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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시형 작성일 : 2009-06-16 조회수 : 4,977
제 목 : 교회사

 

▧교회사(敎會史)①▧

사도시대의 교회

―유대인 그리스도교―

                                          김  성  태

 

사도시대를 시대적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승천에서부터 마지막 사도의 사망 까지로 본다. 사도시대의 종말은 바로 계시시대(啓示時代)가 문을 닫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시대는 계시의 사도시대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기간의 한계를 확정할 수는 없고, 그 경계선을 그리스도인의 제 1,2세대로 보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하였던 이들이 그의 계시를 수행하던 시대(약 30~110년경)까지 연장하여 규정하고 있다.

사도시대에 두 그룹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공존하고 있었다. 하나는 아직도 엄격한 유대사상을 보존하면서 실천하던 팔레스티나 지역의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며, 다른 하나는 팔레스티나 지역 밖에서 개종한 그리스 인, 헬레니스트(Hellenist: 그리스어를 쓰는 유대인) 기타 비()유대인으로 구성된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다. 그런데 이 초창기 교회의 모습을 알려주던 주요 사료(史料)인 사도행전은 유대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제외하고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쓴 그리스 인 저자가, 아람 말을 사용하던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해서 관심과 호의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초창기의 교회는 아람 말을 썼고 오랫동안 유대 사회 속에 머물고 있었다. 다행히도 오늘날 수많은 사료의 발견은 이 사도시대의 교회상을 저술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

사도시대의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루살렘 교회와 갈릴래아 지방의 교회, 사마리아 지방의 교회, 요르단 서안(Transjordan) 지역의 교회가 있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밖의 교회들에 대해서 명백한 언급은 없지만 사마리아 교회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는 암시를 보여주고 있다(사도 8,4-25; 15,3; 21,8-14). 그리고 다른 두 교회들에 대해서는 고대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비문(碑文)이나 초기 교부(敎父), 저술가, 교회사가들이 그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유스티노, 헤제시푸스, 에피파니우스,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을 그 대표적 교회인 예루살렘 모교회(母敎會)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교회와 그 역사는 30년경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성신강림으로 시작되었다. 이 역사적 사건 후, 복음은 사도들, 특히 베드로에 의해 선포되어(사도 2,14-36; 3,26; 4,8-12), 이 교회는 복음 선포적 교회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복음선포(Kerygma)의 주제는 예수의 부활(사도 2,24.39; 3,15; 4,10)과 구약 예언들의 성취(사도 3,20)였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행위인 예수 부활을 자신들이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기적을 통해 증거 했다. 특히 신을 믿어왔던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그 희망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히면서 개종을 요구하였다(사도 2,38; 3,19).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도의 업적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목격자들인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使徒團)과 신도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첫 그리스도교인들은 바리사이 파, 사두가이 파, 에쎄느 파와 같은 유대교 종파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들은 할손례, 정화례(淨化禮), 안식일을 지키며 유대 백성의 종교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신도들은 그들의 특유한 공동체 ―이를 에끌레시아(ecclesia: 교회)라고 했음― 를 형성하는 동시에 예수를 ‘주님’(Kyrios)이라고 부르며 그들 고유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른 유대교인들은 예수의 고향 이름을 따서 이들을 나자렛 파라고 했다. 그들은 유대교의 공동기도에 참석한 안식일 다음날에(사도 20,7) 개인 집에서 집회를 가졌다(사도 2,46; 12,12; 16,40; 20,9). 집회는 훈시와 예절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훈시에는 미신도들에 대한 예비자 교리교육 그리고 신도들을 향한 호교론적인 강론 즉 메시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설교(사도 20,11), 신앙과 애덕 실천을 위한 권유(사도 14, 22, 15; 32) 등이 있었다. 다음에 예절 부분에서는 성찬식 즉 성체성사의 집전이 있었고(사도 2,7; 20,7), 집회를 사회하던 사도나 장로(사도 6,4) 또는 은혜를 받은 신도의 기도로 모임은 끝났다.

예루살렘 공동체의 특수한 생활상은 무엇보다도 상호부조(相互扶助)의 경제 조직이다. 신도들은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누구 하나라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으며”(사도 4,32),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사도 2,45),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 다 놓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받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 34-35). 한 예로 바르나바는 자기 밭을 판 돈을 사도들에게 바치고(사도 4,36-37), 사도들의 제자로서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사도 1,1-22; 13,4-15. 28). 그러나 반대로 아나니아와 삽피라 부부는 땅을 팔아 받은 돈의 일부만을 바쳤기 때문에 죽음의 벌을 받았다. 그러나 재산의 공동소유는 의무적인 것이 아니었다(사도 5, 3-4). 그들의 죽음은 사도들과 공동체, 나아가서는 하느님을 속인 죄의 결과였다(사도 5,4). 그런데 이러한 상호부조의 행위는 협동정신과 형제적 사랑뿐 아니라 현세의 재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감화되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경제조직은 교회 내부에 문제를 일으켰다. 식량배급에 있어 헬레니스트 과부들이 푸대접을 받자 히브리 인(본토 유대인)들에 대한 불평이 터졌다. 사도들은 헬레니스트들 중에서 7명을 뽑아 기도와 안수를 통해 부제(대표로는 스테파노)로 임명하여(사도 6,1-6) 그들의 동료 일꾼으로서 헬레니스트들의 식량배급뿐 아니라 설교와 세례거행의 임무를 부여하였다(사도 6,807. 53; 8,12-13. 36-38). 부제에 해당되는 직책은 히브리인들에게도 이미 있었다. 즉 장로 또는 원로로서(사도 11,30) 대표는 야고보 였다. 따라서 예루살렘 모 교회는 성직계급의 질서를 갖춘 공동체였다. 복음선포, 교회관리, 영신지도, 성사집행의 직무를 갖고 있던 사도단, 사도들의 보조 단체로 히브리인 신도들을 돌보던 장로단과 헬레니스트 신도들을 책임진 부제단이었다. 그러나 36년 스테파노의 순교와 헬레니스트에 대한 박해로 이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고 또 베드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이 예루살렘 밖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되어 장로단이 예루살렘에서 유일한 성직자 단이 되었다.

특히 베드로 사도가 43년경에 예루살렘을 떠난 후(사도 12,17) 유대교적인 전통에 충실하였던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지방주교― 가 되자 이 교회는 더욱 유대주의가 강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되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초창기 그리스도교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 야고보 그룹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으나, 다른 유대 문헌들(히브리 복음서, 토마스 복음서, 야고보의 묵시록, 끌레멘스 강론집 등)에 의하면 야고보 주위에는 많은 예수 친척들이 핵심적인 세력 단체로서 히브리 인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62년 야고보가 순교하자 예수의 사촌인 시몬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권을 계승했으나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이 공동체는 그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상실하였다. 야고보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는 반() 로마 메시아니즘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유대인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이 유대 민족주의에 승복하기를 거부하여, 제1차 유대전쟁(66~70년) 동안에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에서 요르단 서안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과격한 유대 민족주의의 발생과 바오로 사도의 이방인 그리스도교의 성장로 인하여 그리스도교와 유대 사상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②▧

사도시대의 교회<Ⅱ>

―이방인 그리스도교―

                                          김  성  태

 

시리아 그리스도교 공동체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주로 팔레스티나 본토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본토 이외의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가운데 성장하면서, 동시에 복음은 이교인들에게도 전달되었다. 그 중에 시리아는 사도시대에 그리스도교가 크게 발전한 지역이었으며, 특히 이방인 그리스도교의 확산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 대표적 공동체로서 다마스커스 교회와 안티오키아 교회가 있었다. 당시의 로마 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집트)에 버금가는 대도시인 안티오키아에 설립된 교회는 예루살렘 다음 가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그리스 문화권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에서 헬레니스트계의 저자는 이 교회를 잘 묘사하고 있다. 반면에 같은 시리아 지역이지만 아람어계에 속한 다마스커스 교회에 대해서 사도행전을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서 성서적 문헌 이외에 다른 사료(史料)를 통해서 우리는 두 공동체를 동등하게 언급해야 한다.

 

1) 다마스커스 교회.        사도행전에 의하면,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37년에 유대인들의 박해로 예루살렘에서 물러나온 헬레니스트들이 다마스커스 지역인 페니키아에서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11,19). 38년에 사울(후에 바오로)이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커스에 파견되었다(사도 9,1-2). 개종 후에 그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설교하였다(사도 9,20). 또한 이 다마스커스 신도들 중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는데(사도 9,20) 그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사도 22,12). 따라서 다마스커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37년에 설립되었고 헬레니스트들과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성서 이외의 다른 문헌, 즉 사해문서(死海文書)의 쿰란 사본에 속하는 자독 문헌 또는 다마스커스 문헌에 의하면, 사해 서북부의 쿰란 지역에 거주하던 에쎄느파(유대교의 한 종파)에서 개종한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첫 다마스커스 교회에 있었다. 그것은 다마스커스 공동체와 자독 공동체 사이에 많은 유사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스테파노의 설교 중에 인용되고 있는 아모스서의 한 구절(5,25-27)이 다마스커스 문헌(IX, 11)에서도 발견되었고, 또 에쎄느 그리스도교 개종자의 저서인 「12 성조의 성약서」라는 다마스커스 문헌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본거지는 다마스커스 도읍이 아니라, 다마스커스에서 페트라에 이르는 나바태아 왕국의 한 마을인 코크바였다. 이 마을은 다마스커스에서 남서쪽으로 10마일 떨어져 있었다. 바오로가 개종 후에 아라비아로 가서 3년간(38~41년) 지냈는데(갈라 1,17-18), 이는 바로 자독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의 코크바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2) 안티오키아 교회.        안티오키아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고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주민은 주로 시리아 인들이었고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도 있었다. 이 도시의 복음화는 다마스커스에서와 같이 37년에 예루살렘에서 나온 헬레니트스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말씀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파되었으나, 그리스 말을 하는 헬레니스트―키프로스와 키레네 출신―몇 사람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설교하여 많은 이들이 개종하였다(사도 11,19-21). 이후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공동체로서 등장하였다. 42년에 예루살렘에서의 사도단은 바르나바를 이곳에 파견하였다(사도 11,22).

안티오키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크게 발전하여, 글라우디오 황제(41-54년)시대에 처음으로, 그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란 의미로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라 불렸다(사도 11,26). 이러한 명칭은 로마 외교인 수에토니오의 저서인 「글라우디오의 생애」에서도 나타난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제는 더 이상 유대교의 한 종파가 아니라 독립된 큰 단체로서 인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이 교회에서는 지방교회의 장로, 부제와 독립된 지위에서 활동하던 예언자 또는 교사라고 불리는 선교사들을 많이 볼 수 있다(사도 13,1). 이들은 안티오키아에 본거지를 두고 사도들과 긴밀한 접촉을 가지면서―특히 아시아 지역에서―전교하였다.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는 항상 그의 선교 여행을 이곳에서부터 시작하였다(사도 13,4; 15,40; 18,23).

안티오키아는 완전히 분리된 두 공동체 즉 유대인 공동체와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병존하는 첫 도시였다. 갈라디아서(2,11-14)에 의하면,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그들의 관습, 즉 개종한 이방인들과의 식사 금지법을 엄수하였다. 그런데 성찬례는 식사 중에 거행되었기 때문에 두 공동체의 신도들이 함께 이 예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안티오키아 교회에 내분을 일으켰다.

 

로마 그리스도교 공동체

 

로마 전기작가인 수에토니오에 의하면, 로마에서 유대교인들과 유대계 그리스도교 신도들 사이에 충돌사건이 일어나, 이 소식을 들은 글라우디아 황제는 50년에 이 유대인들을 축출하였다(「글라우디아의 생애」 15,4). 사실 바오로 사도는 축출된 신도들 중에서 아퀼라와 부리스킬라 부부를 고린토에서 51년에 만나 로마 교회 소식을 들었다(사도 18,2). 또한 그가 57-58년 겨울에 로마 신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로마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크게 성장하여 있었다(로마 1,8). 아울러 성신강림 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 받은 이들 중에 로마 인들이 있을 수 있다면(사도 2,10), 이미 초기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로마 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전설이나 전승된 증언들에 의하면, 베드로 사도가 로마 교회를 세웠다고 보고 있다. 그는 43년 옥중에서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나와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사도 12,17) 갔다가 49년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하였다(사도 15,7). 성서적 문헌은 43년부터 49년 사이의 베드로의 활동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에 의하면 44년에 베드로는 로마에 와서 25년간 머물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교회사」Ⅱ, 14/16). 따라서 로마 교회는 베드로에 의해서 43-49년에 설립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루살렘의 공의회 이후 베드로는 다시 로마에 거주하면서 63-64년에 그의 첫 편지를 썼고(1베드 5,13), 네로 황제의 박해 시에(64년 7월경) 순교하였다(로마의 끌레멘스의 「고린토 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5-6장: 에우세비오의 「교회사)Ⅱ, 25).

베드로는 로마 주교들의 모든 명단에서 첫 자리에 놓여있는 로마 교회의 창설 사도로서 언급되고 있다. 베드로 사도를 계승해온 주교들의 명단은 이미 160년경에 헤제시포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리옹의 이레네오 역시 180년경에 로마에서 이러한 명단을 찾아냈다(「이단자를 논박함)Ⅲ, 1,1; 3,2). 그런데 두 사람은 모두 로마 주교의 명단을 언급하는 데에 있어서 역사 및 연대기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교리상의 목적에 의해서 였다. 이단을 반박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참된 가르침을 로마 교회의 사도적 전래를 통해서 밝히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로마 주교들의 명단의 순서는 신앙의 순수성과 교리의 견고성을 보장해주는 구실을 하였다. 우리는 초기 로마 주교들의 재위(在位)기간이 기입되지 않아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데 놀랄 필요는 없다. 로마 주교 명단에 대한 역사적 관심은 후기(4세기초)애 생긴 것이며, 교회사의 시조인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가 처음으로 28명의 교황의 재위기간을 기입하였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부터 15대 교황 제피리노(198/9?-217)까지는 연대가 확실치 않고, 이후는 상대적 신빙성을 지니고 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③▧

사도시대의 교회<Ⅲ>

―교회의 내분과 이단―

                                          김  성  태

 

교회의 내분(內紛)

사도시대에는 유대 민족주의가 극단화되어 가면서, 이로부터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강력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70년의 예루살렘 함락은 유대교는 물론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그 영향력을 약화 또는 상실케 하는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더우기 바오로 사도의 노력으로 그리스도교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점차 발전하여, 신도들로 하여금 유대교적 유대(紐帶)에서 탈피케 하였다. 결과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49년에 이러한 교회의 내분을 보여주는 두 사건, 즉 예루살렘 공의회와 안티오키아 사건이 있었다.

예루살렘 공의회 : 바오로 사도는 바르나바와 함께 48년에 선교 여행에서 안티오키아에 돌아와 신도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사도 14,26-28). 그런데 49년에 유대아에서 온 사람들이 할례(割禮)는 모든 신도들에게 의무적인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안티오키아 교회를 혼란케 하였다(사도 15,1-2). 이러한 할례의무화의 주장은 당시에 로마 제국과 투쟁하고 있던 유대 민족의 정치적 환경과 관련되어 있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볼 때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직 유대 공동체에 속하여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할례 받지 않는 이들을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은 유대교에 반역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따라서 유대 민족주의의 압력에 굴복한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유대인 공동체의 그리스도교 일원(一員)이 되는 데 그 증표(證標)안 할례를 요구하였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가 이스라엘의 세속적 목적과 연결될 위험을 깨닫고 할례의무화에 대한 요구를 단호하게 배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쟁점(爭點)의 중대성으로 보아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등을 예루살렘에 파견하여 사도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였다(사도 15,2).

이에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은 회의를 열어 다시 할례에 대해 논의하였다. 여기서 바리사이 파 출신의 신도들은 이방인의 할례를 주장하였으나(사도 15,5), 사도들을 대표하여 베드로는 개종한 이방인들에게는 할례의 의무가 없다고 토론을 종결 지었다(사도 15,10). 이어서 원로들을 대표한 야고보 역시 바오로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이방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음란한 행동을 금지하는 노아 계명만을 지키면 된다는 절충적인 보충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야고보의 제의로 공의회의 결정을 알리는 서신은 바오로와 바르나바 등을 통해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전달되었다(사도 15,20-22). 이러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공동체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이는 이후 수년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안티오키아 사건 :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인의 할례 문제에 대해 확정적으로 결말을 지었다. 그러나 유대 민족주의에 자극을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애국적인 감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49년 말에 베드로는 선교 여행 중에 안티오키아에 들렀다. 처음에 그는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번갈아가면서 지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신도들이 도착한 후에 베드로가 이방인 신도들과 식사하는 것을 중지하자, 이에 대해 바오로는 신랄하게 책망하였다(갈라 2,11-14). 여기서 베드로의 행동과 바오로의 비난은 각기 다른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방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소중하게 여기던 바오로에게는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멍에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반면에 베드로는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유대 민족주의의 압력에 의해 유대교로 되돌아갈 위험을 염려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유대교의 율법에 함께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유대인 신도들을 지키고자 하였다.

두 사도들의 견해는 서로 조화될 수는 없지만 둘 다 합리적인 것이었다. 바오로는 이때에 유대인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으로 단념하였고 이방인들 사이의 교회 장래만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대인 그리스도교가 비록 그 영향력을 상실해가지만 유지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의 행동을 겁장이의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또 바오로의 견해는 일방적이며 개인적 변론에 해당되는 것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이방인들 사이에서 더욱 더 팽창되고 있는 반면에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 사건으로 알 수 있다.

 

이단(異端)

70년의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영지주의(靈知主義)로 알려진 이원론(二元論)적 경향의 이단이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영역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영지주의는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이단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단적인 유대인 그리스도교 그룹에 속하는 이들로서는 에비온파, 엘케사이파, 니콜라오파, 체린투스, 시몬파, 메난데르파 등이 있었다. 이들은 율법을 존중하여 안식일과 할례의 의무를 충실하게 준수하였으나 노아 계명을 배척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의 동정녀 출생(童貞女出生)과 신성(神性)을 거부하여 예수는 신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태어난 인간이며 모세가 말한 예언자 또는 위인으로서 세례 때에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그에게 내려왔다가 수난 이전에 성부께 돌아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유대적 그리스도교의 이단은 2세기 초부터 영지주의로 발전되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 철학, 이교도의 신비적 구원관, 동양의 신화적 우주 개벽설과 점성학 등을 혼합하여 성서를 공상적 비유로 해석하였다. 즉 우주의 창조, 인간의 구원관과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유출설(流出說), 이원론, 정령설(精靈說)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영지주의를 주장한 이들로서는 사투르니노스, 바르벨로 그노시스파, 세드파, 카르포크라테스, 바실리데스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빛의 세계(플레로마)에 있는 미지(未知)의 최고신과 조물주(데미우르고스)를 구별 또는 대립시켜 놓았다. 최고신으로부터 수많은 정령(아이온)들이 유출되어 그 중에 한 정령인 데미우르고스에 속하는 일곱 천사 또는 일곱 통치자들에 의해 우주와 인간이 창조되었고 이 일곱 신들의 지도자가 구약의 신인 야훼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정령들이 최고신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마지막 최하급의 상태로 어두움과 악의 세계에 속한다고 설명하였다.

영지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은 이런 물질세계에서 벗어나 최고신의 세계인 플레로마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빛의 세계(플레로마)로 돌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사명을 띠고 한 정령으로 나타났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④▧

사도후(使徒後)시대의 교회<Ⅰ>

                                          김  성  태

사도교부(使徒敎父)

 

사도후시대(使徒後時代)는 일반적으로 2세기 전반을 지칭하고 있다. 이는 계시의 사도시대가 끝나고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후세대에 전해준 특징을 지닌 시대로서 사도들과 후대 교회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성전(聖傳)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대의 저술가 그룹을 ‘사도교부’라고 부르고 여기서 ‘사도교부시대’라는 명칭도 나왔다. 이들은 사도들과 면식(面識)이 있는 제자들이거나 문하생들, 혹은 사도들과 개인적인 친교를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도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이 그룹에 속하지 않는다.

사도 교부로서 로마의 클레멘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뽈리까르뽀, 헤르마스, 빠삐아스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이외에 연대적으로나 내용에 있어서 사도시대에 밀접한 저서들의 저자들도 사도교부에서 다루고 있다. 예컨대 「디오네토에게 보낸 편지」, 「바르나바의 편지」, 「디다케」, 「코린토 인들에게 보낸 편지」등의 저자들이다.

이러한 사도 교부들의 저서들은 초기 교회의 사상, 관습, 생활을 알아보는 데에 더없이 귀중한 가치를 지닌 문헌들이다. 이 문헌들은 처음에 카리스마적 정신으로 지배되었던 사도들의 공동체가 어떻게 제도적 성격을 띤 교회가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또한 신약성서의 정경(正經)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밝혀준다. 이 저서들 중에 어떤 것은 처음에는 신약성서로 간주되어 계시된 신앙의 정경으로 취급되거나 전례에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사도 교부들 자신에 의해서 영감(靈感)이란 개념이 규정된 후에는 신약성서와 분리되었다.

 

교회전례(敎會典禮)

 

사도후시대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아직도 유대교의 배경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따라서 교회관습은 유대교적, 또는 유대인 그리스도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교회관습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입교의식과 주일 집회였다.

그리스도교 입교의식 : 세례를 위한 준비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별로 없지만 이는 매우 오래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세례준비에는 두 단계가 있었다. 우선 개종을 원하는 이는 교육을 받고, 다음에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깨달아 믿고 신도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그는 준비기간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교육은 교리교육과 윤리교육을 말한다. 교리교육의 내용은 창조주인 하느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 및 구약 예언의 성취 등이었다. 이러한 교리교육은 바오로 사도의 서한이나 초기 교부들의 저서에 있는 옛 신조들을 요약한 것으로 이 신조들은 최초의 신경을 이루었고, 여기서 오늘날 우리의 사도신경이 발전되어 나온 것이다. 윤리교육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계명, 그리스도교 신도의 생활방법, 그리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정한 법에 의한 규율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육이 끝난 다음에는 세례예절이 있었다. 이 예절 이전에 세례 지원자들은 단식을 실천하였는데 이는 구마(驅魔)와 같은 결과 ―마귀를 끊음과 그리스도에게의 신봉― 를 내던 것으로 보인다. 단식 외에 안수(按手)가 있었고 곧 세례예절이 시작되었다. 이 예절은 간접적으로는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 직접적으로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 최종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와 연결되었다. 세례는 샘물에 세 번 침수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이는 천주 성삼을 불러내는 것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죄의 사함과 성령의 은혜를 갖고 오는 것이었다. 침수 후에 몇 가지 부수적 예절이 따랐다. 십자 모양으로 축성된 기름을 바르는 예절이 있었는데 이는 유대인 그리스도교 사상의 흔적으로 십자 표시는 본래 히브리 어로 하느님 이름의 상징을 의미하였다. 이 예절은 세례 자체를 뜻할 만큼 매우 중요하였다. 그리고 흰 옷을 입는 예절이 있었고, 동정자들에 한해서 나뭇잎으로 엮은 관을 쓰고, 세례수를 마시고 우유와 꿀을 먹는 예절 등도 있었다. 성서예식이 끝난 다음에는 세례 후의 교육이 있었다. 세례는 보통은 빠스카 전야에 있었기 때문에 이 교육은 빠스카 설교의 형식을 갖고 있었다. 이는 유대인들이 에집트에서 나올 때의 그들의 해방에 대한 이야기(haggadah)를 대체한 것이다. 이 설교 후에는 회식(會食)이 따랐는데 이는 유대교의 빠스카 식사를 대체한 것이다. 여기에는 세 번의 감사기도, 즉 포도주에 대한 기도, 빵에 대한 기도, 그리고 식사 후의 기도가 있었다.

성찬례의 거행으로 빠스카 전야는 끝난다. 우리는 이 시대의 성찬전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문헌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빠스카 식사 중에 세워진 것으로 보여진다. 빵과 포도주에 대한 축성의 기도는 유대교의 축복 형식에서 취한 것으로 성찬례는 유대교 예절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주일집회 : 신약성서와 사도후시대의 저서들은 주일집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사도 20,7; 디다케 ⅩⅣ, 1; 바르나바의 편지 ⅩⅤ,9). 이 저서들에 의하면 신도들은 주의 날(주일) 동이 트기 전에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빵을 나누기 위해 함께 모여 감사하였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안식일 의식 거행을 나무라면서 주일을 준수할 것을 적극 옹호하였다(마네시아 인들에게 보낸 편지 Ⅸ, 1). 그리고 이 주일집회 이전에 고백 또는 참회예절이 있었다 (디다케 Ⅳ, 14; 바르나바의 편지 ⅩⅨ,12). 주일집회는 복음서와, 바오로 사도나 클레멘스 등의 편지들과 같은 저서들의 낭독으로 시작되었고 이러한 예전적 독서 후에 설교가 있었다. 교회의 중요한 지향을 위한 기도가 있은 다음에 성찬기도가 신도들의 아멘이란 답으로 끝났다.(1고린 16,2).

주일에 대한 명칭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는 그 기원을 우리에게 암시하여주고 있다. 첫째로 가장 오래된 것은 「디다케」에서 발견되는 ‘주의 날’(Kyriake)이다. 이 단어는 처음에 그리스도교의 부활절을 의미하였다. 둘째로 주일은 ‘제8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바르나바의 편지 ⅩⅤ,9). 신도들은 유대교의 제7일을 지낸 후에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그들 고유의 예전을 거행하였는데 이는 유대인 그리스도교에서 기원하였다. 세째로 천지창조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켜 ‘첫째 날’로 지칭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은 매우 중요한 첫째 날이었기 때문에 모든 주일도 역시 첫째 날로 불리었다. 주일 이외에 수요일과 금요일은 그리스도교의 단식일이었고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계속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

유대교 축제일 :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대교 축제일을 계속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유대교 달력은 여러 가지가 있었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사용한 달력도 이런 다양한 것 중의 하나였다. 더우기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축일은 유대교 축제일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지낸 유대교 축제일들은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갖고 재현된 것이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⑤▧

사도후(使徒後)시대의 교회

                                          김  성  태

 

교리(敎理)

 

사도후시대의 교리는 전례와 마찬가지로 아직 유대교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학은 구약성서 ―특히 창세기의 첫 부분(1-3장)의 여러 성구(聖句)에 대한 주해나 예언서, 주로 예레미아와 에제키엘의 단편적인 인용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유대계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유대교의 저서들을 구독하고 있었고 또는 이 책들을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부분적으로 개정하거나 첨부하였다. 예컨대 「12성조의 성약서」, 「이사야의 승천」, 「요셉의 기도」, 「에녹 1,2서」, 「에스드라 4서」 등은 일부는 유대교적, 일부는 그리스도교적 내용이다. 또한 그들은 묵시록(默示錄)들을 저술하였는데 이 저서들은 유대교의 묵시사상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묵시록들 중에서 일부는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계시(啓示)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컨대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하였던 「베드로의 묵시록」, 「12사도의 편지」, 「진리의 복음」, 「클레멘스의 설교」, 「야고보의 묵시록」등이다. 그리고 「요한의 묵시록」과 헤르마스의 「목자」역시 묵시문학에 속하며, 사도교부인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와 빠삐아스도 그리스도교의 묵시사상을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묵시 저서들은 계시의 사실을 설정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묵시 중에 천공이 열려 계시를 받는 이가 천계(天界)를 꿰뚫어보면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조(觀照)하고 그 모습을 설명하는 메시지를 받음으로 천계의 비밀들을 밝힌다. 이러한 비밀들은 신, 천사, 악릿 사자(死者)들의 거처와 신이 천상 저서에 정하여놓은 시기들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런 비사(秘事)들을 아는 것을 그노시스(지식)라고 하였고 따라서 이는 무엇보다도 묵시적 지식을 의미하였다. 이상의 저서들은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신학의 대표적인 주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성삼에 대한 이론은 천사론을 표절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자’라고 불리는 성자(聖子)는 ‘영광을 받는 천사’로서 여섯 대천사들의 지도자로 지칭된다(헤르마스, 「목자」의 비유편 Ⅶ,1,1; Ⅸ,12,7). 헤르마스는 이 천사를 「요한의 묵시록」(12,7-10)에서도 나오는 미카엘로 대체하였다(「목자」의 비유편 Ⅶ3,3). 성신(聖神)은 가브리엘 천사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이사야의 승천 Ⅸ,27,36). 그리고 이사야 예언서(6장)에 나오는 두 천사(세라핌)들은 성자와 성신의 재현으로 보고 있는데(이레네오, 사도의 복음 선포에 대한 증명 10), 이는 유대인 그리스도교적 개념으로 4세기에 다시 예로니모에 의해서 제창된다. 그 밖에 성자(‘말씀’)는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몇 가지 표현으로 지칭되고 있었고 이는 유대교의 이론적인 해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명칭은 ‘이름’(진리의 복음 37, 37-41,3)과 ‘율법’(헤르마스, 「목자」의 비유편 Ⅶ,3,2)등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신비가 역시 천사론과 관련하여 성자는 천사들이 머물고 있는 일곱 천국들을 거쳐서 천사의 형상으로 내려왔다가 같은 방법으로 승천하여 ‘천계에서 천사들에게 흠숭을 받고 있다는 교리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이 승천 중에 천사들이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인성(人性)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견해도 있다(유스티노, 트리포와의 대화 ⅩⅩⅩⅥ 5-6). 이런 견해는 신학적 의미가 첨부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는 신이 자신은 천사보다 낮추었고, 승천의 신비는 인간이 천사보다 높이 들어올림을 받았다는 신학을 제시한다.

세째, 그리스도께서 고성소에 내려갔다는 교리 역시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신학의 주제 중의 하나이다. 이 교리는 구약성서 속에 나오는 의인의 구원 문제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헤르마스는 사도들이 죽은 이들에게 성세를 베풀기 위해서 고성소에 내려갔다는 특이한 교리를 내세우고 있다(목자의 비유편 Ⅸ, 16,15-17). 이렇게 그리스도가 고성소에 내려갔다는 견해의 신학적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는 데에 있다.

네째, 교회관은 당시의 유대교에 기원하고 있는 몇 가지 상징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농장’(사해문서, 하바꾹 주해 Ⅵ, 15-17), ‘배’ ‘건물’(사해문서, 공동체의 규율 Ⅸ,6) 등이다. 그러나 가장 의미 깊은 상징은 선재(先在)하는 교회이다. 이는 첫 창조물인 ‘노부인’(헤르마스, 목자의 묵시편 Ⅱ,4,1)의 상징, 물 위에 세워진 ‘건물’(헤르마스, 목자의 묵시편 Ⅱ,3,3-4)의 상징, 창세기 2장 24절에 대한 묵시적인 주해에 의한 ‘남자와 여자’(코린트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ⅩⅣ,1-2)의 상징 등이다.

마지막으로 종말론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에 대한 기다림과 지상왕국의 건설에 대한 교리가 있었다. 이 종말론은 몇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의인들의 부활, 살아있는 성인들의 변형, 낙원생활을 하는 메시아의 천년왕국(이사야의 승천 Ⅳ,15-17) 등이다. 이러한 상징주의는 유대교에 기원을 두며(요벨서 ⅩⅩⅢ 27; Ⅳ,29), 유대계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교리로 규정하였다.

 

신앙생활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가르친 사상은 사도후시대에서 별로 영향력이 없었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기도는 유대인의 기도와 유사한 점을 많이 갖고 있었다. 물론 신도들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 구약의 신에게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이 기도는 구약성서의 기도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성격의 기도였다. 신도들은 예수 안에서 인간에게 부여된 새로운 생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부(聖父)에게 기도하였다. 그들은 성부에게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아멘’으로서 감사하는 마음을 굳게 하였다. 로마의 클레멘스는 새로운 형태의 기도를 지적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교 신도는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난한 이에게는 도움을, 통치자에게는 지혜를 신에게 청하는 기도를 드렸고 아울러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성부께 기도하였다(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59-61). 그러나 성자께 바치는 기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도들은 그리스도에게도 기도하였다(플리니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편지 10,96).

그리고 사도후시대의 신심은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리스도의 뜻은 바로 신도들의 윤리생활의 규범이었다. 그의 계명은 신도들의 행동을 좌우하였고 성자 자신이 ‘법’이었다(클레멘스,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3,4; 뽈리까르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4,1; 이냐시오, 마네시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13,1; 헤르마스, 목자의 비유편 Ⅶ,3,2). 그리스도의 생활은 신도들이 따라야 할 표본이었고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그리스도교 신심의 기본이 되었다(클레멘스,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16,17,33,7-8; 뽈리까르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10,0; 이냐시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10,3). 이러한 생활의 가장 숭고한 증거는 순교에서 나타난다.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뜻 뒤에는 성부의 원의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르는 이는 성부에게로 가고 성부 안에서 살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과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모든 신도들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理想)이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⑥▧

초대 그리스도교의 박해

                                          김  성  태

 

박해(迫害)의 원인

 

로마 제국은 법치국가 였기에 정부당국이 반()그리스도교적 조처를 취하였을 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박해한 법적 근거가 되는 자료를 제시하여주는 국가문서는 3세기 중엽까지는 없었다. 오히려 박해에 대한 사료(史料)또는 순교사 등 그리스도교 문헌에서 발견되고 있다. 놀랍게도 로마 저술가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박해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렇자면 로마 제국은 일반법이 아닌 특별법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였는가? 아니면 국가의 통치자들이 그리스도교를 ‘부당한 종교’로 보았기 때문에 단속 권한을 행사하였는가?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대부분이 황제들이 대체로 법적 근거가 없이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처벌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떼르뚤리아노가,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가한 박해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부당한 조치였다고 비난한 것으로 봐서도 알 수 있다. 예컨대 뜨라야노 황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 이름 때문에 처벌받아야 한다고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국가는 이 신도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만일 그들이 범죄자라면 왜 기소당하지 않았는가? 또 그들이 범죄자가 아니라면 왜 선고를 받고 처벌되었는가? 이제 그 이유를 고찰하여 보기로 한다.

