄 일이지요.'
사부님이 대답했다. 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살바토레와 레미지오는 저희 과거를 사부님에게 자백한 바 있다. 물론 우베르티노도 이들의 과거를 알고 있다. 만일에 살바토레가 베르나르에게, 이 사실, 즉 사부님과 우베르티노도 그들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백할 경우, 이들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진다는 뜻이었다. 잘못하면 한 동아리로 몰릴 가능성 또한 없지 않았다.
사부님이 미켈레를 돌아다보면서 힘없이 말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수밖에는, 적어도 지금은 다른 도리가 없어요. 만사는 분기정입니다. 따라서 속을 끓인다고 뒤집히는 게 아니잖겠어요?'
'그럽시다. 하느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성 프란체스코도 우리를 도우실 것이고요.'
미켈레의 말에 모두가 성호를 그었다.
'아멘.'
듣고 있던 사부님이 비아냥거렸다.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중재합니까? 교황의 논리에 따르면 성 프란체스코는 하느님을 친견하지 못한 채 어디에선가 최후의 심판일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는 소형제회 수도사들을 바라보면서 제롤라모 주교가 투덜거렸다.
'저 이단자의 우두머리인 교황 요한에게 저주 있으라! 그자가 되어먹지 않은 망발로, 우리와 성자 사이를 가로막으니 죄 많은 우리는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
제5일
1시과
전날 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사부님이, 사절단 회의에 늦겠다면서 나를 두드려 깨웠을 때는 이미 1시과 성무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오고 있을 즈음이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그 수도원에서 닷새째 아침을 맞았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날 밤의 안개가 부드러운 융단이 되어 고원 전체를 덮고 있었다.
밖으로 나갔다. 수도원은 그 전에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교회, 본관, 집회소 같은 수도원의 주건물은 멀리서도 보였지만, 작은 건물들은 안개에 묻혀 있어서 지근거리고 다가서기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가축들이 무의 심연에서 불쑥불쑥 솟아나는 것 같았다. 사람들 역시 안개 속에서 처음에는 잿빛 유령처럼 형상만 생겼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물화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축이다, 사람이다 하는 것만 분간할 수 있었을 뿐, 조금만 떨어진 곳에서는 그 사람이 누군지는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북부 기후대 출신인 나에게 그러한 광경이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내 고향의 평야와 성을 떠올리며 그 안개에 묻힌 아침 시간의 평화를 즐길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날 아침의 날씨는 나의 정신 상태와 놀라우리만치 비슷했다. 집회소 쪽으로 다가가는 나의 마음은, 뒤숭숭했던 꿈자리를 현실로 체험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몹시 무겁고 침침했다.
집회소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베르나르 기가 있었다. 그는 누군가와 마주서서 이야기를 하고 잇었다. 나는, 베르나르 기의 이야기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정체불명의 이야기 상대는 베르나르 기에게 무엇인가를 건네주고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 역시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내 앞으로 지나가려는 참인 모양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나서 가만히 보니 뜻밖에도 말라키아였다. 말라키아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들 눈에 띄기가 싫었던 모양이었다.
말라키아는 거기에 있는 사람이 나인 줄 모르고 지나갔을 터였다. 나는 두 사람이 왜 만났는지 궁금했다. 베르나르 기는 말라키아로부터 받은 몇 장의 서류 같은 것을 훑어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류를 읽던 베르나르 기가 집회소 앞에 선채 손짓으로 경호대장을 불렀다. 대장이 다가오자 몇 마디 귓속말을 건넨 그는 곧장 집회소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를 따라 집회소로 들어갔다.
집회소에 들어가 보기로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겉에서 보기에는 그저 크기가 고만고만한 건물인 집회소였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렇게 짜임새가 있을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고 나서야 안 사실이지만 집회소는, 화재에 일부가 소실된 수도원 교회 자리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밖에서 집회소로 들어가자면 먼저 새로운 양식으로 지어진 정문을 지나게 되는데, 이 정문 옆으로는 밋밋한 아치가 있고 위로는 원화창이 솟아 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교회의 배랑자리에 지어진 현관을 지나야 한다. 현관을 지나면, 구식 아치형 문이 나오는데, 이 문의 반달 꼴 홍예문에는 갖가지 문양이 인각되어 있다. 홍예문 있는 자리는 옛날의 교회 정문 자리였다.
홍예문의 부조는, 수도원 교회 회랑의 조각 못지 않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보는 사람을 심란하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랑의 조각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홍예문 한가운데엔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가 있었다. 그 옆으로는, 세계의 만백성에게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받은 열두 제자들이 갖가지 자세로 갖가지 물건을 손에 들고 임립해 있었다. 그리스도의 머리 위로는, 열두 개의 방이 있는 방주가 있었고, 그리스도의 발치에는 말씀을 받아들일 만방의 백성들이 줄을 짓고 서 있었다. 입은 옷으로 보아 히브리 인도 있었고, 갑바도기아인, 아랍인, 인도인, 프뤼기아인, 비잔티움인, 아르메니아인, 스키타이인, 로마인들도 있었다. 그러니 열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방주 위로 서른 개의 둥근 뼈대를 구성하고 있는 그림 속의, 사람 같은 괴물, 혹은 괴물같은 사람의 그 속하는 지방이 어디인지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거기에 그려진 것은 <박물지>나 먼 나라 여행자들의 여행기 같은 데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들이었다. 더러 짐작이 가는 나라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나에게 생소했다. 가령 손가락이 여섯 개씩인 육지족이 있는가 하면, 나무 벌레로부터 태어나는 목신족, 비늘에 덮인 꼬리로 뱃사람들을 유혹하는 시레네스가 그랬다. 뿐만 아니었다. 땅굴을 파고 들어감으로써 태양의 열기로부터 몸을 지킨다는 새까만 이디오피아 인, 이마에 방패만한 외눈이 달린 <퀴클롭스 족>, 머리와 젖가슴은 여자의 머리와 젖가슴, 배는 암늑대의 배, 꼬리는 돌고래 꼬리인 <스퀼라>, 늪지와 에프그마리데스 강가에서 산다는 털복숭이 인도인, 말하는 소리가 개짖는 소리와 똑같다는 <퀴노케팔리>, 한 발로 내딛다가 햇빛을 피하고 싶으면 그 큰 발을 일산처럼 펴고 그 아래로 들어간다는 <스키오포데스>, 입이 없어서 코로만 공기를 들이마시고 사는 그리스의 <아스토마트>, 수염을 기른 아르케니아 여자들, <퓌그마이오이>, 머리가 없어서 입은 배에, 눈은 어깨에 달린 <블렘마에스>, 12척 장신에, 발목에는 털이 나있고, 엉덩이에는 쇠꼬리가 달려 있으며, 발이 흡사 낙타 발굽과 같은 홍해의 괴녀들, 발이 거꾸로 달려 있어서 발자국만 쫓다가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가 없는 기괴인간, 머리가 셋인 삼두족, 눈이 화등잔만한 인간, 육신은 인간의 육신이되 머리는 괴상한 동물의 머리인 키르케 섬의 괴물들...
홍예문 벽에는 이 밖에도 별별 기괴한 형상이 다 인각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상들은 이 땅의 악마나 지옥의 고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전파되어 이미 알려져 있는 세계 뿐만 아니라 미지의 세계에까지 전파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어서 보기에 하나도 역겹지 않았다. 따라서 이 홍예문벽은 회합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질 빛나는 그리스도 교회 통일의 유쾌한 약속을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복음서의 해석을 둘러싸고 오래 적대하던 사람들이 만나기에 집회소는 참으로 훌륭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 집회소 문턱 너머에서 해묵은 반목이 회합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서 나는 나 자신을 꾸짖었다. 기독교 사상 그같이 중요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고작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 붙잡혀 한숨이나 쉬고 있던 나야말로 용서하기 어려운 죄인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홍예문 벽에 새겨진 평화의 위대한 약속에 비겨 보면, 내 고통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던가. 나는 하느님께 내 허약한 영혼의 용서를 빌고는 새 마음으로 그 집회소 문턱을 넘었다.
집회소 안으로 들어서고 보니, 반원 꼴로 배치된 의자에는 아미, 양 진영의 사절이 대좌하고 있었다. 양 진영의 사절단의 의자가 만나는 지점에는, 수도원장과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 추기경이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의 자리가 황실 사절단과 교황청 사절단을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 의사 발언을 기록하러 들어간 나에게 윌리엄 수도사는 황실측, 그러니까 소형제회 자리에다 내 자리를 잡아 주었다. 내 옆에는 미켈레가 아비뇽에서 온 다른 프란체스코 수도사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자리가 이렇게 배치된 것은 이탈리아인 대프랑스인의 격전장 같은 냄새를 풍기는 대신 프란체스코 회 회칙 지지자들과 이 회칙의 비판자들인 교황청의 가톨릭 옹호자 연합 세력의 토론장 분위기를 내고자 함이었다.
체제나 사람 미켈레를 중심으로 모인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형제회 이론가로는 아끼뗀느 사람 아르노 수도사, 튜캐슬의 휴 수도사, 페루지아 헌장의 기초에 동역했던 안위크 사람 굴리엘모, 카파의 대주교 제롤라모, 베렝가리오 탈로니, 베르가모 사람 보나그라치아, 그리고 적지라고 할 수 있는 아비뇽 교황청에서 온 소형제회 수도사들의 면면이 보였다. 반대쪽에는 아비뇽 교황청의 신학자들이 있었다. 아비뇽의 박학인 로렌초 데코아르콘, 파도바의 주교, 빠리의 신학자 장 다노박사가 보였다. 입을 꾹 다문채 무겁게 앉아 있는 베르나르기 옆으로는, 이탈리아에선, 지오반니 달베나라는 이름으로 불린 도미니크 회 수도사 장 드 본느가 보였다. 사부님은 나에게, 장 드 본느는 나르본느에서 이단 심판관을 지내면서 수많은 베기니 파 수도사드로가 프란체스코 회의 제 3회 수도사들을 재판에 회부한 장본인이자, 그리스도의 청빈에 관한 믿음을 이단으로 몬 장본인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청빈과 관련된 교리 싸움은 장드 본느의 이러한 조처에 대해 베렝가리오 탈로니가 정면으로 교황에게 이 문제를 직소하면서 불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부님 말씀에 따르면, 당시 이 문제에 대한 뚜렷한 견해가 없었던 교황은 이 두사람을 아비뇽으로 부르는데 이들은 아비뇽에서 수차례 격렬한 논쟁을 벌였을 뿐 결론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런데, 앞에서 쓴 바 있지만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페루지아에 모여 그리스도의 청빈을 지지하는 헌장을 채택함으로써 어정쩡한 교황청 태도에 크게 반발하게 된다. 아비뇽 교황청 사절로 장 드 본느 옆으로는 알보레아의 대주교를 비롯한 아비뇽 신학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도원장이 일어나, 그 만남이 저간에 있었던 일련의 사태를 요약해서 마무리하게 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개회 인사를 시작하고는, 체제나 사람 미켈레의 주도 아래 주후 1322년 페루지아에서 열렸던 소형제회 총회가, 완전한 삶의 본인 그리스도와 그분이 사신 삶의 길을 따르면서 사도들은 재산이나 봉물을 공동으로 소유하지 않았다는 신중하고도 현명한 주장을 했는데, 이는 성서의 여러 구절에서도 보이는 바, 가톨릭의 신앙과 교리에서도 부인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장의 말은 이렇게 계속된다.
'...그런 뜻에서 소유의 거부는 참으로 갸륵하고 신성한 것인데 우리는 초대 교회의 교부들 역시 이를 신성한 교리로 따랐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1312년의 비엔느 공의회도 이를 긍정적으로 언급한 바 있고, 1317년에는 교황께서도 친히, 소형제회의 적법 여부를 다룬 율령에서 비엔트 공의회의 심의 결과를 선명하고 건전하고 참으로 갸륵한 것이라고 평론하신 바 있습니다. 따라서, 교황청이 건전한 교리로 인준한 것은 반드시 받아들여지되, 표류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규정한 페루지아 총회는 사실상, 비엔트 공의회의 승인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듯합니다. 이 공의회의 결정에는 저명한 신학자이신 영국의 윌리엄 수도사, 게르만의 하인리히 수도사, 아끼뗀느의 아르노 수도사, 프랑스의 관구장인 니꼴라 수도사, 박학한 신학자이신 기욤블로끄 수도사, 블로냐 관구의 토마스 수도사, 성 프란체스코 관구의 피에트로 수도사, 카스텔로 관구의 페르난도 수도사, 뚜렌느 관구의 시모네 수도사가 서명했습니다. 다음해, 교황께서 사도 헌장 <아드 콘디토렘 카노눔>을 제정, 반포하시자 베르가모의 보나그라치아 형제가 이 사도현장이 이녁의 교리에 위배된다고 교황께 탄원했고, 교황께서는 아비뇽 교황청 정문에다 내걸었던 이 사도 헌장을 거두게 하신 뒤 몇 군데 수정을 가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이 수정이지, 그 직후 보나그라치아 형제가 일년 동안 투옥당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은 수정이라기보다는 강화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같은 해에 교황께서는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해진 저 <쿰 인테르 논눌로스>를 제정, 페루지아 총회의 결정을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 대목에서 베르트란도 추기경이 수도원장의 말을 점잖게 가로막으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1324년 저 바이에른의 루드비히가 작센하우젠 선언이라는 것을 들고 나와 공연한 문제를 일으킴으로써 교황 성하의 심기를 미편하게 했던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이 작센하우젠 선언에서 루드비히는 별 명백한 이유도 없이 페루지아 총회의 결의를 지지하지 않았습니까... 청빈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루드비히 황제가 프란체스코 회의 청빈을 죽어라고 비호하다니 아무래도 우습지 않습니까... 바로 이 작센하우젠 선언에서 루드비히는 교황 성하를 평화의 적으로 규정하고, 불화와 분쟁을 야기시키는 데 광분하고 있다면서 결국 성하를 이단자, 혹은 이단자의 괴수라는 망발까지 늘어놓고 있지 않았습니까?'
'꼭 그렇게 말씀하실 일은 아니지요.'
수도원장은 중재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베르트란도 추기경은 수도원장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사실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교황 성하께서 <퀴아 쿠오룬담>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황제의 터무니없는 간섭 때문이 아니던가요? 미켈레 형제는 잘 아시겠지요? 교황께서는 결국 그대를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미켈레 형제가 페루지아에서 해명 서한을 기초하고도 병을 빙자하여 스스로 아비뇽으로 오는 대신 피단차 사람 지오반니와 페루지아 사람 우밀레 쿠스토디오를 보냈던 것으로 압니다. 물론 우리도 당시에야 미켈레 그대가 칭병하는 줄을 몰랐지요. 페루지아의 <교황파 당원>형제들이 교황께, 미켈레 그대가 아프다는 것은 빈말이고, 사실은 바이에른의 루드비히와 은밀하게 접촉하고 있다고 고변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몰랐을 테지요. 허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지사... 내 지금 체제나의 미켈레 형제를 보니 아주 건강하신 것 같은데, 앞으로 아비뇽에 오시더라도 내내 그렇게 건강하기를 바랄 일입니다. 양쪽의 사려 깊으신 분들이 이렇게 애들 쓰시는데, 바라기로는 미켈레 형제가 몸소 아비뇽으로 가시어 교황 성하를 친견하시고 독대하신 자리에서 직접 이런 것을 해명했으면 합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의 소망은, 우애로운 토론을 통한 대동 화합입니다. 자애로운 아버지이신 교황 성하와 효성스러운 아들들인 우리 수도자 사이에 이런 벽이 있어야 할 까닭이 없지를 않습니까? 우리 사이가 왜 이렇게 벌어져 있습니까? 우리 성모님 교회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속인의 훼방 때문이 아니던가요...'
이번에는 수도원장이 추기경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교회의 사람이고, 교회가 큰 빚을 지고 있는 교단 수도원의 원장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좌중이 술렁거렸다. 가독교 교회가 베네딕트 교단에 빚을 지고 있다는 발언에 다른 교단 수도사들이 토를 달고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소요는 오래 가지 않아서 원장은 말을 계속할 수 있었다.
'추기경께서는 황제를 성모님 교회와는 아무 인연도 없는 속인이라고 하셨지만, 요컨대 나는 루드비히 황제가 교회의 문제와 무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앞으로 바스커빌의 윌리엄 형제가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교황청 사절단과 프란체스코 성인의 제자들 사이에 충분한 의견 교환이 가능한 모임이 있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나는 성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들이 이 모임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스스로 교황 성하의 효성스러운 친자들임을 인정한 것이라고 보는 바입니다.'
이어서 원장은 미켈레 수도사 및 마켈레 수도사의 지명을 받아 발언할 사람은 아비뇽에서 미켈레 수도사가 취할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장의 이 말에 체제나의 미켈레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몹시 기쁘고 고맙게도, 1322년 교황 자신으로부터 청빈의 문제에 대한 진상 조사서의 제출을 요구받았던 카잘레 사람 우베르티노 형제가 마침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베르티노 형제라면, 프란체스코 회의 확고 부동한 이념으로 자리잡은 청빈 교리의 핵심을 박학답게, 명쾌하게, 그리고 굳은 믿음의 바탕 위에서 간추려 설명해 줄 것입니다.'
이윽고 우베르티노가 일어났다. 나는 그가 목회자로서, 교회 행정가로서 그토록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던 이유를 이해했다. 그는 화려한 몸짓과 함께 연설의 포문을 열였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설득력이 있었고, 미소는 매혹적이었으며, 논리는 명쾌하고도 힘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청중을 자기 논리의 맥락 안에 붙잡아 두는 힘이 있었다. 그는 일단 페루지아 총회 헌장의 이론적인 근거에 대한 박식한 해설을 서론으로 삼았다.
'먼저,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이 이중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인 무슨 말인고 하니, 그분들이야말로 <신약성서>가 이루어질 당시의 교회의 근간을 이루는 고위 성직자들이었을 터이고 따라서 분배와 배분의 권능과 관련된, 교회 관리자나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물질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을, 개인적인 인격체, 믿음을 완성시킬 교회의 머릿돌,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하던 이들로 보아야 마땅합니다. 이들이 바로 이런 이중의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관한한 소유의 개념도 두 가지로 나누어 검토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소유 중 한가지는 시민으로서 세속적인 재산을 소유하는 것인데, 이는 로마 제국의 법률도 <사유 재산권>으로서 이를 합법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개개인은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고, 이를 지킬 권리가 있으며, 재산권이 침해당할 경우에는 국가를 상대로 중재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로마 제국의 법에 따르면 시민으로서, 세속적인 재산의 소유자로서, 소유의 주체는 이 재산권이 침해당할 경우 로마 제국의 법정에 이를 탄원할 권리를 지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런 의미에서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이단입니다. <마테오의 복음서> 5장에서 마태오는, <누가 너를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어 주어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있지 않던가요? <루가의 복음서> 6장에는 조금 표현이 다르기는 합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권능과 이적의 능력을 거두어 이를 사도들에게 지웠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태오의 복음서> 19장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한 것을 생각해 보시면 명백해집니다.
이야기가 잠시 빗나갔습니다만, 전자와 같은 시민으로서의 소유가 있는가 하면, 자비를 베풀기 위한 세속적인 물질의 소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혹 사람에 따라 혹 <이우스 폴리>(하늘의 법)라고 불리기도 하는, 천부의 권리에 따라 얼마간의 물질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부여하는 권능인 <이우스 포리>(시장의 법)와는 달리 이 천부의 권리는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인간으로부터 침해당하지 않습니다. 소유권에 관한 한, 모든 사상이 분화되기 전에는, 어떤 물건이 어떤 사람에 의해 소유되는 일이 없었던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시대에는 물건이 가지려는 사람에게 그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물건의 소유권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뉘어져 있었는데, 원죄 이후로 우리 선조들이 비로소 물질의 소유권을 나누기 시작했고, 이로써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절대 소유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물질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원죄 이전의 소유 형태로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바울로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라고 말했듯이 그분들에게는 옷과 빵과 물고기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런 것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재산으로서의 소유가 아니라 일상의 소비재로서의 소유였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런 물질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절대적 청빈이 부정당하는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교황 니콜라우스 2세가 대회칙 <엑시이트 퀴 세미나트>를 통해 용인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반대쪽에서 장 다노가 일어나, 우베르티노의 주장은 상식적인 도리와 성서의 상식적인 해석에서 공히 벗어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발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빵이나 음식물처럼, 사용권을 행사하면 없어지는 것들을 두고 소유의 권리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당치 않습니다. 이는 사실상의 사용권 행사가 아닌 소모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과 3장에도 나와 있듯이, 초대 교회의 신도들에게도 공동의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공동 생활에 필요한 재산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개종하기 전과 같은 유형의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강림한 뒤에도 사도들은 유다 땅에다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무소유로 살겠다는 서원은, 꼭 필요한 물질의 소유까지 포기하겠다는 서원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들을 다 버렸다고 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재산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뿐입니까? 아담에게도 소유권과 재산이 있었습니다. 주인의 돈을 보관하던 종은 그 돈이 가진 힘을 행사하지도 소모하지도 않습니다. 소형제회에서 시도 때도 없이 휘둘러대는 전가의 보도, 곧 프란체스코의 추종자들은 관리하지도 소유하지도 않고 다만 사용할 뿐이라고 주장할 때마다 둘러대는 이 <엑시이트 퀴 세미나트>의 내용은, 소모되는 물질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의 사용권은 법적인 관리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물질을 소유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권리는 제왕이 주인 노릇하는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만물을 관리하는 권능을 부여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옷과 음식과 십일조로 들어온 돈과 신자들 공물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분이 가난하셨다면, 이는 그분에게 재산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고 무소유의 대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니다. 이익을 취하는 것과는 달리 단순한 법적 관리는 소유자의 재산을 늘려 주지 않습니다. 결국<엑시이트 퀴 세미타느>의 견해와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신앙과 도덕에 관한 문제에 관여하는 로마 교황은 전임자의 결정을 해제하고 반대되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카파의 주교 제롤라모가 불쑥 솟기라도 하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바로 이때였다. 말을 점잖게 하려고 무던히 애쓰는 것 같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지 그의 수염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반론하는 요지는 요령부득이었다.
'교황 앞에서든 나 자신 앞에서든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교황이 전임자의 결정을 해제하고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할 수 있다는 의견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이는 내가 교황 요한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한 믿음 때문에 사라센 인들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른 적도 있는 사람입니다. 어는 박학하신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하나 하지요. 어느 날 수도사들 사이에 멜기세덱의 아비가 누구냐는 문제를 두고 입씨름이 벌어졌더랍니다. 코페즈 수도원장이 이 박학한 분에게, 대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 박학한 분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코페즈여, 그대에게 화 있을진저, 그대는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은 모르는 척하면서 하느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을 기웃거리는 구나>하고 소리를 질러 주었다고 합디다. 우리가 바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나에게는 그리스도와 성모님과 사도들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신이자 동시에 인간이라는 사실보다 더욱 확연합니다. 문제는 전자를 부정하는 사람은 반드시 후자도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롤라모 주교는 의기 양양한 얼굴을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나느 윌리엄 수도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부님은 천정바라기만 하고 있었다. 사부님은, 제럴라모 주교를 잘 아는지라 그 수상한 삼단 논법을 나무라는 것 같지 않았다. 제롤라모 주교의 주장에 대해 장 드 본느가 다소 격양된 반론을 폈다. 장 드 본느는, 그리스도의 청빈을 믿는 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자들이라면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가지려면 신앙이 이를 중재해야 하므로 제롤라모가 말하는 전자와 후자는 서로 비교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 드 본느의 새로운 주장을 반박할 때의 제롤라모 주교는 조금 전보다는 더 날카로웠다.
'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나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복음서는 그리스도가 인간이어서 먹고 마셨으되, 이적을 행하는 것으로 보면 여느 인간이 아닌 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말할 일이 아닙니다.'
'마술사와 점쟁이도 이적을 행하기는 마찬가집니다.'
장 드 본느가 응수했다.
'하면, 마술사와 점쟁이가 행하는 이적을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이적과 동등하게 보고 싶으신 것인가요...'
좌중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논쟁은 초점을 이탈하고 있었다. 제롤라모는 의기 양양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 추기경까지 끌어들여 장 드 본느의 목을 죄기 시작했다.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 추기경께 한 말슴 여쭙겠습니다. 추기경께서는, 그리스도의 청빈을 믿음으로 지킨답시고 모로코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처에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다가 피를 흘려 온, 프란체스코 수도회 같은 교단을 이단으로 몰고 싶으신지요?'
윌리엄 수도사가 천장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중얼거렸다.
'오, 페트루스 히스파누스 성인의 혼령이시여, 저희를 좀 돌보아 주소서.'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자찬하는 제롤라모 주교의 말에 장드 본느가 발끈하면서 일어나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면서 소리쳤다.
'이것 보세요, 제롤라모 형제. 원하시면 귀 교단 수도사들이 흘린 피 이야기를 얼마든지 이 자리에서 거론하셔도 좋습니다만, 거론할 때마다 다른 교단 수도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것만은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롤라모 역시 언성을 높였다. 그는 이번에도 가만히 있는 추기경을 들먹거렸다.
'추기경 앞에서 감히 한 말씀 올립니다. 우리 시대에 들어서만도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는 아홉 명의 선교사가 순교했습니다. 그래 도미니크 회에도 이교도들 손에 순교한 선교사가 있던가요?'
얼굴을 붉히면서 벌떡 일어난 것은 도미니크 회의 알보레아 주교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선교사들이 타타르에 선교사를 파견하기 전에 이미 교황 인노켄티우스께서는 도미니크 회 선교사 셋을 이 땅에 파송한 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요?'
제롤라모 주교는 코웃음 치며 반격했다.
'호, 그랫던가요? 내가 알기로 프란체스코 수도회 선교사들은 타타르에 80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마흔 아홉 개의 교회를 세웠답니다. 도미니크 회에서는 모두 다섯 개의 교회를 세웠다지요? 그것도 여차직하면 도망치기 위해 해변에다 세웠다지요? 선교사는 모두 열다섯 명이었고요. 이것으로 일단 이 문제는 매듭을 지읍시다.'
제롤라모 주교의 말이 이렇게 나가자 알보레아 주교의 말도 곱지 않게 나왔다.
'무슨 매듭을 지어요? 암캐가 강아지 낳듯이 줄줄이 이단자들이나 내지르는 주제에 프란체스코 회는 만사를 자기네 공으로 돌리는 걸 좋아합디다. 프란체스코 회는 청빈을 뽐내고 순교자 수를 뽐냅디다만, 글쎄, 으리으리한 교회 짓고, 호사스러운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며 저희 멋대로 사고 팔고,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 그쪽 사람들 아니던가요?'
'아니에요, 이러지 마세요, 주교님. 제멋대로 사고 팔지는 않아요. 교황청 대리인인 서무계 수도사를 통해 수도원 서무계가 사고 파는 일을 할 뿐, 소형제회 수도사들은 그저 편리만 누릴 뿐이랍니다.'
'그러면 서무계 수도사 몰래 사고 판 일은 없다는 건가요? 나는 당신의 농장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건 내가 지은 허물이지요. 내 허물이 어찌 우리 교단의 허물일 수 있겠어요?'
제롤라모 주교가 화들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알보레아 주교의 반격이 주효했던 모양이었다.
수도원장이 나서서 두 사람을 말렸다.
'여러 어르신네께서는 빈도의 말을 좀 들어 주십시오. 오늘의 문제는 소형제회의 가난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청빈입니다.'
'그 문제라면, 나에게 일도양단의 명안이 있소이다.'
역시 제롤라모 주교였다.
'오, 프란체스코 성인이시여, 어리석은 목자들을 보호하소서...'
윌리엄 수도사가 하품에 섞어서 한 말이었다.
제롤라모 주교가 말을 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소형제회보다는 교황청 교리에 훨씬 가까이 닿아 있는 동방 정교회 및 그리스 정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청빈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단을 밥 먹듯이 하는 이 교회 분리주의자들까지도 불 보듯이 빤한 이 진리를 용인하고 있는데, 우리가 왜 이러는 겁니까? 우리가 왜 이를 부정함으로써 그들 이상의 이단자, 그들 이상의 교회 분리주의자들이 되려고 하는 거지요? 이 동양인들은, 우리 기독교에 이 진리를 부정하는 자가 있다는 걸 알면 돌로 쳐죽이려고 할 겁니다.'
제롤라모 주교의 말에 알보레아 주교가 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섰다.
'동방 정교회가 어쨌다고요? 그리스 정교회가 어쨌다고요? 그러면, 정확하게 그것과는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는데 왜 우리 도미니크 회 수도사에게는 돌팔매질을 않는답니까?'
'도미니크 회 수도사? 아, 거기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는데 그래요?'
'이것 보아요. 제롤라모 주교! 나는 소시적부터 그리스에서 살아온 사람이오. 당신은 그리스에 살아도 15년 밖에 못산 사람이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지요?'
'글세, 나도 도미니크 회 알보레아 주교라는 사람이 그리스에 산다는 말은 들었어요. 하지만 그리스는 그리스이되 대부분의 시간은 주교관의 주지육림에서 보낸다더군요. 하지만 여기에 있는 이 사람은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를 상대로 프란체스코 회 교리를 강론한 적도 있답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에 있었던 기간은 15년이 아니고 22년이니까, 그렇게 알아주면 좋겠어요.'
알보레아 주교는 교리 논쟁은 뒷전으로 밀어 버리고 길길이 뛰면서, 차마 입에 담기는 민망하나, 카파 주교 제롤라모의 수염을 당겨 보아야 진 짜 사내인지 계집인지 알 것 같다고 극언했고, 제롤라모 주교는, 자기가 당겨 보고 싶은 것은 알보레아 주교의 사타구니 수염이라고 응수했다.
두 주교가 양쪽 사절단 앞에서 육탄 공격을 벌일 지경에 이르자 소형제회 수도사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인의 장막으로 제롤라모 주교를 보호했다. 아비뇽 교황청 사절들은 도미니크 회 편을 드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되었던지 법의 소매를 걷어 붙이고 알보레아 주교 앞을 막고 나섰다. (주여, 당신의 어린양들 가운데서 뽑혀 나온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수도원장과 추기경이 이를 뜯어말리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소동은 오래 가지 않았고 곧 가라앉았다. 그러나 차분하게 가라앉았다고 좋아할 일은 못 되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들이 이번에는 차분하게 서로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교도 사라센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벌이는 싸움 같았다. 그러나 어느 편도 기독교인들 같지는 않았다. 시종일관 자리에 남아 있던 사람은 이쪽의 윌리엄 수도사와 저쪽의 베르나르 기 이렇게 두사람 뿐이었다. 윌리엄 수도사의 표정은 침울했고, 베르나르 기의 표정은 밝았다... 글쎄, 이것을 밝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이단 심판의 고수 베르나르 기는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험구가 오고 가다가 알보레아 주교가 실제로 카파 주교 제롤라모의 수염을 거머쥐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사부님께 물었다.
'사부님, 그리스도의 청빈을 증명하고 논박하는 토론은 이제 끝난 것입니까?'
'글쎄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묻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느냐? 복음서로서는 어차피 증명도 논파도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을, 입고 계신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셨을 게야. 걸레가 되면 버리셨을 테니까... 청빈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은 우리 프란체스코 회의 이론보다 훨씬 대담하다. 우리는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되 모든 것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퀴나스께서는, <물질을 소유하고, 그대 자신을 그 물질의 소유자로 여기되, 필요로 하는 자가 있거든 쓰게 하라, 이는 자비가 아니라 의무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허나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했느냐, 가난하지 않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청빈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아도 되느냐 하는 데 있다. <가난>의 의미는 궁전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땅의 물질을 다스릴 권리를 갖느냐 포기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께서는, 교황이 그 권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프란체스코 회가 말하는 청빈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황제 편을 들어 교황을 상대로 대리 전쟁을 치르고 잇는 것이야. 허나 마르실리오와 나는 이것을 양면전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희망은, 황제가 우리의 믿음을 지지하되, 이것을 정치에 원용했으면 하는 것이다.'
'차례가 오면 그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이 말을 하면, 황제측 신학자들의 견해를 설명하는 내 임무는 끝날 테지.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나는 아비뇽에서 열리는 두 번째 회의에도 참석해야 하는데, 내가 이런 말 했다는 걸 알고도 교황이 나를 아비뇽으로 오게 하겠느냐.'
'그럼 가만히 계실 요량이신지요?'
'두 개의 건초 더미 사이에서, 어느 쪽을 먼저 먹을까 망설이다가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는 나귀 이야기를 알지? 내가 시방 그 꼴이다. 내 옆으로는 두 적대 세력이 있으니까... 그러나 아직 때가 익지 않았다. 마르실리오는 루드비히 황제의 변신을 찬양하고 있다만, 미친 교황을 길들이는 채찍 노릇은 장히 한다 해도 황제가 그 전임자들보다 낫다고 하기는 어렵다. 저 사람들, 서로 물고 뜯는 짓 그만두면 지금이라도 말은 한마디 할 생각이다만... 어쨌든 너는 본 대로 기록해 두어라. 적어도 후세 사람들에게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는 알려야 할 터인....'
사부님과 내가 그 북새통에서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동안 입씨름은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베르나르 기가 손짓하자 경호병들이 들어와 양쪽 수도사들을 갈라놓으려 했다. 그러나 수도사들은 탁자를 쓰러뜨려 방호벽을 만들고는 그 뒤에 숨어서 차마 듣기에 민망한 욕지거리와 인신 공격을 주고 받았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 말은 누가 했고, 저 말은 누가 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내 귀에 들어온 말만 대충 적어보기로 한다. 발언 순서도 지켜져 있지 않다. 내 고국에서 벌어지는 논쟁과는 달라서, 지중해식 논쟁에서는 이쪽 발언과 저쪽 발언이 겹치는 경우가 많다. 화자가 어느 편에 속하는지는 독자 여러분이 헤아려 주기 바란다.
'복음서는, 그리스도에게 지갑이 있었다고 했다.'
'닥쳐라, 이놈아! 네놈들이 십자가 위에다 그 지갑을 그려 넣었지? 그렇다면 주님이 예루살렘에 계시면서도 밤마다 베다니아로 가신 것을 어떻게 설명할 테냐?'
'베다니아에 가서 주무신 건 주님 사정인데,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며 왜 알아야 하느냐?'
'이런 등신아, 주님은, 예루살렘 여관의 숙박비가 없어서 베다니아로 가셨던 것이다.'
'보나그라치아, 너야말로 청맹관이로구나.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뭘 드셨는지 알기나 하느냐?'
'그럼 너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주인으로부터 귀리를 받아 먹은 말을 그 귀리의 소유자라고 할 터이냐?'
'네 이놈, 감히 그리스도를 말에다 견주었지?'
'네놈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성직이나 팔아먹는 똥통 같은 교황청 성직자에 비교하는구나.'
'오냐, 그러냐? 교황이 네놈의 재산을 지켜 준답시고 송사를 몇 번이나 하더냐?'
'교회의 재산이지 그게 어디 우리 재산이냐? 우리는 그저 쓸 뿐이다.'
'그래, 쓰려고 으리으리한 교회를 짓고 금상을 앉혔더냐? 이 위선자, 회칠한 무덤, 상습범들 같으니! 온전한 삶의 원리가 자비에 있음이지 가난에 있음이 아니라는 걸 네놈들도 알텐데 그러는구나.'
'그건 네놈들의 괴수인 꿀돼지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렸다?'
'말조심 못하겠느냐? 이 깡패 같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네가 꿀돼지라고 부른 그분이 신성 로마 교회의 성인인 줄 왜 모르느냐?'
'성인이라고? 개가 웃겠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괴롭히려고 교황이 억지로 시성한 것도 모르느냐? 그런데 교황에게 시성할 자격이 있기는 있느냐? 이단자의 괴수가 무슨 놈의 시성이야?'
'오냐. 이단자의 괴수라는 말 잘 했다. 작센하우젠에 있는 바이에른의 꼭두각시가 한 말일 테지? 네놈돌이 신주 모시듯이 모시는 우베르티노가 재탕해 먹었고...'
'말조심 못하겠느냐? 이 돼지, 바빌론의 갈보, 매춘부의 사생아 같으니! 우베르티노는 그 해에 황제와 같이 있지도 않았다. 우베르티노는 아비뇽에서 오르시니 추기경과 함께 있었고, 교황이 우베르티노를 아라곤으로 보낸 게 바로 그때인 줄도 모르느냐?'
'알고말고... 모를 턱이 있나? 추기경 밥상머리에서는 청빈을 서약하고, 야반 도주해 가지고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기름진 이 수도원 식객이 되어 있다는 것도 안다. 여보, 우베르티노, 당신이 거기에 없었는데 누가 꼬드겼길래 황제가 당신 글을 읽었다지?'
'네 이놈, 황제가 내 글을 읽은 게 내 잘못이더냐? 너 같은 돌대가리의 글은 아무리 똑똑한 황제라도 못 읽을 게다.'
'내가 돌대가리라고? 하면 거위 타고 논 네놈들의 프란체스코는 그럼 유식하더냐?'
'이놈이 신성을 모독하는구나!'
'신성 모독은 네놈들이 했지, 술통 의식을 알고 있으렸다?'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몬테팔코의 키아라 침대로 기어들어가기 전에 너와 네 졸병들이 했다면서?'
'이런 놈에게 벼락 좀 안 떨어지나? 이놈아, 나는 그때 조사관이었고 키아라는 성인의 향내를 풍기며 이승을 떠난 다음이었다.'
'키아라가 성인의 향내를 풍겼다면, 네놈이 수녀들과 조과 기도할 때는 다른 냄새를 맡았겠구나.'
'잘한다, 잘해. 하느님 진노가 네놈을 칠 게다. 네놈들의 우두머리 되는 동 고트의 에크하르트, 브라누체르톤인가 뭔간 하는 영국놈 요술쟁이도 칠 게다.'
'왜들 이러십니까? 형제들, 왜들 이러세요? 고승 대덕들이 왜들 이러세요?'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 추기경과 수도원장이 가로로 뛰고 세로로 뛰면서 수도사들을 말렸다.
3시과
드잡이와 삿대질이 여전한 가운데, 문 앞에서 안내를 맡고 있던 수련사 하나가, 우박이 쓸고 간 벌판을 방불케 하는 그 난장판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윌리엄 수도사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세베리노가 긴히 뵙고자 한다고 전했다. 사부님과 나느 곧장 배랑으로 나갔다. 배랑에는 수도사들이 잔뜩 모여 집회소 안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맨 앞줄에는 알레산드리아 사람 아이마로도 섞여 있었다. 아이마로는 우주의 덧없음을 몹시 딱하게 여기는 딱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월감을 주체하지 못해 사람을 대할 때도 큰 은혜라도 베푸는 듯이 대하고는 했다. 그런 아이마로가 예의 그 큰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사부님에게 다가오면서 말을 걸었다.
'프란체스코 회가 있으니 그래도 기독교 국가의 기강이 이만이나 하지요.'
사부님은 노골적으로 업신여기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약간 거친 손길로 그를 밀친 다음 똑바로 구석에서 기다리는 세베리노 쪽으로 다가갔다. 세베리노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그는 우리 두 사람에게만 은밀하게 할말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집회소가 난장판이 되면서 호기심 많은 수도사들까지 몰려드는 바람에 집회소 배랑에는 그럴 만한 곳이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가 집회소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체제나의 미켈레가 집회소 문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사부님을 불렀다. 미켈레의 말은, 드잡이와 멱살잡이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것 같으니 어서 들어와 할말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두 더미 건초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에 놓인 사부님은 세베리노를 다그쳤다. 본초학자 세베리노는 주위의 귀를 의식했던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베렝가리오는, 욕장으로 가기 전에 저의 시약소를 들른 게 분명합니다.'
'그걸 어떻게 아시는가?'
사부님이 물었다. 사부님을 알아본 수도사들이 우리 쪽으로 접근했다. 세베리노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수도사님께서는, 베렝가리오가... 뭔가를 훔쳐 달아났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제 시약소에는 평소에 못 보던 서책이 한 권 있습니다. 물론 제 것이 아닌, 이상한 서책입니다.'
'이상한 서책일 테지. 당장 이리로 가지고 오시오.'
이렇게 말하는 사부님 얼굴은, 사절단의 추태를 바라보고 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밝았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뒤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사실은... 그 서책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습니다. 수도사님께서도 흥미롭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도사님께서 오시지요. 저는 그 서책을 꼭 수도사님께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의하지 않으면...'
세베리노의 말이 중간에서 토막났다. 나는 세베리노의 표정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장님 노인 호르헤가 그림자처럼 우리 곁에 붙어 있는 것을 알았다. 호르헤는 마법을 써서 소리나지 않게 우리에게 접근한 것 같았다. 그는 두 팔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집회소에는 별로 출입한 적이 없어 길을 잘 모르는 탓에 손으로 벽을 더듬어 길을 찾는 모양이었다. 여느 사람의 귀에라면 세베리노의 말이 들렸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호르헤는 장님이었다. 호르헤가, 놀라운 청각의 소유자라는 것은 우리도 겪어 보아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호르헤 노인이 세베리노의 말을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가 있는 곳을 지나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수도사 하나를 더듬고는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러자 그 수도사가 호르헤를 부액하여 문간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때 미켈레 수도사가 또 사부님을 불렀다. 사부님은 서둘러 세베리노에게 일렀다.
'어서 시약소로 돌아가시오. 가서 문을 안으로 단단히 걸어 잠그고 나를 기다리시오. 그리고...'
사부님은 나에게 명했다.
'...너는, 호르헤의 뒤를 밟아 보아라. 세베리노 수도사의 말을 엿듣지 않았다면 시약소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만 뒤를 밟아 본 연후에 어디로 갔는지 내게 와서 이르거라.'
집회소로 들어가면서 사부님은 아이마로에게 시선을 던졌다. 나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아이마로 쪽으로 갔다. 아이마로는 밖으로 나간 호르헤 노인을 따라잡으려고 그러는지, 배랑에 빼곡이 들어차 있는 수도사들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사부님은 여느 때의 사부님답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집회소 현관으로 들어서면서, 마악 문을 나서는 세베리노에게, <잘 보관해야 하오. 그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되니까>하고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호르헤 노인을 따라잡으려고 마악 문을 나서는데, 식료계 수도사 레미지오가 바깥문에 기대 서있었다. 그는 사부님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잔뜩 굳어진 얼굴을 하고 사부님과 본초학자 세베리노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가 세베리노가 밖으로 나오는걸 보고는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호르헤 노인의 뒤를 밟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았다. 호르헤 노인의 모습은 이미 안개 속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반대편으로 갔던 세베리노와, 그 뒤를 따르는 레미지오 역시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계산을 놓아 보았다. 내가 사부님으로부터, 호르헤 노수도사의 뒤를 밟으라는 명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사부님이 그렇게 명한 것은 호르헤가 혹 시약소 쪽으로 가지 않을까 저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르헤 노수도사는 시약소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가 가는 방향은 교회와 본관이 있는 쪽이었다.
문제는 레미지오 수도사였다. 바로 식료계 레미지오가 본초학자 세베리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사부님은, 시약소 실험실에서 혹 무슨 일이 생길까 해서 나에게, 시약소로 갈지 모르는 호르헤 노수도사의 뒤를 밟으라고 한 것이 아니던가? 따라서 중요한 것은 호르헤가 아니라 시약소였다. 그래서 나는 세베리노와 레미지오의 뒤를 밟기로 한 것이다. 아이마로의 행방이 궁금했다. 우리와 같은 이유에서 집회소 건물을 나왔다면 나는 당연히 아이마로의 행방도 알아 두어야 했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뒤따르면서 나는 식료계 레미지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미행당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그의 걸음걸이가 유난히 느려졌다. 미행자가 나라는 것은 알리 없을 터였다. 그러나 나 역시, 레미지오의 뒤에 따라붙어 걷고 있을 뿐, 안개 속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분명히 레미지오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우리의 입장은 피차 일반인 셈이었다.
나는 앞서 가는 그림자를 상대로, 내가 미행한다는 낌새를 눈치채게 만들어, 세베리노에게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문득 안개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시약소의 문은 닫혀 있었다. 다행히도 세베리노가 벌써 시약소로 들어가 안으로 문을 잠갔던 모양이었다. 시약소 앞에 이른 레미지오가 내 쪽을 돌아다보았다. 나는 나무 옆에 붙어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레미지오는 생각을 바꾸었는지 주방 쪽으로 발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나는, 내 그만하면 내가 할 일은 다한 것이리라 여기고 집회소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 자리에서 시약소를 조금 더 감시하고 있었더라면 저 불행은 미연에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을... 그러나 나는 인간인지라 미구의 일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집회소로 되돌아갔다. 집회소는 비 갠 뒤의 하늘 같았다. 나는 사부님에게 다가가 간단하게 보고했다. 사부님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내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핀잔윽 주었다. 집회소 분위기는 믿어지지 않으리 만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양쪽 사절단 사이에 평화의 입맞춤이 오고 갔다. 알보레아 주교는 소형제회의 믿음을 찬양했고, 카파의 주교 제롤라모는 도미니크 회 설교자들의 선교 사업을 칭송했다. 모두가 하나같이, 내부 분열이 없는 교회의 미래를 나름대로 설계하고 축원했다. 이쪽에서 저쪽 교단의 교세를 찬양하면, 저쪽에서는 이쪽 교단의 절제와 청빈을 칭송했다. 그렇게 멱살잡이를 하던 수도자들이 졸지에 정의와 분별이라고 하는 미덕의 주인들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많은 수도자들이 그렇게 열심히 성직과 신학적 미덕의 승리에 마음을 쏟는 현장을 본적이 없었다.
이윽고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 추기경이 윌리엄 수도사에게, 황실 신학자들의 견해를 밝혀 줄 것을 요청했다. 사부님은,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는 몸짓과 표정을 보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황실의 견해를 밝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음에 분명했다. 따라서 여차직하면 세베리노의 시약소로 달려갈 터였다. 이제 사부님에게는, 사절단 회의보다는 세베리노의 시약소에 있다는 그 이상한 서책 쪽이 훨씬 절실한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사부님이 황실측 사절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 회의장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까 사부님의 말투에서 <저어...> 아니면 <그러니까>가 유난히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 사부님은 일부러 그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말하자면 윌리엄 자신의 견해와 황실측 견해를 동일시하지 말아 주기를 바라고 있음에 분명했다. 사부님은, 앞서 발언한 성직자들의 고견을 충분히 납득하였음을 전제하고, 그 문제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황제 측 신학자들의 교리라 부르는 것은 확립된믿음의 조항이라 할 수도 없는 단편적 의견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이 땅에다 백성을 창조하시되 더하고 덜함이 없이 그들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사제와 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 <창세기>의 전반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 아담과 그 자손들에게 이 땅의 만물 위에 군림하는 권능을 베푸셨고 그들은 하느님 율법을 기꺼이 섬겼던 것을 보면, 하느님 역시 지상의 만물 안에서 하느님 백성이 지배자가 되고 율법의 제 1원인으로 노릇하는 것을 꺼리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빈도가 여기에서 쓰고 있는 백성이라는 말은 모든 인류를 두루 일컫는 데 쓰여야 마땅하나, 사람 가운데엔 아이도 있고, 바보도 있고, 악인도 있고, 여자도 있는 것인즉, 비록 빈도가 이 범주에 들 인간을 고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으나 정상적인 인간만이 이 백성의 범주에 든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부님은 마른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고는 실내의 공기가 혼탁해서 마른기침이 나오는 모양이니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면서 말을 이었다.
'...이러한 백성이 자기네 의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선거를 통해 가려진 대표자들의 총회를 통해서일 것입니다. 빈도는 이 총회라는 것에다, 법을 해석하고, 바꾸고, 혹은 집행을 연기하는 권한을 부여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저간에 있었던 일련의 특정한 사태를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법이 어느 한 개인에 의해 제정된다면, 이렇게 제정할 수 있는 개인은 무지의 소치가 되었든 악의의 소치가 되었든, 법으로 다스려지는 백성들을 해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부님이 앞서한 말에 어리둥절해 있던 사람들이 이 대목에 이르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 <백성을 해칠 수 있는 개인>으로 교황청 사람들은 황제를 지목하는 것 같았고, 황실측 사람들은 교황을 지목하는 것 같았다. 사부님의 말은 계속되었다.
'...법은 어느 개인에 의해서도 제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에 의해 제정된 법은 악법이 될 가능성을 그 부담으로 안게 됩니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이 이 제정에 동참함으로써 그 부담을 줄이는 것입니다. 빈도는 지금 세속의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게서는 아담에게 선악의 나무에서 열리는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율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이 땅의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용인하시고 독려하심으로써 백성들 목에 걸린 고삐를 푸신 셈입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이름은 사물의 궁극>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창세기>는 이 점을 더할 나위 없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물이라는 동물은 다 아담 앞에 데려다 놓으시고는, 그가 어떤 이름을 붙이는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아담이 뭐라고 불렀든 그로부터는 그게 그 동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아담식 언어로 그 성질에 제대로 맞게 이름을 붙이는 능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아담은 그 동물의 성질에 맞추어 이름을 상상함으로써 일종의 지상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사물의 표징인 개념이라는 말이 모든 사물에 두루 통용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개념을 구별하기 위해 사람들이 갖가지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노멘>, 즉 <이름>이라는 말은 <노모스>, 즉 <법>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따라서 이름은 많은 사람들의 약정에 따라 부여된 것입니다...'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했다. 사부님의 엄청난 박학의 시위에 모두가 넋을 잃은 것 같았다. 사부님은 결론으로 내달았다.
'...따라서, 이 땅의 사물에 대한, 그리고 도시와 왕국과 재산에 관한 법은, 성직에 몸담고 있는 교역자들의 특권인 하느님 말씀을 지키고 해석하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이교도들에게는 하느님 말씀을 해석하는 것과 유사한 직권을 가진 이가 없으니 이 아니 딱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교도들에게는 정부, 왕, 황제, 혹은 이교 군주나 제후를 통해 법을 제정하고 이를 집행하려는 뜻이 없다고 하면 안 됩니다. 로마의 많은 황제들이 지혜로 속사를 다스렸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도 안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교도와 무지 몽매한 불신자들에게 이러한 법을 제정하게 하고, 정치적인 동아리를 이루어 살게 하는 능력은 대체 누가 주었더라는 말입니까? 존재할 리 없는 거짓신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만군의 하느님이시며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야말로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기독교국 백성의 신성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신비를 용인하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정치적 판단과 능력을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밝혀 드러내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속된 회칙과 속사의 지배권이 교회 및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과 아무 상관없다는 사실에 관한 증거로 이보다 더 나은 증거가 있겠습니까? 이야말로 성직자들이 베푸는 모든 성사를 앞질러, 우리 기독교가 틀 잡히기 이전에 하느님께서 정하신 바가 아닐는지요?'
사부님이 마른 기침을 시작했다. 마른기침을 한 사람은 사부님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성직자들이 몸을 비틀면서 사부님으로부터 전염이라도 된 듯이 마른기침들을 했다. 추기경은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적시면서 사부님에게 말을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부님은 그 자리에 참석한 교황청 신학자들은 물론, 참석하지 않은 신학자들까지도 다분히 불쾌하게 만들 법한, 나름의 논리를 짜나갔다.
'...빈도가 이렇게 추론하는 근거는, 이 세상을 지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카이사르의 법에 관한 한 그분께서 보신 이 땅의 정치 상황을 따르려고 오셔서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보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이 이 땅의 백성에게 명을 내리고 이 땅을 지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그 사도들의 계승자들이 세속적, 혹은 강압적인 권력에 집착하지 말아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에 교황과 주교와 사제가 제왕의 세속적 혹은 강압적 권력에 따르지 않는다면 재속의 제왕이 지닌 권위는 도전에 직면합니다. 이제, 이단의 문제 같은, 미묘한 문제도 한번 생각해 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진리의 수호자인 교회가 이단을 규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단자를 처벌할 수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단의 처벌은 속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단자를 색출했다고 여겨질 경우 이를 제왕에게 통고해야 합니다. 제왕에게는 제국의 신민에 관한 것이니만치 이를 통고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왕은 이 이단자를 어떻게 처결해야 합니까? 제왕이 하느님 진리의 수호자가 아니면서도 하느님 이름으로 이를 처결해야 합니까? 당치않습니다. 제왕은, 이단자의 행위가 국가의 안위를 위협했을 경우에만 이단자를 처결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말하자면, 이단자가 이단을 선포하되, 이 이단에 따르지 않는 자를 죽이거나 해치는 등의 폭거를 일삼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경우에도 제왕이 이를 처결하지 못한다면 제왕에게 권력이 있다고 하지 못합니다. 무슨 까닭인가요? 이 땅에 사는 사람치고, 고문을 통하여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강요를 받아도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그런 강요를 받아도 좋다면 내세에서 심판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의 자유 의지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이단자에게, 믿는 백성들의 모듬살이를 해치고 있다고 경고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경고해야 합니다만, 이 땅에서 이단자를 심판하거나, 그 이단자의 자유 의지에 반하는 강요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백성을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내리고 싶어하셨다면, 당신의 율법에 모세가 행사한 것과 유사한 권한을 내리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바라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혹자는,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바라셨지만, 그럴 짬을 내고 그런 힘을 행사하기에는 3년이라는 설교 기간이 너무 짧았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바라시지 않았습니다. 만일에 그리스도께서 이를 바라셨다면 백성들이 그 뜻을 제왕에게 전했을 터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기독교는 자유를 섬기는 종교가 아닌, 노예의 율법을 섬기는 종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빈도가 이렇게 말하는 뜻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빈도는 교황의 권능을 폄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받으신 사명의 경계를 밝혀 두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빈도가 믿기로, 하느님의 종들을 섬기는 종 중의 종인 교황은 이땅에서 남을 섬겨야 하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겝니다. 그런데 교황이 이 땅의 왕국이되, 다른 왕국도 아니고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하면서도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지하시다시피,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교황의 발언은, 영국 국왕의 신민들에게 그렇듯이 프랑스 국왕의 신민에 대해서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진리를 섬기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불신자들이라고 부르는 칸이나 술탄의 신민에 대해서도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교황이 오직 제국의 문제에 관해서 세속적인 권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은 한가지 의혹, 즉 교황은 세속적 권력을 영적인 권력과 동일시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교황이 사라센 제국이나 타타르 제국에 대해서도 정신적인 지배권을 행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을 보면, 프랑스나 영국에 대해서도 영적인 권력을 갖지 못해야 이야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의혹을 정당화시킬 소지가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끔찍한 신성 모독이 아닙니까? 우리가 교황께 아비뇽 교회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사람을 용인하거나 부인하는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모든 인류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고 간언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 다른 왕국에 대한 정도 이상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프랑스 국왕이나 이교의 군주가 교황의 재가를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닌 바에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황제가 교황의 재가르 얻어야 할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성서가 이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은데, 이러한 종속 관계를 종교적 권리의 문제로 파악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백성들 역시 저희들 권리를 앞세워 이런 것을 용인한 바도 없습니다.
