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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09-06-19 조회수 : 5,807
제 목 : 조선시대 꽃 그림 구경하세요

옛 그림 이야기 2009/06/19 05:11 이충렬

조선왕조 세종임금때 강희안(1417 ~ 1465)이라는 어르신이 계셨습니다.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들과 <동국정운>을 편찬한 학자이자 선비화가이셨습니다. <고사관수도>와 같은 좋은 그림을 그리셨고, 1474년에는 <양화소록>이라는 꽃과 나무에 관한 책도 남기셨습니다.

<양화소록>은 옛 선인들의 기록을 참고하면서 자신의 경험으로 쓴,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도감'이자 '화훼재배' 책입니다. 요즘시대에도 참고 할 부분이 많은 좋은 책이라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했습니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이 키우던 꽃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사진기가 없던 시대지만, 조선시대 꽃 그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꽃 그림을 그린 화가는 많습니다. 그중 숙종 때어나 영조때 활동했던 현재 심사정(1707 ~ 1769) 어른의 꽃 그림이 볼만한데,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현재첩>에 좋은 작품이 많아 소개합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그림의 제목은 간송미술관 부설 한국민족미술연구소에서 발행한 <간송문화(澗松文華)> 67호> (2004년), 꽃과 나비 이름은 간송미술관 탁현규 연구원의 설명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간송문화>는 간송미술관에서 일년에 두번 전시회를 할 때마다 발행하는 책인데, 좋은 그림과 좋은 글이 많습니다.

 
<산수유>
 
        현재 심사정 <베짱이가 이슬을 마시다> 종이에 엷은 채색 16.6 x 19.0 cm  (간송미술관 소장>

 
 
 
                                                                     베짱이

 
<금낭화>
 
       현재 심사정 <금낭화가 나비를 부르다> 종이에 엷은 채색 21.0 x 12.8cm (간송미술관 소장)

 
 
 
<원추리(망우초)>
 
현재 심사정 <원추리와 벌과 나비> 비단에 채색  22.0 x 16.1 cm  (간송미술관 소장)


 
호랑나비

 


<장미>
 
현재 심사정 <장미와 나비> 종이에 채색 18.8 x 16/0 cm (간송미술관 소장)

 
 
 
호랑나비


<양귀비>
 
현재 심사정 <벌과 나비와 양귀비> 종이에 채색  28.7 x 18.3cm  (간송미술관 소장)

 
호랑나비


<백합>
 
현재 심사정 <백합과 괴석> 종이에 엷은 채색  21 x 12.8cm (간송미술관 소장)

 
 
강아지풀

 
꼬리명주나비


<맨드라미와 달개비>
 
현재 심사정 <맨드라미와 달개비> 종이에 엷은 채색 21.0 x 12.8 cm (간송미술관 소장)

 
맨드라미(계두화, 계관화)
 
이 꽃은 맨드라미처럼 생기지 않아 간송미술관 탁현규 연구원의 설명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꽃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는 분이기 때문에 틀리지 않을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

 



                                                                      달개비


                            <모란, 국화, 패랭이>

 

                     현재 심사정 <꽃과 채소와 나비> 종이에 채색  26.7 x 19.1 cm (간송미술관 소장)


 
                                                                           모란

 
                                                            호랑나비와 표범나비

 
                                                                    패랭이꽃

 
                                                                국화와 홍당무

 
                                                                      가지

어떻습니까?  우리 조상님들이 남기신 그림에는 좋은 그림들이 정말 많습니다.

                                       
                                                         <간송 전형필>

이 꽃 그림들이 실려있는 <현재첩>은 간송 전형필(1906 ~ 1962) 선생께서 수집한 화첩입니다. 간송은 여러분들도 아시듯이, 일제강점기 때 우리 선조들의 좋은 그림과 글씨 도자기 등이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단순히 물려받은 재산이 많아 취미로 수집하신 분이 아닙니다. 

언제 독립이 될지 알 수 없던 일제강점기 때 문화유산을 지킨다는 것은 돈만 갖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독립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문화유산이 민족에게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 그리고 좋은 작품을 감식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했습니다.

간송은 '당대의 감식안'이던 위창 오세창 선생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 스스로도 많은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판단으로 수집한 작품도 많습니다. 그래서 위창 오세창은 간송이 구해 온 서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기록을 여러 곳에 남겼습니다.

간송은 20대 중반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12년 정도 수집한 서화와 도자기 중 6.25 전쟁 때 도난당하지 않고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숫자는 1000 점이 넘습니다. 6.25 전쟁 때 도난당한 서화와 옛책까지 합치면 수천 점을 훌쩍 넘습니다. 약 4천일 동안 수천 점 이상을 모았으니, 12년 동안 하루에 한 점 이상의 서화나 도자기, 옛책을 수집한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아닙니다. 아니, 돈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조상들의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일본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고 우리나라에 남기겠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간송은 이 일을 위해 젊음과 재산을 바쳤습니다.
 