첫째 원인은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주장하고 있던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으로 인한 유일신교(唯一神敎)와 다신교(多神敎)의 충돌이다. 로마 제국은 일반적으로 다른 종교들에 대해 묵인 또는 관용의 태도를 보였으니, 그 대신 국가의 이교적 경신예식에 참석하고 황제 숭배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예수만이 하느님이며 그리스도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절대론은 국가의 이러한 요구를 거부케 하였고, 따라서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교 로마 인들에게는 무신론자와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둘째 원인은 로마 국민이 그리스도와 그 신도들에 대해 갖고 있던 오해와 증오심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국법(國法)을 성실하게 준수하였고, 황제를 신()으로 승인하여 그에게 기도하지는 않았으나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어떠한 반()그리스도교적 조처를 취할 이유가 없었다. 박해는 오직 간헐적으로 일어났고 그 기간이나 범위도 각 지방에 따라 달랐다. 특히 2세기의 박해는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분화(噴火)와 같은 것이었다. 예컨대 자연의 재해, 패전(敗戰) 등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국가의 신들에게 제사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군중은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미움을 폭발시켰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인들이 증오했는가? 이는 일반 대중이, 자기들과 다른 생활을 하면서 윤리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던 이들에게 갖는 본능적인 반감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대중에서 떨어져 생활한 것은 의혹을 사고 비방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로마 국민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비밀 집회에서 범죄행위를 받는 원인이 되었다. 즉 그리스도 신자들이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먹는 것을 희랍 신화에 나오는 인육제처럼 오해하여, 인간의 육신을 먹고 그들이 서로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을 근친상간(近親相姦)의 죄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세째 원인은 황제들의 그리스도교에 의한 국가 위기 의식이다.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은 범 세계적이고 초()국가적인 향방의 그리스도교는 국가를 전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국가와 그리스도교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특히 2~3세기의 유능한 황제들이 종교를 토대로 하여 국가를 내적으로 견고케 하고자 시도하였을 때 그리스도교는 장애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

 

박해의 과정

 

제 1 기 : 100년까지 로마 제국은 대체로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용과 묵인의 자세를 보였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 간주되어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종교로서 대우를 받았다. 이 시기에 있었던 박해는 황제들의 폭군적인 행동이었을 뿐이며 법적 근거가 없었고 로마 시와 소 아시아 지역에 한하였다. 네로 황제(54-68)는 64년 로마 시의 화제를 그리스도교인 들에게 뒤집어씌워 박해하였다. 이때 베드로 사도가 순교하였다. 도미씨아노 황제(81-96)는 귀족들과 지식인들에게 살인적 만행을 가하였다. 91년에 원로원 의원인 아칠리오 글라브리오는 무신론자로 처형되어 그의 토지의 일부는 후에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고, 96년에 황족(皇族)인 플라비오 클레멘스와 그 아내인 도미틸라가 희생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요한 사도가 파트모스로 유배간 것도 이 시기이다.

제 2 기 : 100년부터 250년 사이에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로부터 구별되면서 그 자체가 종교로 인정을 받았으나 국가와 적대되는 부당한 종교로서 박해를 받았다. 황제 뜨라야노(98-117)와 하드리아노(117-138)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였으나 이들에 대한 익명(匿名)의 고발은 금하였고 배교하는 신도들은 처벌을 면하였다. 마르코 아우렐리오 황제(161-180)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었으며 많은 신도들이 순교하였다. 유스띠노와 뽈리까르뽀가 이때 치명하였다. 또 리옹의 박해로 인하여 신도들의 일부는 순교하였고 일부는 영국으로 건너가 고대 영국교회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셉티모 세베로 황제(193-221)는 그리스도교를 묵인하였으나 202년에 갑자기 북 아프리카와 근동 지역의 신도들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성녀 뻬르뻬뚜아와 펠리치따스가 이때에 순교하였다.

마지막으로 첨부하고자 하는 것은, 제2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반()그리스도교적인 책이나 팜플렛에 대해 교회를 변호하는 호교적 그리스도교 문학이 발생하였다(「경향잡지」 1980년 5월호 ‘호교교부’참조)는 사실이다.

제 3 기 : 250년부터 311년까지의 시기에 비로소 일반법에 의해 금교(禁敎)조치가 취하여졌다. 데치오 황제(249-251)는 250년에 유행병을 퇴치하기 위해 로마 신에게 제사를 바칠 것을 명하는 칙령을 반포하면서 참석자에게는 리벨루스(Libellus)란 증명서를 발부하였다. 여기서 참석을 거부한 신도들이 드러나 체포 처형되었다. 동시에 수많은 배교자가 속출하여 교회 내부에 경종을 울렸고, 더우기 이들이 교회에 복귀하고자 할 때에 이를 반대하는 엄격주의자들은 이단적 교회를 세움으로써 교회 분규를 일으켰다. 발레리아노 황제(253-260)는 두 차례에 걸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다. 이때 치쁘리아노 주교와 라우렌시오 부제가 순교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전보다 내적으로 더욱 견고해졌고 배교자도 적었다. 발레리아노 황제 이후 40년 동안 평화시대를 맞이한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마지막으로 가장 잔인한 대박해를 디오끌레시아노 황제(284-305)로부터 받았다. 그는 처음에 그리스도교에 대해 묵인하는 자세로 관용을 베풀었으나, 303년부터 304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칙령을 반포하면서 전()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를 근절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교회를 파괴하고 성서를 불사르고 그리스도 신자인 공무원을 해직시켰다. 305년 이후서 로마 제국에서는 대체로 박해가 끝났으나 동 로마 제국에서는 311년까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박해가 계속되었다. 311년에 갈레리오 황제(305-313)는 그의 박해가 효과 없음을 인정해야 했고, 죽음을 앞둔 병석에서 관용의 칙서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고 콘스탄틴 대제의 옹호 아래 국교(國敎)로서 급성장하게 된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⑦▧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리스도교

                                          김  성  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改宗)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틴)는 당시 제2의 부제(副帝)인 콘스탄씨우스 클로루스와 헬레나의 아들로 나잇수스에서 출생하였다. 청년시기를 니코메디아에 있는 디오끌레씨아누스 황제(로마 제국의 제1정제)의 궁전에서 보낸 그는 황제가 305년에 은퇴하면서 그를 부제로, 그의 부친을 제1의 정제(正帝: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하리라는 기대에 어긋난 조처를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제2정제가 된 그의 아버지가 있는 골 지방(지금의 프랑스와 스페인 지역)으로 갔다. 일 년 후에 그의 부친이 사망하자 군대는 콘스탄티누스를 제2의 정제로 추대하였다.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정치적 수완과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로마 제국의 서방지역 대부분을 통치하면서 그의 세력권 확장에 노력하였다.

312년에 콘스탄티누스는 서 로마 제국의 제2의 부제인 막쎈씨우스를 이딸리아에서 몰아내고 로마를 점령하기 위해 알프스 산을 넘어 진격하였다. 로마의 티베르 강에 놓여있는 밀비우스 교() 전투(312년 10월)에서 상대방의 막강한 군대와 마주쳤을 때에 그는 전쟁의 승산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 전투는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그리스도교 국가의 옹호자로 등장하는 요인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사건은 당시대의 역사가인 락탄씨우스와 에우세비우스에 의해서 언급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전투 전에 발현(에우세비우스의 증언) 또는 꿈(락탄씨우스의 기록)에서 자신과 그의 군대가 그리스도교의 신의 가호와 구원의 표적을 받았다. 그는 태양 위로 “이 표시로 싸워라”는 말과 함께 십자 표시를 보았고 이 하늘에 나타난 표적 (      ,      )을 그의 군대의 어깨에 붙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는 그가 진군(進軍)하는 데 자신감을 넣어주었고 마침내 대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여기서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승전(勝戰)을 그리스도의 힘과 그리스도교의 우수성의 증거로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어떤 이들은 그의 개종을 내적인 마음의 변화, 즉 종교적 체험의 기적적인 결과로 보기보다는 황제의 순전한 정치적 책략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 증거로 이들은 콘스탄티누스가 재직기간(306-337) 동안 우상숭배의 이교사상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묵인하였고, 오직 임종 때 가서야 그리스도교 신도로 세례를 받은 사실을 들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의 내적 마음의 변화는 매우 긍정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 이유로 황제가 일신교(一神敎)적인 태양신의 신도로서 어느 정도 종교적 경험을 갖고 있어 그리스도교의 일신론에 대해 내적 준비를 오래 전부터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승리에서 그가 일신교로 전환한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일신교 형태의 종교 중에서 제일 순수하고 참된 것이 그리스도교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았다.

 

콘스탄티누스의 교회정책

 

312년 말경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와 그 신도들에 대해 우호적인 조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면세특권을 부여하였고 국가의 사법권을 교회의 주교들에게 이양하였다. 313년 봄에 그는 밀라노에서 동 로마 제국의 리치누스 황제를 만나 소위 ‘밀라노 칙령’이라고 불리는 포고령을 동 로마 제국의 집정관들에게 보내 그리스도교에 관용을 베풀고 다른 종교와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도록 명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와 성직자들에게 수많은 재산을 기증하였고(예컨대 라테란 궁전을 교황에게 기증하였음), 많은 대성전들(로마의 베드로 대성전, 예루살렘의 예수 묘지 성당, 베들레헴의 예수 성탄 대성당 등)이 이 시대에 건립되었다. 그리고 교회생활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국법에 의해 주일과 교회축일을 공휴일로 정하였다. 321년에는 교회가 상속권을 갖는 법이 제정되어 교회는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때 받은 막대한 토지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590-604) 이후에 교황령(敎皇領)으로 조직되었고 교회에 부여된 기금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안식처 역할을 하는 교회를 건립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재산은 남용되는 수도 있었다.

325년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전()로마 제국을 통치하였고 그리스도교 역시 제국 안에서 보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보편적 그리스도교는 범 세계적 로마 제국의 건설을 도울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내부의 일치는 황제에게 중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내분에 의해서 타격을 받고 분렬의 위기에 처하여 있던 그리스도의 일치를 회복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갖고 종교회의와 공의회를 소집, 주재하였고 이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는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콘스탄티누스가 주교처럼 교회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다른 종교의 예식에서 대제관으로 갖고 있던 황제의 권한을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행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사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인 임을 숨기지 않았고 그의 가족은 모두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에 성실하였다. 그는 337년 니코메디아의 주교인 에우세비우스(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가 아님)에게 세례를 받고, 황제복을 다시 입기를 거부하고 흰색의 세례복장을 한 채 세상을 떠났다. 동방 교회에서는 그를 12사도와 같은 성인, 즉 ‘13번째 사도’로 추앙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등장의 종교적 의미

 

콘스탄티누스의 시대 전까지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 금지된 종교로서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교는 갑자기 호의와 헤택을 국가로부터 받으면서 특권화되는 새로운 상황에 처하였다. 이제 그리스도교적인 황제가 통치하는 로마 제국은 호교론자 시대부터 주창되어 온 국가임무를 갖게 되었다.  즉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가 그 사명인 구원의 메시지 선포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길을 마련하는 과업을 맡게 된 것이다. 이 국가의 과업이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 달성되었다. 이 시대에 세계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전제조건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당시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를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지도자로서의 황제로 보았고 그와 함께 교회에 있어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교회는 국가와의 새로운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공공연하게 전하였고, 교리교육의 내외적 확대, 그리스도교 교육에 대한 새로운 관심, 잔존하던 이교사상과의 논쟁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달에 중요한 촉진제가 되었다. 따라서 이제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 기회주의보다는 종교적 관심에 의해서 입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콘스탄티누스의 과격한 급진적 결정은 이교의 중심지인 로마, 아테네 등지에서 격한 논쟁을 일으켰고 비난을 받았다. 반면에 주교들은 황제의 우호적인 정책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였고, 교회법이 국가의 승인을 받고 그 시행에 있어서 국가적 차원의 보호를 받게 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공의회의 결의문은 국법으로 선포되었고 이로써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우호적 태도와 행동은 국가의 교회내정간섭과 교회의 자율권상실을 초래한 황제교황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⑧▧

교리 논쟁(Ⅰ)

                                          김  성  태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기초로 삼으려고 결심하였을 때, 이 교회가 자신이 생각한 대로 하나로 단결되어 있지 못하고 극심한 내부 투쟁으로 분열되어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당시 여러가지 이단(異端)으로 인해 교회는 단일성을 상실하였고 많은 신학적 문제가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는 324년에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자 즉시 교회의 내적 일치를 회복하고 여러 가지 난관을 제국의 종교회의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당시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세 가지였다. 즉 성삼론(聖三論), 그리스도론, 의화론(義化論, 또는 구원론)이었다. 이 문제들은 300년 동안 교회의 신학적 쟁점이 되었다.

 

성삼론

 

1. 신의 단일론적 학파

천주성삼에 대한 교리 문제에 있어서 필요한 사항은 성부와 성자의 내적 관계를 자세하게 정리하고 이를 계시(啓示)의 입장에서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서는 이 성삼의 신비를 구체적이 아닌 일반적 용어로 언급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문제는 2세기 말까지는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靈知主義者)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이단적으로 설명하였을 때, 즉 그리스도를 하나의 창조물로 변형시키려고 하였을 때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의 단일성을 조화시킬 필요가 있게 되었다. 여기서 2세기말에 두 가지의 이단적인 ‘신의 단일론적 학파’가 생겨났다. 하나는 성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성부의 양자(養子)라는 양자설(養子說, Adoptianism)이며 다른 하나는 삼위(三位)라는 하나의 신의 세 형태에 불과하다는 양식론(樣式論, Modalism)이다.

양자론 : 이 학설은 그리스도를 하나의 순수한 인간으로 보고 인간인 그리스도가 어느 한 순간에 ―아마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중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이 있었을 때에― 신의 능력으로 신격화(神格化)되어 양자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본래의 참된 신은 오직 성부뿐이며, 그리스도는 양자 관계에 의한 신이라고 설명하였다.

양식론 :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신(唯一神)의 한 형태만을 보았다. 그 유일신은 때에 따라 성부로 나타나기도 하고 성자나 성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식론자들은 성부께서 인간을 위해 수난을 받으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성부수난주창자라고 불려지기도 하였다.

이 극단적인 단일론자들은 교회의 결정에 의해서 모두 로마에서 배격되었다. 190년경에 빅톨 교황(189-198/199)은 로마에서 양자설을 전파하려던 테오도투스를 파문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양식론을 주창한 프락세스에 대해서는 명백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다만 후시대에 사벨리우스가 양식론을 주장하였을 때에 갈리스투스 교황(217-222)이 이 학설을 단죄하였다. 그 후 이 이단은 로마의 신학자인 노바씨아누스에 의해 250년경에 최종적으로 거부되었다.

 

2. 아리우스 사상

로고스(말씀) 그리스도론 (Logos Christology) : 이 교리는 오리제네스에 의해 연구,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는 성삼의 내적 순서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난관에 처하게 되었다. 비록 이 그리스도론이 성서를 따라서 ‘로고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주장하고 있지만, 성삼에 있어 서열상으로 성자인 그리스도를 성부에 종속시켰고 성신을 성자의 아래 위치에 놓았다. 따라서 성신과 성자는 성부와 같은 신성을 갖고 있지만, 이 신성은 성부에게서 유래된 하급의 것으로 보았다. 결과적으로, 실제로 있을 수 없는 하나의 다신론적 일신론(多神論的 一神論)의 주장을 내세운 셈이다.

오리제네스의 이러한 견해는 상반된 두 신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의 출발점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부와 성자의 공동본체론(共同本體論)을 주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단일성을 주장하였고, 안티오키아 학파는 로고스 그리스도는 다만 제2의 신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구별된다고 강조하였다. 3세기 중엽에 안티오키아 학파의 루치아누스는 성삼교리에 있어서 성자의 성부종속설(聖父從屬說)을 주창하여 아리우스 사상의 기원이 되었다.

아리우스(260-336) : 313년 알렉산드리아의 바우칼리스 교회의 목자가 된 아리우스는 엄격한 금욕주의자이며 웅변가였다. 그는 318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알렉산델과 충돌하였다. 그 이유는 아리우스가 그의 설교, 편지, 저서 등에서 엄격한 성자의 성부종속론을 주장함으로써 신의 단일론적 경향을 갖고 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의식적으로 도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로고스를 신에서 분리시켜, 로고스는 참된 신이 아니며, 신성과 다른 본성과 속성을 갖고 있으며, 창조물 중에서 인간보다 높은 첫 창조물이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함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에서 축출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그의 가르침은 이단으로 단죄되어 그는 파문을 받았다.

이제 아리우스는 그의 안티오키아 학파 친구들에게 가서 니코메디아의 주교인 에우세비우스의 보호를 받았다. 그 후에 아리우스의 친구들이 그를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갈도록 도와주었을 때에 거기에서 데모, 야간집회 등 난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회 내정에 간섭하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교들을 니체아에 소집하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니체아 공의회(325) : 여기에 참석한 주교들은 5명의 서방교회의 주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 로마 제국의 주교들이었다. 교황 실베스텔 1세(314-335)는 연로하여 참석치 못하고 대신 두 장로를 파견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는 자신의 교리를 변호하고 17명의 주교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오랜 격론 끝에 정통파가 승리하여 니체아 신경(信經)속에 정통 교리가 정의되었다. 즉 그리스도는 성부의 본체에서 탄생한 창조물이 아닌 신의 외아들이며 성부와 ‘같은’본체를 지닌 참된 신이다.

이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모든 교회에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신앙의 적으로 교회에서 축출되었다고 알리면서 이들의 저서들을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다. 이 공의회의 결정은 불변의 교리였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의 태도를 바꾸어 328년에 추방된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복직시켰다. 이에 대해 328년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된 아타나시우스가 자기 성직자단에 아리우스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후 아리우스 문제는 계속 교회 안에서 혼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 동 로마 제국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는 아리우스 논쟁을 끝맺기 위해서 콘스탄티노플에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때에 신학자들은 신 안에서의 위격(位格)과 본성의 의미를 정의하여 성부, 성자, 성신의 세 신격(神格)은 다만 세 신성의 내적 관계에서만 존재하고 이 세 신격 안에 하나의 신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325년, 니체아 공의회 신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첨가되었다. “주님이시여, 생명을 주시는 성신을 믿나니 성신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을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이 신경은 예절의 한 부분이 되어 처음에는 성세성사와 관련시켜 사용되었고 미사예절에 들어온 것은 6세기부터이며, 로마에서는 1014년에 황제 헨리 2세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성삼의 교리는 가톨릭 교회에서 확실한 결론에 이르렀다. 이제 신학 문제는 그리스도론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⑨▧

교리 논쟁(Ⅱ)

                                          김  성  태

 

그리스도론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에 있어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정확한 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성서는 이에 대해 명백하게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관계되는 성서 구절의 해석에 있어서 두 신학파인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는 서로 견해를 달리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는 오직 신성에서만 이루어지며, 두 본성은 모두 그 자체로 존재하며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역설하면서 인성을 신성과 독립하여놓고 두 본성의 일치는 외면적인 것으로 보았다.

 

치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 :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치릴루슨느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은 아주 밀접하며 실제적인 것으로 보고, 이 일치 후에는 하나의 본성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Theotovkos)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인성인 예수만을 낳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친’(Christovkos)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그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모친임을 반대하였지만, 아리우스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리스도의 인간성의 완전함을 살리기 위해서 신성에서 인성을 분리하여 두 본성이 모두 완전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한 분리는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불가분의 합일을 인정치 않는 이원론(二元論)에 이르게 되었다. 이 두 신학파의 대립은 상반되는 신학적 견해 외에 두 총대교구인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사이에 있었던 라이벌 의식이 직접 개입되어 있었다.

치릴루스는 429년에 에집트의 성직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황 첼레스티누스 1세(422-432)의 지지를 보장 받아 네스토리우스를 강경하게 반박하고, 12항의 파문조문(破門條文)을 작성하여 교황의 이름으로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반박하는 12항의 파문조문을 발표하였고, 동 로마 제국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를 자기 편으로 하여 서 로마 제국의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425-455)와 함께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권하였다.

 

에페소 공의회 : 에페소에서 431년 6월 22일에 공의회가 열리었다. 개회식에 네스토리우스 파의 지지자인 주교들이 도착하지 않자 치릴루스는 그가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실제적 일치를 언급한 교리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 선언문은 198명의 참석주교들에 의해 인준되었고, 이들은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주장에 대한 단죄에 서명하였다. 따라서 이 공의회에서 마리아가 하느님의 모친이라는 교리가 정식으로 공표되어 밖에서 기다리던 군중은 환호로 받아들였다.

며칠 후에 안티오키아로부터 44명의 주교가 도착하여 즉시 네스토리우스 편을 들어 에페소 공의회에 반대하는 공의회를 구성하였다. 여기서 이제 상호간에 악의에 찬 공격과 비난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황제는 이 소동에 개입하여 두 지도자인 치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를 연금하였다. 나중에 치릴루스는 그의 지방인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가도록 허락되었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에집트의 북부지방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451년경에 사망하였다. 네소토리우스 사건에 있어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은 그의 가르침이 어느 정도까지 이단이며, 그는 오해의 희생물이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단성론(단성론 : Monophysitism) :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지나친 반박에서 새로운 이단이 발생하였다. 수도원 원장인 에우티케스는 네스토리우스의 강경한 반대자이며 동시에 치릴루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인성은 신성에 의해서 완전히 소멸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그리스도의 인성의 존재를 부인함으로 해서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강생(降生)의 신비와 그의 구원자로서의 전제조건이 없어져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플라비아누스가, 에우티케스를 한 종교회의에 소환하여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명하였으나 그는 이에 불응함으로써 이단자로 단죄되었다. 그러나 치릴루스의 후계자이며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디오스크루스는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이 총대주교의 요구에 의하여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49년에 에페소에 다시 한번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에우티케스는 명예 회복되었고, 따라서 교황 레오 1세(440-461)는 이 회의를 강도 행위의 모임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에 대한 교리를 천명하였다. 이는 최초의 ‘교황의 무류권(無謬權)’행사였다. 교황이 황제에게 새로운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여, 테오도시우스 2세의 계승자인 마르치아누스(450-457)가 칼케돈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칼케돈 공의회(451년) : 이 공의회에는 약 350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교황의 특사가 사회를 맡았다. 이 회의에서 디오스크루스는 이단자로 단죄되었고, 그리스도 안의 한 본성의 단성론적 교리가 거부되었다. 그리고 공의회는 신조로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두 개의 본성은 혼합되거나 구분되지 않으면서 한 위격 안에서 일치된다.”

이에 레오 1세는 그리스도 문제에 있어서 테르툴리아누스 이후의 서방교회의 신학적 설명을 토대로 하여 위격적 일치(Hypotastic Union)의 교리를 선언하였다. 즉 치릴루스와 에우티케스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어떠한 혼동이나 구분이 없이 그 주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네스토리우스 주장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천주 성자의 위격 안에서 일치되어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일치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를 살릴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이러한 결정은 구원론의 기초가 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

이러한 개념적이고 언어학적인 해명은 서방 신학 발전에 있어 견고한 바탕을 마련하였지만, 동방 교회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미 공의회 회기 중에 서방과 동방 교회의 신학자들간에 긴장 상태가 일어났고 이로써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라이벌 의식에 의해 가중되었다.

그러므로 동방 교회에 있어서는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도 계속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는 단성론적이었다. 이러한 단일성의 개념은 신학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까지 연장되어 종교와 정치, 교회와 국가를 흡수, 융합시키는 동방 교회의 제국 신학을 발달케 하였다.

이 단성론에 대한 교리는 정치적 개입으로 몇 차례의 종교 회의를 거치면서 교회의 혼란을 초래했으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년)에서 다시 한 번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이 재확인되면서 이 문제는 교회 안에서 마무리 되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⑩▧

고대에서 중세로의

과도기 그리스도교(Ⅰ)

                                          김  성  태

 

야만족의 침입

 

고대에 있어서 야만인이란 말마디는 미개국(未開國)이나 적대국(敵對國)의 국민들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다. 로마 제국의 저술가들은 이 단어를 국경을 둘러싸고 있던 게르만 민족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이 민족은 두 그룹, 즉 동 게르만 인(서 고트 족, 반달 족, 부르군디 족, 동 고트 족, 롬바드르 족)과 서 게르만 인(프랑크 족, 알레만니 족, 앵글 족, 색슨 족, 프리시아 족)으로 구별되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농경민, 노예, 용병(傭兵)으로 로마 제국내에 이주하기 시작하여, 4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훈 족의 서진(西進)으로 밀려 집단적으로 제국령을 침입하여 마침내 476년에 서 로마 제국(로마 제국은 395년에 동서로 양분되었음)이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은 제국 내에 여러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 게르만 족의 침입(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라고도 함)은 당시의 그리스도교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이는 교회조직이나 교회생활에 혼란을 초래하였고, 더 나아가서 일부 지역에서는 교회가 철수하거나 전멸되었다.

아울러 동 게르만 인들은 침입 이전에 로마 제국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 되었다. 이때에 유명한 선교사로서 울필라스(311/2-382/3)가 있었다. 그는 고트 족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으로서 이단인 아리우스 파의 그리스도교를 알게 되어 이를 서 고트 족에게 전하였다. 따라서 이 고트 족으로부터 시작하여 동 게르만 인들은 아리우스 사상의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신앙은 게르만 통치자들과 이들의 지배를 받게 된 로마 제국의 가톨릭 주민들 사이에 많은 어려움을 일으켰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개종

 

일부 아리우스 파의 게르만 민족은 침입 이후에 정통신앙인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였다. 서 고트 족은 세빌라의 주교인 레안델에 의해서, 부르군디 족은 비엔나의 대주교인 아비투스에 의해서, 롬바르드 족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에 의해서 가톨리시즘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게르만 민족 중에서 서 게르만인 프랑크 족의 개종은 서구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중대한 역사적 역할을 하였다. 아리우스 사상은 게르만 민족이 점령한 지역의 가톨릭 주민들과 유대를 이루는 데에 장애가 되었으나, 프랑크 족은 이 아리우스 사상과 접촉이 없었다. 따라서 어느 게르만 족보다도 쉽게 그들의 우상숭배의 외교사상에서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였다. 이러한 개종은 그들이 점령한 로마 국민들과 유대를 굳힐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고, 마침내 프랑크 족과 가톨릭과의 일치는 프랑크 왕국(메로빙가 조 왕국)의 확장에 도움을 주었다. 반면에 다른 게르만 족들은 이러한 유대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왕국은 일찍 멸망하였다.

프랑크 족과 그 왕()인 클로비스(481-511)의 개종은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세계사에 나타난 중요한 사건들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화 한 고대 문화권과 게르만 족과의 융합을 가능케 하였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게르만 민족에게 고대의 문화적 전통을 전해주는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이는 가톨릭 교회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다른 게르만 족이 가톨릭 신앙으로 전환하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아리우스 이단의 확산에 결정적인 저지(沮止)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클로비스의 개종의 동기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종래의 견해는 뚜르스의 주교인 그레고리우스의 저서인 「프랑크 족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콜로비스의 개종은 신의 섭리의 결과로 설명된다. 가톨릭 신자인 왕비 클로틸다는 결혼(493) 후 그의 남편이 가톨릭 교회로 입교하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클로비스는 아내의 권유를 오랫동안 거부하여 왔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개종으로 프랑크 족의 신들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첫아들의 세례에는 동의하였다. 불행하게도 이 아기는 영세 후, 즉시 사망하여 왕은 이 죽음을 아내의 신()의 탓으로 돌렸다. 다음 아들이 탄생하였을 때에 그의 세례를 주저하다가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 아들 역시 병에 걸리자 다시 가톨릭 교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다. 다행히 이 아이는 클로틸다의 기도로 완쾌되었다. 그리고 클로비스는 알레만니 족과의 전쟁 중에 그의 군대가 라인 강의 한 골짜기에서 패망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 그이 아내 클로틸다의 신(그리스도)을 부르면서, 전쟁에서 그가 승리하면 그리스도교 신도가 되겠다고 약속하였다. 승리한 후에 왕은 그의 군대와 함께 496년 성탄축일에 랭스의 주교인 레미지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클로비스의 개종을 신의 섭리의 신비적 결과로 보는 견해는 당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적인 요소를 참고하지 않고 있다. 클로비스는 정치적 측면에서 점령지 주민의 가톨리시즘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국가 통치를 쉽게 할 수 있으며, 프랑크 족의 전통 신앙을 희생하는 것이 왕과 프랑크 족의 새로운 구조를 견고케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종래의 견해는 또 하나의 역사적 문헌을 참조하지 않고 있다. 트리엘의 주교인 니체투스의 증언에 의하면, 클로비스는 세례받기 이전에 뚜르의 마르티누스 성인의 묘를 순례하였을 때에 감명을 받고 그곳에서 영세하기로 서원하였다. 따라서 세례 시기도 498년 또는 499년으로 간주되고 있다.

최근 연구의 결과는 클로비스의 개종에 정치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클로비스는 왕이 된(482년) 후에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레미지우스 주교와 아내인 클로틸다의 영향으로 점차 가톨릭 교회의 문턱에 다가갔다. 그러나 입교(入敎)는 주저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경우에 아직 프랑크 족의 신들을 굳게 믿고 있던 군대 지도자들이나 국민들에게 신임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에 서 고트 족과 전쟁을 할 때 그 지역의 가톨릭 주민들과 동맹(同盟)을 맺기 위해서 506년에 영세하기로 결정하였다.

 

프랑크 교회

 

프랑크 교회는 일종의 폐쇄된 국가 교회였다. 국경이 바로 종교적 경계선이 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어느 지역도 외부교구에 속하지 않고, 이 교회는 왕에게 예속되었다. 국가 차원의 종교회의도 왕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회의의 결정 역시 왕이 선포하는 것과 같았다. 주교들은 왕의 뜻과 귀족들의 영향에 의해서 선출, 임명되었다. 이러한 예속화로 교회는 국가로부터 보호와 이익을 얻었지만 보다 많은 위험을 내포하였다.

프랑크 교회는 중요한 성직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들은 6세기의 교회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주교들로서 비엔나의 아비투스, 랭스의 레미지우스, 트리엘의 니체투스, 빠리의 제르마누스, 뚜르스의 그레고리우스 등이다.

그리고 프랑크의 그리스도교는 복음성서에 나타난 원칙에 따른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통해서 서서히 성장되었다. 수많은 신심조직이 창설되었고, 성인과 성해(聖骸) 공경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윤리 면에 있어서는 아직 야만성과 이교적 관습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는 국가와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크의 메로빙가 왕조의 멸망은 교회의 쇠퇴를 동반하였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⑪▧

고대에서 중세로의

과도기 그리스도교(Ⅱ)

―영국 제도의 교회와 유럽 대륙 선교―

                                          김  성  태

 

고대 영국(브리튼) 교회

 

로마 인들은 43년부터 85년에 영국 제도(諸島) 중 대()브리튼 섬(영국 본토)을 점령한 후에, 브리타니아 주()라는 명칭으로 로마 제국에 편입시켰다(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는 정복되지 않아 브리타니아 주에 속하지 않았음).

영국 고대 교회가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고고학에 의해서 뿐 아니라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에우세비우스 등 교회 저술가들의 증언으로 입증되었다. 또한 최근 연구에서도 이 고대 교회의 설립 과정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를 내놓고 있다. 예컨대 그리스도교가 소()아시아로부터 해로(海路)를 통해서 이 섬에 도입되었다든가, 또는 리옹(프랑스의 도시)의 신도들이 177년의 박해 이후에 이곳에 들어왔다든가, 혹은 이 교회는 로마나 골(프랑스)지방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에 의해 2-3세기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고대 교회는 선교활동도 나섰다. 전승되어오는 바에 의하면, 브리튼 사람(이는 기원전 2세기에 이 섬에 정주한 켈트 민족계임)인 니니아누스(360년경-432년경)는 로마에서 신앙교육을 받고 교황 시리치우스(384-399)에 의해 주교로 임명되어, 4세기 말경에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전파하러 파견되었다.

그러나 5세기 후반에 게르만 민족(앵글 족, 색슨 족)이 이 섬에 들어옴으로써 대부분 지역에서 고대 영국교회는 사라졌다. 그러나 서부지역(웨일즈)에서는 이 교회가 존속하였을 뿐 아니라 확산되었다.

로마 군대가 철수하고 게르만 민족이 침입한 후에 영국 고대 교회의 모습은 변화하였다. 이 교회는 켈트 민족의 특성을 갖춘 수도원 체제의 교회였다. 이 켈트 교회의 특성은 고대 로마 식의 부활절, 특수한 형태의 성직자 삭발(削髮) 등으로, 많은 학자들은 앵글 족과 색슨 족 침입 이후의 영국 고대 교회와 유럽 대륙 교회가 분리되었다는 것을 이러한 특수성들을 가지고 설명한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영국 교회가 로마 교황권에서 독립하였고, 주교 체계를 갖추지 않은 교회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게르만 민족의 침입 이후에 고대 영국 교회의 역사에서 교황 관할권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5세기에 사제(Sacerdos)들과 장로(Presbyter)들이 교회를 통치하였다는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사제란 5-6세기에는 주교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영국 고대 교회는 주교 체제의 교회였다.

 

아일랜드 교회

 

아일랜드는 로마 제국이나 게르만 민족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이 섬지방은 당시에 유목민의 땅으로 미개한 지역이었다. 사회조직은 가정에 기초를 두고, 각 가정은 씨족에 속하였고, 씨족은 부족을 이루어 그들의 왕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부족국가에 그리스도교 복음전파에 공헌한 두 선교사가 있다. 첫 선교사는 팔라디우스였다. 그는 로마 교회의 부제(副祭)로서, 431년에 첼레스티누스 1세(422-432)에 의해 아일랜드의 주교로 임명되어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교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둘째 선교사는 유명한 아일랜드의 주보성인 파트리시우스였다. 그는 골 지방의 수도원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교육을 받고 432년에 팔라디우스의 후계자로 주교가 되었다. 그는 대중의 개종을 위해서 우선 부족장이나 왕에게 복음을 설교하였다.

아일랜드의 교회는 수도원 중심의 교회였다. 이것은 파트리시우스의 수도원에 대한 애착심에서 나온 교회조직이다. 6세기부터 많은 수도원이 창설되고, 그 발달은 교회조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도원은 교회행정의 중심이 되었고, 수도원장은 수도원이 위치한 전지역을 관할하였다. 이러한 수도원장이 모두 주교는 아니었다. 어느 원장은 주교 제자를 두어 그로 하여금 주교로서 할 수 있는 직무를 수행케 하였다. 그리고 이 교회는 고유한 종교관습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유대교의 유월제와 일치하는 부활절을 지냈고, 성사적 참회의 예식을 행하고 있었다. 여기서 유명한 ‘속죄총칙’(贖罪總則)이 생겼다. 이는 죄인의 신분, 죄의 경중, 죄에 대한 원의 등에 따라 보속을 규정한 책자다. 이 교회는 또한 열성적 신앙생활의 실천으로 많은 성인들을 배출했다.