청빈에 관한 논란에 대해서도, 빈도는 일찍이 파도바 사람 마르실리오, 장뎅 사람 장 같은 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습니다만, 이 문제에 관한 빈도의 대단치 않은 견해는 이렇습니다. 요컨대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스스로 청빈하기를 바라는 바에는 교황이 이 아름다운 소망을 단죄할 수도 없고, 또 단죄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청빈했다는 가정이 증명된다면 이느 소형제회의 믿음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권력을 바라시지 않았다는 이론을 강화시키는 바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만남의 자리에서 빈도는 여러 대덕들로부터 그리스도의 청빈 여부는 증명될 수 없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백가쟁명을 명쾌하게 파기하는 명언이 아닙니까?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서든 사도들을 위해서든 지성적 권력을 원치 않으셨다는 사실은 아무도 증명한 바 없고, 또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세속의 만사에 대한 그리스도의 초연하심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청빈을 바라셨을 것이라는 죄없는 믿음을 두둔하는 넉넉한 증거가 아닐는지요?'
사부님은 다소 우유부단해 보이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온건한 말로 자신의 소신을 용감하게, 그리고 모자람 없이 나타낸 것 같았다. 좌중에는 누구 하나 일어나 사부님과 맞서 보자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사부님의 말을 납득하고 지지했다는 것은 아니다. 아비뇽 교황청 쪽 성직자들은 몸을 뒤틀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저희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렸고, 수도원장은 덜 좋은 낯빛을 한 채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수도원장은 사부님의 발언이, 자신의 희망사항인, 베네딕트 교단과 황실과의 관계 개선에 일조가 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게 불만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러한 반응은 소형제회 쪽도 마찬가지였다. 체제나의 미켈레는 당혹을 숨기지 않았고, 카파 주교 제롤라모는 초장부터 대경실색한 나머지 아예 말을 못하고 있었으며 우베르티노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사부님의 말을 곱씹는 것 같았다.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 추기경이었다. 추기경은 웃음 띤 얼굴로 사부님에게 말했다.
'윌리엄 형제, 형제가 몸소 아비뇽으로 가시어 교황 성하를 친견하시고,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을 좀 들려드리지 그래요?'
사부님도 만만치 않게 응수했다.
'교황께서 비록 이렇다저렇다 하기 난감한 견해를 자주 들으실 터이기는 하나, 성도들에게 인자하신 분이신데, 저의 조금 지나친 이견은 그분을 너무 상심케 하지 않을는지요?'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베르나르 기가 사부님에게 권했다. 내가 듣기에는 사부님을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같이 총명하시고, 자신의 견해를 현하의 달변으로 펼칠 수 있는 윌리엄 형제 같은 분이, 교황 성하의 성총을 흐리게 하는 자들을 조복시킬 수 있다면 이 아니 좋은 일이겠습니까?'
'베르나르 어르신께서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만 빈도는 가지 않겠습니다...'
사부님은 이렇게 응수하고는 천천히 추기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말을 이었다.
'...이 가슴앓이 때문에, 이런 계절에 그 먼 길 여행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요.'
'그렇다면 말씀도 길게 하실 일이 아니었군요.'
추기경이 큰 걱정이라도 해주는 듯한 말투로 비아냥거렸다.
'진리를 가까이 하고 있으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터이지요.'
사부님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이때 장 드 본느가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무슨 말씀이시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의논하고 있는 것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냐, 그렇지 못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올시다. 오히려 진리로 행사하고자 하는 지나친 자유에 대한 것이 아니던가요?'
'그럴수도 있겠군요.'
사부님은 장 드 본느를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또 한번, 그 직전에 있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격렬한 논쟁이 오고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장 드 본느의 발언 도중에 경호대장이 들어와 베르나르 기와 귓속말을 나누었다. 베르나르 기가 일어나 손을 들고 발언권을 청했다.
'형제 여러분, 이같이 유익한 토론은 계속되어야 마땅할 터이나, 원장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는 뒤로 미루고 지극히 중요한 불의의 사건부터 수습해야 할 듯합니다. 방금 나는 이 집회소 밖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참입니다.'
베르나르 기는 손가락으로 집회소 밖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수도원장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사부님과 나도 그 뒤를 따랐다. 그 자리에 있던 사절들도 우리 뒤를 따라 나왔다.
'세베리노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으련만...'
사부님이 중얼거렸다.
6시과
사부님과 나는 가벼운 불안을 느끼면서 베르나르 기와 수도원장을 따라 잰 걸음으로 집회소를 나왔다. 경호대장은 베르나르 기를 필두로 한 우리 일행을 시약소 쪽으로 안내했다. 시약소에 이르고 보니, 짙은 안개에 싸인 시약소 앞에 수많은 그림자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면서도 시약소에 접근해 보려고 하는 불목하니들, 그리고 그들의 접근을 막으려는 경호병들의 그림자였다.
'경호병을 제가 보냈습니다. 수도원의 의혹에 빛을 던져줄 사람을 찾으라고 제가 보낸 것입니다.'
베르나르 기가 설명했다.
'아니, 그게 본초학자인 세베리노 수도사였다는 것입니까?'
수도원장이 화들짝 놀라면서 물었다.
'아닙니다,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베르나르 기가 경호병들을 헤치고 시약소 안으로 들어가면서 대답했다.
우리는 시약소 안에 있는 세베리노의 실험실로 들어갔다. 실로 놀라운 장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엾은 본초학자 세베리노는, 머리를 얻어맞고 시체가 되어, 흥건한 피 위에 쓰러져 있었다. 선반이라는 선반은 모두, 폭풍우라도 쓸고 지나간 것처럼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항아리, 병, 서책 그리고 문서는 깨어지고 부서지고 찢긴 채 사방에 널려 있었다. 세베리노의 시체 곁으로는, 사람 머리통의 갑절은 실히 될만한 크기의 천구의가 보였다. 나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천구의가, 그리 높지 않은 삼각대 위에 놓인 채, 출입문 책상 위에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두 경호병이 식료계 수도사 레미지오의 멱살을 틀어 잡고 있었다. 레미지오는 경호병들에게 몸부림치며 자기 결백을 주장했다. 수도원장이 들어서자 그의 목청이 높아졌다.
'원장님, 맹세코 범인은 제가 아닙니다. 제가 들어왔을 때 세베리노 형제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이자들은, 현장에 있었다고 저를 이렇게 체포하려는 것입니다.'
궁병대 경호대장이 베르나르 기에게 다가와,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서 사건 전후의 사정을 보고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경호병들은 식료계 수도사 레미지오를 찾아 구금하라는 명을 받고 두 시간 이상 수도원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나는 이 명령을 내린 사람이 베르나르 기였던 것으로 확신한다.) 그렇다면 베르나르 기는 집회소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경호대장에게 그 명령을 내린 셈이다. 수도원 경내의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경호병들은, 레미지오가 집회소 배랑에 있는 것도 모르고 엉뚱한 곳을 한동안 찾아 다닌다. 게다가 안개까지 짙게 끼어 경호병들은 수도원 경내 수색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어쨌든, 레미지오는 집회소 배랑에서 경호병들의 눈에 뜨인다. 레미지오는 바로 이 집회소 배랑에서 시약소 앞을 지나 주방 쪽으로 간다.(이것은 내 눈으로도 확인한 바 있다.) 경호병들은 주방 근처까지 레미지오를 따라가지만 안개 때문에 주방 앞에서 그만 놓치고 만다. 그런데 경호병들은 이곳에서 레미지오가 본관 쪽으로 가더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경호병들은 본관으로 간다. 그러나 레미지오는 본관에도 있지 않았다. 본관에서 다시 주방으로 간 경호병들은 여기에서 호르헤 노인을 만나게 된다. 호르헤 노인은, 경호병들에게, 조금 전까지 바로 그곳에서 레미지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말한다. 경호병들은 뜰 안으로 샅샅이 뒤지다가,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난 알리나르도 노수도사를 만난다. 노인은 노망기가 지나쳐 본 정신이 아니었으나, 경호병들에게는 레미지오가 그 직전에 시약소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고 말한다. 경호병들은 곧 시약소로 달려간다. 그런데 경호병들이 갔을 때 시약소 문은 열려 있었다. 사태를 심상치 않게 여기고 시약소 안으로 들어간 경호병들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느 세베리노와, 중요한 물건이라도 찾는 듯이 선반을 뒤지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바닥에다 내팽개치는 레미지오를 발견한다. 경호대장은 베르나르 기에게, 사건의 정항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즉, 레미지오가 시약소로 들어서자마자 세베리노를 죽이고, 자기가 노리고 있던 물건을 찾느라고 선반을 뒤지다가 경호병들 손에 붙잡힌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한 경호병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천구의를 집어 베르나르 기에게 건네주었다. 천구의는 하나의 굵고 튼튼한 청동고리에다 여러 개의 청동 및 은테를 둘러 만든 것으로, 원래는 삼각대 위에 놓이게 만들어져 있었다. 범인은, 삼각대 위에 놓여 있던 천구의를 집어 세베리노의 머리를 갈겼던 모양이었다. 몇 개의 둥근 테가 가격의 충격으로 찌그러진 채 안으로 휘어져 있었다. 찌그러진 테에는 세베리노의 피와 머리카락과 살점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윌리엄 사부님은 세베리노의 시신 곁에 쪼그리고 앉아 시신을 꼼꼼하게 조사하고 있었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는 안와에 흥건히 고여 있었다. 눈동자는 어느 한 방향에 고정된 채 굳어져 있었다. 희생자의 굳어진 동공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 희생자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가해자의 형상을 읽을 수 있다는 속신이 있다. 나는 그 속신대로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선은 사부님을 좇았다. 사부님은 세베리노의 손을 조사하고 있었다. 사인이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혹 세베리노의 손가락에도 예의 그 검은 얼룩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조사해 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세베리노의 손가락에는 얼룩이 있을 리 없었다. 위험한 약초나 파충류나 벌레를 만질 때나 쓰는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르나르 기가 으스스한 분위기를 지어 내면서 식료계 레미지오에게 물었다.
'바라지네 사람 레미지오... 그게 자네의 이름이렷다? 내가 자네를 붙잡으라고 사람을 보낸 것은, 자네가 다른 일에서 의혹을 사고 있어서 그 혐의를 확인코자 함이었다. 만시지탄이기는 하나 역시 우리의 판단은 빗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원장...'
베르나르 기는 원장 쪽으로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체포된 그 부랑자의 자백을 받고 나는 오늘 아침에야 이자의 신병을 확보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따라서, 오늘 아침에야 그런 생각을 했고, 이제야 이자를 붙잡았다는 뜻에서, 조금 전에 있었던 살인 사건에 관한 한 나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익히 보셔서 아시다시피, 오늘 아침부터 우리는 집회 문제에 쫓기느라고 다른 정신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안개가 짙어, 경호병들은 이자를 붙잡으라는 내 명령을 받고도 그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르나르 기는 분명히, 실험실에 와 있는 수도사 무리를 의식하고 일부러 목청을 돋우어 말하고 있었다. 그 시점에 이미 실험실에는 수많은 수도사들이 몰려와 있었다. 수도사들은, 난장판이 된 바닥과, 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세베리노의 시신을 손가락질하며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느 베르나르 기의 말을 들으며 말라키아를 유심히 관찰했다. 말라키아 역시 조용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돌연 레미지오가 경호병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말라키아에게 다가가서는, 그의 법의 자락을 잡고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경호병들이 레미지오를 다시 붙잡은 것은 두 수도사의 얼굴이 거의 닿은 것 같을 즈음이었다. 다시 경호병들 손에 붙잡힌 채 시약소 밖으로 끌려 나가면서 레미지오가 말라키아에게 소리쳤다.
'맹세해! 나는 맹세한다!'
말라키아는,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애를 태우는 사람처럼 멀거니 레미지오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 밖으로 끌려 나가던 레미지오가 다시 소리쳤다.
'자네에게 해로운 짓은 절대로 않겠다!'
사부님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게 대체 무슨 뜻인지 너는 아느냐... 사부님의 눈길은 나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베르나르 기는 이 말을 들었을 터인데도 무슨 까닭에선지 사부님이 보인 것 같은 호기심은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말라키아만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어떤 밀약이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베르나르 기가 그 실험실에 있던 수도사들 및 경호대장을 상대로 말했다.
'점심 식사 직후에 집회소에서 피의자를 공개적으로 심문합니다. 경호대장은 그자를 끌고 가 감금하되, 살바토레와는 대면시키지 않도록 하라.'
그때 베노가 뒤에서 사부님을 불렀다. 사부님이 돌아보자 베노가 속삭였다.
'저는 윌리엄 수도사 어른의 뒤를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때 말라키아는 여기에 없었습니다.'
'그럼 그 뒤에 들어온 것인가?'
사부님이 물었다.
'아닙니다. 저는 문 옆에 서서 들어오는 수도사의 면면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말라키아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말라키아는 그전부터 이 방 어딘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전부터라면?'
'식료계 레미지오 수도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확인할 길은, 현재로는 없습니다만, 저는 말라키아가 저 휘장 뒤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사들이 몰려들어올 때를 틈타서 말입니다...'
베노는 이러면서 턱으로 휘장을 가리켰다. 휘장 뒤에는 간이 침대가 하나 있었다. 세베리노가 환자에게 약을 처방한 뒤에는 잠시 누워 있다 가게 하는 침대였다.
'하면, 말라키아가 세베리노를 죽이고 저 뒤에 숨어 있었다. 이말인가? 그래야 레미지오가 들어올 당시 말라키아는 저 휘장 뒤에 있었다는 자네 말이 맞지를 않겠는가?'
'말라키아가 세베리노를 죽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말라키아는 휘장 뒤에 숨어서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왜 식료계가, 해로운 짓을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자기에게도 해로운 짓을 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겠습니까?'
'터무니없는 말은 아닌 것 같군...'
사부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화제를 바꾸었다.
'...하여튼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서책이 한 권 있다. 레미지오가 끌려나갈 때는 빈손이었고, 말라키아 역시 빈손이었으니까 그 서책은 아직 여기에 있을 게다.'
사부님은 나의 보고를 통해, 우리가 서책 이야기를 나눌 때 베노가 엿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베노에게 숨길 것은 없었다. 게다가 사부님에게는 다른 수도사로부터 협조를 받을 필요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은근 슬쩍 베노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모양이었다.
사부님은 원장에게, 현장을 정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으니까 수도사들을 모두 내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원장은 고개짓으로 수도사들에게 잠깐 나가 있을 것을 명했을 뿐, 사부님에게는 눈길 한번 건네지 않고 나가 버렸다. 왜 늘 뒷북만 치고 다니느냐고 나무라는 태도가 역력했다. 다른 수도사들은 모두 그 방을 나갔다. 그러나 말라키아는 구차한 이유를 둘러대면서까지 현장에 남아 있고 싶어했다 그러나 사부님은, 시약소는 장서관이 아닌즉, 원장으로부터 사건 조사를 의뢰받은 자기 말을 따라야 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사부님의 말투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했다. 그러니까 사부님은 이로써, 베난티오의 서안을 조사하려다 말라키아로부터 당했던 수모를 복수한 셈이었다.
사부님은 수도사들이 모두 나가고 나, 베노 이렇게 셋만 남게 되자 서안 위의 유리 부스러기와 종이를 말끔히 치우고 나서 세베리노의 서책을 한 권씩 넘겨 달라고 했다. 장서관 미궁의 장서에 비해 세베리노의 장서는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러나 갖가지 모양과 부피의, 수백 권으로 족히 헤아려지는 장서는, 개인이 독파하고 소장한 서책의 양으로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전에는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그 서책들이, 식료계 레미지오의 미친 듯한 손길이 지나간 뒤로는 쓰레기 더미와 함께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이었다. 더러 책장이 찢긴 서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레미지오는 서책이 아닌 것, 더 좁혀서 말하면 서책의 갈피에 숨길 수도 있는 물건을 찾으려 했던 모양이었다. 표지에서 찢겨져 나와 심하게 쭈그러진 서책도 있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서책을 모아 내용별로 나누어 책장에 다시 정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수도원장이 우리에게 할애한 시간은 그 떨떠름했던 표정으로 미루어 헤아리건대 길지 않을 터였다. 따라서 서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 조사를 끝내고 나가야 수도사들이 들어와 세베리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준비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안 밑, 선반 뒤, 찬장 안까지 조사했다 혹, 전에 못 보던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사부님은, 나륵 돕겠다는 베노의 청을 거절했다. 그는 베노에게, 대신 문 앞에 서 있다가 수도사가 들어오면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수도원장이 시약소 출입을 금지시켰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수도사들이 다투어 시약소로 들어오고 싶어했다. 문 앞에는, 소식을 듣고 겁에 질린 채 몰려와 형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수도사들, 수도원 불목하니들, 그리고 바닥을 청소하려고 걸레와 대야를 들고 온 수련사들 무리가 한데 어울려 있었다.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나는 서책을 모아 한 권씩 사부님 손으로 넘겼고 사부님은 그 서책을 일별하고는 서안 위에다 쌓았다. 그러나 일일이 그렇게 하기에는 서책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방법을 바꾸었다. 내가 책을 집어, 구겨진 부분을 펴고 제목을 읽는 경우, 사부님이 특별히 보자고 할 때느 보여드리되, 아무 말 하지 않으면 그대로 서안에 쌓는 것이었다. 서책 중에는 낱장으로 떨어져 있어서 복원에 적잖은 시간이 걸릴 만한 것도 많았다.
'<식물에 관한 책 전3권 전집>이라... 빌어먹을, 이건 아니야.'
사부님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서책을 서안 위로 던졌다.
'<약초명 사전>...'
내가 서명을 읽자 사부님이 핀잔을 주었다.
'아니야, 우리가 찾는 건 그리스 어로 된 책이야.'
'이것은 어떻습니까?'
나는 표지에 이상한 문자가 쓰인 서책 한 권을 사부님 앞으로 내밀었다.
'멍청이, 그건 그리스 어가 아니라 아랍 어가 아니냐? 우리 베이컨 사부님의 말씀이 옳고말고... 사부님께서는, 학인이 가장 앞서 할 일은 남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아랍 어는 사부님께서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가 또 한번 핀잔을 들었다.
'그래도 아랍 어라는 것은 알지 않느냐?'
내 뒤에서 베노가 길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낯이 화끈거렸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은 서책 뿐만이 아니었다. 간단한 기록, 천상의 궁륭이 그려진 두루마리, 이상한 식물의 이름이 적힌 목록, 세베리노 자신의 것인 듯한 비망록도 있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실험실 구석을 뒤지고 조사했다. 사부님은 바닥을 조사하느라고 시신을 들어보기도 하고, 시신의 법의 자락을 들춰 보기도 했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망자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어쩔 수 없는일... 세베리노는 문을 잠그고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서책이 이 안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레미지오도 들고 나간 적이 없다.'
'레미지오가 혹 법의 자락 안에 감추고 나간 것은 아닐까요?'
'아니야, 베난티오의 서안 밑에 있던 서책은 아주 크고 두꺼웠어. 레미지오가 그걸 감추고 나갔다면 우리 눈에 띄었을 것이다.'
'제본은 어떻게 되어 있었습니까?'
'모르겠다. 펼쳐져 있었으니까... 그것도 잠깐 보았을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 어로 씌어져 있다는 것만 확인 했을 뿐,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계속해 보자. 내가 아는 한 레미지오나 말라키아는 그 서책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
사부님 말에 베노가 끼여들었다.
'그렇습니다. 가지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까 레미지오 수도사가 말라키아 수도사의 옷자락을 붙잡는 것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품안에 서책을 감추고 있었다면 아마 그 순간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좋아... 아니,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서책이 이 방안에 없다면, 말라키아나 레미지오가 아닌, 누군가가 그 전에 들어왔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제 3의 인물이 있다는 말씀이신데요... 그렇다면 대체 누가 세베리노 수도사를 죽였을까요?'
내가 사부님께 여쭈웠다.
'그랬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여기에 그 서책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호르헤 노수도사라면 알테지. 우리 말을 엿들었다면 말이다.'
'그렇습니다만, 호르헤 노인 같은 분이 어떻게 세베리노 수도사같이 혈기방장한 사람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이렇듯이 무참하게 말씀입니다.'
'그렇기도 하다. 더구나 너는 호르헤가 본관 쪽으로 가는 걸 보았다고 했지? 경호병들 역시 레미지오를 찾아내기 직전에 호르헤가 주방에 있더라고 했다. 여기에 왔다가 다시 주방으로 갔을 리가 있겠느냐? 그럴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것 같지 않구나.'
사부님과 겨루기라도 하는 기분으로 내가 나섰다.
'그럼 제가 한번 추리해 보겠습니다... 알리나르도 노수도사 역시 이 근방을 배회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분 역시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분이니 만치 세베리노를 해쳤을 리는 만무합니다. 식료계 레미지오 수도사도 여기에 있기는 있었습니다만 그분이 주방을 떠난 것과, 경호원들이 주방에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입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는, 레미지오 수도사가 세베리노 수도사로 하여금 문을 열게 한 연후에, 천구의로 공격, 살해하고, 방을 이 모양으로 만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말라키아 수도사가 맨 먼저 이곳에 왔을 가능성이 있기는 있습니다. 호르헤 수도사가 집회소 배랑에서 사부님께 드리는 제 보고를 엿들은 뒤 본관 문서 사자실로 달려가 말라키아 수도사에게, 장서관에 있던 서책이 세베리노 수도사의 실험실에 있다고 말하고, 그 말을 들은 말라키아가 이곳으로 와서 세베리노 수도사로 하여금 문을 열게 하고... 그리고는 죽였을까요? 하지만 범인이 만일에 말라키아 수도사라면 이야기가 조금 이상해집니다. 말라키아 수도사라면 방을 이 꼴로 만들지 않고도 충분히 서책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말라키아 수도사는, 서책에 관해서라면 능하지 않을 것이 없는 장서관 사서가 아닙니까? 자, 이렇게 되면 누가 남습니까?'
'베노가 남는군.'
사부님이 웃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사부님 말씀에 베노가 기겁을 하고는 외쳤다.
'당치 않습니댜. 수도사님. 수도사님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호기심이 많은 놈일 뿐입니다. 만일에 제가 이 방으로들어와 서책을 훔쳐 갔다면 왜 지금 수도사님 곁에 있겠습니까?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그 서책을 정신없이 읽고 있을 것이 아닙니까?'
사부님은 그제서야 웃었다.
'일 리가 없는 말은 아니군. 그러나 자네 역시 그 서책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 못해. 따라서 자네 역시 세베리노를 죽이고 그 서책을 찾아내려고 여기에 와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
'수도사님, 저는 살인자가 아닙니다.'
'살인하기 전부터 살인자인 사람은 없는 법이네... 어쨌든 서책은 여기에 없고 자네는 여기에 있으니, 자네가 그 서책을 여기에서 가지고 나가지 않은 것 또한 분명하네...'
사부님은 세베리노의 주검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이 순간만은, 사부님은 오로지 세베리노의 죽음만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엾은 세베리노... 나는 못나게도 당신과 당신이 가진 독극물까지 의심했소. 그런데도 장갑을 끼고 있는 걸 보니 당신은, 이 못난 나를 도운답시고 독극물을 시험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이 땅에서 당할 일을 두려워하더니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것에 당하고 말았군...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흉기를 썼을꼬?'
사부님이 천구의를 집어 꼼꼼하게 살폈다. 내가 무심결에 내뱉었다.
'가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아. 항아리, 원예기구 등, 가까이 있는 다른 흉기는 얼마든지 있어... 어디 보자, 이거야말로 금속의 세공 기술과 천문학이 빚어 낸 걸작품인데, 그만 이렇게 망가지고 말았는데... 옳다, 바로 그거로구나!'
'바로 그거라니요?'
'그러자 태양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나는 사부님이 외고 있는 <요한의 묵시록>의 그 구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다음 구절도 외고 있었다.
'사부님, 그렇다면 네 번째 나팔소리입니까?'
'그래, 첫 번재는 우박, 이어서 피, 그리고 물... 이번에는 별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따져 보아야 한다. 범인이, 집히는 대로 들고 친 것이 아니라 미리 세운 계획에 따라 살인을 저지른 것인데... 그런들, <요한의 묵시록>을 조목조목 외면서 거기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 이걸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다섯 번째 나팔이 울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다섯 번째 나팔이 울리는 대목의 구절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때 나는 하늘로부터 땅에 떨어진 별 하나르 보았습니다. 그 별은 끝없이 깊은 지옥 구덩이를 여는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또 누군가가 죽는다면 우물에 빠져 죽는다는 뜻입니까?'
'아니다. 다섯 번째 나팔이 울리면 여러 가지 재난이 일어나기로 되어 있다. 어디보자... 그 구덩이에서는 큰 용광로에서 내뿜는 것과 같은 연기가 올라와 공중을 뒤덮어 햇빛을 어둡게 하였습니다. 그 연기 속에서 메뚜기들이 나와 땅에 퍼졌습니다. 그 메뚜기들에게는 땅에 있는 전갈들이 가진 것과 같은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 메뚜기의 모양은 전투 준비가 갖추어진 말 같았으며 머리에는 금관같은 것을 썼고... 이빨은 사자의 이빨과 같았습니다...따라서 범인이 이 성경 구절에 따라 예언을 성취시킨다면 몇 가지 방법 중 하나를 골라 쓸 수 있겠구나... 하지만 이런 우연에 매달려 있을 때가 아니다. 그보다는 세베리노가 서책을 발견했다고 할 당시, 정확하게 뭐라고했는지, 어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사부님께서는 가지고 오라고 하셨고, 세베리노 수도사는 그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러다 호르헤 영감이 다가오는 바람에 이야기가 끊기고 말았지? 왜 가져올 수 없었을까?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가 들고 다니기 좋게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냐? 장갑은 왜 또 이렇게 끼고 있는 것일까? 서책 표지에 독물이라도, 베렝가리오, 베난티오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독물이라도 묻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수수께끼 같은 함정, 혹은 독침같은...'
'독사가 아니었을까요?'
'고래라고 하지 그러느냐? 아서라, 말아라. 너는 여전히 허깨비를 보는구나. 앞의 두 희생자를 생각해 보아라. 독극물이라면 마땅히 입으로 들어가는 독극물이어야 한다. 게다가 세베리노는 가져올 수 없다고 했지, 들고 올 수 없다고 한 것은 아니다. 세베리노는 바로 이 자리에서, 나에게 그 서책을 보여 주려고 했던 게다. 그런데 장갑을 끼고... 따라서 나도 그때 이곳으로 왔다면 장갑을 끼고 서책을 다루어야 했을 게다. 여보게, 베노, 자네도 그 서책을 찾거든 장갑을 끼고 다루도록 하게. 나를 도와줘서 고맙네만, 기왕 도와준 거... 조금 더 도와주게. 문서 사자실로 올라가 말라키아를 좀 감시해 주지 않겠나? 놓쳐서는 안 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베노는 자기에게도 일을 맡겨 준 것이 몹시 만족스러운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세베리노의 실험실을 나섰다.
더 이상, 들어오려는 수도사들을 막고 있을 수는 없었다.
베노가 자리를 떠나자 수도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점심시간은 지난 지 오래였다. 따라서 베르나르는 집회소에서 레미지오에 대한 심문을 시작했을 터였다.
'여기에서 더 할 일은 없는 것 같구나.'
사부님이 중얼거렸다.
시약소 건물을 나서면서 나는 조금 전에 사부님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늘어놓았던 나 나름의 추리를 파기했다. 채마밭 한가운데에 이르렀을 즈음, 나는 사부님에게 정말 베노 수도사를 믿느냐고 물어보았다. 사부님이 대답했다.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만, 우리는 그자 앞에서, 그자가 모르는 것은 한마디도 한 것이 없지 않느냐? 게다가 문제의 서책이, 사실은 무시무시한 것이라고 겁도 좀 주었고... 나는 베노를 말라키아에게 붙여 놓은 것이다. 무슨 뜻이냐? 베노를 말라키아에게 붙임으로서 말라키아를 베노에게 붙여 놓았음이야. 말라키아는 제 손으로 그 서책을 찾으려 할 터이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아니냐?'
'그러면 레미지오 수도사는 뭘 가지러 시약소 실험실로 들어왔던 것일까요?'
'곧 알게 되겠지. 뭔가를 가지러 와던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다급하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이게 있어야 레미지오는 무서운 일을 면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라키아는 이게 무엇인지 알았을 게야. 그렇지 않고서는 레미지오가 말라키아의 옷자락을 잡고 통사정하는 까닭은 설명이 되지 않아.'
'어쨌든 서책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글쎄다. 그게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구나...'
집회소 건물 앞에 이르렀을 때도 사부님은 여전히 그 서책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게 어디에 있느냐... 세베리노는 분명히 실험실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없었다. 누가 가져간 것일까? 아직도 실험실 안 어딘가에 있는 것일까?'
'거기에 없는 걸 보면 누가 가져간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추리라고 하는 것은 대전제에서 해나가는 것이 보통이나 소전제에서 해들어오는것도 가능하다, 정황을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그걸 가지고 나간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있어야 하는데, 없지 않았습니까?'
'잠깐... 우리는 지금, 찾지 못했으니까 없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찾지 못했던 것은,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다 찾아보지 않았습니까?'
'다 찾아보았지만 찾아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찾아내고도 그것을 문제의 서책으로 알아보지 못했는지도 모르는 일... 아드소, 세베리노가 그 서책 이야기를 할때 정확하게 뭐라고 하더냐?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 기억하겠느냐?'
'서책을 한 권 발견했는데... 그리스 어로 된 그 서책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하더이다.'
'틀렸다. 내 기억에 따르면 세베리노는 이상한 서책이라는 말을 썼다. 세베리노는 박식한 사람이다. 그리스 어에 능한 박식한 세베리노에게 그리스 어로 된 서책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을 게다. 세베리노가 그리스 어를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알파베타>는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랍 어를 모르느 학자라도, 아랍 어로 된 서책을 이상한 서책이라고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세베리노의 실험실에 왜 아랍 어로 된 서책이 있어야 하느냐? 세베리노는 아랍 어를 모르지 않느냐?'
'그렇다면, 왜 아랍어로 된 서책을 이상한 서책이라고 했겠습니까?'
'그게 문제다. 세베리노가 어떤 서책을 이상하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모양이라도 자기에게는 이상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세베리노는 본초학자이지 장서관 사서가 아니니까... 그리고 장서관에는, 몇 가지의 고대 필사본 원고를 합본한 서책이 더러 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원고를... 그리스 어로 된 원고는 물론이고, 아랍 어로 된 원고까지...'
소스라치게 놀란 내가 소리를 질렀다.
'아랍 어로 된 것도 있었습니다!'
사부님은 바로 그 순간 내 손목을 낚아채고는 배랑으로 끌어내었다. 사부님은, 한시 바삐 시약소 실험실로 달려가자면서 소리쳤다.
'이런 짐승 같은 게르만 놈! 이런 무 대가리 같으니라고! 이런 무식쟁이 아드소 너 이놈! 첫 장 넘길 줄만 알았지 나머지는 건성으로 넘겼구나!'
'하지만 사부님! 제가 그 서책을 넘겨드리면서 그리스 어 같다고 말씀드리자 사부님께서는 아랍 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오냐, 그래, 그래. 그래. 돌대가리는 네가 아니라 바로 나로구나. 서둘러라! 뛰어! 시약소 실험실로!'
우리는 전속력으로 달려 시약소에 이르렀다. 그러나 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수련사들이 세베리노의 시신을 끌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험실에는 호기심 때문에 몰려든 수도사들 때문에 발 들여놓을 데가 없었다. 사부님은 수도사들을 물리치고는 안으로 들어가 서안 위에 쌓여 있는 수많은 서책 중에서 문제의 서책을 찾아내었다. 두눈을 번득이면서 책장을 넘기던 사부님이 혀를 찼다.
'아뿔싸!'
분명히 있던 아랍 어 부분이 그 서책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별로 튼튼하지 못한 표지와, 경금속으로 된 철끈 때문에 그 서책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나간 뒤에 누가 들어왔더냐?'
사부님이 방안에 있던 수도사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그 수도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표정으로 보아, 하도 많은 수도사들이 들락거리느 바람에 뚜렷하게 어느 누구를 기억할 수 없다는 뜻인 것 같았다.
사부님과 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검토해 보았다. 말라키아? 말라키아가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었다.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가 빈손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들어와 가져갔을 수도 있었다. 베노? 아랍 어 서책 때문에 사부님이 나에게 핀잔을 주었을 당시 뒤에서 낄낄대고 있던 베노... 무안하던 참이어서 나는 베노가 나의 무식을 비옷는다고 여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베노는 사부님의 순진함을 비웃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베노는 우리의 추리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 가령 세베리노는 아랍 어를 모르는데, 실험실에 아랍 어로 된 서책이 있을 까닭이 없다. 따라서 그것이 바로 문제의 서책이다... 라는 추리도 능히 할 인물이었다. 베노가 아니라면, 제3의 인물이 또 있는 것일까...
사부님이 맥을 놓는 모습은 옆에서 보고 있기가 딱할 지경이었다. 나는 사부님을 위로하고 싶었다.
'사부님께서는 사흘 동안이나 그리스 어로 된 서책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서책을 선별하시면서도 그리스 어로 된 것이 아닌 서책에는 소흘하신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인간이 실수를 피할 수 없는 것이야 어쩌겠느냐? 허나 실수가 유달리 많은 사람이 있다. 흔히들 그런 사람을 두고 바보라고 하는데, 여기에 있는 내가 바로 그런 위인이구나. 필사 원고 찾느라고 눈 벌겋게 뜨고도 눈앞에 있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이런 눈으로 옥스퍼드에서 공부를 했으면 무얼 하고, 빠리에서 공부를 했으면 무얼 하겠느냐? 둘을 붙인다면, 멍청한 수련사 둘, 광대 둘을 붙여 놓아도 우리 둘보다는 나을 게다. 상대가 우리보다 나은 것이 분명하니, 우리가 머리 싸쥐고 뛰어 봐야 똑똑한 수련사 둘, 광대 둘을 데려다 놓는 것만 같지 못할 게다.'
한동안 이렇게 맥을 놓고 있던 사부님은 마음을 달리 먹기로 했는지 이렇게 고쳐 말했다.
'아니다. 이렇게 징징 울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다. 만일에 말라키아가 그걸 가져갔다면 벌써 장서관에 갖다 놓았을 게다. 따라서 우리가 아프리카의 끝에 해당하는 소장실에 들어갈 방도만 알아내면 그 서책을 찾는 것도 가능하다. 베노가 가져 갔다면... 베노는 조만간에 내가 저를 의심할 줄 알고 곧 여기에다 도로 갖다 놓을 것이다. 불연이면, 그렇게 서둘렀을 리 없다. 베노 이놈... 서책을 가져 간 게 분명하다면 지금쯤 어디엔가 숨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놈을 찾으러 간다면 어디로 갈까? 이놈의 방이겠지. 따라서 베노는 제 방에 숨어 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방으로는 가봐야 헛일이다. 가자. 집회소로 가자. 가서, 레미지오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기나 하자. 어쩌면 쓸만한 말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나는 아직도 이 베르나르 기라는 자의 뱃속을 모르고 있다. 베르나르 기는, 세베리노가 죽기 전부터 레미지오를 붙잡으려고 경호 대장을 보냈다. 레미지오에게서 무엇을 읽었던 것일가? 그 까닭이 궁금하구나.'
우리는 집회소로 돌아갔다. 베노의 방으로 가지 않기로 한 것은 사부님의 또 한번의 실수였다. 뒤에 안 일이지만 베노에게는, 사부님의 식견에 견주어질 만한 그런 식견이 없었다. 그러니까 베노는 사부님의 예견과는 전혀 달리, 실험실로 돌아가 그 서책을 있던 곳에 되돌려 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제 방을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기고, 곧장 자기 방으로 달려가 그 서책을 숨겼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뒤로 미루어 두자. 이 뒤로 수도원에서는, 그런 서책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게 할 정도로 극적인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까지 잊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느 그동안 사부님의 임무와 관련된 화급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뿐이다.
9시과
베르나르 기는 집회소 한가운데에 놓은 커다란 호두나무 책상 앞 중앙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양옆으로는 각각 공증인 역할을 수행할 도미니크 회 수도사 하나와 교황청 사절단의 두 고위 성직자가 심판관 자격으로 배석해 있었다. 레미지오는 바로 그 책상 앞에 서 있었다. 레미지오 옆에 선 두 경호병은 정리인 셈이었다.
원장이 윌리엄 수도사를 향해 불만스러운 듯이 속삭였다.
'이건 법답지가 못하지 않습니까? 1215년 라테란 공의회의 율령 37조가 명기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심문관도 도보로 이틀 이상 떨어진 곳에 거주하는 피의자느 소환할 수도, 심문할 수도 없게 되어 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치 예외가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심문의 거주지와 피의자의 거주지는 떨어져 있어도 너무 떨어져 있는 게 아닙니까?'
사부님이 가만가만히 대답했다.
'이단 심문관이 갖는 면책 특권을 생각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심문관은 일반 사법권 관할 아래 있지 않는 만큼 반드시 율령에 따를 필요는 없지요. 거기에다 변호인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베르나르 기는 지금 이 특권을 즐기고 있는 것이지요.'
나는 레미지오를 보았다. 몰골이 참담하기가 말이 아니었다. 레미지오는 겁에 질린 짐승처럼 끊임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집회소로 끌려 나와서야 비로소 심판관들의 심상치 않은 태도에서 사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한 듯했다. 나는 그가 두 가지 이유에서 겁에 질린 채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첫째는 살인 사건현장에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베르나르 기가 조사를 시작하면서, 불목하니들을 통해 완곡한 암시로 경내로 퍼져나가, 미구에 이단 심문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 때문일 터였다. 이 두가지 다 레미지오를 두려움에 떨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자기 과거가 드러날까 봐 전전 긍긍해 하던 레미지오의 불길한 예감은 살바토레가 붙잡힘으로써 구체적인 현실이 되어 가고 있는 판국이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이 가엾은 레미지오가 저 자신의 과오를 알고 두려움에 몸둘 바를 모르는, 뒤가 구린 위인이라면 베르나르 기는 그런 피의자의 두려움을 공포로 바꾸어 놓을 줄 아는 방면의 선수였다. 베르나르 기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좌중이 마른침을 삼켜 가면서 심문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베르나르 기는 앞에 놓인 서류만 뒤적거릴 뿐이었다. 그의 생각은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느 이따금씩 섬뜩한 시선으로 피의자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 시선에는 위선적인 자비와 얼음장 같은 냉소와 냉혹한 독기가 고루 무르녹아 있었다. 그의 위선적인 자비는 피의자에게, <두려워 말아라, 너는 지금 네 선을 드러내어 악을 가리려는 형제들 앞에 있음이다>, 얼음장 같은 냉소는 <네가 네 선을 모르니 내가 일러 주리라>, 냉혹한 독기는, <심문하고 있는 한 너는 내 수중에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레미지오는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를 어렴풋이 헤아리고 있을 테지만, 베르나르 기의 침묵과 의도적인 지연 작전은 레미지오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같았다. 심문관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피의자는 그만큼 기가 꺾이면서 사람값이 깎이다가 결국은 체념하고, 손에다 잔뜩 침을 칠하고 기다리는 심문관의 먹이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윽고 베르나르 기가 그 길고 지루한 침묵을 깨뜨리고 공식적인 인사말을 몇마디 건성으로 한 다음 이런 말로 심문을 시작했다.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에 배석한 심판관들로서는 공히 용서하기 어려운 두 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된 자를 심문합니다. 두가지 혐의 중 한 가지는, 피의자가 살인 사건의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니 만치 형제들이 익히 아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자는 이미 그전에 이단적인 범죄 혐의로 수도원 경내에서 수배되고 있었습니다.'
레미지오는 쇠사슬에 묶인 손을 거북살스럽게 올려 얼굴을 감쌌다. 베르나르 기가 질문을 시작했다.
'피의자는 누구인가?'
'바라지네 출신인 레미지오올습니다. 52년 전에 태어났고, 소년 시절에 바라지네에 있는 소형제 수도원에 입문했습니다.'
레미지오가 뜻밖에도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해서 성 베네딕트 교단 수도원에 있는 것인가?'
'연전에 교황께서 회칙 <상타 로마나>를 선포하실 당시, 마음이 강건하지 못하던 저는 소형제파의 이단에 물들까 두려워하던 나머지, 유혹이 만연해 있는 그곳으로부터 저의 죄 많은 영혼을 거두어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 수도원에서 저를 거두어주신 덕분에 그로부터 8년 동안 식료계로 봉직하고 있습니다.'
'이단의 유혹으로부터 피하였거나, 이단을 발본 색원하려는 이단 심문관들로부터 피하였을 테지. 그런데도 착한 베네딕트 수도회는 너 같은 자들을 받아들이면서 대단한 자비라도 베푸는 줄 알았을 것이야. 허나 법의를 바꾸어 입는다고 해서 네 영혼에 묻은 사악한 이단의 때가 씻기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네가 바라지네에서 종적을 감춘 이후 무슨 짓을 했는지, 이 신성한 수도원에 오기 전까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보아야겠다.'
'저는 결백합니다. 사악한 이단의 죄악이라고 하시는데, 대체 무슨 연유에서 하시는 말씀인지요?'
레미지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베르나르 기가 심판관들을 돌아다보면서 소리쳤다.
'들으셨지요? 이단자들은 하나같이 이렇답니다. 이단자들은 피의자의 자리에서도 이렇게 태연한 얼굴을 하고는 되려 심문관에게 따진답니다.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고 후회할 것도 없다... 그런데 대체 무얼 심문하고자 하느냐... 이아니 기가 찰 노릇입니까. 그러나 이자들은, 바로 그런 태도야말로 유죄의 뚜렷한 증거 노릇을 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피의자의 자리에 이렇듯이 태연하게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 이자에게 지금부터, 내가 왜 저를 수배했는지 물어 보겠습니다. 레미지오, 너는 최근의 살인 사건이 있기 직전에 이미 수배되어 있었다. 그 까닭을 아느냐, 모르느냐?'
'모르니, 각하로부터 직접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놀라고 말았다. 레미지오는 베르나르 기의 지극히 상투적인 질문에 똑같이 상투적인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단 심문의 절차나 이단 심문이 피의자를 옭아 넣기 위해 마련해 두느 논리적인 올무 같은 것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이단 심판에 회부될 경우에 대비, 오래 연습해 왔을 터였다.
베르나르 기가 다시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하고 심판관들을 돌아다보면서 소리쳤다.
'들으셨지요? 회개할 줄 모르는 이단자들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해볼 만한 전형적인 대답이 아닙니까? 이들은 여우처럼 제 발자국을 감추는 데 대단히 능합니다. 그 꼬리를 붙잡기가 쉬운 일이 아닌 것은, 이들이 징벌을 면하기 위해서는 거짓 증언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답으로 진을 빼면서 시간을 끌어, 웬만큼 이런 인간들을 겪어 온 심판관들까지도 맥이 풀리게 만들어 버리고는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다릅니다. 그러면 또 피의자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레미지오, 그렇다면 너는 소형제파라고 불리는 무리, 청빈파라고 불리는 무리, 베기니파라고 불리는 무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냐?'
'청빈 논쟁이 오래 계속되고 있을 즈음 저역시 소형제파 수도사들과 함께 그 파란을 겪었습니다만 베기니 파에 가담한 일은 없습니다.'
'들으셨지요? 베기니 파에는 가담한 적이 없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소형제파와의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베기니파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이들이 소형제파를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곁가지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소형제파는, 프란체스코 회의 곁가지니까 따라서 저희 행동도 순수하고 완전했다, 이렇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한짓이나 저들이 한 짓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물어보겠습니다. 레미지오! 너는 교회에서, 다른 수도사들처럼 무릎을 꿇은 채 두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대신, 얼굴을 벽에 대거나 머리에다 두건을 쓴 채 부복하고 기도한 것을 부인하겠느냐?'
'베네딕트 회 수도사들도 때에 따라서는 부복하는 줄 압니다.'
'나는, 때에 따라서 어떻게 하느냐고 물은 게 아니고, 평소에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네가 베기니 파 이단의 전형적인 몸가짐을 보였을 것인즉 이를 부인하지 말 것이다. 네 말에 따르면 너는 베기니 파에 속하지 않는데, 그러면 너는 무엇을 믿느냐? 네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여 보아라.'
'저는 선한 기독교인이 마땅히 믿어야 할 바를 믿습니다.'
'명답이로구나. 그런 선한 기독교인은 무엇을 믿느냐?'
'신성한 교회의 가르침을 믿습니다.'
'그럼 신성한 교회는 어떤 교회냐? 스스로 완전한 기독교인들임을 자처하는 가짜 사도파나 이단적인 소형제파가 신성하다고 믿는 교회냐, 아니면 그 이단자들이 바빌론의 창녀소굴이라고 하는 교회냐?'
'베르나르 각하, 각하께서는 어떤 교회를 참 교회라고 믿으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거야 교황 성하와 추기경들이 주도하는, 유일한 교회, 신성한 교회, 사도적이 교회인 로마 교회가 아니겠느냐?'
'저도 그런 교회를 믿습니다.'
'이 교활한 놈! 참으로 놀라운 잔꾀를 피우느구나. 자, 모두들 들으셨지요? 이자느 내가 믿는 교회를 저도 믿는다는 눙치는 수작으로 나의 질문을 교묘하게 피하고 있습니다. 허나 내가 이런 잔꾀를 모르지 않는 바,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지요. 너는, 성사는 주님에게서 비롯되고, 진정한 참회는 하느님의 종에 대한 고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걸 믿느냐? 로마 교회는 하늘에서 결지해지할 것을 땅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다고 믿느냐?'
'믿으면 안 됩니까?'
'되는지 안 되는지를 물은 게 아니고, 너의 믿음을 물은 것이다.'
'저는, 각하와, 선하신 대덕들이 믿으라고 하시는 것은 모조리 믿습니다.'
레미지오가 겁에 질린 채 대답했다.
'그래? 그럼 네가 말하는 그 선한 대덕들이란, 바로 네 교파에서 지령을 내리는 자들을 지칭하는 것이겠구나. 너는 선한 대덕들이라는 말로 그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지? 네가 신앙의 금과옥조로 삼고 따르는 그 거짓말의 장본인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렷다? 내가 만일 그런 자들을 믿는다면 너도 나를 따라 그들을 믿겠다, 이런 말을 한 것이지? 아니면, 내가 믿든 말든 너만이라도 믿겠다는 뜻이냐?'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각하께서는 지금 제가 하고 싶어하지 않는 말을 시키려고 하십니다. 저는, 각하께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 가르쳐 주시면 그것을 믿겠다고 한 것입니다.'
베르나르 기가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뻔뻔한 자를 보았나! 너는 지금 네 기억력에 의지해서 네 교파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리를 앵무새처럼 주워 섬기고 있음이 아니냐? 너는 지금, 내가 만일에 네 교파를 지지한다면 나를 믿겠다고 했다. 가짜 사도파 이단자들 역시 그렇게 대답한다. 너도 모르고 있다 뿐이지 같은 대답을 한 것이다. 어째서 이런 대답이 나오고 있는 것이냐? 네 입에서, 이단 심판관들을 속이려고 오래 연습해 두었던 말이 튀어나오고 있음이야. 따라서 너는 지금 네 입으로 너를 기소하고 있는 것이다. 내 오래 심판관, 조사관, 심문관 노릇을 해오지 않았더라면 네가 놓은 말 덫에 걸리고 말았을 것이다. 교활한 자 같으니, 하지만 심문은 계속하겠다. 파르마 사람 게라르도 세가렐리라는 이름 들어 본 적이 있으렷다?'
'...남들의 입을 통해 들은 적은 있습니다...'
레미지오의 얼굴에 색깔이라는 색깔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상태를 창백하다고 해도 좋다면, 레미지오의 얼굴은 그렇게 창백할 수 없었다.
'노바라의 돌치노라는 이름은?'
'남들의 입을 통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면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느냐?'
'...'
레미지오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디까지 대답해야 할 것인지 나름으로 계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동안 거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습니다.'
'더 크게 말하여라! 네 입에서 나온 말이 남의 귀에 들려야 하지 않겠느냐? 언제, 어디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느냐?'
'제가 노바라 근방의 수도원에 수도사로 있을 때 돌치노 무리가 그곳에 진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몸붙이고 있던 수도원 옆을 지나간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에 그들의 정체를 아는 수도사는 하나도...'
'이런 거짓말쟁이! 바라지네의 프란체스모 회 수도사가 어떻게 노바라 인근 지역의 수도원에 몸붙이고 있을 수 있더냐? 너는 수도원에 있지 않았다. 너는 그때 이미 소형제파 무리에 어울려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걸승패 노릇을 하다가 돌치노 파에 가담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본 듯이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레미지오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본 듯이 말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줄까? 암, 마땅히 가르쳐 주어야 할 일일 테지.'
베르나르 기느 이 말 끝에 경호대장을 향해 살바토레를 끌고 들어오라고 명했다.
레미지오에 대한 심문보다 훨씬 가혹했을 터인 베르나르의 비공개 심문을 하룻밤 견디고 나온 살바토레의 모습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끔찍해 보이느 살바토레의 얼굴인데, 그 날만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우리만치 흉측했다. 베르나르 기가 비공개 심문의 고사였으니 당연하겠지만 외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를 어떻게 손을 보았는지 살바토레는 전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경호병들에게 끌려들어오는 그의 모습은 밧줄에 엮인 원승이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베르나르의 비공개 심문이 얼마나 혹독했던가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베르나르 심문관은 살바토레를 고문한 모양입니다.'
내가 사부님 귓가에서 속삭였다.
사부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는 소리 말아라. 심문관은 고문같은 것은 하지 않는 법이다. 피의자 육신의 관리는 속권의 소관이야. 그러면 누가 살바토레를 고문했겠느냐?'
'다를 것이 없지 않습니까?'
'어리석기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심문관의 입장에서 보아도 다르고, 피의자의 압장에서 봐도 다른 것이야. 고문은 궁병대에서 한 것이다. 심문관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서 좋고, 피의자는 그렇게 고문을 당할 때는 차라리 심문관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어서 좋고... 그렇게 고문을 당하다 심문관을 만나면 피의자는 마음을 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법이다.'
'사부님께서는 저를 놀리고 계십니다.'
'놀리는 것 같으냐?'
이렇게 반문하는 사부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웠다.
베르나르가 살바토레를 상대로 질문을 시작했다. 나에게는 이 괴물 같은 사내의 말을 여기에 직접 화법으로 옮겨 적을 재간이 없다. 그의 말은 그전의 어떤 때 그가 하던 말보다 난해했다. 그는 비비의 몰골로 증인석에 나와 심문관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나 좌중에 그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희소했다. 할 수 없어서 그랬던지, 달리 생각이 있어서 그랬던지 베르나르 기는 방침을 바꿔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게 했다.
베르나르 기의 예, 아니오를 이용한 절묘한 유도 심문에 걸려 살바토레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독자 여러분은, 살바토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할 것이다. 그는 전날 밤의 비공개 심문을 당하면서 한 말을 그 자리에서도 대충 시인했다. 그가 베르나르 기에게 자백하고 집회소에서 시인한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살바토레는 소형제파, 빠스뚜로, 그리고 사도파 사이를 방황하다가 이윽고 돌치노 파에 가담하게 되는데, 그는 여기에서 레미지오를 만난다. 돌치노 무리와 함께 반역의 산 전투를 경험한 이들은 이단자 무리가 괴멸하기 직전 돌치노 파를 도망친 뒤 천신만고 끝에 카잘레 수도원에 몸붙이고 살게 된다. 그런데 이단의 괴수 돌치노는, 싸움에 패배하면서 붙잡힐 때가 임박해지자, 어디의 누구 앞으로 가는 것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밀서한 통을 레미지오에게 맡긴다. 레미지오는 이 밀서를 감히 수신인에게 전하지 못한 채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문제의 수도원에 도착하자, 다른 수도사들의 눈이 무서워 더 이상 지니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파기할 수도 없어서 장서관 사서 말라키아에게 맡긴다. 그러니까 말라키아는 그 밀서를 장서관 어딘가에 보관하고 있는 것이었다.
살바토레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시종 증오의 눈길로 노려보고 있던 레미지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이 구렁이 같은자, 음탕한 원숭이 같은 자! 나는 너의 대부이자 친구이자 방패가 아니더냐? 네가 나에게 이렇게 갚을 수가 있느냐?'
살바토레는 참으로 방패가 필요할 때 요긴하게 그 방패노릇을 해오던 레미지오를 바라보면서 힘겹게 대꾸했다.
'레미지오 수도사님, 이 살바토레, 힘이 닿을 동안 수도사님의 사람 노릇을 했습니다. 수도사님은 곧 좋은 분이었지요. 그러나 그 산의 왕초를 아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말이 없는 사람은 걸어서라도 가야 한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미친놈! 걸어서는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만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너 역시 이단자를 태우는 화형주의 연기로 사라질 것을 왜 모르느냐? 고문을 못 이겨서 한 말이라고 고쳐 말해라. 모두 네가 지어낸 말이라고 해라!'
'수도사 어른, 내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만, 파타리니 파, 가제시 파, 리용의 빈자파, 아르날도 파, 스페론 파, 할례 받은 무리들... 이게 이단이지 우리가 어찌 이단 축에 들겠습니까? 저는 배운 놈이 못 됩니다. 나는 악의가 있어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베르나르 각하께서도 아십니다. 저는,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각하의 자비를 빌 뿐입니다요.'
살바토레의 말에, 레미지오를 대신해서 베르나르 각하가 대답했다.
'암, 우리의 직무가 허락하는 선에서 자비르 베풀고말고. 뿐인가, 네 영혼의 문을 열게 한 선의는, 형제의 우애로 참작할 것이다. 이제 가거라. 가서 네 독거에서 회개하되 우리 주님의 자비를 믿으라, 우리는 조금 다른 문제를 심의해야 한다. 자, 레미지오. 계속하자. 너는 돌치노가 준 밀서를 가져다 장서관 사서로 있는 도반 수도사에게 건네주었다.'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니에요!'
그게 통할 줄 알았던지 레미지오가 외쳤다. 과연 주도 면밀한 베르나르 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허나 이를 확인할 사람은 네가 아니다. 힐데스하임 사람 말라키아 수도사가 있으니까.'
그는 경호대장에게 말라키아를 부르게 했다. 말라키아는 심문 현장인 집회소에 없었다. 나는 그가 문서 사자실, 아니면, 시약소 근방에서 베노와 함께 문제의 서책을 찾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호병들이, 그리 오래지 않아 엉망진창으로 모습이 흐트러진 말라키아를 데리고 왔다. 말라키아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만나지 않으려는 듯이 시종 눈을 내리깔았다. 사부님이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이제 베노는 마음놓고 제 하고 싶은 짓을 하게 생겼구나.'
