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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10-03-30 조회수 : 5,076
제 목 : 원시를 꿈꾼  -- 폴 고갱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1903)은 빈센트 반 고흐, 폴 세잔과 함께 20세기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로 꼽힌다. 소설 [달과 6펜스]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고갱은 강렬한 색채의 실험으로 ‘종합주의’를 선도하였고, 그의 작품들은 이후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페루와 프랑스에서 보낸 유년기

고갱은 저널리스트 클로비스 고갱(Clovis Gauguin)과 페루계 사회주의자(플로라 트리스탄)의 딸인 알린느 마리아 샤잘(Aline Maria Chazal)의 사이에서 태어났다(프랑스 파리). 1851년에 당시 파리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페루로 가던 중 고갱의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고갱과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는 페루의 리마에서 외삼촌과 함께 4년을 살았다. 이곳에서의 이미지들은 훗날 고갱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1854년 무렵 고갱과 그의 가족은 프랑스로 돌아와, 할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오를레앙에 정착했고, 고갱은 이곳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1865년 17살이 되었을 때 고갱은 선박의 항로를 담당하는 수습 도선사(사관후보생)가 되어, 약 6년간 상선(商船)을 타고 라틴아메리카와 북극 등 많은 곳을 여행하였다. 1871년 고갱은 인도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파리로 돌아와,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어머니의 친구가 마련해 준 증권 거래소의 점원 일을 하게 된다. 고갱은 1873년에 덴마크 출신의 메테 소피 가트(Mette Sophie Gad)와 결혼하여 10여 년 동안 5명의 아이를 낳았다.

 


작품 수집가로 시작한 초기 활동

고갱은 결혼 이후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졌고, 이 무렵부터 그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특히 인상파 작품들을 많이 수집했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후견인이었던 어머니의 친구 구스타브 아로사의 영향으로 작품 수집까지 하게 됐다. 그는 갤러리를 빈번히 다니면서 당시 떠오르는 작가들의 작품을 사들였다. 이 즈음의 고갱은 작품을 구입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그리기도 하였으며, 27세 무렵에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 연구소에 다니면서 그림을 배웠다. 1876년에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카미유 피사로를 알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의 제5회 인상파전 이후로는 주요 멤버가 되었다.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의 붕괴로 고갱의 직업은 불안해졌다. 이때 고갱은 화가가 되기 위해 피사로와 의논하게 되고, 피사로의 소개로 폴 세잔, 아르망 기요맹 등과 친교를 맺으면서 확실하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35세가 되던 1883년부터는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고, 생활비가 저렴한 루앙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고 그의 처가가 있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파리로 혼자 돌아온 이후로는 한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파리 생활은 여전히 가난의 연속이었고 고갱은 벽보 붙이는 일을 하며 연명해갔다. 1886년의 제8회 마지막 인상파전에 고갱은 무려 열아홉 점의 작품을 출품했지만, 불행하게도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등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빛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도시생활에 지친 그는 1886년 6월, 브르타뉴(Bretagne)의 퐁타방(Pont-Aven)으로 이사하여 그림에 전념하였다. 퐁타방의 주민들은 프랑스 전통 의상을 즐겨 입었으며 화가의 모델이 되는 것을 좋아하여, 많은 외국인 화가들이 퐁타방을 즐겨 찾았다. 이곳에서 고갱은 종래 인상파풍의 외광묘사를 버리고 차차 특유의 장식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토속적인 토기류 제작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나중에 폴 세뤼지에, 모리스 드니, 피에르 보나르 등의 나비파(Nabis)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토기에서 비롯된 그의 원시적인 관심은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 섬으로 향하게 한다.