아일랜드 교회는 선교사업에도 종사하였다. 이 교회의 유명한 선교사는 우리는 두 성인, 즉 골룸바(597년 사망)와 골룸바누스(540/550-615)를 들 수 있다. 아일랜드 교회의 선교활동은 유럽 대륙(독일과 프랑스)에서 그리스도인 생활의 추진력이 되었고 수많은 개종자들을 냈다. 그러나 이 선교는 프랑크 왕국의 정치적 보호를 받았으므로 개종자들 중에 새로운 종교에 대한 반감이 일었다. 왜냐하면 이 종교는 그들의 정치적 박해자들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크 세력이 물러나자 새 개종자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버렸다. 또한 아일랜드 교회는 그들의 지방의 강한 고유성으로 적응력이 결여되어, 선교지방의 주민들과 충분히 일치하지 못했다. 그리고 선교사업에 계획이 없었고 선교사들 상호간에 협조가 없었다. 게다가 중심 교회인 로마와의 계속적인 협력이 없었기 때문에 항구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앵글로―색슨 교회

 

앵글로―색슨 족의 그리스도교화에 대한 계획과 실현은 교황 대()그레고리우스(590-604)에서 비롯되었다. 교황은 596년에 로마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 원장인 아우구스티누스를 40명의 수사와 함께 영국에 파견하였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수도자들에게 선교사업을 맡김으로써 수도원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즉 수도생활과 사목생활을 합치시켰다. 이것은 이제까지 없었던 것으로 수도원 출신인 교황의 고유한 정책이었다. 그리고 그는 선교방법에 있어서 토착화를 강조하였다. 한 신앙 안에 여러 관습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그 관습 중에 영국인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여 복음을 전파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문맹자들을 위해서는 신앙의 교육의 수단으로 교회의 성상(聖像)을 사용하라고 지시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교활동이 성공을 거두어, 601년에는 12개의 교구가 있는 두 관구(요크와 캔터베리)가 설립되었고, 6세기 말까지는 영국의 대부분 지역이 그리스도교화되었다. 그는 고대 영국 교회가 존속하여오던 서부지방(웨일즈)과의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브리튼 족의 게르만 민족에 대한 증오로 실패하였다.

앵글로―색슨 교회는 로마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로마에 충실하였다. 수도원은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남녀 공동 수도원이 이곳에서 창설되었다. 여기서 수녀원장이 두 공동체의 장상이 되며, 두 수도원은 상호 접근하여 있으면서 한 성당을 사용하되 서로 다른 시간에 예절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수도원은 지적 활동의 중심지로 수사학, 문법, 자연과학 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유럽 대륙으로부터 복음을 받아 성장한 앵글로―색슨 교회는 다시 대륙선교에 나섰다. 이 교회의 선교사들은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갖추지 못했던 인내심, 적응성, 조직능력을 지녔고, 로마와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구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중요한 선교사로는 프리시아(네덜란드)의 사도인 윌리브로드(658-739)와 독일의 사도인 보니파시우스(672/675-754)를 들 수 있다. 윌리브로드는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1명의 수사와 함께 프리시아에 가서 프랑크 왕국의 보호 아래서 선교를 시작하여, 695년에는 프리시아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로마와 긴밀한 유대를 가지면서 대중의 개종을 위해서 지도자들에게 우선 복음을 전하였다. 보니파시우스 역시 수도원(성 베네딕또 회)에서 교육을 마친 후에 유럽 선교에 나섰다. 722년에 선교주교로 임명된 그는 747(또는 748년)에 마인쯔를 그의 관구교구로 세웠다. 그는 프랑크 교회를 재조직하고 개혁을 단행하였다. 무엇보다도 로마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프랑크 교회와 로마 교회와의 결합을 위해 노력하였고, 교황의 영향력을 북부 유럽에까지 확대하는 데 힘썼고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의 일치를 준비하여 그리스도교 서구(西歐) 즉 중세 탄생케 하는 데 공헌하였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⑫▧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의 창설

―중세 교회(Ⅰ)―

                                          김  성  태

 

샤롤르 마르텔과 교황청

 

프랑크 왕국에 있어서 메로빙가 왕조의 왕들은 명목상의 국가 원수였을 뿐이고 궁재(宮宰)들이 실질적 통치자들이었다. 639년 이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카롤링거   가()의 궁재인 샤롤르 마르텔(715-741)이 732년에 프랑스 남부지방까지 침입해온 이슬람 교도를 격퇴하여 서구(西歐)를 구하면서, 그는 대관식을 갖지 않은 서구의 왕이 되었고 카롤링거 가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서 로마 제국이 멸망한(476년) 후에 비잔티움(동 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가 되었다. 그러나 아랍 인 침입과 전쟁으로 인하여 국력이 쇠퇴한 동 로마 제국은, 그 보호령이었던 로마가 740년경 롬바르드 족에게 공격을 받고 패망의 위기에 처하여있었을 때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731-741)는 새로운 보호자를 구하여야 했고 여기서 교황은 프랑크 족에게 눈을 돌려 마르텔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마르텔은 사신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어 보내었으나 이 요청은 거절하였다. 그것은 그가 당시에 롬바르드 족과 동맹을 맺고 아랍 인과 전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교황은 롬바르드 왕과 20년 간의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마르텔은 자기의 정치적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교회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선교사들에게 프리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편의를 베풀었고, 교회 보호를 약속함으로써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과의 연합의 길을 터놓았다. 그러나 중세기의 특징인 그리스도교 제국의 사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를 세속화하였고 프랑크 교회를 쇠퇴케 하였다. 그의 시대에는 교회 발전을 위해 지방공의회나 종교회의(시노드)가 개최되지 않았다. 마르텔은 교회의 고위성직과 성직록(聖職錄)을 그 자신의 이익 추구와 권세확장을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교회 재산을 약탈하고 주교좌나 수도원을 팔아버리거나 그의 친족과 정신(廷臣) 들에게 하사하였다. 따라서 성직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장사를 하였다.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의 동맹

 

샤를르 마르텔이 사망한(741년) 이후에 생 드니 수도원에서 교육받은 두 아들, 카를로망과 소() 페펭(페펭3세)이 궁재직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747년에 카를로망이 수도원에 입회하여 페펭이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실권자가 되었다. 더 나아가 그는 이제 명실공히 프랑크 왕국의 영도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왕권에 대한 게르만 족의 사상은 신성한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페펭은 그의 집권을 정당화하고 왕가혈통의 결여를 영신적인 축성으로 대치하고자 왕권보다 높은 권위를 필요로 하였다. 여기서 그는 이러한 권위를 교황에게서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페펭은 교황 자카리아스(741-752)에게 사신을 보내어 왕권을 소유하지 못한 프랑크의 메로빙가 왕의 문제에 대해서 문의하였다. 이에 교황은 왕권을 박탈당한 이보다는 왕가의 지배권을 받은 이가 왕으로 불려져야 한다고 답변하였다. 이러한 답변은 페펭이 왕위 찬탈(簒奪) 시도를 승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페펭은 교황의 판결에 힘입어 751년에 수아송에서 국회를 소집하여 귀족들에 의해 정식으로 프랑크 왕국의 영도자로 선출되었고, 교황이 지명한 프랑크 대주교에 의해 축성되어 그리스도교 왕권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프랑크 왕국에서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제 로마 교황은 동 로마 제국과의 유대관계를 끊고 서방에 눈을 돌리면서 서구의 대표인 프랑크 왕국과 제휴하였다. 따라서 753년에 롬바르드 족이 재침하여 로마를 위협하였을 때에 교황 스테파누스 3세(752-757)는 프랑크의 페펭을 방문하여 원조를 청하자 왕은 쾌히 승락하였다. 왜냐하면, 페펭의 입장에서 볼 때, 교황청이 과거에 자기의 왕위 찬탈을 승인해 준 빚을 갚을 수 있고 그가 받은 그리스도교 왕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으며, 그는 또 왕권이란 그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교회 보호를 위해 사용해야 된다는 종교-윤리적 의무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페펭은 754년 1월에 폰티온에서 교황청과 일종의 방위조약인 우호동맹을 맺어 롬바르드 족의 침략에서 교황청을 보호하고 침략자가 점령한 지역을 교황에게 반환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같은 해 4월에 퀴에르지에서 열린 국회에서는 교황청을 보호할 것을 결정하였다. 7월에 교황이 직접 생 드니에서 페펭과 그의 두 아들, 샤를르와 카를로망을 축성하고서 이들에게 ‘로마의 보호자’란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런 칭호는 프랑크 민족에게 새로운 임무, 즉 서방 그리스도교를 보호하는 역할이 부여된 것을 의미한다. 페펭은 두 차례(754,756)에 걸친 원정으로 롬바르드 족을 격퇴시키고 그 영토를 교황에게 증여하여 그의 약속을 이행하였다. 따라서 이제 교황이 군주로서 지배하는 교황령의 건설에 그 기반이 이루어졌다.

 

샤를르 대제와 그리스도교 제국

 

후시대에 샤를르 대제(Carolus Magnus)라고 불리는 샤를르(768-814)는 중세기에 있어 가장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는 그의 동생 카를로망과 함께 국가를 분할하여 통치하다가 771년에 동생이 사망하자 단독 영도자가 되었다.

773년 롬바르드 족이 로마를 공격하였을 때에 교황 아드리아누스(772-792)는 샤를르에게 원병을 청하였다. 이에 프랑크 군대는 이딸리아로 진군하여 롬바르드 족을 멸망시켜 프랑크 왕국에 합병하였다. 그리고 774년 부활절에 샤를르는 교황과 함께 로마의 베드로 사도의 무덤에서 영원한 우호관계를 선서하였고, 군사적으로 로마를 보호할 것을 선언한 동시에 그의 부친처럼 롬바르드 족이 점령하였던 땅을 교황에게 기증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롬바르드 족을 쳐이긴 후에 샤를르는 이딸리아 전역에 대한 자신의 권익을 추구해야 되었기에 헌납약속의 실행을 주저하다가 781년에 로마 공국(公國), 라벤나 등 몇 개의 소지역구를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렇게 하여 이제 교황령이 건설되었고, 이는 1870년까지 존속하였다. 이 교황령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교회를 견고케 하는 데에 도움도 주었지만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샤를르 대제는 교회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하느님의 나라」(神國)를 애독하면서 그의 왕권을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이해했다. 게르만 민족의 토대 위에 그리스도의 새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이 그를 지배한 사상이다. 그래서 그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원정하는 것을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나 교회적 입장에서 이룩하여 점령 지역의 이교인이나 미신자 주민들을 프랑크 왕국에 예속시키는 동시에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또한 그는 그의 부친과 보니파시우스가 시작한 교회개혁을 계속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 개혁과정에서 샤를르는 교회를 내외적으로 간섭하였다. 그는 교회생활의 활성화를 위해서 법령을 반포하고 국가종교회의를 개최하고 국가 공무원으로 하여금 종교 업무까지도 감독케 하였다. 샤를르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을 보니파시우스의 개혁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시켰다.

샤를르의 왕권 사상은 신인(神人) 양성의 성격을 띠고 있어 자기 자신을 ‘왕이요 사제(Rex et Sacerdos)로서 간주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영신적인 것과 세속적인 사실의 구분이 명백치 않았다. 특히 그가 황제권에 대한 비잔티움의 개념, 즉 황제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를 알고 난 후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자신을 프랑스 교회의 통치자로서 자처하여 교회의 여러가지 규율과 교리에 대해서 간섭하였고 교회 재산을 세속화하였다. 또한 고대교회로부터 전승되었던 교회의 주교선출의 자주권, 즉 성직자단이 주교 후보자를 추천하고 평신도들이 환호로써 승인하여 선출하던 관례를 무시하고 자신이 임의대로 주교를 임명하여 교회의 요직에 배치하였다. 이제 교회 지도자들은 목자라기보다는 국가의 공무원으로서 영신면을 담당하는 이들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그들의 영신적 임무수행에 있어 세속권의 정책을 그대로 실행하는 왕의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이것은 보니파시우스가 교회개혁을 위해 시도한 본래의 의도와는 정반대였다. 그후 샤를르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교회 세속화는 더욱 더 강조되었고, 마침내 중세 후기에 와서는 세속권과 교권의 서임권(敍任權) 투쟁의 불씨가 되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⑬▧

로마 교회의 암흑기

―중세 교회(Ⅱ)―

                                          김  성  태

 

카롤링거 왕조의 붕괴

 

샤를르 대제를 계승한 카롤링거의 어느 왕도 이 대제만큼 정치적 수완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샤를르의 사망(814) 후에 카롤링거의 프랑크 제국은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샤를르 대제의 아들인 루이 1세(814-840, 敬虔王  이라 불림)가 종교적인 면에서 공헌하였을 뿐이다. 그는 부친의 정책을 이어받아 교회에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었다. 루이 1세는 교회법과 성직자에 대한 규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대성당 참사회(參事會) 제도를 설정(816)하여 성직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도록 조처하였고, 수도회 법령집을 반포(817)하여 프랑크 제국의 모든 수도원들이 성 베네딕또 수도 규칙을 준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819년에 황제는 교회 법령집을 공포하여 자유인에게만 성직자의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봉건사회에서 교회가 지주(地主)에게 예속되는 위험을 방지하였고, 주교만이 성직자를 임면(任免)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지주들의 월권 행위를 금지한 동시에 주교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 북부 유럽의 스칸디나비아 지역과 동남부 유럽의 슬라브 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루이 1세가 프랑크 왕가의 상속법에 의해서 그의 아들들에게 국토를 분배하면서 프랑크 제국은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817년에 루이 1세는 큰아들인 로타르에게 황제의 칭호와 권한을 부여하면서 영토로 제국의 중심부를 내주었고, 페펭과 루이 2세에게는 각각 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황제가 재혼하여 독두왕(禿頭王) 샤를르 2세를 낳고나서 제국을 재분할 하였을 때에 전처 소생의 왕자들이 반발하였고, 그 후 왕자들의 권력투쟁으로 국력은 쇠퇴하였다.

루이 1세의 사망 후에 황제인 로타르는 동생인 샤를르 2세, 루이 2세와 싸웠으나 패전하여, 베르덩 조약(843)으로 제국의 영토는 완전히 삼분(三分)되었다. 로타르는 황제 칭호를 보유하는 동시에 이딸리아와 로타르 국 즉 로트린지아(로트링겐)를, 샤를르 2세는 서 프랑크를, 루이 2세(이제부터는 루트비히 2세)는 동 프랑크 왕국으로서 라인 강 동부 지방을 차지하였다. 이로써 통일된 카롤링거의 프랑크 제국은 붕괴되었고 봉건 제도가 탄생하였다. 870년에 샤를르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메르센 조약에서 국경을 획정(劃定)하여 후에 독일과 프랑스 양국의 성립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 동 프랑크의 소아왕(小兒王) 루트비히 4세의 사망(911)으로 독일지역에서는 카롤링 왕가가 단절되어 양국의 분리는 완전히 이루어졌다.)

그 후, 황제 칭호를 소유하고 있던 로타르의 아들인 로타르 2세(855-875)가 사망하자 황제권을 놓고 루트비히 2세와 독두왕 샤를르 2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황제의 대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교황 요한 8세(872-882)는, 남부 이딸리아를 침략하여 교황령을 위협하는 사라센을 쳐이길 수 있는 이는 샤를르라고 판단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그를 875년 성탄축일에 황제로 대관하였다. 샤를르는 교황청의 힘있고 헌신적인 옹호자가 되었다. 그러나 서부 프랑크 왕의 자격으로는 소수의 군대밖에 갖고 있지 못하였고, 그의 제국 또한 약탈자인 노르만 족의 쉴 새 없는 공격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이딸리아를 원정하려고 결심하였을 때에는 프랑크의 귀족들이 그를 돕지 않았다. 그는 알프스 산을 넘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루트비히 2세의 아들인 카를로망이 잠시 북부 이딸리아를 통치하였고, 이때 교황은 다시 비만왕(肥滿王)이라고 불리는 동부 프랑크 왕 카알 3세의 이름으로 제국을 회복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카알 3세는 나라를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제국은 내외의 파벌싸움 사이에서 분열되었다. 그는 교황 마리누스 1세(882-884)와 하드리아누스 3세(884-885)의 단명하고 소란한 재위 기간 중에 수수방관자로서 살았고, 그가 트리부르의 국회에서 해직된(887) 후에 제국은 일곱 왕국으로 나뉘어졌다.

 

교황권의 추락

 

프랑크 제국의 정치적 붕괴는 교회의 쇠퇴를 초래하였다. 교회는 880년 이후에 암흑기(暗黑期)를 맞았다. 이 시기는 1046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회 개혁을 시작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중의 교황들은 대부분 무능한 교회 지도자였다. 교황청은 주교좌는 동일한 수준으로 전락하였고, 포악한 귀족들의 정치적 투쟁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러한 교황권의 쇠퇴는 몇 가지 허황된 전설이나 불미한 사건을 유발시켰다. 13세기에 트라포의 마르트누스라는 사람은 이 시대의 교황권의 무력을 야유하기 위해서 여()교황 요안나의 야화(野話)를 조작하였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교황 레오 4세(847-855)와 베네딕뚜스 3세(855-858)의 재위 기간 사이에, 남장을 한 마인쯔의 소녀가 아테네에서 공부를 하고 로마에 와서 교황청의 공증인이 되었다가 추기경으로 임명된 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2년 후에 라떼란으로 공식 행렬을 하는 도중 해산의 진통으로 교황의 신분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중세기에는 이를 전설로 믿었으나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에 개신교에 의해서 약용되거나 과장하여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 전설은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레오 4세와 베네딕뚜스 3세의 재위 기간 사이에는 단지 2주의 공백기가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암흑기 초에 일어난 교황 포르모수스(891-896)의 시체 재판은 실제로 있었던 불미한 사건이었다. 당시 이딸리아에는 두 권력층 즉 스폴레토 공국(公國)의 가이와, 가린티아 공국의 아르눌프를 대표로 하는 동 프랑크의 세력이 정권장악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런데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에 가이는 너무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쉽게 폭군으로 변질할 수 있었고, 아르눌프는 먼 곳에 있었으나 국가의 내부문제로 너무 바빴기 때문에 교황청은 주저하고 있었다. 이때 가이가 선수를 쳐서 교황 스테파누스 5세(885-891)로 하여금 자신을 황제로 대관케 하였다(891). 스테파누스의 후계자인 포르모수스는 가이의 아들인 람베르투스를 황제로 대관하도록 압력을 받았을 때에, 교황청의 자주권이 손상될 위험을 느끼고 아르눌프에게 원조를 청하였다. 이 때문에 포르모수스 교황이 사망한 후, 897년에 스폴레토의 가이 가()가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 스테파누스 6세(896-897)에게 묻힌 지 9개월이 된 포르모수스의 시체를 발굴하여 교황복을 입혀 한 종교집회에서 악명높은 재판을 하도록 명하였다. 재판 후에 포르모수스의 시체를 발굴하여 교황복을 절단되어 로마 티베르 강에 표류되어 있는 것을 본 로마 시민은 분노하여 교황 스테파누스 6세를 한 수도원에 감금하였다가 처형했다.

또한 10세기 초에 투스쿨룸의 귀족인 테오필락투스의 가정이 로마에서 득세하여 교황청을 지배하였다. 테오필락투스의 아내인 테오도라, 딸인 마롯지아와 테오도라 2세가 교황을 제멋대로 임명하였다. 테오도라는 교황 세르지우스 3세(904-911)를 임명하였고, 마롯지아는 세 번씩이나 결혼하면서 그녀의 꼭둑각시인 교황 레오 6세(928-929)와 스테파누스 7세(929-931)를 선임하였고 마침내는 그의 아들을 교황 요한 11세(931-936)로 임명하였다. 그녀는 요한 11세에 의해서 여황제로 대관되기를 꿈꾸었지만, 다른 아들 알베릭은 그의 어머니를 감금하였으며, 마롯지아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알베릭 2세는 로마 시를 통치하면서 자신을 로마 인의 왕이며 원로원이라고 자처하였다. 교황 레오 7세(936-939), 스테파누스 8세(939-942), 마리누스 2세(942-946), 아가페투스(946-955)는 이름뿐인 교회의 지도자였다. 이제 교황청은 로마 시의 의회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알베릭은 로마 시의 질서를 회복하였고, 성직자들이 그들의 교황 후보를 선출하는 권한을 존중하였고, 로마의 수도원들을 개혁하는 업적도 남기었다. 그의 아들 옥타비아누스는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교황 아가페투스의 사망 후에 16세의 나이로 자신을 교황으로 공표하였다. 그가 요한 12세(955-964)라는 교황명을 갖고 교황으로서 가장 악덕한 생활을 하면서 교회의 암흑기는 그 절정에 다다랐다.

이는 교회가 신인양성(神人兩性)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신적(神的)면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을 수가 없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인간의 한계성에 의해서 잘못과 죄악까지도 범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⑭▧

 신성 로마 제국의 탄생

―중세 교회(Ⅲ)―

                                          김  성  태

 

교회 지배에 의한 집권 정책

 

카롤링 왕조의 쇠퇴에 따라 프랑크 제국의 황제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고 동 프랑크 왕국(독일 지방)에는 다섯 공령(公領), 즉 프랑코니아(프랑켄), 삭소니아(작센), 투링기아(튀링겐), 스와비아(쉬바벤), 바바리아(바이에른)가 등장하였다. 이 공령의 통치자인 공()들은 카롤링 왕조에 충실하였지만, 911년에 카롤링 왕조가 단절된 후에 이들은 프랑코니아와 콘라르드 공()을 왕(콘라르드 1세)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콘라르드의 통솔력 부족과 공령간의 대립으로 각 공들은 소공국(小公國)을 세우고 군주가 되었다. 콘라르드 1세는 사망 직전에 삭소니아 공을 그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918). 그가 독일 황제 시대를 연 작센 왕가의 창시자 하인리히 1세(919-936)였다. 이제 그와 그의 아들 오토 1세(936-973)는 국가의 통일 사업을 추진하여 주위의 공국들을 통합 정복함으로써 왕권을 확립하였고, 슬라브 족, 데인 인(덴마크인), 마쟈르 족(헝가리 민족)의 침략을 격퇴하였다.

오토 1세는 왕국의 정치 체제를 지방분권화에서 중앙집권화로 전환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점령한 공령들 중 프랑코니아는 왕령(王領)으로 정하여 그 자신이 통치하고, 그 밖의 공령들은 자기 가족에게 분배하여 가부장적(家父長的) 집권에 의한 중앙집권 체제를 실행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953년에 일족 제후(一族諸侯)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오토는 반란 제후들을 힘겹게 진압하고 새로운 통치 체제를 계획하였다.

오토는 그의 족벌주의 정치 체제의 실패를 뼈아프게 체험하고나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위해서 교회 지배에 의한 집권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는 교회의 주교들에게서 지지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교회는 그 재산을 지방 귀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강력한 중앙집권세력을 필요로 하였고, 반면에 오토는 관직 세습과 지방 세력 형성이 불가능한 주교들(독신이므로)은 국가 붕괴나 전복의 위험이 없음을 깨달았다. 여기서 교회와 국가의 상호 이해 관계가 성립되었다.

오토는 교회에 재산을 증여하고 왕의 권리와 특권을 주교에게 부여함으로써 주교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그는 중세기 봉건 교회의 세속권을 기초하였다. 이 권한은 이후 1803년에 독일 교회가 세속화될 때까지 독일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오토는 국가를 교회의 관할하에 두었다. 그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이며, 둘의 이해 관계는 서로 일치되어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계는 오토와 그 후계 황제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제공하였다. 후에 이 제국 교회와 그 지역은 독일 황제들에게 가장 믿음직한 옹호자로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황제들은 교회를 통해서 제국의 지방을 통치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교회와 국가간의 서임권 투쟁에 있어서 이 제국 교회는 황제의 편을 들었다.

교회는 이 새로운 제휴로 생각치 못한 기회를 얻었다. 즉 교회는 일반 사회에서 자유롭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때 독일에서는 종교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정치적 수완을 보인 유명한 주교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또 수도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 예술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오토 르네쌍스).

 

신성 로마 제국

 

교황 요한 12세는, 로마 귀족들의 지배를 받고 자칭 이딸리아의 왕이라는 이브레아 후()인 베렝가리오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오토는 961년에 로마로 진군하기 시작하여 파비아에서 이딸리아의 왕권을 쟁취하고 로마시에 개선하였다. 같은 해 2월 2일에 교황은 감사의 뜻으로 오토를 베드로 대성전에 인도하여 황제로 대관하였다. 이것이 바로 독일에서 1806년까지 지속된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이 되었다. 이때에 오토는 유명한 문서인 ‘오토의 특허장’을 공표하였다. 이에 의하면 오토는 교황청에 이딸리아 왕국의 3/4을 부여하는 대신, 교황 피선자는 축성 예절이 있기 전에 황제에게 충성 선서를 해야 했다. 그리고 황제의 감독관이 파견되어 법 이행을 감시하였다. 이제 교회는 로마 귀족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독일 황제의 보호 아래에서 제2의 암흑기(962-1046)을 맞이하였다.

 

작센(오토) 왕조와 교회

 

오토 대제가 로마를 떠나자 요한 12세와 로마 인들은 새로운 지배자에게 굴복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반대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오토는 963년 11월에 다시 로마에 돌아와서 반대파를 진압하고, 교황은 도주하였다. 오토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요한 12세의 교황으로서의 무자격을 선포하고, 로마 인들에게 앞으로 어느 교황도 황제의 동의 없이 선출하지 않겠다는 것을 서약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측근에 있는 평신도가 하루 만에 부제와 사제로 서품되었고 동시에 레오 8세로 교황에 축성되었다. 왜냐하면 요한 12세는 개인적으로 과오가 많은 현직자(現職者)였고, 황제가 서임한 레오 8세는 반() 교황이었다. 따라서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 초기부터 교황청은 세속권이 부여하는 하나의 독일 주교좌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오토 대제가 로마를 떠난 후에 요한 12세가 다시 로마에 돌아와 레오 8세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요한 12세는 며칠 후에 사망하였고, 로마 인들은 새 교황으로 베네딕뚜스 5세를 선출하였다. 오토는 격노하여 다시 로마에 와서 그가 선출한 레오 8세를 복권시키고, 서약을 깨뜨렸다는 이유로 로마 인들에게 다른 확약을 강요하였다. 교황 레오 8세의 교령으로 일반 신도가 교황 선출에 참여하는 것을 막았다. 레오 8세의 사망(965) 후에, 오토 대제는 가장 세력이 있던 투스쿨룸의 데오필락투스(테오도라 2세의 아들)를 교황(요한 13세)으로 선출함으로써 로마 교회의 지배를 꾀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실패하였다. 새 교황은 소동을 일으키는 로마 귀족들을 엄격하게 처리하려 함으로써 반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교황은 성 안젤로 성에 감금되었다. 오토는 다시 로마에 와서 반란을 진압시키고 6년 동안 로마에 머물렀다. 967년 성탄 축일 미사에서 오토 대제는 13세의 아들 오토 2세를 공동 황제로 대관하였고,  973년 5월 7일에 사망하였다.

오토 대제가 사망한 후에 로마 인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독일 황제의 압정(壓政)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마 귀족들은 크레쉔티를 그들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974년에 반란이 일어나 베네딕뚜스 6세(973-974)는 교살되었고 보니파치오 프랑코가 보니파치우스 7세(974)로 교황이 되었다. 그러나 오토 2세(973-983)는 반란을 진압시키고, 교황은 비잔티움으로 도주하였다. 대신에 수트리의 주교가 황제의 동의를 받아 베네딕뚜스 7세(974-983)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이 교황이 사망한 후에는 황제는 그의 서기를 교황 요한 14세(983-984)로 서임하였다. 그러나 오토 2세의 사망 후에 로마에서 다시 크레쉔티가 득세하여 축출되었던 보니파치우스 7세가 돌아왔고, 요한 14세는 살해되었다. 그러나 크레쉔티와 보니파치우스 7세도  곧 사망하였다. 

새 황제 오토 3세(983-1002)는 옛 로마 제국의 재건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는 독일의 주교들을 이딸리아의 교구에 임명하여 독일과 동등한 통치기구로 마련함으로써 이딸리아에서 그의 황제권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오토 3세는 황실 성당의 성직자인 브루노를 첫 독일인 교황 그레고리우스 5세(996-999)로 서임하였다. 그레고리우스 5세의 사망 후에 황제는, 그의 스승이었던 라벤나의 대주교 게르베르를 교황으로 서임하였다. 그가 첫 프랑스 인 교황인 실베스테르 2세(999-1003)였다. 그는 실추된 교황권 회복에 노력하였고 교회 개혁에 힘썼다.

오토 3세의 사망 후에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공이 계승하였다. 그가 성왕(聖王) 하인리히 2세(1002-1024)였다. 그는 교회의 적극적인 옹호자였다. 그는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만 이딸리아 문제에 개입하였다. 1014년 2월 14일에 하인리히 2세는 그가 선출한 교황 베네딕뚜스 8세(1012-1024)에 의해 황제로 대관되었고 곧 교회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덕망있는 성직자를 주교로 임명할 것을 강조하였고, 부유한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교회에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자녀가 없어 작센(오토) 왕조는 그에게서 단절되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⑮▧

 비잔틴 교회

―중세 교회(Ⅳ)―

                                          김  성  태

 

성화상 파괴 논쟁

 

백여 년 동안 비잔틴(동로마 제국) 교회를 격심한 대립 세력으로 분립시킨 성화상 파괴논쟁(聖畵像破壞論爭)은 많은 박해와 폭력 사태, 정치 호란과 사회 소요를 야기시켰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는 동로마 제국의 교회 역사에 있어서 전환기의 하나로 서술되고 있다. 그 동인(動因)은 명백하게 전부 밝혀지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에는 종교,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요 쟁점은 종교적 문제, 즉 그리스도교 교리와 전례에 대한 것이었다. 성화상 파괴는 모든 종교 예술품에 대한 적의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자세는 구약성서에서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 숭배에서 구하고 신()의 영적 본성을 살리기 위해서 어떠한 형태의 모상(模相)도 공경하는 것을 금지한 사실(출애 20,4; 레위 26,1; 신명 4,16)에 기인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이 가시적 인간의 모습을 갖춘 이후로 신약에서 모상 금지는 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회는 오랫동안 모상에 대해 경고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상보다는 상징(象徵)을 택하였다. 2세기경의 십자가에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당나귀의 형태로 나타났으며(로마의 겔로티아나 성당의 벽화), 4세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십자가 형태가 나왔다. 그리고 5세기에 성화상(주로 그리스도와 성인의 성화상)의 공경이 시작되고 6세기 말에 전파되어 7세기 비잔틴 교회에 있어서는 대중 신심으로 크게 유행되었다.

그런데 후시대에 이르러 소()아시아에서 성화상 공경에 대한 반대가 일어났다. 그것은 일반 대중이 모상과 그것이 뜻하는 대상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신심 행위가 우상 숭배에 떨어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육화(肉化)한 그리스도의 모상은 그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내포해야 하는데, 신성은 나타낼 수 없었고 또 인간 모습만의 표현은 네스토리우스 사상과 같은 이단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동로마 제국에 있던 단성론(單性論)의 이단자들도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참된 인성을 부인하였기 때문에 성화상 공경을 배격하였다. 아울러 동방 교회의 주교들은,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이 시리아와 에집트에 침입하면서 성화상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어서 이들의 개종에 이 신심 행위가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92)는 성화상 공경에 찬의(贊意)를 공표하였다. 또한 8세기 초에 신학자인 다마소의 요한은, 성화상은 ‘침묵의 설교’, ‘하느님 신비에 대한 기록’, ‘문맹자들을 위한 책’일 뿐 아니라 성화(聖化)한 물질이 표상은 그리스도의 육화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신학적 설명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학과 성화상의 의미를 연결시켰고 신()에게만 바치는 흠숭(欽崇)과 피조물에게 드리는 공경(恭敬)을 구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상 논쟁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726년에 황제 레오 3세(717-741)가 비잔틴 제국에서 성화상의 파괴를 명령함으로 해서 이 논쟁은 공개화되었다. 일반 대중은 수도자들의 영향으로 성화상 공경을 주장하고 실천하였다. 마침내 730년에 황제는 성화상 공경 금지의 칙서를 반포하여 성당에서 성화상의 강제 철거를 명령하였고 성인들의 유해는 파괴 또는 소각되었다. 콘스탄틴 5세(741-775)의 시대에 성화상 파괴는 극에 달하였다. 이 황제는 754년에 콘스탄티노플의 한 교회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338명의 참석 주교들의 만장일치로 성화상 공경을 우상 숭배로 결의하여 금지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성화상 공경을 주창하는 지도자들 ― 특히 다마소의 요한 ― 을 이단으로 단죄하여 처형하였다. 따라서 이는 반() 수도원 운동으로 서술되고 있다.

레오 4세(775-780)가 황제가 된 후에는 성화상 공경의 지지자였던 아내 이레나 여제(女帝)의 영향으로 온건 정책을 썼고 수도자 박해도 중지하였다. 이레나가 섭정하면서 성화상 신심을 회복시켰고(786), 787년에는 제2차 니체아 공의회(이는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한자리에 모인 마지막 공의회가 됨)를 개최하여 성화상을 이단으로 선언한 754년 종교 회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다마소의 요한의 신학적 논증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레오 5세(813-820)와 테오필로 1세(829-842)의 시대에 다시 성화상 공경을 금지시켰고 수도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성화상 파괴는 미카엘 3세(842-867)가 등극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843년에 콘스탄티노플의 한 성당에서 열린 종교 회의에서 성화상 공경을 부활시킴으로써 논쟁을 끝맺었다.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결별

 

비잔틴 교회와 서방의 라틴 교회의 견해는 오랫동안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여왔다. 정치, 신학, 전례, 규율에 있어 상호간에 많은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우기 샤를르 대제와 오토 대제의 서방 제국 건설과 이딸리아 진출, 서방 교회의 개혁 정신 등은 두 교회 사이의 대립 또는 적대감정을 격화하였다.

결국 두 교회의 충돌은 복구의 노르만 민족이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남부 이딸리아를 점령하였을 때에, 교황 레오 9세(1049-1054)가 그의 정치 세력을 이 점령 지역까지 연장하였을 때에 일어났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9세(1042-1055)가 점령자들을 축출하기 위해 교황과 동맹을 맺고자 하였다. 이때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미카엘 체룰라리우스(1043-1058)가 그의 관할 지역인 남부 이딸리아에서 교황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내의 충돌을 일으킴으로 비잔틴 제국과 교황청의 상호이해를 저지시켰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수도원과 성당을 폐쇄시켰고, 미사 중에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는 것과 라틴 예절의 거행을 금지시켰으며, 성직자의 독신 생활과 신조(信條)에 ‘성자와’(filioque)를 삽입하는 것을 단죄하였다.