그러나 이 역시 사부님의 오산이었다. 집회소를 기웃거리는 수많은 수도사들의 어깨 너머로 베노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베노는 제 하고 싶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집회소를 기웃거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사부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나는, 집회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호기심에 견주면, 수수께끼의 서책에 대한 베노의 호기심도 별것은 아닌 모양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뒤에 안 일이지만, 베노는 이미 제몫의 천박한 흥정을 끝내고, 느긋하게 심문 현장 구경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증인석에 나섰지만 말라키아는 레미지오 쪽으로는 얼굴 한번 돌리지 않았다.
베르나르가 나직한 음성으로 증인 심문을 시작했다.
'말라키아! 살바토레가 모든 것을 자백한 오늘 아침, 나는 그대에게 여기에 있는 피의자 레미지오로부터 무슨 밀서를 받은 것이 없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그때 나에게 한 대답을 되풀이해라.'
'말라키아! 나에게 해될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나?'
레미지오가 소리쳤다.
말라키아는 레미지오를 향하여, 가까이 있는 내 귀에 겨우 들릴 만한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거짓 맹세를 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어떻게 더 이상 당신에게 해될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밀서는 오늘 아침 당신이 세베리노를 죽이기 직전에 이미 베르나르 각하의 손으로 넘어갔다.'
'너는 안다, 분명히 안다, 나는 세베리노를 죽이지 않았다. 너는 나보다 먼저 거기에 와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다.'
'내가 당신보다 먼저 거기에 와 있었다고? 내가 거기에 간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발견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말라키아가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 해두어라...'
베르나르 기가 두 사람의 대화를 중도에서 자르고는 레미지오에게 불었다.
'...레미지오, 너는 세베리노의 실험실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느냐?'
레미지오는 얼이 빠진 듯한 눈길로 처음에는 윌리엄 사부님을, 다음에는 말라키아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 시선을 베르나르 기 쪽으로 돌리고는 대답했다.
오늘 아침... 저기에 계신 윌리엄 수도사님으로부터, 세베리노에게 무슨 서류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게다가 어젯밤에 살바토레가 끌려가고 나서부터는, 그 밀서건이 마음에 걸려...'
'그것 보아라, 너느 분명히 밀서 건을 알고 있지 않았느냐!'
베르나르가 의기 양양하게 외쳤다. 레미지오는 드디어 베르나르의 올무에 걸린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두 개의 올가미, 즉 이단과의 살인죄의 올가미를 쓴 것이었다. 그러나 레미지오는 늦게나마, 두 번째 혐의에만은 대처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종잡기 어려운 말투, 헝크러진 논리로 보아 그의 희망은 성취되지 못할 모양이었다.
'밀서 건은 나중에 말씀드리고... 먼저, 아니 나중에 그게 제 손에 들어온 경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 일을 먼저 해명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살바토레가 베르나르 각하의 수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당연히 밀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습니다. 이 밀서는 몇 년 동안 저를 괴롭혀 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윌리엄 수도사님과 세베리노 수도사가 무슨 서류를 놓고 이야기하는 걸 엿듣게 되었습니다. 물론 무슨 서류 이야기를 하는지 저로서야 알 리 없지요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저는, 혹시 말라키아가 그 밀서를 없애 버리려고 세베리노에게 건네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는, 그걸 찾아서 파기해 버릴 생각에서 세베리노의 시약소 실험실로 갔습니다... 그런데 세베리노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그 밀서를 찾으려고 실험실을 뒤졌습니다. 너무 무서웠던 나머지...'
사부님이 내 귀에 입술을 대고는 속삭였다.
'밥통같으니... 이리를 피해 사자 아가리로 들어가는구나.'
베르나르의 음성이 사부님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려 왔다.
'어지간히 진실에 가깝다고 하자... 나는 어지간히라고 했다. 자, 너는 세베리노가 그 밀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실험실을 뒤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베리노가 그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네가 다른 형제들을 죽인 까닭은, 그 밀서가 여러 손을 거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화형당한 이단자의 유품 수집이 이 수도원 가풍이던가?'
나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수도원장의 안색을 살폈다. 기겁을 하는 것으로 보아 정신이 번쩍 들었던 모양이었다. 세상에... 화형당한 이단자의 유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수도원이라니... 수도원을 이렇게까지 모욕할 수는 없었다. 베르나르 기는 교묘하게 살인죄와 이단죄를 한 줄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고는 이것을 절묘하게 수도원의 목에다 걸어 버린 셈이었다. 그전에 있었던 살인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레미지오의 절규에 내 생각은 허리가 잘리고 말았다. 베르나르는 조용히 레미지오를 달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본론에서 빗나가 있음을 모를 베르나르가 아니었다.
'레미지오, 너는 지금 이단 혐의로 심문을 당하고 있다. 공연히 세베리노 이야기를 꺼내거나 말라키아를 끌어들임으로써 우리의 주의를 너의 그 이단적인 과거사에서 떼어놓으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밀서 건으로 되돌아가자...'
베르나르는 말라키아 쪽으로 돌아섰다.
'힐데스하임 사람 말라키아 수도사! 그대는 피의자로 이 자리에 출두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오늘 아침 나의 증인 심문에 응해 주었고,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 달라는 나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제 오늘 아침에 했던 말을 여기에서 다시 할 것을 명한다.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말라키아의 확인 증언이 시작되었다.
'오늘 아침에 드린 말씀을 되풀이 하겠습니다. 레미지오 수도사는 이 수도원으로 옮겨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식물과 요사를 담당하는 식료계가 되었습니다. 장서관과 주방이 한 건물에 있기 때문에 저희 둘은 업무상 자주 접촉했습니다 장서관 사서로서 저는 밤마다 본관 문을 모두 걸어 잠가야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주방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저희 둘이 가까이 사귀었고, 제가 레미지오 수도사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레미지오 수도사는 저에게, 고해 성사를 통해 자기에게 맡겨진 극비 서류가 있는데, 다른 손으로 넘어가도 안 되고 자기 손에 있어도 안 되는 것이라면서, 수도원에서는 유일한 금단의 구역인 장서관 사서인 저에게, 여느 수도사의 호기심이 닿지 않는 곳에다 그 서류를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단자와 관련된 것인 줄 모르고 또 읽어 보지도 않고 그러마고 했습니다. 서류를 받는 즉시 저는 그것을 장서관의 여러 방 중에서도 가장 일반의 접근이 어려운 밀실에다 감추었습니다만 그 뒤로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오늘 아침에 베르나르 각하께서 말씀하시길래 넘겨드린 것 뿐입니다.'
수도원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라키아에게 물었다.
'식료계와 그런 약속을 했으면 어째서 나에게는 알리지 않았는가?' 장서관은 수도사의 소지품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지를 않는가?'
원장은 이로써 이 일과 수도원과 아무 관계가 없음을 못박고 싶은 것이었다. 말리키아는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원장님, 이 일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제 불찰입니다. 모르고 지은 죄입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물론, 물론 용서 받아야 하고말고...'
베르나르가 다정하게 말라키아를 위로하고 나서 좌중을 돌아다보았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모두 이 장서관 사서가 한 행동을 납득하고 있습니다. 이 심문장에서 보여 주는 그의 솔직한 태도는 그의 행동이 마땅히 용서받아야 하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원장께서는 이 사서 수도사의 지난날 허물을 너무 꾸짖지 마시기를... 우리는 말라키아 수도사를 믿습니다. 이제 이 사람에게 신성을 앞세워 선서하게 하고 내가 보여주는 이 서물이 바로 이 사람이 오늘 아침 내게 건네준 서물과 같은 것인지, 그리고 연전에 바라지네 사람 레미지오가 본 수도원에 도착한 직후에 맡긴 것과 같은 것인지 확인하게 하겠습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 가운데서 두 장의 양피지를 들어 말라키아에게 보여 주었다. 말라키아는 그 양피지를 보고는 분명하게 말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거룩하신 성모님, 그리고 이 세상을 살다 가신 성인들의 이름으로 이게 그것임을 확인하느 바입니다.'
'됐네. 이제 힐데스하임 사람 말라키아 수도사는 가도 좋다.'
베르나르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라키아가 고개를 숙인 채 문앞까지 걸어갔을 때였다. 집회소 창가로 몰려와 있던 호기심 많은 수도사 무리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너는 저자의 밀서를 감추어 주었고, 저자는 주방에서 너에게 수련사들의 궁둥이를 구경시켜 주었지?'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말라키아는 좌우를 헤치고 황급히 문을 나섰다. 아이마로의 음성이었다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아이마로는 가성으로 외친 것이 분명했다. 수도원장이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 잠자코 있지 않으면 중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하고 나서,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던지 수도사들에게 집회소 주위에 몰려와 있는 잡인을 내치라고 명령했다. 새빨갛게 화를 내며 길길이 뛰는 수도원장을 바라보면서 베르나르는 심술궂게 웃었다.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 추기경은 장 다노의 귀에 입술을 대고는 뭐라고 소근거렸다. 수도원장이 들어서 좋을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수도사들은 일제히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거렸다. 윌리엄 수도사가 중얼거렸다.
'이 레미지오라는 자... 육욕의 죄만 범한 줄 알았더니 뚜쟁이 노릇까지 한 모양이로구나. 허나 베르나르에게는 관심이 없는 일이다. 황제측의 중재자인 수도원장의 입장만 난처하게 되고 말았구나.'
그때였다. 베르나르 기가 윌리엄 사부님께 말을 걸었다.
'윌리엄 형제, 형제로부터 직접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아침 세비리노와 무슨 서물 이야기를 하셨길래 레미지오가 엿듣고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 것입니까?'
베르나르의 눈길을 맞은 사부님은 천천히 대답했다.
'아닌게 아니라 참으로 난처한 오해를 했나 보군요. 우리는 아유브 알 루하위라는 사람이 쓴 개의 공수병에 대한 논문의 사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단한 논문이라서 익히 아실 것입니다만, 읽어 두시면 어르신께도 아주 요긴하실 것입니다. 아유브는 광견병 증상을 스물 다섯가지나 소개하고 있는데...'
도미니크 회에 소속되어 있는, 즉 <주님의 개들>인 베르나르에게는 그 마당에 광견병 이야기로 또 한차례 싸움을 벌일 의사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우리의 심문과는 상관없는 문제로군요...'
베르나르는 재빨리 이렇게 말머리를 틀어 버리고는 질문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말에다 뼈를 묻는 것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 광견병에 걸린 개보다 더 위험한 소형제회의 레미지오, 네 문제로 돌아가자. 만일에 윌리엄 형제가 지난 며칠동안, 개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큼만 3류 이단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 수도원에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진작에 알았을 것을... 밀서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이제 우리는 그 밀서가 네 수중에 있었고, 너는 그것을 숨기려고 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너는 형제를 죽였고... 암, 아니라고 할 테지. 어쨌든 너는 그게 내 손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누군가를 죽였지만, 그 이야기도 나중에 하자. 자, 이게 바로 그 밀서렷다?'
레미지오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 침묵은 웅변적이기에 충분했다.
베르나르의 심문이 계속되었다.
'이 밀서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두 쪽으로 이루어진 이 밀서는 이단의 괴수 돌치노가 체포되기 며칠 전에 쓴 것이다. 돌치노는 이것을 졸개 중 하나에게 주어, 이탈리아 각처에 분산되어 있던 제 교파의 잔당들에게 전하게 했다. 내용을 너에게 읽어 줄 수도 있다. 돌치노는 최후가 제 턱 끝을 조이자 이른바 <희망의 밀서>를 잔당들에게 보낸다. 그는 잔당들을 위로하고, 1305년이 되면, 교황청에 속하는 성직자들은 페데리코 황제 손에 토파될 것이라는 자신의 예언을 전하면서, 비록 그 날짜가 밀서에 쓴 날짜와 일치되지 않더라도 이들이 파멸한 날은 오래 남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단의 괴수는 또 한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자가 예언한 날로부터 20년이 지났는데도 그 사악한 예언 중에는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허나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해야 하는 것은 이 예언을 비웃는 일이 아니라, 너 레미지오가 이 밀서를 품고 다녔다는 사실을 따지는 일이다. 이 회개할 줄 모르는 이단자야, 그래도 네가 가짜 사도파와 교통하고 밥술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겠느냐?'
레미지오도 이 대목까지 와서는 부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베르나르 각하, 저는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하게 청춘을 보낸 가엾은 놈입니다. 다 말씀드리지요. 소형제파에 끌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설교를 듣는 순간 돌치노에게 끌려 그의 말을 믿고 그 무리에 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입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브레시아와 베르가모 지역에 있었습니다. 무리에 휩쓸려 코모에도 갔고, 발세시아에도 갔습니다. 네, 무리와 함께 대머리산으로, 라사 계곡으로 피신했다가 함께 반역의 산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에 가담한 적은 없습니다. 그들이 살인과 노략질을 일삼을 때도 저는, 성 프란체스코를 따르는 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미덕, 혹은 미덕에서 멀어지지 않고자 하는 정신을 제 영혼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반역의 산에서, 그래서 저는 돌치노에게 더 이상 싸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돌치노는 저 같은 겁쟁이에게는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다면서, 하산을 허락하는 대신 불로냐로 편지 한 통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 전하라고 했냐?'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 추기경이 처음으로 심문에 합세했다.
'돌치노 파 사람인데, 이름은 잊었습니다. 기억나면 말씀 올리겠습니다.'
레미지오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해 놓고도 몇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베르트란도 추기경은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인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베르나르 기와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베르나르 기느 이름을 기록하고 나서 레미지오에게 물었다.
'어째서 너는 옛 친구들을 네 손으로 넘기느냐?'
'그들은 저의 옛 친구들이 아닙니다. 밀서를 전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아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돌치노파에 너무 깊이 빠져 든 것은 사실입니다. 몇 년 동안 잊으려고 애쓰던 일입니다만, 지금부터는 하나도 빼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반역의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산밑의 평야 지대에는 베르첼리 주교 휘하의 군대가 진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평야 지대를 안전하게 지나기 위해 베르첼리 주교 휘하의 군사 몇 명과 접촉, 돌치노의 성채를 공격하는 데 요긴한 비밀 통로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안전을 보장받았습니다. 따라서 교회측 군사가 돌치노 무리를 토파한 데는 저의 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점입가경이로구나. 너는 이단자일 뿐만 아리나 겁쟁이를 겸하더니 이번에는 배신까지 하는구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 형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 네가 네 안전을 도모하려고 일찍이 너에게 은혜를 베푼 바 있는 말라키아를 비난했듯이, 너는 너 자신의 신명을 보전하느라고 죄 많은 동료들을 구교의 군대에다 넘긴 것이다. 너는 돌치노 무리를 배반한 것처럼 말한다만, 네가 배반한 것은 그들의 육신이지 그들의 가르침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너는 그 돌치노파가 다시 무리르 규합할 날이 오리라 믿고 그 밀서를, 돌치노 교리에 대한 믿음의 표적으로 간수한 것이다. 어려운 시대를 넘기고, 기회가 오면 그 유품을 잔당들에게 전하고 그 가짜 사도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너는 그 밀서를 간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맹세할 수...'
레미지오는 진땀을 흘리면서, 두 손을 내저었다. 그 손끝이 몹시 떨리고 있었다.
'맹세라고? 이 맹세야말로 너의 유죄를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야. 발도파 이단자들이 겉 다르고 속 다른 주장을 하려 할때마다 쓰느 상투적인 수법이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고문을 당하다 장하에 죽을망정 맹세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는 이것을 익히 알고 있는 내 속을 들여다보고 맹세라는 말을 입에 담음으로써 이단과 인연이 없는 척하려는 것이다. 발도 파 이단자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내 들려줄 말이 있으니 잘 들어 두어라. 이자들은 겁에 질리면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짜 맹세를 한다는 것이다. 이 교활한 여우야, 네가 리용의 빈자파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런데도 너는 나에게, 너의 참 실재를 감추고 거짓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 맹세를 한다고 했다. 맹세하려므나, 용서받고 싶거든 맹세하려므나,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히 해두자. 단 한번의 맹세로는 안 된다. 두 번, 세 번, 백 번, 천 번... 내가 요구하는 대로 맹세해야 한다. 나는 너희 가짜 사도파 무리가, 교파를 배반할 지언정 가짜 맹세라도 하는 놈이면 사면한다는 것을 잘 안다. 따라서 너의 맹세는 너의 유죄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신가요?'
레미지오가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베기니 파의 이단자들처럼 부복하지 말라! 네가 해야 할 일이 딱 하나 있다. 이 시점에서 네 입으로부터 어떤 고백이 나와야 하는지는 나만이 안다. 그러니까 이실직고하라, 오로지 이실직고하라. 이실직고해도 처벌을 면할 수는 없지만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위증의 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과 너그러움과 연민의 감정을 훼손하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대화를 한시 바삐 끝내기 위해서라도 오직 이실직고하라!'
'무엇을 이실직고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두 등급의 죄악이다. 돌치노 무리에 가담한 죄, 이단의 교리를 나누고 주교와 지방 장관의 권위에 도전하여 십자군을 공격한 죄, 완전히 뿌리 뽑히거나 토파된 것은 아니지만, 이단의 괴수가 죽고 그 무리가 사분오열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참회할 줄 모르고 환상에 사로잡혀 거짓 증거한 죄가 그것이다. 가짜 사도파에서 배운 간계에 영혼을 뿌리째 썩인 너는 이 수도원에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해 공히 대죄를 지은 죄인이다. 그 까닭은 네가 아직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만, 교황 성하의 가르치심과 그분이 내리시는 칙서에 반하여 청빈을 가르쳐 왔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는 자들은 모조리 이단자들이다. 이는 믿는 자들이 반드시 유념할 바요, 그렇게 된다면 나로서는 족한 것이다. 이제 네가 저지른 바를 실토하라.'
베르나르의 간계는 이로써 분명해졌다. 그가 노리는 것은, 누가 누구를 죽였느냐는 것이 아니라, 레미지오가 황제측을 대표하느 소형제회 교리에 어떻게 물들어 있느냐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두가지로 대별되는 교리, 말하자면 페루지아 총회의 중심 세력이었던 프란체스코 회의 교리와, 소형제파와 돌치노 파 교리의 관련성을 증명해 내고, 수도원의 특정인이 이단자 무리와 줄을 대고 있다가 연쇄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만 증명한다면 베르나르는 이로써 적대 세력인 황제측 사절단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윌리엄 사부님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예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손을 쓰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느 수도원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그 역시 그제서야 베르나르의 올가미에 걸린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중재자로 나선 그 자신은 사절단의 웃음거리가 되는 셈이었다. 그는 바로 그 집회소에서 베르나르에 의해, 14세기의 마귀라는 마귀는 모조리 모여 한바탕 소동을 부리는 우스꽝스러운 수도원의 원장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레이지오도, 자기가 무슨 범죄로부터 어떻게 결백하다고 주장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더 이상은 머리로 계산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레미지오는 절규했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레미지오의 절규는 영혼의 절규로 들렸다. 그는 그렇게 절규함으로써 오래 간직했던 은밀한 회한을 풀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불확실성과 열광과 절망과 배신을 상대로 불가항력으로 맞서 온 자기의 한 많은 삶을 되돌아보되,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에는 이미 늦었으니 차라리 죄 많은 청춘 시절의 믿음이라고 언명하고 죽기로 마음먹은 사람같았다.
'그렇습니다. 사실입니다. 저는 돌치노와 함께 있었고, 그 일파의 범죄 행위와 음란한 행위에도 동참했습니다. 저는 미쳐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유에의 갈망과 주교에의 증오와 혼동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죄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맹세컨대, 이 수도원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에 관한 한 저는 결백합니다.'
베르나르 기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렇게 나와야지. 네가 이제 와서야 돌치노, 마녀 마르게리타, 그리고 돌치노를 따르던 무리와 이단을 함께 했음을 시인하니 하는 말이다. 놈들은 트리베로에서 죄 없는 어린 아이 열 명과 선한 기독교인들을 교살한 일이 있는데, 그때 그 현장에 함께 있었던 것을 인정하겠느냐? 저희를 따르지 않는다고 그 부모와 아내 앞에서 이들과 지아비를 교살할 때도 함께 있었던 것을 인정하겠느냐? 당시에는 증오에 눈이 멀고 가짜 믿음에 눈이 멀어 있었으니, 마땅히 너희를 따라야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내 말이 맞느냐?'
'맞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 놈들이 주교의 군대를 사로잡아 감옥에 넣어 굶겨 죽이고, 아기 가진 여자의 팔을 자르고, 그 고통 속에서 여자로 하여금 아기를 낳게 하고, 낳은 아기에게 세례도 베풀지 않고 죽였을 때도 너는 함께 있었을 테지? 모소 지역, 트리베로 지역, 코실라 지역, 클레키아 지역, 크레파코리오 지역, 모르펠리아노 지역, 쿠오리노 지역의 집집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고, 성상을 모독하고, 성묘의 묘석을 뜯어내고, 성모상의 팔을 부러뜨리고, 성배와 성기와 성서를 노략하고, 첨탑을 부수고, 종을 깨뜨리고, 자선 단체의 기금과 사제의 소지품을 배앗고, 트리베르 교회를 무너뜨릴 때도 너는 거기에 있었으렷다?'
'네,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저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최후의 심판을 전하는 전령관이고자 했습니다. 저희는 하늘이 보내신 황제와 신성한 교황의 첨병이었습니다. 네, 저희는 필라델피아 천사의 강림을 앞당기고자 했습니다. 그래야 모두 성령의 은혜를 입고, 교회가 거듭한 상태에서, 오로지 교회만이 온갖 사악한 것들의 잿더미 위에서 온전히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 생가했기 때문입니다.'
레미지오는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 침묵과 의색과 양광의 둑이 허물어지면서 그의 과거는 혹은 말로, 혹은 형상으로 그의 머리에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 세월좋던 시절의 광기를 고스란히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하면 되었다. 이제 너는 게라르도 세가렐리를 순교자로 현양했고, 로마 교회의 권위를 부정했고, 교황은 물론 어떤 권세도 너희가 살아온 것과 다른 삶을 베풀 수는 없고, 어느 누구도 너희를 파문할 권리를 갖지 못하고, 성 실베스트로 시대 이후 교회의 모든 고위 성직자는, 모두 모로네의 피에트로만 제하고느 모조리 담 넘어가는 구렁이 아니면 여우이고, 초대 사도들처럼 절대 무류와 청빈을 실천하지 않는 사제들에게는 십일조를 바칠 필요가 없고, 따라서 십일조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사도이며 빈자들인 너희에게만 바쳐야 하고,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마구간에서 하건 성별된 교회에서 하건 마찬가지라고 고백했다. 뿐만 아니라 너는 마을마을을 다니며 <회개하라>를 외치며 사람들을 꾀었고, <여왕이여, 안녕>이라는 노래로 무리를 모았고, 세상의 눈앞에서 가장 완전한 삶을 산답시고 스스로 고해 사제를 참칭하고, 결혼을 비롯한 일체 성사를 믿지 않는 것을 기화로 온갖 음란한 언행을 일삼았고, 너희 스스로를 남보다 정결하다 하여 너희 육체와 다른 사람들의 육체에 온갖 추행을 일삼았다고 고백했다. 맞느냐?'
'맞습니다. 당시에 내 영혼을 바쳐 온전하게 믿던 참 진리를 고백합니다. 일체 무소유를 보여 준답시고 옷을 벗었고, 당신네 개들의 족속이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다 하여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렸던 것을 고백합니다. 그때부터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돈 한 닢 받은 바 없고,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않았으며, 오로지 보시에 힘입어 살되 내일을 위해 아무것도 모으지 않았으며, 신도가 혹 우리를 받아들여 음식상을 내면, 먹되 떠나갈 때는 상에 남은 것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음을 고백합니다.'
'너는 선량한 기독교도의 재산을 탐하여 불을 지르고, 그 재산을 노략했다.'
'우리가 불지르고 노략한 것은 일찍이 청빈을 우주적 율법으로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타인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쌓은 부를 전유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교구에서 저 교구까지 뻗어 있는 탐욕의 거미줄 한가운데를 걷어 버리고 싶었을 뿐이지, 얻기 위해 노략하고 노략하기 위해 불지른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징벌하기 위해, 더러운 자들을 피로 정화하기 위해 죽였습니다. 어쩌면 정의를 향한 미치광이 같은 욕망에 쫓긴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인 한, 하느님에 대한 넘치는 사랑이나 지나친 무류에 겨워 죄를 짓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보내셨고, 마지막 날 영광의 승리자로 선택하신, 참 영혼을 가진 대중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네들의 파멸을 앞당기고, 천국에서 그 상을 받고자 했습니다. 우리만이 그리스도의 사도였을 뿐, 다른 이는 모두 그분을 배반한 이단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게라르도 세가렐리는 신목이었습니다. 우리 교단은 하느님께서 몸소 세우신 교단입니다. 우리느 하루 빨리 당신네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무고한 자도 죽이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평화와 행복이 모두에게 두루 미치는, 보다 나은 새 세상을 바랐습니다. 우리는 당신네들의 탐욕이 불러 일으킨 전쟁을 줄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당신네들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정의와 행복이 뿌리 내리려면 우리 모두가 피를 흘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실은... 사실은 그런데도 최후의 날은 앞당져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타벨로에서 카르나스코 강물을 핏빛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피도 섞여 있었습니다. 우리 피와 당신네들의 피가... 돌치노의 예언이 실현될 날이 가까워진 듯해서 우리로서는 그 징조가 보이는 날을 앞당겨야 했던 것이지요.'
레미지오는 부들부들 떨면서 두 손을 법의 자락에 비볐다. 머리로 상상했던 피를 실제로 닦고 있는 것이었다.
'저 돼지가 이제 정결함을 다시 얻었다.'
사부님이 속삭였다.
'이게 정결함입니까?'
내가 여쭈웠다.
'달리 정결함을 얻는 방도도 없지는 않을테지. 그런데 그 정결함이 우리에게 공포를 안긴다.'
'정결함을 얻으려면 무엇을 경계해야 합니까?'
'성급함이다.'
사부님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눈길을 다시 베르나르에게로 돌렸다.
베르나르가 두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됐다, 그만하면 된 것이다. 나느 너의 고백을 듣고자 함이지 대학살의 보고를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너는 과거에도 이단자였고 지금도 이단자로구나. 그래서 너는 예전에 살인을 저지른 데 만족하지 않고 근자에 와서 다시 살인을 저지른 것이구나. 자, 이제 이 수도원에서는 왜, 어떻게 수도사들을 죽였는지 고백하여라.'
레미지오는 떨다 말고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주위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천만에요. 이 수도원에서 있었던 사건은 나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내가 한 짓은 모두 고백했습니다. 하지 않은 짓까지 고백하게 하지는 마십시오.'
'네가 하지 못할 짓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네가 결백하다고 할 터이냐? 암, 결백하고말고... 오, 순한 양이여, 참으로 양순한 짐승의 본이여! 여러분, 들으셨지요? 한 때는 두 손을 피로 적시고 지금은 결백하다는군요? 어쩌면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바라지네 사람 레미지오는 미덕의 화신, 그리스도의 원수의 원수, 교회의 충성스러운 아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참으로 질서를 중히 여기는 사람인데 교회의 손길이 그를 유혹하여 마을과 도시를 폐허로 만들게 하고, 교회의 평화를 유린하게 하고, 장인의 가계와 교회의 재물을 털게 한지도 모르지요, 그래요, 결백합니다.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오너라, 레미지오 형제여, 내 품안으로 오너라... 사악한 자들이 너에게 씌운 누명을 벗기고 내 너를 위로해 주리라...'
레미지오가 이 말을, 사면의 선언으로 믿은 듯, 휘둥그래진 눈으로 심문관석을 쳐다보는 순간, 베르나르는 낯빛을 고치며 임석해 있던 경호대장에게 명령했다.
'...속구에 의지해서 성직자들이 취하는 조치에 대해 교회는 늘 비판하는 자세를 지켜왔고 나 역시 이런 조치를 역겨워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감정을 다스리고 다독거리는 데엔 나 나름의 방침이 있다. 가거라, 가서 수도원장께, 문초에 필요한, 형틀 차릴 만한 곳이 없겠느냐고 여쭈워라. 그러나 바로 문초하면 안 된다. 이자의 손발을 경박하여 사흘간 독방에다 그대로 두어라. 연후에 고문에 필요한 형틀을 이자에게 보여 주어라. 사흘째 되는 날에는 보여 주기만 해야 한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고문을 시작하라. 가짜 사도들이 믿듯이 , 서둔다고 의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의가 드러나는 데도 몇 세기가 걸렸느니라. 천천히 시행하되, 단계적으로 시행하는 것도 잊지 말 것이다. 그리고 이자가 증언부언하는 바도 빠뜨리지 말고 기록해 두어라. 피의자의 육신 어느 한 부분이 잘려나가게 해서도 아니 되고, 피의자를 치사해서도 아니 된다. 이 문초의 과정에서 피의자는 소원할 터이나, 피의자가 마지막 한마디까지 자진해서 실토하고 이로써 저 자신을 정결케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경호대장의 눈짓에 경호병들이 달려들어 레미지오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레미지오는, 할말이 남아 있다면서 자리에서 버티었다. 베르나르가 손짓으로 경호병들을 물리자 레미지오가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하는 말이 취한 자의 주정 같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정신을 온전히 가누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분명한 것은, 레미지오가 조금 전과 같이 광기에 사로잡힌 듯했다는 것이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베르나르 각하, 고문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나는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나는 그들을 배신하고도 11년 동안이나 내 과거를 부정하면서 이 수도원에서 농민들로부터 십일조를 받고, 외양간을 보살피고 돼지우리를 거두어 이 수도원 곡간을 기름지게 했습니다. 요컨대 나는 이 가짜 그리스도의 재물 관리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온것입니다. 욕지기 나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나는 나의 입맛과 남의 입맛에 공히 어울리는 나날의 삶에 빠진 채로 살아왔습니다.
나느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겁이 많아서 나는 오늘 불로냐에 있는 내 형제를 팔고 돌치노를 팔았습니다. 겁쟁이면서도 나는 십자군 사이에 끼여 돌치노와 마르기리타가 붙잡히는 것을 목격했고, 성토요일에 부겔로 성으로 끌려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느 교화아클레민스의 실형 판결서가 오기까지 베르첼리를 배회하며 석 달을 보냈습니다. 나느 돌치노의 면전에서 마르게리타의육신이 토막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밤에는 나 역시 경험한 적이 있는 가엾은 그 육신에서 내장이 뽑혀 나온 뒤에도 마르게리타는 비명을 지릅디다. 마르게리타의 육신이 재가 되자 형리들은 돌치노에게 달려들어 벌겋게 단 집게로 코와 고환을 떼어 내었습니다. 돌치노가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았다는 후문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올시다. 돌치노는 키가 크고 체격이 엄장한 사람입니다. 짙은 수염과 빨간 곱슬머리를 기른 돌치노는 참으로 미남자인 데다 지도력이 출중한 사람으로, 나다닐 때는 늘 깃털을 꽂은 차양 넓은 모자를쓰고, 긴 칼을 법의의 요하에 차고 다녔습니다. 돌치노가 나타나면 남정네들은 두려움에 몸둘 바를 몰랐고, 여자들은 좋아서 자지러지느라고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무엇합니까? 돌치노는 고문을 당하자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여자처럼, 송아지처럼 비명을 질렀습니다. 형리들이 이 구석 저구석으로 끌고 다닐 동안 돌치노는 온 몸의 상처로 피를 쏟았습니다. 악마의 사자가 얼마나 오래 사는지 보자면서, 형리들이 다시 그의 몸에서 살점을 뜯어내자 돌치노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더이다. 그러나 돌치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살점이 얼마 남지도 않은, 피에 젖은 육신을 끌고 화형대에 오른 다음에야 숨을 거두었습니다. 나느 가까이서 그를 보고자 화형주 앞에까지 갔습니다. 이단 심판에 걸리지 않은 내 운수가 참으로 대견스러웠지요. 아니, 나의 선견지명이 자랑스러웠지요. 저 사기꾼 살바토레도 내 옆에 있었는데, 살바토레는 내 귀에다 입술을 댈 듯이 하고는, <레미지오 수도사님, 우리에게 분별이 있어서 이 참담한 경우를 모면하였으니 이아니 다행입니가? 세상에 고문보다 더 끔찍한 게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러더군요. 고문을 피할 수 있다면 거짓 맹세를 천번이라도 하겠다... 나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를 동안 나는 늘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눕니다. 나야말로 얼마나 천박한 인간이냐... 그러나 천박하기 때문에 여러 차례에 걸쳐 참담한 경우를 모면했는데,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이냐... 내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겁쟁이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어야겠다는 모진 구석도 없지 않았습니다. 베르나르 각하, 오늘 당신은 나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당신은 오늘 나에게, 이교도 황제가 순교자들을 두려워하는 까닭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내 육체와는 별개로 내 영혼이 믿는 바를 고백할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곧 죽을, 이 하찮은 것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용기는 요구하지 마십시오. 안 됩니다. 고문은 안됩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뭐든 다 말씀드리지요. 고문을 당하느니 화형주에 그냥 달리겠습니다. 화형주에 달리면, 불에 타기도 전에 질식으로 죽게 됩니다. 그러나 돌치노가 당했던 그런 고문은 안됩니다. 안되고 말고요. 당신은 내 시체를 바라겠지요? 그렇다면 수도사들에 대한 연쇄 살인죄를 나에게 덮어 씌울 필요가 있겠군요? 곧 시체가 될 터이니 말씀드리지요.
네... 나는 보시다시피 비계살 뿐인 땅딸보, 무식쟁이 늙은이입니다. 그래서, 이 괴물 같은 나를 더욱 괴물같이 보이게 만드는, 저 젊고 기지 충만한 미남자 아델모를 죽였습니다. 내가 모르는 서책까지 읽어 너무 박식한 꼴이 보기 싫어서 살베메크 사람 베난티오를 죽였습니다. 돼지 같은 사제들 어깨 너머로 신학을 주워들은 나는, 장서관 보조 사서라는 게 싫어서 베렝가리오를 죽였습니다. 네, 장크트 벤델 사람 세베리노도 죽였습니다... 왜 죽였느냐... 이자가 약초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역의 산>에서 초근 목피 고아먹은 게 한스러워, 사치스럽게 약초를 모으고 다니는 세베리노를 죽였습니다. 더 말씀드리지요. 다른 수도사도 더 죽이고, 수도원장도 죽일 참이었습니다. 수도원장은 내가 재물을 관리하니까 밥을 먹여 주기는 했습니다만, 교황이나 황제가 그렇듯이 원장 역시 내 원수이기는 마찬가집니다. 이제 되었습니까? 아, 아니군요. 어떻게 죽였는지 알고 싶겠지요. 내가 어떻게 죽였느냐... 어디 봅시다... 그렇지요. 지옥의 권세를 불러 올렸습니다. 살바토레가 가르쳐 준 방법으로 지옥의 권세를 불러 올리고 무수한 지옥의 군사를 부려서 죽인 것이지요.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꼭 손수 쳐야 하나요? 부릴 줄만 알면 악마가 이 일을 대신해 주는 것입니다.'
그는 섬뜩한 웃음을 흘리며 방청하는 사람들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이미 정신이 온전한 사람의 웃음은 아니었다. 사부님이 지적했듯이, 레미지오는 살바토레를 끌어들임으로써 살바토레의 배신을 복수할 만큼 영리했는데도 그웃음만은 영리한 사람의 웃음이 아니었다.
'그래, 지옥의 권세는 어떻게 불렀느냐?'
베르나르가 짐짓 이 헛소리를 자백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고 물었다.
'알면서 그러십니까 악마의 도포를 걸치지 않고는 악마에 들린 자를 상대로 그렇게 오래 장사를 할 수 없었을 텐데 공연히 그러십니다. 사도들 백정인 당신이 모른대서야 어디 말이나 됩니까? 이렇게 되지요,아마? 흰 터럭은 한 올도 섞이지 않은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를 붙잡아... 이제 기억날 테지요... 네 발을 묶어, 한밤중에 네거리로 들고 나가 이렇게 외칩니다.
<지옥의 황제이신 거룩한 루치페로여, 고양이 한 마리를 붙잡아 와 이렇게 바치고 당신을 내 원수에게 붙이고자 하오니 오시어 흠향하소서. 내 원수를 치시면 내일 밤 자정에 다시 이 자리에 와 이 고양이를 제물로 바치겠나이다... 이제 성 키프리아누스의 비법에 따라 지옥 군단의 대장들 이름으로 아드라멜크, 알라스토르, 아차첼의 안부를 여쭙고 기도하나니...>'
레미지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두 눈은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어서 그는, 지옥 군단의 대장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비고르여, 우리를 위해 범죄하소서... 아몬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마엘이여, 우리를 선에서 구하소서...벨리엘이여, 우리를 가엾게 보소서... 포칼로르여, 우리를 부패하게 하소서... 하보림이여, 우리 주를 저주하소서... 자에보스여, 우리 엉덩이를 까소서... 레오나르도여, 나에게 그대의 정액을 뿌리소서... 그러면 나는 더러워지겠나이다...'
'그만, 그만! 주님이시여,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집회소 안에 있는 수도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면서 성호를 그었다.
레미지오는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기세좋게 악마들의 이름을 부르던 그가 언제 그랬는지 고개를 꺽고 있었다. 뒤틀린 입술 안의 치열 사이로 허연 거품이 흘러내렸다. 이따금씩 사슬에 묶인 손을 발작적으로 폈다 오무렸다 하기도 했고, 발로 허공을 걷어차기도 했다. 내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보신 사부님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보았지? 고문을 당하거나 고문의 위협을 당하면 사람이란 제가 하지 않은 짓은 물론이고, 알지 못하는 짓, 하려던 짓까지 했다고 하는 법이다. 레미지오는 지금 어떻게 하든지 죽기만을 소원한다. 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것이다.'
경호병들이, 여전히 발작 증세를 보이는 레미지오를 끌고 나갔다. 베르나르 기는 책상 위의 서류를 모아 들었다.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감정이 몹시 격앙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좌중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심문을 끝났습니다. 자백한 증거 자료와 함께 피의자는 아비뇽으로 이송될 것이고, 거기에서 정의와 진실의 성실한 후견자들에 의해 마지막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적법한 판결이 내려지면, 죄인은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원장님, 이제 저자는 귀문중에 속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지키는 참 초라한 파수꾼인 나에게도 속하지 않습니다. 목자가 사명을 다하고, 수양견이 더럽혀진 양을 거두어 불로써 정화시킬 것인즉, 정의는 어디서든 스스로 드러날 것입니다. 저자의 눈앞에 나타나 그토록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했던 일장 춘몽은 이로써 끝납니다. 이제 수도원은 다시 평화를 되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베르나르는 목청을 돋우고, 위협하듯이 사절단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세상은 아직 평화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황제의 궁전을 피난처로 고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이단자들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형제들께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마의 허리띠>는 사악한 돌치노주의자까지 페루지아 총회 대표단에 싸잡아 엮었습니다. 여러분이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는 조금 전에 우리가 정의의 손에 넘긴 저 사악한 자 역시, 파문당한 바이에른의 게르만 인과 밥상을 함께 한 고위 성직자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악한 이단의 온상이 되는 것은, 아직까지도 존경을 받고 있고, 따라서 아직까지는 죄인으로 일컬어지지 않는 자들의 설교라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어디에 똬리를 틀로 있든, 이러한 독사들을 솎아 내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 같은 죄인들 몫인 고난의 길이자 갈보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신성한 사명에 종사하면서 우리가 깨달은 것은, 공개적으로 이단을 행하는 자들만이 꼭 이단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의 조항을 범하는 자 역시 능히 이단의 지지자로 지목될 수 있을 것인즉, 그 다섯 조항은 이러합니다.
첫째, 수감되어 있는 이단자를 은밀하게 찾아가는 자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둘째, 이단자가 구금되어 있는 사실을 애통하게 여겨서도 안되고, 이단자와의 사귐을 우정으로 기억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이단자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교우했던 자까지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 유죄가 증명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단자가 부당한 처벌을 받는다고 공언해서는 안됩니다. 넷째, 이단을 처단하는 심판관을 흰눈으로 보고 이를 비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심판관들은, 눈이나 코나, 애써 감추려는 표정만 보고도 심판관에 대한 증오나 이단자에 대한 연민을 읽을 수 있으니, 내 말에 유념해야 합니다. 다섯째, 이단자의 뼈나 유품을 수습하여 이를 성물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다 여섯째 조항을 덧붙입니다. 나는, 정통 신앙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단자들에게 사악한 사상을 불어넣는 서물의 저자까지 이단자 무리에 포함시킬 것임을 밝혀 둡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우베르티노를 노려보았다. 황실측의 소형제회 사절단은 그제서야 베르나르의 뱃속을 들여다본 것이었다. 회담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그 뒤로, 그날 오전에 오고 갔던 이야기를 다시 입에 담는 사람은 없었다. 말을 해봐야 어차피 그날의 사건 이야기밖에는 할 것이 없는 터에 공연히 이단 혐의만 날아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베르나르가, 양측의 화해 협상을 깨뜨리기 위해 교황이 보낸 사람이라면, 베르나르는 임무를 썩 훌륭하게 완수한 셈이었다.
만과
수도사들이 집회소에서 나왔다. 체제나의 미켈레 수도사와 윌리엄 수도사도 집회소에서 나와 우베르티노와 합류했다. 어르신들은 안개 속을 걸어 회랑 쪽으로 갔다. 안개는 도무지 걷힐 것 같지 않았다. 심란한 사람들 눈에는 그 안개가 실제보다 더 짙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사부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일에 대해서는 말을 보탤 필요도 없겠지요? 베르나르가 우리를 이겨 먹은 겁니다. 저 변변치 못한 돌치노 잔당이 실제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여부를 나에게 물으실 필요 역시 없을 겁니다. 내가 아는 한, 그자에게는 아무 죄도 없어요. 어쨌거나 우리는 출발점에 되돌아와 있어요. 미켈레 형제, 교황 요한은 여전히 당신 혼자 이비뇽으로 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이고, 우리가 얻으려고 그토록 애쓰던 안전 보장은 오늘 모임의 파탄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어요. 당신도 이제는 알았을 테지요? 아비뇽에 가서 무슨 말을 하건 그 말이 제대로 먹혀 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았을 테지요? 이건 내 의견입니다만... 따라서 당신은 아비뇽에 가지 않아야 합니다.'
미켈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나는 갑니다. 나는 교회의 분열을 원하지 않아요. 윌리엄, 당신은 오늘 말 한번 반듯하게 잘 해주었어요. 하고싶던 말이었을 테지요. 허나 내가 바라던 것은 그게 아니에요. 나는 오늘에 와서야, 페루지아 총회의 결정이 황실의 신학자들에게는, 우리의 의도와는 달리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나는 교황이, 청빈의 이상과 함께 우리 프란체스코 교단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교황도 우리 교단의 청빈 교리를 확인해 두지 않으면, 이단적인 곁가지 교리로부터 우리 교단을 올곧게 세울 수 없다는 걸 이해할 겁니다. 그래서 나는 아비뇽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교황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도 마다하지는 않겠어요. 청빈의 교리만 인정받을 수 있다면 뭐든 양보할 수 있어요.'
'목숨을 거는데도 말이요?'
우베르티노가 물었다.
'걸어야 한다면 걸어야지요. 영혼을 거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어요?'
미켈레가 반문했다.
과연 그는 신중하게 목숨을 걸었다. 교황 요한의 주장이 옳았다면 (나는 아직도 교황 요한의 주장이 옳았다고는 믿지 않는다.) 미켈레는 영혼까지 잃었을 터였다. 지금에 와서야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바이지만, 미켈레는, 레미지오의 심문이 있고 나서 일주일 뒤에 교황을 친견하러 아비뇽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는 넉 달 동안이나 교황을 친견하지 못했다. 다음해 4월, 교황은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미켈레를, <미친놈, 당돌하고 완고하고 포악 무도한 이단의 선동자, 교회의 벽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독사>라고 불렀다. 아비뇽에서 찬밥 신세로 겉돌면서 미켈레는 사부님의 친구인 또 한 사람의 윌리엄, 즉 오캄 사람 윌리엄을 사귀게 되는데, 이 양반이 상당한 극단론자였다는 걸 감안하면, 보는 눈에 따라 교황의 주장이 옳다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오캄 사람 윌리엄의 견해 역시, 그날 아침에 사부님이 마르실리오와 함께 한다면서 피력한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황의 악의에 찬 비난으로, 교황과 견해가 같지 않은 사람들의 목숨은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 되자 5월 말, 미켈레, 오캄의 윌리엄, 베르가모의 보나그라치아, 아스콜리의 프란체스코, 탈라임의 앙리는 교황 측근 인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니스로 몸을 피했다가 이어서 뚤롱, 마르세이유를 거쳐 에그 모르뜨로 갔다. 이들의 뒤를 밟아 온 아라블레의 삐에르 추기경이 에그 모르뜨에서 이들을 만나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지만, 추기경의 설득도 이들의 반골 정신과, 교황에 대한 증오와 공포의 벽을 허물 수는 없었다. 6월에 피사에 도착한 이들은 황제측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바로 그 다음날 미켈레는 공개적으로 교황을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때는 좋지 않았다. 황제의 세력이 이미 사양길에 들어선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아비뇽에서 교황 요한이 소형제회의 총회장 자리에 앉힐 사람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다. 결국 교황은 미켈레를 혁파하는 데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따라서 그날 수도원 교회의 회랑에서 교황을 만나러 가겠다고 결심한 것은 미켈레의 실책이었다. 그가 그런 결심을 하지 않았던들, 적지에서 몇 개월이라는 세월을 낭비하지 않았을뿐더러 소형제 수도회를 규합하여 공개적으로 교황과 맞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위치도 약화시키지 않았을 터였다. 허나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인지도 모르는 일... 지금 돌이켜보아도 실책이었는지 현책이었는지는 단언할 길이 없다. 수많은 세월이 지난 후 열정의 불길이 사라졌고, 그 불길과 함께 진리의 빛으로 여겨지던 것들도 사라졌다. 이제는 먼지가 되고 재가 된 g나 여자의 아름다움을 놓고 싸웠지만, 지금 와서 무슨 수로 헥토르가 옳았는지 아킬레우스가 옳았는지, 아가멤논이 옳았는지 프리아모스가 옳았는지를 시비할 수 있으랴.(<재가 된 한 여자>는 트로이아 전쟁의 불씨가 되었던 미녀 헬레네, 헥토르, 아킬레우스, 아가멤논은 당시의 장군들, 프리아모스는 트로이아의 왕이었다.)
이야기가 또 엇길로 들고 말았다. 윌리엄 수도사. 미켈레 그리고 우베르티노의 슬픈 대화 이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야겠다. 미켈레의 결심은 철석 같아서 누가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윌리엄 사부님이 단도직입적으로, 우베르티노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고 말했다. 베르나르 기가 공석에서 공공연히 우베르티노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었고, 교황의 증오가 우베르티노에게 쏠린 데다, 미켈레가 소형제회를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할 결심을 한다면 우베르티노는 혈혈단신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리였다.
'요한은 미켈레는 법정에, 우베르티노는 지옥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베르나르 기의 속을 제대로 꿰고 보았다면 내일 해지기 전에 우베르티노는 안개 속 어딘가에서 시체로 발견될 겁니다. 누가 한 짓이냐는 질문이 나온다면 이 수도원에서는 또 한번 피냄새가 날 테지요. 베르나르기는 레미지오와 검은 고양이 제물에 불려 나온 악마의 짓, 아니면 이 수도원에 남아 있는 돌치노 잔당의 짓이라고 할테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지...'
우베르티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수도원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세요. 탈 것과 여행 중에 드실 식량을 준비해 달라고 하세요. 되도록 이면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알프스 산 저쪽이 좋겠지요... 수도원 원장 앞으로 소개장도 하나 써달라고 하고요... 야음과 밤안개를 이용해서 바로 떠나도록 하세요.'
'하지만 경호병들이 문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이 수도원에는 출입구가 몇 개 더 있고, 원장은 그걸 알아요. 이곳 머슴과 말을 저 아래에다 대기시키도록 하면 됩니다. 일단 이 수도원을 빠져 나가면 한달음에 숲을 빠져 나가야 해요. 서두르세요, 베르나르가 승리의 도취감에서 깨어나기 전에 피신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있어요. 내게는 일거리가 원래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이미 실패로 돌아갔지만 나머지 하나만은 성공을 거두고 싶군요. 나는 이곳 수도원의 서책과 인간에게 눈을 좀 대어 봐야겠어요. 일이 잘 되어 당신이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데 성공하기를 빕니다. 뒤에 내가 당신을 찾게 될 겁니다. 자. 이쯤에서 헤어져야 합니다.'
사부님이 두 팔을 벌렸다. 우베르티노는 사부님을 껴안으며 떨리는 소리로 울먹였다.
'잘 있게, 윌리엄. 그대는 광기의 용광로를 고아 먹은 듯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영국인이었네만, 마음은 늘 바로 쓸 줄 아는 참 좋은 사람이었네. 다시 만나게 되기는 될까?'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하느님도 그걸 바라실 테고요.'
사부님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걸 바라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앞에서도 썼다시피 우베르티노는 그로부터 2년 뒤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성미가 불칼 같고 젊은이 뺨치게 혈기방장한 이 노인의 인생은 이렇듯이 험한 모험의 가시밭길이었다. 어쩌면 우베르티노는 성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굳센 믿음의 값을 한 자리 성위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 나이 해마다 늘어가고, 나 자신을 하느님 뜻에다 맡기고 보니, 알고자 하던 지성, 행하고자 하던 의지가 나날이 부질없어 보인다. 내가 알기로, 유일한 구원의 길은 믿음이다. 끈질기게 기다리되, 너무 많은 회의로 저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야말로 구원으로 통하는 믿음의 길이 아니겠는가. 우베르티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우리 주님의 피와 고통을 믿은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은 물론이고 그때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싶다. 수수께끼 같은 노인 우베르티노는 그런 내 마음을 읽고, 언젠가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알아줄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정하게 껴안아 주었다. 조부가 손자를 안는 듯한 다정한 포옹, 그러나 전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힘없는 포옹이었다. 나도 같은 마음으로 그를 포옹했다. 포옹을 풀자 그는 미켈레와 함께 수도원장을 찾으러 나섰다.
'이제부터는...'
시작은 내가 했는데 사부님이 이 말을 끝맺었다.
'...우리가 하던 일을 해야겠지. 장서관 조사 말이다.'
'사부님, 오늘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이렇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것은... 사부님께서는, 두 사절단을 화해시키는 일에는 실패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부님께서는 교황과 황제의 갈등을 함께 괴로워하시기보다는 수도원 범죄 사건에 더 관심하시는데 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냐? 미친놈과 아이가 하는 말이 오히려 믿을 만한 법이다. 잘 보았다. 황실의 고문 노릇으로 말하자면 마르실리오가 나보다는 한 수 위다. 그러나 조사관 노릇으로 말한다면 내가 마르실리오보다 한 수 위니라. 베르나르 기보다도 내가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무슨 까닭에서냐? 베르나르 기가 관심하는 바는, 범죄자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고, 피의자를 화형대로 보내는 일이다. 허나 베르나르와는 달리, 나는 꼬이고 매듭진 것을 풀어내는 일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는 이렇게 재미있는지... 나는 철학자로서, 이 세상이 혹 하나의 질서에 꿰여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질서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다면 이 세상 한 귀퉁이에서 일어나는 이 일과 저 일 사이에 적어도 무슨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정말 궁금증을 이길 수 없어서 이 관계를 한번 밝혀 보려는 게다. 이유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교황 요한과 황제 르드비히의 싸움보다 어쩌면 이 일이 훨씬 중요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껏해야 변변치 못한 수도사들 사이의 도둑질과 복수극밖에 더 드러나겠습니까?'
'미련한 놈이로구나, 너는. 여기에는 금단의 서책이 관련되어 있다. 금서 말이다.'
윌리엄 수도사가 천천히, 그러나 힘있게 대답했다.
수도사들이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오고 있을 즈음이었다. 식사를 거의 끝낸 체제나 사람 미켈레가 윌리엄 수도사 옆에 앉으면서, 우베르티노가 떠났다고 속삭였다. 윌리엄 사부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나르는 줄곧 원장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베르나르를 피해 식당을 나오던 우리는 뜻밖에도 베노를 만났다. 베노는 사부님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식당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사부님은 그의 법의 자락을 붙잡아 주방 한구석으로 끌고 갔다.
'베노, 서책은 어디에 있느냐?'
사부님이 물었다.
'서책이라뇨?'
'베노, 나는 바보가 아니다. 오늘 세베리노의 실험실에서 우리가 찾던 서책 말이다. 우리는 그 서책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너는 알아보고도 가만히 있다가, 우리가 나온 뒤에 다시 들어가 그 서책을 가지고 갔을 게다.'
'어째서 제가 그 서책을 가져 갔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내 생각이다.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말하라. 어디에 있느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하냐? 나에게 말하지 않으면 원장께 이를 고발할 터인데도?'
'원장님 말씀이 계셔서 말씀드리지 못하겠다는 것인데도요...'
베노의 태도는 뜻밖에도 당당했다. 베노는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사부님을 바라보면서 덧붙였다.
'...아까 세베리노의 실험실에서 수도사님과 헤어진 이후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려야겠군요. 아시다시피 베렝가리오의 죽음으로 보조 사서 자리는 공석입니다. 오늘 오후 말라키아는 저에게 그 자리를 권했습니다. 그리고 반 시간 전에 원장님께서 이를 제기하셨습니다. 따라서 저는 내일 아침이면 장서관의 비밀에 접하게 됩니다. 오늘 오전에 제가 그 서책을 가져 간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그 서책을 읽어 보지도 않고 제 방 침상 밑에다 감추어 두었습니다. 말라키아는 저에게 보조 사서 자리를 권함으로써 그 서책 문제를 수숩했다... 이렇게만 말씀드려도 수도사님께서는 훤히 아시겠지요. 저는 물론 보조 사서가 마땅히 해야 할 바에 따라 그 서책을 말라키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듣고 있으려니 베노에게 내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베노 수도사님, 어제와 그저께만 하더라도 진리에 목말라 있다면서요? 장서관은 더 이상 진리를 감추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요? 학자라면 마땅히...'
베노는 얼굴을 붉힐 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사부님이 손짓하는 바람에 나는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아드소, 베노는 몇 시간 전에 저쪽 편으로 넘어갔다. 이제 베노는 그토록 알고 싶어하던 비밀의 수호자 동아리에 끼게 되었으니, 마음대로 배불리 그 진리와 접촉할 수 있을게 아니겠느냐?'
'저쪽 편이라고 하시면요? 베노 수도사는 식자의 이름으로 진리를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 지나간 일...'
사부님은 민망해 하는 베노를 그 자리에 남겨 두고 내 손을 끌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잠깐 걷던 사부님이 한숨을 쉬면서 이런 말을 했다.