 빈센트 반 고흐와의 만남

고갱은 퐁타방에서 알게 된 샤를 라발(Charles Laval)과 함께 파나마를 거쳐 마르티니크 섬에 갔다가, 이듬해 파리로 돌아왔다. 짧은 여행 기간 동안 흑인들의 집에 거주하고 그들의 일상을 지켜본 고갱은 즐겁게 지냈지만, 그곳의 여름은 너무나 더웠고 거주지는 비에 젖어 기울어졌으며 설사병과 열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때 제작된 약 10여 점의 원시주의적 미술 작품들은 파리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화상(畵商)인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테오는 고갱의 작품에 큰 감동을 하여 고갱과의 거래를 시작했다. 테오와의 만남을 통해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수확을 얻은 고갱은 더 이상 자연을 미화하며 재현하는 따위의 그림은 그리지 않고, 사물을 자기 방식대로 단순화시키며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고갱은 파리에서 지내며 고흐와 툴루즈 로트렉 등을 알게 되었고, 특히 고흐와의 우정은 특별했다. 테오의 주선으로 고흐가 머물고 있는 아를(Arles)의 ‘노란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당시 고흐는 브르타뉴에서 화가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매우 부러워하고 있었고, 화가들은 함께 모여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여 남프랑스의 아를에 노란 집을 만들어 화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테오로부터 생활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약속받아 아를로 행한 고갱은 고흐와의 그림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등과 대립을 겪었고, 급기야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둘은 헤어졌다.

 

고갱은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고, 조각, 판화, 도기 제작에도 전념하였다. 고갱은 에밀 베르나르, 샤를 라발(Charles Laval) 등 다른 작가들과 함께 퐁타방을 더욱 빈번히 왕래하였고, 이때 퐁타방파라고 불리는 강한 순색의 사용과 그림에 주제를 선택하는 상징주의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퐁타방 또한 매우 번잡하게 느껴 더욱 한적한 바닷가의 작은 마을인 르풀뤼로 이주하였다.

 

  

 

[황색의 그리스도]는 고갱이 한 성당에서 본 나무 십자가의 예수상을 스케치하여 그린 것이다. 노란색의 예수 모습과 배경, 단풍이 든 것처럼 붉게 채색된 나무 등 전체적으로 매우 단순화된 작품이다. 십자가 주변에는 묵상하는 세 여인이 그려져 있으며, 이들은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따랐던 여인들이다. 이 그림 속에서 푸른 빛의 색을 제외하곤 원근감의 표현은 아예 없다. 단지 배경을 구분 짓기 위한 윤곽선이 있을 뿐이다. 평면, 강렬한 색채, 대담한 윤곽선으로 구성된 황색 그리스도는 고갱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인상주의와의 결별

고갱은 점차 파리 아방가르드 화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889년에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시에서는 공식행사인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 전시에 고갱의 참가를 거부했다. 이에 고갱은 전시장 건물 앞 볼피니 카페를 빌려 ‘인상주의와 종합주의’ 그룹전을 열었다. 이는 박람회에 참여하지 못한 불만을 시위하는 장이었다. 피에르 보나르, 에두아르 뷔야르, 그리고 조각가 아리스티드 마이욜까지 참여한 이 전시회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림의 내용 자체가 인상주의와는 거의 무관한 그림들이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와 종합주의’는 고갱이 인상주의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붙인 전시 제목으로 인상주의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장이기도 했다.

 

종합주의’란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외형적 현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과 자신의 경험을 종합하여 가시적인 세계가 아닌 감추어진 세계를 회화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즉 강렬한 색과 굵은 선, 단순화된 형태를 주관적이면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려는 경향으로 고갱의 사상이 이 속에 함축되어 있다. 종합주의 화가들은 일반적으로 나비파 화가로 소개되며, 시인 앙리 카잘리스가 붙인 ’나비파’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의 나비 즉 ’예언자’를 뜻하는 것이다. 고갱은 색의 음영과 농담의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색채만을 사용할 것을 권했다. 이러한 고갱의 이론은 인상주의가 한계를 드러내며 해체되자 젊은 화가들을 매료시켰지만, 일반인들의 관심은 끌지 못했다.


 

  

 

타히티의 이국적인 매력에 흠뻑 빠진 고갱

고갱은 박람회에 출품된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풍물에 열광하였고, 열대지방의 원시적인 삶을 동경하였다. 각국 민속관들 중에서 자바의 민속관은 고갱으로 하여금 이국적인 매력에 흠뻑 빠지게 했다.

 

고갱은 파리에서의 힘든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그는 에밀 베르나르에게 “올해는 그토록 힘겹게 싸웠건만 파리의 조롱 말고는 소득이 없네. 여기서도 그들의 조롱이 내 귀에 들리고 있네. 너무 절망스러워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을 정도라네.”라며 자신의 심경을 피력했다.