그래서 레오 9세는 두 교회의 협력관계를 도모하고 체룰라리우스의 비난을 없애기 위해서 당시에 교회 개혁가였던 훔베르토 추기경을 대표로 하는 세 명의 특사를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협상은 처음부터 잘못 시작되었다. 교황의 사절들은 총대주교를 거만한 자세로 대하였다. 그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로마 헌납서와 사도 전승에 의한 교황의 절대적 권한에 의거하여 체룰라리우스에게 로마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을 인정할 것을 강요하였고, 서방 교회의 관습이 유일한 것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야심가였던 총대주교는 협상이 결렬되도록 유도(誘導)하였고 마침내 사절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훔베르토 추기경은 총대주교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파문서를 작성하여, 1054년 성소피아 성당 제대 위에 놓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파문서는 콘스탄티누스 9세의 명령으로 소각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한 성당에서 개최된 종교 회의는 훔베르토와 그 일행을 파문하였다.

이 파문서는, 서방 교회가 새로운 독자 노선으로 발전되어가고 있었고 서방 교회의 지도자들이 동방 교회의 정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인간의 결점과 오해에 있었고 이는 교리 문제이기보다 규율 문제였다. 오늘날까지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훔베트로 추기경이 월권(越權)을 행사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체룰라리우스의 파문이 선언되었을 때에 교황 레오 9세는 이미 사망하였고(4월 19일 사망), 그 후계자인 아드리아노 4세(1054-1059)는 아직 피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12월 4일에 선출).

이 결별 이후 오늘날까지 두 교회는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다만 일치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예루살렘 방문에서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를 만났고, 1965년에는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1054년의 상호파문을 취소하였으며, 1067년에는 바오로 6세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였다. 최근에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동방 정교회의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와 함께 교회 일치를 위한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고(1979.11.30), 두 교회의 완전 일치를 향한 대화를 위해서 합동신학위원회를 정식 발족시켰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

 교회 개혁 운동

―중세 교회(Ⅴ)―

                                          김  성  태

 

중세 초기의 서구 사회에 있어서 국가와 교회가 평형을 유지한 이원론적 상황은, 교회의 암흑기에 들어서면서 국가와 황제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어 두 세력 사이의 마찰이 불가피해졌다. 이 투쟁은 교회의 쇄신 운동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우선 순수한 수도원 개혁으로 나타났다. 이 개혁 운동은 점차 신앙과 윤리 생활에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 종교, 문화 등 사회 전반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지향함으로써 그 영향은 수도원 밖으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이 운동은 국가와 교회 간의 투쟁을 야기시킨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여러가지 형태로 발전하여 모든 정신 분야에 파급되었다.

 

클루니 수도 단체의 개혁 운동

 

중세기의 수도원 개혁 운동은 클루니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이 수도회는 아퀴텐느의 윌리엄이 909년에 창설하였다. 그는 9세기 교회가 쇠퇴한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수도원의 독립성을 교회 행정가(주교)와 국가 관리에게 박탈당한 데에 있다고 간파하고 클루니 수도회에 내외적으로 자율권을 보장해주었다. 즉 자유 선거에 의한 수도원장 선출과 교구 주교로부터의 치외법권이 창립헌장과 교황의 특권에 의해 보장되었다. 그리고 베네딕또 수도회의 규칙의 엄수, 원장에 대한 절대적 순종, 엄격한 극기생활, 전례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이 수도회의 특징적인 정신이었다. 클루니 수도회는 위대한 원장들의 영도 아래 교회 안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이제까지 수도원은 세속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취해왔었다. 그러나 수도원도 그리스도교에 속해있었고 그리스도교는 세속화의 위험 속에 처하여있었다. 서구의 수도원은 신비주의적인 동방 수도회와는 달리 항상 그리스도교 전체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서방 수도원의 자세는 클루니 수도회의 개혁 운동이 단순히 수도원 운동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10~12세기에 펼쳐진 클루니 수도회 개혁 운동의 빛나는 활동과 영향은 이 수도회의 종교적 활력과 내적 견고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수도생활은 외부 세력으로부터 흔들리지 않으면서 수도원의 담 속에서 힘있게 성장, 발전하여왔다. 클루니 수사들은 조용한 묵상 속에서 기도하면서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는 클루니 수도회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 수도회의 힘은 세속 거부와 현실 도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영신적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서 발견되었다.

클루니 수사들은 열렬한 개혁 정신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세속에 대해 관용과 수용의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학문을 연구하였고, 정치적 관심을 갖고 황제들과 접촉하면서 친교를 맺었다.

클루니 수도회의 제2대 원장인 오도(927-942)는 개혁 운동을 확대시켰다. 많은 수도원들이 클루니 수도회에 합병하거나 이 수도회 규칙으로 재정비하였다. 이에 따라 클루니 수도 단체가 결성, 발전하여 모원(母院)인 클루니 수도원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갖고 그 지시를 받았다. 이 수도 단체는 12세기에 이르러 3천여 개의 수도원을 갖게 되었다.

클루니 수도회의 수도원과 교회 개혁 운동은 심화(深化)하였고 민중에게 종교의 중요성,  교회의 독립권, 교황의 권위를 각성시켰다. 따라서 이 운동은 후 시대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73-1085)가 추진한 그레고리우스 개혁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레고리우스 개혁

 

그레고리우스 개혁은 그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서 클루니 수도 단체의 개혁 운동과는 다르다. 물론 두 운동은 모두 ‘자유의 교회’라는 개념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클루니 수도회의 개혁은 이 자유를 세속 군주와 주교들의 외부 압력과 침해에서의 해방으로 제한하여 생각하였고, 반면에 그레고리우스 개혁은 왕이나 귀족들을 통해 또는 성직매매(聖職賣買)의 방법으로 주교와 수도원장이 임명되던 체제를 공격하였다. 이 교회의 정치적 개혁은 종교의 독립을 옹호하기 위해서 교회의 성직자 자유 선출권의 회복과 그 권한의 행사를 요구하였다. 결과적으로 교권(敎權)과 정치 세력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본래의 이름이 힐데브란트로서 그레고리우스 6세(1045-1046)의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교회의 암흑기 말에 교황과 함께 독일의 쾰른으로 축출되었다(1046). 그레고리우스 6세의 사망(1047) 후에 클루니 수도회에 입회하여 엄격한 성직생활을 서원하였다. 그러나 새로 선출된 교황 레오 9세(1049-1054)의 요청에 의해 로마로 돌아와서(1049) 교황령의 관리자가 되었다. 힐데브란트는 역대 교황들의 교회 개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1059년에 로마 교회의 대부제(大副祭)로 임명되었다. 특히 교황청의 개혁파인 훔베르토 추기경 사망(1061) 후에는 개혁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그의 개혁의 중요한 과제는 성직매매와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에 투쟁하는 것이었다. 서임권 문제에 있어서는 힐데브란트는, 국왕을 교회에 복종해야 하는 평신도로 보았고,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이 육신 위에 위치하듯이 그리스도교 제국에 있어서 교회가 국가에 우선한다고 주장하였다.

 

성직 서임권 투쟁 ― 카놋사 사건 표시

힐데브란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로 선출된 후에 교황의 수위권을 선언하면서(Dictatus Papae, 1075) 교황만이 주교를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이제까지 주교를 임명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대한 도전이었고 독일의 제국 교회의 붕괴를 의미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이 황제 하인리히 4세(1056-1106)가 황제는 교회의 수위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종래의 사상에 의해 밀라노의 주교 선출에 간섭한 사실에 대해서, 그레고리우스 7세는 렌텐 종교회의(1075)에서 평신도의 성직 서임에 대한 금지령을 선포하고 하인리히 4세의 주교 임명권을 박탈하였다. 여기서 황제는 교황의 금령을 무시하고 1076년 1월에 보름스 국회를 개최하여 제국의 주교들을 충동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에 반대하며 교황의 해임을 선언하였다. 교황은 그 대응책으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그 신하들이 국황에 대한 충성 선언을 해제시켰다. 이에 제국의 신하들은 같은 해 10월에 트리부르에서 집회를 갖고, 황제에게 일년안에 교황에게 파문의 취소를 받아내지 못하면 새 황제를 선출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하인리히 4세는 자기의 입장이 불리함을 깨닫고 그해 말 추운 겨울에,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카놋사로 속죄 여행을 떠났다. 황제는 카놋사에 도착한 후에 3일 동안(1077년 1월 26일~28일) 속죄의 옷을 입고 그레고리우스 7세가 머물고 있던 변경백(邊境伯)의 저택 문 앞에서 교황을 기다렸다. 하인리히 4세의 대부(代父)이며 클루니 수도회의 원장인 휴그와 집주인 마틸다 부인의 중재로 마침내 교황의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독일의 황제권에 있어서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치명적 타격이었고, 이로써 서구사회의 지도권은 황제에게서 교황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사망 후에도 국가와 교회 간의 기본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사소한 투쟁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두 세력은 상호 관계 개선의 해결점을 모색하게 되었다. 교황 파스칼 2세(1099-1118)와 황제 하인리히 5세(1106-1125)는 1111년 2월에 수트리에서 종교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 의해 독일의 제국 교회는 황제로부터 받은 영토와 특권을 반납하고 황제는 성직 서임권의 행사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제후들과 주교들은 이 종교협약에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이는 그들에게서 실권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이 서임권 문제는 보름스 종교협약(1122)에서 해결되었다. 여기서 두 가지 서임권이 규정되었다. 황제는 세속적 서임권을 소유하고 교황은 영신적 서임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 해결은 완수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 사이의 투쟁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

 성직자와 수도자의 각성

―중세 교회(Ⅵ)―

                                          김  성  태

 

수도회의 개혁 활동

수도회, 특히 클루니 수도단체에서 시작된 교회 개혁운동은 서구 전체에 종교심을 앙양(昻揚)시켰다. 이제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 생활제도와 성직자나 평신도의 영성생활에 대한 염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신심 깊은 모든 계층의 신도들은 수도생활로 전향하여 어떤 이들은 베네딕또 수도회에 입회하거나 광야에서 은수자의 생활을 하였고, 어떤 이들은 방랑의 고행자로서 또는 설교자로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영성생활을 이끈 사상은 가난과 자발적 자아 포기의 사도적 생활이었다.

수도자들은 교회 쇄신과 수도원의 혁신을 열렬하게 주창하고 실천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딸리아에서 명성을 떨친 성() 로무알두스(951-1027)를 들 수 있다. 그는 자유 분방하게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927년경에 부친의 살인죄를 속죄하기 위해 고향인 라벤나 근처에 있던 성() 아폴리나레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좀더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서 베네치아 근교에 있는 마지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에 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쿡싸의 클루니 개혁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늪지대의 외딴 곳에서 기도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로무알두스는 때때로 민중 앞에 나타나서 속죄의 설교를 하였다. 그의 경건한 종교심과 심금을 울리는 설교는 대중에게 감명을 주어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그들을 위해서 여러 수도원들을 창설하였다. 이 수도원들은 은수생활과 단체생활이 혼합된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 수도자들은 처음에 베네딕또 수도 규칙을 따라 단체생활을 하다가 후에 수도원 주위에 있는 암자에서 은수자의 생활을 하였다. 이 수도원들 중에서 까말돌리 수도원은 열렬한 교회 개혁자인 성() 베드루스 다미아누스(1007-1072)와 같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알프스 북부 지역에서는 아브리쎌의 로베르투스와 티에체빌레의 비탈리스는 순회 선교사로서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 대중에게 속죄의 설교를 하면서 사도적 생활을 실천하였다. 또한 쾰른의 성() 브루노(1032-1101)는 렝스의 주교직을 사임하고 6명의 동료와 함께 그레노블 근처의 험한 산악지역에 카르투시아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이 수도회는 관상(觀想) 수도회로서 회원은 많지 않았지만 기도와 묵상을 통해 내적 힘과 참된 종교심을 간직하면서 종교개혁 시대까지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수도회의 교회 개혁 활동뿐 아니라 베네딕또회 소속 수도원 자체에 대한 개혁의 요구가 일어났다. 씨토(치스테르치안) 수도회는 바로 개혁 베네딕또 수도회였다. 이 수도회는 몰레슴의  로베르투스(1111 사망)가 20명의 동료와 함께 씨토의 광야에서 창설하였다. 씨토 수도회는 사도적 청빈, 기도를 위한 침묵, 규칙적인 엄격한 노동을 강조하고 부()를 가져오는 종래 수도원의 봉건적 구조 질서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수도회의 이상(理想)을 실현한 이가 부르군디 지방의 귀족 출신인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1090-1153)였다. 그는 1112년에 30명의 동료들을 이끌고 씨토 수도원에 입원(入院)하여 1115년에는 클레르보에 새로운 수도 공동체를 세웠고, 이것이 크게 발전하자 12세기 말경에는 씨토 여자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1500년경에는 700여 개의 수사원(修士院)과 900여 개의 수녀원으로 증가되었다. 이 수도원들은 지역사회의 개척과 선교활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베르나르두스의 업적은 영신적인 면에 있었다. 그의 목표는 교회의 종교적부흥과 베네딕또 수도자들의 성화(聖化)였다. 그는 많은 이들로부터 조언과 협력을 요청 받았고 교황, 황제, 제후들과 계속적인 접촉을 하였다. 그는 신전기사 수도회의 규칙서를 작성해주었고, 교황청 분규(1130)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1147년의 십자군 창설은 대부분 그의 설득력 있는 설교의 결과였다. 베르나르두스는 당시대에 위대한 개혁가, 신학자, 종교인으로 불리었으나 우리는 그를 무엇보다도 성인, 수도자, 영신 지도자로 기억하여야 한다.

 

재속 성직자의 생활 쇄신

재속 성직자들도 개혁운동에서 제외되지는 않았다. 11-12세기에 주교좌 대성당과 합동교회의 참사회원(參事會員)의 쇄신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 운동의 목적은 모든 재속 수도 성직자들에게 그리스도교적 사목정신을 각성시키는 것이었다. 자립 본당이 별로 없었고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주교좌 대성당이나 합동교회를 중심으로 모여 생활하면서 성직을 수행하던 당시에, 이 참사회원들의 규율을 제정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미 히포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띠노(354-430)는 자기와 함께 살고 있던 성직자들을 위해 일정한 규율을 만들어 주었다. 이 참사회원들의 생활은 사도들을 본받아 영위되는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동 생활의 질서와 규칙을 준수하고 주교에게 순종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수도자와는 달리 개인 재산을 소유할 수도 있었고 수도 서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성직자들은 좀 더 자유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타락할 위험에 빠질 수 있었고  따라서 항상 생활 제도의 쇄신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이미 성() 보니파시우스(680-754)와 샤를르 대제(764-814)가 참사회 개혁을 시작하여, 768년에 메쯔 주교인 크로데강은 새로운 참사회칙을 만들었고, 805년에 제정된 참사회칙은 프랑크 제국의 모든 성직자들이 수도자처럼, 또는 공동체 속에서 생활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816년에 경건왕 루이 1세는 참사회 법규를 반포하였으나 카롤링 왕가의 붕괴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유감스럽게도 9-10세기에 이르러 주교좌 대성당과 합동교회의 재산이 각 성직자의 성직록으로 분산되고, 공동체의 생활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개혁은 과거의 성직자 생활 제도를 회복시켰다. 1059년에 로마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힐데브란트(후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모든 주교좌 대성당과 합동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그들이 사유 재산을 포기하고 엄격한 규율에 따라 생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 따른 성직자는 ‘수도참사회원’이라고 불리었고 전과 같이 사유 재산을 소유하고 생활한 성직자들은 ‘재속 참사회원’이라고 일컬어졌다. 이 참사회의 개혁 의도는 모든 참사회원들이 아우구스띠노 규율을 받아들일 것을 권장하는 것이었다. 이후 4500여 개의 수도 참사회 단체가 있었고 이들은 그레고리우스 개혁이 핵심적인 그룹이었다. 이 단체의 목적은 성직자들을 사도적 이상(理想)으로 좀더 가깝게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레고리우스 개혁은 재속 성직자들의 성화를 요구하고 성사적 사제직과 교회에서의 그 위치를 새롭게 강조함으로써 재속 성직자의 내적 갱신을 전제로 하였다. 이 시대의 새로운 성직자상은 사도적 청빈, 독신생활, 교회 지도자에 대한 복종, 신학연구, 교계제도에 대한 의식, 개인 생활의 성화 등이다.

중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참사회 단체는 참사회 사제인 크쌍텐의 노르베르투스(1082-1134)가 1120년에 프랑스의 라옹 근처에 있는 쁘레몽트레에서 창설한 ‘쁘레몽스트라텐시아 참사회’였다. 노르베르투스는 귀족 출신의 청년으로서 황제 하인리히 5세의 국정을 돕다가 1113년에 캄브레 교구의 주교로 서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베네딕또 개혁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수도원에서 만족한 생활을 찾지 못하고 어떤 은수자를 방문하여, 그로부터 성직자의 개혁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사실을 듣고 자기 자신을 성직자의 개혁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몇 년 동안 순례 수도자로서 속죄의 설교를 하면서 프랑스를 순회하였다. 이때에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가난을 강조함으로써 일반 민중 속에 만연되고 있던 이단을 성공적으로 쳐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노르베르투스가 설치한 이 단체의 특수한 임무는 성직자의 성화, 사목 활동, 설교였다. 1156년에 이르러 이 참사회 단체는 100여 개의 공동체를 갖게 되었다. 1125년에 그는 막데부르그의 대주교가 된 후, 자기 참사회 성직자들을 그의 교구로 불러들여 활동하게 했다. 이 재속 성직자들은 후에 씨토 수도회원들과 함께 엘베강 동부 지역의 선교와 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

 평신도의 종교심 앙양

―중세 교회(Ⅶ)―

                                          김  성  태

서구사회의 새로운 그리스도교 정신의 자각은 평신도의 신심 앙양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평신도의 십자군 운동과 청빈 운동으로 나타났다.

 

십자군 운동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지순례에 불편을 느끼고 있던 중, 동로마제국 황제 알렉시오 1세(1081-1118)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위기에 서방교회의 군원을 청하였다. 이에 교황 우르바노 2세(1088-1099)는 1095년 두 차례의 종교회의에서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들에게 이를 호소하였다. 이때 동방교회를 돕기 위한 염원과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려는 열망은 국가란 장벽을 넘어 서구세계를 단결시켰다. 이 십자군 운동은 대중의 종교적 운동으로 시작되어 몇 세기 동안 8차례(또는 6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서구의 단일성이 와해되어 그 위력을 상실하였다. 십자군 운동은 그리스도교적인 목적을 위해서 일어났지만 기사들의 모험심, 명예욕 등의 세속적 동기도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활력은 그리스도교적인 광포로 나타나 십자군 운동을 중세의 한 가지 잔인한 현상으로 변질시켰다.

십자군 운동의 결과로 기사 수도회, 즉 성 요한 기사 수도회, 신전 기사회, 뉴우튼 기사회가 창설되었다. 이 수도회들은 청빈, 순명, 정결의 일반 수도서원 외에 병든 순례자의 간호와 투쟁을 통한 이슬람교도로부터의 성지회복을 선서하였다. 아울러 이 운동은 비잔티움과 이슬람 문화의 접촉으로 학문(특히 스콜라 철학과 신학)과 예술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으며 이교도의 세력 확장을 저지시켰고 그리스도교와 교황의 권위를 크게 떨쳤다.

 

청빈 운동

십자군 운동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예루살렘 성지에서 본 가난한 그리스도의 생생한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리면서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염원을 갖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생애가 담겨있는 복음성서에 관심을 갖고 성서 모임을 구성하여 성서를 읽고 해설하면서 그리스도의 생활을 배우려 하였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청빈 생활을 당시의 교회 상황과 비교하게 되었을 때 부유한 교회의 봉건체제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12세기에 성장한 도시들은 더 이상 교회 지도자(주교)의 통치 아래에 있지 않았고 이러한 도시에서 일반 대중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교회의 평신도들도 자각하여 교회와 종교 문제를 성서에 입각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가 교회 안에서 그 내부의 쇄신을 위해 일어났다면 이는 평신도의 교회 복음화 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다. 이러한 평신도의 신심 운동이 비그리스도교적인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이단 운동이라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청빈의 복음화 운동 :12세기에 ‘베귀’(말더듬이)라는 평신도 신심단체가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이 공동체는 수도서원은 하지 않으나 수도자와 같은 엄격한 고행의 공동생활 속에서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성서 봉독, 기도와 묵상, 노동, 병자 간호 등의 자선 활동에 종사하였다. 직공(織工), 염색공 출신인 이들에게는 공동 규칙이나 모원(母院), 총원장이 없었다.

이딸리아의 밀라노 지역에서도 직공들이 ‘후밀리아띠’(겸손한 자)라는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본받아 사유재산을 거부하고 공동 소유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이 신심 운동이 과격한 경향을 띠게 되어 교황 인노첸스 3세(1198-1216)때에 교회가 지도 감독하였다. 이제 이 공동체의 회원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베네딕또 규칙을 지키는 공동 수도생활을 하였고, 어떤 이들은 속세에 남아 기도를 통하여 이 수도원과 제휴하면서 수도원의 신심행사에 참여하였다. 이들이 바로 수도회의 재속 제3회의 기원이 되었다.

이단운동 : 12세기 초에 네덜란드의 열광적 개혁가인 탄켈름은 성직자의 사유재산 소유와 세속적 생활을 힐책하였다. 그는 후에 당시 평신도에게 금지되었던 교리 문제 즉 교계제도, 성사적 교회, 성체성사 등에 반대하여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1115년에 일반 대중에게 살해되었으나 그 이단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고 12세기 중엽에도 잔존하였다.

이딸리아의 급진적 사상을 지닌 속죄 설교가 아르놀드도 재산이 없는 교회를 요구하면서 교황청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치 분쟁 속에 휘말려 1155년에 황제 프리드리히 1세(1152-1190)에 의해 처형되었다. 아르놀드 추종자들은 후에 왈도파의 카타리파에 가담하였다.

프랑스 리옹의 호상인 베드로 왈도는 1173-1176년에 마태오 복음(19,21-26)에서 청빈의 이상을 발견하여 자기 재산을 포기하고 엄격한 사도적 청빈과 속죄의 설교에 헌신하였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난한 이들’ 또는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자칭하였다. 이들의 의도는 매우 좋았으나 교회에 대한 비난 설교가 너무 지나쳤을 뿐 아니라 신앙의 위험까지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리옹의 주교들은 이들을 추방하였고 1184년 교황 루치오 3세(1181-1185)는 왈도의 속죄 설교가로서의 활동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즉시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았다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생활을 하는 이 만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설교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여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12세기에 마케도니아로부터 이원론적 이단인 ‘카타리’(순수파)의 사상이 여행 상인과 십자군의 군인들에 의해 서구에 도입되었다. 이 이단자들은 세력을 확장하면서 1167년에 프랑스에서는 종교회의까지 개최하여 교회를 죄악이 되는 재산을 소유한 부유한 가톨릭 교회와 재산의 소유를 포기한 ‘카타리’교회로 구분하였다. 고행과 극기의 생활을 하는 이들은 이상적 그리스도인이며 가톨릭 교회는 사탄의 집회이고 성직자들은 위선적 죄인들이며 성사는 악마의 장난이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국가에 반대하여 황제는 사탄의 우두머리이며 제후들은 사탄의 협조자라고 욕하였다. 남부 프랑스, 특히 알비 지방의 ‘카타리’파는 프랑스 왕에 대적한 제후들과 제휴하여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알비 전쟁(1209-1229)을 일으켰다.

‘카타리’이단 운동은 서구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 사회, 종교의 기반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국가와 교회가 함께 행동하였다. 1183년 교황 루치오 3세와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교회가 파문한 이단은 즉시 제국이 금지, 색출하여 국가 법정에 기소하는 종교재판 설정에 합의하였다. 이는 서구세계가 그 자체를 정치-종교적 한 단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알비’파를 개종시키려는 시도가 실패하고 1208년에 교황사절이 살해된 후에 교황 인노첸스 3세는 십자군 운동을 일으켜 비그리스도교적인 잔인한 살육 전쟁이 20년 간 계속되었다.

종교재판의 절차는 교황 인노첸스 3세 시대에 완성되었다. 국가는 이단자가 고발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직책상 색출하여 이단의 용의자에 대해서도 공소를 제기하기 위해 종교 심문관을 임명하였고 1252년에는 이단자가 고백하도록 종교 재판관들에게 고문까지 허용되었다. 이는 교회사에 있어서 비극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고려할 점은 당시의 신학자들이 신앙 문제에 있어서 폭력 사용을 배격하였지만 대중은 종교의 이단자를 정치 반란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불행한 결과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반면 아씨시의 프란치스꼬(1181/2-1226)와 도미니꼬(1170-1221)는 복음전파와 이단 근절의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었다. 이 두 성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청빈의 이상대로 생활하면서 동시에 부자를 무조건 힐책하거나 재산 그 자체를 악이라고 부르지 않음으로써 바오로 사도의 말씀(1고린 6,10)대로 재산을 소유하고 포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들은 사도적 청빈생활의 실천과 ‘카타리’파의 개종을 위해 노력하는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라는 탁발 수도회를 각각 창설하였다. 중세의 탁발 수도회는 이외에도 성 아우구스띠노 은수자회와 까르멜회가 있었다. 이 네 수도회들은 중세의 훌륭한 설교가와 유명한 신학자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여자 수도회와 재속 제3회도 설립하였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

 종교개혁시대(Ⅰ)

                                          김  성  태

문제의 초점

종교개혁 ― 교회쇄신

오늘날 신학 연구에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신인양성(神人兩性)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진다. 따라서 교회는 신적 존재라는 점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 없고 거룩하지만, 동시에 인간적 실재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과실, 또는 죄악까지도 있을 수 있다. 이는 인간적 공과(功過)를 갖고 행동하는 교회의 구성원이 인간적 동기와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역사적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개혁을 필요로 하며 결코 만족해서는 안된다. 교회가 이제 더이상 그 전형인 그리스도와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가 그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였을 때는 개혁의 외침과 쇄신운동이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회혁신운동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이다. 이 사건 자체는 교회쇄신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신앙의 기본을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교계(敎界)를 여러 갈래의 분파로 분열시켰다. 그런데 이 종교개혁은 두 가지로 구별되고 있다. 즉 교회 밖에서의 개혁과 교회 안에서의 개혁이다.

교회 밖에서의 개혁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다시 말해서 개신교의 발단이 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서, 가톨릭적 의미에서는 ‘교회에 대한 반란’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에는 몇 가지 형태가 구별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루터의 종교개혁, 즈윙글리의 종교개혁, 재세례파(再洗禮派)의 급진적 종교개혁, 칼빈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 등이 있다.

교회 안에서의 개혁은 가톨릭 종교개혁으로, ‘가톨릭 교회쇄신’또는 ‘반()종교개혁’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반종교개혁이란 표현은 개신교에서 나온 것으로 이 교회개혁운동에 대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해석이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교회 안에서의 개혁을 단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반발해서 일어난 방어적이며 부정적 운동으로 규정짓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관계없이 그 이전에 가톨릭내에서 일어나 성장한 교회개혁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과 이러한 개혁운동의 결과가 트리덴티노 공의회(1545-1563)의 결정이라는 사실로 보아 최근의 학자들은 긍정적 의미의 가톨릭 교회쇄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톨릭 교회쇄신이 방어적 운동, 따라서 반종교개혁이라는 주장도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가톨릭의 교회쇄신을 촉진하였고, 그 방향 설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가톨릭 교회쇄신의 과정 중에 이단자 색출, 종교재판, 처형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다는 점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반동으로서의 반종교개혁이란 용어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의 원인

종교개혁의 원인에 대한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쟁점으로 남아있다. 많은 교회사가들이 종교개혁이 발생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하였지만 아직 일치된 견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가톨릭 학자들은 종교개혁의 원인을 정치적 상황과 윤리적 사실로 설명했다. 정치적 상황으로서는 왕과 지방 관리(제후)들의 권위적 태도와 물질적 욕심을 들고 있다. 윤리적 사실로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고위 성직자들이 탐욕적으로 정치권력을 얻으려고 한 사실을 들고 있다. 개신교 학자들은 교황 및 성청 성직자들의 부적합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역사가들이 모두 사회적 영향을 인정하지만 종교적 원인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의 증언

과거에 수많은 가톨릭 지도자들은 교회의 악폐가 개신교의 발단과 성장 및 발전에 이바지하였다고 공공연하게 인정하였다. 그 한 사례는 교황 아드리아노 6세(1522-1523)가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뉴른베르그 국회(1522-1523)에 파견한 교황사절 프란치스꼬 치에레가띠 추기경에게 보낸 훈령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훈령은 1523년 1월 3일에 국회에서 공개되었다. 교황은 루터 이단으로 인하여 교회가 받는 어려움에 대한 책임은 성직자, 특히 교황청과 그 성직자들에게 있다고 솔직히 시인하였다. 또한 교회가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하느님이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성직자들의 죄악이 하느님의 모습을 가리는 장막이 되어 그 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수 년 동안에 교회 안에는 가증할 만한 폐습이 많이 있었으며 이러한 병폐들은 교황을 포함하여 성직자들에게서 스며 나왔기 때문에 성직자 각자는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고 하느님의 노여움을 재판을 받기 전에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교회의 분쟁이라는 불행이 원인이 된 교황청을 개혁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가톨릭이 입장에서 볼 때에 예외이기는 하지만, 고위층 성직자들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단지 부정적 사건, 즉 가톨릭 운동으로 생각치 않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긍정적 의미를 강조하고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적의에서가 아니라 참다운 종교적 열망에 기인하였다고 서슴없이 선언하였다. 그 한 예로, 지성구주회(至聖求主會)의 알프스 북부 지방 총대리이며 오늘날 비엔나의 사도라고 불리는 성 끌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1751-1820)를 들 수 있다. 그는 1816년 비엔나에서 출판업자인 프리드리히 페르테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독일 민족이 교회에서 이탈한 것은 그들이 종교적 백성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이단자들이나 철학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종교를 절실하게 추구하던 열심한 사람들에 의해서 뿌리를 내리고 전파 되었읍니다. 저는 이 사실을 로마에 있는 교황과 추기경에게 말씀드렸지만 그 분들은 본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종교개혁의 원인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증오였다고 고집하여 주장 하였읍니다.” 사실, 루터는 처음부터 새로운 교회를 세우겠다고 생각치 않았고 한 수사신부로서 비록 실패는 하였지만, 교회 안에서 교회 개혁에 대한 가톨릭적 요구를 내세웠었다.

최근에 이르러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제2회기 개막식(1963년 9월 29일)에서 참관인으로 참석한 갈라진 다른 그리스도교인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그리스도 교계의 분열에 대한 책임을 가톨릭도 함께 져야 한다고 고백하였다. "우리에게 교계 분열에 대한 잘못이 있다면 우리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께 뿐 아니라 우리에게서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는 갈라진 형제들에게도 용서를 청합니다. 우리 편에서 가톨릭 교회가 받은 피해는 즐거운 마음으로 용서하고 오랜 기간의 분쟁을 통해서 받은 고통을 잊겠읍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러한 우리의 선언을 받아주시고 우리 모두가 참다운 형제적 평화를 찾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교황은 1963년 10월 17일에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다시 한 번 상호간의 용서를 청하는 말을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도 갈라진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 단일 유일한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초기부터 분열이 생겼던 것이며, 사도 바오로는 그것을 단죄할 것으로 엄히 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후세기에 와서는 더 많은 불화가 생겨 적지 않은 단체들이 가톨릭 교회와의 완전한 일치에서 갈라지게 되었으며, 때로는 양쪽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었다.”(3항).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

종교개혁시대(Ⅱ)

                                          김 성 태

종교개혁의 원인(1)

정치적 배경

서부 유럽 : 중세 말기에 이르러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서부 유럽 국가들은 중앙집권직인 전제 군주 정치체제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중앙집권주의 정책은 전체적 이익보다는 자국(自國)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게 하였다. 예컨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가장 가톨릭적 국왕인 프랑소와 1세(1515-1547)는 왕권 강화와 세력 확장을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가톨릭 황제인 카알 5세(1519-1556)를 대항하여, 이교 국가인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회교 군주 술레이만 1세(1520), 그리고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동맹을 맺기를 주저치 않았다. 또한 중앙집권주의의 통치자들은 국교회사상(국교회사상)을 갖고서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자 하였다. 예컨대 영국의 헨리 8세(1491-1547)는 국가교회를 세웠다. 이러한 통치자들은 교회 문제에 있어서 성직 임명권과 같은 특권을 요구하였다.

중부 유럽 : 독일, 이딸리아와 같은 유럽 중부지방에서는 중앙집권의 정치체제가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지방분권화의 정치적 상황에 놓여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인 독일의 경우, 황제의 권력은 실질적이기 보다는 하나의 형식적이며 이상적인 것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직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선제후(選帝侯)들과 지방 제후들에 의해 제한을 받았다. 이들은 황제에게 충신을 다하던 봉신(封臣)들이었지만 15세기에 이르러 황제의 권한의 일부를 요구하고 나섰다. 따라서 이들은 후에 이러한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황제와 충돌한 마르틴 루터와 그의 종교개혁을 열렬히 환영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이딸리아는 찬란한 문화와 경제적 풍요를 갖고 있었으나 내부의 투쟁과 외세의 간섭을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분열된 지방이었다. 교황 알렉산델 6세(1492-1503)와 율리우스 2세(1503-1513)치하에서 교황청은 이딸리아의 실질적인 정치세력이었다.

 

경제-사회적 배경

중세 말기에는 경제 및 사회적으로 볼 때에 도시와 지방 사이에 빈부의 차이가 심하였다.

도시인의 배금사상 :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은 전통적인 윤리관이나 고리대금의 금지에 아랑곳없이 황금만능주의에 젖어있었다. 금()은 부유를 가져오고 인간의 모든 행동의 동기는 바로 금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금의 위력은 천국에 이끌 수 있을 만큼 위대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후에 대사에 대한 참된 신학적 의미를 외면한 대사부(大赦符)판매의 길을 쉽게 열어주었다.