'베노는 탐욕의 희생자이다. 탐욕은 곧 번뇌이다만, 베렝 가리오나 레미지오의 탐욕과는 유가 다르다. 학승들에게 그러하듯이 베노에게도 지식에의 탐욕이 있다. 지식 자체에 대한 탐욕.... 이 지식이 울타리 저쪽에 격리되어 있을 동안 베노는 거기에 접근하려고 몸부림쳤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붙잡았다. 말라키아는 지식에 대한 탐욕과 베노라는 인간을 잘 알았다. 말라키아는 서책을 되찾고 베노의 입을 막는, 일석이조의 묘수를 쓴 것이다. 너는, 사람들이 접할 수 없는 바에, 그런 지식의 보고를 관리하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고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탐욕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내 사부님이신 로저 베이컨의 지식에 대한 갈망은 탐욕이 아니었다. 그분은 당신의 지식을 쓰시되, 하느님 백성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쓰셨다. 따라서 그 분은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은 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베노는 제 삶을 가꾸는 수단으로서, 베 비천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 다른 인간을 믿음의 전사나 이단의 첨병을 만드는 수단으로서의 지식을 구한다. 이것이 탐욕이다. 탐욕이라서 해서 꼭 육의 탐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베르나르 기는 탐욕스러운 위인이다. 베르나르는 정의에의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정의에의 탐욕이 아니라 권력에의 탐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의 신성한, 그러나 그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별로 신성하지 못한 교황은 부에의 탐욕에 사로잡힌 자이다. 식료계 레미지요? 이자는 소시적부터 제 몸으로 체험함으로써 저 자신을 변용시키겠다는 탐욕에 사로잡혀 있던 자이다. 그러나 이제는 참회와 죽음에의 탐욕에 사로잡혀 있던 자이다. 그러나 이제는 참회와 죽음에의 탐욕에 사로잡혀 있을 게다. 베노는 서책에 대한 탐욕에 지나친 집착을 보인다. 제 씨앗을 땅에 흘린 오난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무릇 모든 탐욕이 그러하듯이, 베노의 탐욕은 참으로 덧없는 것. 세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는 아무 인연도 없는 것인 법이다. '
'알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진심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사부님은 내 말은 못 들은 척하고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선해야만 그 대상에 기울이는 사랑이 참 사랑일 수 없는 법이다.'
'베노 수도사는 이제 제 손에 들어온 서책의 선을 지킨답시고 그 책을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부터 지킬 터인데 어떻게 이것을 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서책의 선은 읽혀지는데 있다. 서책은 하나의 기호를 밝히는 또 하나의 기호로 되어 있다. 기호는 이렇게 모여서 한 사상의 모습을 증언하는 게다. 이를 읽는 눈이 없으면, 서책은 아무런 개념도 낳지 못하는 기호를 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서책은 벙어리나 다를 바가 없다. 이 장서관은 원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다만 이제는 그 서책을 묻어 버리고 있구나. 이 장서관이 부정과 죄악의 수채 구멍이 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레미지오는 제가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더구나. 베노도 그랬고... 그런데 베노를 보아라. 베노는 저 자신을 배신하고 있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하루였구나. 피가 튀고 이 세상 귀퉁이가 우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하루였다. 이 하루가 어찌 이리도 길었던고. 종과 성무 시간이다. 어서 들렀다가 자리에 들자.'
주방에서 나오다 우리는 아이마로를 만났다. 아이마로는, 말라키아가 베노에게 보조 사서 자리를 주었다는 소문이 나도는데, 혹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이로써 베노의 주장을 사실로 확인한 셈이었다. 아이마로는 예의 그 빈정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오늘 말라키아는 꿩먹고 알 먹었군요. 정의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 정의가 악마를 보내어 오늘 밤 말라키아를 데려가게 할 텐데요...'

 

종과
만과 성무는, 레미지오에 대한 심문이 진행되는 도중에 몇몇 수도사들에 의해 건성으로 치러진 모양이었다. 호기심 많은 수도사들에 의해 건성으로 치러진 모양이었다. 호기심 많은 수도사와 수련사들이 은사의 말은 듣지 않고 집회소 앞에서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으니 만과 성무가 제대로 되었을 리 만무했다.
종과 성무 시간에는 온 대중이 모두 세베리노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대중은 수도원장의 강론이 있을 것으로 알고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궁금해 했다. 그레고리오 성가, 응답 성가 및 찬미가 봉창이 끝나자 원장이 강단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그날 밤만이라도 침묵으로 지내고 싶노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수도원에 갖가지 재앙이 겹치고 있는 판이어서 자기로서는 대중을 꾸짖을 수도 훈계할 수도 없는 것인즉, 한 사람도 빼지 말고 모두가 엄숙히 각자의 양심에 시문해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자기는 사양할 것이나, 누군가가 한 말씀 할 시점이니, 악마의 심술이 빚어 내는 세속적 유혹과 가장 거리가 먼 형제, 즉 수도사 중 죽음을 가장 가까운 앞날에 남겨 둔 최연장자의 훈도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면 강단에 올라야 할 사람은 그로타페라타 사람 알리나르도 노수도사여야 했다. 그러나 알리나르도의 근력은 강당에 올라 형제들에게 강론할 수 있는 정도가 못 되었다. 알리나르도 다음으로,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세월의 풍상을 가장 오래 견딘 사람은 호르헤 수도사였다. 원장은 호르헤를 지목했다.
우리는 아이마로를 비롯, 주로 이탈리아 인들이 몰려 앉는 좌석 주위가 잠시 술렁거리는 걸 보았다. 나는 수도원장이 알리나르도와는 상의도 해보지 않고 호르헤에게 강론을 맡기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사부님이 나에게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원장이 강단에 서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잘한 일이다. 저 양반이 강단에서 하는 말은, 베르나르를 비롯한 아비뇽 사절들에게 꼬투리 잡힐 빌미가 될 가능성이 크다. 아비뇽 사절들은 호르헤의 말이라면 별로 귀담아 듣지 않을 게다. 그러나 나 같으면 저 노인의 말을 귀담아 듣겠다. 왜냐? 호르헤가 아무 목적 없이 강단에 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젊은 수도사의 부액을 받으며 강단으로 올랐다. 회랑에 선 삼각대의 등잔 불빛에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불빛은 두 개의 검은 구멍 같은, 그의 멀어 버린 두 눈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았다.
호르헤가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형제들, 그리고 참으로 귀하신 수도원 빈객 여러분. 이 늙은 것이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본 수도원을 연단한 네 주검의 죽음은, 예나 지금이나 살아 있는 자가 저지르는 가장 비참한 죄악의 문제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 엄정한 손길로 우리 지상의 삶을 다스리는 하늘의 섭리에 따른 죽음이 아니올시다. 여러분 모두가 슬픔에 잠겨 있을 것이나, 이 슬픈 사건이 여러분의 영혼을 좀먹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지요. 무슨 까닭인가요?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여러분 모두가 결백할 것인데 이 한 사람이 이미 속권에 맡겨진 이상 여러분은 이제 오직 한 사람의 죽음만을 슬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는 하느님 법정에서 추궁 당할 이유도, 해명해야 할 의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미친 짓입니까?'
이 대목에서 호르헤는 고함을 빽 지른 뒤에 말을 이었다.
'...미친 짓이다 뿐입니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바보짓이에요! 살인을 범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그 죄값을 받게 되는데, 이는 살인자가 하느님의 뜻으로 노릇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기적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예수님을 배반할 필요가 있었다고는 하나 하느님께서는 이 배신자를 저주하시고 통매하시었습니다. 따라서 근자에 이르러 사람을 죽이고 해침으로써 죄를 저지르는 자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 곧 우리의 교만을 경계할 목적으로 하느님께서 그 손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말을 중단하고 텅 빈 시선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멀어 버린 눈 대신 느낌으로 좌중의 분위기를 읽고 귀로써 좌중의 침묵과 그 침묵의 무게를 감청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수도원에는 교만이라고 하는 배암이 오래 전부터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무슨 교만이었던가요? 권력으로 인한 교만이었던가요? 속세를 등진 이 산문에 권력으로 인한 교만이라니요? 아니올시다. 그게 아니올시다. 하면 부로 인한 교만? 형제들이여, 주님 계실 당시부터 청빈과 소유에 대한 논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갔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시대부터 세속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이 있다면 그것은 회칙에 따라 기도하고 근행하는 권리와 의무뿐입니다. 허나 우리 교단의 사명이자 우리 수도원 수도사들의 의무인 이 근행 가운데에는, 공부하고 지식을 보존하는 의무가 들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공부하고 그 지식을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의무의 노른자위 같은 것이지요. 나는 <탐구>라고 하지 않고 분명히 <보존>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까닭인가요? 하느님께 속하는, 지식이라는 재산은 완전한 것이고, 태초부터 완전한 것으로 정제된 것이고, 말씀의 완전함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탐구>라고 하지 않고 <보존>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까닭에서일까요? 선지자들의 설교로부터 초대 교부들의 해석에 이르기까지 수세기에 걸쳐 정제되고 완성된 이 지식이야말로 인간의 몫으로는 최상의 보고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역사에는 발전이나 진보가 있을 리 없습니다. 오로지 연속적이고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요점 약설이 있을 뿐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창조에서 부활을 거쳐, 구름 위에 좌정하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르기까지 눈에 뛰지 않게 변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지식, 지상적인 지식은 이런 길을 걷지 않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채같이 단단한 이 지식은 우리가 겸손하게 귀를 기울일 때만 우리가 걸을 길을 예언하고 우리에게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내어 줍니다. 그러나 이 길이 지식을 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의 하느님께서는, <내가 바로 그 길>이라고 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두 진리의 무서운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이 두 마디를 밝히기 위해 선지자들, 복음 전도사들, 고부들 고승 대덕들이 남긴 말에 지나지 못합니다. 이교도들이 혹 반대되는 말을 한 바도 없지 않습니다. 이 무지한 이교도들의 말이 우리 기독교에 묻어 든 것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외에는 따로 들어 둘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명상하고 닦고 보존할 뿐입니다. 이는 비할 바 없이 찬란한 장서관을 갖추고 있는 우리 수도원이 해온 일이며, 마땅히 해야 했던 일입니다. 동양의 이교 군주가 어느 날 그네들의 자랑거리인 어느 유명한 도시의 장서관에다 불을 지르라고 명하고는, 수만 서책이 불타는 걸 보고는 마땅히 타야 하는 것, 탈 수도 있는 것 이 탄다고 하더랍니다. <코란>이 가르치는 바를 따르면 되었지, 다른 것을 섬길 것이 뭐 있느냐고 하더랍니다. 서책은 저희 경전에 위배되는 것, 따라서 유해한 것이니 마땅히 타야한다고 하더랍니다.
우리 교회의 신학자들이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성서의 주석서나 해설서는, 하느님께서 쓰게 하신 성경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 만큼 마땅히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은 마땅히 파기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이를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느님 앞에서 짓는 허물일 수 있습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격의 가르침이, 주님께서 선택하시는 시기와 방법을 놓고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는 자들로부터 도전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수세기 동안 우리 교단이 져왔던 책임과 오늘날 우리 수도원이 진 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분명해집니다. 진리에의 긍지를 가지고, 진리에 맞서는 것을 보존함에도 겸손하고 신중하되 우리 스스로 이로써 더럽혀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형제 여러분. 학승을 유혹할 수 있는 교만의 죄가 무엇인가요? 스스로의 임무를 보존하는 데서 찾지 않고,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지식을 구하는 데서 찾는 허물입니다. 나는 이런 형제에게, 성서의 마지막 권에서, 마지막 천사가 한 말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해 둡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벌하실 때에 이 책에 기록된 재난도 덧붙여서 주실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서 무엇을 떼어 버리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 대한 그의 몫을 하느님께서 떼어 버리실 것입니다.>(요한의 묵시록 22:18~19)
불쌍한 형제들이여, 여러분 보시기에, 이 말이 이 수도원 경내에서 있었던 일을 암시하고, 이 수도원 경내에서 있었던 일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파란을 암시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도시에서 성에서, 자만이 차 있는 대학과 교회에서 당당한 말과 행동으로, 주석서에 이미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는 진리의 의미를 왜곡하고, 겁 없는 도발이나 감행하고, 진리의 말씀에 대한 새 해석이나 목마르게 찾는 이 시대를 상징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거야말로 이 수도원에 잠복해 있었고, 지금도 잠복해 있는 교만이 아닐는지요? 나는 장서관에 숨어 들어 제 몫이 아닌 서책의 봉인을 도발하려 했고 지금도 하려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런 짓이야말로, 주님께서 벌하려 하시었고 앞으로도 벌하실, 용서할 수 없는 교만이라고 해두고자 합니다. 우리가 연약한 탓에 주님께서는 어렵지 않게 복수의 길을 찾으실 것입니다...'
사부님이 듣다 말고 내 귓전에서 속삭였다.
'들었느냐? 저 영감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몇 자락 깔고 앉은 채로 말을 하고 있다. 이 일과 관계가 있는 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노인은 호기심 많은 수도사들의 장서관 침입이 계속되는 한 수도원은 평온을 되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호르헤 노인은 잠시 뜸을 들인 다음에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이렇게 교만한 것일까요? 대체 누구에게서 이런 교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일까요? 공범자들일까요? 이러한 비행의 장본인들일까요? 대체 누가 이 수도원 경내에서 이런 짓을 자행함으로써 심판의 날을 부르는 것일까요? 하기야 심판의 날이 다가오더라도, 심판이 우주의 한 주기를 마감하는 것인 만큼, 크기는 할 것이지만 영원한 고통이 아니기는 할 테지요. 여러분은 지금 내 말귀를 알아들으면서도 두려워서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하는군요. 왜 두려워하느냐? 여러분일 수도 있을 터라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두려워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두려워하지 않아요. 나에게는 두려움이 없어요. 나는, 여러분의 오장육부가 공포로 꼬이고, 이빨이 맞부딪쳐 혀를 자르고, 피가 얼어붙고, 눈이 스르르 내려 감기도록 큰 소리로 그 이름을 외치고자 합니다. 그게 누구냐고요? 바로 저 사악한 짐승, 가짜 그리스도!'
호르헤는 숨을 고르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회중석은 쥐죽은 듯이 잠잠했다. 교회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삼각대 위의 등잔불뿐이었다. 그러나 삼각대 그림자는 얼어붙은 듯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호르헤 노인이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내쉬는 희미한 숨소리뿐이었다.
'...여러분은 나에게 이러고 싶겠지요? <아니다. 아직 그때는 오지 않았다. 가짜 그리스도가 왔다는 표징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 ... 참으로 답답들 하십니다. 날 마다 보고 있으면서도 왜 몰라요?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에서, 수도원에서 날마다 파국의 전조가 나타나는데 어째서 아니라고 해요? 그때가 가까워지면 서쪽에서 이방의 왕이 선다고 했습니다. 계교가 무궁무진한 군주, 무신론자, 살인자, 사기꾼, 배금주의자, 엮어 들이기와 속임수의 명수, 참 신도들의 원수이자 박해자인 이방의 왕이 선다고 했습니다. 이자는 재위 중 오로지 금붙이만 탐할 뿐, 은붙이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했습니다. 내 말을 들으면서 여러분은 서둘러 계산을 꼽아 볼 테지요? 내가 말하는 이 사람이 대체 교황에 가까울까, 황제에 가까울까, 프랑스 왕에 가까울까, 아니면 다른 나라 왕에 가까울까... 그러다 여러분은 이러겠지요. <그자는 나의 원수라, 따라서 나는 그자의 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여러분에게 한 사람을 지목하지는 않아요, 가짜 그리스도는 오되, 전체에게 전체로서 옵니다. 따라서 모두가 그 가짜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고 말아요. 가짜 그리스도는 도성과 산촌을 노략하는 도둑 떼로 오되, 하늘에 갑자기 무지개가 나타나거나, 나팔소리가 들리거나, 불이 나거나, 애곡소리가 나거나, 바다가 넘치거나 하는 등의 전조와 함께 옵니다. 가짜 그리스도가 나타날 즈음, 사람과 짐승은 괴물을 낳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증오와 불화가 사람이 사는 마을을 지배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양피지에 그려진 괴물의 그림이나 보고 있지는 마세요. 혼인한 지 얼마 안 되는 여자가 말을 다 배운 아이를 낳는데, 이 아이는 심판의 날이 임박했다는 말만 전하고는 죽어 버린다고 하지여? 그렇다고 그런 아이를 저 아랫마을에서 찾지는 마시오. 지나치게 똑똑한 아이는 바로 이 수도원 경내에서 이미 죽음을 당했어요. 이러한 선지자 아이는 노경에 가까운 어른 모습을 한다던가요? 예언에 따르면, 네 발로 기는 아이, 유령, 태중에서 주문으로 예언하는 태아로 나타나기도 한다던가요?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예언은 천박한 대중과 교회를 선동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악한 목자가 들고 일어나고, 성미가 꼬인 자들, 거만한 자들, 탐욕스러운 자들, 쾌락만을 좇는 자들, 부정 축재한 자들, 부질없는 말장난으로 세월을 보내는 자들, 허장성세를 일삼는 자들, 교만하고 거만한 자들, 음탕한 자들, 덧없는 영화를 좇는 자들, 복음의 원수가 되는 자들은 앞문을 열어놓고 참 말씀을 몰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길을 혐오하고 죄를 참회하지 않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는 불신과 형제 불화와 사악함과 고집과 질시와 무관심과 도둑질과 술주정과 무절제와 방종과 육욕과 사통 같은 악덕을 조장하고 다닙니다. 고통은 잠시 사라질 것이나 인간에의 사랑은, 평화와 청빈과 연민에의 사랑은, 눈물의 미덕은 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수도원 수도사들과 먼 데서 오신 귀빈들께서는 어째서 이를 깨닫지 못하시는가요?'
호르헤의 말이 잠시 중단되는데 어디에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베르트란도 추기경이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뒤트는 소리였다. 호르헤는 대단한 강사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는 수도원 형제들을 채찍질하되 빈객들이라고 사정을 봐주지는 않았다. 나는 베르나를 기를 비롯한 아비뇽 사절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했다.
호르헤의 호령은 계속되었다.
'...가짜 그리스도가 신성을 모독하는 허깨비로, 우리 주님을 흉내내는 잔나비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 시점인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만... 그때가 되면 모든 왕국은 서로 반목하고, 백성 사는 곳에는 기근과 역병이 창궐하여 거두는 것이 많지 못한 까닭에 겨울이면 사람들은 혹한에 시달립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만... 그때가 되면 아이들은 일용품과 먹을 것을 마련해 주는 부모의 슬하를 떠나 저잣거리를 헤매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맞아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복 있을진저... 살아 있는 자가 이 재난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교만하고 뽐내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원수 되는 지옥의 왕자가 나타나 세상을 속이고 정의를 숨기기 위해 갖가지 악덕을 선보일 것입니다. 시리아는 패망하여 제 백성의 죽음을 애통해 할 것이고, 길리기아는 고개를 들다가 심판자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바빌론의 딸들은 화려한 옥좌에서 일어나 독배를 들어야 할 것이고 갑바도기아와 리기아와 리카오니아는 무너지거나 제 부정 부패에 다리가 걸려 패망할 것입니다. 야만인의 막사와 전차가 사방에서 나타나 온 땅을 유린할 것이며, 아르메니아화 폰투스와 비티니아의 청년들은 무수히 칼날에 쓰러질 것이요, 처녀들은 볼로모 끌려가고 아들딸은 근친 상간을 자행할 것입니다. 영광을 뽐내는 피시디아는 엎드려 페니키아의 칼날을 맞을 것이요, 유대 땅은 애곡하면서 부정의 값으로 파멸을 치러 받을 것입니다. 도처에서 성지 유린의 작패가 횡행하면 가짜 그리스도는 서쪽 땅을 짓밟고 무역로를 파괴할 것입니다. 가짜 그리스도는 양손에 각각 칼과 횃불을 들고, 칼로는 내리치고 횃불로는 사를 것입니다. 그의 힘은 신성을 모독하고, 그의 손은 잔혹할 것인즉, 오른손은 파멸이요, 왼손은 어둠일 것입니다. 그의 모습을 알아보는 수가 있기는 있습니다. 머리는 불꽃으로 타오르고, 오른쪽 눈에서는 피가 흐릅니다. 왼쪽 눈은 고양이 눈 같되 하나가 아니라 둘이랍니다. 눈썹은 휘고 아랫입술은 부풀어있고, 발목은 약하나 발은 크고 엄지손가락은 투박하고 길답니다!'
'저 영감, 자화상을 그리고 있지를 않나?'
사부님이 그를 비웃었다. 사부님 말씀으로는 뜻밖에도 심술궂은 표현이었다. 그러나 머리끝이 쭈뼛 서던 참이라서 사부님 말씀이 오히려 반가왔다. 그러나 웃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볼에다 바람을 잔뜩 넣어 웃음을 참았다. 노인이 침묵할 동안 회중석에서는 기침소리, 흐느끼는 소리,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호르헤의 장광설이 끝날 조짐을 보이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세상이 무법 천지가 되고, 천둥 벌거숭이 아들이 아비에게 맞서고, 아내가 제 서방에게 술수를 쓰고, 서방이 아내를 송사에 얽어 들이고, 주인이 머슴을 천시하여 그 말을 거역하는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이때가 되면 노인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젊은이는 권리만 요구하고 나설 것이며, 근행이 천시당하고 도처에서 음행과 악덕과 방종을 찬양하는 노래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여기에, 강간과 간통이 위증과 자연의 이치에 반하는 죄악이 파도처럼 밀려들 것이고, 역질이 창궐하고 무술과 주술이 난무할 것이며 하늘에는 기망한 날 것들이 나타날 터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독교도 사이에는 가짜 선지자, 가짜 사도, 배덕자, 협잡꾼, 마녀, 강간범, 선동자, 위증자, 곡학 아세배가 속출할 터입니다. 그러면 목자는 이리로 표변하고, 사제는 거짓증언을 밥먹듯이 하고, 수도사는 속세를 탐하고, 거지는 두목을 대접하지 않고, 부자는 자비를 잃고, 정의는 오로지 불의만을 편들 것입니다. 도시는 지진에 흔들릴 것이요, 만방에는 역질이 만연할 것이며, 폭풍우는 땅을 뿌리째 뒤집을 것이요, 달에서는 이변이 일어날 것이며, 별은 제 길을 잃으면서 미지의 별이 나타나 하늘을 갈고 다닐 것이요, 계절이 미쳐 여름에는 눈이 오고 겨울에는 폭염이 내릴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종말이 옵니다. 첫날 제3시에는 하늘에서 문득 큰소리가 들리고 북쪽에서는 보랏빛 구름이 모여들고 번개, 천둥과 함께 온 땅에는 피의 비가 쏟아져 내립니다. 둘째 날에는 땅이 뿌리째 흔들리고 연기 기둥이 하늘의 문을 가립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이 땅 밑의 심연이 우주의 네 모서리에서 열립니다. 창공의 탑루가 열리고 그 안에 연기가 들이차며 제10시가 될 때까지 유황 냄새가 진동할 것입니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일찍이 심연이 녹아 터지니 땅의 집들은 하나 남김없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닷새째 되는 날 제6시에는 빛의 권능과 해 바퀴가 터지면서 세상은 암흑 천지가 되되 밤이 되어도 달과 별은 빛을 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엿새째 되는 날 제4시에는 창공이 동에서 서로 갈라지고 그 틈으로 천사들이 이 땅을 내려다볼 것입니다. 땅 위의 모든 것들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천사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천사들을 본 사람들은 그들의 시선을 피해 산 속으로 망명 도생할 터입니다. 이레째 되는 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빛으로 강림하실 것입니다. 곧 의의 심판이 내려지고 승천하는 자는 육체와 영혼의 영원한 지복을 얻게 됩니다. 교만한 형제들이여, 그러나 오늘 밤 여러분이 묵상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올시다. 죄인은 여드레째 아침을 맞지 못합니다. 여드레째 아침이 되면 부드럽고 다정한 소리가 동쪽에서 들리고 하늘 한가운데서 한 천사가 나타나 다른 천사들에게 명을 내립니다. 천사들은 이 한 분 천사와 함께 구름 병거를 타고 날아다니면서 믿는 자들을 축복하여 해방시킵니다. 이들은 모두 한데 어울려 심판의 날이 끝난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오늘 밤의 우리에게는, 그들과 함께 기뻐하는 순간을 상상할 자격이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밤 우리가 묵상하여야 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내쫓는 우리 주님의 음성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외치실 것입니다.
<내게서 떠나라. 저주받은 것들아! 어서 악마와 그 사제가 너희를 위해 예비한 영원한 불길 속으로 들어가거라! 너희가 번 것이니 너희가 누리거라! 내게서 떠나 영원의 어둠으로, 꺼지지 않는 불길로 들어가라! 나는 너희들을 만들었는데 너희는 다른 자를 따랐다. 너희는 다른 주인의 종이 되었으니, 가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이를 가는 그 배암과 함께 하라. 나는 너희들에게 복음을 알아먹는 귀를 주었는데도 너희는 이교도의 말에 그 귀를 기울였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찬미할 입을 주었으나 너희는 그 입으로 거짓 시를 읊고 광대의 익살을 농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내가 보인 본을 알아보는 눈을 주었으니 너희는 그 눈으로 암흑을 엿보았다! 나는 자비로우나 공정한 판관이다. 따라서 내 너희에게, 한 짓에 값하는 심판을 내리리라. 내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나 너희 항아리에는 기름이 없고, 내 너희를 불쌍히 여기고자 하나 너희 등은 닦여져 있지 않구나... 어서 내게서 떠나라...>
우리 주님의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까? 이로써 우리는 영원한 고통이 가다리는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아,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축수했다.
성무가 끝나자 수도사들은 아무 말 없이 줄을 지어 자기네들 방으로 갔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던지 소형제 수도회 사절과 교황청 사절들도 총총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마음이 무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순례자 숙사 계단을 오르면서 사부님이 나에게 말했다.
'어서 자거라. 나다닐 만한 밤이 못 된다. 어쩌면 베르나르기는 우리 시체를,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나팔소리로 삼으려할지 모른다. 내일 조과 성무에는 빠지지 않도록 하자. 조과 성무가 끝나면 미켈레를 비롯 소형제회 수도사들은 모두 떠날 테니...'
'베르나르 기 수도사께서도 죄인들을 데리고 떠나십니까?'
내가 힘없이 물었다.
'암, 이제 여기에서 더 할 일은 없을 테니까... 베르나르는 어떻게 하든 미켈레를 아비뇽으로 데려가려 할 게다. 미켈레의 아비뇽 도착 일자를, 소형제회 수도사를 지냔, 이단자이며 살인자인 레미지오의 심판 일자와 맞추어 놓겠지... 그래야 레미지오를 태우는 화형대의 불길이 화해의 횃불이 되어 미켈레와 교황이 만나는 자리를 비출 테니...'
'그럼 살바토레와... 그...여자는 어떻게 되는지요?'
'살바토레는, 심판 현장에서 증언해야 하니까 레미지오와 함께 가게 될 게다. 베르나르는 어쩌면, 저에게 협조해 준 대가로 살바토레의 목숨은 되돌려 줄지도 모르겠구나. 놓아준 쥐에 사람을 보내어 뒤에서 치게 할지도 모르겠고... 아니, 아주 살려 보낼지도 모르겠다, 베르나르 같은 인간에게 살바토레 같은 인간은 아무 관심거리도 되지 못한다. 살바토레는 랑그도끄 숲 같은 데서 살인 강도로 한 많은 삶을 마치게 될까...'
'하면... 여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여자에 관한 한, 내 이미 화형대의 노린내가 난다고 하지 않더냐? 허나 여자는 아비뇽 구경도 못하고 화형을 당할 게다. 카타리 파 이단자들 마을 근처에서 맛보기 삼아 화형을 당할 테지. 나는 베르나르가 동료인 자끄 푸르니에와 만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이름을 잘 기억해 두거라. 지금은 알비 파 이단자들이나 화형대로 보내고 있다면 이자의 야심은 이 정도가 아닐 것이야. 이 아름다운 마녀를 그을리면 두 사람의 명성과 위용이 더욱 빛나지 않겠느냐?'
'구할 방도가 없습니까? 원장님께서 중재에 나서실 수는 없는 것입니까?'
'누구를 위해서? 범죄 사실을 자백한 레미지오를 위해서? 살바토레 같은 부랑자를 위해서? 불연이면, 그 여자를 위해서?'
'여자를 위해서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사부님? 셋 중에서 결백한 것은 여자뿐입니다. 여자가 마녀가 아니라는 것은 사부님께서도 아시질 않습니까?'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수도원장이 마녀를 구하려고 독사 구멍에 손을 넣을 것 같으냐?'
'우베르티노 님을 도피시키는 일은 도와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베르티노는 자기 수도원의 노수도사인데다 공개적으로는 어떤 혐의도 받은 바 없다. 그러고 보니... 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 우베르티노는, 이빨이 빠졌기는 해도 아직은 사자야! 베르나르라고 하더라도 상대가 우베르티노라면 정면에서 치지는 못해.'
'역시 레미지오 수도사의 말이 옳았습니다. 나오는 대로 한 말이었건, 우베르티노 수도사님이나 미켈레 수도사님 같은 분들을 휘해서 한 말이었건, 역시 값은 항상 약자들이 무는 것이군요. 앞의 두 분은 멀쩡한 사람들을 이단자로 만들어 놓았는데도 말씀입니다.'
나는 절망에 빠져 있었던 나머지 그 여자가, 우베르티노의 신비주의적인 교리에 물든 엄격주의파 신도이기는 고사하고, 엄격주의파와는 아무 인연도 없는 농부의 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네 말이 다 그르지는 않다. 네가 정의를 구하는 기특한 아이여서 하는 말이다만, 언젠가는 교황과 황제라고 하는 두 마리의 큰 개가 평화를 위하여, 서로 제 주인을 위하여 물고 뜯고 싸우던 작은 개의 시체를 주고받게 될 게다. 미켈레와 우베르티노 역시, 오늘 저 여자가 받은 것과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되겠지.'
나는 이제 와서야 자연 철학의 원리를 근거로 하는 사부님의 예언, 혹은 삼단 논법을 이해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의 예언이나 추론이 나에게 하등의 위안거리도 되지 못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여자가 화형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책임을 느꼈다, 여자가 화형을 당하면, 내가 지은 죄까지 사함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도 부끄러워 눈물을 떨구며 내 방으로 돌아와 밤새 울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 여자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알았더라면, 동료들과 멜크 수도원에서 몰래 돌려 가며 읽던 기사 무훈담의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밤새 애통해 할 수 있었을 것을...
이것이 내가 경험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세속적 사랑이다. 그때도 그랬고, 그 뒤로도 그랬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본 바가 없다.
제6일
조과
우리는 조과 성무에 들어갔다. 안개 속에서 하루가 지나고 새 날이 시작되었는데도 안개는 여전했다. 회랑을 지나노라니 잠을 설쳐서 그런지 한기가 뼛속을 스며드는 것 같았고 몸이 구석구석 쑤셔왔다. 교회 안은 몹시 추웠지만 나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회중석 통로에 꿇어앉았다. 마음이 평화로웠던 것은 잡다한 일을 재우고 다른 수도사들과 나누는 온기와 기도로 위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편> 봉독이 시작될 즈음 사부님이 우리 앞쪽의 자리를 가리켰다. 호르헤 노수도사 자리와 티볼리 사람 파치피코의 자리 사이에는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늘 장님 호르헤 곁에 앉는 말라키아의 자리였다.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수도원장 쪽을 바라보았다. 원장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빈자리가 무서운 사건의 전조가 된 전례가 있음은 누구나 익히 아는 터였기 때문이었다. 호르헤 역시 여느 때와는 달리 초조해 하는 눈치를 보였다. 여느 때 같으면 흰창만 희번덕거리는 그 텅빈 눈 때문에 표정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 얼굴이 그날 아침따라 몹시 어두워 보였다. 그는 두 손까지 신경질적으로 비벼대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몇 차례, 주인이 와서 앉았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그 자리를 더듬어 보기까지 했다. 그런 손짓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는 말라키아가 나타나 그 자리에 앉아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사부님, 장서관 사서 수도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까?'
내가 사부님에게 가만히 여쭤 보았다.
'말라키아 말이냐? 장서관 서책이라는 서책은 이제 한 권 남김없이 말라키아의 수중으로 들어온 셈이구나. 이지가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면 그 서책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르고 있을 게다.'
사부님이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우리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기다려 보는 수밖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사부님과 나는 좌우의 눈치를 보면서 기다렸고, 수도원장은 연신 그 빈자리 쪽으로 이따금씩 눈길을 던지면서 기다렸고, 호르헤는 손으로 더듬어 암흑에다 말라키아의 안부를 물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과 성무가 끝날 즈음 수도원장이 수도사들에게 성탄절 장엄 미사를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도원 관례에 따라 찬과 성무시까지는 자리를 뜨지 말고 모두 한자리에 모여 성탄절에 어울리는 찬미가를 연습하자는 뜻이었다. 신심 깊은 수도사들 집단은 한 몸, 완벽한 화음을 내는 한 목소리였다. 몇 년 동안이나 연습을 쌓아온 나머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노래를 통해 하나의 영혼으로 뭉쳐질 수 있는 것이었다.
원장은 <세데룬트>가 좋겠다고 말했다.
<수령들이 모여 앉아 나를 모함하오나
이 3종은 당신의 법규를 명상합니다.
당신의 언약은 나의 기쁨이요
나의 충고자이옵니다.
내 영혼이 먼지 속에 처박혔사오니
말씀하신 대로 이 몸을 살려 주소서.>(시편 119:23 이하)
나는 원장이, 전날 밤에 박해받은 자들을 사악한 수령들로부터 지켜달라고 호소하는 승계송을 골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 자리에는 황제와 교황이라는 수령들의 사절단이 동석해 있었다. 원장은 그러니까, 우리 교단이 수세기에 걸쳐 얼마나 모진 열강의 박해를 받아왔는가를 상기시키고 있는 셈이었다.
참으로 찬미가의 서두는 거대한 힘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느리고 장엄한 합창이 시작되자 하나로 어우러진 백여 개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회중석 통로를 메우면서 우리 머리 위로 떠올랐다. 아니, 그 소리는 땅속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았다. 소리는 잠시도 끊어지는 법이 없었다. 깊고도 그윽한 선율 위로 성부와 다른 또 한 무리의 소리가 일련의 중창과 장식음을 엮어내면서 이어지다가 누군가의 <아베 마리아>가 열두 번 되풀이 된 뒤에야 끝났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듯한 긴 악절은 기도로 이어졌고 또 한 무리의 듬직한 저음, 수련사들이 내는 저음은 흐물거리던 종탑과 기둥과 첨탑을 일으켜 세우면서 각각의 음부에 밑줄을 긋는 듯했다. 내 가슴이 각 성부의 달콤한 울림에 젖어 들면서 이 소리는, 충만한 느낌을 수용해 내지 못하는 영혼(기도하는 영혼이자 듣고 있는 나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 내어버리고 그 아름다운 소리의 힘으로 기쁨과 찬미와 사랑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집요한 지하 신들의 목소리 또한 쉽사리 내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소리는 아직 한 덩어리로 모이지 못한, 주님을 박해하던 막강한 원수의 위협으로 들려오기도 했다. 해저 신들의 단선율적 발악이 진압된 듯할 즈음, 혹은 할렐루야가 신들의 저항을 분쇄한 듯할 즈음 모든 소리는 장엄하고도 완벽한 화음으로 끝나고 있었다.
<세데룬트> 부분이 지나치게 힘차 듣기에 거북한 소리였다면 <프린치페스>는 웅장하면서도 거룩하고 평화로운 소리로 내 귀를 두드렸다. 나는 나를, 혹은 우리를 적대하는 그 세력이 무엇인가를 확신했다. 내 영혼에 도사리고 있던 어둠, 나를 위협하던 악령은 나의 확신과 더불어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나 악령이 거기에서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노래에 빠져 있다가 다시 고개를 쳐든 내 눈에, 언제 없었더냐는 듯이 다시 자리를 채우고 있는 말라키아의 모습이 보인 것이었다. 나는 사부님을 보았다. 사부님 얼굴에도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수도원장의 얼굴에서도 같은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호르헤는 다시 손을 내밀어 의자를 더듬다가 말라키아의 몸을 감촉하고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가 그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이로써 말라키아의 부재가 야기시킬 수 있는 또 하나의 사건에 대한 공포, 또 하나의 악령은 사라진 셈이었다.
찬양대의 합창은 <아디우바 메(나를 도우소서)>를 지나고 있었다. <아디우바>라는 문장의 양성 모음 <아>가 기분 좋게 교회 안을 울려 퍼졌다. <세데룬트>의 경우와는 달리 <우>도 어둡게 들리기는커녕 소리에서 신성한 힘이 넘쳐나는 것 같았다. 베네딕트 수도회 회칙에 따라 수도사들과 수련사들은 몸을 꼿꼿이 세워 고개를 들고 악보를 어깨 높이까지 올린 채로 노래했다. 그래야 고개가 숙여지지 않고 그래야 호흡에 힘을 들이지 않고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과 성무가 끝났다고는 하나 시간적으로는 여전히 신새벽이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린 나팔 소리가 모든 수도사들을 수마로부터 지켜 준 것은 아니었다. 몇몇 수도사들은, 장음부에 따라 소리를 길게 뽑다가 그 소리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는 꾸벅꾸벅 졸고는 했다. 그런 수도사들이 발견될 때마다 찰중 수도사는 등불을 들어 이를 일일이 확인하고는 졸고 있는 수도사의 육체와 정신을 흔들어 깨웠다.
말라키아가 이상한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도 바로 그 찰중 수도사였다. 말라키아는, 그 전날 밤에 눈을 붙이지 못했던지 수마가 득실거리는 킴메리아(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잠의 신 휘프노스가 산다는 나라)의 안개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찰중 수도사가 그에게 다가가 말라키아의 얼굴에다 등잔을 들이대었다. 웬만하면 그 정도만으로도 퍼뜩 정신을 차렸을 만했다. 그러나 말라키아 쪽에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찰중 수도사가 손을 대어 말라키아를 가볍게 밀었다. 말라키아는 씨보릿자루처럼 앞으로 꼬꾸라졌다. 아니, 찰중 수도사가 손을 댄 것과 말라키아가 앞으로 꼬꾸라진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합창이 느려지면서 소리가 하나씩 죽기 시작했다. 화음을 이루던 소리를 밀어내면서 가벼운 소요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부님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 그쪽으로 달려갔다. 티볼리 사람 파치피코와 찰중 수도사는 말라키아를 바닥에 반듯이 눕히고 있었다. 말라키아는 의식을 잃은 듯했다.
수도원장이 달려왔다. 찰중 수도사의 등잔을 빼앗아 든 사부님이 그 등잔을 말라키아의 얼굴 가까이로 가져갔다. 앞에서 말라키아의 시원찮은 용모를 대강 설명한 바 있지만, 그날 밤 희미한 등잔불 빛에 드러난 말라키아의 얼굴은 죽은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죽음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흉측했다. 뾰족한 코, 쑥 들어간 눈, 푹 꺼진 관자놀이, 귓불이 뒤집히고 주름잡혀 그렇게 흉해 보일 수 없는 귀... 말라키아의 얼굴은 이미 굳어져 가고 있었고 누런 뺨에는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눈은 뜨고 있었으니 사물을 보고 있는 눈은 아니었다. 거친 호흡이 허옇게 마른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런 얼굴을 하고도 말라키아가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말라키아 옆에 앉은 사부님 뒤로 다가섰다. 말라키아의 치열 안에서 검은 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부님은 겨드랑에다 손을 넣어 말라키아를 일으켜 앉히고는 이마의 땀을 씻어 주었다. 말라키아는 사부님의 손길을 의식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사부님을 알아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말라키아는 사부님의 어깨를 잡고 자기 입술을 그의 귀에 갖다 대려고 애쓰면서 힘겹게 몇 마디 더듬거렸다.
'그가 그랬어요... 정말... 전갈 천 마리의 힘이...'
'누가 그러던가? 누가?'
사부님이 다그쳐 물었다. 말라키아는 말을 이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차례 발작적으로 몸을 떨고 말라키아는 고개를 뒤로 꺾었다.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숨을 거둔 것이었다.
사부님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원장이 옆에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도 원장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원장 뒤에 서 있는 베르나르 기의 얼굴로 날아가 꽂혔다.
'베르나르 형제여, 용케도 살인범을 잡아 가둡디다만, 자, 이 사람을 죽인 것은 누구입니까?'
베르나르가 그 사부님의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내게 묻지 마세요. 나는, 이 수도원에 있는 범죄자를 소탕했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가능했다면 기꺼이 그랬을 테지만... 허나 나머지는 이 수도원 원장의 혹독한 칼날... 혹은 도에 넘치는 자비의 손길에 맡기기로 하지요.'
원장은 얼굴을 붉혔지만 항변은 하지 못했다. 베르나르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르헤 노수도사였다. 그는 어느 수도사의 부액을 받으며 의자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어깨를 들먹거리고 있었다. 그 수도사가, 말라키아가 숨을 거둔 사실을 일어주었던 모양이었다.
'언제면 끝이 날꼬... 오, 주님. 저희를 용서하소서...'
호르헤의 말은 토막토막 끊어지고 있었다.
사부님은 한동안 시체를 응시했다. 그러다 시체의 손목을 끌어 등잔 가까이 가져갔다. 오른손 손가락 세 개가 까맣게 변색해 있었다.
찬과
찬과 성무 시간이 되었을까? 전이었을까, 후였을까? 나는 시간 헤아리는 감각을 읽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기는 했을 터였다. 말라키아의 시신은 교회의 관대에 놓여 있었고, 수도사 몇 명이 그 관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원장은 신속하게 영결식을 준비하라고 수도사들을 채근하고는 베노와 모리몬도 사람 니콜라를 불렀다. 그는 하루도 채 안 되는 동안에 장서관 사서와 식료계를 한꺼번에 잃었다면서 니콜라에게 말했다.
'그대가 레미지오의 업무를 관장하라. 이 수도원의 식료업무라면 그대도 어지간히 알고 있을 게다. 대장간 일은 그대 의중에 있는 형제에게 맡기도 당장 오늘부터 화급한 식당 및 주방 업무를 관장하여 필요를 메꾸는 데 소홀함이 없게 하라. 성무 참례는 면제할 것인즉 가거라...'
이어서 그는 베노에게 말했다.
'...그대가 말라키아 형제의 조수로 임명된 것은 겨우 어젯밤이다. 문서 사자실 열 준비를 서둘러라. 어떤 사람도 장서관에 올라가게 해서는 안 된다. 혼자서 하라.'
베노는 쭈뼛거리다가, 자기에게도 아직 장서관 출입 허가가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장이 베노를 노려보면서 꾸짖었다.
'앞으로 허가가 날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없다. 세상을 떠난 형제들... 아직도 떠나지 않은 형제들을 위해 모두들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라. 모든 수도사들은 오로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만 진력한다. 서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가 서물을 원하거든 목록을 보라. 그것뿐이다. 만과 성부만 면제한다. 문단속을 해야 할 시각이니까.'
'안으로 문을 잠그면 저는 어떻게 나옵니까?'
베노가 물었다.
'좋은 질문이다. 아랫문은 저녁 식사가 끝나는 대로 내가 잠근다. 이제 가거라.'
원장은 할말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는 사부님은 본 척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교회 안에는 몇몇 수도사들이 남아 있었다. 알리나르도 노수도사, 티볼리 사람 파치피코, 알레산드리아 사람 아이마로, 산탈바노 사람 피에트로... 아이마로는 여전히 빈정대고 있었다.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저 게르만 인이 세상을 떴으니 이제 저 자보다 더 무식한 정서관 사서를 맞을 일은 없어졌으니 말입니다.'
'후임으로는 누가 들어설 것 같은가?'
사부님이 그에게 물었다
'요 며칠 간 수도원 돌아가는 꼴로 봐서 문제는 장서관 사서 정도가 아닐 것 같습니다. 원장이 문제인 것이지요.'
'쉬잇...'
파치피코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었다.
알리나르도 노수도사가 예의 그 예언자 같은 얼굴을 하고는 중얼거렸다.
'이 사람들이 또 불의를 행하는 구나... 내 소시적에 그러더니... 막아야 해. 막아야 하고말고...'
'누구를 막아야 합니까?'
사부님이 다그쳐 물었다. 파치피코가 가만히 다가와 사부님의 팔을 끌고 노인으로부터 꽤 떨어진 문 앞자리까지 가서는 속삭였다.
'아시겠지만... 저희들은 알리나르도 노수도사 어른을 좋아합니다. 저희들이 아는 한, 저 분은 수도원의 미풍 양속, 그리고 세월 좋던 옛날의 유물 같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엉뚱한 말씀도 곧잘 하시고는 하지요, 저희들은 모두 후임 장서관 사서로 누가 들어설지 걱정하던 참입니다. 후임은, 학식이 있고, 된 사람이고, 현명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어도 알아야 하는가?'
사부님이 물었다.
'아랍어도 알아야 합니다. 관례상 그렇고 업무상 그렇습니다. 저희들 가운데서도 그 정도 재능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기가 모자랍니다. 가령 피에트로와 아이마로가...'
'베노도 그리스어는 아네.'
'너무 어립니다. 어제 말라키아가 어째서 그 어린 것을 보조 사서로 골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델모는 그리스어를 알았던가?'
'허나 베난티오는 알았지? 베렝가리오도 알았고... 어쨌든 고맙네.'
우리는 식당 쪽으로 걸었다. 그쪽에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어에 관한 건 왜 물으셨는지요?'
나의 질문에 사부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죽은 수도사로, 손끝에 검은 얼룩이 묻었던 수도사는 모두 그리스어를 안다. 따라서 다음에 누가 죽는다면 그리스어를 아는 수도사일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그러나 너는 그리스어를 모르니까 안전하다.'
'말라키아 수도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너도 듣지 않았느냐? 전갈이라고 했지? 다섯 번째 나팔이 울리면... 메뚜기 떼가 나타나는데... 메뚜기 떼에게는 전갈이 가진 것과 같은 권세가 주어진다...(요한의 묵시록 9:1~3) 말라키아는 누군가가 저에게 한 경고를 우리에게 알리는 것 같더구나.'
'여섯 번째 나팔이 울리면 사자 머리를 한 말이 나타나는데, 이 말은 연기와 불과 유황을 뿜습니다. 잔등에 탄 이는 붉은 색, 보라색, 유황색 가슴 받이를 붙이고 있고...(요한의 묵시록 9:13~17)'
'머리가 아프구나. 그러나저러나 다음 사건은 외양간 근방에서 일어날 지도 모르겠구나. 눈여겨보기로 해야겠다. 일곱 번째 나팔 소리에도 대비해야 한다. 그렇다면 희생자는 아직 두 사람이 더 남았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문제는 그게 누구냐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이 <피니스 아프리카에>, 즉 <아프리카의 끝>이라는 방일까? 그 방을 아는 자일까? 그렇다면 원장밖에 더 있겠느냐? 조금 전에 저 사람들이 하던 원장에 대한 험구를 들었지. 그런데 알리나르도는 복수로 말하더구나.'
'그럼 원장께 귀띔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뭘 귀띔해? 그들이 원장을 살해할 거라고? 확신이 기댈 언덕이 아직은 나에게 없다. 나는, 범인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다는 걸 전제로 밀고 나가 보겠다. 하지만 범인이 다른 계획을 추진 중이라면? 그리고 범인이 단수 아닌 복수라면...'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직은 잘 모르겠다. 허나 내 언제 너에게 이른 적도 있거니와, 우리는 가능한 모든 질서와 무질서를 상상해 보아야만 한다.'
1시과
식료계 직책을 맡은 모리몬도 사람 니콜라는 요리사들에게 갖가지 업무를 지시했고 요리사들은 그에게 주방 업무의 통례를 샅샅이 보고했다. 윌리엄 수도사가 이야기 나눌 짬을 내어 보라고 하자 니콜라는, 지하 보고로 내려가 유리 그릇 닦는 일을 감독해야 한다면서 그 일이 끝난 연후에 시간을 내어 보겠노라고 말했다.
얼마 뒤에야 니콜라는 사부님과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앞장서서 교회로 들어가 제단 뒤로 우리를 안내했다. 수도사들은 회중석에다 관대를 차리고, 말라키아의 시신을 지키며 경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니콜라는 우리를 조그만 사다리 앞으로 안내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보니, 돌기둥에 군데군데 궁륭 꼴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조그만 방이 나왔다. 그 방이 바로 수도원이 귀물이 보관되어 있는 지하 보고였다. 수도원장은 그 지하 보고의 귀물을 끔찍하게 여겨 특별한 경우나, 특히 귀한 손님이 왔을때만 문을 열게 한다고 니콜라가 귀띔해 주었다.
지하 보고에는 갖가지 크기의 상자들이 벽을 지고 쌓여 있었다. 상자 속에 든 보물은 니콜라의 직속인 두 사자가 들고 선 횃불의 불빛에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황금빛 법의, 보석을 박은 금관, 겉에다 다양한 문양을 인각한 금속제 돈궤, 흑금과 상아 세공품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니콜라는 몹시 자랑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에방겔리아리움(4복음서)> 한 권을 보여주었다. 거죽은, 갖가지 색깔의 법랑으로 되어 있었고, 테두리에는 선조 세공한 금테가 감겨 있었다. 서책을 철하는 데 쓴 것도 못이나 철사가 아닌, 보석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형제단도 보여주었다. 이 제단에는 청금석과 금으로 된 기둥이 두 개 있었는데 금으로 된 기둥에는 그리스도가 매장되는 장면이 양각되어 있었고 이 기둥 위로는 줄마노를 바탕으로 13개의 금강석을 박은 황금 십자가가 서 있었다.제단 박공에는 마노와 루비가 박혀 있었다. 상아로 만든 서판도 있었다. 서판은 모두 다섯 쪽으로 되어 있었는데 각 쪽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음각되어 있었다. 서판 한가운데에는 은도금한 조개를 유리로 붙인 등잔이 있었는데, 이 등잔이 밀초로 만든 하얀 바닥에다 찬란한 무늬를 비추어 내었다.
귀물을 설명하는 니콜라의 야단스러운 표정이나 몸짓은, 그가 이 보물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사부님은 니콜라가 보여 준 수도원 보물에 정신이 아찔할 만큼 감동했다고 말하고는 슬쩍 말머리를 틀어 말라키아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느냐고 물었다.
니콜라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 수정 그릇의 얼룩을 닦아 내고는 사부님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비쳤다.
'저야 뭘 알겠습니까만, 들리는 말에 따르면 생각이 깊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의외로 단순했다더군요. 알리나르도 노수도사는 한마디로 멍청이라고 하지만요.'
'알리나르도 노인은 옛날에 있었던 일 때문에 누구에겐가 마음의 앙금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이 알리나르도가 옛날에 장서관 사서 자리 맡으려다가 거절된 사건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거야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 아닙니까? 자그마치 반세기 전의 일이니까요. 제가 이 수도원으로 왔을 당시 장서관 사서는 보비오 사람 로베르토였습니다. 원로 수도사들은 로베르토가 알리나르도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들 하더군요. 로베르토에게는 보조 사서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죽자 새파란 말라키아를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들리던 말에 따르면 말라키아가 제 입으로 그리스어와 아랍어를 안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라더군요. 흔히들 말라키아에게는 쌓인 공부가 없다고들 합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필사하는 원숭이 흉내내듯이 옮겨 쓰던 필사생이었다는 것이지요. 알리나르도 수도사는 말라키아를 그 자리에 앉힌 것은 상정한 사람이 누군지는 저도 모릅니다. 이야기는 이것뿐입니다. 말라키아는 자신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도둑 지키는 개처럼 장서관을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가 항상 있었어요. 그 문제에 있어 말라키아가 베렝가리오를 보조 사서로 지명했을 때에도 수근거림이 있었습니다. 사서나 보조 사서나 멍청하기는 일반이지만 베렝가리오에게는 모사꾼 기질이 조금 있다는 말이 더러 나돌기는 했지만요... 이미 들어서 아실터입니다만 말라키아와 베렝가리오의 사이가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 지나간 이야깁니다. 혹 아시는지요? 베렝가리오와 아델모 역시 해괴한 관계였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젊은 필사생들은 말라키아가 질투한다고들 수근거리더군요. 말라키아와 호르헤 사이를 두고도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아, 그렇다고 달이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해온 공부로 보나, 마음을 닦은 세월로 보나 호르헤 노수도사가 그런 의혹을 받을 만한 분은 아닙니다. 장서관 사서이니 만치 관례상 말라키아는 당연히 고해 사제로 수도원장을 섬겨야 합니다. 다른 수도사들은 호르헤 노인에게 고해합니다. 알리나르도 노수도사에게 하는 수도 있습니다만 이분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들리는 말에 따르면 말라키아와 호르헤가 만나는 횟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장이 말라키아의 영혼을 지배한다면, 호르헤는 말라키아의 육체와 행동과 업무를 관장한다던가... 수도사님도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만 희귀본이나, 지금은 거의 잊혀진 서책을 찾을 때 수도사들은 말라키아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호르헤 노인과 상의합니다. 말라키아는 목록을 갖고 있다가 서책을 찾으러 장서관으로 올라가는 게 고작이지만 호르헤는 그 서책의 내용까지 훤히 꿰고 있답니다.'
'호르헤는 어떻게 해서 장서관 일에 그렇게 정통한 것인가?'
'알리나르도 노인을 제하면, 이 수도원에서 가장 연세가 많은 분이 아닙니까? 거기에다 그분은 소시적부터 이곳에 있었습니다. 호르헤 노인... 연세가 대단히 많습니다. 여든이 넘었다고 하는 사람이 많지요. 장님이 된 지도 40년이 넘었다던가...'
'그럼 눈이 멀기 전에 이미 박학을 얻었다는 이야긴데?'
'호르헤 노인에 관해서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린 시절부터 벌써 굉장한 천재였더랍니다. 카스틸리아에서 소년 시절을 보낼 때 벌써 아랍어와 그리스어에 박사였다니까요. 장님이 된 다음에도... 요새도 마찬가집니다만... 문서 사자실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냅니다. 옆에 있는 수도사들에서 장서 목록을 읽게 하고 필요한 서책을 가져오게 해서는, 수련사들에게 소리내어 읽으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말라키아와 베렝가리오가 죽은 지금, 남아 있는 사람 중에서 장서관 비밀을 알만한 사람이 누구겠는가?'
'원장님이 아시겠지요. 베노를 사서 재목으로 보시는 날 베노에게 그 비밀을 일러주시겠지요.'
'<재목으로 보시는 날>이라나, 그게 무슨 뜻인가?'
'베노의 연치가 어리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베노는 말라키아가 죽기 전에 보조 사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조 사서가 되는 것과 사서가 되는 것과는 천양지찹니다. 사서는 원장직을 승계하는 것이 통례이니까요.'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장서관 사서 자리가 그렇게 중했던 것이구나... 그렇다면 원장도 옛날에는 장서관 사서를 거쳤는가?'