                                                     1938년 완공 당시의 보화각

그리고 그렇게 모은 문화유산을 보호, 전시하기 위해 성북동 입구 오른쪽의 만 여평되는 산을 사서 '보화각'이라는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지었습니다. 
 
                                            보화각 옆 북단장 사랑에서 1938년에 찍은 사진.

가운데에서 부채를 들고 계신 분이 간송입니다. 1906년생이시니 32세때의 모습입니다. 그 왼쪽이 간송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위창 오세창이십니다. 안경낀 분은 안종원 선생, 그 옆의 턱 수염 긴 분이 춘곡 고희동 화백으로 간송의 휘문고보 은사이자 위창 오세창을 만나게 해주신 분입니다.

춘곡 옆에 양복 입은 분이 월탄 박종화 선생으로, 간송의 외종형입니다. 그러니까 간송의 어머님이 월탄의 고모님이십니다. 월탄은 간송의 휘문고보 선배로, 간송 학창시절 때 민족의식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그리고 맨 왼쪽이 청전 이상범 화백입니다. 당시 간송은 청전뿐 아니라 여러 명의 화가들과 교류했는데, 후견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추정은 광복 후, 간송이 화가들과 일부 학자들에게 매달 지원금을 봉투에 나눠줬다는 어느 화가의 증언에 의한 것입니다.

간송 오른편 머리가 짧은 분은 월탄의 형님인 박종목 선생으로 역시 간송의 외종형이고, 그 다음이 심산 노수현 화백 그리고 맨 오른쪽이 한남서림에 상주하면서 간송의 수집을 도운 거간 이순황 선생입니다. 이순황 선생은 당시 경매회사인 경성구락부의 몇 안되는 조선인 주주 중의 한 분이셨기 때문에, '뜨내기 거간'과는 격이 다른 거간이었습니다.

간송은 거간 이순황 선생의 도움으로 <해악전십첩>을 비롯해 겸재 정선의 그림만 161점을 수집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하고 있는 123점보다 많습니다. 그래서 미술사학계에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겸재 그림을 보지 않고는 겸재 연구를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겸재가 우리나라 그림이 중국그림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진경산수화를 창시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지만, 일제강점기 때는 크게 알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겸재의 그림을 그렇게 많이 모았다는 사실은, 간송이 조선시대 미술사에 대해 선구자적인 식견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

최완수 연구실장은 간송이 모은 161점의 겸재 그림을 오랫동안 연구한 후, 겸재가 도화서 화원이 아니라 사대부 화가이고, 중국화풍에서 벗어난 우리나라 고유의 '진경산수화'를 그려낸 '조선의 화성(畵聖)'이라는 연구 결과들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영조, 정조 시대를 '진경시대'라고 불렀고, 학계에서는 그의 학설에 함께하는 학자들을 '간송학파'라고 부릅니다.

최완수 연구실장이 주도했지만 간송미술관의 자료로 공부했기에, '최완수 학파'가 아니라 '간송학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최완수 선생은 간송을 뵌 적이 없습니다. 1962년 간송께서 세상을 떠나신 몇 년 후에 간송미술관 연구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국립경주 박물관 연구원이던 최완수 선생이 간송미술관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이유는, 간송미술관에 있던 100권짜리 <신수대장경>(대정 신수대장경)을 마음껏 보며 공부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때만해도 <신수대장경>은 서울대 도서관에 밖에 없었는데, 최완수 선생은 그 책을 제대로 읽어야 우리미술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립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 것입니다.

최완수 연구실장은 그렇게 간송과 인연을 맺으면서 10년 정도 <신수대장경>을 공부하려고 했는데, 수장고에 있는 어마어마한 간송 수집 작품에 매료되어 40년이 넘도록 간송미술관 연구실을 지키면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의 연구는 겸재 정선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 오늘 작품을 소개한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등 매우 광범위합니다.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수집품을 체계적으로 전시하면서 <간송문화> 발행을 주도하고 있으니, '간송의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은 간송이 생전에 '보화각'이라는 매우 튼튼하고 좋은 미술관을 설립했기 때문에 얻은 '복'입니다. 만약 미술관이 없어 유족이 수집품 관리에 한계를 느끼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면, 수집품에 대한 이런 연구실적은 절대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간송은 단순한 수집가가 아니라, 민족의 문화유산 수호자이셨습니다. 간송이 그렇게 지켰기에 조선시대 문화사와 미술사는 활발하게 연구되면서 풍성해질 수 있었고, 오늘 소개한 현재 심사정의 꽃 그림도 잘 보존되어 이렇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뱀의 다리 :

간송미술관이 일년에 두번만 전시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계신 분들이 꽤 많습니다. 심지어는 횡포라며 분개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옛그림들은 비단이나 한지에 그렸기 때문에 전시를 하기 위해 옮길 때마다 그리고 전시장의 햇빛이나 불빛에도 조금씩 훼손됩니다. 유럽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는 유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보존이 힘듭니다.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같은 이유로 조선시대 서화는 많이 전시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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