지방민의 빈곤 : 지방에서는 일부의 귀족과 몰락한 기사, 그리고 대부분의 농민들이 가난하였고 따라서 불만 속에 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지방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혁명이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성적 배경

르네쌍스 인문주의 : 이 인문주의(人文主義)는 14세기에 이딸리아에서 일어나 15-16세기에  영국, 스페인, 헝가리, 폴란드, 프랑스, 네덜란드에 번진 문화적 또는 지성적 운동이다. 이 운동은 관심사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의 양양에 있기에 인본주의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이 역사적 사건을 다른 인문주의적 운동과 구별하기 위해 르네쌍스 인문주의라고 일컫는다. 서구문화 발전에 있어서 르네쌍스 인문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이를 새로운 역사 시대인 현대의 시작으로 보는 이도 있다.

이 이딸리아의 르네쌍스 인문주의는 고전문학 즉 희랍과 로마 문학에 대해 철학적이기 보다는 심미적 관심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중세의 학자들과는 달리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수사학자인 치체로에 더욱 호감을 가졌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주의적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초기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로마 문화의 상속자로 자처하면서 이를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교적 로마 문화의 재건에 대한 관심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에 충실하였고 오히려 고대 로마의 이교를 본받는 것을 경고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객관적, 스콜라적, 체계적 사상 대신에 주관주의, 개인주의, 인간 각자의 경험에 치중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으며 새로운 과학적 방법, 즉 역사적이며 철학적인 연구방법을 존중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원천에 대한 비판적 탐구 및 복귀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럽 북부 및 서부의 인문주의는 그 개인주의적 성격에 종교적 의미를 적용하여 인간 각자를 성신(聖神)의 궁전으로 존중하였고 고대 원문(原文), 원서로의 복귀에 있어서 고전보다는 그리스도교적인 원천, 즉 신약성서 - 특히 희랍어 신약성서 - 와 교부들의 저서를 중시했고 성서연구에 있어 철학적이며 비판적 방법을 도입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또는 ‘성서적’인문주의란 용어가 나왔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생활에 있어서 초대교회의 제도와 규율을 다시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성서를 강조하고 종교개혁은 사도시대로의 복귀로 확신하였던 루터와 그리스도교 인문주의가 연결을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직접적이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종교개혁의 길을 마련한 원인(遠因)이었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내적생활을 강조하면서 교회개혁을 주장하였지만, 대부분이 혁명적인 인물들은 아니었으며 후에 그리스도교계의 일치와 단결을 보존하기 위해서 가톨릭 교회를 떠나 프로테스탄트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들인 영국의 로체스터 주교 존 피셔(1469-1535)와 대법관 토마스 모어(1478-1535)는 이혼 문제로 인한 헨리 8세와 교황청과의 대립에서 로마 교회의 입장을 옹호하고 영국의 종교개혁에 반대한 이유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의 제1인자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학자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9-1536)였다. 그는 1486년 아우구스띠노 참사수도회에 입회하여 1492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에라스무스는 빠리에서 4년간(1495-1499) 수학한 후 영국을 방문하여 위에 언급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는 빠리에 돌아와서 「그리스도 군사의 제요」라는 저서를 발간하여 지나친 외적 신심행위를 비판하고 성서에 의거한 내적생활을 강조하였다. 이딸리아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획득한 그는 다시 영국을 방문하여(1509-1514) 런던에서 풍자적 글로써 성직자들의 타락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의 희랍어 신약성서 개정판이 스위스 바젤에서 출판업자 요한 프뢰벤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후에 벨기에의 루뱅에 머물고 있을 때에 그곳의 보수주의 신학교수들은 이 성서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성서는 원어로 연구되어야 하며 신학자들은 고대 성서 언어에 대한 밝은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의 친구인 프뢰벤이 루터의 저서들을 출판하였을 때에 에라스무스는 이 신학자들에게 이단자의 혐의를 받았다. 더우기 그는 루터처럼 교회의 악폐를 비난하고 성서에 입각하여 교회를 쇄신할 것을 촉구하였기 때문에 어떤 신학자들은 그를 루터의 지지자로 간주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이 루터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라고 반박하였다. 어쨌든 1519년 11월 7일 루뱅 대학 신학교수들이 루터의 저서를 단죄하여 소각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독일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중도(中道)입장을 취하면서 이 신학자들과 루터 사이의 중재역할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라스무스는 1521년에 바젤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는 오랫동안 주저한 끝에 루터의 교리를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1529년 바젤에서도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그는 독일 프라이부르그에 피신하여 저술생활을 하다가 다시 바젤로 돌아가 1536년 7월 12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마지막 저서들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재결합하기 위한 중재신학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 신학은 가톨릭 측에서 많은 지지자를 갖게 되었고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도 멜랑크톤과 같은 추종자들이 있었다. 멜랑크톤은 아우구스부르그 국회(1530)에서 에라스무스의 정신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재일치를 꾀하였으나 루터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

종교개혁시대(Ⅲ)

                                          김 성 태

종교개혁의 원인(2)

신학적 배경

1. 교의 신학

신학의 불확실성 : 중세기에 제기되고 있던 신학의 많은 문제들이 교회 당국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결정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신학의 현안 문제들을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자유주의는 ‘신학의 불확실성 시대’를 도래시켰다. ― 실상 가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 핵심적인 신학 문제, 예컨대 대사, 의화론과 구원론, 미사와 성사의 의미, 교회관, 교황의 수위권 등에 대한 교리가 좀더 확실하게 정립되었더라면 루터의 신학적 공격과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불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불명료한 점들은 종교개혁 이후 뜨리덴띠노 공의회(1545-1563)에서 비로소 해결되었다.

이러한 신학의 불확실성은 학파간에 ‘신학적 대립’의 결과를 낳았다. 도미니꼬 수도회는 소속 회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4/5-1274)의 사상을 기본원리로 삼아 공식 견해로 내세웠고, 프란치스꼬 수도회는 보나벤뚜라(1221-1274)를 계승한 스꼬뚜스(1265-5-1308)의 가르침을 사상의 근간으로 삼았다. 신앙과 이성을 융합하려는 토마스의 합리주의 신학은 스콜라 사상의 전성기(14세기)에 그리스도교 세계를 내외적으로 지배하였다. 그러나 14세기에 프란치스꼬회 신학자들은 토마스의 이성주의 즉 인간에게 있어서 이성이 최고의 기능이라는 견해에 대립하여, 아우구스띠누스의 영향을 받은 스꼬뚜스의 주의주의 신학을 주창하였다.

스꼬뚜스는 토마스와 같이 스콜라학파의 신학자로서 신의 계시가 인간이성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았지만, 신과 인간에 있어서 최고 기능은 지식과 이성이 아니라 사랑과 자유의지이며 따라서 신앙은 계시에 대한 인간 이성의 동의가 아니라 신의 원의에서 나온 계시의 권위에 대해 승복하는 데에서 성립된다고 주창하였다. 의지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스꼬뚜스의 견해는 프란치스꼬회 신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스꼬뚜스 학파들은 후에 이성과 신앙을 완전히 불리시켜 놓음으로써 합리주의적 ‘스콜라 사상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신학의 쇠퇴 : 신학적 불확실성 시대의 스콜라 사상의 붕괴는 ‘신학의 쇠퇴’라는 결과를 낳았다. 대학이 필요 이상으로 증설되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뚜라와 같은 출중한 학자들은 14세기부터 출현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당시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진지한 연구정신을 갖추지 못하였고 토론의 기교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은 실존적 학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생활을 외면한 단조롭고 장황하거나 괴기하고 조잡한 말마디의 나열로 격하되었다. 이렇게 신앙 문제를 모호하게 만든 신학체계는 윌리엄 옥캄(1300-1349/50)의 유명론(唯名論)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 여기서 우리가 참된 신학을 교회생활, 특히 그 성사적 생활에서 힘입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이 시대의 신학은 ‘죽은 신학’이었다.

유명론 신학: 프란치스꼬회의 신학 전통 속에서 성장한 윌리암 옥캄은 토마스 사상과 스꼬뚜스 신학에 대립하여 ‘유명론 신학’을 제창하였다. 14세기에 새로운 방법의 등장으로 방법은 그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그런데 옥캄의 신학체계는 근본적으로 비가톨릭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는 토마스 등의 스콜라 신학자들을 반대하여 자연계와 초자연계, 인간이성과 신의 계시 사이의 조화를 부인하고 신과 자연의 내적 연결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 자연을 통해서 신의 존재가 증명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옥캄은 인간 이성과 자연에 대해 회의를 갖는 대신에 계시에 대한 굳은 신뢰를 내세웠다. 유명론 신학이론에 의하면 계시된 ‘성서만’이 신앙의 원천을 이루고, 인간이성은 무력하며 ‘신앙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알게 하고 구원을 성취하여 주며, 인간의 본능은 무능하기 때문에 신의 ‘은총만’이 만물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루터는 유명론 신학자인 가브리엘 비엘(1420-1495)을 통해서 옥캄의 사상을 가톨릭의 유일한 정통신학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옥캄의 제자로 자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루터의 세 가지 유일사상 즉 성서 유일, 신앙 유일, 은총 유일은 옥캄의 신학을 발전시킨 것이다.

 

2, 신비신학

유럽의 14세기는 정치적 동요, 전염병과 농민반란 등의 사회적 불안과 교회의 내분으로 인한 종교적 혼란으로 불안정의 시대였다. 이러한 불행 속에 허덕이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세속적 관심을 제거하고, 영혼이 신과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새로운 창조적 정신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신심을 갈망하는 표현이 교회와 성직자 위주의 사상에 반발하는 경향과 함께 곳곳에서 나타났다. 특히 이러한 반교계적인 정신은 신비주의를 통해  독일(특히 라인강 지역)에서 크게 전파되어 사변적 신비사상이 등장하였고, 이는 후에 네덜란드에서 실천적 신비주의운동을 일으켰다.

독일의 사변적 신비주의 : 독일 신비사상의 창시자로 지적되는 마이스터 엑크하르트(1260-1327)는 비정통적 신학사상을 제창하였다. 그는 당시 도미니꼬 수도회의 유명한 설교가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자로 자처하였지만,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교회의 성사 신학을 비판한 신비주의자였다(이렇게 신앙을 중요시하고 성사를 거부한 점에서 루터의 선구자로 간주되기도 함). 엑크하르트의 신비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신의 존재 속으로 흡수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고 신격화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은 그 시대의 토마스 사상과 성사를 중요시하던 사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엑크하르트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인 요한 타울러(1300-13601)에게 계승, 발전되었다. 타울러 역시 도미니꼬회의 경건한 수도자요 열렬한 설교가였다. 그의 가르침은 성직자와 수도자의 규율생활 ― 인간이 구원을 추구하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 을 할 수 없는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였다. 타울러에 의하면, 구원은 금욕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교인에게 부여되는 (신의) 선물이었다. 그는 신이 인간에게 자유로이 주는 은총을 강조함으로써 성사생활의 의미와 가치를 감소시켰다. 인간이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신의 자유은총에 직접 접촉하였다면, 이제 그에게는 교회와 그 권위가 불필요하거나 적어도 의미가 없게 된다.

이러한 신비사상을 통해 교계와 성사를 거부하려는 정신이 만연된 독일에서는 이미 종교개혁이 싹트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실천적 신비주의 : 네덜란드의 신비주의는 독일의 신비주의와 비슷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실천적 신비주의자들은 ‘새로운 신심’이란 운동을 일으켰고 ‘공동생활의 형제회’라는 신심단체를 이루고 있었다. 새로운 신심은 그리스도중심의 개인의 내적신심을 강조한 신앙부흥 운동이었다.

이 운동 후기의 대표적 인물은 토마스 하메르켄 폰 켐펜(1380-1471)이다. 그의 저서로 알려져있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대하여」(준주성범)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지침서로서, 오늘날까지 성서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위로하고 믿음을 강하게 해주고 있다.

공동 생활의 형제회원들은 속화된 교회를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 개선을 추구하려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의 혁신과 그리스도교인의 종교적 자각을 이룩하는 지름길로 교육을 선택하였다. 후에 공동생활의 형제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받고 배출된 이들이 바로 교회쇄신의 주창자들인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과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루터, 멜랑크톤, 칼빈, 즈윙글리 등)이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

종교개혁시대(Ⅲ)

                                          김 성 태

종교개혁의 원인(3)

교회적 배경

교회의 위기 : 14세기 초부터 15세기 중엽까지 교회는 일련의 불행한 대사건으로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교황권이 약화되는 위기에 처하였고 결국 이것은 종교개혁의 외적 요인이 되었다.

우선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를 들 수 있다. 1305년 보르도의 대주교인 프랑스 출신 고뜨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리옹에서 대관식을 갖고 끌레멘스5세(1305-1314)로 취임하였으나, 프랑스왕 필립 4세와 교회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으로 가는 것을 연기하고 아비뇽에 머무르면서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가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이딸리아 정국의 불안정, 사회적 소요, 로마 시민의 반 교황 봉기 등으로 교황들의 아비뇽 체류는 70년 간 계속되었다 이러한 교황청의 아비뇽 장기 체재에 대하여 경건한 그리스도교인들은 통탄하며 혹평을 가하였고, 시인 단떼, 인문주의자 뻬뜨라르까 등 이딸리아의 지성인들은 아비뇽의 교황들을 프랑스 왕들의 포로라고 하면서 이 사건을 ‘교황의 바빌론 유수(幽囚)’라고 비꼬아 표현했다.

6명의 아비뇽 교화들은 개인적으로는 신심 깊은 성직자들로서 교황청과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특히 독일, 이딸리아)에서는 하나의 프랑스 주교로 과소평가되었고 교황권의 보편성을 상실하였다. 더우기 아비뇽 교황청의 과세(課稅)확장 징수방법은 전유럽에 걸쳐 교회에 대한 원성을 드높게 만들었다. 세금 징수관들은 체납자들에게 성사수여 금령이나 교회 공식전례에의 참석 금지 등의 영신적 처벌을 내렸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1370-1378)가 로마로 돌아옴으로써 아비뇽의 교황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교회는 다시 ‘서구의 대이교(大離敎)’라는 시련을 맞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 11세의 사망(1378) 후에 로마에서 16명의 추기경들(프랑스인 11, 이딸리아인 4, 스페인인 1)은 추기경단의 분열로 인한 선거의 장기화와 프랑스인 교황의 선출을 우려하는 로마 시민들의 무력 위협 속에서 바리의 대주교인 이딸리아 출신 쁘리냐노를 교황으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새 교황 우르바누스 6세(1378-1389)는 전제 군주형의 인물로서 추기경들과 불화를 빚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와 스페인의 추기경들은 교황 선거가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효라고 선언하고, 프랑스 왕의 사촌인 제네바의 대주교 로베르 추기경을 교황 끌레멘스 7세(1378-1394)로 선출하여 아비뇽을 교황의 거주지로 제공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1409년에 이딸리아의 삐사에서 열린 공의회는 당시의 로마 교황인 그레고리우스 12세(1406-1415)와 아비뇽 교황인 베네딕뚜스 13세(1394-1422)를 해임하고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하였으나 새 교황은 1년 만에 사망하여 다시 요한 23세(1410-1419)를 선임하였다. 그러나 다른 두 교황은 삐사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세 교황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서구의 대이교’는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7)의 결정으로 끝났다. 로마의 그레고리우스 12세는 이 공의회에서 정통 교황으로 인정 받은 뒤에 자진 사임하였고(1415) 두 교황은 해임되는 동시에 새 교황으로 마르띠누스 5세(1417-1431)를 선출하였다.

‘서구의 대이교’는 교회 안에 반목과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교황들은 각자 반대파들을 파문하여 서구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대부분 파문 상태에 있게 되었다. 아울러 교황청의 분규 동안 ‘공의회 지상주의’, 즉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 권위는 하느님에게서부터 나왔고, 교회의 모든 문제는 교황이 아니라 공의회가 제기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창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콘스탄스 공의회와 바젤 공의회(1431-1439)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삐우스 2세(1458-1464)는 1460년에 교황칙서를 통해 공의회 운동을 정식으로 금지하였다.

교황청의 아비뇽 체류와 분규는 교회에 대한 비난과 개혁의 외침을 드높였고 결국 지방교회에서 이단을 발생케 하였다. 영국의 신학자 위클리프(1324-1384)는 당시 영국의 반 교황적인 국수주의를 배경으로 아비뇽 교황들의 교회 세금 징수와 교회의 지나친 재산 소유를 비난하는 동시에 로마 교황청의 영국 교회 지배를 반대함으로써 영국의 국가 영웅이 되었다.(그는 후에 ‘종교개혁의 샛별’이라고 불려졌다). 그러나 그가 교리(예컨대 성체성사)를 거부하였을 때에 많은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다.

위클리프의 이단적 사상은 보히미아(지금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그 대학 총장이며 유명한 설교가인 후스(1373-1415)에 의해 널리 전파되었다. 그는 설교 중에 교회의 세속화와 성직자의 비윤리적 생활을 비난하면서 위클리프의 이단 교리와 예정설을 제창하였다. 교회 당국은 설교를 금지하였으나 후스가 불복하므로 파문을 내렸다(1412). 후스는 당시의 공의회 우위설에 힘입어 교황의 파문에 대해 항소하였으나 콘스탄스 공의회는 1414년 그를 다시 이단으로 단죄하여 이듬해에 화형에 처했다. 그러나 후스는 추종자들에 의해 국가 영웅 순교자로 선포되었다. 이제 교황에 대한 반감은 더욱 심화되어 결국 보히미아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후스 전쟁((1419-1436)이 발발하였다.

성직자의 생활상 : 15세기 중엽부터 교회에 대한 비난과 개혁의 외침이 더욱 격렬해지면서 일반화되었다. 개혁과 비난의 주요 대상은 성직자(특히 교황과 교회 성직자)의 부적합한 생활이었다. 니꼴라스 5세(1447-1455)부터 레오 10세(1513-1521)에 이르는 ‘르네상스 교황’들은 그들의 시대적 사명인 교회의 개혁과 이슬람교도에 대적하는 서구의 단합을 완수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들 중의 일부는 교회의 재산과 영토를 사유화하고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가족에게 분배하는 족벌주의 정책을 강행하였다. 그들은 교리적 과오는 범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인문주의자로서 예술적 취미 생활에 열중하거나(이런 점에서 그들은 문화적 공헌을 하였음) 안이한, 더 나아가서는 비도덕적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은 당시의 일반 대중에게 묵인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교황들은 영신적 지도자이기보다는 세속적 군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위 성직자들은 영신지도자 또는 봉건영주(독일의 경우)나 학자, 예술가 등의 지성인으로 처신하였다. 일반적으로 많은 주교들이 그들의 영신적 사명을 망각하였고 어떤 주교들은 신학연구나 사제양성과 연수교육에 무관심하였다. 그리고 부유한 생활을 하던 주교들은 한 교구의 정상적 수입으로는 생활 유지가 불가능하여 여러 성직록을 취득해야 했고 임지 부재의 과오를 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리한 생활은 당시의 주교직이 귀족들의 독점물이었다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유의할 점은 수많은 성직자들이 목자로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들의 경건한 생활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수도원 : 많은 수도자들이 참다운 성소가 있어서가 아니라 부모들의 강권에 의해 입회했기 때문에 수도원도 폐단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떤 수도자들은 교황으로부터 수도허원에 대한 관면을 받고 사치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수도생활 양식과 규칙준수방법에 있어서 수도회 간에 또는 수도원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분열되기도 하였다.

평신도의 신심 : 대중의 신심생활은 매우 활발하였다. 그것은 수많은 성당의 건립, 자선단체의 활동, 신심서의 보급 확대, 새로운 신심의 번창(로사리오 기도, 십자가의 길, 삼종기도, 성지순례 및 성인과 성해 공경, 대사에 대한 열의, 죄의식과 구원에 대한 관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어두운 면도 있었다. 이 시대의 신심은 개인주의적이었다. 전례는 공동체적 성격을 상실하였고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헌(기부금 등)을 과대평가하여 신의 은총이 물질과 밀착되었다. 또한 대중신심의 핵심이 하느님 공경이 아니라 성인(특히 성모 마리아, 성부 안나)과 성해 공경이었고 ‘마녀 망상’등 현세적 두려움을 피하는 신심이었기 때문에 미신적 요소가 첨부되었다.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

 종교개혁시대(Ⅴ)

                                          김  성  태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1)

 

초기 생애

가정과 교육 :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삭소니아(작센) 튜린기아(튀링겐) 지방의 아이즐레벤에서 농민인 한스 루터(당시에는 루데르라 불리었음)와 마르가레테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성 마르티노 축일인 출생 다음날에 세례를 받고 마르틴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루터의 부친은 1484년에 만스펠트의 광산 지역으로 집을 옮겨 소규모의 동광업에 종사하였다. 여기서 루터는 초등교육을 받았고(1489-1495), 이어서 경건한 신앙인들의 단체였던 ‘공동생활의 형제회’가 운영하던 마그데부르그 대성당 부속학교에서 1년(1496-1497)을 보낸 후, 어머니의 고향인 아이제나하의 성 게오르그 성당 소속 라틴어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마쳤다(1498-1501). 루터는 이상의 학교들에서 엄격한 규율 생활을 통해 종교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학교교육은 엄격한 가정교육과 더불어 후에 루터의 신관, 즉 위엄과 분노의 재판관으로서의 신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루터는 1501년에 에르프르트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 시절 노래를 잘 불렀고 특히 류우트(14-17세기에 사용되던 기타와 같은 현악기)를 즐겨 연주했으며 진지한 토론을 좋아하여, 친구들 사이에서 음악가 또는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이 대학에서 당시 새로운 학문사조로 등장한 옥캄의 유명론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1502년 57명의 졸업생 중에서 30등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3년 뒤에는 17명중에서 2등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루터는 부친의 강력한 원의에 따라 1505년 5월 법과대학에 등록하였다. 당시는 법률가는 야심 있는 청년들에게 성직자 다음 가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부친의 희망은 아들의 수도원 입회로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수도회 입회 : 루터는 1505년 7월초(7월 2일로 추측됨) 만스펠트에서 에르프르트로 가던 도중 스토테른하임 근처에서 천둥 번개에 놀라, 마지막 성사도 받지 못하고 죽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 땅바닥에 엎드려 성부(聖婦) 안나에게 도움을 청하며 수도자가 되겠다고 서원하였다. 그가 성부 안나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는 중세기 대중신심의 핵심적 대상은 신이 아니라 성인들이었으며, 안나는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공경의 대상이었고 특히 루터의 부친과 같은 광부들의 주보성인이었다는 사실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루터는 부친의 노여움과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7월 17일 에르프르트에 있던 탁발 수도회인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에 들어갔다.

루터의 수도원 입회에 대한 서원은 순간적인 결심이라기보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준비되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중세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구원과 영생을 갈망하였고, 이러한 평소의 자세가 갑작스러운 죽음의 위험과 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실천에 옮겨졌을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성실한 수도생활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루터의 수도원 입회 결심은 그의 강한 의지와 강렬한 종교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의 후기 반가톨릭적 종교개혁을 염두에 두고 스토테른하임의 수도서원을 단순히 돌발적 사건으로만 간주하여, 그에게는 참된 수도성소가 없었다고 내세우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라고 생각된다. 루터는 청원자로서 2달을 지낸 후 수련생활을 시작하였다. 1506년 9월 수도허원을 하고 정식 수도자가 되었고 다음해 4월 3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수사신부가 되었다.

 

신학 연구 : 루터는 에르프르트 대학에서 1년 동안(1507-1508) 당시의 표준신학교과서였던 베드로 롬바르도의 「신학명제론 4집」을 공부하였다. 1508년에 비텐베르그에 있는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 수도원으로 간 루터는 그곳의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철학을 강의하며 신학연구를 계속하였다. 당시에 그는 성서와 아우구스티노의 저서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유명론 신학을 탐구하였다. 여기서 그는 성서학 학위를 받고 성서 강의 자격을 얻었다. 1509년 루터는 다시 에르프르트 대학으로 가서 롬바르도의 「신학명제론」의 강의 자격을 부여하는 학위를 받고 정식 신학교수로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수도회의 일로 로마 여행(1510-1511)을 다녀온 후 1512년 10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 대학에서 성서학 교수로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강의하였다.

 

종교적 체험

영신적 번회 : 루터는 수도생활 중에 심각한 영신적 갈등을 체험하였다 당시 루터의 최대 관심사는 ‘나의 구원’이었다. 그는 수도생활이 구원을 실현하는 데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여 기도, 극기 등의 엄격한 수도규칙을 준수함으로써 공로 쌓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육욕 ― 성적 욕망, 악의 충동, 동료 수사에 대한 시기, 미움, 노여움의 감정 ― 을 느낄 때마다 마음의 평화를 잃고 고통을 당하였다. 마침내 그는 수도규칙의 엄수와 같은 인간의 노력과 선행으로는 완전한 의화(義化)와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루터는 이제 자기 자신이 살아있는지 조차 분간하지 못하였고 신의 존재를 의심할 정도로 실의에 빠졌다.

 

신학적 고민 : 루터는 이러한 번뇌의 해결책을 성서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의 로마서 1장 17절에 나타난 ‘신의 정의’라는 단어는 그의 고민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는 이 정의를 죄인을 벌하는 신의 엄책으로 보았다. 여기서 루터는 그리스도교인에게 신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믿었다. 이제 그는 정의의 신에게 분노하고 증오하는 독성죄를 범하기에 이르렀다.

 

탑실 체험 : 루터는 자신의 영신적 번뇌와 신학적 고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로마서 1장 17절의 의미를 탐구하였다. 비텐베르그 수도원 탑의 아랫방에서 이 성구를 묵상하며 기도하던 어느 날(1512-1519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추측됨), 마침내 그는 조명 또는 계시의 순간에 신의 정의를 수동적 의미로 발견하였다. 루터는 신의 정의란 신이 인간을 신앙에 의해서 의화시키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선행 없이도 신앙만으로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의화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그는 재생하였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회고하였다.

루터의 탑실 체험은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노의 저서, 독일의 신비주의(요한 타울러), 옥캄의 유명론, 성서의 영향을 받아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체험은 신과의 직접적 접촉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러한 신과의 실제적 만남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신의 개입의 결과를 나타내는 회심(回心)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의 이러한 체험은 다른 이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며, 그 근본은 가톨릭적 의미를 갖고 있다.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

 종교개혁시대(Ⅵ)

                                          김  성  태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2)

대사 논쟁

성 베드로 대사 :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전임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가 로마에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전 건립 모금을 위해 1507년에 반포한 전대사를 다시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 모금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지방교회에서는 대사설교가 필요하였다. 독일의 일부지방에서도 대사위원회가 설립되면서 대사설교가들이 임명되고 이들을 위한 설교지침서가 발표되었다. 이 지침서는 대사에 대한 교리는 약술되어있는 반면에 실제상으로 대사를 과찬하여 상품화함으로써, 일반 대중이 그 본래의 의미와 가치는 망각하고 남용하도록 오도하였다. 그런데 루터가 거주하고 있던 비텐베르그에서는 영주인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대사설교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텐베르그의 주민들은 이웃 지방에 활동하던 당시의 설교위원인 요한 테첼(1465-1519)의 설교를 듣고 이른바 대사부(大赦符)를 얻어오는 소란을 피웠다. 루터는 이러한 광적인 행위에 충격을 받았다.

루터의 ‘95개 조목의 명제’: 루터는 대사 남용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서 일련의 명제(이때에는 번호가 명시되지 않았음)를 작성하였다. 이 항의서는 신학교수들이 논의할 수 있는 가설적 신학 논점으로서, 루터는 여기서 대사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고 성서와 신학에 입각하여 대사의 올바른 의미와 실천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당시의 관습대로 이 항의서를 1517년 10월 31일 그의 대주교에게 발송하였고 이틀 후에는 동료 교수들에게 보냈다. 나중에는 라이프찌히, 뉴른베르그, 바젤의 출판업자들이 루터의 허가없이 출판함으로써 1518년에 들어서면서 이 항의서가 문제화되었고 루터는 전독일에서 유명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첨부해야 할 것이 있다. 과거의 전통에 따라 루터가 그의 ‘95개 조목의 명제’를 비텐베르그 성당 문에 붙여 게시했다는 사실이 최근까지 보편적인 견해로 인정되어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축하기념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1961년에 이르러 학문적 역사방법을 통해서 나온 결론은, 루터가 성당 문에 ‘대사에 대한 명제를 게시했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잘못 전해진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터에 대한 반박 : 루터의 명제는 독일 전역 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청에까지 전해졌다. 이 명제는 독일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루터는 국가 영웅이 되었으나 신학자들에게는 공격을 받았다. 특히 도미니꼬 수도회의 신학자들 즉 요한 테첼, 요한 엑크, 실베스떼르 쁘리에라스 등은 일련의 반박 명제를 내놓음으로써 루터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하이델베르그 소환 : 교황 레오 10세는 이 대사 논쟁을 독일의 성 아우구스띠누스 은수사회와 성 도미니꼬 수도회 간의 문제로 간주하여, 루터가 속한 수도회의 장상인 요한 스타우피츠에게 분쟁을 해결하도록 조처를 취하였다. 그래서 이 독일의 성 아우구스띠누스회 총대리는 루터에게 그의 잘못된 교리를 취소할 것을 권하였고 1518년 4월 그를 수도회의 하이델베르그 참사회에 소환하였다. 여기서 루터는 그의 유명한 ‘십자가의 신학’(성서에 나타난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스콜라학파의 '영광의 신학'에 반대하면서 그리스도교인은 고통과 유혹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해야 한다는 견해)을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공개토론을 했다. 비록 그는 반대자들은 납득시키지는 못했지만, 많은 학생들을 자기 편으로 이끄는 데에 성공하였다.

까예따노의 심문 : 로마에서 루터에 대한 이단 재판이 열려 루터에게 60일 이내에 자기 변호를 위해 로마 교회 법정에 출두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중재로 로마에 가지 않고 1518년 10월 아우구스부르그 국회에서 교황특사인 까예따노(1469-1534)추기경의 심문에 응하게 되었다. 세 차례에 걸친 대면에서 루터는 교회에 반대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밝히면서 그의 주장을 설명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교황특사는 자기는 토론이 아니라 심문을 위해서 왔음을 강조하고 루터에게 몇 가지 조목의 명제를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루터는 그의 주장이 성서에 의해서 잘못되었다고 증명되지 않는 한 취소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제 루터는 체포, 구금이 두려워 아우구스부르그에서 피신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공의회의 청원」이란 저서를 출간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문제시하기 시작하였다.

 1518년 11월 9일, 교황의 교서가 반포되어 루터에게 교회의 대사에 대한 가르침의 권위에 항의하지 않도록 명하였다. 까예따노 추기경은 프리드리히 선제후에게 루터를 교회에 인도하거나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거절당하였다. 왜냐하면 루터는 아직 이단자로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교황청은 다른 방법을 모색하였다. 즉 1519년 1월 로마 교황청의 공증인인 작센의 귀족 밀타쯔가 교황특사로 프리드리히에게 파견되었다. 그는 선제후에게 비텐베르그 성당에 대사를 부여하고 ‘황금 장미’훈장을 수여하는 대신에 루터를 교회 법정에 인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도 실패하였다. 이후 교황 레오 10세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이상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의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519년 1월 12일에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막씨밀리안 1세가 사망한 후의 새 황제의 선출 문제였다.

라이프찌히 토론 : 작센의 게오르그 공의 주선으로 1519년 6월 27일에 라이프찌히에서 요한 엑크와 루터 측과 토론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엑크와 루터의 제자인 카알시타트 사이에 토론이 있었고 나중에 루터가 개입하여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에 대해서까지 토론을 벌였다. 루터는 교황권의 신수설(神授說)과 공의회의 무류성을 거부하였고 이에 대해 엑크는 그를 외교인으로 판정하였다. 이제 루터는 교회에서 이탈한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루터의 단죄와 파문 : 1519년 말에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알 5세로 선출되었다. 따라서 교황은 다시 루터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로마에서 루터에 대한 재판이 속개되었다. 1520년 2월 루터의 교리에 대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6월 15일에는 교황의 교서가 반포되어 루터의 이름은 명기하지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이단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안에서 살고 있는 열심한 신도들에게 악한 표양이 된다고 단죄하였다. 그리고 41개 조항의 이단적 명제를 열거하여 이러한 내용의 저서는 소각하고 그 저자들은 60일이내에 취소하지 않으면 파문에 처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이에 불복하여 개혁서라고 밀컬어지는 세 권의 소책자, 「독일 국가의 그리스도교 귀족들에게 고함」「교회의 바빌론 유수생활」 「그리스도교인의 자유」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12월 10일 비텐베르그의 엘스터 성문에서 교황의 교서를 교회 법전과 신학서적(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제외)들과 함께 불태웠다. 결국 루터는 1521년 1월 3일에 공포된 교황의 교서에 의해 정식으로 파문을 받았다.(가톨릭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

 종교개혁시대(Ⅶ)

                                          김  성  태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3)

 

루터의 개혁운동

보름스 국회 :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권을 두고 프랑스의 왕 프랑소와 1세와 치열한 선거전 끝에 황제로 선출되어(1519년 6월 28일) 카알 5세로 즉위하였다. 이 황제 선거에서 교황 레오 10세는 카알을 반대하였다. 따라서 독일에서는 많은 이들이 새 황제의 반교황 정책을 기대하면서 열렬히 환영하였다. 루터도 황제에게 격렬한 격문을 보내어 교황청에 대한 불만과 증오심을 선동하였다.

그러나 카알은 중세기적 전통에 의한 황제의 사명을 고수하여 교회와 서구 그리스도교의 옹호자로 자처하였다. 루터가 자신의 주관적 체험에 이끌려 새로운 신앙을 강조한 반면, 카알은 교황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보다는 전통적인 신앙과 교회의 일치를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황제는 루터 문제에 있어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루터의 저서를 소각하는 데에 참석하였고, 루터가 교회의 공식 파문을 받자 그를 국외로 추방할 것을 승낙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간청으로 우선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 문제를 조사할 것을 허락했다. 루터는 1521년 4월 16일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보름스에 도착했다. 그는 다음날 국회에 출두하여 자신의 저서들을 변호했고,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취소할 것인지에 대한 최후통첩을 받고 생각할 시간을 요청하였다. 루터는 4월 18일 국회에 다시 등장하여 그의 주장이 성서에 입각하여 오류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자신의 양심을 거슬러서까지 취소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루터의 변론은 국회의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다음날 황제도 자신이 작성한 연설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선조들이 로마 교회의 충실한 후예였으며 가톨릭 신앙과 관례, 교령과 경신례의 수호자들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선조들이 남긴 이러한 유산을 성실하게 수행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동시에 카알은 루터의 오류에 대해 아직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않은 것은 유감으로 생각한다면서 국회의원들에게 이제 루터를 이단자로 공인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이로써 독일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루터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이 천명되었다. 황제는 5월 8일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한 칙령에 서명하여 5월 25일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많은 의원들이 귀가했고 황제는 전쟁으로 인하여 독일을 떠나야 했기 대문에 추방령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루터의 바르트부르그 생활 : 루터는 1521년 4월 26일 보름스를 떠나 바라트부르그로 호송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이 독일서 성서는 1522년에 출판되었음). 이 성서는 독일 민족의 언어, 생활, 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불멸의 작품이었다. 그 외에 루터는 미사성제, 성직자의 독신생활, 수도허원을 지나친 표현을 통해서 비난하는 소책자들을 출판하였다. 루터의 과격한 설교와 저서들은 독일을 혼란 속에 빠뜨렸다. 1521년부터 성직자들은 성직을 포기하고 수도자들은 수도원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1521년 12월에 비테베르그에 미사를 봉헌하려는 신부들에 대한 폭행 사건과 성당의 성화상 파괴 행위가 발생하였다.