'아닙니다. 원장님은 거치지 않았습니다. 원장님이 원장직에 오르신 것은 제가 여기에 오기 전인, 그러니까 30년도 더 된 옛날 일입니다. 그전에는 리미니 사람 파올로가 원장이었다는데, 아주 묘한 어른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어른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가 적지 않게 전해지니까요. 이 분은 대단한 독서가로, 장서관에 있는 서책이라는 서책은 모조리 암기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쓸 줄은 몰랐다는군요. 그래서 별명이 <실서 원장>이었답니다. 아주 젊을 때 원장이 되었는데 원장 되는 데는 끌뤼니 사람 알지르다스라는 분의 배경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들 합니다. 모르기는 하지만 한가한 산문 공론이었을 겁니다. 어쨌든 파올로는 수도원장이 되었고, 보비오 사람 로베르토는 장서관 자리에 앉았는데... 이 사서가 허구한 날 병치레로 세월을 보내다 자리에 눕자, 사람들은 못 일어날 것이라고들 했는데...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해서 파올로 원장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죽었던 것인가?'
'사라졌다니까요. 어떻게, 어디고 사라졌는지는, 저도 들은 바가 없어서 잘 모릅니다. 어느 날 길을 떠났다가는 돌아오지 않았다던가... 여행하는 도중에 도둑 떼에게 걸려 죽음을 당했는지 어쨌는지... 파올로가 사라졌으니 장서관 사서 로베르토가 원장 후임으로 들어앉아야 마땅한데... 그게 그렇게 되지 못했답니다. 흑막이 있었던 것이지요. 들리는 말로는, 지금 원장은 이 지역 영주의 서자랍니다. 이 원장은, 자라기는 포사노바 수도원에서 자랐습니다. 소시적에는 성 토마스(토마스 아퀴나스)를 시봉했는데 이분이 돌아가시자 원장은 토마스 원장의 시신을 들쳐 메고 탑루 계단을 내려왔답니다. 그 계단은 원래 시신은 지나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이곳에서 원장을 덜 좋게 여기는 자들은, 그때가 원장의 전성 시대였다고들 합니다. 그 덕에 지금의 원장은 장서관 사서 자리를 거치지 않고도 원장이 되어 누군가로부터... 로베르토로부터였을 겁니다만... 장서관의 비밀을 전수받았답니다. 저는, 원장이 베노를 가르쳐 사서로 만들지, 아예 가르치지도 않을지 알지 못합니다. 이유는 아시겠지요? 장서관 사서로 지목한다는 것은 후임 원장 재목을 지목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극북 지방 출신의, 반쯤은 야만인이나 다름없는 이 풋내기가 이 나라, 이 수도원, 그리고 이 수도원과 이 지역 영주와의 그렇고 그런 관계를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하지만 말라키아나 베렝가리오는 이탈리아인이 아니면서도 각각 사서, 보조 사서 노릇을 하지 않았는가?'
'수도사님은 아마 잘 모르실 겁니다. 수도사들 사이에서는, 지난 반세기 이상이나 수도원 법통이 문란해지고 있다고 불만이 자자하답니다. 반세기 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알리나르도가 장서관 사서 자리를 넘본 적소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겁니다. 사서 자리는 옛부터 이탈리아 인들의 전유물이었더랍니다. 실제 그럴만한 재목도 넉넉하게 있었고요. 아시겠지만...'
니콜라는 말하기가 망설여졌는지 한참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말라키아와 베렝가리오는 이제 죽었으니 원장 자리에는 앉을 수 없는 것이지요...'
니콜라는 아주 불길한 생각, 아니면 망측한 생각이라도 했던지 서둘러 두 손을 허공에다 내젓고는 성호를 그었다.
'...내가 대체 무얼 안다고 이렇게 지껄이고 있을까... 아시다시피 아 나라에서는 창피한 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수도원, 교황청,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암투, 고위 성직을 빼앗기 위한 무고... 구역질이 다 납니다. 인간이라는 이 별종에 대한 제 믿음은 나날이 엷어져 가고요, 도처에 보이는 것은 음모와 책략뿐입니다. 수도원 꼴이 대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성자들이 거둔 승리의 표상이었던 수도원이 이제 한갓 사술이나 부리는 자들이 난무하는 독사굴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이 수도원의 빛나는 역사를...'
니콜라는, 지하 보고 가득히 쌓여 있는 귀물을 가리키고는, 그 자리를 떠나 성골함 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성골함은 지하 보고의 노른자위였다.
'보십시오. 우리 주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 끝을!'
그의 말에 따라 우리는 수정으로 뚜껑을 한 황금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보라색 깔개 위에는 길쭉한 쇠붙이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한때는 녹슬어 있었을 이 쇠붙이는 얼마나 닦이고 문질러졌는지 보기만 해도 섬뜩할 지경으로 번쩍거렸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투명한 뚜껑이 달린, 자수정 박은 은제 상자에는, 주님 달리신 십자가의 한 부분이라는 나무 조각도 있었다. 니콜라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모후가 성지를 순례하러 갔다가 가져 온 것이라고 했다. 헬레나 모후는 골고다 언덕과 성묘를 발굴하고 거기에다 교회를 세웠다고 니콜라가 설명했다.
니콜라는 이 밖에도 많은 성보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일일이 기록할 수 없었다. 숫자가 엄청나게 많은 데다, 설명이 얼마나 화려한지 듣는 것만으로도 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옥 상자에는 십자가에 박혔던 못도 보관되어 있었다. 시든 장미꽃을 깐 유리병 바닥에는 주님이 쓰셨던 가시 면류관의 일부가 들어 있었다. 바닥에다 마른 꽃잎을 깐 다른 병에는 최후의 만찬 때 깔았던 것이라는 식탁보 조각이 들어 있었다. 은줄이 달린 성 마태오의 전대도 있었고, 또 다른 통 속에는 풍상에 색깔이 바랠 대로 바랜 보라색 댕기에 묶인 성 안나의 유골이 들어 있었다. 마구간의 구유 조각, 한 뼘 길이의 사도 성 요한의 보라색 옷자락, 로마에서 성 베드로의 발목을 묶었던 사슬 고리 두 개, 성 아달베르토의 두골, 성 스테파노의 갈, 성 마르게리타의 경골, 성 비탈리스의 손가락뼈, 성 소피아의 갈비뼈, 성 에오반의 턱뼈, 성 크리소스토모스의 어깨뼈, 성 요셉의 약혼 반지, 세례 요한의 이빨, 모세의 지팡이, 성모의 결혼 예복의 장식술 조각... 나는 이런 귀물 중의 구물을 구경한 것이었다.
성보는 아니지만, 먼 나라의 진기하기 그지없는 풍물을 증언하는 귀물도 있었다. 먼 나라를 여행한 수도사들이 수도원에 기증한 기물 혹은 귀물이라는 니콜라의 설명이었다. 박제한 바실리스크와 휘드라, 일각수의 뿔, 어느 은자가 어떤 알에서 꺼냈다는 또 하나의 알,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히브리인들에게 먹이셨다는 만나 한 조각, 고래 이빨, 야자, 노야의 홍수 이전에 이 땅에서 살았다는 짐승의 뼈, 상아, 돌고래의 갈비뼈... 듣도 보도 못한 귀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새까맣게 녹슨 은제 상자의 세공 기술로 보아 아득한 옛날에 수도원으로 들어온 듯한 뼈, 천 조각, 나무, 쇠붙이, 우리 조각은 얼마든지 더 있었다. 까만 가루가 든 병을 보고 무엇이냐고 묻는 나에게 미콜라는 소돔의 유적에서 발견된 목탄이라고 했고, 다른 유리 병 속의 흙은 예리고 성벽에서 떼어낸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황제가 성채 한 기와 바꾸기를 마다할 이런 귀물은 그 귀물을 보존해 온 수도원의 재물이자, 그 수도원을 예사 수도원과 구분하는 상징의 덩어리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계속해서 설명을 듣기만 했다. 니콜라의 설명은 물 흐르는 듯했고 따라서 받아 적으려면 한가지 한가지에 대한 설명이 두루마리 하나 몫은 족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설명을 들은 뒤 나는 혼자 이리저리 다니면서 그 지하 보고를 둘러볼 수 있었다. 니콜라의 시자가 가까이 있을 때엔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으나 이 시자가 등잔을 들고 다른 곳으로 가버릴 때는 어두워서 애를 먹기도 했다. 투명하면서도 신비스럽고, 신비스러우면서도 조금은 역겨워 보이는 노란 연골 조각,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닳고 색깔이 바랜 천 조각, 한때는 동물성 물질이었으나 이윽고 세월과 함께 광물성 물질이 된 첨탑이 있고 종탑이 있는 실제 교회당의 축소판 같은 수석이나 금속 그릇 안에 든 보물을 나는 정신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렇다면 성자들의 시신은 그런 형태로 육신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파편이나 잔해로부터 언젠가는 저 유기체가 재구되고 신성한 섬광 안에서 자연의 감각을 되찾아 피페리노가 썼듯이 이윽고 <자극히 근소한 냄새의 차이>까지 지각하게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사부님 손에 어깨를 얻어맞고 나는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문서 사자실로 올라가 보아야겠구나. 급히 조사해 볼 게 생겼다.'
'베노 수도사가 원장님의 명을 따른다면, 아직 서책을 입수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날 읽던 책을 좀 보아야겠다. 아직 문서 사자실 베난티오의 서안 위에 있을 게다. 구경 더 하고 싶으면 너는 여기에 있어도 좋다. 이 지하 보고는 너도 듣고 보았던 저 청빈 논쟁을 예쁘게 축소시켜놓은 것 같구나.왜 이 수도원 수도사들이 서로 원장이 되려고 상대를 폄훼하는지 이제 알 만하냐?'
'사부님께서는 니콜라 수도사의 말을 믿으시는군요. 그러면 이 수도원 살인 사건은 원장직 승계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내 일찍이 일렀듯이 나는 내가 세운 가정은 미리 언표하지 않는다. 니콜라의 말에 일리가 있기는 해. 흥미있는 대목도 많고... 허나 내가 지금부터 가려는 길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길이야. 아니 어쩌면, 방향만 다를 뿐 한 길인지도 모른다. 그리도 너 말인데, 상자 속에 든 걸 보고 너무 기죽지 말아라. 나는 다른 교회나 수도원에서도 거룩한 십자가 조각을 많이 보았다. 모두가 진짜라면 우리 주님은 통나무 두 개를 걸쳐 만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게 아니라 아주 널찍한 숲속에서 돌아가신 모양이다.'
'아니, 사부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말이 그렇다는 것이야. 이곳에 있는 것보다 더 귀한 보물은 다른데 얼마든지 있다. 내 어느 해 쾰른 성당에서 세례 요한의 두개골을 보았는데... 기가 막혀서... 열 두어 살 먹은 아이의 두개골이더구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세례 요한께서는 연세가 훨씬 드신 다음에 처형당하지 않았습니까?'
'그 두개골은 또 다른 교회의 성보 상자에 들어있을테지...'
사부님은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다. 나는 사부님이 농담을 해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 고국에서 누가 농담을 하면 모두 배를 잡고 웃음으로써 그 농담을 나누어 즐긴다. 그러나 사부님의 농담은 시도 때도 없었다. 사부님은 심각한 일이 있을 때도 농담을 했고, 농담하고 있을 때도 그렇게 진지해 보일 수가 없었다.
3시과
윌리엄 수도사는 니콜라를 뒤로하고 문서 사자실로 올라갔다. 나는 지하 보고를 둘러보고 나서 교회로 올라가 말라키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참이었다. 내가 말라키아라고 하는 사내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는 나에게 어쩐지 스산한 존재였다. 한동안 내가 그 수도원 살인 사건의 혐의자로 말라키아를 의중에 두었던 것도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막상 이승을 뜨고 보니, 그가 어쩐지 채울 수 없는 욕망에 쫓기던 가엾은 존재, 할 말이 하나도 없어서 그랬겠지만 늘 당혹과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의미에서 흡사 수도사들이라는 쇠그릇 사이에 끼인 질그릇 같다는 생각도 했다. 따라서 나는 그에 대한 한 가닥 뉘우침을 지울 수 없었다. 졸지에 당한 참변을 애석해 하고 기도로 그 영혼을 달래 주면 내 죄의식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것 같았다.
교회 안은 희미하게 밝혀져 있었다. 복도 한가운데 있는 망인의 시신 곁에는 몇몇 수도사들이 모여 앉아 단조로운 소리로 망인의 넋을 위한 기도문을 외고 있었다.
나는 그 이전에 이미 멜크 수도원에서 수도사의 장례를 여러 차례 치러본 적이 있다. 유쾌한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장례라는 것은 늘 조용하고 소박한, 따라서 그리 불쾌한 것이 아닌 의식으로 내 뇌리에 남아 있었다. 멜크 수도원 수도사들은 교대로, 죽어 가는 형제의 방을 찾아가 덕담으로 죽어 가는 형제를 위로하느라고, 이제 곧 이승의 선한 삶을 마감하고 곧 영원한 지복의 나라에서 천사들의 찬송가를 들을 형제야말로 얼마나 복된 사람이냐면서 진심으로 부러워하고는 했다. 경건한 선망의 향기에서 온다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평화는, 평화롭게 죽어 가는 당사자에게 그대로 전달되고는 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 아델모를 필두로 한 네 죽음은 얼마나 비참했던가? 결국 나는 <아프리카의 끝>의 악마적인 전갈에 의한 희생자들의 몰골이 어떤가를 가까이서 본 셈이었다. 말라키아가 그랬듯이, 메난티오와 베렝가리오는 수도사로서의 면목을 가누지 못한 채 죽어간 것이었다.
나는 교회 회중석 뒷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한기를 달래려고 했다. 어느 정도 몸이 녹자, 형제들이 외는 기도문에 따라 내 입술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건성으로 입술만 움직였다. 눈이 자꾸만 내리 감기려 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서너 차례 졸았던 듯하다. 수도사들은 <분노의 날(최후의 심판날의 공포를 그린 것으로, 사자를 위한 미사 때 불린다.)>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 속창이 그날 따라 내 귀에는 자장가로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아니, 선잠에 들었다고 해야 옳겠다. 어쨌든 나는 모태 속의 아기처럼 잔뜩 웅크린 채 선잠에 들었다. 내 영혼이 흡사 안개 속으로 잠겨드는 것 같았다. 이승이 아닌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과 함께 나는 환상을 보았다. 아니 꿈을 꾸었다. 꿈이 되었든 환상이 되었든, 독자가 편할 대로 생각해도 좋겠다.
나는, 지하 보고로 내려갈 때처럼 계단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 보니 지하 보고보다 넓은 지하실이 나왔다. 자세히 보니, 수도원 본관 아래층에 있는 주방이었다. 그러자 주방인데도 솥이나 냄비 같은 주방 기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망치와 모루 같은 대장간 연장도 있었다. 흡사 니콜라의 대장간을 그곳으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큰 솥 밑 화덕의 불길로 주위가 환했다. 냄비 속에서 무엇인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는 김과 거품은 공중으로 떠오르다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터지고는 했다. 요리사들은 허공에다 고기 굽는 쇠꼬챙이를 휘둘렀고, 수련사라는 수련사는 모두 주방으로 몰려들어, 이글거리는 화덕 위에서 꼬챙이에 꿰인 채 익고 있는 닭을 낚아채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화덕 옆에서는 대장장이들이 모루에다 망치를 내려쳤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귀가 다 멍멍했고, 모루에서 튄 불꽃은 두 개의 화덕에서 오른 불길 속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나는, 지옥에 와 있는지, 아니면 살바토레가 말하던, 과즙이 뚝뚝 듣고, 순대가 주렁주렁 매달린 천국에 와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어디에 있는지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냄비같이 생긴 난쟁이 무리가 쏟아져 들어와 식당 안으로 떠밀었기 때문이었다.
식당에는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 벽에는 벽걸이와 갖가지 깃발이 걸려 있었으나 거기에 그려진 형상은 흔히 믿는 사람들을 훈도하거나 열왕의 영광을 찬양할 때 그려지는 그런 형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델모의 난외 채식을 연상케 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그러나 아델모의 그림이 무서운 느낌을 주었는데 비해 벽걸이와 깃발에 그려진 그림은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가령 아름드리 나무를 돌며 춤추는 메토끼, 요리사 차림을 한 원숭이의 냄비로 흘러 들어가는, 물 반 고기 반인 강물, 김이 뿜어져 나오는 주전자를 맴도는 장구배 도깨비 그림이 그랬다.
잔칫상 머리에는, 보라색 술 장식 도포로 성장한 수도원장이 삼지창을 홀장처럼 들고 앉아 있었다. 수도원장 곁에서 호르헤는 커다란 술통에서 술을 따라 마시고 있었고, 레미지오는 베르나르 기와 똑같은 차림으로 손에 전갈 모양의 서책을 들고 봉독하고 있었다. 그가 읽고 있는 부분은 분명히 성인전이나 복음서 구절이었을 텐데 우리 귀에 들리는 것은 한 사도를 상대로, <너는 반석이니, 필경은 벌판으로 무너져 내릴 그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라>면서 농담을 건네는 예수님 이야기, 성서를 언급하면서 하느님께서 필경은 예루살렘을 발가벗길 것이라고 주장하는 성 히에로니무스 이야기였다. 뿐만 아니었다. 레미지오가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호르헤가 주먹으로 탁자를 치고 홍소를 터뜨리면서 <하느님 배꼽에 맹세코 자네가 차기 수도원장이 될 것이네> 하고 소리쳤다. 이는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니... 주님, 호르헤를 용서하소서.
수도원장이 경쾌하게 손뼉을 치자 처녀들 무리가 줄을 지어 들어왔다. 화사한 옷으로 단장한, 참으로 눈부신 처녀들의 행렬이었다. 그 중의 한 처녀를 보고 나는 혹 내 어머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여자는 분명히, <엄위하기가 기치 창검을 거느린 군대> 같던 저 무서운 처녀였다. 처녀는 하얀 진주 왕관을 쓰고, 얼굴 양 옆으로는 두 개의 술 장식과 진주 사슬을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끝에 오얏만한 금강석이 달린 이 진주 사슬은 두 줄로 된 다른 장식과 젖가슴 위에서 만나고 있었다. 처녀의 양쪽 귀에서 흘러내린 파란 진주 귀고리는 레바논 탑처럼 희고 곧은 목 언저리에서 목걸이 노릇을 더불어 하고 있었다. 처녀가 입은 옷은 자주색이었고, 손에 든, 금강석이 박힌 황금잔에는 세베리노의 시약소에서 훔침 극약이 들어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이 극약인 줄 짐작했는지는 모르겠다. 갓 밝은 아침처럼 아름다운 처녀 뒤로는 다른 여자들이 줄지어 따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여자는, 금사로 만든 들꽃으로 장식된 검은 겉옷 위에, 장식 무늬를 누빈 흰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두 번째 여자는 초록빛 나뭇잎 무늬와 어두운 미궁 무늬가 놓인 분홍빛 겉옷 위에 노란 다마스크 비단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세 번째 여자는 조그맣고 새빨간 벌레를 짜넣은 에메랄드 옷을 입고, 손에는 흰 목도리를 들고 있었다. 엄위하기가 기치 창검을 거느린 군대 같은 처녀와 옹위하는 여자들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애쓰던 참이어서 나는 다른 여자들의 옷차림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문득 나는 그 처녀가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자들은 모두 손에 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잇는 것 같았다. 아니, 그들의 입에서 두루마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나는 여자들이 웃, 사라, 수산나 등 성서에 나오는 여자들임을 알았다.
이 대목에서 수도원장이, <나오너라, 이 후레자식들아!>하고 외쳤다. 그러자 또 한 무리 귀인들이 소박하면서도 보기 좋은 차림을 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나도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이었다. 무리 한가운데의 보좌에 앉으신 분은 우리 주님이신 동시에 아담이기도 했다. 이분은 보라색 용포 위로는 망토를 두르고, 머리에는 루비와 진주가 박힌 붉고 흰 머리띠를 두르고 그 위에 처녀의 관과 비슷한 왕관을 쓰고 있었다. 이분이 들고 있는 커다란 잔에 든 것은 돼지 피였다. 이분을 옹위하고 있는 다른 귀인들 모습도 여기에 소개해야겠다. 나에게는 하나같이 낯익은 이 귀인들은 프랑스 왕의 근위대와 함께 서 있었는데, 프랑스 왕의 근위대는 초록색, 혹은 붉은색 군복을 입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문자가 새겨진 에메랄드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근위대장이 수도원장에게 술잔을 건네면서 문안을 여쭈었다. 인사를 받은 수도원장이 <넷의 첫 번째와 일곱 번째를 움직여라>하고 외치자 모두가 <아프리카의 끝으로, 아멘.>하고 화답했다. 이어 모두가 좌정했다.
마주보고 서 있던 근위대원들이 물러가자 솔로몬이 수도원장의 명에 따라 잔칫상을 차렸다. 이 잔칫상으로 야고보와 안드레아는 건초 덩어리를 들고 나왔고, 아담은 잔치상 상석을 차지했고 하와는 나뭇잎 위에 누웠고, 카인은 쟁기를 끌고 들어왔고 아벨은 브루넬로에게 먹일 우유통을 들고 나왔고, 노아는 방주를 저으며 의기양양하게 입장했고, 아브라함은 나무 밑에 앉았고, 이사악은 교회의 황금 제단에 누웠고, 모세는 돌위에 쪼그리고 앉았고, 다니엘은 말라키아에게 안긴 채 관대 위로 올라갔고, 토비야는 침대에 누우면서 다리를 뻗었고, 요셉은 됫박 위로 몸을 던졌고, 베냐민은 보릿자루에 몸을 기대었다. 다른 귀인들도 얼마든지 있었으나 내가 보는 환상은 여기에서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다윗은 둔덕 위에 파라오는 모래 위에 있었다. (까닭을 모르는데도 나는 당연한 자리라고 생각했다.) 라자로는 탁자 위에, 예수님은 우물가에, 자캐오는 나뭇가지 위에, 마태오는 의자 위에, 라압은 그루터기 위에, 룻은 보릿짚 위에, 데클라는 창틀 위에(밖에서 창백한 아델모의 얼굴이 나타나면서, 조심하지 않으면 아래로, 그러니까 벼랑으로 떨어진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수산나는 뜰에, 유다는 묘지 한가운데에, 베드로는 보좌 위에, 야고보는 그물 위에, 엘리야는 말 안장 위에, 라헬은 짚단 위에 서 있었다. 사도 바울로는 칼을 뽑아든 채 에사오의 불평을 듣고 있었고, 욥은 똥 무더기 위에서 울고 있었고, 욥을 도우려고 리부가는 옷을, 유딧은 담요를, 하갈은 수의를, 몇몇 수련사들은 김이 무럭무럭 솟는 커다란 냄비를 들고 달려갔는데, 수련사들이 들고 가는 그 냄비 안에서 온몸에 붉은 피를 뒤집어 쓴 베난티오가 나타나 모두에게 돼지 피떡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이윽고 식당이 가득 차자 귀인들이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먹으면서 요나는 식탁에다 아주까리를 내놓았고, 이사야는 채소를, 에제키엘은 검은 딸기를, 자캐오는 후추를, 카인은 엉겅퀴를, 하와는 무화과를, 라헬은 사과를, 아나니아는 오얏만한 금강석을, 레아는 양파를, 아론은 감람을, 요셉은 달걀을, 노아는 포도를, 시므온은 복숭아를 내어놓자 예수님은 <디에스 이라에>를 노래하시면서 몹시 유쾌하신 듯이 프랑스왕 근위병의 창끝에서 해면을 뽑아내고는 이것을 쥐어짰다. 그러자 해면에서 식초가 나와 음식 접시에 골고루 뿌려졌다.
잔치가 무르익자 호르헤가 자기의 <독서용 안경>을 벗고는 떨기나무에 불을 붙였다. 이 불타는 떨기나무는, 사라가 불씨를 준비했고, 입다가 가져 왔고, 이사악이 내렸고, 요셉이 다듬은 것이었다. 야곱이 우물 뚜껑을 열고 있을 동안 다니엘은 호수 가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노아는 포도주를, 하갈은 포도주 담는 부대를, 아부라함은 송아지를 내어 왔다. 라압은 그 송아지를 기둥에 묶었고, 예수님은 밧줄을 내미셨고 엘리야는 송아지 발목에다 밧줄을 감았다. 이어 압살롬이 송아지 털을 잡아당기자, 베드로가 칼을 내밀었고, 카인은 죽였고, 헤로데는 피를 뽑아 내었고 셈은 내장과 똥을 꺼내어 버렸고, 야곱은 기름을, 몰레사돈은 소금을 뿌렸다. 그러자 안티오쿠스는 불은 지폈고, 리브가는 요리했고, 하와는 맛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담은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말라면서, 향초를 넣어 맛을 내자는 본초학자 세베리노의 들을 철썩 갈겼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빵을 잘라 물고기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야곱은 에사오가 불콩죽을 다 먹어 버렸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이사악은 구운 새께 양을 맛있게 먹었으며 요나는 고래를 잡아 삶아 먹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40일 밤낮을 금식하셨다.
이어 귀인들이 모두 들락거리며 송아지 고기의 부위와 색깔에 따라 좋아하는 고기를 고르는데, 베냐민은 큰 것만 탐했고, 마리아는 가장 맛있는 부위 한 조각만 골랐으며, 마르타는 오나가나 설거지 차지만 된다고 투덜댔다. 송아지 고기가 나뉘어졌다. 송아지는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모두 송아지 고기를 나누어 받되, 요한은 머리를 받았고, 압살롬은 골을, 아론은 혀, 삼손은 턱, 베드로는 귀, 홀로페르네스는 머리, 레아는 엉덩이, 사울은 목, 요나는 배, 토비야는 쓸개, 하와는 갈비, 마리아는 젖가슴, 엘리사벳은 음부, 모세는 꼬리. 롯은 다리, 에제키엘은 뼈를 나누어 받았다. 그 동안 예수님은 나귀를 드시었고, 성 프란체스코는 늑대, 아벨은 양, 하와는 뱀장어, 세례 요한은 메뚜기, 파라오는 문어(까닭을 모르면서도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윗은 <가뭇하지만 아름다운>(아가 1:5) 처녀를 덮치며 풍뎅이를 먹었고, 삼손은 사자의 엉덩이를 깨물었고 데릴라는 검은 털이 무성한 거미에 쫓기며 비명을 질렀다.
모두가 취한 듯했다. 미끄러지는 사람, 술통에 처박혀 다리를 허우적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너희 구세주인 물고기 수수께끼를 비롯, 무릇 잔치라는 것의 비밀이니라>, 이렇게 씌어진 서책을 내미는 예수님의 손가락은 하나같이 검었다.
벌렁 나가떨어진 아담이 트림을 시작하자 갈비뼈 사이에서 포도주가 쏟아져 나왔다. 노아는 잠결에 함을 저주했고, 홀로페르네스는 코를 골았고, 요나는 나 몰라라 하고 잠을 잤고, 베드로는 닭이 울 때까지 깨어 있었고, 예수님은 처녀를 화형에 처할 음모를 꾸미는 베르나를 기와 베르트란도 델포제토의 귓속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아버지여,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 잔이 제게서 비켜가게 하소서> 하고 외치셨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 끄덕도 않고 마시는 사람, 웃으면서 죽어 가는 사람, 죽어가면서 웃는 사람, 통째 마시는 사람, 남의 잔으로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수산나는 소의 염통 하나로는 자신의 희고 미끈한 몸을 살바토레나 레미지오에게 바칠 수  없다고 했고, 빌라도는 미친 사람처럼 식당을 돌아다니며 손씻을 물을 달라고 했고, 차양 넓은 모자를 쓴 돌치노는 빌라도에게 물을 내어주고는 낄낄거리면서 옷자락을 열어 피투성이가 된 제 <성기>를 보여주었고, 카인은 돌치노를 놀리며 아름다운 베르나르 기에게 다가가 그를 <교황 성하>라고 부르면서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우베르티노는 생명의 나무로, 체제나의 미켈레는 돈지갑으로 그를 위로했고, 마리아는 그에게 약을 뿌려 주었고, 아담은 사과를 한 입만 베어먹어 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이윽고 본관 천장이 열리면서 천국에서 로저 베이컨이 <오직 인간의 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날틀을 타고 내려왔다. 다윗은 수금을 뜯었고, 살로메는 일곱겹 너울을 쓰고 춤을 추었는데, 너울이 하나씩 내릴 때마다 각각 한 번씩 도합 일곱 번의 나팔소리가 들렸다. 나팔소리가 한 번씩 들릴 때마다 일곱 봉인이 하나씩 뜯겼다. 그러나 오로지 <태양을 입은 여자>의 봉인만은 뜯기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게 재미있는 수도원은 처음 본다고 했고, 베렝가리오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옷을 벗기고는 <항문>에다 입을 맞추었다.
이어서 춤이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목수 차림, 요한은 파수꾼 차림, 베드로는 검투사, 님롯은 사냥꾼, 유다는 밀고자, 아담은 정원사, 하와는 직녀, 카인은 도둑, 아벨은 양치기, 야곱은 어부, 안티오쿠스는 요리사, 리브가는 해녀, 몰레사돈은 바보, 마르타는 하녀, 헤로데는 미친 사람, 토비야는 의사, 요셉은 대목, 노아는 주정꾼, 이사악은 농부, 욥은 비극의 주인공, 다니엘은 재판관, 타마르는 매춘부 차림으로 나왔으며 마리아는 여왕 차림으로 나와 하인들에게 어서 술을 들여오라고 외쳤다.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춤추는 데 정신이 팔려 물을 술로 바꾸어 놓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때 수도원장이 그렇게 흥겨운 잔치를 준비했는데도 선물 갖다 바치는 사람 하나 없다면서 버럭 화를 내었다. 그러자 모두가 앞을 다투어 선물을 가져 왔다. 보물, 황소, 어린양, 사자, 낙타, 수사슴, 송아지, 암말, 태양 수레, 성 에우반의 턱, 성녀 모리몬다의 미골, 성녀 아룬다리나의 자궁, 열두 살바기 성녀 부르고지나의 목을 따서 만든 술잔, <솔로몬의 오릉보>의 모형 등 가지각색이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하찮은 선물로 낯만 가린다면서, 전갈과 일곱 나팔 이야기가 기록된 귀한 서책이 도난 당한 것으로 보아 모두가 지하 보고를 털었음에 분명한 바, 프랑스 왕의 근위대를 불러 혐의자의 몸을 뒤지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창피한 일이었다. 근위병들은 하갈의 몸에서는 색동옷, 라헬의 몸에서는 황금 인장, 데클라의 가슴에서는 은거울, 베냐민의 겨드랑에서는 병, 유딧의 몸에서는 은제 덮개, 롱기누스의 손아귀에서는 창날, 아비멜렉의 품안에서는 이웃 사람의 계집을 뒤져 내었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가뭇하나 아름다워서> 흡사 검은 고양이 같은 저 처녀의 몸에서는 검은 수탉이 나왔다는 점이었다. 모두가 처녀를 손가락질하고, 마녀, 가짜 사도라면서 죄값을 물리느라고 해코지를 하는데, 세례 요한은 처녀의 목을 베었고, 아벨은 배를 갈랐고, 아담은 추방할 걸 그랬다 했고, 느브갓네살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젖가슴에다 천궁도를 그렸고, 엘리야는 불수레에 실었고, 노아는 물에다 처박았고, 롯은 처녀의 남은 육신을 소금 기둥으로 만들었고, 수산나는 처녀의 탐욕을 몹시 꾸짖었고, 요셉은 다른 여자를 탐함으로써 처녀를 배신했고, 아나니아는 불가마에다 넣자 했고, 삼손은 밧줄로 묶었고, 바울로는 채찍으로 때렸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자고 했고, 스데파노는 돌을 던졌고, 로렌초는 석쇠에 올려 태우자 했고, 바르톨로메오는 가죽을 벗겼고, 유다는 밀고했고, 레미지오는 화형에 처했고,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을 싸잡아 부인했다. 이어, 모두가 처녀의 몸 위로 올라가, 배에다 대변을 보고 얼굴에다 방귀를 뀌고 머리에다 오줌을 누고, 가슴에다 먹은 것을 토해 내고, 머리채를 쥐어 뜯고, 엉덩이를 횃불로 지졌다. 한때 아름답던 처녀의 육신은 토막 나고 찢긴 채 지하 보고의 유리 상자와 금과 수정으로 만들어진 성보 상자 사이로 뿌려졌다. 아니, 지하 보고에 뿌려진 것은 처녀의 육신이라기보다는 지하 보고의 잔해였다는 편이 옳다. 지하 보고의 잔해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이제는 광물질이 된 처녀의 육신을 휩쓸었다. 여기에 누군가가 방언으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주문을 외자 처녀의 육신은 한 줌 먼지로 화했다. 흡사 하나의 거대한 육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용해되면서 부분 부분으로 나뉘고. 이 나뉜 것이 다시 나뉘어 지하 보고를 뒤덮는 것 같았다. 지하 보고가 이로써 빛나면서 수도사들의 뼈가 안치되어 있는 지하 납골당으로 화했다. 창조주의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육신의 실제적인 형상이 부서지면서 인간과는 전혀 별개인 무수한 은유적 형상으로 변하는 이 현상은 나에게 죽음과 파멸을 암시하는 듯했다.
잔치 손님도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그들이 가져온 예물도 볼 수 없었다. 손님들은 모두 와해된 채 미라가 되어, 그 본질을 보여주는 투명한 내용물 형태로 지하 보고를 채우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라헬은 형해로, 다니엘은 이빨로, 삼손은 턱으로, 예수님은 자색 용포의 남루로 그 자리를 채우고 잇는 것이었다. 파할 무렵에 처녀의 형장, 잔치 마당이라는 우주적인 형장으로 변한 그 현장에서 내가 본 것은 곧 파국의 현장이었다. 이 파국의 현장에서 모든 육신(탐욕스럽고, 걸신들린 듯하던 잔치 손님들의 지상적, 현세적 육신)은, 찢기고 뜯기고 고문당한 돌치노의 육신 같은 하나의 시체로 화했고, 이어 이 시체는 역겨움을 자아내리만치 현란한 보물로 화했다. 이 보물은 석화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무에 매달린 채 껍질을 벗기운 짐승처럼 힘줄과 오장 육부와 그 밖의 기관과 심지어는 얼굴까지 그대로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주름살과 살갗 무늬와, 초원의 격전지에서 얻은 흉터와 무성한 터럭과 진피와 가슴과 이제는 장밋빛으로 변한 성기까지 고스란히 덮고 있는 살갗, 젖가슴, 손톱, 발뒤축의 굳은살, 눈썹 올, 눈 송의 촉촉한 물기, 입술의 보드라운 살점, 가녀린 등뼈를 갖추고 있었다. 얼개가 일그러지지 않은 뼈는 손가락만 닿아도 가루로 바스러질 것 같았다. 속은 비고, 거죽은 양파처럼 흐물거리는 다리, 분홍빛 혈관으로 수놓인, 상제복처럼 후줄근한 살점, 조각해 놓은 듯한 오장육부의 사리, 단단한 점액질, 홍보석 같은 심장, 목걸이처럼 가지런히 열을 짓고 있는 진주 같은 치열, 분홍빛과 파란 무늬로 짜인 장식끈 같은 혀, 나란히 꽂힌 양초 같은 손가락, 뱃가죽에서 풀린 실로 누군가가 다시 꼬아 놓은 듯한 배꼽... 나는 지하 보고 구석구석에서, 유리 상자와 성보 상자 사이에서, 거대한 시신이 죽음을 당하고, 불가사의하게도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재생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 소리를 들었다. 그 거대한 시신은 바로 그날 잔칫상에 올라 능욕을 당한 바로 그 육신이었다. 그 육신이 내 눈에는 처참하게 무너진, 불가사의한 존재로 비쳤다. 그때 우베르티노 수도사가 내 어깨를 붙잡고 내 살 속으로 손톱을 박으면서 속삭였다.
'보아라. 우거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제 객담을 농하며 환희에 들떠 있는 것들이 여기에 있구나. 벌을 받고 상을 받고. 정열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지고, 무시 무종을 얻고, 스스로를 보존하고, 스스로를 정화시킬 부동의 얼음에 제 몸을 맡기고, 부패를 이김으로써 부패로부터 구원받은 존재가 여기에 있다. 무슨 까닭이냐? 이미 먼지나 광물이 되어 있다면 다시 먼지나 광물이 되는 것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까닭에서다. <죽음은 나그네의 휴식... 모든 수고의 끝이다...>'
그때 살바토레가 악마처럼 새빨간 얼굴을 하고는 지하 보고로 들어와 외쳤다.
'바보들이 아닌가! 이 거대한 리오타르드가 보이지 않아? 무엇을 두려워 해? 이 얼빠진 땡중들! 이게 바로 건락으로 만든 건락 떡이 아니더냐!'
그 순간 지하 보고는 섬광에 환하게 밝아지면서 다시 본관의 주방으로 변했다. 실제의 주방은 넓은데, 이상하게도 그 주방은 자궁 속만큼이나 비좁았다. 주방 한가운데에는 검기가 까마귀 같은 짐승 한 마리의 몸에서 돋아나온 천 개의 손이 거대한 석쇠 위에 묶여 있었다. 이 짐승은 이루 셀 수도 없이 많은 발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낚아채, 목마른 농부가 포도를 눌러 즙을 짜내듯이 쥐어짰다. 사람들은 머리가 부서지고 다리가 부러졌다. 괴수는 유황보다 냄새가 더욱 고약한 불을 토하면서 그 즙을 마셨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내가 그런 광경을 보고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나는, 살바토레 하나만 남기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먹어치운 그 <선한 악마>(나는 그렇게 생각했다)를 당당하게 직면하고 있었다. 죽을 팔자를 타고 태어난 인간의 육신과, 그 육신이 운명으로 타고난 고통과 부정을 직시할 수 있어서 그런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한층 부드러워진 불빛 아래서, 이상하게 다시 원상으로 되돌아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된다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처녀가 나에게 말했다.
'이제 그대도 보았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나는 전보다 더 아름다워질 수 있어요. 나를 보내주셔요. 가서 화형주에서 타게 해주셔요. 그래야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답니다.'
처녀는 내 앞에서 (오, 하느님, 저를 용서하소서) 다리를 벌렸다. 나는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들어가고 보니 물과 과일과 건락 떡이 열리는 나무가 무수히 있는, 황금 시대의 기름진 골짜기 같은 아름다운 동굴이었다.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잔치를 차려 주어서 고맙기 짝이 없으니 사례를 해야 하겠다면서 수도원장을 떠밀고, 걷어차고, 옷을 찢고, 바닥에 쓰러뜨리고, 일제히 남근을 꺼내어 그걸로 원장의 남근을 두들겼다. 원장은 간드러지게 웃으면서 제발 그만 하라고 애원했다. 바로 그런 자리로, 콧구멍으로 유황 연기를 뿜는 말을 타고 청빈을 따르는 수도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허리에 찬. 금화가 가득 든 돈지갑으로 이리는 양으로, 양은 이리고 바꾸어 놓고는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짐승들에게 황제의 대관식을 올려 주었다.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웃고, 입 크게 벌린 것을 후회하리라>!'
이렇게 외치시면서 가시 면류관을 휘두르셨다. 교황 요한 22세가 나와 그 난장판을 내려다보며 한바탕 욕지거리를 퍼부은 다음 탄식했다.
'이러다 무슨 변을 당할 지 모르겠구나...'
모두가 그를 비웃다가 수도원장을 앞세우고는 돼지를 끌고 송로 버섯을 캐러 나갔다. 나는 그들을 따라가다가 사부님을 발견했다. 사부님은 손에 자석을 든 채 미궁에서 나온 참이었는데 자석은 자꾸만 사부님을 북쪽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내가 소리를 질렀다.
'사부님.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저 역시 <피니스 아프리카에>라는 밀실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나이다/'
'너는 벌써 보았느니라.'
내게서 아득히 멀어지면서 사부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교회 안에서는 장례 미사곡의 마지막 부분이 끝나고 있었다.
눈물이 홍수를 이루는 날
처형당할 자들이
잿더미에서 소생한다
하느님. 저희를 용서하소서.
자비로우신 예수여
저들을 편케 하소서.
무릇 환상 보기라고 하는 것이 다 그러하듯이 내가 환상을 본 것도 <디에스 이라에>가 불리어질 동안의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하기야 <아멘>을 외칠 지극히 짧은 순간에도 환상 보기를 경험할 수 있다는 말도 있기는 하다.
3시과 이후
가물가물한 정신을 가누며 나는 교회 박으로 나왔다. 문 앞에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떠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부님도 황실의 사절단이 그들을 배웅하러 교회 앞으로 내려와 있었다.
나는 사부님 곁으로 갔다. 형제들 간에 다정한 포옹이 오고갔다. 나는 사부님에게 아비뇽 교황청 쪽 사람들이 피의자들과 함께 떠나는 것은 언제냐고 물어 보았다. 사부님은 약 한 시간 반 전에 떠났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꿈을 꾸고 있을 시각일 수도 있었다.
한동안 나는 망연 자실,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차라리 잘된 셈이었다. 현장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레미지오, 살바토레 그리고 그 여자가 멀리, 또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로 끌려가는 걸 보면서 견딜 수 있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꿈이 안긴 충격과 그들이 수도원을 떠났다는 소식이 안긴 이중의 충격 때문에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마비라도 되어버린 것 같았다.
프란체스코회 소형제 수도사들은 본관을 지나 정문을 통하여 수도원을 나갔다. 사부님과 나는 교회 앞에 남아 있었다. 이유야 달랐겠지만, 사부님도 나처럼 울적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부님께 꿈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환상은 지극히 잡다한 것, 지극히 비논리적인 것이었지만 나는 되도록 이면 영상별로, 행위별로, 그리고 오고간 말의 낱말별로 정확하게 혹은 간명하게 기억하려고 애썼다. 나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사부님에게 전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꿈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눈 밝은 사람에게 예언적 단서를 제공할 수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부님이 잠자코 듣고 있다가 나에게 물었다.
'그래, 너는 네가 꾼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느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여쭈웠을 뿐입니다.'
'오냐, 그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일러주고 싶은 것은. 네가 나에게 말한 그 꿈 이야기가 사실은 어디엔가 기록되어 있는 것인데, 그걸 아느냐는 말이다. 너는 네가 언젠가 접한 적이 있는 영상에다가 어제오늘에 네가 겪은 일, 만난 사람에 대한 인상, 네 어린 시절에 학교나 수도원에서 읽고 듣고 배운 것들을 비벼 넣은 것이다. 네 어린 시절에 학교나 수도원에서 읽은 것이라면 <키프리아누스의 만찬>(교황 요한 8세를 위로하기 위해 요한 디아코누스가 9세기에 쓴 이 책은, 갈릴레아 땅 가나를 다스리던 요엘 왕의 결혼식에 신.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손님으로 모인 것으로 가정하고 쓴 이야기로 엮어져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성서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나 성격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잔치는 손님들이 각자 온 데로 떠나는 대목에서 끝난다.)일 게다.'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제서야 기억이 되살아났다. 사부님 말씀 그대로였다. 제목을 잊고 있었던 것일 뿐, 나이 든 수도사나 싱거운 수도사들이, 수도원에 산문이나 운문의 형태로 구전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두고 웃고 떠들어대던 것까지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책은 이른바 <수도원의 농담>에 자주 오르내리던 유대교 전통에 속하는 이야깃거리에 속했다. 필사본 자체는, 까다롭고 엄격한 수도사들에 의해 분서, 혹은 파기된 지 오래였으나 싱겁고 호기심 많은 수도사들이 이를 축역본이나 개역본으로 개작, 은밀히 감추고 다니며 읽고 외고 했으니, 이 책이 귓속말로 전해지지 않는 수도원은 없을 정도였다. 우스갯소리 뒤에 도덕적 진실이 깃들어 있을 수 있다면서 정색을 하고 이를 베끼는 수도사도 있었고, 이를 통해 신성한 성서 역사를 쉬 기억하게 해준다고 주장하면서 이 이야기를 은근히 유포시키는 수도사도 있었다. 교황 요한 8세의 재임 기간에 씌어졌다는 운문 서판에는, <나는 농담을 좋아하거니와, 교황 요한이시여, 나의 농담을 들으소서. 원하신다면 웃는 것도 가합니다>라는 해제가 달려 있다고 한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대머리 샤를르 마뉴 황제는, 만찬석에 모인 고승들을 즐겁게 해줄 목적으로 이 이야기를 희극적인 성극으로 번안하여 무대에 올린 적도 있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한두 구절을 입에 올렸다고 도반들과 함께 노수도사들로부터 얼마나 호된 꾸중을 들었던가? 멜크의 어느 연세 드신 수도사는, 키프리아누스같이 고덕하신 양반이, 거룩한 순교자답지 않게 어떻게, 이교도나 무신론자들의 할 짓인, 성서의 개작 시문 만들기로 신성을 모독할 리 있겠느냐고 주장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저러나 나는 몇 해 동안 그때 읽고 외고 하던 그 우스갯소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서책의 영상이 내 꿈속에 그토록 생생하게 나타났던 것일까? 나는, 꿈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의 소식이거나 아니면 하루 중에 있었던 일에 대한 종작없는 기억의 불합리한 재생 현상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부터 나는, 사람은 읽은 서책의 내용을 꿈으로 꿀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남의 꿈을 대신해서 꿀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부님이 나에게 설명했다.
'꿈을 제대로 해석하자면 아르테미도로스(터키 태생의 그리스 해몽가)가 되어야 할테지만, 내가 보기에 네 꿈만은 아르테미도로스가 아니라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구나. 가엾게도 너는 요 며칠간,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말하자면 세상이 온통 뒤집혀 버렸기 때문에 생긴 듯한 일련의 사건을 경험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의 네 꿈자리에,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듯한 우스꽝스러운 영상이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펼쳐진 것이다. 너는 <코에나 키프리아니>에 대한 기억에다, 최근의 기억, 최근에 네가 느낀 불안과 공포를 되는 대로 버무려 넣었던 게다. 아델모의 난외 채식에서 너는 아마 세상의 질서가 온통 역전되어 버린 데서 벌어진 한판의 대단한 사육제라도 떠올린 모양이구나. 그러나 <코에나 키프리아니>의 묘사가 그렇듯이, 사람이란 자기가 했던 상상을 꿈속에서 영상화하기도 한다. 결국 너는 꿈속에서 너 자신에게, 어느 것이 진짜 세계이고 어느 것이 가짜 세계이냐, 바로 서는 것과 거꾸로 서는 것, 삶과 죽음을 구별해 낼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네 꿈은 네가 배운 바를 확신으로 소화하지 못한 데사 온 것이야.'
'제 꿈은 그렇지 않습니다. 꿈이 그러할진대 어떻게 하늘의 계시가 꿈을 통해 내려질 수 있습니까?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꿈은 결국 악마의 장난 아닙니까? 악마의 장난이 진리를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펼쳐져 있는 진리가 어디 모자라더냐? 꿈이 우리에게 전하는 진리에까지 눈을 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이거야말로 가짜 그리스도 올 날이 임박했다는 증거 아니겠느냐? 허나, 내가 보기에 네 꿈만은 대단한 진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너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다. 남의 꿈을 이용하는 게 해서는 안 될 천박한 짓인 것을 내 모르는 바 아니다만, 내가 네 꿈을 이용해서 내 가정을 증명해 내더라도 허물하지 말아라. 아무래도 꿈을 꿀 당시의 네 영혼은, 요 엿새 동안의 어떤 순간의 내 영혼보다 진실에 접근해 있었던 것 같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신지요'
'내 말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겠다만 말만은 진심으로 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네 꿈의 어떤 부분은 내가 세운 가정 중의 하나와 일치하고 있다. 어쨌든 네가 나를 크게 돕게 될 모양이구나.'
'사부님께서 관심하시는 것이 제 꿈의 어떤 부분인지요? 모든 꿈이 다 그렇듯이, 제가 보기에는 제 꿈 역시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모든 꿈이 그렇고 환상이 그렇듯이, 네 꿈 역시 이치에 가까이 닿아 있다. 꿈이라고 하는 것은 비유, 혹은 상징으로 해독되어야 하는 것이야.'
'성서처럼 말씀이십니까?'
'꿈은 곧 성서이다. 그리고 성서의 많은 기록이 곧 꿈 이야기지...'
6시과
사부님은 문서 사자실로 다시 올라가서는, 베노로부터 장서 목록을 받아 빠른 속도로 넘겼다.
'이쯤에서 나올텐데... 한 시간 전에 보았거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목록을 넘기다 문득 손길을 멈추고 나에게 보여 주면서 속삭였다.
'여기에 있다. 서명을 읽어 보아라.'
서책은 한 권인데 제목이 네 개인 것으로 보아 한 권에 네 책을 합본한 것인 모양이었다. 목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아랍어. 어느 바보의 어록. 2. 시리아어. 연금술에 관한 이집트의 소논문. 3. 천국에 있는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의 만찬에 대한 알코프리바의 설명. 4. 첫 음절을 빼버린 동정녀의 음란죄와 창부의 사랑에 관한 책>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우리가 찾던 서책이다. 네 꿈이 나의 상상력을 촉발했기 때문에 나는 이 목록을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게다...'
사부님은 목록의 앞 뒤 쪽을 재빨리 일별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실제로 말이다. 내가 지금껏 생각해 왔고 찾아오던 서책이 바로 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이게 아니다. 여길 보아라. 너, 서판 가지고 왔지? 좋다. 계산을 좀 뽑아 보자, 가능한 한 어제 알리나르도로부터 들은 이야기, 오늘 아침에 니콜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정확하게 기억해 낼 필요가 잇다. 니콜라는, 자기가 이 수도원에 온 게 30년 전이라고 했다. 니콜라가 왔을 당시 수도원 원장이 바로 지금의 원장인데, 이 원장의 전임 원장은 리미니 사람 파올로였다고 했다. 맞느냐? 자, 그렇다면 수도원장 승계가 이루어진 것은 1290년 전후가 되겠구나. 그러나 이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니콜라는 또, 자기가 여기에 왔을 당시 보비오 사람 로베르토가 장서관 사서로 있더라고 했다. 내 말 맞느냐? 그렇다면 로베르토가 죽고 말라키아가 사서직을 승계한 것은 금세기 초의 일이 아니냐? 서판에 잘 기록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니콜라가 오기 전에는, 리미니 사람 파올로가 사서로 재직하던 시기가 있다. 파올로가 사서로 재직한 기간은 어느 정도 될 것 같으냐? 들은 바 없지? 수도원 일지를 조사해 보면 될 테지만, 이 일지는 원장 손에 있을 게다. 보여 달라고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구나. 자, 그러면 파올로가 사서직을 승계한 것을 60년 쯤으로 가정해 보자. 기록해 두도록 해! 이렇게 가정하는 데엔 까닭이 있다. 자, 생각해보자. 알리나르도는, 자기 몫이던 사서 자리가 남에게 돌아간 50년 전의 일을 불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알리나르도의 원망의 대상이 된 사람은 리미니 사람 파올로였던 것일까?'
'보비오 사람 로베르토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지. 이 목록을 자세히 보아라. 너도 알다시피 이 목록의 서명은 서책이 입수된 순서로 작성되어 있다. 이것을 작성한 사람은 그럼 누굴까? 물론 장서관 사서였을 테지. 따라서 이 목록의 필적을 조사해 보면 사서직이 승계된 순서를 알아 낼 수 있다. 자, 목록을 끝에서부터 살펴보자. 보아라. 마지막 목록은 말라키아의 필적으로 되어 있지? 말라키아가 쓴 것은 최근 30년 간, 수도원이 서책을 별로 들여오지 않았다는 증거일 게다. 목록을 이렇게 거꾸로 넘기다 보면, 떨리는 손으로 쓴 듯한 필적이 나온다. 왜? 로베르토는 당시 병치레를 심하게 했다니까... 로베르토가 사서로 오래 재임하지 못했을 것이다. 잘 보아라. 다음 목록에는 필체가 좋고 꼼꼼한 필적이 나온다. 조금 전에 내가 살펴본 서명도 바로 이 필적으로 씌어져 있다. 글씨가 인상적이지? 리미니 사람 파올로는 공부를 열심히 했던 모양이다. 파올로가 젊은 나이에 수도원장 자리에 올랐다고 하던 니콜라스의 말 기억나느냐? 이 공부 벌레는 몇 년 동안 엄청난 양의 서책을 이 수도원 장서관으로 들여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양반에게는 이상한 습벽이 있었다지? 글씨 쓸 줄을 몰라 <아바스 아르라피쿠스>, 즉 <글씨 못 쓰는 원장>이라고 불렸다지 않더냐? 하면 이 글씨는 누가 썼을까? 파올로의 보조 사서가 썼을 테지. 그렇다면 이 보조 사서가 후일 사서가 되어 계속해서 목록을 작성하지 않았겠느냐? 같은 글씨체로 씌어진 목록이 여러 쪽 계속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파올로와 로베르토 사이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에 임명된 다른 사서가 한 사람 있다. 따라서 이 사서는 늙은 나이게 파올로의 뒤를 이어 사서가 되기로 내정되어 있던 알리나르도의 경쟁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의 인물이 죽자 알리나르도의 기대, 혹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로베르토가 사서 자리를 승계한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여기에 있는 필적이 무명 사서의 필적이라고 하더라도, 파올로 역시 처음에는 목록을 작성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서관이 구입한 서책 목록에는 교황의 회칙이나 교서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문서에는 정확한 날짜가 기재되어 있다. 보아라. 보니파치우스 7세의 회칙 <피르마 카우텔라>(엄중한 경고)에는 1296년이라는 일부가 명시되어 있지 않느냐? 따라서 이 문서는 1296년 이전에 입수되었을 수는 없는 일이고, 오래 뒤에 이 수도원으로 들어왔다고 볼 수도 없는 일이다. 바로 이런 회칙이 목록의 작성 연도를 가늠하는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게다. 따라서 리미니 사람 파올로는 1265년에 사서직을 맡았다가 1275년에는 원장직을 승계했다. 목록을 잘 보아라. 보비오의 로베르토가 아닌 사람의 글씨가 1265년에서 1285년까지의 목록에 들어 있다. 너도 알겠지만, 10년이라는 세월이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부님께서는 10년이라는 세월이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시는지요?'
'몰라. 몇 가지 전제가 가능하다는 것일 뿐.'
사부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베노에게 다가갔다. 베노는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말라키아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보조 사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베노가 전날 우리에게 했던 짓을 잊었을 리 없는 사부님이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을 걸었다.
'사서 형제여. 막강한 자리에 앉으셔서 몹시 분망하실 텐데, 시생의 질문을 받으실 틈이 나시겠는지요...'