고갱은 산업문명으로 썩은 서양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다고 했다. 이를 위해 작품을 공매 처분하려고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일반인들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갱은 코펜하겐에 있는 가족을 찾아가 잠시 만난 뒤, 꿈에 그리던 남태평양 타히티파페에테 섬으로 간다. 무려 두 달을 걸려 찾아간 파페에테 섬은 이미 문명의 때가 묻어 있어 그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후 고갱은 문명의 흔적이 거의 없는 섬을 찾다가 마침내 그가 원하던 곳인 마타이에아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열세 살의 원주민 테하마나(테후라)라는 소녀와 동거한다. 고갱의 작품에 많이 등장한 테하마나는 고갱이 찾던 순수하고 아름다운 폴리네시아인이었다. 그는 테하마나와 같이 지낸 기간 동안 왕성한 작품 활동에 빠져들었고 행복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송금이 오래전에 끊겨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그의 작품이 한 점도 팔리지 않은 것이다. 물감 값이 떨어지자 그림은 엷어졌고, 그는 이런 현실을 두고 “고통이 천재성을 고무하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통이 너무 심할 때에는 천재성이 완전히 바닥이 나고 말 것이다.”라며 자조하였다.

 

 

 

고갱은 파리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했고 그림 그리는 일도 접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작품을 호평했던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Albert Aurier)와 고갱의 작품을 거래하던 유일한 화상인 테오도르 반 고흐의 죽음으로 고갱이 기댈 곳은 없어진 셈이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시련의 시기 동안 엄청난 창작욕에 불탄 고갱은 무려 80점이나 되는 작품을 그렸다.

 

 

대작의 탄생과 불행했던 말년

1893년 고갱은 테하마나를 남겨둔 채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뒤랑뤼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타히티의 삶과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삽화를 곁들인 수필을 쓰기도 했다([노아 노아]). 그러나 전시회는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했고, 만신창이가 된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1895년, 파리의 리옹 역. 고갱은 짐에 걸터앉아 울었다. 절망의 늪에 빠져 인생의 낙오자가 된 듯한 자신을 뒤돌아 보며 그는 울고 있었다. 타히티가 지상의 낙원이라고 큰소리쳤지만 그와 동행하려는 동료화가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 고갱은 아내로부터 돈을 빌려, 다시 타히티의 푸나아우이아로 가서 타히티 전통가옥을 짓고 살았다.

 

그의 육체는 점점 병들어갔다. 거듭된 음주로 저항력이 떨어져 매독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피부에 난 뾰루지로 인해 나병 환자로 오해받기도 했다. 이 시기에 고갱은 입원과 퇴원을 수없이 반복했다. 14세의 원주민과 동거를 하였지만, 가난과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갱은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자살하기 전에 유언과도 같은 유작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하여 그린 대작이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이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친구 몽프레(Daniel de Monfreid)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12월 한 달 동안 유작으로 대작을 그려보기로 했네. 미친 듯이 그렸네. 사람들은 이 작품이 미완성이라고 하겠지. 그러나 이 작품은 내가 지금껏 그린 것 중에서 최고이며, 앞으로도 이 그림과 비교할 만한 작품을 그릴 자신이 없네. 작품 구상이 워낙 뚜렷해 어느덧 생동감이 느껴지고 있네. 그림 상단의 양쪽 귀퉁이는 연노랑으로 칠하고, 위의 양 귀퉁이가 손상된 프레스코 벽화처럼 말이야. 나는 이것을 걸작으로 본다네.”

 

 

 

 

이 작품은 삼베에다 그려서 매우 거친 질감으로 느껴진다.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보는 듯 넓게 펼쳐진 풍경에는 여러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다. 모든 것을 체념한 고갱은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고, 그의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붓을 들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작품을 그의 추종자 모리스 드니에게 보냈지만, 여덟 점의 작품을 판 돈으로 불과 1,000프랑 밖에 받지 못했다.

 

남은 삶을 보낸 타히티 섬에서 그린 그의 작품들은 다분히 종교적인 상징주의와 폴리네시아의 이국적인 시각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감각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사물을 평면적으로 표현하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려 했다. 무엇보다 감정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점은 이후 20세기 미술의 수많은 화가들-앙리 마티스, 피카소, 뭉크, 알베르 마르케, 블라맹크, 앙드레 드랭, 라울 뒤피-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 모두 고갱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갱은 1903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당시 고갱을 후원하고 있었던 화상 아브루아즈 볼라르는 사망 몇 달 후 추모전을 열었고, 이어 3년 뒤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여 고갱의 명성을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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