 

루터의 후기 생활

농민반란 : 이 사건은 당시의 정치적 압박과 불의에 대한 반발의 결과로서, 교회사보다는 세계사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것은 루터의 혁명적인 저서에 자극을 받은 농민들이 1524년 관청과 교회에 공격을 감행한 사건이다. 농민 지도자들은 루터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요구 사항을 루터에게 제시하였다(1525년 3월 6일). 루터는 1525년 4월 농민들에게 평화와 인내를 호소하고 군주들에게는 양심에 입각하여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방화와 살육이 전해지자 과격한 행동을 싫어하고 권위를 존중하던 루터는 농민들을 비난하는 입장에서 「강도적이며 살인적인 농민 도당을 거슬러」라는 저서를 써내었다. 여기서 그는 사회의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무력 진압을 요구하였다.

결국 루터는 종교개혁에 무력 사용을 호소한 셈이 되었고 따라서 그는 이제 더이상 독일 국가영웅의 이미지를 상실하였다. 이러한 인기 하락은 그의 결혼으로 가속화되었다. 루터는 42세 때에 씨토 수녀회에서 환속한 16세 연하의 가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1525년 6월 13일). 이 행동은 그의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에게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의 종교문제 해결 모색 : 이제 교회 사건은 정치문제화하여 국회에서 다루게 되었다. 제1차 시파이어 국회는 교회 문제에 대한 조정을 군주들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하여(1526년) 일부 군주들은 자기의 지방을 신교 지방으로 개혁하였다. 그러나 1527년 보름스 국회의 칙령을 수행할 것을 결의하자 신교 국회의원들은 처음으로 공식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하였고(여기서 ‘저항자’라는 의미에서 ‘프로테스탄트’란 용어가 나왔음) 비밀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동안 전쟁으로 독일을 떠나있던 카알 5세가 9년 만에 다시 돌아와 교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1530년 아욱스부르그 국회를 개최하였다. 황제는 평화적 방법으로 신구교의 종교적 대립을 해소하고 교회개혁을 논의하도록 하였다. 우선 루터의 친구인 멜란히톤이 신조문을 작성하여 1530년 6월 25일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 「아욱스부르그 신조문」에는 신구교의 교리적 구별은 없었고 전체적으로 가톨릭적이었으며, 다만 교회 규율 면에 있어서 혁신 요구사항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이와 같은 화해적 태도는 재합일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황제는 신구교의 협상위원회를 구성했고 양측 위원들은 최대한의 절충과 최소한 요구의 양보 자세로 임하였다. 그러나 통합의 시도는 루터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는 추종자들과의 서신 연락으로 국회에 영향을 미쳤고, 멜란히톤의 양보에 대해 엄중히 힐책했으며 작센의 군주 프리드리히에게 어떠한 담판도 거부한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결국 수많은 회담과 충돌을 거쳐 루터가 죽은(1546년 2월 18일) 후 1555년에 아욱수부르그 국회에서 일차종교협정이 이루어졌다. 이에 의하면, 백성들은 자기 영주의 종교를 따르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복잡한 협의가 있었으나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종교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30년 전쟁’(1618-1648)이 발발하였고 독일은 초토화되었다. 마침내 1648년의 베스트팔리아 평화회담에서 종교분쟁은 최종적으로 일단락되었다. 이제 어디에서나 신구교가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1570년에 이르러 독일의 2/3가 루터파로 개종했고 기타 일부 유럽 지역에도 루터파가 전파되었으나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지방은 전부 루터파로 전향하였다.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은 쯔빈글리(1484-1531)와 칼빈(1509-1564)에 의해서도 이루어졌고 영국에서는 성공회가 창설되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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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시대(Ⅷ)

                                          김  성  태

교회 쇄신의 움직임

교회 개혁의 시도 : 교회 쇄신은 이미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7)와 바젤 공의회(1431-1491)에서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수많은 장애, 특히 각 국가와 단체들의 상반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5개의 개혁 교령들이 선포되었으나 실천되지는 못하였다.

대부분의 르네쌍스 교황들도 교회 혁신에 대한 계획을 제시하였다. 교황 비오 2세(1458-1464)는 두 추기경, 도메니키니와 니콜라스의 전교회 쇄신을 위한 포괄적인 ‘프로그램’을 받고 시행하여 하였으나, 회교도와의 전쟁과 그의 급서로 인하여 개혁 칙서의 초안이 작성되었을 뿐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교황 식스또 4세(1471-1484)와 알렉산델 6세(1492-1503) 치하에서도 교회 혁신의 분위기가 있었다. 알렉산델 6세는 1497년 가정의 불행한 사건으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고 교회 쇄신에 경주하기로 결심하여, 6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자신의 개혁 의지를 알리는 교령을 선포하도록 위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도에 불과하였고 교령은 반포되지 않았다. 또한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는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를 개최하여 소규모의 교회 쇄신을 단해하였고 수도원 개혁을 시도하였다.

마지막 르네쌍스 교황인 레오 10세(1513-1517)도 제5차 라테란 공의회를 속개하여 교회 혁신에 착수하였다. 제8차 회기(1513년 12월 19일)에 까말돌리 수도회의 또마소 쥬스티아니와 빈첸쪼 귀리니는 교황에게 교회 혁신을 위한 계획서를 제출하였다. 이 계획서에는 교회의 잘못과 이에 대한 비판, 그리고 교회법의 개정, 수도원의 재조직, 전례의 통일화, 동방교회와의 재일치 등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공의회는 이 개혁 수사들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직 몇 가지 개혁 교령을 반포하였을 뿐이다. 이와 같이 르네쌍스 교황들의 교회 쇄신 계획은 좌절되거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교황들과 교황청이 이를 시행할 만한 내적 그리고 종교적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 공의회의 준비 : 마르틴 루터는 이미 1518년에 전체 공의회의 개최를 요구하였다. 1521년의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 문제를 공의회에 상정하려는 견해가 거론되었다.       특히 교황 아드리아노 6세(1522-1523)는 독일의 뉘른베르그 국회(1522-1523)에 파견한 교황 사절에게 훈령을 내려 교회의 잘못을 고백하고 교회 쇄신을 약속하였다(「경향잡지」 1981년 10월호 참조). 이에 대해서 독일 군주들은 ‘독일 안에서의 자유로운 그리스도교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요구하였다. 1524년 11월에 독일 군주들은 교황이나 그 특사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 공의회를 개최할 수 없어서 슈파이어에서 ‘독일민족의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카알 5세는 “어떻게 한 국가가 교회 질서의 변경을 감행할 수가 있는가?”하며 공의회의 개최를 금지하였다. 그 대신 황제는 교회 개혁을 위한 전체 공의회의 개최를 교황에게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교황 끌레멘스 7세(1523-1534)는 전체 공의회의 개최를 주저하였다. 그 첫째 이유는, 교황이 콘스탄스 공의회와 바젤 공의회에서 주창되었던 공의회주의, 즉 교황보다 공의회가 우위에 있다는 사상의 망령이 다시 살아날까봐 전체 공의회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실상 독일 국회의원들이 ‘자유로운 그리스도교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했을 때, 그들은 이 공의회가 교황의 간섭도 받지 않고 참석 교부들은 공의회에 앞서 교황에게 선서하지 않도록 했다. 따라서 교황의 우려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둘째 이유는 교황령과 관계되는 문제였다. 선임 교황들과 같이 끌레멘스 7세도 교황령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카알 5세의 신성로마제국이 교회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1526년에 프랑스의 왕 프랑소아 1세와 ‘꼬냑동맹’을 맺고 카알 5세에 대항하였다. 이에 대해 황제는 교황에게 프랑스와의 동맹을 취소하지 않으면 전체 공의회를 열어 새 교황을 선출하겠다고 위협하는 동시에, 자기의 힘을 교황이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 로마 군대를 진군시켰다.

거칠고 상관을 갖지 못한 스페인과 독일의 용병들은 1527년 5월 6일에 로마를 습격하여 1주일 동안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이 사건을 ‘로마의 함락’이라고 부름). 교황은 산 안젤로 성에 피신할 수 있었으나 6월 5일에 항복하고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교황은 1529년 6월에 바르첼로나에서 황제와 화해하였고, 볼로냐에 머물고 있는 동안(1529년 11월-1530년 2월) 다시 황제와 독일 문제에 대해 회담하였다. 이때에 카알 5세는 곧 개최될 아욱스부르그 국회에서 분열된 교회가 평화로운 통합을 이루지 못하면 전체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교황에게 약속 받았다. 결국 국회가 결실도 보지 못한 채 폐회되자 황제는 교황에게 약속 이행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끌레멘스 7세는 이 요구를 거절하였다. 독일인이 공의회와 전세계를 혼란 속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는 불안을 교황이 갖고 있었고, 독일의 프로테스탄트와 공의회를 개최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에 이르러 공의회 개최와 교회의 개혁에 대한 전망이 밝아졌다. 바오로 3세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가톨릭의 교회 쇄신을 신중히 받아들여 실천한 첫 교황이었다. ‘로마의 함락’은 교황에게 교회의 반성과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따라서 우선 개혁이 가장 필요하였던 추기경단의 혁신부터 시작하여 개혁의 선구자들을 추기경으로 선임하였다. 그리고 1536년에는 교회 개혁을 갈구하는 추기경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했고, 여기서 ‘교회 쇄신을 위한 의견서’(이것은 후에 트렌트 공의회의 의안이 됨)가 제출되었다. 그 외에 교황은 새로운 혁신 수도회를 장려 또는 인가하였고 교회 개혁과 동양 선교에 공헌한 예수회도 인가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카알 5세에게 1537년 만뚜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는 공의회 소집을 방해하였다. 그것은 서구 전체에 대한 주도권 장악을 꾀하고 있던 프랑소와 1세가 공의회로 인하여 카알 5세의 지위가 강력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인 그는 같은 가톨릭 신자인 카알 5세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회교도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카알 5세는 이 전쟁(1536-1238)에서 승리하였다. 아울러 하겐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그 국회에서 있었던 신구교의 평화 통합의 회담이 무위로 돌아가자 공의회는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황제의 독촉을 받고 바오로 3세는 1542년 6월 29일에 뜨렌또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프랑소와 1세가 다시 카알 5세에게 선전포고하여 공의회의 개최는 연기되었다. 또 한번 전쟁(1542-1544)에서 승리를 거둔 황제는 끄레피 평화회담(1544년 9월 19일)에서 프랑소와 1세에게 다시는 공의회를 방해하지 않도록 다짐을 받았다. 따라서 교황은 1545년 3월 15일에 트렌트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 공의회는 12월에 가서야 개최되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

 종교개혁시대(Ⅸ)

                                          김  성  태

트렌트 공의회

공의회의 의제 채택 문제 : 트렌트 공의회(1545-1563)개최 전에 황제 카알 5세와 교황 바오로 3세는 공의회의 원칙적인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쟁점은 공의회의 중요한 의제에 대한 것이었다. 황제의 관심사는 독일의 종교적 분열에서 일어난 정치 및 사회적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한 교회 규율에 대한 쇄신과 가톨릭과 개신교의 재일치였다. 그러나 교황은 신앙 문제의 해결을 중심 과제로 보았다.

이제까지 교회의 교리는 확실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통교회의 입장에서 이단인 루터의 새로운 신학을 낳게 되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가 주창하는 성서유일사상, 신앙에 의한 구원, 성사에 대한 배격과 새로운 교회관 등의 교리에 대응하여 신조 문제 전반에 걸쳐 재정비할 필요를 느꼈다. 결국 황제와 교황은 1546년 1월 22일 교회 쇄신의 핵심이 되는 규율 문제와 신조 문제를 함께 다루기로 합의하였다.

트렌트 공의회는 전체적으로 보아 교회 내의 반성이며 가톨릭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개신교인은 이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독일 국회의 종교 회담이나 신학자들의 토의가 아니었고, 다만 종교 개혁가들의 신학적 주장을 검토하고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정통 교리를 재확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독일 주교들이 소수만 교회에 참석하였을 뿐이고 로마교회 계통의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당시 종교개혁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과오로 지적하고 있다. 사실 독일의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1555년 가을에 이르러서야 참석하기 시작했다.

공의회의 진행과정 : 공의회 세 시기, 즉 제1기(1545-1547), 제2기(1551-1552), 제3기(1562-1563)로 구분된다. 이 기간 동안 다룬 안건은 너무 많지만 여기서는 간단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제1기는 교황 바오로 3세 시대에 속하여 8차에 걸친 회합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신앙의 2대 원천인 성서와 성전의 교리(4회기), 원죄론(5회기), 의화 문제(6회기), 성사일반론(7회기)을 취급하였다. 이상의 교리 문제는 종교개혁의 핵심이 되는 것으로 가톨릭 교회가 이에 대한 공식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제2기는 교황 율리오 3세 시대에 속한다. 이 동안 성체성사(13회기), 고해성사와 병자성사(14회기)에 대한 정의가 선포되었다. 그리고 1552년 1월에는 황제의 주선으로 개신교의 대표들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이들은 개신교 신학자들이 도착할 때까지 신앙에 대한 칙령을 공표하지 말고 이미 결의된 신앙에 대한 조항을 취소하고 다시 논의하자고 요구하면서 공의회 우위 사상을 내세웠다. 그러나 개신교 측의 교황의 공의회 주재에 대한 거부를 가톨릭 교회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기에 1552년 4월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이 공의회를 방해하는 폭동이 일어나 더 이상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의 대화는 있을 수 없었다.

제3기는 교황 바오로 4세 재위 기간에 개최되었다. 이때에 공의회는 양형(성체와 성혈)영성체(21회기), 미사성제(22회기), 신품성사(23회기), 혼인성사(24회기), 연옥, 대사, 성인 및 성화상에 대한 공경(25회기)등의 교리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마지막으로 바오로 4세는 1564년 1월 26일에 모든 칙서와 쇄신령에 서명하였다. 이제 교황과 주교, 전체 가톨릭 교회가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공의회의 결과 :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는 쇄신의 시대에 들어섰다. 그러나 교황청, 지방교회, 수도원 등 모든 곳에서 착수된 교회개혁은 고질화 된 옛 폐단에 대한 힘겨운 투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시대에 가톨릭 교회의 각계 각층에서 수많은 성인들이 출현하여 우리는 이 시기를 ‘성자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들은 교회 쇄신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시대적 인물들이었다.

3백년 만에 처음으로 성자 교황이 등장하였다. 성인 비오 5세(1566-1572)로서 도미니꼬회 수도자였다. 그는 교황이 된 후에도 고신극기로 거룩한 생활을 하였고 기도 중에 하느님과의 일치를 열렬한 개혁 정신으로 승화시켰다. 교황은 그의 가장 중대한 시대적 사명이 교회의 내적 혁신이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우선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탁월한 인물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했고, 선교와 신앙의 보존을 위한 성성과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의 교회 개혁 상담을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하였다. 또한 그는 성직자들을 위해서 교리문답서, 성무일도서, 미사경본을 새로 발간했다.

지방교회에서도 수많은 훌륭한 주교들이 교회 쇄신에 헌신하였다. 예컨대 밀라노의 대주교 보로메오 성인은 트렌트 공의회의 개혁 정신을 수행한 전형적 사목자였다. 그는 1582년 교회 혁신을 내용으로 「밀라노 교회의 칙서」를 발간하여 밀라노 교구뿐 아니라 다른 교구의 쇄신 사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도원은 가장 근본적인 내적생활의 혁신을 단행하였다. 까르투시아회는 1581년 수도교칙을 개정, 쇄신하였다.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분파인 까푸친회는 창설자인 프란치스꼬 성인의 엄격한 규율과 가난을 강조하는 규칙을 채택했고 교회의 쇄신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1562년 초기 가르멜회의 엄격한 수도규칙 생활을 강조했다. ‘데레사의 개혁’은 점차로 가르멜 수도회 전체에 퍼졌다. 이 성녀는 가톨릭 수도회 전체에 퍼졌다. 이 성녀는 가톨릭 교회의 신비주의와 극기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고 관상생활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명한 베네딕또 수도 규칙을 엄수하는 트라피스트 수도회도 이때(1622년)에 창설되었다.

아울러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도 설립되었다. 우선 자선활동과 일반대중의 심신 강화를 목적으로 모인 성직자와 평신도의 친목단체에서 출발한 ‘재속성직수도회’(테아틴회, 성바오로회, 소마스키회, 예수회)가 등장하였다. 이는 16세기에만 있었던 현상으로서 회원들이 수도허원을 하고 규칙적 공동생활을 하면서 사목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575년 이딸이아에서는 필립 네리를 중심으로 재속성직자들이 수도허원은 하지 않고 공동생활과 사목활동을 하는 오라또리오회가 창설되었다.

1611년에 설립된 프랑스의 예수 그리스도의 오라또리오회는 성직자들의 성화와 교육을 사명으로 했다. 이들은 후에 슐피스회를 설립하여 신학생 교육에 전념했고 그 교육 방법은 20세기 초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사회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많은 수도회도 이때에 창설되었다. 이 수도회를(우르술라회, 가밀로회, 마리아 방문회, 자비의 자매회, 천주의 요한 의료 봉사회)은 병자 간호, 임종자 보호, 가난한 이에 대한 보살핌, 교육 등에 봉사하였다.

이와 같이 수많은 성인들의 배출, 수도회의 설립, 자선사업이나 교육사업의 번창은 트렌트 공의회 이후에 쇄신된 가톨릭 교회의 참다운 그리스도교 정신을 증명해 주었다.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교회사(敎會史)?

 

과도기의 가톨릭 교회

(Ⅰ)

김  성  태

가톨릭 대학 교수·신부

세계 선교의 새 시대

세계 탐험과 식민지 건설 : 중세기에 있어서 교회의 주요 임무는 고대 희랍-문화와 그리스도교를 파괴하던 게르만 민족을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7세기에 이르러 마호메트(약 570-632)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후 이 이교도들의 침입으로 그리스도교 세계는 지역적으로나 숫자적으로 감소되었고, 유럽과 동양 사이의 통로가 폐쇄되어 이제 그리스도교는 거의 완전히 ‘유럽의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유럽에서 제해권을 장악하고 세계 탐험에 나서면서 교회는 세계 선교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유럽인들은 동양(특히 인도)과 통상 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이슬람 제국 때문에 육로를 통한 무역이 불가능하여 동양 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포르투갈 항해사인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함으로써(1498) 인도 항로를 개통하였고, 카브랄은 브라질을 발견하여(1500)포르투갈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마젤란은  세계일주 여행(1519-1522)을 하였다. 1542년에는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에까지 이르렀고, 1557년에 포르투갈은 중국 마카오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이곳은 극동 무역과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스페인의 카스틸랴 왕국도 이딸리아 제노바 출신의 콜룸부스로 하여금 서항로를 통해서 인도로 출범케 하였다. 콜룸부스는 4차례에 걸친 항해를 통해서 중남미의 여러 섬과 지방을 발견하였다. 그외에 많은 스페인 항해사와 탐험가들이 프에르토 리코, 쿠바, 파나마,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를 발견, 정복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국가 후원의 선교

지리상의 신발견과 식민지의 건설은 유럽인들이 동양과 직접 통상하려는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인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 복음의 세계 전파에 나섰다.

교황 니콜라오 5세(1447-1455)는 1454년에 칙서를 통해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탐험권과 점유권을 승인하였고, 교황 갈리스도 3세(1455-1458)는 ‘그리스도회’를 설립하여 그 책임자인 포르투갈의 왕이나 왕족에게 식민지에 성당을 건설하고 선교사들의 생계유지와 신변안전을 보장할 의무를 요구하는 대신에 교회 감독권과 주교 임명권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교황청의 조치는 ‘국가의 교회 후원’(파드로아도 Padroado)이라고 불린다. 이 제도에 의하면, 포르투갈 왕이 식민지의 선교 지방에 파견할 주교 후보를 추천, 임명하면 교회는 나중에 형식적으로 승인하고 주교로 성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콜룸부스가 제1차 탐험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스페인의 카스틸랴 왕가는 스페인 출신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에게 포르투갈의 왕이 소유한 모든 권리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은 특권과 의무를 부여하는 동등한 조치(파트로나토 Patronato)를 취하였다. 그리고 1년 후에는 두 탐험 세력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해 양국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지도상에서 남북으로 선을 그어 대서양의 서부 지역(아메리카)은 스페인에게, 동부 지역(아프리카, 아시아)은 포르투갈에게 무역 독점권과 선교의 의무를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교회 선교 후원 제도는 교회가 처음에 의도한 대로의 선교 수단이기 보다는 군사적 정복을 정당화시켜 주는 동기와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정복자들은 강제로 원주민들의 종교를 근절시키고 가톨릭 교회로 개종시키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따라서 토착민들에게의 선교 활동을 가톨릭 점령군의 사업으로 보았고 선교사를 식민 정치의 협조자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의 선교는 강력한 식민지 정책이 확립되고 원주민의 토착종교가 저항하지 않는 곳(중남미 지역)에서만 성공할 수 있었고 고대 문명국가인 인도, 일본, 중국에서는 어려움을 당하였다. 또한 선교 방법에 있어서도 선교의 중심세력이었던 두 수도회, 즉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의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신앙의 토착화에 무관심하였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요소가 확립될 수 있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가 파괴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고수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식민지의 토착문화를 무시하고 원주민들에게 유럽의 가톨릭 신앙을 그대로 주입시키고자 하였다.

새로운 선교 정책 : 식민지 정책과 유럽 중심의 선교 방법은 예수회의 등장(1535)으로 도전을 받았다. 동양, 특히 인도, 일본, 중국은 예수회의 선교 활동 지역이었다. 프란치스꼬 드 사비에르(1506-1552)와 알렉산드리 발리냐노(1537-1606)가 일본에서, 마테오 릿치(1552-1610)가 중국에서, 로베르 드 노빌리(1557-1656)가 인도에서 새로운 선교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고 토착민과 의식주를 함께 하였다. 또한 이들은 원주민들이 신앙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우선 그들의 언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한편 교회 당국은 국가의 교회 후원 체제에서 벗어나 선교 업무를 직접 관장하기 위해 1622년 포교성성을 설립하여 새로운 선교 지침을 수립하였다. 포교성성은 수도회의 선교사들과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재속신부들도 선교활동에 참여하도록 권장하였다. 그 결과로 1658년에 “빠리 외방전교회’(한국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선교단체)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선교 지방의 교회가 ‘유럽의 교회’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1627년에 우르바노 신학교가 설립되어 이방인 사제가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포교성성은 지방교회가 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하기 위해서 주교좌를 증설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국가의 교회 후원 체제와 마찰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법적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편법으로 ‘교황대리 감목 제도’가 신설되었다. 이 교황대리 감목은 주교가 아니라 명예주교의 직책을 갖고 교황의 대리자로서 주교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58년부터 포교성성은 이 주교들을 파견하였으나 국가의 교회 후원 제도에 의해 임명된 기존 주교들은 포교성성의 선교사들을 배척하였다. 이 불행한 사태는 1853년에 교황청과 포르투갈이 협상, 합의함으로써 제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사들의 충돌은 후에 선교 방법에 있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인도에서 예수회원 노빌리가 개종한 신자들에게 미신이 아닌 이상 토착 신앙과 전례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순응 방법에 대해 다른 선교사들이 논쟁을 불러 일으켜 결국 1704년에 교황 끌레멘스 11세(1700-1721)가 예수회의 토착화의 방법을 단죄하였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조상제사문제로 마테오 릿치가 시행한 순응 방법이 1715년에 금지되었다. 교회의 조상제사 금령은 1742년에 교황 베네딕또 14세(1740-1758)의 칙서로 재확인되어 1939년에 이르러서야 해재되었다. 이 금령은 교회 박해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교회의 선교 정책에 있어서 교세 확장의 장애물이었다고 오늘날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회사(敎會史)?

 

과도기의 가톨릭 교회

(Ⅱ)

김  성  태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트렌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는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시대를 맞이하였다. 교황과 로마 성청은 교회의 쇄신 작업에 임하면서 각 지방 교회와 교구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의 관할권은 이미 교황 식스또 5세(1585-1595)에 의해 설립된 15개의 추기경단과 각 국가에 창설된 교황 대사관을 통해서 내외적으로 증대하였다. 이 추기경단은 특수한 관리 업무를 행사하였고, 교황 사절들은 교황청의 직속 관리로서 전권을 위임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교황청의 중앙집권 체제는 교회 쇄신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필요하였지만, 교회 쇄신이 정착화된 후에는 도전을 받게 되었다. 각 국가의 군주들과 지방 주교들은 중앙집권의 정책을 지나친 간섭으로 느끼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각 국가에서 일기 시작한 국가지상주의(국수주의)와 이에 따른 국교회사상은 17-18세기에 특히 프랑스(갈리아주의), 독일(페브로니오사상), 오스트리아(요셉주의)에서 교회를 괴롭혔던 반가톨릭 운동을 일으켰다.

 

국가지상주의-국교회사상

 

갈리아주의 : 이는 프랑스의 왕권, 프랑스 교회의 교권, 프랑스 국회의 권리, 교황권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면서, 프랑스의 교회는 로마 교황권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창한 사상이며 반가톨릭 운동이었다.

삐에르 삐투(1539-1596)는 그의 저서, 「갈리아(프랑스)교회의 자유」(여기서 ‘갈리아주의’<갈리까니즘>란 명칭이 유래됨)에서 프랑스 왕의 교회 권한을 주장하였다. 즉 프랑스 왕은 국가 차원의 공의회를 개최하고, 프랑스 주재 교황 사절의 관할권을 제한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으며, 교황을 걸어 전체 공의회에 기소하고, 교황 칙서의 타당성과 그 실천에 대한 결정권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프랑스의 정치가인 아르망 장 뤼 쁠레시 리쉘리외  (1585-1642)와 추기경인 쥘레 마자렝  (1602-1661) 등이 받아들여 프랑스는 이교의 위기에 도달하였다. 더우기 태양 왕 루이 14세(1661-1715)의 절대 군주주의 영향으로 국교회사상은 절정에 달하였다.

프랑스 국회는 1663년에 소르본느 대학 당국에 공의회 우위 사상을 승인하고 교황의 교리에 대한 무류성을 부인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1682년 3월 19일, 프랑스 성직자의 집회에서 ‘갈리아 교회의 4개 항목’이 선언되었다. 이 선언문은 보수에 주교가 루이 14세가 원하는 왕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프랑스 교회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이탈하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초안하였다.

그 내용은 교황권의 약화(교황은 세속사에 대해서 관할권이 없고, 왕은 교권에 예속되지 않음), 공의회 우위 사상(교황은 영신적 권한을 갖고 있으나 전체 공의회에 예속됨), 프랑스 교회의 자율건(교황권은 프랑스의 국가 헌법과 교회법에 의해 실행됨),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거부(교황은 신앙 문제에 있어 첫째 결정권을 지니고 있으나 그 결정은 개정될 수 있음)등이다. 이것은 1690년에 교황 알렉산델 8세(1689-1691)의 항의를 받게 되었고 결국 루이 14세는 1693년에 취소하였지만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페브로니오사상 : 독일에서도 주교들이 그들의 자주권을 주장하였다. 이 사상의 주요 교리는 트리어의 주교인 요한 니꼴라우스 폰 혼타임(1701-1790)의 저서인 「교회의 상태와 로마 교황이 합법적 권한에 관하여」(1673)에서 나타나고 있다.

혼테임은 ‘유스띠노 페브로니오’라는 익명으로 이 저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페브로니오사상’(페브로니아니즘)이란 명칭이 나왔다. 이 사상에 의하면 천국의 열쇠는 교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교회, 즉 주교들로 구성된 전체 공의회에 부여된 것이며, 주교들은 그 임무를 교황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신에게서 받았다. 로마의 교황은 다만 보편적 교회의 일치를 이루고, 교회법을 보존하기 위해서 존재하며 주교들은 교황이 갖고 있는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페브로니오사상은 국왕의 수위권을 옹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갈리아주의와는 다르다. 1786년 독일이 대주교들이 피스토이아 종교회의와 엠스 집회에서 페브로니오의 원칙을 받아들여 뮌휀의 교황 대사관 설립에 대처하였다. 이들은 교황 사절의 교황 전권 대리자 위치를 반대하였다. 교황 끌레멘스 13세(1753-1769)는 페브로니오의 사상을 단죄하였다.

요셉주의 : 국교회사상은 가톨릭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 크게 성공하였다. 황제 요셉 2세(1780-1790)는 국가지상주의 이념(요셉주의)에 의해서 1781년에 교회 개혁을 단행하면서 교회에 대한 권한을 요구하고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몰수하였다. 황제는 종교적 관용법을 공포하여 가톨릭의 유일종교 사상과 그 실천에 종지부를 찍고, 개신교와 유대교의 신앙의 자유를 허가하면서 모든 종교는 국가에 예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주교들은 국가에 충성 선서를 이행할 의무가 있고, 신부들은 국가의 공무원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 왕가와 교황청의 국교 관계는 1850년까지 단절되었다.

 

이단 운동 ―‘얀세니즘’의 발생

벨지움 이프레스의 주교인 오또코르넬리오 얀센(1585-1638)이 그의 저서「아우구스띠노)(1640, 사후출판)에서 여러 신학이 혼합된 이단을 내세웠다. 이 사상은 외적으로는 경건심과 엄격주의를 제창하면서 내면적으로는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원죄설과 은총론을 편견적 과장으로 내세우고, 여기에 칼빈의 신학을 첨부하였다. 얀센의 사상은 쌩 끼장(쟝 뒤베르기에 드 오란느 : 1581-1643)을 통해서 프랑스에 전파되었으며, 경건한 수도생활로 덕망을 떨치고 있던 뽀르 로아얄 수녀원이 중심지가 되었다. 이 수녀원을 중심으로 많은 신학자들과 평신도들이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이 프랑스 얀센파들은 ‘끼랑파’라고 일컬어졌음). 이들 중에는 「빵세」로 유명한 블레즈 빠스칼(1623-1662)도 있었다.

얀센파들은 예수회원들의 해이한 윤리 신학을 비난하고, 엄격한 교회 규율의 준수와 성사 배령을 주장하고 특히 엄격한 공심제를 강조함으로써 일반 신자들의 영성체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들은 로마 교황청과 오랜 동안의 논쟁으로 가톨릭 교회와 대립하고 있다가 교황 인노첸스 10세(1644-1655)와 끌레멘스 11세(1700-1721)에 의해서 단죄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정치적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루이 14세에 의해서 프랑스로부터 추방되었고 뽀르 로아얄 수녀원은 폐쇄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는 얀센파들이 존속하게 되었고 1723년에는 우트레트 주교좌를 설립하여 교계제도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를 떠나는 고() 가톨릭 교회가 되었으며, 교계가 독일에서 설정되는 데에 이바지하게 된다. 

 

교회사(敎會史) ?

 

과도기의 가톨릭 교회

(Ⅲ)

김 성 태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계몽사상

 

계몽사상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프랑스를 거쳐 독일에서 발전한 사조로서 18세기 유럽의 정신문화를 특징짓는 지성운동이다. 이 운동은 서양 정신사에 나타난 마지막 사상으로서 지적 문제에 있어서 모든 지식과 진리를 인간의 이성, 직접적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만 얻어진다고 주장하는 경험론적 합리주의의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사회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기존의 권위, 전통, 제도, 관습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배격하면서 관용의 인도적 이상, 정의사회 구현, 인간의 윤리와 복지의 향상에 이바지하는 데에 학문적 방법을 사용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은 서양에서 중세기적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묶여있는 인간을 해방시킴으로써 현대적 발전을 가능케 한 사상가들이었다.

계몽사상은 중세기의 비인도적인 종교재판과 고문의 철폐, 종교 차별의 폐지뿐 아니라 인권 투쟁의 승리를 갖고 왔다. 이것은 1776년에 있었던 미국이 독립선언과 1789년에 프랑스 국회에서 공포한 인권선언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계몽사상에 의한 18세기의 긍정적 산물이다. 그러나 계몽주의자들 중에는 무신론자 또는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이 있어 이들은 교회와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계몽사상이 일어나게 된 근원 중의 하나는 프로테스탄트의 등장과 이에 따른 종교전쟁이다. 16세기까지 그리스도교 세계는 일치, 단결되었으나, 종교개혁으로 그 단일성은 파괴되었다. 이러한 대변동은 신앙에 대한 회의의 원인이 되었다. 더우기 1550년경부터 1648년 사이에 일어난 비참했던 종교전쟁은 서구인에게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를 불러 일으켰다.

18세기에 이르러 서양에서는 종교가 잔인한 행위의 기원이 되었다는 확신이 고조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에 대한 적개심이 무르익었다. 또한 계몽사상은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이 시대의 종교적 관용주의에서 나타나고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모든 종교가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라 보고 있었다.

 

계몽사상과 교회

 

이신론의 등장 : 계몽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조는 합리주의 철학이었다. 이 근세의 새로운 사상은 가톨릭 교회에 대해 교회 사상 가장 큰 위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 철학적 합리주의는 르네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의 이성을 자율적으로 사용하여 사물에 대한 참된 지식과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합리주의가 영국에서는 종교 문제에 적용되어 신의 계시를 무시하는 학설을 내세운 신학적 합리주의와 더불어 종교를 하나의 자연적 현상으로 격하시키는 자연종교의 체계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사조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종교를 갖고 있으며 신의 계시는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롭다.