사부님의 비야냥거림이 베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 것 같았다. 사부님은 베노의 기가 꺾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델모와 다른 수도사들이 수수께끼 이야기를 했다는 날, 베렝가리오가 처음으로 <피니스 아프리카에>, 즉<아프리카의 끝>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지? 혹 <코에나 키프리아니>, 즉 <키프리아누스의 만찬>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던가?'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좌중을 웃기는 재담 수수께끼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베난티오가 <코에나 키프리아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말라키아는 버럭 화를 내고 그런 상스러운 서책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면서 원장께서 금서로 지정하신 서책이니까 범접할 생각도 말라고 했습니다.'
'원장께서 몸소 말인가? 재미있군... 고맙네, 베노.'
'잠깐 수도사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부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노는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고는, 문서 사자실을 빠져나가 주방으로 통하는 계단층까지 내려갔다. 문서 사자실의 다른 수도사들이 들으면 안되는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계단층에서의 베노는 문서 사자실의 베노가 아니었다.
'윌리엄 수도사님... 무섭습니다. 그자들이 말라키아를 죽였습니다. 이제 그 서책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게다가 이탈리아 인들 패거리가 저를 미워합니다... 이탈리아 인들은, 이번에도 역시 외국인 사서 조수가 들어앉게 되었다고 불만이 대단한 모양입니다... 저는 다른 수도사들이 살해된 것과 장서관 서책 혹은 사서직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 알리나르도 노수도사가 말라키아를 몹시 증오했다는 말씀은 드리지 못했군요. 진작 말씀드렸어야 하는 건데...'
'옛날, 알리나르도 대신에 사서직을 승계한 수도사가 누구였는지 아느냐?'
'저는 모릅니다. 알리나르도 노수도사 이야기, 언제나 구름 잡는 이야기 같아서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게다가 아득한 옛날 이야깁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쯤은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도사님, 알리나르도 노수도사의 주변에 있는 이탈리아 인들은 말라키아를 허수아비라고 불렀답니다...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수도원장을 배경으로 장서관 사서 노릇을 하는 사람이라고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이 반목하는 두 집단, 즉 이탈리아 인과 외국인 집단의 사이에 끼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걸 오늘 아침에야 알았습니다. 수도사님, 이탈리아는 음모의 땅입니다... 교황도 능히 독살할 수 있는 것이 이탈리아 인들인데...저같은 것의 운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까지만 해도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저 문제의 서책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말라키아는 서책이 발견되자마자 줄었습니다. 여기에서 도망쳐야겠습니다. 도망쳐야 합니다. 아니, 도망치겠습니다. 제발 저에게 길을 좀 일러주십시오.'
'정신차려, 이 친구야! 나에게 길을 일러달라고? 어젯밤만 하더라도 이 세상이라도 얻은 것처럼 뽐내던 네가 아니냐? 말라키아에게 서책을 건네준 건 바로 너야. 말라키아는 따라서 네가 죽인 것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 말에 바른 대로 대답해! 서책을 손에 넣었을 때, 그걸 뒤적거리면서 읽었느냐? 읽었다면 너는 왜 죽지 않아?'
'모르겠습니다.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건 맹세할 수 있습니다...아니, 세베리노의 실험실에서 가지고 나왔으니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을 아닙니다. 그러나 펴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걸 제 법의 속에 감추고 나와 제 방 침상 밑에다 숨겼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말라키아가 그게 제 수중에 있다는 걸 알고 있더군요. 그래서 바로 문서 사자실로 가져 갔고, 말라키아가 보조 사서 자리를 준다고 꾀길래 그걸 말라키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바른 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 서책을 펴보지 않았다고 우길 테냐?'
'네...숨기기 전에 펴 보았습니다. 첫 부분은 아랍 어, 그 다음 부분은 시리아 어인 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은 라틴 어,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 어였습니다.'
나는 베노의 말을 들으면서 목록 첫머리의 약자를 떠올렸다. 목록에 실려 있는 네 책 중 첫 책은 <아르>, 즉 아랍어, 두 번째 책은 <시르>, 즉 시리아 어...그렇다면 목록에서 우리가 확인한 서책과, 베노가 말하는 서책은 일치하는 것이었다.
사부님이 다그쳤다.
'너는 그 서책에 손을 대었는데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 서책에 손을 댄다고 해서 다 죽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리스 어 부분도 보았느냐? 읽어 보았느냐는 말이야.'
'대략 훑어보았습니다만 제목이 없었다는 것 정도만 기억납니다... 앞부분 일부가 유실된 것 같았습니다만...'
'그래서<리베르 아체팔루스>, 즉<서두가 유실된 책이었던 것이야.'
'첫 쪽을 읽어 보려고 했습니다만, 저의 그리스 어 밑천은 별로 든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이 그리스 어 부분과 관련된 다른 부분을 훑어 보았습니다. 다 읽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지... 그렇습니다. 서책의 각 쪽은 모두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쪽 한 쪽을 떼어 볼 수 없었죠. 네, 양피지가 여느 양피지에 비해 굉장히 부드러웠습니다. 그러나 첫 장은 썩어 있어서, 손을 대자 바스러져 버리더군요. 이상한 책이었습니다.'
'<이상하다>...? 세베리노가 쓰던 것과 같은 말이군.'
'양피지가 도무지 양피지 같이 않았습니다. 양피지라기보다는 천 같았는데요... 뭐라고 할 까... 아주 고급 천 같았습니다.'
'<카르타 렌테아>, 즉 <아마지>라는 것이야. 다른 데서는 본 적이 없나?'
'듣기는 했습니다만 본 적은 없습니다. 값이 아주 비싸고, 다루기가 몹시 까다로워서 쓰이는 일이 아주 적다고 들었습니다. 아랍 인들이 만든다는 말이 맞습니까?'
'아랍인들이 처음 만들기는 했지. 허나 지금은 이탈리아의 파브리노에서도 만들어지고 있어. 아니, 아드소... 그래서 그랬구나!'
사부님의 눈에서 섬광이 일었다.
'...그래서 그랬어. 세상에! 이제 알았어. 이봐, 베노. 고맙네. 암... 이 장서관에 <카트라 린테아>가 귀할 수밖에. 최근의 원고나 서책은 거의 들어온 일이 없으니... 사람들은 이 종이가 양피지처럼 질기지 못하니까 보관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기피한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 이곳 사람들은 양피지에 쓰인 필사 원고를 청동 같은 유물로 남기고 싶어하니까. 좋아, 베노. 잘있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적어도 네가 죽을 위험은 없는 것 같으니까.'
우리는 베노를 남겨 두고 문서 사자실을 나왔다. 베노는 어느 정도 안심하는 것 같았다.
수도원장은 식당에 있었다. 사부님이 그에게 다가가, 긴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달리 빠져 나갈 만한 구멍을 찾지 못한 원장은, 잠시 후 자기 공관에서 만나겠다고 말했다.
9시과
원장의 공관은 집회소 뒤쪽에 있었다. 사부님과 원장이 만난 접객실 창으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하늘이 맑았던 덕분에 교회와 거대한 본관 건물이 선명하게 보였다.
창가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한동안 서 있던 원장이 엄숙한 얼굴로 본관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방주를 만들던 그 황금률에 따라 지어진 참으로 놀라운 성채가 아닌가요? 본관을 보세요. 3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3>은 삼위일체, 아브라함을 찾아갔던 천사들의 숫자,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보냈던 날 수, 예수님과 라자로가 무덤에서 함께 보낸 날 수가 아닙니까? 뿐인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세 번, 쓴 잔을 거두어 주실 것을 기도하셨고, 세 번이나 사도들을 피하여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부활하신 뒤에는 세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었습니다. 신학의 덕목도 역시 셋이니... <3>은 참으로 신성한 숫자올습니다. 영혼도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고, 천사와 인간과 악마라고 하는, 지적인 존재의 등급 또한 셋입니다. 소리에도 <복스>, <플라투스>, <풀수스>(복스는 모음을 중심으로 하는 소리, 플라투스는 숨결소리, 풀수스는 그 밖의 소리를 지칭한다.) 이렇게 세 가지가 있는가 하면 인류의 역사도 전율법 시대, 율법 시대, 후율법 시대, 이렇게 세 시대로 나뉩니다.'
'신성한 것과의 관계는 가히 놀라울 만합니다.'
'사각형의 <4>라는 수 또한 정신적인 것에 상관하는 데 모자람이 없으니 기본 방위가 동, 서, 남, 북. 이렇게 넷이요, 계절이 넷이요, 사대 또한 지, 수, 화, 풍 이렇게 넷이요, 날씨를 나타내는 온냉습건이 넷이요, 사람의 한 살이를 나타내는 생장성노가 넷이요, 천상, 지상, 공중, 수생 이렇게 해서 동물의 가지 수 또한 넷이요, 무지개를 이루는 색깔이 넷이요, 윤년 오기를 기다리는 햇수 또한 넷이니, 이 아니 오묘한 일입니까?'
사부님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술 더 떠서 응수했다.
'과연 그렇습니다. <3>에다 <4>를 더하면 <7>이 되니, 이는 천상적인 신비의 수가 되고, <3>에다 <4>를 곱하면 <12>가 되니, 이는 지상적인 사도의 숫자가 됩니다. 그리고 <12>에다 <12>를 곱하면 <144>가 되니 이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실 선민의 수가 되지 않습니까...'
이상적인 숫자의 세계에 대한 사부님의 이 해박한 지식에 원장은 감히 말을 보태지 못했다. 덕분에 사부님은 원장의 너스레를 말끔히 걷고 본론으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은 그렇고, 최근 귀수도원의 불행한 사태에 대한 이야기가 없을 수 없겠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나 나름대로 생각한 바도 있고요.'
사부님의 이 말에, 창 밖으로 눈길을 주고 있던 원장이 등을 돌렸다. 그는 험악한 얼굴로 사부님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암요, 너무 오래, 너무 많이 생각했으니 생각한 바가 없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윌리엄 형제, 나는 고백컨대 형제에게 훨씬 많은 것, 큰 것을 기대해 왔어요. 수도사께서 여기에 오신 지 벌써 엿새나 되었습니다. 그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요? 아델모를 제하고도 수도사 형제가 넷이나 죽었고 둘이 이단 피의자로 심문관들 손에 끌려갔습니다. 사필귀정이겠으나, 심문관들이 기왕에 있었던 수도원 사건에 눈을 대지 않았던들 우리는 이런 치욕은 면할 수 있었을 겝니다. 결국 나는 모임을 주선하고도 바로 그 모임에서 낯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일이 수도원 내부의 사건 때문입니다.'
사부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로써 사부님은 원장의 말에 일리가 없지 않음을 인정한 셈이었다.
한동안 가만히 있던 사부님이 대꾸했다.
'원장의 기대에 내가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하지요. 이 일련의 사건이 수도사들 간의 감정적 앙금이나 은원 관계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곳, 말하자면 이 수도원의 역사에다 뿌리를 대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원장이 거북살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사부님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무슨 뜻이지요? 사건의 열쇠를 저 식료계 레미지오 혼자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압니다. 이 일이 다른 일과 뒤엉켜 있다는 것은 나도 압니다. 허나 그 다른 일이 바로 문젭니다. 나 역시 알고 있으나 드러내어 놓고는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걸 분명하게 밝혔으니, 이제 수도사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원장께서는, 고해 성사 이야기를 하시는데요...'
사부님의 이 말에 원장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사부님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원장께서는, 내가 그걸 알고 있는지, 혹은 모르고 있는지 궁금할 테지요. 그렇다면 말씀드리지요, 베렝가리오와 아델모, 그리고 베렝가리오와 말라키아의 관계가 마뜩치 못합니다. 이건 수도원 전체가 다 아는 것이라서 새삼스럽게 쉬쉬할 것도 못되는 일이지요.'
원장이 얼굴을 붉히면서 사부님의 말을 막았다.
'그런 이야기를 꼭 이 어린 시자 앞에서 해야 할까요? 그리고 사절 회의가 끝났으니 이제 이 시자는 더 이상 필사 서기로 대동하실 필요는 없을 테지요. 얘야, 너는 나가 있거라.'
원장이 나에게 명했다. 나는 몹시 무참해진 채 자리를 떴다. 그러나 호기심 때문에 그냥 물러날 수 없었다. 나는 반쯤 열린 현관문 뒤에 쪼그리고 앉았다. 두 분의 말소리가 충분히 들릴 만한 거리였다.
먼저 사부님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끄러운 관계들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고통스러운 사건과 거의 무관할 것입니다. 그 열쇠는 원장도 짐작하듯이 다른 곳에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일련의 사건은 <피니스 아프리카에>, 즉 <아프리카의 끝>이라는 밀실에 있던 한 권의 서책과 관계가 있습니다. 원장께서도 아시겠지만, 이 사건의 범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문제의 서책은 말라키아가 애쓴 덕분에 지금 <피니스 아프리카에>라는 이름의 밀실에 돌아가 있습니다.'
수도원장은 약간 충격을 받은 듯 잠깐 머뭇거리고 있다가, 불의의 공격에 기선을 잡힌 사람에게 어울리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대체 <피니스 아프리카에>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그렇게 일렀는데도 기어이 장서관에 들어가시고 말았다는 말입니까?'
사부님은 사실대로 대답해야 했다. 그러나 사실대로 대답할 경우 가만히 있을 수도원장이 아니었다. 사부님은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역시 그답게 교묘한 말놀이로 원장의 예봉을 피했다.
'원장께서는, 내가 여기에 오던 날 그러지 않았습니까? 보지 않고도 <브루넬로>를 그처럼 소상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라면, 들어가 보지 않고도 장서관을 훤히 꿰뚫어 낼 것이라고요.'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야기를 다 하자면 깁니다. 허나 이 일련의 사건이, 공개가 바람직하지 못한 어떤 물건을 두고 생긴 것임은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을 손에 넣으려는 사람과,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 사이에서 생긴 갈등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정당한 방법으로든 부당한 방법으로든 장서관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원장이 바로 그 한 사람입니다.'
'나를 이 사건에다 엮어 넣는 겁니까? 나를, 이 나를 말입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여기에는, 어떤 사물에 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과 아무에게도 알리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최근에 알아낸 것 중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는 그 문제의 물건의 서책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원장께서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 이제, 문제의 그 장서관외 반출이 금지된 서책 이야기, 특히 장서관에 대해 원장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셔야 합니다.'
'여기엔 한기가 도는군요, 밖으로 나가시지요.'
원장의 말이었다.
나는 재빨리 문 앞에서 자리를 옮겨 계단 입구에서 기다렸다. 원장이 나를 보고는 웃었다.
'요 며칠 동안에 듣고 본 일로 이 풋내기 수도사가 얼마나 상심했을꼬. 이리 오너라. 너무 그렇게 기가 죽어 있을 것은 없다. 네 사부께서 이 사건을 실제 이상으로 크게 보신 것 같구나.'
이러면서 그가 한 손을 쳐들었다. 수도원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반지가 영롱하게 빛났다. 반지에 박힌 갖가지 보석은 각기 다른 빛깔로 햇빛을 반사했다. 원장의 말은 계속되었다.
'너 이게 무엇인지 모르지 않을 테지? 내 권위의 상징이자 내가 진 짐의 표상이다. 이것은 그냥 장식이 아니라 내가 지키는 하느님 말씀의 빛나는 정수인 것이야...'
그는 왼손으로, 반지 위의 갖가지 보석을, 자연과 인간의 기술이 빚어 낸 다채로운 보물의 표본 상자를 방불케 하는 보석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것은 겸양의 거울인 자석영이다. 이 자석영은 성 마태오의 고귀한 품성과 그 온유함을 나타내는 보석이기도하다. 그리고 이 옥수는 자비를 나타내는 보석으로 성 요셉과 성 야고보의 상징이고, 또 이것은 신앙을 약속하는 성 베드로의 보석인 벽옥, 이것은 성 바르톨로메오를 나타내는 순교의 상징 마노, 이것은 성 안드레아와 성 바울로의 보석인 희망과 명상의 상징 사파이어, 이것은 성 토마를 나타내는 건전한 교리와 배움과 장수의 상징인 홍주석이다... 보석 세공의 장인들이 아론의 가슴받이와 사도들의 복음서에 나오는 천상적 예루살렘에 대한 기록에서 고증해 낸 보석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는 모를 것이다. 시온의 벽은, 모세의 형 아론의 가슴받이에 붙어 있던 벽옥으로 치장되어 있다고 한다.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는 석류석, 마노, 줄마노가 <요한의 묵시록>에서는 옥수, 줄마노, 홍옥수, 그리고 풍신자석으로 바뀐다...'
그는 빛으로 나를 현혹시키려는 듯이 반지를 움직여 그 영롱한 반사광을 내 눈으로 쏘았다.
'...들어 보아라, 아름답기 그지없는 보석사를... 보석은 사도들은 물론 우리의 위대한 교부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침착함과 인내를 나타내는 루비를 보아라... 그러나 석류석은 자비를 상징한다. 남옥은 성 부루노를 상징하는데, 이 남옥의 순수한 광채는 바로 그분의 신 적인 깊이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터키 옥은 환희, 줄마노는 치품 천사, 자수정은 지천사, 벽옥은 옥좌, 귀감람석은 지배, 사파이어는 덕목, 마노는 권능, 녹조석은 권천사, 루비는 대천사, 에메랄드는 여느 천사들을 상징한다. 보석사는 참으로 다양하니, 각 보석은 그 해석의 방법에 따라 모양에 따라 몇 가지 진리를 동시에 나타내기도 한다. 허나 그 해석의 방법이나 모양을 누가 감히 이렇다 저렇다 정의할 수 있으랴. 우리는 그저 보석이 가르치는 바를 배우고 감득할 뿐이다. 보석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만물 가운데서도 가장 믿을 만한 해석의 주체이며 특권의 은혜를 한 몸에 받은, 따라서 오로지 거룩함으로만 빛나는 권능일 것이다. 달리 어떻게 세상이 우리 죄인들의 눈앞으로 펼쳐 내는 수많은 기호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악마가 던지는 유혹을 피할 수 있을까 보냐, 유념해 두어라. 성 힐데가르트가 일찍이 일렀듯이, 악마는 그래서 보석사를 싫어하는 게다. 사악한 자는 보석으로부터, 거룩함과는 다른 의미, 혹은 지식에 투사된 전언만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사악한 자, 곧 우리의 원수되는 자들은 보석의 영롱한 빛에서, 파멸하기 전에 저 자신이 지녔던 소유물을 떠올리기 때문에 그 빛이 저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불길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한사코 보석을 파기하고 싶어한다...'
그는 나에게 접구를 허락하는 뜻으로 그 보석 반지를 낀 손을 내밀었다. 내가 무릎을 끓자 그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네가 여기에서 듣고 본 것은 모두 잊거라, 그것이 참된 것이 아님은 의심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너는 참으로 운이 좋아 많은 교단 가운데서도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교단에 들어온 수련사이고, 나는 네가 속한 것과 같은 교단에 속하는 이 수도원의 원장이다. 따라서 너는 내 손 안에 있다. 그러니 내 명에 따라야 한다. 자, 영원히 네 입을 다물겠다고 서원하거라...'
사부님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나는 원장 앞에서, 영원히 입을 봉하겠다고 서원을 세웠을 터이고, 그랬더라면 독자 여러분은 나의 이 충실한 연대기를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부님은 이 대목에서 본능적인 거부 반응을 보여 주었다. 물론 나의 서원을 저지하기 위해 나선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부님은, 나에게 암시를 걸고 있는 원장의 행위를 역겹게 여긴 나머지 불쑥 그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던 것 같다.
'원정, 이 일과 그 아이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나는 원장께 질문을 던졌고, 위험을 경고했고, 장서관의 비밀과 관련된 수도사의 이름을 가르쳐 줄 것을 요청했어요... 자, 어떻습니까? 나도 그 반지에 입을 맞추고, 내가 알아낸 것, 내가 의혹을 품어온 것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할까요?'
원장이 참으로 딱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비아냥거렸다.
'아, 드디어 그렇게 나오시는군. 하기야 나도, 운수 행각승에 불과한 그대가 우리 교단의 아름다운 문화를 이해할 것으로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어요, 아울러, 묵언과 비밀과 자애의 신비... 그렇습니다. 자애와 명예와 우리 교단의 자랑인 묵언계에 대하여 삼가는 마음을 가져줄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이제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을 이 교단의 수도원장인 내 앞에서 하고 있군요, 연쇄 살인의 동기가 되었다는 금서는 무엇이고, 나와 비밀을 나누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또 누구를 가리켜 하는 말이지요? 참으로 터무니없는 무고가 아니고 무엇인가요? 하고 싶으면 그대 입으로 말하세요만,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겝니다. 혹 그대의 그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추리가 옳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은 내 손바닥, 나의 사법권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따라서 앞으로는 내가 조사합니다. 나에게는 조사할 방법이 있고 권위가 있어요. 똑똑한 사람, 믿을 만한 형제라고 해서, 문외인인 그대에게 조사를 맡긴 것이 나의 불찰입니다. 오직 나만이 책임질 수 있고 나만이 책임져야 하는 사건인데, 내가 무엇을 잘못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내게 말했듯이 내 뜻을 이해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내 입으로 말하면 고해 성사와 관련된 엄숙한 서원을 어기게 되는 것을 염려하여, 누군가가, 내가 고해 성사를 통해서 들은 바를 대신 알라 내기를 바랬습니다. 아,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망이었던가요? 그런데 그대는 이제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군요? 그대가 해온 일, 혹은 하려던 일에 대해 사의를 표합니다. 교황청과 황실 사절단의 만남이 끝났으니 이제 그대가 이곳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는 끝났습니다. 황제의 궁정에서도 그대를 몹시 기다리고 있겠지요. 누가 감히 그대 같은 거물을 주저앉힐 수 있으리까. 따라서 이제 이 수도원을 떠나도 좋습니다. 허나 오늘은 이미 늦었군요. 갈 길이 적지 않게 험할 터인데 그대를 야밤에 떠나게 하고 싶지는 않군요. 내일 아침 일찍 떠나도록 하세요. 고마워하실 것은 없어요. 그대 같은 분을 모셔 형제로 환대할 수 있었으니 나에게야 이 아니 광영이겠습니까? 지금 물러가셔서 이 수련사와 행장을 꾸리셔도 좋습니다. 내일 새벽에 다시 작별 인사를 드리기로 하지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조사는 이쯤에서 그만두셔도 좋습니다. 바라건대 우리 수도사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 이제 물러가도 좋습니다.'
그것은 협조 관계의 해제라기보다는 숫제 추방이었다. 사부님은 순순히 원장의 말대로 물러섰다.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대체 이것이 무슨 경우입니까, 사부님!'
'글세 말이다... 자, 이제 나의 가설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때가 온 것 같구나. 너도 해보아라. 너도 웬만큼은 알았을게다.'
나는 침을 삼켰다. 가정을 체계적으로 공식화시킨다는 것은 상당한 긴장을 요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두 가지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 두 가지 가정은 서로 상반됩니다. 그럼 제가 한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가정... 원장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사부님께 의뢰해 봐야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가정... 원장님은 특정 인물을 의심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에 대한 의심인지는 저도 아직은, 사부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잘 모르기는 합니다만... 원장님은, 이 모든 갈등이 오로지 남색하는 수도사들 사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그의 눈을 열어 주셨고, 따라서 원장님은 일이 심상치 않게 번진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물론 원장님은, 이 일의 주모자 되는 수도사의 이름, 연쇄 살인 사건의 책임을 저야 할 수도사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글너데 이 대목에서 원장은 자기 손으로 이 사건을 수습하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이 수도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사부님을 이 사건의 조사에서 손을 떼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냐, 네 머리도 이제 돌아가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건의 안팎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원장이라는 자는 오로지 수도원의 명예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자신이 범인인지도 모르고, 그 자신이 다음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 판국인데도 불구하고, 원장은 오로지 이 수도원의 추문이 산을 넘지 못하게 하려고만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 수하의 형제는 죽어도 좋으니 수도원 명예만은 지켜야겠다는 발상이 어디 가당키나 한 노릇이냐? 봉건 영주의 후레자식! 토마스 아퀴나스의 무덤을 파서 제 명예의 속살을 찌우는 저 공작새 같은 허장성세! 술잔만한 반지를 끼어야 살맛이 나는 저 술부대 같은 자! 오냐, 잘 났구나. 너희 베네딕트 회 땡중들! 왕족보다 사악하고, 귀족보다 더 귀족적인 것들이로다!'
'사부님... 저도 베네딕트회...'
나는 듣기가 민망하여 감히 힐난하는 말투로 사부님에게 대들었다.
'닥쳐라, 이 놈. 네 놈도 한 통속이 아니더냐? 너희 무리는 범부도, 범부의 자식들도 아니다. 농부가 몸을 의탁하는데 너희라고 거절하기야 하겠느냐만, 너는 어제 너희 무리가 바로 그런 범용한 농부의 자식을 속권에 넘겨주는 걸 보았다. 너희 무리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그렇지 않은 자는 나의 험구에서 지켜질지라, 허나 원장은 능히 그런 사람을 골라 내어 지하 보고에서 쳐죽이고, 수도원 명예를 높인답시고 그 콩팥을 꺼내어 성보 상자에다 넣을 수 있는 위인이다. 그러니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들, 비천한 소형제 수도사들이야 이 거룩한 집에서 쥐구멍밖에 찾을 것이 있겠느냐? 허나, 저 원장이라는 자를 보면 쥐구멍도 찾게 해줄 성싶지도 않다... <고맙소, 윌리엄 형제,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실 것이오. 이 아름다운 반지가 보이지요? 그럼 안녕히 가시오?> 그렇게는 안 될걸. 이건 나와 원장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나와 내 직무 사이의 문제다. 나는, 내 직무가 끝나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내일 아침에 떠났으면 했지? 그래, 이게 제 집이니까, 오라 가라 할 수 있을 테지... 오냐, 그렇다면 내일 아침까지는 내 일을 끝내는 수밖에... 그래, 기필코 끝내고 말겠다.'
'끝내어야 합니까? 이제 이 사건의 조사는 사부님 의무에서 떠나지 않았습니까?'
'아드소, 우리에게 그런 의무를 지운 사람은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알 것은 알아야 하는 사람이다.'
내가 속한 수도회와, 그 수도회에 속하는 수도원 원장에 대한 사부님의 험구는 참으로 듣기에 민망했다. 나는 다소나마 원장의 입장을 변호할 요량으로 세 번째 가정을 설명했다. 그러자면 사부님이 눈치채지 못하게 약간 재간을 부릴 필요가 있었다.
'사부님, 아직 세 번째 가정은 검토하시지 않았습니다. 지난 며칠간 그런 낌새가 보였고, 오늘 아침 니콜라 수도사의 설명으로 확인된 바도 있는 데다가 교회에서도 그런 냄새가 풍기는 걸 제가 확인했습니다. 즉, 이탈리아 출신 수도사들이 외국인에 의한 사서 자리 승계를 달갑지 않게 여긴다는 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탈리아 출신 수도사들은, 수도원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원장님을 비난하고 있고, 알리나르도 노수도사를 앞세워 수도원 행정 체계의 개혁을 요구하고들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원장님은 사부님의 진상 조사 및 진상의 공개가 가지 반대파의 무기가 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이 문제를 좀더 신중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처리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른지요?'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만, 그래도 원장이 빵빵하게 부푼 술부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언젠가는 제풀에 빵, 하고 터질 것이야!'
우리는 교회 회랑에 이르렀다. 바람이 꽤 사나워져 있었다. 정오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주위는 어둑어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부님에게는, 남은 시간이 그만큼 사라져 가는 셈이었다.
사부님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늦었어, 하지만 시간이 없을 때일수록 냉정을 잃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앞에 남아 있는 시간을 영원으로 보고 느긋하게 움직여야 한다. 네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피니스 아프리카에>... 어떻게 하면 이 <아프리카의 끝>이라는 밀실로 들어갈 수 있느냐... 해답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곳에 있는 어떤 사람을 구해야 한다. 그게 누구냐? 그것은 나도 아직은 모르겠다. 이 일련의 사건이 묵시록 예언의 본을 따른다면 외양간 쪽에서 무슨 소동이 있을 것인즉, 너는 거기에 눈을 대어 보도옥 하여라... 오가는 사람들을 빠짐없이 관찰해야 한다.'
아닌게 아니라 본관과 회랑 사잇길은 여느 때보다 왕래가 잦았다. 원장 공관에서 나온 수련사 하나가 잰 걸음으로 본관 쪽으로 달려가는 것도 그 전에는 보기 어렵던 일이었다. 니콜라 수도사도 본관에서 나와 숙사 쪽으로 가는데 걸음걸이가 역시 여느 때보다 빨랐다. 회랑 구석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수도사들이 알리나르도 노수도사, 파치피코, 아이마로, 피에트로를 상대로 쑥덕공론을 벌이고 있었다. 파티피코와 아이마로와 피에트로는 알리나르도 노수도사를 설득하는 것 같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네 사람에게서 무슨 결론이 난 듯했다. 아이마로는 여전히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이 머뭇거리는 알리나르도를 부축, 숙사 쪽으로 갔다. 숙사로 들어가던 그들과, 호르헤를 앞세우고 숙사를 나오던 니콜라가 문간에서 마주쳤다. 두 이탈리아 인 수도사가 숙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니콜라가 호르헤의 귀에다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자 호르헤 수도사는 고개를 집회소 쪽으로 돌렸다.
'원장이 마무리 작없어 손을 대었구나...'
사부님이 중얼거렸다. 본관에서는 문서 사자실 필사사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나온 베노가 걱정스러운 얼굴고 우리에게 다가와 사부님에게 말했다.
'문서 사자실이 술렁거립니다. 일은 않고 저희들끼리 몰려 다니면서 수군거리는데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유력하던 살인 용의자들이 모두 죽었으니 당연한 노릇...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멍청하면서도 잔인하고 잔인하면서도 음탕한 베렝가리오, 이단 혐의자 레미지오, 거기에다 눈총 받던 말라키아까지도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누구를 의심하랴! 따라서 다른 용의자, 또 하나의 속죄양이 필요해서 이러는 것이야. 모두가 모두를 의심하면 분위기가 이렇게 되는 게야. 가만히 보니, 너처럼 겁을 먹은 녀석도 있고, 남에게 겁을 주려는 녀석도 있군 그래. 모두 들떠 있어...'
사부님은 베노를 보내고는 나에게 말했다.
'아드소, 너는 외양간을 좀 눈여겨보아라. 나는 가서 좀 쉬어야겠다.'
믿어지지 않았다.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가서 좀 쉬어야겠다니... 나는 사부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제야 나는 사부님을 이해한다. 사부님은 쉬면 쉴수록 몸과 마음이 더불어 명민해지는 그런 분이었다.
만과와 종과 사이
그 뒤, 그러니까 만과와 종과 성무 사이에 있었던 일을 t h상하게 쓰기는 쉽지 않다.
사부님은 나와 함께 있지 않았다. 나는 외양간 주변을 예의 주시했으나 달리 이상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마부들이 갑자기 세어진 바람 때문에 짜증을 부리는 말들을 외양간으로 몰아넣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을 뿐, 모든 것은 여느 때처럼 평온했다.
나는 교회로 들어갔다. 모두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원장의 시선을 유심히 좇았다. 원장의 시선은 유달리 자주 호르헤 노수도사의 자리로 가고는 했다. 호르헤 노수도사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원장도 그걸 확인했는지, 성무의 시작을 늦추었다. 그는, 호르헤를 찾으러 보내고 싶었는지 베노를 찾았다. 그러나 베노 역시 그 자리에 없었다. 누군가가, 베노는 문서 사자실 문을 잠그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원장은 짜증을 부리며 본관 규칙도 모르는 자가 어떻게 문은 잠그냐고 했다. 알레산드리아 사람 아이마로가 일어서면서 원장에게 말했다.
'허락하신다면 가서 베노 형제를 불러오겠습니다.'
'내 너에게 그런 말 한 적 없다.'
원장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이마로는 자리에 앉으며 티몰리 사람 파치피코에게 묘한 시선을 던졌다.
원장은, 이번에는 니콜라를 찾았다. 그러나 니콜라 역시 자리에 없었다. 누군가가 니콜라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장은 이 대답에도 싫은 얼굴을 했다. 그는 그런 낯빛을 보여야 하는 자신의 상태 자체에 매우 화가 나 잇는 것 같았다.
'호르헤 수도사가 임석하셔야 한다. 그분을 모시고 오너라. 네가 가거라.'
원장이 수석 수련사에게 명했다.
또 누군가가 이번에는, 알리나르도 노수도사도 성무에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도 안다. 노인은 건강 때문에 기동이 불편하실 게다.'
원장이 대답했다. 나는 마침 산탈바노 사람 피에트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바로 옆에 있던 놀라 사람 군초에게 중부 이탈리아 사투리로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사투리를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영감님은, 교리 강론 끝날 즈음에 보니까 아주 녹초가 되셨더라고. 그나저나 원장이 왜 오늘 따라 아비뇽 교황청의 갈보처럼 군다지?'
수련사들이 특히 당황해 하고 있었다. 나이가 어린 수련사들은, 나처럼 교회 안에서 고조되는 이상한 긴장에 민감했다. 침묵과 당혹의 순간순간이 계속되었다. 원장은 찬미가를 부르자면서 임의로 세 곡을 골라 선창했다. 하나같이 회칙이 만과 성무의 찬미가로 지정한 적이 없는 곡들이었다. 수석 수련사를 앞세우고 베노가 들어와 자리에 앉고는 고개를 숙였다. 호르헤는 문서 사자실에도, 독거에도 없더라고 했다. 원장은 성무의 시작을 명했다.
성무가 끝나고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직전에 나는 사부님을 모시러 갔다. 사부님은 옷을 입은 채, 침상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시간이 그렇게 되었는지 몰랐다고 했다. 내가 간단하게 교회에서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하자 가만히 고개만 저었다.
식당 문 앞에서 사부님과 나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호르헤와 함께 있던 니콜라를 만났다. 사부님이 호르헤가 원장을 만났느냐고 묻자, 니콜라는 알리나르도와 아이마로가 공관에서 원장을 면담했기 때문에 호르헤는 오랜 시간 공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고 대답했다. 니콜라의 말에 따르면, 알리나르도 일행이 나오자 호르헤는 원장 공관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야 나왔다. 원장 공관에서 나온 호르헤는 나콜라에게, 자기를 교회로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 그때가 만과 성무 한 시간 전이었다. 그러니까 교회에는 아무도 없을 시각이었다.
사부님과 니콜라가 식당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원장이 다가와 비아냥거렸다.
'윌리엄 수도사, 아직도 조사하고 있는 중인가요?'
그러나 막상 식당에서는 원장도 사부님을 자기 옆자리에 앉게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사로운 감정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베네딕트 회에서는 손님 접대를 제일의 미덕으로 치기 때문이었다.
식사는 어느 때보다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원장은 자기 생각의 무게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건성으로 손을 놀렸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수도사들에게 종과 성무를 서둘라고 말했다.
알리나르도와 호르헤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수도사들은 장님 노인 호르헤의 빈 자리를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성무가 끝나자 원장은, 부르고스 사람 호르헤 노수도사의 건강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자고 말했다. 호르헤의 육체적 건강이었을까, 영원의 안식을 위한 영혼의 건강이었을까... 회중은 수도원으로 불어 닥칠 또 한 차례의 회오리바람을 예감하는 듯했다.
불쑥 원장은 모든 수도자는 모두 자기 방으로 돌아가되, 한 사람이라도 숙사 밖에서 얼쩡거리면 중벌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 사람>을 특히 강조하는 것 같았다. 겁에 질린 수련사들이 맨 먼저 일어나 두건을 내려쓰고 고개를 숙인 채 교회를 떠났다. 입을 여는 수련사도 없었고 동료를 집적거리는 수련사도 없었다. 수련사들은 대개가 어리다. 그래서 꽤 엄한 수도사가 눈을 부라려도 이들의 짓궂은 장난을 완벽하게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날만은 예외였다.
이윽고 수도사들이 교회를 나섰다. 나는 이른바 <이탈리아인들>로 부르는 수도사들 뒤를 따랐다. 파치피코가 아이마로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렸다.
'자네, 정말 수도원장이 호르헤의 행방을 모를 거라고 믿나?'
'알 테지. 호르헤가 거기에서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거야. 노인은 원한 게 너무 많아. 그러나 원장이 더 이상 노인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은 당연지사...'
아이마로의 대꾸였다.
사부님과 나는 순례자 숙사로 들어가는 척하면서 어슬렁 거리다가, 원장이 그때까지도 열려 있던 식당문을 통해 본관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사부님이 속삭였다.
'조금 더 기다리자. 인적이 끊기거든 내 뒤만 따르거라.'
우리는 잰걸음으로, 인적이 거의 끊긴 길을 따라가다가 길에서 몸을 뽑아 교회로 숨어들었다.
종과 이후
우리는 회교도 자객들처럼 교회 입구의 기둥 귀로 몸을 숨기고, 유골로 짜인 제단을 응시했다.
'원장은 본관 문을 잠그러 간 모양이다. 문을 안으로 잠그면 납골당을 통해 나올 수밖에 없을 게다.'
'나오면요?'
'뭘 하는지 지켜봐야지.'
우리는 원장이 뭘 하는지 지켜볼 수 없었다. 한 시간이 넘었는데도 원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피니스 아프리카에>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식당을 통해 밖으로 나와, 호르헤 노수도사를 찾으러 다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나는 나 자신의 가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의 경우도 상상해 보았다. 호르헤가 죽었을 가능성... 호르헤가 본관에서 원장을 죽이고 있을 가능성... 제3가자 잠입하여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 <이탈리아 인들>이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 베노는 왜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일까? 베노는, 사부님의 주의를 흐트려 놓을 목적으로 짐짓 하소연하는 척한 것은 아닐까? 베노는, 문서 사자실 문을 어떻게 잠그는지도 모르고, 안에서 문을 잠근 뒤 어떻게 빠져 나오는지도 모르는데 왜 만과 성무 시간에는 문서 사자실에 있었던 것일까? 미궁의 통로를 혼자 힘으로 정복하려고 했던 것일까?
'모두 그럴싸한 추리다. 그러나 한 가지 일만은 지금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났거나, 일어나려 하고 있다. 마침내 하느님 은덕으로 우리는 한 가지 확실한 사실 앞까지 다가왔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만사를 다 꿰뚫어 본다고 믿는 이, 바스커빌의 윌리엄이 딱 한 가지, <아프리카의 밀>이라는 밀실로 들어가는 방법만은 아직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아드소, 외양간으로 가보자. 외양간으로...'
'원장님 눈에 띄면 어쩝니까?'
'한 쌍의 유령 행세를 해야지 별 수 있겠느냐?'
적당한 방법이 못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아무 말없이 사부님 뒤로 따라붙었다. 사부님은 초조해 하고 있었다. 우리는 뒷문을 빠져 나와 묘지를 지났다. 바람이 세찼다. 나는, 제발 한 쌍의 유령이나 만나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날 밤의 수도원에 제정신을 지닌 수도사는 하나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외양간에 이르고 보니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말들은 찬바람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외양간 문에는 가슴 높이로 빗장이 걸려 있었다. 우리는 빗장 너머로 외양간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이지만 말과 소를 구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왼쪽 첫 번째 말이 브루넬로라는 것도 알아볼 수 있었다. 브루넬로의 오른쪽, 그러니까 우리쪽에서 보아서 세 번째 말이 우리가 다가간 것을 알고는 고개를 들고 울었다.
'<테르티우스 에퀴>...'
나는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느냐?'
사부님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살바토레 수도사가 한 말이 생각나서 웃었습니다. 살바토레 수도사는 저기 있는 세 번째 말에다 자기만 아는 마법을 걸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살바토레 수도사가 저 말을 가리키면서 하는 엉터리 라틴 어가 걸작입니다. <테르티우스 에퀴>라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세 번째 말>이 아니라 <말의 세 번째 놈>, 결국 <말>이라는 단어의 세 번째 글자 가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자라니?'
별 생각없이 내 말을 듣고 있던 윌리엄 수도사가 반문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살바토레 수도사는 <세 번째 말>이라는 뜻으로 <테르티우스 에퀴>라고 했다니까요, 사부님. <테르티우스 에퀴>라고 해버리면 <세 번째 말>이라는 뜻이 아니고, <에퀴>라는 단어의 세 번째 글자라는 뜻이 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결국 살바토레 수도사가 <테르티우스 에퀴>라는 말로 지칭하고자 한 것은 <세 번째 말>이 아니라 <에퀴>의 세 번째 글자, 즉 가 되고 만 셈이니 이런 엉터리 라틴어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부님의 얼굴이 내 쪽을 향했다. 어둠 속인데도 나는 그의 얼굴이 활짝 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소리쳤다.
'네 이놈! 복 받거라! 오냐, 오냐, <소재>의 오해와 관련된 문제였구나! 아, <언어로 나타나는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 그 자체>였구나! 이이고 이런 돌대가리!'
사부님은 이렇게 외치며 주먹으로 당신의 이마를 퍽 소리가 나게 갈겼다. 적잖게 아플 것 같았다.
'아드소, 오늘 네 입을 통하여 진실이 두 번이나 드러났다. 처음에는 네 꿈 이야기를 통해서, 이번에는 이 엉터리 라틴 어를 통해서... 뛰자, 어서 뛰자. 네 방으로 달려가서 등잔을 하나 가져 오너라. 아니, 둘 다 가져 오너라.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고... 교회에서 만나자. 이유는 묻지 말고 어서 달려가거라!'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 방으로 달려갔다. 등잔 두 개는 내 침상 밑에 있었다. 기름은 충분했고 심지도 내가 다듬어 놓은 것이라서 말짱했다. 나는 부싯돌도 찾아 법의 주머니에 넣고는 교회로 뛰었다.
사부님은 삼각대 아래에 앉아 베난티오의 양피지 쪽지를 다시 읽고 있었다. 나에게 양피지 암호를 설명하는 그의 음성은 들뜬 나머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보아라. <프러물 에트 셉티뭄 데 쿠아투오르>를 우리는 <넷의 첫 번째와 일곱 번째>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넷>이 아니라 <넷>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 즉 <쿠아투오르>를 말하는 것이다. 한동안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머리가 세어질 지경이었는데 이제 이게 풀렸다. <아프리카의 끝>이라는 이름의 밀실 앞 거울 위에 <수페르 트로노스 비긴티 구아투오르>, 즉 <높은 좌석 스물네 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지 않더냐? 바로 이 글귀에 든 <쿠아투오르>가 열쇠인 게야. 서둘자. 잘 하면 한 사람의 목숨은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 말씀이신지요?'
내가 물었다. 그는 이미 제단의 두골을 움직여 납골당을 통하는 문을 열고 있었다.
'그럴 가치가 없는 인간이기가 쉽지.'
우리는 지하 통로에 이르러 등잔에 불을 켜들고 주방으로 통하는 문 쪽으로 갔다.
앞에서 나는 이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면 주방의 화덕 뒤, 그러니까 문서 사자실로 통하는 원형 계단실 아래에 이른다고 쓴 바 있다. 우리가 그 문을 밀었을 때 벽 안에서 무슨 소린가가 들려 왔다. 소리 나는 곳은 문 옆의 벽, 그러니까 유골이 얹힌 한 줄의 벽감이 끝나는 곳이었다. 마지막 벽감 옆은 네모난 석판벽이었고, 석판벽 한가운데엔 고색 창연한 합일문자가 새겨진 낡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소리는 현판 뒤, 혹은 현판 위에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아니, 반은 벽 뒤쪽에서, 반은 우리 머리 위에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혼자서 장서관에 잠입한 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면 나는 죽은 수도사들의 유령을 생각했을 터였다. 그러나 세 번째로 장서관에 잠입하는 내가 아니던가? 나는 비로소 그 소리를 살아 있는 수도사가 내는 소리로 확신할 수 있었다.
'무슨 소리일까요?'
사부님은 문을 열고 화덕 뒤로 들어갔다. 계단실 옆벽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누군가가 벽 속, 아니면 주방 벽과 남쪽 탑루의 외벽 사이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주방 벽과 남쪽 탑루의 외벽 사이의 공간은 상당히 넓었다.
'저기에 누군가가 갇혀 있다. 나는 지금까지 <피니스 아프리카에>로 들어가는 다른 길이 없을까 하고 여러 차례 조사해 보았다. 이 본관 안에는 통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으니까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과연 납골당에서, 주방 위로 올라오기 직전에 나타나는 납골당의 한쪽 벽면이 열리게 되어 있더구나. 그곳에서 이 계단실과 평행하는 벽 속의 계단을 오르면 바로 창이 없는 방을 들어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누굴까요?'
'제2의 인물이다. 제1의 인물은 지금 <피니스 아프리카에>, 즉 <아프리카의 끝>이라는 밀실에 있다. 제2의 인물은 <아프리카의 끝>에 있는 제1의 인물을 찾아가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제1의 인물은 무슨 기계 장치 같은 것을 움직여 제2의 인물이 지나는 통로를 막아 버린 게 분명하다. 따라서 불청객인 제2의 인물은 벽 속에 갇힌 것이지. 갇힌 사람은, 비좁은 벽 속에 공기가 얼마 없을 테니까 지금쯤 혼구멍이 나고 있을 게다.'
'누굴까요? 구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지 곧 알게 될 게다. 그러나 구해 주고 싶어도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기계 장치를 작동시키는 시설은 위에 있을 테니까. 게다가 지금으로서는 나도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일단 올라가고 보자.'
우리는 문서 사자실로 올라가, 장서관의 미궁을 지나 남쪽 탑루에 이르렀다. 나는 두 번이나, 등잔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돌아서야 했다. 전날 밤에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틈새로 불어 들어오던 바람이 이날 따라 그렇게 거셀 수가 없었다. 바람은 통로를 지나면서 각 방의 서안에 놓인 서책 장을 날릴 정도로 거셌다. 그래서 나는 두 손으로 등잔을 껴안 듯이 하고 걸었다.
이윽고 우리는 거울이 있는 방에 이르렀다. 거울에 비치는 우리의 형상은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져 보였으나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등잔을 들어 거울의 틀에 새겨진 글귀를 비추었다. <수페르 트로노스 비긴티 쿠아투오르>, 즉 <높은 좌석 스물네 개>... <쿠아투오르>, 즉 <네 개>라는 단어는 모두 7개의 철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쿠아투오르>라는 단어의 첫 번째 글자와 일곱 번째 글자, 즉 와 을 누르면 되는 것이었다. 몹시 흥분해서, 내 손으로 눌러 보려고 방 한가운데에 있는 서안에다 등잔을 놓았다. 그러나 너무 서둔 것이 탈이었다. 등잔 불꽃이 순식간에 서안 위에 놓여 있던 서책의 표지를 할퀴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이런 멍청이 같으니! 장서관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어?'
사부님이 등잔불을 불어 끄면서 나를 나무랐다.
나는 기가 잔뜩 죽은 채, 등잔에 다시 불을 붙이려 했다.
'놔둬라. 내 등잔 하나면 충분하겠다. 등잔을 들어서 내 손을 비춰 보아라. 높아서 손이 자라기나 할지 모르겠다. 서둘자. 서둘러야 한다.'
'안에 있는 사람이 흉기라도 가지고 있으면 어쩌지요. 사부님?'
사부님은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발끝으로 서서 <요한의 묵시록>의 한 구절인, 문제의 인각된 글자를 더듬었다.
'겁내지 말고 불이나 똑바로 비추어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사부님은 손가락으로 <쿠아투오르>의 자를 더듬었다. 한 발짝 물러서 있는 내 눈에는, 거울 앞에 바싹 붙어선 사부님에 비해 그 글귀를 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는 앞에서 이 글귀가 벽면에 인각된 것 같다고 쓴 바 있다. 그러나 <쿠아투오르>라는 단어만은 쇠붙이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쇠붙이는 벽 속에 내장된 기계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사부님이 와 을 누르자 뒤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울 전체가 움직인다고 생각한 순간, 유리면이 뒤로 물러났다. 자세히 보니 거울 자체가, 왼쪽에 돌쩌귀가 달린 문이었다. 사부님은 거울의 오른쪽 가장자리와 벽 사이의 틈새에다 손을 넣고 거울을 당겼다. 거울 문은 소리를 내며 우리 쪽으로 열렸다. 사부님이 열린 문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는 것을 보고 나도 등잔을 머리 위로 치며 올린 채 뒤를 따라 들어갔다.
종과 성무 두 시간 뒤, 이레째가 마악 시작되려는 엿새째 한밤중에 우리는 마침내 <아프리카의 끝>에 해당하는 밀실로 들어선 것이었다.
제7일
한밤중
우리가 들어선 밀실 <아프리카의 끝>의 모양은 창이 없는 다른 세 개의 7면 벽실과 비슷했다. 곰팡이가 낀 서책에서 나는 듯한, 쾨쾨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가 머리 위로 치켜 든 등잔이 먼저 천장을 비추었다. 등잔을 내려 천천히 좌우를 비추자 이번에는 벽을 등지고 선 서가들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희미한 등잔 불빛에 서책이 잔뜩 쌓인 서안과, 그 서안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산 사람이라면 그는 그 어둠 속에서 부동의 자세를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음에 분명했다. 등잔 불빛이 그 그림자의 얼굴에 채 닿기도 전에 사부님이 소리쳤다.
'안녕하시었소, 호르헤 어른. 나를 기다리고 있었소이까?'
우리가 한 발 다가서자 그제서야 불빛이 노인의 얼굴에 가 닿았다. 그는 눈이 멀쩡한 사람처럼 우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바스커빌 사람 윌리엄이시오? 만과 성무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곳에 와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소. 내 그대가 올 줄 알았지.'
호르헤 노수도사가 대답했다.
'원장은 어찌 되셨소? 비밀 계단실에서 무슨 소리가 나던데 그게 바로 원장이 내던 소리였던가요?'
호르헤 노수도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반문했다.
'아직도 살아 있던가요? 숨이 막혀 죽은 줄 알았는데...'
'당신과 말장난을 하기 전에 먼저 원장을 구해야겠소. 여기서 저 계단을 열 수 있을 테지요?'
'안 됩니다. 늦었어요. 기계 장치는 아래쪽에서 현관을 눌러야 움직입니다. 여기에서 손을 써봐야 계단 입구 쪽 문만 열릴 뿐이오...'
그는 턱으로 어깨 뒤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계단실 옆에 평형추 달린 바퀴가 있을 거시오. 평형추는, 여기에서 기계를 움직이는 장치라오. 나는 바퀴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원장이 올라오는 걸 알았지요. 그래서 바퀴 돌리는 밧줄을 당겼더니 이게 그만 끊어져 버리는 거라... 이제 비밀 계단실 통로는 양쪽에서 막히고 말았어요. 이걸 수리해서 원장을 구할 수는 없는 일... 원장은 벌써 죽었소이다.'
'왜 원장을 죽였소?'
'오늘 이 양반이 날 부르러 와서는, 윌리엄 그대 때문에 진상을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고 합디다. 그런데도 이 맹추 같은 양반, 내가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몰라. 그는 장서관의 보물이 무엇이고, 목적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른단 말이오. 그리곤 나에게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한 설명을 요구합디다. 뿐인가? 나에게 이 <아프리카의 끝>을 열라는 거야. 이탈리아인들이 원장에게 몰려가, 나와 내 선임자들이 싸고도는 이른바 수수께끼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던 모양이오... 이 한심한 자들,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에 쫓기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은 이곳으로 올라와,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그렇게 했듯이, 당신 자신의 목숨도 끊어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겠군요. 그래야 수도사들 눈에는 아무것도 띄지 않을 것이고, 그래야 수도원 명예가 살게 될 테니까. 당신은 원장에게 잠시 후에 이곳으로 올라와 당신의 죽음을 확인하라고 했을 테지요? 그런 덫을 놓고 기다리다가 원장을 죽였을 테지요? 당신은, 원장이 저 거울 문을 통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닌가요?'
'천만에... 원장은 키가 작아요. 따라서 혼자서는 거울 위의 글자에 손이 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만 아는 다른 길을 가르쳐 주었지.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이용한 것인데, 어둠 속에서는 더 간단해서 교회로 간 다음, 유골을 따라가기만 하면 통로 끝에 이를 수 있어.'
'그러니까 미리 죽일 생각을 하고는 올라오게 한 게 틀림없군요?'
'이제 믿을 수가 없어졌거든... 그자는 겁을 먹고 있어. 원장은 포사노바에서 제 사부의 시신을 메고 나선형 계단을 내려온 적이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는데 그게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어.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의 계단도 오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죽어 마땅하지.'
'당신은 40년 동안이나 그 계단을 이용했군요. 시력이 떨어지고 눈이 멀어 가자 당신은 더 이상 장서관을 다스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술수를 쓰기 시작했어요. 말하자면 믿을 만한 사람, 온당한 사람을 원장 자리에 앉히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보비오 사람 로베르토를 장서관 사서로 만들었어요. 그 다음에는 당신의 도움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는 말라키아로 하여금 로베르토의 뒤를 잇게 했을 테지요. 말하자면 당신은 지난 40년 동안이나 이 수도원의 주인 노릇을 했어요. 그런데 알리나르도 노인이 암암리에 이탈리아인들을 깨우친 덕분에 이탈리아인들이 당신의 속셈을 눈치채기 시 했겠군요. 만시지탄이군요. 그렇게 오랬동안 사람들은 알리나르도를 노망든 노인이라고 무시했을 터이니... 내 말이 맞나요? 당신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는데, 사실은 기다린 게 아니라 기계 장치가 벽에 내장되어 있어서 거울 문을 잠글 수가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요, 나를 기다렸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칩시다. 왜 기다렸지요? 어째서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사부님은, 호르헤의 대답을 뻔히 알면서도, 호르헤가 새삼스럽게 경탄하는 꼴을 보자고 그러는 것임에 분명했다.
'처음부터 나는 그대가 다 알아낼 것으로 짐작했어요. 그대의 목소리를 듣고 알았지요. 지금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문서 사자실에서 점잖지 못한 주제를 놓고 토론할 때 나를 몰아치는 재주를 보고 진작부터 알았지요. 그대는 역시 다른 이들보다는 한 수 위더군요. 나는 그대가 어떻게 하든 이 사건을 풀어 낼 줄 알았어요. 그대에게는 남의 생각을 엿보고, 그 생각을 자기 것으로 재구성하는 재주가 있더군요, 그대가 다른 수도사들에게 던지는 질문을 엿들었더니 말다마 정곡을 찔러 나갑디다. 그런데 그대는, 장서관 비밀을 훤히 아는 사람처럼, 장서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질문을 하지 않아... 그래서 며칠 전날 밤에 살며시 그대 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려 보았어요. 대답이 없더군. 그대는 방에 없었던 거요. 주방 일꾼들에게 물었더니 등잔 두 개가 없어졌다고 합디다. 집회소에서 사절단 회의가 있던 날 세베리노는 그대를 배랑으로 불러 서책 이야기를 하더군. 그래서 나는 그대가 내 꼬리를 잡고 있다는 걸 알았지.'