이러한 자연종교의 사상은 이신론으로 발전하여 가톨릭 교회와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신론의 특성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우선 신은 존하며 인간의 숭배 대상인 동시에 윤리적 의무의 근거이다. 그러나 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은 이성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여기서 이신론은 모든 종교문제는 인간 이성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내세움으로써 이성의 역할을 중요시하였고, 그리스도교 진리의 기준은 성서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서는 상식선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증명될 수 없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성서 연구는 인간의 윤리적 의무를 찾는 데에 그 의미를 갖는다. 아울러 이신론자들은 신은 선행을 행하는 이에게 상급을 주고 죄인에게는 벌을 내리기 때문에 회심하여야 한다는 상선벌악에 대한 믿음만이 참된 종교의 본질적 요소를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이신론은 종교를 윤리적 행위로 축소시켜 순전히 인간성의 교육 요인으로, 교양의 도구로 간주했다. 따라서 이신론자들은 종교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아 어느 종교든지 모두 좋은 것으로 주장하는 종교적 자유를 내세워 종교의 다양성의 정당화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후에 각 국가가 헌법에 종교적 관용 즉 종교의 자유를 넣는 데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종교적 전통이 없는 미국이 처음으로 헌법에 종교적 관용주의를 적용하였고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는 유럽의 각 국가들도 신앙의 자유를 법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므로 가톨릭교가 국교화되어 있던 국가에서 다른 종교의 신앙도 법으로 승인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교세는 외적으로 그만큼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프리메이슨 비밀결사 : 합리주의적 이신론은 지식층에 가장 많이 침투되어 있었다. 이 사상은 1717년에 영국에서 조직된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단체에 의해서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 그리고 유럽 지역에서 널리 전파되었다. 이러한 성공적 전파의 이유는 이 운동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 사회정의 등의 계몽주의의 매력적인 정신을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은 영국 지방에서는 별로 문제가 없었으나 프랑스에서는 교회와 성직자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조직에 대해서는 정부당국도 호의를 갖지 않았다. 그것은 이 단체가 비밀결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 끌레멘스 12세(1730-1740)는 1738년 칙서를 반포하여 가톨릭 신자들이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면 파문을 받으리라는 경고를 내렸다.

교황이 금령을 내린 이유에 몇 가지 사실이 있었다. 교황은 종교의 보편성의 위험을 우려하였다. 왜냐하면 ‘프리메이슨’의 회원들은 각 종교를 일종의 자연적 덕행으로 알고 여기에 만족하였고 모든 종교를 동등한 바탕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비밀조직은 공공의 평화를 깨뜨리고 사회의 공동선을 파괴하였다. 아울러 교회는 ‘프리메이슨’을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계몽사상의 긍정적 의미 : 계몽사상이 교회에 부정적 결과만을 초래한 것은 아니다. 교회는 계몽사조로부터 얻은 것도 적지 않다. 교회는 낡아빠진 신심생활이나 의미를 상실한 전통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계몽 사상가들의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주위 사회에 신뢰 받을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나기 위해서 관습의 폐단과 시대착오적 생활양식을 비판하면서 계몽주의의 정신에 입각하여 교회 개혁을 시도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 교리교육, 교회의 조직과 운영, 설교방식, 전례생활에 있어 개혁한 사실은 오늘날 인정을 받고 있다. 독일에서도 계몽주의의 정신을 갖고 있던 고위 성직자와 수도회의 장상들은 박학한 인물들이었고 그 직책을 신앙심 깊게 수행한 성직자들이었다. 이들은 계몽시대의 사조 속에서 교회생활을 위한 혁신에 큰 공헌을 하였다. 

 

교회사(敎會史) 31

 

19세기의 가톨릭 교회

(Ⅰ)

김 성 태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 대혁명은 계몽주의의 이상적인 관용주의와 합리주의를 외적으로 표현한 사건으로서 유럽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교회에 대해서도 전환점을 이루게 하였다. 1789년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1774-1792)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삼부회(三部會)를 소집하였다. 이 삼부회는 프랑스의 세 신분 계급의 대표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신분은 당시에 전인구의 1퍼센트 미만인 성직 계급으로 귀족출신의 고위 성직자들은 주용한 사회적 지위와 많은 재산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평민출신의 하위 성직자들은 분개하고 있었다.

제2신분은 귀족계급으로 이들도 특권과 부를 향유하고 있었으나 전 인구의 2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소수의 두 특권 계급에 비해 제3신분은 프랑스 국민의 9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평민들로서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1789년 5월 5일에 삼부회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소집되었을 때에 처음에는 제1계급과 제3계급은 서로 협조하였다. 그런데 회의운영이 투표방식에 대해서 각 신분 간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제3신분이 6월 23일에 단독으로 국민의회를 개최하였고, 제1신분의 하급 성직들은 여기에 동조하였다. 8월 4일과 5일 사이에 있었던 ‘회생의 밤’에서 일부 자유주의적 귀족과 성직자들은 국민의회에서 그들이 갖고 있던 중세의 봉건적 특권을 평민들을 위해서 포기하였고, 의회는 노예제도의 폐지와 함께 “모든 국민은 출생 신분의 구별 없이 모든 직책에 취임할 수 있다”고 8월 5일 새벽 2시에 선언함으로써 봉건제도는 단번에 붕괴되고 말았다. 3주일 후인 8월 26일에 국민의회는 ‘인권선언’을 공포하였다.

 

교회의 세속화

프랑스 교회 : 프랑스 국민의회의 극단파는 교회재산 문제에 있어서 반교회적 경향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샤를르 모리스 드 딸레랑-빼리고르드 주교가 국가의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공채를 지불하는 데에 사용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이러한 제의를 반대하여 의회에서 퇴장하였다.

이후에 국민의회는 교회를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 휩쓸렸다. 의회는 1790년 2월에 자선사업을 하지 않는 수도단체를 해산시켰고, 4월에는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는 법이 공포되었다. 7월 14일에는 프랑스 성직자 기본법인’성직자 공민헌장’이 선포되었다. 이 법에 의하면, 교구의 수를 줄이고, 성직자는 국가의 봉급을 받으며 교구 주민의 대표로 선출되는 세속 관리로 바뀌어졌다.

이제 프랑스 교회는 로마 교황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국가적 기반 위에 새로 조직되어 국가에 예속되는 ‘국가 교회’(국교)가 되었다. 이러한 조처에 대해 교황이 비난, 항의하자 국민의회는 11월에 모든 성직자들에게 헌장을 지지한다는 선서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전체 성직자들 중에서 3분의 2에 달하는 성직자들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박해가 일어나 4만여 명의 성직자들이 투옥 또는 국외 추방을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 박해는 혁명당국과 국민 사이에 거리를 두는 기회를 주었다. 선량한 많은 국민(신도)들이 선서를 거부한 성직자 편에 몰렸고, 이는 반란과 내란의 기원이 되었다. 결국 ‘성직자 공민헌장’은 프랑스 대혁명이 처음으로 저지른 대실책이었다.

1791년 10월에 새 헌법이 공포되고 이에 의해 선출된 입법의회가 개회되었다. 이 입법의회는 1792년 9월에 공포정치 시대가 시작되면서 끝을 맺었다. 이 시대에 루이 16세와 왕비인 마리 앙뚜아네뜨를 비롯하여 많은 성직자, 귀족, 의회의원, 대중들이 단두대에서 사라졌다. 공포의 독재 정치가들은 그리스교를 폐지하고 여기에 ‘이성의 공경’으로 대체하였다.

1799년 11월에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가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독재정권은 무너지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개심도 사라졌다. 나폴레옹은 종교적인 면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지만, 종교를 정치적 요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국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1801년 7월에 교황과 정교조약을 맺었다. 여기서 프랑스 국민의 대부분이 신봉하는 종교로서 가톨릭 교회를 수복하기로 확정하였다. 동시에 교회는 몰수된 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국가가 성직자들을 돌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이 조약에 비밀히 ‘77항의 파생 조문’을 첨부하였다. 교황 비오 7세(1800-1823)는 이에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나폴레옹에게 많은 고초를 당하였고,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 그를 황제로 도유(塗油)하였다. 새 황제는 1808년에 바티칸 시를 점령하고, 1812년에 교황을 빠리의 퐁덴블로에 감금하고서 바티칸 시를 포기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은 패전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독일 교회 :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침입한 곳에는 어디서나 사회적 혁명이 수반되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프랑스인의 침입이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교회의 세속화)를 지니고 있다. 1803년 2월에 레겐스부르그에서 독일제국의 대의원들은 결의문을 선포하였다. 이 결의문은 22개의 교구와 80개의 제국 수도원과 200여 개의 수도원들의 재산 몰수와 국유화를 명령하였다. 이로써 독일 교회는 물질적 기반을 상실하였고 국가적 뒷바침도 잃고 말았다. 이제 제국 교회의 멸망과 함께 교회는 절망적인 열세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라는 부정적인 면 뒤에는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이제 교회는 고루한 폐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귀족들의 주교좌 독점과 과대한 성직록이 폐지되었다. 그 외에 중세기 봉건주의의 소산인 고위 성직자와 하급 성직자의 심한 차별 의식이 사라졌고, 가난해진 교회는 대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중을 위한 교회가 19세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독일의 신성 로마제국에 예속되어 있었던 제국 교회가 국가와 분리됨으로써 독일 주교들은 로마 교회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교회의 세속화는 로마 교황에게는 종교적 승리를 가능케 해주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단결되었고 국가주의와 국교화 사상에 대해 강력하게 도전하는 움직임을 일으켰다.

이제 가톨릭 교도들의 공동체 의식이 깨어나 오늘날의 가톨릭 운동의 시초로 볼 수 있는 수많은 조직체가 신설되었다. 수도회가 재건되었고 새로운 수도회가 독일에 도입되었다. 신심의 활성화와 더불어 독일 교회는 사회문제에 개방된 자세를 취하면서 사회봉사와 같은 새로운 사목방법으로 민중을 대하였다. 19세기 독일의 여러 곳에서 교회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교회사(교회사) 32

 

19세기의 가톨릭 교회

2

김 성 태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

공의회 개최 배경 :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1864년 12월 8일에 처음으로 공의회를 소집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21명의 로마 주재 추기경들에게 비밀히 의견을 타진하였다. 이 중에서 2명의 추기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교황의 계획을 찬성하였다. 그런데 찬성하는 추기경 가운데, 여섯 명이 정치적 면에서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걱정을 드러냈고 두 명의 추기경은 공의회에서 전통적 신앙으로 내려오던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도 정의되어 교회의 공식적 결정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교황은 유럽과 가톨릭 동방 교회의 주교들에게도 공의회 소집의 계획을 알려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러한 반응의 동기는 당시에 교회 안에서 거론되고 있는 학설들이 전통 신앙에 위험한 경계에 달하여 신학적 정리가 필요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1860년 이후에 민족주의적 통일운동의 결과로 신생 이딸리아가 로마시를 제외하고서 교황령을 점령하였고, 교황권의 영향력에도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교회는 교황청의 권한을 증강시킬 필요가 있었다.

공의회의 준비 과정 :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교황 비오 9세는 1868년 3월 9일에 추기경들로 구성된 준비위원회를 두어 공의회의 의제를 설정하는 데 착수하였다. 3개월 후인 1868년 6월 29일에 비오 9세는 칙서를 통해서 “1869년 12월 8일에 로마에서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공고하였다. 아울러 공의회에서 다룰 의제를 다섯 가지 즉 신앙 교리, 교회 규율, 수도회, 외방 선교, 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으로 규정하여 각 의제의 초안을 준비하는 분과위원회를 구성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공의회가 열리기도 전에 교회 안에서 의견이 양분되었다. 대다수의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18세기의 갈리아주의의 반교회사상(5월호 참조)과 프랑스 대혁명의 반동으로 19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교황권의 지상주의를 제창한 ‘울트라본타니즘’의 영향을 받아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소수의 자유주의파 신학자들과 독일, 오스트리아, 아메리카의 주교들은 이 정의의 선포가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이미 1868년 2월 6일자의 ‘치빌타카톨리카’라는 예수회의 잡지는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정의와 그 신조화를 요구하는 논문을 실었다. 이에 대해 독일의 신학자이며 교회 사가인 될린거(1799-1890)는 익명으로 신문에 논문을 기고하여,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지권이 정의되는 것에 반대, 역사적 사실(교황 호노리오 1세의 이단 승인)을 들어 부당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유럽 국가의 일부 통치자들은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의 교리는 중세기적 교회의 국가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여 공의회에서 이 교리를 신조로 규정하는 데서 파생되는 중대 결과를 경고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교황은 1869년 11월 27일에 칙서를 통해 공의회의 일정을 알리고 의제 결정권은 교황에게 속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공의회의 의안을 준비하는 4개 위원회의 책임자를 임명하였다. 물론 교황의 무류지권 문제는 공의회의 의제로 선택되지 않았지만 자유주의파들이 위원회의 구성에서 제외됨으로써 이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공의회의 진행 과정 : 우선 공의회의 교부들은 교리위원회에서 합리주의, 유물론, 자연주의, 범신론 등의 오류를 반대하여 초안한 신앙 문제(창조주, 계시, 신앙, 신앙과 이성)를 심의 개정했다. 교황은 1870년 4월 24일에 계시와 신앙에 관한 교의적인 헌장 ‘하느님의 아들’을 선포하였다.

이어서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심의가 착수되었다. 무류지권을 지지하는 교부들은 4백여 명의 주교들의 서명을 받아, 이 문제를 의제로 선택하도록 교황에게 요청하였다. 교황의 무류지권과 수위권 문제는 공의회의 교부들을 양분시켰다. 반대파들은 원칙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이의가 없으나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치열한 찬반 논쟁이 7월 4일에 종결되고 무류지권에 대한 교회의 정의가 예비 투표(7월 13일)에서 가결되었다. 이 투표 후에 일부 주교들은 교황의 허가를 받고 최종 투표 전에 로마를 떠나 기권하였다. 7월 18일에 있었던 제4차 회기에서 찬성 533표, 반대 2표로 교회에 관한 헌장인 ‘영원한 목자’가 통과되었다.

이 정의가 선포된 다음 날인 7월 19일에 보불전쟁(1870-1871)이 발발하여 신생 이딸리아로부터 교황청을 보호해 주던 프랑스 군대가 철수, 이딸리아 군대가 로마 시를 장악하여 교황은 1870년 10월 20일에 공의회를 연기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다른 안건을 마무리지을 공의회는 끝내 속개되지 못하였다.

공의회의 결과 :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영원한 목자’헌장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의 신조 선포로, 과거의 콘스탄스 공의회의 공의회 우위 사상에서 시작되어 18세기의 갈리아주의자들이 계속 주창하던 국교회 사상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헌장은 20세기 초에 가톨릭 교회 안에서 스콜라주의와 전통적 교리에 어긋하는 주장을 하는 ‘현대주의’의 교회 침입을 저지하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결과 외에 공의회는 일련의 불행한 사건을 초래하였다.

오스트리아는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에 대해 반대하여 교황청과의 정교협약을 파기했다. 독일의 주교들은 대부분 최종투표 전에 로마를 떠나 기권하였지만 무류지권에 대한 정의가 선포된 후에 공의회의 결정에 승복하였다. 이것은 될린거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파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1870년에 본과 뮌헨 대학 신학자들을 위시하여 여러 곳에서 바티칸 공의회를 거부하는 서명 운동과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마침내 이 반대파는 1871년 9월에 뮌휀에서 집회를 갖고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참된 가톨릭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고()가톨릭 교회’를 설립하여(뒬린거는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음)전통적 가톨릭 교회를 떠났다. 1873년 6월에 브레슬라우 대학의 교회사 교수이며 학창인 라이켄스(1821-1896)가 네덜란드 데벤터의 얀센파 이단 주교인 헤르만 하이캄프에게 독일의 첫 주교로 축성되었다. 이로써 고()가톨릭 교회의 본 교구가 설정되었다.

이렇게 분리된 교회는 1874년에 비밀 고해, 금육제, 단식제 등을 개혁하고 1878년에 혼인의 불가해소성, 혼인 조당, 전례 축일, 사제의 독신 생활을 철폐하였다. 이 교회는 1054년 이전의 첫 7개의 공의회의 결정을 초기 교회의 신앙으로 받아들였고, 반면에 트렌트 공의회와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이 교회는 1932년에 영국의 성공회와 완전 통합하였다. 

 

교회사(敎會史) 33

 

19세기의 가톨릭 교회

3

김 성 태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도전받는 교회

교황령의 붕괴 :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황이 세속 군주로서 1천여 년 동안 통치하던 교황령(교회 국가)은 그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어 영토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1791년 프랑스에 있었던 교황령은 프랑스의 새 공화정부(제1공화국)에 편입되었고 1808년에 나폴레옹이 이딸리아 교황령을 점령하였다. 이 교황령은 나폴레옹이 패전, 실각한 후에 비인회의(1815)에서 수복되었다.

그러나 교황령은 이딸리아의 통일국가를 추구하던 민족주의자들의 도전을 받았다. 당시의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로서 교황령의 정치적 민주화 개혁을 단행하여 민족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848년 말에 민족 진영의 극단파에 의해 교황령의 첫 수상이 의회에서 살해되고 교황은 로마를 떠나 피신하였다. 1849년에 교황은 프랑스 군주의 도움을 받아 민중 봉기를 진압하고 교황령을 되찾은 동시에 그의 자유주의적 태도를 전제적 자세로 바꿨다.

여기서 민족주의자들은 교황 중심의 이딸리아 연방국가 건설이나 교황 체제의 형성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사르디니아의 왕인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1849-1878)에게 눈을 돌렸다. 이제 예수회원들은 축출되고(편집자주: 교황의 측근이기에) 국가혼인 제도가 의무화되는 동시에 교회 법정은 폐쇄되었다. 성직자의 특권이 취소되었고 관상 수도원들도 탄압을 받았다.

피에몬테의 수상인 가밀로 가부르(1852-1861)는 1858년 7월 이딸리아의 통일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1848-1870)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여 1859년에 롬바르디아를 획득하였다. 교황령을 보호해 주던 오스트리아가 철수하자 여러 곳에서 혁명이 일어나 교황 통치가 끝나고 피에몬테와 사르디니아가 통합,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딸리아 민족주의의 영웅인 지우제페 가리발디는 반교회적 인물로서 1860년에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점령하고 같은 해 9월 18일에는 라모리씨에르 장군 휘하의 교황 군대를 굴복시켰다. 마침내 1861년 3월에 이딸리아 왕국이 창설되었고 빅토리오 엠마누엘은 왕이 되었다.

이제 교황령은 대부분 상실되었고 로마만이 프랑스 군대의 도움으로 교황령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러나 1870년에 보불전쟁으로 프랑스 군대가 교황령에서 철수하자 피에몬테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9월 20일) 교황령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바티칸 궁으로 물러난 비오 9세는 침략자들에게 엄중하게 항의하고 파문하였으나 허사였다.

1871년 5월 13일에 이딸리아 왕국의 새 정부는 소위 ‘보호법’을 공포하여 교황청 문제를 일단락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비오 9세는 이 법을 거부하였고 교황청과 이딸리아 정부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교황은 1874년에 칙서를 통해서 현 정부가 시행하는 선거를 거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조처는 결국 선의의 가톨릭 정치인의 현실 참여를 막아 반교회적 과격파가 정권을 장악케 하였다. 이 문제는 후에(1929년 2월 11일) 무쏠리니와 교황 비오 11세(1922-1939)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독일제국의 문화투쟁 : 1701년에 설립된 프로이센 왕국에서 가톨릭 교회는 활기에 넘친 교회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수상인 비스마르크의 등장과 아울러 프로이센의 오스트리아(1866)와 프랑스(1870)와의 전쟁에서 승리, 그리고 독일제국의 탄생(1871) 이후로 교회의 사정은 악화되었다. 특히 보불전쟁의 과정에서 비스마르크는 교황에게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의 무장해제에 있어서 프랑스 성직자들의 협조를 촉구하도록 요청하였고,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제국의 건설과정에서 독립주의를 주장하는 바바리아의 가톨릭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반발을 무마하도록 부탁하였으나 교황은 모두 거절하였다. 이것이 신생 독일제국과 교황청이 충돌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은 헤겔(1770-1831)의 철학을 받아들이는 반 교회적 분위기에 휩싸였고 옛 프로이센 국교의 부활이 시도되었다. 더우기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을 정의, 선포함으로써 가톨릭 교회는 국가에 위험한 존재로 오인되거나 압력 단체로 간주될 수 있었다.

한편, 1852년에 프로이센 의회에서 주로 가톨릭 교회 신도로 구성, 결성된 중앙당이 1871년 3월 선거로 독일제국의 의회에서도 주요 세력으로 등장, 제국 안에서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억압 정책을 미리 배제하고자 “종교의 자유가 새 제국 헌법에서 보장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다. 여기서 비스마르크는 반성직자주의의 성격을 띤 국민자유당과 프로이센의 종교교육상인 아달베르트 팔크(1827-1900)의 지지를 얻고 중앙당과 투쟁하고자 하였다.

독일제국에서 교회에 대한 탄압정책이 시작되었다. 1873년에 루돌프 위르코브는 이러한 반가톨릭 운동을 소위 ‘문화투쟁’이라고 불렀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억압 정책은 1871년 7월 8일에 종교교육성의 가톨릭 사무국이 폐쇄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바바리아의 수상인 요한 루츠는 고가톨릭파를 공격하던 가톨릭 성직자들의 설교를 봉쇄하기 위하여 ‘설교단법’을 형법에 삽입하였다.

1872년 3월에 프로이센에서는 1850년의 헌법에 보장된 성직자의 초등교육 감독권을 국가기관으로 이관하는 법을 제정, 시행하였고 이 법은 6월에 더욱 확대되어 수도단체의 교육 활동 자격을 박탈하였다. 그뿐 아니라 1872년 7월 4일에는 ‘예수회 금지법’의 의회 통과로 예수회의 수도원이 폐쇄되어 그 회원들은 축출되었다. 다음 해에는 이 법이 다른 수도회에도 적용되었다. 특히 1873년 5월 팔크는 본격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기 위한 법(5월법 또는 팔크법)을 제정하고 두 차례에 걸쳐(1874, 1875) 더욱 가혹한 법으로 개정하였다.

수도원은 해체되었고 신학교 운영과 성직자의 임명 등 교회 문제가 국가의 통제 하에 들어갔고, 5월법에 불복하는 성직자는 법적 제재(벌금, 투옥, 추방)를 받게 되었다. 1875년 2월에 정부는 국가혼인을 의무화하였고 4월에는 ‘빵 바구니 법’을 통과시켜 이상의 법들에 불복하는 교구는 교회 특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따라서 1878년경에는 프로이센의 12개 교구 주에 4개 교구만이 남았다.

이러한 반 가톨릭적 법령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가톨릭 교인들은 교황과 주교들에게 더욱 충성하였고, 투쟁하는 동안에 가톨릭 교회의 세력은 더욱 견고해졌다. 중앙당은 매선거에서 승리하였고, 비스마르크의 지지 세력인 국민자유당은 쇠퇴하였다. 더우기 국가 위신에 대한 실추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의 성장은 비스마르크에게 정책 전환을 하게 하였다. 새 교황인 레오 13세(1878-1903)의 선출로 양 세력 간의 평화 무드가 조성되어 각종 금지법이 차례로 폐기되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가톨릭 교회의 강력한 저항에 무릎을 꿇고, 가톨릭 교회의 승리로 문화투쟁은 종막을 고하였다. 

 

교회사(敎會史) 34

 

19세기의 가톨릭 교회

4

김 성 태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가톨릭 사회주의의 등장

대중사회와 사회문제 : 18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19세기 유럽에 중대한 사회변동을 초래하였다. 산업화에 따른 변동 중의 하나는 일반 대중이 정치적 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사회와 그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대중사회의 등장이다. 이러한 대중사회가 성립된 요인은 유럽 인구의 급속적 증가, 대중의 교육 수준 향상, 민주주의 등장이다. 특히 민주주의 등장은 모든 성인 남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고 대중은 정치적 권력 형성에 참여하였다.

더우기 산업화한 대중사회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대규모의 산업체가 성장함으로써 생긴 경제 자유주의, 자유체제의 자본주의에 의해 착취와 억압을 받는 공장 근로자들의 문제였다. 근로조건에 있어서 노동자, 특히 노동력의 2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18세 이하의 청소년 근로자들은 최저 임금으로 하루에 12~15시간의 노동에 종사하면서 봉급의 60~80퍼센트를 주식비에 사용하였다.

여기서 근로 계급의 분노와 불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극도에 달하였고, 경제적 위기로 인하여 유럽과 미국의 곳곳에서는 파업 사태가 속출하였다. 근로자들은 비참한 생활로 말미암아 신앙의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더우기 확산되어가는 사회주의에는 반 그리스도교적인 유물사관의 무신론인 칼 마르크스(1818-1883)의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Y가톨릭 사회주의의 기원 : 19세기 초에 가톨릭 자유주의자들은 근로 대중의 문제를 분석하고 교회의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도를 높혔다. 일부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은 사회문제의 중대성을 깨닫고 이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가 아닌 가난 자체에 대해서 논의해야 되며 이를 위해서 사회의 구조적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 당국의 공식 태도는 사회적 관심에 소극적이었다. 대부분의 고위 성직자들은 소극적인 자선활동에 만족하였고 정의구현을 위한 사회 참여에는 무관심하였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종교적 자유사상(자유주의 신학)은 단죄하였지만 사회의 불행 또는 악을 조장할 수 있는 경제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톨릭 사회주의는 일부 지방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안목과 식견이 높은 소수의 평신도, 신부, 주교들은 비참한 근로 대중의 문제가 사회정의의 문제인 것을 자각하고 사회문제에 깊이 관여하였다. 더우기 마르크스의 반종교적 사회주의가 19세기 중엽 이후 발전하여, 산업체의 근로자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 이제 교회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게 노동자들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였다.

여기서 가톨릭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교회가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이론적 근거로서 세 가지 요소를 제시하였다. 첫째로 가톨릭 신자는 자선활동 이상의 사회적 임무를 지니고 있다. 둘째로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은 사회윤리의 기본적 정신임을 밝히고 있으며, 세째로 신학자들은 항상 사회적 상황에 따라 새로운 원칙을 제시하고 평신도들은 이 원칙들을 적용, 실천하는 임무를 갖는다.

아울러 가톨릭 사회주의자들이 근로자의 권익을 위해서 사회정의의 업무를 수행하는데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 첫째로 온정주의, 즉 고용주에게 근로자들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과 엄한 지도를 촉구하는 자세이다. 둘째로 협동주의, 즉 고용주와 근로자 사이의 공동 협력을 의무화하고자 하는 자세이다. 세째로 급진주의, 즉 근로자들이 주도권을 쥐고서 그들의 행복 증진과 지위 향상을 하는 도모할 권리가 있다는 자세로, 근로 계급이 자기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갖고 사회적 발전의 실질적 세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외면상으로는 민주주의적 이념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정치와 연결되는 운동이었다(따라서 후에 교회는 가톨릭 사회주의의 급진파들을 배격하였다).

가톨릭 사회주의의 지도자들로는 독일의 케틀러 주교(1811-1877), 영국의 헨리 에드워드 매닝(1808-1892), 미국의 기본스 추기경(1834-1921), 스위스의 메르미요 추기경(1824-1892), 프랑스의 알베르 드 뮌(1841-1914)과 르네 드라 뚜르 뒤 펭(1834-1925) 등이 있다. 이들은 근로층의 그리스도교 정신을 부흥하기 위해 사회문제에 있어서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정신을 보여주었고 노조 결성, 근로 시간, 미성년 근로자 보호 등을 위한 근로법 제정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가톨릭 사회주의자들은 노사분쟁에 있어서 국가의 조정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이 근로자의 편에서 중재 역할을 하였다.

레오 13세의 「노동헌장」반포 : 교황 레오 13세(1878-1903)가 1891년 5월 15일에 ‘노동헌장’또는 가톨릭 사회주의 대헌장’이라고 불리우는 칙서, 「새로운 사태」를 반포함으로써 교회가 공식적으로 사회문제에 개입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교황은 이 칙서에서 근로 대중이 사회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확신,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비인간적 경영주에 의한 노예 취급 등의 사회악을 지적하였다.

여기서 레오 13세의 주장이 사회주의와 동일한 견해로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다르다. 사회주의자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부유한 이들에 대한 증오심을 자극시키고 모든 재산의 공유화를 주장하고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를 우선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사회주의자들을 반박하여 개인의 재산 소유권을 옹호하였고 가정은 국가에 우선하는 사회의 첫 구성 단위라고 주장하였으며, 계급투쟁을 배격하였다.

레오 13세는 세 가지 입장에서 사회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교황은 윤리법에 호소하여 근로자는 고용주를 존경하면서 노동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고 고용주는 근로자들을 노예로 대하지 말고 그들에게 힘겨운 임무를 지우지 말며 정당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황은 국가 또는 정부에게 사회복지의 증진과 분배, 정의의 실현을 수행할 임무가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국가는 근로 조건을 통제하고 노사분쟁에 개입하여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경영주와 노동자에게 서로 일치, 협력하여 어려운 노사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면하였다. 아울러 사회문제에 있어서 사회불의와 계층간의 증오심 조장과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레오 13세의 칙서는 근로 대중에게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확산하는 것을 완전히 저지하지는 못했으나 중대한 사회적 반응을 일으켰다. 그것은 가톨릭 사회주의의 두 가지 결실, 즉 그리스도교 노동조합의 발전과 그리스도교 민주정당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근로자와 접근하기 위해서 노동사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사(敎會史) 35

 

현대의 가톨릭 교회

1

 

김 성 태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20세기의 교황

 

비오 10세(1903-1914) : 비오 10세는 경건한 신앙인으로서 16세기 이후 처음 ‘성인 교황’이 되었다. 그는 1858년에 사제가 된 후에 본당 신부, 신학교 영신지도 신부, 교구청의 상서국장 등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그는 ‘사목 교황’으로서 언제나 온정과 유모어로써 그와 만나는 이들에게 친근감을 갖게 하였다.

비오 10세는 ‘개혁 교황’으로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단으로 실현되지 못한 개혁들을 실천에 옮겼다. 그의 교회 개혁은 항상 사목적 관점에서 수행되었는데, 그레고리안 성가를 포함한 교회 음악을 개혁하고(1904), 신자들에게 미사에 자주 참여하여 영성체할 것과 어린이의 영성체를 장려하였다(1905). 또한 성직자의 기도서인 성무일도를 개정하고(1911) 교황청을 개혁, 행정 기구를 근대화시켰다. 비오 10세의 업적 중에서 현대 교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1904년에 교회법 개정을 착수한 것이다(이는 1917년에 교황 베네딕또 15세가 공포하였음).

그러나 비오 10세는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엄격한 군주주의자로서, 교회를 사회 및 그 사조와 융합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교황이 당시에 세계를 휩쓸던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교회는 공화제적 사조와 접촉할 기회를 상실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들과 충돌을 일으켰으며, 여러 국가와의 정교협약이 파기되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 제3공화국은 주교 추천권 논쟁에서 교황청과 종교협약을 파기하고(1904), ‘정교 분리법’을 제정하여(1905) 교회의 재산을 국유화하였다.

반()교회적 정부가 교회에 국가 보조금을 지불하는 정책을 시행하고자 시도하였을 때, 비오 10세는 두 차례에 걸친 회칙(1906)을 통해 프랑스 공화 정부의 시책을 단죄하면서, 프랑스의 주교들에게 교회가 재산을 압수당하여 빈곤할지라도 그 내적 부유함, 전통, 영성, 그리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신심에 의존하도록 명령하였다. 물론 이러한 교황의 반교회적 국가에 대한 비타협적 정책은 프랑스 교회에 물질적 손해를 초래하였고 공화제를 바라던 프랑스 국민과 거리를 멀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오 10세의 주장이 현명하였다는 사실이 훗날 프랑스 교회에서 밝혀졌다. 이 교회는 비록 빈곤하였지만 쇄신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근대주의 : 프랑스, 독일, 이딸리아, 미국에서는 가톨릭 성직자와 신학자 그리고 학자들이 교회의 전통적 신앙과 제도를 새로 등장하여 발전하는 철학, 역사학 등의 학문과 사회자조에 입각하여 개혁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19세기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세속 문화와 타협하여 종교 학문(성서주해, 교회사, 교의 신학, 윤리 신학)에 새로운 학문적 방법을 적용, 결론을 내리려는 일부 저명한 성서학자, 교회사가, 철학자들의 움직임을 ‘근대주의’라고 한다.

근대주의는 각 국가에 따라서 그 관심사와 내용이 여러가지 형태로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첫째, 근대주의자들은 역사적 방법과 비판적 자세를 중요시하여 그들의 연구에 적용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연구 방법과 자세가 신학을 활성화할 수 있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의 쇄신에 공헌할 수 있다고 믿었다. 둘째, 근대주의자들은 스콜라 철학과 신학, 그리고 토마스 사상에 반대하는 학문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세째, 권위주의 특히 교황과 교황청 중심의 권위주의에 크게 반발하면서 그들이 연구하는 학문의 자유와 독립성만을 강력하게 주창하였다. 네째, 당시에 지배적 철학 사조에 지나친 영향을 받고 아직 완전하게 검토되지도 않은 연구 결론을 너무 조급하게 확신하였다.

다섯째, 전통적 신앙 형태에 대해서 다른 가톨릭 학자들이 지녔던 보수주의의 참된 모습을 충분히 평가하지 않았다.

반면에 근대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은 매우 대조적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중세의 지배적 사조인 스콜라 학파로서 연구의 역사 및 비판 방법을 무시하고 새로운 학문의 결론을 신용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는 파괴적이며 회의론적 합리주의가 들어있다고 속단하였다.

이 중세주의자들은 근대주의자들이 중요시하는 인간의 진리 추구에 대한 이념을 다만 교만하고 어리석은 자세라고 단언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유일한 구원은 교회에 대한 절대적 순종에 달렸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반()근대주의자들은 몇 가지 부정적 자세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연구 방법에 있어서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엄격한 스콜라 사상의 형식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그들은 교회의 권위를 남용하여 그들의 주장을 고집 정당화하였고 새로운 철학에 대해 올바른 지식과 역사적 감각을 전혀 갖추지 못하였다.

비오 10세는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견해에 관용적 입장을 취하고 있던 전임 교황 레오 13세와는 달리 새로운 사조에 대해서 1907년 회칙과 교령을 통해 단죄하였다. 두 교회 문헌에서 단죄한 근대주의자들의 오류들은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 부정,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과 교회 창립에 대한 부인,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거부, 가톨릭 교회 신조의 상대화, 교회 성사에 대한 개신교적 해석’등이었다.

비오 10세는 근대주의를 탐색하여 박멸하기 위해서 각 교구에 ‘자경단’을 설치하고 교회 서적 검열관을 배치하였다. 신학생들은 토마스의 스콜라 철학과 신학만을 중점적으로 교육받았고 1010년에는 반근대주의 선서가 규정되어 모든 성직자들은 이 선서를 해야 했다(이는 1967년에 폐지됨). 그러나 불행하게도 근대주의자의 색출에 있어서 결백한 신학자들이 희생되는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베네딕또 15세 : 베네딕또 15세는 평화의 교황으로 후세에 알려지고 있다. 교황은 재위의 첫 순간부터 평화와 화해를 확고부동하게 추구 수행하였다. 베네딕또 15세는 반근대주의자들의 광신적 행동으로 인하여 분열된 교회에서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첫 회칙을 반포하였다.교황은 여기서 근대주의자에 대한 색출 운동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일어났을 때에 전쟁 당사국의 통치자들에게 평화 통첩을 보내 적대적 감정의 불식, 무장해제, 조정위원회의 설립 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상(理想)은 1년 후 미국 대통령 윌슨(1913-1921)이 발표한 ‘평화 14개조’의 내용과 가까왔다.

베네딕또 15세가 평화 중재인으로서 한 다른 역할은 교회와 국가의 외교 관계를 수립 또는 재개하는 것으로 전쟁 후에 교황청과의 수교국이 25개국이 되었다. 그리고 교황령의 붕괴(1870) 이후로 이딸리아인을 분열시킨 로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딸리아 정부와 접촉하여 대화를 시작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교황청의 재정을 바닥내어 그의 서거 후에 차기 교황 선거를 치를 비용이 부족할 정도로 자선사업에 열중하였다. 

 

교회사(敎會史) 36

 

현대의 가톨릭 교회

2

김 성 태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20세기의 교황

비오 11세(1922-1929) : 1879년에 신부가 된 비오 11세는 신학교의 교사, 밀라노와 바티칸의 도서관 책임자, 외교관 등의 경력을 거쳐서 1921년에 밀라노교구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활동 단체인 ‘가톨릭 활동’으로 교황은 이 가톨릭 운동에 대해 ‘교회의 교계적, 사도직에 평신도의 협력과 참여’라는 전통적 정의를 내렸다. 그는 이러한 평신도의 사도직은 모든 가톨릭 신자의 의무인 애덕의 실천이라고 규정하면서 기도와 희생은 넓은 의미의 ‘가톨릭 활동’이며, 가톨릭 신앙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파하는 노력은 엄밀한 의미의 ‘가톨릭 활동’이라고 구분하였다.

비오 11세의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 교회 안에서는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새로운 각도에서 연구되었으며, ‘평신도 신학’이 정립되었고 점차로 성직자 위주의 교회에서 평신도가 함께 연대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탈바꿈하는 전환기에 들어섰다.

그리고 교황은 지방교회에서 ‘가톨릭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많은 국가와 종교협약을 체결하였고 국가 통치자가 ‘가톨릭 활동’에 제재를 가하려고 하였을 때에는 과감하게 투쟁을 선언하였다. 교황은 특히 평신도 사도직 활동단체의 하나인, 근로자로 구성된 ‘가톨릭노동청년회’ 창립에 깊은 관심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 외에도 교회 내정에 있어서 비오 11세는 여러 회칙을 통해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강조하였고, 부당한 피임을 단죄하였다. 또한 그는 레오 13세의 「노동헌장」반포 40주년을 맞이하여 가톨릭 교회의 사회 이론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재천명하는 회칙을 반포하였다(1931).

국제 문제에 있어서 비오 11세는 실리주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20세기 전반기의 유럽에서 독재자들(뭇솔리니와 히틀러)이 출현하는 데 길을 열어 주었다.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선익을 위해서 지방교회의 가톨릭 정당들을 희생시키면서 유럽의 독재자들과 타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비오 11세는 이딸리아에서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으로 혼란해진 국가에 확고한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서 강력한 통치자의 등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베니또 뭇솔리니(1883-1945)를 선택하였다. 훗날에 독재자로 변한 그를 권좌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서 교황은 이딸리아의 가톨릭 국민당에 대한 바티칸의 지지를 철회하였다. 그 보답으로 교황은 뭇솔리니와 라테라노 조약과 종교협약을 체결하였다(1929년 2월 11일).

이로써 50여 년 동안 교회와 이딸리아 정부 사이에 쟁점의 대상이었던 로마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교회는 이딸리아 지역의 교황령에 대해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고 그 영토권을 포기하였으며 로마를 수도로 하는 이딸리아를 국가로 승인하였다. 그리고 이딸리아 정부는 바티칸 시를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그 자주권을 인정하였고, 가톨릭 교회를 유일한 국교로 정하였으며 가톨릭 교리를 학교교육에 있어 종교 과목의 기준으로 삼았고 비정치적 단체로서 ‘가톨릭 활동’의 자유활동을 보장받았다.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허위술책으로 정치와 종교의 상황이 매우 복잡하였다. 독일의 주교들은 1931년에 히틀러의 민족사회당을 단죄하였다. 그러나 2년 후에 권력을 잡게 된 히틀러는 국회에서 모든 종교(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권위를 존중할 것을 약속하면서 국가와 교회가 독일의 정치, 윤리적 정화를 위해 함께 협력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두 세력이 정면 충돌을 하든지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였다.

여기서 가톨릭 중앙당은 히틀러가 요구하는 협력의 진설성에 대해서 의심을 품으면서도 그의 장래 정치 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이 독재자에게 비상권을 발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데 동의하였다. 며칠 후에 독일 주교들은 히틀러와 그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단죄를 철회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비오 11세는 독일의 가톨릭 교회의 권리와 종교활동이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 종교협약을 체결하였다(1933. 7.21).

그러나 비오 11세가 교회의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채택한 정책은 독재자들이 약속을 실천하지 않았을 때에 단호한 대응으로 바뀌었다. 이딸리아에서 뭇솔리니가 ‘가톨릭 활동’을 억압하려고 하였을 때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후퇴시켰다. 또한 독일의 히틀러가 가톨릭 교회의 활동을 제한하려고 교회 단체와 청년 조직의 금지, 종교교육의 철폐, 교회 언론의 탄압, 설교 금지, 성직자와 평신도의 체포, 가톨릭대학과 신학부의 폐교 등 교회에 호전적 태도를 보였을 때에도 세계가 놀랄 만한 회칙을 반포하여(1937) 독재자에게 도전하였다.

교황의 회칙은 나찌즘에 정면 충돌하여 비난한 것으로 바티칸이 반포한 단죄 중의 가장 큰 문헌이다. 이 문헌은 독일에 숨어 들어가 1937년 3월 성지주일에 성당에서 낭독되었다. 교황은 회칙에서 나찌스의 거짓 술책을 폭로하고 새로운 이교사상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나찌스 당국은 공공연하게 교회를 탄압하고 성직자들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여기서 비오 11세는 뭇솔리니와 히틀러의 반()교회 정책과 인종차별 정책에 항의하여 폭탄적인 회칙을 준비하던 중 1939년 2월 10일에 서거하였다.

비오 12세(1939-1958) : 비오 12세는 1899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 교황청의 국무성에 들어가(1901) 관료생활과 외교관 활동을 통해서 정치적인 식견을 넓혔다. 1931년에 추기경으로 승진되면서 국무성 장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동안에 교황 특사로 유럽과 아프리카의 국제성체대회에 참석하면서 국제적 인물이 되었다.

비오 12세는 교황청의 국무성 장관이 교황에 선출되지 않았던 관례를 깨뜨리고 교황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며 개인적으로 고매한 성품의 신심 깊은 신앙인의 인상을 일반 대중에게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전쟁의 위기에 처하여 있는 세계 안에서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유능한 정치가 및 외교관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오 12세의 교황 대관식이 있은지(1939년 3월) 2주일 후에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였다. 이 침략 행위는 세계를 전쟁 직전으로 이끌고 갔으며 여기서 교황은 전쟁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1939년 성탄절 담화에서 다음과 같은 5개항의 평화 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 모든 국가는 각국가의 생존권과 자주권을 인정할 것. 둘째, 각 국가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참된 무장해제를 실천할 것. 세째, 평화수호를 위한 국제 기구를 설치할 것. 네째, 소수 민족의 권리를 승인할 것. 다섯째, 국가 안에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을 도입할 것.

비오 12세는 전쟁을 피하려는 노력으로 히틀러 정부의 전복을 위해 저항하는 독일의 지하운동 단체와 연합군의 동맹을 결성하는 데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전쟁 당사국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나찌즘을 공산주의 이상으로 싫어하였다. 동시에 그는 독일 민족과 문화를 사랑하여 전쟁 후에는 독일인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는 평화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공산국가인 러시아가 득세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러시아의 완전한 승리로 돌아가지 않도록 평화협상에 노력하였다. 그는 반()나찌주의자였고 반()공산주의자였다.

비오 12세는 교회 내정에 있어서 많은 회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의 단합을 요구하였고, 성서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강조하면서 가톨릭 학자들에게 성서 비판 방법을 자유롭게 적용하도록 허용하였다. 또한 그는 전례에 있어서 모국어 사용에 호감을 표시하였고, 성 토요일의 부활전야 빠스카 예절을 부활시키면서 성주간 예절을 개혁한 동시에, 토요일 특전미사를 도입하면서 공심제를 완화하였다. 교황은 많은 비()이딸리아인 추기경들을 선임하였으나 교황지상주의와 교황청 중심의 교회 행정을 펴나가면서 지방교회 주교들의 권한을 희생시켜 많은 반발을 받았다.

그의 보수주의적 자세는 교회의 현대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신학이나 교회 행정의 개혁시도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비오 12세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에 대한 교리를 결정, 반포하였고 동방 정교회들과 관계 개선을 이룩하는 데 노력하였다.

마지막으로, 오늘날에 있어서 비오 12세가 비난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교황이 나찌스와 유대인에 대한 만행에 대해 침묵을 지킨 사실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가 히틀러의 죄악을 항의하게 되면 더 야만적인 행위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하였고, 교회에 대한 잔인한 보복 행위를 염려하였다. 또한 교황은 그의 항의가 신경질적인 히틀러에게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상, 로마에서 5천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교황청에 소속된 수도원에 피신하여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가 많은 이에게는 잘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가장 올바른 양심을 지닌 인물로서 침묵을 지킨 것 때문에 더욱 큰 고민 속에 지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잘못한다면 그의 반대자들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지나치게 외교적인 생각만 하고 중립을 지킨 처신일 것이다. 

 

교회사(敎會史) 37

 

현대의 가톨릭 교회

3

 

김 성 태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

교황 요한 23세(1958-1963) : 비오 12세는 말년에 교회의 내외적 행정에 있어서 비타협적 고자세의 입장을 고수하고 방어적 반동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보수적이었던 교황의 서거 이후에 새 교황을 선출할 추기경단의 의견은 양분되었다. 일부에서는 전임 교황의 정책이 지속되기를 원하였고, 일부에서는 과거의 교회상을 타파하고 새로운 모습의 교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3일 동안 진통 속에서 치른 선거는 열두 번째의 투표에서 양측이 절충하여 ‘과도기 교황’으로 베네치아의 대주교이며 타협적인 태도와 온화한 성품을 지닌 노령(76세)의 추기경인 안젤로 쥬세뻬 론깔리를 선출하였다(1958년 10월 28일). 그러나 이 때의 추기경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과도기의 이 교황이 짧은 재위 기간(4년 7개월) 동안에 트렌트 공의회의 정신 속에서 생활하는 구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현대 가톨릭 교회사에 있어서 새 시대의 문을 연 ‘혁명 교황’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론깔리는 14세 때에 베르가모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4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로마에서 교회법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론깔리 신부는 1년 후 베르가모 교구의 주교 비서로 지내면서 신학교의 교회사 교수와 영신 지도 신부로서 신학생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그는 교구장의 오른팔로서 교회 신문을 발간하였고 가톨릭 액션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면서 폭넓은 사목 경험을 쌓았다.

론깔리 신부는 1차 세계대전(1914-1918) 중에는 육군 병원의 원목 신부와 군종 사제로 활동하였다. 1921년 교황 베네딕또 15세에 의해 이딸리아 외방 선교회의 책임자로 임명된 그는 교회 행정 업무에도 경험을 쌓아가면서 많은 저명한 성직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교회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도서관을 이용하다가 도서관장인 아킬레 라티 몬시뇰과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라티가 비오 11세로 교황에 피선된 후에 론깔리를 바티칸 외교관으로 임명하고는 관습대로 명예 대주교로 서임하였다.

론깔리 대주교는 외교관의 생활에 들어가 처음에는 불가리아의 교황사절로서 활동하였다(1925-1934). 그리고 터어키와 그리이스의 교황 사절을 역임하는 동안 동방 정교회의 국가에서 지도자들을 만나며 동방 정교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1944년 독일군이 후퇴한 후에 새 정부와 교회 관계가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그것은 샤를르 드골 장군과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들이 독일 점령군에 협조한 프랑스의 구정권과 가깝게 지낸 교황대사의 로마 소환과 프랑스 주교들이 해임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 때에 교황 비오 12세는 그곳의 적임자로 론깔리 대주교를 선택하여 파리 주재 교황대사로 임명하였다. 론깔리 교황대사는 외교관으로서의 수완을 발휘하여 프랑스의 긴장된 정교(政敎) 관계를 완화시켰으며, 프랑스 교회의 자주권을 다시 취득하였다. 또한 그는 전쟁 포로인 독일 신학생들을 석방시키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이러한 외교관으로서의 그의 능력은 교황청 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1953년, 비오 12세는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 베네치아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론깔리 추기경이 교황 칭호로 요한 23세를 선택하였을 때에 모든 사람들은 놀랐다. 요한 23세란 칭호는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1415년에 폐위된 가교황의 이름이었다. 이러한 중세기의 불명예스러운 교황명을 다시 선택한 것은 교황사에 있어서 처음 있는 일로써 교회 역사의 어두운 한 장면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요한 23세의 혁명적인 사상은 교황으로서의 그의 행동에서도 나타났다. 교황은 ‘바티칸의 포로’로서 바티칸 구역을 벗어나지 않던 88년간의 전통을 깨뜨리고 로마와 여러 도시의 거리를 거닐면서 일반 시민과 담소하거나 교도소와 병원을 방문하였고, 옛 친구들을 식사에 포대하여 오찬을 베풀었다. 이렇게 사랑하고 그 사랑을 보여주기를 꺼리지 않는 교황의 새로운 모습의 혁명적인 자세는 이제까지 교황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일반 대중에게 놀라움과 함께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또한 요한 23세는 교회를 비정치화하여 바티칸 통치자로서의 교황의 위치를 낮추어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전통적 교황의 명칭)이라고 강조하였고, 지방 교회인 로마의 주교로서 세계 주교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그리고 교회 밖의 세계에 대해 문호를 개방한 교황은 그들과 대화를 갖고 교회를 현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개혁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교황은 가톨릭이 아닌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우호적 태도를 보이며, 바티칸에서 많은 종교 지도자들을 따뜻하게 영접하였고 그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또한 반공주의자였던 비오 12세와는 달리, 소련의 당 제1서기이며 수상안 흐루시초프의 사위인 야쥬베이를 바티칸에서 접견(1963)하는 등 공산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한정된 개선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도 하였다.

공의회 소집 발표 : 요한 23세는 1959년의 그리스도교 일치 기도 주간 마지막 날(1월 25일)에 성 바오로 대성전을 방문하여 교황 기도실에서 기도한 후에 미사 성제에 참석한 17명의 추기경들 앞에서 사목적 방향의 교회 쇄신과 그리스도교 일치의 촉진을 위해서 세 가지 계획, 즉 로마 교구회의 소집, 전체 공의회의 개최, 교회법의 현대화 개정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의향은 이미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갑작스럽게 받은 성신의 영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재일치를 주요 목표로 하여 90년 만에 열릴 제21차 전체 공의회의 소집은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공의회란 말마디는 거의 혁명으로 들렸다. 더우기 교황이 공의회에 다른 그리스도교인들을 초청하겠다는 말은 보수적인 교황청 인사들의 의구심과 반발을 받았으나, 교회 밖(특히 동방 정교회와 영국 성공회)으로부터는 좋은 반응을 받았다.

교황의 세 가지 계획은 단계적으로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하였다. 우선, 5백 년만에 열리는 로마 교구회의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1959년 2월에 구성되어 교구 규칙의 기초, 수정하여 8백 조항의 법안이 1960년의 본회의(1월 24일-1월 31일)에 상정, 토의되었다. 이 회의는 로마 시의 교회 사목을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적응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제2단계인 전체 공의회도 로마 교구회의와 같이 교회의 시대적 적응화라는 목표와 함께 그리스도교 일치를 증진시키고자 1963년에 개최되었다. 마지막으로 교회법의 개정을 위해 1963년 4월 교회법전 개정위원회가 구성되었으나 요한 23세는 그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 개혁안 작업은 최근에 마무리되어 머지않아 선포될 단계에 이르렀다.

공의회의 준비 : 요한 23세가 공의회를 소집하겠다는 의향을 발표한 지 5개월만에 국무성 장관 타르티니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여 교황청 10개 성성의 고위 성직자들로 준비위원회가 되었다. 이 위원회는 세계 각처에 있는 추기경, 주교, 수도회의 총원장, 가톨릭대학의 신학교수, 교회법 전문가들에게 공의회에서 토의될 안건을 제시하도록 요청하는 자문기관으로서 공의회의 직접적 준비에 필요한 위원회와 사무국의 구성을 논의하고 의사 일정을 계획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1960년 6월 5일에 10개의 전문적 준비위원회(신학, 교구 행정, 성직자 규율, 수도자, 성사, 전례, 학문과 신학교, 동방 교회, 선교, 평신도 사도직)와 2개의 사무국(매스 미디아, 그리스도교 일치)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공의회에서 다룰 안건을 조정하는 중앙위원회가 60개국의 주교들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위원회의 요직은 교황청이 행정직에서 거의 독점하였다. 따라서 공의회가 교황청의 주도 하에 진행도어 어떠한 획기적 변화가 기대될 수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공의회가 교황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세 가지 표시가 나타나고 있었다. 첫째는 평신도 사도직 위원회였다. 이는 교황청의 현존하는 어느 행정 부서에도 해당하지않는 기관이었다. 둘째는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의 설치였다. 이 사무국은 교황의 신중한 격려를 받아가며 교황청 당국자의 간섭에서 벗어나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사이의 교회일치운동을 위한 대화에 있어서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하였다. 세째는 각 위원회의 위원 선출이었다. 과거의 공의회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위원들이 교구 사목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주교들이었다. 이는 새로운 구성 방법이었다. 그리고 외형상으로는 각 준비위원회가 보수주의의 경향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신학과 사목적 관점에서 진보주의 성격을 지닌 학자들의 영향력이 뒤에서 행사될 수 있었다.

각 준비위원회는 세계 각처로부터 온 2천여 건의 제의를 다루어 70개의 안건을 중앙위원회에 제출하였고, 중앙위원회는 이를 수정하거나 다시 작성하여 공의회가 열리기 석달 전에 세계 주교들에게 발송하였다. 지방 교회의 주교들은 많은 안건, 특히 신학위원회의 안건은 전통적 가르침을 재천명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교 일치를 겨냥한 공의회가 동방 정교회와 개신교에 대해 방어적 성격을 띤 것이라는 견해를 내세우기도 했다. 

 

교회사(敎會史) 38

 

현대의 가톨릭 교회

4

 

김 성 태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2)

 

공의회의 진행 과정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준비위원회에서 3분의 2 다수결 원칙의 합의 의결 방법을 채택하면서 세 차례의 회기를 열기로 예정하였으나 네 회기를 끝을 맺었다. 이 네 회기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매년 가을철에 열렸고 제1회기는 교황 요한 23세의 재직시기에, 나머지 세 회기는 교황 바오로 6세 시대에 있었다.

1962년 10월 11일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2778명의 교부(공의회에 참석하는 성직자 즉 추기경, 총대주교, 대주교,교구주교, 명예주교, 수도회장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대부분 유럽 교회의 대표들로 구성되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유럽을 대표하는 교부들이 전체의 34%에 지나지 않았고, 신생 교회의 대표들이 66%를 차지하여 세계적 성격을 띠었다. 불행하게도 공산권의 주교들은 150여 명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더우기 소련, 루마니아, 중공, 월맹 등의 국가들은 주교들의 출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과감하고 혁신적인 특색은 가톨릭 교회에서 떠났던 다른 그리스도교인들이 대표로서 참관한 사실이다. 물론 공의회의 첫 회기에는 소수의 대표들, 즉 동방 정교회 7명(놀랍게도 러시아 동방 정교회의 대표가 1명 참석), 영국 성공회 1명, 고()가톨릭 교회 1명, 개신교 9명만이 참석하였다.

처음에는 참관인의 위치가 매우 애매하였으나 요한 23세가 교황청 소속 교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관인들의 참석을 중요시하여 어느 참관인들은 분과 위원회나 주교 및 신학자들의 자문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다른 그리스도교회들이 공의회에 더욱 호응하여 폐막식 때에는 참관인의 수자가 늘어나 28개 교회에서 93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교황은 교부들에게 공의회는 사목적 관점에서 교회의 현대화를 위한 쇄신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의 공의회에 대한 보수적이며 방어적인 태도를 지양한다고 선언하엿다. 그는 교부들이 이단적 교리를 찾아내어 단죄하거나 쓸데없는 학술적 신학 논쟁을 피하고 과거의 교리를 재확인하기보다는 그러한 교리를 제시하는 데에 있어서 새롭고 의미 있는 침신한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이러한 강조는 분명히 교부들의 토론을 위한 근거로 교황청 관리들이 준비하여 내놓은 구태의연한 70개의 안건을 겨냥한 비판을 암시하고 있었다. 여기에 힘을 얻은 많은 교부들은 교황의 윈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이미 교황청이 공의회를 지배하려고 닦아놓은 기반을 파괴해야만 했다. 개막식이 끝난 지 이틀 후에 교부들은 교황청에서 선임한 공의회 10개 분과위원회의 위원 명단을 받고 형식적으로 선출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이 분과위원회는 공의회를 지배하는 중요한 기구였다. 따라서 세 추기경, 즉 프랑스의 르나르, 독일의 프링스, 네덜란드의 알프링크는 교부들이 전혀 모르는 위원들을 선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논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요구했고, 이는 교부들의 절대적 찬성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다수 교부들의 뜻이 관철되어 새로운 위원들을 선출하였다.

이것은 교황청의 놀라운 패배였다. 교황청은 교부들이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두려움을 표시하였다. 이제 공의회의 교부들은 ‘보수주의자’또는 ‘전통주의자’로 불리는 소수파와 ‘자유주의자’또는 ‘진보주의자’라고 불리는 다수파로 나누어졌다. 다수파는 통일된 의견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교황의 개혁 의지를 따라 현대 세계에 대응하여 교회를 적응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성서에 입각한 사목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리에 대한 이론적 설명보다는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는 결정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소수파는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도교 국가들(이딸리아, 스페인, 남미)을 대표하는 교부들이었다. 이들은 교회의 안전과 전제적 행정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어떠한 변화에서 오는 위험을 심각하게 느끼고 신앙 교리를 완전하게 보호하고자 열망하였다. 소수파는 후에 교부들이 기본적 진리를 소홀히 취급하는 데에 주의를 환기시켰고 충분한 검토를 받지 않은 문헌이 조급히 선포되는 것을 예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두 파의 의견 차이는 교황의 기지로 거의 일치된 견해에 도달하였다.

공의회는 기초적 작업이 끝난 후인 1962년 10월 22일에 본격적으로 안건토의에 들어갔다. 우선 어느 정도 혁신의 정신이 들어 있는 전례 안건은 더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비판의 소리가 있기도 하였지만 일반적 원칙은1962년 11월 14일에 승인되었다. 그러나 두번째의 안건인 계시의 원천에 대한 토의에 있어서는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날카로운 대립을 보였다. 제출된 안건은 전통적 교리의 개념이 지배하고 개신교에 대해 방어적 정신이 다분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이는 과거의 계시교리를 베낀 것에 니자니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일주일 동안의 토의 끝에 표결에 붙여졌는데 교부들은 1368대 822로 신학위원회에 되돌려 보내어 작성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1368표는 3분의 2의 다수표에 모자라 반송의 결정이 관철될 수 없었다. 이때에 교황이 개입하여 직권으로 계시 안건을 재검토하도록 신학위원회와 그리스도교일치사무국 합동위원회에 보냈다. 그 다음에 교부들은 ‘매스 메디아’동방 정교회와의 일치에 대한 안건을 검토한 후에 12월 1일에 교회에 대한 안건을 토의하였다. 이 안건은 신학위원회에서 제출된 가장 훌륭한 안건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아 수정되어야 한다는 여러가지 제안들이 나오면서 공의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때에 일부 고위 성직자들, 즉 쉐넨스 추기경, 레제르 추기경, 몬띠니 추기경(후의 교황 바오로 6세) 등은 교황과 협의한 후에 공의회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재검토하자고 제의하였다. 이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을 위한 공의회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교회를 위한 공의회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부들은 교회의 내적 신비를 연구하고 다음에 교회의 세계와의 관계를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세 가지 대화, 즉 가톨릭 신앙인들과의 대화,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과의 대화, 현대세계와의 대화를 제의하는 것이었다. 교부들은 공의회의 진행 규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열렬한 박수로서 이 제의에 찬동하였다. 이제 공의회는 새로운 방향으로 돌입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는 공의회의 전문가 또는 교부들의 자문으로 로마에 와 있었던 프랑스, 벨지움, 독일, 네덜란드 출신의 학자들의 영향으로 일어난 것이다. 결국 공의회는 의제를 70개에서 20개로 줄이고 의제의 수정 작업을 담당할 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12월 8일에 제1회기를 끝내고 1963년의 제2회기를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이 설계에 들어갔다. 

 

교회사(교회사) 39

 

현대의 가톨릭 교회

5

 

김 성 태

가톨릭대학 교수·신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3)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 :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 제2회기를 준비하는 도중인 1963년 6월 4일에 서거하였다. 따라서 공의회는 교황의 사망과 함께 중단되었고 새로운 위기에 처하였다. 많은 이들은 새 교황이 공의회를 계속할 것인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곧 공의회가 속개될 전망이 밝아졌다. 그것은 요한 23세의 혁명 노선을 따르던 밀라노의 대주교 지오반니 바띠스따 몬띠니가 교황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새 교황 바오로 6세는 선출된 다음 날인 1963년 6월 22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자신의 첫 과업은 공의회의 성공이며 교회 일치와 교회법 개정 등 전임 교황의 계획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중단되었던 공의회 조정위원회가 다시 열렸고 각 분과위원회도 제2회기를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다음 공의회를 9월 29일에 소집한다고 발표하였고 공의회는 다시 쇄신을 통한 새로운 교회상을 정립한다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897년 9월 26일 북부 이딸리아의 콘세치오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정치가이며 언론인으로 국회의원을 3번이나 지내면서 반()성직자주의들과 사회주의자들에 대항하여 교회를 옹호하였으며, 지방 신문인 브레스치아 일보의 편집 국장을 지냈다. 이러한 언론 가정 출신인 교황은 제2회기 때부터 언론기관을 위한 조직을 공의회 안에 조직하였다.

몬띠니는 건강이 좋지 못하여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기숙사)에 들어갔다가 곧 집으로 돌아와 교육을 받았다. 신부가 되기 위해서 브레스치아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20년에 신부로 서품되었다. 그후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획득하기도 한 몬띠니 신부는 잠시 본당신부로 사목 활동을 하다가 1922년에 외교관의 수업을 받았다. 1년 후에 그는 폴른드 바르샤바 주재 교황청 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1923-1924) 로마 교황청 국무성성에서 30년간(1924-1954) 역대 교황들(비오 11세와 비오 12세)을 보필하였다.

1944년에 국무성 장관이 사망하자, 비오 12세는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고 47세의 몬띠니 몬시뇰을 교회내정을 담당하는 국무성 장관 서리로 임명하였다. 그는 교황의 오른팔로서 교회 행정에 대한 많은 경험을 쌓았다. 1953년에 비오 12세가 몬띠니를 추기경으로 선임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그러나 1954년에 몬띠니는 이딸리아에서 가장 큰 교구인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몬띠니 대주교는 교구장으로 밀라노 지역을 순회하면서 사목 활동을 완수하였다. 그는 운동경기나 축제에 참석하면서 대중과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특히 밀라노는 공업지대였기 때문에 몬띠니는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가난한 근로자들을 방문, 위로하고 공장에서 미사도 봉헌하였다. 대주교의 이러한 자세는 근로자들을 교회로 이끌었으며, 밀라노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점차로 감소시킬 수 있었다.

1958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몬띠니 대주교를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이것이 교황이 몬띠니를 그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원의의 암시였다. 1963년 요한 23세의 서거 후에 치른 교황 선거에서 이틀 만에 몬띠니는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공의회의 속개 : 교황 바오로 6세는 공의회의 목적, 즉 교회의 쇄신과 그리스도교의 일치, 현대 세계와의 대화를 강조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제2회기(1963년 9월 29일~12월 4일)을 개최하였다. 이 회기 중에 토의된 의제는 교회일치 문제, 종교자유 문제, 현대의 매스 메디아 문제등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쟁점은 교회에 대한 교리였다. 그 중에서도 교황의 수위권과 주교단의 관계는 공의회를 위기로까지 몰고 갔다. 즉 주교단은 교황의 교회에 대한 최고의 권한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초대교회의 전통에 근거하지만 교황이 절대권을 주장하는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의 눈에는 이단으로 보인 것이다.

신학위원회의 많은 위원들은 이러한 주교단의 권한에 대한 사상을 교황의 수위권을 침해하는 위험한 생각으로 간주하여 맹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조정위원회는 이 의제를 직접 총회에 제출하여 주교들의 동의를 얻고자 하였다. 결국 교황 바오로 6세의 개입으로 ‘주교단의 교황 수위권에의 참여’라는 교리는 교부들의 찬동을 받았고 공의회는 더욱 진보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제2회기가 끝나면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과 ‘매스 메디아에 관한 교령’이 선포되었다.

바오로 6세는 공의회 휴회기간 동안에 교회일치를 위한 3일간의 여행을 떠났다. 1964년 1월 4일, 성지순례에 나선 그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 동방 정교회의 총대주교인 아테나고라스와 두 차례에 걸친 회담(1월 5일, 1월 6일)을 가졌다. 그리고 1964년 5월 17일에 비()그리스도교 사무국이 설치되었다.

제3회기(1964년 9월 14일~11월 21일)는 교황이 24명의 주교들과 미사를 공동 집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 합동 미사는 주교단의 권한을 전례를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었다. 제3회기의 특성은 평신도 대표가 청취자로서 공의회에 참석한 사실이다. 이 회기의 중대한 의제는 계시 문제였다. 제출된 문헌은 수정된 것으로 진보적 경향을 띤 교리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토의된 의제는 ‘종교의 자유’였다. 3회기 마지막에 이르러 교황은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교회에 관한 헌장과 교회일치에 관한 교령을 약간 수정하여 동방 교회에 관한 교령과 함께 선포하였다. 아울러 공의회 중에 격하될 위험에 처해 있던 동정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선언하였다.

제4회기는 마지막 회기로 1965년 9월 14일부터 12월 8일까지 열렸다. 이 회기의 주요 의제는 종교의 자유였다. 이 안건은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이 타협하여 통과시켰다. 제4회기에는 교부들이 안건들을 마무리짓느라고 매우 분주하였다. 그들은 주교들의 교회사목직, 사제의 직무와 생활(성직자의 독신 생활), 수도회의 쇄신, 신학교 교육, 그리스도교 교육, 선교, 평신도 사도직, 비그리스도 종교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계시와 교회에 관한 두 문헌은 열띤 토론 끝에 통과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공의회를 끝낼 즈음에 공의회 이후에 교회의 문제들을 의논할 수있는 세계주교회의를 신설하였고, 특히 동방 정교회와 상호 파문(1054년에 두 교회가 내린 파문)을 취소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공의회의 결정이 성공적으로 실천될 수 있기 위해 특별성년(1966년 1월 1일~5월 29일)을 반포하였다. 역사적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4개의 헌장,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문을 공포하고 그 막을 내렸다. 이제 우리 가톨릭 신앙인은 공의회의 결정들을 한 가지씩 실천하는 단계에 들어서 있다. 

 

이번 호로 이 난을 끝맺게 됩니다. 그동안 애써주신 김 성태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왜 동방교회와 갈라졌는가

 

정교(정교, Orthodox)라는 말은 정통 교리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지녔다고,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규정한 가톨릭 교리를 배척하는 네스토리우스 파 같은 이단자들과 구별하기 위해 공의회의 신경을 받아들이는 동방 가톨릭을 ‘정교’라 했었다. 그러나 11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동방 정교 지도자들은 로마와 갈등을 빚게 돼 많은 신자들이 그들을 따랐다. 서방교회의 라틴 문화와 동방교회의 그리스 혹은 비잔틴 문화의 차이, 그리고 동방 및 서방 군주의 교회내 역할에 대한 이견은 교리문제 못지않게 분열을 자극했다. 추상적인 서방의 신학과 보다 전례적인 동방의 신학의 차이는 삼위일체 논쟁에서 날카롭게 되었다. 삼위일체에 관한 서방 신학의 발달로, 6세기에는 니케아 신경 “성신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나시며”에 ‘성자에게서’(Filioque)를 덧붙이는 일은 이미 관습이 돼있었다. 동방 가톨릭은 이를 배척하면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의 규정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서방교회를 비난했다. 또한 정치적인 대결이 문화적인 갈등을 악화시켜갔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라틴 문화에 대한 비탄진 관습을 과감하게 수호했다.

체룰라리우스(1043-58)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자, 교황 레오 9세와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다. 체룰라리우스는 그리스 전례를 따르지 않는 수도원과 성당들을 폐쇄하고, 성찬식에서 누룩없는 빵을 사용하지 않고 사제독신제를 거부했다. 교황은 사절을 보내 총대주교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총대주교는 ‘전교회’의 총대주교라는 칭호와 자신의 총대주교직에 대한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한 교황 친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황사절인 훔베르트 추기경은 반()그리스 교회론을 발행하고 총대주교를 공공연히 비난했다. 그리스 성직자들이 총대주교를 지지하자, 그들의 적개심에 분노한 추기경은 그리스 교회의 관습을 단죄하고 총대주교를 파문하는 파문장을 상지(하기아 소피아)대성당의 제단에 놓았다. 격분한 총대주교도 교황사절들을 파문했다. 동서 교회가 완전히 갈라선 1054년 7월 16일의 일이다. 그후 9백년이 지난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플의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는 가톨릭과 정교회 간의 상호 파문을 폐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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