'그러나 당신은 어떻게든 그 서책이 내 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겠지요?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말라키아를 찾아갔어요. 이 얼간이는, 아델모가, 육욕으로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제 남색패 베렝가리오를 가로챈 일 때문에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어요. 말라키아는 이 일과 베난티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는데도 당신은 말라키아를 잔뜩 부채질해서 꼭지를 돌려놓았을 겁니다. 모르기는 하나 당신은 말라키아에게 베렝가리오와 세베리노가 붙어 지낸다... 베렝가리오는 그래서 세베리노에게 밀실 <아프리카의 끝>에 소장되어 있던 서책을 갖다 주었다... 이런 말을 했을 테지요. 글쎄, 당신이 한 말이 정확하게 어떤 것이었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질투에 꼭지가 돈 말라키아는 세베리노를 때려 죽였겠지요. 하지만 레미지오가 들어오는 바람에 말라키아는 당신이 말한 그 서책을 회수하지 못했어요. 어때요?'
'잘 나가고 있어요.'
'허나 당신은 말라키아가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았어요. 모르기는 하나 당신을 믿고 당신의 말을 존중한 나머지 말라키아는 <아프리카의 끝>의 서책은 읽어 보지도 못하고 허구한 날 만일의 경우에 있을지도 모르는 침입자를 위협하려고 약초로 불이라 지폈을 테지요. 이 약초는 세베리노가 대주었을 것이고요. 그러니까 말라키아와 세베리노가 더러 시약소에서 만나는 것은 바로 이 약초 때문이었을 겁니다. 말라키아는 원장의 밀명을 받고 매일 약초를 얻으러 시약소에 갔을 테니까요. 어떻습니까, 이 부분까지의 내 추리는?'
'잘 가고 있어요. 그래요, 나는 말라키아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어요. 나는 어떤 수단을 쓰든지 그 서책을 찾아다 이곳에 갖다 놓되 절대로 펴보지 말라고만 했소이다. 말라키아에게, 그래서 천 마리 전갈의 독이 서책에 묻어 있다고 했던 것이오. 그런데 이 멍청이는 처음으로 내 말을 어기고 제 생각대로 했던 것이오. 그래요. 나는 말라키아를 잃고 싶지 않았소. 말라키아는 더할 나위 없이 충직한 내 종이었으니까... 허나 그대가 한 짓을 내게 다 설명할 것은 없어요. 그대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 나 또한 모르는 바 아니니까. 나는 그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소. 그대는 혼자서 꿰뚫어 보았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 공이 스스로 빛나오. 나는 오늘 아침 그대가 문서 사자실에서 베노에게 <키프리아누스의 만찬>에 대해 묻는 걸 엿들었소. 그대가 어떻게 해서 거울 문의 명문을 해독했는지는 나는 모르오. 그러나 원장으로부터 그대가 <피니스 아프리카에>, 즉 <아프리카의 끝> 이야기를 하더라는 말을 듣고는 그대가 곧 이렇게 찾아올 줄 알았어요. 내가 그대를 기다렸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오. 자, 이제 무엇을 더 바라시오?'
'아랍어, 시리아어, 그리고 <키프리아누스의 만찬> 번역본, 혹은 사본이 합본된 문제의 서책을 보아야겠습니다. 그리스어 판본을 보아야겠습니다. 아랍 아니면 스페인에서 만든 것이겠지요. 당신은 리미니 사람 파올로의 보조 사서 자격으로 <요한의 묵시록>의 정본 원고를 구하러 당신의 모국에 갔다가 우연히 레온이나 카스틸리아에서 그 서책을 입수했을 겁니다. 당신은 덕분에 이 수도원에서 부동의 자리를 확보하고, 당신보다 10년은 족히 연장자인 알리나르도를 밀어내고 사서직에 오릅니다. 내가 보고 싶어하는 그리스어 판본은 아나지에 사자되어 있을 겁니다. 아마지가, 당신의 고행 부르고스와는 지척인 실로스에서만 만들어지는 희귀한 물건이라는 것도 나는 알지요. 자, 내가 보고 싶은 서책은, 당신이 거기에서 읽어 보고는 훔쳐서 이곳으로 가져 왔고, 당신은 읽었으면서도 다른 수도사에게는 읽지 못하게 했고, 여기에다 감추어 두었고, 남들에게 죽어라고 읽히지 않으면서도 죽어도 파기는 못하겠다고 버티어 온 그 서책입니다. 암, 파기하지 못하고 말고요. 당신은 서책을 파기할 위인이 못 되니까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보고 싶은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세상이 소실되었다고 믿거나 아예 씌어지지도 않았다고 믿는 책... 어쩌면 이 세상에서 한 권 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당신의 소장품, 바로 그겁니다.'
호르헤는 경탄하면서도 유감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윌리엄 형제, 그대는 사서로는 천부적인 재질이 있는 사람이군요. 그래, 다 알고 있었군요. 자... 그대 옆에는 의자가 있을 것이오. 앉아요. 여기 그대에게 주는 상이 있어요.'
사부님은 내가 건네주었던 등잔을 놓고 의자에 앉았다. 등잔불은 아래에서 호르헤의 얼굴을 비추었다. 호르헤 노인은 자기 앞에 놓은 서책을 집어 사부님에게 건네주었다. 낯익은 표지였다. 내가 시약소에서 펼쳐 보고는 아랍어로 씌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서책이었다.
'윌리엄 형제, 천천히 책장을 넘기면서 읽도록 하세요. 그대가 이겼어요. 그대에게는 상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
사부님은, 덥석 서책을 잡는 대신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법의 자락에 손을 넣어 장갑 한 켤레를 꺼냈다. 필사사들이 쓰는 손가락 부분이 없는 장갑이 아니라, 죽은 세베리노의 손에서 벗겨낸, 손가락이 온전한 장갑이었다. 나도 가까이 다가가 그 서책을 내려다 보았다. 호르헤 노인은 예의 그 예사롭지 않은 청력으로 내가 움직이는 소리를 감청하고 소리쳤다.
'오, 너도 와 있었구나! 나중에 너에게도 그것을 보여주마.'
사부님은 첫쪽을 읽다가 호르헤에게 물었다.
'목록에 따르면 이건 바보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아랍어 원고인데 이게 대체 무엇인가요?'
'이교도들의 터무니없는 전설이랍니다. 뭐, 바보가 재담으로 이교 사제나 군주를 놀라게 한다던가...'
'두 번째는 시리아어 원고로군요. 목록에 따르면 연금술에 대한 이집트의 소논문이라는데, 이런 게 어떻게 여기에 들어 있습니까?'
'그건 3세기 즈음 이집트에서 씌어진 원고랍니다. 그 내용상 다음 원고와 관련이 있어서 합본되어 있을 뿐, 별로 불온한 내용은 아니지요. 하지만 공부하는 수도사들이 아프리카 연금술사들의 헛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어쩌게요? 이자는 세상의 창조를 하느님의 웃음에다 관련시키고 있어요...'
호르헤 노인은 고개를 들고 그 구절을 외기 시작했다. 시력이 좋던 시절. 그러니까 자그만치 40년 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외고 있는 것이었다 .사부님과 나는 그의 놀라운 기억력에 혀를 내둘렀다.
'... <하느님께서 웃으시매 일곱 신이 나타나 세상을 다스렸고, 홍소를 터뜨리시매 빛이 생겨났으며, 두 번째 홍소를 터뜨리시매 물이 생겨났고, 그분이 웃기 시작한 지 이레째 되는 날 영혼이 생겨났으니>... 이게 망발 아니면 무엇이오? 다음 책은 <키프리아누스의 만찬>의 주석을 놓은 수많은 바보 중 하나가 썼다는 것인데... 그대가 관심하는 것은 이게 아닐 것이오.'
사부님은 재빨리 책장을 넘겼다. 곧 그리스어 부분이 나타났다. 책장의 재질이 앞 부분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첫 쪽은 군데군데 부서져 나간 데다 가장자리는 완전히 닳아 있었다. 세월과 습기에 찌들 대로 찌든 아마지에는 군데군데 흰 얼룩이 묻어 있었다. 사부님은 도입부를 그리스어로 읽다 말고 곧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읽었다. 그래서 나도 그 치명적인 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알 수 있었다.
'...<제1부에서 우리는 비극을 다루면서 이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야기시킴으로써 카타르시스의 창출을 통해 이러한 감정을 씻어 내는 과정을 검토해 보았다. 이제 약속대로 희극을 풍자극, 광대극과 더불어 다루면서 이 희극이 어리석은 자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비극과 같은 작용을 하는 과정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영혼에 관한 책에서 이미 말했듯이 인간은 하고많은 동물 가운데서도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따라서 먼저 이 웃음이라는 현상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연후에 희극의 연기가 곧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연기의 양식을 정의하고, 희극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수단인 연기와 대사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그런 다음에 현자에서 우자에 이르기까지, 우자에서 현자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인간을 모방하고, 속임수로 관중을 놀라게 하고, 불가능한 것을 왜곡시키고, 자연의 법칙을 깨뜨리고, 엉뚱한 것, 모순된 것을 대비시키고, 등장 인물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희극적이고 천박한 몸짓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부조화를 야기시키고, 무가치한 것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는 행위가 어떻게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창출하고, 동명 이물과 이명 동물을 짐짓 곡해함으로써, 수다와 반복과 말장난과 엉터리 발음과 사투리를 통하여 어떻게 우스꽝스러운 대사가 가능해지는지 검토해 보기로 하자>...'
사부님은, 적당한 낱말을 찾느라고 이따금씩 떠듬거리기도 하면서 그 들을 번역해서 읽었다. 기대했던 서책을 제대로 만난 듯, 그는 읽으면서 몇 차례 미소를 짓기도 했다. 첫 쪽을 읽은 그는 더 읽고 싶지 않은 듯이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 문득 손길을 딱 멈추었다. 몇 쪽에 걸쳐 책장의 옆부분과 윗부분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습기로 인해 아마포가 녹으면서 풀을 바른 것처럼 달라붙어 버린 것 같았다. 호르헤 노인은 책장 넘기는 소리가 그치자 사부님을 재촉했다.
'계속해서 읽어 보아요. 이제 그 서책은 그대의 것이니까. 그대가 번 것이지요.'
그러자 사부님은 태평스럽게 웃으면서 노인을 놀려 주었다.
'호르헤 수도사, 아까 날 보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더니, 당신, 당신 거짓말을 한 모양이구료.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시방 장갑을 끼고 있소이다. 장갑 때문에 손가락이 어둔해서 당신 주문대로 책장을 빠리 넘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마땅히 맨손으로, 그것도 이따금씩 마른 손가락을 혀 끝에 대어 가면서 읽어야 하는데 말이오. 오늘 아침 우연히 문서 사자실에서 손가락에다 침을 칠해 가면서 책을 읽다가 당신의 수법을 알아낸 겁니다. 손에다 침을 묻히면서, 독이 혀끝을 통해 입 안으로 충분하게 좀 들어가게 읽어야 하는데,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독은 무슨 독이냐고 시치밀 한번 떼어 보시지 그러시오? 나는 지금 당신이 옛날에 세베리노의 실험실에서 훔쳐 낸 독을 말하고 있는 것이오. 문서 사자실에서 <아프리카의 끝>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희서를 놓고 수군거리는 수도사들의 소리, 당신 귀에도 들렸을 터인데 얼마나 불안했소이까? 내 보기에, 당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쓰려고 그 독약만은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모양이오. 그러다 며칠 전 베난티오가 이 책의 주제에 접근했고, 경조부박하고 철딱서니 없는 베렝가리오가 아델모의 환심을 사려고 그만 당신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지켜오던 비밀의 일부를 누설했어요. 그래서 당신은 이곳으로 올라와 덫을 놓았어요. 과연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베난티오가 이곳으로 숨어 들어 서책을 훔쳐 가지고는 미친 듯이 책장을 넘기며 읽다가, 당신이 발라 놓은 독약에 중독되자,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고자 주방으로 내려갔어요, 베난티오는 물론 주방에서 죽었지요. 내 말이 틀렸소?'
'아니, 계속하시오.'
'나머지는 간단하지요. 베렝가리오는 주방에서 베난티오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기겁을 합니다. 베난티오가 본관으로 숨어든 것은, 베렝가리오가 아델모에게 하는 말을 엿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줄거리를 타고 들어가면베렝가리오 역시 나중에는 심문을 당할 것이 아닙니까? 베렝가리오는 망설이다가 시신을 둘러메고 돼지 피 항아리에다 처넣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베난티오가 돼지 피 항아리에 처박혀 익사한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말이지요.'
'놀랍소, 당신은 어떻게 아셨소?'
'당신 역시 알고 있었을 텐데 뭘 그러십니까? 베렝가리오의 방에서 피 묻은 천이 발견되었을 때 당신이 보이던 반응을 유심히 보아 두었지요. 그런데 그건 베렝가리오의 피가 아니었어요. 그러면 누구 피냐? 세베리노의 피였지요. 베렝가리오, 이 덜 떨어진 자는 베난티오를 피 항아리에다 처넣고는 그 천으로 제 손에 묻었던 피를 닦았던 겁니다. 어쨌든 베난티오의 시체가 발견된 직후 베렝가리오는 서책과 함께 사라지지요. 이자는 이미 그 서책에 눈독을 들인 지 오래였어요. 당신은 베렝가리오가, 당신이 묻혀 놓은 독약에 중독되어 어디에선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그랬지요. 그런데 세베리노가 그 서책을 찾아냅니다. 어떻게? 서책을 손에 넣은 베렝가리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세베리노의 시약소에서 서책을 읽었던 거지요. 그래서 서책은 세베리노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이어서 당신의 사주를 받은 말라키아가 세베리노는 죽이고 이곳으로 올라와 베노로부터 서책을 빼앗아 가지고는, 대체 무슨 서책인데 당신이 신경을 그렇게 곤두세울까 하면서 펼쳐 읽다가 역시 중독사하고 맙니다. 자, 희생자들의 사인은 모두 설명된 것이지여? 이런 돌대가리...'
'누가 돌대가리라는 것이오?'
'내가 돌대가리라는 거외다. 알리나르도의 푸념을 듣고 나는 일련의 범죄 사건이 <요한의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나팔 소리와 일치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아델모의 죽음과 우박... 하지만 아델모의 죽음은 자살이었어요. 베난티오의 죽음과 피. 베렝가리오의 죽음과 물... 이것 역시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았어요. 세베리노의 죽음과 하늘... 말라키아가 천구의로 세베리노를 타살한 것은, 마침 그게 제일 먼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말라키아와 전갈... 왜 말라키아에게는 그 서책이 천 마리 전갈과 같다고 했지요?'
'그대 들으라고 그랬지요. 이건 알리나르도의 머리에서 나온 거랍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러더군요. 그대 역시 피해자들의 사인을 <요한의 묵시록>과 관련시켜 가면서 생각한다고... 그거 괜찮겠다 싶어서 한번 맞추어 보았지요. 그렇게 맞추어 가면서 보니 이들에게는 아닌게아니라 천벌이 내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따라서 나는 책임을 덜 느껴서 좋았지요. 그래서 말라키아에게도, 호기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똑같은 신의 계획에 따라 죽게 될 거라고 경고했는데, 녀석도 과연 그렇게 죽었어요.'
'그랬었군요. 나는 범인의 움직임을 하나의 가상적인 본으로 설정해 놓고 있었는데 과연 나의 이런 가정이 헛되지 않았군요. 내가 당신을 추적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가상적인 본 덕분이었어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요즈음의 모든 수도사들은 성요한의 <묵시록>에 발목잡혀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당신이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발목잡혀 있었어요.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을 놓고 핏대를 올릴 것 같았는데, 사실은 <요한의 묵시록>이더란 말입니다. 당신의 조국이 <요한의 묵시록> 이상의 묵시록을 써내었기 때문일 테지요. 언젠가 나는 이판 묵시록 사본을 이 장서관으로 들여온 사람이 당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또 언젠가는 알리나르도의 푸념을 들었는데 그 노인은 실로스로 서책을 구하러 떠났다는 정체불명의 경쟁자 이야기를 하더군요. 알리나르도는, 그 경쟁자라는 사람이,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럴 나이도 아닌데 암흑의 나라에 들었다고 합디다. 그 말을 들었을 당시 내 호기심은 절정에 이르렀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장님이 되었다는 뜻이더군요. 즉 알리나르도는 당신을 가리키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실로스는 당신의 고향 부르고스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오늘 아침에 나는 목록에서 당신이 리미니 사람 파올로의 사서 자리를 승계한 뒤, 혹은 승계하기 직전에 구입한 일련의 도서가 모두 스페인 판 묵시록인 걸 알았어요. 그때의 구입 서책에는 물론 이 서책도 들어 있었고요. 그러나 사라진 책이 아마지로 되어 있다는 걸 확인하기까지는 내 가정을 확신할 수 없었어요. 당신이 실로스로 갔다는 걸 알았을 때 비로소 자신을 가졌던 겁니다. 그랬더니 이 서책과 책장에 발라 놓은 독물의 정체가 무너지면서 비로소 <요한의 묵시록>과 관련된 내 가상적인 본은 무너집니다. 허나 이 서책과 일곱 나팔소리를 어떻게 엮어 내어야 할지 그게 막연하더군요. 그러나 <묵시록>을 중심으로 한 가상적인 본에 매달린 덕분에 나는 바로 이 서책의 내용에까지 접근할 수 있었고, 여러모로 당신이라는 사람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특히 웃음에 대해 당신과 벌였던 토론은 좋은 약이 되었지요. 오늘 밤에 나는, 사건이 묵시록적 예언과 일치한다는 가정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내 시자에게는 계속해서 외양간을 잘 지켜보라고 했어요. <묵시록>에 따르면 여섯 번째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기마병이 나타난다고 예언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바로 그 외양간에서 내 시자가 문득 이 <아프리카의 끝>으로 들어오는 열쇠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대의 말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소. 그대는 가상적인 논리를 실마리 삼아 이곳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대체 그대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무엇이오?'
'단지 내 좌절의 순간을 되씹어 보고 있을 뿐,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 같은 건 없어요.'
'주님께서는 일곱 번째 나팔을 불고 있소, 그대 귀에도 그 소리의 희미한 울림이나마 들렸을 것이오.'
'어젯밤의 강론에서 바로 당신이 한 소리가 아니던가요? 당신은, 스스로가 살인자라는 것을 숨기고, 이 모든 일이 하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는 암시를 남에게, 당신 자신에게 주고 싶었겠지요? 그래서 그런 억지를 부리고 있었던 게요.'
'나는 누구를 죽인 적이 없어. 모두 제가 지은 죄값... 제 운명에 따라 죽었을 뿐... 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소.'
'어젯밤에 당신은 유다 역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더군. 허나 도구였던 유다 역시 저주를 받았다는 건 왜 모르시지?'
'나는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아.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한 짓임을 모르지 않을 진대 어찌 주님께서 나를 사면하시지 않으리? 장서관을 지키는 것, 그것은 나의 의무였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신은 나를 죽이려 했소. 그리고 여기에 있는 내 시자까지...'
'그대는 영리한 사람이오만, 남들을 앞질러 크게 영리한 것은 아니오.'
'내가 당신의 덫에 걸렸더라면...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되는 것이오?'
'흠, 걸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내게는 그대를 죽일 필요가 없어. 그대를 설득하면 되는 일이니까. 허나 먼저 궁금한 게 있군. 문제의 서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지?'
'웃음에 대한 당신의 과민한 반응만으로야 어디 어림인들 있었겠소? 당신이 다른 수도사들과 벌였다는 그 토론에 대해서도 내게는 아는 바가 많지 못했고... 처음에는 나도 이런 토론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어요. 그러나 서책의 내용에 대한 비망록을 보았더니, <부끄러운 돌이 광야를 구른다>... <매미가 땅속에서 운다>... <점잖은 무화과>... 이런 글귀가 보입디다. 이런 거라면 나도 읽은 적이 있지요. 실제로 나는 요 며칠 동안 이것을 확인했어요.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1권과 <수사학>에도 나오는 표현이지요. 여기에서 나는 희극에 대한 세빌리아 사람 이시도루스의 정의를 생각해 보았소. 희극이란... <동정녀의 음란죄와 창부의 사람>이라던가... 어쨌든 뭔가가 도치되고 역전된 이야기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시학> 제2권의 윤곽이 잡혀 옵디다. 굳이 읽었다면 나 역시 당신의 의도대로 죽었겠지만 나는 읽지 않고도 내용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코메디>, 즉 <희극>이라는 말은 <코마이>, 즉 <시골 마을>이라는 말에서 비롯됩니다. 말하자면 희극이라는 것은 시골 마을에서 식사나 잔치 뒤에 벌어지는 흥겨운 여흥극인 것이지요. 희극이란 유명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천하고 어리석으나 사악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희극은 보통 사람의 모자라는 면이나 악덕을 왜곡시켜 보여 줌으로써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연출하지요.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을, 교육적 가치가 있는, 선을 지향하는 힘으로 봅니다. 거짓이 아닌 것은 분명하나 실상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런데 희극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을 보여 주는데도 불구하고 기지 넘치는 수수께끼와 예기치 못하던 비유를 통해 실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검증하게 하고, <아하, 실상은 이러한 것인데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하고 감탄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실제보다 못한, 우리가 실제라고 믿던 것보다 열등한 인간과 세계를 그림으로써, 성인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 준 서사시보다, 비극보다 더 열등한 것을 그림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어지간히 접근했소이다만, 그러니까 그대는, 다른 서책을 통해서 거기까지 접근했다는 것이오?'
'대부분은 베난티오의 비망록을 보고 알았지요. 베닌티오는 상당 기간 이 서책을 찾으려 했던 모양입디다. 베난티오는, 내가 그랬듯이, 목록에서 내용만 일별하고도, 그게 자기가 찾고 있던 서책이라는 걸 알아보았을 테지요. 허나 그는 <아프리카의 끝>으러 들어오는 방법을 찾지 못했어요. 그러던 차에 베렝가리오가 아델모를 상대로 이런 얘기하는 걸 엿듣자 메토끼 덫에 걸린 사냥개처럼 펄쩍 뛰었을테지요.'
'사실 그대롭니다. 그러나 나도 눈치는 채고 있었어요. 그래서 장서관을 지킬 때가 왔구나... 이빨에는 이빨로, 못에는 못으로 장서관을 지킬 때가 왔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래서 책장에다 독을 발랐군요. 어둠 속에서 그런 일을 하자나 얼마나 어려웠겠소?'
'내 손은 그대의 눈보다 낫소이다. 세베리노에게 솔 같은 걸 가져 오게 했지요. 물론 장갑도 끼었고... 그대는 오랜 좌절과 고구 끝에야 장갑을 낄 수 있었겠지만.'
'그래요. 나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걸 상상했지요. 가령 독을 칠한 바늘 같은 것을... 당신이 쓴 방법이 대단히 영리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고, 침입자는 십중팔구 혼자 있을 때, 혼자서 도둑질이라도 하는 듯이 서책을 읽다가 중독되었을테니까...'
나는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생사가 걸린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두 분이 오로지 상대의 갈채를 받기 위해서 싸워 온 것인 양 서로 상대에게 감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렝가리오가 아델모를 유혹하는 데 쓴 수법, 나의 감정과 욕망을 유발시키기 위해 여자가 보인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은, 사부님과 호르헤 노인이 겨루어 온 두뇌와 재주,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교묘한 언변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 만치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레 동안 두 사람은 교묘한 약속 아래, 서로 두려워하고 서로 증오하면서 은밀히 서로를 찬양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사부님이 다시 화제를 열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 하나 있소. 그 연유나 좀 들어봅시다. 하고많은 서책 중에서 어째서 이 서책만 그렇게 싸고돌았는지... 무엇 때문에 당신은 갖가지 요술로 속임수를 쓰고, 당신 자신까지 저주를 면치 못할 짓을 하면서까지 이 책을 감추려 했소? 이 서책이 당신의 끔찍한 범죄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책이던가요? 희극을 논하고 웃음을 찬양한 서책은 얼마든지 있소. 왜 하필이면 이 서책이 유포되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게 되었던가요?'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오.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은 하나같이 기독교가 수세기에 걸쳐 축적했던 지식의 일부를 먹어 들어갔소. 우리의 초대 교부들은 일찍이, 말씀의 권능을 깨치는 대 필요한 가르침을 모자람 없이 베푸셨소. 헌데 보에티우스라는 자가 이 철학자의 서책을 극찬함으로써 하느님 말씀의 신성은 인간의 희문으로 변질되면서 삼단 논법의 희롱을 받아 왔소. <창세기>가 우주 창조의 역사를 모자람 없이 설병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자연학>에 아베로에스는 세계는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고 망발했소.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익히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수도원 원장이 장사까지 지내 준 한 도미니크 회 수도사(토마스 아퀴나스를 말함)는 저 철학자의 꾐에 빠져 하느님을 자연의 이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불렀소. 디오뉘시오스 아레오파기타가 은혜로운 섭리의 아름다운 폭포로 그려 내었던 우주가 이때부터는 추상적 기능을 대변하는 지상적인 것의 소굴로 화했어요. 예전 같으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이 땅의 변질을 내려다보면서 눈살을 찌푸렸을 터인데 오늘날에는 땅이 있음으로 해서 하늘을 믿으려 하오, 오늘날에 와서는 성자와 선지자들까지도 신봉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철학가의 일자일언이 바야흐로 세상의 형상을 바꾸어 놓기에 이르렀어요. 이 서책이 공공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는 날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어 놓으신 마지막 경계를 기어이 넘게 되고 말 것이오.'
'웃음을 왈가왈부하는 데 당신이 왜 겁을 먹는 것이지요? 이 서책을 없앤다고 해서 웃음이 없어지겠소?'
'아니오. 결단코 아니오.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허약함, 부패, 우리 육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웃음이란 농부의 여흥, 주정뱅이에게나 가당한 것이오. 지혜롭고 신성한 교회도 잔치나 축제 때는 이 일상의 부정을 용납하여 기분을 풀게 하고 다른 야망과 욕망을 환기시키는 것을 용납하고 있기는 하오, 허나 웃음이 원래 천박한 것, 범용한 자들의 제 진심을 얼버무리는 수단, 평민을 비천하게 만드는 것임에는 변함이 없어요, 사도들도 일찍이, 불에 타죽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다고 한 적이 있소이다만, 하느님이 세우신 천상의 이치를 어기는 것보다야 밥상을 물린 다음, 술동이와 술잔을 비운 다음 사악한 희문을 농하면 웃는 편이 나을 것이기는 하오. 바보로 왕을 세우고, 나귀와 돼지의 항연에서 제정신을 잃고 히히덕거리고, 경건을 떨며 농신의 제사를 올리는 편이 좋겠지요. 허나, 여기, 여기에는...'
호르헤는, 사부님이 펼쳐 들고 있는 서책 바로 옆의 서안을 치면서 말을 이었다.
'...여기에는 웃음이 맡는 일몫이 왜곡되어 있어요. 이 서책에, 웃음은 예술로 과대 평가되어 있고, 식자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으로 과장되어 있어요. 이것이 철학이나 부정한 신학의 대상이 된대서야 어디 말이나 되는 노릇입니까? 그대는 어제, 범부가 어떻게 하면 감히 머리에 무서운 이단의 생각을 담고, 이를 실행하고, 이로써 하느님의 율법과 자연의 이치를 부인하게 되는지 잘 보았겠지요? 교회는 범부의 이단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오. 그들은 제 죄로 저 자신을 심판하거나 무지로 자멸하게 되는 법이랍니다. 따라서 돌치노와 그 추종하는 무리의 부지한 광기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위태롭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폭력을 가르칠 것이로되 곧 폭력으로 자멸하고 따가 되면 잔치가 끝나듯이 세월이 지나면 자취도 없이 소멸하고 마는 법이랍니다. 잔치 기간 동안 한때 거꾸로 된 세계의 모습을 보고 깔깔거린들 무슨 의미가 있답니까? 이런 행위는 거대한 집단의 움직임으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런 천박한 언어를 옮겨 적을 라틴어가 이러한 문화에는 없는 까닭입니다. 내가 알기로 웃음은 사악한 인간을 악마의 두려움에서 해방시킵니다. 왜? 바보의 잔치에서는 악마 또한 하찮은 바보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시비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 서책에 이르면 문제는 달라져요. 이 서책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을 <지혜>라고 부르고 있어요. 술로 목젖을 가르랑거리듯이 웃으면서 사악한 인간은 제가 주인이라도 된 듯이 뽐내는 법이오. 왜? 취하면 스스로를 주인으로 여김으로써 그 주종 관계를 역전시킬 수도 있는 것이니까. 헌데 이 서책은 바로 그 순간부터, 머리 좋은 식자들에게 이 역전을 합리화할 책략을 가르치고 있어요. 다행히도 무식한 대중은 그러한 역전을 몸으로는 믿어도 머리로는 믿지 않아요. 그러므로 범용한 인간에게 적당한 웃음은 죄인인 우리의 분수를 알게 한다는 뜻에서 반드시 타기해야 할 것은 아닐 테지요. 그런데 이 서책을 읽다 보면, 그대같이 타락한 인간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삼단 논법으로 비약시키게 함으로써 웃음을 인간의 목적인 양 오인하게 합니다. 웃음은 잠시 동안 범부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 두려움을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하지요. 헌데 이 서책은 악마를 두들겨 불똥이 튀게 하고, 이 불똥으로 온 세상을 태우려 하는가 하면, 프로메테우스도 알지 못하던 이 웃음을, 두려움을 물리치게 하는 데 대단히 요긴한 희한한 예술로 정의하고 있어요. 웃는 순간, 사악한 인간에게는 죽음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지나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상으로 되돌아오면 죽음의 두려움이 잊혀졌던 계절처럼 되돌아옵니다. 헌데 이 서책에 따르면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죽음을 쳐부술 수 있는 새로운 파괴적 겨냥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우리 죄많은 인생이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그래서 선견자가 되고 천상적 은혜의 총아가 되어서 어쩌자는 것이오? 과거 수세기 동안 우리 신학의 박학들과 교부들은 신성한 가르침의 향기로운 요체를 은밀히 간직한 채로, 고결한 사상을 통하여 인간을 타락한 쾌락과 천박한 유혹으로부터 구제하려 했어요. 그런데, 풍자극이나 광대극과 싸잡아 희극을 평가하되, 불완전하고 허약한 인간의 연기를 통하여 감정의 순화를 낳는 양 평가하는 이 서책은 오히려 천박한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사악한 식자로 하여금 악마적으로 뒤틀린 거만한 자들을 구하려 하고 있어요. 이것을 그대로 두면 이 서책이, 인간이 이 땅의 환락경만으로도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해괴한 사상을 고취시킬 우려가 있어요. 그대의 스승이라는 로저 베이컨이 자연의 경이가 곧 천국이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았듯이 말이오.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여서도 아니 되는 사상이오. 대체 성서를 그렇게 왜곡시킬 수도 있는 것이랍디까? 수도사라는 것들은 그래도 읽으면 그게 악마의 놀음인줄을 압니다. 헌데 저 철학자의 말이, 타락한 상상력이 빚어낸 아슬아슬한 농담이 진실로 믿어지는 날에는 어떻게 되겠어요? 중심의 개념이 무너지고 말아요. 그때가 되면 하느님 백성은 <미지의 세계>의 심연에서 기어오른 무수한 괴물의 무리가 될 터이고, 그 미지의 세계가 기독교 제국의 심장부가 될 것이며 외눈박이 괴물 아리마스피가 베드로의 자리에 앉고, 이집트의 블렘미 족속이 수도원으로 들어오고, 장구머리 장구통 배의 난쟁이가 사서 노릇을 하게 될 것이외다! 물목하니가 율법을 휘두르면(당신을 제외하고는) 이 무법 천지에서 그저 거기에 복종만 하고 있어야 되는 일이오? 그대가 섬기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서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엉터리 권위자인 그리스의 어느 철학자는, 까다로운 적도 웃음으로 조복시킬 수 있으니, 웃음은 능히 까다로움을 조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소.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던가요? 그러나 우리의 지중하신 교부들은 달리 생각하셨으니, 율 아래서 질책과 조정을 받아야 한다고들 하시었소. 범부들에게는 웃음을 제어할 무기가 없기 때문에, 이들을 영생으로 이끌고 배와 엉덩이와 먹을 것과 더러운 욕망으로부터 이들을 구하자면 마땅히 목자들은 이를 엄격한 규율 아래에다 두어야 하는 것이오. 헌데 미래에 누군가가 저 철학자의 말을 휘두름으로써 철학자인 양 뽐내며 웃음이라는 무기를 진짜 무기인 양 쳐드는 날, 설득의 수사학이 야유의 수사학이 되고, 구원의 상징에 대한 끈질긴 언어의 구조물이 성스럽고 거룩한 상징을 와해시키고 전복시키는 짜증스러운 언어의 구조물이 되는 날... 이것 보아요. 윌리엄 형제. 그대나 그대의 지식은 도매금으로 쓸려 나가고 마는 것이오.'
'왜? 내 기지가 남의 기지만 같지 못해서요? 베르나르 기 같은 인간의 불이 돌치노의 불을 능멸하는 세상보다는 그 세상이 훨씬 낫겠소이다.'
'하면 그대 역시 그때가 되면 악마의 음모에 가담하게 되겠군. 그러면,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는 하르마게돈에서 그대는 저쪽 편에서 싸우겠구나! 허나 그날이 오기까지 교회는 다시 한번 그런 싸움을 주관할 수 있어야 하오. 우리는 독신을 무서워하지 않소. 하느님에 대한 저주에서도 우리는, 모습만 다를 뿐, 반역하는 천사들을 저주하신 야훼의 분노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오. 우리는, 역명이라는 환상의 이름으로 목자를 죽이는 자들의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소. 이 폭력은, 이스라엘 백성을 쳐부수려던 사악한 무리의 폭력과 같기 때문이오. 우리는 도나투스 파의 엄격함, 할례자들의 집단 자살, 보고밀 파의 음란함, 알비 파의 지나친 결벽, 편타 교행자들의 피, 자유의 정신을 좇는 무리의 광기도 두려워하지 않소. 우리가 그들을 알고, 그들 죄업의 뿌리가 우리 성성의 뿌리와 같음을 알기 때문이오. 그렇소. 우리는 그들을 파멸시킬 방법을 알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오. 그대로 두면 그네들의 구렁텅이에서 생겨난 뜻은 제풀에 그 절정에서 무너지게 되어 있으니 그들을 자멸케 하는 방법도 우리는 알고 있어요. 아니, 하느님 섭리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소중하오. 그들의 죄악이 우리의 미덕을 장려하고, 그들의 저주가 우리의 찬미를 자극하고 그들의 불경이 우리의 신심을 빛나게 하고, 그들의 미숙한 참회가 우리 제물의 맛을 돋구기 때문이오. 이는 마치 모든 희망의 시작이자 종말인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려면 악마와 악마의 간계와 악마의 절망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랍니다. 허나 때가 되어 희롱하는 재간이 일반에 유포되고, 그것이 품격과 자유로 통하여 더 이상 손쓸 여지가 없게 될 때, <나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현현한 것을 비웃었다>는 소리가 들려 오게 될 때, 불멸의 성서를 섬기고 배운 학승이나 고행승의 손은 모르되 범부의 손은 독신과 싸울 무기를 잃게 됩니다. 이때가 되면 독신은 트림과 방귀뿐인 육신의 사악한 권능을 부르고, 이 트림과 방귀는 정신의 권리를 제 권리로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리쿠르고스는, 웃음의 미덕을 기려 기념비를 세웠다는데요?'
'불경스러운 자들의 죄악인 광대극을 용인하고, 웃기지 못하는 의원보다는 웃기는 의원이 환자에게 더욱 이롭다고 주장하는 클로리티아누스의 책을 읽은 게로군. 하느님께서 그 병자의 명을 주관하실 터인데 웃기지 못하는 의원은 무엇이고 웃기는 의원은 또 무엇이야?'
'나는 의원이 환자의 병을 고친다고 믿지 않습니다. 의원은 환자에게 병을 비웃는 법을 가르친답니다.'
'병이라는 것은 쫓아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박멸해야 하는 것이오.'
'병자와 함께?'
'필요하다면!'
'이 영감아,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사부님이 처음으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호르헤는 뜻밖의 고함 소리에 놀라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가 남들처럼 볼 수 있다면, 이 대목에서는 화등잔만한 눈으로 사부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내가... 말인가?'
노인이 물었다.
'그래! 잘 들어 둬. 당신은 속았어. 악마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는 권능이 아니야.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게 바로 악마야! 악마는 그가 가고 있는 곳을 알고 있고, 움직이면서 언젠가 그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음험하지, 악마는 교활해! 무슨 까닭으로? 당신이 어디에 이를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야. 따라서 영감이 바로 악마야! 봐라, 영감은 악마답게 이렇게 어둠 속에서 살고 있지 않아! 영감이 나를 설득하려 했다면 그건 실패로 끝났어. 영감, 나는 당신이 싫어. 당신 같은 인간이 싫어. 가능하다면 영감을 아래층으로 굴렸다가 마당으로 끌고 나가 옷을 홀랑 벗기고 똥구멍에는 깃털을 꽂고 면상에는 물감을 칠하여 요술쟁이나 어릿광대로 만들어 놓고 싶어! 그러면 수도원 전체가 영감을 보고 깔깔거릴 테지. 그래, 영감의 몸에다 꿀을 잔뜩 바르고 깃털 위로 굴린 다음 가죽끈을 목에다 감아 끌고 저잣거리로 나가 이렇게 외치고 싶군. <이 영감이 여러분에게 진리를 말한다. 진리라는 것이 죽을 맛이라고 하고 있으니 여러분은 영감의 말을 믿을 것이 아니라 꼴을 믿으시라!> 영감, 내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하거니와,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은혜의 폭포를 영감에서 허락하시고도 한 가지를 더 하락하셨어. 그게 뭔고 하니, 세상에 대한 영감의 그 거지 같은 상상력이야. 이 세상의 그 잘난 체하는 진리의 해석자란, 오래 전에 배운 말이나 깍깍거리는 얼빠진 까마귀와 다를 바 없어!'
'소형제 수도사여, 너는 악마보다 질이 더 떨어지는구나! 너희들이 만들어 낸 저 프란체스코라는 자가 그렇듯이 너 또한 광대로구나. 어, <온몸으로 하나의 혀를 만들어내니>. 그러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약장수처럼 마술을 부리며 설교하고, 손에다 금돈을 쥐어 주어 배랑뱅이의 혼을 빼놓고 강론 대신 <미제레레>(다윗 왕이 바쎄바와 통정한 뒤에 지은 시편의 서장)나 읊어 수녀들의 근행을 모독하고, 프랑스어로 탁발하고, 나이 흉내나 내고, 발가벗고 눈 위에 눕고, 금수에게 말을 걸고, 그리스도 강탄의 신비를 동네 굿으로 만들고, 염소소리로 베들레헴의 양 떼를 부른 네놈들의 그 프란체스코와 어쩌면 이리도 똑같으냐? 오냐, 잘 배웠다. 피렌체의 행각승 디오티살비도 네놈들 수형제 수도사렸다?'
사부님은 약간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응수했다.
'암, 그렇고말고... 디오티살비 수도사가 어떤 분이시더냐? 목자들의 수도원으로 가시어, 유품으로 간직할 조반니 수도사의 법의 조각을 주지 않으면 음식을 드실 수 없다고 배짱을 부린 수도사이시다. 수도사들이 법의 조각을 내어 놓자 이걸로 뒤를 닦고는 똥덩이에다 팽개치고 작대기로 휘휘 저으면서, <형제들이여, 나를 도와주시오. 내 성자의 유품을 똥뒷간에다 빠뜨렸소>, 하고 외치신 분이시다. 당신이 이런 경계를 어찌 알겠느냐?'
'그게 그리도 재미있더냐? 암, 재미있을 테지. 하면 소형제 행각승 파올로 밀레모스케도 알겠구나. 눈 위에 네 활개를 뻗고 누웠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울 곳이 그리도 없느냐고 놀리면, <오냐, 네 마누라 배 위라면 가서 눕지>, 했다더냐? 너와 너희 무리의 배랑뱅이 중들은 그런 식으로 진리를 구하더구나.'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만물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라고 하셨으니,영감은 이 경계를 몰라.'
'그러나 규율을 내려 준 건 우리야! 어제 네 형제들. 네 떨거지들도 못 보았느냐? 우리 교단에 들어오고 나니 하는 말이 범부의 수준이 아니더구나. 허나 범부가 말을 하면 안 된다. 이 서책은, 범부의 혀를 지혜를 나르는 수레라고 가르치는데 내가 어찌 이를 그냥 둘 수 있으리. 나는 이제 뜻을 다 이루었다. 너는 나를 악마라고 한다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니라. 나는 하느님의 손이었느니라.'
'하느님의 손은 창조하지, 감추지는 않는다.'
'넘어서 좋은 경계가 있고 넘어서 아니 될 경계도 있는 법이다. <여기에 사자가 있다>는 말이 안 들어가 있어도 좋은 서책, 안 들어가서는 아니 되는 서책(<아프리카의 끝>이라는 밀실에 소장되어야 하는 금서)... 이것도 하느님께서 정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괴물도 지어내시는 걸 왜 모르느냐? 그래서 영감 같은 괴물도 지어내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기를 바라신다.'
호르헤가 떨리는 손으로 문제의 서책을 집어들고는 사부님 앞에다 펼쳐 보이면서 소리쳤다.
'하면, 어째서 하느님께서는 이 서책이 여러 세기 동안 드러나지 못하게 하시다가, 나머지는 하느님만 아시는 곳에서 멸하시고 필사본 한 책만 남기셨겠느냐? 어째서 하느님께서는 이 한 책마저 오랜 세월 그리스 말을 모르는 이교도들 손에 맡겨 두셨다가 이 장서관으로 흘러 들어오게 하셨겠느냐? 하느님께서는 어째서 네 손이 아닌 내 손으로 하여금 이 서책을 오랜 세우러 여기에 숨겨 놓게 하셨겠느냐? 나는 이 서책을 아느니... 네가 못 보는 것도 능히 볼 수 있는 눈으로 이 견고 무비하게 씌어진 서책을 본 듯이 아느니라. 나는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도 아느니라. 그래서 주님 뜻대로 하였느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하였느니라...'
한밤중
노인은 잠잠했다. 구겨진 책장을 읽기 편하게 펴려는 듯이, 아니면 맹금의 발톱으로부터 서책을 지키려는 듯이 그는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서책을 감싸들고 책장을 쓰다듬었다.
사부님이 노인을 윽박질렀다.
'그래 봐야 다 부질없어. 이제 끝났어. 나는 영감을 찾아내었고, 서책을 찾아내었어. 다른 형제들은 개죽음을 당했고...'
'개죽음이라니 당치 않아. 수가 좀 많기는 했지만 그래도 개죽음은 아니었어. 이것이 저주받은 서책이라는 증거가 필요하다면 너는 벌써 그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이 개죽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하나 더 죽어서 안 될 것도 없지.'
노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은, 그래서 투명해 보이는 손으로 그 서책의 책장을 가늘게 찢어 입안에 넣고는 그 책장으로 제 몸을 살찌우려는 듯이 오물오물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사부님은 여상스러운 얼굴로 호르헤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잠시 뒤에야 노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는지 고함을 질렀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호르헤 노인이 핏기 없는 잇몸을 드러내고 웃었다. 턱 위로 돋은 듬성듬성한 흰 수염 사이로, 파리한 입술에서 흐른 침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대는 지금 일곱 번째 나팔소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 저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그 일곱 천둥이 말한 것을 비밀에 붙여 두고 기록하지 말아라. 그것을 받아 삼켜 버려라... 이것이 네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나 배에 들어가면 배를 아프게 할 것이다>(요한의 묵시록) 들었느냐? 내가 곧 무덤이 될 터이다. 그 비밀을 나는 나의 무덤에다 봉인하리라!'
그는 웃었다. 그가, 호르헤가. 그가 웃는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목구멍으로 웃었다. 입술은 웃는 꼴을 하지 못했다. 아니, 웃는 것이 아니라 우는 것 같았다.
'윌리엄, 그대는 몰랐지? 이렇게 되리라고는... 보라, 하느님 은혜로 이 영감은 또 한 차례의 승리를 거두고 있지 않은가!'
사부님이 그 서책을 빼앗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노인은 공기의 떨림으로 사부님의 손놀림을 알아차리고 왼손으로는 서책을 가슴에 안고 오른손으로는 계속해서 책장을 가늘게 찢어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노인과 사부님 사이에는 서안이 있었다. 사부님은 노인을 붙잡으려고 그 서안을 여러 바퀴 돌았으나 번번이 의자가 쓰러지거나 법의 자락이 서안 모서리에 걸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호르헤 노인은 사부님의 그런 움직임을 일일이 감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부님이 멈칫하는 순간, 호르헤는 다시 소리 내어 웃으면서 오른손을 내미는 순간 엄청나게 빠른 손놀림으로 등잔을 더듬다가, 손바닥으로 등잔불의 열기는 느끼는 순간 손바닥으로 등잔을 덮쳐 불을 꺼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아프리카의 끝>은 칠흑 어둠으로 변했다. 어둠 속에서 호르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할 수 있겠거든 나를 찾아보아라! 이제 이 안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바스락 소리도 내지 않았다. 분명히 밀실 안을 움직이고 있을 텐데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씩 엉뚱한 방향에서 종이 찢는 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다.
'아드소! 문 옆에 붙어 서거라!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해야한다!'
사부님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노인을 덮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등잔불이 꺼지는 순간에 서안을 돌아 노인 있는 쪽으로 더듬어 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고함소리를 듣는 순간에야 나는 사부님을 덮치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사부님에게 부딪침으로써, 노인을 문 쪽으로 몰아준 셈이 되고 말았다. 노인은 등잔과 상관없이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어둠 속을 더듬고 있는데 우리 뒤에서 종이 찢는 소리가 들려 왔다. 노인은 이미 문을 나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종이 찢는 소리에 이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거울이다! 영감이 우리를 안에다 두고 거울 문을 닫고 있다!'
사부님이 외쳤다. 우리는 돌쩌귀가 내는 소리로 방향을 가늠해서 입구 쪽으로 돌진했다. 무엇인가가 내 발에 걸렸다. 나는 돌진하다가 의자에 걸려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다리를 문지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호르헤 노인이 문을 닫아 버리면 밀실에 갇해게 된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작동시켜야 문이 열리는지 모르는 우리들로서는 일단 갇히면 끝장이 나는 것이었다.
사부님도 나처럼 돌진했던 것 같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달려가, 밖에서 안으로 닫히는 문을 등으로 밀었다. 우리의 계산이 적중한 것 같았다. 밖에서 안으로 닫히던 문은 우리의 힘에 밀려 다시 열렸다. 호르헤는 그 문에 붙어서 있지 않았다.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문 옆으로 비켜섰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그 밀실에서 나왔다. 호르헤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주위는 코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제서야 법의 주머니에 부싯돌을 넣은 기억이 났다.
'사부님, 저에게 부싯돌이 있습니다.'
'그럼 왜 그러고 있느냐? 어서 등잔을 찾아 불을 켜지 않고?'
나는 다시 밀실 <아프리카의 끝>으로 들어가 바닥을 더듬어 등잔을 찾아내였다. 부싯돌을 꺼내었으나, 손이 떨려 두어 번 헛손질을 하고 있는데 사부님이 문 앞에서 나를 채근했다.
'서둘러라, 뭘 하고 있느냐?'
그 소리에 ?기면서 나는 불을 켰다.
'서둘러라! 서둘지 않으면 저 영감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다 먹어 치우겠다!'
수부님의 불효령이 떨어졌다.
'다 먹어 치우고는 죽을 테지요.'
사부님과 합류하면서 나는 심술을 부렸다.
'저 영감탱이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거기에 붙어 있는 독약을 먹고 있으니 지금 먹은 양으로도 영감은 명재경각이다. 문제는 서책이야. 서책을 찾아야 해!'
사부님은 길길이 뛰면서 소시를 지르다 말고 걸음을 멈추고는 가만히 내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잠깐... 이런 식으로는 백날 해도 안되겠다. 쉬... 어디 숨을 죽이고 기다려 보자'
우리는 숨을 죽였다. 사부님의 계산이 적중했다. 적막 속에서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별로 먼 거리가 아니었다. 노인의 몸이 궤짝에 부딪치는 소리, 서책이 우르르 떨어져 내리는 소리.
'저쪽!'
사부님과 내가 거의 동시에 지른 소리였다.
우리는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걸음을 늦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밀실 <아프리카의 끝>의 밖은 바람이 거칠었다. 장서관 안으로 들어온 바깥 바람이 벽과 벽 사이를 지나면서 작은 돌개바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먹고 달리다가는 천신만고 끝에 켠 등잔불을 다시 꺼뜨리기 십상이었다. 우리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지 못할 바에는, 호르헤로 하여금 역시 빠른 속도로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사부님은 나와는 정반대되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사부님은 어둠 속에댜 대고 또 한 차례 고함을 질렀다.
'영감아! 당신은 붙잡힌 거나 다른없어! 우리는 등잔불을 다시 켰어. 그러니까 발악해야 소용없어!'
사부님의 계산이 호르헤의 의표를 찌른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노인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불안에 쫓기면서 그의 초자연적인 감각과 어둠을 뚫어보는 장님 특유의 초감각 능력이 무색해진 셈이었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그의 소리를 좇아 <이스파니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두 손을 서책을 가슴에 댄 채로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서책 더미에 걸려 쓰러졌던 모양이었다. 그는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책장을 찢어 입 안에 넣는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앞까지 다가갔을 때는 그 역시 일어서 있었다. 우리의 접근을 감지한 그는 처음에는 우리 앞을 가로 막아 보려다가 생각을 바꾸고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등잔 불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참으로 흉측했다.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미간과 뺨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평소에는 하얗게 보이던, 흰자위뿐인 그의 눈도 이상하게도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가늘게 찢긴 아마지가 그의 입술 사이로 비죽 나와 있어서, 흡사 목이 막혀 먹이를 삼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괴물 같아 보였다. 불안과 초조에 몰른 데다, 혈관으로는 맹독이 퍼지고 악에 치받쳐 있는 탓에 그 점잖던 고승대덕의 풍모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몰골이 흉측한 노인 하나만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그런 몰골을 비웃었을 터이나 우리 역시 사냥감을 물어뜯기 직전의 사냥개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조용히 붙잡을 수도 있는 것을, 힘으로 덮친 게 잘못이었다. 노인은 서책을 가슴에 안은 채로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나는 왼손으로 그르르 붙잡은 채 오른손으로는 등잔을 치켜 올리려고 쳔려일실 등잔을 그의 얼굴 앞으로 가져 가고 말았다. 그는 등잔불의 열기를 감지하고, 입에는 아마지를 잔뜩 넣은 채 야수처럼 울부짖으며 있는 힘을 다해 서책을 등잔에다 던졌다.
서책에 맞은 등잔은 공중을 날아가 서안 위에 펼쳐져 있던 다른 서책들 위로 떨어졌다. 기름이 엎질러지면서 불길은 곧 양피지 위로 번졌다. 양피지는 흡사 잘 마른 낙엽 같았다. 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장서관의 고서는 수세기동안 불길을 기다리고 있다가 일단 불길을 만나게 되자 함성이라도 지르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현실로 깨달은 사부님은, 나를 대신해서 잡고 있던 노인의 멱살을 놓았고, 사부님의 손에서 풀려난 것을 안 노인은 재빨리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부님은 잠시, 노인의 멱살을 다시 잡아야 할 것인지, 불길을 잡을 것인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불을 먹은 고서는 순식간에 불길을 뿜으면서 혀를 날름거렸다.
밀폐된 공간에서였다면 쉽게 잡혔을 불길이, 밖에서 불어들어오는 바람을 받자 기세를 높이며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곧 불똥이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빨리 불길을 잡아! 이러다가 다 태우겠다!'
사부님이 외쳤다.
나는 불길로 다가갔을 뿐, 어떻게 손을 써야 좋을지 몰라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사부님이 나를 도우러 왔다. 우리는 불길 잡을 만한 연장을 찾느라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손으로는 가까운 곳을 더듬었다. 문득 내 머리에 묘안이 떠올랐다. 나는 법의를 벗어 불길 한가운데로 던져 불길을 덮었다. 그러나 덮어 버리기에는 불길은 너무 세어져 있었다. 불은 순식간에 내 법의를 삼키고 그 기세로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손등으로 타는 듯한 통증이 왔다. 어느새 손등을 그을렸던 모양이었다. 나는 쓰라린 손을 가슴에다 대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내 뒤에는 사부님과, 호르헤 노인이 서 있었다. 열기가 얼굴 가득 느껴지는데 노인이 거기에 불길이 있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과연 노인에게는 불길 가까이 다가온 이유가 있었다. 호르헤 노인은 방향을 가늠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순간 사부님이 난폭하게 노인을 떠밀었다. 노인의 가냘픈 몸은 가랑잎처럼 밀려가 궤짝에 부딪쳤다. 궤짝 모서리에 머리를 찧었던지 노인은 바닥에 널브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사부님은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뿐, 노인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사부님은 서책에만 주의를 쏟은 채 그 서책을 꺼내려고 불길에다 손을 집어 넣으려 했다. 아뿔싸!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혹은 노인이 먹다 남은 고서는 이미 불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동안 불똥이 그쪽 궤짝 위의 서책으로 튀었던 모양이었다. 벽 앞의 궤짝 위에서도 불길이 일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불길이 인 곳은 두 군데뿐이었다.
사부님은, 이미 손으로 불길을 잡을 때는 지났다는 것을 알고, 서책으로 서책을 구해 보고자 했다. 그는 많은 서책 가운데서도 가장 두껍고 장정이 실한 서책을 골라들고, 불타는 서책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불타는 서책은, 후려칠 때마다 불똥만 날리고는 했다. 사부님은, 불타는 서책을 흐트려 놓으려고 발로 불길을 헤집었다. 역시 역효과가 났을 뿐이었다. 불이 붙은 양피지 조각이 박쥐처럼 날아 올랐다. 밖에서 불어 들어온 바람에 날려 이 박쥐는 다른 서책 무더기 위로 내려앉아 거기에서 다시 불씨를 퍼뜨렸다.
일이 그렇게 되려니까 그랬겠지만 그 방은 장서관의 미궁 안에서도 바닥에 가장 많은 책이 흩어져 있던 방이었다. 서가와 궤짝에서는 두루마리가 군데군데 비죽이 나와 있기도 했다. 책장을 혀처럼 비죽이 내밀고 있는 서책도 적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마를 대로 마른 송아지 피지는 불길에 닿자마자 가랑잎처럼 타기 시작했다. 서안 위에도, 말라키아가 제자리에다 ?지 못한 서책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말라키아는 보조 사서 없이 며칠 간 장서관을 돌보느라고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터였다. 그 방은 호르헤 노인이 등잔을 엎은 것을 신호로, 오랜 세월 오로지 그 군호만을 기다리던, 불길이라는 대군의 침입을 받은 것 같았다.
오래지 않아 방은 한 덩어리의 불길, 한 그루의 불타는 떨기나무로 화했다. 서가와 궤짝 역시 제물의 일부가 되어 소리를 내면서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서야 장서관 전체가, 오직 불똥이 튀기만을 기다려 온 거대한 번제단이었음을 깨달았다.
'물, 물이 있어야 해... 하지만 젠장, 이 화염 지옥에 물이 어디 있담!'
사부님이 고함을 지르려다가 고개를 꺾었다.
'주방에는 있습니다. 아래층 주방에는 있습니다.'
내가 고함을 질렀다. 사부님은,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불길에 비친 그의 얼굴로 노기가 어리고 있었다.
'오냐, 그래. 주방에는 물이 있겠지. 허나 내려갔다가 언제 올라오려느냐? 이 방이 악마의 밥이 된 연후에 올라오겠느냐? 이 방은 끝난 것이다. 어쩌면 다른 방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어서 내려가자. 나는 물을 찾아볼 터이니, 너는 경내의 사람들을 깨워라. 손이 필요하다!'
우리는 계단실로 통하는 길을 찾았다. 불길은 옆방까지 훤하게 비추었지만 불길에서 먼 곳은 여전히 칠흑 어둠이었다. 우리는 방향을 어림잡아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사부님은 그 길로 주방 문을 열었고 나는 밖으로 통하는 식당 문을 밀었다. 긴장과 흥분 때문에 손이 말을 듣지 않아 나는 여러 번 시도한 끝에야 식당 문을 열 수 있었다. 나는 풀밭을 가로질러 숙사 쪽으로 달려가다가, 그때서야 비로소 수도사들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찾아다니면서 깨울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나는 교회 쪽으로 내달아 종탑의 입구를 찾았다. 나는 종 줄 여러 개를 한꺼번에 잡고 거기에 매달렸다. 맨 가운데의 종 줄이 내 몸무게에 끌렸다가 다시 종 쪽으로 쏠렸다. 그 바람에 내 몸이 발판에서 공중으로 떠올랐다. 손등은 화상을 입었지만 손바닥은 온전했다. 그러나 종 줄을 몇 차례 당기다 보니 손바닥 역시 화상을 입은 것만큼이나 아리고 쓰라렸다.
손이 아팠지만 할 일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교회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종소리를 듣고 숙사에서 뛰어나오는 수도사를 보았을 때야 나는 내 할 일을 너끈하게 해내었다는 걸 알았다. 멀리서, 오두막에서 나온 불목하니들의 목소리도 들려 왔다. 나는 그들에게 사태를 소상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다급했기 때문인지 이탈리아 말을 하려는데도 나도 모르게 자꾸만 내 모국어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화상으로 부풀어오르는 손으로 본관 남쪽 창을 가리켰다. 설화석고 창에 이미 불길이 훤하게 비치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아래로 내려오고 다시 종탑으로 올라가 종을 울릴 동안 불길이 다른 창으로 번진 것을 알았다. <아프리카의 끝>과 동쪽 탑루 사이의 창문이라는 창문에는 모두 너울거리는 불길이 비치고 있었다.
'물, 물을 날라 오세요!'
내가 고함을 질렀다.
처음에는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수도사들은 장서관을,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데 버릇 들어 있었다. 따라서 기껏해야 농촌의 오막살이나 덮치는 불길 따위의 위협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었다. 맨 먼저 나와 본관 창을 올려다본 수도사는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성호를 그었다. 장서관에서 나온다는 허깨비를 보았다고 생각한 것임에 분명했다. 나는 그 수도사의 멱살을 잡고 내 뜻을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타나, 잠꼬대 같은 나의 말을 인간의 언어로 통역했다.
모리몬도 사람 니콜라였다. 니콜라가 나를 대신해서 소리쳤다.
'불이야! 장서관에 불이 났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기력을 다 잃은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땅바닥에 꼬꾸라졌다.
니콜라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그는 불목하니들을 지휘하는 한편 주위에 모인 수도사들에게도 일을 할당했다. 그는 수도사 몇몇에게 본관 문을 모조리 열게 하고, 나머지에게는 그릇이라는 그릇은 모조리 찾아내어 물을 퍼오라고 소리쳤다. 그는 또 불목하니들을 모아, 우물과 수도원 저수관의 물을 퍼오게 했다. 목동들에게는 나귀를 끌어내어 물 항아리를 운반하게 하라고 명한 것도 니콜라였다.
사람이란, 직분에 맞는 차림을 하고 있어야 아랫사람을 조복시킬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불목하니들은 전임 식료계 레미지오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데 버릇 들어 있었다. 문서 사자실 필사사와 채식사들은 말라키아의 지시, 나머지 수도사들은 원장의 명령에 움직이는 버릇이 몸에 붙어 있었다. 아... 그러나 그들 셋은 모두 그 자리에 없었다. 수도사들은 명령과 지시를 받으려고 그러는지 두리번두리번 원장을 찾고는 했다. 그러나 원장이 거기에 있을 리 만무했다. 원장이, 그때쯤은 화덕이 되어 있을 그 비밀 통로에 갇힌 채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을 것임을 그들이 알 리 없었다.
니콜라가 목동들을 이쪽으로 모는가 하면, 니콜라를 도우려고 달려온 어떤 수도사는 목동들을 저쪽으로 몰았다. 그러니 목동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은 당연했다. 수도사들 가운데엔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사람도 있었고, 잠에 취해 정신을 반밖에 차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야 말할 힘을 차린 나는 수도사들에게 정황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법의를 벗어 불길 속으로 던진 다음이라 나는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양손으로는 피를 철철 흘리고, 얼굴은 불길에 시커멓게 그을린 데다가 실 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 그나마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이(당시의 내 나이가 그랬다)가 뭐라고 떠들어 봐야 누가 귀를 기울일 리도 없을 터였다.
이윽고 니콜라가 수도사 몇 명을 이끌고 그동안 누군가가 열어 놓은 문을 통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떤 수도사는 용케 횃불을 찾아 들고 나오기도 했다. 주방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사부님이 물을 처 나를 만한 그릇을 찾느라고 주방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이었다.
이때 나는 식당 문을 나서는 사부님을 보았다.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고 법의 자락에서는 연기가 나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냄비를 들고 있었다. 무기력의 상징이 될 만한 그 참담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아팠다, 나는 알았다. 사부님이 냄비의 물을 한 방울도 엎지르지 않고 장서관으로 올라가 끼얹었다고 하더라도 아니 몇 차례 그렇게 물을 끼얹었다고 하더라도 홍로점설에 다를 바 없었을 것임을...
문득 아우구스티누스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이 성인은, 숟가락으로 바닷물을 퍼내고 있는 한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천사였다. 소년으로 변장한 천사는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내려는 성인을 곯려 주느라고 숟가락으로 바닷물을 퍼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부님이 지친 듯이 문설주에 기대면서 바로 그 천사처럼 뇌까렸다.
'틀렸어. 이젠 안 돼. 이 수도원 수도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고 해도 이젠 안돼. 장서관은 끝났어.'
그러나 그 천사와는 달리, 우리 사부님은 울고 있었다.
나는, 식탁보를 벗겨 내 몸을 감싸려고 다가온 사부님을 껴안았다. 우리는 불길에서 물러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빈손으로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사람, 호기심이 동했던지 요량 없이 장서관으로 올라가다가는 불길에 떠밀려 그냥 내려오는 사람, 뒤늦게 물그릇을 찾으려고 길길이 뛰는 사람... 이런 사람들로 본관 앞은 뒤죽박죽이었다. 몇몇 침착한 수도사들은 냄비나 세숫대야를 하나씩 차지하고 물을 뜨러 주방으로 들어갔다가는 그냥 나오고는 했다. 주방의 물이 동나버렸던 모양이었다. 그때 주방으로 물 항아리를 실은 나귀때가 들이닥쳤다. 목동들은 주방에서 나귀 등의 물동이를 내려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문서 사자실로 오르는 길을 알지 못했다. 필사사들 도움으로 계단을 내려오던 수도사들과 부딪쳐 계단에서 한 덩어리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 바람에 물동이가 깨어지고 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목동 중 몇몇은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물동이를 건네주었다. 장서관 입구에서 짙은 연기가 무럭무럭 쏟아져 나왔다. 동쪽 탑루로 올라가려던 수도사 하나가 빨갛게 충혈된 눈을 하고는 연방 기침을 해대면서 지옥 같아서 도저히 뚫고 동쪽 탑루로 갈 수는 없더라고 말했다.
그 때 나는 베노를 보았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엄청나게 큰 물동이를 안고 계단으로 올랐다. 아래에서 누군가가 이름을 부르자 베노를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 겁쟁이들아, 지옥의 밥이나 되어라!'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 구원이라도 청하듯이 뒤를 돌아다보던 그의 눈이 내 눈과 만났다.
'아드소... 장서관... 아, 장서관!'
베노는 이렇게 뇌까리고는 내가 대꾸도 하기 전에 계단으로 올라가 연기 속으로 몸을 던졌다. 내가 그의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위에서 벼락치는 듯한 폭음이 들려왔다. 흙과 돌이 문서 사자실 천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꽃 모양의 천장이 내 머리를 비켜 내려 앉았다. 무너져 내린 것은 미궁의 바닥이었다.
몇몇 사람이 사다리를 운반해 왔다. 본관 바깥 창가에 사다리를 놓고, 창문을 통해 물을 쏟아 부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다리는 문서 사자실 창에도 미치지 못했고, 그나마 애써 올라간 사람이 힘을 다하는데도 창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아래쪽을 향해, 누구든 안으로 들어가 창을 열어 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누가 화덕이 다 되어 있는 문서 사자실로 들어가 창을 연단 말인가?
나는 맨 위층의 장서관 창을 올려다보았다. 마른 책과 마른 책 사이로 번진 불길이 다른 방으로 옮겨 붙어 장서관의 미궁이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은 이제 따로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창이라는 창은 모조리 불길을 내뿜고 있었고, 지붕 위로는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불길이 이미 대들보에 옮겨 붙었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철옹성같고 그렇게 안정감이 있어 보이던 본관 건물도 그 지경이 되자 약점을 보이기 시작했다. 불길이 안에서 벽을 달구자 이 벽이 갈라지면서 빨갛게 달아오른 돌의 파편을 사방으로 퉁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달아오른 돌은 나무를 만날 때마다 주위를 삽시간에 불바다로 만들었다.
내부의 압력을 받았던 듯, 갑자기 창이 차례로 폭발하면서 파편이 어두운 밤하늘을 불꽃으로 갈랐다. 거세던 바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불길을 잡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확산시키는 데 한 몫을 했다. 거센 바람이었으면 불똥을 날려 버렸을 테지만, 산들바람은 그 불똥을 부추겨 다른 곳으로 옮겨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들바람에 불붙은 양피지가 사방으로 날렸다. 또 한 차례 폭음이 들렸다. 장서관 바닥이 내려앉은 데 이어 불붙은 대들보가 내려앉는 소리였다. 나는 문서 사자실 창 밖으로 혀를 날름거리는 화염을 보았다. 문서 사자실의 서책과 상자, 종이, 서안 등에 불이 옮겨 붙으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불길은 점점 맹렬하게 타올랐다.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는 필사사들의 절규를 들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필사하던 땀과 눈물이 밴 양피지를 구하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헛일이었다. 주방과 식당은, 우왕좌왕하다 서로 부딪치고 밀치고 쓰러지는,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들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쓰러진 사람 위로 다른 사람이 쓰러져 켜를 이루었고, 물항아리를 들고 가던 사람은 거기에 걸려 쓰러지면서 귀한 물을 그 위에다 쏟았다. 나귀 떼는 주방으로 들어가다가 불길에 놀라 한차례 공중으로 앞발을 들어올렸다가는 출구 쪽으로 내달으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짓밟았다. 제 주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판국에 나귀 눈에 보였을 리 만무했다. 나귀 떼를 잡도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을 끄려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나귀 떼와, 믿음은 있으되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의 벽을 뚫고 불길에 다가갈 수 없었으리라.
수도원은 나락의 혼돈을 방불케 했으나 이는 비극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창과 지붕에서 튀어나온 불똥은 바람에 사방으로 날리다가 이윽고 교회 지붕 위로 우박처럼 내려앉았다. 훌륭한 교회를 화마로부터 지키는 방법을 모르는 건축가는 없다. 그래서 하느님 처소인 교회는 아름다울뿐더러 거기에 사용한 석재에 힘입어 천상의 예루살렘처럼 견고한 법이다. 그러나 외벽이 그렇다 뿐이지 내벽과 천장에는 모양은 좋으나 화마에는 약한 목재가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석재로 지은 교회 하면 , 우선 천장을 떠받치며 참나무처럼 돌올하게 선 열주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 열주는 참나무 수수로 되어 있다. 뿐인가. 제단, 성가대석, 색칠한 간막이, 회중석 의자, 사제용 의자, 촛대... 이게 모두 나무로 되어 있다. 수도원에 도착하던 날 문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던 경내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회에 불이 붙기는 시간 문제였다. 수도사들과 불목하니들은 그제서야 수도원의 운명이 화형주에 걸리고 있음을 눈치채는 듯 했다. 이렇게 되자 모두 이 새로운 위험에 맞설 준비를 하는 통에 경내에는 또 한차례 소동이 일었다.
교회가 장서관에 견주어 접근이 용이하고 따라서 불길을 잡기가 유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장서관이 화마의 제물이 된 것은 장서관이 지켜온 신비 때문에 그 구조가 밝혀지지 않았는데다 출입구가 극히 적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성무 시간에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교회는 따라서 불을 끄려는 사람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물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다. 근처에 우물이 있기는 했으나 괴는 데 시간이 걸려, 쉴새없이 퍼내어야 하는 긴급한 필요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교회의 불을 끄는 일이면 수도사 모두가 달라붙을 수 있었을 테지만 뾰족한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는 데다가 지휘하는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사람이 지붕으로 올라가 커다란 걸레 같은 것으로 두들긴다고 잡힐 만한 불길도 아니었다. 지붕의 불길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하고부터는 모래는 흙을 끼얹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교회는 천장을 내려 앉히면서, 아래에서 불길을 잡던 수도사 몇을 순식간에 깔아 버렸다.
그 아름답던 교회가 잿더미로 변해 가는 것을 바라보는 수도사들 입에서 회한과 신음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천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얼굴을 그을리거나, 팔다리를 부러뜨리거나, 그 밑에 깔린 사람들의 비명과 절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람이 다시 거세어지자, 타오르던 불길은 맹렬한 기세로 번져갔다. 기겁을 한 가축들이 빗장을 부수고는 문을 박차고 쏟아져 나왔다. 울부짖으며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수도원 경내에 낭자했다. 갈기에 불이 붙은 말도 있었다. 지옥에서 뛰쳐나온 듯한 이런 말은 마당을 가로질러 질풍같이 내달으며 사람이 앞에 걸리는 족족 짓밟았다. 나는 알리나르도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나다니다가 불길을 후광처럼 등진 저 브루넬로에게 짓밟히는 걸 보았다. 노인은, 고깃덩어리처럼 땅바닥 위를 굴렀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를 구할 시간도, 그의 최후를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도처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갈기에 불이 붙은 말들은 바람이 하지 못하던 짓을 했다. 즉 불똥이 날지 않은 곳에다 골고루 불씨를 퍼뜨린 것이었다 교회에서 그리 가깝지 않은 대장간과 수련사 숙사에서도 불길이 올랐다. 사람들은 목적도 없이, 목적이 있어도 대책이 없이 경내를 바람처럼 오고 갔다. 나는 니콜라를 보았다. 누더기가 다 된 법의 차림인 그는 기력이 다했는지 상처 입은 머리를 싸쥐고 교회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욕지거리를 했다. 나는 티볼리 사람 파치피코도 보았다.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진작 포기했는지, 그는 지나가는 나귀를 붙잡으려 했다. 가로로 뛰고 세로로 뛰어 나귀 한 마리를 붙잡은 그가 나에게 소리쳤다.
'똑같이 하고 도망쳐라, 하르마게돈의 끔찍한 복사판으로부터!'
나는 사부님을 찾으러 다녔다. 천장이 무수히 내려앉는 와중이라 사부님이 걱정스러웠다. 한참 찾아다닌 끝에 그를 만난 곳을 회랑이었다. 사부님은 어느새 행장을 꾸렸던지 바랑을 들고 서 있었다. 불길이 순례자 숙사로 번지자 부리나케 들어가 챙겨 가지고 나온 모양이었다. 고맙게도 내 바랑도 있었다. 나는 내 바랑을 뒤져 법의 한 벌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는 숨을 죽이고 불타는 교회를 내려다보았다.
수도원은 불바다였다. 크고 작은 건물에 차례로 불이 붙으면서 수도원 전체가 불바다로 변한 것이었다. 온전한 건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건물에도 불이 옮겨 붙기는 시간 문제였다. 자연과 자연이 빚은 가연성 물질로부터 그 불길을 잡으려는 인간의 노력 자체가, 그 불길을 퍼뜨리는 구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마밭, 회랑 밖의 뜰... 불길이 닿지 않은 안전 지대는, 건물이 없는 이런 곳뿐이었다. 이제 건물을 구할 방법은 없어진 셈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건물을 포기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불길을 구경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교회를 보았다. 큰 건물 화재의 경우, 처음에 목재에 불이 붙을 때는 무서운 기세로 번지고 무서운 기세로 타오르지만 이 목재가 어느 정도 타고나면 불길은 그다지 세지 않다. 그러나 이런 건물은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계속해서 탄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본관의 불길은 달랐다. 건축 자재의 대부분이 가연성 물질이었기 때문에 문서 사자실로 옮겨 붙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불길은 벌써 주방에까지 내려와 있었다. 수백년간 장서관 미궁이던 위층은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우리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장서관이었다. 아, 그런데 이게 무엇이냐, 가짜 그리스도 올 날이 임박했다. 이제는 학문이 가짜 그리스도를 저지할 수 없게 되었으니... 오늘 우리는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가짜 그리스도라고 하시면...'
'호르헤 영감의 얼굴 말이다.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가짜 그리스도는, 그 사자가 그랬듯이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잘 들어 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을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하지만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마음의 상처가 생기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지요? 사부님께서 오늘 밤에 찾아내신 진리도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며칠을 고구하시어 실마리를 푸시고 오늘 그 진실에 이르셨습니다. 호르헤 노인이 이긴 것인지 모르나 결국 사부님께서 그의 음모를 백일하에 드러내셨으니 결국은 호르헤를 이기신 것이 아닙니까?'
'음모라고...? 그러나 그나마 나는 내 실수를 통해 거기에 이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단언은 자기 모순적이었고, 나는 사부님이 참으로 그러길 원했는지 결정할 수 없었다.
'발자국으로 브루넬로를 알아보신 것은 사실입니다. 아델모 수도사가 자살한 것도 사실이었고, 베난티오 수도사가 항아리에 빠져 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미궁이 사부님 상상하신 대로 얽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쿠아트오르>란 단어의 글자를 눌러 <아프리카의 끝>으로 들어가신 것도 사실이었으며, 그 수수께끼의 서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이었던 것이 이렇듯 많은데 어째서 실수를 통하여 접근하셨다는 말씀을 하시는지요?'
'나는 기호의 진실을 의심한 적 없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나아갈 길을 일러주는 것은 기호밖에 없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기호와 기호와의관계다. 나는 일련의 사건을 두루 꿰고 있다고 믿었고, <묵시록>을 본으로 삼아 호르헤에게 도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의 일치였다. 나는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단일한 범인을 추적하다가 호르헤에게 이른 것뿐이다. 그 과정에서 각각의 사건은 서로 다른 범인의 소행이 아니라 한 사람의 소행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집요한 이 성적 판단을 통하여 호르헤에게 이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뚜렷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호르헤에게는 처음부터 구상이 있었다. 호르헤는 이 구상으로부터 일련의 인과 관계와 상호 작용하는 복합적 인과 관계를 창출했다. 여기에서 다시 서로 모순되는 인과 관계, 특정 조건 아래서는 도저히 기능이 불가능한 상호 관계도 창출했다. 내 지혜라는 것은 어디로 갔느냐? 나는 가상의 질서만 좇으며 죽자고 그것만 고집했다. 우주에 질서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나... 이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가상의 질서로도 사부님께서는 결국 찾아낼 것을 찾아내셨습니다.'
'고맙구나. 우리가 상상하는 질서란 그물, 아니면 사다리와 같은 것이다. 고기를 잡으면 버리게 되는 그물, 높은 데 이르면 버리게 되는 사다리 같은 것... <지붕에 올라가면 사다리는 치우는 법>... 내개 제대로 했느냐?'
'네, 저희 모국어로는 그렇습니다. 어떤 분에게서 들으셨습니까?'
'네 나라 출신 신비주의자의 글에서 읽었는데... 어느 글인가는 잊었구나. 내가 이렇게 알고 있으니 이제 그 원고를 누가 찾아낸대도 내게는 소용이 없겠구나. 그래, 유용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언젠가는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
'그러실 일은 아닌 줄 압니다. 사부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인간의 최선이라는 게 참 보잘 것 없어. 나는 아까 우주에 질서가 없다고 했는데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느님의 자유 의지와 그 전능하신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유 의지는 우리를 단죄하시는 자유, 우리의 오만한 마음을 단죄하시는 자유이겠구나.'
나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부님 앞에서 감히 신학적인 추론을 시도했다.
'그렇다면 사부님, 가능성에만 매달려서야 필연적인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과, 태초의 혼돈 사이에 무엇이 다릅니까? 하느님의 절대적 전능성과 그 선택의 절대적 자유를 긍정하는 것은 곧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지 않을는지요?'
사부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네 질문에 그렇다고 해버린다면, 식자들이 어떻게 배운 것을 풀어 먹겠느냐?'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반문했다.
'진리의 기분이 없으면 전달 가능한 학문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니면 상대가 그 의견을 승인하지 않으면 지식을 전달할 수 없다는 뜻인지요?'
그 순간 숙사의 지붕 일부가 내려앉으면서 엄청난 양의 불꽃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경내를 떠돌아다니던 양과 염소 무리가 애처롭게 울며 우리 옆을 지나갔다. 불목하니 떼거리가 부딪쳐 쓰러뜨릴 듯이 우리를 지나치면서 뭐라고 고함을 질렀다.
사부님이 탄식했다.
'이곳은 너무 시끄럽구나. <이런 난장판에는, 이런 난장판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아>(구약성서 열왕기상의 다음 대목)...'
뒷말
뒷 이야기이지만 수도원은 그 후로도 사흘 밤낮을 탔다.
불길을 잡아 보려던 마지막 노력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생존자들은, 수도원 건물 중에 지켜 낼 수 있는 건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하느님의 응징에 맞서 보려고 쳐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이때는 그 엄장하던 건물이 모두 외벽뿐인 폐허로 남고, 교회가 빨아들이듯이 종탑을 삼켜 버린 다음이었다. 우리가 그 수도원에 머문 지 이레째 되던 날의 일이었다. 몇 동이의 물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집회소와 수도원장 공관은 그날 아침까지도 타고 있었다. 불길이 발화 지점인 장서관에서 멀리 떨어진 갖가지 작업장으로 옮겨 붙은 것은, 이미 수도원 기물을 되는대로 챙겨 가지고 산을 내려간 불목하니들이 인근 사하촌을 누비는 가축을 붙잡으려고 기로로 뛰고 세로로 뛰고 있을 즈음이었다. 수도원 가축은 수도원이 불길에 휩싸이자 밤을 도와 경내를 빠져 산을 내려갔던 것이었다.
나는 몇몇 불목하니들이 용감하게, 타다 남은 교회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도망치기 전에 지하 보고에 있는 보물을 한 점이라도 더 손에 넣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귀물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는지, 그때까지도 지하 보고의 천장은 내려않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지, 아니면 그 촌뜨기들이 귀물에 욕심을 내다가 내려앉는 천장에 깔려 죽었는지, 그것은 나도 모르겠다.
사하촌 사람들도 적기 않게 올라와 있었다. 진화를 도우려고 온 사람들도 있었고, 짊어지고 내려갈 것이 없을까 하고 올라온 사람들도 있었다. 시체는 그때까지도, 시뻘겋게 달아 오른 폐허와 함께 방치되어 있었다. 불이 난지 사흘째 되는 날에야 남은 사람들은 부상자를 치료하고 시신을 감장했다는 후문이다. 수도사들과 불목하니들이 짐을 꾸리고, 여전히 연기를 내뿜는 수도원을 저주받은 땅으로 남겨두고 제 갈길로 갔다.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사부님과 나도 숲속에서 방황하는 말 두 필을 붙잡아 타고 그곳을 떠났다. 우리는 그것을 <무연고재산>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동쪽으로 향했다. 보비오에 이르렀을 때 황제에 관한 좋지 못한 소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소식은 이러하다.
교황 요한 22세와의 화해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황제는 로마로 내려와 니콜라우스 5세를 대립 교황으로 옹립한다. 마르실리오는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주교들을 임명하는데, 그 직권 행사가 지나쳤는지 로마에는 참으로 해괴한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진다. 교황 요한 22세의 살붙이들, 미사를 제대로 집전하지 못하는 사제들은 고문을 당하며,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원장은 카피톨리아 언덕 위의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된다. 결국 마르실리오와 장뎅 사람 장은 교황 요한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황제 르드비히는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황제의 실정은 당시 지방 영주들을 괴롭히고 지방의 재정을 말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소식을 듣고는 로마 방문을 뒤로 미루었다. 사부님도 자신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든 소문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폼포사에 이르렀을 때야 우리는 로마가 루드비히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에 따르면 황제는 다시 피사로 돌아가고, 교황 요한의 사절단은 로마에 개선한다.
체제나 사람 미켈레는 그 즈음 아비뇽에 있어 보았자 생명의 위협만 느꼈지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알고는 피사로 피신, 황제의 휘하로 들어갔다는 소식도 있었다.
황제가 뮌헨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우리는 발길을 돌려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사부님이 이탈리아에서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부님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얼마 뒤 황제의지지 세력이었던 기벨리니(교황을 지지하던 구엘피에 맞서 게르만 인 황제를 지원하던 세력)가 무너지자 대립 교황 니콜라우스는 제 목에다 밧줄을 걸어 교황 요한에게 항복해 버린 것이었다.
뮌헨에 이르러 나는 사부님과 눈물로 이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부님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내 속가에서는 내가 멜크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저 비극의 날, 사부님이 수도원의 폐허 앞에서 삶과 진리에 대한 그분 자신의 생각을 비치신 이래 우리는 약속이라고 한 듯이 그 수도원 일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눈물로 이별하면서도 끝내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부님은, 내가 할 공부에 관하여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 주신 뒤, 니콜라가 만들었던 예의 그 테 속에 박은 유리를 내게 주시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것이 따로 있었다.
'네 나이 지금은 어리나 장차 요긴할 게다.'
사부님께서 이러셨는데, 나는 지금 그 우리를 콧등에 올린 채 이 글을 쓰고 있으니 과연 요긴하기는 요긴하다. 사부님께서는,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나를 안아 보시고는 나를 떠나 보내셨다.
그 뒤로는 그분을 다시 뵙지 못했다. 금세기 중엽 역병이 유럽을 휩쓸 당시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아, 바라건대 하느님께서 그분의 영혼을 수습하시되, 지적인 허영에 못 이겨 그분이 지으신 허물을 용서하시기를...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나는 멜크 수도원장의 심부름으로 우연히 이탈리아에 가게 되었다. 유혹을 누를 길 없어, 나는 귀로를 훨씬 벗어나 그 수도원 폐허를 다시 찾았다.
산 사면의 두 사하촌은 황폐하져 있었고, 사하촌 주위의 경작지는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정상에 올랐을 때 내 앞에 펼쳐진 황량한 적막과 죽음의 그림자는 내 눈을 눈물로 적셨다.
한때 엄장한 건축물로 장관을 이루던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고대 로마의 이교도들이 남긴 기념비와 흡사한, 그나마 띄엄띄엄 눈에 띄는 폐허뿐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벽과, 기둥과, 문틀의 잔해 위로는 인동덩굴이 있었고, 바닥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예전의 채마밭과 뜰은 어디에 있었는지 분간도 할 수 없었다. 묘지의 위치는, 군데군데 솟아 있는 무덤으로나마 가려낼 수 있었다. 돌 틈과 벽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뱀이나 도마뱀, 이들을 잡아먹는 몇 마리 육식조가 그나마 생명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교회 문 앞에도 잔해가 더러 남아 있었다. 박공도 반쯤은 남아 있어서, 나는 거기에서 풍상에 찌들리고 이끼에 덮인, 왕좌에 앉은 그리스도의 왼쪽 눈과 사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본관은, 허물어져 버린 남쪽 벽을 제하고는 여전히 선 채로 풍상과 맞서고 있었다. 벼랑에 면한 탑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동공이 빈 눈 같은 창틀에서는 썩은 덩굴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인공의 구조물이란 구조물은 자취도 없이 부서져 버린 본관 내부는 자연의 손톱에 할퀴어 옛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 넓던 주방 너머, 타락한 천사처럼 무너져 앉은 천장과 지붕 사이로는 하늘이 보였다. 이끼가 없는 부분에는 수십 년 전의 연기에 그을린 시커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갈을 헤집자, 수십 년 전 문서 사자실이나 장서관에서 떨어져 보물처럼 흙 속에 묻힌 채 견뎌 온 양피지 조각이 더러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양피지 조각을 모았다. 찢긴 책장 쪽을 붙이려는 듯이 모았다.
그러나 나는, 일그러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뼈대는 살아남은 탑과, 그 탑 속의 문서 사자실로 오르는 계단을 보았다. 폐허 속의 계단을 따라 오르자 이윽고 장서관이었다. 허나 옛날은 장서관이 아니라 외벽에 의지해서 서 있는 베란다에 지나지 못했다. 사방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벽 앞에 궤짝 하나가 있었다. 어떻게 그 불길 속에서 살아 남았는지 모르겠다. 습기에 썩고, 흰개미에 쏠려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궤짝이었지만, 안에는 그래도 양피지 몇 쪽이 남아 있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간 나는 흙을 뒤적여 몇 점의 유물을 더 찾아내었다. 수확은 참으로 초라했으나 그래도 나는 하루 종일 거두어 들였다. 장서관의 <유물의 파편>이 능히 한 소식을 전해 주기라도 하는 듯이 나는 열심히 뒤지고 열심히 모아들였다. 하얗게 바랜 양피지도 있었고, 그림의 흔적이 남은 양피지, 한두 단어 글씨가 남은 양피지도 있었다. 문장 하나가 고스란히 남은 양피지 한 쪽과 철사에 묶여 있었던 듯한 표지 한 장도 고스란히 내 손안으로 들어왔다. 밖은 온전하되 속이 썩어 버린 서책의 유령도 있었고, 제목을 읽을 수 있는 반쪽 짜리 속표지도 있었다.
나는 유물을 되는대로 모아 바랑 두 개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니 내게 요긴했던 사물은 버려야 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면서, 그리고 멜크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이 유물의 문자를 해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더러는 한 단어, 더러는 남아 있는 그림으로 그것이 무슨 서책이었는지 알아내기도 했다. 혹 이런 서책의 온전한 사본이 내게 들어오는 날이면, 운명이 나를 그 서책으로 이끈 듯이 그 유물의 파편이 나에게 <가져 가서 읽어라>(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에 나오는 구절)고 한 듯이 나는 정성 들여 읽고 고구했다. 끈기있게 복원한 끝에 이윽고 내 손안에는, 이제는 사라진 저 위대한 장서관의 상징인 작은 장서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양피지 조각과 인용문과 자투리 문장과 서책이 파편으로 된 장서관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것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의미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도 그 시절 이후로 그 작은 장서관은 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 이따금씩 나는, 하늘이 맡긴 뜻이라도 읽는 듯이, 거기에다 짜맞추어 놓은 글월을 읽고는 한다. 미지의 독자들이여, 나는 내가 여기에다 쓴 글, 그래서 독자들이 읽고 있는 글도 이러한 유물의 파편이 나에게 읊어 주는 발췌시나 유희시, 많은 단상들에 속할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다, 내가 이 유물의 파편을 노래하는지, 이 유물의 파편이 내 입을 빌어 노래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허나, 아마 둘 다 옳을 것이다. 나는 지금 나 자신에게, 유물이 파편에서 떠오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때 있었던 이 일련의 사건과 그 사건을 연결하는 시간 사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되풀이하면 할수록 나는 여기에서 멀어져 가는 것 같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늙은 수도사에게, 제가 쓴 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많은지, 적은지,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허나 이 늙은 것의 미망은, 이 닳고 닳은 세상으로 다가와 이윽고 세상을 뒤덮을 암흑의 그림자 탓인지도 모르겠다.
<바빌론의 영화는 어디로 갔는가?>(베르나르의 '속세의 능멸에 대하여'에 나오는 구절) 지난해 내린 눈은 어디에 있는가? 이 땅은 죽음의 무도에 취해 있다. 때로 내 눈에는 다뉴브 강을 오르내리는 선박이, 지옥으로 가는 바보들을 잔뜩 처실은 선단으로 보이고는 한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묵을 지키는 것뿐... <홀로 적막 안에서 침묵하고 하느님과 독대함이여. 참으로 실답고 즐겁고 감미로워라!?> 나는 이제 곧 나의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우리 교단의 수도원장들이, 그분이야말로 영광의 하느님이라고 하나 나는 이제 그분을 그분으로 믿지 아니하고, 소형제회에서는 그이가 바로 환희의 하느님이라고 하나 나는 그이를 그이로 믿지 않는다. <하느님은 순수한 무의 존재라서 때와 곳에 구애되지 않는다>...
나는 얼마 안 있으면 참으로 신심있는 자들이 지복을 누리는 광막한 사막으로 들어간다. 오래지 않아 동등과 부동이 존재하지 않는, 적막과 화합과 적멸의 나라인 하늘의 어둠에 든다. 이 심연에서는 나의 영혼 역시 무화하여 동등함과 부동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심연에서는 모든 불화가 사함을 얻는다. 나는 곧 모든 차이가 잊혀지고 같음과 다름에 대한 분별이 없는 깊고 깊은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수고도 없고 형상도 없는 무인지경의 적막한 신성에 든다.
문서 사자실이 추워 손이 곱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베르나르의 '속세와 능멸에 대하여'에 나오는 일절)
개역판 <장미의 이름>에 부치는 말
꿈의 내용을 더러 메모해 보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만, 이 메모를 나중에 읽어보면 아무 재미가 없습니다. 꿈의 이미지가 증발해 버리고 거기에 사실적인 언어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험이다, 참여다 하느라고, 소설도 자꾸만 무미 건조해지는 요즈음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소설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자꾸만 증발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장미의 이름>을 쓴 움베르토 에코란 분은 재미있는 소설을 써 보겠다고 마음을 옹골지게 먹었던 모양입니다. 이 소설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역자가 누릴 수 있었던 재미는 참 여러 가집니다만 굳이 여기에서 들추어내고 싶은 재미라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미스터리 소설로서의 재미입니다.
아델모, 베난티오, 베렝가리오, 세베리노 등이 죽어가는 상황은 <요한 묵시록>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즉 천사들의 나팔소리가 고지하는 천재의 상황과 거의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법은 일찍이 아가사 크리스티가 <열 꼬마 인디언>이라는 소설에서 쓴 바 있습니다. 크리스타의 소설에 나오는 인디언 섬의 손님들은 <열 꼬마 인디언>이라는 동요의 내용에 따라 차례로 죽어 갑니다. 말하자면 죽어 가는 상황과 죽어 갈 사람의 숫자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소설 자체의 긴장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이러한 기법은, 뛰어난 미스터리의 거장이 아니고는 허투루 쓰지 못할 절묘한 트릭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가 언젠가 아이언 플레밍의 소설 <007> 시리즈를 분석한 적이 있는 모양입니다만 그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윌리엄 수도사 역시 제임스 본드 못지 않게 쇼맨십과 슈퍼스타 기질이 대단한 사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암흑 시대인 중세 사람인데도 비행기 이야기를 태연하게 하는가 하면 안경을 쓰고 암호를 해독하며 마법의 돌인 자석으로 나침반 제작을 시도하는 첨단 과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또 수도사란 직분에 어울리지 않게 기도보다는 자연 과학을 믿고, 겸손보다는 투사 기질에 더 기대는 참으로 아슬아슬하면서도 통쾌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둘째, 이 작품은 중세의 종교 소설로도 재미있습니다.
흔히 암흑 시대라고도 불리는 중세는, 최후의 심판날로 예언된 주후 10세기를 훨씬 넘겨, 신심 있는 많은 사람들을 당혹케 했던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세계 종말과 최후 심판에의 예감에 시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암흑 속에서 태동하던 계몽주의와 인간성에 눈을 뜨는 인문주의적 신학으로부터 근엄한 기독교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 책은 각 교단간의 이단 논쟁과 종교 재판의 와중에서, 흑백 논리의 칼질이 난무하던 중세 기독교사를 정확하게 그려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 종교관, 세계관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데 지금 이 시대에 그 시대의 경직된 교조주의와 병적인 흑백 논리를 되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도 이 책만이 줄 수 있는 재미일 것입니다. 악마, 거짓 선지자, 가짜 그리스도에 대한 중세적 정의를 지금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책은 지나친 교조주의자와 광적인 호교주의자를 바로 그런 부정적인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교조주의는, 그 교조주의가 섬기는 도그마를 악마화 시킬 수 있는 모양입니다. 니코스 카잔차카스는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3백 명의 수도자가 구도하던 어느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은 악마의 틈입을 막아 보려고 아침에는 흰 말, 낮에는 붉은 말, 저녁에는 검은 말을 타고 번을 돌았더니, 그 악마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들어오더라.>
셋째, 움베르토 에코는 작가로서보다는 기호학자로 더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소설은, 그가 자신의 학문적, 비평적 태도를 문학 작품에 응용하는 본보기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호학 이론을 여기에 자세히 소개하기에는 역자의 힘이 부칩니다. 그는 문학의 의미 요소, 즉 기호가 어떻게 전달, 소통되느냐는 문제를 추적해 온 학자지만, 다른 학자들이 언어를 의미 요소의 핵심 도구로 파악하고 있는데 비해 그는 비언어적 기호에 크게 관심해 온 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비언어적 기호를 이 소설에다 응용한 셈인데, 아닌게아니라 이 소설은 비언어적 기호의 시운전장 같기도 합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한 번도 보지 않고 수도원에서 달아난 말의 키, 색깔, 모양, 심지어는 이름까지도 알아 내어 수도사들을 놀라게 하는가 하면, 시자 아드소에게는 입버릇처럼 <자연은 위대한 양피지, 거기에 다 기록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비언어적 기호로 사물의 요체에 접근하는 윌리엄 수도사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고대 인도에서는 <구루>라고 불리어지던 구도자와 흡사합니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는 고대 인도의 <리그 배다>나 <우파니샤드>에 실려 있는 구도자적 통찰이 다소 변형된 형태로 발견됩니다만 <진리는 하나되 현자가 이를 여러 이름으로 언표한다>니 그럴 수도 있긴 하겠습니다.
우리말 <장미의 이름>이 처음 독자들 손으로 들어간 것은 1986년의 일입니다. 역자인 나는 이 소설의 번역 작업과 관련, 숱한 찬사와 질정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 <장미의 이름>음 내가 낸 1백여 권의 역서 중에서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준 책이기도 하고 나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어 준 책이기도 합니다. 나를 행복하게 한 것은 물론 남들의 찬사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비참함이라고 하는 것은 속사정 모르는 무책임한 찬사에 은밀하게 행복해 한 데서 오는 비참하다는 느낌. 뻔뻔스럽게 그런 찬사를 받고 있으면서도 그 찬사에 걸맞는 어떤 내재율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비참한 느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역과 가공할 만한 넘겨짚기 해석과 졸속과 졸문이 나를 몹시 괴롭히던 즈음인 1990년 나는<열린책들>로부터 한 권의 책을 넘겨받게 됩니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수많은 고유 명사, 수많은 중세 개념, 수많은 인용구들의 출전을 일일이 밝히고 이를 사전식으로 편집한, 아델 J. 하프트. 제인 G. 화이트, 로버트 J. 화이트 공저인, <장미의 이름의 열쇠>의 일역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책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맙니다. 이 책으로 인하여 나의 오역과 넘겨짚기 해석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오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것을 합리적으로 수습하기로 마음을 먹는 중에, <열린책들>로부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용감한 제안을 받고 여기에 동의하게 됩니다. <열린책들>의 제안은 원고료에서부터 조판비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자금이 다시 투입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나 허투루 할 수 있는 그런 제안이 아닙니다.
1992년 1월 나는 미국에 있는 미시간 주립대학교 도서관에서 저자 움베르토 에코와 관련된 영어판 자료와 <장미의 이름의 열쇠>의 영어 원서를 찾아내어 <장미의 이름>의 개역 작업에 착수하고는, 오역이 바로잡히고, 졸문이 칼질을 당하고 방대한 각주가 붙여진 원고를 탈고하여, 올해 5월에 새로운 원고를 송고하게 됩니다. 이로써 나는 앞에서 말한 <비참한 느낌>에서 얼마간 놓여 나는 듯합니다만 이런 느낌이 또 언제 새로운 비참함으로 나를 몰라갈지 그것은 나도 모릅니다.
우리말 <장미의 이름>이 나돌 동안 나는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제목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게도 나는 때로는 얼버무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터무니없는 해석을 덧붙이고는 했는데, 마침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 창작 노트>라는 소책자에서 이 책의 제목에서 <장미>가 지니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수많은 독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없었던 답변을 대신합니다.
<...이 책이 출판된 뒤로 나는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이 책의 말미에 실린 6보격 시구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것이 어째서 책의 제목이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비로소 대답하거니와, 우리에게서 사라지는 것들은 그 이름을 뒤로 남긴다. 이름은, 언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존재하다가 그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까지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대답과 더불어, 이 이름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 해석에 대한 결론을 독자의 숙제로 남기고자 한다... 화자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화자가 해석하고 들어가는 글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창조해야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이 개역판 작업은, 기왕에 저지른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수습하는 데 성의를 보이고자 한 우리 노력의 작은 열매입니다.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 <열린책들>의 홍지웅 사장에게 우정을 전합니다.1992년 6월 일시 귀국해서, 여장을 푼 방배동 <하인음방>에서 이윤기
<장미의 이름>에다 세 번째로 손을 대면서
1984년에 <장미의 이름>을 번역했다. 하지만 출판하겠다는 회사가 없어서 원고가 2년을 겉돌았다. 편집 디자이너 정병규 형의 도움으로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펴낼 수 있었다. 1986년에 펴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
반응이 너무 좋아서 오금이 저렸다. 실수했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서, 1992년 미국에서 원고를 다시 손보았다. 미국과 일본에서 나온 <장미의 이름> 관련 서적을 구입, 약 5백개에 이르는 각주도 달아, 같은 해 개역판을 냈다. 오금 저린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잡초 없는 뜰이 어디 있으랴, 하면서 스스로 위로하면서 8년을 보냈다.
2000년 3월, 무려 60쪽에 달하는 원고를 받았다. 철학을 전공한 강유원 박사의 <장미의 이름 고쳐 읽기>라는 제목이 달린 원고였다. 강유원 박사는 동국대학교에서 철학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장미의 이름>을 바르게 읽어 주면서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의미를 가르쳤던 모양인데, 바로 그때의 메모를 내게 보내 준 것이다.
매우 부끄러웠다. 이 원고는 무려 3백여 군데의 부적절한 번역, 빠져 있는 부분 및 삭제해야 할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다. 강 박사의 지적은 정확하고도 친절했다. 나는 철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움베르토 에코의 해박한 중세학과 철학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움베르토 에코가 옮겨 주는 무수한 개념을 철학사에서 찾아내는 일이 나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서에 없는 말을 덧붙인 일도 없지 않다.
2000년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강유원 박사의 지적을 검토하고, 3백 가지 지적 중 2백 60군데를 바르게 손을 보았다. 그리고는 강유원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부끄러웠다고 고백하고, 그의 지적을 새 책에 반영해도 좋다는 양해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장미의 이름>에 내가 세 번째로 손을 댄 내력이다. 강 박사께 한없이 고맙다는 말씀 전하고 싶다.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또 오금 저리는 세월을 오래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강 박사같이 정확한 지식과 예리한 눈을 겸비한 분이 감시해 주고 있는 것은 우리 번역계에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다시 한번 이렇게 쓰지 않을 수 없다.
'강유원 박사, 고맙습니다.'
2000년 7월 3일 과천에서, 이윤기
<장미의 이름> 고쳐 읽기
예전에 PC통신 나우누리에는 <문화 공장>이라는 이름의 작은 모임이 있었다. <문화>라는 말이 사방에서 굴러다니고 있기는 하지만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문화 이론가>들이 가득 찬 세상에서 어설프더라도 스스로에게 납득이 가는 생각을 하고 글을 써보려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모임이었다. 3년 가까이 계속되다가 문화 공장은 문을 닫았고, 지금은 몇몇 회원-우리는 회원을 <공장 인부>라 불렀다-들이 사적으로 만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으로 남아 있다.
문화 공장에서 <장미의 이름>을 강독한 적이 있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장미의 이름>은 흔한 추리 소설로 읽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텍스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풍부한 교양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기왕이면 제대로 읽어보자고 합의했다. 그리하여 <장미의 이름> 영어판과 해설서인 <장미의 이름의 열쇠>를 구하고 번역본과 대조해서 보고,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사전이나 참고문헌을 찾아 보면서 책을 읽어 나갔다. 그런 과정을 거쳐 A4용지 60매 정도의 자료가 만들어졌고, 우리는 이것을 열린책들에 가져다 주었다.
이번에 이윤기 님과 열린책들은 책을 새로이 펴내면서 우리의 작은 노력을 흔쾌히 받아 주었다. 무책임한 번역과 어지러운 출간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조금은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는 은밀한 기쁨으로 간직될 것이다. 감사드린다.
2000년 8월 7일 공장 인부들을 대신해서 공장장 강유원 적음
<장미의 이름>의 열쇠 후기
<장미의 이름>은 <아드소의 묵시록>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알리나르도가 윌리엄에게 했던 헛소리처럼 1327년 11월 수도원에서 일어난 범죄 뒤에는 그 해결의 열쇠를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묵시록의 세게가 있기 때문이다. 요한의 묵시록으로 알려진 이 책은 신이 죄로 가득찬 세계를 파괴하고, 신심이 깊은 자들을 구원하며,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우주적, 역사적 비젼을 서술하고 잇는데, 바로 이것이 <장미의 이름>을 관통하고 있는 기본적인 비젼이다.
이 소설이 시작된 시기는 1327년 11월 말의 어느 일요일이다. 이날은 아마 강림절(크리스마스 전 네 일요일을 포함하는 기간)의 첫날이었을 것이요,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1327년에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가? 앞서 말한 알리나르도와 윌리엄의 대화에서 알리나르도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임박했다고 말하자, 윌리엄은 천년은 이미 지나갔다고 말한다. 그러자 알리나르도는 천년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지배, 즉 예수의 죽음 후 300년부터 계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1327년이라 해도 알리나르도의 계산법에 따르면 천년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묵시록적 사건의 시간은 기본적으로 설정되는 셈이다.
시간은 이렇게 설정되었고, 공간은 어떠한가? 과연 이 수도원은 묵시록적 사건이 일어날 만한 공간인가? 수도원 교회 입구 둘레의 돌에는 종말의 날에 일어난다고 하는 사건들이 새겨져 있다. 묵시록의 구절들은 두루마리에 씌어져 장서관 각 방 입구에 걸려 있다. 장서관 안에서 아드소는 묵시록의 구절에 나오는 환상들을 목격하기도 한다. 윌리엄과 아드소는 장서관이 그리스도 제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묵시록 보관소임을 발견한다. 이만함녀 공간도 갖춰진 셈이다. 그러면 등장하는 인물은 어떠한지 보자.
아드소 자신은 묵시록적 인물인데, 그는 묵시록의 역사에서 중요한 두 인물, 성서의 묵시록을 쓴 요한과, 호르헤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지적한 몽띠에르 앙 데르 사람 아드소의 표상이다. 몽띠에르 앙 데르 사람 아드소는 <가짜 그리스도의 반란>이라는 중세 묵시록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주석서를 쓴 사람이다. 아드소는 성서의 묵시록의 저자인 요한의 화신과도 같다. 그는 교회 입구를 응시하면서 자신이 묵시록의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체험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본 환상은 바로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수도원장의 과묵한 입을 통해 들었던 일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이켜보건대, 그날부터 내 이 교회 문간으로 달려와 내 체험이 이 문간의 예언과 그대로 일치한다고 무릎을 친 것이 무릇 몇 번이던가! 그때마다 나는 우리가 저 측량할 길 없는 천상적 학살을 목격하기 위해 그 수도원으로 올라왔음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드소는 장서관에서도 환상 체험을 하고, 디에스 이라에를 들으며 꿈을 꾸기도 한다. 묵시록의 필자인 요한과 이 소설의 화자인 아드소는 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받는 수동적인 관찰자이다. <인자 같은 분>에 해당하는 이가 <장미의 이름>에서는 바스커빌 사람 윌리엄이다. 그는 아드소가 정신적, 육체적 미로를 헤쳐나가게 하는 안내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장미의 이름>의 시간, 공간, 인물이 묵시록적으로 설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이 소설의 구조 또는 소설의 전개 또한 그러한가이다. 소설 전체를 통하여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묵시록의 패턴에 따라 구축하고 있음은 틀림없는데, 이는 우선 그가 7이라는 숫자를 사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묵시록에서 요한은 그가 <주님의 날> 본 것을 7이라는 숫자의 연쇄를 통해 설명한다. 일곱 봉인, 일곱 나팔, 일곱 상징, 일곱 분노 등이 그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드소는 주님의 날인 일요일에 첫 번째 환상을 보며, 7일간에 걸친 사건을 서술한다. 묵시록적 저자에게 일곱 날은 물질적 우주의 해소, 즉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우베르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요아힘의 말이 옳았다. 인류의 역사가 제 6기에 접어들었으니 두 가짜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장서관의 화재는 7일째 일어나고 그 화재로 인해 수도원은 불타 없어지는데 이는 바로 우주론적 종말을 상징하는 것이다. 에코는 또한 정확한 해결책이 없는 텍스트인 묵시록에 등장하는, 그가 <공허한 대립의 유희>라 부르는 것에 매료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장미의 이름>에는 묵시록에서와 마찬가지로 명백한 대립항들이 (이단과 정통, 창녀와 처녀, 악마와 신 등) 등장하는데, 상세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영상들이다.
묵시록 못지 않게 <장미의 이름>에 영향을 끼친 문헌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들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국립 도서관장을 지냈던 보르헤스의 모습은 부르고스 사람 호르헤의 모습으로 소설에서 등장하며, 보르헤스가 그의 소설에서 사용했던 이미지들도 등장한다. 예를 들면 에코나 보르헤스나 거울을 현실의 두 세계 또는 두 이미지 사이의 문, 혹은 통로로 본다. 이는 묵시록에서 요한이 옥좌에 앉은 이를 볼 수 있었던 천국의 문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장미의 이름>에서 거울 달린 문은 사람들을 <비밀의 방>으로 이끄는데, 이것은 <비밀>과 <성서를 읽기 위한 한적한 방>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방에 있는 책들은 피니스 아프리카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성서가 아니라 이단자들의 금서이다. 그래서 거울 달린 방은 기독교 세계와 이단 세계, 과거와 미래, 어둠과 밝음, 삶과 죽음 사이의 통로를 표상하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에서는 세 명만이 이 통로를 지날 수 있었다.-아드소, 호르헤, 윌리엄.
거울 뒤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중적, 또다른 자아를 보게 된다. 아드소가 처음 장서관에서 거울에 마주쳤을 때 그는 확대되고 축소된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몹시 놀란다. 나중에 그와 윌리엄이 거울 달린 문을 지나 <비밀의 방>인 피니스 아프리카에로 들어갈 때 윌리엄은 거기서 자신의 반영인 호르헤를 만난다. 아드소는 그 둘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생사가 걸린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두 분이 오로지 상대의 갈채를 받기 위해서 싸워 온 것인 양 서로 상대에게 감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레 동안 두 사람은 교묘한 약속 아래, 서로 두려워하고 서로 증오하면서 은밀히 서로를 찬양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두 사람은 마지막 대결에서 대면하고 거기서 자신의 영리함을 겨룬다. 호르헤는 거울, 약초, 독약으로 윌리엄을 속이려 하고, 윌리엄은 호르헤에게 그 방에 이른 과정을 자랑한다. 그러나 윌리엄이 따르던 패턴은 그릇된 것이었고, 피니스 아프리카에로 들어가는 열쇠는 아드소가 무심코 지껄인 말에서 우연히 얻은 것이었다. 그러니 호르헤나 윌리엄이나 자신들의 재주를 자랑하기에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아드소가 윌리엄을 위로해도 윌리엄은 자신이 뛰어나지 못했음을 탄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장미의 이름>이 가진 묵시록적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것을 알고 나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가, 아니다. 에코는 이 책을 그렇게 만들어 놓지 않았다. 범죄를 해결하는데 굉장히 중요해 보였던 묵시록의 단서들은 결국 사건의 해결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이 판명되었다. 윌리엄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나는 일련의 사건을 두루 꿰고 있다고 믿었고, '묵시록'은 본으로 삼아 호르헤에게 도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의 일치였다.> 묵시록과 이 사건의 해결은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없는 것이다. 지루하게 계속되었던 프란체스코파의 영성과 청빈에 관한 논쟁도 이 사건과 무관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마지막에 발견한 것은 고작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 마지막 복사본을 숨기고 있는 정신 착란의 늙은이일 뿐이다. 묵시록적 열정에 사로잡히고 웃음을 사악한 것이라고 확신하는 예언자인 호르헤는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그 책을 감추려한다. 그 책이 세상을 파괴하고 신의 진리의 위대함을 무너뜨릴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더 이상 그것을 감출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요한의 묵시록> 10장에서처럼 그것을 삼키기로 작정한다. 그는 죽기 직전에야 웃는다. 그리고 그는 독이 묻은 서책을 뜯어 삼키면서 <그가 온 곳으로 되돌아간다>. 그곳은 바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과 묵시록에 관한 주석서를 잔뜩 가지고 돌아왔던 YSPANIA이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새로운 천년을 앞둔 인류가 발견하게 될 것도 이런게 아닐까. 묵시록적인 암시에 휩싸여 <밀레니엄>이 무슨 기적의 날이라도 되는 양 광분하고 있는 와중에 웅크리고 있는 악마는 없는지를 윌리엄처럼 이성을 가지고 찾아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불타버린 장서관처럼 그런 광기에 휩쓸려 모든 것을 태워버린 뒤 <학문이 가짜 그리스도를 저지할 수 없게 되었으니...>는 윌리엄의 탄식을 되풀이 하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장미의 이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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